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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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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16. 14:47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53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  강 시집

2016, 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전철 4호선,
선바위역과 남태령역 사이에
전력 공급이 끊어지는 구간이 있다.
숫자를 세어 시간을 재보았다.
십이 초나 십삼 초.
그사이 객실 천장의 조명은 꺼지고
낮은 조도의 등들이 드문드문
비상전력으로 밝혀진다.
책을 계속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워
나는 고개를 든다.
맞은편에 웅크려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파리해 보인다.
기대지 말라는 표지가 붙은 문에 기대선 청년은 위태로워 보인다.
어둡다.
우리가 이렇게 어두웠었나.
덜컹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맹렬하던 전철의 속력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가속도만으로 레일 위를 미끄러지고 있다.
확연히 느려졌다고 느낀 순간,
일제히 조명이 들어온다, 다시 맹렬하게 덜컹거린다. 갑자기 누구도
파리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나는 건너온 것일까?

 

시인 한  은 1970년에 태어나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네 편이 실리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과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등을 출간했다.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는 침묵의 그림에 육박하기 위해 피 흘리는 언어들이 있다. 그리고 피 흘리는 언어의 심장을 뜨겁게 응시하며 영혼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확인하려는 시인이 있다. 그는 침묵과 암흑의 세계로부터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렸던 최초의 언어에 가닿고자 한다. 뜨겁고도 차가운 한강의 첫 시집은 오로지 인간만이 지닌 ‘언어-영혼’의 소생 가능성을 점검해보는 고통의 시금석인 셈이다.

 

시인의 말

 

어떤 저녁은 투명했다.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불꽃 속에

둥근 적막이 있었다.

 

2013년 11월

한  강

 

차례

 

시인의 말

 

1부 새벽에 들은 노래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새벽에 들은 노래

심장이라는 사물

마크 로스코와 나

마크 로스코와 나 2

휠체어 댄스

새벽에 들은 노래 2

새벽에 들은 노래 3

저녁의 대화

서커스의 여자

파란 돌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이천오년 오월 삼십일, 제주의 봄바다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

 

2부 해부극장

조용한 날들

어두워지기 전에

해부극장

해부극장 2

피 흐르는 눈

피 흐르는 눈 2

피 흐르는 눈 3

피 흐르는 눈 4

저녁의 소묘

조용한 날들 2

저녁의 소묘 2

저녁의 소묘 3

 

3부 저녁 잎사귀

여름날은 간다

저녁 잎사귀

효에게. 2002. 겨울

괜찮아

자화상. 2000. 겨울

회복기의 노래

그때

다시, 회복기의 노래. 2008

심장이라는 사물 2

저녁의 소묘 4

몇 개의 이야기 6

몇 개의 이야기 12

날개

 

4부 거울 저편의 거울

거울 저편의 겨울

거울 저편의 겨울 2

거울 저편의 겨울 3

거울 저편의 겨울 4

거울 저편의 겨울 5

거울 저편의 겨울 6

거울 저편의 겨울 7

거울 저편의 겨울 8

거울 저편의 겨울 9

거울 저편의 겨울 10

거울 저편의 겨울 11

거울 저편의 겨울 12

 

5부 캄캄한 불빛의 집

캄캄한 불빛의 집

첫새벽

회상

무제

어느 날, 나의 살은

오이도

서시

유월

서울의 겨울 12

저녁의 소묘 5

 

해설 | 개기일식이 끝나갈 때 · 조연정

 

피 흐르는 눈 3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초여름 천변

흔들리는 커다란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면서

그 영혼의 주파수에 맞출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앗던 순간에 대해서

 

(정말) 허락된다면 묻고 싶어

 

그렇게 부서지고도

나는 살아 있고

 

살갗이 부드럽고

이가 희고

아직 머리털이 검고

 

차가운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믿지 않는 신을 생각할 때

살려줘, 란 말이 어슴푸레 빛난 이유

 

