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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23. 11:07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63 萬人譜 22

 

高銀

2006, 창비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810

 

811.6

고7만 22

 

창비전작시

 

스웨덴 Svenska Dagbladet가 뽑은 '2005 올해의 책'

 

옛일은 참혹했던 일까지도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번 고은 선생의 『만인보』에 그려진 4 · 19도 그러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것은 지금의 눈에 비치는 당시의 일들이 어떤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신문팔이 소년의 용기가 계엄군을 돌아서게 하는 이야기는 그러한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드러내준다. 이것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 시인의 시심이 그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인보』는 민족 또는 민중의 서사시이다. 서사시에는 영웅이 있게 마련이고, 이 시의 영웅은 민중이지만, 모든 것이 민중이데올로기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만인보』는 정치와 관련 없는 민중의 삶, 더 나아가 혁명의 적에게도 열려 있다. 여기에 실린 「어느 임종」은 죽음에 임하여, 독수리에게 자신의 주검을 내맡기며, 내생을 사절하는, 도인의 초탈을 읊고 있다. 『만인보』의 시심은 정치를 넘어, 이러한 초연함과 일치하고, 다시 한 없는 자비심과 일치한다. ● 김우창 문학평론가, 고려대 명예교수

 

『만인보』는 이번 세기 세계문학에서 가장 탁월한 기획 가운데 하나다. 그 시들은 더할나위 없이 감칠맛 나고, 사람들 삶의 세목으로 충만하다. ● 로버트 하스(Robert Hass)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서평

 

그는 무엇보다 시적 영감을 얻은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적, 정신사적 영향력을 지닌 백과사전이다. 통찰력과 풍자와 온정을 갖고 이 차가운 불빛 속에서 인간적 자연의 하약함과 유혹을 드러내 보여준다. ● 얀 칼손(Jan Karlsson) Kristianstadsbladet 서평

 

윤회하는 세속의 그의 인물들은 무아의 경지에서 가장 강하다. 시들 속의 이야기는 마술퍼럼 마을과 밭과 개들, 그리고 새들과 인간들과 시간의 흐름을 내포한다. ● 스웨덴 국영라디오 'P1' 서평

 

고  은 高  銀

1958년 처녀시를 발표한 이래 시 · 소설 · 평론 등에 걸쳐 14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서사시 『백두산』『만인보』와 『고은시선집』 1 · 2 『고은전집』(전38권) 등을 출간했고, 전세계 10여개 언어로 50여권의 시집 · 시선집이 간행되어 큰 반향을 얻고 있다. 현재 세계 시아카데미 회원(한국대표)로 세계시단이 주목하는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차례

 

방옥수의 시 / 신선로 / 김광석 / 안승준 / 최신자 / 김종술 / 봄날 무명씨 / 김성수 / 김영호의 친구 / 어부 김기돈 / 권찬주 / 이창원 / 이귀봉 / 안종길 / 홍종필 / 최기태 / 김평도 / 진수만이 / 박지두 옹 / 서울의 한 풍경 / 이효의 / 안부자 / 삼섭이 / 임원협 영감 / 임동성 / 김승하 / 김현기 / 김용실 / 박동춘 / 김관식 / 이상현 / 이시광 / 김영길 / 원일순 / 고해길 / 효덕이 / 한쪽 눈 눈물 / 백제 마구간지기 사기라는 사내의 행로 / 효덕이 / 최경순 / 늙은 막일꾼 / 구자숙 / 꼬냑 / 김영준 / 오막살이 영감 / 홍순선 / 김찬우 / 최기두 / 심자룡 / 가실 / 두 주검 / 김용안 / 이정옥 / 김경이 / 장인서 / 최정규 / 차명진 / 강관순 / 성엽이 / 김재복 / 이근형 / 이강섭 / 박순희 / 장기수 / 서대문 최현식 / 김지태 / 이영 / 김철호 / 이수길 / 조근남 / 채광석 / 안응헌 / 김재준 / 강석원 / 김호석 / 박완식 / 김치호 / 조주광 / 천년 농사 / 순복이 / 팔짱 낀 여자 / 박래욱 / 발바리 / 그의 고백 / 그 아버지 / 박동희 / 유대수 / 김응수 / 박경식 / 이종량 / 정환규 / 정삼근 / 전청언 / 그 아기 / 임진표 / 이후락 / 석정선 / 차성원 / 정임석 / 권장근 / 이성룡 / 김창무 / 장형 / 옥여 자매 / 기숙이 / 선비의 길 / 강기학 / 최동섭 / 최봉섭 / 나영주 / 정규철 / 최태식 / 정태성 / 소매치기 전일중 / 안창완 / 박쥐 / 강명석 / 다정도 할사 / 차대공 / 권한승 / 김호남 / 박재옥 / 장도영 / 조용수 / 김철곤 / 임순자 / 장인보 / 이규복 / 고운이시여 고운이시여 / 이판갑 / 최현식 / 김두호 / 이학수 / 봉원집 / 빈 죽음 / 김도연 / 지복수 / 어떤 청년 / 종로3가의 소리 / 최봉옥 / 저무는 충무로

