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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16. 10:07 내가 읽은 책들/2012년도

2012-080 덕수궁(경운궁)

 

글 / 김순일●사진 / 김종섭

1997,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7969

 

082

빛12ㄷ 108

 

빛깔있는 책들 108

 

김순일-------------------------------------------------------------------------

 

서울대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공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논문으로 '경운궁 영건에 관한 연구' 등 다수를 발표했다.

 

김종섭-------------------------------------------------------------------------

 

본사 사진부 차장

 

|차례|

 

머리말

덕수궁의 본명은 경운궁

선조, 광해군 시대의 경운궁

고종 시대의 경운궁

순종 시대 이후의 경운궁

경운궁의 배치와 전각

영문 요약 · Abstract

참고 문헌

 

 

 

▲ 경운궁 경운궁은 당시 최고의 재료와 기술로 조영된 조선 왕조 최후의 궁궐이다. 여기에는 쓰러져 가는 국가의 중흥을 위해서 왕실의 존엄성과 국력을 과시하려는 의지가 숨어 있다.

▲ 창경궁 전경 창경원으로 한때 격하되기도 했던 창경궁이 본래의 이름을 찾았듯이 덕수궁도 경운궁이란 제이름을 되찾아야 한다.

▲ 1919년의 광명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문으로 고종이 거처하던 함녕전의 정문이다.(황종훈 「대한제국고종황제국장화첩」경제평론사)

▲ 광명문 안의 흥천사종 세조 8년에 주조된 이 종은 경운궁과는 관계없는 유물이다.

▲ 종묘 정전 전경 역대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는 왕조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임진왜란이 끝난 뒤 가장 급히 서둘러야 하는 일은 불타 없어진 궁궐과 종묘의 중건이었으며 이 공사는 광해군 즉위년에 준공을 보았다.

▲ 창덕궁 인정전 전경 경운궁 즉조당에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3년 뒤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자신이 머무르던 행궁을 경운궁이라 개칭하였다.

▲ 사직단 전경 땅의 신과 곡식의 신을 모신 사직단은 인왕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광해군은 '인왕산하건궁설'에 따라 지금의 사직단 부근에 인경궁을 영건하였다.

▲ 즉조당과 석어당 즉조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된 팔작지붕의 전각으로 전면에 분합문을 달아 들어올리게 하였다. 석어당은 궁궐 안의 유일한 2층 건물이다.

▲ 원구단 원구단은 원단을 쌓아 신위를 모시고 천자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이다.

▲ 원구단 돌북(위)과 계단(아래) 고종 이전에도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낸 일이 있으나 천자만이 제를 지낼 수 있다는 중국의 압력으로 허문 일이 있었다. 고종의 황제 즉위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어 쌓은 것이다. 돌북은 제사에 사용되는 악기를 상징한다.

▲ 러시아 공사관 안의 고종 거처방 을미사변이 계기가 되어 고종은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데 이 사건이 아관파천이다. 여기서 왕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어할 뜻을 굳혔다고 생각된다.(최석로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서문당)

▲ 경운궁 안의 접견실 석조전 안에 있는 이곳에서 고종은 각 나라의 공사나 영사, 정부 대신들을 접견하였다.(황종훈 「대한제국고종황제국장화첩」의 사진)

▲ 함녕전 공포와 현판 함녕전이 신축된 당시는 선덕전이란 이름으로 전각이 건립되었으나 그 뒤 함녕전으로 바뀌었다. 익공식으로 된 공포와 함녕전 현판이다.

▲ 화재 전의 중화전 경운궁은 신하들의 조하를 받는 중층 중화전을 영건함으로써 다른 궁궐에 비길 만한 면모를 갖추었으나 지금은 화재를 당하여 애석하게도 그 위용을 볼 수 없다. 1904년 화재 발생 전의 중화전이다. 뒤에 보이는 양관은 구성헌이다. (도변호 외 「조선명승기」의 사진)

▲ 중층 중화전 정면도 2중 석조 기단에 중층으로 된 화재 전의 중화전 정면도로서 「중화전영건도감의궤」에 실려 있다.

▲ 1904년의 큰 화재 수리하던 함녕전의 온돌 아궁이에서 비롯된 이 화재로 궁궐 중심부의 전각들이 불탔고 가정당, 돈덕전, 구성헌만 겨우 남았다. (「한국의 백년」)

▲ 중화전 화재 뒤 중건된 중화전은 중층에서 단층으로 축소되었으나 면적이나 간살의 너비 등은 그 전과 같다. 지붕 위의 잡상이나 용두 그리고 앞마당에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품비석이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더해 준다.

▲ 단층 중화전 정면도(위), 중화전 평면도(아래)

▲ 중화전 측면도(위)와 횡단면도(아래)

▲ 1904년의 화재 경운궁에 고종이 머무르던 것을 싫어하던 일본인들이 을사보호조약을 앞두고 저지른 방화로 추측한다. 불이 나자 궁중의 사람들이 광명문을 통해 뛰쳐 나오는 것을 일본 경찰이 지켜보고 있다. (오소백 「한국 100년사」한국홍보연구소)

▲ 즉조당 중화전이 건립되기 전 한때 정전으로 사용되었던 즉조당은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뒤 귀비 엄씨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 중화전 당가 당가는 법전 안의 옥좌 위에 집 모양으로 만들어 얹는 닫집이다. 이것은 옥좌 뒤에 있는 오봉병과 곡병 등과 어우러져 왕의 위엄을 더해 준다.