눈에서 흐른 끈끈한 건

어떻게 피가 아니라 물이었는지

 

부서진 입술

 

어둠 속의 혀

 

(아직) 캄캄하게 부푼 허파로

 

더 묻고 싶어

 

허락된다면,

(정말)

허락되지 않는다면,

아니,

 

회복기의 노래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회상

 

아무것도 남지 않은 천지에도

남은 것들은 많았다 그해 늦봄

널브러진 지친 시간들을 밟아 으깨며

어김없이 창은 밝아왔고

흉몽은 습관처럼 생시를 드나들었다

이를 악물어도 등이 시려워

외마디소리처럼 담 결려올 때

분말 같은 햇살 앞에 그저

눈 감으면 끝인 것을

텃새들은 겨울부터 아니 그전 겨울부터 아니아니 그 전 겨울부터

목 아프게 지저귀고 있었다

때론 비가 오고 때론 개었다 세 끼 식사는 한결같았다 아아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어린 동생의 브라운관은 언제나처럼 총탄과 수류탄으로

울부짖고 있었고 그 틈에 우뚝

살아남은 영웅들의 미소가 의연했다

그 해 늦봄 나무들마다 날리는 것은 꽃가루가 아니었다

부서져 꽂히는 희망의 파편들

오그린 발바닥이 이따금 베어 피 흘러도

봉쇄된 거리 벗겨진 신 한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천지에서 떠밀려온 원치 않은 꿈들이 멍든 등을 질벅거렸고

그 하늘

그 나무

그 햇살들 사이

내 안에 말라붙은 강 바닥은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모든 것이 남은 천지에

남은 것은 없었던 그해 늦봄

 

그때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비였다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에, 뱃가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그러나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바스러졌다

 

저녁의 소묘 4

 

잊지 않았다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건

부스러질 것들

 

부스러질 혀와 입술,

따뜻한 두 주먹

 

부스러질 맑은 두 눈으로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

검은 웅덩이의 살얼음에 내려앉는 걸 지켜본다

 

                                    무엇인가

                                   반짝인다

 

반짝일 때까지

 

파란 돌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을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러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캄캄한 불빛의 집

 

그날 우이동에는

진눈깨비가 내렸고

영혼의 동지(同志)인 나의 육체는

눈물 내릴 때마다 오한을 했다

 

가거라

 

망설이느냐

무엇을 꿈꾸며 서성이느냐

 

꽃처럼 불 밝힌 이층집들,

그 아래서 나는 고통을 배웠고

아직 닿아보지 못한 기쁨의 나라로

어리석게 손 내밀었다

 

가거라

 

무엇을 꿈꾸느냐 계속 걸어가거라

가등에 맺히는 기억을 향해 나는 걸어갔다

걸어가서 올려다보면 가등갓 안쪽은

캄캄한 집이었다 캄캄한

불빛의 집

 

하늘은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텃새들은

제 몸무게를 떨치며 날아올랐다

저렇게 날기 위해 나는 몇번을 죽어야 할까

누구도 손잡아줄 수는 없었다

 

무슨 꿈이 곱더냐

무슨 기억이

그리 찬란하더냐

 

어머니 손끝 같은 진눈깨비여

내 헝클어진 눈썹을 갈퀴질하며

언 뺨 후려치며 그 자리

도로 어루만지며

 

어서 가거라

 

저녁의 소묘

 

어떤 저녁은 피투성이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

 

흑과 백

그 사이 수없는 음영을 따라

 

어둠이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

 

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의

평화도,

오랜 지옥도

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일히도록

 

외등은 희고

 

외등 갓의 바깥은 침묵하며 잿빛이도록

 

그의 눈을 적신 것은

조용히, 검게 흘러내리도록

 

새벽의 들은 노래

 

봄빛과

 

번지는 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얼비쳐

 

나는 입술을 다문다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나는 입술을 다문다

 

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

 

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

 

기다려봐야지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

 

다시는

 

이제 다시는

 

해부극장*

 

한 해골이

비스듬히 비석에 기대어 서서

비석 위에 놓인 다른 해골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

 

섬세한

잔뼈들로 이루어진 손

그토록 조심스럽게

가지런히 펼쳐진 손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이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을 들여다본다

 

                (우린 마주 볼 눈이 없는걸.)

