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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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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6 만인보 


高銀

1997,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797


811.6

고67만  9


창비전작시----------------------------------------------------------------------


나는 고은의 『만인보』를 읽으면서 인간에 대한 종교적 연민을 배운다. 나는 사람의 삶의 형태에 따라서 어느 쪽인가 하면 사람과 미움의 마음이 분명한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찌들어진 운명의 땅에 태어나 온갖 삶의 형태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사라져간 인간들에 대해서 사랑이나 미움보다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다만 『만인보』를 읽음으로 말미암아서 나 자신이 인간과 삶에 대해서 더욱 경건해지는 것만으로도 『만인보』와 그 작가 고은에 대해서 감사한다.

- 한양대 교수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이영희

 

일찍이 발자끄는 빠리의 호적부와 경쟁하겠다고 호언히였다. 뛰어난 소설가라면 모름지기 이만해야 한다. 그런데 한 시인이 있어 우리 민족의 호적부와 겨루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웠다. 고난으로 축복받은 이땅에서 살아갔던 평균적 인물들의 눈부신 삶과 탁월한 역사적 개인들의 평균적 삶의 자태를 교직한 『만인보』에서 시인은 문득 일천 강물 위에 은빛 도장을 찍는 달빛이 되어 독자들을 저 망망한 민중사의 바다로 인도한다. 소도둑과 혁명가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을 백과사전적 전개 속에서 추구하는 『만인보』는 진실로 민족서사시적 위엄을 스스로 갖추고 있다.

- 문학평론가 최원식


고은(高銀)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눈길」「천은사운」 등을 추천받아 등단.

1960년 첫시집 『피안감성』 간행. 이후 시 · 소설 · 수필 · 평론 등에 걸쳐 100여 권의 저서 간행.

1984년 『고은시선집』 간행.

1986년 『만인보』 간행 시작

1987 ~ 94년 서사시 『백두산』 간행.

제3회 만해문학상, 제1회 대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등 수상.


차례


이용문 / 방앗간집 딸 / 오복이 아버지 / 오복이 할머니 / 말감고 / 이현상 / 질경이 / 득순이 / 득순 어미 / 무녀리 / 문매기 / 김정호 / 남순이 / 유병렬씨 전실 딸년 / 남춘이 / 칠  수 / 최만식이 / 재룡이 / 정읍 여인 / 쌍  례 / 쌍례네 / 노래할지어다 / 생불이 할머니 / 생불이 할아버지 / 노래를 폐할지어다 / 옥순이 어머니 / 옥순이 아버지 / 옥순이 / 옥  상 / 이  녕 / 정분이 / 미자 어머니 / 미  자 / 박  연 / 사팔뜨기 노인둥이 / 정생 홍도 / 순임이 작은어머니 / 마서 심서방 / 김목공이 일대기 / 유  유 / 선  자 / 대장간 부자 / 한만걸이 마누라 / 박지원 / 단속곳 도둑놈 / 김용국 / 요까티 순자 / 의주 홍부자 / 넓적이 / 넓적이 어미 / 상이군인 / 그 처녀 / 채영묵 / 채영묵이 어머니 / 채병묵이 / 송시열 / 부  용 / 장터 영자 / 방의원 마누라 / 방의원 / 김개똥 / 순  자 / 생  피 / 마서 정연덕이 / 정연덕이 막내누이 / 공짜술꾼 / 오성륜 / 거짓말쟁이 / 이희광 / 추석 뒤 / 뻔뻔이 / 뻔뻔이 마누라 / 석금이 / 원오 화상 / 며느리고금 / 대복이 어머니 / 영실이 / 여서방 / 김호익 / 일본도 / 김서장 / 배불뚝이 / 임종면 / 임종면 재취 / 박봉양 / 재  례 / 장독대 / 검정몸뻬 / 검정몸뻬 아비 / 남의 옷 백 벌 / 팔마비 / 이  름 / 달치 포구 / 달치 포구 다정옥 / 이씨 종가 시엄씨 / 이득구 / 요까티 봉모 / 박진홍 / 최만석 주임 / 달 / 밤나무 주인 / 윤달이 / 응달 나무 / 소서방 / 융 / 쌍둥이 자매 / 이칠구 / 용이 할아범 / 도식이 마누라 / 낙서쟁이 / 장치기 김옥섭이 / 유장사 / 도두머리 우래옥 / 비인 과부 / 정씨 몸종 / 비인 장사와 판교 장사 / 풍 / 말  례 / 임두빈 / 임두빈 마누라 / 거지 계집애 / 우병덕이 / 조남술이 / 옥봉이 / 삽시도 이장 / 반공포로 / 한정기 / 운천석물 고석관 / 고석관이 아들 / 고석관이 딸 / 체장수 / 충승 충지 형제

