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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27. 15:46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73 Artist's House 예술가의 집


지은이 | 멜라니 클리어, 옮긴이 | 김지선

2007, 예경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19936


650.8

아887ㅇ 5


● ART SPECIAL 5 


Artist's House | 예술가의 집


"우리 집의 저녁 조명은 너무나 멋져서, 난 대ㅈ낮의 햇빛보다 이게 더 좋습니다. ……꼭 한번 와서 직접 봐야 해요. 빛이 모든 대립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모습, 깊고 검은 그늘이 그림들을 에워싸는 그 모습을……" - 파블로 피카소


"나는 공간을 소유한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고 생각한다. 커다란 빈 공간." - 앤디 워홀


피카소는 칸의 저택 '라 칼리포르니'의 계단에 나와 앉아 따뜻한 밤 공기를 만끽하며 와인잔을 기울였다. 클로드 모네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 '지베르니'에 들어가 정원을 천국처럼 가꾸며 대(大)화가로 발돋움했다. 프리다 칼로가 태어나고 자라고 죽음을 맞이한 '카사 아슬'을 살펴보지 않고는 그녀의 그림을 말할 수 없다. 이 책은 예술가들이 살았고, 작품활동을 했으며, 때로는 예술작품으로 지었던 말할 수 없이 매혹적인 집들로 우리를 부르는 아름다운 초대장이다.


한번쯤 위대한 예술의 무대 뒤편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던가?

피카소가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모네의 정원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마티스는 어떤 곳에서 그림을

그렸는지…… 직접 구경해보고 싶지 않던가?

이 책은 유명 예술가들의 사적인 공간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며, 그들의 삶과 작업을

현장 속에서 되새겨보는 특별한

기회를 마련해준다.

뉘른베르크의 뒤러하우스에서부터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수라장 아틀리에

까지, 천국 같은 모네의 정원에서부터

호일로 도배한 앤디 워홀의 팩토리까지,

또 가우디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예술 건축

으로까지…… 이 책은 때로는 아늑하고 매력적인

집으로, 때로는 당혹스럽고 괴상망측한 작업실로

독자를 이끌며, 이제까지의 미술책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과 방식으로 거장들에게

성큼 다가서게 해준다.


프랜시스 베이컨

"나는 여기 이 카오스 속에서 마음이 편하다. 왜냐하면 카오스가 내 속에서 그림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버드맨

"이 집은 나 자신의 거울이다."


'청기사'

"얼마간 고전하던 끝에 나는 엄청난 도약을 이루어냈다. 자연의 모사에서…… 추상으로의, 즉 정수를 표현하는 일로의 도약."_가브리엘레 뮌터


블룸즈버리

"덩컨과 나는……수채물감으로 프라 안젤리코의 소형 복제화를……내 침실 벽면에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이다."


안토니 가우디

"모든 것의 근원은 바로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 속에 있다 …… 내 아틀리에 앞에 있는 이 나무…… 그것이 바로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니!"


프랭크 오 게리

"……온 세상을 대칭축 위에 지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같은 얼굴, 탁자, 의자, 찻잔 하나라도 매일 새롭게 발견할 수 잇다. 이전보다 더 아름답고 더 진정한 모습으로."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

"입주자마다 창 밖으로 몸을 내밀 권리, 외벽 바깥쪽 손이 닿는 데까지 일체를 자신의 취향대로 꾸밀 권리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멀리 길거리에서도 저곳에 한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도록."


프리다 칼로

"멕시코는 언제나처럼 특유의 혼잡함으로, 정신머리가 하나도 없는데, 시골 지방의 아득한 아름다움……그것만은 여전하다."


칼 라르손

"나의 그림은 나의 집과 같다.……요란한 것 하나 없고, 고품격의 취향도 아니다. 하지만 선량하고 건실한 작업."


지은이 멜라니 클리어Malanie Klier는 미술사가이며 현재 뮌헨에서 작가이자 기자로 활동중이다.


옮긴이 | 김지선은 서울대학교 독어교육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는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내가 읽은 책과 그림>, <햄스터야, 사랑해>,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베르트람 아저씨는 어디에?>, <도둑맞은 아이디어> 등이 있다.


차례


과거에는

다시 현재로


화가의 집

칼 라르손-문을 활짝 열고 화가의 집으로!

모네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계단 위 '청기사파'의 집으로

프리다 칼로-독자적 세계를 키워낸 요람

영상으로 담은 집 : 피카소의 빌라 '라 칼리포르니'