 

방옥수의 시

 

그 혁명 어느날

사랑하는 남자 방옥수가 총 맞아 죽었습니다

임수인은 머리 풀고

회문산에 들어가

혼자 살았습니다

두렵지 않았습니다

외롭지 않았습니다

혼자 뻐꾸기로 두견새로

띠밭 일구어 살았습니다 머리 잘랐습니다

고운 살결 굳어버렸습니다

 

20년 뒤 어느날

그네가 세상 떠나버렸습니다

 

그네 유품 하잘것 없었습니다

백팔염주 한 벌과 만년필

염주는 심심풀이로 목에 걸었을 테고

만년필은 필시 남자의 것이었습니다

또 한가지 다음과 같은 접고 접힌 분홍색 쪽지가 있었습니다

 

이세상 어디에도

저세상 어디에도

영 이별은 없다 하더이다 꽃도 달도 사람도 그렇다 하더이다

 

지난날 방옥수의 글월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아 그러고 보니

4월혁명은 한 편의 서정시도 벙어리로 남겼습니다

 

이세상 어디에도

이별은 없다 하더이다

 

이런 거짓말이 어느덧 흰구름 이는 참말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봄날 무명씨

 

금호동 마루 옥수동 비탈에서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개나리가

잿빛 세상 잿빛 마음을

잘도 바꿔놓았다

 

기뻐라

 

한강물도 느리게 느리게 가며

눈 시리게 새로운 개나리를 바라본다 돌아다본다

 

금호동 마루 옥수동 비탈에서

한강 건너

압구정 터 과수원이 내려다보인다

봄 배추밭도

어느날은

봄 배추밭에 나온 삽사리도 내려다보인다

 

세상에는 자유당만 있다

자유당 임흥순만 있다

그러나 야당 유옥우도 잇다

 

금호동 마루 옥수동 비탈

백년 사랑할 듯 사랑하던 사람

저세상의 사람이 내려다보인다

봄날 내 호주머니는 빈 새집인 양 텅 비었다

 

약수동 네거리 식당에 가서

곰탕 한 그릇만

사먹었으면 좋겠다

막걸리 한 사발만

마셨으면 좋겠다

 

금호동 마루 옥수동 비탈에서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개나리가

한창 벙어리로 벙어리로 피어 있다

 

김영호의 친구

 

마산 중앙중학교 3년생

영호군

제1차 의거의 밤

남성동 파출소 앞에서

총 맞아 죽었다

 

열여덟살의 일생

 

네살 때부터 고누를 두고

다섯살 때부터 바둑을 두었다 가포리 바닷가에 한번 간 적 있다

 

다음날 뒷산

영호군의 친구 인섭군이 외쳤다

내 이름 오인섭을 버리고

네 이름 김영호로 살겠다

영호야

이제 내가 너이다

 

메아리가 있었다 내가 너이다 너이다

 

어부 김기돈

 

거룻배 위

혼자 앉아

홍합을 잡아올린다

바다는 막막하고 뭍은 피를 흘리고 있다

 

오늘 따라

잡히지 않는다

빈 갈고리

빈 갈고리

 

그러다가 덜렁 무거운 것이 걸렸다

잡아당겼다

시체

흰 메리야스

잿빛 반지

눈두덩에 55센티 최루탄이 박혀 있다

 

거룻배가 기우뚱거렸다

 

김주열 시체

어부 김기돈은 불려가

사찰계 형사의 모진 닦달을 받았다

 

너 누가 시켜

그 송장 건져냈느냐

너에게 시킨

빨갱이가 누구냐

숨기지 말고 말해

그렇지 않으면

네가 바다 밑 홍합된다

 

아무도 시킨 적 없소 죽이든지 죽여 던지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서울의 한 풍경

 

여기는 신촌 노고산 기슭

개구리가 오다가 도로 간다

사랑하면 무엇이고 궁금한 아이가 되어버리나

 

토끼풀밭에 벌렁 누운

순옥이 물었다

 

왜 하늘은 파래?

