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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14. 14:02 내가 읽은 책들/2017년도

2017-005 빅데이터 세상

 

매일경제 기획팀 · 서울대 빅데이터 센터 지음

2014, 매일경제신문사

 

대야도서관

SB102206

 

331.5412

매68ㅂ

 

당신의 숨겨진 욕망까지 읽어드립니다

 

빅데이터, Big Data

당신의 마음을 읽다

 

최근 ICT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수많은 데이터들이 재조명되었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던 수많은 데이터들이 '빅데이터' 기술을 만나 유의미한 것으로 바뀌었다.


#1 소비자들의 주요 소비품목을 날씨 정보와 함께 분석하니 비오는 날에는 피자빵이 많이 소비된다는 결과를 얻었다. 쇼윈도의 마네킹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수집한 고객정보를 분석해 보니 손님이 많이 출입하는 시간대와 많은 손님들이 드나드는 출입문이 어느 곳인지 알게 되었다.

#2 한 통신사는 전국 수만 대의 차량에 센서를 부착, 운행정보를 수집한다. 서비스 가입자들에게 실시간 교통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가장 안전하고 신속한 길을 안내한다.

#3 어떤 금융사는 SNS 이용자들의 게시글에 반복되는 어휘를 수집한다. 그리고 그 어휘가 자주 사용되는 사회적 배경을 분석한다. 그것이 주가에 미칠 영향을 예측하는 데 사용되기 위해서다. 사회심리가 주가에도 영향을 미치는 바, 수익률 높은 투자정보를 고객에게 제공하기 위해서다.


빅데이터는 이미 실생활 가까운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의 수준은 걸음마 단계다. 아직 빅데이터가 널리 사용되기에는 제도적인 한계가 너무나도 많고, 일반인들 다수는 빅데이터의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산업계에선 선진국의 활용사례를 발 빠르게 받아들여 현장에 도입하고 있으며, 학계 역시 빅데이터 학과를 개설,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 세계적 수준인 우리나라의 ICT인프라를 빅데이터에 활용하기 위한 연구도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이 책은 한국 빅데이터의 현주소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스마트한 사회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유익한 정보와 영감을 제공할 것이다.

 

지은이

매일경제 기획팀 · 서울대 빅데이터 센터

매일경제는 ‘미래를 바꾸는 창’으로 불리는 빅데이터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2013년 6월부터 서울대 빅데이터센터와 공동으로 <디지털 금맥, 빅데이터> 연중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 기업과 학계, 정부는 실시간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활용해 새로운 사업기회를 확보하는 것은 물론 미래까지 예측하는 빅데이터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국

매일경제 기획팀

유진평 모바일부 부장, 최용성 모바일부 차장, 황지혜 모바일부 기자, 홍장원 모바일부 기자, 이동인 사회부 기자, 김대기 과학기술부 기자, 원요환 사회부기자, 손유리 모바일부 기자

서울대 빅데이터 센터

고학수 교수(법학), 김선 교수(컴퓨터공학), 김수옥 교수(경영학), 박종헌 교수(산업공학), 서진욱 교수(컴퓨터공학), 이상구 교수(컴퓨터공학), 이재욱 교수(산업공학), 조성준 교수(산업공학)

 

contents

 

발간사

머리말 1

머리말 2

 

PART 01 빅데이터

 

chapter 1 실리콘밸리 빅데이터

                     실리콘밸리에 부는 빅데이터 바람

                     스타트업도 빅데이터가 대세

                     ● Interview - 파드마스리 워리어 시스코 부회장

                     구글과 페이스북의 데이터 파워전략

                     ● Interview - 벤 곰스 부사장

                     ● Interview - 댄 니어리 대표

 

chapter 2 빅데이터, 그것이 알고 싶다

                     빅데이터가 뭐기에…

                     ● Interview - 빅토르 마이어 쇤베르거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스포츠…

                     범죄 수사에서도 새 물결

                     ● Interview - 이상구 서울대 정보화본부장

                     ● Interview - 사이번 토머스 IBM 부사장

                     ● 빅데이터가 만드는 세상 - 조성준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 운영 빅데이터에 기반한 실시간 기업의 완성

                         - 박종헌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PART 2 빅데이터 빅뱅

 

chapter 1 유통빅뱅

                     고객정보 수집하는 마네킹

                     맑은 날 샌드위치, 비 오면 피자빵

                     ● Interview - 강용성 와이즈넛 대표

                     ● 고객을 불러들이는 분석경영 - 김수옥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

 

chapter 2 스포츠 빅뱅

                     오틀랜드 20연승 신기록의 비결

                     삼성라이온즈 3년 연속 우승의 힘

                     ● Inetrview - 장원철 서울대 통계학과 교수

 

chapter 3 생명과학 빅뱅

                     가족력 · 유전자 맞춤진료

                     DNA로 몇 년 후 발병 알아내

                     의료정보 활용, 프라이버시가 관건

                     ● Interview - 김주한 서울대 의대 교수

                     ● 생물정보학 기술을 이용한 유방암,

                         가뭄저항성 벼 연구 - 김선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

 

chapter 4 ICT 빅뱅

                     국내 이동통신사들의 빅데이터 활용

                     한국 SI, 콜롬비아 빅데이터 문을 열다

                     국내 업계 빅데이터 솔루션 시장공략

                     ● Interview - 이영조 서울대 교수

                     ● Interview - 함유근 건국대 교수

 

chapter 5 금융빅뱅

                     금융업계 빅데이터 금맥 찾기

                     항구도시 부산, 양식소비가 일식 3배

                     카드사는 알고있다

                     ● 빅데이터와 금융 - 이재욱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외 1인

 

chapter 6 부동산 빅뱅

                     부동산에 부는 빅데이터 바람

                     ● Interview - 경정익 명지대 교수

 

chapter 7 재난대응 빅뱅

                     세월호 비극은 열악한 한국 빅데이터 민낯

                     '데이터 빈곤 악순환'에 빠진 한국 사회

 

PART 3 빅데이터 미래

 

chapter 1 빅브라더와 빅데이터

                     디지털 감옥에 갇힐 수도

                     ● Interview - 제프 모스 데프콘 설립자

 

chapter 2 빅데이터 걸림돌

                     너무 까다로운 규제환경

                     융합산업 가로막는 개인정보보호 체계

                      ● Interview - 김형주 서울대 교수

                      ● 개인정보유출로 인한 피해와 빅데이터 활용

                          - 고학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chapter 3 빅데이터 코리아를 위해

                     정보 빅뱅시대 '빅데이터 분석가' 키워야

                     ● Interview - 이준기 연세대 교수

                     ● 정보시각화 - 서진욱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

                     ● 텍스트 데이터 처리, 인류의 지적 자산 다루기

                         - 이상구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

 

 

 

 

posted by 황영찬

2017-004 그림의 힘

 

 

 

김선현 지음

2015,에이트 포인트

 

대야도서관

SB104162

 

600.18

김54ㄱ

 

the power of masterpiece

 

최상의 리듬을 찾는 내 안의 새로운 변화

 

김선현

 

예술을 사랑해서 미술을 전공했고, 작가로 활동했다. 강의와 실습을 지도하던 중, 눈에 띄게 밝아진 아이들과 스트레스로부터 차츰 벗어나는 사람들을 보고 그림이 갖는 치료적 힘에 눈을 떴다.

‘그림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건 나 혼자만의 만족이지만, 미술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희망과 도움을 줄 수 있다.’

그 가능성에 인생을 걸어보자고 생각했다.

주위의 만류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불모지나 다름없던 미술치료 분야에 뛰어들었다.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동양인 최초로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 부속병원에서 예술치료 인턴 과정을 수료했다. 일본에서는 외국인 최초로 임상미술사 자격을 취득했고, 일본 기무라 클리닉 및 미국 MD앤더슨암센터 예술치료 과정을 거쳐 프랑스 미술치료 Professional 과정까지 마쳤다. 미국미술치료학회(AATA) 정회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현재 차(CHA)의과학대학교 미술치료대학원 원장과 차병원 임상미술치료클리닉 교수로 재직 중이며, 그간의 활동과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작년에는 세계미술치료학회(WCAT)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최근 세월호 사고 학생들은 물론, 천안함 사건 유족, 연평도 포격 피해 주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동일본 대지진 피해 일본인까지, ‘국가적 트라우마’ 현장에 곧바로 초빙되어 많은 이들의 아픈 마음을 전문적으로 치유해온 미술치료계의 최고 권위자다. TV나 신문, 잡지 등의 언론에서는 사람들의 심리를 다루게 되는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 가장 먼저 그녀를 인터뷰한다.

그동안 집필한 책으로는 『그림심리평가』 『그려요 내 마음, 그래요 내 마음』 『그림 속에서 나를 만나다』 『컬러가 내 몸을 바꾼다』 등 다수가 있다.
이번 『그림의 힘』은 지난 20여 년간의 미술치료 현장에서 가장 효과가 있었던 세기의 명화들을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도록 집약한 김선현 원장의 대표작이다.

 

그림은 과연 어떤 힘을 갖고 있을까?

 

이 책이 기존 명화책과 다른 점은, 효과가 입증된 그림들을 엄선했다는 것이다. 이 그림들을 보면 스트레스가 줄어든다. 스트레스가 완화될수록 집중력이 높아지고 창조성도 생긴다. 나의 내면에 선순환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정신과 영혼을 건강하게 만드는 그림의 힘을 확인시키는 김선현 교수의 역작이다.

- 정신과 전문의 · 『세로토닌하라!』 저자 | 이시형 박사




그림은 저에게 습관입니다. 그림은 관점을 새롭게 하고 역발상을 자극합니다. 여러 개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합니다. 이 책이 참 반갑습니다.

- 법무법인 세줄 대표 변호사 | 최정수



만듦새에 정성을 들인 책이다. 현대인들에게 이렇게 호화로운 명화들을 질 좋게 감상하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다.

