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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16. 13:37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69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

 

권기봉 지음

2008, 알마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20320

 

911.6

권18ㅅ

 

서울은 알면 알수록 놀라운 사실을 만나게 되는 요술경 같았다. 눈에 들어온 것은 촌스러운 건물이었지만, 서울시의회 청사에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지나치던 보신각과 청계천이었지만, 그 안에는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진실이 숨어 있었다. '다이내믹 코리아'의 수도답게 서울의 변화 속도는 따라가기 벅찰 정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의 기적을 대변했던 청계고가도, 2열종대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던 삼일아파트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우리가 밥벌이의 고단함에 치여 허우적대는 사이 축적된 삶의 편린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여기 그런 게 있었어요?

 

우리가 알던 것과는 다르거나 숨겨져 있는

또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의미 · 장소 · 문화 · 일상을 재발견하다.

 

일상의 재발견  일상의 공간이기에 그저 무심하게 지나치는 공간이 겪어낸 역사적 사건을 떠올린다.

 ● 이순신이 세종로를 접수한 까닭은 무엇일까? ● 해방과 함께 태어나 전쟁과 함께 자란 용산동 해방촌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함께 평화시장을 가다 ● 남산에 오르면 친일미술가의 손으로 빚은 독립운동가의 동상을 볼 수 있다...


문화의 재발견  우리 주변의 장소와 건물이 가진 문화를 탐색한다.

단성사에 가면 100년 한국 영화의 역사를 볼 수 있다 ● 조만간 기억 속으로 사라질 세운상가는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빌딩이었다 ● 무참히 헐려버린 우이동 육당 최남선 고택을 찾아가다 ● 서울 최초의 커피숍 손탁호텔이 있던 자리를 찾아 정동을 걷다...


의미의 재발견  잘 알려진 곳이지만 이면에 있는 역사적인 의미를 재조명한다.

● 해방 이후 서대문 형무소의 역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 '사대의 상징'을 헐고 '일제로의 종속'을 기념해 독립문을 세우다 ● '친일파 항일' '남과 북'이 불편한 동거 중인 국립현충원은 너무 시끄럽다 ● '기록'이 아닌 '기억'에 의지해야 하는 현실, 충무로 2가 100번지 한미호텔은 어디에?...


장소의 재발견  지나간 이야기를 숨긴 채 다른 모습으로 변해버린 장소를 찾아가 그때를 생각한다.

● 모든 집은 와우식으로! 날림공사의 원조 와우아파트가 무너지다 ● 유스호스텔로 변해 버린 옛 안기부 건물에서 하룻밤 묵어볼까? ● 남산 중턱에 있던 조선신궁은 서울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 리라초등학교 뒤에 가면 '군인의 신' 노기를 기리던 신사가 있다...


지은이 권기봉은 월악산국립공원에서 자란 산골소년,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에 입학하면서 올라온 서울은 '원더랜드' 그 자체였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공간이 궁금해 무작정 길을 나섰는데, 사람이 보이고 역사가 읽히고 그 배경이 되는 건물과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재발견한 메트로폴리스 서울에 대한 글쓰기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워낙 호기심이 많고, 여행 다니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알고 싶은 것도 많은 그는 대학 시절부터 학보사 기자,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를 거쳐, 2005년 말에는 SBS 기자까지 되어버렸다. 적성과 딱 맞아떨어지는 기자 일을 하면서, '2002년 올해의 시민기자상' '2006년 SBS 특종상' 등을 타며 "오늘의 사건사고"를 취재 중이다. 사회부 기자로 살다 보니 그 좋아하는 여행도 쉽지 않다. 그래도 1년에 두세 번은 나름대로 긴 여행을 떠난다는 생각으로 다음 여행지를 구상하는 재미에 하루 피로를 잊는다. 서른 즈음에 와 있는 그는 요즘 제주도나 오키나와 같은 변방의 역사, 스포츠와 민족주의의 상관관계 등에 관심이 많다. 지금 이 순간을 유쾌하고 재미있게 살자는 삶의 자세로 오늘도 호기심 천국, 세상 속을 분주하게 걷고 있다.


