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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11. 11:19 내가 읽은 책들/2012년도

2012-171 조선 선비 살해사건 2

 

이덕일 지음

2006, 다산초당

 

시흥시대야도서관

EM051360

 

911.05

이24조 2

 

시대의 풍운아 조광조가 약사발을 앞에 두고 앉아서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했고, 나라를 내 집처럼 금심했네. 해가 아래 세상을 굽어보니,

충정을 밝게 비추리." 기묘년이 저물어가는 12월 30일. 만 37세의 젊은 나이였다.

 

"신은 38세의 선비로 이 세상에 믿은 것은 전하의 마음뿐이었습니다. 국가의 병통이 가짜로 공신이 된 신료들이 사욕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이를 막아 국가의 명맥을 길이 새롭게 하고자 했을 뿐 조금도 사심이 없었습니다."

_기묘사화 때 국청에 나간 조광조의 말

 

"슬프다, 우리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머니가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아들이 훗날에 어찌 원수를 갚지 않겠는가?"

-연산군의 친모 폐비 윤씨게게 사약을 전한 승지 이세좌 부인이 한 말

 

오늘밤 저승으로 갈 사람들, 속절없이 밝은 달만 남아 인간을 비추네 / 흰구름에 백골을 묻으면 영원히 그만인데, 공연히 흐르는 물만 남아 인간을 향하네 / 긴 하늘 달 밝은 밤 / 추운 겨울 작별을 아쉬워하는 때

_옥사에서 김정과 김구가 주고 받은 시

 

먼 섬에 버려져 고혼이 되는구나 / 어머니를 남겼으니 천륜이 막혔다 / 이런 세상을 만나 내 몸을 잃으니 / 구름을 타고 가 상제를 찾을까 / 굴원을 따라 높은 곳에 거닐까 / 기나긴 밤 어둡구나 언제 밝을꼬 / 붉은 충성 빛났건만 풀더미 속에 묻히는구나 / 당당하던 뜻이 중간에 꺽이고 마는구나 / 오호라, 먼 훗날에는 나를 슬퍼하리.

_김정의 절명사

 

이덕일

숭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동북항일연군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객관적이고 풍부한 사료와 흡인력있는 문체를 토대로 대중역사서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한 그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역사저술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으로 있다.

한국사의 디양한 쟁점을 소재로 한 저서들 중 특히 《조선 왕 독살사건》은 인종, 선조, 효종, 현종, 경종, 정조, 고종과 소현세자 등 석연치 않은 죽음으로 독살설에 휘말린 조선 왕들의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역사서 붐을 일으켰다. 역사의 이면을 넘어 그 의미까지도 생각하게 해준 《조선 왕 독살 사건》은 역사저술가로서의 그의 이름을 독자들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킨 역작이다. 그 외 조선 당쟁사의 심장부를 다룬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사도세자의 고백》,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의미를 보여준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비롯하여 불운한 천재나 역사 속에 묻혀버린 인물들을 복원한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이덕일의 여인열전》, 《조선 최대의 갑부 역관》, 《장군과 제왕》등의 저서가 있다.

 

2권 주요 등장인물 _정치적 견해를 중심으로

 

윤필상尹弼商 1427~1504

1455년 호조좌랑으로 원종공신 이등에 책록된 뒤 형방승지, 도승지 등을 역임하면서 세조의 신임과 총애를 받앗다. 특히 형방승지로 있을 때 날씨가 매우 춥자 경향에 있는 죄수들을 낱낱이 상고하여 작은 책자에 기록해 두었다가 세조가 죄수의 현황을 묻자 즉시 응답해 신임을 두터이 하였다. 이시애의 난 때 왕명을 신속히 처리하여 우참찬에 특배되고 적개공신 일등에 녹훈되었다.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의 폐비를 막지 않았다 하여 사사의 명을 받았으나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세조 5년(1459)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정자 등의 관직을 역임햇다. 성종 때는 경연관이 되어 성종에게 성리학을 역설했다. 길재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를 사사하여 성리학의 학통을 이은 것으로 평가된다. 영남 사림파의 종조로 많은 문인들을 관계에 진출시켜 훈구파에 맞서는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그가 지은 <조의제문>이 사후에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단서가 되었다.

