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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 26. 17:11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64 세잔 - 사과 하나로 시작된 현대 미술


미셸 오 지음, 이종인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8


082

시156ㅅ  33


시공디스커버리총서 33



"나는 당신에게 회화의 진실을 말할 의무가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평생 미술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독창적인

천재 세잔은 회화의 진실을 전달하겠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세상사와는 담을 쌓은 채

그리고 또 그렸다. 마침내 세잔은 색채의 논리를 규정하고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여 '자신의 감각을

실현하는 일'에 성공했다. 그의 작업은 곧 20세기

현대 미술의 새로운 지평이 되었다.


"자연의 모든 물상은

색채를 갖고 있으므로, 데생과

색채는 결코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색을 칠해 나감에 따라 데생도

이루어지는 것이며, 색의 조화가

이루어질수록 데생도

더욱 확실해지는 것이다. 색채가

풍부해질 때 형태는 가장 풍만해진다.

색조의 대비 및 관계가 데생과 형태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무척이나 천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아주 복잡한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끝이 없습니다."

"그림이란 색채, 형태 공간 따위 다양한 관계 속에서 어떤 조화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그렇게하여 그것을 새롭고 독창적인 논리에 따라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강렬한 느낌 - 나는 그런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 이 미술적 개념을 이해하는 근본적 바탕이 되고 이 바탕에 의존해서 모든 미래의 작품들이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획득한다고 볼 때,


우리의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에 관련한 폭넓은 지식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식은 오로지 오랜 동안 쌓아 온 경험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습니다."


"명암(빛과 그림자)은 곧 색채의 관계입니다. 이 두 가지 중요한 우연적 요소는 색 자체의 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색과 색이 함께 어울릴 때의 공명도(共鳴度)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림자도 빛만큼이나 어엿한 색채입니다. 단지 명도(明度)가 떨어질 뿐이지요. 그러므로 명암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색조(色調)가 맺는 관계일 뿐입니다."


"(그림에는) 대비(對比)가 있을 뿐, 선(線)이나 모델링(modelling, 대상에 입체감을 주는 것 : 역주)은 없습니다. 그것은 명암의 대비가 아니라, 색채감(sensation of color)의 대비를 뜻합니다."


"모델링은 색조의 관계를 정확하게 맞추었을 때 얻어집니다. 색조를 조화롭게 병치(倂置)시켜 완성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그림은 스스로 모델링을 갖추게 됩니다."


차례


Cezanne, "Puissant et solitaire"


제1장 유년 시절

제2장 인상주의 시대

제3장 자연과 평행한 조화

제4장 "이제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기록과 증언

참고문헌

그림목록

찾아보기


미셸 오 Michel Hoog

파리 로랑제리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인 미셸 오는, '로베르 들로네' '19세기 러시아 회화의 리얼리즘과 시정' '르 두아니에 루소'와 같은 굵직한 전시회를 주최한 바 있다. 1971년부터 파리에 있는 에콜 드 루브르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가 펴낸 수많은 미술 서적들은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기도 하였다.


옮긴이 : 이종인

1954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고,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번 <문자의 역사> 23번 <셰익스피어> 28번 <붓다> 32번 <미라>가 있으며, 그외 <절망이 아닌 선택> <증발> <때로는 낯선 타인처럼> 등이 있다.


제1장

유년시절


"은행가이신 우리 아버지는 자신의 책상 뒤에서 화가가 나타났다는 것을 아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남부 프랑스의 한적한 마을 출신인 한 총명한 학생은 이렇게 말하면서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내비쳤다. 당시 은행가이던 그의 아버지가 반대했을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세잔은 자신의 사진(아래, 1860년대 초만 해도 사진은 신기한 물건이었다.)을 보면서 그린 초상화(위, 1861~1862)를 고의적으로 보기 흉하게 처리했다. 누런 안색, 응시하는 눈, 험악한 인상은 악마를 연상시킨다. 훗날 제작된 초상화들도 웃지 않는 표정으로 유명하지만, 이 초상화만큼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지는 못했다.

세잔의 누이인 마리 세잔의 초상화(위, 1866년경). 세잔의 초기 시대에 그린 몇 안 되는 여자 초상화이다. 물감은 팔레트 나이프를 사용하여 두텁게 칠해져 있는데, 세잔은 임파스토(impasto)라고 하는 이런 빠르고 거친 붓질을 애용했다. 이 기법은 널리 통용되던 관학적인 기법이나 당시 엑스에서 가르치던 부드럽고 장식적인 붓질과 성격을 달리한다.

 

세잔의 외삼촌 도미니크 오베르의 초상화
(아래, 1866)는 약 10점 정도 제작되었다. 그는 조카를 위해 군말없이 모델이 되어 주었다.

 

 

"물결치는 파도 위로 나는 달아낫다. 몇 년간 행복한 세월이 흘렀다.

우리의 날랜 두 팔이 부드러운 파도 위로 뱀처럼 헤엄쳤을 때

안녕, 포도주로 익힌 행복한 날들이여! 대어를 낚는 행운이 따르기를!"

세잔

18558년 4월 9일 에밀 졸라에게 쓴 편지

이탈리아 이민의 아들인 루이 오귀스트 세잔은 1848년 엑스에 은행을 차렸고, 큰부자가 되었다.

<4계절> 벽화(당초 자 드 부팡의 벽에 그린 것이었으나 현재는 파리의 프티 팔레 박물관에 옮겨져 있음)는 그림을 그려 넣은 벽지나 로맨틱한 커튼에 등장할 법한 여인을 그리고 있다.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를 등장시킨 가을(위)과 (아래)은 이탈리아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를 연상시킨다. 야망이 엿보이는 이 초심자의 작품이 보여 주는 예리한 데생, 분명한 윤곽, 긴 팔 등은 세잔이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그림에 '앵그르'라고 서명한 이유를 말해 준다. 신고전파 화가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는 관학적 화풍의 교과서적 전범이었던 것이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그린 이 데생은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의 효시이다. 이 그림은 1859년 1월 17일 에밀 졸라(아래)에게 보낸 편지의 여백에 그린 것으로, 세잔은 "죽음이 이곳을 지배하고 있다."고 제목을 달아 낳았다.

1863년에 사망한 외젠 들라크루아는 세잔 세대의 많은 화가들의 우상이었다. 이 그림은 세잔이 그린 들라크루아의 초상(1864~1866).

