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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11. 13:38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04 사도세자가 꿈꾼나라

 

이덕일 지음

2012, 역사의 아침

 

 

시흥시대야도서관

SB066564

 

911.058

이24ㅅ

 

사도세자의 고백 개정판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힌 것은 윤5월 13일. 그는 좁은 뒤주 속에서 무려 여드레 동안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신음하다 이승을 하직했다.

뒤주에 갇히기 직전 세자는 뒤주의 모서리를 잡고 '아버지 살려주소서'라고 빌었다.

그러나 그가 뒤주 속에 갇혀 신음하던 여드레 동안 '세자를 살려주소서'라고 영조에게 빈 조정대신은 아무도 없었다.

혜경궁 홍씨와 홍봉한 · 홍인한. 그리고 김상로 · 홍계희 등 집권 노론 인사들은 모두 세자의 반대편에서 서서 말하고 행동했다.

반면 이종성 · 조현명 · 조재호 같은 소론 인사들은 세자의 편에서 말하고 행동했다.

사실상 이 비극적인 사건은 이 양편이 완충지대없이 좁은 뒤주에서 맞부딪친 결과 발생한 것이다.

 

가해자의 기록, 『한중록』의 이면에 감춰진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을 말하다!

 

영조 38년 윤5월 21일. 여드레 동안 뒤주에 갇혀 있던 세자가 죽었다. 이후 그의 이름은 금기가 되었으며, 누구도 그 사건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부왕 영조는 아들을 죽음으로 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나경언의 고변서는 물론 그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을 없앴다. 그렇게 사라져간 사도세자 진실의 빈자리를 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 메웠다. 『한중록』은 영조의 이상성격과 사도세자의 정신병의 충돌 결과가 비극의 원인이라 했다. 세자의 부인이 쓴 피맺힌 기록의 내용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의 이야기는 진실이 되었다.

하지만 실록의 기록은 달랐다. 『영조실록』에서는 사도세자가 『한중록』이 전하는 정신병자와는 거리가 먼,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들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너무나 다른 기록의 간극을 메우고자, 그리고 가해자의 기록이면에 담긴 역사적 진실과 사도세자 죽음의 비밀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고자 현전하는 사료들을 취합하고 분석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이 책에 담긴 내용만이 역사의 진실이라고 강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중록』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제는 저자의 손을 떠난 이 책이 또 하나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갖기를 바랄 뿐이다.

 

 

이덕일 李德一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시작으로 뚜렷한 관점과 흡인력 있는 문체로 한국사의 핵심 쟁점들을 명쾌하게 풀어냄으로써 역사대중화와 동시에 한국역사서 서술의 질적 전환을 이뤄낸 우리 시대 대표적 역사학자이다. 특히 『조선 왕을 말하다』(전2권), 『조선왕 독살사건』,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 『윤휴와 침묵의 제국』,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조선 최대 갑부 역관』, 『조선선비 살해사건』 등의 조선사 관련 저술은 조선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바꾸어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등은 일제 식민사관과 중화 패권주의사관에 의해 왜곡된 우리 역사를 복원해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며, 시대와 인물을 읽어내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저술에 힘쓰고 있다.

홈페이지(http://www.hangaramhistory.org)

다음카페(httP://cafe.daum.net/hangaram-forum)

 

차례

 

들어가는 글_ 사도세자를 두 번 죽이는 사람들

프롤로그_ 노회한 정객, 혜경궁의 진실

 

1부  삼종의 혈맥

    축복 속에 태어난 세자

    부정父情

    효종을 닮은 소년 천자

    박문수의 예언

 

2부  눈물의 임금

    장희빈과 경종, 모자의 한

    이복형제의 비극, '경종 독살설'

    영조의 두 가지 콤플렉스

 

3부  슬픈 서막

    저승전의 한상궁

    당습을 하지 말라

    어린 왕자의 정치 체험

    노론 세자빈

 

