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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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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4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최하림 시집

2005, 랜덤하우스중앙

 

 

시흥시대야도서관

EM047113

 

문예중앙시선 1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5  우수문학도서

 

최하림 시인은 우리에게 메시지가 없는,

그러나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풍경들을 보여주고 있다.

시 속 풍경 한가운데 분명 주인공 자신이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풍경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그 풍경의 한 부분이 되어 계속해서 자신을 지워내고 있다.

우리 땅 여러 곳에 도사리고 있는 작고 아름다운 산하를

따스하게 불러모으기도 하고,

그 자연과 섞여 사는 올망졸망한 마을들의 이름까지

하나씩 독특한 색깔로 칠해주니

나 같은 떠돌이에게는 새삼 가슴 아련한 향수까지 느끼게 한다.

'지난 겨울의 기억'부터 시작하여

'빈 들'과 '잠든 새'와 '침묵의 겨울 풍경'으로 끝나는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온몸을 덮쳐오는 스산한 추위에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고,

때로 어깨를 웅크리며 두 손을 비벼대야만 했다.

홀로 떠난 우리 모두의 친구,

그 겨울 나그네의 내면을 마음으로 아끼면서,

한 줄 한 줄 극진한 정성으로 노래하고 이야기해주는

시인의 다정하고 오롯한 마음 안으로 문득 걸어들어가고 싶다.

- 마종기(시인)

 

최하림

1939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시단에 등장한 후 『우리들을 위하여』『작은 마을에서』『겨울 깊은 물소리』『속이 보이는 심연으로』『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풍경 뒤의 풍경』 등의 시집과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미술에세이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 『자유인의 초상』 등을 썼다.

시인의 말

 

북한강 가로 이사온 뒤에 쓴 시들을 묶는다.

많은 시들이 아직도 금강 상류에서 머물던 시기의 감회와,

감회 어린 이름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때의 '거느리고'는 '잊지 못하고'가 될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늘 적응 속도가 느리다.

'가을이다' 말하고 나면 가을은 어느새 가버리고 없다.

 

2005년 봄

최하림

 

|차례|

 

● 제1부

지난 겨울 기억

서상(書床)

바람이 센 듯해서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쓴다

지리산 넘어 수십만 되새들이

마음의 그림자

우리가 멀리 떠나거나 잠이 든 새에

공중을 빙빙 돌며

징검다리

메밀밭에서는

공중으로 너풀너풀 날아간다

저녁 종소리 울린다

십일월이 지나는 산굽이에서

내린천을 지나

할머니들이 도란도란

 

● 제2부

나는 산 밑을 돌아간다

눈발이 날리다 말고

시월은

나는 금강천을 건너

오래된 우물

메아리

구석방

빗속으로

가을 광활

잠시, 생각의 순간에

두 여자가

별것도 없다고 투덜거리던 달도

K와 함께

그해 겨울에는

어디선지 한 소리가

해남 가는 길

 

● 제3부

기억할 만한 어느 저녁

봄날이 온다

가라앉은 밤

할머니들이 겨울배추를 다듬는다

북한강

오래오래 누워

나는, 지금

겨울 도장리

결빙(結氷)의 문장을 읽는다

시베리아 판화(版畵) 1

시베리아 판화(版畵) 2

시베리아 판화(版畵) 3

침묵 속으로

 

● 제4부

외몽고

한줄기 회오리 같은

구부러진 해안선으로

바다와 산을 넘어

저녁배에 오르다

겨울 단양행

밤의 다리

힘든 여름

소록도

촛불을 들고

시베리아 판화(版畵) 4

시베리아 판화(版畵) 5

눈과 강아지

바람과 웃음

언뜻언뜻 눈 내리고

 

|작품 해설| 김문주 / 풍경의 자연주의

 

서상(書床)

 