<노인의 두상>(위, 1865~1868)은 도미니크 외삼촌을 그린 초상화보다 훨씬 더 감각적이고 정교하다. <메데아와 자식들>(아래, 1879~1882)은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모사작이다.

시인이자 미술비평가였던 안토니 발라브레그는 엑스 출신이었고 파리의 카페를 즐겨 찾던 소집단의 멤버였다. 무뚝뚝한 시골뜨기 세잔은 파리의 예술가들이 즐겨 드나들어 파리 예술계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던 카페 게르부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잔은 화난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있거나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친 듯이 화를 냈다. 마네의 심기를  건드린 적도 있었다. "마네 씨, 난 악수하지 못하겠소. 1주일 동안 손을 닦지 않은 터라."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1863)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페트 샹페트르>(1510경, 이 작품은 한때 조르조네의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를 모델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옷 입은 남자들 사이에 있는 벌거벗은 여체 때문에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살롱에서 낙선한 화가들은 자기 작품을 알릴 기회가 없었다. 1863년. 낙선자들은 전시회장의 옆건물에서 낙선전을 열었다. 당시의 신문 만화에서 알 수 있듯, 낙선전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얘야, 모자를 벗으려무나. 이 불행한 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해야지."

세잔은 기법과 주제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폭력적인 장면(1867~1868년경에 제작한 <살인>)이나 어느만큼은 풍자적인 초상화를 그릴 때는 아주 신속하게 작업을 했다. 두터운 붓질과 빈번한 팔레트 나이프의 사용이 엿보이는 것이다. 반면 평온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 정물화는 부드럽고 사색적인 붓질로 처리하곤 했다.

졸라에게 책을 읽어 주는 폴 알렉시스

그 역시 엑상프로방스 출신인 폴 알렉시스는 졸라의 제자였고 그의 비서로 지내기도 했다. 위 그림(1869~1870)에서 알렉시스는 책 읽어 주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 그림은, 만족스럽지 않은 작품은 파기해 버리는 세잔으로서는 이례적인 미완성작이다. 간단히 스케치만 되어 있는 졸라의 모습은 그림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날카로운 대조를 보인다. 옆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는 알렉시스는 이 그림보다 1~2년 전인 1868년에 제작된 마네의 유명한 그림 <졸라>(아래)를 연상케 해준다. 이 그림은 졸라가 죽고 여러 해가 지난 뒤 촐라의 다락방에서 발견되었다.

세잔은 아버지가 읽고 있는 신문의 제자(題字)를 일부러 나오게 그렸다. 그 신문은 아버지가 평소에 보던 신문이 아니라, 1866년 4월과 5월에 살롱을 성토하는 기사를 게재한 《에베느망》지였다. (살롱을 '바보들의 집단'이라고 꼬집었다.) 졸라는 필명으로 게재한 글에서 살롱을 통렬히 논박하여 물의를 일으켰고, 이 신문의 편집인은 졸라의 기사를 게재하지 못하게 조처하는 한편, 졸라를 해고해 버렸다. 젊은 세잔이 그린 정물화-<설탕그릇, 배, 푸른 컵이 있는 정물>(가운데, 1863~1865)-가 안락의자 뒤에 걸려 있다. 루이 오귀스트 세잔이 아들의 정물화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에 어떤 상징적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아실 앙프레르의 초상화는 폴 고갱의 친구이며 화가인 에밀 슈프네케의 소유였다가 다시 반 고흐의 모델이며 화가인 외젠 기욤 보흐의 손으로 넘어갔다. 세잔은 후년에 이 그림을 파기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으나, 세상사람들은 언제나 이 작품에 깊은 관심을 보여 왔다-오로지 그 크기와 풍자적인 면모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 그림은 1870년 이전, 세잔이 살롱 입선을 노리고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세잔은 당시 스타일, 혹은 그 자신이 말하는 '원칙'을 찾아내기 위해 탐구에 탐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세잔은 자신의 감각을 분석하기보다는 과거 대가들의 그림을 연구하는 일에 더 몰두하고 있었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시점, 강렬한 색채, 풍자적 분위기, 대문자로 적어 넣은 제목 따위가 고풍스런 기법과 간판쟁이의 손놀림이 뒤범벅되어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그림 속의 안락의자는 아버지의 초상화와, (비록 아무도 앉아 있지 않지만) 1866년에 제작된 <탄호이저 서곡>에서 다시 한번 등장한다.

앙프레르를 스케치한 것.

세잔은 전통적인 테마에서 많은 것을 빌려 왔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림보에 있는 그리스도>(첫번째, 두번째) 이외에는 종교화를 별로 그리지 않았다. 이 그림속의 그리스도는 프라도 박물관에 소장된 세바스티노 델 피옴보의 그림에서 모사한 것이고, 막달라 마리아(네번째, <비탄>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음)는 루브르에 있는 도메니코 페티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엑상프로방스 출신 친구인 포르튀네 마리옹은 세잔이 파리 교외로 산책을 나갈 때 자주 동무해 주었다. 그는 지질학자이며 아마추어 화가였다. <야외사생을 나가는 마리옹과 발라브레그>(1866)에는 두 친구가 야외작업을 위한 복장을 하고 나온다. 세잔이 외광파에 대한 관심을 처음으로 선언한 작품이다.

이 풍경화(1865~1867)에서 두텁게 느껴지는 형태가 나무인지 암석인지 확실하지 않다. 세잔은 모델의 얼굴을 표현할 때와 똑같은 정열을 가지고 야생적이고 원시적인 자연을 그렸다.

<대주연>(1870년경)은 아주 큰 화폭에 그려졌다. 세잔은 자신의 스타일을 완전히 바꾼 다음인 1895년에 가졌던 개인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반드시 전시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 시대(1866~1870)의 가장 인상적인 그림 중의 하나가 뤼 드 라 콩다민에 있던 졸라의 집에서 제작되었다. 세잔은 이 그림을 완성하여 졸라에게 선물했다. <유괴(강간)>(1867)는 세잔의 의도대로 366~457cm에는 못 미치고 89~117cm로 완성되었다. 콤마(,) 같은 터치로 그려진 초록색 초원은 마치 험난한 바다 같다. 이런 배경에 서 있는 구릿빛 거인의 누드는 앞으로 튀어나와 보인다. 사내는 양팔로 청흑색 머리카락을 한 창백한 여인을 안고 있다. 여인의 엉덩이에서 진청색 천이 흘러내린다. 초록색 평원과 푸른색 물체에 둘러싸인, 여인의 흰색 피부와 사내의 구릿빛 피부가 강렬한 조화를 이룬다. 저 멀리 배경에 흰 구름을 인 산은 생트빅투아르를 연상시킨다. 화면 왼쪽에 있는 두 소녀의 핑크 빛 육체가 구성에 생기를 준다."