'버드맨'의 부화장


아틀리에

오귀스트 르누아르-올리브 농원 속의 집

앙리 마티스-니스의 지붕 위

알베르토 자코메티-황량한 산골동네와 파리의 판잣집

호안 미로-지중해 섬의 별장 아틀리에

앤디 워홀-모자공장 건물에서 나온 팝 아트

프랜시스 베이컨-화실에서 벌어진 감식작업


예술로서의 집

'자연건축' : 안토니 가우디의 <카사 바트요>

'자연건축' :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토목공학적 실험' : 플래티런 빌딩

'토목공학적 실험'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

'예술을 위한 집' :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미술관


용어 해설


과거에는



"우리가 아름다운 것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뉘른베르크의 멋진 저택 소유자


'예술가의 집'이란……


……상당히 복합적이고 열린 개념이다. 수 세기에 걸쳐 어떤 건축양식상의 특정한 규정을 따른 것도 아니다. 엉성하게 대충 지은 임시거처도 있고, 시골의 개인별장도 있으며, 위풍당당한 초호화 건축물인 경우도 있다. 또한 이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예술가의 개인주택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예술적인 건축물, 미술관 건물, 아틀리에, 창작가들의 기관인 예술원 등의 다양한 의미들을 그야말로 '한 지붕 아래' 담고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 <신(神)>, 1824/27, 에칭 부조, 채색, 23.4×16.8cm, 맨체스터, 맨체스터 대학교, 휘트워스 미술관.

피에졸레에 있는 아르놀트 뵈클린의 빌라(위)와 아틀리에에서 작업하는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아래).


다시 현재로


고대의 예술가는 분명 공인된 사회적 지위를 누린 개인이었다. 존경받는 창작인의 위신은 중세 들어 크게 위축되어 일개 장인으로 전락한다. 르네상스에 이르러서야 주관을 가진 전문가라는 예술가상을 되찾게 된다.

베네치아의 리오델라 센사에 있는 작은 성은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화가 틴토레토가 거둔 대성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만토바에 있는 안드레아 만테나의 저택에 붙은 명칭은 '카사 디 노빌리' 즉 '귀족의 집'이다.


"사람은 자신의 거처와 상당히 관계가 깊어서, 집을 잘 관찰하면 거기 사는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기 마련이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아레초에 있는 유명한 예술사가 조르조 바사리의 저택 내부는 인문주의적 장식의 모범을 보여준다. 사진은 <미덕의 승리 홀>의 천장화.

대규모 공방을 운영했던 페터 파울 루벤스는 안트베르펜의 대저택에 고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뮌헨 렌바흐의 빌라 내부 모습. 아틀리에 입구 전실.

프란츠레겐텐슈트라세에 있는 뮌헨의 황제화가 프란츠 폰 슈투크의 빌라 외관. 당시의 수정판 사진.

무한한 창조정신 | 벽난로의 장식그림은 덩컨 그랜트가 직접 그린 것. 작업실로 썼던 이 방에 그는 주요 영국문학작품, 도자기, 회화들을 들여놓았는데, 회화는 주로 블룸즈버리 그룹의 것들이다. 1916년 바네사 벨이 로저 프라이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은 이렇다. "덩컨과 나는 …… 수채물감으로 프라 안젤리코의 소형 복제화를 열 배로 확대하여 내 침실 벽에 그리기 시작했답니다. …… 가망 없는 모험이지요."


화가의 집


"나의 그림은 나의 집과 같다.

고급 가구는 고사하고, 번듯한 옷장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나의 집.

그처럼 나의 그림은 너무나 수수하되

조화롭고 편안하다. 요란한 것 하나 없고,

고품격의 취향도 아니다.

하지만 선량하고 건실한 작업."


칼 라르손


아이들 방에서 다락방까지


여기서는 우리 함께 집 구경을 해보자. 문을 열어 집안을 들여다보고, 뒤란의 '헛간'도 보지. '아이들 방'에도 가보자. 프랑스에서는 기분 좋게 '부엌'이나 '정원'을 거닐어보고, 만찬도 즐겨보자. '식탁 코너'에 앉아 쉬다가, 알프스 고지대의 언덕길을 오르는 건 어떤가. 꽁꽁 얼게 추운 날, '응접실'에 모여앉아 수다를 떨고, 아늑한 스웨덴풍 '침실'에서 편히 쉬어볼까? 아니면 '다락방'에서 비둘기들과 친구하는 착한 꿈을 꾸는 건……


칼 라르손 - 문을 활짝

열고 화가의 집으로!


소박한 침실의 반질반질 윤이 나는 마루바닥 위에 옷을 홀딱 벗은 채 웃고 서 있는 어린아이. 햇살 환한 '아늑한 방' 안에서 몸을 쭉 뻗고 드러누워 느긋하게 낮잠을 자는 개……어느 누구보다도 더 다정하고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주는 화가의 입. 바로 스웨덴의 유명한 화가이자 판화가며 일러스트레이터인 칼 올로프 라르손의 집이다.

'릴라 휘트내스'의 베란다와 현관, 서쪽 면 일부(위). 물레방아 탁자에 둘러앉은 라르손 가족, 1906~07년(아래).

스웨덴의 겨울풍경. 1901년부터 라르손 일가가 살았던 순트보른의 '릴라 휘트내스'. 빨간 목조주택 앞에서 브리타가 썰매를 지치는 모습.


"칼 라르손 부부의 집에 오신 당신을 환영합니다!"

- 순트보른 집 현관 위에 쓰인 문구

남향의 거실에서 화분에 물을 주는 딸. 칼 라르손은 이 응접실을 '게으름의 사원'이라고 불렀다.

