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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01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서윤후 시집

2016, 민음사

 

대야도서관

SB110691

 

811.7

민67ㅁ  221

 

민음의 시 221

 

이제 겨우 그는 첫 번째 미로를 통과한 셈이다.

어려운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아직도 헤매고 다니는 내 뒷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 나는 그가 좋고, 그의 시가 참 좋다. 적어도 그는 세계를

깔보거나 비웃지 않으며, 자기를 과시하지 않는다. 그의 시가

자아내는 내밀하고 친숙한 분위기는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을

떠올리게 한다.

- 작품 해설에서 | 장이지(시인)

 

서윤후

 

1990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으며

2009년 《현대시》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어디 가서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어겼다

 

2016년 2월

서윤후

 

차례

 

1부

 

가정

희디흰

퀘백

나의 연못

희미해진 심장으로

곰팡이 첫사랑

거장

예컨대, 우리 사랑

취미기술

상속

코발트블루

계피의 질문

사탕과 해변의 맛

파리소년원

포기

오픈 북

종이의 생활

 

2부

 

에너지

다정한 공포

메종 드 앙팡

레오파드 소년들

소년성(小年性)

무명 시절

설탕의 신비

눈치의 공감각

말라리아

시리얼 키드

욕조 속의 아이들

구체적 소년

발육의 깊이

덴마크 다이어트

노력하는 소년

탈무드 버리기

사우르스

해변으로 독립하다

방물관(房物館)

요트의 기분

투명한 산책

 

3부

 

스무 살

하나 이상의 모뎀과 둘 이하의 잉꼬

어제오늘 유망주

외상(外傷)

스웨터 입기

독거 청년

감염된 나라에서

아프레게르 푸줏간

화염

무사히

편애

90년대의 수지

유니크

1995

1997

1999

커뮤니티

퀴즈

 

작품해설│장이지

달콤한 상처

 

90년대의 수지

 

   사람들이 황금을 내놓던 날 고장 난 저울도 무게를 감추고 허리띠를 내놓았다 그런 어른들의 날들은 우리와 상관없는 일들처럼, 학급에 한두 명은 있을 법한 수지라는 이름의 아이를 알게 될 확률처럼, 물질도 절망도 수지도 유행하던 나날

 

   불소 용액 받아 가던 수지, 창가에 걸터앉아 칠판지우개를 털어 내던 수지, 미처 알지 못해 이름만 알던 수지도 그땐 모두 똑같은 획순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설를 부를 때 어색해하던 표정이 이상하게 닮았던 날들

 

   우리는 IMF라는 말을 배웠다 열대야를 펼쳐 이름을 팔던 벼룩시장, 소년일보에 게재된 이름 모를 아이의 논설문, 내가 알던 수지와는 상관없는 일들이 자꾸 발생했다 급식소엔 강냉이죽 끓이는 냄새가 났었고

 

   언제부터 기억을 절약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훌쩍 커 버렸을 수지에 대해 생각하면, 이름은 자라고 얼굴은 자라지 않은 사진만 수지라고 부를 수 있을 때, 저울은 가벼워졌고 사람들의 장롱은 배가 나오고 있었다

 

   이젠 아끼지 말아야지, 수지는 옆에 없고 수지맞을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때의 수지가 몰래 적어 냈던 장래 희망, 이루어진 것이 있다면 중고가 된 이름을 떠올리는 것 나눠 쓸 수 있는 이름 때문에, 그 날들을 헐값으로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유니크

 

숨바꼭질 하는 기분 같았어요

들켜서도 안 되고 영영 잊혀서는 더더욱 곤란한

 

나만 좋아하는 것 같았던 싱어송라이터 오빠, 어느 날 친구가 오빠의 노래를 흥얼거려

새 것이 헌 것이 되는 기분 때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진짜 영역 표시를 해요

나만 모르게 하면 괜찮다는 생각으로

냄새라도 남기게 되는 날엔 감각이 폐업하는 날

코에 온종일 몰두하는 피노키오 이야기처럼

거짓말로 뚜렷해지려고

 

나 여기에 숨어 있어 숨기고 싶지만 조금은 알려 주고 싶은 이상한 기분

빨간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나를 보고 누가 불이 났다고 소리를 친다면

되도록 쉽게 되도록 안타깝게

난 꺼질 수 없어요

 

 

 

 

커뮤니티

 

   공동체라는 낱말에서 빠져나옵시다. 그렇다면 공동체라는 글씨는 희미해질 것입니다. 모든 이름을 불러줄 수 없습니다. 헷갈린 이름 위에 반창고를 붙여 줍니다. 다정한 건 어렵지 않습니다. 조금 친밀해졌다면 개인 체조를 해 봅니다. 가만히 누워 있거나 부리나케 뛰어다니거나 팔을 접어 베개로 삼는 모양으로부터. 공동체는 만화경 속을 들여다보듯 어지럽습니다. 하나가 되는 일이 가장 많이 갖는 일입니다. 공동체라는 낱말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가까워지지만 같아질 수 없는 부등호를 만듭시다. 숫자는 이름보다 편리합니다. 숫자로 된 편지를 씁니다. 공통된 취향을 고백합니다. 그림자들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콜라주로 만든 몽타주가 생깁니다. 데칼코마니는 사라진 미술 기법입니다. 공동체라는 낱말에서 빠져나옵시다. 사이사이에 거리를 조성합시다. 무단횡단을 해봅시다. 사이렌이 울릴 것입니다. 공동체라는 낱말이 마침내 사라집니다. 세계는 무너집니다. 블록들을 다시 하나씩 쌓아 봅니다. 선별된 입구들이 마침내 하나의 복도로 통합니다. 인사를 합시다. 처음 본 사람처럼, 공동체는 끝났습니다. 하나들의 집합이 됩시다.

