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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30. 09:34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02 책이 무거운 이유

 

맹문재 시집

2005, 창비

 

 

시흥시대야도서관

EM047602

 

811.6

맹3619책

 

창비시선 252

 

맹문재 시인의 시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순수성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다. 그는 불혹의 나이 사십이 되어서도 아직도 종달새 소리와 흰나비를 쫓는 순진한 소년이다. 그는 쇳가루를 뒤집어쓴 공장노동자 생활을 경험한 바 있으며 동시에 인간에 대한 배신과 실망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하나의 소망처럼 간직하고 있는 것이 그의 아름다움이다. 시는 인간이다. 진솔하고 꾸밈없는 언어로 씌어진 그의 시를 읽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려본다. 거짓된 말은 사람을 유혹하나 진실된 말은 사람을 움직인다.

최동호 시인, 고려대 국문과 교수

 

맹문재 孟文在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1991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등이 잇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로 있다.

 

차례

 

제1부 ___

운(運) / 봄 / 품 / 홍무수 맛 / 안부 / 별똥별 / 선생님 / 목련꽃 / 선생님 / 목련꽃 / 귤 / 가장자리에서 / 나침반 / 신발 / 주인 / 집 / 귀가 / 손목시계

 

제2부 ___

책이 무거운 이유 / 달 / 단단한 무늬 / 벽화 앞에서 / 까치집 / 꽃 / 새순 지팡이 / 첫눈의 노래 / 다음에 / 까마귀 소리 / 사십대 / 아름다운 얼굴 / 산길 / 배수진을 친 집

 

제3부 ___

약수 / 염소 / 도둑고양이 / 착지점, 이자 / 손안에 없는 별을 위하여 / 이자의 감기에 걸린 어린이날 / 사십을 생각한다 / 이자가 적을 만든다 / 말일 / 사남매 / 시집 읽기 / 예 /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다 / 라면을 한 개 더 삶다

 

제4부 ___

소읍은 살고 있었다 / 겨울 저녁을 닮은 단추 / 사십세 / 뉴스가 사이렌을 울린다 / 안전 주간 / 치기를 위하여 / 안주를 뱉다 / 수선공의 손 / 배수진과 원탁 / 1980년대에 대하여 / 평전 다시 읽기 / 아름다운 푯대 / 뿔

 

해설 | 이경수

시인의 말

 

목련꽃

 

잠지리에 들었는데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린다

비도 제법 내리는 것 같다

택시에 받혀 나가떨어진 엊저녁 퇴근길에 본 사내가 떠오른다

그의 아내도 저 천둥소리를 듣고 있을까

정비공으로 일하는 작은동생의 운전길이 미끄러울텐데

쇠를 만들어 밥 먹는 제철소 친구들의 안전화가 젖을텐데

자전거를 타고 건너다가 넘어졌던 그곳 철길이 여전히 미끄러워

나는 이불 속으로 움츠러든다

이사를 다녔던 거미줄 같은 길들이 질펀하다

시골집의 낡은 전선과 형광등이 괜찮을까

할머니의 산소가 허물어지지 않을까

잠자다가 일본 광산에 끌려간 조선인들, 그들이 탄 열차가 흔들린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고향을 바라보았을까

그날도 저렇게 비가 내리지 않았을까

 

출근하려고 현관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

 

나의 길을 내기 위해 목련꽃들이

천둥소리를 잡아먹고 널브러진 채 죽어 있는 것이다

 

사십대

 

아웃, 나는 이 호각소리에

더이상 놀라거나 실망할 이유가 없어

십이월의 섬에서 고독하게 저녁을 맞는다

 

식사 시간에도 새벽안개를 긁어모았고

담화문을 향해 돌을 던지는 심정으로 책을 읽었고

일기장마다 건조한 지도를 그려온 나의 그림자도

조용히 앉아 풀어지고 있다

 

저쪽 언덕 위에서는 위로(慰勞)가

마치 송편 같은 눈으로 아웃된 나를 안쓰러워하며

거울을 비춰주고 있다

머리가 허옇고 눈을 껌벅거리고

장작개비처럼 마른 팔로 책을 들고 있는 한 노인이

등을 구부린 채 골목길을 가고 있다

위로의 품에 안겨 흐느끼고 싶지만

이내 포기한다

나의 카리스마가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인 것이다

 

아웃, 나는 이 호각소리를 무시하고

십이월의 섬에 앉아 카리스마의 독설을 묵묵히 듣는다

 

이자의 감기에 걸린 어린이날

 