차례


산책을 시작하며


1부 일상의 재발견


이순신 장군이 세종로를 접수한 까닭

세종로 '이순신 동상'을 찾아


청계고가는 갔어도 화두는 여전하다

지금은 사라진 '청계고가'를 걸으며


어머니가 가발공장에 취직하던 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과 '평화시장'을 찾아


해방과 함께 태어나 전쟁과 함께 자라다

용산동 2가 '해방촌'을 찾아


'친일미술가'의 손으로 '독립운동가'의 동상을 빚다

남산공원 '김구와 안중근 동상'을 찾아


해방 60년 만에 닻 올리는 친일 역사 청산

'반민특위'가 있던 국민은행 명동지점을 찾아


침략과 수탈에서 평화 교류의 철도로

'서울역'을 찾아


2부 문화의 재발견


100년 한국 영화와 함께한 산증인

종로 3가 '단성사'를 찾아


실패한 조국 근대화의 상징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세운상가' 유람기


지금 이 순간에도 무참히 헐리고 있다

우이동 '육당 최남선 고택'을 찾아


외세를 이용해 외세를 막으려 하다

정동 '손탁호텔'터를 찾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장경근을 떠올리다

정동 '옛 대법원'을 찾아


'만들어진 전통' 제야의 종

종로 '보신각'을 찾아


3부 의미의 재발견


나머지 절반의 역사를 생각한다

현저동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


'사대의 상징'을 헐고 들어선 '일제로의 종속'

현저동 941번지 '독립문'을 찾아


'망자'가 아닌 '산자'를 위한 공간

논란이 끊이지 않는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철저히 유린된 제국의 상징

소공동 '환구단'을 찾아


김구만 남고 임시정부는 잊혀지다

평동 '경교장'을 찾아


'기록'이 아닌 '기억'에 의지해야 하는 현실

충무로 2가 100번지 '한미호텔'을 찾아


4부 장소의 재발견


모든 집은 와우식으로!

날림공사의 원조 '와우아파트'를 찾아


과거 청산 없는 화해란 있을 수 없다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과 함께 남산 '옛 안기부'를 찾아


진정한 민족대표는 누구인가?

인사동 '태화관'터를 찾아


'해방'은 됐을지언정 '독립'은 하지 못하다

남산공원 '조선신궁'터를 찾아


남산에 신사 유구가 있다!

리라초등학교 뒤 '노기신사'터를 찾아


이토 히로부미 죽어서도 조선을 파괴하다

장충동 '박문사'터를 찾아


초라한 서울시의회 청사가 가벼이 보이지 않는 이유

태평로 1가 '부민관'과 해방 후 '국회'가 있던 곳을 찾아


산책을 마치며

참고 문헌

사진 출처

과거권력과 현재권력 등 한국 사회의 '파워'가 교차하는 세종로, 그 한복판에 이순신 동상이 우뚝 서 있다.

1956년 8월 10일 옛 남산식물원 터에 '현직' 대통령인 이승만의 대형 동상이 들어섰다. 당시 언론들은 이 동상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1964년 5월 16일 세종로에서 '애국선열' 37인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박정희 정권이 야심차게 추진한 애국선열 동상 건립사업은 그 자체로 부실 덩어리였다.

세종로에 한복판에 자리한 이순신 장군상. 박정희 대통령이 비명횡사하지 않았다면 새 모습의 동상으로 교체되었을 것이다.

일본 도쿄 야스쿠니신사 앞에 서 있는 '일본 육군의 아버지' 오무라 마스지로의 동상.

일제강점기 때 위생의 목적과 전쟁 물자 수송을 위해 시작된 복개사업은 40년 후인 1977년까지 계속됐다. 복개 중(위)과 복개 후(아래)의 모습.

1970년대 청계고가와 삼일빌딩은 정부의 해외홍보물에 수시로 등장하는 자랑거리였다. 삼일빌딩은 63빌딩이 들어서기 전까지 한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군사작전하듯 마구 덮어버린 청계천이 거침없이 다시 열렸다. 과연 청계천은 '복원'된 것일까?

'수많은 전태일들'이 일했던 작업장이 대부분 창신동 쪽으로 옮겨가, 지금의 평화시장은 그저 의류 도매시장일 뿐이다.

평화시장이 아닌 '착취시장'에 갓 취직했을 때 전태일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각혈하며 쓰러져가는 시다들이었다. 시다, 미싱보조사와 함께 찍은 위의 사진에서는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한미사 동료와 찍은 아래 사진에서는 맨 오른쪽이 전태일이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노동착취 실태를 고발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까지 보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답장을 받지는 못했다.

2005년 평화시장 앞 버들다리 위에 전태일 흉상이 세워졌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에 전태일 정신이 구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2003년 말까지만 해도 전태일이 분신한 자리에는 그의 죽음을 기리는 동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청계천 복원공사 와중에 뜯겨 나가고 말았다.

남산과 용산 미군기지 사이에 자리한 해방촌은 해방과 함께 태어나 전쟁과 함께 자랐다.

국회의사당 중앙현관에 서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대리석상. 둘 다 일제와 독재정권에 부역한 김경승의 작품이다. 땅달막한 몸집 등 모양새가 유려하지 않다.

