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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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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10. 16:20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40 Gustav Klimt 구스타프 클림트


지은이 | 니나 크랜젤 / 옮긴이 | 엄양선

2007, 예경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19875


650.8

아887ㅇ


ART SPECIAL 1


"나 스스로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가 가련한 바보라는 사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진정한 사랑에 두려움과 존경심마저 느낀다."

- 구스타프 클림트


이 책은 귀한 사진 자료들과 독특한 지면 구성을 통해 "여자들이 주요 작품"이라고 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다양한 작품세계, 최고와 바닥을 오르내린 그의 예술에 대한 평가와 한때 비밀에 싸였던 그의 삶을 조망한다. 또한 그의 작업실에서 피어난 스캔들로부터 오늘날 하늘을 찌를 듯한 그의 인기에 힘입어 제작된 영화 <클림트-빈의 환상>을 보여줌으로써 읽는 이들을 매혹한다.


구스타프 클림트 | Gustav Klimt(1862 - 1918)

퇴폐적인 세기말의 분위기가 지배하는 빈에서 찬란한 황금빛과 화려한 색채의 회화를 창조한 재능 있는 화가 클림트. 빈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장식하는 고전적인 회화로 단숨에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그는 당대의 도덕적 규범 안에서 수용하기 힘든 강도 높은 에로티시즘을 표출하면서 하루 아침에 여론의 뭇매를 맞는 패륜아로 전락한다. 위선적인 여론에 실망한 클림트는 사회적인 명예보다는 예술의 자유를 선택하면서 '금색 시기'부터 추상에 가까워지는 풍경화까지 다채로운 작품세계를 이루어냈다.


지은이 | 니나 크랜젤 Nina Kransel은 미술사를 전공했고, 기자 및 음악가로 활동 중이다. 현재 뮌헨에 거주하며 일하고 있다.


옮긴이 | 엄양선은 숙명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독일 뮌스터의 베스트팔렌 빌헬름 대학에서 수학했고, 지금은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강의하며 독일어 책 번역 모임 '나누리'와 함께 좋은 책을 우리 글로 옮기고 있다. 옮긴 책으로 《미래의 권력》, 《아름다움의 제국》, 《히스테리》,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그린 마술그림》, 《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즐거운 지식여행 - 춤》 등이 있다.


차례


그때 그 시절

근대 예술의 초점, 빈


최고가 되기까지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예술

찬란한 황금빛과 화려한 색채


"비범한 깊이의 인간"


사랑

"여자는 나의 주요 작품"


지금도 우리 곁에

클림트의 세계


작품의 변천 과정

클림트의 작품들을 보면 그가 화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이 한눈에 드러난다.

그의 작품 세계는 사실주의로부터 '금색 시기'를 거쳐 찬란한 색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엄격한 아카데미즘으로부터 클림트만의 자유로운 양식으로 변화한다.


초상화

1891

1898

1900-01

1907

1916


"나는 그림의 소재로 나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 특히 여자들, 그들의 색다른 모습에 훨씬 더 흥미 있다."(구스타프 클림트, 작품의 모티프에 대해서)


알레고리화

1883

1895

1905

1907-08

1916


"나는 매일같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구스타프 클림트, 자신의 작업에 대하여)


풍경화

1881

1896-97

1900

1907

1916


"……조금씩 그림을 그린다오. 해가 날 때는 호수를, 흐린 날에는 내 방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풍경을 그리지……."(구스타프 클림트, 잘츠카머구트에서 보내는 여름 휴가에 대하여)


소묘

1911-1912

1914-1916


"나는 회화와 소묘 작업을 할 수 있다. 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몇몇 사람들도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지 확신이 없다."(구스타프 클림트, 자신의 재능에 대하여)


차례


그때 그 시절

근대 예술의 초점, 빈


최고가 되기까지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예술

찬란한 황금빛과 화려한 색채


"비범한 깊이의 인간"


사랑

"여자는 나의 주요 작품"


지금도 우리 곁에

클림트의 세계

 

그때 그 시절

 



"빈, 수수께끼처럼 남김없이

을 흡수하는 대기에 싸여,

마법이 마르지 않는

경이로운 도시"

후고 폰 호프만스탈

 