 

사랑하면 할수록 행복도 불안해지나

 

10년 뒤에도

우리 지금처럼 행복할까

 

이런 순옥이 말에 대답 없다

돌아다보니

공광식이는 잠들어 있다

파리 한 마리가 왔다가 도로 간다

 

순옥이가 혼자 콧노래를 불렀다

남쪽나라 십자성은 어머님 얼굴

 

지금 종로1가 계엄사령관 송요찬의 지프차가 지나가고 있다

 

돌항아리 같은

돌대가리 같은 장군이

검은 안경 쓰고 기우뚱 지프차가 지나가고 있다

 

한쪽 눈 눈물

 

밤 기차는 운명이다

친구들은 벌써 캔맥주 네개째다

시끌벅적하다

그 가운데 창가의 유보섭

한밤중 조치원역을 지나갈 때

지난날 조치원에서 일하셨던 아버지 생각으로

가슴 저렸다

 

아버지는 한쪽 다리 절뚝거리며

조치원 화물취급소에서 근무하셨다

어린 시절 유보섭도

여기서 자라났다

 

5년 전 그 아버지는 어머니가 계신 저세상에 가셨다

 

친구들은 캔맥주 다섯개 여섯개 째다

시끌벅적하다

창밖은 캄캄하다 불빛이 화살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차창 쪽 눈은 눈물

다른 쪽 눈은 말없는 눈웃음이었다

 

통일호 야간급행은 지칠 줄 모르고 간다

이따금 나타나는 간이역들 사그리 무시하고 간다

 

어느덧 친구들은 하나둘 곯아떨어지고

유보섭만 다른 쪽 눈마저 눈물

유보섭의 마음은 깊고 깊다 저세상도 들어 있다 아무도 모르겠다

 

백제 마구간지기 사기라는 사내의 행로

 

옛 스키타이 사람들

어떻게 말을 타기 시작했던가

자주 말등에서 떨어져

다쳤으리라

마구 달리는 동안 떨어져

생발목이 부러지기도 하였으리라

그러다가

그러다가

말등에 익어

태어난 듯

말등에 익어

나이 다섯 여섯 살이면

냉큼 말등에 올라

바람인 듯 내달렸으리라

이랴

이랴

채찍 휘둘러

말엉덩이 냉큼 쳐대었으리라

 

그러다가

그러다가

말등에 안장 놓고 말에 재갈도 먹였으리라

 

고구려에도

백제에도 이런 말 타는 핏줄 이어져

기원 370년

기마군대 늠름하였다

백제군

고구려 깊숙이 쳐들어갔다

근초고왕 태자

근구수 장군 앞에

적 고구려 진영에서 뛰쳐나온 자가 앞잡이로 대령하였다

 

그를 앞세워

적 정예군을 무찌르니

그밖의 장병은 붉은 깃발만 괜히 휘날리다 다 투항해버렸다

그 전쟁을 백제의 승리로 이끌었다

투항자 사기

그는 본디 백제인이었다

백제 기마군 마구간지기였다

 

어느날 장군 애마의 말굽을 망가뜨려

그 길로 고구려로 달아난 것

 

과연 말이나 소는

고구려 백제에서

사람값을 다하였으니

죽은 딸 시신도

소나 말로 주고 찾아왔다

 

하물며 장군의 애마를 못 쓰게 만든 죄 커서

적지로 달아났던 것

달아났다가

고국 정복군이 닥치자

목숨 부지하려고

투항한 것

적진을 자세하게 알려준 것

 

