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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13. 11:12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68  The Blue Rider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지은이 | 지빌레 엥겔스, 코르넬리아 트리슈베르거 / 옮긴이 | 홍진경

2007, 예경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19997

 

6650.8

아887ㅇ  4

 

ART SPECIAL 4

 

The Blue Rider |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사람들은 칸딘스키로부터 새로운 미술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할 것이다."

- 알프레트 쿠빈

 

이 책은 칸딘스키를 비롯한 청기사파 화가들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다루고 있다.

청기사파는 추상화로 가는 길을 닦아 20세기 현대 미술의 서막을 열었다.

이 책은 세기 전환기 '뮌헨의 몽마르트르' 슈바빙 거리에서 새로운 예술을 향해 고군분투한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화가들이 주인공이다. 칸딘스키와 그의 연인 가브리엘레 뮌터, 동물화가로 유명한 프란츠 마르크와 부인 마리아 프랑크, 아우구스트 마케, 알렉세이 야블렌스키와 부인 마리안네 베레프킨……또한 열정이 넘치는 예술가로서뿐만 아니라 인생과 사랑에서도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선구자적인 여성 화가들도 만날 수 있다.

 

칸딘스키와 청기사파

 

최초의 추상화를 그려 현대 미술의 서막을 열다!

1911년 뮌헨에서 칸딘스키를 비롯한 몇몇 화가들은 이전의 어떤 미술가도 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단체를 결성한다. 이들의 단체 이름이 청기사파이다. 이 화가들이 도달한 곳이, 바로 20세기 현대 미술을 정의하는 추상화였다. 칸딘스키가 주도한 청기사파는 3년이라는 짧은 기간 유지되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아니 영원히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추상화와 현대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의 길'을 열어놓고……

 

지은이 | 지빌레 엥겔스는 기자로 활동하면서 광고 에이전시를 운영하고 있고, 코르넬리아 트리슈베르거는 작가이자 기자로 활동 중이다. 두 사람 모두 현재 뮌헨에 살고 있다.

 

옮긴이 | 홍진경은 홍익대학교 동양학과를 졸업하고, 쾰른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 고전고고학, 교육학 전공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쓴 책으로는 《베로니카의 수건》, 《인간의 얼굴 그림으로 읽기》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도상학과 도상해석학》(공역), 《미술사학의 이해》, 《당신의 미술관 1, 2》, 《집들은 어떻게 하늘 높이 올라갔나》 등이 있다. 홍익대학교 디자인 미술원(서초동)과 상명대학교 미술대학원 무대디자인과에 출강중이다.

 

1990

세계사

>> 빌헬름 황제, 베를린에서 통치함.

>> 파리에서 세계만국박람회 개최.

>> 미술계에서 유켄트슈틸 유행.

>> 독일에서 여성들의 대학 입학이 허용됨.

 

청기사파

>> 청기사파 화가들이 뮌헨의 예술가 부락인 슈바빙에 모여들기 시작함.

 

1909

세계사

>> 피카소 파리에서 야수파와 어울리며 입체주의라는 새로운 미술의 길을 모색함.

>> 이사도라 덩컨 자유로운 무용형식을 펼침.

 

청기사파

>> 칸딘스키, 뮌터, 베레프킨, 야블렌스키가 청기사파의 전신인 뮌헨 신미술가협회 결성함.

 

1910

세계사

>> 독일의 전위 미술가단체 '다리파' 베를린에서 신분리파전에 참가함.

>> 전기세탁기, 여성용 나일론 스타킹 발명됨.

 

청기사파

>> 마르크가 뮌헨 신미술가협회에 가입함.

>> 마케는 뮌헨에서 마르크를 만나고 그의 동료화가들과도 친해짐.

>> 칸딘스키는 미술사에서 최초의 추상화로 알려진 <구성 2> 제작함.

 

1911

세계사

>> 3월 8일 최초의 세계여성회의 개최.

>> 여성운동은 여성의 참정권 확보에 주력함.

>> 마리 퀴리, 노벨화학상 수상.

>> 빈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켄트슈틸이 코코슈카와 에곤 실레가 주도한 표현주의에 밀려 쇠퇴함.