 

1999

 

   머릿수가 이름이었던 무리들이었다 잘못 띄어쓰기한 글자들처럼 행렬했다 윗도리와 아랫도리처럼 어울렸다 세상 모든 구멍의 주소를 공유했다 더러운 빨래들에게서 가까워지는 냄새가 났다 미생물이 가장 좋아하는 온도에서 섞였다 조금 우쭐대는 법을 배웠다 우린 이것을 용기라고 불렀다 시계탑 앞에서 시간을 보지 않았다 비둘기 앞에서 우표를 떠올리지 않았다 맞댄 어깨가 기울어질수록 표본실의 비커에 물이 넘쳐흘렀다 증발하고 있었다 어두워진 이름들이 번져 갔다 운동장의 정글짐을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무리들이 동시에 다 같이 ㅇ르자 흔들리기 시작한 건 수ㅜㅁ기고 싶은 덧니처럼 몽정처럼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은 간지러운 통증 얼룩으로 남은 용기

 

어제오늘 유망주

 

   최대한 늦게 출발하도록 달리고 있는 너를 보고 있어 아직은 결승점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도 너란다 시선과 희비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호루라기 부는 건

 

   절망을 투시할 줄 아는 사람

   그러나 기적 앞에선 캄캄한 사람

 

   쥐구멍 찾아 직접 드나드는 너의 아침과 저녁은 같은 궤도에 진입했구나

 

   다녀오겠습니다 (                      ) 다녀왔습니다

   건조한 실내악

 

   집에 처음 보는 정물화가 걸려 있어 못 박힌 벽이 아까워서 주워 왔단다 사과와 포도 사이 벌레도 죽어버릴 것 같은 명암에 가려진, 달리기가 느린 너

 

   가방 속엔 꺼낼 어둠의 다발이 많아 이름 앞에 놓인 모든 형용사들이 징그러운 책을 펼치면 기울어지는 흰 종이 검은 글자 사이의 멀미, 빗나간 밑줄들

 

   어디에 멈춰서 운동화 끈을 묶을 것인가

   돌파구는 무엇인가

   애쓰는 발꿈치로 밀고 나가는 트랙에서

 

   너는 꼭지를 잃은 사과

   너의 목덜미를 누군가 아직 베어 물지 않았다면

   그것은 분명 맛있을 것

 

가정

 

눈곱 낀

일요일의 사람들

 

누군가 선물로 해 준 작명

얼어붙은 이름을 자꾸 불러 주자

녹기 시작한 피

 

동생이 형처럼 엄마가 언니처럼

누나가 아이처럼 아빠가 유령처럼

 

커튼을 열고 환기를 시키는 동안의

혼숙

 

희디흰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어떤 얼룩을 기다리는 것처럼 조용하게

 

   애어른 같은 아이를 키우는 집은 행복할 것 같다고 옆집 사람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공사장에 다녀온 사람은 불을 끄고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었을 때에도 검은 발바닥은 검은 발바닥이었다 더려워도 더럽다고 할 수 없었다

 

   팔레트의 굳은 물감

   두 번째 신는 흰 양말

 

   마른 빨래를 개키던 어머니를 돕고,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조용히 책도 읽었다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는 깨끗한 손이 있었다

 

   타일이 풍기는 표백제 냄새

   깨끗하다고 믿는 중독

 

   그의 발바닥을 그렸다 검은 생각들이었기 때문에 깊은 밤 속에 파묻혀 아버지가 화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우는 일만 하던 어머니의 표백된 얼굴이

 

   자꾸 생각나지 않을 때마다 나는 병에 걸렸다

   흰 색을 잃어 가는 여전히 흰 옷 같은 나의 세포

 

   나에게 묻는 것들이 무엇인지

   보호하는 이 깨끗한 색으로부터

   나는 가장 위험했다

 

상속

 

아버지는 줍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옛날 사람의 말로, 아직 쓸 만한 것에 대해 후한 마음의 두께라는 것은

주어다 몰래 꽂은 위인전집이나 백과사전의 두터움

 

숙제로 키우는 양파와 고구마가 잘 자라지 않을 땐

창틀을 보았다 온갖 죽은 벌레를 볼 수 있는 학습이 있었다

 

책은 내가 읽고 아버지는 책을 꽂는다 어느 날은 분리수거장을 서성이다 빈손으로 돌아온다

 

줍고 버리고 줍고 버리는

 

버릴수록 나는 읽을 게 많아졌다 고구마에 작은 싹을 보았다 그만큼 바라보았는데

겨우 이만큼 자랐네 한숨 쉬는 창가

입김 사이로 다 읽은 책들이 다시 버려진다

 

계피의 질문

 

   아버지가 되는 꿈을 꿨다. 아들은 계피나무 우거진 언덕에서 사탕에 베인 혀로 휘파람을 불었다 박하향이 흐르는 곳으로 담을 넘다가

 

   깨진 무릎에서 나던 피는 언제부터 흐르던 생일일까 계피 사탕을 문 나의 어머니가 아들을 불렀다 내 이름에선 왜 계피 냄새가 나지 않을까

 

   아들은 자라는 동안 뼈에 그늘이 드는 병에 걸렸다 햇빛에서 작아지는 아들을 업고 계피 나무 숲으로 갔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그런 산책을 하다가

 

   아들은 넘어져 주머니 속 박하사탕이 깨졌다며 울었다 맛있을 것 같아서 오랫동안 남겨 둔 사탕을 그만 까마득하게 잊어버려 울었던 사람이 있었지, 그게 누군데요?