4부  임금과 대리 임금

    무제의 반만큼만 짐을 섬겨라

    대리청정의 숨은 뜻

    임금보다 어려운 세자

    당인들을 갈아 마시겠다

    무슨 면목으로 황형을 뵙겠는가

 

5부  정적政敵

    만약 다른 왕자가 있다면

    나주 벽서 사건의 파문

    부자의 갈림길

    그때부터 게장은 먹지 않았소

    세자의 꿈, 북벌

    또 하나의 정적, 외척

 

6부  사도세자의 반격

    풍원군이 살아 있었으면

    온궁의 행복

    진현을 둘러싼 의문의 8개월

    세자가 관서로 간 까닭은?

    거 땅에 있었던 때를 잊지 말라

 

7부  비극

    노론의 승부수, 나경언의 고변

    차라리 미쳐버려라

    영조가 분노한 이유

    운명의 그날, 세자가 부른 사람

    아버님, 살려주소서!

    뒤주 속의 세자, 뒤주 밖의 궁궐

 

8부  미완의 꿈

    세손을 끌어내려라

    영조의 마지막 전교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들의 마지막 반격

    노론과의 결별, 남인과의 결합

 

에필로그

주요연표

주요인물

제2판 머리말

제1판 머리말

 

『영조실록』 38년 5월 22일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변하다.

사도세자가 밤을 세워 금천교禁川橋 가에서 대죄하다.

 

『영조실록』 38년 5월 24일

임금이 홍화문에 나가 각전各廛 시민들을 불러

세자가 진 빚을 갚아주었다.

▲ 창경궁 집복헌  영조11년(1735) 1월 21일, 훗날 세자가 되었지만 아버지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왕자, '선'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서울시 종로구 소재.

▲ 창경궁 명정전  창경궁의 정전正殿으로 성종 15년(1484)에 건축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탔지만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건축했다. 서울시 종로구 소재.

▲ 영빈 이씨 인장  훗날 '선희궁'으로 불리기도 한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는 나인이었다가 영조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다.

▲ 왕세자 탄생 축하연(부분)  태어난 당일 원라로 책봉된 왕자 '선'은 노론과 소론을 막론한 모든 당파의 지지 아래 세자가 되었다.

▲ 사도세자 책봉 죽책  영조 12년(1736) 3월 15일, 백관들이 하례한 가운데 창덕궁 인정전에서 두 살짜리 원량 선의 세자 책봉식이 거행되었다.

▲ 박문수(1691~1756)  비록 소론에 당인이었지만 원자를 두고 노론과 소론, 각 당파의 당론이 다른 것에 대해 '유일한 삼종의 혈맥을 당파의 자리에서 바라본다면 원자와 나라의 운명이 망국의 지경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를 영조에게 나타냈다.

 

『영조실록』 38년 윤5월 13일

(나경언이 고변한 지 21일째 되던 날)

영조가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가두었다.

▲ 의릉(경종릉)  조선의 20대 왕인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이다. 경종은 신병과 당쟁의 와중에 후사없이 재위 4년 만에 승하했다. 서울시 성북구 소재.

▲ 김일경 단소(壇所)  신임사화를 주도했던 소론 강경파 김일경은 영조가 즉위하자 유배되었다가 목호룡과 당고개에서 참형을 당했다. 경상북도 예천군 소재.

 

『영조실록』 38년 윤5월 14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다음 날)

좌의정 홍봉한이, "한림翰林 윤숙尹塾은

어제 신들을 꾸짖었고 또 울부짖으며 거조를 잃었으니,

인심을 진정시키고자 한다면

엄히 처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조실록』 같은 날

환관 박필수朴弼秀와 여승 가선假仙 등을 베어 죽였다

처음에 박필수는 세자를 따라 놀면서 세자를 종용하여

좋지 못한 일을 많이 저질렀고,

가선은 안암동의 여승인데 머리를 기르고 입궁하였다.

