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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26. 12:37 내가 읽은 책들/2017년도

2017-050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서울편

 

 

 

유홍준 지음

2017, 창비

 

대야도서관

SB126065

 

981.1

유95ㄴ  9  c.2

 

만천명월 주인옹은 말한다

 

'답사기', 드디어 서울을 이야기하다!

 

'답사기'가 돌고 돌아 마침내 서울로 들어왔다. 척째 권 '남도답사 일번지'가 세상에 나온 지 25년 만이다. '답사기' 새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오랜 독자들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정년(停年)이라는 것을 잊고 답사기에서 손을 놓지 못하여 마침내 한양 입성까지 하게 되었다.

실제로 '답사기'를 쓰면서 나는 항시 옛 친구 같은 독자들과 함께 가고 있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내가 삶의 충고로 받아들이는 격언의 하나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인의 진득한 마음자세이다. 어쩌면 그렇게 독자들과 함께 가고자 했기 때문에 '답사기'가 장수하면서 이렇게 멀리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계속 그렇게 갈 것이다.

- 「책머리에」에서

 

 

 

유홍준 兪弘濬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학과,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석사),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박사)를 졸업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와 제1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등을 지냈다. 1985년부터 2000년까지 서울과 대구에서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강좌를 개설했으며,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를 맡았다.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다.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를 정년퇴임한 후 석좌교수로 있으며, 가재울미술사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국내편 1~10, 일본편 1~4), 평론집 『80년대 미술의 현장과 작가들』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미술사 저술 『조선시대 화론 연구』 『화인열전』(1·2) 『완당평전』(1~3) 『국보순례』 『명작순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1~3) 『석농화원』(공역) 『안목』 등이 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저작상(1998), 제18회 만해문학상(2003) 등을 수상했다.

 

차례

 

책을 펴내며

제1부 종묘

종묘

종묘 예찬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 건축가 승효상의 고백 / 프랭크 게리 / 종묘와 사직 / 영녕전 / 공신당과 칠사당

종묘 제례

「보태평」과 「정대업」은 영원하리라
『국조오례의』 / 「보태평」과 「정대업」 / 세종대왕의 절대음감 / 종묘제례 / 이건용의 「전폐희문」 / 향대청과 재궁 / 전사청 / 정전, 영녕전, 악공청 / 신도


제2부 창덕궁

돈화문에서 인정전까지

인간적 체취가 살아 있는 궁궐
궁궐의 도시, 서울 / 5대 궁궐 / 경복궁과 창덕궁 / 「동궐도」 / 돈화문 / 내병조와 ‘찬수개화’ / 금천교 / 인정전 / ‘검이불루 화이불치’

선정전과 희정당

조선 건축의 모든 것이 창덕궁에 있다
창덕궁의 구조 / 내전의 파사드 / 빈청과 어차고 / 선정전 / 유교 이데올로기와 경연 / 희정당 / 선기옥형과 하월지 / 창덕궁 대화재와 복구 / 내전 벽화 프로젝트

대조전과 성정각

조선의 왕과 왕자들은 이렇게 살았다
대조전 / 경훈각 뒷간 / 대조전 화계 / 중희당 / 성정각 / 희우루 / 관물헌 / 승화루 서목

낙선재

문예군주 헌종과 이왕가의 여인들
헌종 / 낙선재 / 『보소당 인존』과 낙선재 현판 / 허련과 헌종의 만남 / 낙선재 뒤란 / 이왕가 여인들 / 이구와 줄리아


제3부 창덕궁 후원

부용정

자연을 경영하는 우리나라 정원의 백미
자연과 정원 / 창덕궁 호랑이 / 부용지 진입로 / 사정기비각 / 영화당 / 부용정 / 다산 정약용

규장각 주합루

임금과 신하가 하나가 되던 궁궐의 후원
어수문 / 취병 울타리 / 정조와 규장각 / 서호수와 『규장총목』 / 차비대령화원 / 단원 김홍도 / 희우정, 천석정, 서향각 / 표암 강세황

애련정과 연경당

풍광의 즐거움만이라면 나는 이를 취하지 않겠노라
불로문 / 숙종의 애련정 기문 / 의두합 기오헌 / 효명세자의 「의두합 상량문」 / 어수당 / 연경당 / 「춘앵전」

존덕정과 옥류천

만천명월(萬川明月) 주인옹은 말한다
후원 정자의 모습과 특징 / 관람지 / 관람정 / 존덕정 / 만천명월주인옹 / 옥류천 유상곡수 / 조선의 마지막 재궁 / 수령 700년 향나무


제4부 창경궁

외조와 치조

영조대왕의 꿈과 한이 서린 궁궐
창경궁 조망 / 명정전 / 창경궁의 역사 / 홍화문과 영조의 균역법 / 옥천교와 주자소 / 문정전과 숭문당 / 사도세자와 정조