- (사)한국판화사진진흥협회 회장 · 금산갤러리 대표 | 황달성



『그림의 힘』은 실제 미술치료라는 관점에서 누구나 편안하고 쉽게 그림이 전하는 마음과 뜻,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따뜻한 시선이 담긴 책이다. 저자 김선현은 독자들에게 동서양의 다양한 그림들을 통해 화가가 전달하려 했던 이야기와 상념, 그림 속에 스며들어 있는 삶의 기억과 편린들을 보여주면서 독자들, 아니 이 책을 통해 정신적 유대를 맺게 된 동시대인들에게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해 준다.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덕목은 다양한 그림의 색과 구도, 이미지들이 가지는 의미와 치유력을 누구나 알기 쉽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분석하여 미술치료라는 맥락으로 엮어내고 있다는 데 있다. 새삼 그림의 힘, 그림을 통한 내면적 대화와 소통, 치유의 가능성을 깨닫게 해 주는 좋은 책이다. 이 아름다운 책을 읽으면 별이 가득한 겨울밤 벽난로 옆에 앉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찬찬히 이야기를 건네는 저자를 만나는 잔잔한 기쁨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 서울대학교 교수 ·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 회장 홍준형


일과 삶에서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스트레스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위로받기도 하고, 때로는 웃음 지으며 제 자신을 다독일 수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이 '그림의 따뜻한 힘'을 통해 좀 더 행복해지길 바랍니다. 그림은 늘 놀랍습니다.

- 구글 팀장 · 『생각을 선물하는 남자』 저자 | 김태원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모른 채 바쁜 걸음을 걷는 이들에게 그림이라는 거울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책.

- ‘브로콜리 너마저’ | 윤덕원



지독한 탐미주의자인 나는 표지부터 마음을 사로잡혔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책 안에 실린 그림들이 더 보고 싶어 책장이 끝나가는 아쉬움을 느낄 정도였다. 늘 웃으며 살지만 복잡한 생각과 불안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다. 그런 나날 속에 내 머리를 맑게 해준, 나를 위한 최고의 투자였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미팅이 있기 전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려야 하는 순간에 리프레시가 되어줄 자극들을 선사받은 기분이다.

- ‘장진우식당’ 대표 | 장진우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지칠 수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집중력과 의욕을 높여주는 그림들이 유용할 듯하다.

- 대원외고 교사 | 권중모



일과 육아에 지쳐 책 읽을 시간도 없고 글자도 잘 들어오지 않았던 나에게 매일 밤 선물 같았던 책. 그림만 봐도 심신이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 4년차 워킹맘 | 윤가영



무거워도 비행갈 때 이 책은 꼭 챙기고 싶다. 호텔에서 쉴 때마다, 세계의 명화도 보고 사람과 일에 대한 생각도 내려놓을 수 있어서 나에게 더없는 힐링 타임이 된다.

- 스튜어디스 | 안소영

 

 

차례

 

저는 그림의 힘을 믿습니다.

 

Work
일의 행복을 위하여


'사람들이 일에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일이 적성에 맞아야 하고, 일을 너무 많이 해서는 안 되며, 일에서 성취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 존 러스킨John Ruskin

세 가지 조건 모두를 충족시키기 쉽지 않기에, 우리는 일로부터 잦은 스트레스를 받곤 합니다. 이 파트의 그림은 지친 머리를 맑게 하고 일의 집중력과 에너지, 의욕을 자극해 일의 행복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01 오늘 하루도 수고한 당신을 위한 밤의 테라스
02 둥근 원, 빨강, 그리고 체력 에너지
03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자유
04 손과 마음이 가는대로
05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
06 신선한 아이디어를 얻으려면
07 짜증을 풀려면 붉은 방에 가라
08 나도 의욕적으로 일하고 싶다
09 배움에 대한 열정
10 마음을 어루만지는 그림이 필요한 이유
11 하기 싫은 일로부터의 스트레스
12 집중력을 위한 최상의 분위기
13 긴장을 풀어주는 노랑의 힘
14 에너지가 쏟아지는 순간을 맞이하라
15 나의 감정을 이해해주세요
16 불안한 마음을 해소하는 방법



Relationship 부드러운 사람 관계를 원한다면

사랑하고 또 동시에 미워하게도 되는 존재, 어렵다고 등한시할 수 없는 영원한 삶의 과제. ‘사람’. 외로움과 상처와 같이 사람으로부터 오는 결핍들을 치유하고, 나의 사람 관계를 돈독히 꾸려나갈 수 있는 그림들을 담았습니다.


01 아름다운 그림은 구체적으로 어떤 힘을 지닐까
02 우리들 마음에 잔잔한 위로를 던져주는 그림
03 사교적 활동과 대인관계에 좋은 색깔
04 한 번쯤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해주는 그림
05 나 혼자만이 갖는 시간의 비밀
06 주변 사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다
07 어른이 되면서 주변에 사람이 줄어든 이들
08 자신도 모르게 느끼는 일상의 관계들
09 사람에게 실망할 때
10 질투로 인한 영혼의 괴로움
11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때
12 업무 현장에서 다 함께 보면 좋은 그림
13 사랑의 설렘을 느끼고 싶다면
14 휴식이 되어줄 수 있는 관계
15 순간순간 스트레스를 주는 상대가 있는 사람들

* 나를 알아보는 Art Therapy Test Ⅰ


Money 돈, 인생의 가장 긴밀한 친구가 되다

돈의 힘은 일의 결과를 좌우하고 사람의 처지를 변화시킵니다. 이런 돈을 적이나 주인으로 삼기보다, 적절한 동반자로 삼는 마인드가 중요할 것입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돈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재설정할 수 있는 그림들을 실었습니다.


01 행복하면 ‘핑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02 돈을 버는 것이 행복하려면
03 나도 부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04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최상의 황홀
05 꿈이 시작되는 기쁨에 전염되다
06 내 스스로에게 주는 휴식
07 유명 스타를 꿈꾸다
08 그저 마음 편안해지는 그림
09 돈보다 중요한 그 무엇
10 힘든 일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 비밀
11 그림으로 파악해보는 나의 현실
12 돈에 대한 부담을 가볍게 하다
13 돈 버는 일 중에, 힘들지 않은 일은 없을까
14 미래에 우리가 살고 싶은 풍경
15 가장의 짐을 내려놓다

* 나를 알아보는 Art Therapy Test Ⅱ


Time 시간에 대한 긍정으로

과거의 기억에 따른 아픔, 현재에 대한 불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누구나 한 번쯤 겪듯이, 우리는 시간과 싸우고 화해하며 그렇게 매일을 살아갑니다. 이 파트는 나를 둘러싼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고 편안히 마주할 수 있게 만들어줄 그림들입니다.


01 나는 어떤 기대를 가지고 살아갈까
02 바빠서 너무 정신이 없을 때
03 미래의 희망으로 나를 채우다
04 마음 편한 퇴근 시간처럼
05 과거에 사로잡힌 당신에게
06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나의 문제들
07 지금의 나를 벗어나고 싶다면
08 세 여인이 가르쳐준 인생의 단계
09 미래에 대한 불안을 걷어내려면
10 한 번쯤 죽음을 생각해보는 시간
11 성실함이 주는 삶의 교훈
12 시간이 멈춰버린 세상
13 지금 이 시간에 충실하라
14 휴식이 필요한 순간은?
15 늙는다는 것에 대하여

 

Myself 내 고유의 리듬을 되찾고 싶다면

진짜 내 마음을 들여다본 적이 있나요? 때론 나조차도 제대로 살피지 않은 나를 보살펴주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나만의 리듬과 스스로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해주는 이 그림들의 힘으로, 스트레스 받았던 일상이 문득 빛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01 울음은 영혼이 회복하는 첫걸음
02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03 나는 어떤 사람인가
04 모든 책임은 우주에 있다
05 침체된 몸에 생기를 선물하라
06 불안해하는 청춘들에게
07 나에게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은?
08 내 안에서 두 가지 마음이 싸운다면
09 자신감이 부족할 때 보면 좋은 그림
10 자유로움을 갈망하다
11 있는 그대로의 나
12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지다
13 풀어진 나를 팽팽하게 당겨주는 그림
14 화를 푸는 방법
15 생각을 바꾸면 보이는 나만의 개성
16 나를 최고로 만드는 그림의 힘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현실이 된다.

Everything you can imagine is real.

---------------◇----------------

- 파블로 피카소 Pablo Ruiz Picasso

 

 

Work

---------------◇---------------

01

 

오늘 하루도 수고한

당신을 위한 밤의 테라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

밤의 카페 테라스

Cafe Terrace at Night

 

 빈센트 반 고흐 | 1888 | 캔버스에 유채 | 81 × 65.5cm | 크뢸러뮐러 미술관

 

Work

---------------◇---------------

02

 

둥근 원, 빨강,

그리고 체력 에너지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Wassilyvich Kandinsky

---------------◇---------------

동심원들과 정사각형들

Squares with Concentric Rings

 

바실리 칸딘스키 | 1913 | 수채 · 과슈 · 쵸크 | 23.9 × 31.5cm | 렌바흐 미술관

 

Work

---------------◇---------------

03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자유

 

구스타브 카유보트

Gustave Callebotte

---------------◇---------------

창가의 남자

Young Man at His Window

 

구스타브 카유보트 | 1875 \ 캔버스에 유채 | 117 × 82cm | 개인소장

 

Work

---------------◇---------------

04

 

손과 마음이

가는대로

 

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

---------------◇---------------

비눗방울 부는 소년

Boy Blowing Bubbles

 

에두아르 마네 | 1867 | 캔버스에 유채 | 100.5 × 81.4cm | 칼루스트 굴베키안 미술관

 

Work

---------------◇---------------

05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

 

존 밀레이

John Everett Millais

---------------◇---------------

눈 먼 소녀

The Blind Girl

 

존 밀레이 | 1854 ~ 56 | 캔버스에 유채 | 82 × 60.8cm | 버밍엄 박물관 및 미술관

 

Work

---------------◇---------------

06

 

신선한 아이디어를

얻으려면

 

앙리 마티스

Henri-Emile-Benoit Matisse

---------------◇---------------

폴리네시아, 하늘

Polynesia, the sky

폴리네시아, 바다

Polynesia, the sea

 

폴리네시아, 하늘 Polynesia, the sky

앙리 마티스 | 1946 | 과슈 · 종이 붙이기 | 200 × 314cm | 조르주 퐁피두 센터

폴리네시아, 바다 Polynesia, the sea

앙리 마티스 | 1946 | 과슈 · 종이 붙이기 | 196 × 314cm | 조르주 퐁피두 센터

 

Work

---------------◇---------------

07

 

짜증을 풀려면

붉은 방에 가라

 

앙리 마티스

Henri-Emile-Benoit Matisse

---------------◇---------------

붉은 조화

Harmony in Red

 