이때 임금이 박필수와 가선 및 서읍西邑의

기녀 다섯 명의 목을 베라고 명했다.

▲ 왕세자 태학 입학식도  사도세자는 여덟 살 때 태학에 '입학'했다. 물론 세자가 태학에서 실제로 교육을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그만큼 유학을 중시한다는 의사 표시이자 세자가 이제 본격적인 학문의 길에 접어 들었음을 의미했다.

▲ 탕평비  세자의 태학 입학을 기념하며 세운 비로, 세자를 포함한 성균관 유생 모두가 편벽된 당심을 갖지 않고 두루 통하는 군자의 도를 깨치기를 바라는 영조의 마음을 비에 새겼다. 서울시 성균관대학교 구내 소재.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심이고

편벽되어 두루 통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소인의 마음이다.

(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

 

▲ 창덕궁 선원전  역대 임금의 어진이 봉안된 곳이다. 영조 16년(1740) 5월, 신하들이 당론을 하자 영조는 이곳에서 왕위와 옥체를 무기로 빗속에서 양위 소동을 벌인다. 양위 소동이 있을 때마다 어린 세자는 영문도 모른채 그 혼란 속으로 던져졌다. 서울시 종로구 소재.

▲ 홍봉한(1713~78)  아버지가 예조 판서를 지낸 홍현보인 까닭에 음직으로 출사할 수 있었다. 딸 홍씨가 세자빈이 되고 그해 과거에 급제하면서 비로소 중앙 정계로 진출했다.

▲ 창덕궁 금천교  왕가와 사가를 구분 짓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다리다. 이곳을 지남으로써 왕가의 일원이 된 홍씨는 훗날 일어날 비극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서울시 종로구 소재.

 

『영조실록』 38년 윤5월 15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이틀이 지난 날)

영조가 경화문景化門에 나아가 직접 지은 하교로써

자신이 정사에 복귀하는 이유를 담은 반교문을 반포했다.

이익원李翼元을 증도부처하였는데, 반교할 때

소리를 내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영조실록』 같은 날

죄인 서필보徐必普와 정중유鄭重維의

목을 베어 전시하라 하였는데

구 동궁(사도세자) 시절에 범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해는 동쪽에서 솟아 사해四海를 밝히고

달은 중천에 솟아 만산萬山을 비추도다

- 사도세자가 열 살 때 지은 시

 

부엉아 부엉아 내 자식 잡아먹었으니

나의 보금자리는 헐지 마라

정성으로 어린 자식 길렀는데 불쌍하구나

장맛비 내리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 벗겨다가

창을 엮고 문을 얽었으니

이제 너 같은 아랫것들이 어찌 감히 나를 모욕할 수 있겠는가

내 손이 다 닳도록 내 갈대 이삭 뽑아다가

내 집을 쌓고 보금자리를 깔았다

내 입이 병난 것은 내 집이 없기 때문이니라

내 날개는 부러지고 내 꼬리는 닳아 빠졌으며

내 보금자리는 위태하여 비바람에 흔들거리는지라

내 소리는 어려움에 떤단다

-치효장鴟鴞章(부엉이장)

▲ 조현명(1690~1752)  효장세자의 빈인 현빈 조씨의 숙부로, 형 조문명과 함께 영조 때 탕평책을 이끈 소론 영수이자 탕평 영수였다. 또한 시종일관 사도세자를 지지했다.

▲ 사도세자 대리청정 '휘지'  영조 25년(1749), 사도세자는 열다섯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사진은 대리청정을 위임받은 왕세자가 명령을 내릴 때 사용한 증표다.

▲ 육상궁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이다. 영조는 숙의 문씨의 오빠 문성국을 이곳 육상궁의 별감으로 특채했다. 서울시 종로구 소재.

 

『영조실록』 38년 윤5월 16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사흘이 지난 날)

"아! 비록 만고에 없는 일을 만났지만 지금은 내가

그 보좌에 나갔으니 조선을 중흥해야 하는데

오늘 대신臺臣(3사의 신하들)이 어찌 감히

정사에 복귀하는 처음에 연달아 아뢰는가?"