내전

전각에 서려 있는 그 많은 궁중비사
함인정 / 환경전 / 소현세자 / 경춘전과 정조·순조의 기문 / 통명전 / 인현왕후와 장희빈 / 양화당과 내명부의 여인들 / 영춘헌과 집복헌

창경궁에서 창경원으로

춘당지 연못에는 원앙이 날아든다
자경전 / 혜경궁과 『한중록』 / 풍기대 / 앙부일구 / 성종 태실 / 명나라 석탑과 식물원 / 춘당대 관덕정

 

|종묘 정전| 종묘는 조선 역대 제왕과 왕비들의 혼을 모신 사당이다. 궁궐이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라면, 종묘는 죽음의 공간이자 영혼을 위한 공간으로 조선왕조의 신전이다.

|정전 앞에 선 프랭크 게리| 파격적인 건축으로 이름 높은 프랭크 게리는 단순하면서 장엄한 종묘 정전 앞에서 조용히 이 건축의 미학을 음미하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본 정전의 풍경| 종묘를 부감법으로 내려다보면 서울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자연 속에 파묻혀 있는 자리앉음새가 확연히 드러난다. 과연 신전이 들어설 만한 곳이라는 감탄이 나온다.

|영녕전| 더 이상 종묘에서 모실 수 없는 조상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태종은 영녕전이라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고 영원히 후손들과 함께할 수 있게 했다.

|증축을 거듭한 영녕전| 왕조가 이어지면서 신주를 모실 분이 늘어나 정전과 영녕전을 계속 증축할 수밖에 없었다. 헌종 2년에 마지막으로 영녕전을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인 16칸을 갖추었다.

|정전의 열주| 19분의 왕(왕비까지 49위)을 모신 각 산실 앞에는 열주들이 늘어서 있어 장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종묘 정전 신위 봉안도|

|종묘 영녕전 신위 봉안도|

|공신당| 공신당에는 각 임금마다 적게는 2명, 많게는 7명의 근신이 배향되어 모두 83명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종묘의 공신당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명예이고 가문의 영광이지만 그 인물 선정을 둘러싼 이론이 많다.

|공신당 내부| 공신당 내부에는 각 임금마다 배향 대신의 신위가 여러 칸으로 나뉘어 모셔져 있어 자못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칠사당 내부| 칠사당의 내부에는 붉은색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데 창을 통해 들어오는 광선으로 인해 더욱 신령스런 분위기가 있다.

|종묘 건축의 미학| 100미터가 넘는 맞배지붕이 19개의 둥근 기둥에 의지하여 대지에 낮게 내려앉아 불가사의할 정도로 침묵이 감도는 공간을 보여준다는 점에 정전 건축미의 핵심이 있다.

|종묘의 낮은 담장| 아주 낮게 둘러져 있는 담장은 조용히 정전을 기록하게 만들고 있다. 정전에서 내다보면 담의 지붕이 거의 발아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종묘의 가을| 종묘의 단풍은 참나무 느티나무의 황갈색이 주조를 이룬 가운데 노란 은행나무와 빨간 단풍나무가 점점이 어우러져 있어, 늦가을 끝자락에 가면 인생의 황혼 녘에 찾아오는 처연한 미학을 느낄 수 있다.

|종묘의 겨울| 눈이 내려 정전의 지붕이 하얗게 덮일 때 종묘는 거대한 수묵 진경산수화 같은 명장면을 연출한다.

|『국조오례의』| 예를 제정하고 악을 짓는 '예악의 제도화'는 유교국가 정치의 핵심이었고, 조선은 예악의 정립을 위해 『국조오례의』를 편찬했다.

|편경| 계몽군주이자 자신이 절대음감을 지녔던 세종은 박연에게 제례악으로 쓸 순 국산 편경을 제작하도록 명했다.

|종묘제례 장면| 오늘날의 종묘제례는 간소화되어 행사 당일 아침 경복궁 광화문에서 출발하는 어가와 제관의 행렬을 시작으로 오전에는 영녕전에서 제향하고 오후에는 정전에서 제향을 치른다.

|신실 내부| 종묘제례 당일 새벽에는 정전과 영녕전 각 실의 문을 열고 신을 맞이한다.

|신실 앞에 차려진 제상| 제상은 19개 신실 중 태조 · 태종 · 세종 3위만 진설하고 나머지 16위는 술만 올린다.

|종묘제례악 연주| 종묘제례악에서 악사는 두 팀으로 나누어 배치했고, 악기는 박 · 편종 · 편경 · 피리 · 장구 · 대금 · 해금 · 북 · 아쟁 · 태평소 · 축 · 어 등 15가지로 편성했다.