▲ 경운궁 전경

▲ 경운궁 연못 대한제국 때 있었던 영복당 자리 근처에 지금은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 유현문과 꽃담 전으로 쌓은 유현문의 홍예와 지형에 따라 담장의 높낮음에 변화를 준 담의 뇌문이 조화를 이룬다.

▲ 동쪽의 즉조당과 서쪽의 준명당은 2칸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 중화전 앞 드므(부분) 드므는 불귀신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설치한 일종의 벽사 시설이다. 다른 궁궐의 단순한 형태의 것들과는 달리 만(卍)자문, 수(壽)자가 새겨져 있다.

▲ 중화전 석계의 석수 조선 말기의 조각술을 보여 주는 석수로 양감이 부족한 몸체에 비해 표정이 풍부한 면이 돋보인다.

▲ 중화전 답도의 판석 답도는 정전의 중앙 계단을 말한다. 이곳에 있는 판석에는 경복궁 등의 봉황 무늬와 달리 쌍룡이 새겨졌는데 이는 고종이 황제로서 궁궐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 함녕전 굴뚝 화계 위에 전으로 쌓은 굴뚝으로 몸체 남면에 수자 무늬가 새겨져 있다.

▲ 정관헌 이 전각의 인조석 씻어내기로 만든 독립기둥에는 로마네스크식 주두가 있다. 전면과 측면 테라스에 정교한 아케이드를 만들어 증축하였다.

▲ 시조전, 중화전을 중심으로 본 경운궁 전경

▲ 석조전 전경과 분수대

▲ 영국 대사관을 중심으로 본 경운궁 전경

▲ 순종비 가례식장 중건된 중화전에서 치러진 순종비의 가례식 장면이다. 산만한 느낌이 드는 왕실의 이 행사 장면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듯하다. (김원모 외 「한국의 백년」의 사진)

▲ 성복례당일 대한문 앞 함녕전에 거처하던 고종은 68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많은 의문점을 자아냈다. 성복례당일 경운궁 대한문 앞에 국민들이 모여 슬픔을 달래고 있다. (「대한제국고종황제국장화첩」)

▲ 준명당과 즉조당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준명당은 1904년 화재 때 고종과 순종의 어진을 봉안하였고 외국 사신을 여러 번 접견하기도 했던 곳이다. 동쪽의 2칸 복도로 연결된 즉조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전각 건물이다.

▲  준명당 아직 중화전이 건립되기 전인 1900년에 고종과 그 각료들이 준명당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 준명당 사분합문

▲ 함녕전 1904년의 화재 뒤 1905년에 상량한 함녕전은 고종이 거처하다가 죽은 곳이기도 하다. 그 뒤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 경운궁 배치도

▲ 중화문 다포식 공포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중화문은 중화전의 정문으로 그 규모가 1904년 화재 전의 그것과 같다.

▲ 중화문에서 바라본 중화전 앞뜰에 늘어서 있는 품비석과 지붕에 장식한 잡상, 용두 등이 전각의 위엄을 더해 준다.

▲ 중화전 천장 중화전 천장에는 용이 투각되어 있어 창덕궁 인정전 천장에 새겨진 봉황과 비교된다. 곧 왕의 품격과는 다른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 중화전 용향로

▲ 함녕전 행각

▲ 보루각 자격루 흥천사 범종과 함께 광명문에 전시되어 있으나 경운궁과는 관계없는 유물이다.

▲ 즉조당 동쪽으로부터 2, 3, 4째 칸은 개방하여 툇마루를 만들었다.

▲ 석어당(뒤) 궁 안의 유일한 중층 건물로 왕이 거처한 전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석어당

▲ 준명당과 즉조당

▲ 준명당 복도의 누하주 준명당과 즉조당을 연결시키는 2칸 복도의 아랫부분으로 사람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흥미롭다.

▲ 대안문 원래의 정문인 인화문은 철거하고 당시의 대안문을 다시 수리하여 정문으로 삼았다. 군인들이 대안문을 경계하고 있는 모습이다. (최석로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속」에서)

▲ 덕홍전과 샛담 귀빈의 알현소로 사용된 덕홍전을 구르고 있는 샛담은 전돌로 쌓아올린 꽃담이다.

▲ 석조전 기둥 이오니아식 주두로 된 열주가 늘어서 있는 석조전은 경운궁 안에 있는 양옥 가운데 대표적인 건물이다.

▲ 정관헌 내부 한때 경운당으로 불렀던 정관헌은 단층 양옥으로 내부 기둥이 로마네스크식 주두로 석조전의 외부 기둥과 비교된다. 바닥은 대리석판을 깔았다.

▲ 영건 중화전과 구성헌 중층의 중화전 뒤쪽에 2층 양옥의 구성헌이 보인다. (원유한 외 「한국사대계 7」삼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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