그러나 그 마구간지기 사기는

말 한 필 사서 바칠 때까지

지난날의 장군이 거느린 부대에

말굽 온전한 말 한 필 사서 바칠 때까지

1일 1식

마구간 말똥 말오줌

청소

마구간 검불

마구간 말먹이 여물통

날마다 밤마다 날라야 하였다

3년 노역형

어느새 팍 늙어버린 사기

갈비뼈 속

한숨소리 났다

 

오도가도 못하고 팍 늙어버렸다 이제 조국도 적국도 없어졌다

 

늙은 막일꾼

 

혁명은 태어났다

혁명은 자라났다

누구의 붉은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구들의 푸른 이데올로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하얀 우연의 정의(正義)

혁명은 불쑥 튀어나왔다

담모퉁이에서

두런두런 나타났다

혁명은 나아갔다

누구의 노란 전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안된다

안돼

이승만 독재는 안돼

 

탄압의 모든 이유는 반공

반공은

독재의 만사형통

안된다

안돼

여기저기서

안암동 젊은이들이

연건동 젊은이들이

신촌 젊은이들이

흑석동 젊은이들이

 

아니

신설동 어린이들이

동대문 어린이들이

 

종로 관철동 늙은이들이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다섯 여섯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들불이 일어났다

대구 들불

마산 들불

대전

광주 들불이 일어났다

아 서울 들불이 일어났다

태평로 들불

세종로 들불

아 4월혁명의 들불

 

4월 26일 낮

동대문 밖 신설동 네거리에서

안병채가

총 맞아 쓰러졌다

누군가가

일으켰으나

이미 주검

 

늙은 아버지 안병근 씨는

막일꾼이었다

 

내 자식 손

일만 한 손

내 자식 등짝

남의 짐만 진 등짝

 

막일꾼 아들은 죽고

막일꾼 아버지는 살아 있었다

4월 혁명의 눈물

 

오막살이 영감

 

서정리 바위배기 언덕

해송 언저리

오막살이 집 한 채

오막살이 지붕에는

박 한 덩어리

사립문 없고

울타리 없다

아예 마당도 없다

뱀이 섬돌 밑 똬리 틀고 있다가 가기도 한다

 

윗말에서 낮닭이 한번 운다

 

그 오막살이 영감 합죽이영감

안마을

윗마을 초상 나면

슬슬 일어나서

초상집 간다 차일 쳐주고 궂은일 도맡아 한다

 

막걸리 한 사발

밥 만 국 한 사발

더도 덜도 말고

그것이 품삯이었다

 

누가 시답지 않은 반말로 물었다

 

자네

본관 어디신가

 

모르오 청주인지 전주인지

 

자네

김가는 정말 김가인가 피가 아닌가

 

성이야

어찌 내가 마음대로 달겠소

그냥 어릴 때부터

김가였소

 

허허

자네 집 방 안에 세간은 있나

 

고리짝 하나 없소

농짝 하나 없소

이 내 몸 하나

겨울에는

여름옷 두 벌 껴입고

여름에는

한 벌 벗거나

두 벌 다 벗거나

 

방문 한 짝

자물쇠도 열쇠도 없다오

 

그러나 오두막 굴뚝 아래

맨드라미 하나는

올해도 닭벼슬 시뻘겋게 소리친다오

 

아쭈 자네 정수동인가 김삿갓인가

 

닭벼슬이 소리친다

시뻘겋게 소리친다

아쭈

 

천년 농사

 

내 이름 알아서 무엇하리오

박아무개

장아무개

그중의 하나

임아무개

임칠성이오

고래실 조각논 110평

고개 넘어

비알밭 30평

 

더 바라는 것 없소

 

딸아이 하나 시집가고

아들 하나 자라나

고등학교 갔다오면

교복 벗고

허드레옷 입고

소 몰고 각시풀 뜯기러 가오

 

더 바랄 것 없소

 

아침 인시(寅時) 어둑어둑

논 쪽으로 큰절 올리고

밭 쪽으로 큰절 올린다오

 

더 바랄 것 없소

 

천년 농사 이어온 조상 핏줄

나에게는 논이 하늘이고

밭이 대세지보살이라오

 

나에게는 절간도 예배당도

소용없소

 

저녁 해시(亥時) 어둑어둑

재 너머 밭 쪽으로 큰절 올리고

고래실 논 쪽으로 큰절 올리고

 

더 바랄 것 없소

 

내일모레

마누라하고

오랜만에 딸네집 다니러 가오

 