앙리 마티스 | 1908 | 캔버스에 유채 | 180.5 × 221cm | 에르미타주 미술관

 

Work

---------------◇---------------

08

 

나도 의욕적으로

일하고 싶다

 

장 조프루아

Henry-Jules-Jean Geoffroy

---------------◇---------------

교실, 공부하는 아이들

The Children's Class

 

장 조프루아 | 1889 | 캔버스에 유화 | 프랑스 교육부

 

Work

---------------◇---------------

09

 

배움에 대한

열정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Jean-Baptiste-Simeon Chardin

---------------◇---------------

젊은 여선생

The Young Schoolmistress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 1735 ~ 36 | 캔버스에 유채 | 62 × 67cm | 내셔널 갤러리

 

Work

---------------◇---------------

10

 

마음을 어루만지는

그림이 필요한 이유

 

에드가 드가

Edgar Degas

---------------◇---------------

시골 경마장

At the Races in the Countryside

 

에드가 드가 | 1869 | 캔버스에 유채 | 36.5 × 55.9cm | 보스턴 미술관

 

Work

---------------◇---------------

11

 

하기 싫은 일로부터의

스트레스

 

자코모 발라

Giacomo Balla

---------------◇---------------

줄에 매인 개의 움직임

Dynamism of a Dog on a Leash

 

자코모 발라 | 1912 | 캔버스에 유채 | 95.57 × 115.57 cm | 올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Work

---------------◇---------------

12

 

집중력을 위한

최상의 분위기

 

조르주 드 라 투르

Georges de La 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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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등불 앞의 막달라 마리아

Magdalen with the Smoking Flame

 

조르주 드 라 투르 | 1640 ~ 45) | 캔버스에 유채 | 128 × 94cm | 루브르 박물관

 

Work

---------------◇---------------

13

 

긴장을 풀어주는

노랑의 힘

 

폴 고갱

Paul Gauguin

---------------◇---------------

기도하는 브르타뉴의 여인

Breton Woman in Prayer

 

폴 고갱 | 1894 | 캔버스에 유채 | 65.3 × 46.7cm | 스털링 앤 프란시네 클락 아트 인스티튜트

 

 

Work

---------------◇---------------

14

 

에너지가 쏟아지는 순간을

맞이하라

 

가쓰시카 호쿠사이

葛飾北斎

---------------◇---------------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

The Great Wave off Kanagawa

 

가쓰시카 호쿠사이 | 1829 ~ 32 | 판화 | 25.7 × 37.8cm | 기메 국립 아시아 미술관

 

Work

---------------◇---------------

15

 

나의 감정을

이해해주세요

 

후고 짐베르크

Hugo Gerhard Simberg

---------------◇---------------

부상당한 천사

The Wounded Angel

 

후고 짐베르크 | 1903 | 캔버스에 유채 | 127 × 154cm | 아테네움 미술관

 

 

Work

---------------◇---------------

16

 

불안한 마음을

해소하는 방법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

비너스의 탄생

The Birth of Venus

 

산드로 보티첼리 | 1483 ~ 85 | 패널에 템페라 | 172.5 × 278.5cm | 우피치 미술관

 

Relationship

---------------◇---------------

01

 

아름다운 그림은 구체적으로

어떤 힘을 지닐까

 

오귀스트 르누아르

Pierre-Auguste Ren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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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소녀

Young Girls at the Piano

 

오귀스트 르누아르 | 1892 | 캔버스에 유채 | 116 × 90cm | 오르세 미술관

 

Relationship

---------------◇---------------

02

 

우리들 마음에 잔잔한 위로를

던져주는 그림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

우체부 조제프 롤랭의 초상

Portrait of the Postman Joseph Roulin

 

빈센트 반 고흐 | 1889 | 캔버스에 유채 | 64.4 × 55.2cm | 뉴욕 현대미술관

 

Relationship

---------------◇---------------

03

 

사교적 활동과 대인관계에

좋은 색깔

 

이중섭

---------------◇---------------

해와 아이들

 

이중섭 | 1952 ~ 53 | 종이에 연필과 유채 | 32.5 × 49cm

 

 

Relationship

---------------◇---------------

04

 

한 번쯤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해주는 그림

 

조르주 로슈그로스

Georges Antoine Rochegrosse

---------------◇---------------

꽃밭의 기사

The Knight of Flowers

 

조르주 로슈그로스 | 1894 | 캔버스에 유채 | 235 × 374cm | 오르세 미술관

 

Relationship

---------------◇---------------

05

 

나 혼자만이

갖는 시간의 비밀

 

정선

---------------◇---------------

인왕제색도

 

정선 | 1751 | 종이에 수묵 | 79.2 × 138.2cm | 삼성미술관 리움

 

Relationship

---------------◇---------------

06

 

주변 사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

황제 권좌에 앉은 나폴레옹

Napoleon I on his Imperial Throne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 1806 | 캔버스에 유채 | 259 × 162cm | 앵발리드 군사박물관

 

Relationship

---------------◇---------------

07

 

어른이 되면서 주변에

사람이 줄어든 이들

 

오귀스트 르누아르

Pierre-Auguste Renoir

---------------◇---------------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Dance at le Moulin de la Galette

 

오귀스트 르누아르 | 1876 | 캔버스에 유채 | 131 × 175cm | 오르세 미술관

 

Relationship

---------------◇---------------

08

 

자신도 모르게 느끼는

일상의 관계들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Rodriguez de Silva y Velazquez

---------------◇---------------

시녀들

The Maids of Honor

 

디에고 벨라스케스 | 1656 | 캔버스에 유채 | 316 × 276cm | 프라도 미술관

 

Relationship

---------------◇---------------

09

 

사람에게

실망할 때

 

클로드 모네

Oscar-Claude Monet

---------------◇---------------

임종을 맞은 카미유

Camille on Her Death Bed

 

클로드 모네 | 1879 | 캔버스에 유채 | 90 × 68cm | 오르세 미술관

 

Relationship

---------------◇---------------

10

 

질투로 인한

영혼의 괴로움

 

전기

---------------◇---------------

매화초옥도

 

전기 | 19세기 중엽 | 종이에 엷은 채색 | 32.4 × 36.1cm | 국립중앙박물관

 

Relationship

---------------◇---------------

11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때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

태양

The Sun

 

에드바르트 뭉크 | 1911 ~ 16 | 캔버스에 유채 | 455 × 780cm | 오슬로 대학

 

Relationship

---------------◇---------------

12

 

업무 현장에서

다 함께 보면 좋은 그림

 

크리스티안 롤프스

Christian Rohlfs

---------------◇---------------

블루 마운틴

The Blue Mountain

 

크리스티안 롤프스 | 1912 | 캔버스에 유채 | 80 × 60cm | 쿤스트 팔라스트 미술관

 

Relationship

---------------◇---------------

13

 

사랑의 설렘을

느끼고 싶다면

 

로렌스 알마 타데마

Lawrence Alma-Tadema

---------------◇---------------

더 묻지 마세요

Ask Me No More

 

로렌스 알마 타데마 | 1906 | 캔버스에 유채 | 80.1 × 115.7cm | 개인소장

 

 

Relationship

---------------◇---------------

14

 

휴식이 되어줄 수 있는

관계

 

마커스 스톤

Marcus Stone

---------------◇---------------

훔친 키스

A Atolen Kiss

 

마커스 스톤 | 1894 | 캔버스에 유채 | 152 × 66cm | 개인소장

 

Relationship

---------------◇---------------

15

 

순간순간 스트레스를 주는

상대가 있는 사람들

 

폴 세뤼지에

Louis-Paul-Henri Serusier

---------------◇---------------

브르타뉴의 싸움

Breton Wrestling

 

폴 세뤼지에 | 1890 ~ 91 | 캔버스에 유채 | 91 × 72cm | 오르세 미술관

 

 

카스파르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 창가의 여인Woman at Window

 

Money

---------------◇---------------

 

01

 

행복하면 '핑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Jean-Honore Fragonard

---------------◇---------------

그네

The Swing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 1767 | 캔버스에 유채 | 81 × 64.2cm | 윌리스 컬렉션

 

Money

---------------◇---------------

 

02

 

돈을 버는 것이

행복하려면

 

히에로니무스 보슈

Hieronymus Bosch

---------------◇---------------

죽음과 구두쇠

Death and the Miser

 

히에로니무스 보슈 | 1485 ~ 90| 패널에 유채 | 93 × 31cm | 워싱턴 국립미술관

 

Money

---------------◇---------------

 

03

 

나도 부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그랜마 모지스

Grandma Mosese

---------------◇---------------

퀼팅 비

The Quilting Bee

 

그랜마 모지스 | 1940 ~ 50| 목판에 유채 | 50.8 × 61cm | 개인소장

 

Money

---------------◇---------------

 

04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최상의 황홀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

꽃이 있는 농장 정원

Farm Garden with Flowers

 

구스타프 클림트 | 1905 ~ 06| 캔버스에 유채 | 110 × 110cm |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갤러리

 

Money

---------------◇---------------

 

05

 

꿈이 시작되는 기쁨에

전염되다

 

애벗 그레이브스

Abbott Fuller Graves

---------------◇---------------

종잣돈

The Nest Egg

 

애벗 그레이브스 | 1910 | 캔버스에 유채 | 81.2 × 116.8cm | 뱅크 오브 아메리카 컬렉션

 

Money

---------------◇---------------

 

06

 

내 스스로에게 주는

휴식

 

윌리엄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

전함 테메레르

The Fighting Te-meraire

rugged to her last berth to be broken up

 

윌리엄 터너 | 1839 | 캔버스에 유채 | 91 × 122cm | 내셔널 갤러리

 

 

Money

---------------◇---------------

 

07

 

유명 스타를

꿈꾸다

 

에드가 드가

Edgar Degas

---------------◇---------------

스타

The Star

 

에드가 드가 | 1876 | 종이에 파스텔 | 58 × 42cm | 오르세 미술관

 

Money

---------------◇---------------

 

08

 

그저 마음 편안해지는

그림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cois Millet

---------------◇---------------

Spring

 

장 프랑수아 밀레 | 1868 ~ 73 | 캔버스에 유채 | 86 × 111cm | 오르세 미술관

 

Money

---------------◇---------------

 

09

 

돈보다 중요한

그 무엇

 

