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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8. 25. 09:54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78 Auguste Rodin 오귀스트 로댕

 

지은이 | 라르스 뢰퍼 , 옮긴이 | 정연진

2008, 예경

 

 

시흥시대야도서관

SB040163

 

650.8

아887ㅇ  6

 

ART SPECIAL 6

 

Auguste Rodin | 오귀스트 로댕

 

"사람들은 내 조각 <걸어가는 사람>에 머리가 없다고 비판하지.

그런데, 도대체 걷는 데 왜 머리가 필요한 거요?"

- 오귀스트 로댕

 

당대의 평론가들은 로댕의 작품을 보고 '괴물'이라고

비난하며 그를 외톨이로 몰았다. 하지만 로댕은 이러한 비평

따위는 아랑곳없이 예술에 대한 사랑으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추구했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책은 로댕이 활동하던 19세기 말 매혹

적인 파리로부터 카미유 클로델과의 사랑을 비롯한 그의

굴곡 많은 삶, 그의 예술 세계, 영화 <카미유 클로델> 및

오늘날 우리 곁에 남아 있는 로댕에 대한 흔적 등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오귀스트 로댕 Auguste Rodin(1840~1917)

근대 조각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14살에 국립공예실기학교에 입학하면서 조각의 길에 들어선다. 1864년 살롱에 처음으로 <코가 깨진 사나이>를 출품했으나, 너무나 생생한 사실적인 묘사에 심사위원들이 거부감을 느껴 낙선되고 말았다. 이후 유럽 각지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훗날 자신의 예술세계 기반을 다져갔다. 1878년 파리에 돌아온 로댕은 살롱에 <청동시대>를 출품하는데, 작품의 뛰어난 사실성으로 인해 살아 있는 모델에서 직접 석고형을 뜬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로댕은 <입맞춤>, <지옥의 문>, <생각하는 사람>, <칼레의 시민>, <발자크 상> 등 무수한 걸작들을 만들었다. 사실적 기법 아래서 인간의 희노애락과 치솟아 오르는 생명의 약동과 영혼까지 묘사한 로댕의 작품들은 근대 조각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1840-53

세계사

>> 1840년 영국에서 역사상 첫 우표인 '페니 블랙' 발행.

>> 1841년 홍콩, 영국령으로 귀속.

>> 1845년 아일랜드 대기근 발생.

>> 1850년 오노레 드 발자크 사망.

>> 1851년 런던에서 첫 만국박람회 개최,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출간.

 

로댕의 예술세계

>>1840년 11월 12일 프랑수아 오귀스트 로댕, 파리에서 출생.

>> 1848년부터는 기독교리형제학교, 1851년부터는 숙부가 운영하는 보배기숙학교에 다님.

1854-661

 

>> 1856년 지그문트 프로이트(위 사진) 출생.

>> 1857년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 출판, 저자와 출판자 모두 "미풍 양속을 해친 행위"로 인해 벌금형이 내려짐.

>>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출간.

>>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됨.

 

>> 1854년 "프티트 에콜"에 입학.

>> 1858년 보자르 미술학교의 입학시험에 세 번 연속으로 낙방, 장식업자와 부조제작자의 조수로 일함.

 

1862-64

>> 1862년 10권으로 된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레 미제라블》 출간.

>> 구스타프 클림트(위 사진) 출생.

>> 1863년 런던에서 역사상 첫 지하철 개통, 프랑스에서는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가 논란을 일으킴.

 

>> 1862년 누나 마리아 사망. 로댕, 성령회 수도원에 들어감.

>> 1863년 에마르 신부의 흉상 제작. 수도원 생활 청산.

>> 1864년부터 알베르-에르네스트 카리에-벨뢰즈에게 고용되어 일함. 같은 해에 로즈 뵈레와 만남.

 

1865-71

>> 1865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암살로 사망.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뮌헨에서 초연.

>> 1867년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출간. 샤를 보들레르 사망.

>> 1871년 시카고 대화재 참사.

 

>> 1866년 아들 오귀스트 외젠 뵈레 출생.

>>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발발. 국립방위군에 자원.

>> 1871년 국립방위군에서 나쁜 시력으로 제대. 카리에-벨레즈(위 사진)를 따라 벨기에로 이주. 어머니 사망.

 

1872-76

>> 1872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개관.