 

『영조실록』 38년 윤5월 17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나흘이 지난 날)

임금이 태복시에 나아가 죄인 엄흥복을 진국하였다.

이때 엄흥복이 조재호가 한 불령한 말을 듣고서

이미에게 전했고 이미가 홍봉한에게 전했는데,

홍봉한이 임금에게 아뢰어 친국이 있게 된 것이다.

임금이 판부사 조재호와 응교 이미를

모두 삭직削職하라고 명하였다.

▲ 나주 금성관  영조 31년(1755), 이곳의 대문에 걸린 '흉서'로 영조의 탕평책에 사실상의 종지부를 찍게 되는 나주벽서사건이 시작되었다. 전라남도 나주시 소재.

▲ 『천의소감』  신임옥사에서부터 나주 벽서 사건까지를 언급한 책으로, 경종 대 노론의 행위는 모두 영조와 나라를 위한 충성이었음을 주장한다.

▲ 『능허관만고』  사도세자의 시문집으로 사, 부, 시뿐아니라 대리청정할 때 군신들의 상소에 대한 답과 판부判付 등이 실렸다.

▲ 정순왕후 생가  영조 35년(1759), 당시 15세이던 김한구의 맏딸은 51세 연상인 영조와 결혼해 정순왕후가 되었다. 이때 정순왕후는 세자보다 열 살이 어렸다. 충청남도 서산시 소재.

 

『영조실록』 38년 윤5월 18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닷새가 지난 날)

죄인 엄흥복을 수구문 밖에서 참하였다.

결안하기를 "본디 허황한 사람으로서 세상의 지목을

받아왔는데, 4월 사이에 만나서 긴요치 않은 수작을 나누었고,

이로 인해서 무상하고 망측한 말을 만들어

세상을 어지럽히자 했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은 죄이다" 하였다.

 

『영조실록』 같은 날

임금이 "이현중李顯重을 강진현으로 정배하고,

조재호는 단천부로 안치하라"고 명했다.

▲ 온양별궁 전도  영조 36년(1760) 7월, 세자는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별궁인 '온궁'이 있는 온양의 온천으로 향했다.

▲ 영괴대  영조의 온양 별궁 행차 때 동행한 세자가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아들 정조가 세웠다. 충청남도 아산시 소재.

▲ 경희궁  원래의 이름은 경덕궁이었으나 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개명되었다.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서울시 종로구 소재.

▲ 『어제조훈언해』  영조가 세손인 정조에게 내린 열 가지 훈사를 책으로 만든 『어제조훈御製祖訓』을 언해한 책이다.

▲ 홍계희 묘  홍계희는 노론의 중진으로, 경기 감사로 있을 때 세자의 잘못을 고변하게 함으로써 세자가 죽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었다. 정조 즉위 후 그의 두 아들 및 일가가 정조암살미수로 처형당하자 관작이 추탈되고 역안逆案에 이름이 올랐다. 경기도 용인시 소재.

▲ 서명응(1716~87)  세자의 관서행에, 당시 대사성이었던 서명응은 세자의 근신들 중 관련된 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조가 동궁일 때 빈객이었으며 정조 즉위 후 첫 번째 규장각 제학으로 규장각 운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영조실록』 38년 윤5월 19일

(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엿새가 지난 날)

13일(세자가 뒤주에 갇힌 날)에 따라서 들어온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 관원을 모두 파직하라고 명했다.

 

『영조실록』 같은 날

영의정 신만, 좌의정 홍봉한, 우의정 윤동도가

복정復政(영조가 세자를 폐하고 정사에 복귀한 것)을

하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한 장의 치사致詞를

어찌 사양하겠는가"라고 말했다.