 

   꿈에서 작별인사 할 때, 아들은 나에게 어디 가냐고 물었다 심부름 할 것이 있단다, 아들이 싫어하는 계피 사탕을 주머니에 가득 넣고서

 

   꿈인 줄 알았는데 정말 꿈이라서 안도하면 나는 도둑으로 몰리게 될까 언젠가 아버지 외투에서 계피 냄새가 났었는데, 좋지도 싫지도 않은 등에 처음으로 업히던 날에

 

퀘백

 

   아브라함 평원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탈 수 없는 꽃마차가 붉은 벽돌 길을 횡단한다 이민자들의 줄은 끝이 보이지 않고 나와 동생, 차례를 기다리며 이곳에서 귀한 검은 눈알을 꺼내 두었다

 

   감자를 깎으며 내리는 눈을 보았다 감자밭이 뒤덮여 버렸네, 동생이 말했다 빨간 십자가만 유일하게 뒤덮이지 않는 색깔이었는데 색맹이 있어 나와 동생은 서로의 양말을 섞어 신고선 시린 발들을 식탁 밑으로 숨겼다

 

   학교에서 눈보라를 뚫고 돌아온 동생이 그림을 보여 줬다 단 한 자루만 짧아져 가는 크레파스를 만지며 우리에겐 왜 두 개의 눈이 있을까? 동생이 그랬다 껍질들을 길게 깍아 쥐구멍 앞에 놓아 주었다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면 커튼을 뒤집어쓰고 성호를 그었다 너는 나를 믿지? 동생은 대답했다 오빠도 색깔을 모르잖아 불 꺼진 벽난로 앞에서 그날 밤 한 개의 그림자를 나눠 덮고 잠에 들었다

 

   나와 동생은 무슨 색의 털실로 엉켜 있었는지, 다 하얗다고 믿는 동생은 일 년 내내 폭설이었다 다 검다고 믿는 나는 동생을 업고 긴 터널을 건넜다 우리는 단지 조금 다른 높낮이의 울음소리를 냈다 구별되는 슬픔이 있었다

 

다정한 공포

 

공포 영화를 되감기 하면서

귀신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장면을 본다

 

나란히 이불을 덮으면 다시 시작하는 영화

다가올수록 섬뜩해지는 건

여전하기 때문이다 너의 옆에 잇어 준다

 

손에 땀이 나면 어떡하지, 스스로 끈 형광등 불빛을 초조하게

걸린 외투를 의심하며 성장하는 동공

 

망설이다가 줄거리를 헤매게 될 때

제자리에 있는 것들이 무서워지는 건

여전하기 때문이다 너의 옆에 있어 준다

 

어둠을 필요로 할 때 본 영화를 다시 볼 때

덜 무섭게 예고된 장면을 먼저 말해 주는 착하지만 착하지 않은 옆자리

 

눈 가린 두 손 뒤로 의심의 속눈썹 자라고

끝난 뒤 시시하다고 생각하면 사라지는

너의 옆에 있어 준다

비디오는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데

 

서늘한 여름은 자꾸 빨라진다

정지 버튼을 누를 때

빨간 빛이 손가락을 뚫고 터진다

 

메종 드 앙팡

 

괘종시계가 무서워 돌아가려다

꽃 없는 화분을 자주 깨뜨렸다

넘어지면서 집의 구조를 무릎으로 익혔지만

아이들은 말을 배우지 못했다

 

아무런 소리 없이 잠긴 방에서

딸꾹질 소리가 멈추지 않고

요절을 꿈꾸듯 사물들이 위태롭게 장식되어 있었다

 

수도꼭지를 젖 대신 물고 잠이 든 아이들의 천식

물 찬 기침을 하던 그날엔

장작에 불이 잘 붙지 않았다

 

벽난로의 어두운 입 속으로 흘러드는

웃풍을 맞으며 입김을 배웠다

그래도 내뱉을 수 있는 것이 있어

자꾸 죽는 것에 실패하는 아이들

 

모든 형광등과 식물들이 죽었다

아이들 소음에 가끔 깨어나는 부모가 있어

데려가 달라고 떼쓰면

멍 자국 같은 그림자 하나 문 앞으로 온다

 

아이들을 거둬 줄 보모가 왔는데

문을 열어 줄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다

기침하는 날이 자꾸 많아져야 했다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인기척밖에 없었다

집엔 부스러기들만 자꾸 생겨나고 있다

 

말라리아

 

나 죽어도 돼?

   죽음을 허락하는 사이가 되었을 때 여름이 찾아왔다 님프의 동굴을 헤매다가

   더위를 맞이하는 일은 곧 천천히 죽어가는 것

   홍조도 가시지 않은 아이들은

   고삐를 물고 여기저기 머리를 들이밀며, 우스운 병도 쉽게 잊기로 한다

   저물녘에 꾼 꿈들은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가끔 물방개 튀어 오르는 소리에 놀라겠지만

   버려진 신발을 찾아 헤맨다

   가랑비를 기다리며 목구멍을 벌리고 있는 목숨을 생각한다 혀를 보여 준다는 것은 비밀이 늙어 가는 일

   아이들은 손잡고 숲을 거닐며 감염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서로를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피가 섞였어

 손만 잡고 놀았는데 돌림병이 나돌았지 곪아서 옮아서 살아 있음을 느끼는 축제가 끝나고 예보를 전한다

   곧 비가 올 건가 봐, 우중충해졌어

   네 얼굴이

 