빈의 모더니즘은

… '세기말'과 함께 시작된다. 도나우 강변의 이 도시는 1890-1910년 사이에 예술, 문화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12음 음악, 의사이자 극작가 아르투르 슈니츨러의 '심리 묘사'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빈, 아니 이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세기말'

현재 '세기말'이라는 단어는 주로 끓어오르는 창조성과 언제나 데카당스로 끝맺게 되는 낭비벽이 만연했던 1890년부터 1914년까지 약 25년간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세기말'을 묵시록에 등장하는 재앙이 나타나기 전 시기로 여겨 두려워했고, 풍요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라는 뜻)의 뒤를 잇는 피하기 어려운 몰락으로 받아들였다. '세기말'은 프란시스 드 주브노와 H. 미카르의 연극 제목으로 쓰이면서,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1890년 무렵 문화의 중심지 빈. 새로지은 궁정극장인 부르크 극장과 시내가 보인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1888년에 완성한, 문자 그대로 사교계의 초상. 이 그림은 옛 부르크 극장의 철거가 결정된 뒤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클림트는 수많은 빈의 귀족, 명사들을 마치 사진처럼 모사했다.


"충동 이론은 소위 우리의 신화다. 충동은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단히 신화적인 존재이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헤르만 바르. 뛰어난 수필가이자 비평가였던 그는 클림트와 절친한 사이였다.

작가 아르투르 슈니츨러는 빈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했다.

나일강에서의 사냥 | 거장 한스 마카르트는 19세기 빈에서 사장 인기 있던 예술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화려한 역사화는 젊은 구스타프 클림트에게도 모범이 되었다. 마카르트가 이집트 여행 후에 그린 <나일강에서의 사냥>은 동양에 대한 이국적 묘사로 유럽 관람객의 환상을 부추겼다.

마카르트를 추종한 초기 작품 | 구스타프 클림트의 초기 작품들은 특히 한스 마카르트에 의해 각인된 당시 지배적인 성향을 강하게 보인다. 하지만 클림트가 21살 때 그린 <우화>의 나체 여인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연상시키며, 그의 후기작에 등장하는 '팜 파탈'의 이미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최고가 되기까지

 

"너의 행동과 예술작품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 수 없다면,

소수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게 하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것은 잘못이다."

- 프리드리히 실러, 구스타프 클림트의 <벌거벗은 진실>에 적힌 어구

 

시대를 앞선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은 시대를 앞서갔다. 그는 모질고 격렬한 비판과 거부를 받았고, 그의 작업은 빈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클림트는 성을 솔직하게 표현하여 보수적인 사고를 뒤흔들고 금기를 깨뜨렸으며, 계속해서 대중들을 모욕했다. 그럼에도 그는 세기말 오스트리아의 예술계를 선두에서 이끌었으며, 이후 세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빈 사람들에게는 너무 도발적이었던 <철학>의 일부.

 

빈 분리파

19세긱 말 무렵 빈 미술가협회에서 진보적인 회원들과 보수적 회원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클림트를 비롯한 몇몇 회원들은 빈 미술가협회에서 탈퇴하고 독자적으로 '분리파'를 결성했다. 이들의 목표는 진리 추구와 건축, 회화, 조각이 통합된 종합미술작품의 창작이었다.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는 클림트를 중심으로 모인 예술가들을 위해 1897-98년에 걸쳐 분리파 전시관을 세웠다.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가 있는 빈 분리파 전시관 홀 전경. 1992년경.

 

"나는 공격에는 매우 둔감하다. 하지만 주문한 사람이 내 작품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는 더욱 민감해진다."

- 구스타프 클림트

'예술가 컴퍼니'에 들어온 주문! 구스타프와 에른스트 클림트, 프란츠 마치는 부르크 극장의 계단실을 시칠리아 섬 타오르미나의 고대 극장을 묘사한 그림으로 장식했다.

<법학>에서 클림트는 대학당국이 요구한 법의 승리 대신 적대와 불안의 상태를 그렸다. 세 점의 학부 그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소실되었다.

<탕가라 소녀>는 '고대 그리스'를 구현한다고 했다(탕가라는 고대 그리스의 지방이름이다-옮긴이). 그러나 클림트는 바로 당대의 여인을 묘사했다. 많은 관람자들은 이 그림을 보고 빈의 화류계 여성을 떠올렸다.

