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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31. 13:02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01 우리 옛 도자기

 

글, 사진 / 윤용이

2010, 대원사


 

시흥시매화도서관

SH013805

 

082

빛12ㄷ  226

 

빛깔있는 책들 226

 

윤용이-------------------------------------------------------------------------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사 및 학예관을 거쳐 문화재위원을 역임하였고 현재 원광대학교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한국도자사연구』『아름다운 우리 도자기』『한국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공저) 등이 있다.

 

|차례|

 

머리말

고려 청자

조선 분청자

조선 백자

분원과 사기장

조선 백자 전통의 단절

부록 - 우리 옛 도자기의 명칭과 용도

참고 문헌

철제 불두(鐵製佛頭) 선종이 널리 전파된 9세기 무렵부터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불상의 재료도 철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10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순화4년명'항아리 993년, 높이 35센티미터,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햇무리굽 청자완 11세기, 입지름 16.4센티미터, 해강도자미술관 소장.

청화철화국화문꽃병 12세기 중반, 높이 22.7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화철화초문매병 12세기 중반, 높이 26.3센티미터, 호림박물관 소장.

청자양각연판문접시와 굽 12세기, 입지름 16.4센티미터, 해강도자미술관 소장.

청자사자뚜껑주전자 및 승반 12세기 중반, 총높이 27.5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양이병 12세기 중반, 높이 21.6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철채백화점문나한좌상 13세기, 높이 22.3센티미터, 개인 소장.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12세기 중반, 높이 10센티미터, 간송미술관 소장.

청자동녀형연적 12세기 중반, 높이 11.4센티미터,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청자투각칠보문향로 12세기 중반, 높이 15.5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투각연당초문주전자 및 승반 12세기 중반, 총높이 20.2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참외형꽃병 1146년, 높이 22.9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향완 13세기 전반, 높이 30.4센티미터, 호암미술관 소장.

청자상감모란당초문'신축'명벼루 1181년, 크리 13.1×10.2센티미터, 호암미술관 소장.

청자상감연화인물문매병 13세기 전반, 높이 39센티미터,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청자상감초화문주전자 및 승반 12세기 후반, 주전자 높이 17센티미터, 승반 높이 6.8센티미터, 개인 소장.

청자상감표류수금문정병 12세기 후반, 높이 37.1센티미터, 간송미술관 소장.

흑자표형병 13세기, 높이 41.7센티미터, 일본 야마토분화관(大和文華館) 소장.

청자상감운학문매병 12세기 후반, 높이 30.5센티미터,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청자상감국화문탁잔 12세기 후반, 총높이 9.9센티미터, 간송미술관 소장.

청자양각연판문동채표주박형주전자 1257년, 높이 32.5센티미터, 호암미술관 소장.

분청자상감모란당초문편병 15세기 전반, 높이 22.7센티미터, 해강도자미술관 소장.

분청자인화문벼루 15세기, 크기 7×10.5센티미터, 해강도자미술관 소장.

분청자선각화문편병 15세기 후반, 높이 21.8센티미터, 호암미술관 소장.

분청자박지모란문호 15세기 후반, 높이 45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분청자귀얄문합 백토를 풀비(귀얄)로 적셔 분청자의 겉면을 바르면 겉이 희게 되면서 동시에 풀비의 자국이 나타난다. 16세기 전반, 총높이 8.2센티미터, 호암미술관 소장.

분청자덤벙문탁잔 백토물에 분청자를 덤벙 담갔다가 꺼내면 겉이 거의 백자와 같이 하얗게 되는 덤벙분청자가 된다. 16세기 전반, 총높이 7.9센티미터, 호암미술관 소장.

분청자선각선문편병 15세기 후반, 23.5센티미터, 일본 개인 소장.

분청자철화모란문병 15세기 후반, 높이 28센티미터,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분청자철화어문양이발 15세기 후반, 입지름 31.1센티미터,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

분청자귀얄문병 16세기 전반, 촐높이 8.2센티미터, 호암미술관 소장.

분청자덤벙문희준 16세기 전반, 높이 17.9센티미터, 길이 28.5센티미터, 호암미술관 소장.

태조 이성계 영정 이성계에 의해 건국된 조선은 성리학을 숭상하는 나라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세계가 잘 표현된 백자가 각광을 받게 된다. 전주 경기전 소장.

광주 분원리 앞의 한강 왕실에서는 서울에서 가깝고 좋은 백토가 나는 광주에 백자 가마터를 만들었다. 분원리 가마는 한강 가에 위치하여 물자 수송에도 용이한 곳이었다.

백자청화매조죽문병 16세기 전반, 높이 32.9센티미터, 개인 소장.

백자청화'홍치2년'명송죽문호 1489년, 높이 48.7센티미터,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백자주전자 16세기 전반, 높이 33센티미터, 호암미술관 소장.

백자유개호 15세기 후반, 총높이 42.4센티미터, 호암미술관 소장.

백자청화운룡문병 16세기 전반, 높이 25센티미터, 호암미술관 소장.

우암 송시열 초상 17세기 중국에서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들어서자 조선 사회도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당시 노론 세력을 형성한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소중화 사상을 외쳤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철화운룡문유개호 17세기 전반, 총높이 41.5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영조 영정 18세기는 숙종, 영조, 정조의 시기로 조선시대 후기 문화의 전성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고전적인 유백색, 설백색의 백자와 간결한 청화백자가 제작되었다. 궁중유물박물관 소장.

「선조조기영회도(宣祖朝耆英會圖)」 부분 1585년,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백자달항아리 18세기 전반, 높이 44.2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동화연화문호 18세기 후반, 높이 29.8센티미터, 일본 개인 소장.

백자청화동채연화문호 18세기 후반, 높이 44.6센티미터,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백자천도복숭아연적 19세기, 높이 11.5센티미터,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번조관의 비 18세기에서 19세기에 분원을 관장하던 번조관들의 비(碑)로 광주 분원리 분원초등학교 안에 세워져 있다.

센리큐의 초상 유명한 일본의 다인(茶人)이다. 16세기 이후 일본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6세기 후반.

이도(井戶)다완 16세기경 일본에서 좋은 찻잔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의 명예이며 부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16세기 후반, 입지름 15.3센티미터, 일본 다이토쿠지(大德寺) 소장.

한 · 일 사신의 연회 모습 일본의 사기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자기가 조선 사회에 침투하자 조선 백자는 값싼 왜사기와의 경쟁에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1883년, 숭실대학교 박물관 소장. 

 

posted by 황영찬
2014. 10. 27. 14:55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00 HOW TO READ 히틀러 Adolf Hitler


닐 그레고어 지음 | 안인회 옮김

2007, 웅진지식하우스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31815


082

하66ㅇ v. 5


자칭 운명의 남자이자, 극단적인 폭력의 상징이었던 히틀러.

그는 깊은 방향상실을 경험하고 있던 수많은 도이치 사람들이 느끼던

일반적인 괴로움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며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나의 투쟁》은 보통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압도하는

정치적 · 경제적 · 문화적 위기를 어떻게든 나름대로

이해할 수단을 제공해주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바로 이런 위기에 대한 중요한 증언이었다.


HOW TO READ

●  ●  ●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도발적인 작가와 사상,

그들의 글을 원전으로 직접 만난다


세계사를 뒤흔든 과격한 정치가, 히틀러


과격한 폭력성과 광적인 연설, 그리고 논리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글들, 히틀러의 글을 읽는 것은 셰익스피어를 읽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히틀러를 한낮 미치광이로 이해하는 것은 그에 대한 너무나도 게으른 접근방식이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유럽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일이 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 《나의 투쟁》을 읽는 것은 여전히 결실이 풍부한 경험이다. 저자 닐 그레고어는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자 히틀러의 사고체계를 원전 텍스트를 통해 그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생존 공간 확보와 반유대주의라는 사상이 어떻게 실제 전쟁과 유대인 학살로 나타날 수 있었는지를 밝히는 키워드를 찾아낸다. "독은 오로지 해독제로만 막을 수 있다"는 히틀러의 말은 그를 보는 우리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HOW TO READ 시리즈

위대한 사상, 세기의 저작을 원전으로 직접 만나는 특별한 기회, HOW TO READ 시리즈, 이 시리즈는 세계적 석학들의 안내를 받으며 사상가들의 저작 중 핵심적인 부분을 직접 읽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읽는 척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제대로 읽을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우리시대 교양인을 위한 고품격 마스터클래스가 될 것이다.


닐 그레고어 Neil Gregor

사우샘프턴대학교에서 현대독일사를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제3제국의 다임러-벤츠》가 있으며 《나치즘 : 강의》와 《나치즘, 전쟁과 학살》 등을 펴냈다. 현재 '뉘른베르크와 1945년 이후의 나치 과거'에 관한 책을 집필 중이다.


안인회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전공하고, 독일 밤베르크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95년 실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로 제2회 한독번역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03년에는 신화와 예술과 현실의 관계를 흥미롭게 살핀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로 '올해의 논픽션 상'을 수상했다. 그의 지은 책으로 《안인회의 북유럽 신화 1 · 2》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 《히틀러 평전》《중세로의 초대》《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한국번역가협회 번역 대상 수상), 《그림전설집》 등이 있다.


차례


■ HOW TO READ 시리즈를 열며


1 히틀러의 세계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 위대한 어머니 도이치 국가로!

3 대량 학살의 텍스트, 《나의 투쟁》

4 히틀러, 그만의 논리

5 "모든 것 뒤에 유대인이 있다"

6 유대인 학살의 징후

7 건강한 여성의 번식력

8 역설적인 현대성

9 세계 제국의 꿈

10 위대한 지도자의 조건


■ 자료 출처

■ 주

■ 히틀러의 생애

■ 함께 보면 좋은 자료

■ 역자 후기 : 히틀러의 진짜 목소리를 듣는다


1

히틀러의 세계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의 글은 마음을 고양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정치적으로 구제불능의 극우파에게라면 몰라도 오늘날 영감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미움과 폭력, 파괴의 메시지를 전파한다.

이것은 어떤 정치적 계기를 맞이해 민족적 · 종족적 · 사회적 · 문화적 원한들을

대규모로 동원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하나의 견해를 보여준다.

2

위대한 어머니

도이치 국가로!


독일 - 오스트리아는 합쳐져서 위대한 어머니 도이치 국가로 돌아가야 한다.

경제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경제적 관점에서는 그런 통합이 중요한 것이 아니더라도,

아니 심지어는 해로운 것이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3

대량학살의 텍스트,

《나의 투쟁》


그의 글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사적 폭력의 이미지들은

전쟁에 의해 생겨난 광범위한 문화 위기의 징후를 드러내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나아가 독일의 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향한 극단적인

폭력의 위협을 명백하게 밝히는 강령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4

히틀러, 그만의 논리


역사란 그 자체가 한 민족이 벌이는, 생존을 위한 싸움의 과정을 뜻한다.

여기서 나는 "생존을 위한 싸움"이라는 말을 일부러 사용했다.

평화의 시기나 전쟁의 시기를 막론하고 현실에서 매일 먹을 빵을 얻기 위한

전쟁은 수천수만의 장애물에 맞선 끝도 없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5

"모든 것 뒤에

유대인이 있다"


언론의 주요 소유주들은 누구였던가? 유대인이었다.

주식 교환 가치에서 혜택을 입는 사람이 누구였던가? 유대인이었다.

마르크스주의가 널리 퍼진 것은 누구 책임이며, 마르크스주의는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가? 유대인이었다.

그렇게 해서 도이치 민족의 쇠퇴를 불러오고 유대인의 국제적 음모가 성공할 길을 닦는 것이다.

후방에 나타난 온갖 부정적인 정치 발전의 뒤에는 도이치 종족의 적인 유대인이 있었다.


6

유대인 학살의 징후


민족이라는 몸은 각 부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 있다.

기생충이나 "독성이 있는 바이러스"가 제때 꼭 필요한 철저함으로 처리되지 않으면

그것이 '주인'의 몸을 정복하고, 그러면 몸은 필연적으로 죽게 된다.

이런 기생충 역할을 하는 것은 누구인가? 대답은 물론 '유대인'이다.


7

건강한 여성의 번식력


신체적 ·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 자식을 낳음으로써

그것을 후세에 전달하고 그렇게 자기들의 고통이 지속되게 해서는 안 된다.

종족 국가는 이런 점에서 가장 거대한 교육적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앞으로 언젠가는 이것이 오늘날 부르주아 시대가 얻은 전쟁에서의

가장 큰 승리보다도 더 위대한 행위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8

역설적인 현대성


노동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해로운 영향에서 벗어나 민족에 다시 통합되어

'민족 공동체'에서 완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민족 공동체에서는 농부들의 이익과 도시 노동자의 이익 사이의 긴장이

아주 멋지게 극복되고, 모든 사람이 자신만을 위해 일하는 대신에

민족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9

세계 제국의 꿈


우리는 남쪽과 서쪽으로의 무한한 움직임을 끝내고,

우리의 시선을 동쪽에 있는 땅으로 향한다.

마침내 우리는 전쟁 이전 시대의 식민지 및 상업 정책을 중단하고,

미래의 영토 정책으로 옮겨간다.


10

위대한 지도자의 조건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최고도로 무한한 권위와 함께

가장 무거운 궁극적인 책임도 짊어진다.

이것에 어울리지 못하거나 아니면 너무 비겁해서 자기 행동의 결과에

책임을 지지 못하는 사람은 지도자로 적합하지 않다.

오로지 영웅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


히틀러의 생애


1889년 4월 20일 인 강변의 브라우나우에서 아돌프 히틀러 탄생.

1907~1913년 히틀러, 빈에 머묾.

1913년 5월 24일 뮌헨으로 이사.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 시작.

1914~1918년 군 복무. 철십자 훈장 2급, 이어서 1급 훈장을 받음.

1918년 10월 23일 가스 공격을 받아 일시적으로 눈이 멀어 입원.

1918년 11월 혁명의 파도가 북부 항구 지역에서 시작되어 독일 전 지역으로 퍼짐.

            공화국 선포. 정전 협정 조인.

1919년 1월 5일 도이치노동자당(DAP) 창설. 1920년에 국가사회주의 도이치노동자당(NSDAP)으로              이름을 바꿈.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 조인.

1919년 8월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1919년 9월 히틀러, 도이치노동자당에 입당.

1921년 7월 NSDAP 안에서 리더십 위기. 히틀러, 당수가 됨.

1923년 1월 프랑스, 루르 지방을 점령.

1923년 11월 히틀러, 뮌헨의 '비어홀 쿠테타' 주도.

1924년 2~4월 히틀러, 반역 모의. 5년형 받음.

1924년 감옥에서 《나의 투쟁》 제1권 집필.

1924년 12월 20일 9개월 정도를 복역한 다음 감옥에서 석방.

1925년 2월 NSDAP를 다시 창설.

1925~1929년 NSDAP는 변두리 정당에 지나지 않았지만 차츰 독일 전 지역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기반을 다짐.

1925년 7월 《나의 투쟁》 제1권 출간.

1926년 12월 《나의 투쟁》 제2권 출판.

1928년 여름 《제2권》집필. 출판되지 않음.

1929~1933년 불경기(세계 경제공황)로 NSDAP의 당원과 후원자의 세력을 급진적으로 확장시킬               기회 얻음.

1930년 3월 마지막 바이마르 연합정부 붕괴.

1930년 3월~1933년 1월 브뤼닝(Bruning), 파펜(Papen), 슐라이허(Schleicher)의 권위주의 정부              가 차례로 나타남.

1933년 1월 30일 히틀러, 수상이 됨.

1933년 3월 최초의 공식적인 수용소 캠프 세워짐(다하우).

1934년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 사망. 히틀러, 대통령직과 수상직을 합친 '지도자겸 제국 수상'(총               통)이 됨.

1935년 3월 징병제 도입.

1935년 9월 15일 뉘른베르크 법 공표.

1936년 3월 7일 라인란트 지역을 다시 군사 지역으로 만듦.

1936년 11월 로마-베를린 축(Rome-Berlin Axis) 선언.

1937년 11월 5일 '호스바흐 집회.' 히틀러의 확장 정책의 윤곽이 드러나고 영국을 "증오를 따르는                적대자"라고 규정함.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합병.

1938년 9월 주테텐 위기가 뮌헨 협정에서 절정에 이름. 이어서 주데텐란트 획득.

1938년 11월 '수정의 밤(Kristallnacht)' 반유대인 정책이 강화되기 시작.

1939년 1월 30일 히틀러, 다음 전쟁에서 유대인의 운명과 관련해서 악명 높은 예언을 함.

1939년 3월 14일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제국 보호령(통치 지역) 확립.

1939년 9월 독일, 폴란드 침공. 영국과 프랑스, 전쟁 선포.

1939년 9월 이후 점령된 유럽 지역 유대인들의 강제 노동, 국외추방, 게토 지역에 감금, 대량 학살.

1940년 4월 독일,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

1940년 5~6월 대 프랑스 전쟁.

1940년 여름 영국 전쟁.

1941년 6월 22일 독일, 소련 침공(바르바로사 작전). 친위대 작전부대 소련 유대인 살해를 주도.

1942년 1월 20일 반제(Wannsee) 회의에서 '최종 해결'에 관한 사법적 · 조직적 문제들이 최종적으              로 결정됨.

1942년 봄 처형 수용소들이 대량 학살 시작.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제6군단 항복.

1944년 3월 19일 독일, 헝가리 정복. 이어서 헝가리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송.

1944년 6월 동부전선에서 독일 진영 붕괴. 제2전선 시작.

1944년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Claus Schenk von Stauffenberg)의 히틀러 암살 시도 실패.

1945년 1월 소련의 반격이 다시 시작됨.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해방.

1945년 4월 30일 히틀러, 베를린에서 자살.

1945년 5월 2일 소련 붉은 군대 베를린 장악.

1945년 5월 8일 베를린에서 소련 주코프(Zhukov) 원수에게 독일 카이텔(Keitel) 장군 항복.




posted by 황영찬
2014. 10. 27. 10:10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99 피카소 - 성스러운 어릿광대

 

마리-로르 베르나다크, 폴 뒤 부셰 지음, 최경란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3

 

082

시158ㅅ 18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018

 

마리-로르 베르나다크 Marie-Laure Bernadac

1950년 2월에 태어난 그녀는 1980년 이후 지금까지 피카소 미술관의 관장을 역임하고 있다. 1980년에 사진집 <피카소 미술관>을 출판했으며, 같은 해에 피카소 미술관의 카탈로그를 공동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1986년에는 디디에 보시(Didier Baussy) 감독의 영화 <피카소>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폴 뒤 부셰 Paule du Bouchet

1951년 4월에 출생했다. 폴 뒤 부셰는 1978년부터 1985년까지 <오가피 Okapi> 지(紙) 기자로 활약했으며, 어린이를 위한 도서를 다수 저술하였다.

 

옮긴이 : 최경란

1963년 대구 출생. 연세대학교 불어불문과를 졸업한 후 파리 제10대학에서 언어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고 동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한국 단편 작가들의 작품을 불어로 번역하는 일에 참여했으며, 번역서로는 <표절>과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의 <그리스 문명의 탄생>이 있다.

 

20세기 최고의 통찰자, 피카소.

피카소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통찰을 의미했다.

그는 인간과 사물의 내면에 숨겨진 은밀한 의미를

파악하여 생명력을 지닌 그림으로 승화시켜 놓았다.

그는 동시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살던 시대를, 사람을, 사물을

잘 보았던 사람이지만 그 자신은 격하고 비밀스러워서

도무지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기도 했다.

 

1955년 여름,

피카소는 자신의 작업 과정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앙리-조르주 클루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피카소는 번지지 않고 종이에 잘 스며드는

착색 잉크를 미국으로부터 공급받았는데,

이 새로운 소재의 발굴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앙리-조르주는 반투명한

종이 뒤에 카메라를 세워 놓고 피카소가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을 하나하나 필름에 담았다.