찾아보기


오복이 아버지


딱 한번 추석때 와서

한 댓새 집에 머물다가

홀연히 또 떠나간다

꼬장꼬장한 오복이 아버지

옥생각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내일 모레 눈감을 어머니 있건만

염소똥 같은 외동아들 있건만

물에 물 탄 듯한 마누라

그러나 속 깊은 마누라 있건만

집에 붙어 있으면 숨차는지

벌떡 일어나

하늘 본다

하늘가 구름 본다

그러다가 아버지 무덤 벌초나 하고 나서

또 떠나가버린다


행색이야

늘 그 행색이매

여기저기 별 수 없는 떠도는 막일꾼으로

강원도 땅도

충주 제천도

안 다니는 데 없이

떠나가버린다


술에 약하여

술 두어 잔에 잠들어버린다

작년에 없던 흉터

새 흉터

팔에 그어져 번쩍거리건만

도시 이런 오복이 아버지 입 열어본 적 없이

또 떠나가버린다


이마적 고로롱고로롱 누워 있는 늙은 어머니

갈자리 갈대 도막 분질러대며

저런 인간을

내 뱃속에 두었으니

내 탓인지

영감 탓인지

하늘 탓인지


오복이 할머니


시름시름 누워 있다가도 조금만 빤하면 일어난다

이른 아침 이슬 차고

산 넘어 사래밭에 간다

누구 따라올까보아 달아나듯이 간다

그 비알진 밭에 가

한번 쭈욱 살펴보고

일면 자갈 주워내고

일면 풀 맨다

종일 사람 구경이라고는 씨도 없다

싸가지고 간

주먹덩어리 깡보리밥 삼키고

쉴 참도 없다

밥 먹고 바로 매던 풀 맨다

매어놓은 풀 벌써 시들어

그 풀냄새가 동무이런가

그런 하루 팍 저물어서야

물것 덤벼들고

잔솔 밑 물병 보이지 않게 어두워서야

허리 쳐 일어난다

가져갈 것 없으니

모깃불 덮을 풀이라도 한 다발

혼자 산 넘어 돌아오는데

밤새 솟적다 솟적다 벌써 청승떤다

돌아오는 마을이래야

어디 변변한 불빛 하나 있는가

그저 입에 넣을 것 넣고

어둠에는

고된 몸도 가려지매

바로 구들장 지는 마을이다

어머님 이제 오세유

하는 기어들어가는 며느리 말소리

귀하디귀한 손자놈이야

벌써 자빠져 잔다

마당 구석 나팔꽃 오른 데로

반딧불 두어개 난다


득순이


괜스러이 마른번개 친다 아침부터

쇠미 길갓집

외주물집

거기에 무슨 화초담쟁이겠는가

무슨 흙담이겠는가

무슨 놈의 싸리울 짚울타리이겠는가

거적때기 걸친 일도 없이

그냥 초가삼간 덜렁

길에 나붙어

문 열면

방안의 빈댓자국 붉은 댓잎사귀 다 나오고

득순네 머리 매고

누워 있는 것

다 보인다


그 길갓집 딸 득순이

누가 데려가야지

나이 스물아홉이면

두메 마을에서야

재취자리 아니면 갈 데 없는데

두 모녀 싸움 나면

득순네 청승떠는데

아이고 저년은 첩복도 없어 시앗복도 없어

첩살이도 못 가는 년이여

아이고 내 원수여

홀어미 욕이나 배불리 얻어먹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어느 날

득순이 떠나버렸다

누가

대천정거장에서 막차 타는 것 보았다 한다

장항 가는 버스 타는 것 보았다 한다

댕기 딴 머리

미장원에 가 다 잘라버리고

지지고 볶고 떠나는 것 보았다 한다


득순 어미


딸 도망간 뒤

다리병신으로

혼자 밥 끓여먹고

거미줄에 걸리고

혼자 나무해 끌고 오고

절뚝절뚝

혼자 군소리

끊이지 않고

오사할 년

오사할 년

어찌 이게 딸 욕인가

세상 욕이지

나무비녀 꽂으나마나

머리 숱 성겨

낭자라고 탱자만한데

남의 밭 고구마 캔 밭 더트며

잔 고구마 주워 담으며

혼자 군소리

참 내

참 내

그러나 단 한번도 슬퍼보지 않았다

어디에 슬플 만한 하늘 있는가


슬픔도 혹이로다

사람 이하에는

슬픔도 괜히 풍류로다


쌍례


대천 아랫갈머리 건너 쇠미에 가면

낯선 사람 가면

제일 먼저 쫓아나오는 계집아이

쌍례

하루내내 무슨 일이 있겠는가

낯선 사람 가면

지키고 있다가 반색하며

쫓아나오는 계집아이

쌍례

각시풀 뜯어다가

각시 만들어

너 가져라

너 가져라

나누어주는 계집아이

쌍례

그 사팔뜨기 눈으로

낯선 사람 가면

제일 먼저 쫓아나와 헤실헤실 웃는 계집아이

헌 광목치마 기워 입었을 뿐

단속곳도 안 입고

아무것도 안 입고

맨바람 숭숭 드나드는 계집아이

쌍례


딸만 아홉인데

그 가운데 딸 쌍둥이 한배 있어

쌍례하고

뒷례하고 자라나다가

뒷례는 묻혀버렸다

둘이 클 것을 혼자 커서 그런가

말만한 쌍례

그만 일찌감치 눈맞아

염소 풀 매러 나온

아랫갈머리 지동춘 영감한테

참빗도 받고

동전도 받고

눈깔사탕도 받더니

나이 열여섯 다 못되어

지영감 소실로 가버렸다


낮의 지영감

누가 오면 집안 계집아이라 하고

밤의 지영감

어서 어서 들어와

기명을랑 내일 식전에 치고

하며 안달하는데

어서 들어와 허리 주물러주어

안달하는데


어린 시절

그렇게도 사람께나 바치더니

사내라고

피 식은 영감땡감 몸이나 뎁혀주고

콧김이나 쐬어주는 등글개첩

쌍례


그러나저러나

밥이야 굶지 않으니

서방복 그만두고

식복으로 살어리랏다

쌍례


쌍례네


딸만 아홉에다가

슬슬 계명워리짓도 해

어느 놈은

딴 서방 소생이기도 하지만

다 본서방 성 받아

어엿이 임금 왕자 왕씨 딸들이라

그러나 딸부자가

어디 부자인가

태어난 코맹맹이 소리로

멸치젓 사아

갈치젓 사아

자하젓 사아


환갑 회갑 넘어서도

멸치젓 사아

새우젓 사아

갈치속젓 사아


이 세상 사는 일이

젓 이고 다니며 파는 일이요

젊어서는 사잇서방질도 더러 하는 일이요

가을 하늘 푸르건만

그 푸른 것이 무슨 까닭이겠는가

쌍례네야

하늘 모른다

구름 모른다


젓냄새밖에 낼 줄 모르는 쌍례네

달 밝은 밤에도

한숨 모른다

노여워 욕사발 퍼부으면 퍼부었지

한숨 따위 모른다

그것 하나 기막힌 힘이라

밤새 달빛 저 혼자 부서진다

딸년들 제 힘으로 시집갈 년은 가고

못 가는 년은 못 가

집이나 보거라

집 보다가 나가고 싶거든 나가거라


생불이 할머니


대천읍 관촌 앞

생불이네 집 송방집

옛날 보부상이나 개성 상인들 연락하던 송방집

이제는 그냥 성냥 엿 과자 등잔기름 따위

참숯 소주 사이다 따위

묵은 명태 따위 파는 잡화상이라

부엌 겸 술청 겸 막걸리도 팔았다

이러니 술장사라 하여

마을에서 상것으로 치부했다

딸 하나 달랑 있다가

시집가서

외손자 생불이가 태어나

생불이 외할머니가

생불이 할머니로 불리운들 어떠랴

안방에는 괜히 이대통령의 커다란 사진 걸려 있다

동네 어른들한테

상것 대접받는 값인가

동네 아이들한테는

욕 퍼부어대기 아니면

돌팔매 던지기 버릇 들었다

그러니 자식 없고 손자 없고

아무 짝에도

쓸 모서리 없는 외손자밖에 없지

아나 생불이 할머니

라고 한내장 말썽꾼 관모가 윽박질렀다

그러면 유리창 드르륵 닫아버린다

차 지나가며

흙탕물 튀어 붙은 유리창이었다


그 안에서 원통하고 절통한지

생불이 할머니 우는 소리 나다 말았다


생불이 할아버지


늘 신작로에 나가 어정거린다

길손이 길 묻거나

뉘 집 묻거나 하면

그것 자세자세 가르쳐주고

장날 촌에서 나오는 장꾼들하고

허드레 인사나 하고

아 하늘이 보아주어서

이번 장은 궂은 장 안되겠그만그려

어쩌고저쩌고

이런 인사가 소임이다


공연스러이 뒷짐깨나 지거나

팔짱 끼거나

너무 많이 나와 있었다 생각되면

송방 가서

덧문 세워둔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거나


가을바람 한 자락 기다렸다가

용케 그것 알아맞히고

물에 가

밀물새우나 징게미

체로 뜨거나

모기장 체로 둠벙에 가 훑어오거나 해서

오갈뚝배기에

손수 정성껏 쓿여

혼자 한잔 들어 흐뭇한가


어느새 여름 가네그려

낮달이 차츰

빛나기 시작하는 애저녁

60년 인생 깨쳐

부처나

지랄이나 될 만도 한가

어느새 여름 가네그려


옥순이 어머니


옥순이 생모

그러니까 옥순이 배다른오빠 김무공의 계모

갯것장수 소금장수 나물장수 채소장수

어느 장수 안해본 것 없다

워낙 밖으로 나다니는지라

거기에 무슨 알뜰살뜰한 것이 붙어 있겠는가

그저 정정한 몸 서서

무거운 것 이고 나다니는지라

한가위 송편 솜씨 없다

송편이라고 빚으면

넓적한 것이

꼭 제 귀만했다

큰 귀 두 개 가진 옥순이 어머니

나이 여든까지도

수수모가지 광주리 이고

저문 수수밭 휘영청 일어섰다

그 걸음밭에서 부싯돌불 빛났다

길하고 하나인 아낙

흙하고 둘이 아닌 아낙

고려 대지의 아낙

하늘이 무너져내려도 끄떡없는 아낙

옥순이 어머니

웬만한 사내 두엇인 듯

온 마을 든든했다


옥순이 아버지


옥순이 아버지

그러니까 정분이 아버지

그러니까 정분이 오빠

김목공이 아버지

평생 조끼 하나 입지 못하고

늘 동저고리 바람으로 살아온 가난이나 판 무식이나

세상 이치야 먼동 터 훤했다

술보다 담배가 좋다

금방 피우고 나

다시 담배 꾹꾹 눌러 불 붙인다

식구들이 채독 걸려도

겉으로는 놀라는 기색 내색지 않았다

한산 이씨 문구네 형

갈말 여릿재 골창에서

총 맞아 죽은 것을 달려가 묻어주었다

세월 흘러

그 무덤 면례도

정분이 아버지가 나서서 해주었다


모진 세월일수록

거기 반드시 인정 깊으나 깊은 사람 있다

변하는 세월일수록

세월 뒤켠에 변할 줄 모르는 사람 있다

간장은 짜고

물은 달다

이 세상 아무리 망해버려도

다시 세상 일으키는 사람 있다

그런 사람 가까이

멀뚱멀뚱 옛 마음씨 그대로인 사람 있다


옥순이


김목공이 여동생

찔레순 꺾어 먹고

장다리

공다리 꺾어 먹고

그렇게 커서

두근두근 시집가 어찌 사는지

친정 올 때 되었는데도


그렇게도 달음박질 잘 치던 처녀

장다리꽃 꺾어 들면

장다리밭 나비 따라와

나비하고 달음박질치던 처녀

시집간 지 3년 세월 어찌 사는지

아이 배어

아이 지워버렸다는 소식 있고

그 뒤로 어찌 사는지

목덜미 점 하나 어찌 사는지


미자 어머니


고향 한산에서

일찌감치 부모 저 세상 보내고

어찌 어찌 한내까지 흘러와

남의집살이하다가

김목공이와 눈맞았다


김목공이 거름으로 쓰느라

역전 이 집 저 집 뒷간 치워

그 거름 져나르는데

그때 눈맞고 배맞췄다

인연은 똥지게에도 있어

똥 구린내도

어엿이 사랑이었다


훗날 어디가 좋아 눈맞았느냐고 하면

그냥 다 좋았다고 했다


미자 낳아 길러

어느덧 미자하고 걸어가면

미자 어머니가 더 작은 키였다

그러나 쟁기질 빼놓고는

무슨 일이나 억척이었다

시부모 섬기는 것도 몸에 불났다


그런 미자 어머니 하는 말 있다

부자는 곡간에서 인심 나고

가난뱅이야 아침 이슬에서 복 나온다

부지런해야 한다

부지런해야 한다

부지런하면

하늘이 우박이라도 내려주신다


미자


김목공이 딸

난리통에 어떻게 크는 줄도 모르게 컸다

먹은 것도 없이

복학으로 빈 배가 올챙이배였다

네 팔다리 무우말랭이로 말라비틀어져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개구리 고아 먹이는 것이 약이었다

회초리로

콩밭 뒤져 개구리 후려쳐 잡아다가

그것 고아 먹여서 키웠다

그 미자 커서

대천역전 나서면

사방의 눈길 쪼르르 모여든다

눈부셨다

다가가고 싶었다

수밀도 같았다

단 하나 아버지 김목공이 눈 닮아

먼데 바라보면 까닭없이

아버지처럼 세상이 싫어졌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라디오 가게 노래 쟁쟁하건만

