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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23. 12:17 내가 읽은 책들/2017년도

2017-003 드 보통의 삶의 철학산책

 

 

알랭 드 보통 지음 | 정진욱 옮김

2002, 생각의 나무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8922

 

101

보885삶

 

복잡하고 힘겨운 삶을 유쾌하게 만드는 삶의 거장들이 알려주는 행복의 철학

 

지은이 -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196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영어 · 프랑스어 · 독일어에 능통하다. 지은 책으로는 유머와 통찰력으로 가득한 철학적 연애 소설『로맨스』『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키스와 말』이 있으며, 독특한 문학평론서『프루스트는 어떻게 당신의 삶을 바꿨나』, 여행에 관한 에세이『여행의 기술』(근간) 등이 있다. 그의 책은 현재 2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현재 미국 워싱턴에 살고 있으며, 철학과(科) 졸업 프로그램을 지도하기 위해 런던 대학을 오가고 있다. 원제가 '철학의 위안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인 이 책은 영국과 미국에서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였으며, 동시에 영국에서 <철학: 행복으로의 안내>라는 제목의 6부작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방영됐다. 알랭 드 보통의 웹사이트 www.alaindebotton.com에서 그의 근황과 이 책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정진욱

전문번역가. 옮긴 책으로는 <섹스의 영혼>, <독서의 역사>, <제1의 성>, <드 보통의 삶의 철학산책> 등이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다.

- 몽테뉴

 

아직 철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거나

철학을 할 시기가 지나가 버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행복을 맞이하기에 너무 젊거나 늙었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다.

- 에피쿠로스

 

만약 우리의 나이가 2천 살이 아니고,

플라톤의 대화에 관심이 없고, 또 조용히 파묻혀 산다는 이유로

자신은 깨달음을 얻는 데 부적절한 존재라고 생각하기를 그만둔다면,

우리 모두도 현명한 아이디어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 알랭 드 보통

 

차례

 

1장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 소크라테스 Socrates

          지적 회의로의 초대장

          상식에 대한 집착

          소크라테스식 삶의 방식

          소크라테스의 재판

          소크라테스의 죽음

 

2장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한 데 대한 위안 에피쿠로스 Epicurus

          행복, 구매 리스트 하나

          쾌락을 가르치는 철학자

          철학의 임무 - 에피쿠로스의 경우

          행복, 에피쿠로스파의 구매 리스트

          행복의 물질적 환상 - 소박함에 대한 옹호

          행복, 또 다른 구매 리스트 하나

 

3장 좌절에 대한 위안 세네카 Seneca

          세네카의 죽음

          좌절을 설명하는 세네카의 사전

          체념의 기술

 

4장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 몽테뉴 Montaigne

인간에 대한 인정

성적 부적절함에 대하여

문화적 부적절함에 대하여

지적 부적절함에 대하여

 

5장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 쇼펜하우어 Schopenhauer

염세적인 철학자의 연대기 - 쇼펜하우어의 일생

현대인의 러브 스토리 한 토막 - 쇼펜하우어의 해설을 곁들여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6장 곤경에 대한 위안 니체 Nietzsche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용 및 참고문헌

찾아보기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

그대가 아는 것들은 그게 전부인가

 

Socrstes

도대체 무슨 근거에서 이런 혹평을 할까? ……만약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현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일을 삼간다면, 그 주된 이유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인기 있는 것들을 옳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맨발의 철학자는 사람들 사이에 인기 있는 그 무엇인가가 과연 이치에 닿는 것인지를 가리기 위해서 거듭 의문을 제기했다.

소크라테스 거리의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일과로 삼다가 결국 고발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철학자 소크라테스. 그는 아테네의 거리에서 청소년들과 마을의 유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이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묻고 있는 모습으로 낯익다. 그 문답은 항상 '그것은 모른다'라고 하는 무지의 고백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모든 이의 의견을 다 존중할 필요는 없고 단지 몇 명만 존중하면 되고 다른 사람들은 무시해도 좋다는 사실……, 훌륭한 의건은 존중하되 나쁜 의견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다는 사실, 그것 참 멋진 원칙이라고 자네는 생각하지 않는가? 그리고 훌륭한 의견은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의 것인 반면, 나쁜 의견은 이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의 것이지……. 그러니 훌륭한 나의 친구여,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어떤 말을 하든 마음 쓸 필요가 없소. 하지만 전문가들이 정의와 불공평의 문제에 대해 하는 말에는 신경을 써야 하오.

-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린 이 그림에서 소크라테스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철학의 본질을 보여주려는 듯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평범한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

<소크라테스의 죽음> 샤를-알퐁스 뒤프레누아가 그린 이 그림 역시 독배를 들이켜는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그를 둘러싼 친구들을 극적인 포즈로 그려 놓았다. 비통에 겨워 바닥에 무너진 인물들을 보라. 소크라테스만이 동요하지 않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18세기에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갖는 회화적 잠재력에 주목한 많은 화가들이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순간을 비애감을 가득 넣어 연출해 냈다. 자크 필립 조셉 드 생-켕틴(1762, 위), 피에르 페이론(1790, 아래)이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

아테네의 군인과 여성 그리스 남성들에게 전투에서의 승리는 영광된 행위였으며, 당당하게 적을 죽이는 용기는 최고의 덕목이었다. 반면 여성들은 그런 남성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로 칭송받았다.

소크라테스 그는 일년 내내 똑같은 외투를 걸쳤으며 언제나 맨발로 걸어다녔다. 소크라테스와 마주친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그의 외모에 불편해했을 것이다.

철학자들의 도시 아테네 아테네가 철학자들의 도시가 된 까닭은 온화한 날씨와 도시계획 덕택이었을 것이다. 적당한 인구와 작은 크기, 좋은 날씨를 가진 도시에서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고 사색을 즐겼으리라.

파르테논 신전의 기병 조각 그리스인으로서 용맹스런 자가 되려면 군인이 되어야 햇으며, 전투에 나가 적을 죽여야 했다. 그리고 전투에서 무공을 세우거나 장렬하게 전사한 자들의 건강성과 용맹성은 도시 곳곳에서 기림을 받았다.

그리스 도자기 이 화려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그리스인들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공정을 차근차근 진행했을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도 그와 같이 실제로 어려운 작업일 테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식 사고방식

 

1. 확고하게 상식으로 인식되는 의견을 하나 찾아보자.

 

    용기 있는 행동에는 전장에서 후퇴하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덕을 쌓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2. 잠시 상상해 보자. 이런 의견을 내놓는 사람의 확신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거짓이 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 의견이 진실일 수 없는 상황이나 환경을 찾아보자.

   

    용기가 있으면서도 전쟁터에서 후퇴하는 사람은 정말로 없을까?

    전쟁터에서 꿋꿋하게 전투에 임하면서도 용기가 없는 사람은 없을까?

 

    돈을 가졌으면서도 덕을 쌓지 못한 사람은 없을까?

    돈은 없지만 덕이 높은 사람은 있지 않을까?

 

3. 예외가 발견되면, 그 정의는 틀렸거나 아니면 최소한 불명확한 것임에 틀림없다.

 

    용기가 있으면서도 후퇴하는 것이 가능하다.

    전쟁터에서 꿋꿋하게 전투에 임하고 있지만 용기가 없는 경우도 가능하다.

    돈을 가진 악한도 있다.

    가난하지만 덕은 높을 수도 있다.

 

4. 최초의 의견은 이런 예외까지 고려할 수 있도록 새롭게 고쳐져야 한다.

    용기 있는 행동은 전쟁터에서 후퇴와 전진을 동시에 뜻할 수 있다.

 

    돈을 가진 사람은 그 돈을 고결한 방식으로 획득한 경우에만 덕이 있는 존재로 묘사될 수 있다. 그리고 돈을 가지지 못한 일부 사람들도 덕을 추구했으되 돈을 버는 일이 불가능한 환경에서 살아왔다면 역시 덕이 높을 수 있다.

 

5. 그렇게 새로 정리한 주장에서 예외가 발견된다면, 앞에서 거쳤던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 진실은, 만약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언제나 더 이상 논박할 수 없는 주장 속에 담겨 잇어야 한다. 어떤 주장에 대한 이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곧 그 주장에 담겨 있는 그릇된 것들을 발견해 나가는 일이다.

 

6.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빗대어 뭘 말했든 간에, 사고의 산물은 직관의 산물보다 우월하다.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 엘리펀트 맨 희귀병 때문에 끔찍하게 생긴 기형의 얼굴을 가진 주인공은 서커스단의 구경거리가 되어 온갖 학대를 받으며 살아간다. 사실 그는 세익스피어의 고전과 성경까지 섭렵한 아주 박식하고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소크라테스도 그처럼 슬픈 운명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한 데 대한 위안

행복한 삶을 위해서 나에겐 무엇이 필요할까

 

Epicurus

종종 쾌락을 혐오하며 엄격하게 굴었던 사람들 중에 예외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 철학자는 인생을 잘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고자 했던 것 같았다. 에피쿠로스, 그는 이렇게 썼다. "만약 미각의 쾌락을 빼앗고, 성적 쾌락을 빼앗고, 듣는 쾌감을 빼앗고, 또 아름다운 형태를 봄으로써 일어나는 달콤한 감정들을 빼앗아버린다면 나는 행복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에피쿠로스 어려서부터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여행을 다닌 에피쿠로스는 그들의 가르침에 동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십대 후반에 자신의 사상을 정리해 삶의 철학을 세우기로 마음 먹었다. 에피쿠로스 이전까지 유쾌한 삶의 방식에 대한 관심을 그처럼 진솔하게 컬어놓았던 철학자는 없었다.

 

욕망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것들은 자연스럽고 또 필요하다. 또 다른 것들은 자연스럽긴 하지만 불필요하다. 그리고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도 있다.

결핍에서 오는 고통만 제거된다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음식도 호화로운 식탁 못지 않은 쾌락을 제공한다.

이미 인생의 황혼녘에 다다른 마당에 나는 원하노라. 죽음이 덮치기 전에 쾌락의 충만함을 축하할 훌륭한 송가를 하나 만들어 마음이 차분하게 정리된 사람들을 돕기를.

-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르세티 빌라 거대한 저택과 커다란 정원, 저택 앞에는 드넓은 잔디밭, 정원에는 과실수와 관상수 숲이 들어차 잇다. 여름철의 분수 물소리와 겨울철의 설경을 상상해 보라. 이보다 더 넘치게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폼페이의 이시스 사원 프레스코화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였던 폼페이는 로마의 황제와 군인들의 여름 휴양지와 별장지로서 극장, 목욕탕, 바실리카, 신전 등이 지어졌으며, 상점, 수도(水道), 포장도로도 갖춰졌다. 화산재에 묻히기 전까지 도시는 호화로운 조각, 벽화,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다.

성스러운 대화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화가인 지오바니 벨리니(1430~1516)는 종교적인 이야기식 표현을 강조하던 경향에서 자연스러운 배경과 풍경을 강조하는 대담한 자연주의를 전개했다. 그의 <성스러운 대화>에 등장하는 여인 또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테네 학당>의 에피쿠로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54명의 인물 중 에피쿠로스를 그린 부분이다. 에피쿠로스는 사람들에게 과연 절실히 원하는 것이 그 때문에 생길 고통과 고생을 감수해야 할 만큼 의미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바로 당신 곁에 있다.

 

좌절에 대한 위안

이게 진짜 내가 두려워했던 그 상황이란 말인가

 

SENECA

동물은 자신의 목을 매고 있는 밧줄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지만 그것은 오히려 밧줄을 더 단단히 조이는 결과가 된다. ……순응하지 않고 마구 몸부림친다고 해서 묶여 잇는 동물의 고통이 덜해지도록 적당히 느슨하게 만든 멍에는 이 세상에는 절대로 없다. 저항할 수 없는 악에 맞서 고통을 경감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숙명에 굴복하며 참는 것이다.

 

세네카의 두상 '가벼운 슬픔은 말이 많고 큰 슬픔은 말이 없다' 등 수많은 격언으로 기억되는 철학자 세네카. 그는 스스로 세속에 물들면서도, 끝내 인간이 인간다운 까닭은 올바른 이성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모순과 불안에 찬 생애를 살았다.

 

사람이란 도대체 뭔가? 약간의 충격, 약간의 타격에도 터지고 말 혈관…… 자연 상태에서는 무방비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하고, 운명의 여신이 내리는 모든 모욕에 고스란히 노출된, 허약하고 부서지기 쉽소 발가벗은 육체.

그대는 말하겠지.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라고. 그렇다면 그대는,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고, 그것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잇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는 만물의 질서를 바꿀 수 없다. ……우리의 영혼이 순응해야 하는 것은 이 (자연의) 법칙이다. 이 법칙을 우리는 따라야 하고, 이 법을 우리는 준수해야 한다. ……당신이 개조시킬 수 없는 것이라면, 참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린 <세네카의 죽음>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함께 세네카의 죽음은 철학적 죽음의 상징이다. 울부짖는 동료들에게 세네카가 보인 반응은, '철학'을 어디 내팽개쳤느냐는 꾸짖음이자 들이닥칠 불운에 맞서겠다는 결심이 어디 갔느냐는 힐난이었다.