아프레게르 푸줏간

 

   고기 반찬을 보면

   심장 밖을 뛰쳐나간 사람들이 생각나

 

   버려진 아이들아, 꿈으로 팽창한 실핏줄을 터뜨리며 울어라, 말했지만

   거긴 붉은 고기가 맛있어 보이는 푸줏간이었구나

 

   그만 이곳에서 떠나가거라, 들렸지만

   노인들은 갈 곳이 없었다 아직 주인의 이름을 이마에 새기지 않은 아이들이

   저렇게 늙기 싫어 저렇게 늙기 싫어

   희한한 귀신 놀이를 하고 있다

 

   폐허에 붉은 벽돌을 다시 쌓아 올릴 사람, 늙은 노인들을 모시고 다른 나라로 갈 사람, 폐허가 될 때까지 다시 싸올 사람, 잠만 자고 꿈을 축낼 사람

   불발된 총알처럼 한 시간 뒤엔 문밖을 나선다, 돌아오는 일이 제 심장에 방아쇠를 당기는 일처럼 여겨지면

 

   망설임 속에 피어나는 핏덩이들

   말랑말랑한 고기

   숨 쉬는 육식

   먹고 싶은 것을 예쁘다고 말해 주는 거울 앞에서

 

   거대한 것이 무섭다는 것보단 맛있을까 봐

   그래서 입맛을 다시게 될까 봐

   함부로 꼬리를 자르고

   아이들의 숨통부터 알아볼까 봐

 

   과거를 조감하는 푸줏간 근방의 칼질이

   칼질 없이 피를 가졌다는 심장이 태어나고

   고기반찬을 먹었다 죄책감 없이

 

무사히

 

   청동으로 만든 종이 울린다 끝나는지 시작하는지 알 수 없는 일정한 간격, 소리가 들리는데 움직이는 사람 없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태어난 적 없는 것처럼 투명하게 사라지라고 해서

 

   별일들이 잦아드는 언덕엔 피고름 맺힌 리본이 흔들렸다 무서워서 못 본 걸로 하니, 금세 잊혔다 네 번의 종이 다시 울리면, 네 시에 하기 좋은 일들을 했다 거리의 고양이에게 밥을 주기에 이른 시간이란 없었다

 

   우산을 챙긴 날의 맑음은 수고스럽다 아침밥을 걸렀지만 점심밥 먹을 시간이 왔다 신발 끈 풀리고도 조금 더 걸었다 허리 숙이는 일이 거추장스러웠다 다시 비가 와 우산을 펼쳤는데 펴지질 않앗다 빗속을 뚫고 종이 울렸다

 

   보건소의 기침들과 성당의 풍금 소리, 파이프의 납땜 소리 모두가 종소리보다 작았지만 오래 났다 출발한 적 없는 아이들이 도착을 위해 서둘 때도, 종소리는 났다 시계보다 조금 일찍 시간을 맞췄다 어차피 그렇게 될 테니까

 

   모를수록 살 만해졌다 밑줄 없는 세상에 잘 미끄러졌다 누가 버리고 간 세계인가 누가 주인인 척하는가 보살핌은 그렇게 만지기만 해도 아픈 폭력이 되었다 종은 규칙적으로 소리를 냈다 오늘 내리는 산성비

 

   흘러내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살며시 살아 냈다

 

나의 연못

 

   1.

   우리는 아직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은 동생

 

   2.

   고요한 교실

   투명한 햇빛에 흩날리는 먼지 바라보다

   철제 필통을 떨어트렸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귀가 빨개졌다

 

   간밤에 깎은 연필들이 부러졌다

   아무것도 적을 수 없는 흰 종이 앞

   화분에서 길 잃은 꽃말처럼

   나는 나의 이름을 외웠다

 

   3.

   내가 자주 가는 연못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물방개 튀어 오르고 발을 담가도 혼나지 않을 깊이, 연못을 잊은 사람들은 오랜 잠수 시합을 하고 있거나 저수지에 갔을까 바다가 되기엔 담가야 할 발목들이 부족한 이곳은

 

   내가 자주 오던 연못이었다

 

   4.

   눈에 흰 천을 두르고 숨바꼭질 했다

   아이들이 박수 치며 여기야, 아니 저쪽이야

   귓속말로 내게 바람처럼 불어왔다

 

   손으로 만질 수 있었다 술래가 바뀔 차례인데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다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을 뿐

 

   5.

   손을 갖다 대면 온도계는 아주 조금 움직였다

   아직 나에게 남은 에너지

 

   집에 가는 길엔 모르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았다 빨개진 귀는 누가 물들이는 걸까 두 뺨 붉게 달아오르는 나란한 거리에서 발생된 체온

 

   6.

   나는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처럼

   책상 밑에 숨는, 아직은 작고 연약해서

   이불이 너무 커 밤새 이불 밖을 나오지 못했다

   창문 밖에 나를 데리러 올 사람이 있어

   연못처럼 조용한 성격에

   내일의 연필을 깎아줄 수 있는 솜씨를 지닌

   아무도 없는 방에서 손뼉 치고

   여기야, 바로 여기에 있어

   숨은 적 없이 숨어 있게 된 방 안

   죽은 손목시계는 멋으로 차고

   고장 난 태엽을 돌리며 나는 오랫동안

   나를 맴돌았다

 

   7.