>> 1873년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에서 '프리아모스의 보물' 발견.

>> 1875년 작가 토마스만 출생.

>> 1876년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기 발명(위 사진).

 

>> 1874년 브뤼셀에서 다수 건축 프로젝트에 참가.

>> 1875년과 1876년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 미켈란젤로의 예술 연구.

 

1877-80

>> 1879년 토마스 에디슨이 백열전등 발명.

>> 1880년 콘라드 두덴이 라이프치히에서 《독일어 정서법 사전》 출간. 화가인 프란츠 마르크와 에른스트 키르히너 출생.

 

>> 1877년 '주조 스캔들'로 구설수에 오름. <청동시대>가 모델을 그대로 본 떠 만든 작품이라 비판 받음.

>> 1880년 명예 회복과 동시에 <지옥의 문> 의뢰 받음.

 

1881-86

>> 1881년 루이 파스퇴르가 광견병 예방백신 개발.

>> 1883년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추간. 리하르트 바그너와 카를 마르크스 사망.

 

>> 1883년 카미유 클로델(위)과 만남. 아버지 사망.

>> 1884년 <칼레의 시민> 제작 의뢰 받음.

 

1887-92

 

>> 1888년 빈센트 반 고흐가 귀에 의문의 부상을 입음.

>> 1889년 파리에 물랭루즈 개장. 아돌프 히틀러 출생.

>> 1890년 화가 에곤 실레 출생. 빈센트 반 고흐 사망.

>> 1891년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 건설 시작.

 

>> 1887년 레종 도뇌르 슈발리에 훈장 받음.

>> 1888년 보들레르의 《악의 꽃》 삽화 그림.

>> 1889년 빅토르 위고 기념비 제작 의뢰 받음.

>> 1891년 오노레 드 발자크 기념비 제작 의뢰 받음.

>> 1892년 레종 도뇌르 오피시에 훈장 받음.

 

1893-98

 

 

>> 1893년 카를 마이(위)의 인디안 '위니투' 이야기 마지막 권 출간.

>> 1894년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마지막 황제로 재위. 파리 상젤리제에서 첫 자동차 전시회 개최.

>>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에서 첫 영화 상영.

>> 1896년 앙트완 앙리 베크렐이 방사능 발견.

 

>> 1895년 <칼레의 시민> 공개식.

>> 1897년 뫼동의 브리앙 저택에 정착함.

>> 1898년 카미유 클로델과 영원히 결별.

 

1899-1910

 

>> 1899년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출간. 에리히 캐스트너 출생.

>> 1906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및 화재로 도시 황폐화(위).

>>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러일전쟁 종식 중재로 노벨평화상 수상.

 

>>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로댕을 위한 단독 전시관 마련.

>> 1902년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과 만남. 후에 로댕에게 고용될 작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만남.

>> 1904년 슈와쥘 공작 부인과 만남.

 

1911-17

>> 1911년 노르웨이인 로알 아문센(위)이 영국인 로버트 스코트를 간발의 차로 앞지르고 먼저 남극점에 도달. 스코트는 귀향길에 사망.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 1915년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 발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출간.

 

>> 1913년 카미유 클로델, 정신병원에 수감됨.

>> 1916년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함.

>> 1917년 1월 29일 반려자 로즈 뵈레와 결혼. 2월 14일 로즈 뵈레 사망. 11월 17일 오귀스트 로댕 사망.

 

지은이 | 라르스 뢰퍼Lars Roper은 현재 베를린에 살고 있으며, 자유 기고작가, 여행기록 작가 및 전시회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잇다.

 

옮긴이 | 정연진은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슈투트가르트 예술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국제회의통역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대학원에서 통번역학 박사과정 중에 있고, 동대학원 및 서강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차례

 

그때 그 시절

급변하는 사회

 

최고가 되기까지

예술가의 피

 

예술

조각 속에 깃든 우주

 

일용직 노동자가 꾼 천재의 꿈

 

사랑

헌신이냐 열정이냐

 

지금도 우리 곁에

세계 시민 곁의 로댕

 

그때 그 시절

 

 

"파리여,

소년을 유혹하는,

남자가슴을 뛰게 하는,

그리고 늙은이에게 위안을 주는 도시여!"

 

하인리히 하이네

 

 

"파리에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있소."

