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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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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13. 17:26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19 마티스 - 원색의 마술사


그자비에 지라르 지음, 이희재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1


082

시156ㅅ  26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6


순수한 색채, 단순한 선만으로도 이전의

대화가들보다 더 눈부신 빛을 창조한 화가 마티스.

대담한 원색의 구사로 인해 자칫 혼란스럽기

쉬운 화풍에 냉철하고 풍부한 지성으로 적절한 질서를

부여할 줄 알았던 마티스는, 인상파와는 또 다른

시각에서 빛과 색을 찾아내 사람들에게 원색의

마법을 선보인 가장 혁신적인 화가이다

 

Matisse, "Une splendeur inouie"

 

"마티스 이전에는

모든 그림이 빛을 발하지 않았다고

어떤 이는 말한다.

이것은 오류이며 불공평한 견해이다.

그러나 마티스의 그림 옆에서는 반 고흐,

르누아르, 모네, 터너의 그림마저 빛을 잃고 만다.

세계사의 어느 시점에서 한 화가를

그러한 존재로 인정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최소한 반세기 동안 이러한 영광을

부여받은 화가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림에서 빛을 볼 뿐이다.

그들은 인간성의 밤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창문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젊은 세대는 비로소 그들에게서

태양의 모습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루이 아라공,

1948년 필라델피아 예술박물관에서 열린

마티스 회고전 카탈로그 서문에서




 

차례

 

제1장 그림에서 맛본 희열

제2장 이국의 매력

제3장 색, 무용, 음악

제4장 거대한 아틀리에

제5장 "내 몽상의 대상"

제6장 완전한 통일

기록과 증언

참고문헌

그림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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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비에 지라르 Xavier Girard

마티스 미술관의 관장으로 있는 그자비에 지라르는 니스 대학교에서 예술사를 가르치고 있다. <아트 프레스> <아트 포럼> <갤러리 매거진>과 같은 미술 전문잡지에 비평을 기고하고 있으며, 프랑스 국내외 여러 박물관의 전시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유럽 회화와 조각에 관련된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고,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일본 등지에서 여러 차례의 마티스전을 시획했다.

 

옮긴이 : 이희재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30번 <고갱.과 <말하기의 다른 방법>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 <꿈과 상상의 여행> <추적> 등이 있다.

 

제1장

그림에서 맛본 희열

 

"내 삶의 줄거리에는 이렇다 할 사건들이 없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나는 1869년 12월 마지막 날 북부 프랑스의 르카토캉브레지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상인이었던 나의 선친은 아들이 법관이 되기를 원했으므로 나는 열여덟 살에서 스물두 살까지 생캉탱의 한 법률사무소 서기로 충실하게 일하려고 노력했다."

대대로 장갑을 만들고 가죽을 다듬어 온 집안에서 자란 마티스의 어머니(1887년 아들과 찍은 사진)는 가족상회에서 도료 파는 일을 맡았다. 마티스가 모자, 꽃(그녀는 도자기에 꽃을 그렸다). 장식미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티스가 '나의 처녀작'이라고 말한 이 작품(1890) 안의 법률책은 그림 때문에 방향전환을 해야 햇던 그의 인생을 상징한다.

"너무나 복잡하다네." 마티스는 자신이 베껴 그린 안 데 헴의 정물화 <식기대>(위)의 모사화(아래)를 피에르 쿠르티옹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마치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며 그린 듯해, 원작 안의 어떤 사물들을 귿도로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지. 그래서 나는 이젤을 방 맞은편에 놓고 마치 실물을 옮기듯 작업했다네." 이 모사화는 1955년 마티스가 '현대적 구성기법에 따라' 그린 대작 <데 헴의 정물 변주>의 바탕이 되었다.

1895년 마티스가 처음 브르타뉴를 방문했을 때 뵈제크카프시쥔에서 그린 <브르타뉴의 마을>은 카미유 피사로나 장 프랑수아 밀레에 여과되기는 했지만 마티스가 코로에 진 빚을 여실히 보여 준다. 풍경과 화가 사이에는 장매물이 놓여 있다. 마티스는 먼저 문제를 명확히 분석하면서 실마리를 풀어 나갔다. 역광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늘은 어떻게 철리할 것인가? 브르타뉴 아낙네를 집과 지붕과 첨탑으로 둘러싸는 것이 그 해결책이었다.

'등을 보이는' 초상화 중 첫번째로 그려진 <책 읽는 여자>는 코로의 화실과 흡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모델 카롤린 조블로가 마티스와 함께 살고 있던 살림방 겸 작업실에서 생활용품에 둘러싸여 있다.

1896년 벨일에서 찍은 마티스의 사진.

훗날 마티스는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레몽 에스쿨리에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모네가 작업했던 (탁 트인 <굴파르의 바다 경치>(1896)에 보이는 벨일의 거친 해변에서 일했습니다. 당시 내 팔레트는 진한 갈색과 황토색이 고작이었던 반면 베리는 인상파다운 팔레트를 갖고 있었어요.…… 나는 순수색의 광채가 지닌 마력에 눈을 떴습니다.


제2장

이국의 매력


"나는 어디서나 스스로를 탐구했다." 마티스는 나중에 자신의 형성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같은 인상파 화가를 조심스럽게 흉내내려는 시도에서부터 빈센트 반 고흐와 오딜롱 르동에게 영감을 받아 자극적인 색을 쓰느 데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적 가능성을 탐구했다. 폴 세잔식의 공간구성을 모방했고 신인상파 화가 폴 시냐크의 충고에 따라 색을 실험하기도 했으며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의 평온한 세계를 따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길을 열어 준 것은 마티스 자신의 직관이었다.

그림의 제목인 <호사, 평온, 관능>(1904~1905, 부분화, 위)--샤를 보들레르의 시구에서 따왔다--은 풍경과 여인들의 나체가 빚어내는 자연스러운 조화에서 샘솟는 열락의 상태를 나타낸다. 마티스가 처음으로 그린 자화상(1900~1903, 아래)은 램브란트에게 영감을 받았다.

"귀스타브 모로의 화실에 있는 동안은 결코 인물화를 그리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라고 마티스는 루이 아라공에게 말했다. "그래서 정물화에다 인물을 집어 넣았지요." 피사로에게서 영감을 얻은 <저녁 식탁>(첫번째, 1896~1897)의 인상주의 기법은 그 자체로도 마티스가 따로따로 탐구해 온 그림의 두 유형을 결합했다는 데서 참된 의미를 갖는다. 두번째는 <벨일의 르팔레 항구>(1896)이고, 세번째와 내번째는 1896년의 앙리 마티스아멜리 파레르이다.

브르타뉴 여행을 통해 마티스는 외광 풍경화(plein-air landscape)에, '자연에 깃들인 빛의 계시'에 처음으로 눈떴다. 색채로 들끓는 코르시카의 전원에서 그는 빛의 구체성을 복원할 필요성을 느꼈다. 충만하면서도 집중된 <아작시오의 방앗간 마당>(1898)은 '무지개 빛깔'로 가득 찬 마당에 쏟아지는 빛의 효과를 나타내려는 시도였다.

마티스의 친구들은 대부분 화가였다. 샤를 카무앵과 알베르 마르케(위), 앙리 망갱(아래).