 

소혜왕후(昭惠王后. 인수대비) 한씨韓氏 1437~1504

서원부원군 한확韓確의 딸. 세조 1년에 의경세자의 빈인 수빈粹嬪에 책봉 되었으나 의경세자가 요절함으로써 사가로 물러났다. 예종이 죽은 후, 시어머니 정희왕후 윤씨 ·사돈 한명회와 짜고 둘째아들을 성종으로 즉위시킴으로써 인수대비에 책봉되었다. 성종의 계비 윤씨의 투기에 강경한 조처를 취해 윤씨를 폐출시키고 사약을 내림으로써 갑자사화의 단초를 제공했다.

 

유자광柳子光 ?~1512

서얼 출신이나 이시애의 난 때 공을 세워 병조정랑이 되었다. 예종 때 남이의 옥사를 주도한 공으로 익대공신 일등이 되었다. 성종 때는 한명회와 대립하다가 파직되기도 했다.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을 기화로 이극돈과 함께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중종반정 후에도 정국공신 일등에 봉해졌으나, 대간과 홍문관의 잇단 탄핵으로 관작이 삭탈되고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

김종직의 문하에서 《소학》을 배워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고, '소학의 화신'이란 평을 받았다. 이극균의 추천으로 남부참봉에 제수된 후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다가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당黨이란 죄목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 희천에서 조광조에게 성리학을 가르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학통을 잇게 했다. 이후 갑자사화 때 무오당인戊午黨人이란 죄목으로 사약을 받았다.

 

이심원李深源 1454~1504

태종의 현손玄孫으로 학문을 좋아해 사림파로 자처하니 문인들이 많이 따랐다. 임사홍이 고모부였으나 성종에게 그를 탄핵하여 조부와 사이가 갈라졌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아들 유녕幼寧과 함께 사형되었다. 중종 때 흥록대부興祿大夫 정1품으로 추증되었다.

 

임사홍任士洪 ?~1506

두 아들이 각각 예종과 성종의 부마인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다. 궁중파宮中派의 핵심 인물로서 부중파府中派를 제거하기 위해 폐비 윤씨 사건으로 연산군을 부추겨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부중파는 물론 사림파도 대거 살육했다가 중종반정 때 처형되었다.

 

유순정柳順汀 1459~1512

목사 양攘의 아들로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성종 18년(1487)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간원 헌남, 이조판서 등을 역임햇다. 1503년에 공조참판으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에는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연산군의 밤사냥에 대해 진언하였다가 임사홍의 모략으로 추국당했다. 1506년, 박원종 · 성희안과 함께 중종반정을 일으켜 '반정 삼대장'으로 불렸으며 중종반정 후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한재寒齋 이목李穆 1471~1498

김종직의 문인으로서 연산군 1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영안도평사永安道評事 등을 역임했다. 성균관 유생 시절 훈구파의 핵심인 영의정 윤필상을 '간귀'라고 비난했다가 무오사화 때 김일손 · 권오복과 함께 사형되었다.

 

지족당知足堂 남곤南袞 1471~1527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 좌부승지 등을 역임햇다. 중종 때 이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좌찬성, 대제학 등에 올랐으나 조광조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원래는 사림파의 종주인 김종직의 문인이었으나 훈구파 심정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제거했다. 이후 이를 후회하여 자신의 글을 모두 불태웠다. 중종 22년 사망하자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받았으나 명종 때 관작을 삭탈당했다.

 

소요정逍遙亭 심정沈貞 1471~1531

1502년 문과에 급제한 후 수찬이 되었다가 중종반정에 참가해 정국공신이 되었다.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며 훈구파의 거물로 성장해 남곤과 함께 사림파를 대거 살육하는 기묘사화를 일으켰다. 복성군福城君의 옥사 때 김안로의 공격을 받아 강서에 유배되었다가 박빈朴嬪과 내통한 혐의로 사사되었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