존 리월드

《세잔 전기》(1986)

<두개골과 초가 있는 정물>(1865~1867)은 세잔의 전형적인 초기 정물화이다. 소재 선택에서는 전통에 충실한 면을 보이나 그 기법과 조명에서는 매우 현대적이다.

바늘이 없이 표현된 검은 시계는 졸라의 것이다. 탁자 밑으로 흘러내리는 테이블보는 엑스 교외의 채석장에서 볼 수 있는 바위의 표면을 연상시킨다.

<탄호이저 서곡>(1866경)은 몇 개의 직각(안락의자, 등받이 있는 소파, 작은 의자, 피아노 치는 소녀의 팔, 피아노)을 이용해 단단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림 속의 소재는 캔버스의 면과 수직 혹은 수평을 이룬다. 은은하게 퍼진 빛,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 안락의자의 미묘한 반사광은 베르메르나 사르댕 같은 시적 분위기를 전해 준다. 글레이즈(마른 색채 위에 칠하는 밝은 빛)의 터치로 회색과 흰색은 가볍게 진동하고 있다.

풍자만화가 스톡이 그린 세잔의 초상. 1870년 살롱에서 낙선한 아실 앙프레르의 초상화와 누드(이 그림은 전하지 않음)가 함께 그려져 있다. "팔레트 나이프, 페인트브러시, 붓 따위 여러 가지 화구로 그림을 그리는 쿠르베, 마네, 모네 등이여, 당신들은 모두 유행에 뒤떨어졌소이다, 여기 당신들의 스승 세잔을 소개하나니!" 이 풍자만화는 1870년 봄에 출간된 스톡의 주간 잡지에 수록되었다.

초기에는 그리 흔하지 않던 여성의 초상화는 오르탕스 피케를 만난 1869년 이후로 그 수가 많아졌다. <붉은색 안락의자에 앉은 세잔 부인>(1877).

철로를 부설하기 위해 허리를 잘라낸 언덕이 살벌하게 다가서는 이 풍경화(1870)는 엑스 교외에서 제작되었다. 언덕 뒤로는 생트빅투아르산이 주변을 제압하고 있다. 이 풍경화에서 처음 등장한 생트빅투아르는 그뒤 한참 잊혀졌다가 만년에 자주 등장한다.

 

제2장

인상주의 시대

 

전쟁이 터지기 몇 년 전부터 피사로는 파리 북방의 퐁투아즈라는 곳에서 젊은 제자 화가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다. 세잔은 1872년에 오르탕스 피케와 어린 아들 폴을 데리고 그 그룹에 합류했다. 이제 불안에 떨며 자기분석에 열중하던 청년기가 막을 내리고 약 10년 가까이 평온한 시기가 이어진다.

퐁투아즈 근교의 전원풍경은 세잔의 예술적 발전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색채는 밝아졌고 흑과 백의 강렬한 대비는 사라지고 밝은 색채의 화음이 등장했다. <오베르에 있는 작은 집>(1873~1874경).

모네와 르누아르가 표현한 것처럼 인상파 운동은 즉흥성의 결과이거나 우연한 발견마냥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피사로, 모네, 르누아르, 기요맹 들은 근 10년 동안 한가지 방향으로 작업을 계속해 왔던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르누아르(프레데릭 바질, 1867), 기요맹(세잔, 1869~1872), 시슬레(르누아르, 1874), 모네(르누아르, 1875), 오베르로 야외작업을 나가는 세잔.

'겸손하고 위대한' 피사로 - 세잔은 자신에게 늘 조언을 아끼지 않은 피사로를 그렇게 불렀다 - 의 지도를 받으면서 세잔의 팔레트는 눈에 뛸만큼 밝은 색으로 바뀌었다. 위는 피사로의 <퐁투아즈에 있는 집들>, 아래는 세잔의 <메당의 집>(1879~1881경).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시회 개최를 추진하기 위해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 무명 예술가 30여 명으로 모임이 결성되었다. 유명한 사진가인 나다르(펠릭스 투르나숑)가 자신이 사용하던 카퓌신 35번가의 스튜디오를 빌려 주었다. 세잔의 강렬한 그림이 관람객에게 혐오감을 줄지도 모른다고 동료들이 우려했지만, 피사로는 세잔의 그림을 꼭 출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네도 세잔을 편들어 주었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는 유사한 특징이 발견되지만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있는 목매 죽은 사람의 집>(1872~1873)은 다른 개성을 담고 있다. 그림의 구성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붕, 벽, 언덕은 삼각형 모양이다. 이곳저곳에 짙은 물감이 팔레트 나이프로 발라져 있다.

 

"자네는 이런 시간에 나보고 그 <현대판 올랭피아> 얘기를 하라는 건가? 흑인 하녀가 쪼그리고 누운 추악한 여자의 몸에서 베일을 걷어 내는 광경을 넋놓고 쳐다보는 저 한심한 친구! 혹시 자네는 마네의 <올랭피아>를 기억하나? 그 작품은 이 세잔이라는 사람의 작품에 비하면 데생, 정확도, 마무리 등이 탁월한 걸작이지."

루이 르루아

《르 샤리바리》 1874년 4월 25일

<현대판 올랭피아>의 두번째 그림(위, 1873경), <현대판 올랭피아>의 첫번째 그림(아래, 1867경), 마네의 <올랭피아>(가운데, 1863).

1880년경의 세잔(위)과 <세 명의 목욕하는 여자>의 습작(아래, 1895경).

 

"붓이나 연필을 한 번도 잡아 보지 않은 사람들이그가 데생을 할 줄 모른다고 말한다. 또 그림이 부정확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확한 것이 아니라 고도의 기술을 통해 얻어진 세련됨이다."