대천역 모랫바람 부는 날

미자에게는 사랑도 싫다

그저 대천에서 홍성 갔다 오고

예산 갔다 오고

수덕사 일엽 스님 찾아갔다 오고

어느 때는 천안까지 갔다 온다

이런 미자의 뜻 알아주는 사람 하나

오직 미자 어머니

영감 잃은 미자 어머니

딸이 무슨 큰 일로 다녀온다고

올 시간 되면

대천역까지 마중 나가

조각달 뜬 밤

함께 돌아오기도 한다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고 따지는 일 없이

오로지 딸의 말 몇 마디에

암만

암만

암 그렇지

암 그렇고말고


넓적이


잘난 놈은 잘났으나

못난 놈은 못난 놈끼리

무던히도 넓은 세상이구나


북선에서

북선 청천강 어디에서 피난 온

아이 윤정길이

엿목판 가슴 앞에 걸고

거기 미제 꿀 눈깔사탕 요깡 건빵 나부랭이

오징어 나부랭이 담겨

드문드문 팔렸다


앞뒤로 눌렀는지

얼굴 납짝하여

이름은 모르나

장터 술도가 옆 넓적이라면 다 안다

뒤통수에 돈짝만한 흉터 있어

넓적이라면

그 흉터에 햇빛 비쳐 번쩍번쩍 다 안다

끔 장사하다가

학교 편입해 학교 다녔으나

본바닥 아이들이 깔보아

친구 하나 없었다

그러더니 국민학교 졸업하고 어디로 갔다

어디 가 무얼 먹고 사는지

어디에 가

사람이 짝 있는 법이라

되게 얽은 여자라도 만나

서로 지고 들어가

아들딸 낳고 사는지


하늘이 너무 크니

하늘보고 짐작할 일 하나도 없다


그런데 누가 장항에서 넓적이 보았다 하고

장항 천안 사이

느려터진 완행열차 안에서

틀림없는 넓적이 보았다 한다

아니야

가면 멀리 갈 사람이여

전라도나

경상도 어디나

서울 하왕십리나


넓적이 어미


넓적이가 끔 판 돈

건빵 판 돈 다 모아

막걸리 사먹었다

막걸리 졸업하고

소주하고 배갈 사먹었다


들은 말인즉 피난길에서

미군 두 놈한테 강간당하고

그 길로 실성하여

그때부터 술꾼 되었다 한다


술 취하면

사내더러는 좆이라 하고

여자더러는 씹이라 했다


야 이 좆대가리 간나새끼 인사하고 가라우야

야 이 씹구멍에

꿩대가리 박은 에미나이야

나한테 인사하고 지나가라우


제 아들 넓적이 있거나 말거나

덜렁 덥지도 않은 날 저고리 벗어

젖통 다 드러내놓고


야 이 씹구멍에

날감자 박은 년아 인사하고 지나가라우야


채영묵


대천 떠난 30년 뒤

채영묵이 중동으로 돈 벌러 간 기술자 마누라 꼬여

수천만 원 갈취하고

더 가져오라고 때리고 패다가

고발당해 쇠고랑 찼다

부전자전이 아니라 모전자전쯤 된다

제 어머니 빼다 박아

늘 생글거리며

여자가 좋아하게 이쁘장한 영묵이

교도소 나와

사촌이 살고 있는 대천에 왔다 갔다

대천 사람들이 알아보고

술자리 만들어주었더니

술 먹고 엉엉 울었다

술집 색시가 손수건 꺼내

눈물 닦아주었다

아버지 맹꽁이차 운전수는 진작 죽었다 한다


채영묵이 어머니


채영묵이 아버지가 맹꽁이차 운전수였다

트럭 본네트가 짧아 맹꽁이차였다

거기에 짐도 가득 싣고

사람도 빼곡하게 실었다

그런 때

그 맹꽁이차에 탄 사람들

영락없이 콩나물같이 순했다

정기버스가 없던 시절이라

장날에는 장짐 실은 장돌뱅이가 독차지했다

좀처럼 크락숀소리 울리지 않았다

아무리 소가 길 막아도

아이들이 길 비키지 않아도


이렇게 채영묵이 아버지가 집 비우는 날 많자

채영묵이 어머니 방 하나 남아돌아

하숙 쳐 가양에 보태어 썼다

워낙 물색 좋은 여자라

국민학교 5학년 아이 어머니가 아니라

생처녀같이 싱그러웠다

검정 사지바지에

걸을 때마다 엉덩이가 보기 좋았다

진분홍 털스웨터 차림이었다

달밤의 박꽃처럼 어여뻤다

거기다가 생글생글했다

누구에게나 먼저 웃는 얼굴이엇다


그러더니 그만 나이 아래 하숙생하고

고등학생 하숙생하고 통정하고 말았다

대천농고 2학년 아이

그 아이도 학교 작파해버렸다

끝내 둘이 도망쳐버렸다

그렇게 되자 채영묵이 아버지도

남우세스러워 맹꽁이차에 제 짐 싣고

운전수 옆자리에 우는 영묵이 앉혀

대천바닥 썰렁하게 떠나버렸다

괜찮다 괜찮다 사람은 어디 가나 살 데 있다


방의원 마누라


본래 술집 돌던 여자인데

방준식이 만나

아이 배자 달라붙어 살기 시작했다

턱이 겹치고

귀가 길쭉하게 처져서

복덩어리라 했다

턱 뾰쪽 빤 준식이가

돈 벌고 출세한 것도

제 덕이 아니라

마누라 덕이라 했다

남편 면의원 된 뒤

그 마누라 한내 나들이갈 때

저만치 딸 순자 앞세우고

몸통 흔들며

두 팔 흔들어대며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가는 걸음걸이었다

그 전에는 먼저 인사하더니

이제는 누가 인사해야 아는 체한다

물론 금비녀 끼고

낭자도 사발만하게 커졌다

저런 ! 고개 돌려

땅보다 하늘하고 더 친하며


방의원


한내에서 술장사로 돈 벌었다

그러나 술장사라 해서 사람 대접 못 받는지라

그만 술장사 그만두고

논 7천 평 사고

밭 2천 평 사서

관촌으로 이사 왔다

그러나 술장사 내력 아는지라

누구하나 대접해주지 않았다

여기에 포한이 져서

면의원에 출마 당선되니

하루아침에 방준식이가

방의원이 되었다

방의원 마누라가 나서서

우리 방의원 방의원 하고

말머리에 달고 다녔다

어느덧 관촌 양반부스럭지들도

방준식이가 집 나서면

방의원 하고 대접했다


마서 정연덕이


마서 서룡리 웃말

서당에서 제일 공부 잘하던 연덕이

그런데 스물아홉에도 장가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고자라 했다


인물 한번 잘났는데

부리부리한 눈에

떡 벌어진 가슴팍

철이 바뀌어도 감기 못 들어온다


누이가 생피 붙은 이후

대천으로 이사 가 건어물전 벌였으나 맡겨두고

대천 앞바다에만 나갔다

하루내내 해수욕장 수박 먹고 나

그 수박씨 애잔한 잎새 틔워

파르라니 나 있는 것도 보며

느린 파도소리 들으며

바다 바라보며


드디어 바다 위 뱃놈 될 생각했다

다음날 대천ㅇ업조합 직원한테 줄 넣어

보령 제1호 갈치배 타기도 했다


그렇다 바다 위에서는

과거도 없고 내일도 없다

그날과

그날의 파도 끝없을 따름이다


정연덕이 막내누이


언니 연옥이가 생피 붙어버렸으니

누이 연복이야 시집갈 길 막혔다

언니 일로 운 것은

정작 연복이뿐이었다

늘 다정한 계집애


대천으로 이사 온 지 한 달 못되어

그 연복이 집 나갔다

계룡산 신중이 되어 흰고무신 신었는지

아니면 온양 온천에 가

늘어지게 잠자는 갈보가 되었는지


집안에 일 하나 생겨

이렇게 집안 식구 흩어져

흩어져

이 세상 넓은 것인가


집안 식구 빨래 다 하고도

손끝 놀리지 않던 계집애

누가 데려가면

그 집 복 찰 계집애

연복이


그러나 어디 가서 무슨 몸인지


뻔뻔이


요까티 강순달이

이발값 아껴

댂칼 갈아 거출거출 면도 시늉하고

면도 시늉하면

보는 사람이야 어쨌거나

면도하고 나서

얼굴에 물 바르고 나서면

그 기분 괜찮은지라


떡 본 김에 제사인지라

잔칫집이나

초상집 가서

하루 삼시 세때 잘 먹고

국수 두 그릇 먹어도

눈치 받지 않고

그것으로 부족하여라

반드시 남은 음식 걷어가지고 일어선다

돼지고기 비계에다

점잖은 윗손님 술상 홍어 찐 것도 걷어가지고

허리 아프지도 않으며

끙 ! 하고 일어선다


초상집 일가붙이 어른이 나와

자네는 문상 왔나

음식 챙기러 왔나

하는 점잖은 핀잔 따위야 코방귀이다

아니 자네 순달이 여전히 뻔뻔하네그려 하면

그래서 나를 뻔뻔이라 부르지 않소

강순달이라면 모르지만

뻔뻔이라면 오소산 이짝 저짝에서

나 모르고 어쩌겠소

하고 너스레 떨며 일어선다


먹던 묵

먹고 남은 고사리나물 숙주나물

흰 소금 따위

음식뿐 아니라

쓰고 남은 백지 조각 따위도 가지고 일어선다

찬바람 불면 누가 막아주겠나

문구멍 막아주는 것은 이것이여

문풍지 우는 밤

문바람 막아주는 것은 이것이여

하고


한번은 떨어진 옷고름 주워 담다가

옷고름 주인 순자 어머니한테 걸려

아니 한다 한다 하자니까

이제는 남의 옷고름까지 떼어가?

하자

떼어가다니요

줏어가는 것하고 떼어가는 것하고는

구별할 줄 알아야

이 세상에 하늘 있고 땅 있어요

참 내


순자네 개가 뻔뻔이 알아보고

꼬리깨나 흔들어 배웅한다

옷고름 빼앗기고 서운한 뻔뻔이 강순달이 뒤에서


뻔뻔이 마누라


낭자에 젓가락 비녀 꽂은 강순달이 마누라

눈은 뜨는지 감았는지

늘 째져 있을 뿐

그런 눈으로 용케 앞을 본다

앞뿐 아니라 뒤도 빤히 짐작한다


강순달이에

강순달이 마누라라고

어찌 서방과 딴판이겠는가

남의 집 부엌이나 뒤란에

그놈의 마당발 들여놓기 망정이지

그런 곳에 들어갔다 하면

누더기 앞치마에 감춰가지고 나오는 것

반드시 있다


친정에 가서는

단속곳 안에

친정조카 돌 선물 은수저 훔쳐 꽂은 것 떨어져

친정 올케와 대판 싸우고

발 끊겨버렸다


밤중에 잠 안 와 팔베개 고쳐 베고 나서

아니 요새 당신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하니

하다못해 과부네 굳은 된장이라도

한 사발 가져오지 못하니

하자

서방 순달이도 한 마디

그러는 임자는 무엇이여

그 좋은 솜씨 어디다 처박아두고

손목 잘러버려

손목 잘러버려


밤중 귀뚜라니 소리 점점 줄어든다


임종면


장항부두 통통배 두 척

15마력짜리

10마력짜리

거기에다 중선 세 척의 선주 임종면이

그 임종면이 자전거 타고

허리 꼿꼿이 세우고 지나가면

서천군수도 서장도

읍장도

물 건너 군산항만청장도

저 앞에서부터 알아보고 굽신거린다

아직 수염 기를 나이 아닌데

여덟팔자 수염까지 단청했으니

절 받을 만한 임종면이

늘 양복 조끼에 시계금줄 걸려 있고

칠피구두는 자전거 페달과 함께 돌며 번쩍거린다

칠산바다 조기는 다 임종면이네 조기라 하고

마까오 물건은 다 임종면이네 물건이라 한다

돈으로 요 깔고 자고

돈으로 이불 해 덮고 잔다 한다

그런데 그 임종면이네 집

불행 있다

딱 하나

외아들이 간질병 나면

방바닥 나뒹굴며

비싸디비싼 옛날 백자 항아리 부수어버린다

흰 거품 물고

눈 흰자위 뒤집혀져

나자빠져

꼭 무당벌레 뒤집혀진 듯이 지랄한다

아버지 임종면이 들어와

그런 병신자식 지랄에

찬물 한 양철동이 퍼부어버린다

이 원수야


임종면 재취


임선주 임부자 본마누라 고생만 실컷 하고

배 한 척 두 척 사들이자

그만 병 들어

그 길로 칠성판 지고 갔다

지랄병 아들 달랑 남겨놓고 갔다

거기에 천안 처녀 하나

논 사주고 밭 사주고 가마 태워 왔는데

장항에 오니

당장 제1미인이라

눈 같은 살결에

눈동자는 흑진주 저리 가거라

앵두입술에

어느 때는 생대구 이리 같은 입술에

검은 머리 가리마 쪽 곧아 푸르러라


한 마디 더 보태자면

둥근 얼굴 영락없는 보름달이라

한번 나들이 나서면

그 누구 감히

그 자태 바라볼쏘냐

그저 쉬쉬쉬 꿀꺽

흘끔 바라보고 목젓 막혀버린다

그런 미인인지라

임종면이 재산 다

그 재취 베갯속에 간다 한다

아이고 어디 저게 사람이여

신선 아니면

백년 묵은 여우 둔갑한 것이여

저 치맛자락 땅에 닿은 것 좀 보아

그 밑에 고무신 버선발 좀 보아


그런데 그 임종면이 재취가

전실 자식 지랄병 아이 살인죄 쓰고 잡혀갔다

간질병으로 나뒹구는 아이를

수쳇구멍에 처박아 죽였다 한다

그러나 임종면이 배 한 척 팔아

그 재취부인 풀려나왔다

그리하여 그 재취 수덕사로 마곡사로

부여 고란사로

아들 하나 점지해 달라고

칠성불공 앉히러 연락부절로 다녔다


3년 뒤 아들 하나 낳았다

기쁨 찼다

그러나 백일 넘기고 죽었다

장항거리 어디에도

그 재취부인 보이지 않았다

임종면이 통통배 다 넘어가고

중선 하나는 덕적도 앞바다에 가라앉았다


아름다움이여 파괴와 멸망이여


껌정몸뻬


1 · 4후퇴 피난민 행렬이

아랫녘으로 아랫녘으로 내려가다가

전선이 38선 언저리서 맞대어 완충 이루자

죽어도 서울 가서 죽어야 한다고

다시 올라갔다

큰 길로만 올라가다가

마을에 들러

보리 한 자쯤 자라난 이른봄

나물 캐어

화덕에 걸고 나물국 끓여먹었다

거기에 구호양곡으로 밥이라고 해먹었다


그 북행 피난민 행렬에서

동네 간장 얻으러 오는 처녀

껌몸뻬

흰 무명실로 더덕더덕 기워 입은

껌정몸뻬

검은 눈썹 두 마리 볼 만하다

그 처녀 들창코 내밀고

간장 달라고

한 집에 들어가

한 시간도 앉아 졸라댔다

아무리 인심 좋은 마을이나

간장 된장 다 떨어진 난리인지라

없다 해도

곧이 듣지 않고 졸라댔다


그러다가 숨겨둔 것 한 갱끼

기어이 얻어가고 마는 껌정몸뻬 아가씨

그게 어디 아가씨인가

그냥 돌멩이거나

황소 뿔이거나


흠 북선년 독한 년이여

어디 가서도 살기는 살어

어느 바위 너설에도

올라앉은 엉겅퀴꽃이여


껌정몸뻬 아비


제 딸 사는 힘 질기다고

제 딸 앞세워

먹을 것 얻어가는

껌정몸뻬 아비

황해도 사리원 영감

일제 때 수리조합장 했다 하나

그런 것 같지도 않은 영감

피난민 머무는 미창 창고에서

다른 사람들 다 부지런히

먹을 것

땔 것

입을 것

쓸 것 찾아다니는데

손 놓고

그냥 낯선 타관 한눈팔고 있는 영감

딸 없으면

어쩔 뻔했나

그냥 내려오다가

개성 토성 언저리서 죽었을 영감

아무나 보고 빙그레 웃으니

혹시 이쪽에서 긴가민가 계면쩍어

어이할 수 없이 빙그레 답례하는데

썩 근사한 한 마디

우리 좋은 세상 오우다 꼭 오우다

제 이마빡 먹사마귀 믿듯이


임두빈


무창포에서 멀리 대천 선창이 보인다

대천 바다에서 태어나

무창포로 와 흘러와 사는 암두빈

날마다 선창에서

갯바람에 절어 사는데

이따금 저 건너 대천 쪽 바라보지만

거기 가본 적 없다

가볼 생각 없다

잠깐 말미 내면

버스 타고 가면 금세 대천인데

아버지 보아도 그렇고

형을 보아도 그렇고

그냥 내리닫이 10년 20년을

무창포 선창 떠난 적 없다

 