<첫 오렌지 정물>(1899)에서는 반 고흐, 고갱, 시냐크의 영향이 드러나고 있다. 인상파의 '미묘한 색채점이(漸移)'가 여기서는 오렌지라는 지배색에 압도되어 잇다. 기욤 아폴리네르는 이 오렌지를 '빛으로 터질 듯한 과일'이라고 묘사했다. 대상들은 오렌지의 공격에 저항하려는 듯이 중앙에 모여 있다.

마티스가 창가에서 내려다보곤 하던 다리는 도시풍경 연작(1900~1905)에 나타난다. 마르케가 비슷한 도시풍경화에서 선호했던 뿌연 유백광은 사라지고 군데군데 그대로 노출된 캔버스의 환한 역광 위에 색을 빠르게 흩뿌리는 기법이 나타난다. 이 그림은 1900년경에 그려진 <생미셸 다리>이다.

세잔의 <목욕하는 세 여인>(1879~1882경)처럼 마티스의 뇌리에 오래 남아 있던 작품도 드물 것이다. 마티스는 1899년 이 작품을 사들인 뒤 프티팔레 미술관에 기증할 때까지 37년 동안이나 소장했다. 인물과 풍경이 군더더기 없이 융합된 세잔의 그림에서 구현된 엄격한 예술적 총체성은 시각적 실재성을 압도하고 있다.

펠릭스 페네옹이 예고한 '태양의 광포한 승리'에 마티스는 도취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마티스는 빛을 다스리는 쪽을 택했다. 마르케와 상징주의 화가들이 준 교훈에 따라 마티스는 깊이감을 상쇄시키기 위해 <역광이 있는 정물>(1899)에서 역광을 이용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온몸이 울퉁불퉁한 <농노>(위는 팔이 제거되기 전의 모습, 아래는 제거된 후의 모습. 1900~1904)는 색을 통해 공간이 평면화되고 균일화되었던 캔버스화와 대조를 이룬다.

앙브루아즈 몰라르는 1904년 6월 처음으로 마티스 개인전을 대규모로 열었다. 그는 마티스가 화랑과 계약을 맺지 못하고 있을 때 그의 초기작 가운데 다수를 구입했다.

마티스의 작품은 무엇보다도 작업이 발전하는 공간이다. <풍금이 있는 실내>(1900)처럼 거듭 손질된 작품은 계속되는 재구성의 과정을 생생히 보여 준다. 처음 그림에서 풍금의 왼쪽 하단은 앞으로 쏠려 있었고 바깥쪽으로 벌어져 있었으며 뚜껑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뚜껑의 가장자리는 아래로 향하는 화살과 같았다. 방의 안쪽을 향해 밀고 들어가는 꽃다발이 균형을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전경의 책은 더욱 바닥으로 하강하는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폴 시냐크(1907년경).

<생트로페의 테라스>(위, 1904)를 둘러싼 폴 시냐크와의 갈등은 마티스로 하여금 같은 해에 <생트로페만>(아래)을 그리게 만들었다. 두 그림의 차이점에서 우리는 마티스가 의도적으로 후퇴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러나 신인상주의로의 복귀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생트로페만>은 생트로페에서 처음 그려진 지중해 풍경화들에서는 무시되었던 그 '황홀한 해안'으로 마티스가 다시 관심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호사, 평온, 관능>(1904~1905)은 마티스의 작품을 지탱하는 세 가지 근본적인 주제-고대, 가족, 풍경-를 느린 이동 촬영 장면처럼 펼쳐지는 구성 안에서 결합하고 있다. "이것은 순수한 무지개 빛깔로 그려진 그림"이라고 마티스는 나중에 썼다. "그 유파(신인상파)의 모든 그림은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 약간의 분홍, 약간의 파랑, 약간의 녹색으로 이루어진 너무도 제한된 그들의 팔레토가 내 마음을 썩 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콜리우르? 거기에는 여자, 배, 바다, 산이 있다."고 드랭은 1905년에 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빛이 있다. 그늘을 드리우는 황금빛 햇살." <콜리우르의 실내(시에스타)>(1905)에서 마티스는 바다가 굽어보이는 방에서 바닷가 마을의 빛을 담았다. 그의 의도는 한낮의 대상이 띠는 색채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꿈결이나 채색파 화가의 실험에서 볼 수 있는 가벼운 회오리운동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 운동은 벽과 마루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그림자와 반사광을 흐트러뜨리며 색채의 원 안으로 실내와 실외를 감싸안는다. 풍경은 방 안으로 살그머니 들어와서 잠자는 여인의 꿈속으로 녹아들었다.

 

 

"(이것이) 외부세계와 바다와 내부세계를 결합할 수 있었다면." 마티스는 <콜리우르의 열린 창>(1905)을 이렇게 평했다. "그것은 풍경의 분위기와 내 방의 분위기가 바로 하나였기 때문이다."

마티스는 1905년 여름에 <콜리우르의 풍경>을 그렸다. "잠시 야수파에 젖어 있을 동안 우리는 모든 색채를 빠짐없이 강렬하게 처리하고 그중 아무것도 희생시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닮은꼴로 그린 <마티스 부인의 초상/녹색 줄무늬>(아래, 1905)에서도 그랬지만 마티스는 <모자를 쓴 여인>(위, 1905)에서 모자, 얼굴, 일본 부채를 병치하여 위대한 초상화가인 마네, 르누아르와 자웅을 겨루려 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뚜렷하고 특징적이며 강렬하지만 서로 삐걱거리는 야성적인 색의 배합으로 나타내려고 했다.

그림 안에 그림들이 담겨 있는 듯한 복잡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선사시대 동굴벽화와 그리스 신화에서 스테판 말라르메와 파리의 카바레에 이르는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주제와 이미지를 차용한 <삶의 기쁨>은 <호사, 평온, 관능> 이후 그림으로 표명한 마티스의 가장 중요한 발언이다. 다섯 달 동안 작업해 완성한 이 작품은 원래 독립적으로 구상되었다가 나중에 식물의 모티프로 설정된 무대 안에서 시각적 연상효과를 낳을 수 있게 배열된 이미지들로 구성되었다. 마티스는 콜리우르의 약동하는 풍경을 장식적인 분위기에 담아, 화가 에두아르 뷔야르가 만들었던 상징주의적 무대를 연상시키는 평면적이고 선적인 에덴 동산을 연출했다. 섬세한 운율과 연상으로 가득 찬 이 그림의 구성은 마치 말라르메의 시구처럼 펼쳐진다. 흩어지는 파편들을 하나로 모으는 효과를 낳는 무희들의 군무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의 모호성과 궁극적인 불확정성, 그리고 이것과 결부된 상징주의적 뉘앙스는 이 시기의 마티스가 아직은 과도기에 머물렀던, 잠재력으로 충만한 화가였음을 암시한다.

 

제3장

색, 무용, 음악

 

1906년 5월, 콜리우르로 돌아간 마티스는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 그릴 생각"이라고 밝혔다. 사람들이 그를 야수파로 이해하던 바로 그 무렵에 마티스는 조각과 도자기에 손을 댔고 그 작업을 캔버스에다 옮겼다. 마티스의 그림은 이내 순수하게 장식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생각이었다."고 그는 몇 년 뒤에 말했다.

