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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15. 09:01 내가 읽은 책들/2012년도

2012-079 한국의 궁궐

 

글, 사진 / 이강근

1997,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7968

 

082

빛12ㄷ 107

 

빛깔있는 책들 107

 

이강근-------------------------------------------------------------------------

 

서울시립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였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예술학과에서 미술사를 전공,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이며 한국미술사학회 이사이다. 주요 논문으로 '경복궁에 관한 건축사적 연구' '경희궁의 역사' '동문선과 고려시대의 건축' '17세기 불전의 장엄에 관한 연구' 등 여러 편이 있다.

 

도움 주신 분-----------------------------------------------------------------

 

김동현(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

문명대(동국대학교 박물관장)

장경호(문화재연구소장)

박방룡(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차례|

 

머리말

궁궐이란 무엇인가

고구려 궁궐

백제 궁궐

신라 궁궐

발해 궁궐

고려 궁궐

조선 궁궐

맺음말

참고 문헌

 

 

▲ 창덕궁 인정전 중앙집권적 국가의 왕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행하던 곳만을 엄밀한 의미에서 '궁궐'이라 부를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궁궐이란 곧 왕궁을 가리킨다. 조선시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전경이다.

▲ 주나라의 침궁도(寢宮圖) 「삼례도」에 실린 그림이다.

▲ 국도도(國都圖)

▲ 3문3조

▲ 경복궁 동십자각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 남쪽 양끝에 둔 동, 서십자각도 궐이 변형된 것이다. 위는 현재의 모습이고 아래는 일제에 의해 경복궁이 훼손되기 전의 모습이다.

▲ 위니암산성(환도산성)과 국내성

▲ 국내성 터 고대 국가 시기 최초의 도성인 국내성에서는 궁전터가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았으나 현재 잘 다듬은 방추형 돌로 네모나게 쌓은 성벽이 남아 있다.

▲ 안학궁성 평면도 안학궁성은 고구려 후기의 왕궁이 있었던 곳으로 소문봉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궁전은 남북으로 배치하여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 대성산성 남문 대성산성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직후에 건설되었다. 최근에 고구려 건축 양식으로 복원한 모습이다.

▲ 대성산 일대 고구려 유적 분포도

▲ 안학궁 모형 고구려 전성기의 궁궐인 안학궁의 전체 모습을 복원해 본 모형도이다. 남궁에서 북궁으로 가면서 터는 높아지고 건물은 낮아졌으며 각 궁 남회랑의 길이가 북쪽으로 가면서 점차 줄어든 것이 이 궁의 배치 특징이다. 1호 궁전터의 경우, 건물의 크기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이다.

▲ 평양 출토 귀면와 평양에서 출토된 구구려시대의 양감이 풍부한 귀면와이다.

▲ 장안성(평양성) 을밀대 평양성의 내성 장대로 쓰던 곳으로 누정은 1714년에 고쳐 지은 것이지만 축대는 고구려시대에 쌓은 것이다. 축대 높이는 약 11미터이며 뒤뿌리가 길게 사각추형으로 다듬은 화강석으로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작은 것으로 맞물리게 하였다.

▲ 장안성(평양성) 배치도 평지와 산의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장안성은 궁성을 중심으로 도시 전체 구획을 성벽으로 둘러쌌다.

▲ 장안성(평양성) 성돌 장안성에서는 고구려 때 글자를 새긴 성돌이 여러 점 발견되었다. 경상동에서는 "丙戌十二月漢城下後小兄文達節自此西北行涉之"라 새긴 성돌이 발견되었다.

▲ 몽촌토성 현황 대표적인 백제 초기의 성으로 타원형의 내성과 그 바깥에 달린 외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최근에 발굴, 복원되었으며 현재는 올림픽 공원 안에 있다.

▲ 황룡사 터 진흥왕 때 신 궁(新宮)을 짓는다는 구실 아래 월성 동쪽에 거대한 규모의 새로운 절 곧 황룡사를 지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월성 동쪽이자 용궁(龍宮) 남쪽에 자궁(紫宮)을 지으려다가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절로 바꾸어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시기에 황룡사의 북쪽에 용궁이 있었으며 새로 지으려던 궁궐의 이름이 자궁이었음을 알려 준다. 용궁의 위치는 아직 분명하게 확인되어 있지 않다.

▲ 황룡사 금당터의 불상 대좌석 유구

▲ 안압지 월지라고 불렀던 안압지는 1980년에 통일신라시대 건축 양식으로 복원되었다.

▲ "의봉 4년 개토" 평기와 1974년부터 1975년의 안압지 발굴 당시에 못 안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 기와의 명문으로 679년에 동궁을 창건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확인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복원된 월정교 경덕왕 19년(760)에는 궁 안에 큰 못을 파고 궁 남쪽의 문천(남천)에 월정교와 춘양교를 놓았다. 월정교는 발굴 조사된 최근에 일부가 복원되었다.