   초인종 누르지 않고도 찾아드는 은인들에게

 

   연못이 바다보다 더 어려운 둘레라는 것을

   설명하지 못하고 굳어 갈 때

 

   풀이 죽은 동생이

   죽은 따옴표로 흰 접시를 채웠다

 

   밥을 먹을수록 말수가 사라지는 동생

   이 병신아

   소리 없이 우는 건 누가 알려줬냐고

 

   멱살을 흔들던 그림자가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무것도

   입지도 벗지도 않은 채 낱낱이

 

   나의 연못에 온 첫 손님이었다.

 

방물관(房物館)

 

   방 안의 모든 압정들이 쏟아진 날, 소년은 움직일 수 없었다 오래전 잠근 문은 전망이 어렵고, 떨어진 세계지도 뒤 편은 아무것도 없이 눈부셨다

 

   모든 사물이 긴장했다 자꾸 커지는 발을 숨길 수 없었던 소년, 다치지 않으려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더니 어루만져 준 적 없는 등이 불편해졌고

 

   믿을 것이 바닥 밖에 없었던 생일날, 누군가 방문을 열어 줄 것 같다는 예감을 통째로 박제시킨 바깥의 중력들을 관측했다

 

   압정을 밟아 피가 흐르는 최초의 박물관을 빠져나올 수 있을까 소년을 구경하던 모서리가 침묵을 긋고 그 틈으로 쏟아지는 미세한 고요함이 숨죽이고 서 있다

 

외상(外傷)

 

   보리차 끓이는 동안엔 할 일이 많아진다. 일단 엄마부터 찾고, 집에 누워 있는 사람이 없으면 서 있는 사람은 나 혼자. 빈집에 주전자만 끓고 있다. 갈증이 난다. 냉장고엔 물이 없고 모락모락 혼자서 나는 김,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을 땐 손잡이가 잡고 싶어진다. 조금씩 열려 있는 문들 마저 닫고 주전자 뚜껑만 반쯤 열어 놓는다. 넘쳐흐르지 않게 파수꾼처럼 지켜본다. 식탁에 앉아 숙제한다. 대합실 안 사람이 된다. 우는 소리 들리면 불을 끄고 밸브를 잠그면 된다. 다시 식어 갈 때까지 잊고 있으면 된다. 보고 싶어서 갈증이 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물소리를 듣는다. 물의 인기척을 들으며 조금씩 자란다. 주인 없는 보리밭의 저녁이 오면 주전자를 창문 곁에 내놓고, 안개를 거둔다. 수증기가 지나자마자 나는 고소한 냄새, 주전자에 가라앉은 검은 보리알들이 나를 쳐다본다. 나는 한 모금씩 말라 간다. 아직 숙제가 남아 있고 단내와 탄내가 동시에 난다.

 

거장

 

   우리는 만난 적도 없는데 헤어지기 바쁩니다 이름 불러준 적 있는데도 생각나는 게 향기뿐인 사람처럼 선생님, 십 분 정도 늦을 것 같습니다.

 

……에게. 이름보다 먼저 도착한 엽서를 샀습니다. 벌거벗은 소년이 피리를 부는 삽화가 그려진…… 선생님, 요즘 건강은 어떠신가요? 교차로엔 움직이지 않는 차들이 너무 많습니다.

 

죄송하지만 십 분 정도 늦을 것 같습니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사람의 뼈를 붙잡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 밤 기분은요 탁자에 걸터앉아 모질게 의자를 바라보았어요 선생님이 편안하신 곳에서 봬요

 

   같은 커피를 마시고 다른 카페인으로 뒤척이는 카페에 들어가 계신다면……

   창가에서 선생님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전쟁을 상상했어요 죽는 것이 사는 방법이라는 말 창문 하나에 역설적인 온도에는 누가 관여하나요? 어디에도 없는 실내는 오로지 사람일까요?

 

   질문이 너무 많아 죄송합니다

   선생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만들어서…… 면목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에겐 머플러를 선물하고 싶어요 목젖을 녹일 수 있을 만큼 따뜻한…… 그러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거죠 체온은 상납하기 쉬운 마음이잖아요

 

   그러니까…… 선생님,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선생님은 아시죠?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이잖아요 모르는 걸 모를 뿐이라고,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거의 도착했습니다. 방금 첫눈을 맞았어요

   꽃다발을 사려고 했는데 마카롱을 삽니다

 

선생님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뵙자고 했습니다 감당이 안 되는 난파선에서 물 대신 불을 생각하던 날엔, 가여운 밤을 출렁이며 보냈어요

   이제 저 멀리 선생님이 보여요. 아주 흐릿하게

   첫눈을 맞고 있는 선생님이 그곳에 서 계셔서

 

   다행히도…… 라고 운을 띄우는 말들로 포장한 불행을 지피며 벽난로에 겨울을 욱여넣고, 십 분 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고…… 꽁꽁 언 마카롱을 녹이기 위해 얼마나 달콤한 말들을 해야 할지

 

   아직도 연인들이 발생하는 골목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목도리를 둘러주며

   사랑하는 사람을 바깥이라 생각하는 고백이

   리본을 달 만한 일이라고 선생님은 생각하시나요?