 

청기사파

>> 뮌헨 신미술가협회에 내분 일어남.

>> 뮌터, 마르크, 칸딘스키가 탈퇴함.

>> 12월 18일 제1회 청기사 전시회 개최됨.

 

1912

세계사

>> '타이타닉호' 미국으로 항해 중 빙산에 부딪혀 좌초함.

>> 말레비치 등 러시아 전위 미술가들이 단체를 결성하고 작품을 공개함. 일례로 1912년 '당나귀 꼬리 전시회' 등.

 

청기사파

>> 칸딘스키의 미술이론서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해>와 <청기사 연감> 발간.

>> 제2회 청기사파 전시회 개최.

 

1914

세계사

>> 제1차 세계대전 발발.

>> 다다이즘 시작됨.

>> 다다에서 시작된 초현실주의가 살바도르 달리와 만 레이 등에게 영향을 줌.

>> 찰리 채플린은 커다란 구두, 헐렁한 바지, 꼭 쬐는 조끼, 작은 중절모와 콧수염 등으로 분장한 '떠돌이' 캐릭터로 세계적인 배우가 됨.

 

청기사파

>>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청기사파 해체됨.

>> 칸딘스키는 모스크바로 돌아가고, 야블렌스키와 베레프킨은 스위스로 이주하고, 마케와 마르크는 군대에 징집됨. 마케는 1914년, 마르크는 1916년 전사함.

 

1933

세계사

>> 나치(국가사회주의) 독일의 현대 미술가들을 박해함.

>>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제국의 총리에 취임함.

>> 그로피우스, 클레, 칸딘스키가 교수로 있던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폐교됨.

>> 수많은 미술가와 지식인들이 망명길에 오름.

 

청기사파

>> 청기사파 그림들이 나치 정권에 의해 '퇴폐 미술'로 낙인찍힘.

 

1938-45

세계사

>> 1939년 초-1945년 말 제2차 세계대전.

>> 1938년 나치 유대인 대탄압이 시작됨. 유대인의 예배당과 상점들이 약탈됨.

>> 1943년 험프리 보거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출현한 <카사블랑카> 개봉.

>> 피카소, 미로, 달리 등의 스페인 미술가들이 프랑코의 파시즘 정권에 항의하는 작품 제작함.

 

청시가파

>> 칸딘스키는 1944년 파리에서, 베레프킨은 1938년 아스코나에서, 야블렌스키는 1941년 비스바덴에서 세상을 떠남.

>> 뮌터는 청기사파 작품들을 무르나우에 있는 자신의 집 창고에 숨김.

 

1949

세계사

>>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 서독과 동독의 분단. NATO 설립으로 냉전시대가 시작됨.

>> 뉴욕에서 데 쿠닝, 잭슨 폴록 등 추상 화가들이 '성난 작가들' 결성.

 

청기사파

>> 뮌헨에서 제1회 청기사파 회고전 열림.

 

1957

세계사

>> 엘비스 프레슬리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함.

>> 소비에트 연방국은 최초의 위성 '스푸트닉'을 발사함.

>> 유럽연합(EU)의 전신인 EC(유럽공동체)가 결성됨.

>> 피카소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헨리 무어가 1950년대 조각미술계를 대표함.

 

청기사파

>> 뮌터는 보관하던 청기사파 작품들을 뮌헨의 렌바흐하우스에 기증함.

>> 청기사파 컬렉션은 중요한 후원자 베른하르트 쾰러에 의해 보강됨.

 

1962

세계사

>> 팝 아트, 미술계의 주류로 떠오름.

>> 마틴 루터 킹이 미국에서 흑인의 인권운동 시작함.

>> 노벨의학상이 DNA 연구자에게 돌아감.

 

청기사파

>> 뮌헨에서 청기사파 화가 중 뮌터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남.

 

차례

 

그때 그 시절

'슈바빙의 보헤미안'

 

최고가 되기까지

'K'씨의 엄청난 능력

 

예술

추상화의 탄생

 

예술가들

친구이자 적

 

사랑

"마르크는 항상 나와만 춤을 추었어……"

 

지금도 우리 곁에

모두 한 지붕 아래에

 

그때 그 시절

 

"나는 뭔가 하고 싶은데, 그게 뭘까?