루벤스가 그린 <세네카의 죽음>(1615) 세네카가 비통한 죽음을 견뎌낸 방식에 대한 기나긴 찬양의 역사는 로마시대 이후 많은 그림으로 남겨졌다. 이 그림에서 세네카는 위엄과 고매한 인격의 현자로 그려져 있다.

17세기에 그려진 <세네카의 죽음> 들 루카 조르다노(위, 1680), 게라르트 폰 흔토르스트가 그린 <세네카의 죽음>.

세네카와 소크라테스 가족과 친구들이 이성을 잃고 흐느끼는 가운데 너무도 평온하게 최후를 맞이했던 두 명의 고대 철학자들. 그들은 현실과 극단적인 갈등을 빚을 때도 절대로 의지박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래는 같은 조각에서 세네카의 얼굴.

 

세네카의 명상

 

 

운명의 여신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아.

공적인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인간의 운명도 도시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지.

엄청난 노고의 대가로, 그리고 신들의 위대한 배려로 수많은 세월을 두고 착실하게 올려진 건물일지라도 하루아침에 무너져 사라질 수 있나니, 아니지, '하루아침'이라고 말한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들이닥치는 불운을 감안하면 유예 기간을 지나치게 길게 잡고 있어. 한 시간, 찰나의 순간도 제국을 넘어뜨릴 수 있거든.

아시아의 도시들이, 아카이아의 도시들이 얼마나 자주 단 한 차례의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던가? 얼마나 많은 시리아의 도시들이, 또 얼마나 많은 마케도니아의 도시들이 한 차례의 지진에 삼켜져버렸던가? 이런 참화가 얼마나 자주 키프로스를 쑥밭으로 만들었던가?

우리 모두는 죽을 운명을 타고난 것들에 묻혀 살고 있네.

누구나 죽을 운명으로 태어났고, 우리 역시 죽을 운명의 아이를 낳는 법이야.

모든 것에 기대를 거는 한편으로 어떤 일이든 다 닥칠 수 있다고 예측해야지.

 

루벤스가 그린 <4명의 철학자> 고전학에 관심이 많았던 루벤스는 형이 사망하자 리프시우스, 그리고 그의 제자와 자신이 철학 토론을 벌이고 있는 그림을 그렸다. 배경으로 이들의 학문적 관심을 상징하는 세네카의 두상이 보인다.

로마의 수도교 주어진 그대로의 상태에 대한 인간의 저항을 보여 주는 위대한 상징물. 인간이 모든 좌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인류의 위대한 성취는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의 독창력의 원동력은 '그게 꼭 이런 식이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심지어 더 이상 현실을 개조시킬 희망이 없을 때에도 끊임없이 변화와 진보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낸다.

네로의 두상 네로 앞에서는 인간에겐 이성이 있지만 개에겐 이성이 없다는 말이 무색해진다. 로마 황제 네로가 무차별 살해와 성적 가혹 행위에 몰입한 까닭은 무얼까. 네로는 세네카를 꼭 껴안으면서 사랑하는 가정교사를 해치느니 자신이 죽고 말겠노라고 맹세했지만 결국 세네카는 그에게 죽음을 당했다.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

지식이란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MONTAIGNE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안고 있는 지적 우둔함을 간파한 사람이면 누구나 놀랄 만한 이야깃거리를 갖게 될 것이다……. 인간의 지력을 위대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그런 중요한 인물들에게서조차 그처럼 엄청난 잘못들을 발견할 때, 우리는 인간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이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몽테뉴의 초상 몽테뉴는 인간의 온전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데 관심이 이었다. 그의 『수상록』은 그 전에 나온 심각한 책들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은 것들로, 이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이미지를 깨뜨리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몽테뉴 덕분에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어리석은 짓을 했거나, 어리석은 말을 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보다 넉넉하고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우리 인간은 한갖 멍청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안고 있는 지적 우둔함을 간파한 사람이면 누구나 놀랄 만한 이야깃거리를 갖게 될 것이다. 인간의 지력을 위대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그런 중요한 인물들에게서조차 그처럼 엄청난 잘못들을 발견할 때, 우리는 인간에 대해, 인간의 감각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이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사람이다. 인간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것치고 나에게 낯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몽테뉴가 살았던 성 젊어서 프랑수아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하여 르네상스를 접한 몽테뉴의 아버지는 활동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라틴어 교육을 위해 집안의 모든 하인들에게도 라틴어를 말하게 한 환경에서 자란 몽테뉴는 서민들에게 애착을 갖도록 농부들에게 맡겨져 자유롭게 그들과 어울렸다.

몽테뉴의 원형 서재 독서광이자 애서가로 유명했던 몽테뉴는 이 탑 안의 원형 서재에서 평생 택을 읽고 사색했다. 독서는 몽테뉴에게 커다란 위안이었으며, 그는 삶이 버거울 때면 커다란 서재를 갖추고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으로 살기보다는 동물로 살아가는 삶의 이점을 검토했다.

몽테뉴 서재의 나무 들보 몽테뉴는 자신의 서재 천장 들보에 성경과 고전에서 따온 명구 57개를 새겼다. 여기에는 정신이란 것이 우리 인간에게 감사해야 마땅한 어떤 것을 주었는지 의심하는 금언들이 새겨져 있었다.

앙리 3세와 캐서린 데 메디치의 초상 우아한 부인들은 절대로 볼 일을 보지 않는다거나 근엄한 왕에게는 엉덩이가 없다는 터무니없는 통념은 몽테뉴로 하여금 그들도 똥을 눅 엉덩이를 가지고 잇다는 점을 이 세상에 상기시키도록 만들었다.

몽테뉴의 초상 토마스 데 뤼가 그린 몽테뉴의 정장 차림 공식 초상. 속내를 읽기 어려울 정도로 다소 장중한 이 초상 속의 몽테뉴는 그가 『수상록』에서 드러내기를 바랐던 그의 참 모습이 아니었다. 몽테뉴는 이런 이미지가 아닌 자신의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을 모사하려고 최대한 노력할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

투피 인디오 몽테뉴의 지적 호기심은 세계로 열려 있었다. 그가 읽은 바로는 아메리카 인디언 종족인 투피 인디오 남자들은 부인을 한 명 이상 둘 수 있었으며 남자들은 부인 모두에게 똑같이 헌신한다. 그들의 윤리 제도는 오직 두 가지 조항으로 구성되는데, 전투에서의 단단한 결의와 부인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그려진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포괄적인 지식을 탐구한 인물이자 지나치게 똑똑한 저자. 그의 천재성은 후계자들로 하여금 창조적 작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앞선 지식을 회의하는 무례함을 저지를 용기를 갖지 못하게 한다.

『수상록』 1580년에 보르도에서 출판된 『수상록』 초판본 속표지. 에세이의 시조로 불리는 몽테뉴의 『수상록』은 자기 탐구의 고백서이자, 인간에 관련된 모든 것의 탐구서다. 몽테뉴는 이 책에서 '되도록 자세히 나를 살펴보고 끊임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지만 내 안에서 발견되는 허약함은 감히 입밖에 내어 말하기 힘들다. ……조금만 방향을 바꾸거나 관점을 바꾸면 내 안에서는 온갖 모순이 발견된다'고 털어놓았다.

키케로의 흉상 고대 로마의 최고의 지식인이자 변론가, 문필가로 불리는 키케로. 몽테뉴는 키케로의 책에 대해 공허한 이야기로만 가득 차 있다고 평했다. 몽테뉴는 학자들이 고전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쏟는 이유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을 지적인 존재로 비치고 싶은 허영심을 가지고 잇기 때문이었다.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

사랑이 삶을 지배하는 이유

 

SCHOPENHAUER

이 모든 소란과 흥분은 왜일까? 이런 조급함과 아우성, 고민과 격렬함은 왜일까? 왜 그런 하찮은 것이 이다지도 중요하게 다가올까? 여기 의문의 대상이 된 것은 결코 시시하지 않다. 그와는 반대로 중요한 것은 성실하고 열정적인 노력으로 철저히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모든 사랑 놀음의 최종적인 목표는…… 인간 삶의 다른 어떤 목표보다도 실제로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사랑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누구든지 아무리 심각해져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쇼펜하우어 염세주의 철학자요 생(生)의 철학적인 쇼펜하우어. 그는 자신이 철학의 주요 문제를 해결했다고 확신하고 자신의 사상이 수많은 책의 원천과 계기가 될 것이라고 자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독한 철학자였던 그는 세상이 자신의 위대성을 인정해 주지않는 데 대해 실망하고 내면으로 화살을 돌려 자신의 영혼을 쉴 새 없이 괴롭혔다.

 

사랑이란 것은…… 성적 관심은 별도로 하더라도, 혐오스럽고, 경멸할만하고, 심지어 상극으로까지 보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맡기게 만든다. 그러나 종(種)의 의지는 개인의 의지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그 연인은 자신의 것과 상반되는 모든 특질들에 눈을 감아버리고, 모든 것을 간파하고, 모든 것을 그릇 판단하고, 자신의 열정의 대상과 자신을 영원히 묶어버린다. 그런 환상에 빠진 사람은 완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그 환상은 종의 의지가 다 충족되고 나면 금방 사라지고 이제 평생을 혐오하면서 살아야 할 파트너만 남게 된다. 바로 여기서, 매우 이성적이고 심지어 탁월하기까지 한 남자들이 종종 잔소리가 심하고 악마 같기도 한 여자들과 사는 이유,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도 왜 자신들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쇼펜하우어의 부모 쇼펜하우어의 아버지 하인리히와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는 이들 부부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가 고독하게 지내는 동안 어머니는 연회를 베풀었다. 또한 아버지가 극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동안 어머니는 즐겁게 지냈다. 그것이 여인들의 사랑이다……."

윔블던의 이글 하우스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루트르(Arthur)'라는 세례명을 받게 했는데, 그 까닭은 이 이름이 유럽 어느 나라에서나 똑같이 '아루트르'라고 발음되기에 후에 사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그는 어린 쇼펜하우어가 '세계라는 큰 책'을 배울 수 있도록 프랑스와 영국 등지로 보내 외국어를 익히고 고급문화를 접하게 했다.

젊은 시절의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처음부터 철학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의학 공부를 먼저 하다가 칸트 연구가인 슐체의 강의에 감동 받아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다. 그는 슐체를 통해 '신과 같은 플라톤'과 '경탄할 만한 칸트'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이 두 사람의 사상을 통해 그의 사상은 '염세주의'라고 할 만한 것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노년의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점점 더 울적해져서 공포와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발사가 면도칼로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고 생각해 절대로 면도를 하지 못하게 했고, 잘 때에도 침대 밑에 권총을 넣어 두고 잤다. 죽음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의 안전과 건강에 극도로 신경 썼던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말년을 보낸 집 헤겔의 죽음은 쇼펜하우어에게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헤겔을 죽인 콜레라를 피해 프랑크푸르트로 간 쇼펜하우어는 이곳에서 비로소 성공을 맛보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차츰차츰 알려지기 시작햇고, 그는 이러한 성공에 매우 만족해햇으며, 자신의 명성을 보도한 기사를 찾아 읽고 매우 즐거워했다.

엘리자베스 네이와 그녀가 만든 쇼펜하우어의 흉상 사랑의 비통함에 관한 한, 아마도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존재일 쇼펜하우어는 말년에 가서 명성이 높아지자 여성에 관한 시각을 누그러뜨렸다. 폐렴으로 죽은 쇼펜하우어의 장례식은 아직 죽지 않은 상태로 매장되지 않을까 두려워한 그의 유언에 따라 죽은 지 며칠이 지난 후에야 치러졌다.

마사치오가 그린 <낙원에서의 추방> 아담과 이브가 낙원을 떠나면서 울부짖는 절망. 마사치오는 이 그림에서 절망의 정수를 표현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오류성과 연약함의 보편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을 떠나는 순간 우리 인간 모두가 그곳에서 추방된 셈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이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갖고 있다. 그것은 혼자서만 고통받고 외로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식'이다.

 

곤경에 대한 위안

피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어떤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NIETZCHE

인간이 걸리는 병중에서 가장 나쁜 병은 사람들이 자신의 병을 다스리는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치유로 보이는 것이 결국에는 그 치유의 대상이 되었던 병보다 더 독한 무엇인가를 낳았다. 즉각적으로 효과를 나타내는 수단들, 마취와 도취, 소위 말하는 위안들은 무지하게도 치유책으로 여겨졌다. 여기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고통을 즉각적으로 진정시키는 방법들은 그 고통을 낳은 불만을 악화시키는 대가를 치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니체의 초상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첫 인상은 하나의 개인적인 특징일 뿐인데도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결정짓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신사답고 가장 합리적인 사람도, 만약에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잇다면, 언제나 기다란 턱수염에 딸린 존재로만 보일 뿐이다. 이를테면 쉽게 화를 내고 그러다 간혹 난폭해지기도 하는 군인형(型)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사람은 그런 인간형으로 대접받게 될 것이다.