   시인 김혜겸이 서상(書床)을 하나 선물로 가지고 왔다 헐어낸 고가에서 나온 구멍 숭숭 뚫린 널빤지를 정성스레 다듬고 네 귀에 나무못을 박고 가운데 서랍을 단 것이었다. 도예가 이동욱이 만든 것이라고 했다 마루의 서쪽 벽면이 어울릴 것 같아 그 아래 두고 모시천을 깔고 작은 사발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흰 그늘 같은 것이 흐르는 듯했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어디로 갔는지 사발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검붉은 기가 도는 갈색 꽃병을 올려놓았다 그것 역시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시집을 한 권 올려놓았다 시집도 행방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서상(書床)은 저 홀로 제시간에 흘러가는 어둠을 보고 싶은 듯했다 그리고 여러 날들이 지나갔다 우수도 지나가고 청명도 지나갔다 한식이 내일모레라는 날 나는 시를 쓰려고 이층 서재에서 파지를 수십 장 버리다가 작파하고 한밤에 층계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갔다 나는 마루로 내려갔다 놀랍게도 마루에는 물과 같은 시간이 넘실거리면서 가고 있었다 서상(書床)은 시간 위에 둥둥 떠가고 있었다

 

공중을 빙빙 돌며

 

공중을 빙빙돌며

새 한 마리 머뭇거리다가

버드나무 가지에 내려앉은다

순간 이파리들이 동요하고

미닫이문이 열렸다가 닫히면서

햇살이 물밀듯 들어온다

미닫이를 통해 보면

햇살을 받아들이는 건 새도

버드나무도 들녘도 아니고 그 아래

일파만파로 파동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가을 강과 가을의 기억들, 수초들

눈여겨보면 어린 날의 물거미들도

파동을 타고 어디로인지 이동해간다

모든 것들이 간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금 강을 본다

여전히 물거미들은 이동하고

구름이 모여드는지 산기슭에서는

나무들이 흔들리고 새는

버드나무 위에 있다 가을에는

물물이 빛나지 않는 것이

없다

 

결빙(結氷)의 문장을 읽는다

 

   결빙(結氷)의 문장을 읽는다 어느 시인이 북극에서 포획해 가지고 왔다는 극도로 단단하고 투명하기도 한, 이물질과도 같은, 나는 결빙(結氷)을 이해하려고 머리를 싸매고 읽는다 읽을수록 문장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해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고 바람도 없고 거리와 골목은 비좁고 마침내 폐쇄된다 나는 남은 문장을 버리고 집을 나선다 이상한 해방감이 감돌면서 나는 찬 기운이 도는 길을 지난다

 

메아리

 

   오래된 우물에 갔었지요 갈대숲에 가려 수시간을 헤맨 끝에 간신히 바위 아래 숨은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마을 장로들의 말씀으로는 성호 이익(星湖李瀷) 선생께서 파셨다고도 하고 성호 문하에서 파셨다고도 하고 그보다 오래 전 사람들이 파셨다고도 했습니다 아무려면 어떻겠습니까마는 좌우지간 예사 우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벌컥벌컥 물을 마신 다음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냐*고 가만히 물어보았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이유라도……

하고 메아리가 일었습니다 그와 함께 수면이 산산조각 깨어지고 얼굴이 달아났습니다 나는 놀래어 일어났지만 수면은 계속 파장을 일으키며 공중으로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은 채 외롭게 스스로의 생을 마감한 여림의 유작시 한 구절. 나는 그를 가르친 적이 있다.

 

바람이 센 듯해서

 

바람이 조금 센 듯해서 커튼을 치려고

유리창 앞으로 가자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희끄무레한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어디서 본 듯

했습니다 그래 말했지요

나는 아침마다 설거지하고

아내를 하나로마트에 데려다 주고

중미산을 넘어 설악동을 달린다고

요즘에는 거의 매일 설거지하고

마트에 가고 설악동으로 달리는데

공기가 심하게 부풀면서 굵은 비가

쏟아지는 날은 조심조심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길가에 세운다고 삶이

위태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무들이 흔들리고 흙탕물이 쏟아지고

차를 세우려면 왠지 슬퍼진다고

시 또한 슬퍼진다고

 

내린천을 지나

 