작곡가 프레데릭 쇼팽이 1831년에 남긴 말은 당시 파리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여기선 당신이 재미있어하든, 지루해하든, 웃든, 울든, 마음대로 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소. 이 도시에 있는 수천 명이 또같은 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오. 다만, 방식만 조금씩 다를 뿐이지."

사진작가 샤를 마르빌은 주로 19세기 파리의 거리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사진은 오 마리 가(街).

 

마음껏 즐기자

파리 시민을 지루하게 만드는 것은 죄악이었다. 전쟁과 혁명으로 세월을 보냈던 파리 시민들이 원하는 것은 즐기고, 즐기고, 또 즐기는 것뿐이었다.

로댕은 신사복을 차려입고 파리의 거리를 누비며 구경거리를 찾아다니길 좋아했다. 로댕이 활동 초기에 전시회를 기획하는 데에는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재정적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동시대 미술가의 작품 수집을 즐겼던 카유보트 역시 화가였는데, 약 500점의 작품을 남겼다. 위 작품은 카유보트의 1877년 작(作)인 <파리의 거리>이다.

 

"파리라는 도시가 좋은 점이 뭔지 아나? 누가 여기서 어떻게 태어나서 살아가고 죽는지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점이지."

-오노레 드 발자크

샤를 보들레르(1821-67)의 상징주의적 작품들은 로댕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향하는 전환기에는 뢴트겐선 촬영 기술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 기술이 발명되어 화제가 되었다. 사진은 1896년 전신 촬영 사진으로, 아홉 개의 부분 사진을 모아 붙인 것이다.

자연 속에서 | 클로드 모네나 오귀스트 르누아르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화실에서 벗어나 야외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연의 풍경과 색채를 순간의 모습 그대로 화폭에 담으려 했다. 이는 화실에서라면 불가능했을 작업이었다. 그래서 인상주의 작품들은 풍경화가 주류를 이룬다. 그 대표작 중 하나인 르누아르의 <작은 배>.

상징주의자 | 스위스 출신 화가인 아르놀트 뵈클린은 회화를 통해 문학 작품이 주류를 이루던 상징주의에 합류했다. 상징주의는 상징을 통해 현실 세계를 표현하는 예술 사조이다. 뵈클린은 당대의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동화 같은 풍경을 배경으로 고대 신화의 모티브를 담아내는 작업을 즐겼다. 그의 작품 <가을의 사색>은 보는 이로 하여금 명상에 잠기게 한다. 

 

최고가 되기까지

 

"명성을 얻기 부터

로댕외로운 사람이었다.

찾아온 명성

그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건 괴물이야!"

 

아카데미 미술을 추종한 비평가들이 로댕의 작품을 평한 말이다. 로댕이 좌절할 때마다 다시 일어나 두 배로 노력한 것은 예술을 향한 그의 사랑 때문이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906년 해고되기까지 6개월간 로댕을 보좌한다.

 

작은 왕궁

로댕이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하자, 그를 흠모한 모델, 일꾼, 제자, 조수, 비서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작은 왕궁을 형성하였다. 로댕의 일거수일투족에 경외심을 표하던 이들은 로댕이 더욱 까다롭고 독선적으로 변해가는 데 일조하였다.

 

"우리가 삶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고, 또 일을 통해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잇기 때문이다."

- 오귀스트 로댕

<세례 요한>은 로댕에게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다.

희망 | 로댕의 초기 작품인 <코가 부러진 사나이>는 '비비'라는 이름의 가난한 이웃 사내를 모델로 삼았는데, 예술가들로부터 "고대의 아름다움을 간직했다"며 호평을 받았다. 로댕은 살롱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출품했지만, 보수적인 성향의 살롱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외면해버린다.

공모전 | 1877년 말, 로댕은 드디어 자신만의 작품에 몰두할 수 있게 된다. 이때부터 로댕은 가능한 한 모든 공모전에 도전장을 던지기 시작한다. 작품 <무기를 들어라>는 파리 '데팡스'전 출품을 위해 1879년에 제작되었지만, 1922년 승전 기념비로 베르됭 시에 설치되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로댕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작품을 소개할 기회를 얻었다.