 

나와 약간이라도 인연을 맺고 있는 인간 존재들에게 나는 고통과 절망, 질병, 냉대, 경멸이 내려지기를 바란다. 나는 그 사람들이 지독한 자기경멸과 자기불신의 고문, 패배당한 자의 열등감과 동떨어져 지내지 않기를 희망한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풍부한 결실을 남긴 사람들의 삶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대 자신에게 악천후와 폭풍을 견디지 못하는 나무들이 앞으로 거목으로 훌쩍 자랄 수 있을지를 한번 물어보라. 불운과 외부의 저항, 어떤 종류의 혐오, 질투, 완고함, 불신, 잔혹, 탐욕, 그리고 폭력, 이런 것들이 사실은 호의적인 조건에 속하지 않는지 곰곰 따져보라. 이런 것들을 경험하지 않고는 어떠한 위대한 미덕의 성장도 좀처럼 이룰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히틀러와 악수하는 엘리자벳 니체 니체는 누이 엘리자벳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니체의 마지막 저작 『힘에의 의지』는 그의 사후에 엘리자벳에 의해 정리 출판되었다. 사진에서 나치에게 매료된 엘리자벳이 히틀러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니체는 그녀를 '복수에 불타는 반유대주의자 멍청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위버멘쉬 혹은 슈퍼맨 초기에 니체를 영어로 옮겼던 번역자들은 부주의하게도 위버멘쉬(초인)를 전설적인 만화의 주인공 슈퍼맨으로 옮겨 적었다. 그러나 니체의 위버멘쉬는 하늘을 휙휙 나는 인물이나 파시스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위버멘쉬란 지성보다도 본능, 합리보다도 의지, 이성보다도 정열, 사고보다도 육체를 존중할 줄 아는 의지의 인간을 말한다.

니체가 좋아한 인물들 니체는 살아 있는 인물 중에는 그다지 궁금한 인물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서, 인류 역사를 돌아볼 때 완성에 가까운 삶을 산 것으로 여겨지는 몇몇 개인에 대한 회고를 늘어놓았다. 그들을 니체의 용어로 말하자면 위버멘쉬로 묘사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위에서부터 몽테뉴, 아베 갈리아니, 스탕달(앙리 바일), 괴테.

니체가 사랑한 괴테 니체는 괴테를 '숭고한 인물',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마지막 독일인'이라고 불렀다. 니체가 보기에 괴테가 원한 것은 총체감이었으며, 괴테는 이성과 관능, 느낌, 의지를 서로 분리하는 데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괴테는 10년 동안 바이마르 궁정의 문관을 지내며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면서 나폴레옹을 두 차례 알현했다.

질스-마리아에 있는 니체 박물관 서른다섯의 나이에 바젤대학의 교수 자리에서 물러나자마자 니체는 알프스 지역인 해발 1,800미터의 질스-마리아라는 자그마한 마을에서 여름을 보내며 그의 주요 저서들을 썼다. 그는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정오까지 작업을 하고, 마을을 에워싸고 있던 산을 오르곤 했다. 그리고 밤이면 홀로 간소한 식사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곤 했다. 이 농가는 '니체가 살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 수수하게 단장한' 네체 박물관이 되었다.

라파엘로의 <니콜리니 코퍼 마돈나>를 위한 밑그림과 완성작 그림 소유자의 이름을 붙인 이 성모자 그림은 라파엘로가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가기 직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스럽게 성모와 아기가 육체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결속된 느낌을 주는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모 마리아와 아기>로부터 배운 결과물이다.

라파엘로의 <한 젊은 여인의 초상>과 <한 여인의 초상>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메켈란젤로의 작품들을 찾아 그들의 밑그림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두 거장의 해부학적인 스케치에서 얻은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그들의 예를 따랐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라파엘이 쏟은 노력의 결과는 그 이전에 그린 <한 젊은 여인의 초상>과 몇 년 뒤 완성한 <한 여인의 초상>을 비교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파에스툼에 있는 그리스 사원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열정과 악을 지극히 자연스런 취향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신들의 마음속에 간직된 너무나 인간적인 것을 찬양하는 일을 디오니소스 축제와 같은 공식적인 제식으로 제도화했다. 그들은 악과 의심, 그리고 적당한 해방을 절멸하려고 애쓰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열정을 상대로 한 전쟁 니체는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피하려 들지 말고 그것을 세련되게 활용하라고 말했다. 열정과 욕망이 지닌 어두운 힘을 두려워하고 피할 목적으로 그것들을 파괴하는 것은 니체가 보기에 그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로 보였다. 이빨이 아프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뽑아버리는 치과의사에게 누가 치료를 맡기겠는가.

본대학 시절의 니체 니체가 소속한 본대학 사교클럽. 사진 중앙의 몸을 한쪽으로 돌리고 있는 이가 니체다. 아래쪽 가운데에 맥주통이 보인다. 니체는 동료 학생들이 알코올을 너무 좋아한다는 사실에 몹시 화를 냇다. 니체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면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말라고 권고했다.

베수비우스산의 폭발 1879년에 베수비우스산이 폭발하는 모습. "존재를 통해서 가장 위대한 성취와 가장 위대한 즐거움을 일궈내는 비결은, 위태하게 살아가는 것이지! 도시들을 베수비우스산 기슭에다 짓도록 하게나!"

뢰켄 교회 니체는 라이프치히 근처의 뢰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으며, 그의 어머니 또한 목사의 딸로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니체는 뢰켄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훗날 니체는 기독교를 가장 무서운 저주이자 가장 무서운 타락이라고 부르게 된다.

니체의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 니체는 '시골 목사의 완벽한 구현'이었던 아버지를 매우 사랑했으며 평생 동안 아버지의 기억을 숭배했다. 니체의 기억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자비로운 성격에 따뜻한 동정심과 재치 있는 대화로 정신적 안내자로서 농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니체에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상스러운 짓이었다.

코지마 바그너 그녀는 프란츠 리스트의 딸로서, 한스 폰 뵐로와 이혼하고 리하르트 바그너와 재혼했다. 니체는 이들 모두와 교류했는데, 그가 진정으로 사랑에 빠졌던 부인이 바로 바그너의 부인인 코지마라는 아이러니컬한 사건은 유명하다. 니체는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우정으로 교묘하게 위장했다.

니체와 루 안드레이-살로메 가운데 인물은 파울 레. 독특한 외모와 수줍은 성격으로 여성들로부터 연이어 퇴짜를 맞은 니체가 경험한 사랑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위대했던 사랑은 루 안드레아-살로메였다. 젊고 아름답고 똑똑하고 바람기가 많았던 그녀는 남자로서보다 철학자로서 니체에게 관심이 더 있었다. 루의 거부는 니체를 다시 한번 극심한 우울증에 몰아넣었다.

 

 

 

posted by 황영찬
2017. 1. 10. 14:30 내가 읽은 책들/2017년도

2017-002 김성희의 주얼리시간여행

 

 

김성희

2002, 생각의나무

 

시흥시대야도서관

EM030137

 

633

김546주

 

탐사와산책 18

 

나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아이덴티티, 주얼리 속으로 떠나는 역사여행

뿌리칠 수 없는 찬란한 유혹으로의 초대, 주얼리의 향연 속으로

 

김성희

추계예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 한국보석학원에서 주얼리 디자인 강사를 역임했다. 1995년 이태리로 건너가 밀라노의 Istituto Europeo di Design의 주얼리 디자인과를 수석 졸업하고 그 뒤 한국의 주얼리, 액세서리 회사는 물론 세계 유명 주얼리 회사(이태리 CASA DAMIANI, 미국 A.JAFFE 등)의 디자이너로 활동하였다. 1993년부터 현재까지 WGC, De Beers 등 각종 주얼리 국제공모전에 일곱 차례 당선하였으며 7년 전부터는 관련업계를 대표하는 기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이태리 밀라노에서 주얼리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 이태리 비첸자 주얼리 박람회를 위한 주얼리 트랜드 북을 제작중이며 더불어 이태리 주얼리 업계 및 패션업계의 주얼리 디자인을 하고 있다.

 

주얼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찌 보면 패션이나 문화보다도 더 먼저 생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생활과 더불어 형성되어 약7천 년 이상의 긴 역사를 가진 주얼리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표현하거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또는 사랑의 징표나

죽은 이를 기념하고 자신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어 왔다.

 

c o n t e n t s | 차례

 

저자서문 주얼리란 무엇일까

머리말 주얼리의 파노라마

 

고대의 주얼리 Ancient
이집트 투탕카멘 왕의 가슴장식에서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카메오까지

고대 주얼리의 재료와 소재
수메르의 주얼리
이집트의 주얼리
철기 시대의 주얼리
미노스와 미케네의 주얼리
에트루스칸의 주얼리
헬레니즘 시대의 주얼리
로마제국의 주얼리
기타 지역

비잔틴과 중세의 주얼리 300~1500
이 시대 이후로는 다시 볼 수 없던 신비롭고도 화려한 주얼리 아트

비잔틴 시대의 주얼리
중세 시대의 주얼리
다양한 보석의 사용
중세 시대 주얼리의 중심도시와 기술
카메오의 유행
에나멜 장식
벨트와 체인
부적으로 사용된 주얼리
부정행위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주얼리 1500~1714
이니셜, 죽음, 정치 등 다양한 모티브가 반영되던 독창성의 실현

그림의 사용
이니셜
고전주의의 영향
체인의 사용
17세기의 머리장식과 반지
귀보석
그 밖의 경향

로코코와 신고전주의의 주얼리 1715~1836
로맨틱하고 여성스러운 우아함을 넘어 절제된 검소함으로의 회귀

모티브의 변화
왕궁의 로맨틱한 주얼리
머리장식
목걸이와 체인, 팔찌, 벨트
귀걸이
남성들의 주얼리
주얼리에 사용된 다른 재료들
신고전주의

빅토리아 시대의 주얼리 1837~1914
품위 있는 화려함 속에 저급함과 기괴함이 공존하던 감상의 시대

시대상황
주얼리의 다양한 변화
빅토리아 여왕 시대
19세기의 주얼리
대량 생산과 아티스트의 복고풍 주얼리
다이아몬드의 사용
애도를 표현하는 주얼리
그밖의 주얼리

아르누보 시대의 주얼리 Art Nouveau
"예술가들을 수공업자로, 수공업자들을 예술가로 변화" 시켰던 조화의 시대

시대의 예술과 성격
영국의 아르누보와 주얼리
프랑스의 아르누보와 주얼리
유럽 다른 국가의 아르누보

아르데코 시대의 주얼리 Art Deco
다양하고 대담한 모티브를 통해 유쾌하고 발랄한 상상력이 넘치던 20년


아르데코 스타일
아르데코 주얼리의 모티브
파리의 아티스트들
유명 브랜드 주얼리 회사들
다른 나라의 아르데코 주얼리
미국의 아르데코 주얼리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주얼리 1940~1959
화려하고 대담하며 모던한 칵테일 주얼리에 취했던 불안과 위기의 시대


제2차 세계대전의 타격
칵테일 주얼리
주얼리의 모티브와 형태
1950년대의 주얼리
주얼리와 아트
자유로운 디자인

현대의 주얼리 Present
진취적인 주얼리 아티스트들의 참신한 아이디어가 만들어가는 주얼리의 세계


1960년대부터 20세기 말까지
새로운 소재, 새로운 모티브, 새로운 디자인
21세기의 새로운 주얼리 장르
주얼리 공모전
주얼리 전시회
패션과 주얼리
미래의 주얼리

 

주얼리 모티브와 그 의미

용어 해설

참고 문헌

 

동물의 뼈로 만든 추장의 목걸이에서 백금으로 만든 신부의 드레스까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어 끝없이 펼쳐지는 주얼리의 파노라마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금은 장신구를 만들 때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금속이었다.

햇살과 같은 색깔을 띠고 있는데다가 연성이 좋아 다루기도 쉬워

여러 가지 형태로의 제작이 손쉬웠으며 부식되거나 손상을 입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고대인들은 금을 사용해 많은 주얼리를 만들었다.