 

   귀찮은 제 질문들이 행여나 선생님의 안경을 뿌옇게 김 서리게 만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급해지는 건 시계가 아니라 시계를 찬 사람들임을

 

   선생님, 꽁꽁 언 마카롱을 녹일 만한

   그런 따옴표를 줍고 싶습니다만

   홀로 집에 가는 그 길에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설령 비가 오는 날이더라도

   끝끝내 모르는 척 해 주십시오 일기예보가 틀려도

   살아 낼 수 있는 십 분이 제게도 생긴다면

   부디 목례하며 지나칠 수 있는 밤의 세계에서

   안녕히, 또 안녕히

 

편애

 

   선생은 나를 좋아했다 주머니엔 아직 많은 질문과 숫기와 어리광이 잔돈처럼 짤랑거렸지만 그는 나를 아꼈다

 

   다시 찾아간 선생의 집에서 하루는 간병하는 사람처럼 그의 곁을 지켰다 너무 늙은 당신이 나를 헷갈려하고 있었다

 

   창밖엔 목마 탄 아이들이 거인처럼 보이는 숲이 있었다 울창한 흰머리가 겨울을 알아차리는 동안 담요 밖을 나서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고 했다

 

   선생은 내 이름을 자주 불러 줬다 나의 이름은 당신의 희망적인 낱말 카드였을까 커튼을 치고 싶은 날씨였을까

 

   검버섯들이 말줄임표가 되어 있는 당신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이제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만 자라나고 싶어서

 

   문밖을 나설 때 선생은 어서 오너라 인사했고 그에게 쓴 쪽지를 부인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 준 만큼 걸어야 했던 산책이었다."

 

   유리로 된 숲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거인보다 땅을 기는 거인이 더 무서워 보였다 목마에서 내려온 내 얼굴아 얼음장에 비친 내 얼굴아

 

   투명하니

   뾰족하니

 

예컨대, 우리 사랑

 

   옛날 사람들이 들려주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 버려지고도 다시 주워 깁는 그런 이야기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귀신이 되어 소문이 되어 떠돌던 예컨대

 

   종이로 접을 수 없는 생물과 잡아 본 적 없는 손이 모두 따뜻할 때, 없었던 표정을 짓게 되고 우리 사이에 아름다운 낱말을 발명하면서 즐겨 하던 옛날 사람들의 놀이와 같은 것

 

   기억을 잃었던 사람이 있었지, 그것조차 기억 못하는 사람, 파도에 발을 씻고서 다시 백사장을 밟는 사람, 옛날 사람들은 우리에게 아주 촌스러운 이름을 빌려주었다

 

   끝말잇기가 끝나지 않고, 태어나 죽을 때까지 불러도 부를 수 없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옛날 사람에겐, 편지를 부치지 못했다 크고 넉넉한 봉투가 없어서

 

   온실 속엔 향기가 없는 꽃이 피었다 아무도 꽃을 꺾지 않는 정원엔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도 괜찮았다 바라봐 줄 사람만 있다면 살아야하는 것이 씨앗인 오늘

 

   손목시계에 밥을 주고, 열대어를 가만히 바라보던 사람 나눴던 대화를 종종 잊으면서도 곧잘 들어 주던 사람 옛날 사람들이 들려주길 우리는 사랑에 어설펐던 귀신이라고

 

소년성(小年性)

 

가는 팔목은 흰 이마와 잘 맞아 떨어졌다. 엎드려 있는 나를 울고 있다고 여기던 사람들. 사실 몸을 숙이는 건 쉬운 일이었다. 평면을 벗어나는 몸의 마지막 표정. 그래프는 날뛰고, 달력은 단호하며 날씨는 마음과 나란해지기 쉬운 기울기였다. 가내수공업이 끝날 줄 모르던 밤, 졸면서 만든 규격이 나를 엉성하게 만들었다. 근사한 걸작이 곧 태어날 거라고 장담하면서, 나는 맨 처음으로 수치심을 길렀다. 잠든 나를 깨워 계집애 같은 사내아이를 어쩐지 실수라고 여기면 나는 나의 목격자가 되었다. 증언이 필요한 꿈결과 이름에 써 버린 행운과 주입된 슬픔으로 살아갈 온 마음은 시험판이었다. 치명적인 오류지만 결코 멈춰 버리진 않는 그 방 안에 나는 설계된 적 없는 자세로 처음 나를 감지한다. 엎드려 있으나 잠이 비껴가고 슬픔으로 젖지 않는 주소로 나는 배달되었다. 나는 멸종 위기가 아니다.

 

구체적 소년

 

   청중들은 기다린다. 소년이 모자 속에서 무엇을 꺼낼 것인지에 대해 어깨 너머의 앵무새는 알고 있다 새로움을 위해 거짓말을 펼쳐야 했던 소년을, 앵무새가 소년의 거짓말을 똑같이 따라할 때 비로소 거짓말은 근사한 마술이 된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박수를 친다 암표를 팔지 않는 공연에서, 소년이 낡은 구두를 벗고, 벗겨진 지팡이를 내려놓는다 예전 사람들에게서 빌려온 것들을 놓자 이젠 사라질 수 있겠다고

 

   소년은 거짓말을 발명한다 미래의 누군가가 거짓말을 연기하게 될 것, 가장 긴 박수 소리에 외롭지 않을 모험을 건 소년은 일부러 연필을 부러뜨렸다 비둘기 꺼내는 장면 다음, 토끼를 꺼내는 장면 다음에도 흰 색이 필요했기 때문에

 

   찾아 준 청중들에게 바치는 소년의 말과 행동들, 가여운 앵무새는 날개를 잊었고 새로운 거짓말을 배우기엔 이제 늙어 버렸다 조명은 아직 소년 발끝에 걸려 있는데, 어둠 속에서도 청중의 눈동자는 빛났는데, 얼어붙은 손이 꺼낸 것은 파란 장미

 

   자꾸 새로워지길 원하는 매표소, 거짓말은 노인들에게 암표가 되어 팔려 나갔고, 앵무새 없인 할 수 없는 마술에 이미 거리를 떠도는 소년들은 모자에 동전을 구걸했다 세계의 모든 고요는 이미 매진이다 소년에겐 더 이상 할 수 있는 침묵이 없다