프랑수아 제라르

Francois Pascal Simon, Baron Gerard

---------------◇---------------

큐피드와 프시케

Cupid and Psyche

 

프랑수아 제라르 | 1798 | 캔버스에 유채 | 186 × 132cm | 루브르 박물관

 

 

Money

---------------◇---------------

 

10

 

힘든 일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 비밀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

수확하는 농부

Wheatfield with a Reaper

 

 

빈센트 반 고흐 | 1889 | 캔버스에 유채 | 73.2 × 92.7cm | 반 고흐 미술관

 

Money

---------------◇---------------

 

11

 

그림으로 파악해보는

나의 현실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

생의 춤

The Dance of Life

 

에드바르트 뭉크 | 1899 ~ 1900 | 캔버스에 유채 | 125 × 191cm | 뭉크 미술관

 

Money

---------------◇---------------

 

12

 

돈에 대한 부담을

가볍게 하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

속임수를 쓰는 사람

The Cardsharps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 1595년경 | 캔버스에 유채 | 94.2 × 130.9cm | 킴벨 미술관

 

 

Money

---------------◇---------------

 

13

 

돈 버는 일 중에,

힘들지 않은 일은 없을까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

---------------◇---------------

꽃 노점상

The Flower Seller

 

 디에고 리베라 | 1942 | 메이소나이트에 유채 | 122 × 122cm | 개인소장

 

 

Money

---------------◇---------------

 

14

 

미래에 우리가

살고 싶은 풍경

 

클로드 모네

Oscar-Claude Monet

---------------◇---------------

아르장퇴유의 뱃놀이

Regatta at Argenteuil

 

 

클로드 모네 | 1872년경 | 캔버스에 유채 | 48 × 75.3cm | 오르세 미술관

 

Money

---------------◇---------------

 

15

 

가장의 짐을

내려놓다

 

암리타 쉐어 길

Amrita Sher-Gil

---------------◇---------------

옛이야기꾼

Ancient Storyteller

 

암리타 쉐어 길 | 1940 | 캔버스에 유채 | 89.2 × 72.8cm | 인도 국립현대미술관

 

 

페르디낭 호들러 Ferdinand Hodler | 선택받은 자 The Consecrated One

 

Time

---------------◇---------------

 

01

 

나는 어떤 기대를

가지고 살아갈까

 

로렌스 알마 타데마

Lawrence Alma-Tadema

---------------◇---------------

기대

Expectations

 

로렌스 알마 타데마 | 1885 | 패널에 유화 | 45 × 66cm | 개인소장

 

Time

---------------◇---------------

 

02

 

바빠서

너무 정신이 없을 때

 

프레데릭 레이턴

Frederick Leigton

---------------◇---------------

타오르는 6월

Flaming June

 

프레데릭 레이턴 | 1895 | 캔버스에 유채 | 119 × 119cm | 폰세 미술관

 

Time

---------------◇---------------

 

03

 

미래의 희망으로

나를 채우다

 

파울 클레

Paul Klee

---------------◇---------------

세네치오

Senecio

 

파울 클레 | 1922 | 캔버스에 유채 | 40.3 × 37.4cm | 바젤미술관

 

Time

---------------◇---------------

 

04

 

미음 편한

퇴근 시간처럼

 

허버트 바담

Herbert Badham

---------------◇---------------

나이트 버스

The Night Bus

 

허버트 바담 | 1943 | 보드에 유채 | 35.7 × 25.6cm | 빅토리아 주립미술관

 

Time

---------------◇---------------

 

05

 

과거에 사로잡힌

당신에게

 

클로드 모네

Oscar-Claude Monet

---------------◇---------------

루앙 대성당

Rouen Carhedral

 

클로드 모네 | 1892 ~ 93 | 캔버스에 유채 | 107 × 73cm | 오르세 미술관

 

Time

---------------◇---------------

 

06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나의 문제들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

---------------◇---------------

안개 낀 바다 위의 방랑자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 1817년경 | 캔버스에 유채 | 94.5 × 74.8cm | 함부르크 미술관

 

Time

---------------◇---------------

 

07

 

지금의 나를

벗어나고 싶다면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

머리카락을 자른 자화상

Self-Portrait Cropped Hair

 

프리다 칼로 | 1940 | 캔버스에 유채 | 40 × 27.9cm | 뉴욕 현대미술관

 

Time

---------------◇---------------

 

08

 

세 여인이 가르쳐준

인생의 단계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

여인의 세 단계

The Three Ages of Woman

 

구스타프 클림트 | 1905 | 캔버스에 유채 | 178 × 198cm | 로마 현대미술 갤러리

 

Time

---------------◇---------------

 

09

 

미래에 대한 불안을

걷어내려면

 

피터르 브뤼헐

Pieter Bruegel the Elder

---------------◇---------------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the Fall of Icarus

 

피터르 브뤼헐 | 1558 | 캔버스에 유채 | 73.5 × 112cm | 벨기에 왕립미술관

 

Time

---------------◇---------------

 

10

 

한 번쯤 죽음을

생각해보는 시간

 

폴 고갱

Paul Gauguin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폴 고갱 | 1897 ~ 98 | 캔버스에 유채 | 139.1 × 374.6cm | 보스턴 미술관

 

Time

---------------◇---------------

 

11

 

성실함이 주는

삶의 교훈

 

랭부르 형제

The Limbourg brothers

---------------◇---------------

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6월, 2월)

The Very Rich Hours of the Duke of Berry

 

랭부르 형제 | 1412 ~ 16 | 양피지에 필사본 삽화 | 22.5 × 13.6cm | 콩데 미술관

 

Time

---------------◇---------------

 

12

 

시간이

멈춰버린 세상

 

알베르트 비어슈타트

Albert Bierstadt

---------------◇---------------

하구에서

On the Saco

 

알베르트 비어슈타트 | 19세기경 | 캔버스에 유채 | 76.2 × 111.76cm | 개인소장

 

Time

---------------◇---------------

 

13

 

지금 이 시간에

충실하라

 

조르주 쇠라

Georges-Pierre Seurat

---------------◇---------------

임종을 맞이하는 아나이스 페브르 오몽테

Anaïs Faivre Haumonte on Deathbed

 

조르주 피에르 쇠라 | 1887 | 과슈 · 소묘 연필 | 23 × 33cm | 루브르 박물관

 

Time

---------------◇---------------

 

14

 

휴식이 필요한

순간은?

 

모리츠 폰 슈빈트

Moritz von Schwind

---------------◇---------------

아침시간

The Morning Hour

 

쉴 시간이 없을 때가

바로 휴식이 필요한 

순간이다.              

The time to relax             

is when you don't          

have time for it.             

                          - 시드니 J. 해리스 Sydney J. Harris

 

모리츠 폰 슈빈트 | 1860 | 캔버스에 유채 | 34.8 × 41.9cm | 샤크 미술관

 

Time

---------------◇---------------

 

15

 

늙는다는 것에

대하여

 

주세페 아르침볼도

Giuseppe Arcimboldo

---------------◇---------------

봄 · 여름 · 가을 · 겨울

Spring · Summer · Autumn · Winter

 

주세페 아르침볼도 | 1573 | 캔버스에 유채 | 77 × 63cm | 루브르 박물관

 

Myself

---------------◇---------------

 

01

 

울음은  영혼이

회복하는 첫걸음

 

조지 클로젠

George Clausen

---------------◇---------------

울고 있는 젊은이

Youth Mourning

 

조지 클로젠 | 1916 | 캔버스에 유채 | 91.4 × 91.4cm | 임페리얼 전쟁박물관

 

Myself

---------------◇---------------

 

02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

---------------◇---------------

류트를 든 자화상

Self-Portrait as a Lute Player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 | 1615 ~ 17 | 캔버스에 유채 | 77.5 × 71.8cm | 커티스 갤러리

 

Myself

---------------◇---------------

 

03

 

나는

어떤 사람인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

나르키소스

Narcissus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 1594 ~ 96 | 캔버스에 유채 | 110 × 92cm | 로마 바르베리니궁 국립고전회화관

 

Myself

---------------◇---------------

 

04

 

모든 책임은

우주에 있다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Caspar David Friedrich

---------------◇---------------

해변의 암초

Rocky Reef on the Sea Beach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 1825 | 캔버스에 유채 | 22 × 31cm | 카를스루에 주립 미술관

 

Myself

---------------◇---------------

 

05

 

침체된 몸에

생기를 선물하라

 

파울 클레

Paul Klee

---------------◇---------------

노란 새가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Yellow Birds

 

파울 클레 | 1923 | 검은 바탕에 수채 | 35.56 × 43.18cm | 개인소장

 

Myself

---------------◇---------------

 

06

 

불안해하는

청춘들에게

 

로버트 리드

Robert Reid

---------------◇---------------

섬머 걸

A Summer Girl

 

로버트 리드 | 1896 | 캔버스에 유채 | 92.71 × 83.19cm | 개인소장

 

Myself

---------------◇---------------

 

07

 

나에게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은?