 

도자기 구슬과 펜던트로 만든 목걸이 이집트 가나 인들의(Canaanite) 패션 목걸이. 기원전 약 1500 ~ 1200년경 이스라엘의 Lachish(modern Tell ed-Duweir)에서 발견되었다. 이 아름다운 이집트 스타일의 두 목걸이들은 늦은 청동기 시대 이스라엘의 Lachish(modern Tell ed-Duweir)의 외호(Fosse, 성이나 요새의 한 부분) 사원의 것으로 그곳에서는 또한 동물의 뼈가 담긴 항아리들과 상아, 유리 제품, 도자기, 그리고 금은으로 만든 많은 종류의 주얼리들이 발견되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수메르 여인의 주얼리 장식 기원전 약 2500년경의 것으로 보이는 이 주얼리들은 무덤에서 발견될 때 몇 구의 시신 위에 착용된 상태였는데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 전시하고 있다. 꽃 모양을 한 세 개의 머리장식(Diadem)과 금으로 만든 리본 머리띠. 라피스 라줄리와 코닐리언 구슬로 만든 머리장식에 금과 라피스 라줄리를 둥글게 연마해 만든 흔들리는 머리장식, 큼직한 금귀걸이와 목에 달라붙는 쵸커 스타일의 목걸이, 라피스 라줄리와 금으로 구슬을 만들어 꿴 목걸이와 라피스 라줄리를 둥글게 깎아 붙인 은으로 된 옷핀은 모두 한껏 멋을 낸 수메르 여인들의 미적 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수메르 아트(Art) 기원전 약 2500년경의 작품으로 염소 형상을 한 높이 50cm의 조각상이다. 수메르(Sumer)인들의 대표적인 금세공 작품 가운데 하나로 이 시대 금세공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얼굴에 입 부분과 발 부분은 얇은 금박으로, 뿔과 어깨, 털, 눈은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와 조개로, 배는 왕호박으로 만들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수메르 인의 머리장식 수메르 우르 시대에 남자 무덤에서 발견된 머리장식으로, 시대는 기원전 2500년경으로 보인다. 중앙의 원은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와 코닐리언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원의 가장자리에 연결된 네 줄은 금, 라피스 라줄리, 그리고 코닐리언이 번갈아가며 꿰어져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부적으로 쓰이던 금속 펜던트 기원전 약 1950 ~ 1800년경 이집트 제12왕조에서 사용하던 이집트 굴(Oyster) 껍질 모양의 금 펜던트로, Senusert(Sesostris)라는 이름이 Cartouch(이집트 시대에 왕의 이름을 새기던 원형의 장식 테두리)에 새겨져 있다. 이러한 굴 껍질 모양의 금속 팬던트는 이집트 왕조 중반에 부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Wedjat Eye'의 부적들 기원전 약 1068 ~ 661년의 것으로서 재생을 목적으로 사용한 부적들이다. 'Wedjat Eye'는 우리에게 알려진 이집트 부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으로 Wedjat의 뜻은 'the sound one'(하나의 소리)로 경쟁자 Seth과의 제권 싸움에서 잃은 Horus의 왼쪽 눈과 연관이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맨 처음 발견된 이집트 주얼리 이집트 제2왕조 때의 귀걸이로 남성과 여성 모두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귀걸이는 투탕카멘 왕이 살아 있던 당시에 쓰였으며 당시 남성들은 일반적으로 사춘기 이후에는 귀걸이를 착용하지 않았다(Cairo Museum 소장).

투탕카멘 왕의 묘에서 발견된 독수리 형상 주얼리 투탕카멘 왕의 묘에서는 독수리 형상이 담긴 가슴장식과 목걸이가 많은 양 발견되었다.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상징으로 영원(shen)과 삶(ankh)은 매의 모습을 가진 태양신(falcon horus)의 발톱에 매달려 있었다(Cairo Museum 소장).

한 쌍의 이집트 금팔찌 기원전 약 940년경의 것으로 이집트 제22왕조를 건국한 Sheshongq 1세의 아들인 Nemareth 왕자의 소유물이었다. Harpocrates의 형상은 부조로 표현되어 적색 상감된 연꽃 위에 앉아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팔찌의 나머지 부분은 땋은 형태로 금과 라피스 라줄리, 그리고 푸른색 유리가 번갈아 장식되어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이집트 왕조 중반의 금팔찌 기원전 약 2000 ~ 1750년경의 것으로 금으로 만들어진 팔찌 중앙에는 은으로 만든 여러 가지의 상징적인 형상들이 다양한 Wedjat eye(Horus의 눈)와 djed(4대의 주부가 얹어진 기둥), 그리고 앵크(ankh, 위쪽에 고리가 달린 T자 형의 십자)가 서로 번갈아가며 장식되어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에게 해 연안에서 발견된 금반지들 기원전 약 1850 ~ 1550년경 에게 해 아이지나(Aegina)섬에서 출토된 지름 2.1cm, 무게 152g의 반지들. 아이지나에서 발견된 5개의 반지 가운데 라피스 라줄리가 들어간 4개는 아이지나 보물 가운데서도 기술적으로 가장 숙련된 것이다. 라피스 라줄리는 매우 귀하고 값비싼 것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수입하여 사용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양머리 모양의 팔찌 세트 그리스 사이프러스(Cyprus)의 Kourion 무덤 73에서 출토되었지만 페르시안 스타일이 엿보인다. 지름 8.4cm, 무게 1669g, 기원전 약 450 ~ 400년경의 작품으로 양의 머리 부분은 반쪽씩 따로 만들어져 접합되었고 눈은 에나멜 착색으로 만든 듯 하다. 머리는 팔찌 링에 테두리로 연결되어 구리 알로이 못으로 고정되어 있으며 팔찌의 링은 구리에 금박을 입힌 것이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사이프러스의 특산품 나산형의 귀걸이 그리스 사이프러스(Cyprus)의 무덤 256의 석관에서 발견된 지름 약 2.9cm, 무게 245g의 귀걸이로 기원전 약 425 ~ 400년경의 작품이다. 동에 금박을 입힌 나선형 끝에 그리폰의 머리가 부착되어 있다. 그리폰의 머리는 금판을 두드려 만들었고 이마는 금으로 만든 장미 모양으로 장식했고 목은 푸른색과 녹색의 에나멜로 착색되어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날개 달린 키메라(CHIMERA) 모양의 금 브로치 기원전 525 ~ 500년의 것으로 길이 6.8cm, 무게 117g, 이탈리아에서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금 브로치의 좋은 예로 에트루스칸(Etruscan)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던 주얼리이다. 이 주얼리는 얇은 금박을 두드려 만든 것으로 키메라 부분은 두 개로 나누어 만든 다음 서로 맞붙여 땜질해 붙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OXus의 부적 팔찌 기원전 4 ~ 5세기의 것으로 뒤에서 보면 꽉 찬 것 같지만 사실 팔찌의 밑부분은 그리핀의 날개가 있는 앞 끝으로 오면서 관 형태를 이룬다. 괴물의 뿔 안쪽 부분과 얼굴, 몸통의 홈은 상감을 이용한 것으로 나중에 날개의 윗부분에 부착되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귀걸이 금으로 만든 기원전 3세기의 귀걸이. 윗부분은 원형 디스크로 과립화(Granulation)된 작은 금 알갱이들을 붙여 장식 효과를 냇으며 가장자리에는 천사 모양의 메달이 두 개 달려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초상 카메오 로마 시대 세 층의 샤도닉스 돌을 깎아 만든 높이 12.8cm, 넓이 9.3cm의 카메오. 이 카메오는 로마제국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기원전 27년 ~ 기원후 14년) 황제의 큰 초상화 가운데 한 조각이다.

이집트 여인의 미이라 초상 약 100 ~ 120년 정도의 주얼리로 높이는 38.2cm 정도이다. 이 여인의 초상은 이집트 스타일의 미이라에서 나온 것으로 주제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 초상에서 보이는 여인의 모습은 그리스-로마 시대 여성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영국 로만 시대의 금반지 2 ~ 3세기 무렵의 것으로 지름 2.2cm의 반지. 또같은 문자가 들어간 이러한 형태의 다각형 반지는 이미 2세기 영국 로만 시대의 왕가에 널리 퍼진 것이었다. 들어간 문자는 대부분 그리스어로 이 반지에는 'Polemios(사랑의 증거)'라고 써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금과 유리로 제작된 메달 로마 카타콤바에서 발견된 지름 60.4mm의 4세기 작품. 그리스도 안에서 결혼한 부부를 주제로 메달 속 남녀의 상반신은 얇은 금박 테두리와 글씨에 둘러싸여 있다. 양 옆으로는 'DULCIS ANIMA VIVAS'("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은 (오래)살 것입니다")라는 글귀가 써 있다. 이 메달은 결혼 선물로 만들어졌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용(龍) 형태의 브로치 한 쌍 기원후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의 것으로 보이는 길이 4.5cm의 보석으로, 푸른색과 적색의 에나멜로 착색된 이 한 쌍의 브로치는 뒤쪽에 상당히 심하게 구부러진 핀으로 보아 두꺼운 옷을 고정하는 데에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비잔틴과 중세 주얼리가 지닌 화려함의 기본이 되는 장식기술로서, 여러 가지 종류의

에나멜 기법을 빼놓을 수 없다. 오리지널 에나멜 기법인 클로아저네(Cloisonne)에서 반투명 기법인

샴플레브(Champleve), 그리고 금 위에 흰색이나 다른 색이 있는 유리가루 반죽을 굳혀 붙이는

론드 보스(en Ronde Bosse) 기법 등이 이 시대 주얼리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프랑크 족 귀부인의 주얼리 북부 프랑스 Artres의 무덤에서 발견된 것으로 1855년 프랑스 Artres의 한 농부가 작은 고분 밑에서 발견하였다. 중앙에 있는 커다란 두 개의 은으로 된 브로치는 망토를 고정하거나 치마를 고정하는 데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금과 가넷(Garnet)으로 만든, 작은 두 개의 브로치는 각각 겉옷이나 일반 옷을 고정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랫쪽의 구슬이 꿰어진 금귀걸이 세트는 6세기 특유의 귀걸이 형태이며 위의 은팔찌는 사회적 신분을 나타낸다. 또 금에 부착된 크리스털 펜던트는 그 시대의 부적으로 사용된 듯 하다(런던 The British Museum 고장).

금과 에나멜로 만든 귀걸이 세트 비잔틴 시대(약 10세기)의 것으로 길이 47mm, 높이 38.8mm의 이 귀걸이는 반달형 호에는 에나멜 판넬과 작은 새들이 부리에 작은 가지를 물고 있는 디자인으로 장식되어 있다. 에나멜 판넬의 바탕 부분은 반투명의 녹색이고 새는 머리와 목 부분이 불투명의 흰색 에나멜로, 몸통 부분은 반투명 푸른색, 날개는 불투명한 푸른색의 에나멜로 착색되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Londesborough' 브로치 8세기 무렵의 것으로 길이 24.2cm, 은에 금도금을 해서 만들었다. 원의 윗부분은 호박과 푸른색 유리, 그리고 조각으로 장식되어 잇으며 원의 뒷부분 역시 유리장식과 함께 곡선 모티브를 사용해 상감으로 되어 있다. 동물 형상 모티브의 사용은 앵글로색슨족의 세공사들이 주로 사용하던 것으로 아일랜드 금 세공사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제품을 만들 수 있었는지를 증명한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Robert Fitzwalter의 봉인 약 1213 ~ 1219년경 제작된 영국 남작의 문장이다. 봉인은 일반적으로 집안의 문장이나 디자인이 들어간 것으로 중요한 서류를 봉할 때 초 위에 찍던 도장이다. 이 봉인 위에 들어간 갑옷과 투구의 자세한 디데일과 스타일은 1213 ~ 1219년의 정치상황을 그대로 설명해 주고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노아의 방주 카메오('Noah' Cameo) 무거운 금메달에 부착한 길이 5.3cm의 오닉스 카메오. 아르크(Ark)를 떠나는 노아와 그 가족, 그리고 동물들을 묘사하고 있다. 아르크의 문 위에는 메디치 가의 Lorenzo de' Medici의 이니셜인 'LAUR MED'가 새겨져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보쥬(Beaujeu) 지방 Ann의 초상 유명한 그림 <Maitre de Moulins>의 일부분으로 1498년 무렵의 작품이다. 에나멜 착색이 된 당시의 아름다운 머리장식이 돋보인다. 작품의 원작은 Moulins 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Dunstable 백조 금으로 만든 다음 그 위에 흰색 에나멜로 착색했다. 물갈퀴 부분에는 검은색의 에나멜로 착색한 흔적이 보인다.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브로치의 연결 고리는 뒤쪽 표면에 부착되어 있으며 불투명 에나멜 기법인 론드 보스가 금에 사용된 가장 좋은 본보기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15세기 초 큰 성골상자를 장식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에나멜 기법으로 영국에서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성침(Holy Thorn)이 보호되어져 있는 비잔틴 시대의 메달 약 14세기경 프랑스 제품으로 하나의 '금박'과 두 개의 크리스털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잔틴 황제 Bladwin의 성스러운 왕관의 한 부분이었던 이 성골 상자 뚜껑의 안쪽 면과 중앙의 한쪽 면에는 반투명의 에나멜을 사용하여 제작한 예수의 일생에 대한 여섯 장면의 그림이 있다. 성침은 크리스털과 'DE SPINA SANCTE CORONE'(성스러운 왕관의 성침)이라는 문구와 함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비잔틴 시대의 작은 성골상자 메달 클로이져네 기법으로 에나멜 착색을 했으며 내부에는 성 십자가의 작은 파편이 보호되어 있다. 표면에는 동정녀 마리아의 기도하는 모습이, 양 옆으로는 성 바실리오와 성 조르지오의 상반신이 그려져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형상 예술의 수준으로 주얼리를 끌어올린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 17세기의 주얼리는 이전까지

집착하고 있던 형상 예술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 주얼리는 그 자체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더 이상 사회적인 지위나 종교, 정치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게 된다.

프랑스 파리는 패션과 유행을 선도하는

핵심 도시로 자리 잡게 되고 베르사이유 궁전의 화려함으로 파리의 절대성은 정점에 이른다.