<붉은 조화 / 식탁>(1908, 일부)에서 마티스는 현실에서 관찰한 대상들의 일관성을 장식적 추상성과 조화시켰으며, 육체성이 결여된 선을 무게 및 양감과 조화시키기 위해 조심스럽게 색을 사용했다.

<비스듬히 누운 나부 Ⅰ>(1906~1907)은 우여곡절 끝에 <푸른 나부 : 비스크라의 추억>으로 발전했다.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

야수파 아리아드네. 아프리카의 거대한 오달리스크. 요정 님프가 하나로 결합된 <푸른 나부 : 비스크라의 추억>은 모순된 요소들을 병렬한 다음, 이 인물의 형태적, 상징적 효과를 크게 강조하는 방식으로 그 요소들을 짜 넣고 있다. 이 인물이 피카소, 드랭, 조르주 브라크의 그림에서 거듭 나타난다는 사실은 이 그림이 초기 입체파의 이미지에서 차지하는 막중한 비중을 웅변적으로 드러낸다.

포도덩굴과 포도송이로 둘러싸인 님프(1907)는 오스트하우스 저택의 장식용으로 제작된 3면 도예화의 왼족 부분이다. 이것은 <푸른 나부 : 비스크라의 추억>을 장식화로 옮긴 셈이다.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채색 광택 타일로 된 벽화는 조그만 방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되었지만 마티스의 후기 작품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친다.

마티스, 아내, 딸 마르그리트가 1907년 여름 콜리우르의 작업실에서 여러 점의 미완성 작품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위) 1908년 오톤 살롱 전시회에 출품된 마티스의 조각 <두 여인>(아래, 1907)은 아프리카 조각이나 고전 조각이 두 인물을 다루는 방식을 결합하고 있다.

<호사 Ⅰ을 위한 습작>(위, 1907)과 <호사 Ⅱ>(아래, 1907~1908).

 

<삶의 기쁨>를 좀더 장대한 규모로 재현한 두 개의 <호사>는 세잔의 <사랑에 빠진 양치기>를 고갱과 퓌비 드 샤반의 시각을 통해 장식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생트로페만과 비슷한 이 한적한 해안에 비너스를 닮은 자연미에 충실한 인물, 쪼그려 앉은 숭배자, 화환을 든 제3의 여인이 있다. 성적인 수수께끼는 이 목가적인 분위기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마티스가 이 낙원의 정경을 위해 창조한 장식적인 여인들은 우아하고 담백한 미적 이상을 발산한다.

<나무공 놀이>(위, 1908)와 <거북이와 목욕하는 세 여인>(아래, 1908)에 나오는 장대한 장식적 인물들은 세잔의 <세 명의 해수욕객>과 일맥상통한다. 마티스는 세잔에게서 영감을 받은 피카소의 큐비즘에 맞서 조화롭고 표현적인 신체의 움직임을 강조하는 이 기념비적인 구성을 내놓았다.

파리의 스타인 부부 아파트에 모인 미카엘 스타인과 사라 스타인, 마티스, 알랑 스타인, 한스 푸어만(위, 1907경). 마티스(중앙)와 학생들(아래, 1909~1910). <붉은 조화 / 식탁>(가운데, 1908)에서 빨강은 색채가 갖는 무한한 잠재력을 탐구하고 있다.

"나는 (그림을) 보완하려는 시도로 조각을 했다."고 마티스는 술회했다. 그는 <춤 Ⅰ>에 나오는 인물들의 약동하는 활기찬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의 발을 조각으로 탐구했다(1909).

"아뇨, (춤의) 주제는 벽에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1951년의 인터뷰에서 마티스는 말햇다. "나는 남달리 춤을 좋아하고 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본답니다. 표현력이 풍부한 움직임, 율동감 있는 움직임, 내가 좋아하는 음악 따위를요, 춤은 내 안에 있었습니다." 마티스는 1909년 3월 유채 스케치, <춤 Ⅰ>를 그린 데 이어 이듬해 봄에는 같은 주제를 좀더 강렬하게 그렸다. <음악>(아래, 1909~1910).

 

제4장

거대한 아틀리에

 

마티스가 <대화>에 착수한 1908년 가을부터 이 작품을 완성한 1912년까지 그의 그림으로 파란색이 쇄도해 들어온다. 또 하나의 장식적 문턱을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마티스의 작업실은 우리가 예술이라고 일컫는 초월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는 단순한 배경이나 무대의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그곳은 고독, 행동, 명상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으며, 독보적인 색의 공간이었다.

<제라늄이 있는 정물>.

잔 바드랭을 모델로 한 <처녀와 튤립>(1910)에서 마티스는 회복기에 들어선 환자의 모습과 만개하기 직전의 튤립을 짝지우고 있다. <자네트> 연작 조각들처럼 이 작품은 식물의 자연스러운 생명력과 신체에 내재된 유기적인 치유력을 상징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튤립은 생명선의 구실을 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모델에 불어넣고 있다.

<춤이 있는 정물>을 그리는 마티스(1909년).

1910~1911년, 마티스가 <세비야 정물>(위)과 <스페인 정물>(아래)을 세비야의 임대 작업실에서 그리고 있었을 때, 그의 기억 속을 또렷이 맴돌던 것은 뮌헨의 이슬람 미술전에서 보았던 양탄자와 벽걸이 장식의 풍요로운 색채였다. 그림에서 현실의 꽃송이는 인공의 세계 속에 파묻혀 버리다시피 했다. 직물 위에서 물결치는 꽃무늬에 압도당한 그림 안의 꽃병은 활기찬 장식미와 정감 어린 메시지를 상징하고 잇다. 벽 전체는 꽃의 붉은 빛깔로 처리되어 있다.

<마닐라 숄>(1911)은 마티스의 관심이 '현실의 제라늄'을 묘사하는 데에서 꽃무늬의 인상적인 반복으로, 꽃잎의 붉은색에서 타오르는 정염을 간직한 붉은색으로 바뀌었음을 보여 준다.

마티스 미학의 훌륭한 전범이 되는 <대화>(1908~1912)는 많은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피에르 슈네데는, 이 그림이 일상생활의 한 장면(마티스 부부의 말다툼)을 창문의 '중심적인 순수성(central purity)'이 지배하는 비잔틴 시대의 성화(聖畵)로 승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슈나이더에 따르면 이 작품은 "그림이라는 종교가 주는 일종의 계시이다." 예술사가 잭 플램은, 이 그림의 구성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고대 함무라비의 석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만, 주제는 현대 화가의 독백"이라고 주장한다. 발코니 격자는 'NON(부정어)'으로 읽히는데, 이것은 그림에 나오는 부부뿐 아니라, 순전히 시각적인 그림의 한계로 말미암아 장면으로부터 단절된 감상자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두 해석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점은 <대화>가 마티스의 작품세계 전반을 대변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작품과 짝을 이루는 <붉은 조화>가 파란색으로 출발했으며 <대화>의 관능적인 붉은색이 추상적인 파란색으로 덮여 있음을 알고 있다. 색은 화가의 내밀한 감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힘을 잃지 않고 있다.

"식구들 생각만 하면 골치가 지끈거린다." 마티스는 1911년 5월 26일 <화가의 가족>(1911)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썼다.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지만 그림 속에서는 그런 갈등의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피에르와 장은 체스를 두고 있고 마티스 부인은 뜨게질을 하고 있으며 마르그리트는 한손에 책을 들고 있다.