▲ 조재호(1702~60)  풍릉부원군 조문명의 아들이자 풍원군 조현명의 조카이며 효장세자빈의 오빠다. 죽음을 예견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세자가 도움을 청한 인물이었다. 사도세자 사후 "세자를 보호하려 한다"는 말을 한 혐의로 사형당했다.

▲ 창경궁 선인문  영조 38년(1762) 윤5월 13일, 세자는 영조의 명에 따라 창경궁 휘령전(문정전)에서 뒤주로 들어갔다. 세자가 들어간 뒤주는 선인문 앞으로 옮겨졌으며 8일 뒤인 21일 세자는 그 속에서 운명했다. 서울시 종로구 소재.

▲ 융릉  사도세자의 무덤(혜경궁 홍씨와 합장)으로 정조 대에 영우원, 현륭원 등으로 개칭되었다가, 광무 3년(1899) 융릉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경기도 화성시 소재.

 

『영조실록』 38년 윤5월 21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지 여드레가 지난 날)

사도세자가 훙서薨逝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미 보고를 들은 후이니 30년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어찌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사도세자라 한다.

 

『영조실록』 같은 날

세자궁의 중관 구흥삼具興三 등을

모두 종으로 삼으라고 명하다.

▲ 정민시(1745~1800)  세자시강원 필선으로 세손의 옆을 지켰다. 이후 정조가 즉위하면서 홍국영과 함께 요직을 두루 거쳤고 끝까지 분수를 지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 『향사반차도설』  『경모궁의궤』의 한 부분으로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에서 제례를 올릴 때 제관들의 위치를 표시한 그림이다.

▲ 채제공(1720~99)  정조 12년(1788) 우의정으로 발탁됨으로써 남인 유일의 정승이 되었다.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하고 추진한 핵심 인물 중 한 명이다.

▲ 장용영 내부평면도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해 문관을 배출하고 장용영을 강화해 무관들을 키운 것은 모두 개혁을 위한 신진 세력을 양성하기 위해서 였다. 정조의 꿈은 그렇게 준비되었다.

▲ 김조순(1765~1832)  정조가 세자빈으로 선택한 이는, 노론이지만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정적이었던 시파 김조순의 딸이다.

▲ 시사단試士壇  정조 16년(1792), 남인의 종주 퇴계 이황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치러진 별시를 기념해 세웠다. 정조는 이 별시로 노론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남인의  결속을 도모했다. 경상북도 안동시 소재.

 

단군 · 기자 이후 4천 년에

세상의 온갖 만물 성신들이 만들었네

산길을 뚫고 물길을 뚫어서

큰 강에는 나무다리 놓고 작은 강엔 줄다리를 놓았네

남쪽의 금강과 북쪽의 용흥강에

모두 다 다리 놓아 인객人客을 건너게 하였어라

유독 한수漢水(한강)에만 섣불리 논의하기 어려워

예전부터 다리 없이 배를 타고 왕래했네

백학은 아니 오고 청룡도 달아났건만

수면엔 무지개처럼 곧은 다리 보이지 않았네

13년 되던 해 가을 7월에

원침을 장차 만년 터전으로 옮길 때

대궐의 밤 시간은 효심으로 길어가고

애타는 정성에는 하늘도 감동했네

지관을 기다릴 것도 없이 좋은 자리 찾았고

산악에 오른 적도 없이 명당자리 얻었도다

여룡이 구슬을 뱉으니 햇살이 빛나고

하늘 너머에서 날아온 아름다운 봉새 깃이어라

찬란한 연화는 구슬과 비단을 따르고

명당을 찾아뵈니 금성을 에워쌌네

세심하게 공을 들여 책에서 찾아봐도

마치 귀신이 몰래 하사한 듯하네

성인聖人(정조)이 성인(사도세자)을 장사하니 길상吉祥이 뒤얽히는데

구슬 같은 언덕은 어찌 그리 고운고

흠의를 마련할 때 내탕고를 기울이고

갖가지 공역은 삯을 내어 꾸려서

털끝만큼도 농군들을 귀찮게 안 하니

닭과 개도 저마다 새 고을(수원)로 돌아갔네

의장 행렬은 앞길에 십여 리나 늘어서고

임금님 지나는 길 깎은 듯이 평탄하네

 