조르주 리비에르

《랭프레시오니스트》 1877년 4월 14일

열광적인 미술작품 수집가인 빅토르 쇼케(위, 1877경)에게 보낸 1866년 5월 11일자 편지에서 세잔은 그를 존경한다고 말한 다음 자기는 야외작업에 매력을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우리 둘 다 들라크루아를 좋아한다는 점을 하나의 매개로 하여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처럼 놀랍고 안정된 지성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지성은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목표를 달성하게 해주었단 말입니까! …… 그러나 나는 그런 행운을 타고난 것 같지 않습니다. …… 그것말고는 나에게 특별한 불만이 없습니다. 자연의 광대무변한 울타리인 하늘은 늘 나를 매혹시킵니다. 그것을 쳐다볼 때마다 기쁨에 잠깁니다." <자 드 부팡의 풀장>(아래, 1878~1879경).

고갱은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의 그림을 수집하여 오노레 도미에와 조앙 바르톨트 종킨트 옆에 걸어 놓았다. 고갱은 세잔의 작품도 석 점 갖고 있었다. 이들 중 하나인 <커피포트가 있는 정물>(1880경)은 고갱 자신의 그림 <여인 초상>(1890)의 배경에도 등장한다. "세잔의 이 정물화는 내가 갖고 있는 보물 중의 보물이야. 내가 빈털터리가 되더라도 이 그림은 갖고 있을 거야." 고갱은 1888년 6월에 친구 에밀 슈페네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수프 그릇이 있는 정물화>(위)는 1877년경 퐁투아즈에 있는 피사로의 집에서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평범하고 둥근 정물 위로 쏟아지는 빛은 정교한 반사광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그림자는 거의 생략되었다. 당시 루브르 박물관은 샤르댕의 위대한 정물화 열 점을 사들였는데, 이 그림은 샤르댕의 정물화를 연상시킨다. 샤르댕의 <은제 술잔>(아래).


"나는 내가 주위의 화가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이런 확신감은 오랜 각고 끝에 얻어진 것입니다. 나는 물론 열심히 일하지만 세련된 것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세련된 것은 바보들이나 좋아하는 것이지요. 보통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은 쟁이들의 기교의 결과물에 불과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은 예술적 가치가 부재하는 속된 것입니다. 나는 나의 비전을 달성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지식과 진설을 신장하는 즐거움이 잇기 때문입니다."

세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1874년 9월 26일

오베르의 파노라마적 풍경을 그린 작품(1873~1875).


"이곳의 햇빛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모든 물체가 마치 실루엣으로 축소되어 버리는 느낌입니다. …… 오베르 출신의 풍경화가들이 이리로 내려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잔

카미유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 1876년 7월 2일. 에스타크

<마르세유와 마리섬>(1882경).

<라크루아 신부의 집>은 제작년도(1873)와 서명이 분명하게 들어 있는 몇 안 되는 그림 중의 하나이다. 세잔은 약 20점에 서명을 했고 약 10점에 제작년도를 적어 넣었다. 이것이 세잔 작품의 정확한 제작년도를 결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이다.

<맹시의 다리>(1879).


"다리를 그림 한가운데 놓고 이어 다리 옆에다 두 개의 아치를 구도의 요소로 삼은 다음, 마지막으로 앞에다 나무를 배치해 다리의 전경으로 삼았다. 왼쪽의 아치는 물에 강렬하게 어리면서 앞으로 튀어나와, 다리와 나무의 두 공간을 연결시켜 준다. 이러한 구도적 균형은 변하고 있는 듯한 물빛으로 더욱 단단하게 뒷받침되고 잇다. 물빛의 한가운데가 짙은 초록이지만 양옆은 옅은 갈색을 띠고 있음도 주목할 만하다. 다리 위쪽의 잎새 처리도 인상적이다. 세잔은 모자이크 같은 터치로 녹색과 흰색을 다양하게 변조시켜 마치 물방울이 퍼지는 듯한 빛의 효과를 이룩해 내고 있는데, 이것은 세잔이 인상파 수법에 정통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렇게 하여 세잔이 자연에서 느낀 풍성함과 여러 선들이 잘 어우러져 절묘한 회화적 공간이 창조된다.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가의 정서적 긴장을 '경험'하게 ('보는' 것이 아니다) 해준다. ……이 그림은 인상주의가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개척하고 있으며, 노대가(老大家, 15세기와 18세기 사이에 배출된 대가들)의 권위와 세잔 시대의 새로운 광학(光學)이 잘 결합된 찬연한 금자탑이다."

리처드 베르디

《세잔》(1992)

<맹시의 다리>

"세잔은 사전에 깊이 생각하지 않은 붓질을 단 한 획도 한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의 눈을 시원하게 하는 절묘한 색채감으로 사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색채의 마술사였다,"

에밀 베르나르

《폴 세잔에 대한 회상》(1921)

세잔은 절대로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화상을 그렸으며, 심리를 표현한다기보다는 외형적 리얼리티를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두번째부터 아래로, 1880년, 1875년, 1877~1878년에 그려진 자화상. 맨 마지막 작품은 한때 피사로가 소장했다.

 

제3장

자연과 평행한 조화

 

 

 

"그림의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네." 세잔은 1879년 9월 24일 졸라에게 털어놓았다. 인상파 수법을 7~8년 시험한 끝에 세잔은 반사광과 색채의 그림자에 대한 분석을 최대한 해보았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1880년경부터는 세잔의 작품에 인상파의 수법과 다른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과거의 수법과 갑작스런 결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채화로 그린 <화분>(아래, 1883~1887>. 유연한 꽃줄기와 미동하는 듯한 빛이 나란히 늘어선 화분의 균일감을 깨뜨리고 있다. 세잔은 수채화에서 새로운 표현수단을 발견했다. 세잔 이전의 프랑스 화가 중에서 세잔처럼 수채화를 잘 활용한 화가는 몇 되지 않는다. <정원에 앉아 있는 세잔 부인>(위, 1879~1882).

<나무와 집>(위, 1885~1887)의 밝고 옅은 물감칠과 미묘한 색조는 수채화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검은 나뭇가지들이 확 트인 밝은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이 그림의 구성은 세잔의 작품 중에서도 돋보인다. 미술학교 선생이던 질베르에게 배운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풍경화를 그려 볼 생각이었을까? 아래는 <나무와 지붕>(1882~1883경).