헤르만 바르는 제1회 분리파 전시회를 두고 "나쁜 그림은 하나도 없는 전시회"라고 호평했다.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가 벌거벗고 싸우는 모습을 그린 분리파 전시회의 포스터는 검열을 받아 여기서 보는 두 번째 포스터에서는 나무에 성기가 가려졌다.

탁월함! 클림트는 <죽음과 삶>으로 로마 국제미술전시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많은 관람객들의 추측에 의하면,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어머니(상부 가운데)는 클림트의 평생 반려자인 에밀리 플뢰게이다.

클림트는 딱 두 번 성경의 주제를 다룬다. 이 작품 <아담과 이브>는 그의 후기 작품 중 하나이다. 밝게 채색된 이브와 어두운 그림자 안쪽의 아담을 그린 이 작품에서는 여성을 전문적으로 그렸던 클림트 그림의 특징이 나타난다.

사랑의 힘 |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 작품 중 하나인 <베토벤 프리즈>는 분리파 전시관에서 열린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게 헌정된 전시회를 위해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클림트가 꿈꾼 유토피아의 실현, 즉 예술과 헌신적인 사랑을 통한 인간 구원을 나타낸다.

구원 | 학부 그림의 주요 주제가 상실과 혼돈이라면 <베토벤 프리즈>에서는 이러한 긴장이 해소된다. 분명 행복을 갈망하며 적대적인 무력의 위험을 뚫고 온 영웅은 연인과 포옹함으로써 구원받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이 <전 세계의 키스>로!

 

예술

 


"나는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인물화, 풍경화, 간혹

초상화도 그린다."

- 구스타프 클림트

한스 마카르트가 그린 나신.

장식이란?

'장식하다, 치장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오나레(onare)에서 유래한 장식은 반복되는 무늬를 가리키며, 추상적인 무늬가 많다. 천, 건축물, 그림, 카펫, 기둥의 표면을 치장하는 데 쓰인다. 장식은 연속되는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지 않고 표면에 한정된다. 전체적으로 자연주의적이며 조형적이라 해도 장식의 주요 기능은 꾸미는 것이다.

클림트는 <처녀>를 그렸을 때 처음으로 노화의 징후를 느낀 듯하다. 그러나 청춘에 헌정한 이 작품에는 태평하게 단꿈에 빠진 여인들을 보면 저절로 미소 짓게 되는 무심한 경쾌함이 가득하다. 클림트는 피라미드 형 구성에서 혼합하지 않은 순색만 썼다!

클림트는 미묘한 에로티시즘의 화가다. 화려한 색과 장식의 우주 안에서 선정적인 <물뱀>들이 꿈틀댄다.

 

"나는 회화와 소묘 작업을 할 수 잇다. 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며, 몇몇 사람들은 자기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지는 확신할 수 없다."

- 구스타프 클림트

<조각의 알레고리>, 1896. 사과를 손에 든 이브는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조형예술을 나타낸다. 두 여인의 얼굴은 에로틱하고 생동감 있으며 현실적으로 보이는 반면, 그 뒤에 있는 고전적 조각상의 시선은 공허하게 허공을 향하고 있다.

클림트는 모델들을 보고 수많은 관능적 스케치를 완성했다. 그는 여인들이 취했던 유혹적인 포즈를 몇 개의 간결한 선으로 확실하게 포착했다.

클림트는 귀족부인 로제 폰 로스트호른 프리트만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녀는 사교계에서 아름답고 지적이라고 소문이 자자햇다. 클림트는 발그스레하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통해 이 작품에 에로티시즘의 색채를 부여했다.

닉스(게르만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요정-옮긴이)의 얼굴에서는 로제 폰 로스트호른 프리트만의 특징이 분명하게 보인다. 이렇게 귀족 출신 팜 파탈이 탄생했다. 클림트가 그녀의 동의를 구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이 그림은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다. 빈 사람들은 그러한 추측과 험담 거리를 좋아했던 것이다.

<여성의 세 시기>에서 클림트는 선정적인 아름다움과 관능적 분위기가 여자의 인생에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주제로 다루었다.

클림트는 얼핏 보면 '야생의' 자연을 암시하듯 보이는 것들을 잘 계산하여 배열하고 세부적인 즐거움을 많이 장치했다. <닭이 있는 정원 길>은 1945년 오스트리아 임멘도르프 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모자와 모피 목도리의 숙녀 | 클림트는 <키스>보다 2년여 후에 이 수수께끼 같은 여인을 그렸다. 이 작품에서는 빈의 젊은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의 영향이 나타나면서, 금색을 비롯한 장식 요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 그림은 이전 작품보다 더 단순하고 더 표현주의 성향을 보이며 비밀과 암시로 가득 차 있다.