첫 겨울의 날씨 좋은 병진일에

임금 상여 떠나니 은초롱 늘어섰네

울긋불긋 의장대에 운삽이 뚜렷한데

새벽녘에 강물을 무사히 건넜도다

신이 외람됨을 잊은 채 긴 시詩를 지어

성사를 노래하여 천년 억년 전하노니

후인에게 부교浮橋가 있는 곳을 가리켜 알게 하여

하수에 임해 우임금의 업적을 떠올리는 것처럼 하노라

- 부사직 이헌경李獻慶이 지어올린 「부교행浮橋行」이란 장시의 일부

 

주요 인물

· 사도세자(1735~62)

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효종과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열살 때 노론 홍봉한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열다섯 살 되던 해부터 군사와 용인用人을 제외하고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한다. 영조 31년(1735)에 소론이 일으킨 나주  벽서 사건 관련 옥사 확대에 반대한다 노론의 미움을 산다. 노론이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소론 영수 조재호와 연합해 대항하려 하다가 나경언을 앞세운 노론의 역습을 당해 뒤주 속에서 비참하게 사망한다. 훗날 장헌세자와 장조莊祖로 추존된다.

 

· 영조(1694~1776)

사도세자의 아버지. 무수리 출신 어머니 최씨와 숙종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인 · 손론계인 희빈 장씨 소생의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세제에 책봉된다. 이어서 대리청정을 주장하다 소론 강경파에게 역적으로 몰리지만 경종에 의해 구원된다. 경종이 와병 중일 때 어의의 반대를 무릎 쓰고 독단적으로 약을 처방했다가 경종 독살설에 휘말린다. 즉위 후 탕평책을 추진해 노론과 소론을 병용했으나 재위 31년에 발생한 나주 벽서 사건으로 탕평책을 포기한다. 이후 독주하기 시작한 노론과 사도세자가 대립하자 노론을 지지하고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다. 그 후 노론의 반대를 무릎 쓰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을 지지해 왕위에 오르게 한다.

 

· 경종(1688~1724)

희빈 장씨 소생으로 숙종의 큰아들이다. 어머니가 사삭된 후 소론의 보호로 왕위에 올랐으나 노론에 밀려 이복동생인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영조)을 세제로 책봉하고 대리청정케 한다. 소론 강경파가 대리청정을 역으로 몰자 이를 이용해 노론 4대신을 사형시키는 신축 · 임인옥사를 단행한다. 재위 4년 만에 급서하자 독살당했다는 벽서가 전국 각지에 나붙고 소론 강경파 이인좌가 경종의 복수를 기치로 거병하기도 한다.

 

· 홍봉한(1713~78)

사도세자의 장인. 예조 판서를 지낸 홍현보의 아들로 노론 명문가의 자제였으나 나이 서른이 넘도록 출사하지 못하다가 딸이 세자빈이 된 그해 과거에 급제했다. 이후 영조의 총애를 입어 고속으로 승진해 노론 영수가 된다. 나주 벽서 사건 이후 세자가 소론으로 처신하자 당론에 따라 김상로, 홍계희, 윤급, 김한구 등과 함께 세자를 제거하는 데 앞장 선다. 세자가 갇혀 죽은 뒤주를 바친 인물이기도 하다. 정조가 즉위한 후 온 집안이 화를 입는다.

 

· 혜경궁 홍씨(1735~1815)

노론 홍봉한의 딸로서 열 살 때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다. 혼인 초에는 세자와 사이가 좋았으나 세자가 소론으로 처신하면서 노론과 대립하자 세자를 버리고 친정을 택한다. 이후 세자의 여러 동정을 홍봉한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아들 정조가 즉위한 후 친정이 사도세자 살해의 주모자로 몰려 화를 입는다. 정조가 사망한 후 일흔이 넘은 나이에 손자 순조에게 친정을 변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중록』을 저술하는 노회한 정객으로 변신한다. 