빨간색으로 칠한 가구들로 꾸민 식당(아래). 위는 라르손의 작품 <아빠와 엄마와 아기>. 1910. 태피스트리 작품 <4원소>와 잘 어우러지게 식당 의자에 맞춰 제작한 카린의 <해바라기 쿠션>.

침실 | 칼 라르손의 침실 중앙에 놓인 캐노피 침대의 수놓인 휘장은 카린의 작품. 흰색 인테리어의 침실 윗벽을 빨간색으로 칠한 책선반이(뒷면은 파란색 벽지를 발랐다) 마치 프리스 띠 장식처럼 둘려 있다.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모퉁이에서 옷매무새를 살피고 있는 화가의 모습이 살짝 보인다. 칼은 이 단순 소박한 공간에 애착이 강했고, 이곳에서 "천국의 침대에 누운 왕이라도 된 듯 행복하고 깊은 잠"에 들었다.

<목수와 도장공, 나의 친구들> | 라르손 부부의 주문대로 거실을 꾸미고 있는 목수 한스 아른봄과 페인트공 칼 오스카 페르손. 거울을 통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라르손의 모습이 비친다. 기능공들의 초상화 연작은 스웨덴의 전통적인 직업들을 재조명하고자 한 라르손의 각별한 노력으로 이해된다.

'릴라 휘트내스'에 대한 칼 라르손의 말 | "조촐하게 꾸민 우리집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 선보입니다. …… 뽐내려는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만들어내기까지 나름대로 품이 많이 들었던 만큼, 자기 집을 아늑하게 꾸미고 싶어하는 많은 분들께 참고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게 잡기> | 스웨덴에서 게 시즌의 시작은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행사에 든다. 각자 즐겁게 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수채화 작품이다. 라르손 일가는 지금도 매년 8월이면 게 요리를 먹기 위해 '릴라 휘트내스'에 모두 모인다. 이제 일가는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이 대지와 가옥은 1940년에 발족한 가족협회에서 계속 관리하고 있다. "……우리집에 자식들이 대를 물려가며 오래오래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던 칼 라르손의 바람대로.


모네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클로드 모네, 그의 그림, 프랑스의 시골마을 지베르니에 있는 그의 집, 그리고 그 집에 딸린 온갖 꽃이 만발한 넓은 꽃밭과 연못정원 - 모두 서로 너무나 긴밀히 묶여 있어서 어느 것 하나 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다. 이 인상주의 화가는 자신의 파라다이스에서 43년을 살고, 사랑하고, 작업했다. 눈부신 자연과 회화가 하나로 녹아든다.

위의 그림은 1899년 작 <일본식 다리>, 아래는 1921년 6월에 찍은 사진. 정치인 조르주 클레망소와 그의 딸 릴리와 함께 있는 모네.

지베르니 주변의 인상 : "모네가 사랑했던 이곳.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 잔잔히 흘러가는 엡트 강, 은빛으로 반짝이는 포플러 나무들……그리고 저 멀리까지 보이는 양귀비꽃 만발한 드넓은 밀밭." - 하이데 미켈스


"지베르니에 와서 클로드 모네를 직접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 그를 이해할 수 있고, 그의 성격, 그의 생활방식, 그의 깊은 내면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다."

- 귀스타브 제프로이

지베르니의 집과 정원 조감도.

지베르니의 집은 오늘날 복원되어 많은 방문객들이 찾고 있다.

클로드 모네가 그린 <화가의 정원에 난 길>(1901~02).

'파란색 응접실' | (위) 가족들이 모여 취미생활을 하는 장소였다. 모네는 플로베르를 즐겨 읽었다. 함께 카드놀이를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수를 놓기도 하였다. 방대한 양에 달하는 모네의 장서(특히 식물학 도서들)도 이곳에 두었다. (아래) 알리스 모네의 침실 벽에는 남편이 수집한 일본 판화들이 걸려 있다.

모네의 아틀리에 | '살롱 아틀리에'(위)는 작업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가족실이자 그림을 살펴보고, 작품들을 마지막으로 수정하고 전시하는 용도로 쓰였다. 모네가 현대적 건축물인 '수련 아틀리에'(아래)를 지은 것은 <대작>을 시작한 연후였다. 거대한 크기의 그림을 잘 살펴볼 수 있도록 아틀리에 중앙에 소파 두 개를 맞대놓았다.


계단 위 '청기사파'의 집으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바이에른 알프스 고지대의 경사진 대지에는 가브리엘레 뮌터와 바실리 칸딘스키가 함께 살았던 시골집이 복원되어 있다. 무르나우 교외의 이곳에서는 시장 광장의 성이 내려다보이고, 병풍처럼 둘린 주변 산들의 전망이 탁월하다. '뮌터 하우스'는 한 바퀴 둘러볼 만하다. 한 계단 한 계단씩, 길은 아방가르드로 이어진다.

뮌터가 1931년에 그림에 담아둔 이 집은 뮌터의 사망 이후 35년간 다른 사람들이 살았다. 1998/99년에 착수한 복원작업을 통해 1909-14년 무렵의 '러시아 사람의 집'으로 되돌려놓았다. 칸딘스키와 뮌터가 함께 들어와 살기 시작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칸딘스키가 떠날 때까지의 시절이다.