색채에 축배를! |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에밀리 플뢰게를 제외하면 클림트가 여러 번 초상을 그린 유일한 여인이었다. 두 번째 초상화에서는 황금 대신 색채를 풍부하게 썼다. <유디트 Ⅰ>도 아델레가 모델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부유한 실업가의 부인인 아델레가 오랫동안 클림트의 연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봉우리 위에 빛나는 하늘 | 이 작품은 클림트의 풍경화에서도 보기 드문 유형이다. 일반적으로 클림트는 원근법적 깊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호수 가운데서 시점이 시작되는 이 그림에는 어느 정도 공간성이 보인다.

아터 호숫가의 운터라흐 | 호수 연안에 집들이 층층이 '겹쳐졌다.' 밀교 이론에서 특히 조화로운 형태로 간주되었던 정사각형은 건물들이 조각조각 잇닿아 있게끔 단면의 선택을 제한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특별히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구스타프 클림트

 

'강한 개성의 소유자'

클림트 시대의 빈에서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강철 같은 작업 의지와 엄격한 원칙으로 똘똘 뭉친 위대한 재능을 타고 났다. 클림트는 스스로를 '별로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물보다는 자신의 작품을 보라고 권한다. 클림트에 관해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림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안에서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알아내야" 한다.

 

 

 

"노 코멘트!"

클림트는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하지 않은 사실에 한층 더 흥미를 느낀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클림트를 둘러싼 추측과 험담, 비방, 전설은 끊이지 않았다. 그의 인간관계와 연애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클림트의 생애를 추적하는 진정한 그림의 원천이 되는 사건들은 그가 세상을 뜬 후에야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다.

1912년 무렵 에곤 실레는 자신의 위대한 우상이었던 구스타프 클림트를 파란색 작업 가운을 입은 모습으로 영원히 남겨놓았다.

사진작가 모리츠 내어는 클림트의 평생지기였다. 1910년 무렵 내어는 클림트의 작업실에서 이 사진을 찍었다.

 

"나에 관해 알고 싶다면…… 내 그림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안에서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알아내면 될 것이다."

- 구스타프 클림트

구스타프 클림트는 지금은 빈 14구역이 된 린처슈트라세 247번지에서 태어났다. 클림트 가족은 대문 오른쪽 바로 옆방에 살았다. 이 사진은 1900년에 촬영했고 이 건물은 1967년 철거되었다.

클림트가 공예를 배웠던 장소. 빈 링슈트라세에 위치한 응용미술학교와 미술 및 산업 박물관.

1880년 빈 응용미술학교 회화반의 사진. 앞줄 왼쪽에 라우프베르거 교수와 그 옆에 구스타프와 에른스트 클림트가 앉아 있다. 맨 뒷줄에 검은 양복을 입은 프란츠 마치가 서 있다.

클림트는 1890-92년에 <협죽도(夾竹桃)와 두 소녀)>를 그렸다. 이 초기 작품에는 아직 고대 생활상 그리기를 좋아하는 취향이 많이 보인다.

구스타프와 에른스트의 동생 게오르크는 다른 가족들처럼 '기꺼이' <세익스피어 극장>의 로미오 역 모델이 되어주었다.

이곳 베스트반슈트라세 366번지에 클림트가 살았다. 클림트의 방은 4층 왼쪽 두 개의 창에 해당한다.

에른스트 클림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와 헬레네의 딸은 태어난 지 불과 몇 달밖에 되지 않았다. 구스타프는 후견인이 되어 평생 이 아이를 사랑해주고 금전적으로 보살폈다. 이 그림은 헬레네가 여섯 살 때 그린 초상화이다.

귀부인의 초상 | 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 작품이 그려진 1894년 무렵에 클림트는 개인 고객의 초상화를 그렸다. 2년 전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으로 대가족의 생계를 혼자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던 클림트는 이러한 초상화 주문으로 수입이 늘어나 기뻐했다.