충청도 사람 조상 유난히 섬기지만

임두빈이야

그런 조상 거들떠본 적 없다

그저 맞아들이는 것은

날마다 홍합배 갈치배라

만선 들어오면

그것 퍼내느라 숨쉴 겨를도 모자라

이렇게 선창 막일로 살아가며

계집 생기고

자식 생겨

밤 늦게 막걸리 먹고 집에 가면

그때에야

아이고 우리 상식이 잘 놀았느냐

하고 희끗희끗 수염발 문지른다

암 조상은 없어도 자식은 있다

 

임두빈 마누라

 

무창포로 흘러와

선창 구석 상밥집 식모살이하다가

임두빈 타진 옷 꿰메주고 나서

그 길로

임두빈 마누라 되어

참기름집 옆에다

방 얻어 살림났다

얼굴에 촘촘이 주근깨 덮여 있어

말할 때마다

웃을 때마다

그 주근깨 쏟아질 듯하지만

아기 낳아

그 아기 얼러대는데

얼씨구 얼씨구 하고 기뻐 어쩔 줄 모르는데

그렇게 얼러대는데

기쁜 주근깨도 함께

얼러대는데

밭에 밭이랑나비

바다에 물결이랑나비 큼직하기도 하여라

 

웅천석물 고석관

 

군산 밖 옥산에서 농사짓다가

투전 끝발에 논밭 날리고

군산 수산시장에서 생선 좀 만지다가

그 노릇도 작파하고

강 건너

웅천에 마음 붙여

검은 돌 만지기 시작했다

난리 지난 뒤라

한동안은

어디 비석 세울 자손 있던가

여기저기

집 들어서고

새 거리 트이면서

차츰 산에 언덕에 밭두렁에

그냥 맨무덤 두었다가

하나둘 비석 섰다

그때 날랜 고석관이 석물공장 차렸다

밤중까지 돌 쪼는 소리

돌 가는 소리

그러자니 먼 돈 가까이 왔다

그토록 달아나기만 하던 돈

이제 얼쑤얼쑤 어깻짓하며 왔다

고석관이 고부자 되었다

 

대천 미군부대 지프 한 대 사들여 타고 다녔다

그 차 지나가면

자갈길 먼지 자욱히 피어올랐다

땅딸보 고석관이

위가 아래인지

아래가 위인지 모르게 땅달보라

아무리 돈 많아도

술집 색시들 넌즈시 에누리했다

 

그래서 고석관이 술 취하면 틀림없다

술상 차고 일어난다

일어나 돈 뿌리고

문 밀치고 나와버린다

청천하늘에 별도 많아

뭇별들 넌지시 에누리한다

너도 사람이라고 술 취했구나 하고

 

별 뜬 하늘에 늦은 달 떠올라와

저 아래 조용한 술집 마당 내려비치며

허허 저기 저 술집에는

그 고석관이 안 왔구나

 

고석관이 아들

 

어머니 타겨

인삼 다려먹어도 파리파리하다

고석관이 아들 영수

나이 열일곱인데

고등학교 다니다가 그만두고

집안에서 논다

겨우 마당 맨드라미하고 논다

몸이 허약하매

눈뜨기보다

눈감고 있을 때가 좋았다

그러다가 눈이 좋아져

책을 읽었다

밤새도록 읽었다

진주탑 마도의 향불

어디 그뿐인가

수호지

어디 그뿐인가

토정비결까지

 

동네 사람들

공장 사람들 모르는 것 있으면

거기 가 묻는다

콧잔등에 푸른 심줄 돋아난 영수

그 영수 모르는 것 없다

 

끝내 계룡산 신도안 드나들다가

신도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훔치훔치 그 산중 굴속으로

 

고석관이 딸

 

어디서 날아 온 딸 정순이

영수하고

배다른 동생 정순이

이 계집애 돈에 밝아

어릴 때부터 돼지저금통 채워쌓더니

커서

아버지한테 타는 용돈 안 쓰고 모아

어느새 밭 하나 샀다

밭 2백 평짜리

 

아버지한테 밭 샀다고 말하자

술 취한 아버지 기뻐할 줄 알았으나

아니다

뭣이 ! 네가 밭을 사 저금통으로 밭을 사

네 에미하고 다른 데 하나도 없구나

네 에미도 돈이라면

죽고 못 살더니

 

그러나 오빠 집 나간 뒤

열네살 정순이 그 계집애

댕기머리 잘라

단발머리로

일꾼 꼼짝달싹 못하게 다스린다

아저씨 방아달 밭에 재 내가야지

왜 안 내가고 있어요?

집 안의 잿간에 재 차면

그 집이 어디 사람 사는 집이유?

 

한쪽 볼에 얕은 볼우물

그것이 덩달아

화난 얼굴 더하여준다




posted by 황영찬

2015-015 대나무

 

글 / 김준호●사진 / 박보하

2004, 대원사

 

 

시흥시매화도서관

SH013811

 

082

빛12ㄷ  234

 

빛깔있는 책들 234

 

김준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식물생태학으로 석사 · 박사 과정을 이수하여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주사범대학과 서울대 자연대 교수를 역임하고, 한국식물학회 · 한국생태학회 · 한국생물과학협회 회장을 지냈고,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와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환경운동연합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보하-------------------------------------------------------------------------

경남 거창에서 태어낫으며 네 번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을 가졌다. 1993년 월간 『사진예술』에서 주최하는 올해의 사진가상을 수상하였고 1994년에는 『korean culture』로 한국일보 출판문화상 사진예술상을 수상하였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사진들을 주로 촬영하고 있다.

 

|차례|

 

대숲 예찬

대숲의 사계

대나무의 생태와 환경

대나무의 일생

대숲의 자연 질서

2000년을 이어온 대문화

새로운 대문화를 위한 움직임

참고 문헌

오죽헌  율곡의 생가인 오죽헌에는 검정색 줄기의 대숲이 무성하다.

오죽헌의 오죽(검정색 줄기의 대나무)

 

이 원(園)이 좋아서 사랑하노니

시원하여 더위를 피할 만하다.

소나무 바람은 으슬으슬 불어 대고

연잎에 가랑비는 가늘게 내리네.

산이 가까워 그늘이 난간을 덮고

시냇물 드리워서 찬 기운 발에 든다.

저녁 볕이 여기에 어찌 이르랴.

다시금 대숲이 어우러져 있는데.

爲愛玆園好(위애자원호)    淸凉可避炎(청량가피염)
松風吹浙瀝(송풍취절력)    荷雨灑廉纖(하우쇄렴섬)
山近陰籠檻(산근음농함)    溪懸爽琇廉(계현상수렴)
斜陽那到此(사양나도차)    更有竹林兼(경유죽림겸)

오세신(吳世臣, 생몰년 미상)

 

산림이 구름 속에 숨어 있으니

도덕군자 마음은 생생하구나.

바람 속의 소나무는 신통한 피리 소리 보내오고

달 아래 대나무는 맑은 그늘 띄우네.

여기에서 알맞게 익은 술을 마시며

길고 짧은 소리로 글을 읊조려.

산에 사는 사람이라 어찌 벗이 없으리오.

때로는 두어 마리 새들도 있네. 

林壑隱雲表    生君道者心
風松送靈籟    月竹散淸陰
爰以淺深酒     遂成長短吟
山人豈無友     時下兩三禽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년)


능소화 덩굴 대나무를 휘어 감아도 곧은 마음 지키려고 애를 쓴다네.

태고의 고운 소리 돌에 부딛는 건 물줄기 소리.

凌霄竹抱若貞心   激石波含太古音

윤인서(尹仁恕)

경복궁 자경전의 대나무 무늬판  자경전의 서쪽 담 외벽에는 매화, 난초, 대나무 등의 무늬판이 치장되어 있다.

방갓  방갓은 가늘고 얇게 쪼갠 대오리를 삿갓 모양으로 결어 거죽으로 하고 왕골 속을 엮어서 안을 받치며, 가장자리를 사화판형으로 만들어 완성한다.


 

posted by 황영찬

2015-014 명화의 거짓말 - 성서 편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2014, 북폴리오

 

 

대야도서관

SB101475

 

654.23

나872ㅁ

 

"성서는 기묘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거침없고 지루할 틈 없는 나카노 교코식 명화 읽기

 

권위와 편견을 버려라, 그리고 즐겨라!

도발적인 호기심과 흥미로운 해석으로 가득 찬 성서 이야기

 

서양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미술 감상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나카노 교코 교수의 매혹적인 명화 해설서 <명화의 거짓말> 그 두 번째 이야기. 서양 문화의 기저를 이루는 영원한 베스트셀러. 그리스신화에 이어 이번에는 성서를 다룬다. 천지 창조, 아담과 이브,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담은 구약에서부터 수태고지와 세례자 요한,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최후의 만찬 등을 다룬 신약 이야기를 주제로 한 명화를 훑으며 성서의 주요 에피소드를 흥미진진하게 소개한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와 <E. T.>의 상관관계, 성모 마리아의 수태고지에 대한 다빈치의 숨은 견해,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에게 경배를 보내는 장면에 자신과 후원자들을 타임슬립 시킨 보티첼리,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모아졌던 욕망의 시선을 통해 읽는 서머싯 몸의 소설 <비> 등, 풍성한 이야기의 향연이 펼쳐진다.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종교화를 즐기고 싶은 사람, 혹은 종교화를 통해 성서와 역사와 화가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이교도가 보는 성서에는 '괴상한' 부분이 잔뜩 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은 기묘한 이야기를 과연 화가는 이런 식으로 궁리해서 표현했던 것이구나, 하는 걸 알아차리면 갑자기 그 그림은 매력이 더 커질 것입니다._<저자 후기> 중

 

나카노 교코 中野京子

와세다 대학에서 독일 문학과 서양 문화사를 강의하고 있으며 다양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꽃과 나비를 그린다 - 바로크 시대의 곤충화가 메리안의 일생(사이언스 북스)』『무서운 그림 1 · 2 · 3(세미콜론)』『무서운 그림으로 인간을 읽다(이봄)』『잔혹한 왕과 가련한 왕비(이봄)』『명화의 거짓말 - 그리스신화 편(북폴리오)』 등을 썼다. 서양 역사와 영화, 미술, 오페라, 뮤지컬 등 문화 전반을 종횡무진하는 독특한 시각의 미술 읽기로 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다.

