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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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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24. 15:59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1-1 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

06 종로 · 인사동

젊음이 오래 머물러 있는 길을 걷는다

 

광화문 교보빌딩 앞 한 귀퉁이에 있는 비각. 많은 사람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사적이지만 그 내력은 만만치 않다.

 

"花商(화신백화점)의 '쇼윈도우' 속에서 붉은 입술을 방긋이 벌이고 있고 被女들의 푸른 치마폭은 아침의 '아스팔트' 위에서, 백화점의 층층계 위에서 깃발과 같이 발랄하게 팔락거리지 않는가."

김기림, <봄의 전령>, 《조선일보》, 1933년 2월 22일

옛날 화신백화점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종로타워.

예나 지금이나 주변 어느 건물보다 눈에 띄는 랜드마크와 같은 건물이다.

 

그래도, 구보는, 약간 자신이 있는 듯싶은 걸음걸이로 전차 선로를 두 번 횡단하여 화신상회 앞으로 간다. 그리고 저도 모를 사이에 그의 발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기조차 하였다. 젊은 내외가, 너덧 살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그곳에 가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식당으로 가서 그들의 오찬을 즐길 것이다. 흘낏 구보를 본 그들 내외의 눈에는 자기네들의 행복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엿보였는지도 모른다. 구보는, 그들을 업신여겨 볼까 하다가, 문득 생각을 고쳐, 그들을 축복하여 주려 하였다. 사실, 4, 5년 이상을 같이 살아왔으면서도, 오히려 새로운 기쁨을 가져 이렇게 거리로 나온 젊은 부부는 구보에게 좀 다른 의미로서의 부러움을 느끼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분명히 가정을 가졌고,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당연히 그들의 행복을 찾을 게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그리고 화신백화점 육층의 창들 중에서는 그중 세 개에서만 불빛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해질 사태가 벌어졌다. 안의 얼굴에 놀라운 기쁨이 빛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빠른 말씨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서대문 버스 정거장에는 사람이 서른두 명 있는데 그중 여자가 열일곱 명이었고, 어린애는 다섯 명, 젊은이는 스물한 명, 노인이 여섯 명입니다."

"그건 언제 일이지요?"

"오늘 저녁 일곱시 십오분 현재입니다."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조경란의 장편 《우리는 만난 적이 있에는 주인공이 이 레스토랑(탑 클라우드)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바깥을 내다보는 장면이 있다.

 

33층 스카이라운지의 화장실은 한 벽면 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나는 자동센서가 달린 커다랗고 둥근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통유리 앞에 놓인 의자에 가 앉았다. 남산타워와 은밀한 도시의 요새처럼 환하게 붉을 밝힌 동대문 두산타워의 빽빽하게 밀집한 빌딩숲과 구불거리는 길에 수많은 골목을 숨긴 인사동 거리, 푸른빛의 간접조명을 받으며 성채처럼 우뚝 선 세종문화회관 건물……33층에서 바라보는 도심의 한밤은 셀 수 없이 많은 빛을 흩뿌려 놓은 듯 화려한 빛무리로 들끓고 있었다. 의자를 뒤로 젖힐 때마다 자동센서에서 저절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탑 클라우드, 높은 구름, 구름의 꼭대기, 나는 스카이라운지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유리로 만들어진 비행선을 타고 우주를 유람하다가 지나는 길에 잠깐 이곳을 비행하고 있는 거란 느낌에 휩싸이고 있었다.

조경란,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로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늘

드는 칼로 이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로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서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 <그날이 오면>

보신각에서는 매일 낮 12시 보신각종 상설 타종행사가 열린다. 서울시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하면 직접 종을 쳐 볼 수도 있다.

 

이야기에 팔려서, 오는 줄도 모르게 어느덧 종각 앞을 지나 광교를 건너고 잇다. 화신 잎 네거리까지가 송영호 군에겐 거주지역이고, 게서부터는 남쪽으로 본정을 들어 명치정 골목을 돌아 내려오는 건, 이를테면 여행을 하는 셈이다.

채만식, <종로의 주민>

 

썸싱 장소를 묻다가 소양이가 종로 2가에 자주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옥의 말에 의하면 소양이도 여느 젊은 아이들처럼 재수할 때부터 종로통이었고, 자리마다 인터폰이 있어서 졸팅하는 재미로 젊은 애들이 많이 가는 썸싱에서 희중을 만나게 되었다.

강석경, 《숲속의 방》

 

일어 학원이 있는 종로 일대에는 일어 학원 말고도 학원이 무수히 많았다.

서울 아이들은 보통 학교를 두 군데 이상이나 다니나 보다. 영수 학원, 대입 학원, 고입 학원, 고시 학원, 예비고사반, 연합고사반, 모의고사반, 종합반, 정통영어반, 공통수학반, 서울대반, 연고대반, 이대반……이 무수한 학원으로 무거운 책가방을 든 학생들이 몰려 들어가고 쏟아져 나오고 했다.

박완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나무가 되어 한껏 바람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네

가축의 피가 되어 욕망을 으르렁거리기도 했네

정액이 되어 번식의 황홀경에 도취되기도 했네

눈물이 되어 타령으로 한세상 쓴 살이도 했네

자학의 세월 돌부리에 몸 부딪치며

계곡을 뒤흔들기도 했네

아으, 구름이 되어 한량처럼

한세상 두둥실 떠돌기도 했건만

이제 모든 소리를 탕진하고 늙어

침묵으로 흐르는 강물이 되고 말았네

저기 죽음의 바다가 넘실거리네

함민복, <탑골공원에서>

 

종로에 들렀다가 탑골공원으로 갔다. 갈비와 물김치가 못 견디게 먹고 싶었다. 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할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몰래 주워먹었다. 그러고는 행인들을 구경하며 그들의 얘기를 엿들으며 하루를 보냇다.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고 말 걸지 않았다.

김영하,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잇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황지우, <거룩한 식사>

탑골공원 한 구석에 숨은 듯이 서 있는 만해 한용운 선사의 기념비.

옛 파고다극장이 있던 낡은 건물.