1911년에 마티스가 보낸 엽서로 <화가의 가족>의 스케치가 보인다.

세르게이 슈추킨.

<붉은 조화>가 그랬듯이 <붉은 화실>(1911)도 원래는 황토색이 악센트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실내는 전체적으로 파르스름한 빛깔이었다.

탕헤르만을 살피는 마티스(1912).

마티스는 <탕헤르의 정원>(1912)을 그린 별장의 정원을 이렇게 묘사했다. "드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우뚝우뚝 솟은 우람한 나무들을 보고 할 말을 잊었다. 키 작은 아칸서스는 또 얼마나 우거져 있던지, 그 화려한 자태란 마치 내 관심을 끌려고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탕헤르의 정원>은 모로코의 정원을 그린 석 점 가운데 하나이다.

<성문><창에서 바라본 풍경>(1912~1913)은 이반 모로소프의 요청에 따라 제작되었다. 이 창을 통해 바라본 모습은 '파란 풍경'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두번째로 탕헤르를 찾았을 때 마티스는 원래 연한 녹색과 분홍색을 띠고 있던 그림의 색조를 시원한 청색으로 바꾸었다.

그는 대형 유화인 <테라스에서>(1912~1913)를 위의 두 그림과 함께 이른바 모로코 3부작으로 구성하려고 처음부터 생각한 것일까? 어쩌면 조라의 오빠들이 누이의 모델 노릇을 방해할까 봐 미리미리 그려 두었는지도 모른다. '끊기지 않는 몽상'의 상태에 놓인 모델을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파악하는 시간이 지난 뒤 마티스는 처녀를 러시아 성화에 등장하는 성모의 이미지로 변형시켰다.

전쟁이 고조되었을 무렵, <금붕어와 팔레트>(1914)는 화가의 작업이 능동적이며 건설적인 내용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1913년 5월, 사진가 알뱅 랑동 코뷔른이 이시레물리노 화실에서 대작 <강가의 물놀이>(맨 아래)를 그리고 있는 마티스의 모습을 잡았다. 마티스가 1909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이 그림은 1916년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그림의 건축적 형태는 입체파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에 화답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강조점은 분명히 장식적 원시주의에 놓여 있다. 슬그머니 들어오는 뱀을 보고도 꿈쩍하지 않는 이 세잔풍의 인물들에서는 퓌비 드 샤반과 로댕의 영향력도 감지된다.

1914년 마티스는 피카소를 더욱 자주 만났고 후안 그리스와 가깝게 지냈다. 아내 조제트와 함께한 후안 그리스.

1914년 초에 비평가 모리스 레날의 아내 제르맨이 <높은 걸상 위의 여인>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알베르 랑스베르는 뒤에 <이본 랑스베르 양의 초상>(1914)-처음에는 동판화로 제작되었다(아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누이가 모델이 되었던 첫날에는 그림 속의 인물과 모델이 아주 비슷했지만, 점점 그림이 추상적으로 바뀌었다. …… 작업이 계속 진행될수록 그림 속의 인물은 육체적으로는 누이와 점점 다른 모습을 띠어 갔지만, 나는 거기서 누이의 영혼을 읽을 수 있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처음부터 색채는 탁월했다. 표면을 가로지르는 신비로운 하얀 선들의 바탕을 이루는 강청색(鋼靑色), 철회색(鐵灰色), 검은색, 주황색, 흰색이 인상적이었다." 마티스는 나중에 이 선들은 "공간에서 차지하는 폭을 넓히기 위해 내가 인물 주위에 마련한 구조적인 장치였다."고 말했다.

미술평론가 펠릭스 페네옹(스위스 화가 펠릭스 발로통이 그린 모습)은 마티스의 오랜 후원자였다. 마티스가 1909년 9월 베르냉 화랑과 계약을 맺은 것도 페네옹의 소개 덕분이었다.

"우리는 리얼리즘 운동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마티스는 1909년에 말했다. "리얼리즘 운동은 약간의 원자료를 확보했다. 자료는 준비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그것을 조직하는 대대적인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마티스의 눈에 들어온 입체파의 중요성은 <얀 다비드스츠데 햄의 '식탁'을 닮은 정물>(1915)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브라크와 드랭이 전선으로 떠난 뒤 착잡한 심정에 빠졌던 피카소는 전통에서 위안을 찾앗다. <작업실의 화가>(1916)에서 마티스는 자신이 2년 전부터 탐구하기 시작한 형태적 단순성을 더욱 밀어붙였다. 전쟁중에도 화가와 모델 사이에 오가는 정감 어린 대화는 계속되었다. 분명히 각도는 예각으로 변했으며, 전망이 단절되어 있고 천장이 낮은 비좁은 방은 대조적인 부분들로 분할되었다. 그러나 비록 몸은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화가가 전하려는 중심 메시지는 여전히 살아 있다.

<피아노 교습>(1916)에서 마티스는 젊은 초심자이건(피아노 앞에 앉은 그의 아들 피에르처럼) 원숙한 경지에 올라 있건 모든 화가가 당면해 있는 가장 큰 과제는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다.'라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제5장

"내 몽상의 대상"

 

"모든 게 거짓말 같고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고 매혹적이다." 마티스는 1917년 말 니스에서 묵었던 호텔방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호텔 방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던 장식성은 그가 남태평양으로 떠날 때까지 마티스의 작품세계를 지배한다.

 

앙리에트 다리카레르는 <장식적 배경 위의 장식적 인물>(위, 1925~1926)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림이라는 공간 안에 대상으로 묘사된 익명의 모델로만 머물지는 않았다. 그 자신이 화가이며 음악가였던 다리카레르는 그림이라는 극장에서 마티스와 협연했으며(아래, 1921년 작업실에 함께 있는 두 사람), 그의 모델 중에서도 남다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고 거리를 둠으로써 마티스는 고독과 함께 찾아오는 내밀함을 다시 포착할 수 있었다. <자화상>(1918)에서 화가의 과장된 엄지와 삐죽 솟은 붓은 그의 잠재된 창조력을 상징한다.

마티스는 한때 <바이올린이 있는 실내>(1917~1918)를 '가장 아끼는 그림'이라고 했다.

마티스는 1918년 <창가의 바이올린 주자>를 그렸다.

마티스는 카뉴쉬르메르 부근에 있던 노화가 르누아르의 레콜레트 별장을 방문했다. 사진 윗줄 가운데에 마티스가 있고, 그의 왼편으로 마티스의 아들 피에르와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보인다.

"모자에 타조 깃털을 단 젊은 여인의 초상화를 보라." 마티스는 <깃털 모자>(1919)를 가리키면서 말햇다. "깃털은 하나의 장식이며 장식적 요소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깃털은 연장(延長)을 만지면 느껴질 듯한 가벼움을 지니고 있다. 훅 불면 날아갈 듯한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느낌……. 나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한꺼번에 전달하고 싶었다. 내가 하나의 주제 앞에서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집약해서 보여 주고 싶었다."

앙리에트 다리카레르와 마르그리트 마티스는 <무어 병풍>(위, 1921)의 모델이었다. <정원 다과회>(아래, 1919).

세르게이 디아길레프(1916).

미켈란젤로의 <밤>(위)은 마티스의 <대형 나부 좌상>(아래)에 영감을 주었다.