'명화의 거짓말' 시리즈는 서양 문화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고전이자 숱한 명화의 주제가 되어온 '그리스신화'에 이어 이번에는 '성서 이야기'를 다룬다. 역사는 물론, 영화, 광고, 뮤지컬 등 광범위한 문화적 지식을 곁들인 도발적인 질문과 해석을 통해 명화에 씌워진 엄숙하고 권위적인 이미지를 벗겨내고 독자들의 자유롭고 풍부한 감상을 유도한다.

 

나카노 교코 블로그 http://blog.goo.ne.jp/hanatumi2006

 

옮긴이 이연식

미술사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과정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일본의 우기요에浮世繪와 양풍화洋風畵에 대한 논문을 썼다. 학부에서는 그림을 그렸고, 현재 미술책 저술과 번역을 병행하며 미술사를 다각도에서 조명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미술 글쓰기를 주제로 강의도 하고 있다.

『미술영화 거들떠 보고서』『위작과 도난의 미술사』『유혹하는 그림, 우키요에』『눈속임 그림』『아트 파탈』을 썼다. 옮긴 책으로는 『무서운 그림』(1권, 3권), 『맛있는 그림』 등이 있다.

 

진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름답다. 하지만, 거짓 역시 그렇다.

- 랄프 왈도 에머슨

 

|목차|

 

성서에 나오는 이들

 

구약성서

코는 그만, 손가락으로 |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지혜와 맞바꾼 영생 | 크라나흐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 마사초 <낙원에서의 추방>

인류 최초의 살인자 | 블레이크 <아벨의 시신을 발견한 아담과 이브> / 코르몽 <카인>

하늘까지 닿아라 | 브뤼헐 <바벨탑>

수수께끼를 내는 하느님 | 렘브란트 <이사악의 희생> / 카라바조 <이사악의 희생>

야곱보다는 시원시원한 에사오 | 빌만 <야곱이 꿈꾼 풍경> / 들라크루아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사랑이었을까? 루벤스 <삼손과 들릴라>

목을 든 미녀 | 알로리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들고 있는 유딧> / 젠틸레스키 <유딧과 하녀>

인더벌 :: 큰 죄는 일곱 개뿐? | 보스 <일곱 가지 대좌와 네 가지 종말>

 

신약성서

축복받았다고는 하지만 | 레오나르도 다빈치 <수태고지> / 로세티 <주님의 여종을 보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 브뤼헐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유명인과의 기념 촬영 | 알트도르퍼 <동방박사의 경배> /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

세례와 잘린 목 | 프란체스카 <그리스도의 세례> / 클림트 <유딧 Ⅱ <살로메>

제자들 | 카라바조 <성 마태오의 소명>

마리아 막달레나 | 티치아노 <성모 마리아 막달레나> / 크리벨리 <마리아 막달레나>

최후의 만찬 |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배신자의 입맞춤 | 조토 <예수를 배신함>

예수는 보았다 | 벨라스케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 티소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가 본 모습>

요한의 묵시록 | 뒤러 <묵시록의 네 기사들>

위대한 아들, 위대한 어머니 | 티치아노 <성모 승천>

심판의 날이 온다면 |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저자 후기

역자 후기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는 피렌체에서 몰락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각, 회화, 건축에서 수많은 걸작을 남긴 르네상스의 거인이다. 생전에 이미 '신과 같은 미켈란젤로'라고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스스로의 재능에 회의를 품고 줄곧 고뇌했다. 60대 무렵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불쌍한 사내다. 그렇게 뛰어난 구석은 거의 없다. 젊었을 적부터 성냥이라도 만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진심으로 한탄하고 있다.

덧붙여 아래 사진 속 바티칸 근위병의 기발한 패션 역시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했다는 설이 있다. 정말 대단하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아담의 창조』

1512년, 프레스코화, 280×570cm, 시스티나 예배당 소장(바티칸 시국)


- 12년에 걸친 복원 작업으로 화면의 밝은 색채가 되살아났다.

- 손가락과 손가락이 막 닿으려는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순간, 뒷날 여러 이미지에 인용되었다.

- 하느님은 흰 수염과 흰 머리의 위엄 있는 노인으로 그려졌다.

- 여기 여자가 이브라는 설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 하느님을 떠받치는 것처럼 보이는 날개 없는 천사.

- 고대 그리스 조각 같은 나체 표현

시스티나 예배당(바티칸 시국(市國))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1472~1553년)는 작센 공의 궁정화가로서 혜택받은 인생을 보냈다. 특유의 구불구불한 선으로 표현된 여성 누드의 차가운 관능미는 알프스 이북에서 인기를 끌었다. 일본에서는 루벤스가 그린 풍만한 여체와 마찬가지로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루카스 크라나흐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1530년, 유화, 81×114cm,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오스트리아)


- 하늘에 둥실 떠 있는 하느님의 얼굴. 나쁜 짓을 했다는 사실을 숨기려 해도 결국 들키고 만다.

- 하느님의 명령으로 아담과 이브를 추방하는 이는 케루빔(지품천사智品天使)이다.

- 낙원은 우거진 수풀 속에서 동물과 인간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

- 나긋나긋한 몸을 배배 꼰 창백하고 여윈 여체는 크라나흐 그림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북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다.

- 화면 위쪽의 사과나무에 휘감긴 것은 상반신만 여자의 모습인 뱀이다. 당시에는 뱀을 종종 이런 모습으로 그렸다.


마사초(Masaccio, 1401~1428년)는 아깝게도 페스트로 요절했지만 르네상스 양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마사초 『낙원에서의 추방』

1425~27년경. 프레스코화, 208×88cm,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 브란카치 예배당 소장(이탈리아).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년)는 시류를 전혀 따르지 않는 화풍을 구사했기 때문에 생전에는 거의 인정받지 못했으나 20세기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지금은 환상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시(특히 시집 『무구의 노래Songs of Innocence)』로도 이름이 높다.

윌리엄 블레이크 『아벨의 시신을 발견한 아담과 이브』

1826년경, 템페라, 33×43cm, 테이트 갤러리 소장(영국)


- 카인의 이마에 '낙인'이 찍힌 순간. 미켈란젤로를 숭배했던 블레이크는 그를 따라 울퉁불퉁한 근육을 세심하게 묘사했다.

- 불온한 검은 구름, 쫓기는 듯한 어둑한 태양……, 광기가 감도는 괴이한 표현은 200년 전의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현대적이다.

- 깜짝 놀라 몸을 뒤로 젖힌 아담, 몸을 굽히고 슬퍼하는 이브, 길게 누운 아벨의 시체.

- 시체를 묻기 위해 삽으로 깨끗하게 파놓은 장방형 구덩이.


◐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 1845~1924년)은 프랑스 아카데미의 중견 화가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의 밑에서 반 고흐, 로트레크, 베르나르, 그리고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 1867~1943년)가 공부했다고 한다. <카인>을 발표한 것은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발견된 다음 해인 1880년이다. 고고학의 대유행에 편승해 이 그림도 호평을 받았다.

페르낭 코르몽 『카인』

1880년, 유화, 380×700cm, 오르세 미술관 소장(프랑스).


◐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1525년경~1569년)은 출생 연도도 출생지도 불명으로, 수수께끼가 많다. 1551년에 오늘날 벨기에 안트베르펜 화가조합에 등록했던 것이 알려졌다. 그 뒤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귀국한 1555년부터 죽기 전까지가 천재성을 훌륭하게 꽃피워낸, 짧지만 풍요로운 기간이었다.

타로카드 '탑'

피터르 브뤼헐 『바벨탑』

1563년, 유화, 114×155cm,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오스트리아).


- 위층은 이미 생활공간이 되었다. 빨래가 널려 있고 나귀가 짐을 나르고 있다.

- 탑 여기저기서 붕괴가 시작되고 있다.

- 왕이 시찰하러 왔다. 지상의 신인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는 석공들.

- 인간의 욕망을 흡입하여 불길한 생물로 변해버린 탑. 구름을 뚫고 올라가고 있다.

- 브뤼헐의 시대에 사용되었던 갖가지 건축기계가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 당시 번창했던 안트베르펜의 항만 풍경


◐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t, 1606~1669년)는 플랑드르의 루벤스와 나란히 17세기를 대표하는 네덜란드 화가, '빛과 그림자의 마술사', '영혼의 화가' 등의 별명을 갖고 있다.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 『이사악의 희생』

1635년, 유화, 193×132cm,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러시아).


- 천사의 부드러운 손이 아브라함의 울툭불툭한 손을 붙잡는다.

- 아브라함의 손에서 떨어지는 칼, 날이 잘 선 것처럼 빛난다.

- 아브라함의 커다란 손이 아들의 얼굴을 뒤덮는 모습이 잔혹하고 폭력적으로 보인다.

- 희생양으로 죽을 운명을 받아들이고 저항도 하지 않는 이사악.

- 이사악은 자신이 지고 온 장작 위에 뒤로 묶인 채 눕혀졌다. 목을 단숨에 베이고 불에 태워질 판이다.


◐ 미켈란젤로 메리시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Caravaggio, 1571~1610년)는 극적인 명암 표현으로 후세의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이탈리아 화가. 강렬한 빛과 짙은 어둠의 콘트라스트를 종교화에도 끌어들임으로써 동시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성격도 과격해서 싸움을 하다가 사람을 찔러 죽이고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 죽었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카라바조 『이사악의 희생』

1603년경, 유화, 104×135cm, 우피치 미술관 소장(이탈리아).


◐ 미하엘 루카스 레오폴트 빌만(Michael Lucas Leopold Willman, 1630~1706년)은 지금은 거의 잊힌 독일인 화가.

미하엘 루카스 레오폴트 빌만 『야곱이 꿈꾼 풍경』

1691년, 유화, 87×105cm, 베를린 미술관 소장(독일).


◐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년)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등 여러 걸작으로 알려진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생부는 당시의 유명한 정치가 탈레랑으로 알려졌다.

외젠 들라크루아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1857년, 프레스코화, 751×485cm, 생 쉴피스 교회 소장(프랑스).


- 울창하게 우거진 숲의 묘사, 주의 깊게 배치한 나무들.

- 뒷날 고갱도 같은 제목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들라크루아의 이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 안쪽에 그려진 사람들도 야곱의 일행이다. 야곱이 부자였음을 알 수 있다.

- 야곱의 종자와 노예들이 가축을 끌고 재물을 싣고 서둘러 간다.

- 천사가 오른팔로 야곱의 허벅지를 꽉 쥐고 있다. 뒤엉킨 양쪽은 호각지세로, 마치 춤을 추는 한순간을 정지시킨 것 같다. 샐리 포터 감독의 영화 <탱고 레슨>에서 댄서 두 사람이 이런 포즈를 취했다.


◐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년)가 이 그림을 완성한 것은 겨우 32세 때다. 의상의 질감과 어두운 그늘을 묘사하는 훌륭한 솜씨, 색채와 빛의 풍요로움, 인물 묘사의 적확함, 드라마틱한 순간을 잡아내는 솜씨는 천재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삼손과 들릴라』

1609~10년, 유화, 185×205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영국).


- 들릴라의 복잡하고 모호한 표정이 보는 이의 상상을 한껏 자극한다.

- 삼손이 지닌 괴력의 원천인 머리카락을 능숙한 손놀림으로 잘라내는 사내.