|팔일무 장면| 제례악에 맞추어 추는 춤은 정연하게 열을 지어 춘다고 해서 '일무'라고 한다. 가로세로 8명씩이면 64명이 추는 팔일무다.

|제례 진행 과정들| 1. 입실을 기다리는 제관 2. 신위 앞에 진설된 제상 3. 신위마다 잔을 올리는 장면 4. 잔에 술을 담는 과정 5. 축문을 받들어 모시는 장면 6. 제례가 끝난 뒤 축문을 태우는 장면

|종묘제례를 바라보는 관람객들| 1970년대에만 해도 종묘제례 참관인은 월대 위로 올라가 악사와 팔일무 자리만 비워두고 제례 과정을 구경했다. 한번 들어가면 밖으로 나오기도 힘들었다.

|궤(簋)| 메조와 차조를 담는 제기

|보(簠)| 쌀을 담는 제기

|형(鉶)| 간을 한 국을 담는 제기

|등(登)| 간을 하지 않은 국을 담는 제기

|작(爵)| 술잔

|종묘의 건물과 연못| 위로부터 재궁, 향대청, 중연지, 망묘루

|악공청| 악사와 일무원의 공간인 악공청을 보면 종묘제례에서 음악과 춤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실감한다.

|한양의 5대 궁궐| 서울에 5개의 궁궐이 생기게 된 내력에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빛과 그림자가 서려 있다.

|창덕궁 전경| 서울은 '궁궐의 도시'라고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중에서도 조선 궁궐의 멋을 한껏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창덕궁이다.

|「동궐도」|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1830년 무렵에 그린 「동궐도(東闕圖)」(국보 제249호)를 보면 말로만 들어온 구중궁궐이 장대하게 펼쳐진다. 원래 16권의 화첩으로 만들어진 「동궐도」는 현재 그중 2부가 남아 고려대는 화첩 그대로, 동아대는 16폭 병풍으로 꾸며진 것을 소장하고 있다.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은 돈화문이다. 돈화문 앞 월대는 제법 크고, 옆면이 잘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둘려 있어 번듯하다.

|창덕궁 궐내각사| 창덕궁 안은 정원 같은 편안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나무들 너머로 보이는 전각들이 궁궐임을 확실히 느끼게 한다.

|내병조 건물| 궁궐 안에 근무하던 병조 관리의 출장소 같은 곳이다. 궁궐 안에 있는 병조라고 해서 내병조라 부른다.

|금천교| 창덕궁 금천을 가로지른 금천교는 한양 건설을 도맡았던 전설적인 토목 · 건설 기술자 박자청이 설계 · 시공한 명작이다.

|금천교 돌짐승 조각들| 금천교 양쪽 기둥엔 네 마리의 동물이 조각되어 있는데 어떤 동물도 마주치기만 하면 도망치고 만다는 전설 속 백수의 왕인 산예(철번째, 두번째)다. 금천교를 받치고 있는 쌍무지개 아치를 보면 북쪽엔 돌거북(세번째)이, 남쪽엔 홍예 사이의 부재에는 귀면(네번째)이 조각되어 있다.

|금천교와 진선문| 삐뚜름히 놓인 금천교가 궁궐의 정연함을 흩트려놓았다. 금천교를 복원하면서 진선문과 일지선을 이루게 하지 않고 금천 호안석축과 직각이 되게 했기 때문에 나온 실수였다.

|진선문 안쪽| 진선문에서 숙장문을 바라보면 왼쪽엔 인정문과 인정전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긴 회랑이 펼쳐진다. 이 회랑 자리에는 본래 오늘날로 치면 경호실인 호위청과 총무과인 상서원이 있었다.

|창덕궁의 하이라이트 인정전| 부감법으로 내려다보면 인정전은 회랑으로 둘려 있어 품위와 권위가 살아나고 있음이 한눈에 들어온다.

|인정전| 정면 5칸의 중층 팔작지붕으로, 품위 있고 듬직하고 잘생겼다. 낮은 듯 높게 쌓은 석축 위에 올라앉아 있어 대지에 내려앉은 안정감이 있다.

|인정전 내부의 용상| 일제강점기 근대식 알현소로 개조되었던 인정전은 현재 복원되어 용상의 단을 높여 세웠으나, 마룻바닥은 그대로 두어 상처의 흔적을 남겼다.

|인정전 천장| 천장엔 왕의 공간임을 상징하는 봉항 한 쌍이 조각되어 있다. 그 조각 솜씨가 대단히 뛰어나고 채색이 매우 아름답다.

|창덕궁 궁궐 건축의 미학| 후원의 아름다움에 가려 종종 그 건축적 가치가 지워지곤 하는 창덕궁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의 미학을 구현해놓은 대표적인 궁궐이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新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 김부식,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 15년(기원전 4)조에서 백제의 궁궐 건축에 대해