김굉필의 문인으로서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박사 등을 역임했다. 중종 때 좌찬성, 대제학, 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했다. 경상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여씨향약》, 《오륜행실도》, 《소학》 등을 널리 보급하여 사림파의 성장에 많은 공을 세웠다. 기묘사화 때 파직되었지만 조광조의 급격한 개혁에 반대한 온건개혁론자였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평안도 희천에 가서 귀양와 있던 김굉필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당시는 사화 직후여서 천지들은 성리학에 몰두하는 그를 '화태'라고 부르며 멀리하기도 했다. 1510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등을 역임하다가 경연 시독관이 되어 중종에게 남다른 인상을 남겼다. 그는 성리학적 도학정치道學政治,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추구해 《여씨향약》, 《주자가례》 등을 보급했다. 대사헌에 올라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권을 잡고 현량과를 실시하여 사림파를 대거 등용했다. 반정공신 중 가짜가 많다 하여 위훈 삭제를 주장해 4분의 3에 달하는 공신을 박탈했는데, 이로 인해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기묘사화 때 사형되었다. 선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정우당淨友堂 김식金湜 1482~1520

중종 14년 조광조의 주도로 실시된 현량과에 장원하여 부제학이 되었고, 사림파의 강력한 천거로 대사성에 전임되었다. 조광조 등과 사림정치 실현에 힘쓰다가 선산에 유배되었으나 도망한 후 <군신천세의>라는 시를 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충암沖菴 김정金淨 1486~1520

중종 2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순창군수로 있으며 담양부사 박상과 함께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했다가 훈구파에 의해 보은에 유배되었다. 중종 11년에 풀려나와 사림파가 중용됨에 따라 도승지와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조광조와 함께 도학정치 · 지치주의를 추구하다가 중종 14년(1519) 기묘년에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그 이듬해 제주에서 사사되었다.

 

자암自庵 김구金絿 1488~1534

중종 6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다. 기묘사화 때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10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후 향리 예산에서 학문에 몰두하다가 병사했다. 선조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남해 유배 시절에 지은 <화전별곡花田別曲>은 시가詩歌로 이름이 높다.

 

윤임尹任 1487~1545

대윤의 영수.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오빠다. 무과에 급제하여 경주부윤,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여 자신의 외조카인 인종을 보호하려 애썼다. 인종이 즉위하자 사림파를 등용하기 위해 애썼다. 인종이 죽고 12세의 어린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섭정하게 되면서 그녀의 동생인 소윤 윤원형이 주도한 을사사화를 맞아 사형되었다.

 

윤원형尹元衡 ?~1565

소윤의 영수.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동생이다. 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 지평, 응교 등을 역임했다. 문정왕후의 소생인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이 이끄는 대윤을 제거했다. 그후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며 정권을 장악했으나,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자 실각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고 강음에 유배되어 죽었다.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 1501~1565

영돈녕 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로, 장경왕후가 죽은 후 계비로 책봉되었다. 자신의 아들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다. 그동안 동생 윤원형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과 사림파를 제거했다. 또 불교를 신봉해 승려 보우普雨를 병조판서에 등용하고 선 · 교 양종을 부활하는 등 불교를 강화해 사림파의 비난을 샀다.

 

차례

 

2권 주요 등장인물

 

11 왕권을 압도하는 신권

    형을 제치고 국왕이 된 성종

    단종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의 운명

    누구를 위한 공신 책봉인가?

 

12 사림파의 등장

    한씨 조선인가, 이씨 조선인가

    승정원에 붙은 익명서와 대비의 퇴진

    김숙자와 아들 김종직

    훈구파, 토지를 독식하다

 

13 신진 사림, 훈구 공신들과 격돌하다

    원상제를 폐지하다

    개혁의 전위기관 홍문관

    대간과 임사홍의 대결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에서 줄을 타는 성종

 

14 파란의 연산군시대

    낮에는 요순, 밤에는 걸주

    연산군의 즉위

    연산군, 대간들과 충돌하다

 

15 사림파의 첫 번째 시련, 무오사화

     사초 때문에 충돌하다

    훈구파의 역공세

    피바람의 전주곡, '조의제문'

    세조를 비난한 '술주시' 사건

 

16 금삼의 피

    폐비 윤씨와 선왕의 후궁들

    연산군의 과거사 청산, 폐비 윤씨 사건 재조사

    사림파에게 튄 불똥

 

17 연산군의 무한권력

     연산군의 엽색 행각

    내관 김처선의 비극

    고립된 연산군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다

    무르익은 반정의 꿈

    연산군의 뒤늦은 후회

    연산군은 독살되었는가?