 

 

바로크 진주가 사용된 르네상스 시대의 주얼리 인어의 상반신에 여러  형태의 바로크 진주를 사용해서 제작. 카닝 자작(Canning Viscount) 2세가 구입했다고 해서 카닝 주얼리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주얼리는 16세기 르네상스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현재는 19세기 르네상스 부활 시기의 디자인으로 보는 견해가 더 많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파닉스 주얼리(Phoenix' Jewel) 약 1570 ~ 1580년경 제작된 이 금메달의 중앙에는 엘리자베스 여왕 1세의 상반신 실루엣이 들어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녹색과 적색의 에나멜로 착색된 튜터(Tudor) 왕조의 장미가 둘려져 있다. 메달 뒷면에는 문장과 왕관, 그리고 광선이 릴리프로 표현되어져 잇으며 아랫 부분에는 불사조가 날개를 편 형태가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성스러운 모노그램 IHS가 쓰인 펜던트 중앙 위쪽에 십자가가 장식되어 있고 체인에 연결된 3개의 못은 Crucjfixion(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내는 십자가)의 못을 나타낸다. 다이아몬드와 금을 사용해 만들었으며, 16세기 말에 북유럽에서 제작되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Lyte' 주얼리 1610년 29개의 다이아몬드가 조각된 금 펜던트로 겉에는 모노그램 IR이 새겨져 있다. R의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꽃잎 모양의 난집 위에 있는 4개의 다이아몬드는 15세기의 것으로 Burgundy 왕조의 다이아몬드 연마사들이 최초로 면을 낸 것이다. 열린 펜던트 안쪽에는 1610년에 Nicholas Hilliard가 그린 영국 왕 James 1세의 초상이 들어 있는데 Hillard는 영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영국 황실 아티스트로 여왕 Elizabeth 1세와 그 후세들을 위해 일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보디스(Bodice) 장식 17세기 말 제작된 작품으로 당시에 여성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주얼리였다. 길이 10.5cm, 네덜란드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보디스는 금에 토파즈를, 은에 로즈 커트 다이아몬드를 조각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머리장식이 돋보이는 여인의 초상 Elenora de'Medici의 딸 Margherita gonzaga(1591 ~ 1632)의 초상으로 17세기 초반 이탈리아 작품이다. 이 여인은 진주로 꾸며진 화려한 머리장식과 가슴장식을 하고 있는데 장식에 쓰인 다이아몬드는 테이블 커트와 하트 커트 등으로 연마된 것인데 당시에는 아직 브릴리언트 커트 연마방식이 발견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에나멜 착색이 된 모자 주얼리(Hat-Jewel) 지름 4.8cm, 뒷면을 쳐서 무늬가 겉으로 도드라지게 하는 Repousse 기법을 사용해 만든 모자장식 주얼리. St. Paul의 개종을 설명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모자 주얼리의 기원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으로 이 주얼리는 16세기 중반에 사용된 것으로 뒷면에 이탈리아어로 해군 장교인 Marchese Camillo Capizucchi의 모자 장식 세트라고 기록되어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찰스 1세(Charles Ⅰ)를 기리는 기념반지 약 1650년경 영국에서 제작된 이 금반지는 두 개의 오벌 형태의 납작한 틀로 이루어져 있고 안쪽 면에는 에나멜로 그린 찰스 1세(1625 ~ 1649)의 초상화가 들어 있다. 경첩 부분은 에나멜과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져 있다. 반지의 어깨부분은 검은색 에나멜로 착색되어 있고 다이아몬드는 검은 에나멜과 함께 가장자리에 테를 두르고 있으며 뚜껑의 가장자리 역시 흰색과 검은색의 에나멜로 장식되어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여러 가지 색의 귀보석 반지 세트

1열 에메랄드(Emerald), 루비(Ruby), 사파이어(Sapphire), 사파이어(Sapphire), 사파이어(Sapphire), 사파이어(Sapphire)

2열 스피넬(Spinel), 시트린(Citrine), 아메시스트(Amethyst, 자수정), 아쿠아마린(Aquamarine), 페리도트(Peridot), 크리소베릴(Chrysoberyl)

3열 투어멀린(Tourmaline), 투어멀린(Tourmaline), 지르콘(Zircon), 지르콘(Zircon), 토파즈(Topaz), 토파즈(Topaz)

4열 가넷(Garnet), 데만토이드(Demantoid), 가넷(Garnet),  헤소나이트 가넷(Hessonite Garnet),  오팔(Opal), 블랙 오팔(Black Opal), 파이어 오팔(Fire Opal)

5열 크리소베릴Chrysoberyl),  캣츠 아이(Cat's Eye),  스타 사파이어(Star Sapphire), 스타 루비(Star Ruby), 문스톤(Moonstone), 래보라도라이트(Labradorite)

6열 크리소프레이스(Chrysoprase), 터키석(Turquoise), 말라카이트(Malachite),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  칼세도니(Chalcedony), 어벤츄린 쿼츠(Aventurine Quartz)

7열 오닉스Onyx), 모스 아게이트(Moss Agate), 코닐리언(Cornelian), 아게이트(Agate), 재스퍼(Jasper)

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펠리컨 모양의 펜던트 1550 ~ 1575년경에 스페인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8.8cm의 펠리컨 모양을 본딴 펜던트. 이 성스러운 느낌의 펜던트는 금에 에나멜 착색을 하고 뒷면에 넓게 적색 포일 백(Foil Back)을 해서 붙인 다음 진주를 매달아 만들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독일의 결혼반지 1575년경 제작된 것으로 디자인은 아탈리아의 '믿음의 손'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거나 또는 그 당시 유행했던 사랑과 믿음의 상징에서 비롯된 듯하다. 두 사람이 하트 형태를 맞잡고 있는 이 반지는 결혼반지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잘 살려낸 작품이다.

The Tor Abbey 주얼리 영국에서 약 1540 ~ 1550년경 금에 에나멜을 착색해 제작했다. 죽음을 상징하는 관 형태의 드라마틱한 유물로 뚜껑을 열면 안에는 에나멜로 착색한 해골이 누워 있다. 뚜껑의 무어(Moorish)식의 장식은 당시 유럽에서 흔히 사용되던 것이었는데 가장자리에 써 있는 글귀 'THRONGH, THE, RESVERRECTION, OF, CHRISTE, WE, BE, ALL, SANCTIFIED'는 이것이 영국 주얼리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해골을 사용해 제작된 죽음과 관련된 반지들 죽음의 상징인 해골을 기본 모티브로 해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잘 형상화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18세기 초의 주얼리는 일상생활에서 쓰는 주얼리와 중요한 공식 행사 때에 착용하는 화려한 주얼리,

또는 저녁 파티를 위해 여러 가지 보석으로 만든 세트 주얼리 등으로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주얼리는 상류사회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파티의 촛불 아래 최대한

반짝거려 돋보일 수 있도록 특별히 디자인되곤 했다.

 

에나멜과 금, 은, 다이아몬드로 조각한 부케 길이 22cm의 17세기 말 스페인 작품으로 Dona Juana Rabasa(당시 스페인 재무부 장관이었던 Charles 4세의 부인)의 소유품이었으나 훗날 Saragossa의 Virgin of the Pillar에 기부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눈 그림이 들어 있는 애도 반지 약 1794년경 영국에서 만들어진, 지름 2cm, 무게 58g의 작품이다. '눈 그림 반지'는 죽은 사람이 항상 자기를 지켜본다는 생각을 표현한 작품으로 이 눈은 일반적으로 초상화에서 잘라 내어 삽입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Flora of Pistrucci' 카메오 금반지 크기 2.3cm의 이 반지는 코닐리언 보석에 장미꽃과 양귀비, 마가레트로 머리를 장식한 Flora의 형상이 릴리프로 카메오 조각되어 금반지에 물려 있다. 이탈리아 조각가 Benedetto Pistrucci(1784 ~ 1855)의 명작 가운데 하나이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보디스(Bodice) 로즈 커트로 절단되어 뒷면을 댄(Foil Back) 은에 다이아몬드를 붙여 만든 이 주얼리는 스토마커(stomacher, 화려하게 꾸민 삼각형의 가슴장식)로도 사용되었다. 1720년 영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밑에 보이는 몇 개의 보석들은 뒷부분의 색이 벗겨져 갈색의 색조를 띄고 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18세기 특유의 우아함을 살린 목걸이 1660년경 프랑스에서 제작된 높이 17cm의 목걸이. 이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작품은 금을 기본으로 그 위에 에나멜을 착색하여 여러 가지 색을 냈으며 다이아몬드를 조각해 화려함을 더했다. 중앙 부분은 진주와 사파이어로 장식, 18세기 특유의 우아함과 화려함의 조화를 엿볼 수 있는 목걸이이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나비 모티브를 잘 살린 목걸이 1805년 프랑스에서 제작된 목걸이로 총 길이는 40cm이다. 불투명 보석을 각각의 나비 디자인에 맞게 절단하여 꽃 줄에 끼워 맞춘 모자이크로 장식해 만들었다. 이러한 모자이크 방식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독특한 스타일이지만 이 주얼리의 조립 및 완성은 프랑스에서 이루어졌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Cut Steel의 Chatelaine 19세기 초 프랑스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길이는 52.7cm이다. 맨 위쪽의 고리(Hook)부분은 왕관의 모노그램으로 장식되어져 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로 만든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 1806년 작품으로 나폴레옹과 그의 아내 조세핀이 양녀 스테파니의 결혼식 때 선물한 주얼리 세트. 목걸이 뒷부분의 두 물방울형 에메랄드는 뒤에 조립된 것이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베를린의 아이언 워크 고딕 스타일의 트레이서리(Tracery) 무늬와 잎사귀 무늬 장식의 목걸이로 1820 ~ 183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큰 장식 부분의 중앙은 빛을 반사하기 위해 광을 낸 원형의 납작한 철을 붙여 만들었다. 당시에 유행한 독특한 소재로 만든 주얼리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19세기에는 로맨틱한 감성과 애국심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는 시기로서 새로운 대중

예술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련된 도시의 주얼리와 대중적인 서민 주얼리 사이에 스타일의 교환이 이루어지곤 했다.

특히 서민적인 스타일의 의복과 장식품에 대한 관심은

훗날 윌리엄 모리스의 아트 앤 크래프트 운동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금과 은에 다이아몬드가 가득 박힌 왕관 약 1855년경 영국 런던에서 제작된 지름 16.3cm의 왕관으로서 사실적으로 묘사된 세 개의 떡갈나무 가지와 열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 개의 장식은 각기 떨어져 브로치로도 사용될 수 있게 만들어진 다기능 주얼리로, 브로치와 왕관의 테는 금과 거북이 등껍질로 만들어졌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포도 넝쿨 목걸이 1840 ~ 1850년경 제작된 목걸이로 포도 알갱이는 자수정으로, 잎은 금에 녹색 에나멜을 착색해서 만들었다. 이런 형태의 섬세한 디자인을 가진 주얼리는 후에 작은 진주 등으로도 제작되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메꽃 브로치 1845 ~ 185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금에 터키석과 진주로 장식했고 가장 긴 부분의 길이는 12.5cm 정도이다. 메꽃의 꽃말은 '연분, 결속', 또는 '절망'을 뜻한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움직이는 나비가 매달린 머리장식 브로치 높이 9.4cm의 이 장신구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세 가지 색깔의 금으로 만들어졌다. 장미 가지 형태로 만든 것으로서, 이러한 꽃 모티브는 19세기 초 꽃말 등을 통해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꽃다발에는 나비를 용수철을 이용해 떨리도록 만들어 끝부분에 매달아 진짜로 나비가 움직이는 것 같은 효과를 주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그리스 스타일을 재현한 금목걸이 1870년경 제작된 총 길이 35cm의 목걸이. 금선으로 그물을 엮듯이 짠 줄에는 속이 빈 펜던트와 장미 모양의 장식이 촘촘히 달려 있는, 이탈리아 세공 대가 Castellani의 작품이다. 오리지널 주얼리는 1864년 Kul Oba에서 발굴된 기원전 360년의 그리스 주얼리이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전기 주얼리의 하나인 해골 핀 1867년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재미있는 전기 주얼리. 화이트 에나멜과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금핀으로 뒤쪽 목 부분에 달린 뼈는 전기 단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배터리에 연결되면 다이아몬드가 박힌 눈은 빙글 빙긍 돌고 턱은 딸깍거린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사용되었던 딱딱한 스타일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선의 유동적인 자유로움과 자연에 집중한 주제의 사용,

또 새롭고 강렬하며 다양한 색채의 선택 등이 아르누보 시대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또 이 시대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 예술과의 접목을 들어도 과언이 아니다.

 

 

르네 라릭(Rene Larique)의 작품 금, 에나멜 착색, 크리소프레이스(Crysoprase)로 만든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주얼리가 보관되어 있는 리스본의 Gulbenkian Foundation은 1898년 Calouste Gulbenkian이 세운 박물관으로 아르누보 시대를 대표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얼리들을 갖고 있다(리스본 The Calouste Gulbenkian Museum 소장).

플리끄 앙 주르 에나멜 기법을 사용한 머리장식 1900년 작품으로 길이는 7.6cm, 루비와 다이아몬드를 사용했다. 위쪽의 꽃잎을 통해 쏟아져 내려오는 빛은 에나멜의 투명함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아르누보 스타일의 목걸이 약 1902년경 금과 Blister pearl(납작한 거품 진주), 오팔로 제작된 길이 24cm의 목걸이로 디자이너 Archibald Knox가 런던의 주얼리 가게 Liberty를 위해 디자인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클로아저네 방식으로 착색한 일본 스타일 메달 1868년에서 1870년 사이에 프랑스 세공사 Alexis Falize가 제작, 일본식 주얼리 스타일과 에나멜 기술은 별다른 무리없이 자유롭게 유럽 주얼리에 적용되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르네 라릭의 코사지 프랑스에서 1898 ~ 1899년에 금과 에나멜로 제작된, 라릭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이다. 아홉 마리의 뱀이 서로 얽혀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리스본 The Calouste Gulbenkian Museum 소장).