내린천을 지나 인제로

미시령으로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깊은 잠에 떨어졌네

꿈도 꾸지 않았네

한줄기 별똥별도

흐르지 않았네

캄캄한 잠 속을 헤매고 헤맨 뒤

또르르또르르 물소리 같은 소리가

계속 귓바퀴를 울려 나는 일어났네

물소리 같은 소리가

집을 울리고

나무도 새도

울렸네

가을은

각각의

집으로 돌아가

울고 있었네

지붕 위로 떼 지어 어스름이 달렸네

검은 바위들이 어둠에 잠겼네

아무것도 나는 알 수 없었네

경(經) 한 장 읽을 수 없었네

 

구석방

 

   산 아래 이층 목조 건물은 긴 의자와 십여 개 유리창이 일제히 남으로 열려 있어 아침이면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밤에는 별들이 내려왔다 개들이 컹컹컹컹 짖어댔다 나는 고해성사실과도 같은 이층 구석방으로 들어가 옷자락을 여미고 숨었다 구석방은 어두웠다 건축가 김수 선생님은 그날 지은 죄를 고하고 사함을 받으라고 구석방을 마련한 모양이지만 나는 고해할 줄 몰랐다 고해를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죄의 대야에 두 발을 담그고 이따금씩 잠을 잤다 잠이 들면 새들이 소리없이 언덕을 넘어가고 언덕 아래로는 밤열차가 덜커덩 덜커덩 쇠바퀴를 굴리며 지나갔다 간간이 기적을 울리며 가기도 했다 나는 자다 말고 벌떡벌떡 일어나 층계를 타고 내려갔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우유를 꺼내 마셨다 토마토도 몇 개 베어먹었다 밤은 아직도 멀었는지 창밖으로는 새까맣게 어둠이 흘러갔고 나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의자는 딱딱했다 의자가 밤 속으로 흘러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의자는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지리산 넘어 수십만 돼새들이

 

   지리산 넘어 수십만 되새들이 까맣게 포물선을 그리며 돌고 돌다가 대숲으로 들어간다 순간 대숯은 일망무제와 같이 흔들리고, 흔들리면서 일어서고 소리지른다

   아아 숲 속에는

   숲의 집 속에는

   피 흘리던 날들이 있다

   유리를 뚫고 천길 벼랑을

   뛰어내린 뼈아픈 날들이 있다

   이한열과 박종철이 있다 김상진이

   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다

   짐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이 있다 돌아보고

   돌아보라 대숲에는 아직도 십일월의 햇빛이 사금파리처럼 부서지면서 반짝이고 아침에는 무서리 내리고 지평선이 더욱 멀고 수십만 되새들이 지리산을 넘고 또 넘어간다 십일월에는 모든 것들이 물에도 젖지 않고 흘러내려간다 

 

가라앉은 밤

 

날이 저물오가면서

세상이 줄줄이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물거미와 장구벌레 같은 것들도 파장을 그으며

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므로

한없이 고통스럽고 두려운 우리는

그것이 한 개의 돌이거나 지평선에 드러누운

나무들이라 할지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밤낮으로 지나는 골목에서도 우리는

문득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본다

 

촛불을 들고

 

   사층 붉은 벽돌집에 미군들이 살았다 원래 천주교 사제관이었던 건물은 언제나 붉은 햇빛이 가득했고 미군들은 지프차를 타고 들락날락했다 아이들은 기브 미 쪼코렛 기브 미 쪼코렛 소리질렀다 때때로 미군들은 유리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초콜릿을 종이처럼 뿌렸다 아이들은 벌떼처럼 몰려갔다 날마다 거의 유사한 풍경이 반복되었다 어느 여름날 저녁 사층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물 젖은 블론드 머리의 여군이 한 웅큼 초콜릿을 던졌다 또 아이들은 벌떼처럼 몰려갔다 아무도 여군이 벌거벗고 목욕을 하고 있었는지 변을 보고 있었는지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미군들은 떠나고 아이들도 소도시를 떠나갔다 소도시는 잡초가 무성해지고 꽃들이 피어 열매를 맺었다 빨간 열매를 먹으며 어느 날 미군 전차가 두 여중생을 깔아뭉개 죽인 사건이 돌연히 일어났다 시민들은 너도나도 촛불을 켜들고 광화문으로 시청 앞으로 모여들었다 나도 촛불을 들고 시청 앞으로 갔다 시민들은 양키 고 홈! 양키 고 홈! 외쳤다 나도 양키 고 홈! 외쳤다 그러자 기억에서 사라졌던 블론드 머리가 물에 젖은 채 미로의 비너스처럼 심연에서 솟아올랐다 나는 계속 양키 고 홈을 외치면서 블론드 머리에 끌려가고 있었다