가브리엘레 뮌터의 <이젤 앞의 자화상>, 1909년.


"사랑스러운 엘라 (……) 우리 악동화가에게 다정한 인사와 한없는 경의의 키스를, 당신의 사람."

- 바실리 칸딘스키가 가브리엘레 뮌터에게

칸딘스키는 거실의 식탁 코너에 자신의 유리그림들을 걸어두었다. '손 대면 끝' - 이것이 제작의 원칙이다. 추후의 수정이 전혀 불가능한 유리그림의 제작 방식을 일컫는다.

가브리엘레 뮌터, <식탁에 앉아 있는 칸딘스키와 에르마 보시>, 1912년.

1934년에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자화상은 보는 이의 시선을 다른 데로 유도한다. 칸딘스키가 없는 외로운 나날들에의 회상, <새들의 아침 식사>.

<즉흥 - 골짜기> | 1914년 7월 3일 가르미시 근처 횔렌탈 골짜기로 갔던 소풍에서 영감을 받아 칸딘스키가 그린 그림이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칸딘스키의 이 과정은 뮌터 하우스와 그 주변을 배경으로 하여 진행된다.

 

프리다 칼로 -

독자적 세계를 키워낸 요람

 

프리다 칼로가 뜨겁게 사랑했던 '카사 아술'은 그녀가 사망한 지 단 4년 만에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그 4년간은 외부인이 거주한 적이 없다. 이는 엄청난 장점이었다.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 손보고 고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프리다 칼로를 이토록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 집은 그녀 스스로 창조해낸 우주의 중심이요 심장이다.

 

 

프리다 칼로가 사랑했던 유년의 집 '카사 아술'. 외벽이 코발트블루로 칠해진 이 집은 멕시코시티 교외였는데, 현재는 시에 편입되었다.

프리다가 이혼하고 혼자 살던 시기에 그린 자화상이다. 목을 칭칭 감아 죈 가시관에 죽은 벌새가 매달려 있다. 이 작은 새는 행복한 사랑의 부적이자 멋진 환생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프리다는 미술의 역사상 자기 감정의 생물학적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가슴과 심장을 찢은 유일한 예술가이다. (……) 탁월한 화가이자 멕시코 예술의 부활을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

- 디에고 리베라

| "나는 인생에서 두 번의 대형 사고를 당했다. 하나는 전차 사고였고, 또 하나는 디에고였다."

아래 | 한 쌍의 연인 : "코끼리와 비둘기"(프리다의 어머니는 몸집 좋은 디에고 리베라와 가냘픈 프리다 칼로를 이렇게 불렀다), 40년대 중반 프리다의 침실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프리다의 병상이자 작업대였던 캐노피 침대가 공중에 둥실 떠 있는 모습이 상징적이다. 엄청난 폭발성과 동시에 또한 화려하게 꽃피는 내면을 지닌 채 옴짝달싹 못하는 해골(닫집 위에 얹어놓은 전통 폭죽)처럼 그녀는 자신이 무덤 속 같은 침상에 포박된 존재라고 느꼈던 것일까?

이젤 앞의 프리다. 벽에 걸린 <두 프리다>(1939)는 자신 안의 인디오적인 면과 스페인적인 면을 표현하고자 한 작품이다. 자아와 제2의 에고가 하나의 혈관으로 결합되어 있다. 책장에는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인물 조상(彫像)들이 있다.

프리다 칼로가 사망 직전에 그린 수박정물화 <viva la vida(인생만세)>에는 의미심장한 제명(題名)이 새겨져 있다.

프리다의 아버지, 사진사 길레르모 칼로가 1933년에 찍은 카사 아술의 안마당 모습.

카사 아술 | 이 파란 집에 살았던 두 사람의 이름은 벽에 새겨진 채 여전히 기억 속에 살아 있다. 부엌 벽면에 '프리다'와 '디에고'라는 이름이 모자이크로 박혀 있다.(위) 디에고의 침실. 모자들과 신발 한 켤레, 외투와 지팡이 등이 마치 지금도 여전히 사람이 드나드는 느낌을 준다. 침대 머리맡에 걸린 프리다의 사진이 시선을 끈다.(아래)

자화상 | 테와나의 여성 전통복장 차림의 프리다. 마치 원주민처럼 머리에 쓰개치마를 덮어썼다. 프리다가 외국에 체류할 때면 그녀의 독특한 전통 스타일의 의상(풍성한 검은 머리칼에 화려하게 감아올린 머리띠장식과 함께)은 관심과 감탄을 모았다.

 

영상으로 담은 집 : 피카소의

빌라 '라 칼리포르니'

 

파블로 피카소와 거장 사진작가요 그림에세이스트이자 종군 보도기자인 데이비드 더글러스 덩컨의 우정은 확실히 너무나도 특별했다. 17년이 넘도록 오랜 세월 유지된 깊고 막역한 두 사람의 관계는 1956년 첫 만남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피카소를 만나겠다고 미국에서 칸까지 날아온 손님을 욕조에 들어앉아 맞았다니!