영원토록 젊은 시인을 추억하게 하는 곳.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지나,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아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기형도, <진눈깨비>

작은 공원처럼 꾸며진 옛 조선극장 터. 이곳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인사동에 들어서게 된다.

 

"진짜 호경기야 만주사변 지나서 아니겠습니까. 만주사변을 일으켜 놓자 그쪽에선 구경꾼을 잃어버린 왜놈들이 조선땅을 찾아들었던 거죠. 그쪽에선 그맘때 벌써 영화가 판을 쳤다지만 우리네야 명절 때면 모를까 어디 큰맘 먹지 않고는 우미관이나 조선극장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으니까요."

준표의 눈이 가늘어진다. 서커스에서 몸담아 지나온 영욕의 시간들이 눈앞을 스쳐가고 잇었다.

한수산, 《부초》

 

그들이 인사동에 있는 르네상스에 들어섰을 때, 아닌게 아니라 분위기는 무척 가라앉고 처져 있는 편이었다. 그러면서도 뭐랄까 조금은 느적지근하고 사람의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고급스런 냄새가 났다. 함부로 막걸리 냄새를 풍긴다든가, 도나캐나 쇠똥말똥 밟은 흙발로 들어서서는 안 될 것 같은 가라앉은 치장으로 휩싸여 있었다. 우선 전후의 막돼먹은 다방과는 달리 디스크 플레이어를 따로 유리 박스에 가두어 두고 그 옆으로 차곡차곡 쟁여져 있는 작은 산더미 같은 레코드판이 그들의 기를 꺾어 놓았다. 어지간한 다방에 들어서면 공기부터가 텁텁하고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소리들로 하여 쇠전이나 장바닥에 들어온 느낌이었는데 르네상스는 안 그랬다. 모두가 차분히 가라 앉아 있고 박힐 것들이 제자리에 박혀 있는 느낌이었다.

최일남, <서울의 초상>

 

걸어서 인사동까지 온 운지는 승찬이 평소 잘 들락거린다는 이층 술집으로 들어갔다. 일어서면 머리끝이 천장에 닿았다.

"여기가 바로 그 쟁이들이 밤낮으로 죽치고 술마시는 그 술집인가? 이름부터 좀 수상한데? 세상만들기라……."

"예, 괜찮은 집이예요. 선배도 앞으로 잘 애용해보세요."

김소진, 《양파》

 

오늘은 인사동이 궁금하다

며칠 안 나가는 동안

눈에 번쩍 띄이는 벼루가 나왔다가

눈 밝은 사람에게 끌려가지 않았을까 하고

그래서 틈만 나면

인사동 거리를 기웃거리지만

- 그 벼루 조각 한 번 참!

은 만나지 못하고

찌든 먹 냄새만 가슴에 환하게 담고

목 부러진 백자주병처럼

고개 꺾고 돌아오는

이근배, <인사동 산책 - 벼루 읽기> 부분

 

시현은 인사동 거리를 걸으며 그곳이 바람든 여염집 여편네 같다고 생각한다. 체면과 탐욕이, 명분과 실리가 적절히 섞여 있는 그 모습이, 과거와 현재가, 예술과 상혼이, 그리고 온갖 딜레탕트적인 주변예술이 뒤섞여 이제는 노쇠와 퇴락밖에 남지 않은 비만한 중년부인을 닮아가고 있다.

김형경, 《새들을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전통의 거리라는 인상이 강하던 인사동에도 변화의 바람이 분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인사동 쌈지길 모습.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

천상병 시인의 아내(문순옥 여사)가 운영하는 작은 카페. 귀천.

 

내 아내가 경영하는 카페

그 이름은 '귀천(歸天)'이라 하고

앉을 의자가 열다섯 석밖에 없는

세계에서도

제일 작은 카페

 

그런데도 하루에 손님 이

평균 60여 명이 온다는

너무나 작은 카페

 

서울 인사동과 관훈동 접촉점에 있는

문화의 찻집이기도 하고

예술의 카페인 '귀천(歸天)'에 복 있으라.

천상병, <세계에서 제일 작은 카페>

 

세계에서 제일 작은 카페의 분점이 생겼다. 이제 인사동에는 귀천 카페가 둘이다.

 

07 북촌길

궁궐 옆 마을 길을 걸었네

 

광화문 큰 거리를 총독부 쪽으로 어슬어슬 걸어가노라니 그의 그림자가 짤막하게 앞에 누워 간다. P는 그 자기 그림자를 꽉 밟고 싶었다. 그러나 발을 내어 디디면 그림자도 그만큼 앞으로 더 나가곤 한다. 이 그림자와 자기 자신에서, 그리고 그림자를 밟으려는 자기 자신과 앞으로 달아나는 그림자에서 P는 자기의 이중인격의 모순상(相)을 발견하였다.

(중략)

물론 그는 지금이라도 누가 한 달에 삼십 원만 줄 테니 와서 일을 해달라면 마치 주린 개가 고기를 보고 덤비듯이 덮어놓고 덤벼들 것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그와 딴판으로 배포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P가 삼청동으로 올라가느라고 건춘문 앞까지 이르렀을 때 저편에서 말쑥하게 몸치장을 한 여자 하나가 마주 내려왔다.

역시 삼청동 근처에 사는 여자인지 P와는 가끔 마주치는 여자다.

P는 그 여자와 만날 때마다 일부러 눈여겨보지 않는 체하면서도 실상은 고비 샅샅 관찰을 하였고, 그리고 속으로는 연애라도 좀 했으면 하던 터였었다.

무엇보다도 동그스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모두 모지지 아니하고 얼굴의 윤곽이 둥글듯이 모가 나지 아니한 것, 그래서 맘자리도 그렇게 둥글려니 하는 것이 P의 마음을 끈 것이다.

(중략)

삼청동 꼭대기에 있는 집--집이 아니라 사글세로 든 행랑방--에 돌아왔다

객지에 혼자 있으니 웬만하면 하숙에 있을 것이로되 방값이 밀리고 그것에 졸릴 것이 무서워 P는 방을 얻어 가지고 있던 것이다.

채만식, <레디 메이드 인생>, 《신동아》, 1934

건춘문은 경복궁의 동문(東門)이다.