세잔은 자 드 부팡에서 평화와 정적을 얻었다. 그는 그 건물(<자 드 부팡의 저택과 농가>, 1885~1887경). 멋진 호수, 공원, 나무 등을 4계절 내내 그렸고, 정원에서는 농부들과 인부들이 모델을 서 주었다. 세잔의 어머니가 사망한 지 2년째 되던 1899년 이 집은 세잔 누이의 강권으로 매각되었다. 세잔은 이사를 가기 전에 소지품을 대부분 불태워 버렸다.

<에스타크에서 본 마르세유만>(위, 1879경). <에스타크만>(아래, 1879~1883).

 

"남프랑스의 바다풍경,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푸른 바다, 울퉁불퉁한 바위산, 뜨거운 열기 속에 몽롱하고 나른해 보이는 사물, 강한 구도를 갖춘 해변들이 아주 솔직하고 세밀히 묘사되어 있다."

귀스타브 제프루아

《르 주르날》 1894년 2월 1일

<에스타크와 샤토 디프의 풍경> (1883~1885).

세잔은 종종 넓게 펼쳐진 풀경의 전경에 외딴 나무를 돌출시키곤 했다. 여기 <커다란 소나무>(1885경)에서는 나무가 화폭을 거의 다 차지하여 풍경을 가리고 있다. 가지들 사이로 땅과 하늘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세잔은 이 그림에서 나무껍질, 잎새, 땅빛깔 등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수채화에서처럼 선영(線影)이 드러나는 비스듬한 붓질로 풍경화에 일체감을 주고 있다. 수직축과 수평축이 교차하는 부분에 많이 구사된 노랑색은 나무를 실제보다 더 커 보이게 해준다. <생트빅투아르산>과 같은 장대한 구도는 없지만, 세잔이 시골풍경화에 종종 부여한 종교적 분위기가 그대로 배어 나오고 있다.

<부엌의 정물>(1888~1890)에 나오는 사물들은 두 개나 세 개 시점에서 바라본 모습들이다.

 

"천재 세잔은 그림의 전체적 구도를 재배열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전체로서의 그림을 보면 원근법의 왜곡이 더 이상 왜곡되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림이 하나의 정상적 비전을 획득하여, 새로운 질서가 그 안에서 탄생하고 또 그림 속의 사물은 지금 막 우리들 눈앞에 나타나 한데 집합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

《센스와 넌센스》(1948)

<푸른 화병>(1885~1887)은 세잔의 중기 그림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이 그림 속에서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는 상징적 사물들로 이루어진 구성은 놀라운 회화적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선은 문인지 혹은 벽지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색채는 캔버스에 통일성을 부여하면서 그림자 부분마저도 밝게 해주고 있다. 빛의 방향은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사과와 비스킷

완숙기에 그려진 단순한 그림 중의 하나인 <사과와 비스킷>(1879~1882)은 평온기에 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특징을 잘 드러낸다. 궤짝 위에 올려놓은 접시 하나와 사과들은 완벽한 구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수채화의 뉘앙스를 풍기는 섬세한 색감(色感, 비스킷은 분홍, 접시는 연한 청색), 교묘하게 꾸민 단순함, 정물 주변의 절묘한 공간처리 등이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 정물화는 프랑스 화가 루뱅 보갱, 스페인 화가 프란치스코 드 주르바란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세잔이 이들 화가의 정물화를 보았을 것 같지는 않다.

유년시절의 사과

사과는 세잔의 스타일 실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가 정물화의 소재로 늘 사과를 선택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세잔에게 사과는 전통적인 성애의 상징 이외에도 유년의 투쟁을 나타내는 사물이었다. 학생 시절 동급생인 졸라가 학생들에게 놀림당하는 것을 도와 주었던 세잔은, 졸라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사과를 건네받았던 것이다. 세잔은 훗날 사과 정물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사과로 파리를 정복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사소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사과를 그려서 유명한 화가가 되겠다는 뜻이리라. 그림은 <테이블 위의 정물>(1883~1887)이다.

메당의 저택 서재에 앉아 있는 졸라. 1897년경에 찍은 사진.

세잔은 여러 화가들에게 지중해의 햇빛을 발견하도록 권했다. 에스타크에 있던 세잔은 모네, 르누아르, 그리고 조르주 브라크, 라울 뒤피들의 방문을 받았다. <에스타크에서 본 마르세유만>(위). <자화상>(아래, 1880).

에스타크의 바다

세잔이 에스타크 바다말고 다른 바다를 그린 적은 거의 없다(이 그림은 1883~1886년에 제작된 그림). 그러나 에스타크의 산업화가 촉진되자,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그는 이곳을 찾지 않았다. 세잔은 1902년 9월 1일 대녀(代女)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에스타크 해변은 한때 대단히 아름다웠지. 그러나 진보라는 괴물이 이 고장에도 닥쳐왔어. 그 두 발 달린 동물은 아름다운 해변을 기괴한 부두로 바꾸어 놓았는데, 그러고도 부족했는지 가스등을 달았고, 더욱 한심하게도 전등을 달았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세상이 되었어!"

모네나 시슬레가 그린, 햇빛 속에 반짝이는 포플러에 비교해 볼 때, 세잔의 포플러는 청동처럼 부동(不動)하는 견고함을 간직하고 있다. 음영 속에서 보이는 이 미묘한 밝음은 1885~1890년 사이에 그려진 웅장한 풍경화의 특징이다. 이들 풍경화에서 세잔은 푸생의 영웅적 풍경화가 갖고 있는 시적 평온함을 획득한다. 위에서부터 세잔의 <포플러>(1879~1882), <포플러>(모네, 1891), <루앵 인근의 모레>(시슬레, 1892).

생트빅투아르산은 시나이, 타보르, 올림피아 등과 어깨를 겨루는 성산(聖山)이 되었다. 생트빅투아르라는 이름(그 기원은 불분명함)부터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생트빅투아르산을 그린 이 그림은 1885년경에 제작되었다. 전경에 외로운 소나무를 배치한 구성은 풍경 전체에 깊이를 주기 위한 것으로서 파격적이면서도 대담하다.

<생트빅투아르 산>(위, 1882~1885) <생트빅투아리 산>(아래, 1885~1887).