- 벽감에는 비너스와 그녀의 아들인 큐피드의 상이 놓여 있다.

- 삼손이 무력해지면 방으로 밀고 들어오기 위해 병사들이 문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다.

- 사랑하는 여인을 믿고 아이처럼 잠든 삼손. 들릴라의 손은 삼손의 등을 사랑스럽게 쓰다듬는다.


◐ 크리스토파노 알로리(Cristofano Allori, 1577~1621년)는 피렌체의 화가다. 거의 이 작품만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 셈이다.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들고 있는 유딧』

1613년, 유화, 139×116cm, 피티 궁 소장(이탈리아).


◐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년경)는 여자임에도 이탈리라 미술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고 왕후 귀족으로부터 많은 주문을 받았다. 그 뒤 그녀는 오래도록 잊혔다. 후세 미술사가들이 여자는 수준 높은 역사화를 그릴 수 없다는 편견에 사로 잡혀서 그녀의 작품 대부분을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의 그림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최근에 비로소 그녀의 재능이 알려졌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유딧과 하녀』

1614~20년, 유화, 114×94cm, 피티 궁 소장(이탈리아).


- 바구니 안에 홀로페르네스의 창백한 얼굴이 보인다. 천에 묻은 피가 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 하녀라기보다 동지 관계로 보인다.

- 무슨 소리라도 났는지 돌아보는 두 사람. 유딧은 "침착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녀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는다. 긴박한 순간을 포착했다.

- 어둠 속에 떠오른 유딧의 새하얀 가슴께는 에로틱하지만 삼백안의 옆얼굴은 늠름하다.

- 그림에 등장하는 검의 의미는 '정의'. 그녀의 살인은 정당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녀는 검을 마치 쓰바키 산주로(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쓰바키 산주로>의 주인공)처럼 느긋하게 어깨에 걸쳤다.


◐ 히로니뮈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년경~1516년)는 생년도 불명이고 삶도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살아 있을 때부터 작품은 인기를 누렸고 장례식 때는 지역의 명사로 대우받았다고 한다. 그가 죽은 다음 해 루터가 교회 문에 면죄부에 대한 질문장을 붙여 드디어 종교개혁의 막이 올랐다.

히로니뮈스 보스 『일곱 가지 대죄와 네 가지 종말』

1475~80년경, 유화, 120×150cm, 프라도 미술관 소장(스페인).


- 아래 그림부터 시계 방향으로 '분노', '질투', '탐욕', '폭식', '나태', '색욕', '교만'.

- 애초에는 둥근 테이블에 그려져 있었는데, 뒤에 지금의 모양으로 바뀌었다.

- 노란 홍채 한가운데 동공이 있고, 거기서 예수가 오른쪽 옆구리의 성흔을 내보이고 있다. 아래에는 "마음이여, 마음이여, 하느님이 보고 계신다"라고 쓰여 있다.

- 네 귀퉁이의 그림은 보스가 그린 것이 아니라 뒷날 다른 사람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년)는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꼽힌다. <모나리자>가 너무도 유명해서 초상화를 여럿 그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작품 대부분이 종교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수태고지』

1472년경, 유화, 98×217cm, 우피치 미술관 소장(이탈리아).

 

- 낮은 돌담은 주변을 모두 막고 있지 않고, 길이 구불구불 밖에서 안으로 이어진다.

- 레오나르도 특유의 웅대한 원경

- 처녀성의 상징인 흰 백합을 들고 무릎을 꿇은 채 마리아를 축복하는 대천사 가브리엘.

- 흰 백합에 암술과 수술이 분명하게 나뉘어 그려져 있다. 레오나르도가 처녀 수태에 회의적이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게 되는 부분.

- 마리아의 차림은 이처럼 붉은 옷에 푸른 망토가 릴반적이다. 붉은 옷은 희생의 피를, 푸른 망토는 하늘의 진실을 나타낸다고 해석된다.


◐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년)는 당시 화단이 라파엘로를 최고의 모범으로 삼았던 것에 반발하여 라파엘로 이전의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재평가해야 한다며 '라파엘 전파'를 결성했다. 이후 그는 점차 신비주의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 『주님의 여종을 보라』

1849~50년경, 유화, 72×42cm, 테이트 갤러리 소장(영국).

 

◐ 피터르 브뤼얼은 스스로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 비밀로 가득한 화가였다. 농민의 생활 풍속을 많이 그렸지만 자신은 농민이 아니었다. 여러 지식인들과 교류했고 합스부르크가의 후원을 받기도 했다. 이 때문에 브뤼헐은 농촌에 대해 흥미로워하며 어리석고 무지한 농민을 지적으로 관찰했을 뿐, 합스부르크가를 비판했던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미술사가도 있다. 그려진 것 이상을 추측하는 것은 미술사로서의 해석이 아니라 사회학적 해석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리도 상상력이 빈곤할까.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치세 동안 플랑드르에서 종교상의 이유로 살해된 사람의 수가 10만이라고도 하고 15만이라고도 한다. 동포가 개미처럼 짓밟히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그림만 팔리면 된다고 생각했다면 브뤼헐의 그림이 이렇게나 수수께끼 같을 이유가 있을까? 애초에 누구나 금방 알아차릴 수 있게 압제자를 비판하는 그림을 그렸다가는 무사할 수가 없었다. 확증이 없는 암시와 은유를 교묘하게 작품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구소련 체제의 동구권에서 SF소설이 흥했던 것처럼.

 

 

피터르 브뤼헐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1566년, 유화, 116×165cm, 벨기에 왕립미술관 소장(벨기에).

 

 

- 여관 벽에는 합스부르크가의 '머리 둘 달린 독수리 문장'이 달려 있다.

- 등록하러 모인 사람들.

- 돼지 방광을 자신의 몸만큼이나 크게 부풀리는 아이.

- 겨울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돼지를 죽이는 부모. 아버지가 목을 따고 어머니가 피를 프라이팬에 받고 있다. 피로 소시지를 만들 것이다.

- 톱을 어깨에 진 요셉과 나귀에 탄 성모 마리아가 마을을 지난다. 그녀는 앞으로 이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예수를 낳게 되는데 누구 한 사람, 세계가 뒤바뀔 전조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 허물어지는 고성(古城)과 그 앞쪽에 지어지는 새로운 집(화면 위쪽) 종교화에서 '구약'과 '신약'을 나타낸다.

 

◐ 알부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 1480년경~1538년)는 16세기 독일의 화가다. 순수한 풍경화의 전통이 없었던 서양 회화에서 풍경을 주로 그린  선구자로 여겨진다.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동방박사의 경배』

1530~35년, 유화, 109×77cm, 슈테델 미술관 소장(독일).

 

◐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년)의 최고 걸작 <비너스의 탄생>과 <봄>도 메디치 가문과의 관계 속에서 나왔다. 피렌체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산드로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

1475년경, 템페라, 111×134cm, 우피치 미술관 소장(이탈리아).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가리킨다.

- 예수의 발에 손을 내밀고 있는 이는 메디치가를 발흥시킨 코시모, 이 그림이 그려질 무렵에는 이미 죽었지만 동방박사 역으로 등장했다.

- 폐가의 무너진 천장에서 성스러운 빛이 내려와 아기 예수를 축복했다.

- 예수와 마리아의 배후에 늙고 무시당하는 존재로서 성 요셉이 서 있다.

- 무리 지은 사람들 속에서 이 그림을 화가에게 주문한 사람이 이쪽을 보며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가리킨다.

- 메디치가의 비호를 받았던 화가 보티첼리가 관람객을 바라본다. 군상회화에 화가가 자화상을 넣는 것이 관례였다.

 

◐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20년경~1492년)는 회화에 기하학의 필요성을 주장한 최초의 화가로 알려졌다. 만년에는 『투시화법에 대하여』 같은 책도 썼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그리스도의 세례』

1448~50년경, 템페라, 167×116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영국).

 

- 일순 흰 구름인가 착각하게 하는 성령의 흰 비둘기.

- 조개껍데기로 예수의 머리에 물을 끼얹는다.

- 돌멩이투성이인 팔레스티나가 아니라 화가 자신의 고향 토스카나를 배경에 그렸다.

- 세례 요한은 무슨 옷을 입었는지가 『신약성서』에서 유일하게 언급된 인물이다. 낙타털 가죽과 가죽 끈이 그것이다.

- 다음에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이 서둘러 옷을 벗고 있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뒤에 잇는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년)는 걸출한 개성으로 세기말 미술의 인기 화가가 되었다. 아름답고 화려한 작품은 합스부르크가 말기의 빈이라는 도시에 딱 맞았다.

구스타프 클림트 『유딧 Ⅱ(살로메)』

1909년, 유화, 178×46cm, 베네치아 근대미술관 소장(이탈리아).

미켈란젤로 메리시 카라바조 『성 마태오의 소명

1600년, 유화, 322×340cm,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소장(이탈리아).

 

- 천상의 빛을 받아 창틀이 또렷한 십자가 모양을 나타낸다.

- 수염 기른 남자는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 걸까, 자신일까, 아니면 고개를 숙인 청년일까? 예전에는 수염 기른 남자를 마태오로 추정했다.

- 한눈팔지 않고 돈을 세는 청년. 예수의 손가락은 그를 가리키고 있는 걸까? 즉 이 청년이 마테오인 걸까?

- 화려하게 차려입은 청년들은 예수가 살던 시대가 아니라 카라바조가 살던 16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패션을 따르고 있다.

- 예수의 손이 만든 이 모양이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 나오는 하느님의 손이다.

- 등을 이쪽으로 향한 사도 베드로.

 

◐ 베첼리오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1487년경~1576년)는 장대한 화풍과 화려한 색채로 온 유럽의 궁정에서 환영을 받았던, 베네치아파 최대의 천재 화가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뒷날 옷을 입은 비전도 두 점 나왔다.

베첼리오 티치아노 『성녀 마리아 맏달레나』

1533년경, 유화, 84×69cm, 피터 궁 소장(이탈리아).

 

- 마리아 막달레나의 어트리뷰트인 향유 항아리가 왼쪽 아래에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 수없이 그려진 마리아 막달레나 그림 중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하늘을 우러러보는 이 아름다운 그림이 특히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옷을 입은 모습을 비롯해 여러 버전이 제작되었다.

- 예수가 승천한 뒤 마리아 막달레나는 동굴에서 기도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 그림도 그런 모습을 그린 것이다.

- 손과 손가락의 묘사는 무척이나 어렵다. 화가에 따라서는 손을 그리는 경우와 그리지 않는 경우에 따라 초상화의 가격에 차이를 두기도 했다. 천재 티치아노의 필치가 완벽하다.

- 빛나는 머리카락으로 알몸을 가린다(가리는 듯 가리지 않는 듯).

 

◐ 카를로 크리벨리(Carlo Crivelli, 1435년경~1494년경)는 보티첼리와 동시대의 화가다. 예리한 선묘와 과도한 장식성이 특징이다.

카를로 크리벨리 『마리아 막달레나』

1477년경, 템페라, 152×49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네덜란드).

 

◐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빈치 마을의 레오나르도'라는 의미다. 오래도록 미술서에는 '다빈치'라고 표기되었지만 이는 그저 '빈치 마을'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최근에는 '레오나르도'라고 쓰는 책도 늘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1495~97년경, 유화 · 템페라, 460×880cm,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소장(이탈리아).