수많은 오달리스크를 그렸던 작은 무대에서 앙리에트 다리카레르를 그리고 있는 마티스. 그는 알록달록하고 울긋불긋한 커튼을 잘 활용했다.

세 점의 '머리 표현' 연작 중 가장 뛰어난 두번째 작품 <앙리에트 Ⅱ>(1925~1926).

<터키 의자에 기댄 오달리스크>(1927~1928). "이 오달리스크들을 자세히 보라."고 마티스는 썼다. "현란한 햇살이 밀려 들어오고 있다. …… 이제 실내의 동양적 장식, 커튼과 양탄자의 배열, 화려한 의상은 …… 우리를 속일 수 없다. …… 커다란 긴장이 끓어오르고 있다. 그것은 다양한 요소들의 상호작용에서 야기된 특스한 그림의 질서가 낳는 긴장이다."

마티스는 남태평양으로 떠날 때 미처 끝내지 못한 <노란 드레스>(1929~1931)를 니스로 돌아온 다음 마무리했다. 여행은 새로운 요소를 이 그림에 덧붙여 주었다.

 

제6장

완전한 통일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창작자가 자기의 삶을 작품에 불어넣는다는 점에서는 말이다. 그때 예술품은 마치 자연물처럼 풍요하고 보는 이를 전율로 몰아넣는 힘 - 그 눈부신 아름다움 - 을 가진 것으로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마티스는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954년에 가진 한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위대한 사랑이 필요하다. 진리를 향한 그 끈질긴 탐구, 그 타오르는 열기, 모든 작품의 탄생에 필수적인 그 분석의 깊이를 고취시키고 유지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그런 사랑이.

니스 레지나 호텔의 화실에서 작업에 몰두해 있는 마티스(위, 1952). 1948년에 그린 어느 책의 삽화. 담배항아리 속의 꽃(아래).

니스의 빈 차고에서 <춤>의 초기 미완성작을 스케치하고 있는 마티스(위, 1931). 마티스는 최초의 완성작(아래)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그가 완성한 벽화는 1933년 반스 재단 중앙 홀에 설치되었다. 이 홀에는 이미 세잔의 <카드 놀이 하는 사람들>, 르누아르의 <화가의 가족>, 쇠라의 <모델들> 등 주옥 같은 걸작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빛이 잘 드는 곳에 설치된 마티스의 벽화는 홀 맞은편에 있는 두 개의 발코니와 회랑 바닥에서 볼 수 있었다-마티스에 따르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마티스는 "벽화가 홀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홀에 전시된 그림들에게 숨쉴 수 있는 공간의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세심한 신경을 썼다.

<춤 벽화를 위한 습작>(1930~1931). 초기의 작은 유화 습작으로 미완성상태에서 둘둘 말려 한곳에 치워져 있다가 1992년에야 재발견되었다.

1935년 5월에서 10월까지 마티스는 오려 낸 종이들로 공간과 색채의 '양적'조화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누워 있는 대형 나부 / 분홍색 나부>를 제작했다. 여러 달 동안 작업이 계속되면서 애초에 실제 모델에 바탕을 두었던 자연주의적 중간그림들은 장식성이 돋보이는 기념비적 작품인 최종작(아래)으로 발전했다. 화가는 이 작품의 발전과정을 사진에 담아 두었는데, 완성까지 모두 20여 단계를 거쳐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위 사진은 마티스의 비서 리디아 델렉트로스카야가 1935년 10월 15일이라고 적혀 있는 중간그림을 지우고 있다. 미완성작 <타히티의 창가 Ⅰ>이 그녀 뒷벽에 걸려 있고 <동 Ⅳ> 석고상이 배경에 놓여 있다.

"<숲 속의 님프>는 원래 태피스트리를 위한 디자인으로 구상되었다. 애초에 그림의 주제는 말라르메의 시집을 위해 1931년에 제작된 동판화였는데, 그때는 구도가 거꾸로였고 인물도 등장하지 않았다." 리디아 델렉트로스카야는 이렇게 증언했다.

<음악>(1939)에서 마티스는 1930년대에 즐겨 쓰던 방법을 다시 도입하면서 기존의 주제를 확장하고 있다. 전에는 엘렌 갈리친 혼자서 기타를 치고 있었지만 여기에는 두번째 인물이 추가되었던 것이다.

마티스가 걸상에 올라가 <숲 속의 님프>를 그리고 있다(1941). 그림 속의 나무줄기가 방공 탐조등이 내쏘는 빛줄기와 비슷하다. 세계는 온통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피리를 든 님프와 파우니>(1940~1943).

1939년 8월 파리에서 완성된 <검은 배경의 책 읽는 여인>.

<파란 여인>(1937)에서 리디아 델렉트로스카야는 러플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해에 마티스는 러플이 달린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자주 화폭에 담았다.

마티스는 친구에게 <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나는 어여쁜 루마니아 블라우스를 발견했지. 공주나 입었을 법한 빛바랜 붉은 장식이 달린 블라우스 말이야. 그런 블라우스를 더 구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가 아끼는 그림과 바꾸었을 거야. 이 그림을 완성하는 데 1년이 걸렸다네.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대충대충 그린 것으로 착각할지 모르지만 말이야."

1939년 파리의 작업실에서 모델 빌마 자보르를 스케치하고 있는 마티스. <검은 배경의 책 읽는 여인>에도 그녀가 등장한다. 마티스 뒤편으로 그가 눈을 감고 그린 자화상이 보인다.

1938년 11월. 마티스는 레지나 호텔로 작업실을 옮겼다.

"요즘 들어 내가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그림이다." 1941년에 마티스는 <목련이 있는 정물>을 이렇게 평했다. 부분에 따라 색채에 따라 이러저러하게 인쇄효과가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꼼꼼하게 손수 써서 《베르브》지 제판공에게 보낸 작업지시서는 이 작품을 그가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를 알려 준다. "(중앙의 화병) 왼쪽 손잡이는 베네치안 레드에 검정 윤곽선, 오른쪽 손잡이도 베네치안에 검정 윤곽, 바닥은 황토색과 흰색, 주전자 바닥은 진홍색으로 그러데이션을 주고 부드러운 선황색을 한 겹만 입힐 것."

1942년 9월 26일부터 마티스의 간호사로 일하기 시작한 모니크 부르주아는 곧 마티스의 수많은 그림에 등장한다. <우상>은 1942년 12월에 그려졌다. 마티스는 그녀가 자크 마리라는 이름을 받고 수녀가 된 다음에도 "장난기 섞인 연애"를 즐겼다. "마치 둘이서 꽃송이를 던지고 받으며 노는 것 같았다."고 마티스는 술회했다. 두 사람의 다정한 관계는 방스 성당을 지을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방스 성당의 <십자가의 길>(위)을 위한 밐그림은 "샘솟는 영감의 도움을 받아" 불과 두 시간 만에 그려졌다. 아래 사진은 아직 완공되지 않은 예배당에 앉아 있는 마티스.

얼굴없는 성자의 모습으로 정신적 고행을 상징하는 <성 도미니코> 벽화의 착수에 앞서 수많은 습작들이 그려졌다. 어떤 것은 작업실 벽에 실물과 똑같은 크기로 그려지기도 했다. 마티스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전통에 어울리는 성자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다양한 시도 끝에 도미니코 수도회의 이상이 가장 잘 반영된 형상을 창조할 수 있었다.