남산공원에 있는 도마 안중근상(위), 백범 김구상(가운데), 김유신상(아래)도 모두 김경승의 작품이다. 김경승은 '친일'에서 '친독재'로 변신하여 명성을 이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세운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앞에는 "민족정기의 전당"이라고 쓴 박 대통령의 글씨가 여전히 남아 있다. 정통성이 빈약한 독재정권은 '항일'마저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반민특위 본부가 있던 명동 국민은행 건물이다.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서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1949년 9월 5일 중앙청에서 열린 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회의 기념사진으로, 원 안의 인물은 반민특위 중앙사무국 총무과장이었던 이원용 조사관이다.

이승만 대통령 등 집권세력이 조직적으로 방해하거나 반민특위 인사들에 대한 집단 암살이 시도되는 등 반민특위 활동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사진은 반민특위 전남조사부가 설치한 투서함의 모습이다.

1951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해방 후 육군 참모총장과 외무부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장 등을 지낸 정일권 중장에게 훈장을 주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 등 독재정권은 친일부역자들을 중용함으로써 정권의 기반을 다졌다.

반민특위가 있던 국민은행 명동지점 한쪽 구석에 (정부나 서울시가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반민특위 표지석 한기가 서 있다. 글씨는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가 썼다.

경성역 2층에 있던 '그릴'은 일제강점기 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하지 않은 모습이다.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절반을 쏟아 부어 만든 경성역(현 서울역). 설계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설계한 독일인 게오르그 데 라란데와 츠가모토 야스시 도쿄 제국대 교수가 맡았다.

해군대장 출신으로 제3, 5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

강우규는 1919년 9월 2일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머커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 1년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서울역 한쪽 구석에 강우규의 거사를 기록한 표지석 한 기가 쓸쓸하게 서 있다.

2007년 5월 17일 남쪽 열차(위)와 북쪽 열차(아래)가 강원도 제진역에서 만나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끊긴 경의선과 동해선이 연결됨으로써 남북 철도는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맞고 있다.

새 KTX 서울역과 옛 서울역.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 상영을 알리는 작은 간판이 흥미로워 보이는 1955년의 단성사로, 건물은 1934년 5차 완공 당시 그대로다. <피아골>은 빨치산 남자대원들이 한 여대원을 둘러싸고 벌이는 갈등을 그린 반공 영화였으나, 빨치산을 낭만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주연의 <플레이밍 스타Flaming Star>와 말론 브란도 주연의 <애꾸눈 잭. 간판 등이 내걸린 1962년 4월 30일의 단성사.

<월하의 맹서>에 출연한 '최초의 본격적인 여배우' 이월화.

1926년 <아리랑>에 출연한 나운규와 신일선.

단성사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최고 개봉관의 지위를 누렸다. 사진은 <장군의 아들3>과 <서편제> 개봉 당시 단성사 앞에 영화를 보고자 몰린 관객.

2005년 2월, 10개 상영관을 갖춘 복합상영관으로 거듭난 단성사.

일제가 미군의 공습에 대비한 방공용 공터는 한국전쟁 후 빈민들 차지가 됐다. 사진은 종묘 맞은편 공터를 메운 판잣집으로, 이것을 없애고 지은 것이 '한국판 라데팡스' 세운상가다.

세운상가는 보행자전용로와 인공정원 등을 갖춘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빌딩으로 기획됐다. 사진은 세운상가 아파트 조감도.

1967년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으로 지은 세운상가는 완공 후 10여 년 만에 슬럼화됐다.

박정희 정권에 있어 세운상가는 조국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1967년 11월 17일 세운상가 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2003년 1월 19일 찾아간 우이동 최남선 고택은 지붕에 물이 새고 기둥에는 곰팡이가 스는 등 철저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고택은 답사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 헐려버렸다.

철거 직전 집 주변에는 일본 황실 사진첩(위)이나 최남선이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 등 흥미로운 지료들이 나뒹굴고 있었다(아래).

한 청년이 최남선에게 편지로 "선생님의 거룩하신 애족, 애국 정신으로 지도해달라"며 부탁하고 있다. 역사는 그렇게 윤색되어 있었다.

손탁은 4개 국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배포가 커 주한 외국인들의 대모 역할을 했다. 조선왕실은 일본을 견제하고자 그런 그녀를 필요로 했다. 사진은 손탁과 그녀를 방문한 외국인들의 모습.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손탁호텔로, 박공(지붕 아래 삼각형 부분)에 '손타그 호텔'이라고 일본어로 씌어 있다.