 

십일월이 지나는 산굽이에서

 

십일월이 지나는 겨울의 굽이에서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으며 가지를 늘어뜨리고 골짜기는 입을 다문다

 

토사층 아래로 흘러가는 물도 소리가 없다 강 건너

 

편으로 한 사내가 제 일정을 살피며 가듯이 겨울은

 

둥지를 지나 징검다리를 서둘러 건너간다 시간들이

 

건너간다 시간들은 다리에 걸려 더러는 시체처럼

 

쌓이고 더러는 썩고 문드러져 떠내려간다 아들아

 

너는 저 시간들을 돌아보지 말아라 시간들은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다 시간들은 거기 그렇게 돌과 같이

 

나둥그러져 있을 뿐…… 시간의 배후에서는 밤이 일어나고

 

미로 같은 안개가 강을 덮는다 우리는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아직도 골짜기에서는 나무들이 기다리고 새들이 기다리고

 

바람이 숨을 죽인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오래도록 걸음을 멈추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멀리 떠나거나 잠이 든 새에

 

우리가 멀리 떠나거나 잠이 든 새에

안개는 물 위로 떠올라 강을

덮고 마을을 덮는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벌판 쪽으로 창이

하나 둘 열리고

나라들이 들어서고

저녁열차가 덜커덩덜커덩 언덕 아래로

쇠바퀴를 굴리며 지나간다 다시

안 보이는 벌판 쪽으로

창이 열리고

나라들이 들어서고

십일월과 십이월이 황사와도 같이

시계를 가리며 간다 모든 시간의

그림자들이 줄지어 간다 지상엔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기각했다는

허섭스레기 같은 소문들이 가득해지고

시청 앞 광장에는 오늘 밤도 촛불시위가

계속된다 붉은 띠를 두른 전사들이

무어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외친다

우리가 멀리 떠나거나 잠이 든 새에……

안개가 물 위로 떠올라 강을 덮고

마을을 덮는 새에……

 

힘든 여름

 

   땅은 달아오르고 시간은 더디 가고 새들은 징벌처럼 서 있다 참나무와 도토리나무도 서 있다 새들은 이 가지와 저 가지 새로 빠져나가는 여름을 보며 울고 있지만 그들이 왜 우는지 아무도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참나무와 도토리나무도 보려 하지 않는다 산 아래 마을에서는 라디오가 사정없이 볼륨을 높여 이 강산 낙화유수를 부르고 아이들이 달려가고 해는 구부러져 간다 나는 변두리애서 변두리로 이동한다 나는 수릉리에서 문호리로 간다 수입리에서 노문리로 간다 오늘도 나는 이동을 반복하면서 여름을 견딘다 나무와 새들도 각각의 방식으로 여름을 견디며 보낸다

 

소록도 7

 

   크고 작은 보퉁이를 이고 철선(鐵船)을 내린 아낙들이 울퉁불퉁한 길을 돌아가노라면 오래된 교회가 나오고 길게 휘어진 해안길이 시작된다 아낙들은 종종걸음으로 간다 때마침 계절풍이 불어와 청솔가지들은 흔들리고 바다가 차오르고 새들이 후드득후드득 날아간다 벽안의 천사들이 병원 문을 닫고 들어간다 계절풍은 그 뒤로도 세차게 계속 불어와 소나무는 소나무들끼리 판잣집은 판잣집끼리 문둥이는 문둥이들끼리 서로 부여안고 밤을 보낸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소록도는 비극적인 징조를 점점 선명하게 보이면서 벼랑으로 굴러떨어진다 검은 바다가 소록도를 집어삼킨다