 

무명 시절

 

예고되지 않은 비가 내리면 이름 없는 날이 깊어진다

 

우산이 펴지질 않았다 낙담하면 생기는 그늘 속에 사라진 비운의 소년들이 개구리처럼 우는 곳으로

서로의 명찰을 잊기로 하자

 

농담보다 편한 별명까지 강수량은 차올랐다 소년들의 발 냄새가 났다 울 수 있는 거리에서

이름도 모르게 활자들이 무럭무럭 수배된

담벼락의 몽타주에 자기소개가 번져 가자 침을 뱉었다

 

찾고 싶은 찾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우리는 공짜로 얻은 이 골목길을 누비는 거라고

골목에 그어 놓은 그들에 있어도

비 맞는 자세로 젖은 이름을 말린다

 

고장 난 우산이 멀쩡하게 펴지면 불러 보지 못한 이름들이 쏟아진다

색색의 개구리가 튀어 오른다

 

레오파드 소년들

 

식물도감은 우리를 호명하지 않았다

풀밭 위에서 햇빛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날 때

우리는 그 이유를 헤아리지 않았다

 

이곳의 질서는 흙 밑에서 발굴되곤 했다

일광욕을 할 때면 비릿한 햇빛은 우리를 간지럽혔다

발자국보다 잎맥이 더 푸르기를 바라는 햇빛은

우리의 송곳니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입을 다물고 숨기는 동안

입 속 단내의 팔 할은 우리를 키우면서

젖보다 달콤하고 거름보다 맛있는 양식을 주었고

꼬리를 뿌리로 착각하지 않아야 하는 진화를 주었다

 

발톱은 우리가 가진 가장 건강한 유물이라는 것을

간지러운 자리마다 생긴 무늬를 긁으며 자라나자

풀밭 위의 수컷과 암술들은 꽃가루보다

더 어지러운 소문을 흩날렸다

이제는 햇빛보다 밤이 더 즐거워, 속눈썹으로

풀밭의 밤을 들어 올리면, 스스로 야행성이 된다

꽃의 포효에 밤이 숨죽이고 우리들을 훔치려고 하면

그날엔 몸살을 앓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향기 나는 털갈이를 위해 서로의 등을 부비며 뛰논다

발바닥에 잔뿌리가 한 뼘 더 자라나 있다

헷갈리는 우리들의 탄생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는 저 도감도 뱉어 낼 책갈피가 없다

 

곰팡이 첫사랑

 

   생물시간이 끝나면 다시 다정해지는 버릇 끝나는 종이 울리면 시작되는 실험 다정하게 너를 안아줄수록 자꾸 커지는 상상력

 

   아플수록 가까워졌고 잊을수록 뚜렷해졌다 무수히 많은 변인과 경우의 수를 두고 떠올리는 늙은 미래의 모습 노년의 너라면 할머니

 

   비가 오는 날의 하교 너에게 우산 주고 온 날이면, 우산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잃어버린 것들에게도 다시 생기는 이름. 작명하기 좋은 습도

 

   따뜻할수록 징그러워졌다 번식하고 싶은 마음, 몰래 한 자위는 도둑질 같아서 너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했다 옆집 할머니

 

   알코올램프의 심지처럼 꿈틀꿈틀, 생물 시간이 되면 궁금한 게 많아져 잡은 손의 눅눅함과 다른 유전자를 가진 피부가 맞닿는 느낌은 감염의 증상

 

   창백한 얼굴에 핀 검버섯을 보았다 노년의 너를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교복에 보라색 물이 들어가는 병, 수군대며 아이들이 너와 나를 관찰하고 있다

 

사탕과 해변의 맛

 

 

해변에 버려진 것 중엔 내가 가장 쓸모 있었다

버려진 사람들이 잃은 것을 대신해 다시

버려진 사람을 줍는 세계에서

우리의 수도는 어느 쪽이었을까

한 뼘의 파라솔이 그늘을 짓고 우리는

통째로 두고 간 유실물로 남겨져

하나의 관광지를 이룬다

 

*

파도의 디저트가 되네 하나밖에 모르는 맛으로 사탕처럼 둥글게 앉아 녹아가는 연인들

철썩이는 파도가 핥아 가네

발가락부터 녹으며 조금씩 둘레를 잃어 가는 사랑이여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던 연인들이 전투적으로 질투하고 비로소 세계는 달콤해지고 온화해지네

 

*

해변이라는 말을 좋아해

물에 젖는 건 싫어하지만 햇볕이 남아 있는 단어들은 아껴 먹으려고 남겨둔 사탕 같은 것

 

*

내가 먹어본 사탕 중엔 네가 제일 별로였어

 

너처럼이라는 직유가 가진

설탕과 소금 사이의 결정체

 

*

네 말에 끈적끈적해진 나는

입안의 상처들을 혀로 만지작거리며 피가 달다고 생각했다 달콤함을 모르고 조금씩 사라져간다

 

*

바다가 범람하는 세계에서

너는 고작

오리발이었어

 

*

옷소매의 끝엔 해변이 있어

서툰 세수와 훔친 눈물로 적셔놓은

사탕이 녹을 때까지만 출렁이는 해변에서 나는

말라가지 않는 헤엄을 배워

 

안간힘을 다해서

 

설탕의 신비

 

   너는 마치 설탕 속에 빠진 개미

 

   사탕수수밭에 도착한 포로들이 무당벌레를 손톱으로 터뜨리며

   명령을 기다리는 중

 