만년의 마티스는 커다란 채색지에다 가면처럼 생긴 얼굴을 수없이 많이 그렸다(<가면>, 1950). 그는 이 그림들을 화실 벽에 오려 붙인 종이들 사이에 걸어 유기적 모티프를 구성했다.

<푸른 나부 Ⅳ>(1952)에 보이는 목탄 선은 1951년 9월에서 1952년 6월 사이에 그린 일련의 종이 누드에도 등장한다. 이것은 이 작품이 많은 준비단계를 거쳐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끝없는 성장과 발전의 과정이 생명을 더 높은 단계로 고양한다고 말했다. 베르그송이 말한 엘랑 비탈(elan vital), 곧 생명력을 표현한 <다발>(1953)은 분명 활력으로 용솟음치고 있다.

<재즈>에 나오는 <광대>(1947).

발로리의 라갈루아즈 집에서 포즈를 취한 피카소와 프랑수와즈 질로(1951).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마티스의 사진(1944).

니스 레지나 호텔에서 마티스가 키우던 새. 평론가이자 시인인 앙드레 베르데가 레지나 호텔을 방문한 뒤 이렇게 썼다. "그 커다란 방에는 모두 300마리가 넘는 새가 있었다. 잉꼬, 개똥지빠귀, 비둘기, 그리고 흔히 볼 수 없는 희귀조들이 살고 있었다."


 




posted by 황영찬
2015. 2. 13. 14:47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18 만인보 


高銀

1996,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798


811.6

고67만  10


창비전작시----------------------------------------------------------------------


큰 명제에 대한 시대적 일탈이 여기저기서 눈여겨지는 때에 시와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이 있어야겠다. 그것은 근원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뜨겁게 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접어두고 나서 나는 그 이념의 혐의와 상관없이 먼저 인간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이나 사회 · 역사 · 문명 전반에 대한 통합적 인식이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는 사실에 새삼 눈떠야 했다. 인간의 실존적 정화 내지 승화만이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고비들을 넘기는 일의 시작이라는 것도 거기에 포함된다.

세상에 어디 '시적 인간'의 가능성이 그 싹수마저 보이고 있느냐라고 고개를 젓지 말기 바란다. 바로 이런 판에서 시인보다 먼저 시적 인간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므로.

다만 그런 인간에게서 메시아적이기보다 연인적이기까지 한 친화를 경험하는 것이 창조의 축복과도 닿아 있을 터이다.

「머리말」에서


고은(高銀)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눈길」「천은사운」 등을 추천받아 등단.

1960년 첫시집 『피안감성』 간행. 이후 시 · 소설 · 수필 · 평론 등에 걸쳐 100여 권의 저서 간행.

1984년 『고은시선집』 간행.

1986년 『만인보』 간행 시작

1987 ~ 94년 서사시 『백두산』 간행.

제3회 만해문학상, 제1회 대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등 수상.


차례


머리말

함석헌 / 전태일 / 육영수 / 늙은 절름발이 / 우의정 한효순 / 이소선 / 김대중 / 차인출 / 윤반웅 / 증  살 / 계훈제 / 이상훈 / 이돈명 / 문재린 / 설  총 / 김수환 / 천관우 / 안국동 / 서대문 현저동 노인 / 허병섭 / 장준하 / 이인영 / 선우휘 / 관철동 삼일여관 / 박고석 / 서울역 지게꾼 / 원각사 행자 / 정연주 / 이우성 / 이문영 / 유일한 / 공중변소 낙서꾼 / 마니산 참성단 / 이응로 / 정경화 / 윤이상 / 지명관 / 김이옥 / 강원룡 / 두 의사 / 강운구 / 오종우 / 산중 혁명 / 황인철 / 문국주 / 대원암 탄허 / 막걸리반공법 / 서경덕 / 이해학 / 장기표 / 김  윤 / 연산군 / 함세웅 / 남정현 / 안병무 / 박난주(朴蘭州) / 길진섭 / 대전발 0시 50분 / 봉천동 이씨 / 노동자 김진수 / 청진동 옥자 / 안수길 / 지석영 / 정구영 / 칠보 들노래 / 홍성우 / 대법정 정리(廷吏) 김두식 / 고영근 / 곽태영 / 김홍도 / 권호경 / 김승훈 / 최일남 / 홍남순 / 강세황 / 가짜 문둥이 / 화곡동 수리공 / 이종찬 장군 / 유진오 / 신상초 / 최정호 / 신선시 / 이규태 / 오충일 / 정경모 / 김정한 / 김숭경 / 유원식 / 문익점 / 박명호 / 박철웅 / 박철웅 / 목요상 / 만일제 / 박목월 / 고상돈 / 정태기 / 이희승 / 고선지 / 김종철 / 낭만 아가씨들 / 광주 조아라 / 차순이 / 대왕암 / 김윤수 / 김병곤 / 청계천 뚝방 홍씨 / 김지하 / 성삼문 / 소년수


함석헌


하얀 머리칼 나부낀다

찬바람 분다

하얀 수염 나부낀다

찬바람 분다


오로지 섭리의 역사

하얀 두루마기

하얀 고무신

성큼 한걸음 나서노라면


거기가

이 나라의 갈숲

하얀 갈꽃이 소리쳐 피어오른다


집안에는 깨어진 꽹과리 따위

대야에 담긴 얼음 따위지만

세상에 성큼 나서노라면


그에게는 끝내 글이 없다

있는 것은

어제도 오늘도허위허위 쉬지 않는 말


이 나라의 수고 많은 하늘 아래

그의 뒷모습까지도 말이었다

하얀 머리칼 나부낀다

찬바람 분다


전태일


그의 죽음은

너의 시작이었다

나의 시작이었다

하나 둘 모여들어

희뿌옇게

아침바다의 시작이었다


그는 한밤중에도 우리들의 시작이었다


육영수


1974년 8월 15일

그녀는 국립극장 단상에서 쓰러졌다

한 송이 백목련이라고

한 마리 날개 접은 백학이라고

그녀의 죽음은 고개 숙여 받들어졌다


그 정치적 산화(散華) 이후

남편은 황량한 때를 말갈기로 달렸고

딸들과

아들은 하나하나 고아가 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난 성장에 바쳐진 슬픈 가족이었다


그녀는 드물게 영롱한 새소리로

하얀 이빨 시려

불행을 돕는 마음을 일으켜 행복했으나

그 새소리는 더이상 들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꽃도 새도 아닌 백자 항아리로 말이 없다

그해 8월 15일 이후


김대중


고난이 필요한 시대 그는 고난의 화신이었다


일본 수도의 한 호텔 안에서

토막져 죽어야 했다가 살아났다

현해탄 복판에 던져져

물귀신이 되어야 했다가 살아났다


71년 대통령선거에서

아슬아슬하게 졌다

그의 파도치는 웅변이

1백만 인파를 지진처럼 흔들어댔다

그는 혼자서도

1백만 인파였다


그로부터 박정희는 이를 갈았다


70년대 전 기간 그는

그 극한의 고난 가운데서도

밤새워 책 읽고 영어 개인교사를 드나들게 했다


모든 준비를 다 마쳤다

친지와 의논할 때도

라디오 FM 틀어놓고

도청을 막아가면서

모든 준비를 다 마쳤다

하지만 오직 하나

그가 바라는 것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아직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뒤의 어떤 고비에도