팔짱 낀 여자

 

1960년 한국 과부는 총 50만 6천명에 이르렀다

전쟁과부 중

몇천명은 해를 거듭하며 재혼하거나

개가했다

전생과부가 아니더라도

그냥 과부들도

하나둘 시시한 새살림을 위해

지난날의 반지를 팔아버렸다

하지만

전쟁 뒤 10년

아직도 이 강산의 과부는

논의 뜸부기

뒷산 두견이로 흔하디흔했다

 

그네들의 한으로

한국의 밤하늘 뭇별들 침 삼키듯 울음 삼키듯 찬란했다

어쩌다 비장하게 사라지는 별똥별이 있었다

과부별인듯

과부별인듯

 

1960년 다음해 봄

한국 창녀는 총 4만명을 넘었다

그네들의 몸으로

한국의 젊은 엉터리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었다

그네들이 번 화대 몇푼으로

두고 온 고향의 동생이 공부를 했다

 

기생 7백여명이

난만한 밤 요정에서 국회부의장의 술을 따르고

권력에 바짝 눌어붙은

정욕의 술을 따르고

충성스러운 장관의 개다리 사타구니를 달래주었다

장구소리로 밤이 으슥토록

아코디언 소리로

전자오르간 소리로 으슥토록

 

그들에게

한국은 천국이었다

절대빈곤 보릿고개의 한국은

절대 지옥이 아니었다

 

이에 질세라

기우뚱거리는

베니어판 위에

백노지 쫘악 깔고

거기에

빈대떡 놓고

막걸리 놓고

소주 놓고

밀주도 놓고

젓가락 니나노가 시작되는 술집들

니나노 작부 3400명

 

명동 빠아 오아씨스

남포동 마도로스

청춘

불야성 카사부랑카 등 여급 2300명

 

금자가 마리아가 된 댄서 1200명

 

밥만 먹여주세요

잠만 재워주세요

밤중의 식모방 주인영감이 덮쳐도

한강물에 배가 지나가고요

 

생쥐꼬리

월급도 감지덕지

하녀 1870명

 

저 캠프 아이젠하워 밖

양공주촌

양공주 3천명

미군 동거 온리 3천명

아니 민족공주 몇천명

 

이 온갖 몸의 행위자야말로

조국의 폐허에서 태어났고

조국의 폐허에서 살아남았다

이 몸의 운명이야말로

조국의 폐허를 다시 삶의 무대로 만들었다

그네들의 나락으로

그네들의 자포자기로

한국의 봄 얼음이 풀려 떠내려갓다

죽은 송장도

그 얼음덩이 타고 떠내려갔다

 

이런 한국여성의 시절

그러나 아직도 깜깜절벽 남녀부동석의 시절

빠리에서 돌아온

이병복이

그의 남편 권옥연의 팔짱 끼고

화신 앞을 지나간다

 

모든 사람에게 그것은 충격이었다

세상에

세상에

여자가 남자하고

팔짱을 끼다니

세상에

세상에

아이고 망측해라

아이고 말세

 

그의 고백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의 아버지가 빨갱이여도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의 아버지가 나를 낳은 것은 사실이나

틀림없는 사실이나

천번이라도

틀림없는 사실이나

나의 아버지는 나의 원수입니다

나의 삼촌이 민청 면지부 간부였을지라도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의 매형이 야산대에

한두번 참가했더라도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의 외사촌 관호형

그 자식이 의용군에 따라갔어도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는 빨갱이가 싫어서

자장면집 빨간색 춘첩(春帖)도 뜯어냈습니다

나는 빨갱이가 싫어서

태극기의 태극 빨간색을

검정색으로 덮어버렸습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는 가을 빨간 단풍잎들도 마구 후려쳤습니다

나는 니나노집 작부의

빨간 구찌베니 주둥이를 짝 찢어버렸습니다

병원비 몽땅 냈습니다

손해배상 몽땅 냈습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빨간 금붕어도 꺼내어

눌러 죽여버렸습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는 이승만 각하의 눈깔입니다

나는 반공연맹 흰 똥 푸른 똥 변소입니다

 

나는 죽어도 빨갱이가 아닙니다

 

그 아버지

 