"르톨로네 마을에서는 그 산이 보인다. 민둥산이기 때문에 색채라기보다 한줄기 섬광이 지나가는 흑백의 산일 뿐이다. 어떤 때는 그위에 떠 있는 구름이 산과 혼동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정반대이다. 그 멋진 산은 일견 보기에 하늘에서 갑자기 솟아난 것 같은 느낌이다. 태곳적에 석화(石化)된 듯한 연속되는 습곡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어쩌면 산밑둥에서 수직으로 솟구쳐 오르는 바위절벽이 지닌 동세(動勢)는 이런 감상을 더욱 강화해 준다. 생트빅투아르는 산과 똑같은 색깔의 하늘에서 흘러 내려와, 아니 우주공간에서 솟아 나와 거대한 암석덩어리로 굳어 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페터 한트케

《생트빅투아르산의 교훈》(1980)

 

분명하고 단순한 양감(量感)을 보여 주는 세잔의 오르탕스 피케의 초상화는 입체파 화가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움직이는 인물이 등장하는 <마르디 그라>(두번째, 1888)는 1870년 이후의 작품경향으로 볼 때 희귀한 그림이다. 세번째 스케치는 <마르디 그라>를 위한 습작이고, 네번째는 <커피포트와 여자>(1890~1895)이다. <온실 속의 세잔 부인>(첫번째, 1891~1892)은 오르탕스 피케를 그린 유명한 그림으로, 오르탕스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미완성 작품 속에서 더욱 돋보인다.

세잔의 자화상은 그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생기빌랄하고 가장 적극적이다. <자화상>(첫번째, 1895경). 두번째부터 <부드러운 모자를 쓴 자화상>(1890~1894), <중산모를 쓴 자화상>(1883~5), 한때 드가가 소장했던 <자화상>(1879~1882).

<다섯 명의 목욕하는 여자>(1879~1882>. 파블로 피카소가 한때 이 그림을 소장했다.

<목욕하는 남자들>(1890~1894)

 

제4장

"이제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세잔은 오로지 내적 확신만을 길잡이삼아 멀고 험한 길을 걸어왔다. 그는 많은 장애를 극복했고 그의 작품은 회화사에 새 지평을 열었다. 세잔은 1903년 1월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에게 수줍게 고백한다. "저는 약간의 진경(進境)을 개척했습니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 많은 시간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까? 예술은 순수한 마음을 완전히 바쳐야만 그 결실을 볼 수 있는 사제직 같은 것입니까?"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 가릴 것 없이 세잔은 자신의 모티프를 재치 있고 자유롭게 처리했다. <앉아 있는 발리에>(위, 1906년), <정물 : 사과, 배, 그리고 그릇>(아래, 1900~1904).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아래, 1899)과 볼라르의 화랑에서 1898년에 개최된 세잔 개인전시회의 카달로그(위).

세잔은 정물화의 대상으로 과일이나 병 같은 간단한 사물을 골랐고 정물의 부동상태에 움직임과 유연을 주기 위해 식탁보를 배치하곤 했다. <양파가 있는 정물>(첫번째와 세번째, 1895경)의 부분, <사과와 오렌지>(두번째와 네번째, 1895~1900경)의 부분.

수욕도 시리즈를 그리던 시기에 카드놀이하는 사람이라는 주제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야외에서 실루엣 처리되어 마치 사람이 아닌 듯 보이는 <수욕도>의 등장인물과는 달리,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은 집중된 표정과 밀폐된 공간에서 서로 마주앉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카드놀이하는 사람>(위, 1890~1892)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반스재단의 소장품으로 세잔의 소장품으로, 세잔의 그림 중 가장 큰 것 가운데 하나이며, 강한 집중과 긴장을 전해 준다. 훨씬 평온한 느낌을 주는 아래의 <카드놀이하는 사람>(1890~1892)은 뉴욕메트로폴리탄 예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등장인물들 간의 대치상황이 훨씬 완화되어 있다.

<카드놀이하는 사람> 시리즈에서 세잔은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와의 투쟁, 아니면 자기 자신과의 투쟁을 표현하려 하지 않았을까? 카드는 화가 세잔의 무기와 작업을 상징한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 당시 미술평론가들의 용어로 보나, 게르부아 카페의 테이블에서 흘러다녔던 말로 보나, 카드는 마네와 인상파 화가의 단순화된 스타일과 평면구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석 점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두 점은 1890~1895년 사이에 제작(첫번째와 두번째)되었고 나머지 하나(네번째, 세번째는 부분 확대)는 1890~1892년에 제작되었다-은 두 명의 대결구도로 구성을 축소했다.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그리고 잇는 이 석 점의 그림은, 쓸데없는 배경을 생략한 가운데 자유분벙한 기법과 단호한 붓질을 통한 색채처리를 보여 준다.

<사과와 오렌지>(위, 1895~1900경), <양파가 있는 정물>(가운데, 1895경), <큐피드 석고가 있는 정물>(아래, 1895경)

만년에 세잔은 젊었을 때 즐겨 쓰던 짙은 색을 많이 썼다. 1902~1906년에 제작된 대형 수채화. <주름 잡힌 천 위의 두개골>에서 세잔은 투명성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 그는 당시의 관습과 반대로 균형을 깨면서 대상을 배치해 구성의 자유를 획득했다.

미술평론가 제프루아는 세잔이 그려 준 자기 초상화가 미완성임에도 불구하고 세잔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서가, 책상 위의 서류, 로댕 작품의 복사 석고, 포즈를 취하기 전에 세잔이 가져온 인조 장미꽃 등 모든 것이 탁월하게 그려져 있다. 게다가 책상 앞에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그는 너무나도 세심한 손질과 풍부한 색조, 그리고 비할 바 없는 조화로움으로 표현되어 있다."

<조아생 가스케의 초상>(위, 1896)과 <팔짱을 낀 남자>(아래, 1899경)는 면(面)의 왜곡을 보여 준다.

고갱, 모네, 앙리 '르두아니에(세관관리)' 루소 등의 그림에서는 활활 타오르는 듯한 녹음(綠陰)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그림들은 1870년대에 세잔과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탁 트인 풍경이나 거대한 하늘과 대조된다. <숲>(1895~1900).

 

"프로방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왔다네. ……아주 쾌적한 곳이군. 주위를 에워싼 산들이 쾌 높은 것 같아. 두 계곡ㅇ[ 둘러싸인 호수는 젊은 처녀들이 데생을 하기에 알맞은 곳이지. 정말 고요한 자연일세. 젊은 여자 여행가의 스케치 수첩을 들추면 금방 튀어나올 법한 그런 곳이라네."