1956년에 개봉된 <피카소의 신비>는

캔버스 위의 그림이 생명을 얻어가는 과정을

한눈에 보여 주었다.

 

미셰 리셰

<피카소 미술관, 파리 : 데생, 수채화, 고무수채화 그리고 파스텔화>,

1988

 

차례

 

제1장 스페인에서 보낸 유년기

제2장 몽마르트르에서의 광적인 시절

제3장 입체주의 혁명

제4장 명성으로의 길

제5장 천재의 고독

제6장 방황과 좌절

제7장 영광의 나날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찾아보기

 

 

제1장

스페인에서 보낸 유년기

 

스페인의 남부 도시 말라가의 하얀 대저택에서 피카소가 태어난 것은 1881년 10월 25일 자정에 가까운 시각, 정확히 23시 15분이었다. 그날 하늘에서는 달과 성운들이 신기한 조합을 이루어 자정 무렵 하늘이 범상치 않게 밝았다. 그 빛은 신비한 광채를 드리우며 고요히 잠든 마을을 하얗게 밝히고 있었다.

피카소가 첫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그가 8세 때 그린 <피카도르>(위)로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것이다. 세월이 흘러 다소 손상되기는 했지만 피카소는 이 작품을 평생 간직했다. 파스텔을 사용한 어머니의 초상화(아래)는 피카소가 14세 때에 바르셀로나에서 그린 것이다.

1890년. 피카소가 9세 때 그린 비둘기 그림. 당시 피카소는 아버지의 그림을 그대로 모사하였다.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는 새를 모델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는 모델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집 안에서도 많은 비둘기를 기르고 있었다. 그래서 비둘기들은 집 안 구석구석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피카소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비둘기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간직하게 되었다.

바르셀로나로 이주하던 무렵인 1896년에 찍은 사진으로, 이때 피카소는 15세였다. 짧게 자른 머리가 그의 강렬한 시선을 한층 부각시키고 있다.

<맨발의 소녀>. 1895년. 라코루나에서 이 소녀상을 그렸을 때 피카소는 14세였다. "이곳의 가난한 소녀들은 항상 맨발로 다녔다. 그림의 소녀는 온통 동상으로 뒤덮인 발을 내놓고 있다." 기법은 사실적이고 전통적이지만, 인물의 무거운 시선과 슬픔에 찬 모습 등을 능히 표현할 수 있는 성숙한 화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남자의 동체>. 1893~1894. 피카소는 바르셀로나의 미술학교에서 고전적인 교육을 받으며 고대 주형들을 모사하였다. 완벽에 가까운 그의 작품들은 교수들을 놀라게 하였다. "나는 어린아이의 그림을 그려 본 적이 한번도 없다. 12세 때 이미 라파엘처럼 그림을 그려야 했다……."

 

한 세기가 바뀌던 무렵에 바르셀로나는 유럽의 지성이 융합되던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바르셀로나에는 《펜과 붓》, 《청춘》, 《카탈루냐 예술》 등의 잡지 외에도 피카소가 1901년에 예술부장직을 맡아 보기도 했던 《젊은 예술》과 같은 문예 지가 활발히 간행되는 가운데 모더니즘이 제창되고 있었다. 한편, 이러한 잡지들은 당시 바르셀로나 깊숙이 침투하고 있던 무정부주의의 기관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피카소는 이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바르셀로나는 무정부주의 도시였다. 이곳에서는 전유럽을 휩쓸던 무정부주의가 노동자 계급의 중심부에서 확고한 지배력을 갖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빈민가는 처참할 정도로 빈곤했다. 이는 사회에 폭력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촉진제 구실을 하였고 이 같은 폭력은 종종 소요와 테러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고양이 네 마리'는 몽마르트르에 있는 카페 '검은 고양이'에서 이름을 따 온 것이다. 이것은 카탈루나 지방의 '고양이 네 마리도 없다'는 표현이 프랑스어로 '고양이 한 마리도 없다.'라는 표현과 같은 뜻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1899년, 피카소는 이 카페의 차림표 표지를 그렸다. 피카소는 존경하던 툴루즈 로트레크의 화필을 환기시키면서 세기말 영국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양식을 유머러스하게 해석하고 있다.

색의 시대

'청색시대'의 작품들은 피카소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졌으며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다. 작품 속의 인물들이 비교적 현실에 '부합'되며 '눈에 보이는 것'에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의 주제 역시 직접적 감정을 주로 표현하고 있어서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 보면 현실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는 이 시기 작품에서도 피카소가 가진 고유한 시각이 관건이 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삶>(위). 1903년. 청색시대의 작품 중 가장 대작인 이 작품은 하나의 상징이다. 한쪽에는 한 쌍의 나체 인물이 있고 다른 쪽에는 초췌한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는 이들 부부에게 사랑과 해산 등 인생의 황금 같은 순간들이 실은 고통에 지나지 않음을 말해 주려는 듯하다. 이들 사이에 놓인 웅크린 나신은 창조가 현존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창조는 곧 예술인 것이다. 피카소에게 예술은 죽음에서의 구원을 의미한다. 예술은 삶이다.

<자화상>(아래). 1901년. 피카소는 20세였으나 이 자화상에서는 무척이나 나이 든 모습으로 표현했다. 푹 꺼진 볼, 텁구룩한 턱수염, 넋이 나간 듯한 두 눈은 인생을 관조하는 듯한 인간의 고독과 고뇌를 웅변해 준다.

청색시대

1901년에서 1904년에 이르는 시기에 피카소는 모든 것을 청색으로 보았다. 마치 그와 세계 사이에 청색 여과지가 놓여 있는 것처럼, 그가 사용한 디양한 청색들은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각각의 청색은 특별하고도 개별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청색은 밤의 색이고 바다의 색이며 하늘의 색이었다. 붉은색과 노란색이 생명, 태양, 열기를 표현하는 따뜻한 색이라면, 청색은 깊고도 차가우며 허무주의와 빈곤 그리고 일종의 절망감에 적합한 색이었던 것이다.


<맹인의 식사>. 1903년. '맹인'은 당시 피카소를 사로잡고 있던 주제였다. 맹인은 볼 수 없지만 만질 수 있다. 피카소는 자신의 손에 지대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화가에게 있어 모든 작업은 시각에 의존한다. 모든 권능이 눈에서 나오는 것이다. 시각을 잃는다는 것은 그 어떤 불구보다도 치명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맹인이라는 주제를 통해 피카소는 진정한 시각, 즉 내면의 시각을 말하고자 했다. 그것은 외부세계가 단지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을 때 화가가 보고 느끼게 되는 시각을 의미했다.

여명의 색

장밋빛시대는 1904년에서 1906년까지 이어진다. 이 이름은 당시 피카소의 화폭을 지배하던 황갈색과 창백한 장미색, 그리고 화폭에 나타난 인물들의 부드러움과 연약함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때 모델이 되었던 인물들은 주로 곡예사, 서커스 단원, 소외 받고 상처 입기 쉬운 예술가 등이었다.


<공 위에 올라선 곡예사>(위). 1905년. 튼튼한 근육으로 단련된 육상선수가 넓다란 등을 보이며 각진 상자에 앉아 둥근 공 위에 올라서 있는 소녀를 지켜본다. 우아한 동작으로 두 팔을 들고 허리를 살짝 젖힌 소녀의 몸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그림은 대립을 환기시켜 준다. 한편에는 힘과 안정감, 자제력이 표현되고, 다른 한편에는 가벼움, 유연함, 우아함이 나타난다. 기하학적인 형상, 즉 정방형과 원형은 이러한 대립을 함축하고 잇다. 장식은 극히 단순화되어 있다. 배경에는 말과 인물들이 흩어져 있다.

<다림질하는 여인>(아래). 1904년. 바짝 마른 몸에 슬프고 피로한 표정을 한 젊은 여인이 다리미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피카소의 몇몇 작품은 청색시대와 장밋빛시대의 중간단계를 보여 준다. 이 그림의 주제는 청색시대의 그것(빈곤, 고난, 고역)이지만 색채는 분홍색과 회색을 향해 밝게 변하고 있다.

장밋빛시대

피카소의 세계는 1905년부터 밝아진다. 그의 삶도 회복되는 듯하다. 이 시기에 그는 매일 저녁 메드라노 서커스를 보러 갔다. 거기서 그는 곡예사들과 서커스 단원들에게 매료되어 이들을 대상으로 많은 작품을 그렸다. 그러나 실상 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구경거리가 아니라 그들의 일상이었다.


<어릿광대와 그의 동반자>(위). 1901년. <곡예사의 가족>(아래). 1905년. 4년의 간격을 두고 제작된 이 두 작품에는 피카소가 매우 사랑했던 서커스 단원들이 묘사되어 있다. 마치 꿈꾸는 듯하면서도 어릿광대 특유의 다소 슬픈 표정을 한, 그리고 약간 취기가 도는 듯한 어릿광대와 그의 반려자가 사념에 잠겨 있다. 서커스 단원들은 피카소가 장밋빛시대를 지나는 여정 동안 진정한 동반자였다. 체크 무늬 의상의 어릿광대, 뾰족한 모자를 쓴 늙은 익살꾼, 두 명의 어린이, 수영복 차림의 곡예사, 꽃바구니를 들고 있는 무용수, 한쪽 구석에는 모자를 쓰고 앉아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이 그림을 보고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렇게 썼다. "말해 주렴. 그들이 누구인지. 헤매는 이 사람들, 우리들보다 조금은 더 덧없이 보이는 이들이."

어릿광대의 색

<손풍금을 치는 사람>(위) 1905년. <원숭이와 함께 있는 곡예사 가족>(가운데). 1905년. <배우>(아래). 1904년.


"로마의 카니발 기간 중에 때로는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밤의 대주연을 치르고 그 다음날 아침에 성 베드로의 발가락에 입맞추기 위해 산피에트로 대성당으로 향하는 가면의 행렬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피카소를 매혹시킬 만한 존재들이었다. 조악하게 번쩍거리는 싸구려 의상으로 치장한 이들 서커스단의 날씬한 모습에서 변덕스럽고 교활하며 가난에 찌들어 거짓말을 일삼는 젊은이를 느낄 수 있다."

기욤 아폴리네르

《화가, 소묘가인 피카소》


"청색은 사라져 가고 더 명료하고 가벼운 다른 색에게 자리를 내준다. 또 화폭의 여기저기에 공기나 빛에 영향받지 않은 고무수채화 기법의 우윳빛 색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색채는 어릿광대 의상의 색이다. 즉, 어떤 물체를 덮고 있는 다른 하나의 물체와 같은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숨결 아래 가볍게 흔들리는 듯한 이 톡톡 끊어진 윤곽선 안에 감미로운, 때로는 너무나 감미로운 수법으로 배치된 색채들은 목판화에서는 뜻밖의 것처럼 느껴진다.

세자르 브란디

<적색, 즉 회화>


제2장

몽마르트르에서의 광적인 시절


1900년 피카소는 열아홉 살이 되었다. 파리 생활은 최초의 외국생활이었다 그에게 파리는 몽마르트르를 의미했다. 피카소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몽마르트르에 자리를 잡았다. 몽마르트르는 가장 매력적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도착할 당시 피카소는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해 가을은 진정 영예로운 한철이었다. 파리는 아름다웠고 피카소는 이 도시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사바르테스의 초상>. 1901년. 어느 날 저녁 하이메 사바르테스는 카페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때 피카소가 들어와 그를 알아보곤 이 초상화를 그렸다. 여기에는 녹색과 흰색, 황색이 사용되고 있다. 슬픔이 이미 자리를 잡은 얼굴에 손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다.

<카사게마스의 죽음>. 1901년. 파리. 친구 카를로스 카사게마스의 죽음은 피카소에게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는 많은 작품에서 이 비극적인 사건을 다루었다. 이 작품들은 당시 피카소의 화풍 중 가장 이질적인 것들이다. 피카소는 죽어서 창백해진 친구의 얼굴을 기억을 더듬어 그려 나갔다. 이 얼굴은 반 고흐의 그림에서처럼 빛을 방사하고 있는 촛불로 밝혀져 있다. 관자놀이 위에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탄환자국이 선명하다.

당시 피카소는 빈곤과 창작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의 친구 사바르테스는 이렇게 썼다. "피카소는 예술이 슬픔과 고통에서 태어나는 것이라 믿고 잇었다. 그는 슬픔이 명상에 적합한 것이며 고통은 삶의 토대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당시 우리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할 나이를 지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이 불확실한 시기를 자신의 비참함에서 비롯된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것이다."

페르낭드 올리비에. 1905년부터 피카소와 동거를 시작한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훗날 피카소를 처음 본 순간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피카소는 작은 키에 가무잡잡했으며 작달막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동시에 불안감을 주는 청년이었다. 그의 눈은 깊고 어두웠으며 뭔가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꼭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듯한 눈이었다."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1906년. 피카소가 이 유명한 초상화에 착수한 것은 1905년이었다. 그때 거트루드 스타인은 오랜 시간 동안 포즈를 취해 주었다. 그런데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 피카소는 그 동안 그린 얼굴을 몽땅 지워 버렸다. 그에게는 그다지 탐탁치 않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다가 1906년 가을, 고솔에서 돌아온 피카소는 그동안 제쳐두었던 이 초상화에 다시 착수하여 가면 같은 모습을 부여햇다. 매끈한 이마는 튀어나온 듯하고 윤곽은 개성이 없고 도식적이며 이목구비가 정연하다. 이 초상화에 대해 거트루드 스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여러 초상화 중에서 언제나 나의 모습으로 남아 잇는 유일한 것입니다."

<자화상>. 1906년. 피카소가 고솔에서 막 돌아와 그린 것이다. 고솔에서의 체류기간은 그의 미술세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처음으로 피카소는 눈에 보이는 대상들에 인공적인 가식을 곁들이지 않고 일종의 투박함과 형태의 순수성만으로 그려 나갔다. 인물들은 거의 조각작품과도 같은 풍부함을 가지고 잇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피카소가 이베리아 조각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잇다. 이 초상화에서 피카소는 그가 아닌 그 누군가가 문제라는 듯 자신의 얼굴을 가면처럼 그렸다. 이 작품의 강렬함과 거의 원시에 가까운 의고주의는 피카소가 몇 년 간, 어쩌면 지난 몇 달 간 겪은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머리손질>. 1906년. 파리 둥글고 단순한 형태와 달걀형의 얼굴 그리고 황갈색과 분홍색 계통의 색감 등, 이 작품은 고솔 시기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머리손질'은 그 시기에 피카소가 즐겨 그리던 주제였다. 피카소는 여성의 몸동작들이 지닌 우아함과, 이 친밀한 순간의 차분하고도 육감적인 분위기를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제3장

입체주의 혁명

 

1906년 말, 피카소는 스물다섯번째 생일을 맞았다. 피카소는 회화와 데생뿐 아니라 조각과 판화 분야에서도 널리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가 마티스를 만나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또 다른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의 내부에서 용트림하던 하나의 흐름이 서서히 분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흐름은 피카소가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작업 태도와 신념을 문자 그대로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소녀의 초상>. 1914년 여름. 아비뇽. 선명한 빛깔과 뛰어난 장식효과, 경쾌한 분위기를 보이는 이 그림은 당시에 피카소가 제작하던 콜라주와 색종이 기법을 눈속임 효과로 모방해 그린 것이다.

그레보 가면. 목재와 식물성 섬유로 만든 이 가면은 피카소의 소장품 중 하나이다. 피카소는 흑인예술을 '이성적인 예술'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표현한다는 것, 다시 말해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사유를 표현한다는 것이었다. 피카소에게는 이 가면들에 담긴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시기의 피카소 작품에서 우리는 이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조르주 브라크. 1910년 클리시가에 있는 피카소의 화실에서. 브라크와 피카소는 기이한 한 쌍의 친구였다. 그들은 서로 정반대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브라크는 단적으로 "피카소는 스페인인이고 나는 프랑스인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피카소가 동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원기왕성했던 반면 브라크는 정적이고 냉철했으며 두드러지지 않은 성격이었다.

조각난 처녀들의 몸

미술사가들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모든 현대미술의 시발점으로 평가한다. 이 그림에서 최초로 한 화가가 사실적인 모습과 단절하고 새로운 회화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나체화는 모든 화가들이 즐겨 다루던 주제이다. 19세기에 앵그르는 <터키탕>을 그렸고, 20세기 초에 세잔은 <목욕하는 여인들>(1)을 그렸다. 많은 소묘(2)를 통해 작품의 구성을 연구하면서,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몇 달이나 걸렸다.

<아비뇽의 처녀들>. 1903년. 여기에 나타난 여인은 두 유형으로 나뉜다. 왼쪽의 세 여인은 가장자리에 주름이 잡힌 커다란 눈을 가지고 가운데에 위치한 여인은 귀가 8자처럼 그려져 있고 얼굴은 정면인게 코는 옆으로 뉘여 있다. 피카소의 설명은 이렇다. "옆으로 그린 코요? 그건 의도적이었습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반드시 코라고밖에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오른쪽의 각진 형태를 한 두 여인은 줄무늬 섞인 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더욱이 그녀들의 얼굴은 대칭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위쪽 여인의 커다랗고 검은 눈은 정면을 향해 있지만 다른 눈은 3/4 각도로 옆을 보고 있다. 또한 아래쪽 여인은 등을 돌리고 앉은 자세에서도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아비뇽의 처녀들> 부분. 이 두 얼굴은 전혀 다른 두 유형을 보여 준다. 한 얼굴은 곡선으로, 다른 얼굴은 사선으로 그려져 있다.

<두 인물이 있는 풍경>. 1908년. 풍경 속에 두 명의 나체 인물이 놓여 있다.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 완벽하게 융합되어 있다. 그들의 육체는 마치 나무에 흡수된 듯하다. 경치와 인물은 모두 단순화된 기하학적인 양감으로 동일하게 처리되었다. 언젠가 세잔은 "회화는 무엇보다도 광학을 의미한다. 즉, 우리의 예술은 눈이 생각하는 것에서 소재를 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1908년경, 피카소는 아직 세잔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시기는 우리가 '세잔식 입체주의'라고 부르는 입체주의의 초기단계이기도 하다.

에바(마르셀 움베르). 1912년. 피카소는 에바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년 간 그녀와 함께 살았다.

<파이프, 유리잔, 스페이드의 에이스, 바스병, 기타, 주사위(아름다운 나의 여인)>. 1904년. 생생한 색체와 반점들 그리고 <소녀의 초상>에서와 같은 눈속임 효과를 이 정물화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을 그리던 시기, 에바를 깊이 사랑하고 있던 피카소는 당시 유행하던 <아름다운 나의 여인>이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그는 회화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노래하기 위해 작품 안에 악보를 삽입했다. 입체주의 시기에 피카소는 가장 진부하고 일상적인 사물들로 구성된 정물화들을 다수 제작하였다. 특히 선술집의 탁자 위에 굴러다니는 물건들, 예컨대 카드, 병, 파이프 등을 즐겨 그렸으며, 여성의 몸을 연상시키는 악기인 기타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1915년. 쉘세르가 화실에서 찍은 피카소의 사진. 때는 전쟁 중이었다. 이 사진은 에바가 병에 걸려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침울한 시기에 찍은 것이다. 매일 아침 피카소는 전철을 타고 화실과 환자의 침상 사이를 오가곤 하였다.

입체주의의 작은 입방체

입체주의란 1908년에서 1915년 사이에 피카소와 브라크가 주도했던 탐구방식을 말한다. 입체주의(cubism)라는 단어는 '입방체(cube)'에서 파생한 것으로 브라크의 풍경화를 보고 한 미술비평가가 사용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실제로 브라크의 풍경화에서는 집과 나무, 배경이 모두 입방체 모양이다. 20세기 예술의 주요한 발견인 입체주의는 점진적인 단계들을 거쳐 발전한다. 초기의 '세잔식 입체주의'의 뒤를 이어 '분석적 입체주의'가 등장하고, 다음에는 '콜라주', 마지막으로 '종이붙이기'와 '구성'이 등장한다.