나는 뭔가를 동경하는데,

무엇에 대한 것일까?"

 

회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 :

러시아 태생의 미술가 바실리 칸딘스키는 자전거 마니아이기도 했다.

 

세기의 전환기 뮌헨에서는

 

…전통적 방식이건 새로운 방식이건 가리지 않고 창조적 영감을 찾아 다양한 미술활동과 작업들이 나타났다. 독일 바이에른 주의 수도 뮌헨은 젊은이들에게 파리처럼 매력 넘치는 예술의 도시였다. 이 거리에서 '청기사파'의 화가들도 활동하고 있었다.

가브리엘레 뮌터.

 

'아르 누보'

뮌헨에서는 프란츠 폰 렌바흐의 고전주의 역사화에 반대하는 흐름들이 나타났다. 이는 베를린과 빈보다 앞선 행보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칸딘스키와 친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1902년 바실리 칸딘스키가 자신의 팔랑크스 미술학교 학생들과 함께 있는 모습(앞에서 오른쪽). 이 학생들 중에 이후 칸딘스키의 연인이자 인생의 동반자가 된 가브리엘레 뮌터(가운데)가 앉아 있다.

1901년 칸딘스키가 제1회 팔랑크스 전시회를 위해 제작한 포스터로, 유켄트슈틸과 상장주의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로부터 친절한 말 한마디 못 듣는다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나 무거워졌다."

- 바실리 칸딘스키

당대의 명망 높은 화가 프란츠 폰 렌바흐가 마지막으로 그린 자화상. 그의 저택이었던 렌바흐하우스는 오늘날 '청기사파'의 중요 작품들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되어 있다.

현대미술의 시발점이 된 인상주의 : 폴 세잔의 <연못 위의 다리>, 1890년.

유켄트슈틸의 '교황' 프란츠 폰 슈투크가 거주하던 빌라 슈투크의 음악감상실.

프란츠 폰 슈투크의 <천국의 수호자>, 1889년.

1902년 여름 코헬로 야외수업을 가던 중의 칸딘스키(왼쪽)와 팔랑크스 미술학교 학생들.

생 클루 공원 | 칸딘스키가 1906년 가브리엘레 뮌터와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그린 그림이다. 후기인상주의 기법을 사용한 작품으로는 가장 나중에 제작되었다. 이 작품에서 칸딘스키는 대상보다는 색채의 본성을 표현하려 했다. "인상주의자들이 말하는 빛과 대기의 문제는 내 관심거리가 아니다……내게 중요한 것은 신인상주의 기법이다. 그들은 대기를 놔두고 색채의 효과를 강조한다."

생 클루 공원의 오솔길 | 같은 시기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그림이다. 두 사람은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근교의 이 공원을 즐겨 찾았다. 뮌터의 그림은 여전히 대상의 재현이라는 본질에 충실하다. 반면 칸딘스키의 가을빛이 완연한 오솔길에는 나무와 땅의 형체만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다.

도시 앞에서 | 칸딘스키는 "뮌헨의 대기가 만들어내는 강렬하고 풍부한 색채"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도시의 풍경을 자주 그렸는데, 그중 하나가 1908년에 그린 이 그림이다.

말에 탄 연인들 | 칸딘스키의 초기작은 동화를 떠올리게 하는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유년 시절에 들었던 러시아 전래동화와 중세의 기사 이야기나, 러시아 동화의 삽화나 유켄트슈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1907년 제작된 이 그림은 특히나 유명하다.

 

최고가 되기까지

 

"자랑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때때로

제시한 새롭고, 아름다운 길

현대 회화의 발전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바실리 칸딘스키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화가 친구들을 추상의 세계로 이끈다.

 

'사기꾼' 협회

 

청기사파의 전신은 뮌헨 신미술가협회이다. 칸딘스키와 동료들은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해 뮌헨에서 전위적인 미술을 선보이려 했다. 하지만 관객과 언론의 매몰찬 반응만이 돌아왔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기꾼'이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칸딘스키, <구성 5>, 1910년.