키 큰 가로수들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오늘 산책을 시작한다.

 

불안과 초조와 희망이 섞인 사흘이 겨우 지났다. 나흘 되는 날 아침 일찍이 찬구는 P의 집에 가보았다. 그러나 기다리던 통지는 오지 않은 것이었다. 너무 일러 그런 게지 하고 도로 나와 창덕궁 앞으로 나서서 단성사 앞을 지나 종로를 한 바퀴 휘돌아 또 들러 보았으나 그래도 아무 편지도 안 왔다 한다. 이번에는 북으로 돌아 원동 계동 재동 삼청동 일대를 돌아 오정 때나 되어 세 번째 글러 보았으나 그래도 아무 소식도 없었다. 혹시 또 채용이 못 되는 것인가 생각하니 기가 탁 막힌다. 그러나 자기가 너무 조급하게 구는 것이라 돌려 생각하고 아주 멀리 장충단공원으로 가서 잔디밭에서 낮잠을 잤다. 따뜻한 햇살에 몸은 노곤히 풀리면서도 깊은 잠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언뜻 눈을 뜨고 보니 꽤 잠을 잔 모양으로 가로 길게 비낀 나무 그림자가 오후도 퍽 늦어진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찬구는 분주하게 툭툭 털고 일어나 P의 집으로 걸음을 빨리하였다.

유진오, <오월의 구직자>

여고와 남고가 모여 있던 동네에 자리잡은 정독도서관. 첫사랑을 기다리는 소년의 모습이 그려지는 향수어린 풍경.

 

도서관에 다다랐을 때엔 마침 때 이른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라고 영민이가 킁킁거렸다.

우리는 거리에 서서 도서관 문 닫는 시간을 기다렸다. 하늘엔 가득가득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첫눈 치고는 폭설에 가까웠다. 날이 더운 탓에 눈은 쌓이질 않고 땅 위에 떨어지자마자 녹았다. 그러나 좀 후에는 쌓이기 시작했다.

가방을 어깨에 맨 채 벽에 기대서 우리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서 있었다.

우리는 입을 벌려 눈을 받아먹었다.

그때였다. 도서관 시간이 끝났는지 학생들이 꾸역꾸역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전신주 뒤에 몸을 숨기고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그녀인지 아닌지 구별하려고 기웃거렸다.

소녀가 맨 나중에 나오고 있었다.

최인호, 《머저리 클럽》

 

정독도서관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에 1977년 1월에 개관한 서울시립공공도서관이다. 옛날 학교 건물을 도서관으로 이용하고 있어 곳곳에서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운영시간 07:00(동절기 08:00) ~ 20:00 정기휴관일 매월 1, 3주 수요일. 일요일을 제외한 법정공휴일(공휴일과 일요일이 겹칠 경우 휴관)

 

북촌

북촌한옥마을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북촌문화센터 및 북촌한옥마을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북촌의 유명한 풍경을 찍을 수 있는 '북촌 8경'이란 포토 스폿도 마련되어 있는 데 이에 대한 정보도 있으니 사진을 찍을 계획이 있는 이들은 한번 확인해 보고 출발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http://bukchon.seoul.go.kr

헌법재판소의 백송. 버팀기둥에 몸을 의지해야 할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 왔다.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홍영식이 비참하게 죽은 뒤, 민영익의 도움을 받은 알렌은 흉가가 된 홍영식의 집에다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했다. 제중원의 뜰에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박지원의 집 앞에 있었던 나무, 홍영식의 집 앞에 있었던 나무,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그녀와 함께 걸어다녔던 그 골목길들, 그 가운데 서 있던 나무, 그 나무 한 그루 말이다.

(중략)

둥치에서부터 나누어진 두 개의 가지는 저마다 아픈 사람들처럼 철제 버팀기둥에 기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두 가지 사이로는 가느다란 쇠줄이 연결돼 있었다. 그 통에 서로가 서로를 끌어주면서 버티는 꼴이 되어버렸다. 쇠줄을 자르고 버팀기둥을 없애버리면 금방이라도 두 개의 가지는 땅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얼굴로 떨어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서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왜 쓰러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은 것인가? 나는 울타리를 넘어 잔디를 밟으며 백송을 향해 몇 걸음 더 걸어갔다. 천연기념물 제8호 재동 백송이 내 머리 위로 그 젖은 잎을 드리웠다. 비가 쏟아지는데도 여전히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계속 따져 묻기로 했다. 왜 그냥 쓰러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가? 철제 버팁기둥과 쇠줄로 지탱되는 육백 살이라니? 다른 나무들은 다 죽어버렸는데, 오래 살아남기만 하면 천연기념물이 된다니 그것도 일종의 농담인가? 백송이여, 그런 것도 농담인가?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하면 지금의 우연한 일들도 모두 필연이 된다는 뜻인가? 어린 백송도 천연기념물이 될 수 있다는 뜻인가?

김연수,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멀리서 보아도 희게 빛나는 백송의 줄기. 오랜 세월 탓에 외과수술을 받은 흔적도 보인다.

 

마치 저 굉장한 보물이 크고 아름답고 기이하고 빼어나나……이 구절을 읽을 때면 나는 늘 늦가을 아침 유언을 남기고 죽은 박지원의 재동 집 벽장에 들어있었다는 지구의를 떠올린다. 그 지구의에 대한 얘기를 처음 꺼낸 사람은 단재 신채호였다. 신채호는 박지원이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지구의를 가져왔다고 쓴 바 있다. 박지원이 손수 지은 재동 집 사랑채 앞에는 그가 태어나기 오래 전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원래는 숲을 이룰 만큼 많았겠지만,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잇다. 바로 그날, 우리의 행로 한가운데에 서 있던 바로 그 나무 한 그루다.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비롯한 수많은 책을 남겼으며 조선 후기의 개화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건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아울러 박지원의 벽장 속의 지구의와 뜰 앞에 나무 한 그루도 남겼다. 그건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이다. 나는 역사라는 이름의 위험천만한 폭약을 단숨에 폭파시키는 뇌관은 <열하일기>나 실학사상 같은 게 아니라 벽장 속의 지구의나 뜰 앞의 한 그루처럼 사소하고 하잘것없고 우연의 소산으로만 보이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시작과 끝, 원인과 결과만을 두고 본다면 세상의 모든 일은 인과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그 사이의 행로는 때로 매우 우연적이고 사소한 것들로 채워지곤 한다.