 

<빵과 과일그릇이 있는 정물>(1, 위)과 그 부분(2, 가운데). 1908년. 모든 대상이 원통, 원추, 구 등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정면에서 본 탁자를 표현한 그림에서는 탁자의 아래쪽은 볼 수 없었다. 그런데 피카소는 탁자의 밑면에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렸다. 이렇게 해서 피카소는 시선의 각도라는 원칙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오르타의 공장>(3, 아래). 1908년. 표면은 밝고 짙은 결정면들로 분할된다. 공장건물은 입방체로 표현되고, 건물을 구성하는 상이한 면들이 중첩된다. 피카소는 배경과 대상을 동일한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다.

산산조각이 난 얼굴들

입체주의 화가들은 사물의 외관에만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 사물로부터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것, 즉 앞면과 옆면, 빛과 공간 속에서 차지한 위치,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등에도 관심을 두었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하나의 화폭에 모두 표현할 수 잇을까? 그것은 사물의 모든 면들을 한꺼번에 늘어놓음으로써, 그리고 그들을 서로 중첩시킴으로써 가능했다.

 

<페르낭드의 초상>(위). 1909년. 가까이 보면 얼굴이 마치 골절되어 도드라진 듯이 보인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이같은 평면의 유희는 이마의 양감과 음영을 재구성해 주고 있다. 여기서는 아직 얼굴의 윤곽선이 닫혀져 있다. 그러나 이듬해 피카소는 이 테두리마저 많은 부분으로 깨뜨린다.

 

<블라르릐 초상>(아래). 1910년. 결정면들의 좁다란 격자망을 통해 한 남자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다. 형태를 해체하며 피카소가 채택한 방식은 그를 더욱 극단화시켰다. 이때 한편으로는 회화의 매커니즘에 따르는 지적인 과정, 즉 선과 결정면으로 구성된 추상적인 격자망이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려야 할 모델이 있다.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긴장감을 준다. 형태를 존중해야 할 것인가?

노끈, 신문지, 비닐장판 : 콜라주의 탄생

콜라주의 새로운 체계는 문외한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곧 피카소와 브라크는 입체주의가 미학적이고 추상적이며 소수의 전문가에게 국한된 순수한 실천으로 변질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제 그들은 작품에 어느 정도 현실을 보증하는 실제 사물을 붙이기 시작했다. 먼저 브라크가 자신의 작품에 못을 도입하고는 못의 그림자를 함께 그려 넣었다. 그림이 그 못으로 벽에 걸려 있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1912년에 피카소는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을 제작했다. 이는 최초의 콜라주 작품으로 미술사에 기록된다.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 1912년. 등나무 의자를 그림으로 재현해서 의자라는 착각을 심어 주는 대신 피카소는 등나무 의자 무늬의 비닐장판을 한 조각 사용했다. 테두리로는 진짜  노끈을 사용했다. 그림의 내부에는 다양한 대상들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 상단에는 둥근 레몬 조각과 가리비 조개를 나타내는 삼각형이 놓여 있다. 투명한 물잔은 간략한 선으로 윤곽만을 그려 넣었다. 왼쪽에는 JOU라는 철자가 있는데, '신문(journal)'일 수도 '유희하다(Jouer)'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 그림 자체가 말의 유희이자 이미지의 유희이다. 위에는 담배 파이프 관과 담배통이 그려져 있다.

바이올린과 악보 : 종이붙이기와 구성

모든 종류의 재료를 이용하는 콜라주라는 결정적인 기법을 발명한 후, 브라크와 피카소는 종이붙이기에 착수했다. 신문조각, 색종이, 악보 등. 그들은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자르고 붙이고 구성했다. 종이붙이기 수법을 통해 색채가 다시 도입되었고 중첩된 여러 평면들에서 깊이감이 생겨났다. 그러나 피카소는 회화의 평면적 공간에 만족하지 못하고 용적을 가지고 있는 진정한 공간의 정복을 원하게 되었다.

 

<만돌린과 클라리넷>(1). 구성. 1913년. <기타>(2). 구성. 1912년. <바이올린>(3). 구성. 1915년. <바이올린과 악보>(4). 종이붙이기. 1912년.

 

<바이올린>(5). 1913년. 피카소는 화폭 위에 마분지로 된 상자를 붙였다. 그리고 상자에 길쭉한 틈을 내어 울림통을 표시했다. 그 옆에는 바이올린의 'f자 구멍'을 그려 넣었다. 종이붙이기를 한 '인조나무'는 바이올린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임을 시사한다. 바이올린의 형태는 신문지 바탕 위에 목탄으로 그렸고, 악기의 현은 흰색 종이띠 위에 표시했으며, 바이올린의 받침대는 화폭의 제일 위쪽에 그렸다. 이렇게 바이올린의 각 부분이 서로 다른 기법으로 나타나 있다.

 

제4장

명성으로의 길

 

1917년의 로마는 태양과 로마 시민들의 쾌활함과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소용돌이 장식으로 꾸며진 바로크풍의 기념물들, 경탄을 자아내는 성당 건물과 성당의 독방 기도실에서 빛을 발하는 대리석 조각들, 고대의 대광장, 미켈란젤로와 라파엘의 작품들, 피카소는 황홀경에 빠져 온종일 걸어다니다 베네토가 깊숙이 자리잡은 카페에 들어가 피곤한 다리를 쉬곤 했다. 그는 마치 공작새 꼬리의 수많은 눈을 가진 사람처럼 로마를 관찰했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올가의 초상>(위). 1917년. 피카소는 고전적이고 구상적인 양식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이 그림을 의도적으로 미완성인 채 남겨 두었다. 의자덮개가 종이붙이기를 한 자락 해놓은 것처럼 처리되어 있다. 아래는 발레극 《메르큐르와 퓰치넬라》를 위한 의상.

<에릭 사티의 초상>. 1920년. 당시 50세였던 사티는 피카소보다 15세 정도 연상이었고 자신의 음악만큼이나 기상천외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초상화가 제작되기 불과 몇 년 전부터 친구 드뷔시와 라벨의 도움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퍼레이드》의 무대장막. 1917년. 첫 상연부터 관객들은 분노했다. 낭만적인 발레를 애호하던 사람들은 《퍼레이드》를 혐오했다. 그러나 피카소가 그린 이 무대장막은 오늘날 피카소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새로운 친구 장 콕토의 캐리커처. 1917년. 파리.

<아폴리네르의 초상>. 1916년. 피카소는 군복을 입은 시인 친구의 모습을 한번의 필치로 그려 냈다. 기욤 아폴리네르는 이때 전쟁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이 그림에서 그는 전선에서 입은 상처를 싸맨 붕대 위에 군모를 눌러쓰고 있다. 피카소의 작품 전시회에 즈음하여 아폴리네르는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흔히 피카소의 작품이 때이른 환멸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 생각은 그 반대이다. 나에겐 그가 모든 것에 매혹당해 자신의 부인할 수 없는 재능을 달콤함과 끔찍함 그리고 비천함과 우아함을 뒤섞는 어떤 공상에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변을 달리는 여인들>. 1922년. 해수욕장의 두 여인은 마치 거인과도 같다. 그들의 발은 지축을 뒤흔드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들은 시간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에 취한 듯, 발레리나와 같이 우아하게 도약하여 달리고 있다. 1920년대에 피카소는 정기적으로 바다를 찾았다. 그곳에서 해수욕하는 여인들의 육체에 매혹된 그는 그 몸들을 괴이하게 변형된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이 고무수채화는 콕토와 다리우스 미요의 발레극 《푸른 열차》의 무대장막으로 사용되었다. '푸른 열차'는 휴가열차라는 의미이다. 이후에 피카소는 잠시 로마에 체류하였다. 그곳에서 피카소는 로마 제국 시대의 조각품들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육상선수, 전사, 여신들의 조각상들이 지닌 장엄함은 고귀함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 인체를 바라보는 시각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 시기 피카소의 삶에 등장한 연극이라는 요소는 고대 로마 예술품들의 기념비적인 형태와 결합되었다.

 

제5장

천재의 고독

 

피카소가 고전적인 주제들을 고전적인 방식으로 그린 지 몇 년이 지났다. 가족인 올가와 파울로를 모델로 그린 많은 초상화들, 이제 이 고전풍 그림에 대해서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1925년 6월에 공개된 작품 앞에서 비평가들은 모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진 이 작품은 <무용>이었다.

<무용>(위). 1925년. 마음대로 휘어진 몸, 요란한 색채, 축약된 움직임을 보이는 새 인물이 그려져 있다. 한 여자는 고개를 젖히고 가슴 한쪽을 공중에 드러낸 채 다리 하나를 들고 있다. 또 한 여인은 십자가에 박힌 듯 두 팔을 들고 있다. 측면상으로 그려진 남자는 못 모양을 한 손으로 여인의 손을 잡고 있다. 아래는 만 레이가 1937년에 찍은 피카소의 사진.

1924년 앙드레 브르통은 <제1차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초현실주의 시의 근본을 제시했다. 그것은 무의식의 탐구와 더불어, '현실'의 구속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언어를 탐색한다는 것이었다.

<기타>. 1926년. 구멍난 삼베천, 가느다란 실, 못, 신문지를 잘라 만든 띠들, 이것들로 기타가 하나 만들어졌다. 이 작품의 의도는 극히 공격적인 것이어서, 피카소는 작품 주위에 칼날을 붙이려고까지 생각하였다. 작품에 손을 대려는 사람의 손가락을 끊어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청동제 광대상과 여인상

피카소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조각가이다. 그는 조각의 모든 형태들을 새롭게 창안했으며 수많은 재료와 새로운 기법을 실험했다. 그는 석회를 주물했고 나무를 깎았으며 마분지와 함석을 자르고 접었다, 그리고 우연히 찾아낸 사물을 조합했다. 이리하여 피카소는 현대조각의 길을 열었다.

 

1909년에 피카소는 전통적인 조각의 양감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그는 각이 진 수많은 결정면들로 양감을 분해했다. <페르낭드의 두상>(1, 위).

1905년에 제작된 초기작품의 하나인 <광대>(2, 가운데)는 즐겨 표현하던 곡예사의 테마를 가지고 고전적인 수법으로 제작한 환조이다. 처음에 이것은 친구인 막스 자코브의 흉상으로 계획되었다.

1930년대에 피카소는 형태나 짜임새로 선택된 재료나 대상을 주형으로 각인을 뜬 후, 그것으로 모델링을 하는 방식을 창안했다. 그는 석회를 사각형 통에 부은 후, 구멍을 세 개 뚫어 머리를 만들었다. 주름진 종이 안에다 석회를 부은 것은 옷이 되었다. 이렇게 만든 옷의 주름은 건축물 기둥 세로홈을 연상시킨다. 잎맥이 모두 드러난 나뭇잎의 각인은 <나뭇잎 여인>(3, 아래)에 생명의 떨림을 부여한다.

대형 목제 수영객들

피카소는 물건을 버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끈, 깡통, 못, 중고품 등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모았다. '언젠가는 다 쓰일 데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잡일꾼이자 천부적인 '넝마주의'였던 그는 가장 진부하고 일상적인 사물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사물은 그의 천재성을 통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신했다.


<해수욕객들>. 1956년. 이들은 여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잠수부, 손을 모은 남자, 분수(噴水)-남자, 어린이, 팔을 벌리고 있는 여자, 젊은 남자 등이다. 이 작품은 피카소의 유일한 군상 조각품이다. 긴 기하학적 모양을 한 인물들은 다듬지 않은 판자들을 조합하여 제작했다.(피카소 미술관에는 이 작품의 청동제판이 소장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침대다리, 빗자루대, 액자틀 등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판자 위에는 인체의 해부학적 특징들이 삽입되어 그려져 있다. 판판하고 단순한 형태만을 가지고서도 피카소는 표현력과 생명력이 넘치는 인물들을 창조해 낸 것이다. 피카소가 제시한 인물들의 연출에 따르면, 잠수부와 손을 모은 남자는 방파제 위에 서 있고 팔을 벌리고 있는 여자와 젊은 남자는 다이빙대 위에, 그리고 분수-남자와 어린이는 바닷물 속에 있다.

조합해 만든 조각품

1941년부터 조각은 또다시 피카소에게 가장 중요한 분야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한 번 그는 새로운 혁신을 가져왔다. 그는 쓰레기 하치장 등에서 주워 모은 잡다하고 기묘한 잡동사니들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자전거 안장과 녹슨 핸들이 생명력 넘치는 황소 머리로 둔갑하고, 고철조각이 품위 있는 커다란 새로 변신했다. 다시 한번 피카소는 눈에 띄는 노력 없이 마술 같은 변신을 보여 주었다.

<염소>(위). 1950년. 종려나무 잎이 염소의 등이며, 부풀어오른 염소의 배는 버드나무 바구니로 만들었다. 나무와 고철조각이 염소 다리로, 철사가 꼬리로, 포도나무 그루터기가 뿔과 수염으로 바뀌었다. 염소의 귀는 마분지로, 흉곽은 통조림 깡통으로, 젖통은 두 개의 도자기로 만들었다. 반으로 접은 냄비 뚜껑이 성기이며, 금속 파이프를 잘라 낸 것이 항문이다. 이 모든 요소는 회반죽으로 뭉쳐져 하나가 되었으며, 끝으로 염소에 청동을 입혔다.

<줄넘기하는 소녀>(아래). 1950년. 바구니는 소녀의 몸, 과자를 찍는 틀은 꽃, 주름무늬 마분지는 소녀의 머리이다. 이 작품의 발은 바닥에 닿지 않는다. 피카소는 말했다. "줄넘기하는 작은 소녀를 어떻게 공중에 띄워 둘 수 있을까? 나는 줄넘기 줄을 바닥에 고정하기로 했다."

함석판 자르기

피카소가 조각예술에 마지막으로 기여한 바는 함석조각들을 자르고 채색하여 만든 60년대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수욕객들>에서 시작된 평면조각의 원칙을 접기 과정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피카소는 계획한 그림에 맞추어 종이를 잘랐다. 그리고 몇몇 면을 접어서 인물들을 세운 후, 거기에서 생긴 각들로 입체감을 가늠해 보았다. 다음에는 종이나 마분지로 만든 이 모형에 맞추어 함석판을 잘라 작품을 완성했다.

<축구선수>. 1961년. 둥글고 충만한 형태와 경쾌한 색감으로, 공을 차기 직전에 가볍게 몸을 날리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는 것이 옷, 얼굴, 발, 손 등을 도식적으로 배치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피카소는 일생을 통해 회화와 조각을 밀접하게 관련지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각에 이르기 위해서는 회화를 자르기만 하면 된다."

<마리 테레즈 발터>(위). 1929년 여름 디나르에서 찍은 사진. 아래는 1931년 작품인 <여인 흉상>. 이마의 연장선에 커다란 코가 있는 이 청동 조각상은 마리 테레즈를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은 부아줄루에서 피카소가 조각 작업실로 개조한 천장이 높은 마구산에서 제작한 것이다. 피카소는 이 새로운 모델의 둥글고 충만한 형태와 관능적인 우아함에 물리는 법 없이 수많은 조각과 회화, 판화를 통해 그녀의 모습을 찬양했다.

<조각가의 휴식>. 동판화 1931년. 이 작품은 <조각가의 작업실> 연작의 일부이다. 몇 년 전부터 피카소는 볼라르에게 일러스트레이션 작품들을 제공한다는 계약을 맺고 있었다. 1937년까지 지속된 10년 간의 계약기간 동안 피카소는 100여 점의 판화와 동판화를 넘겨주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볼라르 연작>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이다.

<막사를 열고 있는 해변의 여인>. 1928년. 1927년에서 1929년 사이에 피카소의 화폭에는 기이하게 뒤틀린 형태의 수수께끼 같은 여인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분해된 듯한 여인들의 몸은 그로테스크하거나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피카소의 작품들 가운데 이 시기의 것들은 가장 널리 알려진 동시에 가장 큰 파문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회화에서 가장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주제인 여성의 아름다움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인형을 안고 있는 마이야>. 1938년. 여기에서 마이야의 눈은 하나는 정면을, 다른 하나는 측면을 보고 있다. 옆모습을 하고 있는 코에는 두 개의 콧구멍이 있고, 입은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입체주의 시기와 마찬가지로, 피카소는 마이야의 모습을 동시에 두 개의 각도에서 그리고자 했다. 변형된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이야의 모습을 잘 알아볼 수 있다. 마이야는 피카소와 마리 테레즈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당시 세 살이었다. 이 혼돈스러운 그림에서 단지 인형만이 전통적인 수법으로 그려져 있다.

<프랑코의 망상과 기만>. 피카소는 1937년에 <프랑코의 망상과 기만>이라는 시가 삽입된 두 개의 판화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프랑코의 폭정에 대한 가차없는 저항을 의미했다. 여기서 스페인의 독재자는 무조건 밀고 들어가는 전쟁광의 모습으로 그려져 잇다. 사건들이 마치 만화처럼 직사각형  속에 넣은 일련의 그림을 통해 표현된 가운데 다음과 같은 고발의 글이 함께 실렸다. "어린이들의 외침, 부녀자의 외침, 새들의 외침, 기둥과 돌들의 외침, 벽들의 외침, 침대와 의자와 커튼과 항아리의 외침……." 고국을 갈가리 찢어 놓은 비극 앞에서 피카소가 보인 격렬한 반응은 그가 진정한 스페인 사람으로 남아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게르니카>

<게르니카>(1). 1937년. 위의 단순한 소묘들이 피카소의 회화작품 중 가장 강렬한 <게르니카>를 탄생시켰다는 사실을 상상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게르니카>는 파시즘의 공포 앞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의 외침이자 저항의 상징이다. 1937년 5월 1일부터 6월 말까지 피카소는 45점의 크로키를 제작했다. 황소, 불을 든 여인, 말 등 그림의 주된 요소는 첫 소묘에 이미 다 나타나 있다. 피카소가 이 작품을 통해 표현한 것은 전쟁, 맹목적인 폭력, 어린아이들의 죽음, 어머니들의 고통 등 모든 인류에 공통된 비극이다. 피카소는 투우 장면, 말, 암흑과 야만성의 상징인 황소 등 자신의 세계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 비극을 말하고자 했다. 전체 색조는 초상, 장례의 그것이다. 피카소는 의도적으로 물감을 흰색과 검정색으로 한정했다. 형태는 마치 포스터에서 보는 것처럼 납작하고 단순화되어 강한 극적 효과를 주고 있다. "어떻게 예술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습니까? 냉담한 상아탑에 갇혀 다른 사람들이 그리도 풍부히 제공하는 삶을 외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닙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회화는 아파트나 치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적과 싸우며 공격과 수비를 행하는 하나의 전투무기입니다."