그는 삶을 겨자씨만치도 허비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녕 70년대 한국 국민은

한국에서 가장 정밀한 그를 모르고 살 수 없었다


김수환


1969년 한국 천주교의 첫 추기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쓴 빨강 스컬캡은 신앙에 앞서 명예였다

그러나 가장 겸허한 사람이었다

70년대 이래

그는 한번도 분노를 터뜨리지 않아도

항상 강했다


그는 행동이기보다 행동의 요소였다


하늘에 별이 있음을

땅에 꽃이 있음을

아들을 잉태하기 전의

젊은 마리아처럼 노래했다


그에게는 잔잔한 밤바다가 있다

함께 앉아 있는 동안

어느새 훤히 먼동 튼다


그러다가 진실로 흙으로 빚어낸 사람

독이나

옹기거나


장준하


경기도 포천군 이동 약사봉 아래

장준하가 추락한 곳은 으슥하다

그의 죽음보다

그의 의문 없는 삶이 먼저 떠오른다

난초잎새 같은

머리칼 쳐올려 깎은 흰 얼굴

그 어디에

큰 간담 있음을 내색이나 하겠는가


임시수도 부산에서

미국의 후원으로 월간지를 창간했다

하기야

광복군 시절의 OSS 인연에 이어

USIS 인연도 있을 법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야릇하다

한국 지식인들의 역사의식 저항의식까지

파고들었다

북한에서 태어나

남한에 사는 계몽지식인들이 뭉치는 쎈터를 후원했다


발행인 장준하는 아내와 함께

잡지를 찍어

리어카에 싣고

서점마다 돌리기도 했다


김준엽 노능걸 들과

중국 서주에서

멀고먼 사천 중경까지 갔던 사람

가서 김구 주석의 가난한 환영을 받았던 사람


박정희더러

밀수왕초라고 마구 공격하던 사람


박정희 3선개헌 반대의 싸움을

앞장서서 이끌다가

그의 죽음으로도

싸움을 이끌었다


선우휘


선우휘 신상초 고정훈

이 서북의 사나이들

서북지방 기독교와는 동떨어져

술 한번 마셨다 하면

바지 저고리

다 벗어던지고 마셨다


우리에게는 남은 사진 한 장이 있다

한국전쟁의 1 · 4 후퇴 당시

평양 대동강 철교 가득히

남으로 남으로 피란민 건너는 광경이다

온통 흰옷뿐

흰옷밖에 입을 줄 모르는 사람뿐


바로 그들의 피란을 이끌었던 사람

1950년대 휴머니즘은

거기서부터였다

1950년대 전후 휴머니즘 문학은

거기서부터였다


육군 대령 선우휘

그는 군복 입은 전후의 작가였다

후방의 음울한 작가 손창섭

짚차 달려 자갈 튕기며

전방의 작가 선우휘


훨씬 뒤 마당에는 명아주 따위 잡초 우거지도록 방치했다

그 잡초야말로 그에게는 꽃이었던가


유일한


1970년에 20프로의 한국인 한 사람이 죽었다

9세에 미국으로 떠났다가

그곳에서 고학생이었다

어느 만큼 애국자였다가

돌아와 유한양행을 차렸다


20프로의 한국인으로

80프로 이상의 한국을 꿈꾸었다

모든 것을 돌려주었다

그의 딸에게도 주지 않고

세상에 돌려주었다

단 한푼도


물질이 소유의 것이 아니라

공공의 것이었던 바가

태초이거늘


이응로


동백림사건으로

고국에 왔다

고국의 중앙정보부에 왔다

고국의 대전교도소에 왔다


웬일인지

감방에서 붓과 페인트를 구할 수 있었다

4 · 6배판 정도의 책만한

베니어판이면 되었다


거기에 뚝 멈춰선 황소를 그렸다

정지된 분노와도

발기된 성기의 화석과도 같았다

한 송이 꽃도 그렸다


대전교도소 사상범 사방

겨울의 철창을

비닐로 막았다 하나

방안은 영하의 냉방

손 곱아

붓이 잡히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여

붓을 잡았다


가까스로 봄이 와 꽃이 피었다

베니어판 위

그리하여 빠리로 돌아간 뒤

그의 한지 묵화

그의 상형문자 묵화

그의 민중무한 묵화

그것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졌다


그 육중한 대머리에

모락모락 김이 났다

으스스한 빠리 교외의 겨울에도

보리밭처럼

보리밭 위 종달새처럼

조국이 녹아들어

질척거렸다


정경화


전란이 지나간 뒤

엄마는 어린 딸을

사랑하는 딸을

바이올린으로 만들었다


만들어지는 단련과

이미 만들어진 천재가

길고 긴 미로를 통과했다


한국이 인권 없는 나라 서열 8위일 때

코리아게이트의 추악으로 들끓을 때

그런 나라에서 피어난

화려한 꽃이었다


기립박수 속에서

그의 바이올린 연주는

한국의 성층권에서

세계의 대기권으로 내려갔다


윤이상


가서 동양을 펼쳐라

바다 밑 용왕으로부터 명을 받았다

한 마리 다친 용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렇게 떠났다


그 용이 광복절 초청의 이름 아래

잡혀왔다

그 용이 감방 벽에 쇠붙이에 머리를 치받았다

타살을 거부할 마지막 자결의 힘으로

쏟아지는 피로 유서를 썼다

아들아 나는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러움 없다 간첩 사건은 조작이다……

그는 죽어가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무기수의 겨울이었다

떠다 둔 식수가 얼어버리는 감방에서

용은 웅숭그린 채

담요 둘러쓰고

엎드린 채


양자강 언저리 장주(莊周)의 나비를 꿈꾸었다

그의 5선지는 살아났다

천둥 치고

무너지고

그리고 적요했다


세계는 그의 음악을

정장(正裝)의 경건성으로 받들었다

말러 이후인가


장기표


그의 순정은 사명이었다

무엇인가를 말해야 했다

혼자일 때도

그는 마음속에서

말해야 했다

말하는 동안

그에게는 기쁨조차도 슬픔이었다


1977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서울구치소

3사 상 감방에서

나는 그대를 만났지

그대는 항소심이고

나는 1심이었지


추운 날 손가락 펴가며

묵사지에

골필 항소장을 쓰고 있었지


어머니는 항상 전태일의 어머니였지

그의 몸 90퍼센트는 꿈

나머지 10퍼센트에

아내와

어린 두 딸이 있다


고등학생 때는 산사에 들어갔고

대학생 때는

시대의 최전선에 섰다

하얀 낮

머루 눈

나막신 소리 같은 목소리

정치와

인간을 혼동하는 정신

그대는 그렇게

시집가는 신부의 다홍치마였지


함세웅


한국의 천주께서는

참 깨끗한 아들 하나를

거룩한 볼모로 삼으셨나이다

너희들

너희들

이 사람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거든

나를 함부로 망각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하얀 칼라 제복의 여고생들이

저쪽으로 가고 있다

저쪽에서 천주의 아들이 혼자 오고 있다

가고 오고

그 아들은 파란 하늘에 물들어 있다


맑은 얼굴

맑은 눈

비온 뒤라면 무지개 걸려


그러나 독재나 어떤 잔재 따위에는

진흙탕 싸움을 사양할 수 없다

그 아들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지(知)와 신앙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도시의 신부다 두메로 가면 안 된다