로댕이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알마 광장에 세운 '로댕관'

뫼동에 있는 '빌라 드 브리앙'

로댕의 저택 '오텔 비롱'의 사무실에 앉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인 릴케는 로댕의 괴팍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를 천재로 받들었다.

| 로댕의 작업실에 들어서면 손을 비롯한 다양한 인체 부위 조각품 수백 개가 바닥과 선반을 가득 메우고 있다. 로댕은 이 부분 조각품들을 작품을 위한 자투리가 아닌 완전한 예술품으로 다루고 애정을 쏟았다. 오늘날 세계적인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 <대성당>에서 로댕은 두 개의 손을 조합하여 대성당의 건축양식을 형상화하였다.

참수 | 자신의 조각품에 대해 불완전하다는 비평이 쏟아지자, 로댕은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다시는 완전한 작품을 만들지 않으리라! 난 고대의 전통을 따르겠어!" 그리고 이를 실천에 옮긴 첫 작품이 바로 이 <걷고 있는 남자>라고 한다. 로댕에 관한 회고록에 따르면 이 작품은 <세례 요한>의 주조에서 목만 떼어낸 것이라 하고, 다른 기록에서는 이 작품이 <세례 요한>을 위한 습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무용수 | 조각가에게 있어서 무용수의 몸짓은 영감의 원천이자 도전의 대상이기도 하다. 로댕이 이러한 도전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폴란드 출신의 러시아 발레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바슬라브 니진스키를 표현한 조각품은 위대한 조각가와 위대한 무용가의 재능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삼매경 | <명상> 혹은 <내면의 소리>로 불리는 이 조각품은 원래 <지옥의 문>을 구성하며 제작되었다. 무언가에 깊이 심취한 듯한 이 귀부인의 모습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 삽화에도 등장한다. 로댕은 후에 빅토르 위고 기념비에 접목하는 과정에서 이 조각품의 양팔과 무릎을 잘라냈고, 그 모습을 더 마음에 들어 했다.

열쇠가 되는 인물 | <생각하는 사람>은 로댕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잇다. 원래 로댕의 계획은 단테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지옥의 문>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게 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조각품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사색하는 인간 혹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고뇌하는 창조자의 모습을 상징하는 작품이 되었다.

모욕 | 문호 발자크의 기념비 제작을 의뢰한 문인협회는 빠르게 완성하길 바라며 로댕을 더욱 독촉했다. 그러나 로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발자크> 상을 개인적으로 자신의 미학에 획을 긋는 작품으로 완성시키고자 했다. 이윽고 1898년 로댕의 완성품을 전달받은 문인협회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대문호 발자크를 "괴물로 만들었다"며 로댕을 비난했다.

 

예술

 

"예술이란 인내 정성을 요구하는 것

그리고 노동 없이는 불가능한 것."

 

오귀스트 로댕

 

평범하라고? 그럴 수는 없어!

 

로댕이 명성을 얻을 때까지 수십 년이 걸렸지만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평범함이다. 로댕의 눈에 평범한 자는 "예술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자연을 흉내 내기만 한다. 자연을 관찰만 할 뿐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사물을 보는 법을 안다. 그리고 그의 눈과 마음이 함께 자연의 품 안에 깊이 안긴다."

 

"예술적 영감? 우습군! 그건 이성도, 의미도 없는 낡아빠진 낭만적 정서에 불과하네. 스무 살 청년이 벼락을 맞고는 갑자기 대리석을 깎아내서 후에 걸작이 될 작품을 위한 습작을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영감이라네. 상상력의 광란 상태이지! …… 그러나 이렇게 광기에 불타 만들어진 작품들은 아낌없이 부수어버려야 한다네."

- 오귀스트 로댕

로댕의 작품 중 늙은 여인을 모티브 삼은 작품은 <한때는 아름다웠던 투구 제작자의 아내>뿐이다.

<청동시대>의 모델이었던 오귀스트 네이. 로댕은 이 사진으로 자신의 작품이 저질스러운 복제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려 했다.

 

"사실 작업에 필요한 건 기술적 능력과 지식뿐이지만,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건 그게 아니야. 사람들은 현실적인 것보다는 특이한 것, 초인적인 것을 믿고 싶어 한다네. 물론, 예술적 영감에 비하면 기술과 지식, 시간, 고찰 같은 요소는 그다지 멋있어 보이지 않겠지. 그렇지만 이 요소들이야말로 예술을 만들어내는 기본 틀이라네."