 

미노타우로마키(Minotauromachy)는 미노타우로스(Minotauros)와 투우(Toraumachy)를 합성해 피카소가 만든 말이다. <미노타우로마키>(1935)라는 이 유명한 판화작품에서 미노타우로스는 촛불을 든 소녀를 향해 위협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장면의 배경은 해변이다. 긴 턱수염을 한 남자는 사다리 위로 도주하고 있다. 중앙에 있는 암말은 칼을 쥔 여자 투우사를 등에 태운 채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비둘기와 함께 두 명의 젊은 여성이 이 기이한 장면을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고 있다. 이 작품은 미노타우로스로 의인화된 악의 힘과 밤의 어두움, 소녀로 대표되는 선과 빛, 순진함 사이의 투쟁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의 미노타우로스는 크레타 여왕 파시파애와 바다에서 온 황소 사이에서 태어난 괴물로, 인간의 몸과 황소 머리를 가진 반인반수이다. 피카소는 이 신화에 매혹되어 여기에 자신의 요소라 할 수 있는 인간과 동물 간의 필사적이며 비극적 투쟁인 투우를 결합시켰다. 이때 동물은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강한 힘을 상징한다. 피카소 자신은 종종 스스로를 미노타우로스에 비유하기도 했다. "내가 걸어온 길을 종이 위에 모두 표시하고 그 점들을 이어 보면 그것은 미노타우로스의 형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6장

방황과 좌절

 

1939년은 두 개의 겹쳐진 얼굴, 두 개의 겹쳐진 존재 속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마리 테레즈와 도라였다. 피카소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의 작품 속에서 이 두 얼굴은 서로 대치되고 중첩되었다, 1월의 어느 날에는 똑같은 포즈를 취한 모습으로 두 여인의 초상화를 그리기까지 했다. 깊고 깊은 표정을 가진 도라의 얼굴은 피카소를 매혹시켰다. 피카소는 울면서 애원하는, 눈물자국이 난 얼굴을 한 그녀의 모습을 수없이 그렸다.

<애원하는 여인>(위). 1937년. 작달막하고 괴물 같은 몸에 겁에 질린 표정을 한 여인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다. 이 여인은 스페인 내전에서 상처를 입은 어머니들과 과부들의 고통을 상징한다. 아래는 1941년의 도라 마르.

<앙티브에서의 밤낚시>. 1939년. 이 작품은 <게르니카> 다음으로 큰 대작이다. 1939년 여름. 피카소는 집어등을 밝힌 밤낚시라는 주제로 항구의 일상생활을 담았다. 작은 배의 이물 앞에 놓인 대형 램프는 불빛을 발하면서 물고기를 유인한다. 한 어부가 사지창으로 사각형 모양의 생선을 찍고 있다. 다른 어부는 손으로 물고기를 낚아채려고 물 위로 위태롭게 상반신을 내밀고 있다. 이 장면을 구경하고 있는 두 여인은 도라 마르와 앙드레 브르통의 아내 자클린 랑바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부두를 따라 자전거를 끌고 있다. 지중해의 밤은 어두운 청색과 보라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인물들의 얼굴과 몸은 폭력적으로 왜곡되어 있으며, 그림은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결정면들로 분할되어 있는 듯하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녀들은 전쟁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피카소의 용어로 물고기와 가재류는 폭력과 잔인성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새를 잡은 고양이>. 1939년. 세계대전의 위협이 프랑스 전역을 내리덮고 있었다. 피카소는 한번도 전쟁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그린 적이 없다. 그러나 전쟁 때 그린 그림에는 전쟁이 몰고온 폭력과 공포가 가득 차 있다. 가장 진부하고 일상적인 소재들, 예컨대 고양이나 새들까지도 견디기 어려운 잔혹함의 이미지로 변형되어 있다.

자작 희곡 《꼬리 잡힌 욕망》의 속표지를 위한 일러스트레이션. 1941년.

<양을 안고 있는 사나이>. 청동. 1943년. 1950년에 피카소는 발로리스 시청에 이 조각상을 기증했다. 이 작품을 발로리스 시내의 작은 광장에서 볼 수 있다.

<태양의 여인 프랑수아즈>. 1946년.

피카소, 프랑수아즈 질로, 피카소의 조카 그자비에 빌라토. 골프후안의 해변에서. 1948년 여름.

올빼미의 이글거리는 눈은 피카소의 눈이다.

피카소의 컬렉션

"화가란 수집가입니다. 타인들로부터 좋아하는 부분을 취해 스스로 그린 그림을 수집하지요."

피카소

세잔의 <에스타크의 바다>(1). 1879년. 세잔의 회화는 입체주의의 시발점이다. "세잔에 대해 아느냐고요? 그는 나의 유일한 스승입니다. 나는 수년 간 그의 그림을 연구했습니다."

마티스. <오렌지가 있는 정물>(2). 1912년. 마티스는 피카소가 존경하던 경쟁자였다. 피카소는 평생 마티스와 폭넓은 대화를 나눴다. 마티스가 색채, 조화, 충만감, 행복이었다면, 피카소는 데생, 분해, 갈등, 비극이었다.

루소. <여인의 초상>(3). 1895년. 이 걸작은 피카소가 1908년에 한 고물상에서 발견한 것이다. 두아니에 루소의 신선한 시각은 피카소와 친구들에게 중대한 방향을 제시했다.

여인의 두상들

서로 다른 쪽을 보고 있는 눈, 옆으로 누운 코, 삐뚤어진 턱, 뾰족하게 과장된 얼굴, 그로테스크한 모자, 예를 들어 사람들은 뭔가 변형되고 왜곡되어 있는 것을 보면 "피카소 작품 같군."하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피카소의 작품을 보는 시각이 그러하다. 그런데 왜 피카소는 이런 변형을 준 것일까? 피카소는 대체 왜 인간의 얼굴을 흐트러뜨리고 아래위를 거꾸로 뒤집어 놓으면서 즐거워한 것일까?

<마리 테레즈의 초상>(위). 1937년. 언제나 마리 테레즈의 모습은 차고 부드러운 색으로 그려져 있다. 마리 테레즈는 푸른색과 녹색, 황색과 백합색을 사용해 둥글고 조화로운 선과 아라베스크한 문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피카소는 독서를 하거나 잠이 들어, 자신의 시선에 전신을 맡긴 마리 테레즈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줄무늬 모자를 쓴 여인의 흉상>(아래). 1939년. 피카소가 그린 초상화는  여인들 하나하나에 대한 시각을 담고 있다. 우스꽝스러운 모자와 함께 여인들은  희극적이고 가련하고 비극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여인의 얼굴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문양, 특히 줄쳐진 모자의 모티브를 완전히 흡수해 버린 듯하다.

울고 있는 여인

피카소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최우선 문제였다. '여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다음 문제였다. 피카소는 형태, 선, 색채를 변형시킨 다음에 전체적인 조화를 부여했다. 그는 얼굴이나 몸을 하나의 구조물로 여겼다. 즉, 코, 귀, 목 등을 마음에 드는 장소에 배치하는 정물화로 생각한 것이다.이러한 변형이나 왜곡된 형태들은 표현적인 효과를 목적으로 한다.

<울고 있는 여인>. 1937년. 강렬한 감정에 휩싸이거나 폭력적인 충격을 받을 때 육체적이고 가시적인 변형을 체험한다. 많은 표현들이 변형을 증명해 준다. '눈이 튀어나올 것 같다.' '입이 얼어붙는 것 같다' '얼굴이 눈물로 푹 팬다'하는 말이 그것이다. 피카소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이런 감정들이었다. 전쟁중에 피카소가 그린 초상화들은 모두 '전쟁의 공포'를 반영하고 있다.

<도라 마르의 초상>. 1937년. 그녀는 종종 검은색이나 붉은색 등의 강렬한 색채와 함께 뾰족한 형태로 표현된다. 붉은색으로 칠한 긴 손톱과 둥글면서도 강한 의지를 보이는 턱, 지성과 생기로 반짝이는 두 눈이 인상적이다. 도라 마르의 얼굴은 전쟁중에 있는 인간의 고통을 대변해 준다. 그녀는 '우는 여인' 즉 고통으로 뒤틀린 여인의 상징이었다.

여인과 꽃

피카소는 모델의 개성이나 특징만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모델이 자기에게 불어넣는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모든 여인은 그에 따른 특정한 양식에 대응한다. 왜곡된 형태는 화폭에 모든 것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즉, 여인의 정면상, 측면상, 3/4상 등을 동시에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폭은 하나밖에 없었고, 따라서 모든 부분을 전부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얼굴을 비틀어야만 했다.

<자클린의 초상>(위). 1954년. 그리스풍 옆모습을 지닌 자클린. 이마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는 곧은 코와 아몬드 열매같이 깊이 팬 커다란 두 눈을 가진 자클린은 완벽한 지중해 여인의 전형이었다. 피카소는 터키 의상을 입고 동양식으로 무릎을 꿇은 그녀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이 초상화에서 피카소는 얼굴선의 엄격한 순수성을 표현하기 위해 얼굴을 구성하는 면들을 기하학적으로 처리했다.

<꽃여인>(아래). 1946년. 프랑수아즈 질로는 꽃여인, 해여인을 상징했다. 피카소는 이 특징을 더욱 강조하여, 꽃잎 같은 풍성한 머리채는 빛을 발하며 둥글게, 만개한 가슴을 지탱하는 허리는 꽃줄기로 표현했다.


제7장

영광의 나날


라칼리포르니는 칸의 높은 지대에 위치한 별장으로 20세기 초엽에 벨에포크(Belle Epoque) 양식으로 지어진 거대한 집이었다. 통풍이 잘되는 방들은 사방에서 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유리창들이 있어 매우 밝았다. 하지만 힘든 시기였다. 1955년 초여름, 피카소의 가장 큰 소망은 무분별한 질문들을 해대는 기자들과 대중을 피하는 것이었다.

<터키 의상을 입은 자클린의 초상>(위). 1955년. 피카소는 자클린이 들라크루아의 작품 <알제리의 여인들> 속에 그려진 하렘의 여인 하나와 닮았다고 생각하여 그녀를 이렇게 표현했다. 아래는 1950년대의 피카소. 투우장면을 그리고 있다.

<알제리의 여인들>(위). 들라크루아. <들라크루아의 알제리의 여인들 주제에 의한 작품>(아래). 피카소. 1955년.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모방'한 이 작품에서 피카소는 구성과 인물은 그대로 고수했으나 그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지난 시대 대가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은 19세기와 20세기 작가들을 일생의 어느 한 시기 동안 사로잡던 주제였다. 마네와 세잔 같은 화가들, 프로코피에프나 스트라빈스키 같은 음악가들, 콕토 같은 시인들이 그러했다. 이러한 탐구의 최종목표는 항상 공통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즉, 그들은 고전적인 교훈에 비추어 스스로를 평가하고 그것을 더욱 잘 이해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넘어서자는 것이었다. 피카소도 그의 생애 마지막의 몇 해 동안 과거와의 호기심 어린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들라크루아의 <알제리의 여인들>을 주제로 한 14개의 변형 작품,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를 주제로 한 44개의 작품,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주제로 한 27개의 작품을 제작했다.

1955년. 피카소는 새로운 거주지로 옮겼다. 칸에 위치한 저택 라칼리포르니였다. 그는 거대한 거실을 화실로 꾸미면서 전적으로 바로크적이며 그림으로 가득 찬 세계를 만들었다. 수많은 그림과 조각, 가구 등 피카소가 사랑하던 물건들이 곳곳에 쌓여 있는 라칼리포르니는 말 그대로 창고 같았다. 피카소는 이 화실을 '나의 내면 풍경'이라고 불렀으며, 이 장소를 소재로 15점에 달하는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의 가운데에는 이젤에 걸린 백색의 캔버스가 놓여 있다. 오른쪽에는 터키 의상을 입은 자클린의 초상화 습작이 보이고, 왼쪽에는 마름모꼴의 소형 조각인 <여인의 두상>과 마로크산(産) 접시가 보인다. 피카소는 창문 가장자리의 잘라 낸 듯한 형태를 전체작품의 구성에 리듬을 주는 장식적인 요소로 사용하고 있다.

엑상프로방스 가까이에 자리잡은 보브나르그성. 세잔이 살았던 이곳에 피카소는 1958년에서 1961년까지 거주했다.

<모성>. 1971년. '모성'은 종종 강한 추진력으로 피카소를 찾아오는 주제이다. 그 자신 67세에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되었던 피카소는 수많은 작품을 통해 모성을 표현했다. 그리고 인생의 끝에 다다른 90세가 되어 그는 다시 한번 새로운 회화기법을 창안했다. 흐르는 물처럼 간략한 형태를 빠르고 분명한 붓놀림으로 그리는 것이다. 색채는 더 많이 사용되었다. 소홀한 듯 잘 다듬어지지 않은 특징은 실제로는 새로운 생명력을 말해 주는 것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피카소의 탐구는 회화에서의 좀더 큰 자유를 상징한다.

"나는 찾지 않는다. 발견할 뿐이다."

피카소


"우리는 결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찾는 것을 멈출 수 없다."

피카소



피카소와 프랑수아즈 질로. 발로리스에 있는 집 라갈루아즈에서의 한때. 1951년.

칸바일러와 피카소. 1960년대. 라칼리포르니에서.

밤의 정경을 찍고 있는 브라사이. 1930년경.

엘뤼아르의 시집 《비옥한 눈》에 실린 일러스트레이션. 피카소 작.

A PABLO PICASSO

 

 

I

 

Les uns ont inventé l’ennui d’autres le rire

Certains taillent à la vie un manteau d’orage

Ils assomment les papillons font tourner les oiseaux en eau

Et s’en vont mourir dans le noir

 

Toi tu as ouvert des yeux qui vont leur voie

Parmi les choses naturelles à tous les âges

Tu as fait la moisson des choses naturelles

Et tu sèmes pout tous les temps

 

On te prêchait l’âme et le corps

Tu as remis la tête sur le corps

Tu as percé la langue d l’homme rassasié

Tu as brûlé le pain bénit de la beauté

Un seul cœur anima l’idole et les esclaves

 

Et parmi tes victimes tu continues à travailler

Innocemment

 

C’en est fini des joies greffées sur le chagrin.

 

 

II

 

Un bol d’air bouclier de lumière

 

Derrière ton regard aux trois épées croisées

Tes cheveux nattent le vent rebelle

Sous ton teint renversé la coupole et la hache de ton front

Délivrent la bouche tendue à nu

Ton nez est rond et calme

Les sourcils sont légers l’oreille est transparente

 

A ta vue je sais que rien n’est perdu.

 

 

III

 

Fini d’errer tout est possible

Puisque la table est droite comme un chêne

Couleur de bure couleur d’espoir

Puisque dans notre champ petit comme un diamant

Tient le reflet de toutes les étoiles

 

Tout est possible on est ami avec l’homme et la bête

A la façon de l’arc-en-ciel

 

Tour à tour brûlante et glaciale

Notre volonté est de nacre

Elle change de bourgeons et de fleurs non selon l’heure mais selon

La main et l’œil que nous nous ignorions

 

Nous toucherons tout ce que nous voyons

Aussi bien le ciel que la femme

Nous joignons nos mains à nos yeux

La fête est nouvelle.

 

 

IV

 

L’oreille du taureau à la fenêtre

De la maison sauvage où le soleil blessé

Un soleil d’intérieur se terre

 

Tentures du réveil les parois de la chambre

Ont vaincu le sommeil.

 

 

V

 

Est-il argile plus aride que tous ces journaux déchirés

Avec lesquels tu te lanças à la conquête de l’aurore

De l’aurore d’un simple objet

 

Tu dessines avec amour ce qui attendait d’exister

Tu dessines dans le vide

Comme on ne dessine pas

 

Généreusement tu découpas la forme d’un poulet

Tes mains jouèrent avec ton paquet de tabac

Avec un verre avec un litre qui gagnèrent

 

Le monde enfant sortit d’un songe

 

Bon vent pour la guitare et pour l’oiseau

Une seule passion pour le lit et la barque

Pour la verdure morte et pour le vin nouveau

 

Les jambes des baigneuses dénudent vague et plage

Matin tes volets bleus se ferment sur la nuit

Dans les sillons la caille a l’odeur de noisette

Des vieux mois d’Août et des jeudis

Récoltes bariolées paysannes sonores

Ecailles des marais sécheresse des nids

 

Visage aux hirondelles amères au couchant rauque

 

Le matin allume un fruit vert

Dore les blés les joues les cœurs

Tu tiens la flamme entre tes doigts

Et tu peins comme un incendie

 

Enfin la flamme unit enfin la flamme sauve.

 

 

VI

 

Je reconnais l’image variable de la femme

Astre double miroir mouvant

La négatrice du désert et de l’oubli

Source aux seins de bruyère étincelle confiance

Donnant le jour au jour et son sang au sang

 

Je t’entends chanter sa chanson

Ses mille formes imaginaires

Ses couleurs qui préparent le lit de la campagne

Puis qui s’en vont teinter des mirages nocturnes

 

Et quand la caresse s’enfuit

Reste l’immense violence

Reste l’injure aux ailes lasses

Sombre métamorphose un peuple solitaire

Que le malheur dévore

 

Drame de voir où il n’y a rien à voir

Que soi et ce qui est semblable à soi

 

Tu ne peux pas t’anéantir

Tout renaît sous tes yeux justes

 

Et sur les fondations des souvenirs présents

Sans ordre ni désordre avec simplicité

S’élève le prestige de donner à voir.

Paul Eluard, in Cahiers d'Art n°3-10, 1938


1941년. 친구들과 함께한 《꼬리 잡힌 욕망》의 낭독회. 피카소는 중앙에 서 있다. 그의 오른쪽으로는 자니 드 캉팡, 루이즈 레리, 피에르 레베르디, 갈라의 딸, 세실 엘뤼아르, 라캉 박사가 있고, 그의 왼쪽으로는 발렌틴 위고와 시몬 드 보부아르가 보인다. 장 폴 사르트르, 미셀 레리 그리고 장 오비에는 앉아 있다. 알베르 카뮈는 쭈그린 모습이다.

《퍼레이드》의 등장인물인 파리의 매니저(Manager of Paris).

《퍼레이드》의 무대장막 위에 앉아 있는 피카소와 일꾼들.

1953년 12월 27일 《뤼마니테》지 제1면을 위한 일러스트레이션.

1953년에 피카소가 제작한 스탈린의 초상화는 프랑스 공산당 내부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림의 기법이 너무 공상적이라는 것이었다.

1906년 바르셀로나에서.

1916년 쉘세르가에서.

1910년경 클리시가에 있는 화실에서.

애견 카스백과 함께 골프후안의 해변에서.

당나귀 위에 앉은 파울로. 1923년.

1937년 그랑오귀스탱가의 화실에서 <게르니카>를 그리고 있는 피카소.

투우 관람. 피카소 왼쪽에 장 콕토, 오른쪽에 자클린 로크, 뒤에 팔로마, 마이야, 클로드가 있다.

1951년 라갈루아즈에서.

골프후안의 해변에서 피카소와 클로드.

1967년 라칼리포르니에서 피카소와 자클린 로크.

 

 

 

 

posted by 황영찬
2014. 10. 25. 09:03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98 HOW TO READ 니체(Friedrich Nietzsche)

 

키스 안셀 피어슨 지음 · 서정은 옮김

2007, 웅진지식하우스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31814

 

082

하66ㅇ v. 4

 

니체는 읽기가 깊이 있는 사고를 요구하는

예술의 일종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느림의 친구

혹은 느리게 읽기의 교습자같이 비시대적이고 친숙하지 않은

표현을 써서 자신을 표현했다. 우리는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다.

느낌은 더 이상 가치를 갖지 않으며 모든 것이 서둘러 달려가려고 한다.

니체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알고 싶어하는지,

또 그 과제를 위해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바로 이것이 니체를 읽는 데 필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즉 그를 읽을 시간을, 그를 "잘" 읽을 수 있는

시간과 관심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HOW TO READ

●  ●  ●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도발적인 작가와 사상,

그들의 글을 원전으로 직접 만난다

 

언제나 우리를 도발하고 고양시키는

위험한 천재, 니체

 

행복한 삶을 위한 지식과 기술의 전파자로서의 니체, 삶의 허무에 대한 처방전을 제시하는 의사로서의 니체, 사유의 명랑함과 지식의 즐거움을 과시하는 광대로서의 니체, 우리는 그의 외침에 반응하고 그의 처방전을 접수하며 그의 명랑함에 감염된다.

저자 키스 안셀 피어슨은 '영원회귀'나 '초인'처럼 가장 유명하지만 또한 매우 자주 오해되어온 개념들을 재조명하고, 아름다움, 진리, 기억 등의 핵심적 주제에 대한 니체 철학의 도전적 성격을 밝혀낸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즐거운 지식》《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덕의 계보학》 등의 원전 텍스트로 니체의 독자적 철학 스타일과 그의 사유가 발전해간 과정을 직접적으로 들여다본다.