소를 부려 밭을 갈던 아버지의 목청이 가라앉았다

거실의 텔레비전이 가라앉았다

걸려온 전화를 조심스레 받는 어머니가 가라앉았다

안방의 장롱이 가라앉았다

야근한 뒤 점심도 굶고 잠자는 동생이 가라앉았다

화장실이 가라앉았다

벽에 걸린 가족사진이 가라앉았다

안부전화를 건 제철소의 동료가 가라앉았다

쿨룩거리는 냉장고가 가라앉았다

먼 지방의 공사장으로 간 여동생 남편이 가라앉았다

십년째 쓰는 전기밥솥이 가라앉았다

고객의 호출을 착하게 받는 막내 동생이 가라앉았다

돌아가신 작은아버지의 낡은 수첩이 가라앉았다

윤기 없는 아내가 가라앉았다

날아드는 먼지를 막지 못하는 현관이 가라앉았다

취직 걱정에 몸살이 난 내가 가라앉았다

 

인터넷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 가라앉았다

 

손안에 없는 별을 위하여

 

1

돈, 돈 하고 있는데

주는 돈 다 셈하면 가져도 좋아, 못하면 헛일이고

나는 이자의 제의에 휘파람을 불었다

 

만원, 이만원, 삼만원…… 십만원, 십일만원……

백만원, 백일만원……

 

얼마쯤 지났을까, 나는 돈방석에 앉아 있었다

세기만 하면 되었기에

유행가를 부르듯 부지런히 이어갔다

천일만원, 천이만원, 천삼만원……

 

2

그러나 점점 초조해졌다

설마 그렇게 많이 가졌을까 하고 생각했던 이자의 돈이

끊기지 않고 속주머니에서 계속 나와

오히려 겁이 난 것이다

그래도 엄청난 기회를 잃을 수 없다고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일억 일만원, 일억 이만원, 일억 삼만원……

 

마침내 나는 헐떡거렸다

내가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

이자에게 농락당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산더미 같은 돈 앞에서 든 것이다.

왜 그 사실을 몰랐을까, 이자의 얼굴을 쳐다보니

아무 일 없다는 듯 여전히 미소를 띠고

내게 돈을 건넸다

 

3

나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만

도망갈 수도 없었다

눈을 돌려 하늘의 별들을 쳐다보았다

어디에도 있는 별, 그러나 나의 손안 어디에도 없는 별

 

진정 내게 전략이 없는가?

 

배수진과 원탁

 

아더왕은 원탁이 잇어 배수진을 칠 수 있었을까

배수진을 쳤기에 원탁을 살릴 수 잇었을까

 

영화 「킹 아더」를 보다가 생각했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개채용에 또 한번 속고 나서

배수진을 치지 않는 한 원탁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사람의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살인범의 죄까지

나와 상관있다고 애써 인정해왔는데

이제는 다르게 생각한다

환경은 지배계급의 원탁이기에

나의 죄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탁에 둘러앉는 것보다

배수진을 치고 들어가는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아더왕의 지배계급성을 싫어하지만

언 강물 위에 배수진을 치고 칼을 뽑았던 결정을 수용한다

 

모든 길은 원탁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배수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귀가

 

1

나는 흥얼거리며 골목길을 올라갔다

언덕 위에 우리 집이 보이는데

아직 식구들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모두 잠들었는지

불은 켜져 있지 않았다

나는 얼른 들어가 불을 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라갈 수가 없었다

얼어붙은 길이 너무 미끄러워

발을 제대로 딛지 못하고 자꾸 뒤로 밀려나는 것이었다

술 몇잔을 마셨다고 이렇게 힘이 없을까

나는 오기를 가지고 올라갔지만

몇걸음 못 가 다시 미끄러지고 말았다

 

2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나는 밧줄을 구해 와

매듭을 지어 집을 향해 던졌다

밧줄은 대문에 정확히 걸려

나는 밧줄을 감아쥐고

한 발씩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집에 거의 다가갔을 때

대문이 나의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내 쪽으로 기우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할 수 없이 밧줄을 놓고

오르는 것을 포기했다

 

얼른 들어가 불을 켜야 하는데

아내와 어린애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위대한 아버지가 왔다고 큰소리쳐야 하는데

따뜻한 방에 슬픈 그림자를 눕히고 재워야 하는데

 

3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밤바람이 제법 찼다

나는 눈을 감고 한참을 서 있다가

신발을 벗었다

양말도 벗었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손발을 오므렸다

 

나는 온몸으로 길을 녹이며 오르기 시작했다

 

도둑고양이

 

야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던 한 마리의 고양이와 마주쳤다 주춤거리며 나를 쏘아보는 눈빛이 제법 무서웠는데 슬퍼 보이기도 했다 나에게 들켰다고 화를 내는 것일까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다음날 저녁 나는 다시 그 쓰레기통에서 고양이와 마주쳤다. 나를 아는 눈치였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무서운 눈빛이었지만 늦가을 바람에 이리저리 뒹구는 낙엽처럼 외롭고 슬퍼 보였다

 

그 다음날 귀갓길에 나는 고양이를 떠올렸다 어느새 고양이는 나의 슬픈 신발이 되어 있었고 외로운 거울이 되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골목에 들어서서 다가갔다 그런데 고양이는 없었다 왜 오지 않았을까, 허망했고 걱정도 되었다

 