어미가 제 새끼 다섯 마리 고루 핥아주었다

제 새끼 오줌 다 핥아먹고

제 새끼 똥 흔적 없이 다 핥아먹었다

 

새끼들 궁둥이 깨끗하다

막 나기 시작하는

젖비린내 나는 몸뚱이 깨끗하다

 

아비는 필요없다

 

전라북도 완주군 지주 진달권 영감께서는

맏아들

맏며느리

둘째아들

첫째딸

셋째아들

넷째아들

다섯째아들

둘째딸

여섯째아들

죽은 다섯째아들의 무덤

두루두루

골고루 챙기는 것으로 세월을 보냇다

 

마누라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

마당에는 거위 울음소리가 있고

거위 똥이 있다

 

장차 그 아들딸에게 나누어줄 논과 밭

산과 과수원을 챙겼다

밤중에 나누어두었다

밤중에도 혼자서 땅문서 꺼내놓고 이것저것 챙겼다

 

그 형제자매들 어머니는 필요없다

 

선비의 길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펼친다

 

제3장 몸가짐〔持身〕의 장

아홉가지 수련의 항목

하나 발모양을 무겁게 하라 경솔과 거만 다 피하라

둘 손모양을 공손히하라

셋 눈모양을 단정히하라 훔쳐보지 마라

넷 입모양을 움직이지 마라

다섯 소리를 조용히 내라 트림도 삼가라

여섯 머리모양을 곧게 하라

일곱 숨쉬는 모양을 숙연케 하라

여덟 서 있는 모양을 덕스럽게 하라

아홉 얼굴모양을 장엄하게 하라

 

아홉가지 지혜 수련을 위한 항목

 

하나 바르게 보라 바르게 생각하라

둘 밝게 들어라

셋 안색 온화하게 하라

넷 언제나 공손함을 생각하라

다섯 말을 충실하게 하도록 하라

여섯 일마다 공경스럽게 정성스럽게 할 것을 생각하라

일곱 의심나는 것은 바로 물어라

여덟 분할 때는 어려움을 먼저 생각하라

아홉 옳은 것을 얻었을 때 그것이 옳은가를 생각하라

 

이런 수련을 지나 한 사람의 조선 성리학 선비가 만들어진다

그 조선 선비 사흘 굶어도 의젓이 앉아

그 조선 선비 바른 말하고 사약 앞에

의젓이 앉아

 

그 조선 선비

나라가 기울어질 때

분연히 일어섰다

그중 일어서지 않은 선비 있다

도포 입고

『중용』 『대학』만 읽고 있는 제천 선비

육만손 영감 있다

 

그의 아들 육관섭이

아버지의 제자들을

다 내쫓앆다

 

다정도 할사

 

조선 4대 임금 세종 연간

청백리에 녹선(錄選)된 세 정승

영의정 황희

영의정 맹사성

좌의정 유관

그 가운데 유관 대감 거동 보아라

 

여름 한 달 넘게 장맛비 왔다

유관 대감과

그의 부인

지붕이 줄줄 새니

종이우산 하나 펴들고 앉았다

 

다정도 할사

 

유관 대감께서 말했다

우산도 없는 집은 어떻겠소 그나마 우리는 낫소그려

부인이 그 걱정 달랬다

우산 없는 집은 그 집대로 다른 마련이 있을 것이오

 

다정도 할사

 

방 안의 그릇마다 빗물 떨어지는 소리

궁상각치우

 

고운이시여 고운이시여

 

조선 서유거(徐有擧)의 『교인계원필경서(校印桂苑筆耕序)』는 말한다

최치원

공의 이름은 최치원 자는 해부(海夫) 고운(孤雲)은 그의 호이다

호남 옥구 사람이다

 

청나라 포송령의 소설 『요재지이(聊齋志異)』 강남오통지사(江南五通之事)는 말한다

신라 말기에 최승은 이 고을(桂州, 지금의 沃溝)에 태수가 되었는데

그의 처가 아들을 낳으니 치원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기 보통이 아니었다

고군산도의 옛 이름은 문창군(文昌郡)이다 또 고기가 많이 잡히니

당나라 장삿배가 자주 왕래했다 장사꾼이 치원을 좋아하여

드디어 싣고 당나라로 가서 과거에 통과하여 벼슬하게 되었다 뒤에

고국으로 돌아가 산수를 방랑했다 고군산도에 있는 월영대(月影坮)는

곧 선생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당에 들어가 18세 소년으로 급제하니 과연 도교의 별 문창성(文昌星)을