 

HOW TO READ 시리즈

위대한 사상, 세기의 저작을 원전으로 직접 만나는 특별한 기회, HOW TO READ 시리즈, 이 시리즈는 세계적 석학들의 안내를 받으며 사상가들의 저작 중 핵심적인 부분을 직접 읽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읽는 척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제대로 읽을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우리시대 교양인을 위한 고품격 마스터클래스가 될 것이다.

 

키스 안셀 피어슨  Keith Ansell Pearson

영국 위릭대학교 철학과 교수이자 대학원장, 저명한 국제 니체 학회지의 편집자다. 하이데거, 들뢰즈, 푸코, 하버마스 등 20세기 철학자들에게 니체가 미친 영향에 대해 특히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싹트는 생명 :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등이 있다.

 

서정은

연세대학교에서 비교문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동대학원 영문과 박사 과정에 있다. 현재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 《역사의 요동》이 있다.

 

차례

 

■ HOW TO READ 시리즈를 열며

■ 저자 서문 : 느리게 읽기를 가르치는 자, 니체

 

1 디오니소스, 예수를 만나다

: 《비극의 탄생》 17

2 절대적 진리도 영원한 사실도 없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2

3 늙은 신은 죽었다

: 《즐거운 학문》 343

4 니체, 진리를 의심하다

: 《즐거운 학문》 110

5 기억과 망각의 연금술

: 《도덕의 계보학》 제2논문, 1

6 삶은 여성이다

: 《즐거운 학문》 339

7 그 어떤 인간들보다 높이

: 《즐거운 학문》 341

8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 3

9 니힐리즘의 끝, 영원회귀

: 《도덕의 계보학》 제3논문, 28

10 나의 말을 이해했는가

: 《이 사람을 보라》 서문 1, 2

■ 주

■ 추신

■ 니체의 생애

■ 함께 보면 좋은 자료

■ 역자 후기 : 진정한 니체 읽기를 만나다

 

1

디오니소스,

예수를 만나다

: 《비극의 탄생》 17

 

니체는 세계를 대립되는 힘들의 비극으로 이해했다.

세계에 구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는 그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어떤 연구자의 지적처럼 니체는 심리적 개념들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 적용시켰다.

철학은 오직 이 비극적 지혜에 관련된 학문인데 이 지혜는 세계를

디오니소스적 어둠과 아폴론적인 빛의 근원적 투쟁으로,

다시 말해 세계를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형태 없는 심연인 삶의 토대와

개별자들을 만들어내는 빛의 영역 간의 근원적 투쟁으로 바라보는 총찰에서만 나올 수 있다.

 

2

절대적 진리도

영원한 사실도 없다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2

 

니체는 어떻게 무언가가 그것과 모순되는 것에서 생겨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형이상학적 철학'과 '역사적 철학'을 대비시킨다.

역사철학은 더 이상 자연과학으로부터 자산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철학과 달리 세계에는 어떤 대립물도 존재하지 않으며

대립물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하나의 승화 과정에 속한 현상임을 입증하고자 노력한다.

 

3

늙은 신은 죽었다

: 《즐거운 학문》 343

 

우주를 살아 있는 유기체나 기계로 보는 것, 사실은 (인간적) 필요만이 존재하는

우주에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죽음의 예외적 상황일 뿐인 삶을 죽음에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것,

신에 대한 허구를 물질에 대한 숭배로 대체하는 것 등이 모두 경계해야 할 신의 그림자들이다.

니체는 신의 그림자가 더 이상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하도록 둘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자연으로부터 신을 제거하는 행위였다.

 

4

니체, 진리를

의심하다

: 《즐거운 학문》 110

 

가장 심오하고 숭고한 지식 역시 인간의 허영 이상은 아니며

이제 우리가 "자연적 인간이라는 본래의 영원한 근본 바탕 위에 오늘날까지 덧씌워져온

과장되고 거짓된 해석과 이차적 의미들을 극복하고" 인간을 다시 자연으로 해석하고자 한다면

도대체 왜 지식의 문제를 고민하는가? 그것이야말로 미친 짓이 아닌가?

그러나 니체는 지식이 분명 여전히 고민할 가치가 있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 변화하기 때문이다.

 

5

기억과 망각의

연금술

: 《도덕의 계보학》 제2논문, 1

 

우리는 잘못된 선택이나 망설임, 지연,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일들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 같은 실수들 모두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삶에서 마주치는 사건들을 불운이나 죄책감같은 개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망각할 줄 아는 자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꿀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건강"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6

삶은 여성이다

: 《즐거운 학문》 339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계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넘쳐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아름다움의 순간은 너무 적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강력한 마법일지도 모른다.

삶은 가능성이라는 황금실로 짜인 베일에 덮여 있다.

약속하고, 반감을 품고, 수줍어하고, 냉소하고, 동정하고, 유혹하는

그렇다, 삶은 여성이다!

 

7

그 어떤

인간들보다 높이

: 《즐거운 학문》 341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라는 질문은 모든 경우에 최고의 무게로 그대의 행위 위에 얹힐 것이다!

이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그대 자신과 그대의 삶을 만들어나가야만 하는가?

 

8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에 대하여> 3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을 창조하는 사람만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유일한 자라고 말했다.

"인류를 위한 목적을 창조하고 이 세계와 그 미래에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는 사람,

그가 이 세계의 선과 악을 결정짓는 자이다."

우리는 선과 악의 탄생에 대한 오래된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전복시켜야 하며

스승과 덕의 주창자들, 성인과 시인, 이 세계의 구원자들 모두를 이런 전복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9

니힐리즘의 끝,

영원회귀

:  《도덕의 계보학》 제3논문, 28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더욱이 동물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관능에 대한, 이성 자체에 대한 이러한 혐오, 행복과 미에 대한 이러한 공포,

모든 가상, 변화, 생성, 죽음, 소망, 욕망 자체에서 도망치려는 이러한 욕망

- 이 모든 것이, 감히 이것을 이해하고자 시도해본다면,

허무를 향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적의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한 반발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의 의지이며 하나의 의지로 남아 있다.

 

10

나의 말을

이해했는가

《이 사람을 보라》 서문 1, 2

 

소중한 몇 권의 책만 읽되, 너무 많은 책을 읽지 말고, 책만 들척이다

사유 능력을 잃고 오로지 어떤 자극에 반응만 하게 되는 학자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도서관을 피하며, 가급적 앉아 있지 말고, 열린 공기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떠오른 생각이 아니면 믿지 말 것이며,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기회가 오면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세익스피어의 작품이 대단한 어릿광대의 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읽고,

햄릿을 미치게 한 것은 의심이 아닌 확실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니체의 생애

 

1844년 10월 15일 뢰켄(Rocken)에서 카를 루트비히와 프란치스카 니체의 아들로 출생.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는 프로테스탄트 목사였다.

1846년 여동생 엘리자베스 출생.

1849년 남동생 조세프 출생. 같은 해 아버지 졸도 이후 '뇌연화증'으로 사망.

1850년 남동생 사망. 가족들 나움부르크로 이사.

1858~1864년 유명한 기숙학교 슐포르타에 들어가다. 고전에 재능을 보이다.

1864년 본 대학교 입학,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전공하다.

1865년 지도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가다. 그곳에서 신학을 그만두고 고전문헌학을 계속 공부하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접하다.

1867~1868년 나움부르크에서 병역 의무를 수행.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인해 제대하게 됨.

1869년 바젤 대학교 고전문헌학과에 특별 촉탁 교수로 임명. 시험 없이 박사학위를 받음. 프러시아 시민권을 포기하고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하려고 신청했지만 시민권 취득에 필요한 자격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절당함. 이후 국적 없는 상태로 산다. 루체른 근교 트립셴의 바그너 가족을 부정기적으로 방문.

1870년 정교수로 승격. <그리스의 음악극 The Greek Music-Drama> 강연. 프러시아 전쟁에 위생병으로 자원, 참전. 그러나 전선에서 2주 만에 디프테리아와 이질에 걸려 바젤로 돌아온다. 크리스마스를 바그너 가족과 함께 보내다.

1871년 《비극의 탄생》 저술에 몰두하다. 독일 통일. 독일 제국 성립. 처음으로 "건강상의 이유로" 휴직 신청을 내다.

1872년 《음악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출간.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연. 바이로이트 음악 축제 초석을 놓는 행사에 참가.

1873년 다비드 슈트라우스에 대한 첫 번째 《반시대적 고찰》출간.

1874년 두 번째와 세 번째 《반시대적 고찰》이 각각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와 <교육자로서 쇼펜하우어>로 출간. 바그너와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함. 이해 8월에 개인적 방문으로는 마지막으로 바그너를 방문. 이후 2년간 두 사람은 거의 만나지 않는다.

1875년 음악가 하인리히 쾨젤리츠(피터 가스트)를 만남. 그는 곧 니체를 이상화하고 그의 추종자가 된다. 지독한 두통과 구토의 치료를 위해 흑림지대(Black Forest) 온천에서 요양하다.

1876년 네 번째이자 마지막 《반시대적 고찰》인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 출간. 바이로이트 음악 축제에 처음으로 참가하지만 오래 머물지 않고 떠나다. 곧 리하르트 바그너와 결별. 건강 상태 악화. 대학교로부터 일 년간 병가를 받다.

1878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출간. 이 책의 출간으로 바그너와의 결별이 더욱 공고해지다.

1879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후편으로 《여러 의견과 격언》 출간. 연금을 받고 대학교를 완전히 떠나다. 처음으로 《여러 의견과 격언》 출간. 연금을 받고 대학교를 완전히 떠나다. 처음으로 엥가딘을 방문하고 생모리츠에서 여름을 보내다.

1880년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 출간. 베니스와 제노바에 처음으로 체류.

1881년 《아침놀》 출간. 실스마리아에 처음으로 체류. 처음으로 비제의 카르멘을 보고 이를 바그너에 대한 대안으로 간주.

1882년 《즐거운 학문》 출간. 그의 청혼을 거부한 루 살로메에게 열중하다.

1883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2부를 각각 따로 출간. 바그너 사망. 여름은 실스마리아에서 겨울은 니스에서 보냄. 이후 5년간 같은 패턴을 반복함. 글쓰기로 자신을 대단히 혹사하다.

1884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 출간.

1885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부 인쇄본으로 소수의 지인들에게만 배부.

1886년 《선악을 넘어서》 출간.

1887년 《도덕의 계보학》 출간.

1888년 대중적 주목을 받기 시작하다. 브란데스(Georg Brandes)가 코펜하겐에서 니체의 작품에 대한 강연을 하다. 튀린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바그너의 경우》를 집필하다. 빠르게 《우상의 황혼》(1908년 초판 발간), 《안티크리스트》(1895년 초판 발간), 《이 사람을 보라》(1908년 초판 발간), 《니체 대 바그너》(1895년 초판 발간), 《디오니소스 송가》(1892년 초판 발간) 등을 써내려가다.

1889년 튀린에서(1월 3일) 몇 번의 정신착란을 겪고 예나의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는다. 정신착란이 시작된 후 나온 첫 책 《우상의 황혼》이 1월 24일 출간.

 

1894년 누이 엘리자베스가 나움부르크에 니체 아카이브를 설립(이는 2년 후 바이마르로 옮겨진다).

1895년 《안티크리스트》와 《니체 대 바그너》 출간. 엘리자베스가 니체 작품의 저작권자가 된다.

1897년 어머니 사망. 엘리자베스가 그를 바이마르로 데려온다.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사망.

 

 

 

posted by 황영찬
2014. 10. 23. 08:57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97 청동기 문화

 

글, 사진 / 이건무

2000, 대원사

 


시흥시립도서관

SA002646

 

082

빛12ㄷ  239

 

빛깔있는 책들 239

 

이건무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한 뒤 한양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 국립광주박물관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으로 있다. 1994년에는 한국고고미술연구소에서 주관하는 동원학술논문상을 수상하였다. 주요 논문으로 「한국 청동 의기의 연구」, 「유문동과고」, 「한국식동검문화의 성격」, 「한국식동검의 조립식 구조에 대하여」, 「한국의 청동기 문화」, 「한국 청동기 문화의 성립과 전개」 등 수십 편이 있다.

 

|차례|

 

머리말

청동기란 무엇인가

청동기시대의 생활상

청동기 문화의 역사와 특성

청동기 제작 기술

맺음말

부록-용어 설명

참고 문헌

요령식동검

승주 대곡리 마을 전남 승주군(지금의 순천시) 대곡리의 청동기시대 마을 전경이다. 강가의 평탄한 대지를 택해 여러 채의 움집을 지어 마을을 형성하였다. 현재는 주암댐 건설로 수몰된 상태이다.

울주 검단리 마을 경남 울주군 검단리 마을 유적은 해발 100미터 정도의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주위에는 도랑을 설치하였다. 사진 : 부산대학교박물관

부여 송국리 마을 유적의 울타리 울타리는 마을의 방어 시설로서 송국리 마을 유적의 외곽에서 발견되엇다. 기둥의 직경이 0.5미터나 되며 기둥 구멍 사이의 폭은 약 1.8미터이다.

울산 무거동 논 유적 청동기시대 전기 유적으로, 여기서는 마을과 논이 함께 발견되었다. 사진에 나타난 논과 수로의 흔적을 통해 이 시기에 이미 논농사를 위한 조성 기술 · 관개기술이 상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진 : 경남대학교박물관, 밀양대학교박물관

어은1지구 유적의 밭 경남 진주 대평리에 위치한 어은1지구 유적이다. 강가의 모래사장에 만들어졌으며 전체 규모가 4,000여 평에 이른다. 이랑과 고랑이 뚜렷하며 주변에서는 마을 유적이 발견되었다. 작은 사진은 요즈음 텃밭 경남 진주 대평리 소재

농경문청동기(앞면) 대전 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청동 의기이다. 앞면에는 남자 두 사람이 각각 따비와 괭이를 가지고 밭을 가는 장면과 여성이 그릇에 무엇인가를 담는 장면이 새겨져 있으며 , 뒷면에는 Y자로 갈라진 나뭇가지에 매와 같은 형상의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따비 밭을 가는 데 사용하는 농기구로 근래에도 농촌에서 볼 수 있었다.

그물추(어망 복원) 청동기시대의 어로 행위를 증명할 만한 자료이다. 그물어구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물에 매달려 있던 그물추는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물추는 흙을 구워 만든 것과 작은 돌의 양면을 쪼아내거나, 홈을 내어 만든 것이 있다.

반구대 암각화 경남 울주군 소재 반구대 암각화에는 배를 타고 바다에서 집단으로 고기잡이를 하는 장면과 고래 등에 작살이 꽂혀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견갑형동기 경주 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청동 의기에는 표범 또는 사슴과 같은 짐승이 그려져 있는데, 특히 사슴 한 마리에는 화살이 꽂혀 있어 사냥 의식과 관련된 의기로 추정할 수 있다.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곱은옥(위)과 대롱옥(아래) 청동기시대의 곱은옥은 천하석으로 만들었으며, 대롱옥은 벽옥으로 만들었다. 곱은옥은 귀고리나 수식(펜던트)에, 대롱옥은 여러 개를 연결하여 목걸이로 사용하였다.

양전동 암각화 경상북도 고령군 양전동 유적의 암각화에는 기하 문양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청동기인의 주술과 기원을 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뼈피리 함북 웅기군 굴포리 유적 청동기시대층에서는 새의 다리뼈를 잘라서 만든 뼈피리가 출토되었다.

원개형동기 한국식동검문화의 성립기에 사용된 청동 의기 가운데 하나이다.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징과 같은 역할을 한 일종의 무구로 추정된다.

북방식 고인돌 북방식 고인돌은 주검을 안치하는 곳(주검칸)이 지상에 드러나 있다. 황해도 은율의 북방식 고인돌처럼 윗돌의 크기가 8미터에 달하는 것도 있다.

화순 고인돌 채석장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큰 돌을 떼어낼 수 있는 채석장이 필요하다. 전남 화순 효산리에서도 채석장 유적이 발견되었다.

초포리 유적 전남 함평 초포리 유적은 나무널 주위에 돌을 채운 형식의 무덤이다. 이 유적에서는 한국식동검 · 청동거울 · 의기 등의 껴묻거리가 다량 출토되었다.

미송리형토기 무문토기 형식 중에서 평안도 지방과 요동 지역 일대에 주로 분포하는 토기로 짧게 밖으로 퍼진 목과 부른 배 그리고 띠고리 손잡이를 가진 작은 항아리 모양이다.

구멍무늬토기 우리나라 동북 지방(함경도)을 대표하는 무문토기로 깊은 바리 모양에 입부분 바로 아래쪽에 구멍무늬를 한 줄 돌린 것을 특징으로 한다.

팽이형토기 우리나라 서북 지역(평안남도 · 황해도)을 대표하는 무문토기로 독 모양과 항아리 모양의 두 가지 형식이 있다. 입을 겹으로 감싸 넘기고 겹싼 부분에는 짧은 빗금무늬를 새겼으며 밑굽은 몸체에 비해 아주 작아 불안정하게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적색마연토기 토기를 만들어 굽기 전에 그릇 표면에 산화철을 바르고 잘 문지른 뒤 구우면 붉은색으로 발색이 된 토기가 나오게 된다. 이러한 토기는 일상 생활 용기보다는 제사용 · 의례용 · 부장용 또는 특수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송국리형토기 짧고 밖으로 약간 벌어진 구연(口緣)과 배부른 동체를 특징으로 하는 무문토기 형식의 하나로 충남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어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점토대토기 청동기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무문토기 형식으로, 입을 둥글게 겹싸 넘긴 것을 특징으로 한다. 한국식동검문화를 대표하며, 중국 요동성과 일본 큐슈 지방에서도 이러한 형식의 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목긴항아리(흑색토기장경호) 점토대토기와 함께 청동기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무문토기 형식이다. 소형의 목이 긴 항아리 형태로, 대부분이 검은색을 띠며 일부는 그릇 표면이 곱게 문질러져 있다.

각종 반달칼 반달칼은 반달 모양이 일반적이나 빗 · 배 · 장방형 · 삼각형 등 그 형태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낫과 곰배괭이 돌로 만든 농경 도구로는 경작용의 곰배괭이와 수확용의 낫 그리고 반달칼 등이 있다.

곤봉두(별도끼) 곤봉두는 지휘자가 지니고 있던 일종의 위의구였을 가능성이 많은 도끼와 같은 무기이다. 둥근 형태의 날을 가진 달도끼와 날이 여러 개로 나뉜 별도끼가 있다.

썰개 석기를 만들기 위해 점판암과 같은 석재를 자르는 데 사용된 도구이다. 앞뒤로 직선 왕복 운동을 통해 석재를 자른다.

농경문청동기(뒷면) 대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농경문청동기의 뒷면에는 Y자 형태의 나뭇가지에 매와 같은 새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어 솟대와 같은 형상을 보여 준다.

솟대 오늘날의 솟대 모습. 높은 장대 위에 새 두 마리가 마주하고 있다. 전북 남원 호경리 마을

검파형(대쪽 모양)동기 검파형동기는 3점이 세트로 출토된다. 대전 괴정동 유적 출토

검파형동기 부분 충남 예산 동서리 돌널무덤에서 출토된 검파형동기에는 손이(위), 아산 남성리 돌널무덤에서 출토된 검파형동기에는 사슴이(아래) 그려져 있어 시베리아 샤머니즘과의 관련성을 말해 준다.

요령식동검 요령식동검은 칼몸과 칼자루 그리고 칼자루끝장식의 세 부분을 조립해서 사용하게 되어 잇다. 각종 요령식동검의 칼몸 형태는 기본적으로 비파형이지만 시대가 내려가면 점차 폭이 좁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요령식동검의 T자형 손잡이 요령식동검의 손잡이는 T자형이다. 손잡이의 표면에는 기하 문양이 새겨져 있다. 황해도 신천에서 출토된 것을 비롯하여 4점이 알려져 있다.