 

빗속으로

 

   연일 장맛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냉장고는 텅텅 비고 쌀독도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빗줄기가 가늘어진 틈을 타서 차를 몰고 중미산을 넘어갔다 양평장으로 갔다 우리는 서둘러 여주쌀과 가지 시금치 배추 고추 간고등어 들을 사가지고 오던 길로 다시 달렸다 중미산을 넘고 정배리 계곡으로 들어서자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고 기슭을 타고 내려온 빗물이 아스팔트 위로 철철철 흘러넘쳤다 빗물을 타고 작고 푸른 산개구리들이 수백 마리 길 가득 뛰어올랐다 나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계속 빗물과 산개구리들은 소리지르며 뛰어오르고 어둠이 빠르게 지나갔다 시간은 여섯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헤드라이트를 켰다 빗물과 산개구리들이 라이트 속으로 풀쩍풀쩍 뛰어올랐다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천천히 바퀴가 구르고 빗물과 산개구리들이 뛰어오르고 차는 속도를 내어 달렸다 빗물과 산개구리들은 차보다 빠르게, 차 앞에서, 뒤에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었다


외몽고


   외몽고 지도를 들여다보면 영하의 바람과 붉은 언덕과 유목민의 말떼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달려온다


   폭설과 한파가 몰아온다 저녁이 되어 지구의 표면은 흰 물결이 굽이치면서 흘러가다가 울란바토르에 이르러 눈부신 몸을 드러낸다 지구는 실오라기 하나 없는 몸으로 선을 긋는다


   (선에 의해 그려진 네 울타리는 얼마나 높고 순수한가)


   나는 울타리 가에 초소를 세우고 외몽고를 지킨다 나는 순수주의와 역사주의 사이에서 부딪치고 부서진다 나는 작아지고 또 작아진다


   외몽고는 유적지처럼 달리는 속성도 잊어버린 채 솟아올랐다가 어느 날 자취도 없이 사구로 사라진다 천년…… 또 천년…… 언덕과 초원은 수평선이 되어 펼쳐지고 말들이 앞발을 세우고 달려간다 불과 같은 소리들이 일어선다 해조음이 바다 끝에서 일어난다


   나는 시간이 부서지고 부서지던 날의 굉음을 들으며 사구를 넘어가는 해를 오늘도 하염없이 본다.


할머니들이 도란도란


   공기가 조금씩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역광을 받은 나무 이파리들이 검붉게 빛나고 할머니들의 머리도 빛난다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맨드라미들이 울타리 너머로 고개를 내민다 할머니들은 마당 깊은 집으로 간다 현관문을 밀고 들어간다 할머니들의 이야기 소리가 밤내 도란도란 울린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불이 환하게 창을 밝히고 밤벌레들이 날아들고 어디서 고라니들이 내려오는지 가랑잎 서걱거리는 소리 들린다


겨울 단양행


산 아래로 구름이 내려오면서

바람이 일고 소백산은 갈수록

깊어간다 영동을 떠난 지 벌써

다섯 시간째 차는 헉헉거리며

죽령고개를 넘어 터널을 빠져나간다

시간들이 파랗게 얼어 유리창에

달라붙는다 연화봉 아래

희방정사에서는 저녁 예불을 올리는지

범종 소리 떼엥떼엥 울고

고라니들이 소나무 숲 새로

걸음을 죽인다 나는 해남길에서

저러한 고라니들을 본 적이 있다

고라니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

고라니들이 두렵다

어스름이 내리는 골짜기로

차는 숨가쁘게 내려간다

언뜻언뜻 표지판이 보인다

'단양 20킬로미터'

20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시야에 들어오다가 사라진다

나는 달린다 범종 소리 다시

사방을 울리고 소리들이 풍경을

거두어 가지고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