- 오귀스트 로댕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은 건 로댕뿐만이 아니었다. (아래 : 로댕의 드로잉 <악마를 보고 놀라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예를 들어 외젠 들라크루아는 1822년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통해 신곡의 한 장면을 연출한다.

로댕은 출판업자 폴 갈리마르의 의뢰로 1887년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초판의 삽화 작업을 맡는다.

로댕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면밀히 탐구하였고, 때로는 이를 위해 이탈리아에 가기도 했다. 위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승리>.

<발자크> 상을 완성하기 위해 로댕은 수많은 습작을 만들어냈는데, 그중에는 걸어가는 나체의 모습도 있었다.

로댕의 우주 |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온갖 희망을 버릴지어다." 단테의 문학에 묘사된 지옥의 문 위에 씌어진 문구이다. 희망을 버린 건 로댕의 추종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지옥의 문>이 로댕 생전에 완성되기는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로댕은 35년의 세월을 <지옥의 문>에 쏟아 넣었다. 결국 이 작품은 미완성으로 끝맺었지만, 어떤 작품보다도 로댕의 우주를 잘 나타내고 있다.

지옥편 | <떨어지는 사람>은 그나마 힘으로 <지옥의 문> 틀에 매달려 버티고 있다. 그러나 그도 머지않아 저 아래 있는 저주받은 자들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단테 알리게리가 《신곡》에서 묘사했듯이 말이다. 로댕의 작품 세계를 깊이 느끼고 싶다면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읽어보아야 한다.

이중성 | <입맞춤>에서 두 연인은 애정 깊은 입맞춤을 나누는 듯하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작품을 보면, 두 연인들이 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간절한 당부 | 오르페우스는 뛰어난 음악 솜씨 덕택에 지하 세계로 간 연인 에우리디케를 다시 데려올 수 있게 되었다. 둘이 함께 이승으로 돌아가던 중, 에우리디케의 발걸음 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오르페우스는 걱정이 된 나머지 페르세포네의 당부를 잊고 그만 뒤를 돌아본다. 그러자 에우리디케는 죽음의 세계로 돌아가버린다.

새로운 시각 | 조각이라면 받침대가 있던 것이 당연시되던 당시에, 바닥에 조각을 놓는 것은 매우 특이한 방식이었다. 1885년 작품인 <순교자> 또한 그러한 양식을 띠고 있어서, 위에서 작품을 내려다보도록 하고 있다. 오늘날 이 작품은 결국 대부분의 박물관에서 받침대 위에 놓여 전시된다.

| 낭만파 문호 노발리스가 말했던 "사랑, 우주의 숨결"은 로댕의 1884년 작품 <영원한 봄>에 정확히 들어맞는 표현이다. 사랑에 빠져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젊은 연인의 모습은 얼어붙은 세상이 깨어나고 만물이 태동하는 계절인 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로댕은 1883년 동료 조각가인 쥘 달루의 흉상을 제작한다. 그러나 달루에게 <빅토르 위고>의 수주를 빼앗긴 후, 둘의 관계는 차갑게 식어버렸다.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에 둘러싸여 서 있는 로댕. 1902년 촬영.

로댕이 그린 에로틱한 드로잉에서 모델들은 자유분방한 포즈를 취한다. <달, 프시케>

민주주의 예술 | 칼레 시의 고위관리들은 여럿을 위한 기념비보다는 단 한 명의 영웅을 내세우고 싶어 했다. 반면, 로댕은 군상을 통해 공동의 시민의식을 표현하고자 했다. 로댕이 생각하기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요청에 응하여 칼레 시를 구하려 햇던 여섯 명의 자원자 모두가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아이 | 대리석에서 뻗어 나온 <신의 손>은 혼돈 속에서 솟아올라 나와 이 세상을 향한다. 그리고 점토로 첫 인류를 빚어낸다. 로댕이 이 작품을 만든 과정도 이와 비슷했다. 로댕은 손 조각품 중 큰 작품을 골라서, 그 위에 적당한 크기의 누드 조각품을 담았다. 작업실 안에서 우주를 창조하듯 말이다.