한국식동검 한국식동검은 요령식동검과 마찬가지로 칼몸과 칼자루 그리고 칼자루끝장식을 서로 결합하여 사용하게끔 되어 있지만, 칼몸이 직선화되고 결입부와 마디가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한국식동검과 칼자루끝장식 요령식동검문화기의 마제석검과 한국식동검문화기 초기의 동검에는 철광석제나 토제 칼자루끝 장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칼자루끝장식이 부착된 동검

나팔형동기 나팔형동기는 충남 예산 동서리 돌널무덤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 유일하다. 청동 의기로 여겨지는 것이나, 중국 요령 지역에서는 이러한 동기가 말머리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견갑형동기 경주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청동 의기 가운데 하나로 표면에 표범(또는 호랑이)과 사슴 등이 그려져 있다. 사슴 한 마리는 화살에 맞은 모습을 하고 있어 수렵과 관련된 제의에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원형유문동기 전북 익산 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청동 의기의 하나이다. 바깥쪽은 방사상, 안쪽은 십자형으로 구성하여 태양을 상징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십자일광문의 모티프는 시베리아 지역에서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고운무늬거울 한국식동검문화 발전기에 제작된 고운무늬거울은 뒷면에 새겨진 기하학적 문양이 아주 곱고 가늘다. 햇빛을 반사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라 대부분 뒷면의 무늬가 태양무늬이다.

방울류 세트 청동 의기 가운데 방울류는 우리나라에서만 보이는 특유의 것으로 간두령 · 쌍두령 · 조합식쌍두령 · 팔주령의 4종이 세트로 되어 있다.

거푸집 세부(도끼 상부) 투겁도끼는 도끼자루를 끼우기 위해 내부에 자루를 끼울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거푸집의 투겁 바로 위쪽에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속틀이 매달릴 수 있도록 조그만 홈이 파여 있다.

각종 거푸집 거푸집은 활석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으며, 대부분 같은 모양이 새겨진 2매를 합쳐서 사용하게 된다. 전남 영암에서 일괄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거푸집에는 무기 · 공구 · 거울 · 낚싯바늘 등이 새겨져 있다.

 

 

거푸집 세부(도끼 상부) 투겁도끼는 도끼자루를 끼우기 위해 내부에 자루를 끼울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거푸집의 투겁 바로 위쪽에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속틀이 매달릴 수 있도록 조그만 홈이 파여 잇다.


 

 

 

posted by 황영찬
2014. 10. 13. 15:39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95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강정 시집

2006, 문학동네



시흥시대야도서관

EM052126


811.6

강74들


모든 것이 애매하다.

영원한 우주와 필멸의 인간이, 남자와 여자가, 어머니와 자식이, 별과 항문이,

낡음과 미래가, 인간과 짐승이,시간과 공간 이, 태초와 현재가, 구분되지 않고,

그래서, 기이한가?

아니다. 더 편안하다.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이……

그의 기이한 이미지들은 기이하게 편안하고, 따스하다.

이 모든 것의 배후가, '기어이' 울음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우는 아이를 내 몸에 다시 넣어 / 기어이 우는 아이가 내 몸을 찢고

다시 태어나기를" ……

김정환(시인)


강정의 이미지는 검은 하늘에 그어지는 사이키델릭한 불꽃놀이 불빛이다.

눈이 부시다.

이 작열은 검은 하늘, 암흑의 캔버스 때문에 기본적으로 가능하다.

그 이미지는 추락한다. 과감히, 매우 빠른 속도로,

그래서 그것은 폭포 같다.

폭포는 기둥이고 따라서 남근이다.

그는 각종 환경호르몬 때문에 남근들이 흐물거리는 시대에 보기 드문

빳빳한 남근 이미지를 지닌 시인이다. 나는 그의 빳빳한 물기둥을 본다.

매 초, 그 물기둥들은 허망하게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급기야 웅덩이가 생긴다.

흥건한 그 웅덩이는 욕망의 웅덩이이고 그때 깨닫게 된다.

그의 검은 하늘이 욕망의 물웅덩이인 것을.

성기완(시인,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 멤버)


강    정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나 추계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1992년 『현대시세계』 가을호로 등단했으며, 시집 『처형극장』 문화비평집 『루트와 코드』가 있다.


상징이 없으면 세계는, 시적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시는 세계의 부재를 겪고 있다. 그래서 전에 없이 대상을 노래하지 않는 시들이 무수히 씌어지고 있다. 대상을 노래하지 않으므로 그 말들은 의미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분열한다. 강정은 드물게 이 새로운 현상을 몸으로 겪고 있는 시인이다. 다른 시인들이 그 분열을 자체로 드러낼 때 강정은 상징과 대상의 불가능성을 겪고, 그것을 노래한다. _ 함성호(시인)


自序


오래 팽개쳐둔 마음의 빈 구석에서 시간은

저 혼자 불똥이 된다.

뒤늦게 쫓아가는 나는

짐짓 난해한 물건이거나

심통맞게 돌아선 누군가의 싸늘한 등덜미이다.

불똥에 덴 흔적들과 함께

비로소 나는 나의 바깥에서 저 홀로 자족한다.


한없이 차가워진 마음으로

오래 식은 아궁이를 살피듯 긁어모은 불똥들이

세계와 나 사이,

깊숙이 가라앉은 시간의 구들장을 데운다.

알맞게 익었는지 살짝 엉덩이라도 디밀어보는 모든 분들아,

조금은 흉물스럽더라도

까칠한 거죽 속에서 혼자 비실비실 웃는

이 마음의 귀여움만이라도 눈치채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2005년 겨울

강  정


차례


自序

불면 / 새벽 / 노을 /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 해산하는 태양 / 우주괴물 / 오레된 자화상 / 두번째 아이 / 알을 품은 시인 / 엄마도 운단다 / 밤의 저편으로부터 그가 / 한밤의 모터사이클 / 무서운 음악 / 당신이 만약 미라와 사랑에 빠지고 싶다면 / 타고 남은 초신성 / 불가사리 / 內歷 / 거꾸로 / 미스터리 서클 / 零度의 대화 / 거울 속 호랑이 / 바닷가 교회 / 잠든 애인의 목소리 / 새와 물고기를 닮은 남자 / 서쪽 베란다에서 / 낮잠, 바람의 묘지 / 불꽃벌레 / 하나뿐인 음식 / 봄날의 전장 / 봄밤 / 망치를 든 사랑 / 그녀들의 연금술 / 기억의 사슬 / 기린은 환영이다 / 폭우 / 거미인간의 초대 / 거미인간의 시 - 새벽거미 / 거미인간의 시 - 다시 쓴 족보 / 거미인간의 시 - 정오의 산책 / 거미인간의 시 - 하오의 독백 / 거미인간의 시 - 새로운 식욕 / 거미인간의 시 - 별빛들 / 들판을 달리는 토끼 / 허공의 다리 / 蛇足詩

발문 | 함성호 그러니까, 그러니까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그가 내게 처음 한 말은

물이 모자라 거죽이 붉게 부르튼 어느 짐승에 관한 얘기다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그 짐승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다

비이거나 혹은 바람이거나

아직도 살 만큼 물이 충분한 내 몸에 파충류의 피륙 같은 돌기가 솟았던 걸 보니

짐짓 실체가 없는 무슨 진동 같은 거였는지 모른다

말이거나 비이거나 바람이거나

생각해보니 그것은 내 촉수를 자극해 조금씩 부풀면서

존재를 확인하려 하면 사라지고 만다

만져지는 대신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무성생식한 우주의 굵은 탯줄만 낡은 가구들 틈에 끼여

목청껏 다른 말들을 웅얼거리는데

이 다른 말이라 하는 것도,

듣고 보니 말이라 했지만,

책에 쌓인 먼지라거나

같이 있다 방금 자리를 뜬 사람의 미진한 온기 따위인지도 모른다

내 체온이 닿았던 것들은 나 이후로는

사망의 시간 속에 스며들어가

전혀 다른 종류의 생물로

내 체온이 발원하는 지점 깊숙이 파고든다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냉온이 빠르게 교차하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나라고 하는 건

한갓 누군가의 원망을 대신 실현하려

파리나 모기 따위에게로 쏠리는 식욕을 감춘 채 인간의 영역에 파견된

짐승과도 같다는 것

들려주려니 말이 자꾸 새끼를 치지만,

내가 들려주려는 말이 결국 내 체온을 액면 그대로 종이 위에 처바르는 일이듯

붓끝에서 뭉치거나 흩어진 물감들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저 나름의 궤도로 일렁이면서 시간의 어느 정점을 물들이면

나는 곧 나로부터 이탈되어 본래의 땅으로 돌아간다

들려주려니 땅이라 이름 붙였지만,

인간도 아니고 인간 아닌 것도 아닌 만물이 때 되면 허물 벗어 다른 생을 낳는 그곳을

허공이라 한들 어떠리


알을 품은 시인


맑은 날의 뱃길에선 태양과 물이

유리알을 낳는다 저것에 내 몸이 베이면

나는 詩를 낳으리라

아, 그러나 관두자 머리는 가볍고 가여워

보다 살가운 육체가 아닌 이상

나는 그를 빌어주지 않으련다


그러나 기어이 그는 빠져나간다 멍청한 내게는

아무런 기별도 없이, 몰래 일을 치르고 달아나는 疫神처럼

우리의 사랑이란 이토록 균등하지 않다

그는 수시로 날 약올릴 궁리만 하는 모양이다


유리밭 속에서 목욕하는 저 피 흘리는 몸을

그러나 아무도 보지 못한다 아직도 이 나라엔 백성들의 눈과 귀를

틀어쥔 거대한 대통령, 무시무시한 장관님들이 건재하신 듯하다


한가롭지 못한 내 뱃길을 그는 오로지 자신의 눈만으로 관장하신다

물굽이의 불규칙한 능선 사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떠다니는

그의 몸짓이 어떤 분명하지 않은 始原을 암시하고 있는데

나는 하염없이 눈만 깜빡거린다

횃대에 앉은 닭들의 푸르스름한 안광이 저 바다를

더욱 넘실거리게 하는 것 같다


저 지겨운 몰입을 보라

詩를 낳을 저 몸이 내 안에서 살던 것이라니!

나는 낯설기 짝이 없는 내 눈을 긁적거리기나 하자

공기의 뼈들이 어지럽히는 뱃전, 예상치 못한 사고가 암시되는 와중에도

졸고 있는 조타수의 뇌수는 지극히 정상적이다

장바구니를 깔고 앉아 싸구려 담배를 태우는 노인들은

이미 한 번쯤 죽음에서 살아존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 그는 그러나 자꾸만 내 시선을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어렴풋한 진공을 보게 만든다 명료하지 않은,

더 깊은 세계의 포말을


태양이 숨을 몰아쉬고 있다 무거워진 내 몸이

바다의 살을 물고 튀어오르는

유리알들을 불러모은다

구름들은 다 어지로 숨었나, 날카로운 물살에 베여

나는 이미 피투성이다 아무도 못 봤겠지만,

그래도 나의 變身을 눈치챈 꼬마아이 하나의 눈매는

선한 악의로 번들거린다

횃대에 앉아 알 까는 시늉을 하는 어느 멍청한

수탉을 구경하듯 내 질척한 항문의 심상찮은 産氣에

저도 발끈한 모양이지, 나는 꼬마를 피해 눈을 감는다


터진다, 기어이! 그리고 부숴버린다

깔고 앉은 바닥이 부풀어오른다

내 눈알은 이미 푸른빛 거미줄을 그리며 도처로 흘러가고 있다

바다에서 그가 건져내는 건 나 아닌 모든 것들의

굵게 사각진 뇌수들이다 한결같이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한결같지 않은 유리알 속으로 포획되는

이 눈부신 개화를 보라

유리밭 속을 출렁이며 흐르는 이 배가 도착하는 지점에서

나는 기어이 살아 있는 죽음을 볼 것이다


두번째 아이


가장 낡은 언어로 말하지 않고서는 드러나지 않는 미래가 있다

갓 젖 뗀 아이가 울부짓는 소리를

손에 받아 냄새 맡아보라

당신의 손바닥에 빙하의 뿌리처럼 남아 있는 수분이 태양을 빨아당겨

생명을 내뱉은 당신의 하복부에 금삧 문자를 새긴다


얼어붙지 않은 열기라면

손 안의 모래알처럼 바람의 궤적을 그릴 때만 유효하다

아이는 사실 아무 말도 않지만

아이의 소리를 옮겨적은 백지 위엔 수시로 광풍이 분다

집이 무너지고 태양의 꿀을 짜내던 뭇 별들이 폭사해

당신의 거처를 무한십이면체의 정글로 변화시킨다


당신의 아이는 당신을

새로 탄생한 수정궁의 유일한 결함으로 기억한다

한줄기 냄새로 변한 당신은

이제 아이의 손바닥에서 바람의 시녀가 된다

손바닥을 냄새 맡는 아이의 숨결 속에서

당신 스스로 두번째 아이가 된다

하수를 열면 녹슨 언어들이 폐차장의 바퀴살처럼 공허하게 입을 벌리고 있다

죽은 태양이 삐걱삐걱 새로운 노동에 몰입하는 순간,

당신의 비어 있는 손바닥에 대해 스스로 눈감으라


內歷


남근을 잘라 풀숲에 묻었더니 꽃이 하나 피었습니다

내가 누구냐며 소리치고 있었지요

오직 자기만이 알아먹을 소리로요


한 열흘 비만 내리니 풀숲이 온통 젖어

둥글게 접질린 꽃잎 하나 휘돌아나가는 개천 어귀까지 떠내려갔어요

개천이 뜨겁게 끓어올랐지요


또 한 열흘 햇볕 내리쬐고 얕아지는 물살 따라

팅팅 불은 꽃잎 하나 흩어진 보리알마냥 갈가리 찢겨 흘렀지요

그런데 이런~ 물빛이 된통 벌건 거 있죠


비밤람 뜨내긴 양 머물다 가고 떠다니는 햇빛 비늘들

개천을 시뻘건 용의 등짝으로 달구어버렸어요

유언처럼 터진 용 아가리에 염주도 아닌 누런 알 하나 박혀 있데요


근데 그 남근 내 건 아니었던가봐요

내 몸이 꾸물꾸물 갓난 용새끼처럼 번들거렸던 거 있죠

잘려나간 자리에 별나비들 뾰족한 꼬챙이나 박아넣으며 목숨 끊고


거울 속 호랑이


1

파리가 천장 아래를 배회한다

난 문득, 호랑이처럼 일어서는 식욕 때문에 시야가 어지럽다

아무것도 씌어지지 않은 창가엔 태양 처녀의 푸르른 솔기만 고요하다


천장 너머엔 호랑이도 한낱 파리 목숨일 하늘이 떠 있다

이런 당연한 사실이 새삼 무서울 때

세계는 오래된 호랑이 굴처럼 암흑 속의 미지가 된다


2

파리가 거울 쪽으로 이동한다

파리를 통해 보는 거울은 이미 다른 세상을 비추고 있다

거울을 보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켠다

쇳물이 가득 배어 있는 이 액체는 오래 전 내 열망을 다독이던 여인의 질액보다 매캐하다

배부른 호랑이가 굴 속으로 숨듯

옛 여인의 어두운 꿈속 같은 액체 속에 나는 잠긴다

시큼한 쇳내음이 내 뼈를 금속으로 바꾸는 듯하다

거울 속에선 파리가 나보다 더 큰 날갯짓으로 창천을 가린다


3

파리가 나를 삼킨 건지

맥주잔 속에 빠진 파리를 내가 들이켠 건지

사방이 온통 거울을 비추는 거울들로 둘러싸여 있다


거울 속에서 거울이 부푼다

거울 속에 붙들린 세계의 표면들이 부푼다

세계는 이미 거울의 홍수 속에 잠겨 있다

호랑이를 삼킨 파리가 제 몸을 쪼개 수억 마리 분신들로 명멸한다


4

잊혀진 여인의 태 속에서 금박으로 장식된 파리떼가 내 몸을 쫀다

사방으로 빛을 튕겨대는 거울 속에 오래 전 내 얼굴들에 금이 가 있다

인간의 박피가 여느 기계의 표면보다 차고 단단해질 날이 멀지 않았는가

점액질의 기억들로 부식된 영혼이 여인의 상처입은 성기를 납땜하고

태양에서 떨어져나온 빛이 거울들 사이를 날아다닌다

튀어오르는 불꽃들을 삼키며 호랑이가 울부짖는다

거울 밖으로 날아오르는 파리의 뱃속에서 호랑이 새끼들이 걸어나온다


망치를 든 사랑


꽃이라도 몇 송이 들고서 말해야 할는지 모르겠으나

꽃을 든 손은 망치를 든 손보다 아름답지 못한 걸 압니다


언젠가 내 마음보다 헐렁한 주머니를 털어 꽃을 몇 송이 건네봤지만

당신에게 날아든 건 가난한 집 지붕을 찢는 벼락 같은 것이었죠


아시다시피 벼락은 뾰족합니다

손에 쥐면 피가 흐르고

피가 흐른 다음엔

그 피를 핥으며 땅 밑에서 올라온 이상한 짐승들이

잘 알던 곳의 지도를 바꿔버리지요

낯선 곳에선 내 몸도 이미 내 몸이 아니랍니다


벼락이 찢어놓은 하늘 속으로 빗방울 타고 들어가려다가

물컹하게 밟히는 그 어두운 통로가

내 마음 속이란 걸 알곤 고꾸라지고 말았지요

그래요, 마음이란 게 생겨나기도 전에

내가 먼저 그놈을 死産시킨 이후론

펭귄이나 순록 같은 것들의 희미한 눈동자가 오래도록

몸 속을 들락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답니다

빙점 아래로 떨어진 체온이 태양을 얼려

벼락 모양의 눈물이 온몸에 가시처럼 돋아나기도 했구요


내 머리 뚜껑을 열고 해독되지 않는 책을 펼쳐 읽던 당신은

밤새 골수를 후비다 새벽녘에야 몸 밖으로 빠져나온

썩은 어금니랑 다를 바 없습니다

눈물에 뜯긴 자국만 혹성의 분화구처럼 뚫려 있는 베개가

그런 게 사랑이라면서 먼지를 폴폴 날리더군요


당신이 만약 미라와 사랑에 빠지고 싶다면


날 만나기 위해 화장을 짙게 하고 머리는 도깨비처럼 곧추세워야 할 거야 접어두었던 꼬리도 길게 펴고 超新星의 빛을 훔쳐 동공을 반짝반짝 닦아줘야 해 무덤의 기억들을 햇볕 아래 내놓을 순 없으니까


밤마다 찾아오는 눈 밝은 아이들을 발가벗겨 영양 많은 호기심을 빨아마셔야 해 새롭게 햇볕을 마시고 살 당신에게 궁금한 것이 없다면 난 연기처럼 당신 앞에서 사라지고 말케니까


그동안 난 낮달을 가슴에 얹어 오래도록 불을 지펴야지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마음이라고 당신이 실망하지 않도록 이미 죽은 몸이더라도 세상의 녹슨 연장들을 들고 고역중이라는 걸 보여줘야 하니까


당신과 미궁의 아이를 낳을 거야 오래 전에 내가 먹은 태양, 내 몸 속에 냉동된 열기를 꺼내어 마음대로 유린하도록, 태양이 남자를 낳았으니 이제 여자가 태양을 낳을 차례, 내 몸을 둥글게 구부려 죽어도 죽지 않는 뿌리를 삼키게 해줘 길은 늘 엉켜 있어야 이 창백한 정신에 번쩍번쩍 불이 들게 하거든 최대한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길 바래 땅 속에서 흙을 빚어 만든 당신의 몸이 엉긴 불기둥으로 다시 샘솟게 하려면


당신을 일으켜세워 봄볕의 따사한 粉으로 화장한 다음, 날 백 번쯤 다시 죽여달라고 당신에게 빌지도 몰라 그러면 어김없이 불칼을 들어 내 면상을 찍어줘 불꽃이 튀는 방향으로 소리를 지르며 몸 속의 모든 벌레들을 만개하는 꽃들의 대궁 속에 던져넣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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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4. 10. 10. 15:12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94 조각감상법


글 · 사진 | 조은정

2008, 대원사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25953


082

빛12ㄷ 271


빛깔있는 책들 271


조각은 시대를 반영한다.