김연수,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인촌 김성수의 대저택을 그대로 보존한 인촌기념관.

 

추석을 지나 이윽고, 짙어 가는 가을 해가 저물기 쉬운 어느 날 석양.

저 계동(桂洞)의 이름 난 장자[富者] 윤직원(尹直員) 영감이 마침 어디 출입을 했다가 방금 인력거를 처억 잡숫고 돌아와, 마악 댁의 대문 앞에서 내리는 참입니다.

(중략)

구경을 아주 원만히 마치고 난 윤직원 영감은, 춘심이는 제 집이 청진동이니까 걸어가라고 보내고, 자기 혼자만 전차 정류장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숱해 몰려 나온 구경꾼들과 같이서 전차를 탈 일이며, 또 버스를 탈 일이며, 그뿐 아니라 재동서 내려 경사진 계동길을 걸어올라가자면 숨이 찰 일이며 모두 생각만 해도 대견했습니다. 십 원짜리를 가지고 하면 또 공차를 탈 수도 있을 테지만, 에라 내가 돈을 아껴서는 무얼 하겠느냐고 실로 하늘이 일까 무서운 변심을 먹고, 마침 지나가는 인력거를 불러 탔던 것이고, 결과는 돈 오 전을 가외에 더 뺏겼고, 해서 정히 역정이 났었고, 그리고 또 대문이 말입니다.

대문은 언제든지 꽉 잠가 두거니와, 옆으로 난 쪽문도 안으로 잠겼어야 할 것이거늘 그것이 훤하게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은 큰대문을 열어 놓고 있노라면 어쩐지 집안엣것이 형적 없이 자꾸만 대문으로 해서 빠져나가는 것만 같고, 그 대신 성서롭지 못한 것이 자꾸만 술술 들어오는 것만 같고 하여, 간혹 창작바리나 큰짐이 들어올 때가 아니면 큰대문은 결단코 열어 놓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이 집의 엄한 가헌입니다.

채만식, 《태평천하》

중앙고등학교에 있는 이상화 시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새겨 놓았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그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어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해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쳤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채만식의 업적을 기리는 채만식 문학비.

<국화 옆에서>를 새겨 놓은 서정주 시비.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통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시인의 찻집 싸롱마고에서는 이런저런 문화 행사들이 열린다.

백목련, 자목련이 짝을 맞춰 피는 소설 속 한옥집은 어디쯤 있을까?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름을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후략)

박인환, <목마와 숙녀>

 

어머니를 따라서 살게 된 가회동집은 한옥으로서 굳이 말하자면 튼 ㅁ자형이었다. 대문을 열면 좌우에 사랑방과 창고가 들여져 있었고, 곧 뜰로 이어졌다. 곱은자형의 안채에는 안방과 뒷방이 있었으며, 대청을 사이에 두고 건넌방이 있었다.

뜰은 나무들이 울창했다.

인위적으로 가꿨다기보다 절로 잡목들이 우거져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기와를 얹은 동편 담장을 따라 오동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고, 라일락과 단풍나무와 사철나무가 있었으며, 백목련 자목련이 짝을 맞춰 자라고 있었다. 특히 마당의 중앙에 서 있는 백목련은 아주 나이 많은 나무여서 기둥이 한 아름은 충분히 될 정도였다.

박범신, 《외등》

 

08 부안동 · 홍지동 · 평창동

산중에 숨어 살며 문학에 헌신한 사람들

 

나는 아직도 청청이 어우러진 수풀이나 바라보며 병을 다스리고 살 수밖엔 없다. 혼란한 꾀꼴새의 매끄러운 울음 끝에 구슬 목청을 메아리가 도로 받아 얼른 또 넘겨 빽빽한 가지 틈을 요리조리 휘돌아 구을러 흐르듯 살아가면 앞길은 열리기도 마련이다.

사람이 사는 길은 물이 흘러가는 길.

산마루 어느집 물항아리에 나는 물이 되어 고여 있다가 바람에 출렁거려 한줄기 가느다란 시냇물처럼 여기에 흘러왔을 따름인 것이다. (후략)

김관식, <자하문 밖> 부분

성문 현판에는 분명 창의문이라 쓰여 있지만 사람들은 자하문이란 이름을 더 좋아하는가 보다.

 

樺榴나무에 연둣빛 기류가 감돌게 되면 봄은 벌써 와 있다고 해야 한다.

해는 차츰 길어지고 낮달이 유난히 눈을 끈다. 저녁에는 사철나무 키 작은 어깨가 달싹인다. 저희끼리 뭔가 표정을 나누고 있다. 이럴 때 서울의 부암동 산꼭대기 그 누옥, 술 때문인지 온종일 입에서 떼지 않는 파이프 때문인지 강화백의 한쪽 눈이 젖어 있다. 지금도 아마 그 큰 눈의 어느 한 쪽은 젖어 있으리, 고지새가 한 마리 거실 맞은 편 뜰에 내려와 집주인의 눈을 먼발치서 가만히 바라본다.

김춘수, <강화백>

 

여기가 어디다냐?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여기가 종로구란 말이냐?

(중략)

작년에 네 가족들이 삼 년 남짓한 외국생활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때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예전에 살던 아파트 전세도 얻지 못하게 되었다고 실망하더니 이런 마을을 찾아낸 모양이로구나. 여긴 완전히 시골마을이여, 커피집도 잇고 미술관도 있긴 하나 방앗간도 있더구나. 방앗간에선 흰 가래떡을 뽑고 있더구나. 옛날 생각이 나서 한참 구경을 했구나. 설이 다가오는가. 방앗간에서 흰떡을 뽐는 사람들이 꽤 있던걸. 아직도 설이라고 흰떡을 뿜는 그런 마을이 이 도시에도 있구나.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환기미술관

관람시간 오전 10시 ~ 오후 6시(11 ~ 2월은 오후 5시) | 관람종료 30분 전까지 입장 가능 | 매주 일요일, 설날, 추석연휴 휴관

입장료 일반 2,000원, 학생 1,000원 문의 02-391-7701 ~ 2 | www.whankimuseum.org

`"흥, 그렇구마. 무너지다가 담만 즐비하게 남았즈마. 우리 살던 집도 터야 안남았겠는기오."