천연 대리석 | 손은 로댕의 예술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로댕은 <대성당>이나 <신의 손>처럼 <악마의 손>에서도 두 개의 기존 작품을 하나로 조립했다. 그러나 로댕이 너무 앞서 간다고 비판받은 것은 대상을 조합했기 때문이 아니라, 거친 천연 대리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욕정 | 귀부인에서 신분 낮은 모델에 이르기까지 로댕은 여인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넘치는 욕정의 소유자였다. 여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위해 드로잉과 조각품들의 모델을 서주었고, 그의 애인이 되어주기도 했다.

느낌 | 1893년 작품 <트리톤과 네레이드>를 통해 로댕은 부분 조각품에 대한 철학을 완성하는 단계에 이른다. 남녀가 서로 뒤엉켜 한 점토에서 나와 형태를 이루는 모습 속에 로댕의 언어가 깃들어 있다.

위대한 자연 | <설교자 솔로몬> 혹은 <전도서>는 구약성경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로댕은 이 여인의 관능적인 포즈를 보고 전도서의 구절이 생각났을 것이다.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로댕은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책보다도 아름다운 게 자연이라오. 다만, 어떻게 읽어야 가장 아름다운지 알고 읽어야 하지."

 

 

"살아 있는 모든 생물

공기를 들이마시고, 영혼을 뱉어낸다.

나는 그러한 과정

묘사하고 싶은 것이다."

 

오귀스트 로댕

 

어느 문맹자의 위대한 발견

 

오귀스트 로댕이 그림만큼 좋아한 건 없었다. 부모와 교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댕은 거의 문맹 수준이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로댕이 고집세다는 것이었는데, 그는 부모를 조른 끝에 무료 미술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다. 이곳, '프티 에콜'에서도 여전히 외톨이였던 로댕은 교정을 돌아다니다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로댕은 미켈란젤로(위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모세>)에 대해 탐구한다. "나는 밤새도록 스케치를 했다. 미켈란젤로를 흉내 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미켈란젤로를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대한 생각을 그려낸 것이었다."

 

'부르주아 전담 예술가'

수년간 일용직으로 근근히 생활했던 로댕에게 드디어 행운이 찾아왔다. 조각가이자 상인인 알베르-에르네스트 카리에-벨뢰즈가 젊은 로댕의 재능을 간파하고, 그에게 고난이도의 장식 조각품 제작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카리에-벨뢰즈는 아무리 중요한 일을 맡겨도 서명은 반드시 본인의 이름으로 하였다.

C. H. 오브리가 1862년에 촬영한 젊은 로댕의 모습에서 일생을 예술에 바치려는 굳은 의지가 보인다. 이러한 의지가 없었다면, 향후 그가 수십 년간 겪게 될 무명 시절과 혹독한 비평을 견뎌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생물이 이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나가려는 이유는 뭘까? 이토록 고통스러운데도 삶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이것은 지금도, 앞으로도 나를 괴롭히는 질문일 것이다."

 

- 오귀스트 로댕

로댕이 1860년에 그린 로렌 지방 출신의 어머니, 마리 셰페르.

피에르-쥘리앵 에마르 신부의 흉상을 만들고 있는 젊은날의 로댕, 1863년 사진.

굳게 닫힌 마음 | <웅크린 여인>은 원래 <지옥의 문> 가장자리 기둥에 삽입될 모티브로 제작되었으며, 청동조로 제작된 개별 작품으로 친다면 로댕의 작품 중에서도 매우 대담한 편이다.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듯한 여인의 자세가 주는 의미는 오늘날에도 밝혀지지 않았다.

최초의 여인 | <이브>는 자신이 벌거벗은 것과 죄를 범한 것을 알아차리고, 부끄러운 몸짓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피한다. 로댕은 이브를 유혹의 주체가 아닌, 인류 최초의 어머니로 묘사하려 했다. 로댕은 <이브>를 <지옥의 문> 오른편에 설치했다. <아담>은 건너편에 위치한다.

아름다운 실루엣 | <나는 아름답다>는 원래 <지옥의 문>에 설치되었던 두 점의 개별적인 작품인 <떨어지는 남자>와 <웅크린 여인>을 다시 조합한 것으로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선보인다. 이 작품의 두 남녀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도 않고 매우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어우러져 있어, 두 오브제 간의 관계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렵게 만든다.