 

윤두서

---------------◇---------------

자화상

 

윤두서 | 17세기 후반 | 종이에 수묵담채 | 20.5 × 38.5cm | 개인소장

 

Myself

---------------◇---------------

 

08

 

내 안에서 두 가지 마음이

싸운다면

 

앙리 마티스

Henri-Emile-Benoit Matisse

---------------◇---------------

마음

The Heart

 

앙리 마티스 | 1946 | 스텐실 | 42.5 × 65.5cm | 조르주 퐁피두 센터

 

 

Myself

---------------◇---------------

 

09

 

자신감이 부족할 때

보면 좋은 그림

 

앙리 마티스

Henri-Emile-Benoit Matisse

---------------◇---------------

이카루스

Icarus

 

 

앙리 마티스 | 1946 | 과슈 · 종이 붙이기 | 43.4 × 34.1cm | 조르주 퐁피두 센터

 

Myself

---------------◇---------------

 

10

 

자유로움을

갈망하다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Wassilyevich Kandinsky

---------------◇---------------

푸른 하늘

Sky Blue

 

 

바실리 칸딘스키 | 1940 | 캔버스에 유채 | 100 × 73cm | 조르주 퐁피두 센터

 

Myself

---------------◇---------------

 

11

 

있는 그대로의

 

클로드 모네

Oscar-Claude Monet

---------------◇---------------

우리집 뜰의 카미유와 아이

Camille Monet and a Child in a Garden

 

 

 

클로드 모네 | 1875 | 캔버스에 유채 | 55.3 × 64.7cm | 보스턴 미술관

 

Myself

---------------◇---------------

 

12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편안해지다

 

구스타브 카유보트

Gustave Caillebotte

---------------◇---------------

낮잠

The Nap

 

 

 

구스타브 카유보트 | 1877 | 파스텔 | 36 × 53cm | 워즈워스 학당 미술관

 

Myself

---------------◇---------------

 

13

 

풀어진 나를 팽팽하게

당겨주는 그림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

---------------◇---------------

디트로이트 산업 벽화

Detroit Industry Murals

 

 

디에고 리베라 | 1932 ~ 33 | 프레스코 | 디트로이트 미술학교

 

Myself

---------------◇---------------

 

14

 

화를 푸는

방법

 

잭슨 폴락

Jackson Pollock

---------------◇---------------

가을의 리듬 : 넘버 30

Autumn Rhythm : Number 30

 

 

 

잭슨 폴락 | 1950 | 캔버스에 유채 | 266.7 × 525.8cm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Myself

---------------◇---------------

 

15

 

생각을 바꾸면 보이는

나만의 개성

 

베르트 모리조

Berthe Morisot

---------------◇---------------

로리앙 항구

The Harbor at Lorient

 

베르트 모리조 | 1869 | 캔버스에 유채 | 43.5 × 73cm | 내셔널 아트 갤러리

 

Myself

---------------◇---------------

 

16

 

나를 최고로 만드는

그림의 힘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Rodriguez de Silva y Velazquez

---------------◇---------------

비너스의 단장

Venus at her Mirror

 

디에고 벨라스케스 | 1647 ~ 51 | 캔버스에 유채 | 122.5 × 177cm | 내셔널 갤러리

posted by 황영찬
2017. 1. 23. 12:17 내가 읽은 책들/2017년도

2017-003 드 보통의 삶의 철학산책

 

 

알랭 드 보통 지음 | 정진욱 옮김

2002, 생각의 나무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8922

 

101

보885삶

 

복잡하고 힘겨운 삶을 유쾌하게 만드는 삶의 거장들이 알려주는 행복의 철학

 

지은이 -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196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영어 · 프랑스어 · 독일어에 능통하다. 지은 책으로는 유머와 통찰력으로 가득한 철학적 연애 소설『로맨스』『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키스와 말』이 있으며, 독특한 문학평론서『프루스트는 어떻게 당신의 삶을 바꿨나』, 여행에 관한 에세이『여행의 기술』(근간) 등이 있다. 그의 책은 현재 2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현재 미국 워싱턴에 살고 있으며, 철학과(科) 졸업 프로그램을 지도하기 위해 런던 대학을 오가고 있다. 원제가 '철학의 위안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인 이 책은 영국과 미국에서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였으며, 동시에 영국에서 <철학: 행복으로의 안내>라는 제목의 6부작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방영됐다. 알랭 드 보통의 웹사이트 www.alaindebotton.com에서 그의 근황과 이 책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정진욱

전문번역가. 옮긴 책으로는 <섹스의 영혼>, <독서의 역사>, <제1의 성>, <드 보통의 삶의 철학산책> 등이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다.

- 몽테뉴

 

아직 철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거나

철학을 할 시기가 지나가 버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행복을 맞이하기에 너무 젊거나 늙었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다.

- 에피쿠로스

 

만약 우리의 나이가 2천 살이 아니고,

플라톤의 대화에 관심이 없고, 또 조용히 파묻혀 산다는 이유로

자신은 깨달음을 얻는 데 부적절한 존재라고 생각하기를 그만둔다면,

우리 모두도 현명한 아이디어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 알랭 드 보통

 

차례

 

1장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 소크라테스 Socrates

          지적 회의로의 초대장

          상식에 대한 집착

          소크라테스식 삶의 방식

          소크라테스의 재판

          소크라테스의 죽음

 

2장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한 데 대한 위안 에피쿠로스 Epicurus

          행복, 구매 리스트 하나

          쾌락을 가르치는 철학자

          철학의 임무 - 에피쿠로스의 경우

          행복, 에피쿠로스파의 구매 리스트

          행복의 물질적 환상 - 소박함에 대한 옹호

          행복, 또 다른 구매 리스트 하나

 

3장 좌절에 대한 위안 세네카 Seneca

          세네카의 죽음

          좌절을 설명하는 세네카의 사전

          체념의 기술

 

4장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 몽테뉴 Montaigne

인간에 대한 인정

성적 부적절함에 대하여

문화적 부적절함에 대하여

지적 부적절함에 대하여

 

5장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 쇼펜하우어 Schopenhauer

염세적인 철학자의 연대기 - 쇼펜하우어의 일생

현대인의 러브 스토리 한 토막 - 쇼펜하우어의 해설을 곁들여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6장 곤경에 대한 위안 니체 Nietzsche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용 및 참고문헌

찾아보기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

그대가 아는 것들은 그게 전부인가

 

Socrstes

도대체 무슨 근거에서 이런 혹평을 할까? ……만약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현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일을 삼간다면, 그 주된 이유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인기 있는 것들을 옳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맨발의 철학자는 사람들 사이에 인기 있는 그 무엇인가가 과연 이치에 닿는 것인지를 가리기 위해서 거듭 의문을 제기했다.

소크라테스 거리의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일과로 삼다가 결국 고발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철학자 소크라테스. 그는 아테네의 거리에서 청소년들과 마을의 유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이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묻고 있는 모습으로 낯익다. 그 문답은 항상 '그것은 모른다'라고 하는 무지의 고백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모든 이의 의견을 다 존중할 필요는 없고 단지 몇 명만 존중하면 되고 다른 사람들은 무시해도 좋다는 사실……, 훌륭한 의건은 존중하되 나쁜 의견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다는 사실, 그것 참 멋진 원칙이라고 자네는 생각하지 않는가? 그리고 훌륭한 의견은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의 것인 반면, 나쁜 의견은 이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의 것이지……. 그러니 훌륭한 나의 친구여,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어떤 말을 하든 마음 쓸 필요가 없소. 하지만 전문가들이 정의와 불공평의 문제에 대해 하는 말에는 신경을 써야 하오.

-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린 이 그림에서 소크라테스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철학의 본질을 보여주려는 듯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평범한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

<소크라테스의 죽음> 샤를-알퐁스 뒤프레누아가 그린 이 그림 역시 독배를 들이켜는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그를 둘러싼 친구들을 극적인 포즈로 그려 놓았다. 비통에 겨워 바닥에 무너진 인물들을 보라. 소크라테스만이 동요하지 않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18세기에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갖는 회화적 잠재력에 주목한 많은 화가들이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순간을 비애감을 가득 넣어 연출해 냈다. 자크 필립 조셉 드 생-켕틴(1762, 위), 피에르 페이론(1790, 아래)이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

아테네의 군인과 여성 그리스 남성들에게 전투에서의 승리는 영광된 행위였으며, 당당하게 적을 죽이는 용기는 최고의 덕목이었다. 반면 여성들은 그런 남성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로 칭송받았다.

소크라테스 그는 일년 내내 똑같은 외투를 걸쳤으며 언제나 맨발로 걸어다녔다. 소크라테스와 마주친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그의 외모에 불편해했을 것이다.

철학자들의 도시 아테네 아테네가 철학자들의 도시가 된 까닭은 온화한 날씨와 도시계획 덕택이었을 것이다. 적당한 인구와 작은 크기, 좋은 날씨를 가진 도시에서 사람들은 대화를 나누고 사색을 즐겼으리라.

파르테논 신전의 기병 조각 그리스인으로서 용맹스런 자가 되려면 군인이 되어야 햇으며, 전투에 나가 적을 죽여야 했다. 그리고 전투에서 무공을 세우거나 장렬하게 전사한 자들의 건강성과 용맹성은 도시 곳곳에서 기림을 받았다.

그리스 도자기 이 화려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그리스인들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공정을 차근차근 진행했을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도 그와 같이 실제로 어려운 작업일 테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식 사고방식

 

1. 확고하게 상식으로 인식되는 의견을 하나 찾아보자.

 

    용기 있는 행동에는 전장에서 후퇴하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덕을 쌓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2. 잠시 상상해 보자. 이런 의견을 내놓는 사람의 확신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거짓이 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 의견이 진실일 수 없는 상황이나 환경을 찾아보자.

   

    용기가 있으면서도 전쟁터에서 후퇴하는 사람은 정말로 없을까?

    전쟁터에서 꿋꿋하게 전투에 임하면서도 용기가 없는 사람은 없을까?

 

    돈을 가졌으면서도 덕을 쌓지 못한 사람은 없을까?

    돈은 없지만 덕이 높은 사람은 있지 않을까?

 

3. 예외가 발견되면, 그 정의는 틀렸거나 아니면 최소한 불명확한 것임에 틀림없다.

 

    용기가 있으면서도 후퇴하는 것이 가능하다.

    전쟁터에서 꿋꿋하게 전투에 임하고 있지만 용기가 없는 경우도 가능하다.

    돈을 가진 악한도 있다.

    가난하지만 덕은 높을 수도 있다.

 

4. 최초의 의견은 이런 예외까지 고려할 수 있도록 새롭게 고쳐져야 한다.

    용기 있는 행동은 전쟁터에서 후퇴와 전진을 동시에 뜻할 수 있다.

 

    돈을 가진 사람은 그 돈을 고결한 방식으로 획득한 경우에만 덕이 있는 존재로 묘사될 수 있다. 그리고 돈을 가지지 못한 일부 사람들도 덕을 추구했으되 돈을 버는 일이 불가능한 환경에서 살아왔다면 역시 덕이 높을 수 있다.

 

5. 그렇게 새로 정리한 주장에서 예외가 발견된다면, 앞에서 거쳤던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 진실은, 만약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언제나 더 이상 논박할 수 없는 주장 속에 담겨 잇어야 한다. 어떤 주장에 대한 이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곧 그 주장에 담겨 있는 그릇된 것들을 발견해 나가는 일이다.