기품 있는 아우라 | 1899년 구스타프 클림트는 부유한 기업가 아우구스트 레더러의 부인 세레나를 그렸다. 레더러는 클림트의 열광적인 후원자가 되어 곧 클림트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수집가가 되었다. 실물보다 큰 이 그림에서 세레나 레더러는 품위 있고 부드러운 인상이다. 하늘하늘 늘어지는 옷에 감싸인 그녀는 밝은 배경 속으로 녹아드는 듯하다.

피아니스트 |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요제프 펨바우어는 클림트 형제를 비롯해 미술가와 배우들이 모였던 '펨바우어 협회'의 창립자이다. 1890년에 그린 이 펨바우어 초상화는 협회의 회의실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식 테두리와 간소한 배경 장식이 인물을 두드러지게 한다.

황금 애호가 | 클림트는 1906년경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을 통해 '금색 시기'를 시작한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를 암시하는 프리차는 추상적이고 장식적인 무늬로 표현된 안락의자에 녹아들 듯한 느낌을 준다. 곧은 자세, 놀란 듯한 시선, 비스듬하게 포갠 두 손으로 인해 프리차는 마치 어린 소녀처럼 보인다.

벌거벗은 진실 | 1899년 작 <벌거벗은 진실>은 빈 분리파 화가들의 노력을 형성화했다. 그의 동료들은 타협하지 않고 진리 수호라는 의무를 수행하는 예술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다. 바로 이런 <진실>을 구현한 나체의 여인은 관찰자를 향해 거울을 들고 자신의 진실을 검토하라고 요구한다.

팔라스 아테네 | 아테네는 빈 예술가들을 감시해야 한다. 분리파 회원들이 그룹의 수호신으로 뽑은 '팔라스 아테네'는 진지하고 투쟁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문양으로 장식된 액자가 특이한 단면을 보여주는 그림을 감싼다. 1898년에 그린 이 작품에서 클림트는 전쟁과 지혜와 예술의 여신에게 비밀스럽고 유혹적인 분위기를 선사한다.

클림트의 작업실. 가꾸지 않아 무성하게 자란 정원은 작업실을 자연과 친숙한 은신처로 만들어주었다.

클림트는 자신의 여러 모델들을 보고 수많은 관능적인 스케치를 그렸다.

미치 침머만. 그녀는 클림트의 모델이자 애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구스타프와 오토의 어머니였다.

1874년에 태어난 에밀리 플뢰게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한,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자 인생의 반려자였다.

해바라기 그림은 모자이크처럼 구성되었다. 클림트는 여인들을 그리는 방식으로 꽃을 그렸다. 해바라기는 조용히 빛을 발하며 중심에 서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 에밀리 플뢰게, 그녀의 언니 헬레네. 1905년경 아터 호에서, 해마다 가는 휴가여행은 클림트 생활에서 중요한 일정이었다.

여럿이 어울린 시골파티. 야외 주점으로의 소풍, 산책은 클림트의 여름휴가에서 중요한 사교 활동이었다. 물론 그림 그릴 때는 반드시 혼자 있기를 요구했다. 그때는 사진 촬영도 허용되지 않았다.

낭만주의 | 1895년에 만들어진 이 <사랑의 알레고리>는 걸작 <키스>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이 작품에서는 아직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흔적이 느껴지지만 서서히 유켄트슈틸 시기에 가까워짐을 보여준다. 사랑에 대한 영원한 상징인 장미가 그림 안에 보일 뿐 아니라 양 옆의 금색 평면 위로 줄기를 뻗는다.

부드러운 금발 | 1891년 17세의 에밀리 플뢰게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구스타프 클림트는 이 초상화를 그렸다. 그의 제수 헬레네의 동생인 에밀리를 그린 이 작품은 그의 초기 초상화 가운데 하나다. 헬레네와 에밀리는 셋째인 파울리네와 함께 '플뢰게 패션살롱'을 운영하며 자신들이 디자인한 옷을 팔아 성공을 거두었다.

사랑을 나누는 소녀들 | 클림트가 <물뱀>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두 여자를 그린 이 그림은 분명히 사랑을 나누는 두 소녀를 보여주고 있다. 클림트의 스케치들 가운데는 여성들의 동성애를 그린 작품이 수없이 많다. 그는 관객으로서 그들의 쾌락을 탐닉한 듯하다. 그림 아래쪽의 물고기는 남성 관찰자의 상징일까?