레닌 동상이 민중에 의해 끌어내려지고,

이승만 동상이 시민들에 의해 질질 끌려 다녔다.

조각은 시대에 따라 힘과 권력의 상징이었으며,

문명의 기록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조각이 지니고 있는 힘과

문명이 발달하면서 재료의 다양화로 표현되는 조각의 재질성 등

조각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시대와 얽혀 있는 조각과 정치의 관계,

조각으로 나타난 장인의 일면을 다루고 있다.

조각은 주변의 공기를 호흡하고,

그 공간을 음미하며 손으로 만져서 얻어지는 예술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어렵게만 느껴왔던 조각의 범주에

성큼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빛깔있는 책들  ●  ●  ●


대중 독서의 질높은 문화를 여는

새로운 감각, 새로운 내용의 「빛깔 문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며 생각하게 하는 책,

지식과 정보를 해당 사진들과 함께 전달함으로써

책 보는 재미가 한결 더하고,

이해의 속도가 한층 더 빠르도록 꾸민 책,

보는 책 시대의 빛깔있는 책들입니다.


사진이나 그림이 넉넉히 들어가고

여러 빛깔로 아름답게 인쇄된 책이면

흔히 보관용으로 꽂아 두는

비싼 책으로 알아 왔습니다.

대원사의 빛깔있는 책들은

그런 그릇된 관념을 바로잡으며

이제 우리 대중 독서의 보는 책 시대를

선언합니다.


빛깔있는 책들은

전통 문화와 민속에서부터

오늘의 현대 문물과 생활 문화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골고루 다룸으로써

한 권 한 권이 쌓여

마침내 빛깔있는 가정 도서관을

이루게 됩니다.


글 · 사진 | 조은정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화여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신여대, 국민대, 중앙대, 경원대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한남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를 거쳐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학교 문화산업경영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제2회 조각평론상을 수상하였고,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주간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 『한국 조각의 미』, 『권진규』, 『김복진의 예술세계』(공저), 『비평으로 본 한국미술』(공저) 등이 있고,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권력과 미술의 관계에 대한 연구」, 「이승만 동상 연구」, 「동상조각의 근대이미지」, 「19, 20세기 궁정조각에 대한 연구」, 「20세기 황제릉에 대한 연구」, 「한국전쟁기 남한 미술인의 전쟁체험에 대한 연구」, 「한국전쟁기 북한 미술인의 전쟁수행 역할에 대한 연구」, 「조선후기 16나한상에 대한 연구」 등의 논문이 있다.


|차례|


조각의 힘


조각의 범주

    조각과 조소

    입체와 설치

    경계를 넘는 조각


조각의 조형 요소

    조각의 색

    조각에서 선


문명의 기록으로서 조각 재료

    인간 정신의 그릇, 뼈조각

    시간의 벽을 뛰어넘은 기록자, 돌조각

    외유내강의 아름다움, 나무조각

    흙과 바람의 솜씨, 소조

    금속조

    기계적 편리함과 건축적 견고함, 시멘트제

    새로운 물성의 새로운 조각, 합성수지와 고무

    일상적인 물질의 즐거움, 종이와 섬유

    가루가 고체로, 석고

    눈앞의 모든 것, 오브제에서 분비물까지

    새로운 재료로서의 자연

    공간을 형태화하는 소리


조각가와 장인

    선사시대와 고대의 조각가

    장인과 조각가


한국 근현대사의 정치와 조각

    식민지 전쟁 동원 조각

    장군 동상


부록

    주



이승만 동상  윤효중, 1956년. 서울 남산.

철거되는 남산 이승만 동상 서울 남산.(1960.8.27)

남산의 이승만 동상 제작을 위한 석재 채취 작업 (1956.2.20)

세종대왕 동상 제막식 (1968.5.4) 우리 주변의 동상들은 거개가 애국선열을 기념하고 그들의 정신을 기려 국가 교육에 이바지하고자 했던 목적에서 제작된 것들이다.

4 · 19민주묘지 수호자상 김경승, 1963년. 김경승은 시멘트로 만든 뒤 흰색으로 칠하였지만 1993년 4 · 19민주묘지 성역화 작업을 하면서 대리석제로 복사하였다.

인어공주 에드바르 에릭센Edvard Eriksen, 청동, 높이 80cm. 1913년 덴마크 코펜하겐. 이 조각은 발레를 감상하던 칼스버그 맥주회사의 경영주가 착안하여 안데르센의 동화책 속 인어공주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기업의 사회 환원이라는 측면에도 일조하는 이 작은 조각은 덴마크를 상징하는 기념물이 되었다.

공간의 새 브랑쿠시, 청동, 높이 137cm. 1919년.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이집트 석판 부조 덴마크 칼스버그 그립토텍 소장. 단단한 물체인 돌을 깎거나 파서 만든 경우 '각'이라 한다.

그리스 종 인물상 테라코타, 높이 39.5cm. 기원전 700년경.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 흙으로 만들어 불에 구운 테라코타는 소조의 한 방식이다.

자전거 바퀴 마르셀 뒤샹, 1913년 제작한 것을 잃어버려서 1951년에 재제작. 미국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이 조각은 움직이는 조각인 키네틱 아트의 최초 형태로 알려져 있다.

제3인터내셔널기념탑 타틀린, 1920년. 사진 스웨덴 스톡홀름미술관 소장.

구성적인 머리 2 나움 가보, 철에 채색, 1966년. 일본 효고현립미술관 소장. 러시아 구성주의자 중 하나였던 나움 가보는 1920년대부터 공간과 덩어리를 결합한 조각을 선보였다.

나선형 방파제 로버트 스미드슨, 돌 · 소금 · 수정 · 흙 · 물, 지름 457m. 1970년. 미국 유타 주 그레이트 솔트레이크. 사람이 걸어 들어가 형태에 참여함으로써 감상하는 동시에 실연자가 되는 대지예술이다.

강아지 제프 쿤스, 꽃과 나무 등, 1999년.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 제프 쿤스가 만든 강아지는 '살아서' 계절이 바뀜에 따라 색이 변화한다.

아베 마리아 모리조 카테란Maurizio Cattelan, 폴리우레탄 · 금속 · 천, 200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현대미술관 소장. 전시장 벽면에 실제의 인간이 팔을 뻗은 듯한 설치는 경직된 사회와 권력에 대한 비판을 보여준다.

무제 로버트 고버, 양말 · 운동화 · 털 · 속옷 등, 27.9×43.23×115.5cm. 1991~1993. 독일 프랑크푸르트현대미술관 소장. 인간의 체모를 심어 사람의 다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은 전시장에 생뚱맞게 자리하여 이질감을 극대화시킨다.

쇼핑백을 든 부부 듀안 핸슨, 실물 크기의 색칠한 비닐, 1976년. 미국 뉴욕 개인 소장.

촛불 하나 백남준, 비디오 카메라  비디오 모니터 · 비디오 프로젝션, 1988년. 독일 프랑크푸르트현대미술관 소장.

움직이는 분수 장 팅겔리, 스위스 팅겔리미술관.

수사슴을 비치는 조명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 1958~198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현대미술관 소장.

요셉 보이스가 카셀에 심은 나무 요셉 보이스는 1982년 '카셀 프로젝트 7'에서 7000그루의 떡갈나무를 심기로 했다. 그는 카셀 도큐멘터가 열리는 미술관 가까이에 있는 공대 마당에 현무암을 쌓아 놓고 나무를 심을 때마다 돌을 치우기로 하였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고 실행에 옮겨야 가능한 일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사막화 되어 가는 현대 환경에 대한 지적을 하였고, 모든 사람들이 예술 행위에 참여할 기회를 주었다.

에밀의 정원 장 뒤뷔페, 1972~1973년. 네덜란드 크뢸러뮐러미술관 소장. 정원 안에 하얀색의 정원을 만든 설치 작품이다. 하얀 바탕에 테두리를 두른 생생한 검은색 선은 대지 위에 드로잉 같아 자칫 평면으로 인식되는 흰색에 3차원적인 공간을 부여한다. 뒤뷔페는 이러한 조각을 일컬어 '회화적인 시념비'라고 하였다. 그는 때때로 아이들이나 정신이상자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하였는데, 이 정원은 그러한 동심과 공간의 혼돈이 잘 드러나 있다.

칼레의 시민 로댕, 청동, 높이 213cm. 1884~1895년경 제작하여 1902~1903년경 주조. 덴마크 칼스버그 그립토텍 소장.

그림자 로댕, 1890년경 제작하여 1902년경 주조 높이 191.8cm. 덴마크 칼스버그 그립토텍 소장. 인체의 윤곽은 몸이 끝나는 곳에서 만들어진다는 로댕의 생각은 인체와 주변의 경계선에 빛을 끌어들여 윤곽을 드러냄으로써 실현되었다.

빅토르 위고를 위한 기념비 습작 로댕, 석고, 1883년. 덴마크 칼스버그 그립토텍 소장.

비너스 높이 202cm, 기원전 2세기 후반.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 밀로의 비너스라 불리는 이 조각은 1820년 멜로스 섬에서 발굴되었다. 왼쪽 발과 팔이 다른 돌로 조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우스신전 모형 루브르박물관. 신상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크게 만들어졌다.

코레(처녀상) 대리석, 높이 195cm. 기원전 570~560년경. 1875년 그리스 사모스 섬 헤라신전 발굴,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

코루스 대리석, 높이 94.50cm. 기원전 570년경. 글시 악티움 발견, 루브르박물관 소장.

노예 미켈란젤로, 대리석, 1513~1515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

키오스의 코레 대리석, 높이 56.6cm. 기원전 520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출토,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박물관 소장.

자코메티의 조각이 놓인 덴마크 루지애나미술관 자코메티의 방 자코메티의 인체는 직선이 주는 감성을 형태에 투사하여 정신적인 공허와 고독을 강조한다.

사모트라케의 니케 대리석, 기원전 3세기.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

성녀 테레사의 법열 베르니니, 대리석, 1647~1652년. 코르나로교회, 이탈리아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철사구성 피카소, 높이 32cm. 1930년.

벽 모서리를 위한 부조 타틀린, 철사 등, 원작 망실.

남자 훌리오 곤잘레스, 동, 64.3×25×17cm. 1939년 만든 것을 1953~1954년 사이에 주조. 베니스 폐기구겐하임미술관 소장.

목 잘린 여인 자코메티, 동, 23.2×89cm. 1932년 만든 것을 1949년에 주조. 베니스 폐기구겐하임미술관 소장. 대좌를 버린 조각은 관람자의 공간 침범을 허용한 조각이다.

오스트랄리아Australia 데이비드 스미스, 1951년경. 뉴욕주 볼턴. 선으로 이룩한 완벽한 균형을 통한 중력의 극복을 보여준다.(출처 : 구겐하임미술관 홈페이지)

늘어뜨린 조각 전국광, 1986년 설치 작품을 2007년에 재현. 경기도 모란미술관 전시 장면.

댄 플래빈의 작품 1968년. 독일 프랑크푸르트현대미술관 소장.

노사나불좌상 철, 보물 1292호. 880년경. 강원도 동해시 삼화사 소재. 철을 주로한 조각은 고대 불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십자고상 송영수, 철, 89×30.5×16cm. 1963년. 개인 소장.

성인 김찬식, 철, 45×17.5×9.6cm. 1957년. 목암미술관 소장.

바다 김세일, 스테인리스 스틸 선, 250×70×200cm. 2004년. 작가 소장.

고종황제릉인 홍릉의 마석(위)과 순종황제릉인 유릉의 마석(아래)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의 조각은 전통에 입각하여 조영한 홍릉의 조각과 일제강점기 일본인 조각가의 마케트에 의해 만들어진 조각이 다른 정신 아래 제작된 형태를 보여준다.

욕망(남과 여) 마이욜Aristide Maillol. 1861~1944, 1907년. 덴마크 칼스버그 그립토텍 소장. 부조는 전체가 도드라져 환조에 가까운 것도 있지만 후면을 제외한 면을 본다는 특징이 있다.

낙산樂山 능운사凌雲寺 대불 587cm. 713~803년. 중국 사천성 소재. 이 불상은 원래 13층 전각으로 보호되고 있었으나 명나라 시대에 전각은 없어지고 현재는 노출되어 있다. 거대한 부조인 마애불의 양상을 알 수 있다.

트롤(발굴용 삽) 올덴버그Claes Oldenburg. 1929~, 1971년. 덴마크 크뢸러밀러미술관. 올덴버그의 조각은 일상의 사물을 거대한 크기로 확대하여 장소성을 부여한다.

전생담 중 석가 탄생도 인도 델리국립박물관 소장.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의 출산 자세는 생명성을 상징하는 인도 전통 약시상에서도 볼 수 있는 자세이다. 부조는 석가모니가 룸비니동산에서 태어나 일곱 발걸음을 걸었다는 것을 한 번에 말해줄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 구조를 쉽게 풀어낼 수 있는 조각 방식이다.

야생뿌리 존 챔벌레인John Chamberlain. 1927~, 175×133×95cm. 195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현대미술관 소장. 폐자동차 등 산업 폐기물을 이용하여 만든 작품으로 일상생활의 폐기물을 이용한 작품들을 일명 정크아트라고도 한다.

Zin Zum Ⅱ 바넷 뉴먼Barnet Newman. 1905~1970, 철, 1969~1985년. 독일 뒤셀도르프주립미술관 소장.

아잔타 전경 인도 아잔타 석굴은 전체가 암벽으로 된 산을 깎아 들어가 조각을 하였다.

다비드 미켈란젤로, 대리석, 높이 408cm, 1501~1504년. 이탈리아 피렌체 아카데미아미술관 소장.

로마시대 헤라클레스상 대리석. 덴마크 칼스버그 그립토텍 소장.

아소카왕의 석주 주두 사자상 대리석, 213cm. 기원전 240년경. 인도 사르나트박물관 소장.

불좌상 분홍색 사암, 68cm. 2세기 중엽경. 인도 사르나트박물관 소장.

뵐렌도르프의 비너스 석회암 자갈, 15cm. 기원전 3만~2만 5천 년.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소장.

경기도 매산리사지 미륵당 불상 화강암. 고려시대. 우리나라 산과 바위를 형성하는 화강암으로 조성된 불상이다.

목조 피에타 독일 프랑크푸르트 성 바돌로뮤 성당. 목조는 자유로운 채색이 가능하여 특히 중세 성상에서 많은 제작례를 보인다.

물동아 든 여인 윤효중, 나무, 125×48×48cm. 1940년. 리움 소장.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윤효중의<물동이 인 여인(일명 아침)>은 근대 조각가가 만든 목조를 보여준다.

방윤 · 춘부 안규응, 나무,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의 출품작. 조선시대 전통 목각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중국 진시황릉의 병마용갱 전경

지원의 얼굴 권진규, 테라코타, 49×31.8×27cm. 1967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일본 호류지 오중탑 내부 소조상

기다림 문옥자, 테라코타, 20×20×35cm. 1990년. 작가 소장. 소조는 작가의 손맛을 살려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합창A(오른쪽) 윤효중, 도조, 46×16×15cm. 1958년. 예술원 소장.

합창B(왼쪽) 윤효중, 도조, 46×15×13cm. 1958년. 예술원 소장.

흙으로 형태를 만들어 가마에 구운 다음 채색과 유약을 입혀 다시 구운 도조 작품이다.

인물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 청동, 1970년. 덴마크 루지애나미술관 소장.

천사의 도시 마리노 마리니Marino Marini, 청동, 247.9×106cm. 1948년 제작하여 1950년 주조. 베니스 폐기구겐하임미술관 소장.

엄지손가락 세자르Cesar, 1921~1998, 황동, 1970년. 덴마크 루지애나미술관 소장.

이상적인 모형 P/K90 올라프 메젤Olaf Metzel, 1952~, 철, 1987년. 독일 뒤셀도르프주립미술관 소장.

올려다보라 · 글을 읽으라 일리야 카바코프Ilya Kabakov, 철, 1997년. 독일 뮌스터. 일리야 카바코프는 1997년 뮌스터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이곳 출신 시인의 시를 하늘에 써 놓았다.

회전하는 나선형 리차드 세라, 철, 427×978×1268cm. 2003~2004년.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 소장.

설치 모니카 소스노프스카Monika Sosnowska, 철,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 폴란드관.

무제 도널드 저드Donald Judd, 알루미늄에 채색, 122×304.8×304.8cm. 196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현대미술관 소장.

큐바이 Ⅵ 데이비드 스미스, 1963년. 이스라엘 예루살렘미술관 소장.(출처 : Wikidepia)

천사들의 노래 최병상, 스테인리스 스틸, 280×160×320cm. 1987년.

법주사 미륵불상 김복진, 시멘트, 높이 33m. 1940년. 김복진이 조영하다가 세상을 뜬 뒤 그의 제자들이 완성한 당시의 시멘트제 법주사 미륵불상.

1963년 보수 후의 시멘트제 미륵불상.

푸른 문 앞의 푸른 소녀 조지 시걸, 석고 · 나무, 채색, 1980년. 일본 효고현립미술관 소장.

아마벨 프랭크 스텔라, 비행기 잔해, 1999.

뤼미에르의 제단Autel de Lumiere 첸젠Chen Zhen, 1955~2000, 양초 · 변기 ·선반, 1999년.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 중국 작가 첸젠은 양초와 변기, 이동용 선반을 이용하여 생활과 미에 대한 생각의 전복을 보여주었다.

황금천 엘 아낫수이El Anatsui, 1944~, 폐깡통 · 병뚜껑,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 아프리카 가나에서 태어나 나이지리아에 살고 있는 엘 아낫수이는 폐깡통과 병뚜껑 등을 이어 붙여 양탄자와 같은 형태를 만들어낸다.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 에드가르 드가, 청동과 옷, 높이 99cm. 1881년. 프랑스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인상파 화가였던 드가는 즐겨 그리던 어린 무용수를 조각으로까지 확대하였다. 청동으로 주조한 다음 옷을 입히고 머리에 리본을 묶어 일종의 아상블라주를 한 셈이다.

무제 이사 겐첸Isa Genzken, 오브제 설치, 2007년 뮌스터 프로젝트, 독일 뮌스터.

달리는 울타리 크리스토, 1972~1976년.

소망나무-페기에게 오노의 사랑을 전하며 오노 요코Ono Yoko, 1933~, 살아있는 올리브나무, 2003년. 페기구겐하임미술관 소장.

잃어버린 반향 수잔 필립즈, 2007년. 독일 뮌스터 프로젝트. 작가의 목소리를 녹음하여 다리 저편에 울리게 하는 작업으로, 소리는 공간을 형상화한다.

인체 헨리 무어, 청동, 1966년. 덴마크 루지애나미술관.

카르포, 대리석, 420×298cm. 1867~1869년. 프랑스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약동적인 낭만주의 조각을 보여준다.

머큐리 볼로냐, 청동, 1564~1565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

자연연구 루이즈 부르주아, 1984~1994년. 덴마크 칼스버그 그립토텍 소장. 루이즈 부르주아의 자연연구 시리즈는 트라우마 드러내기와 여성주의적인 시각 이외에 고대 여신상의 전통을 응용하였다는 점도 특징 중 하나이다.