 

6.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빗대어 뭘 말했든 간에, 사고의 산물은 직관의 산물보다 우월하다.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 엘리펀트 맨 희귀병 때문에 끔찍하게 생긴 기형의 얼굴을 가진 주인공은 서커스단의 구경거리가 되어 온갖 학대를 받으며 살아간다. 사실 그는 세익스피어의 고전과 성경까지 섭렵한 아주 박식하고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소크라테스도 그처럼 슬픈 운명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한 데 대한 위안

행복한 삶을 위해서 나에겐 무엇이 필요할까

 

Epicurus

종종 쾌락을 혐오하며 엄격하게 굴었던 사람들 중에 예외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 철학자는 인생을 잘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고자 했던 것 같았다. 에피쿠로스, 그는 이렇게 썼다. "만약 미각의 쾌락을 빼앗고, 성적 쾌락을 빼앗고, 듣는 쾌감을 빼앗고, 또 아름다운 형태를 봄으로써 일어나는 달콤한 감정들을 빼앗아버린다면 나는 행복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에피쿠로스 어려서부터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여행을 다닌 에피쿠로스는 그들의 가르침에 동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십대 후반에 자신의 사상을 정리해 삶의 철학을 세우기로 마음 먹었다. 에피쿠로스 이전까지 유쾌한 삶의 방식에 대한 관심을 그처럼 진솔하게 컬어놓았던 철학자는 없었다.

 

욕망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것들은 자연스럽고 또 필요하다. 또 다른 것들은 자연스럽긴 하지만 불필요하다. 그리고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도 있다.

결핍에서 오는 고통만 제거된다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음식도 호화로운 식탁 못지 않은 쾌락을 제공한다.

이미 인생의 황혼녘에 다다른 마당에 나는 원하노라. 죽음이 덮치기 전에 쾌락의 충만함을 축하할 훌륭한 송가를 하나 만들어 마음이 차분하게 정리된 사람들을 돕기를.

-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르세티 빌라 거대한 저택과 커다란 정원, 저택 앞에는 드넓은 잔디밭, 정원에는 과실수와 관상수 숲이 들어차 잇다. 여름철의 분수 물소리와 겨울철의 설경을 상상해 보라. 이보다 더 넘치게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폼페이의 이시스 사원 프레스코화 고대 로마의 식민도시였던 폼페이는 로마의 황제와 군인들의 여름 휴양지와 별장지로서 극장, 목욕탕, 바실리카, 신전 등이 지어졌으며, 상점, 수도(水道), 포장도로도 갖춰졌다. 화산재에 묻히기 전까지 도시는 호화로운 조각, 벽화,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다.

성스러운 대화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화가인 지오바니 벨리니(1430~1516)는 종교적인 이야기식 표현을 강조하던 경향에서 자연스러운 배경과 풍경을 강조하는 대담한 자연주의를 전개했다. 그의 <성스러운 대화>에 등장하는 여인 또한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테네 학당>의 에피쿠로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54명의 인물 중 에피쿠로스를 그린 부분이다. 에피쿠로스는 사람들에게 과연 절실히 원하는 것이 그 때문에 생길 고통과 고생을 감수해야 할 만큼 의미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바로 당신 곁에 있다.

 

좌절에 대한 위안

이게 진짜 내가 두려워했던 그 상황이란 말인가

 

SENECA

동물은 자신의 목을 매고 있는 밧줄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지만 그것은 오히려 밧줄을 더 단단히 조이는 결과가 된다. ……순응하지 않고 마구 몸부림친다고 해서 묶여 잇는 동물의 고통이 덜해지도록 적당히 느슨하게 만든 멍에는 이 세상에는 절대로 없다. 저항할 수 없는 악에 맞서 고통을 경감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숙명에 굴복하며 참는 것이다.

 

세네카의 두상 '가벼운 슬픔은 말이 많고 큰 슬픔은 말이 없다' 등 수많은 격언으로 기억되는 철학자 세네카. 그는 스스로 세속에 물들면서도, 끝내 인간이 인간다운 까닭은 올바른 이성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모순과 불안에 찬 생애를 살았다.

 

사람이란 도대체 뭔가? 약간의 충격, 약간의 타격에도 터지고 말 혈관…… 자연 상태에서는 무방비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존하고, 운명의 여신이 내리는 모든 모욕에 고스란히 노출된, 허약하고 부서지기 쉽소 발가벗은 육체.

그대는 말하겠지.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라고. 그렇다면 그대는,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고, 그것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세상에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잇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는 만물의 질서를 바꿀 수 없다. ……우리의 영혼이 순응해야 하는 것은 이 (자연의) 법칙이다. 이 법칙을 우리는 따라야 하고, 이 법을 우리는 준수해야 한다. ……당신이 개조시킬 수 없는 것이라면, 참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린 <세네카의 죽음>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함께 세네카의 죽음은 철학적 죽음의 상징이다. 울부짖는 동료들에게 세네카가 보인 반응은, '철학'을 어디 내팽개쳤느냐는 꾸짖음이자 들이닥칠 불운에 맞서겠다는 결심이 어디 갔느냐는 힐난이었다.

루벤스가 그린 <세네카의 죽음>(1615) 세네카가 비통한 죽음을 견뎌낸 방식에 대한 기나긴 찬양의 역사는 로마시대 이후 많은 그림으로 남겨졌다. 이 그림에서 세네카는 위엄과 고매한 인격의 현자로 그려져 있다.

17세기에 그려진 <세네카의 죽음> 들 루카 조르다노(위, 1680), 게라르트 폰 흔토르스트가 그린 <세네카의 죽음>.

세네카와 소크라테스 가족과 친구들이 이성을 잃고 흐느끼는 가운데 너무도 평온하게 최후를 맞이했던 두 명의 고대 철학자들. 그들은 현실과 극단적인 갈등을 빚을 때도 절대로 의지박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래는 같은 조각에서 세네카의 얼굴.

 

세네카의 명상

 

 

운명의 여신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아.

공적인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인간의 운명도 도시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지.

엄청난 노고의 대가로, 그리고 신들의 위대한 배려로 수많은 세월을 두고 착실하게 올려진 건물일지라도 하루아침에 무너져 사라질 수 있나니, 아니지, '하루아침'이라고 말한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들이닥치는 불운을 감안하면 유예 기간을 지나치게 길게 잡고 있어. 한 시간, 찰나의 순간도 제국을 넘어뜨릴 수 있거든.

아시아의 도시들이, 아카이아의 도시들이 얼마나 자주 단 한 차례의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던가? 얼마나 많은 시리아의 도시들이, 또 얼마나 많은 마케도니아의 도시들이 한 차례의 지진에 삼켜져버렸던가? 이런 참화가 얼마나 자주 키프로스를 쑥밭으로 만들었던가?

우리 모두는 죽을 운명을 타고난 것들에 묻혀 살고 있네.

누구나 죽을 운명으로 태어났고, 우리 역시 죽을 운명의 아이를 낳는 법이야.

모든 것에 기대를 거는 한편으로 어떤 일이든 다 닥칠 수 있다고 예측해야지.

 

루벤스가 그린 <4명의 철학자> 고전학에 관심이 많았던 루벤스는 형이 사망하자 리프시우스, 그리고 그의 제자와 자신이 철학 토론을 벌이고 있는 그림을 그렸다. 배경으로 이들의 학문적 관심을 상징하는 세네카의 두상이 보인다.

로마의 수도교 주어진 그대로의 상태에 대한 인간의 저항을 보여 주는 위대한 상징물. 인간이 모든 좌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인류의 위대한 성취는 별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의 독창력의 원동력은 '그게 꼭 이런 식이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심지어 더 이상 현실을 개조시킬 희망이 없을 때에도 끊임없이 변화와 진보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낸다.

네로의 두상 네로 앞에서는 인간에겐 이성이 있지만 개에겐 이성이 없다는 말이 무색해진다. 로마 황제 네로가 무차별 살해와 성적 가혹 행위에 몰입한 까닭은 무얼까. 네로는 세네카를 꼭 껴안으면서 사랑하는 가정교사를 해치느니 자신이 죽고 말겠노라고 맹세했지만 결국 세네카는 그에게 죽음을 당했다.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

지식이란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MONTAIGNE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안고 있는 지적 우둔함을 간파한 사람이면 누구나 놀랄 만한 이야깃거리를 갖게 될 것이다……. 인간의 지력을 위대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그런 중요한 인물들에게서조차 그처럼 엄청난 잘못들을 발견할 때, 우리는 인간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이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몽테뉴의 초상 몽테뉴는 인간의 온전한 모습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데 관심이 이었다. 그의 『수상록』은 그 전에 나온 심각한 책들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은 것들로, 이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이미지를 깨뜨리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몽테뉴 덕분에 인간은 자연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어리석은 짓을 했거나, 어리석은 말을 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는 보다 넉넉하고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우리 인간은 한갖 멍청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안고 있는 지적 우둔함을 간파한 사람이면 누구나 놀랄 만한 이야깃거리를 갖게 될 것이다. 인간의 지력을 위대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그런 중요한 인물들에게서조차 그처럼 엄청난 잘못들을 발견할 때, 우리는 인간에 대해, 인간의 감각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이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사람이다. 인간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것치고 나에게 낯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몽테뉴가 살았던 성 젊어서 프랑수아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하여 르네상스를 접한 몽테뉴의 아버지는 활동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라틴어 교육을 위해 집안의 모든 하인들에게도 라틴어를 말하게 한 환경에서 자란 몽테뉴는 서민들에게 애착을 갖도록 농부들에게 맡겨져 자유롭게 그들과 어울렸다.

몽테뉴의 원형 서재 독서광이자 애서가로 유명했던 몽테뉴는 이 탑 안의 원형 서재에서 평생 택을 읽고 사색했다. 독서는 몽테뉴에게 커다란 위안이었으며, 그는 삶이 버거울 때면 커다란 서재를 갖추고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으로 살기보다는 동물로 살아가는 삶의 이점을 검토했다.

몽테뉴 서재의 나무 들보 몽테뉴는 자신의 서재 천장 들보에 성경과 고전에서 따온 명구 57개를 새겼다. 여기에는 정신이란 것이 우리 인간에게 감사해야 마땅한 어떤 것을 주었는지 의심하는 금언들이 새겨져 있었다.

앙리 3세와 캐서린 데 메디치의 초상 우아한 부인들은 절대로 볼 일을 보지 않는다거나 근엄한 왕에게는 엉덩이가 없다는 터무니없는 통념은 몽테뉴로 하여금 그들도 똥을 눅 엉덩이를 가지고 잇다는 점을 이 세상에 상기시키도록 만들었다.