과거를 비는 신으로 삼아온 바 고려 때 최공을 문창후로 추존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문창초등학교가 군산 교외 바닷가에 있다

 

고운이시여

고운이시여

문창후 고운이시여

동쪽 나라 시의 아비시여

 

돌 한 덩이에게도 물 한 구비에게도 떳떳한 시 아니거든

시를 말하지 말라 하신 아비시여

천년 전 가야산에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으신 아비시여

삼가 당신의 후인 어쭙잖은 몇다발 시편 불태우지 못하고 세상이나 희롱하며 떠돌고 있나이다

 

고운이시여

고운이시여

다시 한번 태어나소서 태어나 밤 하늘에 시의 미친 밤 이루소서

 

어떤 청년

 

태평로 국회의사당 거리

시청 앞

서울역 앞

종로

세종로 거리

 

수백개 횃불들이 춤추며 소리치며 타올랐다

횃불데모는 흉흉했다

장면 정권 타도하자

횃불데모는 섬뜩했다

4월혁명 배신했다 그놈이 그놈이다

횃불데모는 공포였고 또 공포였고 매캐한 불안이었다

북으로 가자

남으로 가자

 

횃불데모 이틀째 참가한 청년 현중구

이제 그는 제기동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고교 중퇴 실업자가 아니라

태평로의 혁명가였다

횃불데모 맨 앞에서

우렁우렁한 구호 외쳐댔다

지정구호 말고

즉흥구호 마구 외쳤다

 

장면 정권 타도하자

그놈이 그놈이다

중앙청은 우리 것이다

중앙청으로 가자

중앙청으로 가자

 

한 혁신정당은 그를 설득했다

현동지 우리와 함께

나라와 민족을 구해냅시다

한 혁신정당은 그를 반대했다

안되오

저런 맹목적인 자

저런 난폭한 자는

반드시 우리에게 해가 될 것이오

 

그러나

그는 밤이면 나타나 외치고 외쳤다 장면 정권 타도하자

 

종로3가의 소리

 

이 쌍놈으 새끼

씹값 떼어먹고 튀는 새끼

이 쌍놈으 새끼

지 에미 씹구멍으로

도로 기어들어가 숨막혀 뒈질 새끼

 

치사한 새끼

떼어먹을 게 없어

씹값 떼어먹고 사라진 새끼

이 쌍놈으 새끼

 

뭐 오줌 싸고 와서

한번 더 하자고

이대로 꼼짝 말고

누워 있어 어쩌고 저쩌고

 

더러운 새끼

속여먹을 게 없어

나를 속여먹어

이 쌍놈으 새끼

 

제 에비 좆

썩어문드러진

그 좆으로 낳은 새끼

이 쌍놈으 새끼

 

네놈의 새끼

네놈의 여편네

네놈의 자식들 다 뒈져라

이 쌍놈으 새끼

 

종로3가 단성사 골목

이렇게 욕 퍼붓는 한밤중이 숙연하다

창녀 우옥자

그네 얼굴 빼어난 미모

나이 25세

어디서 이런 짙푸른 욕이 나오나 숙연하고 숙연하다

 

저무는 충무로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튀는 놈들은 지식인이다

혁명이 나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놈들은 지식인이다

 

그뒤 혁명의 거리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놈들은 지식인이다

무지랭이들

일자무식 머저리들의 주검 널린 그 거리에

 

놈들은 혁명을 찬양하고 혁명의 논리를 만들어낸다

할렐루야

놈들은 혁명을 벌써 제것으로 만든다

 

결국 놈들은 혁명을 모독한다 혁명을 배반한다

 

1961년 3월

벌써 1년 미만으로

혁명은 없어져가고 있다

서울 충무로 입구 주점 오스카

그 술집 한구석 벽에 기대어 음독자살한

계영제 군

신흥대 야간부 학생

종잇조각 낙서가 유서였다

 

두번의 데모 속에서

나는 도망쳤다

네번의 데모 속에서

내가 밀려났을 때

앞으로 나아갔던

내 친구 안진호 군

이제라도

그대의 뒤 따르겠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