 

18 힘없는 군왕 중종과 조광조의 등장

    조강지처를 쫓아낸 임금

    새로운 특권층이 등장하다

    전권을 장악한 반정 삼대장

    반정 삼대장의 죽음과 조광조의 등장

 

19 조광조의 도전

    소학동자 김굉필과 제자 조광조

    조광조, 중종의 눈에 들다

    사림파의 작은 승리, 그리고 그들의 한계

 

20 사림파의 개혁정치

    사림파의 등용문 현량과

    누구를 위한 토지개혁인가?

    돌아올 수 없는 강, 위훈 삭제

 

21 기묘사화, 훈구파의 반격과 중종의 배신

    주초위왕

    "우리의 죄가 무엇입니까?"

 

22 마지막 시련, 을사사화

    대윤 대 소윤

    윤임, 제거되다

    계림군의 비극

    양재역 벽서 사건

    문정왕후의 죽음과 소윤의 몰락

 

23 사림파, 최후의 승자가 되다

    막을 수 없는 역사의 흐름, 사림파의 집권

    사림파 집권의 토대를 다진 이황

    야당에서 여당으로 : 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

 

참고자료

    이 책의 배경이 된 주요 정치일지

    조선 전기의 공신

    조선 전기의 피화자

 

대저 이른바 공신이라고 하는 자는

반드시 그 공이 사직社稷에 있으며 그 덕을

생령(生靈, 백성)에게 입힌 다음이라야 나라에서 이론이 없게 되며,

사람들도 더불어 다투지 않는 것입니다.

금일의 좌리공신 70여 인은

과연 무슨 공이 있었는지 신 등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_《성종실록》2년 3월 28일

 

▲ 한명회의 묘  한명회는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나,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씨 폐사廢死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되었다가 신원되었다. 현재의 묘는 이장된 곳이다. 충남 아산시 소재.

▲ 어우야담  광해군 때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이 지은 한국 최초의 야담집野談集으로 야사野史 · 항담향巷談 · 가설街說 등을 수록하여 조선 중후기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형은 무슨 일로 세월을 보내실까.

아마도 거문고와 노래겠지.

問兄何事送  想洋琴與渭歌

- 성종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

- 월산대군

▲ 희우정  원래 이름은 합강정合江亭이었으나 세종이 농정을 살피기 위해 이곳을 찾았을 때 마침 단비가 내려 이를 기뻐한 세종이 희우정喜雨亭이라 고쳐 사패했다. 그후 월산대군이 이곳을 대폭 수리한 후 '경치를 멀리 내다볼 수 있다'는 뜻에서 망원정望遠亭으로 개칭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온 나라의 번거로운 사무로 성체聖體를 수고롭게 하는것도

또한 편안히 봉양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이에 마지못해서

지금부터는 무릇 국가의 모든 정사는 내 뜻으로써 결단하고

다시는 대왕대비에게 아뢰어 처결處決하지는 않을 예정이다.

_ 《성종실록》 7년 1월 13일

 

▲ 경국대전  세조는 고려부터 조선 초까지 100여 년에 걸쳐 반포된 법전, 교지, 조례,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법전편찬작업을 시작했는데 이렇게 완성된 법전이 경국대전이다. 성종 때 경국대전이 반포됨으로써 조선은 최초로 정비된 법전을 가진 왕조가 되었다.

▲ 신숙주

▲ 추원재  김숙자金叔滋 · 김종직 부자父子의 집터. 경남 밀양시 소재.

▲ 학사루  통일신라시대의 누각.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이 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이곳에 걸린 유자광의 현판을 철거한 것이 무오사화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경남 함양군 소재.

 

대저 창업하는 임금은 뜻이 성공에 있으므로

비록 한 가지의 재예才藝를 가진 자라도 모두 거두어 쓰지만

수성하는 임금은 이와 달라서 모름지기 재주와 덕이 겸비된 뒤에야 쓰는 것입니다.

세조조에는 한 가지 재주만 있어도 단점보다는 장점을 헤아려 임용했으며,

인연으로 공을 얻어서 훈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전하께서 옛 훈신이라고 하여 녹용錄用하였으니,

그 녹용된 자들이 필시 다 어질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_ 《성종실록》 9년 4월 9일

 

▲ 창덕궁 선정전

▲ 이심원 충신정려현판  주계군 이심원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에 내려진 현판으로 충남 계룡시 소재.

▲ 이목의 묘  전주이씨 서원군파의 묘역에 위치하고 있는 이목의 묘. 이 묘역에는 효령대군의 둘째 아들인 서원군과 효령대군의 5대손 이신성, 그의 아들 이목, 손자 이지함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경기도 안성시 소재.