                (괜찮아, 이렇게 좀더 있자.)

 

* 17세기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안드레아 베살리우스의 책. 수년간의 급진적 해부 연구 끝에 인간의 뼈와 장기, 근육 등 정교한 세부를 목판에 새겨 제작했다. 독특한 구도의 해골 그림들이 실려 있다.

 

해부극장 2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견딜 수 없다, 내가

 

안녕,

이라고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하고

정말이에요,

라고 대답할 때

 

구불구불 휘어진 혀가

내 입천장에

매끄러운 이의 뒷면에

닿을 때

닿았다 떨어질 때

 

*

 

그러니까 내 말은,

 

안녕.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심이야.

 

          후회하고 있어.

 

          이제는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아.

 

*

 

나에게

심장이 있다.

통증을 모르는

차가운 머리카락과 손톱들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나에게 붉은 것이 있다, 라고

견디며 말한다

일 초마다 오므렸다 활짝 펼쳐지는 것,

일 초마다 한 주먹씩 더운 피를 뿜어내는 것이 있다

 

*

 

수년 전 접질렸던 발목에

새로 염증이 생겨

걸음마다 조용히 불탈 때가 잇다

 

그보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다친 무릎이

마룻장처럼 삐걱일 때가 있다

 

그보다 더 오래전 으스러졌던 손목이

손가락 관절들이

다정하게

고통에 찬 말을 걸어온다

 

*

 

그러나 늦은 봄 어느 오후

검푸른 뢴트겐 사진에 담긴 나는

그리 키가 크지 않은 해골

 

살갗이 없으니

물론 여위었고

역삼각형의 골반 안쪽은 텅 비어 있다

엉치뼈 위의 디스크 하나가

초승달처럼 곱게, 조금 닳아 있다

 

썩지 않을,

영원히 멈춰 있는

섬세한 잔뼈들

 

뻥 뚫린 비강과 동공이

곰곰이 내 얼굴을 마주 본다

혀도 입술도 없이

어떤 붉은 것, 더운 것도 없이

 

*

 

몸속에 맑게 고였던 것들이

뙤약볕에 마르는 날이 간다

끈적끈적한 것

비통한 것까지

함께 바싹 말라 가벼워지는 날

 

겨우 따뜻한 내 육체를

메스로 가른다 해도

꿈틀거리는 무엇도 들여다볼 수 없을

 

다만 해가 있는 쪽을 향해 눈을 잠그고

주황색 허공에

생명, 생명이라고 써야 하는 날

 

혀가 없는 말이어서

지워지지도 않을 그 말을

 

거울 저편의 겨울

 

1

 

불꽃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파르스름한

심장

모양의 눈

 

가장 뜨겁고 밝은 건

그걸 둘러싼

주황색 속불꽃

 

가장 흔들리는 건

다시 그걸 둘러싼

반투명한 겉불꽃

 

내일 아침은 내가

가장 먼 도시로 가는 아침

오늘 아침은

불꽃의 파르스름한 눈이

내 눈 저편을 들여다본다

 

2

 

  지금 나의 도시는 봄의 아침인데요 지구의 핵을 통과하면,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꿰뚫으면 그 도시가 나오는데요 그곳의 시차는꼭 열두 시간 뒤, 계절은 꼭 반년 뒤 그러니까 그 도시는 지금 가을의 저녁 누군가가 가만히 뒤따라오듯 그 도시가 나의 도시를 뒤따라오는데요 밤을 건너려고 겨울을 건너려고 가만히 기다리는데요 누군가가 가만히 앞질러 가듯 나의 도시가 그 도시를 앞질러 가는 동안

 

3

 

거울 속에서 겨울이 기다리고 있었어

 

