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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7. 14:35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29-1 한국사傳 2

6

베트남을 찾은

최초의 한국인

--- 조완벽

 

여름이 되면 일본의 섬 쓰시마에서 축제가 열린다.

'아리랑 마쓰리'라고 불리는 이 축제는

조선통신사가 오갔던 영광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400년 전 쓰시마를 지나 일본 본토로 들어간 첫 번째 통신사는

돌아오는 길에도 이 섬에 들렀다.

그때 통신사는 일본에서 포로로 잡혀 있던 조선 선비를 데리고 왔다.

조완벽이라는 이름의 선비.

베트남까지 끌려갔던 선비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비우당 옛터.

임진왜란 때 지휘본부로 사용하던 진주의 촉석루.

시미즈 요시히로가 머물렀던 선진리왜성.

왜장 시미즈 요시히로가 사천성 전투에서 패배한 조명 연합군 군사들의 목을 베어 쌓아둔 조명군총. 경상남도기념물 제80호.

일본의 창 역할을 했던 일본 최남단의 가고시마 항.

센코지의 한 법당에 절을 세운 스미노쿠라 료이를 모셔놓았다.

베트남의 유교 교육기관이었던 국자감.

베트남에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던 베트남의 대문장가 풍극관.

400년 전 쓰시마를 지났던 조선통신사를 기념한 축제.

 

7

조선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화가

--- 단원 김홍도

 

경기도 화성에 있는 용주사.

이곳 대웅보전에는 특별한 불화 한 점이 걸려 있다.

1790년에 그려진 후불탱화.

그런데 불화 속 인물들은 전통 불화에서는

볼 수 없는 명암법으로 표현돼 있다.

일반 불화와는 달리 인물을 서양화법으로 그려 숱한 논란을 낳았던 작품.

이 불화를 그린 사람이 바로 단원 김홍도다.

그는 어떻게 서양화법을 구사한 독특한 불화를 그리게 된 것일까?

안산시의 단원조각공원.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표암 강세황의 자화상.

영조 칠순을 기념해 그린 경헌당수작도. 그림은 사라지고 글씨만 남았는데, 그림을 김홍도가 그렸다고 적혀 있다.

김홍도가 삼십대 초반에 그린 <송하맹호도>(부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군선도> 일부. 삼성미술관 소장.

김홍도의 <행려풍속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행려풍속도>의 여덟 번째 그림 '훔쳐보기' 편.

《또 하나의 샤라쿠》라는 책에서 저자가 김홍도와 동일인물이라 주장한 도슈사이 샤라쿠의 작품들.

김홍도(왼쪽)와 샤라쿠의 그림.

김홍도가 금강산에 다녀와서 그린 <증명탑><구룡연>.

강릉시 운정동의 해운정.

이곳 방명록에 김홍도와 김응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통신사 행렬도 일부.

통도사 실제 모습(위)과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통도사 전경도>(일부).

통도사를 방문한 유명인사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 김홍도와 김응환의 이름도 나란히 등장한다.

정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경기도 화성시의 용주사. 일주문이 다른 절과 달리 삼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용주사의 건물 기둥은 굴궐에서나 사용되는 장대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용주사 후불탱화. 김홍도의 그림으로 추정된다.

후불탱화의 하단 중앙에 쓰여 있는 축원문.

후불탱화 일부. 손처리나 초상화적 기법이 김홍도의 화법과 같다.

김홍도의 후불탱화(왼쪽)와 화승 민관이 그린 삼장탱화(1790).

서양화법을 구사한 이형록(李亨祿)의 책거리 그림.

김홍도가 현감으로 있었던 충북 괴산군 연풍면.

연풍 지역의 현청 건물 가운데 하나였던 풍락헌.

김홍도가 연풍 현감 당시 인근의 단양 지역을 그린 <도담삼봉><옥순봉>.

<화성원행반차도> 일부.

<주교도> 일부.