세잔

조아생 가스케에게 보낸 편지

아느시, 1896년 7월

<아느시호>(1896)

 

"나는 심심풀이로 그림을 좀 그리고 있소. 별로 재미는 없소. 하지만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는 제법 그럴듯하다오. 산높이가 2,000m 정도 된다지만 우리 고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오."

세잔

에밀 솔라리에게 보낸 편지

아느시, 1896년 7월

샤토 누아르

"엑스와 르톨로네 마을의 중간쯤에 위치한 샤토 누아르(검은 성)는 19세기 후반에 건축되었다. 산림이 무성한 산기슭에 난 산길 바로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이 건축물은 니은 자 모양을 한 두 개 동(棟)으로 구성되어 있다. …… 그리고 각 동에는 일련의 기둥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그러나 기둥은 아무것도 떠받치지 않기 때문에, 어쩐지 폐허 같은 인상을 준다. 좁은 고딕풍 창문과 뾰족한 지붕도 을씨년스럽다. …… 두 동 사이에는 정원이 있는데 세잔의 방에서 잘 내려다보였다. …… 이 집의 이름은 어쩐지 어색하다. 집을 온통 둘러보아도 검은 색조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이 집이 성 같아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집은 근처의 비베뮈 석산에서 가져온 아름다운 노란 돌로 지어졌다. …… 세잔의 그림에서는 서쪽 동의 진노란색 정면이 커다란 빨간색 헛간 문에 강조되어 노랗게 빛나고 잇다. …… 노랑은 짙은 진녹색 녹음을 압도한다."

존 리월드

<세잔 : 만년작>

(전시회 카탈로그, 1977)

<샤토 누아르의 공원>(첫번째, 1898경), <샤토 누아르 정원에 있는 피스타치오 나무>(네번째, 1900경), <샤토 누아르>(두번째, 1894~1896), 다른 <샤토 누아르>(세번째, 1904~1906)의 부분 확대.

 

녹색과 황토색의 하모니

"색채감은 빛의 깊이를 변별해 주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추상작용이 일어나 화면을 채우기가 어렵고 또 공기와 물체 사이의 부드러운 접촉면(윤곽)을 정확하게 그려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의 이미지와 그림은 번번히 미완성으로 남습니다."

세잔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

1905년 10월 23일

웅장한 산

1896~1898년 사이에 제작된 <르톨로네 길에서 본 생트빅투아르산>(위, 아래는 부분 확대)은 탁 트인 풍경 속에 완벽한 통합을 이루어 내고 있다. 평원과 언덕들 사이에는 그 어떤 단절도 보이지 않으며 또 산과 평원도 부드럽게 이어져 있다. 하늘은 푸른색, 녹음은 녹색, 땅은 연한 황토색, 산은 연한 푸른색으로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색채가 구사되었다. 구불구불하고 불규칙한 윤곽선을 따라 색면이 단절 없이 펼쳐진다. 생트빅투아르산 작품 중 하나의 완성을 목격한 조아생 가스케는 이렇게 썼다. "캔버스는 서서히 어떤 균형감을 획득하고 있습니다. 사전에 충분히 생각해 둔 이미지가 온 사방에 퍼진 색면에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세잔은 신중하게 선택한 색을 가지고 물체 하나하나를 천천히 그려 나갔기 때문에 전체적인 풍경은 약간 진동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는 조금씩 조금씩, 날마다 날마다 이들 색가에 확실한 조화를 주어 착 가라앉은 것 같은 명석함과 정밀함으로 그들을 한데 연결합니다."

1904년 세잔은 에밀 베르나르의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대수욕도>(아래, 1900~1905)를 뒤에 놓고 사진을 찍었다. 부조 조각같은 구도를 취하는 이 수욕도는 거대한 수욕도의 일부분으로 여겨진다. 이 그림은 펜실베이니아 메리언에 있는 반스 재단 컬렉션에 수장된 수욕도 그림의 일부분이다.

여자들, 나무들, 그리고 하늘

"이 작품은 <대수욕도>(1900~1906)를 위한 밑그림이라기보다 별도의 독립 작품으로 시도된 듯하다. …… 이 미완성 그림에서는 인물들이 주된 관심사였던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캔버스에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점만으로도 미완성이라고 보아야 할 이 작품은, 구성 면에서가 아니라 채색 면에서 미완으로 보아야 한다. 슥슥 붓질을 한 이 그림은 청회색이 주조를 이룬 가운데, 땅, 나무, 하늘에는 약간의 녹청색이 사용되고 있다. …… 전체 구성에서 가장 짙은 부분은 중경(中景)의 진청색 삼각형인데. 그 주위에 모여든 누드 넷은 왼쪽과 오른쪽의 다른 누드들과 구분되어 있다. 이것은 세잔의 다른 수욕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구도이다. (그러나 수채화에서는 이런 구도를 볼 수 있다.) 바탕의 흰색이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은 양옆의 누드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중앙의 누드들은 땅바닥에 뭔가 신기한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모두 몸을 수그리고 있다.

존 리월드

<세잔 : 만년작>

(전시회 카탈로그, 1977)

대수욕도

"이 그림은 세잔의 작품 중 가장 크고 가장 형식적인 면을 보여 주기 때문에 그의 이상적 구성을 나타낸다고 전해져 왔다. …… 이 작품은 누드들이 나무와 강과 함께 정확한 삼각형을 이루고 있어 세잔 작품 중에서는 보기 드문 균형감을 갖추고 있다. …… 이 그림의 분위기는 낯설면서도 아름답다. 전체적으로 푸른 색조를 띠고 있는 풍경 속으로 하늘, 물, 녹음이 녹아드는 듯하며 그리하여 멋지게 그려진 누드들이 돋보이고 있다."