 

- 복음 기자 요한.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여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예로부터 요한은 중성적인 청년으로 묘사되어왔다.

- 후광은 그리지 않았지만 창의 위쪽 벽틀이 반원 모양으로 예수의 신성을 나타낸다. 아랫부분에는 예전에 이웃한 주방으로 통하는 문이 설치되었다. 예수의 다리 부분이 그려져 있었을 테지만 이제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 주의 깊은 세정 작업으로 식탁의 음식이 쾌 잘 보이게 되었다.

- 오른손에 단검을 든 베드로. 만찬 뒤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적의 귀를 자른 에피소드에 근거한 표현이다.

- 은화 주머니를 쥐고 있는 모습으로, 배신자 유다임을 알 수 있다.

 

◐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6년경~1337년)는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다. 그때까지 평면적이고 형식적이었던 종교화에 인간적인 감정을 풍요롭게 불어넣었다. 같은 시대의 시인 단테도 그를 당대 최고의 화가라고 칭송했다.

조토 디 본도네 『예수를 배신함』

1304~06년, 프레스코화, 150×140cm, 스크로베니 예배당 소장(이탈리아).

 

- 베드로가 예수의 뒤로 다가가는 적의 귀를 자르는 장면. 귀가 팔랑 떨어지고 있지만 본인은 아직 아픔도 느끼지 못한다.

- 황색은 긍정과 부정 양쪽의 상징이다. 전자는 아폴론으로 대표되는 빛나는 태양의 색, 후자는 '배신자의 색', 유다에게 걸맞는 색이다.

- 횃불이 밤하늘을 비추는 가운데 수많은 곤봉과 창이 뒤엉킨 모습이 긴박감을 자아낸다.

- 예수를 잡으러 온 신전 측의 행사들과 종자들.

- 조토는 인간의 내면을 표정으로 그리려고 했다. 고귀한 예수와 야비한 유다의 대비.

 

◐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년)는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황혼을 유례가 드문 필치로 후세에 남겼다. 걸작 <라스 메니나스>는 프라도 미술관의 그야말로 성유물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1631~32년경, 유화, 248×169cm, 프라도 미술관 소장(스페인).

 

◐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1836~1902년)는 인상주의 시대의 풍속화가였는데, 50세 무렵 성당에서 예수의 환영을 본 뒤로 종교화를 여럿 그렸다.

제임스 티소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가 본 모습』

1886~94년, 과슈, 26×23cm, 브루클린 미술관 소장(미국).

 

- 붉은 망토를 걸치고 투구를 쓴 로마 병사.

-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책형도에 묘사되는 복음 기자 요한.

- 십자가에 매달린 이는 마리아 막달레나일 것이다. 그녀의 가슴께에 그려진 못 박혀 피투성이인 예수의 양발과 발받침.

- 가운데에서 살짝 왼쪽에 보이는 검은 굴은 골고다 언덕에 있던 매장소. 동굴을 그대로 이용했다.

- 저마다 나름의 생각을 갖고 모여든 구경꾼들이 멀리서 둘러싸고 있다.

- 화려하게 차려입은 예루살렘의 사제장들. '구세주라면 먼저 자신을 구해보라'며 조소했다는데, 이 그림에서는 그저 조용히 올려다보고 있다.

- 화면 중앙에는 성모마리아와 두 여자 신도가 있다(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집행인이 준비한 마비약이나 진통제가 들어 있는 항아리.

 

◐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년)는 이 작품을 발표하고 나서 독일뿐 아니라 온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다. 이보다 한 해 앞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완성되었지만 목판화라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해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쪽이 훨씬 널리 알려졌다. 화면 가운데 아랫부분에 뒤러의 사인이 들어 있다(대문 모양에 D가 들어가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묵시록의 네 기사들』

1498년경, 목판화, 39×28cm, 개인 소장.

 

 

- 선악을 재는 저울.

- 흰 말을 타고 활을 든 '정복자' 혹은 '역병'(오른편 끄트머리), 붉은 말을 타고 검을 든 '전쟁' 혹은 '기근'(중앙0, 검은 말을 타고 저울을 든 '기근' 혹은 '전쟁'(왼편).

- 창백한 푸른 말을 타고 쇠스랑을 든 '죽음'. '죽음'을 따라오는 '저승'이 사교를 집어삼킨다.

- 사람들은 그저 죽임을 당할 뿐.

 

◐ 베첼리오 티치아노는 진정한 천재의 표본으로 젊었을 때부터 이미 완벽한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이 그림을 완성한 것도 겨우 서른 살 무렵이었다. 베네치아의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수도원의 제단용으로 주문된 이 그림은 젊은 티치아노의 명성을 공고히 하고, 그 천재적인 재능을 온 유럽에 떨치게 해준 기념비적인 대작이다.

베첼리오 티치아노 『성모 승천』

1516~18년, 유화, 690×360cm,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수도원 소장(이탈리아).

 

- 비상하는 하느님을 이런 각도에서 그리면 위엄이 약간 떨어진다.

- 푸른 망토를 펄럭이며 기쁨에 겨워 양팔을 벌리고 하느님이 거하신 곳으로 올라가는 성모마리아.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 귀여운 아기 천사들이 나르는 구름은 그림 위쪽의 반원에 보태어 원형을 만들고, 그 중심에 마리아의 얼굴이 들어오도록 구성되었다.

- 하늘로 끌어올려지는 성모를 보며 기뻐하는 신도들.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동시대 사람에게 '신 같은 사람'으로 불린다. 그런 그에게도 콤플렉스가 있었다. 젊은 시절 친구와 다투다 코를 맞아 찌부러진 뒤로, 외모에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르네상스라는 시대 자체가 천재에게도 외관의 아름다움을 요구했고, 3대 거장 중 다른 두 사람, 라파엘로는 천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잘생긴 여성 킬러, 레오나르도도 외모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그런데 '나는 왜'라고 생각했던 걸까? 이 그림 속 가죽에 그려진, 짐짓 뒤틀린 자화상은 자학의 결과라고 한다(정말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최후의 심판』

1536~41년, 프레스코화, 1440~1330cm, 시스티나 예배당 소장(바티칸 시국).

 

- 예수를 둘러싼 사도, 성인, 예언자, 대사교들.

- 화면 맨 위쪽에 엄숙하게 정좌했던 여태까지의 도상과는 달리 이 그림 속의 예수는 근육이 우람한 신체를 드라마틱하게 움직이고 있다. 곁에 있는 성모의 자태도 의미심장하다.

- 열두 사도 중에서 산 채로 가죽이 벗겨져 순교한 성 바르톨로메오. 손에든 가죽에 보이는 비참한 얼굴은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 날개 없는 천사들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죄인들을 무자비하게 주먹으로 때리고 있다. 화면 중앙에는 천사들이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나팔을 분다.

- 지옥의 판관 미노스는 몸에 뱀을 감고 있다. 미노스의 얼굴은 미켈란젤로에 적대적이었던 비아조의 얼굴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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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5-013 만인보 


高銀

2006,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796


811.6

고67만  8


창비전작시


나는 고은의 『만인보』를 읽으면서 인간에 대한 종교적 연민을 배운다. 나는 사람의 삶의 형태에 따라서 어느 쪽인가 하면 사람과 미움의 마음이 분명한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찌들어진 운명의 땅에 태어나 온갖 삶의 형태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사라져간 인간들에 대해서 사랑이나 미움보다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다만 『만인보』를 읽음으로 말미암아서 나 자신이 인간과 삶에 대해서 더욱 경건해지는 것만으로도 『만인보』와 그 작가 고은에 대해서 감사한다.

- 한양대 교수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이영희

 

일찍이 발자끄는 빠리의 호적부와 경쟁하겠다고 호언히였다. 뛰어난 소설가라면 모름지기 이만해야 한다. 그런데 한 시인이 있어 우리 민족의 호적부와 겨루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웠다. 고난으로 축복받은 이땅에서 살아갔던 평균적 인물들의 눈부신 삶과 탁월한 역사적 개인들의 평균적 삶의 자태를 교직한 『만인보』에서 시인은 문득 일천 강물 위에 은빛 도장을 찍는 달빛이 되어 독자들을 저 망망한 민중사의 바다로 인도한다. 소도둑과 혁명가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을 백과사전적 전개 속에서 추구하는 『만인보』는 진실로 민족서사시적 위엄을 스스로 갖추고 있다.

- 문학평론가 최원식



고  은  高  銀

1958년 처녀시를 발표한 이래 시 · 소설 · 평론 등에 걸쳐 13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서사시 『백두산』『만인보』와 『고은시선집』 1 · 2 『고은전집』(전38권)을 출간했다. 현재 세계 시아카데미 회원(한국대표)이다.


차례


머리노래 금강 / 이름 몇 백 / 외할머니 오랜 동무 / 탁  류 / 장항 부두 1 / 순동이 / 장항 기생 / 굴뚝님 / 대천역 / 장항 부두 2 / 대천 이문구 / 나물장수 성산댁 / 봉림이 / 읍장 신중헌 / 짝 / 옛 외가 / 순남이 / 지서방 / 이관구 / 우영감 / 유재필 / 재필이 아버지 / 재필이 어머니 / 대천장 할망구 / 비인만 어부 / 구멍가게 나길섭 / 유영모 / 대천 노창길이 / 화양 정순이 / 행  인 / 솔리 추씨 / 송내 처녀 / 어린 거지 / 삼  절 / 은옥이 / 김돈중 / 제련소 소장 / 대천장 소장 / 대천장 임씨 / 인  월 / 대천 박형사 마누라 / 고봉산이 / 고서방 / 마서 나상하 / 화냥년 옥분이 / 나영순 / 복산이 아범 / 길  례 / 고  종 / 윤서방 / 삼남매 / 청라 도령 우활식 / 석봉이 / 복남이 누나 / 고광순 / 고광훈 / 본마누라 / 김수관씨 / 팔룡이 / 팔룡이 마누라 / 그  손 / 전상국 / 철  새 / 승철이 할머니 / 임  화 / 대복이 아버지 / 봉  자 / 두  로 / 다홍치마 / 뒷산 도사 / 서장옥 / 대천 호박 / 이한종 어르신 / 사모님 / 아기씨 / 머슴 석주 / 송광사 사미 / 귀먹짜가리 / 김학기 / 복산이 에미 / 상거지 노인 / 정순이 / 청라 배창덕 / 창덕이 마누라 / 채완묵이 / 대천장 여장군 / 여서방 / 창조 할아버지의 기절 / 창조 누나 / 박성춘 / 윤덕산 / 덕산이 마누라 / 그 움집 / 우군칙의 머리 / 대복이 아버지 / 대복이 어머니 / 부월이 / 앵  무 / 산업과장 / 보령군수 / 심봉사 / 심  청 / 부  채 / 최건달 전처 / 최건달 / 창호 큰어머니 / 귀동이 아버지 / 성삼문 / 창덕이 아들 형제 / 정  자 / 파리 부자 / 똥통쟁이 / 김암덕 / 신석공이 / 신석공이 마누라 / 신석공이 딸 / 신석공이 어머니 / 김주사 / 이먹고노장 / 대천동국민학교 돈선생 / 비인 염생원 / 삼거리 주모 / 상사병 / 화양 우희만 부부 / 원남이 아비 / 세 젊은이 / 권  율 / 만호 마누라 / 얌전이 / 장항 고진모 / 이발사 주백이 아비 / 주백이