칸딘스키, <구성 2>.

칸딘스키, '청기사파전' 도록의 제호, 1911년 12월.

1911년 칸딘스키가 《청기사 연감》의 표지를 위해 그린 11점 수채화 중의 하나.

1903년 칸딘스키가 그린 <청기사>.

베른하르트 쾰러는 청기사 미술가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후원자였다. 쾰러의 조카와 마케는 결혼한 사이였다. 아우구스트 마케가 그린 쾰러의 초상화.

칸딘스키가 자신의 책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초판을 위해 디자인한 표지.

1911년 프란츠 마르크가 그린 <푸른 말>은 청기사파의 상징으로 유명하다. 이 그림은 현재 뮌헨의 렌바흐하우스에 소장되어 있다.

《청기사 연감》을 위해 바실리 칸딘스키가 1912년 제작한 목판화.

아우구스트 마케는 이 그림 <청기사에 대한 조롱>을 통해 '대부' 칸딘스키와 결별을 선언한다.

나무들 | 청기사파는 배타적인 미술단체가 아니었다. 피카소나 들로네 등 여러 작가들이 이 단체의 전시회에 초대되었다. 블라디미르 부를리우크도 1911년에 그린 이 그림을 제1회 청기사파 전시회에 내놓았다. 칸딘스키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이 아방가르드 화가와 아즈베의 화실에서 작업하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숲속의 노루 | 프란츠 마르크는 이 그림에 '숲속의 노루'(1911)라는 제목을 붙였다. 동물은 마르크에게 언제나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영적인 순수함과 구원을 상징하는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예술


"예술에서 나는 교황처럼

절대 무오류성을 지니며

황제처럼

독재적이다."


열정적인 정원사 칸딘스키.

높은 자의식과 확신을 가진 예술가 칸딘스키는

홀로 새로운 미술을 향한 길을 만들어갔다.


'대부' 칸딘스키!


지적이고 명민한 이 러시아 화가가 아니었다면, 청기사파의 결성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칸딘스키는 이 단체를 창립한 화가일 뿐만 아니라 미술이론의 기초를 세운 뛰어난 이론가이기도 했다. 그는 비구상 즉, 추상회화의 근거를 미술이론으로 정립했다. 미술이론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20세기 초 칸딘스키는 미술이론가로서도 뛰어난 활약을 했던 것이다.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

클로드 모네의 <해질 무렵의 건초더미>, 1884년경.

여러 계열의 청색 : 칸딘스키가 그린 <무르나우의 교회>(1910)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칸딘스키는 1911년 그린 이 그림을 <즉흥 19a>이라 불렀다.

1912년 아우구스트 마케가 그린 <동물원 1>. 동물은 항상 마케의 관심거리였으므로, 이후 그의 수많은 그림에 등장한다.

프란츠 마르크는 1912년에 그린 이 그림을 <작은 황색 말>이라 불렀다.

가브리엘레 뮌터, <교회가 있는 풍경>, 1910년.

폭풍 | 마케는 제1회 청기사 전시회에 3점을 출품하는데, 이 그림(1911)도 그중 하나다.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마케는 청기사파를 신랄하게 비난하고는 동료들과 거리를 두었다. 제2회 전시회에도 참가하지만 이후 청기사파에서 완전히 탈퇴한다.

빗속에서 | 프란츠 마르크는 1912년 이탈리아 미래주의를 연상케 하는 이 그림을 선보이는데, 당시 많이 그려진 '순수한 동물화'와는 전혀 다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그려진 것은 프란츠 마르크, 부인 마리아 그리고 그들의 애완견 루시이다.

 

예술가들

 

"무능력자들……

화려한 색채를 걸친 아둔한 자들……

촌스런 옷을 입은 자들……

촌스런 옷을 입은 자들……

악질적인 촌뜨기들……

타고난 저능아들……"

 

청기사파 미술가들에 대해 당시의 한 비평가가 내뱉은 말이다. 그림 왼쪽부터 마리아 프랑크, 프란츠 마르크, 베른하르트 쾰러, 친구사이였던 하인리히 캄펜동크와 코마스 폰 하르트만 그리고 바실리 칸딘스키.