덕수궁 중명전 마당에서 환담하는 더럼 스티븐스와 이토 히로부미. 두 사람 모두 한국인에게 처단당했다.

손탁호텔이 있던 자리에는 이화여고가 들어섰다. 손탁호텔은 사라졌지만 정동에서는 여전히 열강의 각축이 느껴진다.

1954년 5월 15일 미국 '군인의 날' 기념식을 마친 미군이 세종로에서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자신들의 기념행사를 세종로에서 할 정도로 우리에게 미국의 존재는 막강했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을 제외하면 1978년까지 사법부 수장은 모두 친일부역자들 차지였다. 사진은 법원 인사를 둘러싼 이승만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옷을 벗은 뒤 이 대통령을 찾은 김병로 대법원장.

'제야의 종' 행사를 기획한 경성방송국은 정동 덕수초등학교 터에 있었다. 사진은 1927년 2월 16일 첫 방송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기념비다.

보신각은 원래 지금의 자리가 아니라 종로 탑골공원 옆에 있었다.

2층으로 중건된 현재의 보신각. 지금 걸려 있는 현판은 이승만 대통령이 썼다.

2008년 1월 1일 '제야의 종' 타종식이 열린 서울 보신각. 그 기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올해도 어김없이 10만 명이 넘는 시민이 몰렸다.

서대문 형무소의 붉은 담과 감시탑 일부는 지금도 남아 있다.

서대문 형무소 옥사 내부.

사형장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위)과 사형집행 후 시신을 외부로 내보내는 통로(아래).

해방 후 미군정청과 독재정권도 정적이나 진보인사들을 탄압하는 데 서대문 형무소를 활용했다. 사진은 1959년 7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당한 진보당 조봉암 당수(국회부의장, 초대 농림부장관)가 사형판결을 받는 모습으로 조봉암은 '북진통일'을 주창한 이승만에 반해 '평화통일'을 추구했다.

항일의 공간으로만 추억되는 서대문 형무소가 온전한 모습을 찾을 날은 언제일까.

1910년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독립문과 영은문 주초. 독립문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세운 것이었으나 그것은 또 다른 종속을 의미했다.

독립문의 남과 북 편액은 각각 한글과 한자로 씌어 있는데, 모두 이완용이 썼다.

1979년 8월 15일, 독립문은 고가도로 건설을 위해 '獨立門址'라고 쓴 동판을 남겨둔 채 북서쪽으로 70미터 밀려났다.

독립문 옆에서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서 있는 필립 제이슨 동상. 그가 만든 《독립신문》은 개화사상을 고취하기는 했으나, 한게도 분명했다.

'또 다른 종속'에 불과한 것이 '독립'이라는 상징으로 조작되어 있는 현장.

충성분수대와 그 뒤에 있는 겨레의 마당 너머로 현충문과 현충탑이 보인다. 국립서울현충원은 '충성'과 '민족' 과잉의 현장이다.

1963년 4월 29일 여고생들을 도열시킨 가운데 아산 현충사를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이른바 '구국의 현장' 성역화 작업은 '군인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데 주효한 수단이었다.

1962년 5월 5일 투병 중인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을 방문한 '일본 관동군 출신' 대통령.

장군들의 묘(위)는 촘촘하기만 한 사병 묘(아래)에 비해 각각 8배나 넓다. 게다가 묘비도 훨씬 크고 봉분까지 갖추고 있다.

본질적으로 국립현충원도 야스쿠니신사처럼 '망자'가 아닌 '산자'를 위한 공간이다.

네모난 담장 안에 원형 제단이 3단으로 쌓여 있고, 그 한가운데 원추형 지붕의 건물이 보이는 창건 당시의 원구단. 사진 왼쪽으로 지금도 남아 있는 황궁우와 삼문이 보인다.

일제는 환구단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철도호텔과 반도호텔 등을 지었다. 사진은 지난 1958년 8월 31일 화재가 난 조선호텔(옛 조선철도호텔).

고층빌딩에 둘러싸여 미처 외딴섬 같은 황궁우.

위로부터 일제강점기 때 세워진 조선저축은행(SC제일은행)조선은행(한국은행), 미츠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 본점). 신세계백화점은 2007년 외장재를 교체해, 초기의 건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1940년까지만 해도 환구단 대부분의 영역은 파괴됐어도 황궁우 삼문 앞에는 그나마 '공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위). 그러나 지금은 호텔을 너무 바짝 들여 짓는 바람에 문의 기능을 잃어버렸다(아래).

환구단 대문이 시내버스 차고지의 정문으로 쓰이고 있는 사실이 2007년이 되어서야 알려졌다.