파르테논 인물상 대리석, 120cm. 기원전 447~433년. 영국 대영박물관 소장(엘간마블스).

조선말기 해태상이 있는 경복궁 광화문 앞 전경

라호텝과 그의 비 노프레 석회암에 채색, 높이 120cm. 기원전 2550년경. 이집트 카이로 이집트미술관 소장.

스위스 팅겔리미술관에 있는 니키 드 생팔 작품 니키 드 생팔의 작품은 구상에 기초한 추상의 전개를 보인다.

백화 김복진, 1938년. 17회 조선미술전람회 무감사출품작.

소년 김복진, 1940년. 19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여인입상 문석오, 1930년. 9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역사力士 김만술, 청동, 275×160×170cm. 1950~60년. 개인 소장.

혁명은 단호한 것이다 구본주.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 설명문(1968. 4. 27)

이순신 장군 동상, 김세중 제작 (1968. 4. 27)




posted by 황영찬
2014. 10. 6. 09:19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93 HOW TO READ 마르크스(Karl Marx)


피터 오스본 지음 | 고병권 · 조원광 옮김

2007, 웅진지식하우스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31813


082

하66ㅇ v. 3


마르크스에게는 경제 환원론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유물론' 이나 '코뮤니즘' '정치경제학 비판' 등의

의미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풍부하고 독창적이다.

자본주의가 새롭게 지구화된 지금, 과거 어느 때보다 마르크스의 분석,

상품화가 초래한 결과에 대한 그 분석이 중요성을 갖는다.


HOW TO READ

●  ●  ●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도발적인 작가와 사상,

그들의 글을 원전으로 직접 만난다


자본주의에 관한

최초 · 최고의 비판적 분석가,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사유했던 사상가이자 자본주의의 사회적 역학과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사유했던 이론가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저작들은 국제 공산주의가 붕괴된 후,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에서는 의미가 없다고 치부되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 피터 오스본은 마르크스의 견해를 하나의 독트린이 아니라 계속 진행 중인 탐구 과정으로 제시한다. 마르크스의 산문은 이론과 은유, 전문적 난해함과 정치적 투박함의 아주 독특하고도 즐거운 혼합이다. 마르크스를 가장 생산적으로 읽는 방법은 그를 이 모든 수준들에서 동시에 읽는 것이다.


HOW TO READ 시리즈

위대한 사상, 세기의 저작을 원전으로 직접 만나는 특별한 기회, HOW TO READ 시리즈, 이 시리즈는 세계적 석학들의 안내를 받으며 사상가들의 저작 중 핵심적인 부분을 직접 읽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읽는 척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제대로 읽을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우리시대 교양인을 위한 고품격 마스터클래스가 될 것이다.


피터 오스본 Peter Osborne

런던 미들섹스대학교 현대유럽철학과 교수이며, 잡지 <레디컬 필로소피>의 편집자다. 주요 저서로 《시간의 정치학》《문화 이론에서의 철학》《개념 예술》 등이 있다. 《발터 벤야민 : 문화 이론에서의 비판적 평가》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고병권

현재 '연구공간 수유 + 너머'의 추장. 혁명이나 코뮨주의를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활발하게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화폐, 마법의 사중주》《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등이 있다.


조원광

현재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으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 재학 중이다. 《모더니티의 지층들》《문화 - 정치학의 영토들》을 함께 썼다.


차 례


■ HOW TO READ 시리즈를 열며

■ 저자 서문 | 자본주의에 관한 최초 · 최고의 비판적 분석가, 마르크스


1. 상품은 왜 신비한가

    : 《자본》

2. 실천, 세계를 변화시키다

    : <포이어바흐에 관하여>

3. 역사, 인간 행동의 시간성

    : 《독일이데올로기》

4. 소외, 사적 소유의 본성

    : 《경제학 철학 초고》

5. 철학의 가면들

    : <에피쿠로스 철학에 관한 노트>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 서문>

6. 코뮤니즘, 역사의 해결된 수수께끼

    : 《코뮤니스트 선언》《경제학 철학 초고》

7. 자본주의의 파괴성

    : 《코뮤니스트 선언》

8. 살아 있는 노동과 죽은 노동의 관계

    : 《자본》

9. 본원적 축적의 비밀

    : 《자본》

10. 여전히 유효한 마르크스

    : '영국의 인도 지배의 장래의 결과'


■ 자료 출처

■ 주

■ 마르크스의 생애

■ 함께 보면 좋은 자료

■ 역자 후기 : 마르크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결백한 독해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죄를 범한 독해가 어떤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

《자본을 읽자 Reading Capital》, 알튀세


1

상품은 왜 신비한가

: 《자본》


상품이 '신비한' 이유는,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것이 교환가치를 가졌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즉 상품의 교환가치 소유로 인해 상품의 [구체적] 사용이나 감각, 물질적 형태와는

무관한 성격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노동 생산물이 상품으로서 출현할 때,

그것은 "감각적임"과 동시에 "초감각적 혹은 사회적인" 것이기도 하다.


2

실천, 세계를 변화시킨다

: <포이어바흐에 관하여>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하여>는 세계를 지각 가능한 대상들의 집합으로 보는

[과거 유물론의 낡은] 관념을 넘어서, 자연에 대한 우리의 실천적 상호 작용을 강조하는

새로운 유물론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실천적 과업에 지적으로 적합한 것을 지향했다. 마르크스의 사유가 성숙기에 접어들었을 때,

철학적 토대가 된 것이 바로 이것이다.


3

역사, 인간 행동의 시간성

《독일이데올로기》


새로운 욕구들의 창출은 이전까지는 사회적 개념에 머물렀던 인간적인 것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역사적 논리를 끌어들인다. 바로 인간 욕구들의 발전과 그 욕구들에 상응하는

생산력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 척도를 도입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게 인간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욕구들을 창출[창조]한다는 것과 같다.

역사는 인간적 욕구들과 그에 상응하는 생산력의 확장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4

소외, 사적 소유의 본성

《경제학 철학 초고》


소외에 대한 마르크스의 언급은 임금노동의 소외적 성격에 대한

직관적 공감(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은 자기 일에서 소외된 느낌을 갖는다)을

복잡한 철학적 분석과 헤겔이 사용한 지독히 어려운 용어들에 결합시킨 것이다.

더욱이 마르크스는 낯섦과 상실의 실존적 의미 네 가지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라는 사실"과 관련지어 절합(節合)시키고 있다.


5

철학의 가면들

: <에피쿠로스 철학에 관한 노트>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 서문>


사회 세계에 개입하면서 전체 철학들은 어느 편을 들 수밖에 없고,

진행 중인 사회적 투쟁에서 특정한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또한 어떤 특수한 사회적 캐릭터의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

카니발의 가면들처럼 이런 비판 · 철학적 가면들은 권위(철학의 권위)의 비틀어지고 뒤집힌 이미지다.

그러므로 보편적이기를 열망하는 철학은 특수한 캐릭터들로 위장함으로써

실재적인 것[실재 세계] 안에 나타난다. 이것은 당시 철학의 근본 모순이었다.


6

코뮤니즘,

역사의 해결된 수수께끼

《코뮤니스트 선언》

 《경제학 철학 초고》


마르크스는 코뮤니즘이 인류와 자연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하나의 예외적이고(extraordinary) 유토피아적인, 사색적 주장이다.

이는 코뮤니즘이 통상적 의미에서의 역사 발전 단계가 아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헤겔이 말하는 역사의 종언처럼 그 뒤에 더 이상의 '발전'이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코뮤니즘을 "역사의 해결된 수수께끼"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시간, 인간 자유의 시간을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역사', 즉 자유의 시작이 될 것이다.


7

자본주의의 파괴성

: 《코뮤니스트 선언》


모든 사회적 관계를 혁명화하는 자본주의의 진보적 성격은 주로 그것의 파괴성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파괴성은 자본주의의 종교 · 국가 · 가족 · 세대 · 성과 같은 사회적 구속에 대한

구조적 폐지(annihilation)에 국한되지 않는다(그것들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저본주의의 파괴성은 특정한 사회적 공간에 자본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일회적 행위가 아니다.

그 파괴성은 자본주의 자신을 향한 파괴에까지 이른다.


8

살아 있는 노동과

죽은 노동의 관계

《자본》


자본은 흡혈귀와 같다. 왜냐하면 그것의 "단 하나의 충동"-자신을 가치 증식시키며,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충동-은 오직 살아 있는 노동에 대한 기생적인 관계 속에서만 자기표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노동은 이 관계에서 가변자본으로 통합된다.

자본은 자기 자산에 대한 내적 관계-가변자본과 불변자본, 노동과 다른 생산수단들의 관계-의

결과로서 양적으로 '증식'하고 성장한다는 점에서 운동하는("살아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9

본원적 축적의 비밀

《자본》


마르크스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 '어떻게 자본주의적 생산의 사회적 관계가 성립할 수 있었기에,

그렇게 사전에 축적된 부가 자본이라는 사회적 형태를 취할 수 있었는가?'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는 교환(시장)이나 특정한 수준의 축적이나

생산의 특별한 기술로 정의되는 게 아니라, 생산의 사회적 관계인 자본 · 노동의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화폐와 상품은 생산수단과 생활 수단이 그러하듯이 결코 처음부터 지본은 아니다.

그것들은 자본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자본으로 전환되기 위해서, 부는 가치를 창출하는 데 쓰여야 한다.

이 전환은 가치의 원천인 노동력의 상품화에 달려 있다.


10

여전히 유효한 마르크스

: '영국의 인도 지배의 장래의 결과'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한 마르크스의 저술들은, 정치 분석의 세계사적 양식이라는 문제적 유산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저술들을 유럽 중심주의 성향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저술들은 비판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도전거리를 내놓고 있다.

자본주의적 식민주의와 그것의 계속되는 영향을, 동일한 세계사적 규모에서

좀 더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더 광범위한 경험적 지식과 정치적 지혜(hindsight)의 이점을 활용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생애


1818년 5월 5일 프로이센의 라인주 트리어(Trier)시에서 변호사인 하인리히(Heinrich)와네덜란드 출신의 헨리에타(Henriette) 사이에서 출생. 형제자매는 모두 아홉 명이었다.

1831년 헤겔 사망.

1835년 트리어시의 김나지움에서 수학, 본에서 법학을 공부.

1836년 베를린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함. 예니 폰 베스트팔렌(Jenny von Westphalen)과 약혼.

1838년 마르크스의 아버지 하인리히 사망.

1839년 <에피쿠로스 철학에 관한 노트> 저술.

1841년 예나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당시 그는 예나에 있지 않았다).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 출간.

1842년 <라인 신문>에 기고, 10월에 편집자가 됨.

1843년 3월에 독일 정부에 의해 <라인 신문>이 폐간됨. 6월에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 <크로이츠나흐 노트>와 <루게에게 편지> 등을 쓰다. 10월 하순에 파리로 이사함.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 서문>을 쓰다.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 집필. 딸 예니(Jenny) 출생. 엥겔스가 열흘 동안 방문했고, 둘의 공동 작업이 시작되다. 엥겔스의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 출간.

1845년 2월에 프랑스에서 추방돼 브뤼셀로 옮기다. 엥겔스와 함께 《독일이데올로기》 집필 시작.

1846년 정의 동맹(league of the Just)에 가입. 둘째 딸 라우라(Laura) 출생.

1847년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에 대한 대응으로 《철학의 빈곤》을 내다. 영국에서 노동일을 제한하는 10시간 노동 법안(Ten-hour Bill)이 제정됨. 아들 에드가(Edgar) 출생(1855년에 사망). 코뮤니스트 동맹(Communist League)이 만들어지다.

1848년 《코뮤니스트 선언》이 발표됨. 유럽에서 2월혁명이 일어남. 벨기에에서 추방되어 독일로 가다. <신라인 신문>의 편집장이 됨. 캘리포니아에 골드러시가 일어나다.

1849년 프랑크푸르트국민회의 실패. '반란 선동죄'에 대해 무죄 처분을 받다. 독일에서 추방되어 무국적자가 됨. 런던으로 이사한 후 아들 구이도(Guido) 출생(1851년 사망).

1850년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1851년 프랑스에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일으킴.

1852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1853년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인도에 대한 첫 번째 글이 실림.

1853~1856년 크림전쟁

1857~1858년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거친 형태의 초고로) 작성. 보들레르의 《악의 꽃》 출간,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다윈의 《종의 기원》 출간.

1861년 미국 남북전쟁 발발.

1864년 런던에서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 설립. 마르크스는 평의회(General Council)의 독일 측 대표가 되다.

1867년 《자본》 제1권이 출판됨. 영국에서 정치가 디즈레일리(Disraeli)가 남성 선거권을 확장했다.

1871년 파리코뮌. 《프랑스 내전》 저술.

1872년 니체의 《비극의 탄생》 출간.

1875년 독일 노동자 정당들이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을 만들기 위해 고타 회의에 집결. <고타 강령 비판> 발표.

1876년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왕이 됨. 제1인터내셔널 해체.

1878년 독일에서 반사회주의자법(Anti-Socialist Law)이 제정됨.

1881년 12월, 부인 예니 사망.

1883년 월, 딸 예니 사망. 3월 14일 마르크스 사망. 런던 하이게이트(Highgate) 묘지에 묻히다.

1885년 《자본》 제2권 출판됨.

1888년 《자본》 제1권 영문판 출판됨.

1894년 《자본》 제3권 출판됨.

1895년 엥겔스 사망.

1905~1910년 《잉여가치 학설사》 출판됨.

1927년 《마르크스 엥겔스 저작 전집》 발간 시작.

1932년 마르크스의 초기 초고들이 처음 출판됨.

1938년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처음 출판됨.




posted by 황영찬
2014. 10. 1. 14:04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92 커피


글 | 조윤정 · 사진 | 김정열

2009,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16297


082

빛12ㄷ  269


빛깔있는 책들 269


커피의 블랙이 주는 느낌과 관련하여 인생, 쓴맛, 깜깜함, 미묘함이 언급되었고, 많은 이들이 근사한 카페의 분위기와 관련하여 낙엽, 가을, 그리움, 추억, 휴식, 사람, 만남, 여행, 길, 창가, 나무와 거리를 이미지화했다.

그리고 또 커피의 향기를 기억했다. 커피를 통해 지나간 사랑을 떠올리며 아득해하고 옛사랑을 추억한다.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근사한 카페에서 새로운 만남을 시작한다. 사랑의 여정처럼 그렇게, 길 위에 선 여행객처럼 그렇게, 인생의 미묘한 순간들에 그렇게, 커피가 있다.


빛깔있는 책들  ●  ●  ●


대중 독서의 질높은 문화를 여는

새로운 감각, 새로운 내용의 「빛깔 문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며 생각하게 하는 책,

지식과 정보를 해당 사진들과 함께 전달함으로써

책 보는 재미가 한결 더하고,

이해의 속도가 한층 더 빠르도록 꾸민 책,

보는 책 시대의 빛깔있는 책들입니다.


사진이나 그림이 넉넉히 들어가고

여러 빛깔로 아름답게 인쇄된 책이면

흔히 보관용으로 꽂아 두는

비싼 책으로 알아 왔습니다.

대원사의 빛깔있는 책들은

그런 그릇된 관념을 바로잡으며

이제 우리 대중 독서의 보는 책 시대를

선언합니다.


빛깔있는 책들은

전통 문화와 민속에서부터

오늘의 현대 문물과 생활 문화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골고루 다룸으로써

한 권 한 권이 쌓여

마침내 빛깔있는 가정 도서관을

이루게 됩니다.


글 | 조윤정

경남 밀양의 작은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다. 성심여대 사회학과 및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을 거쳐 1년여 대학 연구소에서 일했다. 문화연구, 여성학, 글쓰기에 관심을 두었으며 특히나 삶의 현장이 늘 좋았다. 영국으로 건너가 다큐멘터리를 공부하던 중 커피를 만났고, 커피의 매력에 빠졌다. 그 후 오랜 역사를 지닌 영국의 커피회사에 취직하여 3년 가까이 일하며 커피롸 로스팅을 배웠다.

현재 이화여대, 파주 여성회관 커피전문가과정 및 커피스트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으며 광화문 신문로에서 '커피스트'라는 커피가게를 하고 있다.

그는 커피로 사람들과 더불어 사랑하고 나누며 즐겁게 노는 것이 바로 문화라고 믿고 있다.


사진 | 김정열

커피 사진 프리랜서. 커피가 좋아 커피를 배우고 즐기며, 집에서 직접 커피를 볶고 갈아서 마시는 진정한 커피 마니아다. 사진은 예전부터 해온 그의 취미, 좋아하는 커피를 오랜 취미인 사진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데에 매력을 느낀 그는, 현재 국내 커피 기행 관련 책을 출간하기 위해 카메라를 메고 전국 커피 전문점을 취재 다니고 있다.


차례


왜 커피인가

    커피, 멋과 낭만에 관하여 ? 각성의 힘, 카페인 / 자기표현의 장, 카페문화 / 스페셜티 커피를 아는가


커피란 무엇인가

    커피의 정의 / 커피의 기원 / 커피의 역사 / 커피의 종류


커피 좀더 들여다보기

    커피의 재배 과정 / 커피의 처리 과정


로스터를 꿈꾸며, 로스팅

    로스팅이란 / 로스팅의 역사 / 생두 / 집에서 커피 볶기 / 로스터와 로스팅하우스 / 로스팅노하우


배합의 미학, 블랜딩

    블랜딩 방법


나도 이제 커피의 맛을 안다, 커피테이스팅

    테이스팅 방법 / 커피 맛을 음미하는 데 도움을 주는 표현들 / 생산지별 커피의 맛


추출기구가 다르면 커피 맛도 다르다

    터키쉬 / 사이폰 / 플런저(프랜치 프레스) / 모카폿 / 더치(워터 드립)


한 잔의 맛있는 커피를 위하여

    맛있는 커피란 / 물 / 분쇄 / 원두의 양 / 물의 온도 / 추출 속도와 시간


핸드 드립 고수되기

    핸드 드립이란 / 메리타 드립 / 카리타 드립 / 고노 드립 / 융 드립 / 드립으로 맛있는 응용 커피 만들기


바리스타, 그들은 누구인가

    바리스타란 / 일반 커피와는 다른 에스프레소의 정의 / 에스프레소의 역사 / 에스프레소 머신의 구조적 이해 및 용어 / 에스프레소 추출 / 우유 거품 내기 / 에스프레소로 맛있는 커피 만들기


부록

    현대인의 이슈, 유기농 커피와 페어 트레이드

    참고문헌


고민이 있으면 카페로 가자

그녀가 이유도 없이 만나러 오지 않으면 카페로 가자

장화가 찢어지면 카페로 가자

월급이 4백 크로네인데 5백 크로네 쓴다면 카페로 가자

바르고 얌전하게 살고 있는 자신이 용서가 되지 않으면 카페로 가자

좋은 사람을 찾지 못한다면 카페로 가자

언제나 자살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카페로 가자

사람을 경멸하지만 사람이 없어 견디지 못한다면 카페로 가자

이제 어디서도 외상을 안 해주면 카페로 가자


방랑작가 페터 알텐베르크


카페는 나의 집의 장점을 모두 갖추고 단점들을 모두 치워낸 우리집이다. 즐겨 찾아가서는 떠나기가 어렵다. 무엇이든 거의 할 수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자유의 터전'이다.


『베네치아의 카페 플로리안으로 가자』, 이광주, 다른 세상, 2001

커피벨트


커피주전자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

커피주전자는 아이들을 자라게 하며

우리를 부자가 되게 하나이다

부디 우리를 악에서 보호하여 주시옵고

우리에게 비와 풀을 내려주시 옵소서

오로모족의 기도문


커피를 추출하는 게 아니라

뽑는게 아니라

커피를 내린다니

이 얼마나 감동적인가요?

어느 커피 가게 주인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