 

"50년대 피카소의 세계에서 구심점이 되었던 '라 칼리포르니'에서는 하루하루가 달랐다. 때로는 그림들이 아틀리에를 가득 채우는가 하면, 어떤 때는 도자기 천지였다. 여기서 저기로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였다."

- 데이비드 더글러스 덩컨

윤곽선을 따라 오려낸 피리부는 목양신상을 잡고 있는 피카소. 그는 흥이 나면 이 신화 속 음악가처럼 온 방을 돌아다니며 춤을 춘다.

작품 활동이 왕성했던 칸 시절에 그린 드라이포인트 동판화 <타우로마키아>. 투우를 좋아한 피카소는 발로리스에서 투우장을 즐겨 찾았다.

애견 카불과 함께 있는 피카소와 자클린. 1962년, 무쟁.

<아틀리에의 자클린> | 피카소보다 50살 가까이 연하인 자클린 로크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 동반자였다. 피카소는 그녀의 초상화를 여러점 그렸다. 이 그림은 그의 아틀리에임을 보여주는 사모바르 주전자, 탁자, 그리고 창 밖의 전망 등을 앙비앙스로 하여 작품으로 남긴 자클린의 프로필 초상.

브론즈로 길들인 염소 | 피카소는 자연스러움을 사랑했고 스스로 그렇게 살았다. <라 칼리포르니> 빌라 정원을 마음껏 누비고 다닌 염소 카브라를 모델로 해서 제작한 브론즈 조상. 옥외계단 앞에 세워두었다.

전망 | '라 칼리포르니'의 꼭대기 층에 위치한 아틀리에에서 칸 해변이 보인다. 피카소의 비둘기들이 사는 곳이다. 북쪽 지방(보브나르그성)으로 이사하느라 이 빌라를 떠나기 직전, 열린 아틀리에 문으로 한 떼의 비둘기들이 날아들었다. 마치 마지막 작별인사라도 나누겠다는 듯이……

 

'버드맨'의 부화장

 

옛날 옛적에……오버바이에른 알프스 높은 산에 1930년대에 지은 농가가 있었습니다. 어느 다재다능한 남자가 '버드맨'이 되어 아시아를 날아다니다가, 바트퇼츠 근처 황량한 '두메산골'에 내려앉았습니다. 그는 그곳을 운명의 장소로 삼아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것은 온통 새들로 뒤덮인 예술의 세계였습니다!

바트 퇼 츠 근방에 별난 "새집"이 있다. 그 집의 주인은 가끔 솜털 보송한 새로 변신하기도 하고, 새집 안에 웅크리고 들어가 있기도 하며, 스스로를 "버드맨"이라고 칭한다.

 

이 집은 나 자신의 거울이다. 땅에 단단히 뿌리내린 채, 새들을 통해 하늘과 연결된다."

- 버드맨

새의 집 | 현관. 나무판자들을 덧대 새들의 둥지를 꾸며놓은 모습이 일부 보인다. 뒤쪽에 보이는 트롤리에는 또 하나의 '버드맨 프로젝트'가 진행중. 바로 새 박물관이다.

 

아틀리에

 

"천재지변이라도 나면 모를까, 난 단 하루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걸 상상할 수 없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작은 지형도―예술가의

 

영역

 

스튜디오들을 어떤 유형 내지 장소로 규정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세계 곳곳의 아틀리에들을 간단히 둘러볼까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 시대의 다수 대중은 창작의 현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예술은 요즘 개개인의 집 또는 임대한 공간 속으로 몸을 감춘다. 이러한 아틀리에들을 은밀히 출입하는 이들은 주로 화랑 주인들, 화상들, 언론 등이다. '아틀리에 데이'나 되어야 다수 대중들이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다.

카탈루냐의 화가 호안 미로가 작업하는 모습.

보르프스베데 예술가촌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여류화가인 파울라 모더존-베커가 1902년경에 그린 <집, 자작나무, 그리고 달>.

중궁인 화가 용보 자오는 자택 정원에 따로 개인 아틀리에가 있지만, 처음부터 이곳 예술인촌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곳에서만 작품을 할 수 있었어요. 이제 저는 자리를 잡았습니다. 막 활동을 개시하는 젊은 무명 화가들에게는 이와 같은 장소가 필요합니다. 이곳은 저의 성지입니다. 여기서 딱 만 년만 살고 싶어요."

 

예술이 태어나는 곳

 

아틀리에의 형태에는 아무 제한이 없다. 판자집(자코메티)에서 문 닫은 모자공장(워홀)까지, 올리브 농원의 유리구조물(르누아르)에서 집 안에 꾸며놓은 동화 같은 동방세계(마티스)까지 가지각색이다. 한 칸짜리 카오스 스튜디오(베이컨)에서 마음껏 늘어놓을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이라는 꿈의 실현(미로)까지 - 이 모두가 가능하다. 함께 들어가 보자.……

마카르트의 초호화판 아틀리에는 단순한 작업공간에서 '예술의 전당'으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당시 빈 부르주아 가정과 살롱 문화에서 교양인의 메카가 되었다. 작업실이자 파티장(전설의 가장무도회들!)이었던 이 아틀리에는 현재 관광명소로서, 4시에서 5시까지 관광객에게 개방된다.