 

|'검이불루 화이불치'| 한 미장원이 내건 입간판에 '검이불루 화이불치, 최고의 미용실'이라고 쓰여 있다.

|창덕궁 전경| 창덕궁 건축의 조선적 특징과 세련미는 3조의 배치에서 두드러진다. 창덕궁의 3조는 산자락을 따라가며 어깨를 맞대듯 나란히 배치되었다. 그로 인해 창덕궁은 편안한 한국식 공간으로 인간적 체취를 풍긴다.

|경복궁 전경| 경복궁은 외조, 치조, 연조의 3조가 남북 일직선상에 있다. 그래서 경복궁에는 『주례』에 충실한 의례적인 긴장감이 있다.

|상서원과 호위청| 호위청은 임금을 뒤따르며 호위하는 경호실이고, 상서원은 옥새, 외교문서, 과거 합격자 사령장 등을 관리하는 곳이다.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총무과에 해당하는,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부서였다.

|선정전 앞 빈터| 숙장문을 들어서면 넓은 빈터 너머 늠름하게 잘생긴 건물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어깨를 맞대고 길게 펼쳐져 있다. 가까운 맨 왼쪽 건물은 임금이 신하들과 국정을 논하며 나랏일을 보던 치조의 선정전이다.

|순종과 황후의 어차| 순종황제가 탔던 어차는 1903년에 미국의 제너럴모터스사가 제작한 캐딜락 리무진이고 황후가 탄 어차는 1909년 영국 다임러사에서 제작한 것으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드문 앤티크 자동차가 되었다.

|선정전| 인조반정으로 인한 창덕궁 대화재로 소실된 선정전을 복원하면서 인왕산에 있던 인경궁 건물을 옮겨와 창덕궁 전각 중 유일한 청기와 집으로 남았다.

|선정전 내부| 보물 제814호인 선정전은 치조의 핵심 건물로 오늘날로 치면 국무회의나 비서관 회의 등이 열렸던 곳이다. 조선의 임금들은 여기에서 매일같이 대신들과 정치에 관해 논의했다.

|선정전 현판| 베풀 선(宣) 자, 정사 정(政) 자를 쓴 선정전이라는 이름에는 임금이 정치를 베푼다는 뜻이 담겨 있는데, 옛날엔 이를 청정(聽政)이라고도 했다.

|희정당 정면| 희정당은 앞쪽에 새로 신관까지 지어 창덕궁 어느 건물보다도 화려하다. 순종황제 때는 자동차가 신관 문앞까지 들어오도록 신관 정면에 캐노피 건물을 세웠다.

|희정당| 희정당은 본래 임금의 서재이기 때문에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순조가 희정당을 편전으로 삼으면서 창덕궁의 핵심 건물로 부상해 규모가 커졌고, 순종황제 때는 손님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쓰이면서 더욱 위상이 높아졌다.

|희정당 전각| 보물 제815호인 희정당 건물은 정면 11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기단부를 장대석 5단으로 거의 담장 높이까지 높직이 올려쌓아 자못 장중하다.

|『매일신보』에 실린 창덕궁 화재 소식| 1917년 11월 10일에 일어난 화재로 대조전, 희정당, 경훈각 등 침전의 주요 건물이 전소되었다. 당시 많은 신문들이 호외를 발행하고 연일 대서특필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희정당 내부| 전소된 내전 건물을 복원하면서 전각 내부를 우리나라 화가들이 그린 벽화로 장식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한국미술사에서 전례 없는 장대한 미술 프로젝트가 시행되었다.

|희정당 벽화| 「총석정절경도」(김규진, 비단에 채색, 1920)

|희정당 벽화| 「금강산만물초승경도」(김규진, 비단에 채색, 1920)

|대조전 전체 모습| 궁궐 한가운데 있는 지밀한 곳이기 때문에 겹겹이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고, 입구에는 별도의 대문까지 있다.

|대조전| 대조전 건물은 정면 9칸으로 그 규모가 상당히 크고, 앞에는 넓고 높직한 월대가 있어 장중함을 더한다.

|대조전 내부| 대조전의 실내 장식은 1920년 복원 때 근대식으로 바뀌었다. 창호지 대신 유리창과 무쇠로 만든 고전적인 전등이 달렸고, 기둥과 창방에는 예쁜 봉황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대조전 벽화| 「백학도」(김은호, 비단에 채색, 1920)

|경훈각 회랑 바깥 풍경| 대조전 뒤쪽의 큰 건물인 경훈각은 임금과 왕실 가족들의 휴식 공간이다. 희정당, 대조전, 경훈각은 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경훈각 실내| 현재의 경훈각은 정면 9칸, 측면 4칸 건물로, 가운데에 3칸의 대청을 두고 동서벽 상인방에는 벽화를 걸었으며 좌우로 2칸씩 온돌을 들였다.