 

……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했는데,

윤씨가 눈물을 닦아 피 묻은 수건을 그 어머니 신씨에게 주면서,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거든 이것으로

나의 원통함을 말해주고, 또 나를 거둥하는 길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달라'고 유언하므로 건원릉健元陵 길 왼편에 장사했다.

_ 《기묘록

 

▲ 선릉  조선 성종과 그의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가 묻혀 있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소재.

 

나의 사초史草에, 이극돈이 세조 때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것은

불경을 잘 외웠기 때문이라고 쓴 것과 정희왕후의 상을 당했을 때

향香을 바치지도 않고 장흥長興의 관기 등을 가까이한 일을 기록하였는데,

이극돈이 이 조항을 삭제하려다가 실패했소.

……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큰 옥獄이 일어날 것이오.

_ 《연산군 일기》 4년 7월 12일

 

▲ 자계서원  김일손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자계사紫溪祠는 선조 9년(1576) 서원으로 승격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광해군 7년(1615) 중건되어 김극일金克一 · 김대유金大有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현종 2년(1661) '자계'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경북 청도군 소재.

▲ 김종직

▲ 김종직의 묘  경남 밀양시 소재.

▲ 김일손의 묘  경북 청도군 소재.

 

무오년 사초 사건으로 그 도당이 대부분 외방으로 정배되었으나,

그때 삼공三公이 모두 간흉한 무리들로서 사심을 끼고 사정을 써

죽을 자가 살게 되고 살 자가 도리어 죽기도 했다.

그러니 이 무리들을 두었다가 어디 쓰겠는가? 모두 잡아오도록 하라.

_ 《연산군 일기》 10년 9월 26일

 

어제 어머니 사당을 배알한 일에 생각이 달려가네.

존귀한 작호를 올려도 자리를 적시는 눈물 거두기 어렵도다.

간절히 다가오는 정희를 다하기 어렵도다.

영령이여! 정성스럽고 진실된 이 마음을 돌아보소서.

昨趨思廟拜慈親 尊爵難收淚滿茵

懇迫情悔難紀極 英靈應有誠眞

- 연산군

▲ 회묘(회릉)  서울시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던 폐비 윤씨의 무덤은 처음에는 '회묘懷墓'라 불렸으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왕릉으로 승격, '회릉懷陵'으로 바뀌었다가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다시 '회묘'가 되었다. 그러다가 1967년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나는 술을 스승으로 삼으나 성인(청주)도 현인(탁주)도 아니고

증거움 그 자체를 즐긴다.

마음으로 즐기면 장차 늙음이 닥쳐옴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어찌 즐거움의 남는 것이 술임을 알겠는가.

我乃師酒  非聖非賢  樂其樂者  樂終心

不知老之將至  人孰知餘之樂是  酒也

- 정희량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는 그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야 하거늘,

요사이 간사한 내시 김처선이 임금의 은혜를 잊고

변변치 못한 마음을 품고서 분부를 꺼리고 임금을 꾸짖었으니,

… 이에 중죄로 처치하고 그 자식에게까지 미치게 하며

그 가산을 적몰하고 그 가택을 못으로 만들고 살던 고향을 아울러 혁파하여,

흉악하고 간사한 것을 씻어내서 뒷일을 경계하노니, 중외에 효유하라.

_ 《연산군 일기》 11년 4월 4일

 

▲ 서오릉  풍수적인 길지吉地에 왕실의 족분族墳을 만든 것으로 경릉敬陵 · 창릉昌陵 · 익릉翼陵 · 명릉明陵 · 홍릉弘陵의 다섯 능을 일컫는다. 이 중 경릉은 세조의 세자 장(璋 : 德宗)과 그 비妃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경기도 고양시 소재.

 

세상사 매달려도 뜬구름만 못하다.

생각하면 인간사 꿈속만 같구나.

애써 좇는 공명 모두가 허망해

꽃 속에 파묻혀 취하는 것만 못하구나.

深推物理勝雲空  暗度人間似夢中

謾糾功名徒誕妄  不如長醉賞群紅

- 연산군

 

▲ 금표비  연산군이 사냥에 방해가 된다며 '금표내에 들어오는 자는 참한다'는 내용을 한자로 새겨 넣은 화강석 비이다. 금표 구역은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 파주시 · 양주군 · 포천군 · 남양주시 · 광주군 · 구리시 · 김포시 등이었다. 경기도 고양시 소재.