황홀경 | 감옥에 갇힌 <다나에>를 황금비로 변신한 제우스가 '방문'한다. 클림트는 이 그리스 신화를 차용해 삶에서 가장 은밀한 순간을 표현한다. 천에 감싸여 누워 있는 붉은 머리 여인의 다리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황금 빛 실이 에로티시즘이 감도는 분위기를 강조한다.

비밀에 싸인 늪 | 클림트는 풍경화에서 대부분 정사각형 화폭을 선택했다. 이 작품 <늪>의 구성은 단면과 색채의 효과를 강조한다. 수면은 마치 거울처럼 하늘과 늪 주변의 풍경을 비추며, 인상주의 기법으로 나타난 각각의 색 점들은 생기를 부여하면서 신비한 분위기를 내는 데 기여한다.

사랑하는 아터 호수 | 클림트는 자연, 식물, 날씨를 좋아했다. 이것들은 그의 편지나 엽서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는 주제였다. "찬란한 태양이 비치고, 마치 축제일 같소!" 그는 에밀리에게 이렇게 썼다. 특히 클림트는 자신이 좋아했던 아터 호수를 수없이 많이 그렸다. 그림의 수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명상적인 분위기에 젖어든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브뤼셀에 지은 기업가 아돌프 스토클레 저택의 실내 장식을 맡았다. 저택의 설계는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이 맡았다.

클림트는 스토클레 저택의 22명이 앉을 수 식탁이 갖춰진 식당에 <스토클레 프리즈>를 제작했다. 스토클레는 이 <프리즈> 제작에 든 비용을 비밀에 붙였고, 심지어 관련 서류들을 모두 폐기했다.

<스토클레 프리즈>의 부분. 클림트가 준비 작업으로 그린 작품이다. 여기에는 인물 묘사가 전혀 없으며, 이는 추상으로 발전하는 전조로 평가된다.

자기 작업실 앞에 있는 클림트. 고양이를 안고 포즈를 취했다.

클림트 특유의 파란색 작업 가운은 현재 빈 시립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클림트는 56세에 뇌졸증을 맞아 사망했다. 병원에서 면도를 해서, 데스마스크에는 턱수염이 없다.

약간의 익살을 곁들인 인사. 클림트의 캐리커쳐 자화상.

기대 | 클림트는 <스토클레 프리즈>를 디자인하는 데 4-5년이 필요했다. 클림트가 완성한 시안을 빈 공방 회원들이 브뤼셀의 스토클레 저택에 모자이크로 옮겨놓았다. 인물의 옆모습과 손 모양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클림트는 이집트 양식 표현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충만 | 클림트는 <스토클레 프리즈>에서 공예품에 대한 애호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었다. 그의 시안을 대리석에 옮겨놓았다. 재료로는 구리, 은박, 산호, 보석, 에나멜, 금박을 썼다. 클림트는 빈 공방의 작업을 감독햇으며, 여기서는 <기대>가 <충만>으로 변했음을 볼 수 있다.

자포니즘 | 프리데리케 마리아 베어는 1915-16년에 클림트에게 초상화를 주문했다. 그녀는 빈 미술계의 후원자였고 이미 실레에게도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실레가 그린 초상화가 있는데 왜 자기에게서 또 초상화를 원하느냐는 클림트의 질문에 그녀는 '클림트의 그림으로 남아야 비로소 영원해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배경의 모티프들에서 일본 미술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매혹적인 여인들 | '여자 친구들'이 친밀하게 서로 기대고 있다. 부드러운 붉은색조가 그림 전체에 은밀한 분위기를 부여한다. 두 사람은 이국적이며 감각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관람자는 울타리 밖으로 물러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비밀은 자기들끼리 지니는 것이다! 여인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자극적이며, 약간은 관음증적 시선은 일생동안 클림트를 사로잡았다!

 

사랑

"나 스스로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가 가련한 바보라는 사실이다.

나는 진정한 사랑

두려움과 존경심마저 느낀다."

구스타프 클림트

 

수많은 연애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삶을 장식했지만 그는 어느 한 사람과 지속적인 연인관계를 맺거나 결혼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는 두 명의 모델에게서 그가 인정한 자식들을 두었으며 사교계의 부인들과는 은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여인은 에밀리 플뢰게로 두 사람은 매우 친밀한 사이였지만, 여러 가지 미묘한 이유에서 정신적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 머물렀다.