마이어 샤피로

<폴 세잔>(1988)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위, 아래는 부분 확대)은 1889~1890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풍부한 표현력을 보여 준다. 인체의 다른 부분에 비해 지나치게 긴 오른팔은 추상예술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세잔 같은 대가만이 인간의 강렬한 감정을 순수회화(그림에 그려진 내용이 아니라 선, 색, 형태 등으로 호소하는 그림 : 역주) 속에서 성공적으로 되살려낼 수 있는 것이다.(축쳐진 오른팔과 턱을 괸 왼팔을 대비시켜, 소년이 겪고 있는 고민의 갈등상을 드러내고 있고, 화면 뒤쪽의 보라색, 조끼의 빨간색, 소매의 흰색을 대비시켜 소년의 사색적 심리상태를 드러냈다는 뜻 : 역주)

<항해사>(위, 1902~1906)의 주인공은 세잔의 정원사 발리에이다. <앉은 사람>(아래, 1905~1906)에는 허깨비 같은 모습이 등장한다.

세잔은 자신이 느끼는 강렬한 감정을 하나의 조화로운 형태로 재구성하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직접 작업하는 자극을 필요로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감각을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그린 느낌은 늘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며 강렬한 서정주의를 뿜어대고 있는 것 같다."(그래서 사람들은 얼토당토않게 세잔의 시력이 나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가 만년에 그린 생트빅투아르 그림 속에서 산은 더 이상 언덕, 땅, 녹음 등과 어우러지는 파노라마의 일부분이 아니었다. 산은 이것들과는 별도로 떨어져 있는 하나의 덩어리였다. 그것은 분명 풍경의 한 부분이 아니었고 언덕, 나무, 집과 같은 차원에 놓인 물체가 아니었다. 산은 이미 다른 성질을 획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력하게 그어진 수평의 선이 산을 여타 풍경과 구분지어 놓고 있다(동세에 가득 찬 산의 모습이 세잔의 예술가적 의지에 억제되어 동세와 의지 사이에 절묘한 평형상태를 이루고 있다는 뜻 : 역주). 첫번째는 <레로브에서 바라본 생트빅투아르 산>(1904~1906)이다. 두번째부터 네번째까지는 생트빅투아르산을 그린 세 그림(1904~1906)이고, 다섯째는 레로브 언덕에서 이젤을 앞에 두고 서 있는 세잔을 화가 케 그자비에 루셀이 1906년에 찍은 사진이다.

<레로브에서 본 생트빅투아르산>(1902~1906)


최초의 현대적 화가

"세잔은 미술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대가이다. 그를 반 고흐나 폴 고갱에 견주는 일은 격에 맞지 않는다. 세잔의 업적을 생각하면 17세기의 거장 램브란트가 연상된다. <엠마오의 순례자들>을 그린 렘브란트처럼, 그는 주변적이고 부수적인 것은 깡그리 무시하고 지혜의 눈으로써 리얼리티의 심연에 뛰어들었다. 설혹 심오한 리얼리즘이 어느새 반투명한 정신적 상태로 뒤바뀌는 그 경지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세잔은 적어도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는 후배들을 위해 분명하면서도 멋진 방법론을 하나 남겨 놓았다. 그는 우리에게 우주의 약동하는 힘을 터득하라고 가르쳤다. 그는 생명이 없는 낯선 물체들이 서로에게 변화를 주는 그 미묘한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우리는 세잔에게 대상의 색깔을 바꾸는 것은 그 대상의 구조를 바꾸는 것이라는 획기적인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미술이 선과 색체로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색체로 자연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입증했다. 세잔에 대한 이해는 곧 입체파의 출현을 예견하는 것이다."

알베르 글레즈, 장 메칭거

《입체파 화가에 대하여》(1912)



1871년경의 세잔.

에밀 졸라.

졸라의 시골 별장. 샤토 드 메당.

21세기 초의 세잔(위)과 졸라(아래).

엑스에 있는 스튜디오. 작업에 몰두한 세잔을 방해할 만한 요소는 아무것도 없다.

1901년에 지은 레로브 스튜디오는 생트빅투아르의 산록에서 도보로 몇 분 안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카미유 피사로가 1874년에 그린 세잔 초상화(동판화).

야외작업을 나가는 피사로(1874경).

인상파 화가이며 세잔이 스승으로 받든 카미유 피사로(오른쪽 끝)의 퐁투아즈 집 정원에 앉아 있는 세잔(왼쪽 앞). 1877년 사진.

니콜라 푸생이 그린 <폴리페무스>(1649). 화면 속의 산이 풍경을 압도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등장인물들을 완전히 위축시키지는 않고 있다.

<목졸린 여자>(1870~1872경)는 1874년의 제1차 인상파 전시회 때 물의를 일으켰던 <현대판 올랭피아>(1873경)의 극적 구도를 취하고 있다.

"그는 덩치가 크고 잘생긴 남자였으며, 알맞게 곱슬거리는 짙은 갈색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었다. 약간 구붓한 매부리코와 크고 검은 두 눈은 루브르에 있는 아시리아 부조의 인물상을 닮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다. 몇 년 뒤에 만난 그는 정수리부터 대머리가 되었고, 수염과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는데 머리에는 얼마만큼 흰눈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눈은 예전처럼 반짝거렸다. 만년의 세잔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만년에 그를 만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퇴역군인 같아 보였다고 존했다.

조르주 리비에르

《스승 폴 세잔》(1923)

마티스가 1889년에 사들인 그림 <세 명의 목욕하는 여자>(1879~1882).

한때 고갱이 소유했던 정물화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 화가 오딜롱 르동과 에두아르 뷔야르, 평론가 앙드레 멜레리오,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 화가 모리스 드니, 폴 세뤼지에, 폴 엘리에 랑송, 케르자비에 루셀, 피에르 보나르, 그리고 드니의 아내, 드니가 1900년에 그린 <세잔에게 경의를>이라는 이 그림에서 그들은 세잔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다.

1906년의 세잔.

세잔의 아내 초상화를 스페인의 입체파 화가인 후앙 그리스가 1916년에 다시 그린 작품.

한때 모리스 드니가 소장했던 <수욕도>(1890~1894).

<오베르의 농가>(1879경).

에밀 베르나르가 1904년에 찍은 세잔의 사진.

<미디의 풍경>(1885경). "나는 내가 느낀 것을 표현하려 하며, 또한 그 느낌을 나의 개인적 미학을 통해 조직할 것입니다."

생트빅투아르산과 샤토누아르. 1904~19066년에 제작된 세잔의 그림이다.

사과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랑을 연상시킨다. <석고 큐피트가 있는 정물>(1895경).

생트빅투아르산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들 중 하나(1900~1902).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