 

친구이자 적

 

 

칸딘스키가 이끌어간 청기사파는 사실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진 작가들의 모임이었다. 이 단체의 회원들은 언제나 서로에게 호의적으로 대하거나, 서로를 존중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직접 들어보자.

 


 

 

 

아들 발터와 함께 한 아우구스트와 엘리자베트 마케 부부, 1912년, 본.

 

1905년 칸딘스키가 그린 인생의 동반자 가브리엘레 뮌터의 초상화.

 

야블렌스키와 그의 아들 안드레아스, 190년.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초상화.

1906년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초상화(위) 그리고 1871/72년 오데사에서 지낸 어린 시절의 모습(아래).

 

"벌 받을 생각이 아니라면 다른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서서는 안 된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큰 짐이 될 수 잇으며, 때로 역겨운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 바실리 칸딘스키

1908년 칸딘스키가 그린 <바이에른의 가을>.

가브리엘레 뮌터가 무르나우에서 구입한 집. 이 집은 칸딘스키 때문에 '러시아인의 집'이라고 불렸다.

바실리 칸딘스키, <구성 8>, 1923년.

바실리 칸딘스키, 1938년 파리의 아틀리에에서.

뮌헨 - 이자르 강 | 안톤 아츠베와 프란츠 폰 슈투크로부터 아카데미 미술교육을 받았지만 칸딘스키는 야외에서의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자연에서 받은 인상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 그림은 1907년까지 야외에서 그린 그림 중 하나로, 후기인상주의의 영향이 엿보인다.

칼뮌츠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가브리엘레 뮌터 | 칸딘스키는 1903년 이 그림에 사용된 기법을 '순간 묘사'라고 명명했다. 팔랑크스 미술학교의 제자였던 엘라 뮌터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마을 나프탈의 야외 수업에 참여했다.

인상 3 | 1911년 칸딘스키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공연을 보고 온 직후 그린 그림이다. 칸딘스키는 이 그림의 제목을 '인상', 즉 외적인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인상이라고 붙였다. 지배적인 효과는 '노란 소리', 즉 소리의 인상에 대한 선언이다.

낭만적인 풍경 | 이 그림에 대해 칸딘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10년 <낭만적인 풍경>을 그렸다. 이 제목은 고전적인 낭만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미래의 낭만성은 실제 매우 깊고,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낭만성은 불꽃을 일으키며 타들어가는 한 조각의 얼음덩어리이다. 사람들이 얼음덩어리의 불꽃은 못 보고 얼음덩어리만 느낀다면 불행해질 것이다."

붉은 반점 2 |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칸딘스키는 미술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전쟁 직후에 제작된 이 그림은 칸딘스키가 새로운 시기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칸딘스키는 러시아의 말레비치나 타틀린의 구축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칸딘스키는 기하학적 특성에 대해, "삼각형의 한 꼭짓점과 원의 만남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신과 아담의 손가락 접촉만큼이나 심오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구성 10 | 칸딘스키가 생을 마감하기 직전인 1939년에 제작한 그림이다. 이 해 칸딘스키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독일에서는 이미 퇴폐 미술가로 낙인찍힘.) 1939년은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이기도 하다. 이 무렵 칸딘스키의 작품은 규모가 줄어드는데, 이를 꼭 물자 부족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1909년 그린 <이젤 앞에서의 자화상>.

가브리엘레 뮌터, <어부의 집>, 1908년 전성기 시절의 작품.

 

"누군가 내 그림을 감상한다면 그 속에서 선을 그리는 화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가브리엘레 뮌터


1897년 자전거를 타는 엘라 뮌터의 모습. 당시 어린 소녀가 자전거를 타는 것은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가브리엘레 뮌터, <푸른색 위의 사과들>, 1908/09년.

화구를 들고 있는 가브리엘레 뮌터, 1902년 코헬에서.

1918년 코펜하겐 전시회를 위해 가브리엘레 뮌터가 제작한 포스터.