"팜 파탈"

미모와 성적 매력을 무기로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위험한 성향을 지닌 여성, 19세기 말 영국과 프랑스에서 이러한 뜻에서 '팜 파탈' 개념이 생겨났다. 클림트의 그림에는 남자들을 불안으로 몰아가고 옭아매는 이러한 여자들이 항상 있다. 또한 문학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데, 옥타브 미르보의 <시련의 뜰>이나 사드의 <쥐스틴> 같은 작품은 '팜 파탈'을 주제로 다루었다.

 

파란 베일의 <소녀>로 표현된 아름다운 미지의 여인처럼 여자들은 구스타프 클림트에게 대단한 매혹의 대상이었다.

파트너, 친구, 연인?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밀리 플뢰게가 어떤 관계였는지는 확언하기 힘들다.

 

"나는 그림의 주제로서 나 자신에는 흥미가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 흥미가 잇다. 특히 여자들에게."

구스타프 클림트

플뢰게 자매가 운영한 패션살롱은 현대적이고 편리한 설비를 갖추엇다. 실내 디자인과 시공은 빈 공장이 말았다.

어느 여름 아터 호수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클림트는 두 사람이 함께 디자인한 혁명적인 의상을 입은 에밀리의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에서 에밀리는 클림트가 그녀를 위해 주문한 하트 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걸었다.

1902년 레미기우스 가일링은 이 과장된 클림트의 캐리커쳐를 그렸다. 클림트는 <철학>의 스케치를 옮겨 그리면서 두 여인의 시중을 받고 있다.

알마 말러 베르펠(결혼 전 성은 쉰들러)은 많은 예술가들의 아내였고 친구이자 애인이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정원 풍경 | 클림트가 그린 에밀리의 두 번째 초상화는 클림트 작품에서 초기에 해당하며, 역사화를 위한 습작으로 그려졌다. 에밀리는 고전적 의상을 입고 협죽도 앞에 서 있다. 에밀리는 요제프스테터슈트라세에 있던 클림트 작업실의 수풀이 무성한 정원에서 모델을 섰다고 추측된다.

미디의 초상화 | 구스타프가 그린 에밀리. 1902년의 이 그림이 에밀리의 마지막 초상화다. 이 그림은 에밀리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미디'에게 쓴 편지를 보면 클림트가 이 그림을 팔았을 때 어머니(그의 어머니인지 에밀리의 어머니인지는 확실치 않다)에게서 질책을 받았고 빨리 하나를 그려 놓으라는 말을 들었다고 썼다! 물론 다음 초상화는 그려지지 않았다.

희망 | 클림트는 이미 빈 대학교의 학부 그림을 그렸을 때 임신부를 묘사하여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물론 알레고리화 <희망>은 주문받는 작품이 아니었다. 화가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릴 수 있었고, 붉은 머리칼, 아름다운 각선미 같은 '팜 파탈'의 특징을 만삭의 여인과 연결했다.

생성되는 생명 | <희망 Ⅱ>, <희망 Ⅰ>보다 4년 뒤에 그려진 이 그림은 생명의 순환에 대한 상징이 집약되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임신부의 시선이 감춰진 자신의 배를 향한다. 전작에서 위협적으로 보이던 찡그린 얼굴과 해골이 사라졌다.

오토는 클림트와 미치 침머만 사이에서 태어난 두 번째 아이로, 두 살 즈음 사망했다. 클림트는 1903년 이 아들을 스케치했다.

<유디트 Ⅰ>을 위한 스케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가 모델이다. 이 그림은 그들의 연인 관계에 대한 증거였고 스캔들이 되었다.

클림트가 관능적인 스케치에 표현한 모델들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오히려 그가 포착했던 감정으로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충만한 육체적 몰입.

아름답고, 당당하고, 위험한 | 빈 '팜 파탈'의 전형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1899년 즈음 성경의 인물 <유디트>를 위해 모델을 섰다. 이것은 공식적인 초상화가 아니지만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통해 아델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목걸이는 부유한 제당회사 사장 페르디난트 블로흐 바우어가 아내에게 선물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 황금으로 치장한 걸작 <유디트>가 발표된 지 8년 후 클림트는 또 하나의 <유디트>를 그렸다. 이번 작품도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황홀경에 빠져 춤추는 것처럼 보이는 여인이므로 이 작품의 제목을 <살로메>로 붙여도 좋을 것이다. 살해한 후 극도로 흥분한 이 <유디트>는 방탕하고 피에 굶주린 듯 보인다.