|매우틀| 경훈각 서북쪽으로 돌아나가는 모서리 섬돌 바로 위에 작은 나무문이 하나 나 있다. 경훈각 뒷간으로, 안에는 용변이 담긴 그릇을 끌어내는 바퀴 달린 편자가 있다. 사진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동식 변기 매우틀이다.

|경훈각 벽화| 위는 노수현이 그린 「조일선관도」(비단에 채색, 1920)이고, 아래는 이상범이 그린 「삼선관파도」(비단에 채색, 1920)이다.

|대조전 화계| 경훈각을 돌아나오면 산자락 따라 길게 뻗은 화계를 만난다. 아름다운 꽃계단이다. 장대석을 4단으로 쌓아올린 화계 위로 붉은 벽돌과 검은 기와가 어우러진 꽃담장이 높직이 올라앉아 있다.

|성정각| 왕세자의 독서와 서연이 이루어진 건물로, 동궁의 정전인 중희당은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내면서 헐리고 맨 서쪽에 있는 성정각만 남았다.

|희우루 현판| 성정각 동쪽 머리에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 기뻐한다'는 뜻을 담은 희우루(喜雨樓) 현판이 걸려 있다. 정조 당시 극심한 가뭄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누각 중건 공사를 개시한 날과 완성한 날, 반가운 비가 내려 누각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 내력이 있다.

|관물헌과 '집희' 현판| 관물헌은 세자가 공부하며 생각에 잠기는 공간이었다고 하는데, 서까래 아래에 '집희(緝熙)'라는 작은 현판이 붙어 있다. 고종이 쓴 글씨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매화| 성정각 담장 밖 후원 가는 길가의 홍매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정도로 오랜 노매이다.

|승화루| 동궁의 동쪽 끝에 해당하는 서화 수장고로, 규장각의 주합루에 비견하여 소주합루라고도 불렸다. 안타깝게도 이 승화루의 서화들은 모두 망실되었다.

|낙선재 권역| 헌종은 문인 학자들과 자주 만나면서 그들의 삶을 동경하여 1847년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문인들의 사랑채를 본뜬 낙선재를 지었다.

|「헌종 가례진하도 병풍」| 헌종은 17세 때인 1843년에 왕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에 남양 홍씨 홍재룡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였다. 이를 기념하여 기록화로 그린 의궤도가 「헌종 가례진하도 병풍」(동아대박물관 소장)이다.

|낙선재 화계| 화계는 5단으로 아주 가파르게 짜였고, 아래쪽에는 괴석과 돌수조가 진열되어 있다. 대조전 화계가 장대하다면 여기서는 아기자기한 멋을 느낄 수 있다.

|낙선재| 낙선재는 문기(文氣) 있는 선비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할 만한 사랑스런 집이다. 앞마당이 널찍하고, 장대석을 5단으로 쌓은 석축 위에 건물이 높이 올라앉아 잇어 번듯한 인상을 준다.

|낙선재 빙벽 문양| 낙선재 누마루 아래로는 아궁이가 보이지 않게 가벽을 치고 이를 빙렬무늬로 장식했는데, 화재 예방의 의미를 담은 일종의 추상 벽화다.

|낙선재의 창살들| 낙선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창살이다. 수직 · 수평선만 사용하는 창살이지만 격자 · 만자 · 마름모꼴 능화 · 사방연속 무늬 등을 두루 사용하여 모두 다르게 디자인했다.

|'보소당' 현판| 낙선재 동쪽에는 '보소당(寶蘇堂)'이라는 아주 예쁜 현판이 있다. 원래 옹방강의 당호였지만 헌종이 이를 이어받았다. 전형적인 추사체의 멋이 잇으며 헌종의 글씨로 추정한다.

|낙선재 현판| 청나라 금석학자이자 추사의 친구인 섭지선이 쓴 현판이다. 당시 청나라의 신 문물을 적극 받아들였던 징표이기도 하다.

|유재 현판| 추사가 제자 남병길에게 준 당호다. 이 현판은 예서로 쓴 '유재' 두 글자도 멋있었지만 행서로 쓴 풀이 글이 참으로 감동적이다.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盡之巧以還造化 / 盡之祿以還朝廷 / 盡之財以還百姓 / 盡之福以還子孫

 

|석복헌 화계에서 낙선재 뒤뜰까지| 왕비가 기거한 석복헌과 대왕대비가 기거하던 수강재 뒤뜰은 아름다운 화계로 연결되어 있다. 앞쪽은 세 채가 담으로 막혀 있으나 뒤란은 하나로 트여 있다.