 

올리브 농원 속의 집

오귀스트 르누아르 |

 

"올리브 나무는 아주 지긋지긋합니다. 이놈이 나를 얼마나 곤욕스럽게 하는지 모르실 겁니다. 이건 회색만 빼고 온갖 색채가 다 들어 있는 나무입니다. 이제 그 나뭇잎들을 쳐다보기만 해도 진땀이 날 지경이랍니다. 한 줄기 바람에 나의 나무는 색조가 바뀌지요. 색은 잎사귀가 아니라 그 사이 공간에 들어 있습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레 콜레트'를 프랑스식 정원조성방식과는 반대로, 자연 상태 그대로 두었다. 일꾼들이 길가의 잡초를 제거하려 해도 만류할 정도였다.

1913년에 찍은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사진.

이젤 앞에 몸을 굽힌 78세의 르누아르를 알베르 앙드레가 화폭에 담았다. 마비된 손가락들 사이에 붓을 끼워 고정시켰다. "천재지변이라도 나면 모를까, 난 단 하루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걸 상상할 수 없다."

- 오귀스트 르누아르

목가 | <목욕하는 여인들> 혹은 <님프들>은 위대한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의 마지막 그림이다. 여인의 누드를 자연의 풍경 속에 담은 이 그림은 그의 예술의 변주이자 결산이요 이별가라 하겠다. 모델들은 천을 걸친 채 정원에 있고, 화가는 정원화실 안에서 작업했다. 유리창을 통해 그는 자신의 모티브를 완벽하게 조망할 수 있었다.

 

니스의 지붕 위

앙리 마티스 |

 

"……니스의 은빛 광선, 그 강렬함과 선명함은 미술가의 감각에 안성맞춤이고 불가결한 요소 같습니다. 특히나 아름다운 1월이면 더욱 그렇지요."

이 초기작은 화실 창문에서 내려다 본 코발트 빛 바다와 번화하고 아름다운 거리 '영국인의 산책로'의 전망을 그린 것이다.

앙리 마티스는 니스 구시가 한복판에 자리잡은 이 건물 꼭대기 층을 '독차지'했다. 5층에는 넓은 'ㄱ'자 발코니가 있고 꽃시장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유동의 경계 | 1929년 그린 <니스의 아틀리에에서>. 마티스의 그림은 '유동적'이다. 내부와 외부 세계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파스텔 색조의, 빛으로 충만한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바다의 물빛은 책상 상판의 밝은 옥색으로 실내에 유입되고, 밝은 노란색 커튼은 실내에 떠 있는 태양이며, 종려나무의 진초록은 벽에 그려진 타일 무늬로 재현된다.

비전 | "나는 균형, 정화, 휴식의 예술을 꿈꾼다. 사람을 불안하거나 짜증나게 만들기보다 사업가건 문인이건 아무튼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예술, 마치 육체의 긴장을 풀어주는 편안한 안락의자처럼 머리를 쉬게 해주는 그런 예술을 꿈꾼다." - 앙리 마티스

이완 | 다양한 소재의 천들로 아름답게 장식된 화실에서 모델 앙리에트 다리카레르를 스케치하는 마티스.(아래) 이러한 습작들에서 <목련이 있는 오달리스크> 같은 작품들이 나온다. "이런 애틋하고 나른한 분위기, 사람과 사물의 경계가 가물가물해지는 몽롱한 햇살 아래서 숯불처럼 은근히 타오르는 엄청난 긴장, 이는 순전히 회화적인 것으로, 구성요소들 간의 관계와 상호작용에서 나온다." - 앙리 마티스

니스의 오후 | 1922년 작 <니스의 실내, 시에스타>에서는 코트다쥐르 해안의 지글거리는 한낮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창문은 열려 있고, 차양은 내려진 채, 세상이 고요하게 정지한 듯하다. 모델은 조는 듯 나른하게 안락의자에 누워 있다. 이 시절의 마티스의 그림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커다란 창문으로, 그가 그린 아틀리에나 실내 풍경 대부분에 창문이 보인다. 그에게 내부와 외부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창문의 벽이 두 개의 상이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황량한 산골동네와 파리의 판잣집

알베르토 자코메티 |

 

"같은 얼굴, 탁자, 의자, 찻잔 하나라도 매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 이전보다 더 아름답고 더 진정한 모습으로."

양친이 사시는 고향 스탐파의 마을 길에 서 있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아래는 파리의 아틀리에 앞. 안쪽으로 주거공간이 딸려 있는 판잣집이다.

자코메티가 남동생 디에고의 고양이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브론즈 조상. 아침마다 "침대를 찾아오는" 고양이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스파르타 풍의 작업장 |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작업중인 자코메티.(위) 작업장은 그가 끊임없이 반죽하고, 이기고, 누르고, 빚으며, 형태를 만드는 실존주의적 예술, 독특한 '현상학적' 조소작품들로 가득하다. 미완성 작품들은 굳지 않도록 젖은 천으로 덮어두었다.(아래)

아틀리에 입구 | 자코메티의 아틀리에는 1층이다. 침대 위에 신문지, 방 한가운데에는 실물 크기 이상의 커다란 석고조상이 있는 단출한 공간. 계단을 올라가면 다른 예술가들의 작업장들이 나온다. 알베르토의 남동생 디에고의 작업실도 이 다세대 건물 내에 있었다.