1949년 뮌헨의 미술관에서 개최된 청기사파 회고전에 참석한 뮌터와 아이히너.

흰색의 벽이 있는 풍경 | 1910년에 그린 '전형적인' 가브리엘레의 작품. 그녀는 자연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추상화했다. 대상이 있는 주제들, 말하자면 풍경, 집, 벽면 등은 그대로 나타난다. 하지만 검은색 윤곽선이 둘러지고 그 안은 색면으로 채워졌다.

눈이 온 광장 1 | 칸딘스키가 뮌터의 그림에 대해 "뮌터, 인적이 드문 곳에서 소리를 치거나 갑자기 생과 죽은 것에 대한 재미있는 소리들이 들려올 것 같은 어두운 소박함의 세상"이라고 표현한 지 1년 후에 제작된 그림이다.

노란 나무가 있는 가을 풍경 | 무르나우 시절 가브리엘레의 그림은 후기인상주의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시작한다. 형태는 극단적으로 단순화되고, 색채 대비는 더욱 강렬해졌다. 이 그림은 1909년 제작되었다.

병자(병病者) | 1917년 가브리엘레가 스톡홀름에서 하염없이 칸딘스키를 기다릴 때 그린 그림이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당시 그녀의 감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건조한 색채가 당시 그녀의 절박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새들의 아침 | 1930년대 초 무르나우로 돌아온 가브리엘레는 다시 그림에 몰두했다. 이 시기 그녀는 자신의 표현주의적인 뿌리에 골몰한다. 이 그림은 1934년 제작된 초상화로, 과거의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프란츠 마르크의 세 모습. 1913년 진델스도르프와 뮌헨에서의 모습(위, 가운데), 그리고 1910년 아우구스트 마케가 그린 스케치(아래).

<유수프 왕자의 레몬색 말과 불꽃색 황소>는 1913년 마르크가 친구인 여류시인 엘제 라즈커 실러에게 보낸 엽서 그림이다.


"정신적인 것에 있어서는 수치가 아니라 관념의 강도가 승리를 결정짓는다."

-프란츠 마르크

마르크는 1908-10년 사이에 수많은 말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곧 찢어버렸다. <렝그리스의 거대한 말 1>은 후에 찢어진 부분들을 이어붙여 복원한 것이다.

마르크는 1907년 <바닷가의 기사>를 첫 번째 아내 마리쉬누어와 함께 떠난 오스트제 여행에서 그렸다.

1910년 아우구스트 마케가 그린 프란츠 마르크의 모습.

1913년 <푸른 말의 탑>. 원작은 1945년 사라졌다.

노란 소 | 마르크는 다음과 같은 색채 상징이론을 주장했다. "푸른색은 건조하고, 영적이고, 남성적인 원칙에 해당한다. 노란색은 부드럽고, 밝고, 감각적이고, 여성적인 원칙에 해당한다. 붉은색은 잔인하고, 무거운 재료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이 이론에 상당히 합당해 보인다. 1911년 그린 이 그림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거대한 푸른 말들 | 1911년 프란츠 마르크가 그린 그림이다. '푸른 말'이라는 모티브는 오늘날까지 청기사파와 동일어로 여겨지고 있다.

푸른 고양이와 노란 고양이 | "나는 동물화라고 명명하고 싶을 만큼 미술을 동물화 시키는 것보다 더 행복한 방식은 볼 수 없다." 마르크는 1912년 일련의 동물 그림을 제작하는데, 이 그림도 그중 하나이다.

호랑이 | 프란츠 마르크가 제작한 위대한 작품 중의 하나(1912)이다. 이 그림에는 추상화 과정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아우구스트 마케.

1913년 마케가 그린 <햇살이 드는 길>.

 

"칸딘스키의 초기 작품은 내게는 좀 공허하게 느껴진다.……

-아우구스트 마케

아직 학생 시절이던 1906년에 그린 마케의 <자화상>.

마케와 부인 엘리자베트, 엘리자베트의 삼촌 베른하르트 쾰러. 쾰러는 청기사파의 막강한 후원자였다.