하고 그의 짜는 듯한 목은 높아졌다."썩어 넘어진 서까래. 뚤뚤 구르는 주추는! 꼭 무덤을 파서 해골을 헐어 젖혀 놓은 것 같더마.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기오? 백여 호 살던 동리가 십 년이 못되어 통 없어지는 수도 있는기오, 후!"

하고 그는 한숨을 쉬며 그때의 광경을 눈앞에 그리는 듯이 멀거니 먼 산을 보다가 내가 따라 준 술을 꿀떡 들이켜고,

"참! 가슴이 터지드마, 가슴이 터져."

하자마자 굵직한 눈물 둬 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그 눈물 가운데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을 똑똑히 본 듯싶었다.

현진건, <고향>

좁은 골목 입구 담 아래 현진건의 집터를 알려주는 작은 비석이 있다.

 

지난 봄에 창의문 밖에 있는 전 대원군의 별장을 구경한 일이 있다. 워낙은 김모라는 당시 재상이 지은 것인데 뒤에 대원군이 가진 것이라는데 첫째 이상한 것은 그렇게 좋은 재목으로 그렇게 아끼는 것이 없이 짓는 집을 왜 요즘 집장수들의 집처럼 간사를 좁게 지었나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까닭은 그때 사람들이라고 키가 더 작았던 것도 아니요, 재목을 아꼈음도 아니요, 다만 이만하면 되었다 하는 겸양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태준, <집 이야기>

석파정은 잠긴 문틈으로 보기만 해도 풍채 좋은 한옥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느릿느릿 흘러내리던 인왕산(仁旺山) 자락이 세검정 시냇물을 만나 문득 걸음을 멈추면서 불끈 또아리를 튼 이곳은 풍광이 좋아 예로부터 별장이 많던 것이었다. 세검정 개울 건너 산비탈에 자리잡은 것은 춘원(春園)의 별장이었다고 하는데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위쪽으로 둘러쳐진 철조망 너머 숲 사이로 살짝 보이는 기와지붕은 대원군의 별장이었다는 석파정이었고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현대식 삼층건물은 무슨 재벌동아리 회장의 별장이었다.

김성동, 《길》

'춘원헌'은 춘원 이광수가 은거하며 중요한 작품들을 남긴 곳이다.

 

세검정 빨래란 자고로 유명하다고 하오. 날이나 밝은 아침이면, 밥솥과 장작과 빨래 보퉁이와 빨래 삶을 양철통과를 사내가 걸머지고, 여편네는 진뜩 한 임 이고 코 흘리는 아이를 데리고 자하문으로 주렁주렁 넘어오는 것이 봄부터 가을에 걸쳐서 이 고장의 한 풍경이오. 그들은 개천가 빨래하기 좋은 목에다가 진을 치고 점심을 지어 먹어 가며 빨래질을 하는 것이오. 저보시오. 개천가에는 홑이불, 욧잇, 치마, 모두 널어 말리고 있소.

이광수, <육장기>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잡은 상명대학교 건물은 큰길에서 바로 보인다.

 

"저기는 세검정인가요?"

초희는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렇지." "저 큰 집은 뭐지요?" 전에는 집 한 채 없던 세검정 골짜기에 그득 서 있는 집들, 그 중에서도 산중턱에 새로 지은 큰 건물이 눈에 띄었다.

"저건 학굔가 부지요?"

"상명여자사범대학이야"

"저기다 어떻게 집을 지었을까"

박영준, 《고속도로》

 

집 앞에서 135번 버스를 타고 자하문 터널인지를 지나, 상명여대 입구에서 내린다. 홍은동 쪽으로 걸어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으론 제법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왼쪽으론 몇 개의 작은 산길이 나 있다. 그중 하나의 산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곳에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나무들과 바위와 바람이 있다. 비라도 내린 날이면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린다. 봄과 여름에는 야생화도 핀다.

구효서, 《낯선 여름》

 

내가 자하문고개를 넘어 세검정을 찾았던 것은 1964년 늦가을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졸업반의 학생이었고 게다가 세검정은 초행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곳은 서울에서는 꽤 외딴 동네에 들었다. 그날은 가랑비가 하루 종일 안개처럼 흐르다 멈췄다 하는 날씨였는데, 그렇다고 음산하지는 않았다. 그곳 분지는 안개비에 몽롱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중에 어디선가 배운 대로 표현하자면 이른바 산수운연(山水雲煙)의 경계를 몽롱하고 침중하게 나타낸다는 선염법(渲染法)에 의한 한 폭의 동양화처럼 보였다. 집에서 나와 그곳에 틀어박힌다는 상상이 실제의 일처럼 내 앞에 다가와 나는 망연자실, 남모르는 환희에 몸이 떨렸던 것도 같다. 버스가 자하문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아마도 느티나무인가, 황록색에 붉은빛을 띤 가을 잎사귀들이 무리져 날리는, 어쩌면 비현실의 세계 같기도 한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내 머릿속에 세검정이라는 동네가 두고두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인식된 까닭이 바로 이때의 느낌 때문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 마을의 깊고 가라앉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들이 저 도끼로 찍어 놓은 준(皴)처럼 주름져 보이는 것도 인상이 깊었다.

윤후명, 《돈황의 사랑》

 춘원이 살던 동네에는 '춘원'이라는 빌라가 있어 이정표 구실을 한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주위는 점점 낯설어졌다. 길 가는 사람을 까닭 없이 멸시하는 듯한, 거드름 섞인 높고 도도한 담장들 사이의 삭막한 길. 모든 것이 나로부터 철저하게 무관했다. 그런데 나는 방금 이런 세상을 두려워하여 거짓된 말의 방패 뒤에 비열하게 몸을 숨겼던 것이다.

