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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 4. 17:07 서울구경(2011)

[새해 첫날 - 창덕궁 가다] 02

창덕궁 연표

-    1392년(태조 1) 조선 개국

⊙  1400년대(창건)
-    1405년(태종 5) 궁궐 조성 시작
-    1406년(태종 6) 후원 조성
-    1411년(태종 11) 금천교 건립
-    1412년(태종 12) 돈화문 건립
-    1462년(세조 8) 후원 본격 확장
-    1494년(연산 즉위) 후원 꾸밈

⊙ 1500년대(임진왜란으로 소실)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모두 소실

⊙ 1600년대(법궁으로 사용)
-     1610년(광해 2) 재건하여 법궁으로 삼음
-     1623년(광해 15) 인조반정으로 전각 대부분 소실
-     1636년(인조 14) 후원 옥류천에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 건립
-     1647년(인조 25) 선정전, 대조전, 희정당 등 소실된 건물 중건

⊙ 1700·1800년대(소실과 중건)
-     1704년(숙종 30) 후원에 대보단 조성
-     1776년(정조 즉위) 후원에 규장각 설치
-     1803년(순조 3) 인정전 소실
-     1804년(순조 4) 인정전 재건
-     1833년(순조 33) 대조전, 희정당 등 소실
-     1834년(순조 34) 대조전, 희정당 등 재건
-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성난 군중 창덕궁에 침입
-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개화파가 고종을 관물현에 모심
⊙ 1900년대(민족 수난기와 복원)
-     1908년(순종 1) 인정전 개수
-     1910년 흥복현에서 한일합병조약 체결
-     1917년 대화재로 대조전 소실
-     1920년 경복궁의 일부 건물 헐어 대조전, 희정당 등 재건
-     1926년 대조전에서 순종 승하
-     1989년 낙선재에서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별세
-     1990~1999년 인정전 내행각·외행각 정비 및 복원
-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 창덕궁의 회화나무

창덕궁의 회화나무  천연기념물

Scholar Tree of Changdeokgung NATURAL MONUMENT

돈화문 안마당 좌우에 자라는 8그루의 회화나무가 모두 천연기념물이다. 나이는 약 300~400년에 이른다. 이곳 회화나무는 1830년 무렵의 창덕궁 그림(동궐도, 東闕圖)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린 창덕궁을 다시 지을 때 심은 것으로 짐작된다. 돈화문 주변은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공간으로, 이곳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궁궐 정문 안쪽에 괴목(회화나무와 느티나무)을 심고 그 아래에서 삼공(三公)이 나랏일을 논했다'는 중국 고사에 의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궁궐 이외에 학덕 높은 선비들이 사는 마을에 흔히 심었다. 그래서 학자나무라고도 한다.


창덕궁의 특별한 나무들

창덕궁은 자연의 흥취가 한껏 살아있는 궁궐이다. 자연 그대로인 듯 멋스러운 창덕궁으로 보이지만, 그 자연스러움에는 나무 한 그루라도 법도에 따라 심고 가꾼 배려가 숨어 있다.
돈화문 주변에는 300~400년 수령의 회화나무(천연기념물 제472호) 여덟 그루가 자라고 있다. 돈화문 주변에 회화나무를 심은 것은 이곳에 조정의 관료가 근무하는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가지를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회화나무는 종종 학자의 기개에 비유된다.
선원전 서쪽 가까이에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가 자라고 있는 것은 선원전이 제례 공간인 것과 관련이 있다. 선원전은 역대 왕의 초상인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며, 과거에는 향나무의 줄기를 깎아 향을 피우는 데 주로 사용했다. 수령 750년 정도로, 창덕궁이 세워질 때 이미 어느 정도 자란 나무를 옮겨다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후원 애련지 부근에 자라는 뽕나무(천연기념물 제471호)는 양잠을 권장하기 위해 왕비가 키웠던 뽕나무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시대 왕비는 궐내에서 친히 누에를 치고, 양잠의 선인 서릉씨에게 제사 지내는 친잠례를 거행했다. 수령 400년 정도이며, 뽕나무로서는 보기 드문 노거수이다.
후원 깊숙한 곳에 자라는 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는 6개 정도의 굵은 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이리저리 엉키면서 자라는 모습이 매우 독특하다. 다래나무는 암수딴그루인데, 창덕궁의 다래나무는 수나무여서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 수령 600년 정도로, 우리나라 다래나무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


▲ 돈화문 일원

돈화문 일원 | 敦化門

Donhwamun and Vicinity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에 사용되었고, 신하들은 서편의 금호문(金虎門)으로 드나들었다. 창건 당시 이미 종묘가 창덕궁 앞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돈화문은 궁궐의 서쪽 끝에 놓여졌다. 궁궐의 중심부가 동쪽에 있기 때문에 정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금천교를 건너 정전인 인정전 일곽과 연결된다. 1608년 재건된 돈화문은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아래층은 출입용으로, 위층은 감시 전망용으로 사용되었다.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출입시의 대기공간으로 사용했고, 원래는 여기서부터 종로까지 관청가가 조성되었다.


창덕궁 | 昌德宮

Changdeokgung Palace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은 1405년에 제2의 왕궁으로 창덕궁(昌德宮)을 창건했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양의 서쪽에는 경복궁이, 동쪽에는 창덕궁이 위치하여 균형 잡힌 도시공간을 구성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탄 후 경복궁은 재건되지 않았고, 270여 년 동안 창덕궁이 조선 왕조 제1의 정궁으로 역할하였으며,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까지 사용된 최후의 궁궐이기도 하다. 동쪽의 창경궁(昌慶宮)과 함께 하나의 궁궐로 사용되어 동궐(東闕)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궁걸예제는 남북 중심축을 따라 엄격하게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경복궁 역시 이 제도를 따랐다. 그러나 산자락에 자리 잡은 창덕궁은 인위적인 제도를 벗어나 주변 자연지형에 순응하고 변화를 거듭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 되었다. 왕실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공간 구성은 경희궁, 덕수궁 등 다른 궁궐 구성에 영향을 주었다. 1917년에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들이 불타 없어지자 경복궁의 전각들을 헐어다 옮겨 짓는 등 많은 건물들이 변형, 훼손, 철거되었다가, 1991년부터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덕궁은 조선 궁궐의 원형을 비교적 충실히 지니고 잇으며, 동궐의 후원은 한국 전통 조경의 특성과 아름다움을 가장 훌륭하게 구현한 예로 평가된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창덕궁


세계유산

THE WORLD HERITAGE

Ch'angdokkung Palace


창덕궁(昌德宮)은 「세계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1997년 12월 6일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계유산'이란 세계적으로 뛰어나고 보편적 가치가 있어 인류 전체를 위하여 보호하여야 할 문화유산을 말하는데 창덕궁이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 5년(1405년)에 경복궁의 이궁(離宮, 궁성 밖에 마련된 임금의 거처)으로 건립한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의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며 특히 왕궁의 정원인 후원(後苑)은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정원으로 손꼽힌다.


▲ 금천교를 건너가고 건너오는 관람객
▲ 금천교
▲ 진선문進善門
▲ 인정전으로 가는 길
▲ 눈이 쌓인 앞마당
-계속-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