 

지중해 섬의 별장 아틀리에

호안 미로 |

 

"……변화무쌍한 마요르카의 이런 하늘을 바라보는 게 나는 정말 좋았다. 그리고 밤이면 별똥별들이 수놓는 하늘과 반딧불들의 반짝임에 넋을 잃고 빠져들곤 했다. 그리고 바다, 밤이나 낮이나 한결같이 푸르디푸른……"

<청색 3부작>은 미로가 새 아틀리에에 들어와서 완성한 첫 3부작이자, 예술사의 중대한 이정표이다. 미로 스스로 이 작품을 일컬어, "이 그림들은 내가 이제껏 만들고자 시도했던 모든 것들의 완결이다."라고 평했다.

추상의 표현력 | 마요르카 집의 벽 앞에 앉아 자신의 구상을 검토하는 미로. 더러 그림의 '내구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작품을 야외에 내놓기도 했다. 그는 만년의 작품에서 기호적 세계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하였다. "내가 추구하는 바는, 강도의 최대치와 낭비의 최소치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 그림들에서 공백이 갈수록 더 중요해진다.

 

모자공장 건물에서 나온 팝 아트

앤디 워홀 |

 

"나는 공간을 소유한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고 생각한다. 커다란 빈 공간. 내가 예술가로서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내긴 하지만, 나는 텅 빈 공간들을 진정으로 믿는다."

'실버 팩토리' 시절에 나온 워홀의 <자화상>(1967)은 미국 팝 아트의 화신이었던 그의 자의식을 드러내 보여준다.

1965년, '실버 팩토리'는 뉴욕 히피들의 집합 명소였다. 알루미늄 호일로 씌운 작업장에서의 파티 모습.

예술작품 생산 | 1964/65년, 앤디 워홀과 제라드 멀란가가 캠벨 스프 캔 그림을 위해 실크스크린 날염 작업을 하는 모습. 워홀은 초기에는 멀란가 같은 조수들의 도움을 받다가, 수요가 점점 놀자 팩토리를 찾는 친구와 손님들까지 동원한다. 이후에 그는 일련의 작품 생산을 아예 상업 인쇄소에 맡겼는데, 이로 인해 날카로운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워홀 '오리지널' 작품의 '가치'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아틀리에의 워홀 | 시리즈로 생산된 자신의 팝 아트 예술, 그리고 이 장소의 본래 용도를 고려하여 워홀은 자신의 주거공간을 '팩토리'라고 명명하였다. 그는 그 뒤로 총 세 곳에 작업장을 갖게 되는데, 갈수록 점점 그 규모가 커졌다. 1967년 유니온 스퀘어 웨스트 33번지에 마련한 두 번째 작업장은 파티장보다는 사무실에 가까웠다. 그리고 1974년 8월에 이사한 브로드웨이 860번지의 세 번째 '팩토리'는 정식 사무실과 회의실, 그리고 멋진 식당 공간 등을 갖추었다.

 

화실에서 떨어진 감식작업

프랜시스 베이컨 |

 

"나는 여기 이 카오스 속에서 마음이 편하다. 왜냐하면 카오스가 내 속에서 그림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집과 아틀리에가 있던 곳. 런던, 사우스 켄싱턴, 리스 뮤즈 7번가.

"나는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산다"고 프랜시스 베이컨은 주장했다. 그의 스파르타적인 주거공간을 두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을 듯.

색상표가 되어버린 아틀리에. 베이컨은 색을 섞을 때 팔레트 대신 주변의 평면들(문짝, 벽면 등)을 이용했다. 그는 아틀리에 벽면들을 가리켜, 자신의 '유일한 추상적 작업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970년에 그린 이 자화상은 베이컨의 작업방식을 잘 보여준다. 이 그림은 흑백 사진술에서 진일보한 신체 탐구다.

구제불능의 카오스 | "아틀리에란 현자의 돌을 찾는 연금술사의 작업장이 아니다. ― 그런 것은 우리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다 ― 그보다는 오히려 화학자의 실험실에 가깝다." 2001년 5월부터 프랜시스 베이컨의 런던 스튜디오는 더블린 시립미술관 휴 레인 갤러리에서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영감의 원천이자 피난처 | 베이컨의 아틀리에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우주로서, 몇몇 친한 친구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그의 작업의 흔적들은 어느 것 하나 치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겹겹이 쌓여갔다. 어느 대담에서 그는, 질서를 창출하는 것은 그림들이 해야 할 일로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예술로서의 집

 

"모든 것의 근원은 바로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 속에 있다.

…… 내 아틀리에 앞에 있는 이 나무……

그것이 바로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니!"