서영은, 《그녀의 여자》

 

부귀영화를 빼앗아 만년이나 누릴 듯, 후세의 비평을 듣는 단종의 삼촌 세조도 겨우 열세 해 만에 호화로운 꿈도 한 줌의 흙을 보태었을 뿐이요. 그의 원자(元子) 덕종(德宗)은 세조 생전에 참혹한 꼴을 본 것이매, 손도 꼽지 않으려니와, 둘째이신 예종(睿宗)이 또한 겨우 왕위에 오르신 지 일년에 이 세상을 버리시니, 나이 겨우 스무 살이신 예종이 장남한 왕사(王嗣)를 두실리 없다. 세조 비 정희 왕후(貞熹王后)의 명을 받들어 덕종의 둘째 아들이신 자산군(者山君)을 왕위에 모시니 곧 성종(成宗)이시며, 임금 노릇 하신 지 스물 다섯 해, 춘추 서른 여덟에 승하하시니 원자 연산(燕山)이 왕위에 올랐다. 때는 바야흐로 태평성대, 영특한 임금, 갸륵한 어른으로 존숭을 받으시는 성종으로도 호색이 빌미가 되어 비빈 사이에 질투의 불길이 일어나고, 나중에 세자의 어머님이요 곤전마마이신 막중한 왕비를 폐위시키고 또 사약을 내리니, 백성의 집인들 어찌 이러한 흉변이 잇으랴. 한 지어미 원한을 품으매 오 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거늘, 막중한 왕비어니 종묘 사직이 어찌 위태치 아니하랴.

박종화, 《금삼의 피》

그만 헐려버린 충신동 한옥이 너무 아까워 서재만 뽑아서 평창동 산 속에 옮겨 놓았다는 박종화 고택.

 

차가 도심지를 뒤를 밀어내면서 자하문 고개로 넘어가고 있었다. 눈발은 어느덧 굵어져 있었다. 눈발 너머의 숲은 새댁처럼 음전햇으나, 음모자 같은 구석도 잇어 뵜다. 숲 사이로 그림 엽서에서나 봤음직한 아름다운 2층 3층 양옥들이 나타났다. 먼 이역의 딴 세계였다.

(중략)

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2층인 줄 알았는데 안으로 들어가서 보자 3층집이었다. 눈이 너른 정원에 하얗게 쌓여 있었다. 집채만한 암석이 그의 품에 키는 낮고 나이는 많은 노송 한 그루를 품고, 정원 끝에서 그를 내려다 봤다.

박범신, 《죽음보다 깊은 잠》

 

마리가 다시 뾰족한 목소리로 받았다. 그때 그에게 퍼뜩 떠오르는 곳이 있었다. 며칠전 재혁이 전화에서 자랑한 곳이었다.

"나 요즘 사는 집 하나는 팔자 늘어졌다. 건평만 100평 단독주택 나 혼자 쓴다는 거 아니냐? 그것도 평창동 그윽한 곳에 집주인들 식구대로 해외 나갈 일이 있는데, 그게 겨우 다섯 달이라 세를 줄 수도 없고 두둑한 관리비까지 주며 좀 봐달라고 사정하는데 어떻게 하냐? 거기다 잘나가는 교회 당회장님 부탁이니."

이문열, 《호모 엑세쿠탄스》

 

문득, 새소리가 울려댓다. 그를 부르는 휴대전화의 울림이었다.

Y문학박물관에서 그에게 오는 오후 시간 중에 방문해달라고 했다. 며칠전 전화에서, 그쪽의 용건은 문인들의 라이프마스트를 떠서 전시회를 준비하고, 보존도 해두고 싶다는 것이었다. 남준은 머리를 식힐 겸 평창동의 그 문학박물관에 갔다. 관장은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K여사, 노년에 접어들면서 한국문학과 창작가들의 지료와 자취들을 폭넓게 많이 수집 보관해오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많지 않은 문학박물관의 기능을 확대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노년에 편안한 시간을 즐길 수 있는데, 왜 그렇게 극성이냐는 주변 사람들의 핀잔에도 "그럼 나라도 이런 걸 안 하면 누구 하우?" 하는 K여사의 주름진 얼굴이 남준의 가슴을 가만히 흔들었다. 문학을 위해 헌신하는 일중엔 이런 일도 있구나…….

호영송, 《죽은 소설가의 사회》

영인문학관

관람시간 전시기간(4 ~ 5월, 9 ~ 10워) 오전 10시 30분 ~ 오후 5시 | 전시기간 이외에는 오전 10시 30분 ~ 오후 5시 | 토, 일요일 휴관 문의 02-379-3182 | www.youngin.org

 

영인문학관 내부.

 

09 대학로

어느덧 중년이 되어버린 시인의 거리

 

대학가와 대학오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대학로를 소리나는 대로 적으면 대항노, 아니면 대항로가 될 것인데, 그 때문인지 그 거리는 그야말로 대항의 신작로로 변하여 시국 규탄대회가 열려 최루탄이 난무하기 일쑤이고, 기성세대에 대항하는 젊은이들이 무리져 와서 마음껏 북 두드리고 꽹과리 치고 기타 치고 춤추고 악을 쓰다가 술에 취해 쓰러져 자기 일쑤였다. 새벽 두세 시에도 젊은이들이 집단적으로 고래고래 고함치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만우 씨의 고막을 얼얼하게 만든 것은 다반사로 잇는 일이었다. 그래서 만우 씨는 그 거리에 빽빽하게 들어선 무슨무슨 레스토랑의 간판을 무슨무슨 레지스탕스로 읽곤 할 정도였다. 레스토랑이든 레지스탕스이든 저런 것들이 한 거리에 저렇게 많이 있을 필요가 있는 건지 만우씨로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 연극이나 영화 같은 것을 구경하고 싶을 때는 편리한 점도 잇긴 했다. 그 거리에 꽤 많은 연극 공연 극장들이 모여 있고, 제법 쓸 만한 영화관도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재즈 카페도 있고, 심지어 낭만적인 시절에나 있을 법한 고전음악 감상실까지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만우 씨는 이 동네에서 10년도 더 넘게 살아 오고 있고 지금도 이 동리를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잇는 자로서, 이 동리에 머무름으로써 얻게 되는 그럴듯한 이익들을 어떻해서든지 찾아내 보려는 버릇이 있기도 했다.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거리의 활달함 같은 것도 창작생활에 보탬이 될 거라는 식으로 말이다. 무엇보다 만우 씨가 술을 마실 만한 적당한 공간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사실이 유리한 점으로 작용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

조성기, <우리 시대의 소설가>

세상이 변하는 속도만큼 대학로도 빠르게 변한다. 하지만 오래도록 변치 않는 것도 잇다. 벽돌 건물이 인상적인 샘터 파랑새극장.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피천득, <오월>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기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서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잇는 것이다.