▲ 상경 용천부 도성터

▲ 상경 용천부 석등 이 석등은 고구려의 자(1자는 35센티미터)를 사용하여 제작한 것으로 6.3미터이다. 화사석을 중심으로 건축적 장식미가 뛰어난 작품이다.

▲ 발해 궁전터 온돌 유구

▲ 발해 제1궁전터

▲ 발해 출토 치미 출토된 건축 재료를 통해 발해 문화의 성격이 고구려 문화의 전통 위에 당시 국제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던 당의 문물 제도를 융합시킨 새로운 문화임이 분명해졌다.

▲ 만월대 1973년부터 1974년 사이에 시도된 왕궁터 발굴 조사에 의하면 정전 행각 밖 서북쪽 건물군 터는 4개의 문화층으로 되어 있어, 문헌 기록상 4번 불탔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정전 입구에 쌓았던 기단과 4곳의 33단 돌계단은 지금도 잘 남아 있다.

▲ 대화궁 터 인종 때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기 위해 옛 임원역 터에 대화궁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서경 천도가 좌절되자 묘청의 난으로 비화되고 반란이 진압되자 대화궁도 버려지게 되었다. 위는 토성 유구이며 아래는 외궁에 남아 있는 석실 고분의 유구이다.

▲ 청자 기와 의종 11년에 지은 양이정의 지붕은 청자 기와로 덮을 정도로 지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자 수막새와 암막새 등의 유물을 통해 호화로운 건축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이 기와들은 전라남도 강진군 사당리 청자 가마터에서 출토된 것이다.

▲ 만월대 서남부 쪽에서 바라본 모습

▲ 종묘 전경 조선은 한양을 명실상부한 경도로 만드는 계획을 세우면서 사직, 궁궐 등과 함께 역대 왕의 신위를 모시는 종묘의 위치와 설계 등도 계획했다.

▲ 경복궁 창건 배치 추정안

▲ 경복궁 경회루 전경 재상 중심의 정치 운영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경복궁은 그 안에 경회루를 짓고 주변에 못을 파서 군신의 연회 장소를 마련하였다.

▲ 창덕궁 전경 정치가 안정되고 권력이 왕에게로 집중되면서 경복궁 동쪽에 정궁이 아닌 이궁으로서 창덕궁이 건립된다. 태종 5년(1405년)에 세워진 이 궁은 처음에 외전 74칸, 내전 118칸 규모였으나 증설되어 때로는 왕이 이곳으로 옮겨 거처하면서 정치를 행하기도 하였다.

▲ 창경궁 명정전 창덕궁 옆의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 옛 수강궁 터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 궁은 대비들을 위해 지은 것으로 일종의 대비궁인 셈이 된다. 그래서 경복궁과 창경궁이 남향으로 배치된 것과는 달리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이다.

▲ 창경궁 전경 창경궁과 창덕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으므로 합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이들 궁궐은 정궁인 경복궁과 함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가 창경궁은 광해군 때인 1615년에 중건된다. 그러나 1830년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몇 차례의 중건과 소실을 거치면서 지속되다가 1985년에 새로이 정비되었다.

▲ 동궐도 1830년대의 화재로 소실되기 직전의 궁궐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도록 그린 것으로 창덕궁 인정전 일곽이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 서궐도안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 경희궁 숭정전 광해군 때 완성된 경희궁은 창건된지 4년이 지난 뒤에야 왕궁으로서 빛을 보게 된다.

▲ 숭정전의 2중 기단 일본인들에게 강제 철거된 경희궁을 1985년부터 4차례의 발굴 조사를 했다. 이때 드러난 숭정전의 2중 기단 모습이다.

▲ 북궐도형

▲ 경복궁 향원정 향원지 안에 원형 섬을 만들고 평면이 6각형이고 2층인 정자를 세웠다. 경복궁 중건 때 지은 이 정자는 목조 다리와 더불어 공예적인 의장을 갖추고 있다.

▲ 덕수궁 전경 덕수궁의 옛 이름은 경운궁이다. 경운궁은 임진왜란 직후에 잠시 동안 궁궐로 사용되다가 창덕궁 및 창경궁이 중건된 뒤에는 더 이상 왕의 거처로 쓰이지 않았는데, 20세기 초에 와서 다시 중요한 궁궐로 부각되었다. 경운궁에 이르러 한국의 궁궐 건축은 동양의 문화와 서양의 문화가 절충된 형식으로 급격히 변모하게 되었다.

▲ 남한산성 조선의 도성은 궁성과 외성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이나 황성을 두지 않았다. 도성의 방어뿐 아니라 국가의 방위에 자신이 있던 시절에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1624년에 남한산성을 쌓는 등 도성 외호에 힘을 썼다.

▲ 수선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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