안토니 가우디

 

규범의 저편

 

예술가의 집이라는 말에는 '예술로서의 집'이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는 건축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다. 그러면서 거듭 묻게 되는 것은, 의뢰인의 의견과 요구가 예술가의 이념과 접점을 찾을 수 있을까, 있다면 과연 얼마만큼 가능할까 하는 문제이다. 자연건축, 토목공학적 실험, 혹은 미술관 건물 ―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

 

"서구의 문화는 늘 각종 질서만을 생각한다. ……대칭, 고전적인 비례규범, 중앙구도 등, 하지만 온 세상을 대칭축 위에 지을 수는 없는 법이다."

― 프랭크 오 게리

 

 

"건축은 응결된 음악이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가우디의 <카사 바트요> : 용의 비늘 같은 지붕에는 작은 탑들이 있고, 성가족의 머리글자가 금장으러 새겨져 있다. 위의 사진은 동화처럼 신비롭게 번쩍거리는 파사드 장식.

환상의 동물 | <카사 바트요>는 코끼리 다리 모양의 육중한 자연석 받침대와 바다뱀처럼 꿈틀거리는 파사드 표면이 대조를 이룬다. 태고의 용의 비늘을 연상시키는 세라믹 지붕도 햇빛을 받아 찬란한 광채를 발한다. 건물 뒷면은 분홍과 주홍빛의 작은 세라믹 파편들이 반짝거린다. 원통형 탑도 이웃한 건물들과 높이를 적당히 맞추었다.

유기적 건축 | "우리 현대 주택의 외벽들은 바로 우리 감옥의 담벼락이다. 획일적이고, 삭막하며 …… 따분하리만큼 공허하기 때문이다. 공동주택 건물에서 각 주거 단위마다 외벽을 독자적으로 개성있게 또한 유기적으로 꾸미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다. 외부에서 보더라도 공동주택 가운데 각 거주자의 집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잇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파사드에 관한 훈데르트바서의 원칙이다.

뾰족한 삼각형 모양이 다리미 형태를 닮아서 '플래티런 빌딩'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기능적 |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슬로건은 당시의 맨해튼 최고층인 <플래티런 빌딩>을 통해 당당하게 실현되었다. 그것은 매우 제한된 대지를 최적으로 살린 효율적인 설계였다. 그러나 대니얼 허드슨 번햄이 신고전주의 양식의 파사드를 택한 점을 두고 '시카고파'의 현대성을 놓쳤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잇었다.

화제를 불러일으킨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물 <낙수장>의 내부 모습.

천재적 업적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 건축은 '응결된 음악'이다. 미국의 유력 건축가인 그는 이러한 이념을 실행에 옮긴다. 나무가 무성한 산비탈에 작은 개천이 통과하는 부지의 입지 조건은 그에게 천계와 같았다. 그리고 건축을 의뢰한 집주인이 (특히 비용과 관련하여!)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건축학도나 건축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순례지가 된 이 <낙수장>은 현재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건축 자재 : 콘크리트, 잡석, 유리.

옴베르토 보초니의 미래파 예술은 건축가 프랭크 게리에게 영감을 주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예술을 위한 집 | 불시착한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외관의 거대한 미술관 건물은 내부 역시 시각적 역동성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제멋대로인 듯이 보이는 형태의 결합이 늘 새롭고 색다른 공간조각 작품으로서 작용한다.

 

프란츠 폰 렌바흐

>> "나의 빌라를 뮌헨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겠다."

 

앙리 마티스

>> "니스의 은빛 광선, 그 강렬함과 선명함은 미술가의 김각에 선명함은 미술가의 감각에 안성맞춤이요 불가결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특히나 아름다운 1월이면 더욱 그렇지요."

 

호안 미로

>> "변화무쌍한 마요르카의 이런 하늘을 바라보는 게 나는 정말 좋있다."

 

클로드 모네

>> "내일부터 며칠 안에 맘에 드는 적당한 장소와 집을 찾아내야지, 그러기 전에는 발 뻗고 잠을 잘 수가 없게 생겼습니다."

 

렘브란트 반 레인

 

>> "분위기가 담기지 않은 그림은 아무 것도 아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만 해도 카뉴는 여유롭고 멋진 농촌마을이었다. 언덕마다 올리브와 오렌지 농원이 끝도 없이 이어졌었다." - 장 르누아르

 

페터 파울 루벤스

>> "건물은 그저 독채 하나이되, 중앙에 파티홀이 있고, 거기서 여러 칸의 이어지는 방들로 연결되는 개인주택 정도면 …… 궁전이라고 하겠다."

 

파블로 피카소

>> "우리집의 저녁 조명은 너무나 멋져서, 난 대낮의 햇빛보다 이게 더 좋습니다.……꼭 한번 와서 직접 봐야 해요. 빛이 모든 대립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모습, 깊고 검은 그늘이 그림들을 에워싸는 그 모습을……"

 

자코포 틴토레토

>> "아름다운 색들은 리알토의 상점들에서 살 수 있지만, 훌륭한 그림은 꾸준한 연구와 불면의 밤들을 통과한 예술적 재능이라는 보석상자 - 오로지 거기에서만 얻을 수 잇다."

 

앤디 워홀

>> "나는 공간을 소유한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고 생각한다. 커다란 빈공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건축은 응결된 음악이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