추운 곳

 

몹시 추운 곳

 

너무 추워

사물들은 떨지 못해

(얼어 있던) 네 얼굴은

부서지지도 못해

 

나는 손을 내밀지 않아

너도

손을 내미는 걸 싫어하지

 

추운 곳

오래 추운 곳

 

너무 추워

눈동자들은 흔들리지 못해

눈꺼풀들은

(함께) 감기는 법을 모르고

 

거울 속에서

겨울이 기다리고

 

거울 속에서

네 눈을 나는 피하지 못하고

 

너는 손을 내미는 걸 싫어하지

 

4

 

만 하루 동안 비행할 거라고 했다

 

스물네 시간을 꼭꼭 접어서 입속에 털어넣고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그 도시의 숙소에 짐을 풀면

오래 세수를 해야지

 

이 도시의 고통이 가만히 앞질러 가면

나는 가만히 뒤처져 가고

 

네가 잠시 안 들여다보는

거울의 찬 뒷면에 등을 기대고

아무렇게나 흥얼거려야지

 

스물네 시간을 꼭꼭 접어서

따가운 혀로 밀어 뱉어낸 네가

돌아가 나를 들여다볼 때까지

 

5

 

  내 눈은 두 개의 몽당양초 뚜욱뚝 촛농을 흘리며 심지를 태우는데요 그게 뜨겁지도 아프지도 않은데요 파르스름한 불꽃심이 흔들리는 건 혼들이 오는 거라는데요 혼들이 내 눈에 앉아 흔들리는데요 흥얼거리는데요 멀리 너울거리는 겉불꽃은 더 멀어지려고 너울거리는데요 내일 당신은 가장 먼 도시로 가는데요 내가 여기서 타오르는데요 당신은 이제 허공의 무덤속에 손을 넣고 기다리는데요 기억이 뱀처럼 당신의 손가락을 무는데요 당신은 뜨겁지도 아프지도 않은데요 꼼짝하지 않는 당신의 얼굴은 불타지도 부서지지도 않는데요,

 

거울 저편의 겨울 7

- 오후의 미소

 

거울 뒤편의

백화점 푸드코트

 

초로의 지친 여자가

선명한 파랑색 블라우스를 입고

두 병째 맥주를 마시고 있다

 

스티로폼 접시에

감자튀김이 쌓여 있다

 

일회용 소스 봉지는 뜯겨 있다

 

너덜너덜 뜯긴 경계에

달고 끈끈한 소스가 묻어 있다

 

텅 빈 눈 한 쌍이 나를 응시한다

 

너를 공격할 생각은 없어

라는 암호가

끌어올린 입꼬리에 새겨진다

 

수십 개의 더러운 테이블들이

수십 명의 지친 쇼핑객들이

수백 조각의 뜨거운 감자튀김들이

 

나를 공격할 생각은 마

 

너덜너덜 뜯긴

식욕을 기다리며,

 

거울 저편의 겨울 8

 

흰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눈먼 남자 둘이서

앞뒤로 나란히

구두와 지팡이의 리듬을 맞춰 걷고 있었다

 

앞의 남자가

더듬더듬 상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뒤의 남자는 앞의 남자의 등을

보호하듯 팔로 감싸며 따라 들어갔다

 

미소 띤 얼굴로

유리문을 닫았다

 

거울 저편의 겨울 4

- 개기일식

 

생각하고 싶었다

(아직 피투성이로)

 

태양보다 400배 작은 달이

태양보다 400배 지구에 가깝기 때문에

달의 원이

태양의 원과 정확하게 겹쳐지는 기적에 대하여

 

검은 코트 소매에 떨어진 눈송이의 정육각형,

1초

또는 더 짧게

그 결정의 형상을 지켜보는 시간에 대하여

 

나의 도시가

거울 저편의 도시에 겹쳐지는 시간

타오르는

붉은 테두리만 남기는 시간

 