백성에게 잔인하기 나보다 더한 이 없건

내시가 난여(임금)를 범할 줄이야.

부끄럽고 통분해 정서 많아서

바닷물에 씻어도 한이 남으리.

殘薄臨民莫類予  那思姦閹犯鸞輿

羞牽痛極多情諸  欲滌滄浪恨有餘

- 연산군

 

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들을 괴롭혔나.

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오랑캐 막으려고 헛되이 만리장성 쌓았구나.

祖舜宗堯自太平  秦皇何事苦蒼生

不知禍起蕭墻內  虛築防胡萬里城

- 임희재

 

어진 이들과 화정에 모여서 연회 베푸는 것을 시절이 허락하니

꽃과 술에 한가롭게 기대어 태평성대를 깨닫겠네.

어찌 이들이 사사롭게 은혜를 입는 것만 좋아하리.

모두 충성과 정성을 바칠 것을 생각하기 바라노라.

時許群賢宴畵亭  閑憑花酒覺昇平

何徒爭喜鴻私厚  咸欲思忠獻以誠

- 연산군

 

농민들의 집을 헐어 정자 만들고

많은 여자 뽑아서 운평 만들었네.

원훈은 죽이고 대간들은 도륙하고

내시들만 남겨서 충성하게 하였네.

撤人盧舍摠爲亭  採却靑紅作運平

誅盡元勳屠諫輔  只留皀帽表忠誠

- 조신曺伸

 

푸른 이슬 밤에 맺혀 비단치마 적시고

가을바람 소슬하여 애간장을 녹이누나.

난간에 기대 기러기 소리 들으니 달빛이 차갑고

눈물 가득 찬 눈시울은 슬픈 마음 이기지 못하네.

翠露凝宵濕絳裳  金風蕭瑟斷芳腸

憑闌聞雁蟾光冷  淚滿星睚不勝傷

- 연산군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는 것.

人生如草露  會合不多時

- 연산군

 

▲ 금호재琴湖齎  조선시대 문신이자 학자로 중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금헌琴軒 이장곤李長坤의 재실齋室이다. 재실은 묘제墓祭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을 일컫는다. 경남 창녕군 소재.

 

화난禍難 닥치리라 미리 헤아려 딴 놈에게 붙고

흉하게도 고식적인 생각으로 깊은 산에 숨었구나.

어버이 임금 버리고 어디서 용신容身 할꼬.

고금에 완악하기 이보다 더한 놈 없도다.

先度終難掩附攀  兇思姑息隱幽山

離親葉主容何地  今古難逾此惡頑

- 연산군

▲ 박원종의 묘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하고 있다.

▲ 연산군 교동유배지  연산군은 중종반정 이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어 이곳에서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았다. 현재 밭으로 변해 버린 집터에는 '연산군 잠저 지'라고 새긴 자그마한 비가 세워져 있다.

▲ 연산군 묘  연산군과 폐비된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 신씨가 매장되어 있다. 서울시 도봉구 소재.

▲ 연산군 부부상  연산군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폐비 신씨가 보고 싶다"였다. 폭군이었던 연산군도 부인에 대한 애정만큼은 그렇게 각별했다고 한다.

 

"거사할 때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큰일을 성취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지금 수근의 친딸이 대내大內에 있습니다. 만약 궁곤(왕비)으로 삼는다면

인심이 불안해지고 인심이 불안해지면 종사에 관계됨이 있으니,

은정恩情을 끊어 밖으로 내치소서."

"아뢰는 바가 심히 마땅하지만, 조강지처인데 어찌하랴?"

"신 등도 이미 요량하였지만, 종사의 대계로 볼 때 어쩌겠습니까?

머뭇거리지 마시고 쾌히 결단하소서."

"종사가 지극히 중하니 어찌 사사로운 정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여러 사람 의논을 좇아 밖으로 내치겠다."

_ 《중종실록》 1년 9월 9일

▲ 조광조

 

신 등이 성균관에서 천거한 유생 중 조광조는

조행(操行, 조신스런 행실)이 있으나 나이 30이 못 되어,

한창 학업에 큰 뜻을 두고 있습니다.