(후략)

피천득, <수필>

 

향원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마음이 청정한 사람이면 누구든 이곳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대할 수 잇다는 말이 전해져 오는 정자였다. 어느 날 임금께서 길을 가다가 이 정자에서 쉬게 되었다. 이때 미풍에 얹혀 슬쩍 지나가는 향기가 있었다. 기가 막힌 향기였다. 임금은 수행 신하들을 불러서 부근에 피어 있는 꽃을 꺾어 오도록 했다.

신하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향기가 좋기로 소문난 꽃들을 한 가지씩 가지고 왔다. 모란, 난초, 양귀비……그러나 임금은 꽃을 하나하나 코에 대어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중략)

이때였다. 먼 하늘 깊은 곳에 잇는 별빛인지, 가늘고 맑은 바람이 한줄기 흘러왔다. 그러자 보라. 풀섶 사이에서 작은 꽃이 갸우뚱 고개를 내밀다가 들킨 향기를, 바로 그 황홀한 향기가 아닌가.

향감별사는 임금 앞에 돌아가서 아뢰었다. "그 향기는 화관이 크고 아름다운 꽃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또 멀고 귀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굳세게 살고 자기 빛을 잃지 않은 작은 풀꽃이 지니고 잇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 향기는 보는 이의 마음이 청정할 때만이 제대로 깃들 수 잇기 때문에 좀체로 만나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정채봉, <멀리가는 향기>

조금은 뜬금없지만 어쨌든 반가운 김광균의 시비.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를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김광균, <설야>

옛날에는 청춘들의 아지트. 지금은 추억을 지켜주는 고마운 공간, 학림다방.

 

(전략)

1973년 : 동숭동 개나리꽃 소주병에 꽂고 우리의 緯度 위로

봄이 후딱 지나간 것을 추도하다. 가정교사 때려치우다.

이집 저집 떠돌아다니다. 여자를 만났다 헤어지고, 그때

홍표 · 성복이 · 석희 · 도연이 · 정환이 · 철이 · 형준이 · 성인이와 놀다.

그들과 함께, 스메타나, <몰다우江> 쏟아지는 學林다방, 木계단에 오줌을

갈기거나, 지나가는 버스 세워놓고 욕지거리, 감자 먹이기 등 發狂을 한다.

發精期, 그 긴 여름이 가다. 어디선가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나고, 어디선가

바람이 다가오는 듯, 예감의 공기를 인 마로니에, 은행나무숲 위로 새들이

먼저 아우성치며 파닥거리다. 그때 生을 어떤 사건, 어떤 우연, 어떤 소음에

떠맡기다. 그 활엽수 아래로 生이, 그 개 같은 生이, 최루탄과 화염병이

강림하던 순간, 그 계절의 城떠나다. 친구들 <아침 이슬>, <애국가> 부르며

차에 올라타다. 황금빛 잎들이 마저 평지에 지다.

(후략)

황지우, <활엽수림에서>

역사와 내력이 진하게 묻어나는 학림의 방명록.

 

나의 학림. 방학이 끝나고 서울역에 5시 반에 내리면 갈 데가 없어서, 이불 보따리 책 보따리 들고 찾아와 새벽잠을 자던 학림. 나의 고향, 나의 청춘, 나의 상실, 내가 슬피 울던 곳, 보첼로를 청해 듣던 곳. 1990. 6. 15. 김승옥.

달빛 밝은 밤이면 수만 리가 한 마을입니다. 2004. 정월. 황석영

희미한 옛사랑이 머물었던 곳 <학림다방>에 4 · 19세대 한 사람이 34년 만에 다녀가다. 1994. 5. 2. 김광규

 

(전략)

L선배가 학림을 다시 찾은 것은 1985년 가을이었다. 세월이 흘렀으나 가파른 나무 계단은 여전했다. 추억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가 본 것은 옛날의 아늑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상업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레스토랑으로 변해 있었다. 과거의 시간이 훼손되어버린 듯한 느낌은 통렬한 아픔을 몰고 와 그곳을 찾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사연을 듣고 나니 호기심이 일었다. 어떻게 변해 있길래 저러는가 싶어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한 후 혼자 학림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실내를 훑어본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무 탁자와 빛 바랜 소형 소파, 벽에 걸린 흑백 사진, 어두우면서도 편안한 조명, 은은히 흐르는 클래식 음악, 그녀의 이야기가 연상시킨 천박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중략)

학림이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추억을 남긴 채 문을 닫은 것은 1983년이었다. 주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린 것. 새 주인은 대학로라는 새로운 소비문화 거리의 고객 취향과 맞지 않은 학림의 1960년대 분위기를 털어냈다. L선배가 망연자실한 것은 당연했다. 학림의 분위기가 다시 바뀐 것은 1987년 K가 학림을 인수하고부터였다. 그는 과거의 정취를 살리는 데에 골몰했다. 내부 단장을 새롭게 하는 한편, 학림의 추억을 안고 찾아오는 '늙은 손님'들을 반갑게 만났다. 방명록도 만들었는데, 그들이 남긴 글들은 빛 바랜 흑백 사진처럼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후략)

정찬, <베니스에서 죽다>

 

(전략)