   잠을 졸여 내일의 수확량을 채우자

   돌아갈 수 있다는 졸렬한 희망을 내뱉자

 

   제자리로 돌아가라는 말은 달콤해 제자리를 떠나야만 했던 맛을 벌써 잊은 거야? 대답을 기다리는 혀만 텁텁해지고

   설탕은 먹기 좋게 네모가 될 수 있다는데

 

   각설탕은 기계의 것

   각설탕은 기계의 몫

 

   입 안 가득 설탕을 물고 바다를 건너던 도망자에게 내린 벌은 설탕 속에 빠뜨리는 것

   벗어나도 설탕 녹아도 설탕 털어내도 설탕

   끈적거리는 심장을 핥아야만 나아갈 수 있는 개미떼 행렬에 합류하면

 

   다시 일손은 넘쳐나고 포로들은 줄을 서서 익어가기를

 

   땀 흘리는 노동 앞에서

   포로들의 목덜미엔 처음 맛보는 짠맛의 설탕 열리고

   소금을 몰래 긁어모으는 당직자들

 

   이제 포로들은 소금을 채취하기 위해

   깊어지는 인중을 걷고 또 걸어야 한다

 

시리얼 키드

 

   풀장엔 밀크. 멀건 수면 속에서 발장구친다. 유통기한에 부치는 자유형은 빠르게. 가볍게 스푼을 들지만 바삭바삭하게. 우리는 비주류와 견과류 사이에서 태어난 잡곡. 혼혈이 되고 나니 모두들 맛있다고 풀장에 밀크를 넣어 준다. 단지, 우리는 맛있으면 된다. 우유와 가장 잘 어울리면 되는 우리의 장래는 칼슘이 보장되어 튼튼하다. 호랑이도 우리 편이다. 예의를 지킬수록 영양소는 흩어지는 법. 무서울 것이 없는 우리를 주식으로. 식탁 위에서 미끄러질 일만 남았다. 풀장의 밀크. 가파른 물살은 희고 부드럽게, 우리는 점점 더 고소하게. 숟가락을 넘나들며 수중발레, 풀장은 우리 것. 시나몬 파우더도 초코를 입은 땅콩도 허우적거리기 바쁜 밀크. 밀크는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시리얼이 되지 못해 안달난 가공식품들. 어설프게 밀크 속으로 빠져 봤자 건더기일 뿐. 밀크만 충당하는 스펀지 같은 너희들과 달라. 수줍게 떠오르자 풀장은 비좁고, 우리는 서서히 녹는다. 우리는 우유라는 말을 모른다.

 

종이와 생활

 

   나는 내 종이를 다해 편지를 씁니다

 

   종이는 얇고 투명하게 우리 사이를 넘기다 베인 상처로 조금씩 행간을 만듭니다 그 정도의 눈금이 좋아서 나는 온힘을 다해 나의 종이를 낭비합니다

 

   또각또각 연필이 똑바로 걸어가는 일이 측은합니다 들려주지 못한 이것은 종이로 접은 사람이 내게 읽어 준

   왼손으로 편지를 씁니다

 

취미기술

 

네가 좋아하면 그걸로 됐어

이미 죽은 것이니까

 

토끼의 심장을 손에 쥐고선 자두처럼 한입 베어 무는 싱거움

모르는 낱말 없는 사전을 들고

다 아는 듯 말하지도 못하는 자랑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나타날 때까지

열렬하게 실패하는 꿈을 꾸고 싶어

 

목줄이 힘줄로 팽팽해지는 착각

연습은 이것으로 끝내 볼게

캐치볼을 끝낸 아이들이 잃어버린 공이 되어

바람을 조금씩 빼앗기기 전에

 

고백은 자꾸 쉬워지고

살면서 기억하게 된 거절들이 매표소에서 편도 기차표를 발권해

어디론가 떠나가게 되면서 돌아오는

내가 싫어 부메랑을 던지면

 

밀렵을 두려워하는

사냥꾼의 눈동자를 볼 수 있어

 

그 속에 이름 없는 꽃밭을 일구고

씨앗이 저지른 향기들을 무심코 사랑하게 되자

사서함 속에 넘쳐 나는 빈 엽서들

누가 몰래 쓰고 간 내 이름은

사랑 받으면서 이미 죽어 버린 것

 

알비노를 앓는 토끼 두 눈에 그제야 맛잇어 보이는 심장

먹음직스럽게 숨을 쉴 때마다

예뻐지고 위험해지는 나는 너의 악취미

 

덴마크 다이어트

 

   우리는 다 잘한다 피를 거꾸로 속이며 노력한다 할 건 다하는 질량들, 보존되어 가는 교과서 속 알고리즘 반대로 해야 멋있는 줄 아는 껍데기들, 벗으면 날 줄 알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빼야 한다 나머지가 생기지 않도록

 

   권리는 없었다 뾰족해지면 어른들은 우리를 꼭지점이라 부를 것, 기억될 방점이 생길 거야 몸속의 뼈들이 장작으로 나타날 때까지 땔감으로 쓰기엔 너무 젖어 있는 둘레, 서로를 껴안아 주지 못했다

 

   모서리가 생겼다 우리를 꼭짓점이라 불러 주는 사람들, 오늘은 생일이다 우리 이름을 부피가 아닌 피부로, 아니면 그냥 피로 불러 주길, 가파른 곳으로 갈수록 설 자리 없는 청정 지역이 보인다

 

   어제의 식단이 내일이 되는 것은 유감이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울었다 도형이 되는 일, 야윈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아 주었다 근거 없는 상처들이 생겨났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