|금사연지(위)와 소영주(아래)| 화계 앞 돌수조에는 고운 전서체로 '금사연지(琴史硯池)'라 새겨져 있는데, '거문고를 연주하고 역사책을 읽는 벼루 같은 연못'이라는 뜻이다. 괴석을 올려놓은 육각형 석함에는 반듯한 해서체로 '소영주(小瀛洲)'라 새겨져 있는데, 작은 영주산이라는 뜻이다.

|상량정| 낙선재 위로 올라가면 형태도 단청도 화려한 '평원루(平遠樓)'라는 정자가 나온다. 이 정자에는 최고로 시원하다는 뜻의 '상량정(上凉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상량정 전경| 평원루와 승화루 사이에는 벽돌 기와담 가운데에 만월문(滿月門)이라는 동그란 중국식 문이 나 있다. 그래서 창덕궁 안에서 가장 이국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방자 여사(위)와 영친왕(아래)| 영친왕 이은은 일본 왕족의 딸 이방자 여사와 정략결혼을 했다. 영친왕은 1970년 향년 74세로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고, 이방자 여사는 1989년 역시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소학교 시절의 덕혜옹주|

|이구와 줄리아|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낳은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줄리아와 결혼했으나 자손이 없다는 이유로 이혼을 종용당해 헤어져야 하는 운명을 겪었다.

|이구의 영결식| 마지막 황세손 이구의 장례식은 2005년 7월 24일 낙선재에서 9일장으로 화려하고 엄숙하게 치러졌다. 이때 줄리아는 장례 행렬을 조용히 지켜보았다고 한다.

|「동궐도」 중희당 부분|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원래 동궁의 정전인 중희당이 있었다. 「동궐도」에는 중희당 전각들이 아주 상세히 나와 있는데 참으로 멋진 공간이었다는 인상을 준다.

|창덕궁 후원 입구| 창덕국이 아름다운 궁궐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후원 덕분이다. 10만 평에 이르는 산자락의 골짜기를 정원으로 삼고 계곡 곳곳에 건물과 정자를 지어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정원을 경영했다.

|창덕궁 후원 돌담길| 후원으로 향하는 길을 걷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한 일이다. 양옆으로 기와지붕의 사괴석 담장이 길게 펼쳐져 궁중의 내전임을 알려주고 담장 너머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길 위로 나무 터널을 이룬다.

|부용정 전경| 부용지와 그 너머의 장중한 규장각 2층 건물, 석축 위에 편안히 올라앉은 영화당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섬에는 잘생긴 소나무가 주인인 양 넓게 자리잡고 있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영화당, 부용정, 규장각, 사정기비각 4채의 건물이 제각기 이 정원에서 자기 몫을 하면서 의젓이 자리하고 있다.

|사정기비각| 멀리 산자락에 바짝 붙어 있는 보호각 안에는 숙종이 쓴 사정기비(四井記碑)를 보호하는 비각이 있다.

|사정기비| 숙종이 세운 이 비석에는 세조가 4개의 우물을 찾아낸 것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있다.

|「동궐도」 영화당과 춘당지 부분| 「동궐도」를 보면 지금은 없지만 영화당 양옆으로 긴 담장이 둘려 있어 영화당 안쪽의 부용지와 바깥쪽 춘당대로 열린 공간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영화당| 석축 위에 높직이 올라앉은 영화당의 정면은 춘당대로 열려 있다. 뒷면에서는 부용지와 부용정, 규장각, 비각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용지에 오면 누구나 이 영화당 툇마루에 앉아 부용지를 한껏 감상하고 가게 된다.

|영화당 현판| 영조의 영화당 현판 글씨는 획이 아름답고 글자의 구성이 반듯하면서도 멋스러워 명작이라 할 만하다.

 

빙그레 난간에 기대어 작은 연못 굽어보며                     㗛倚畫欄臨小塘

조용한 정원에 일 없으니 맑은 빛 구경한다                    閑庭無事玩澄光

한 쌍의 오리는 섬뜰 위에서 뒤뚱거리고                        玉砌緩行雙彩鴨

고기 새끼가 뽐내며 우쭐거리는 것이 희망에 차 있구나   漁兒自得意洋洋

 

|부용정| 다채로운 구조의 부용정은 한옥으로 지을 수 있는 화려함의 최대치가 구사된 정자다. 평면은 열 십(十)자 형을 기본으로 하면서 4면 모두 팔작지붕으로 날개를 펴고 있다.

|「동궐도」 부용지와 부용정 부분| 「동궐도」에서는 채색이 아름다운 비단 돛배 두 척이 부용지에 떠 있다. 정조는 부용정에서 신하들과 뱃놀이와 낚시를 즐겼고 달밤엔 불을 밝히고 시를 주고받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곤 했다.