마케의 <모자를 쓴 화가의 부인>은 약혼녀 엘리자베트를 그린 것이다. 결혼하기 바로 직전에 그렸다.

말을 탄 인디안 | 마케가 청기사파의 관념에서 영감을 얻어 1911년 그린 그림이다. 이 무렵 마케는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문화의 미술에 푹 빠져 있었다.

나무 아래서 햇빛을 받고 있는 아이들 | 마케는 청기사파를 탈퇴한 직후인 1913년에 이 작품을 그렸다. 당시 그는 본에서 젊은 미술가들을 모아 오늘날 '라인 인상주의'라 알려진 운동을 주도했다. 이 미술가들은 마케와 마찬가지로 대상을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1912년의 <자화상>.

1887년 젊은 중위 때의 야블렌스키의 모습.

야블렌스키, <푸른 찻잔과 사과가 있는 정물>, 1904년.

 

"야블렌스키의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다. 그는 늘 그렇듯이 포동포동한 얼굴로 칸딘스키의 미술이론을 엿듣는 모습이었다."

- 가브리엘레 뮌터, 자신의 작품 <경청(야블렌스키의 초상화)>에 대해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마리안네 베레프킨, 안드레아스 야블렌스키, 가브리엘레 뮌터 / 무르나우, 1908년.

야블렌스키, <오버스도르프 풍경>, 1912년.

가브리엘레 뮌터, <경청(야블렌스키의 초상화)>, 1909년.

무용가 알렉산더 사하로프의 초상 | 1909년 야블렌스키는 30분간에 걸친 친구들의 설명을 듣고 이 그림을 그렸다. 사하로프는 아직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그림을 격하게 뺏어 들었다. 겁이 난 야블렌스키는 언제나처럼 다시 잘 그리겠다고 말했다.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세 모습. 자화상(1910년)과 두 점의 사진.

마리안네 베레프킨, <무용가 사하로프>, 1909년.

 

"나 스스로의 고문을 막을 수 없다면야, 내가 정말 진정한 미술가가 될 수는 있을까."

-마리안네 베레프킨

베레프킨, <붉은 나무>, 1910년. 이 작품은 그녀가 일본 목판화에 매료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마리안네 베레프킨. 1930년경 아스코나의 아틀리에에서.

쌍둥이 |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1909년 작품. 그녀를 매혹시킨 노르웨이 출신의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의 영향이 엿보인다.

비극적 분위기 |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1910년 작품. 야블렌스키와의 비극적인 관계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사랑


"오직 당신을 통해서

나는 진정한 위대함

이를 수가 있소."


바실리 칸딘스키가 연인이자 뮤즈, 그리고 동료였던 가브리엘레 뮌터에게 쓴 글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서


바실리 칸딘스키와 가브리엘레 뮌터, 마리안네 베레프킨과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프란츠 마르크와 마리아 프랑크, 이 세 미술가 커플은 당시의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길든 짧든) '부적절한' 동거를 하고 있었다. 또한 남자든 여자든 모두 열정이 넘치는 예술가로서 예술에서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새로운 길을 찾아갔다.

베레프킨과 야블렌스키, 젊은 시절 러시아의 아틀리에에서.

1910년 가브리엘레 뮌터가 연인 칸딘스키와 공동으로 그린 <조각배 소풍>.

가브리엘레 뮌터, <풍경화를 그리는 칸딘스키>, 1903년 초.

첫 번째 부인 안나, 어머니와 차를 마시는 칸딘스키.

1930년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린 <러시아인의 집>.

1913년 자신의 그림 <작은 기쁨> 앞에 선 칸딘스키.

칸딘스키와 결혼한 니나, 1921년.

가브리엘레 뮌터, <차가 놓인 탁자 앞의 칸딘스키>, 1910년.

애견 루시와 함께 있는 프란츠 마르크와 마리아 프랑크, 1911년 렝그리스에서.

프란츠 마르크, <주홍색 누드>, 1910년, 모델은 부인인 마리아 프랑크.

프란츠 마르크, <고양이와 함께 있는 누드>, 1910년, 모델은 마리아 프랑크.