지금 만일 그의 뜻을 갑자기 빼앗아 미관微官에 서용한다면,

그 학업을 폐지하게 되고, 그 또한 나와서 벼슬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을 것이니,

국가에서 인재를 배양하는 도리에 결함이 되겠습니다. 갑자기 서용하지 말고,

평생의 뜻을 펴게 해서 입신성명立身成名한 후에 쓰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_ 《중종실록》 6년 4월 11일

 

글을 업으로 삼았어도 천기天機를 몰랐는데

《소학》을 읽던 중 이전의 잘못을 깨달았네.

業文猶未識天機  小學書中悟昨非

- 김굉필

 

▲ 경복궁 사정전

▲ 삼인대  강천사剛泉寺 앞 내를 건너 남쪽에 있는 비각으로 내부에는 삼인대 비(碑)가 세워져 있다. 반정 후 새로 중종의 왕비가 된 장경왕후가 10년 만에 죽자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유옥柳沃은 이곳에 모여 과거 억울하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킴이 옳다고 믿어, 각자의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맹세하고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전북 순창군 소재.

▲ 월인천강지곡  세종이 소헌왕후 심沈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 대군이 석가의 일대기를 국문으로 엮은 <석보상절>을 보고 지은 장편 서사시이다.

 

토지를 겸병하는 무리들의 땅은 그 밭둑이 한없이 연이었고,

가난한 자들은 송곳 세울 땅도 없습니다.

백성들의 곤궁은 바로 여기에 연유되는 것이니 이 또한 금하고 눌러야 합니다.

앞으로는 원래의 토지가 50결 이상인데도 다시 더 차지하는 자가 있으면

그 지방 수령으로 하여금 규찰하여 금하게 하고

몰래 타인의 이름으로 바꿔 놓은 자 역시 법에 따라 엄격히 규제해야 합니다.

_ 《중종실록》 13년 5월 28일

 

▲ 경현당  미원서원에는 조선 12유현을 기리는 경현단景賢壇이 있다. 이 단지壇地에는 전면 중앙에 조광조와 김식의 단비가 있고, 왼쪽으로는 남언경 · 김육 · 박세호 · 남도진 · 김평묵, 오른쪽으로는 이제신 · 김창옹 · 이원충 · 이항로 · 유중교의 단비가 있다. 경기도 가평군 소재.

▲ 심곡서원  효종 1년(1650) 조광조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들이 세운 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기도 하다. 경기도 용인시 소재.

 

…… 임금이 있는 것만 알고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아서

우리 임금이 요순 같은 임금이 되게 하고자 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제 몸을 위한 꾀이겠습니까?

천일天日이 비추는 아래에 다른 사심이 없었습니다.

신 등의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나, 사류의 화가 한번 시작되면

뒷날의 국가의 명맥이 염려되지 않겠습니까?

천문天門이 멀어서 생각을 아뢸 길이 없으나

잠자코 죽는 것도 참으로 견딜 수 없으니,

다행히 친히 한번 국문해주시면 만 번 죽더라도 한이 없겠습니다.

뜻은 넘치고 말은 막혀서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_ 《중종실록》 14년 11월 16일

 

▲ 신무문  경복궁의 북문으로 복쪽을 상징하는 현무에서 따온 이름이다. 세종 15년(1433)에 세운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 때 중건되었다. 북쪽은 음기가 많다고 하여 평소에는 닫아두었다.

오늘밤 저승으로 갈 사람들,

속절없이 밝은 달만 남아 인간을 비추네.

重泉此夜長歸客  空照明月照人間

-김정

 

흰 구름에 백골을 묻으면 영원히 그만인데,

공연히 흐르는 물만 남아 인간을 향하네.

埋骨白雲長巳矣  空餘流水向人間

- 김구

 

긴 하늘 달 밝은 밤.

明月長天夜

- 김구

 

추운 겨울 작별을 아쉬워하는 때.

嚴冬惜別時

- 김정

 

▲ 적려 유허비  적려란 귀양 또는 유배되어 갔던 곳을 이르며, 유허비는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히어 후세에 알리고자 세워두는 비를 말하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종 때 이곳에 유배당한 조광조의 옛 자취를 기록하고 있다. 비를 제작한 시기는 현종 8년(1667)으로, 당시 능주목사를 지내던 민여조가 건립하였으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전남 화순 소재.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했고,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했네.