"영원한 터널" | 이 작품에서 <신의 전령 이리스>는 허벅지를 벌려, 화가 쿠르베가 말하는 '세상의 근원'을 드러내 보인다. 로댕은 반면 은밀한 부위를 가리켜 "영원한 터널" 혹은 "판 신의 재래"라고 부르곤 했다. 자신의 삶에서도 여인이라면 모두 사랑했던 로댕이기에, 그가 예술 세계에서도 여인의 모두를 표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낭만의 극치 : 로댕은 내연의 처인 로즈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흉상 <미뇽>을 제작한다.

로댕의 작업실에서 일하고 있는 카미유 클로델(왼쪽)과 제시 립스콤. 1888년 사진.

로댕의 우주 : 1904-05년 사이에 촬영된 뫼동의 작업실.

저택 '오텔 비롱'의 오귀스트 로댕. 1915년 사진.

임종한 오귀스트 로댕.

죽음의 나락으로 |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나오는 '이카로스의 추락'은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리스 신화였고, 로댕도 이 이야기에 심취했다. 이카로스는 나무에 밀랍으로 깃털을 붙여 만든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올라간다. 그러나 너무 자만한 나머지 태양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밀랍이 녹아내리는 바람에 추락해서 죽는다.

우화 속 주인공 | 로댕의 부분 조각품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감상자에게 질문을 던지길 좋아했는데, 이는 고대 우화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소의 머리와 신앙의 다리를 가진 미노타우로스가 저항하는 님프를 무릎에 앉히려는 광경은 고대 우화와도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다. 이 대리석 작품은 <목신과 님프> 혹은 <주피터 타우로스>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추락한 천사 | <천사의 추락>은 샤를 보들레르의 문학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작품이다. 이처럼 두 여인의 인체가 어우러진 모습을 담은 작품은 <지옥의 문>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추락한 카리아티드>와 <아델레의 토르소>이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 | 예술가인 피그말리온은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온통 조각으로만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자신이 빚어낸 상아 여인상이 완성되자,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를 알게 된 비너스는 여인상을 '갈라테아'라는 살아 있는 여인으로 둔갑시켜준다.

에로스와 프시케 | 로댕은 1905년에 <에로스와 프시케>를 만들면서 플레이우스가 2세기에 쓴 소설 《황금 당나귀》의 내용을 근거로 삼았다고 한다. 오늘날은 이 조각품의 제목이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주장도 없지 않다. 에로스의 상징인 날개나 활 등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

 

"여인이란 성스러운 존재이다."

 

오귀스트 로댕

 

기사도와 외설

 

로댕에게 있어 여인과 예술은 가장 위대한 두 가지 요소였다. 로댕은 여인들을 찬양하고 신성화했으며, 여인들을 위해 기사도 정신을 발휘했다. 반면 자신의 외설적인 드로잉을 통해서는 모델의 은밀한 부위를 그대로 보여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요란하게 치장하기 좋아했던 슈와젤 공작부인은 한때 로댕의 애인이었다.

 

"나는 자연을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연과 동화되려는 것이다. 나는 자연이 나를 이끌고 가도록 맡긴다. 나는 인간 이외에는 대상으로 삼고 싶은 것이 없다. 인체가 만들어내는 형상은 나에게 다가와 나를 압도해 버린다. 나는 나체를 보면 끝없는 찬미와 깊은 경외심을 느낀다."

- 오귀스트 로댕

 

 

젊은 카미유 클로델과 오귀스트 로댕은 서로 싸우고, 배우고, 사랑하고, 경멸하고는, 또다시 사랑에 빠졌다. 로댕은 회상하길, 자신은 카미유에게 금을 찾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며, 그녀에게 "찾은 금은 그냥 가져도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승이자 애인 : 카미유 클로델이 만든 오귀스트 로댕의 흉상. 1888년.

 

"로댕은 여인들의 얼굴을 아름다운 인체에 속한 일부분으로 보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여인들의 눈과 입은 단순히 얼굴에만 속한 모티브가 아니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로즈 뵈레는 로댕의 에로틱한 행각들을 묵묵히 견뎌낸다.

사랑의 굴레 | <영원한 우상>의 두 연인들 둘레에는 보이지 않는 굴레가 씌워져 있는 듯하다. 남성은 사랑하는 여성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에 입맞춤하려 하고 잇다. 여인은 몸을 뒤로 젖혀 뿌리치고 싶지만, 어쩌지 못하는 자세이다. 두 연인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떨어지지 못하는 괴로움 사이에서 불안한 공존을 유지하고 있다.