해방정국 당시 암살은 정적을 제거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의 목숨을 앗아간 총알 구멍 너머로 그를 애도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종합병원 건물로 둘러싸여 병원 정문으로 전락한 경교장의 모습.

경교장은 2층 김구 집무실만 복원되어 있는 상태다. 김구가 앉아 있던 책상과 안두희가 총을 쏜 위치, 창문에 뚫린 구멍 등 암살 당시 상황으로 꾸며놓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살았던 이화장은 서울시가 이화장의 유지보수 비용을 부담하는 등 경교장과 달리 복원 상태가 양호하다.

1948년 4월 19일 김구의 북행을 만류하려고 모인 학생(위)과 결국 북행길에 나서 같은 날 38선 앞에 선 김구 일행(아래).

1945년 11월 3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을 앞두고 찍은 단체사진. 그러나 그들의 환국 길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한미호텔의 전신인 혼마치호텔.

한미호텔 터에 들어선 신한은행 건물. 뒤늦게나마 신한은행이 한미호텔 관련 사료 찾기에 나섰다.

하루아침에 폭삭 주저앉아버린 와우아파트 붕괴현장. 붕괴되지 않고 서 있는 옆 동도 가파른 산비틀하며 얇은 기둥이 위태로워 보인다.

정부는 무허가 판자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변두리로 이주시키는 '배제정책'과 시민아파트를 지어 입주시키는 '포용정책'을 병행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포용된 빈민은 거의 없었다.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은 정권 차원에서 추진됐다. 1969년 4월 21일 금화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안기부가 떠나간 건물은 각각 TBS교통방송(위)과 서울시 별관(가운데), 문학의 집(아래) 등으로 쓰이고 있다. 특히 문락의 집은 안기부장 관사를 개조한 것이다.

온갖 고문이 행해졌던 안기부 별관 지하. 그러나 지금은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간첩을 잡아야 할 우리 정보기관은 간첩을 만들어내는 데에도 능숙했다. 사진은 1964년 8월 14일 '제1차 인혁당 사건'의 전모를 발표하고 있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옛 안기부 건물을 민주주의기념관 등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결국 안기부 본관은 유스호스텔로 쓰이게 됐다.

학생 대표들은 탑골공원에서 멀지 않은 인사동 승동교회를 중심으로 3 · 1운동을 준비했다.

태화관 자리에 들어선 태화빌딩과 독립선언 표지석.

3 · 1 운동 당시 이른바 민족대표라고 불렸던 이들이 모였던 태화관.

1952년 7월 22일 한강철교 재개통식에서 시승용 기차를 타고 한강을 건너는 이승만 대통령(가운데).

1966년 7월 22일 열린 맹호, 청룡 교체부대 환송식.

조선싱궁으로 향하는 참도와 도리이로, 위 사진은 숭례문 쪽에서 힐튼호텔 쪽을 바라본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힐튼호텔 앞 어린이 놀이터 근처다. 사람 크기와 비교해 보면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조선신궁의 전체 면적은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가까운 43만 제곱미터나 됐다. 주요 건물은 안중근의사기념관과 지금은 없어진 남산식물원 일대에 있었다.

신사의 석등 받침으로 추정되는 석재는 뒤집혀 탁자와 의자, 장독받침 등으로 쓰이고 있다. 미타라이샤는 기증자와 기증연도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어 역사적 가치가 있지만, 흉물처럼 버려져 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데다 무쓰히토 천황 장삿날 부인과 함께 할복자살함으로써 '군신'으로까지 추앙받는 노기 마레스케.

노기가 이끄는 일본군이 뤼순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203고지에서 내려다본 뤼순항 사진으로, 침몰하거나 반파된 군함들이 보인다.

이토는 1963년부터 1986년까지 24년 동안 1,000엔권 지폐의 모델이었을 정도로 일본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던 박문사 본전.

일제는 조선왕실과 관련한 시설을 동물원이나 놀이공원으로 만드는 등 철저히 희화화했다. 사진은 1972년 4월 21일 촬영한 창경궁으로, 지금도 창경궁 대신 놀이공원의 의미를 지닌 '창경원'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

일제는 조선 5대 궁궐 가운데 하나인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을 떼어다 박문사 정문으로 삼았다(위, 가운데 박문사 정문 앞뒤 모습). 흥화문은 해방 후 경희궁으로 옮겨졌고, 지금 그 자리에는 흥화문의 모조품이 서 있다(아래).

태평로 국회 역시 숱한 정치 격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다. 사진은 1958년 12월 20일 야당 의원들이 국가보안법 통과를 저지하려고 철야농성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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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