해가 아래 세상을 굽어보니,

충정을 밝게 비추리.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自日臨下土  昭昭照丹衷

- 조광조

 

해가 져서 하늘은 먹같이 어둡고,

산이 깊어 골짜기는 구름 같구나.

군신의 의리는 천년토록 변치 않는 것.

섭섭하다 이 외로운 무덤이여!

日落天呂墨  山深谷似雲

君臣卑載義 怊悵一孤墳街

- 조광조

 

▲ 조광조의 묘  경기도 용인 소재.

 

근심과 병은 귀밑까지 이르고,

바람과 서리 차건만 옷도 주지 않네.

생각하면 임금은 밝은 달인가,

하늘가에도 멀리 비치네.

- 김정

 

먼 섬에 버려져 고혼이 되는구나.

어머니를 남겼으니 천륜이 막혔다.

이런 세상을 만나 내 몸을 잃으니

구름을 타고 가 상제를 찾을까.

굴원을 따라 높은 곳에 거닐까.

기나긴 밤 어둡구나 언제 밝을꼬.

붉은 충성 빛났건만 풀더미 속에 묻히는구나.

당당하던 뜻이 중간에 꺾이고 마는구나.

오호라, 먼 훗날에는 나를 슬퍼하리.

投絶國兮作孤魂  遺慈母兮隔慾天倫

斯世兮余身  乘雲氣兮歷帝

從屈原兮高逍遙  長夜暝瞬兮何時朝

炯丹衷兮埋草  堂堂壯志兮中道

鳴呼千秋萬世兮應我哀

- 김정 <절명사絶命辭>

 

먼 변방도 강산은 고국과 같구나.

하늘가에 눈물 흘리며 외로운 배에 의지했네.

밀물소리 적막한데 관문關門은 닫혔고,

나뭇잎 떨어져 쓸쓸한데 성곽은 비었다.

들길은 가을 퓰 밖으로 가늘게 뻗어 있고

인가人家는 멀리 석양 속에 있구나.

만 리 길 가는 배 돌아오는 돛대는 없으니,

푸른 바다 아득한데 소식도 통할 수 없네.

- 김정

 

▲ 김정 적려비  제주 오현단 경내 소재.

 

날은 저물어 천지는 어두운데

빈 산사엔 구름만 걸쳐 있네.

군신은 천 년의 의리가 잇다 하는데

어느 곳에 외로운 무덤을 삼을까.

日暮天含黑  山空寺八雲

君臣千歲義  何處有孤墳

- 김정 <군신천세의君臣千歲義>

 

조광조 등의 일은 내가 늘 마음속에서 잊지 않았으나

선왕께서 전에 허락하지 않으셨으므로

내가 감히 가벼이 고치지 못하고 천천히 하려 하였다.

이제는 내 병이 위독하고 날로 심해져서 다시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으므로

비로소 유언하여 뒤미처 인심을 위로하니,

조광조 등의 벼슬을 일체 전일의 중의衆議처럼 회복할 수 있으면 다행하겠다.

현량과도 전에 아뢴 대로 그 과를 회복하여 거두어 등용하도록 하라.

- 《인종실록》 1년 6월 29일

▲ 죽도 인종이 손수 그린 그림.

▲ 태릉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모후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문정왕후의 릉이다. 서울시 노원구 소재.

 

지난날 이언적을 평하여 부족한 데가 있다는 말을 듣고서

스스로 탄식하여 생각해 본다. 지금 사람들은 아무런 일이 없는 평지 위에 서서

자기 생각에 따라 옛사람의 시비득실을 점검한다.

이는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일이 실제로 자신에게 당도했을 때

어찌 옛사람의 발꿈치인들 따라가겠는가.

말을 만들어 보이지 않는 흉을 찾아내려 한다면

천하에 어찌 존경하고 숭상할 만한 현인군자가 있겠는가?

_ 유성룡

 

▲ 이황

 

▲ 성학십도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황이 지어바친 책으로 성학聖學의 개요를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십도十圖란 태극도太極圖 · 서명도西銘圖 · 소학도小學圖 · 대학도大學圖 ·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 인설도仁說圖 · 심학도心學圖 · 경재잠도敬齋箴圖 ·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로 사진은 1도 태극도와 10도 숙흥야매잠도이다.

▲ 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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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