 

· 조재호(?~1762)

소론 영수 조문명의 아들로서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빈의 오빠다. 우의정까지 올랐으나 당쟁에 반대했고 노론이 독주하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사직한다. 이후 춘천에 은거하면서 노론에 둘러싸인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세력을 모은다. 세자가 뒤주에 갇힌 직후부터 홍봉한에게 공격을 당하기 시작해 세자를 보호하려 했다는 이유로 사사당한다.

 

· 인원왕후 김씨(1687~1757)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로서 인현왕후 민씨의 뒤를 이어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친정은 소론가였으나 숙종이 노론을 지지하자 노론이 되었다. 경종 재위 시 노론을 배후에서 움직여 연잉군(영조)을 세제로 책봉하고 대리청정케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후에도 정치적 위기 때마다 여러 차례 연잉군을 구해주었다.

 

· 정성왕후 서씨(1692~1757)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이 되었다가 연잉군이 세제로 책봉됨에 따라 세제빈이 되었다. 임인옥사 때 처조카 서덕수가 연잉군 관련설을 자백하고 사형당함에 따라 정치적 곤경에 처한다. 세제빈 시절 연잉군과 함께 많은 정치적 역경을 헤쳐나가 왕비가 된다.

 

· 선의왕후 어씨(1705~30)

경종의 계비. 1718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다. 원래 노론 어유구의 딸이지만 경종이 소론으로 처신하자 그녀도 소론으로 정치 소신을 바꾸었다. 경종이 후사를 낳지 못하자 시동생 연잉군 대신 종친을 양자로 들여 왕위를 잇게 하려다가 대비 인원왕후와 노론의 저지로 실패하고 경종이 승하한 지 6년 후 쓸쓸하게 세상을 뜬다.

 

· 김상로(1702~69?)

노론 영수이자 영의정으로 영조와 세자 사이를 이간하고 숙의 문씨의 오라비 문성국 등과 결탁해 세자를 위험에 빠뜨린다. 정조 즉위 직후 관작이 추탈되고 그 아들 치양致良 · 치현致顯 등은 유배당한다.

 

· 윤급(1696~1770)

노론 중진으로서 탕평책에 반대했다. 자신의 청지기 나경언을 시켜 세자를 역적으로 고변케 했다.

 

· 나경언(?~1762)

노론 중진 윤급의 청지기로서 액정 별감 나상언의 형이다. 가산이 탕진되어 곤경에 처하자 윤급 · 홍봉한 · 김상로 · 김한구 등의 사주를 받아 거액을 받고 세자를 역모로 고변하는 일을 맡았다.

 

· 홍계희(?~1771)

노론 중진으로서 균역청 설치를 주관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으나 홍봉한 · 김상로 등과 짜고 세자를 제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영조 47년에 사망했으나 그의 아들 지해 · 술해 등이 정조를 살해하려다 실패하여 멸문당하고 그 역시 관작이 추탈되었다.

 

· 이종성(1692~1759)

소론 영수로서 시종일관 사도세자를 지지한다. 나주 벽서 사건 때 옥사를 확대하는 데 반대하여 삭탈관직을 당한다.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가 임신해 세자에게 위기설이 나돌자 세자 호위를 적극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영조 35년(1759) 사망한 것은 세자에게 큰 타격이었다. 사후 장조莊祖(사도세자)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숙의 문씨(?~1776)

효장세자빈 조씨(현빈)의 나인이었는데 현빈이 사망하자 영조가 친히 장례를 주관하는 과정에서 눈에 띄어 승은을 입는다. 오라비 문성국과 함께 노론과 결탁해 사도세자를 핍박하는 일에 가담했다가 정조가 즉위한 후 사사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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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