그후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눈빛을 찬물을 끼얹어 장작불을 끄듯 내 마음속에서 끌 수가 없었다 무서웠고 슬퍼 보였고 외로워 보였던 그의 눈빛

 

나는 그 눈빛을 촛불로 삼고 복잡한 서울 거리를 헛디디지 않고 다녔다 구조조정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인터넷 뉴스를 뒤졌고 아이들의 용돈을 마련하려고 교통비를 아꼈다 주눅 든 마음을 일으켜 세우려고 『전태일 평전』을 읽었고 겨울바람을 막으려고 전세 대출금 이자를 연체하지 않고 냈다

 

사남매

 

할머니가 밭에 나가 있는 동안

일곱살 동생이 열다섯 된 오빠를 데리고 논다

마늘 몇접 걸려 있는 처마 밑에 놀이터를 마련하고

텔레비전에서 본 것을 따라

방을 꾸미고 컴퓨터를 설치하고

화단을 가꾸고 우편함을 만들고 만국기를 단다

해가 뜨면 오빠와 할머니께 인사를 한 뒤 회사에 출근하고

집에 있는 오빠가 궁금해 회사에서 가끔씩 전화를 걸고

과일과 붕어빵과 아이스크림을 사서 퇴근한다

저녁을 지어 오빠와 할머니와 냠냠 먹고 나서는

할머니의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설거지를 한 뒤 잠자리에 든다

오빠는 동생의 소꿉놀이가 즐거운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헤헤 웃으며 손뼉을 치고

동생은 했던 놀이를 하고 또 해도 마냥 즐거워하는 오빠가 좋아

집안 살림을 신나게 한다

 

밭에서 돌아온 할머니가 남매를 부르면

동생은 오빠를 이끌어야 된다는 마음으로

오빠는 동생을 따라가야 된다는 마음으로 달려간다

할머니가 세상에 두번 다시 오지 않기라도 하는 듯 치마를 잡고

어두컴컴한 방에 들어서면

이부자리 곁에서 낮잠을 자던 또다른 남매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치며 일어난다

시멘트공장에 일하러 가다가 교통사고로 세상 뜬 남편과

정신박약아인 아들과 이자가 안될 딸과 노모를 버리고 가면서

선물로 남기고 간 인형 남매가

어느덧 언니들과 어울려 놀 만큼 자라난 것이다

할머니가 부엌에서 저녁을 짓는 동안

사남매는 모여 앉아 오순도순 얘기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손뼉을 치며 노래도 부른다

 

운(運)

 

이력서를 낸 곳에 시외버스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

면접 보러 가는 길

내 이마를 툭 치는, 그것

 

내게 한마리 하려고 그 멀고도 험한 길을

달려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나는 비로소 그것이

들판 그득하게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뭇가지에 파릇파릇 살아 있는 것도

새들과 함께 날아오르는 것도

도랑물을 타고 흘러가는 것도

도랑물을 타고 흘러가는 것도 보았다

 

그것, 꽉 쥐고 있자니

어느새 내 손바닥은 눈물로 흥건하다

 

아름다운 얼굴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죽는 것이었다

 

소란하되 소란하지 않고

황홀하되 황홀하지 않고

 

윤슬이 사는 생애란 눈 깜짝할 사이만큼 짧은 것이지만

그사이에 반짝이는 힘은

늙은 벌레가 되어가는 나를 번개처럼 때렸다

 

바람에 팔락이는 나뭇잎처럼

비늘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윤슬의 얼굴

너무 장엄해 나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사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푯대

 

공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다가

뒤편의 산마루에 피어 있는 꽃들을 발견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꽃들은

말갛게 쓸린 오후의 골목길처럼 깨끗했고

미인의 귀볼처럼 발그레했고

세상살이가 좋기라도 하다는 듯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왜 지금까지 저 꽃들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나는 몇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렇지만 부끄러웠다

쇳가루를 뒤집어쓴 시커먼 공장을

아름다운 푯대로 삼으려고 했던 내가

꽃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니

 

공장을 품고 살아가겠다는 내가

꽃 앞에서 강박관념을 느끼는 존재라니

나를 흔들고 있는 아름다운 푯대여

 

책이 무거운 이유

 

어느 시인은 책이 무거운 이유가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책이 나무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시험을 위해 알았을 뿐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에 밑줄을 그었다

 

나는 그 뒤 책을 읽을 때마다

나무를 떠올리는 버릇이 생겼다

나무만을 너무 생각하느라

자살한 노동자의 유서에 스며 있는 슬픔이나

비전향자의 편지에 쌓인 세월을 잊을지 모른다고

때로는 겁났지만

나무를 뽑아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한그루의 나무를 기준으로 삼아

몸무게를 달고

생활계획표를 짜고

유망 직종을 찾아보았다

그럴수록 나무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채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었다

 

내게 지금 책이 무거운 이유는

눈물조차 보이지 않고 묵묵히 뿌리 박고 서 있는

그 나무 때문이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