지석영


사람들은 그의 종두법에 의하여

팔뚝에

우두를 맞기 시작하였다

사내든

계집이든

팔뚝 윗부분에

우두자국 흉터가 달빛에 드러나며 번쩍거렸다


켈로이드 체질의 우두자국은

바야흐로 꿈틀대다 멈춘 버러지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이 또 하나 있다

어려운 한문 버리고

쉬운 한글을 쓰자 하였다

쉬운 한글 가로쓰기로 쓰자 하였다


이것은 그 무렵 일본의 영어교도 모리가

한자는 물론이거니와

아예 일본어를 버리고

영어로 말하고

영어로 쓰자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최일남


술 취하면 노래 열 개 스무 개가

줄 서서 흘러나오지만

하늘의 별들이

땅 위의 노래를 위하여 깜박인다

별이기보다

먼 등불인 양


지극히 정다우나 지극히 어꾸수하나

지극히 공적인 사람

한번도 찬란한 적 없으나

어느 곳도

헛디딘 곳이어서는 안되었다


그는 그의 과녘 적중을 자랑하지 않는다

세월이 갈수록

그는 무서운 사람이어서

날 저물어

추운 개울물 건너

타락을 모르는 무서운 사람이어서


우리나라가 아주 망해버리지는 않을 터


홍남순


광주에 가면 홍남순 옹이 있다

무등산이 있고

무등산이 내려보는 곳에

홍남순 옹이 있다


그런디 그것이……

송충이 같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반대라기보다

그저 언짢은 듯이


그 눈썹 그 머리가

몇년 뒤

하루아침 하얗게 셀 줄이야

어디에도 판사인지

변호사인지

그런 자취 도무지 없이

그저 마을 좌장으로

조끼 입고

조끼 단추 다 끼고

팔짱 끼고 앉아


그런디 그것이……

광주시 북판 궁동

그의 집 겸

그의 사무실 사랑방이야

하루 내내

이 사람 저 사람

드나들어

발 고린내도 남아 있다


그런디 그것이……


유진오


일본제국 헌법과 독일 바이마르 헌법을 본떠

법률유보 아래 자유권을 두어

양원제

의원내각제로 원안을 만들었다

이른바 유진오안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

국회 단원제로 뜯어고쳐

사실상 제헌헌법은 누더기 개헌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초안을 고친 것이기보다

헌법 전문위원 유진오나 권승렬을 뛰어넘어

이승만의 전횡이었다

그 전횡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 대한민국 헌법만큼

남루한 세월을 살아온 것도 없으렷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헌법에는

본래의 알속 빠진 이로니

으레 유진오의 이름이 따라다닌다

소설가

대학 총장

야당 총재

그리고 대통령후보가 되기도 한다

한동안 프랑스 요리도 즐기면서

막걸리를 통 몰랐다


곱게

곱게 마고자 입고

등줄기 서늘히 등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한 사람의 귀족이 된 이래

중년 이래 저 건너 가난을 몰랐다


이규태


1930년대의 아이

1940년대의 어린이 그대로 촌사람이다

진안 장수

산골 촌사람이다

그런데 지구의를 돌려보아라


지구의 어느 구석

거기에는

반드시 그의 발자취가 있다

심지어 네팔 카트만두의 초밥집에도

그 초밥집 주인 성씨 김(金)이

한국 김씨의 한 자손임을 밝혀내는

그의 발자취가 있다


그래서 한반도 천년의 삶

켜켜이 쌓인

그 먼지투성이 가운데서

이윽고 한 마리의 새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투박하기는 막걸리 뒤의 모주인가

대학도 제대로가 아니었다

전후 클래식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그 뒤로는 언론인으로

사실과 상상을 묶어버려

어느 것이 상상인가


어디까지가 이규태인가


목요상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의 시대

흑암의 시대

그 흑암에 맞서

사법부의 기상을 떨친

한 판사가 있었다

끝내 법복을 벗었다


어느 시대란 어느 인간을

서론에서

각론으로 옮겨놓는다

젊은 판사는

사법부에서

입법부로 옮겼다


그러는 동안 이 나라의 사법부는 없어졌다

대법원장실에는

역대 대법원장의 사진 대신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목요상

그는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더 이상

지난날의 기상은 떨치지 않았다


인간은

한번만의 절정에서 내려가는 것인가


박목월


청록파 3인이라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이라


타고난 서정파라

인생파라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일제시대는

형산장 기슭에서

금융조합 다니느라

긴 포플러 길을

자전거 타고 다녔다


발은 유난히 크고 미욱했지만

손은 두꺼웠다

눈은 늘 서늘했다

시는 연필로 썼다


그러다가 대통령 부인이게

한동안

매주 한번씩

시 이야기를 들려준 일로


시인들

시집 낼 돈을 얻어

여러 시인들 시집 냈다


시집 뒤에는

어느 고마우신 분의 도움으로

이 시집을 냅니다라는

팻말이 박혀 있었다


그 뒤 그녀가 죽은 뒤

그 전기 써서

동작동 무덤에 가서 봉정했다

딸 근혜와 함께


아마 그 전기 밑글은

싼 원고료 받고

박재삼이 썼다던가


미리 묻힐 데

부인과 함께 정한 뒤

먼저 묻혔다

묻혀

달에 구름 가는가


고상돈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정상에 태극기가 꽂혔다

스물아홉살의 사나이가

그 태극기와 함께

그곳에 서 있었다


힘만이겠는가

뜻만이겠는가

운명만이겠는가


그 정상은 지상이 아니었다

몇만년 이래

모든 사람에게

그 정상은 천상이었다

지상에서는

먼 옛날 12세 소년 주몽이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쳐

해씨에서

고씨로 성을 바꿔

풀지붕 띳집궁궐로 나라를 세웠다

고구려 동명왕이었다

그런 뒤 오늘에 이르러

고상돈이

에베레스트에 오른 것

이제 그는

더이상의 일이 없어야 한다

동북아시아 한반도의 태극기들이

에베레스트 정상의 태극기와

함께 휘날리는 동안


이희승


키가 작아

서울의 북악

남산 낙산

아니 인왕마저

함께 키를 낮춘다


곱게

가을 햇빛에 물들어

곱게 곱게

쪼글쪼글한 대춧빛

그 대추 속

단단한 씨들이

그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다


평생 욕도 못한 입

화내거나

떠벌리거나 해보지 못한 입에

밥 한 숟갈 넣어

50번은 씹어 넘긴다

딸깍발이 선비라 하지

모두들

딸깍발이 선비의 나막신이라 하지

모두들


그는 모국의 말과 글에 파묻혔으나

무슨 큰 학문이나

큰 사업도 없이

더러 시조도 썼고

벙어리 냉가슴

수필도 썼다


어김없이 반독재 반열에 은근히 이름을 올렸다

세상 떠날 때도

요란한 기적소리 없었다

보리밭 노고지리도 울지 않도록


김지하


70년대 김지하

한국의 도처에 그가 있었지

세계의 도처에 그가 있었지

드디어 감옥 7년

그 7년은 70년이었지

그의 감방 앞에는

볼품없는 화분 하나 놓여 있었지


그 무상대도 젊음 다 바쳐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