조지 포끄의 코사지(Corsage) 1902년 작품. 날개 달린 바다 괴물의 형태로 몸통은 클로이저네 에나멜 기법으로, 지느러미와 꼬리는 플리크 앙 주르 에나멜 기법으로 착색되었다. 뱀 머리 윗부분에는 에메랄드가 부착되어 있고 금과 분홍색 바로크 진주, 다이아몬드를 사용해 해초를 표현하였다.

날개 달린 뱀 모양의 드라마틱한 손 장신구 아르누보 시대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 가운데 한 명인 알퐁소 무챠(Alphonse Mucha)의 디자인으로 조지 포끄(George Fouquet)가 제작한 팔찌와 반지. 1899년 파리에서 금과 에나멜, 오팔과 다이아몬드를 사용해 만든 이 환상적인 팔찌는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의 <클레오파트라> 공연을 위해 제작되었다(개인 소장).

공작 펜던트 약 1900년경 제작된 펜던트로 날개는 플리크 앙 주르 에나멜 기법을 사용하였고 날개 사이의 하트 모양 깃털은 오팔로 장식하였다. 아래 물방울 형태로 매달린 것 역시 오팔이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아르데코 시대의 주얼리 제작자들은 그 이전까지는 단 한번도 제작된 적이 없는

불후의 명작들을 많이 남겼다.

이때는 대담하면서도 정성을 가득 담아 만든 환상적인 대작에서 신선하고 때로는

장난스럽기까지 한 독창적인 작품들이 공존했다. 이 시기를 결정짓는

주얼리 디자이너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신 보석을 판매하는 보석상의 브랜드 네임이 힘을 얻던 것도

이 시대의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자동차 기념 브로치 오벌 형태의 브로치로 자동차 'Thunderbolt'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1937년 Land Speed 세계 기록을 깬 캡틴 조지 이스턴(George Eyston)의 부인에게 선물된 브로치로 이처럼 이 당시에는 모티브나 디자인에 한계가 없었다.

풍뎅이(scarab)과 꽃 상징 모티브 이탈리아 주얼리 제작에 중심이 되는 모티브는 풍뎅이와 꽃 상징 모티브였다. 위쪽의 둥근 모양은 해와 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달의 신 Thoth와 해의 신 Ra-Horakhty를 함유하고 있다(Cairo Museum 소장).

실편백 나무 모양을 본딴 브로치 Lacloche Freres사의 작품으로 1927년 작품이다. 화이트 골드에 원형의 브릴리언트 커트와 직사각형의 바게트 커트로 커팅된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 블랙 오닉스로 만들어졌다. 이 브로치는 거꾸로 뒤집으면 펜던트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카르띠에(Cartier) 백금 팔찌 1929년 파리에서 만들어진 이 팔찌는 두 마리의 키메라(chimera) 머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상이다. 백금(platinum)에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 그리고 사파이어로 장식했다.

카르티에(Cartier) 브로치 1940년 런던에서 제작된 아르데코 스타일의 브로치. 1847년 창립한 카르티에는 19세기 그 어떤 회사의 주얼리보다 많은 사랑을 받으며 주얼리 계의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전형적인 아르데코 스타일의 팔찌 넓은 밴드 스타일의 팔찌로 1925년 Oscar Heyman & Brothers사가 제작했다. 화려한 색상의 남부 열대지방의 꽃과 새 모양으로 장식했으며 이러한 디자인에 맞게 연마된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오닉스가 멜레 다이아몬드와 함께 백금(Platinum)에 물려져 만들어졌다.

Quivering Camellia Set 1938년 작품으로 CORO(Cohn & Rosenberger.Inc)제작. Gene Verrecchio가 디자인했으며 디자인 특허를 낸 제품이다. 브로치, 팔찌, 목걸이, 귀걸이 세트로 금, 은도금, 크리스털과 큐빅, 에나멜로 작업했으며 금색 도금된 동백꽃에 푸른색 바게트 커팅된 크리스털과 라운드 커팅된 큐빅, 잎사귀는 검은색의 에나멜로 장식했다.

Camellia Set 1939년 작품으로 CORO(Cohn & Rosenberger.Inc)제작. Adolph Katz가 디자인했으며 역시 디자인 특허 제품이다. 동백꽃 모티브를 이용한 팔찌와 브로치 세트. 팔찌는 1965년 플라스틱으로 다시 만들어져 오리지널 작품의 바리에이션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1950년대 많은 조각가와 화가들은 주얼리에 관심을 보이고 직접 주얼리를 제작했다.

처음으로 주얼리를 제작하기 시작한 조각가는 스위스의 자코메티와 미국의 칼더이고,

그 뒤를 이어 에른스트, 탕가이 등의 조각가들이 주얼리를 제작했다.

이들의 주얼리는 그들의 작품과 동일시되는 독특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작품들과는 구분이 되었다.

 

 

불가리(BULGARI)의 화려한 목걸이와 귀걸이 아기들의 턱받이 모양으로 디자인된 목걸이와 길고 큼직하게 내려오는 귀걸이로 이루어진 주얼리 세트로 1965년 작품이다. 18K 옐로 골드를 기본으로 물방울 모양으로 다듬은 터키석과 에메랄드, 캐보션으로 커트된 자수정, 그리고 다이아몬드가 사용된 이 세트는 불가리의 VINTAGE collection 가운데 하나이다.

뱀 모양의 체인 런던에서 1947년 수출을 목적으로 제작된 길이 39.5cm의 목걸이로, 화이트와 옐로우 골드로 만든 뱀 효과가 나는 줄(Snake chain)에 다이아몬드와 루비, 사파이어가 조각된 장식으로 중앙을 고정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Tree' 1942년 제작된 작품으로 디자인 특허를 낸 나무 형태의 브로치이다. 메탈 은도금과 하늘색 보석, 큐빅, 검은색 에나멜을 사용해 만들었다,

'Rock Fish' 1945년 만들어진 독특한 작품이지만 디자인 특허는 하지 않았다. 디자인의 독창성으로 디자이너 Adolph Katz가 잡지 《American Magazine》의 '모든 여성은 여왕' 란에 특별 인터뷰한 작품으로 하늘색과 적색 보석의 두 가지 바리에이션이 있다.

'Griphon' 1941년 작품으로 디자인 특허 제품이다. 금도금 메탈과 적색, 청록색 에나멜을 착색, 큐빅깃털이 풍성한, 꼬리가 긴 까치 형태의 브로치로 머리, 몸통과 다리는 큐빅 조각을 했다.

'Medusa Set' 1946년 작품으로 브로치와 귀걸이 세트. 금도금 메탈과 큐빅을 사용했다. 1946년 6월 잡지 《Women's Wear Daily》가 '상상을 초월하는 비범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린 주얼리로 얼굴 부분이 검은 색 에나멜로 착색된 변형본도 있다.

'Pom Pom and Tom Tom' 1949년 작품으로 디자인 특허된 어린아이들 모양의 브로치 한 쌍. 메탈 은도금과 유리, 큐빅을 사용한 작품이다. 잡지 《Harper's Bazaar》와 《Jewelers Circular-Keystone》에 광고된 것으로, 발랄한 어린이들의 형상이 푸른색과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Cat Fishing in a Bowl' 1948년 제작된 작품으로 어항에서 헤엄치는 금붕어를 잡는 재치 있는 디자인의 브로치. 스터어링 실버(Sterling Silver, 92.5퍼센트는 실버, 나머지는 동)에 도금, 적색의 사각 보석과 큐빅, 에나멜을 사용했고 어항은 루사이트(Lucite, 투명합성수지)로 표현했다.

'Ballet of Jewels' 가운데 'Prima Ballerina' 디자인 특허된 1950년 작품. 금도금 메탈과 큐빅으로 춤추는 발레리나 형태를 만들었다. 1949년 7월 잡지 《Women's Wear Daily》에 소개된 작품이다.

'Bowknot' 1940년 작품으로 디자인 특허된 리본 형태의 브로치이다. 은도금과 적색 에나멜을 사용하고 큐빅을 조각해 제작했다.

카르티에(Cartier) 타이거 클립 1957년 파리에서 만들어진 옐로 골드와 옐로 다이아몬드, 오닉스, 에메랄드로 제작된 호랑이 펜던트. 1961년 카르티에는 이 브로치와 함께 할 수 있는 귀걸이도 제작하였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디자인의 브로치 옐로 골드와 4 ~ 6mm 크기의 진주, 루비로, 치아는 진주로 표현한, 혁신적이고도 독창적인 디자인의 이 제품은 현재도 그 참신함과 신선함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Good Fairy' 1946년 작품. 은도금, 큐빅이 가득 박힌 요정 형태의 브로치로 투각된 날개 가장자리는 검은색 에나멜로 착색했다. 이름부터 독창적인 주얼리로서 프랑스 주얼리 회사 Van Cleef & Arpels의 컬렉션인 'Wings of Victory'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다.

 

미래에는 어떤 주얼리가 유행할지 지금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새로운 기술과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그 디자인과 유행이 달라지기 때문인데

확실한 것은 주얼리에 사용되는 금과 백금, 다이아몬드와 그 밖의 유색 보석이 가진

화려함이 주는 마술 같은 매력은 언제까지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중앙 부분이 움직이는 반지 깔끔하고 절제된 이미지로 전 세계 주얼리 마니아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니싱(NIESSING)의 독특한 반지. 중앙 부분의 장식이 회전하여 한 개의 반지로 두 개의 반지를 소유한 느낌을 갖게 하는, '니싱다운'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Gold Virtuosi 2002

INTERNATIONAL JEWELRY DESIGN AWARDS

Gold Virtuosi 2002 당선 작품 레이저를 이용해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정교하고 세밀하게 새겨서 만든 목걸이와 반지로 공모전에서 기술상을 수상했다(디자인 Ranjith Gamage).

 

Diamonds International Awards

1998년 당선작 작품명 '사하라' 이탈리아 Damiani 제품으로 사하라 사막의 모래언덕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했다. 다이아몬드를 사용해 섬세한 선을 표현해 낸 이 독특한 주얼리는 디자이너 Giam Paola De Marchi의 작품이다.

 

CHIMENTO

 

'삶은 꿈이다'라는 의미의 'La Vita e Sogno'를 회사의 기본 경영철학으로

삼고 있는 이탈리아 브랜드

치멘토(CHIMENTO)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주얼리 가운데 하나이다.

 

NIESSING

너무나 독일적인 브랜드 니싱(NIESSING)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주얼리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다.

인간 내면의 목소리를 주얼리라는 매개로 표현하고자 하는 니싱은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받아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참신한

아이디어와 인간과의 교감이 빛나는 각각의 작품에는 이러한

니싱의 마인드가 그대로 담겨 있다. 심플하고 멋스러우며

지적인 느낌이 잘 살아 있는 니싱은 현재 우리나라에도 런칭되어 있다.

 

 

 

 

 

 

posted by 황영찬

2017-001 박태상의 동유럽문화예술산책

 

박태상

2002, 생각의 나무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8830

 

982.02

박883동

 

탐사와 산책 12

 

누가 도나우강에서 뱃놀이를 했는가

 

박태상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MSU)에서 객원교수를 지냈고, 한국방송대학교 울산지역대 학장을 거쳐 현재 인문학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동시에 사단법인 [서울평양학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두 권의 문학평론집 '전통부재시대의 한국문학'과 '엽기 패러디 시대의 한국문학' 및 한 권의 영화평론집 '영화, 어떤 문화코드로 읽을 것인가'를 출간했고, 대통령자문기구인 민주평통자문위원(상임위원)과 옥천 지용제 운영위원 겸 홍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KBS 라디오 한민족

 

 

목차

 

책머리에 | 동유럽, 그 치열한 지성과 냉혹한 역사적 현실의 세계

 

쇼팽이 사랑한 여인, 쇼팽이 사랑한 음악 | 바르샤바의 쇼팽박물관

크라쿠프에서 괴테를 만나다 | 폴란드 왕립 소금광산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 다뉴브 강과 부다페스트의 슬픔

여인천하 | 루카치 박물관과 쉔브룬 궁전

모차르트, 베토벤과 동거하다 |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음악가 무덤

프라하의 봄 | <2000어 선언>과 밀란 쿤데라

비세흐라트의 향기 | 체코의 자랑 프라하 성

카프카의 연인들 | 프라하의 명소 카프카 박물관

신세계를 펼쳐라 | 드보르자크의 예술세계

어떻게 살아남아야만 하는가 | 브레히트 박물관의 신비로움

베를린판 분서갱유 | 독일의 명문 흄볼트 대학

한국을 독립시켜라 | 세칠리엔호프 궁전과 포츠담 선언

헤겔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가 | 헤겔 철학의 세계정신

도브리 젠 | 레닌 묘와 고리키 박물관

단테스, 콘체로바를 포기하라 |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 푸슈킨

에르미타쥬 미술관과 '황금의 방' |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자존심

캔버스를 허리춤에 차고 예술을 창조한 화가 | 사실주의 화가의 대명사 일리야 레핀

아르바트 거리와 젊은 예술인들 | 러시아 전통의 이콘 페인팅

민족이 우선인가, 세계화가 먼저인가 |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표트르 차이코프스키

 

쇼팽 박물관 내부 폴란드 젤라조바 볼라에 있는 쇼팽 박물관의 내부이다.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별명답게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소품들의 조화가 인상적이다.