화성 건설의 과정을 꼼꼼히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김홍도가 정조를 위해 화성 풍경을 그린 <서성우렵도> 일부.

김홍도가 말년에 초야에 묻혀 그린 <포의풍류도>.

김홍도의 말년 그림 <염불서승도>.

김홍도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

김홍도의 마지막 작품인 <추성부도>.

 

8

무인의 길을 선택한 군주

--- 정조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군사훈련이 펼쳐진다.

훈련을 지켜본 대신들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임금 정조의 지나친 위용이 두려웠던 것이다.

갑옷을 입고, 6000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임금의 모습.

정조는 왜 군대를 이끌고 나선 것일까?

정조가 12세 세손 시절 쓴 친필.

정조가 세손 시절 머물던 경희궁.

정조가 세손 시절 남긴 일기.

《무예도보통지》.

《장용영고사》. 장용영의 훈련 기록 등을 담은 책.

수원화성 홍보관에 있는 정조의 어진. 1989년 이길범 화백이 학자 군주 정조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 것이다.

《선원보략》에 남아 있는 정조의 어진.

사도세자의 묘. 경기도 수원시 소재.

사도세자의 죽음에 정치적 책임이 있었던 노론 심환지, 이병모, 김종수(위에서부터).

노론 세력은 북촌을 중심으로 집단거주를 하며 한양을 지배했다.

수원화성 모형.

<시흥행차도> 일부. 정조 19년 윤2월,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실시한 화성 행차를 기념하는 그림.

<연거도> 일부. 정조의 야간훈련 장면을 그린 그림.

정조가 야간훈련을 몸소 지휘했던 서장대.

정조가 그린 <국화도>. 동국대박물관 소장.

<국화도>에 찍힌 낙관을 확대해보면 '만천명월주인옹'이란 글을 확인할 수 있다.

정조가 숨을 거둔 창경궁 영춘헌.

 

9

난세의 충신

--- 백헌 이경석

 

조선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인조는 결국 오랑캐라 부르던 이들에게 머리를 조아렸고,

그 굴복의 역사는 우리 손에 의해 비문에 새겨졌다.

그러나 찬양의 글귀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 누군가에 의해

모두 갈려 사라졌다.

그리고 그 비문을 지은 이경석 역시

부끄러운 이름이 되고 말았다.

청나라 군대가 한양으로 진격하자 인조는 시체를 내다버리는 수구문(광희문)을 통해 몰래 탈출했다.

청태조 누르하치.

홍의포.

병자호란 때 절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삼학사의 위패를 모셔놓은 현절사.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서 돌아온 여성들이 목욕을 하면 몸이 깨끗해진다고 알려졌던 홍제천.

남별궁지. 1917년 환구단으로 개축.

이경석의 유배지였던 압록강변의 백마산성.

이경석의 신도비. 옛 비석과 근래에 새로 세운 비석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성남시 분당구 석문동 소재.

이경석이 현종으로부터 하사받은 궤장. 경기도박물관 소장.

《사궤장연회도첩》. 궤장을 하사받는 날의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우암 송시열.

넘어진 삼전도비.

2007년 2월에 있었던 삼전도비 페인트칠 훼손 사건.

백헌 이경석의 묘.

 

10

조선의 과학수사관

--- 정약용

 

200여 년 전, 황해도 수안군.

충격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한 여인이 같은 마을에 사는 이웃 남자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살해 방법은 잔혹했다.

몇 번에 걸쳐 다듬이 방망이로 내려친 다음

남자의 목을 두 차례 깊숙이 찔렀다.

당시 사건 수사관은 곡산부사(谷山府使)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1836)

그는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그리고 실학자로서 정약용은 조선의 범죄와 형벌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탁월했던 수사관, 정약용을 만날 시간이다.

《흠흠신서》.

조선시대 수사와 형벌 과정을 그림으로 설명해놓은 《사법제도연혁도보》.

《무원록》에서는 시체검시 결과를 부위에 따라 상세히 작성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다산초당.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사적 제107호.

정약용의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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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