수수께끼 같은 흐름 | 1903년의 <도깨비 불>은 비밀에 싸여 부드럽게 반짝인다. 굽이치는 머리카락을 이루는 유려한 선, 희망이 가득한 여인들의 얼굴, 유혹적으로 빛나는 나체들이 뻗어나가며 이 작품의 특별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사소한 복수 | 클림트는 원래 이 그림에 <나의 비평가들에게>라는 제목을 달았다. 빈 대학교 학부 그림이 거부당한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 가득한 분노! 풍만한 엉덩이를 보이는 붉은 머리 여인의 대담한 시선이 매우 직설적이다. 클림트는 친구들의 설득으로 <금붕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그 메시지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

생명의 원천 | 1917-18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미완성작이다. 요람에 누인 아기는 여러 면에서 생명의 시작을 보여준다. 산위에 있는 이 젖먹이는 이제 무덤으로 내려갈 일만 남아 있는 산 정상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이의 탄생은 순환하는 인생의 즐거운 절정일까?

무희 | 관능적인 표현에 대한 클림트의 취향은 화려한 색채로 이루어진 후기 작품까지 이어진다. 아름다운 <무희>가 입고 있는 옷의 다채로운 무늬는 배경과 하나가 되어 시선을 깊이 끌어들인다. 왼쪽에 있는 아시아인들의 모습에서 극동 예술에 심취했던 클림트의 취향을 되짚어볼 수 있다.


지금도 우리 곁에



"나는 클림트라는 인물을

아르투르 슈니츨러

이야기한 방식으로

짜 맞추려고 시도 했다."

라울 루이즈 (<클림트-빈의 환상>의 감독, 위는 구스타프 클림트 역의 존 말코비치)


그 어느 때보다

…세계는 지금 더 클림트에게 관심을 쏟고 잇다. 빈이 낳은 유명한 예술가 클림트가 만약 지금 자신의 작품이 얼마나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 볼 수 있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는 지금 오스트리아 예술의 간판스타로 이름을 올렸고, 그 당시 격렬한 논쟁의 대사이었던 그의 작업 방식은 일상 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한편 그가 직접 그린 작품들은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클림트를 찾고자 하는 이는 어느 곳보다도 그의 고향에서 클림트를 먼저 발견할 것이다.




위에서 바라본 빈의 오버 벨레데레 궁전. 오늘날 미술관으로 쓰이는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다.


"……나는 클림트 자신이 만들었을 법한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라울 루이즈

1984년 미국의 팝스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디자이너 레이 아가안에게 아주 특별한 드레스를 만들게 했다. 이 의상은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Ⅰ>을 본 따 만들었다.

클림트의 열렬한 팬이라고 고백한 영화배우 샤론 스톤.

감독 라울 루이즈. 루이즈는 이미 여러 차례 영화상을 수상했으며 다수의 영화들이 성공을 거두었다.

구스타프 클림트로 분한 존 말코비치가 <여자 친구들>을 그리고 있다.

카리스마 | 니콜라이 킨스키가 에곤 실레 역을 연기했다. 영화는 클림트의 임종 침상에서 시작된다. 젊은 실레는 존경하는 대가의 초상을 마지막으로 그리고 싶어 한다. 그가 연필을 잡자 클림트가 갑자기 눈을 뜬다…….

우정의 끈 | 에밀리 역의 베로니카 페레스와 구스타프 클림트 역의 존 말코비치. 라울 루이즈의 화려한 영화 속에서도 두 사람은 영원히 맺어지지 못하고 정신적 사랑을 나누는 한 쌍으로 남는다.

클림트 당시의 작업실 | 구스타프 클림트가 마지막 작업실에 있는 매혹적인 정원을 거닐고 있다. 자연에 근접한 작업실은 그가 제2의 집으로 삼았고, 창의력을 북돋워 주는 이상적인 은둔처였다.

현재의 유산 | 그 사이 개축된 작업실은 오늘날 '구스타프 클림트 기념사업회'가 관리한다. 기념사업회는 이 장소를 클림트 순례자들이 관람하게 하고, 여러 가지 문화 프로그램으로 클림트의 유산을 생생하게 보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