쇼팽 초상 감상적이면서도 다소 신경질적인 쇼팽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는 쇼팽의 초상이다. 상드의 회고에 의하면 쇼팽이 가장 사랑한 여인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고 한다.

밖에서 본 쇼팽 박물관 쇼팽 박물관은 고즈넉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풍긴다. 바르샤바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쇼팽을 사랑하는 외국의 관광객들로 늘 붐비고 있다.

쇼팽의 가족사진 박물관 벽에 붙어 있는 쇼팽의 가족들 사진이다. 프랑스인이었던 쇼팽의 아버지 니콜라스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사회적인 불안을 피해 폴란드로 이주했는데, 연초공장에서 회계 일을 하던 중 백작의 집에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됐다. 그곳에서 옛 귀족 출신 가정부 유스티나와 결혼, 1남 3녀를 얻었다. 그 가운데 둘째가 쇼팽이다.

조르주 상드의 초상화 쇼팽의 연인 조르주 상드의 초상화. 당대의 화가 들라크르와의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격정적이면서도 섬세한 조르주 상드의 내면이 잘 드러나 있는 그림이다.

쇼팽의 초상 쇼팽의 깔끔하면서도 창백한 인상은 뭇 여성들로부터 모성 본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실생활에서도 쇼팽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고독을 무척 즐겼다고 하는데 이런 성격은 그의 음악세계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쇼팽의 정원에 있는 음악비 조르주 상드, 보진스카 등의 연인들과 뜨겁게 사랑했지만 끝내 평안을 얻지 못했던 쇼팽. 그래서 그런지 그의 음악비는 어딘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하게 보인다. 그의 장례식장에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흘렀다.

쇼팽의 초상화 평소에 바흐를 존경했던 쇼팽. 그의 표정에서는 바흐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단아한 귀족미와 고전적인 절제, 그리고 세련된 자족감이 느껴진다.

왕립 소금광산 박물관 폴란드 크라쿠프에 있는 소금광산 박물관의 전경이다. 소금광산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명소로 광산 안에는 광부들이 새긴 조각물들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다.

소금광산 내 연못 폴란드 크라쿠프에 있는 왕립 소금광산 내의 연못. 둘레에 관광객들을 위한 다리가 놓여져 있다.

이집트로의 피난 왕립 소금광산 내에 있는 성 킹가 성당 벽에 조각된 작품으로 당시의 광부들의 손에 의해 제작되었다.

최후의 만찬 성 킹가 성당 벽에 조각된 작품으로 조각가이며 광부인 안토니오 비로덱에 의해 제작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을 모사한 작품이다.

괴테의 초상 근엄하면서도 낭만적인 멋을 갖춘 귀족이며 신사였던 괴테의 위엄과 매력이 잘 드러나 있는 초상화이다.

울리케 폰 레베초 괴테는 74세 때 19세의 울리케 폰 레베초에게 청혼하였다. 괴테는 1823년 뵈멘으로 마지막 온천여행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그가 묵었던 집 주인의 손녀인 우아한 그녀에게서 열정적 사랑을 느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 헝가리 민주의회정치의 현장인 동시에 198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1956년의 5 . 6혁명 당시 부다페스트 공과대학 학생들은 이곳에서 소련군의 철수와 헝가리의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이 사건은 헝가리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헝가리 국립미술관 부다페스트 부다 왕궁에 있는 국립미술관. 현재 여러 부속 박물관과 국립 세치니도서관을 수용하는 문화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다눕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쏘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순간,

바숴진 네 두부는 소스라쳐 삼십 보 상공으로 튀었다.

두부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디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의 일만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눕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눕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 스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 사장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 쥐고

왜 열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을까,

죽어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열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잡히는 것 아무 것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 김춘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중 일부

 

가브리엘 천사상 영웅의 광장에 조각되어 있는 조각으로 헝가리 국민들의 선민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헝가리 국민들은 가브리엘 천사가 신에 의탁해 헝가리를 보호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마차시 성당 부다페스트의 명소 중 하나인 마차시 성당의 모습. 18세기 초에 세운 삼위일체상이 유명하며 신고딕 양식의 뾰족탑이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성당의 채색 모자이크 기와 지붕이 무척 화려하고 아름답다.

글로리에터 전경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별궁이었던 쉔부룬 궁전의 뒤편 언덕에 만들어진 글로리에터(글로리아 게이트)

오스트리아 쉔부룬 궁전의 전경 40년 간의 통치로 여인천하 시대를 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야심이 그대로 표현된 대궁전. 궁전의 방이 무려 1,441개나 된다.

글로리에터 측면 쉔부룬 궁전의 뒤편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글로리에터의 모습도 가까이에서 보면 매우 웅장하고 아름답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스케일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무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중심가에 위치한 비엔나 중앙 묘지 안의 '음악가 무덤'에 있는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의 무덤과 그 조형물.

모차르트의 초상 천재성과 장난기, 그리고 광기가 느껴지는 모차르트의 초상. 그는 감정의 기복이 심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재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비엔나 현지에 가면 모차르트에 대한 비엔나 시민들의 사랑을 어디에서든지 쉽게 느낄 수 있다.

구스타프 말러 표식 비엔나의 오페라하우스 가는 길에 위치한 '보행자의 거리'에 새겨진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별 모양의 표식

모차르트의 초상 그의 음악은 고귀한 기품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심에 찬 느낌을 잘 표현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음악'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또한 그는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전개되는 음악을 만드는 타고난 리듬감을 가지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가족 일찍부터 천재적 재능을 나타냈던 모차르트는 14세가 되기 전에 피아노, 바이올린, 관현악을 위한 많은 곡을 작곡했다. 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인식하고 그를 데리고 유럽 전역에 연주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두 아들 모차르트는 결혼을 해서 세 아들을 두었지만 첫아들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잃고 만다. 그림은 둘째아들과 셋째아들이다.

 

죽음이란 우리가 그걸 아주 가깝게 생각한다면, 우리 존재의 참다운 목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최근 몇 해 동안에 인류의 가장 좋은, 가장 진실한 친구인 이 죽음과 대단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죽음의 영상은 제겐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퍽이나 부드럽고 진정으로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죽음이 참다운 행복으로 통하는 문의 열쇠라는 것을 터득할 기회를 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도 젊은 나이에 저는 밤마다 언젠가는 제가 살아 잇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자리에 드는 때가 한 번도 없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줄곧 내가 얼마나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당신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요. 나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을 나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오. 무지무지하게 날 괴롭히는 일종의 공허감 - 일종의 그리움 - 그것은 결코 충족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 것이오. 끈질기게 내게 달라붙어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해질 뿐이라오.

- 병상에 누워있던 부친(1787)과 바덴에서 요양중이던 병약한 아내 콘스탄츠(1791)에게 보낸 편지

 

한 어버이가 자식들을 넓은 세상에 내보낼 때, 가장 훌륭하고 고명한 벗에게 맡겨 보호와 지도를 부탁하는 것은 곧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경애하는 고명한 벗이여! 여기 6명의 자식(하이든 4중주곡의 6편)을 그대에게 보냅니다. 부디 그들의 다정한 친권자가 되어 주시기를…… 이후로 나는 그들에 대한 모든 권리를 당신께 양도합니다.

 

베토벤 초상 섬약한 듯하면서도 강직하고 신경질적이면서도 초인적인 예술혼을 가지고 있던 베토벤의 내성이 잘 드러나 있는 초상화이다.

베토벤 임종시의 초상 베토벤은 1819년 완전한 귀머거리가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작곡하는 일을 멈추지 않던 그는 계속되는 병마와 싸우다가 1827년 세상을 떠난다. 그의 죽음에 대해 온 유럽의 지식인들은 깊은 애도를 표했다. 20,000명의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그의 운구 행렬을 따르던 젊은이 가운데는 슈베르트도 있었다.

 

나의 천사, 나의 전부, 나의 분신이여!

 

오늘은 몇 마디만, 그것도 (그대의) 연필로……

겨우 내일쯤에는 거처가 정해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건 정말 공연한 시간의 낭비입니다……!

숙명적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깊은 고뇌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우리들의 사랑은 희생과 단념 이외에는 아무런 방법도 없을 것인지……. 그대가 나만의 존재가 아니고 내가 그대만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영영 변치 않을 것인지…….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당면한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며, 나는 그대를, 그대는 나를 위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한 마음 한 뜻으로 될 수만 있었던들 나도 그리고 그대도 이렇게 괴로워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여행은 지긋지긋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저께 아침 4시에야 겨우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중략)…….

조만간 만나겠지만 오늘도 이 며칠 동안의 내 생활에 관한 나의 생각을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이 서로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따금 나는 말이란 전혀 쓸모 없는 것이라고 느끼기도 합니다. 명랑한 마음으로…….

내가 그대에게 있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항상 나의 진실하고 유일한 보물, 나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십시오. 그 이외의 것은 무엇이나 신에게 맡길 수밖에 없겠지요.

그대의 성실한 루드비히

베토벤 무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중심가에 위치한 비엔나 중앙 묘지 안의 '음악가 무덤'에 있는 베토벤의 무덤과 그 조형물.

스트라호프 수도원 1126년 세워진 유서 깊은 스트라호프 수도원의 언덕에서 바라본 체코의 수도 프라하 시의 전경.

스테판 성당 체코의 명물 스테판 성당. 체코 가톨릭을 대표하는 성당으로 체코 국민들에게 정신적인 위안을 주는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밀란 쿤데라 체코 사회의 정치적 알레고리를 함의적으로 깔고 있는 작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세계 문단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

체코 대통령 궁 체코의 하벨 대통령이 집무하고 있는 대통령 궁의 정문과 그 조각물.

 

역사의 경우도 개체의 삶에 있어서와 상황이 비슷하다. 단 하나의 체코인들의 역사가 있을 뿐이다. 어느날엔가 그것은 토마스의 삶과 마찬가지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을 것이다. ……보헤미아의 역사와 유럽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인류의 무경험에 의해 그려진 두 개의 스케치다. 역사란 개별적인 인간의 삶과 똑같이 가벼운 존재다. 그것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휘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밀란 쿤데라 체코를 대표하는 작가인 밀란 쿤데라는 음대 교수의 아들로 출생했다. 1975년 체코에서 프랑스로 망명, 주로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에도 활발히 번역 출간되고 있다.

영화 <프라하의 봄> 포스터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프라하의 봄> 포스터. 줄리엣 비노쉬, 레나 올린이 상반된 캐릭터인 테레사와 사비나의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틴 성당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틴 성당. 벽공을 향해 솟아 있는 첨탑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코흘 분수 프라하의 대통령 궁 안의 정원에 있는 코흘 분수. 초기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어졌으며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태양을 상징하는 사자가 받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 비투스 성당의 내부 체코 프라하에 있는 성 비투스 성당의 내부 모습이다. 고딕 양식을 적용한, 끝이 맞물리는 아치형의 첨탑(98미터)을 가지고 있는 것이 퍽 인상적인데, 3세기 영국 성인 비투스를 추앙하여 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성 비투스 성당의 외부 프라하 성의 언덕에 우뚝 솟아 있는 프라하 최대의 고딕 양식 건물로 10세기부터 점차적으로 건축이 진행되었다. 우측 중앙의 성 바츨라프(체코의 고대 왕으로 체코의 수호성인 중의 한 사람) 예배당과 좌측 바로 앞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유명하다. 지하에는 찰스 4세를 비롯한 체코 역대 왕들의 무덤이 있다.

하벨 대통령 시인이자 희곡작가로 활동했던 하벨은 첨예한 정치적 상황에서도 소신 있는 입장을 밝혀 체코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다.

카프카 초상 체코 프라하를 세계적인 문학적 수도로 만들어버린 프란츠 카프카. 그의 문학의 본딜은 '결여성'에서 발견된다.

황금골목의 상점 카프카의 막내동생 오트라의 집이 있었던 황금골목에 위치한 상점으로 현재 카프카와 관련된 기념품 등을 관광객들에게 팔고 있다. 역시 프라하의 명소이다.

청년 시절의 카프카 비범했지만 소심해서 평생을 프라하에서 살았던 카프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에 골몰한 채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그는 이 시절 보험회사에 취직하였으나 창작시간이 전혀 나지 않자 그만두기도 한다.

카프카와 그의 누이들 카프카에게는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유독 막내동생 오트라와는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드보르자크 동상 체코 프라하 시내에 있는 드보르자크 음악박물관 정원에 있는 드보르자크의 동상. 조각가 데젠호프의 작품이다.

 

친애하는 친구 S에게

 

내가 편지를 먼저 써야 할 정도로 그대가 오랜 기간 동안 왜 편지를 쓰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먼저 밝힐 것은 최근에 비엔나에 와서 나는 매우 경쾌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비에스바덴 출신인 브람스 박사와 함께 보낸다는 사실 때문이지요. 나는 그동안 그가 그렇게 즐거운 표정을 짓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었어요. 우리는 매일 낮에 만나서 밤늦게까지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보냈지요. 나와 담소를 나누는 것은 브람스 자신을 흡족하게 하는 일인 것처럼 보였소. 그래서 나는 그의 예술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그의 매력을 칭송하게 되었소. 그리고 브람스의 내면에 감추어진 마음과 영혼에 대해 흠뻑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오.