몽테뉴의 초상 토마스 데 뤼가 그린 몽테뉴의 정장 차림 공식 초상. 속내를 읽기 어려울 정도로 다소 장중한 이 초상 속의 몽테뉴는 그가 『수상록』에서 드러내기를 바랐던 그의 참 모습이 아니었다. 몽테뉴는 이런 이미지가 아닌 자신의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을 모사하려고 최대한 노력할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

투피 인디오 몽테뉴의 지적 호기심은 세계로 열려 있었다. 그가 읽은 바로는 아메리카 인디언 종족인 투피 인디오 남자들은 부인을 한 명 이상 둘 수 있었으며 남자들은 부인 모두에게 똑같이 헌신한다. 그들의 윤리 제도는 오직 두 가지 조항으로 구성되는데, 전투에서의 단단한 결의와 부인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그려진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포괄적인 지식을 탐구한 인물이자 지나치게 똑똑한 저자. 그의 천재성은 후계자들로 하여금 창조적 작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앞선 지식을 회의하는 무례함을 저지를 용기를 갖지 못하게 한다.

『수상록』 1580년에 보르도에서 출판된 『수상록』 초판본 속표지. 에세이의 시조로 불리는 몽테뉴의 『수상록』은 자기 탐구의 고백서이자, 인간에 관련된 모든 것의 탐구서다. 몽테뉴는 이 책에서 '되도록 자세히 나를 살펴보고 끊임없이 나를 지켜보고 있지만 내 안에서 발견되는 허약함은 감히 입밖에 내어 말하기 힘들다. ……조금만 방향을 바꾸거나 관점을 바꾸면 내 안에서는 온갖 모순이 발견된다'고 털어놓았다.

키케로의 흉상 고대 로마의 최고의 지식인이자 변론가, 문필가로 불리는 키케로. 몽테뉴는 키케로의 책에 대해 공허한 이야기로만 가득 차 있다고 평했다. 몽테뉴는 학자들이 고전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쏟는 이유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을 지적인 존재로 비치고 싶은 허영심을 가지고 잇기 때문이었다.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

사랑이 삶을 지배하는 이유

 

SCHOPENHAUER

이 모든 소란과 흥분은 왜일까? 이런 조급함과 아우성, 고민과 격렬함은 왜일까? 왜 그런 하찮은 것이 이다지도 중요하게 다가올까? 여기 의문의 대상이 된 것은 결코 시시하지 않다. 그와는 반대로 중요한 것은 성실하고 열정적인 노력으로 철저히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모든 사랑 놀음의 최종적인 목표는…… 인간 삶의 다른 어떤 목표보다도 실제로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사랑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누구든지 아무리 심각해져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쇼펜하우어 염세주의 철학자요 생(生)의 철학적인 쇼펜하우어. 그는 자신이 철학의 주요 문제를 해결했다고 확신하고 자신의 사상이 수많은 책의 원천과 계기가 될 것이라고 자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독한 철학자였던 그는 세상이 자신의 위대성을 인정해 주지않는 데 대해 실망하고 내면으로 화살을 돌려 자신의 영혼을 쉴 새 없이 괴롭혔다.

 

사랑이란 것은…… 성적 관심은 별도로 하더라도, 혐오스럽고, 경멸할만하고, 심지어 상극으로까지 보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맡기게 만든다. 그러나 종(種)의 의지는 개인의 의지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에 그 연인은 자신의 것과 상반되는 모든 특질들에 눈을 감아버리고, 모든 것을 간파하고, 모든 것을 그릇 판단하고, 자신의 열정의 대상과 자신을 영원히 묶어버린다. 그런 환상에 빠진 사람은 완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그 환상은 종의 의지가 다 충족되고 나면 금방 사라지고 이제 평생을 혐오하면서 살아야 할 파트너만 남게 된다. 바로 여기서, 매우 이성적이고 심지어 탁월하기까지 한 남자들이 종종 잔소리가 심하고 악마 같기도 한 여자들과 사는 이유,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도 왜 자신들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쇼펜하우어의 부모 쇼펜하우어의 아버지 하인리히와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는 이들 부부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가 고독하게 지내는 동안 어머니는 연회를 베풀었다. 또한 아버지가 극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동안 어머니는 즐겁게 지냈다. 그것이 여인들의 사랑이다……."

윔블던의 이글 하우스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루트르(Arthur)'라는 세례명을 받게 했는데, 그 까닭은 이 이름이 유럽 어느 나라에서나 똑같이 '아루트르'라고 발음되기에 후에 사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그는 어린 쇼펜하우어가 '세계라는 큰 책'을 배울 수 있도록 프랑스와 영국 등지로 보내 외국어를 익히고 고급문화를 접하게 했다.

젊은 시절의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처음부터 철학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의학 공부를 먼저 하다가 칸트 연구가인 슐체의 강의에 감동 받아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다. 그는 슐체를 통해 '신과 같은 플라톤'과 '경탄할 만한 칸트'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이 두 사람의 사상을 통해 그의 사상은 '염세주의'라고 할 만한 것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노년의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점점 더 울적해져서 공포와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발사가 면도칼로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고 생각해 절대로 면도를 하지 못하게 했고, 잘 때에도 침대 밑에 권총을 넣어 두고 잤다. 죽음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의 안전과 건강에 극도로 신경 썼던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말년을 보낸 집 헤겔의 죽음은 쇼펜하우어에게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헤겔을 죽인 콜레라를 피해 프랑크푸르트로 간 쇼펜하우어는 이곳에서 비로소 성공을 맛보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차츰차츰 알려지기 시작햇고, 그는 이러한 성공에 매우 만족해햇으며, 자신의 명성을 보도한 기사를 찾아 읽고 매우 즐거워했다.

엘리자베스 네이와 그녀가 만든 쇼펜하우어의 흉상 사랑의 비통함에 관한 한, 아마도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존재일 쇼펜하우어는 말년에 가서 명성이 높아지자 여성에 관한 시각을 누그러뜨렸다. 폐렴으로 죽은 쇼펜하우어의 장례식은 아직 죽지 않은 상태로 매장되지 않을까 두려워한 그의 유언에 따라 죽은 지 며칠이 지난 후에야 치러졌다.

마사치오가 그린 <낙원에서의 추방> 아담과 이브가 낙원을 떠나면서 울부짖는 절망. 마사치오는 이 그림에서 절망의 정수를 표현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오류성과 연약함의 보편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을 떠나는 순간 우리 인간 모두가 그곳에서 추방된 셈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이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갖고 있다. 그것은 혼자서만 고통받고 외로워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식'이다.

 

곤경에 대한 위안

피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어떤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NIETZCHE

인간이 걸리는 병중에서 가장 나쁜 병은 사람들이 자신의 병을 다스리는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치유로 보이는 것이 결국에는 그 치유의 대상이 되었던 병보다 더 독한 무엇인가를 낳았다. 즉각적으로 효과를 나타내는 수단들, 마취와 도취, 소위 말하는 위안들은 무지하게도 치유책으로 여겨졌다. 여기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고통을 즉각적으로 진정시키는 방법들은 그 고통을 낳은 불만을 악화시키는 대가를 치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니체의 초상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첫 인상은 하나의 개인적인 특징일 뿐인데도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결정짓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신사답고 가장 합리적인 사람도, 만약에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잇다면, 언제나 기다란 턱수염에 딸린 존재로만 보일 뿐이다. 이를테면 쉽게 화를 내고 그러다 간혹 난폭해지기도 하는 군인형(型)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사람은 그런 인간형으로 대접받게 될 것이다.

 

나와 약간이라도 인연을 맺고 있는 인간 존재들에게 나는 고통과 절망, 질병, 냉대, 경멸이 내려지기를 바란다. 나는 그 사람들이 지독한 자기경멸과 자기불신의 고문, 패배당한 자의 열등감과 동떨어져 지내지 않기를 희망한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풍부한 결실을 남긴 사람들의 삶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대 자신에게 악천후와 폭풍을 견디지 못하는 나무들이 앞으로 거목으로 훌쩍 자랄 수 있을지를 한번 물어보라. 불운과 외부의 저항, 어떤 종류의 혐오, 질투, 완고함, 불신, 잔혹, 탐욕, 그리고 폭력, 이런 것들이 사실은 호의적인 조건에 속하지 않는지 곰곰 따져보라. 이런 것들을 경험하지 않고는 어떠한 위대한 미덕의 성장도 좀처럼 이룰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히틀러와 악수하는 엘리자벳 니체 니체는 누이 엘리자벳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니체의 마지막 저작 『힘에의 의지』는 그의 사후에 엘리자벳에 의해 정리 출판되었다. 사진에서 나치에게 매료된 엘리자벳이 히틀러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니체는 그녀를 '복수에 불타는 반유대주의자 멍청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위버멘쉬 혹은 슈퍼맨 초기에 니체를 영어로 옮겼던 번역자들은 부주의하게도 위버멘쉬(초인)를 전설적인 만화의 주인공 슈퍼맨으로 옮겨 적었다. 그러나 니체의 위버멘쉬는 하늘을 휙휙 나는 인물이나 파시스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위버멘쉬란 지성보다도 본능, 합리보다도 의지, 이성보다도 정열, 사고보다도 육체를 존중할 줄 아는 의지의 인간을 말한다.

니체가 좋아한 인물들 니체는 살아 있는 인물 중에는 그다지 궁금한 인물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서, 인류 역사를 돌아볼 때 완성에 가까운 삶을 산 것으로 여겨지는 몇몇 개인에 대한 회고를 늘어놓았다. 그들을 니체의 용어로 말하자면 위버멘쉬로 묘사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위에서부터 몽테뉴, 아베 갈리아니, 스탕달(앙리 바일), 괴테.

니체가 사랑한 괴테 니체는 괴테를 '숭고한 인물',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마지막 독일인'이라고 불렀다. 니체가 보기에 괴테가 원한 것은 총체감이었으며, 괴테는 이성과 관능, 느낌, 의지를 서로 분리하는 데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괴테는 10년 동안 바이마르 궁정의 문관을 지내며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면서 나폴레옹을 두 차례 알현했다.

질스-마리아에 있는 니체 박물관 서른다섯의 나이에 바젤대학의 교수 자리에서 물러나자마자 니체는 알프스 지역인 해발 1,800미터의 질스-마리아라는 자그마한 마을에서 여름을 보내며 그의 주요 저서들을 썼다. 그는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정오까지 작업을 하고, 마을을 에워싸고 있던 산을 오르곤 했다. 그리고 밤이면 홀로 간소한 식사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곤 했다. 이 농가는 '니체가 살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 수수하게 단장한' 네체 박물관이 되었다.