거울 저편의 도시가

잠시 나의 도시를 관통하는

(뜨거운) 그림자

 

마주 보는 두 개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서로를 가리는 순간

완전하게 응시를 지우는 순간

 

얼음의 고요한 모서리

 

(아직 피투성이로)

짧게 응시하는 겨울

의 겉불꽃

 

거울 저편의 겨울 9

- 탱고 극장의 플라멩코

 

정면을 보며 발을 구를 것

 

발목이 흔들리거나, 부러지거나

리듬이 흩어지거나, 부스러지거나

 

얼굴은 정면을 향할 것

두 눈은 이글거릴 것

 

마주 볼 수 없는 걸 똑바로 쏘아볼 것

그러니까 태양 또는 죽음,

공포 또는 슬픔

 

그것들을 이길 수만 있다면

심장에 바람을 넣고

미끄러질 것, 비스듬히

 

(흐느끼는 빵처럼

악기들이 부풀고)

그것들을 이길 수만 있다면

당신을 가질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중력을 타고 비스듬히,

더 팽팽한 사선으로 미끄러질 것

 

피 흐르는 눈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그밖에 뭘 가져보았는지는

이제 잊었어.

 

달콤한 것은 없어.

씁쓸한 것도 없어.

부드러운 것,

맥박 치는 것,

가만히 심장을 문지르는 것

 

무심코 잊었어, 어쩌다

더 갈 길이 없어.

 

모든 것이 붉게 보이진 않아, 다만

모든 잠잠한 것을 믿지 않아, 신음은

생략하기로 해

난막(卵膜)처럼 얇은 눈꺼풀로

눈을 덮고 쉴 때

 

그때 내 뺨을 사랑하지 않아.

입술을, 얼룩진 인중을 사랑하지 않아.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마크 로스코와 나 2

 

한 사람의 영혼을 갈라서

안을 보여준다면 이런 것이겠지

그래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이다

붓 대신 스펀지로 발라

영원히 번져가는 물감 속에서

고요히 붉은

영혼의 피 냄새

 

이렇게 멎는다

기억이

예감이

나침반이

내가

나라는 것도

 

스며오는 것

번져오는 것

만져지는 물결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의 피

 

어둠과 빛

사이

 

어떤 소리도

광선도 닿지 않는

심해의 밤

천년 전에 폭발한

성운 곁의

오랜 저녁

 

스며오르는 것

번져오르는 것

피투성이 밤을

머금고도 떠오르는 것

 

방금

벼락 치는 구름을

통과한 새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 영혼의 피

 

마크 로스코와 나

- 2월의 죽음

 

미리 밝혀둘 것도 없이

마크 로스코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는 1903년 9월 25일에 태어나

1970년 2월 25일에 죽었고

나는 1970년 11월 27일에 태어나

아직 살아 있다

그의 죽음과 내 출생 사이에 그어진

9개월여의 시간을

다만

가끔 생각한다

 

작업실에 딸린 부엌에서

그가 양쪽 손목을 칼로 긋던 새벽

며칠 안팎에

내 부모는 몸을 섞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점 생명이

따뜻한 자궁에 맺혔을 것이다

늦겨울 뉴욕의 묘지에서

그의 몸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신기한 일이 아니라

쓸쓸한 일

 

나는 아직 심장도 뛰지 않는

점 하나로

언어를 모르고

빛도 모르고

눈물도 모르며

연붉은 자궁 속에

맺혀 있었을 것이다

 

죽음과 생명 사이,

벌어진 틈 같은 2월이

버티고

버텨 마침내 아물어갈 무렵

 

반 녹아 더 차가운 흙 속

그의 손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심장이라는 사물

 

지워진 단어를 들여다본다

 

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

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

지워지기 전에 이미

비어 있던 사이들

 

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

어깨를 안으로 말고

허리를 접고

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희미해지려는 마음은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덜 지워진 칼은

길게 내 입술을 가르고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

 

저녁의 소묘 5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저녁 잎사귀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년쯤

별 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