- 드보르자크가 브람스와의 친교에대해 친구 심록(Simrock)에게 보낸 편지

 

드보르자크 음악박물관의 외관 프라하 시내인 카를로뷰 20번지에 위치한 드보르자크 음악박물관의 우아한 모습. 그의 음악세계의 정교함과 섬세함을 그대로 반영한듯한 건축적 조형이다.

드보르자크의 초상 제자들을 가르칠 때 무척 엄격했다고 전해지는 드보르자크는 스메타나와 더불어 체코 음악을 세계에 알린 대음악가이다. 그는 <슬라브 무곡> 등으로 민족 정서를 반영하는 곡을 쓰기도 했고 <신세계 교향곡> 같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찬탄을 표현하는 곡을 남기기도 했다.

브레히트 박물관 표현주의 예술의 거장이며 20세기 연극이론의 기초를 마련했던 브레히트와 그의 아내 헬레나가 함께 살았던, 베를린의 카우세 스트라세 125번지에 위치한 브레히트 박물관.

브레히트와 그의 아들 브레히트와 그의 아들 프랑크의 단란했던 모습. 브레히트는 평생 애용했던 담배를, 아들 프랑크는 과일을 손에 들고 있다.

브레히트와 헬레나 브레히트는 마리아네 초프와 29세 때 이혼하고 만났던 연극배우 출신의 열정적인 여인 헬레나에게 사랑을 느낀다. 브레히트와 헬레나의 다정한 한때.

브레히트의 가족사진 왼쪽이 브레히트이고 가운데가 그의 동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제지공장을 운영하는 중산층이었고 브레히트는 부모의 바람대로 처음에 의대에 진학하지만 곧 문학의 세계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담배를 문 브레히트 평소에 담배를 무척이나 즐겼던 브레히트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사진을 많이 남겼다. 브레히트 박물관에는 그가 애용했던 수많은 재떨이들이 전시되어 있다.

베를린의 국회의사당 가운데 상단부의 투명한 유리 돔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돔을 투명한 유리로 만든 것은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투명한 정치를 펼치자는 독일 정치인들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마르크스 엥겔스 동상 베를린의 국립미술관과 베를리너 돔 근처에 있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 이들이 전개한 '토대와 상부구조', '리얼리즘 소설이론'은 이후 많은 경제학자, 문예비평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베를린 장벽 원래는 동독과 서독 양쪽에서 만든 장벽이 있었으나, 현재는 한쪽 벽만 슈프레 강 주변에 남아 있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벽 위에 그려진 전위예술가들의 그림이 분단의 상흔을 회상케 하고 있다.

베를린판 분서갱유의 역사유 흄볼트 대학 법과대학 앞 광장에 놓여 있는 역사적인 유물이다. 히틀러가 자신의 체제에 동조하지 않은 지성인들의 책을 끌어내어서 불태워버린 것을 고발하고 있다. 투명한 유리창 밑에 빈 서가가 보인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세계 최고의 관현악단으로 키워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푸르트벵글러, 토스카니니 등과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지휘자로 꼽힌다.

포츠담에 모인 세 정상 1945년 6월에 열린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미국 영국 소련의 세 지도자. 왼쪽부터 처칠, 투루먼, 스탈린이다. 처음에는 미국 대표로 루스벨트, 영국 대표로 처칠이 참석했으나 뒤에 투루먼과 애틀리로 바뀌었다.

세칠리엔호프 궁전 역사적인 포츠담 회담이 열렸던 장소로 이곳에서 한국의 독립이 재확인되었다.

쉬로스 세칠리엔호프 호엔촐레른가의 마지막 왕인 빌헬름 1세의 아들 빌헬름 2세의 부인으로 세칠리엔호프 궁전은 그녀의 이름으로부터 나왔다.

포츠담 회담이 열렸던 회담장 독일 베를린의 부란덴부르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1945년 6월 역사적인 포츠담 회담이 시작되었다.

헤겔의 무덤 독일 베를린 공동묘지에 있는 헤겔의 무덤. 헤겔은 평소에 존경했던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의 옆에 묻히기를 원했고, 그의 희망대로 사후에 피히테 곁에 묻혔다.

헤겔의 초상 과묵하지만 사려 깊고 논리적이었던 헤겔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초상이다. 헤겔은 무척 성실한 철학자였으며 그의 생애 동안 점진적으로 자신의 논리를 보완 완성해 나갔다.

횔더린(위)와 피히테(아래)의 초상 헤겔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두 사람. 튀빙겐 대학의 동창이었던 횔더린과 철학자로서의 전범을 보여주었던 피히테.

청년 헤겔의 초상 비록 보잘것 없는 보수를 받으며 예나 대학의 강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청년 헤겔은 이 시절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정립할 기회를 갖는다. 그의 철학은 후일 마르크스 철학의 기본 동력으로 작용해 세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나는 정찰을 위해서 말을 타고 거리를 지나가는 황제-이 세계정신-를 보았습니다. 그러한 개인을 본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기분이며, 그 개인은 한 점에 집중되어 잇고, 마상에 앉아서 세계를 쥐고 그것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목요일부터 월요일까지의 그러한 사태전개는 놀라지 않고는 불가능한, 이 예외적인 개인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 나폴레옹을 접하게 된 것에 감격하여 남긴 글

 

당신이 만약 허락한다면, 나는 당신이 현재의 처지에서보다 대학교육을 위해서 더욱더 활동적인 공헌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사태가 아직 불확실하기 때문에 이 나의 편지가 터무니없고 쓸데없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쓰는 데는 그만한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랑스럽고 마음씨 고운 처녀와의 관계가 그것이다. 내 행운은 부분적으로 내가 대학에서 한 자리를 얻는다는 조건과 결부된 것이다.

그저께부터 나는 이 사랑의 마음이 나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운을 빌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그녀에게 우선 당신과 당신의 부인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을 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 폰 툭허라고 부른다.

- 1811년 4월 18일 친구 니히트함머에게 보낸 편지

 

너는 나의 것 ! 나는 그녀를 내 것이라 부를 수 있네.

너의 눈짓에서

사랑의 눈짓을 되돌려주는 것을 알겠네.

오 이 기쁨, 오 최고의 행복 !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너는 지금 말할 수 있네.

괴로운 가슴 속에

너무나 오랫동안 몰래 간직했던 것

그것이 이제 내게 큰 기쁨이 되네 !

 

사랑의 황홀은 말이 모자라.

얼마나 그것이 안에서 끓고 넘치는지

표현하기에는 가슴이 벅차

너의 힘이 모자라지.

 

밤에 우는 새야, 나는 네가 부러워

너의 목의 힘으로,

자연도 말하기 어려워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

 

그녀가 입으로 말을 할 때에도

사랑은 축복

결혼의 약속은 없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주고

 

그녀가 그에게 준 깊은 표시,

입맞춤의 깊은 말은

영혼이 닻을 내리는 곳

내 마음 너의 마음 속에 넘쳐 흐르네.

- 헤겔

 

브레히트의 무덤 베를린 공동묘지에 있는 브레히트의 무덤. 브레히트는 사후에 헤겔의 무덤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

고리키 박물관 고리키는 『어머니』 등의 뛰어난 민중소설을 남긴 러시아의 대표적인 민족작가이다. 그는 정치적인 탄압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소신을 지켜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고리키 박물관에 방문객들이 몰려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로마소노프 동상 러시아 최고의 대학인 모스크바 대학을 설립한 로마소노프의 동상.

레닌의 시신 레닌이 죽은 후 후계자 스탈린은 레닌의 우상화 작업에 착수, 권력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다. 레닌의 시신을 방부처리한 후 공개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이다.

담배를 피우는 고리키 고리키는 톨스토이와는 달리 출신성분이 서민계층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생계에 뛰어들어 많은 작업을 전전하였고 이 경험들은 나중에 그의 작품세계에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어린 푸슈킨 초상 푸슈킨은 어린시절부터 감수성이 예민했고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사랑, 우정, 기쁨, 슬픔 등을 언어로 표현해 내는 데 있어 천부적인 시인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푸슈킨 초상 열정적이며 다정다감하고 순수했던 푸슈킨의 초상. 그는 결국 콘체로바라는 여인을 사이에 두고 단테스라는 연적과 결투를 벌이다 목숨을 잃는다.

 

나는 그 경이의 순간을 기억한다.

내가 내 앞에 나타난 그때를

스쳐가는 환영처럼

순수한 아름다움의 정령처럼

 

희망 없는 비애의 그리움 속에서

소란한 조급함의 흥분 속에서

내게 오랫동안 그 부드러운 소리 울렸고

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꿈꾸었다.

- 안나 페트로브나 케른에게 바친 연애시

 

네가 주인이다. 홀로 살아가라.

걸어가라 자유로운 길을,

자유로운 정신이 너를 이끄는 곳으로

좋아하는 생각의 열매를 완성하면서

고귀한 행위에 대한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며,

그것은 너 자신의 내부에 있다.

너 자신이 최고의 심판관이다.

너는 누구보다도 더 엄격하게 자신의 작품을 평가할 수 있다.

- 푸슈킨 「시인에게」

겨울궁전 예카테리나 2세 여왕이 기거하던 겨울궁전은 현재 에르미타쥬 국립 미술관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다. 에르미타쥬 미술관은 세계 3대 미술관의 하나로 230만 점의 소장품을 자랑하고 있다.

황금의 응접실 에르미타쥬 미술관 내부의 황금으로 꾸며진 응접실. 호화롭고 사치스러웠던 왕조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에르미타쥬 미술관 내의 응접실 아치 모양의 장식이 다채롭고 화려한 에르미타쥬 미술관 내의 응접실. 당시 황족이나 귀족들의 미의식과 유행하던 건축 양식 등을 알 수 있다.

압생트를 좋아하는 여인 피카소의 그림으로 에르미타쥬 미술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이 그림은 피카소가 파리에 옮겨온 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이른바 청색시대의 작품에 해당하는데, 푸른색에 대한 그의 독특한 애호는 그의 그림에 고독과, 슬픔, 연민 등의 감정을 불어넣는다.

열매를 들고 있는 여인 폴 고갱의 그림으로 역시 에르미타쥬 미술관의 소장품 중 하나이다. 원초적인 순수의 세계를 찾아 타히티에 정착한 고갱이 그곳의 원주민 소녀를 그린 그림으로 인공의 미가 거세된 순수한 생명의 매력이 잘 드러나 있다.

일리야 레핀이 그린 푸슈킨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러시아 리얼리즘 미술의 대가인 일리야 레핀이 그린 천재 소년 시인 푸슈킨의 초상.

푸슈킨의 신혼집 푸슈킨이 갓 결혼해서 살았던 집. 아르바트 거리에 있다.

 

내가 운명에 대해 경멸을 간직해야 하는가?

내가 운명에 대해서는 고집을

그리고 내 자랑스런 젊음에 대해서는

인내를 지녀야 하는가?

- 푸슈킨

 

푸슈킨과 콘체로바의 동상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푸슈킨과 콘체로바의 동상. 정장 차림인 푸슈킨과 웨딩드레스 차림인 콘체로바의 모습이 이채롭다.

림스키 코르사코프 동상 오페라 <사드코>로 유명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동상. 차이코프스키의 세계화 전략에 맞선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의 상징적인 작곡가이다.

림스키 코르사코프 초상 강직하면서도 위엄을 갖췄던 러시아 민족주의 작곡가 코르사코프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초상화이다. 그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배제했던 차이코프스키보다 러시아 국민에게 더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무소르그스키(위)와 보로딘(아래)의 초상 림스키 코르사코프, 발라키레프, 쿠이와 함께 러시아5인조로 활동, 민족주의 정신을 고취했던 위대한 민족주의 작곡가 무소르그스키와 보로딘의 초상이다.

림스키 코르사코프 부인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부인은 아름다운 것으로도 유명했지만 남편의 음악적 활동을 이해했고 무엇보다 민족음악을 정립하고자 하는 코르사코프의 노력에 동조 적극적으로 권장을 하였다.

작곡을 하는 림스키 코르사코프 말년에 작업실에서 작곡을 하고 있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모습. 그는 말년에 러시아 설화에서 채집한 소재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작곡에 전념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초상 차이코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한 코르사코프와는 달리 주로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외국으로도 활발한 연주여행을 떠났다. 그는 러시아 국내보다는 국외에서 더 많이 알려졌으며 러시아 음악의 세계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차이코프스키의 초상 3개월 간의 짧은 결혼 생활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차이코프스키는 열렬한 팬이었던 나데주다 부인의 금전적 지원을 바탕으로 왕성한 작곡, 연주 활동을 펼치면서 점차 러시아 음악계의 거두로 자리 잡는다.

차이코프스키와 그의 부인 차이코프스키는 밀류브코바라는 여인과 단 한 번 결혼하지만 3개월 만에 헤어지고 만다. 이후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는데 그 때문인지 그에게는 동성애자였다는 의혹이 따라붙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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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