프란츠 마르크, <고양이와 함께 있는 여인 2>, 1912년.

프란츠 마르크와 그의 반려자 마리아 프랑크, 1908년 렝그리스에서.

아우구스트 마케의 스케치, <본의 아틀리에에서 마리아와 프란츠 마르크>, 1912년.

가브리엘레 뮌터, <야블렌스키와 베레프킨>, 1909년, 야외스케치 여행 중의 장면.

일랴 레핀, <붕대를 맨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초상>, 1888년.

야블렌스키는 1900년 15살의 어린 가정부 헬레네의 초상을 그린다. 헬레네는 2년 후 야블렌스키의 아들 안드레아스를 낳았다.

야블렌스키, <마리안네 베레프킨의 초상>, 1905년.

야블렌스키와 부인 헬레네, 1929년 비스바덴에서.

 

지금도 우리 곁에는

 

"나는 단지

작품들한데 모아

놓아야 했다."

 

청기사파와 이 단체의 보물 같은 그림들을 지킨 수호천사 가브리엘레 뮌터와 그녀의 반려자 요하네스 아이히너, 1955년 뮌헨에서 열린 '추상적 즉흥' 전시회의 개막식에서.

 

청기사파의 발자취

 

한 시대의 유산인 뮌헨의 미술가 그룹과 세계적으로 이름난 그들의 작품들, 시대를 앞서간 여성 미술가들과 남성 미술가들에 대한 회고전. 그 들의 창조 정신은 오늘날 미술관과 기념관, 그리고 예술가의 이름을 딴 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뮌터의 그림 <러사아인의 집 실내>(1909)에 따라 새로 복원된 아틀리에.

1910년 칸딘스키가 직접 칠한 계단의 난간도 복원되었다.

프란츠 마르크 미술관.

비스바덴 미술관.

가브리엘레 뮌터 상.

청기사파 컬렉션의 고향인 뮌헨의 렌바흐하우스.

무르나우의 집. 의자가 놓인 벽면에 가브리엘레는 중요한 청기사파 그림들을 보관했다.

가브리엘레 뮌터, 1957년 1월.

 

작품의 변천 과정

청기사파 화가 개개인의 변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바실리 칸딘스키

1907

1908

1910

1939

 

>> "그는 아시아인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저급하게 보이지만, 무척 재미있으며, 그리고 완벽히 비밀스러운 그림을 그린다."

(마케가 칸딘스키에 대해)

 

가브리엘레 뮌터

1903

1908/1909

1910

1918

1934

 

>> "뮌터의 그림은 정말 독특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소박함을 지니고 잇다. 절대적인 자연성, 건조하며 낮은 채도……그것이 그녀 그림의 본질이다. 바로 그 안에 선함과 사랑이 존재한다. 나는 그녀의 그림에서 많은 즐거움을 느낀다."

(쇤베르크가 뮌터에 대해)

 

프란츠 마르크

1908

1910

1911

1911

1912

 

>> "다른 화가들보다 젊은 이 화가는 동물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들판과 숲 속에 묻혀드는 소나 노루 등을 그려 마르크 자신의 세계관을 내보이고 있다."

(칸딘스키가 마르크에 대해)

 

아우구스트 마케

1906

1911

1912

1912

1913


>> "그것은 일상적이며 우연한 삶의 진정한 시(詩)이자 비전들이었다. 그는 끊이지 않는 기쁨과 정열로 자신의 삶을 작품 속에 녹여냈다."

(엘리자베트가 남편 마케에 대해)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1900

1904

1909

1912

1936


>> "나는 색채를 통해 나타낼 수 있는 모든 형태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다."

(야블랜스키)


마리안네 베레프킨

1909

1910

1910

1910


>> "자신이 느낀 인상을 색채의 멜로디 속으로 녹여낼 수 있다면, 그는 비전의 대가이다. 자신의 생각을 형상화하기 위해 자신이 느낀 가시적인 인상을 색채의 멜로디라는 단순한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그는 그 자신의 대가이다. 사람들은 이 같은 기준으로 미술가들을 판단해야 한다."

(베레프킨)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