그야 주인의 직업이 직업이라 결코 팔리지 않는 유화(油畵) 나부랭이는 제법 넉넉하게 사면 벽에 가 걸려 있어도, 소위 실내장식이라고는 오직 그뿐으로, 원래가 삼백 원 남짓한 돈을 가지고 시작한 장사라, 무어 찻집답게 꾸며 보려야 꾸며질 턱도 없이, 다락과 의자와 그러한 다방에서의 필수품들까지도 전혀 소박한 것을 취지로, 축음기는 자작(子爵)이 기부한 포터블을 사용하기로 하는 등 모든 것이 그러하였으므로, 물론 그러한 간략한 장치로 무어 어떻게 한밑천 잡아 보겠다든지 하는 그러한 엉뚱한 생각은 꿈에도 먹어 본 일 없었고, 한 동리에 사는 같은 불우한 예술가들에게도, 장사로 하느니보다는 오히려 우리들의 구락부와 같이 이용하고 싶다고 그러한 말을 하여, 그들을 감격시켜 주었던 것이요, 그렇기에 자작은 자기가 수삼 년간 애용하여 온 수제형 축음기와 이십여 매의 흑반 레코드를 자진하여 이 다방에 기부하였던 것이요, 만성(晩成)이는 또 만성이대로 어디서 어떻게 수집하여 두었던 것인지 대소 칠팔 개의 재떨이를 들고 왔던 것이요, 또 한편 수경(水鏡) 선생은 아직도 이 다방의 옥호가 결정되지 않았을 때, 그릐 조그만 정원에서 한 분의 난초를 손수 운반하여 가지고 와서 다점의 이름은 방란장(芳蘭莊)이라든 그러한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제의하여 주는 등, 이 다방의 탄생에는 그 이면에 이러한 유의 가화미담이 적지 않으나, 그러한 것이야 어떻든, 미술가는 별로 이 장사에 아무러한 자신도 있을 턱 없이, 그저 차 한 잔 팔아 담배 한 갑 사먹고 술 한 잔 팔아 쌀 한 되 사먹고 어떻게 그렇게라도 지낼 수 있었으면 하고, 일종 비장한 생각으로 개업을 하였던 것이 (후략)

박태원, <방란장 주인> 

카페 마리안느.

 

밖으로 나가야 한다. 정언명법으로 된 명제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콧속으로 무언가 썩은 냄새가 밀려들었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은 보랏빛 명조체로 힘차게 타이핑된 폰트 18크기의 명제였다. 폰트 18,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다가 나는 잠시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오른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잇었다. 문득 어떻게 해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라는 문장이 마치 눈앞에 있고 만질 수도 있는 실체처럼 여겨질 수 있는가, 어떻게 해서 그 글자체며 폰트까지 하나의 개념으로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인가 하는 짧은 궁금증이 스쳐갔다.

윤이형, <피의 일요일>

혜화동 로터리.

 

4 · 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4.19혁명 18년 뒤 쓰여짐)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한무숙문학관은 돌담에 나무 대문 그리고 기와지붕을 한 100여 년 된 한옥이다.

 

현숙하다는 칭송을 듣기까지의 심중의 고초는 한마님께옵서 익히 아오시는 몸부림이오며 아내가 깊고 깊은 절망을 겪은 후에야 갖출 수 있는 거동에 대한 보답이오이다. 겉이 평정하옵다고 안이 잔잔할 수는 없나이다. 송조집 진이의 자질은 투기하옵기엔 너무나 뛰어났사오며 시새워하기엔 위인이 지나치게 사리 밝고 민첩 체체하옵고 설부요안은 천품이오니 천수를 부러워할까 겨눌 기력은 없사옵니다.

사가(士家)에 태어나서 부도 여공을 익히고 배운 바는 이름 석 자 문안문, 여우 언문 익혀 쓰고, 열녀전 떼면 학문은 족하다 하셨나이다. 아녀자가 학문하면 기구해진다 하오셨는데 학문 익히지 못한 몸 시앗보고 공규(空閨)를 지킨 지 하 오래이오니 선인들 말씀은 거짓이오잇가.

송도집 진이의 높은 학식을 잡기라 할지라도 자즈러진 가무 현악 하오며 찌르는 듯한 재치를 따라가지 못하오니 지아비 마음을 그와 어찌 겨누어 차지할 수 있겠사오리잇가. 마음을 암담하게 아프게 던져 버리오니 남이 현숙하다 하더이다.

한무숙, <이상종의 아내>

 한무숙문학관

www.hanmoosook.com 문의 02-762-3093

 

한무숙문학관 내부 응접실에는 작가가 생전에 쓰던 가구들이 보존되어 있다.

장왕록 영문학 교수, 노벨상 수상자 펄벅(Pearl Comfort Buck) 여사, 한무숙(1964년)

 

이제는 아득하게만 생각되는 50년대 말 아직 학교에 다닐 때 혜화동에 있는 한무숙 여사댁을 방문한 적이 있다. 시인 송영택 형의 제의에 의해서였다. (중략) 한무숙 여사는 물론 몇 안 되는 당대 유수한 여류 작가였고, 《역사는 흐른다》의 작가로서 명성이 높았었다. (중략) 우리가 찾아갔을 때 한무숙 여사는 듣던 바대로 깨끗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맞아 주었는데 미당이 얘기했다던 '마담 델리카'란 말을 실감시켜 주었다. (중략) 한 여사는 가슴을 앓던 시절에 읽은 체호프를 얘기하고 투르게네프를 얘기하였다. <첫사랑>, <아버지와 아들>, <처녀지>, <연기>, <귀족의 검>, <그 전날 밤> 등등. 투르게네프의 표제 자체가 그대로 시가 되는 탓도 있지만 부지중에 어떤 정서적 감염을 경험하였다. 한 여사는 또 토마스 만을 얘기하였다. <토니오크뢰거> - 그러자 퍼뜩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50년대 말 명륜동댁의 서가에 꽂힌 책에서 유난히 눈에 뜨이는 책이 있었다. 일본의 이와나미 서점에서 나온 토마스 만이 쓴 <파우스트 박사>의 일역판이다. 그것은 몇 권으로 되어 있었는데 인상에 남아 있었던 것은 당시 신간이었다는 것과 내 자신이 몹시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는 것과 연관된 것이라 생각된다.

<작품 해설-삶의 진실과 슬픔>, 《한무숙 문학전집 6-감정이 있는 심연》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