|가을날의 부용정과 부용지|

|부용지 건너에서 올려다본 규장각 주합루|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부용지 북쪽 산자락에 역대 왕들의 어진과 글씨, 보책, 인장 등을 보관할 규장각 주합루를 짓게 했다.

|부용지 물고기 조각| 부용지 동남쪽 모서리 맨 위 장대석에 새겨놓은 물고기 한 마리에는 국왕과 신하의 원만한 어울림의 뜻이 담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수문| 부용지 연못가에서 규장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어수문이라는 대문이 절집의 일주문처럼 서 있다.

|주합루 현판(위)과 규장각 현판(아래)|

|규장각의 주련들| 아래 2개는 정조가 내린 주련으로 '손님이 온 것을 보아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마라''전임자가 아니면 들어오지 마라'라는 뜻을 새겼다.

|정조의 「국화도」(오른쪽)와 「파초도」(왼쪽)| 보기 드문 계몽군주였던 정조는 다양한 미술문화 진흥책을 지시했고, 그 자신도 글과 그림에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동국대박물관 소장)

|정조의 '정민시를 위한 송별시'| 정조는 신하들에게 편지도 자주 하였고, 송별시도 많이 썼다. 그렇게 신하와 가깝기를 원했는데 글씨도 윤기 있으면서 힘이 있다. 특히 정조는 아름다운 색지에 글씨를 써서 그 권위가 더욱 살아난다.

|개유와 현판| 규장각 부설 장서각에는 조선 책은 서고(西庫)에, 중국 책은 열고관(閱古觀)에 보관했는데 중국 책이 늘어나면서 새로 서고를 증축해 '개유와'라 이름 붙였다. 개유와란 '모든 게 다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김홍도의 「규장각도」| 부용지의 원 주인장 같은 규장각 주합루는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늠름하게 잘생겼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립하자마자 갓 서른을 넘긴 단원 김홍도에게 「규장각도」를 그리게 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석정| 기역 자로 된 누마루 집으로, 희우정과 마찬가지로 임금의 휴식처지만 소박한 건물이다. 그 이름에는 풍년을 기원하는 뜻이 있으며 지금은 '제월광풍루(霽月光風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서향각| 규장각 서편에 동향한 정면 8칸, 측면 3칸 팔작지붕 큰 건물로,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규장각에 봉안된 어진, 임금의 글과 글씨 등을 보관하고, 이따금 서적을 널어 말리던 곳이다. '책 향기가 나는 집'이라는 뜻이다.

|'어친잠실' 현판| 서향각에는 '어친잠실(御親蠶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왕족이 친히 누에를 치는 방'이라는 뜻이다. 서향각에는 '친잠권민(親蠶勸民, 친히 누에를 쳐 백성에게 권한다)'이라는 현판도 있다.

|강세황 자화상| 정조 5년, 뒤늦게 출사한 69세의 표암 강세황은 정조의 부름을 받고 창덕궁 규장각 옆에 있는 희우정으로 들어갔다가 뜻밖의 후원 유람을 하게 된다. 이날 쓴 글이 「호가유금원기」다.

|희우정| 규장각 뒤편에 있는 희우정은 숙종 때 초가를 기와로 바꾼 정자로 아주 아담한데 정조는 표암 강세황에게 희우정에 와서 글씨를 쓰게 했고 직접 옥류천을 구경시켜주었다.

|불로문| 불로문은 넓적한 화강석 통판을 과감하게 다귿 자로 오려 세운 문이다. 모서리를 가볍게 궁글린 것 외에는 손길이 더 가지 않았다. 돌문 머리에 새겨넣은 '불로문(不老門)' 세 글자는 참으로 아름다운 전서체다.

|애련정| 불로문으로 들어가면 석축으로 반듯하게 두른 네모난 애련지가 나오고 건너편에는 사방 한 칸에 사모지붕을 한 애련정이 있다. 숙종 18년 연못 가운데에 섬을 두고 세운 정자였으나 후대 어느 때인가 연못가로 옮겨졌다.

|석축에 새겨진 '태액'| 애련지 석축 한쪽엔 '태액(太液)'이라고, 전서체로 새겨놓은 글이 있다. '큰 물'이라는 뜻으로 이곳이 전에는 '태액지'라고 불리던 곳임을 알려 준다.

|의두합 기오헌| 기오헌은 의두합 누마루의 별칭이다. 그래서 『궁궐지』를 비롯한 문헌에 이 집은 의두합이라고 지칭될 뿐 기오헌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효명세자의 시호인 '문조'가 새겨진 어보| 고종은 효명세자의 공덕을 기려 문조(文祖)라는 시호를 내렸고, 어보를 제작해 '문조금보(文祖金寶)'라 새겼다.