순동이


흐린 물 금강 하류

장항제련소 굴뚝

그 굴뚝의 기나긴 연기 바다로 이어진다

누가 말했던가

조선에서 제일 적막한 장항읍 거리

이쪽에서 저쪽까지 한번 걸어가면 끝나는 거리

그 거리 어중간 국밥집 남창옥

술손님 밥손님 기다려보아야

하루 서너 패로

더 올 사람 없는 남창옥

한밤중 남포불 심지 줄여

불빛은 남겨두어야지

그 집 중노미 하루 하품 열 번

나이 서른이 넘어도

부여 고란사 중인가 땡초인가

계집을 흙 보듯 하고

그저 시키는 일

술청 닦고 쓸고 물 길어다 부을 따름


이 사람이 장항 토박이

이순동이

한산 이씨 순동이

옛날 옛적 고려 이색 이어서

정승 이산해 후손인데

이제 상밥집 중노니 신세라

제 고조할애비가 남인이면 어떻고

제 증조할애비가 농풀월이면 어떻단 말인가


남창옥 주인 마누라

불여우 마누라

이 닦을 때 소금 많이 쓰지 말라 하자

아예 순동이

모래 파다가

모래로 이 닦고 르르르르 헹구어내는데


그런 남창옥 잘되는 일 별로 없다

키우던 개도 슬슬 나가버린다


봉림이


그렇게 달밤에 박꽃 같더니

열다섯 살에

그 봉림이 단발머리

고무줄 줄넘기 멈출 줄 모르는

열다섯 살에


차령산맥이 강원도 오대산에서 비롯하여

원주 치악산으로 올라섰다가

그것이 경기 충청 서운산 흑성산 지나

차령 넘으면

청양 두메 이루다가

이윽고 보령 서천 들판을 건너뛰어

장항제련소 우뚝 솟아

그만 바다로 빠져버린다

그러나 거기서 끝장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솟아나

고군산 선유도 장자도 되어

거기에 동백꽃도 피는데


장항 선창가 봉림이 시집갈 때

시집가기 전날 밤

싱숭생숭

제련소 굴뚝에 대고

장항 선창가 고물상 딸 봉림이

얌전한 봉림이

제 아버지 친구가

서천군 문산면 봉림산 이름 따서

이름 지은 봉림이

다른 것은 그만두고

부디 부디 여드름만 없애주시오 하고 빌며

아버지 술 끊게 해주시오 하고 빌며

어둔 밤 눈물 흘리며 빌고 빌었다

그 여드름쟁이 봉림이


강바람인지 바닷바람인지 비단 같은 밤


순남이


금강 개펄 개흙 범벅으로

변변치도 않은 바지락 캐는 순남이

아버지가 글 배우면

화냥년 된다고

학교 보내지 않아

바지락 캐는 순남이

제 또래 아이들

책보 메고

딸깍딸깍 필통소리 내며

학교 파하고 오는 것 보아도

부러운 생각 눈꼽만치도 없이

개펄 비탈에 맨발 푹 빠지며

바지락 따개비

졸따개비 캐는 순남이


소원 하나

고군산 선유도

그 섬에 가보는 것

석양머리 불타는 바다 바라보며

어느새 저 혼자 캄캄한 처녀가 되어버린 순남이


은옥이


언제나 빨간 두 볼의 은옥이

1 · 4후퇴 때

경기도 연천에서 피난길 나섰는 데

의정부 지나

그만 부모가 폭격으로 죽어버리고

어린 은옥이 하나 살아나

제 이름 송은옥이만은 용케 붙들고

한강 건너

수원이라

천안이라

홍성 예산이라

이렇게 바닷가 대천까지 흘러오며

어느덧 시악시 꼴 박혔다

그 모진 고생으로

어설픈 초다짐밖에는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어느덧 무거운 시악시 꼴 박혔다

대천 복숭아 과수원 조만석이네 양녀로 들어가

키는 작으나

그 몸집 오동통하고 상냥하고

과수원의 고된 일

남정네 두 품이나 해내고


수문리 동네사람들

아이고 은옥이 좀 보아 은옥이 좀 보아

하고 이르던 시악시인데

그러나 이 고장이

충청도 잔반 땅이라

아무 막대기 하나 선 데 없이

그저 떠돌이로 온 은옥인지라

누구도 선뜻 데려가지 않았다

그런 신세라 워낙 은옥이도

늘 어린 시절 고향 그리워하며

시집을 가도

고향 총각한데 가겠다고 입버릇이었는데

어디 경기도 연천 포천이복사꽃 피던 춘색이던가

아직도 폿소리 포연 자욱한 싸움판이 아니던가


그래도 말이 씨 되어

그런 세월 지나서

휴전이라고

총소리 뚝 그쳤을 때

이때다 하고

은옥이 머릿수건 벗고

고향 달려가

실컷 울고불고

양친부모 허묘라도 써두고 나니

마침 총각 있어

만나자마자 성례 치르고

싸움 끝난 폐허에서

가시버시 되니

그렇게 시작하여

떡두꺼비 아들 낳아

그 아들 업고

친정 오듯

대천 수문리 과수원집에 와서

며칠 머물며

어린것한테

과수원 찬바람 마구 쏘이고 돌아갔다

 

대천 이씨네 사랑방 머슴들 입초시에는

으례 은옥이 방덩이가 올랐는데

누가 보기나 했나

그 박속 같은 방덩이

그 살살살 눈 녹는 방덩이

사철 안식교 구제품이나 걸치고

손등 터 구리셀린 바르지 않는 날 없으나

그 손등 손가락 가지런히 예쁘디예쁜 손가락

그 은옥이 방덩이는 고사하고

그 손가락도 이제 없다

 

자 포 떨어졌거든

졸장기라도 두어보아

어서

 

석봉이

 

전실 자식 남매 석봉이 석근이 앞세우고

석봉이 에미 재취로 들어와서

또 아들 낳으니

그게 원수지 어디 형제이겠는가

의붓아비야

남의 자식 꼴 못 보고

에미는 에미대로

전실 자식도 자식이요

새 자식도 자식인지라

 

그저 불 때면

매운 내에 눈물바람으로 날 저무는구나

 

이런 집구석에서 견디다가

석봉이는

제 누이 석근이 데리고

그놈의 집구석 뛰쳐나갔다

 

한사코 남의 집 중 노릇 따위는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 좋더니

끝내 남의 호주머니에 잘도 드나들었다

 

석근아

이 오라비가

너 굶겨 죽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훔쳐온 돈 쏟아놓으면

단발머리 석근이가

그 돈 얌전히 팽기며 훌쩍거린다

 

오빠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여 !

 

이 계집애가 짜기는 왜 짜

 

팔룡이

 

무창포에서

헌 유자망이나 만지작거리다가

대천으로 온 팔룡이

여기 와서

무슨 대수가 있나

막벌이는 거지 사촌이기 십상이지

 

한 마리 용도 거추장스러운데

여덟 마리 용으로 이름 지어놓았으니

아이고

그놈의 용트림에 얽히고 설켜

길이 트인 적 없는

팔룡이

 

어느덧 세상을 제대로 보기 싫어하여

아이들도 질색이고

아이들 노래도 질색이고

이른봄 개나리 피어도

그 개나리 꽃가지 낫으로 쳐내버리고

 

어찌 이런 인간이 되었는지

세상과는 도무지 맞지 않은 사람

최팔룡이

남의 품 팔러 가서도

반품에 그냥 돌아와버리는 사람

딱도 한 사람 최팔룡이

 

정순이

 

관촌 이씨네 높다란 토방머리

오뚝 서서

비 온 끝

분주한 낙숫물 떨어지는 것

언제까지나 바라보는

열다섯 살 정순이

눈 흰창 어찌나 그리 깨끗한지

그 정순이 눈 한번 더 보고지고

열흘은 기쁘리라

 

어서 바람 불어라

내가 연 날려

그 정순이

하늘 드높이 떠오른 연 바라보도록

언제까지나 바라보도록

열흘 아니라 달포는 기쁘리라 아흐 정순이

 

부월이

 

대복이 누나 부월이

아무것 없어도

꼭 하나 손바닥 반절짜리 거울

낡아서

좀 벗겨진 거울

 

그 거울 하나하고 있으면

한나절 온데 간데 없지

시집가면

살림 한번 매섭게 해낼 부월이

 

어쩌다가 백분 사서 바르는데

그 곱돌덩어리

그 부스러기 빻아 바르는데

그것 혀끝에 닿으면

쉬어터진 개살구맛 그대로라

거울 속 얼굴 찡그렸다가 이내 편다

 

거울 보다가

아무도 없는데

제풀에 흠칫 놀라

거울 두고 일어나

재빨리 부엌으로 간다

솥에 물부터 붓고

아궁이에

축축한 것 넣고

어렵사리 불 피운다

건넛마을 감나무에서

감 툭 떨어진다

대복이네 집에야

무슨 감나무 있겠는가

 

부월이 숨겨둔 거울

캄캄한 거울

 

얌전이

 

그 외보조개 웃어 써먹어보지 않고

조만호 딸 얌전이

아니 조만호 딸이 아니라

조만호 마누라 딸 얌전이

머리 곱게 곱게 딴 가시내야

팔월 한가위

널 한번 드높이 뛰어오르지 않고

널뛰며 깔깔대는

동네 시악시들

그 말만한 시악시들 웃음소리 들으며

명절 다음날

어머니 앞에서

어머니 실 감는데

실타래 두 손에 걸어 풀어주누나

밥도 하루 두 끼면 되고

무엇 하나 군입 다시지 않고

우물에 가도

동네 아낙네 뜸할 때

얼른 가 물 길어 온다

그 넓고 밋밋한 이마에 땀방울 돋아

마늘밭

묵은 소매 거름도 혼자 준다

그래도 어머니는

늘 딸에 성이 안 차

아 배추밭 벌레 안 잡고 무엇 하였어

허나 어찌 한 몸에 두 가지 일이겠는가

그 말 들으며

기명 치고 나서

그때에야 남새밭으로 나가는 얌전이

누구 하나 쳐다본 일 없으매

정작 동네 어른도

다른 동네 사람이나 다름없이 낯설어라

까치 까마귀도 낯설어라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도 낯설어라

치마 곱다랗게 기워 입은

열여덟 살 얌전이

속으로만 잉잉거리는 얌전이

 

주백이

 

이발장이 아들 주백이

어릴 때부터 없는 일 잘도 만들어내더니

국민학교 졸업하고

홍성으로 갔는데

거기서 천안으로 갔는데

천안에서 더 나아가

서울 갔는데

3년 뒤 서울 여자 하나 차고 왔다

불과 열여섯살에

벌써 계집이 생겨 차고 왔다

그런데 동네 아낙네 눈 무섭다

암만해도

여염 년이 아니라

놀던 계집이었다

하룻밤 자고 나더니

촌집 답답해하며

부채 부치는 꼴이

석박지에 얌전히 밥 먹을 년 아니었다

 

키 껑충한 주백이 아비

그것도 며느리라고

이발해서 번 돈으로

닭 사다가 닭 고아 먹이고는 했다

 

어느 날 주백이 나가고 없는 날

주백이 어미

빨래하러 나가고 없는 날

아버님

나 그 사람보다

아버님이 좋아요

아버님이 좋아요

하며

마루끝에 둔 삐뚝구두 뒤축으로

마룻바닥 콩콩 찍어대었다

치마 걷힌 다리살 살짝 드러나서

 

주백이 아비 울타리 보니 울타리가 마구 떨렸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