절망 | "잡으려 애쓸수록 더욱 잘 빠져나가기 마련"이라는 속담이 이만큼 잘 어울리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두 남녀가 서로 등을 마주한 <달아나는 여인>은 단테의 《신곡》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파울로가 아무리 잡으려 애써도 품 안에서 빠져나가는 프란체스카의 모습을 묘사했다.

거친 표면 | 카미유 클로델은 로댕의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 이 중 초기 작품인 <사색>에서 로댕은 카미유의 표정을 감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 카미유의 몸은 머리를 받치고 있는 무거운 대리석 덩어리일 뿐이다. 몸뚱이를 대신한 대리석의 거친 표면은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로댕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표출하고 있다.

시인의 찬미 | 시인 릴케는 젊은 시절에 <다나이드>를 보며 그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쏟아져 내리는 머리카락…… 대리석을 따라 천천히, 길게 이어지는 등의 곡선, 흐느끼는 듯 돌 속에 파묻어버린 얼굴, 그리고 작은 소리로 생명을 꿈꾸는 꽃송이 같은 손……."

뫼동에서 로즈 뵈레와 함께 한 오귀스트 로댕. 1913년 가을.

과거의 그늘 속에 갇힌 카미유 클로델. 1929년 사진.

슈와젤 공작부인과의 내연 관계는 모든 이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사랑은 리듬을 타고 | 카미유 클로델의 작품인 <왈츠>는 포옹하듯 왈츠의 리듬에 맡긴 연인들을 그려낸다. 이 작품은 클로델이 로댕과 가장 친밀했던 1895년에 제작되었는데, 유켄트슈틸 양식을 따르면서도 남녀 모두 강인한 인체로 표현되어 전반적으로 역동성이 느껴진다.

영감의 보물창고 | 로댕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기원후 1년경에 씌어진 이 시집은 당시 시대 상황을 로마와 그리스 신화에 빗대어 묘사했다. 특히 오비디우스는 인간 혹은 신이 동물이나 식물로 변형하는 신화 모티브에 심취했다.

아상블라주 | <이별>은 로댕이 즐겨 쓰던 조합 방식인 '아상블라주' 기법을 사용한 작품이다. 머리는 카미유 클로델의 얼굴을, 손은 <칼레의 시민>의 습작 조각을 사용한 듯하다. <이별>은 클로델이 작업실을 떠나던 시점인 1892년에 완성되었다.

남겨진 자 | <성숙>에서 젊은 여인인 클로델은 로댕과 결별한 후의 마음을 그려내 듯, 늙은 여인에게 이끌려가는 늙은 남성을 향해 애원하듯 팔을 뻗고 있다. 로댕은 클로델을 사랑했지만, 일생 동안 자신의 곁을 지킨 로즈를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 곁에

 

"나는 어제내일

잇는 다리이다."

 

브뤼노 뉘탱이 연출한 영화 <카미유 클로델>에서 오귀스트 로댕 역을 맡아 열연한 제라르 드파르디외.

 

시민 곁으로

 

<칼레의 시민>을 감상하고 싶은가? 그렇다고 반드시 칼레로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코펜하겐에 가도 같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도쿄가 더 가까운가? 아니면 워싱턴은? 로댕의 <칼레의 시민>은 더 이상 칼레에만 있지 않다. 원본을 토대로 12점이 주조되어 전 세계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사람>의 주조 역시 현재 전 세계에 퍼져 있다.

브리앙 저택 : 로댕의 "열정의 삶 속 한순간"(릴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로댕의 능력은 대리석을 통해 고통과 육욕을 표현하는 수준을 뛰어넘는다. …… 그는이루지 못한 욕망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보여주었고, 죽음의 허무한 나락으로 추락하는 인간을 보여주었다."

 

- 옥타브 미르보, 오귀스트 로댕에 관하여

쥘 E. 마스트바움의 로댕 소장품은 오늘날 필라델피아 로댕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거장의 유산 | 파리 로댕 미술관은 로댕이 죽기 전까지 수년간 기거했던 오텔 비롱에 위치하며, 로댕의 작품뿐 아니라 카미유 클로델의 작품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이 밖에도 빈센트 반 고흐, 오귀스트 르누아리, 외젠 카리에르 등의 유화를 비롯한 로댕의 소장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