|「무신친정계첩」에 나온 어수당| 「무신친정계첩(戊申親政契帖)」은 영조 4년(1728) 이조와 병조의 책임자들이 어수당에 모여 인사평가를 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순조 29년(1829)을 끝으로 사료에서 사라진 이곳은 창덕궁 복원공사를 한다면 가장 시급히 세워야 할 건물이다.

|연경당 장락문과 행랑채 전경| 연경당 대문인 장락문은 높직한 솟을대문으로 양옆에 바깥 행랑채(외행각)가 길게 뻗어 있다. 본채로 들어가기 위한 전실인 셈이다. 곧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한 호흡 고르게 하는 이 공간이 주는 권위는 아주 크다.

|농수정| 사방 한 칸에 사모지붕을 한 농수정이 숨은 듯이 자리잡고 있다. 작은 마당이 있고 주변으로는 연잎 장식의 돌난간을 돌렸다. 정자의 자리앉음새와 구조 모두에 깊은 건축적 사고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궐도」 연경당 부분| 연경당이 건축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구조가 긴밀하면서도 분리되어 있고, 건물들이 모두 단정하면서도 품위 있다는 점이다.

|「기축 진찬의궤」| 대리청정 기간의 효명세자는 기축년(1829)에 부왕 순조의 등극 30년과 탄신 40년을 기념하는 '기축 진찬의' 연회를 열었고 이를 의궤도로 기록했다.

|「기축 진찬의궤」 연경당 부분| 「기축 진찬의궤」에 따르면 효명세자 시절 연경당은 지금과 달리 디귿 자 모양의 큰 집이었고, 그 마당은 연회를 위한 야외 공연장으로 제격이었다.

|관람정| '연못에서 뱃놀이하며 구경하는 정자'라는 이름의 뜻이 형식을 지배해 건물 자체가 부채꼴 모양에 대단히 공예적이고 장식적이다.

|관람정 현판| 파초 잎에 글씨를 써놓은 듯한 이 현판은 관람정의 장식미를 한껏 높인다.

|존덕정| 인조 때 세워진 이래로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등 많은 임금이 이 아름답고 당당하고 기품 있는 정자에 와서 시와 문장을 남겼다.

|존덕정 내부에 새겨진 「만천명월주인옹 자서」| 정조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 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장문의 글이 존덕정에 잔글씨로 새겨져 있어 이 정자의 주인공이 되었다. '만천명월주인옹'이란 '만 개의 냇물에 비치는 달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정조대왕 「송별시축」| 정조가 1799년 임지로 떠나는 철옹부사에게 써준 송별시다. 정조의 부드러우면서도 절도 있는 필치가 잘 살아 있는 명품이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폄우사| 낮은 기단 위에 세운 홑처마 맞배지붕의 아담한 집이다. '폄우(砭愚)'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돌침을 놓아 깨우친다'는 뜻이니 여기서 쉬면서도 어리석음을 경계하라는 뜻을 담아 붙인 이름인 듯하다.

|취규정| 인조 18년(1640)에 세운 정자로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고 있는데, 창호와 벽체 없이 사면을 모두 개방해 시원스럽다. 느긋이 쉬기보다는 잠시 걸터앉기 좋은 분위기다.

|취한정| 그 규모나 모습이 취규정과 닮았는데, 홑처마 팔작지붕이고 가운데 칸이 양쪽 칸보다 현저하게 넓으며 사면이 벽체나 창호 없이 트인 점 등이 흡사하다.

|옥류천|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깊숙한 골짜기로 골이 깊고 물이 많아 마침내 천(川)이라는 이름까지 갖게 되었다.

|옥류천과 유상곡수| 달리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조원(造園)의 명작이다. 흐르는 물줄기를 원형으로 한 바퀴 돌려 홈을 파서 술잔을 띄우면 돌아가게 했다. 유상곡수 뒤쪽으로는 '소요암'이라는 이름의 듬직한 바위가 있다.

|소요정| 옥류천의 대장격인 소요정에는 성종과 선조의 어필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 것으로 보아 소요정은 임란 전부터 있었던 듯하다. 여기서 옥류천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다.

|옥류천의 정자들| 농산정, 태극정, 청의정, 능허정(위로부터)

|청의정의 천장 무늬| '청의(淸漪)'는 '맑은 잔물결'이란 뜻이다. 정자 안에서 천장을 바라보면 서까래들이 정연히 퍼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겉으로는 소박해 보이지만 디테일이 정교하여 더욱 매력적이다.

|신선원전 내부| 신선원전은 일반 관람이 허용되지 않는 관리 보호구역에 있는데, 선왕과 선후의 화상을 모시는 선원전 지역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천연기념물 제194호 향나무| 1404년 태종이 창덕궁 창건을 시작할 때부터 이 자리를 지켜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동쪽 가지가 꼬불꼬불 기형으로 자라 마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