라파엘로의 <니콜리니 코퍼 마돈나>를 위한 밑그림과 완성작 그림 소유자의 이름을 붙인 이 성모자 그림은 라파엘로가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가기 직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스럽게 성모와 아기가 육체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결속된 느낌을 주는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모 마리아와 아기>로부터 배운 결과물이다.

라파엘로의 <한 젊은 여인의 초상>과 <한 여인의 초상>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메켈란젤로의 작품들을 찾아 그들의 밑그림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두 거장의 해부학적인 스케치에서 얻은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그들의 예를 따랐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라파엘이 쏟은 노력의 결과는 그 이전에 그린 <한 젊은 여인의 초상>과 몇 년 뒤 완성한 <한 여인의 초상>을 비교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파에스툼에 있는 그리스 사원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열정과 악을 지극히 자연스런 취향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신들의 마음속에 간직된 너무나 인간적인 것을 찬양하는 일을 디오니소스 축제와 같은 공식적인 제식으로 제도화했다. 그들은 악과 의심, 그리고 적당한 해방을 절멸하려고 애쓰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열정을 상대로 한 전쟁 니체는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피하려 들지 말고 그것을 세련되게 활용하라고 말했다. 열정과 욕망이 지닌 어두운 힘을 두려워하고 피할 목적으로 그것들을 파괴하는 것은 니체가 보기에 그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로 보였다. 이빨이 아프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뽑아버리는 치과의사에게 누가 치료를 맡기겠는가.

본대학 시절의 니체 니체가 소속한 본대학 사교클럽. 사진 중앙의 몸을 한쪽으로 돌리고 있는 이가 니체다. 아래쪽 가운데에 맥주통이 보인다. 니체는 동료 학생들이 알코올을 너무 좋아한다는 사실에 몹시 화를 냇다. 니체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면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말라고 권고했다.

베수비우스산의 폭발 1879년에 베수비우스산이 폭발하는 모습. "존재를 통해서 가장 위대한 성취와 가장 위대한 즐거움을 일궈내는 비결은, 위태하게 살아가는 것이지! 도시들을 베수비우스산 기슭에다 짓도록 하게나!"

뢰켄 교회 니체는 라이프치히 근처의 뢰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으며, 그의 어머니 또한 목사의 딸로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니체는 뢰켄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훗날 니체는 기독교를 가장 무서운 저주이자 가장 무서운 타락이라고 부르게 된다.

니체의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 니체는 '시골 목사의 완벽한 구현'이었던 아버지를 매우 사랑했으며 평생 동안 아버지의 기억을 숭배했다. 니체의 기억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자비로운 성격에 따뜻한 동정심과 재치 있는 대화로 정신적 안내자로서 농민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니체에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상스러운 짓이었다.

코지마 바그너 그녀는 프란츠 리스트의 딸로서, 한스 폰 뵐로와 이혼하고 리하르트 바그너와 재혼했다. 니체는 이들 모두와 교류했는데, 그가 진정으로 사랑에 빠졌던 부인이 바로 바그너의 부인인 코지마라는 아이러니컬한 사건은 유명하다. 니체는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우정으로 교묘하게 위장했다.

니체와 루 안드레이-살로메 가운데 인물은 파울 레. 독특한 외모와 수줍은 성격으로 여성들로부터 연이어 퇴짜를 맞은 니체가 경험한 사랑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위대했던 사랑은 루 안드레아-살로메였다. 젊고 아름답고 똑똑하고 바람기가 많았던 그녀는 남자로서보다 철학자로서 니체에게 관심이 더 있었다. 루의 거부는 니체를 다시 한번 극심한 우울증에 몰아넣었다.

 

 

 

posted by 황영찬
2017. 1. 10. 14:30 내가 읽은 책들/2017년도

2017-002 김성희의 주얼리시간여행

 

 

김성희

2002, 생각의나무

 

시흥시대야도서관

EM030137

 

633

김546주

 

탐사와산책 18

 

나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아이덴티티, 주얼리 속으로 떠나는 역사여행

뿌리칠 수 없는 찬란한 유혹으로의 초대, 주얼리의 향연 속으로

 

김성희

추계예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 한국보석학원에서 주얼리 디자인 강사를 역임했다. 1995년 이태리로 건너가 밀라노의 Istituto Europeo di Design의 주얼리 디자인과를 수석 졸업하고 그 뒤 한국의 주얼리, 액세서리 회사는 물론 세계 유명 주얼리 회사(이태리 CASA DAMIANI, 미국 A.JAFFE 등)의 디자이너로 활동하였다. 1993년부터 현재까지 WGC, De Beers 등 각종 주얼리 국제공모전에 일곱 차례 당선하였으며 7년 전부터는 관련업계를 대표하는 기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이태리 밀라노에서 주얼리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 이태리 비첸자 주얼리 박람회를 위한 주얼리 트랜드 북을 제작중이며 더불어 이태리 주얼리 업계 및 패션업계의 주얼리 디자인을 하고 있다.

 

주얼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찌 보면 패션이나 문화보다도 더 먼저 생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생활과 더불어 형성되어 약7천 년 이상의 긴 역사를 가진 주얼리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표현하거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또는 사랑의 징표나

죽은 이를 기념하고 자신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어 왔다.

 

c o n t e n t s | 차례

 

저자서문 주얼리란 무엇일까

머리말 주얼리의 파노라마

 

고대의 주얼리 Ancient
이집트 투탕카멘 왕의 가슴장식에서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카메오까지

고대 주얼리의 재료와 소재
수메르의 주얼리
이집트의 주얼리
철기 시대의 주얼리
미노스와 미케네의 주얼리
에트루스칸의 주얼리
헬레니즘 시대의 주얼리
로마제국의 주얼리
기타 지역

비잔틴과 중세의 주얼리 300~1500
이 시대 이후로는 다시 볼 수 없던 신비롭고도 화려한 주얼리 아트

비잔틴 시대의 주얼리
중세 시대의 주얼리
다양한 보석의 사용
중세 시대 주얼리의 중심도시와 기술
카메오의 유행
에나멜 장식
벨트와 체인
부적으로 사용된 주얼리
부정행위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주얼리 1500~1714
이니셜, 죽음, 정치 등 다양한 모티브가 반영되던 독창성의 실현

그림의 사용
이니셜
고전주의의 영향
체인의 사용
17세기의 머리장식과 반지
귀보석
그 밖의 경향

로코코와 신고전주의의 주얼리 1715~1836
로맨틱하고 여성스러운 우아함을 넘어 절제된 검소함으로의 회귀

모티브의 변화
왕궁의 로맨틱한 주얼리
머리장식
목걸이와 체인, 팔찌, 벨트
귀걸이
남성들의 주얼리
주얼리에 사용된 다른 재료들
신고전주의

빅토리아 시대의 주얼리 1837~1914
품위 있는 화려함 속에 저급함과 기괴함이 공존하던 감상의 시대

시대상황
주얼리의 다양한 변화
빅토리아 여왕 시대
19세기의 주얼리
대량 생산과 아티스트의 복고풍 주얼리
다이아몬드의 사용
애도를 표현하는 주얼리
그밖의 주얼리

아르누보 시대의 주얼리 Art Nouveau
"예술가들을 수공업자로, 수공업자들을 예술가로 변화" 시켰던 조화의 시대

시대의 예술과 성격
영국의 아르누보와 주얼리
프랑스의 아르누보와 주얼리
유럽 다른 국가의 아르누보

아르데코 시대의 주얼리 Art Deco
다양하고 대담한 모티브를 통해 유쾌하고 발랄한 상상력이 넘치던 20년


아르데코 스타일
아르데코 주얼리의 모티브
파리의 아티스트들
유명 브랜드 주얼리 회사들
다른 나라의 아르데코 주얼리
미국의 아르데코 주얼리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주얼리 1940~1959
화려하고 대담하며 모던한 칵테일 주얼리에 취했던 불안과 위기의 시대


제2차 세계대전의 타격
칵테일 주얼리
주얼리의 모티브와 형태
1950년대의 주얼리
주얼리와 아트
자유로운 디자인

현대의 주얼리 Present
진취적인 주얼리 아티스트들의 참신한 아이디어가 만들어가는 주얼리의 세계


1960년대부터 20세기 말까지
새로운 소재, 새로운 모티브, 새로운 디자인
21세기의 새로운 주얼리 장르
주얼리 공모전
주얼리 전시회
패션과 주얼리
미래의 주얼리

 

주얼리 모티브와 그 의미

용어 해설

참고 문헌

 

동물의 뼈로 만든 추장의 목걸이에서 백금으로 만든 신부의 드레스까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어 끝없이 펼쳐지는 주얼리의 파노라마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금은 장신구를 만들 때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금속이었다.

햇살과 같은 색깔을 띠고 있는데다가 연성이 좋아 다루기도 쉬워

여러 가지 형태로의 제작이 손쉬웠으며 부식되거나 손상을 입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고대인들은 금을 사용해 많은 주얼리를 만들었다.

 

도자기 구슬과 펜던트로 만든 목걸이 이집트 가나 인들의(Canaanite) 패션 목걸이. 기원전 약 1500 ~ 1200년경 이스라엘의 Lachish(modern Tell ed-Duweir)에서 발견되었다. 이 아름다운 이집트 스타일의 두 목걸이들은 늦은 청동기 시대 이스라엘의 Lachish(modern Tell ed-Duweir)의 외호(Fosse, 성이나 요새의 한 부분) 사원의 것으로 그곳에서는 또한 동물의 뼈가 담긴 항아리들과 상아, 유리 제품, 도자기, 그리고 금은으로 만든 많은 종류의 주얼리들이 발견되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수메르 여인의 주얼리 장식 기원전 약 2500년경의 것으로 보이는 이 주얼리들은 무덤에서 발견될 때 몇 구의 시신 위에 착용된 상태였는데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 전시하고 있다. 꽃 모양을 한 세 개의 머리장식(Diadem)과 금으로 만든 리본 머리띠. 라피스 라줄리와 코닐리언 구슬로 만든 머리장식에 금과 라피스 라줄리를 둥글게 연마해 만든 흔들리는 머리장식, 큼직한 금귀걸이와 목에 달라붙는 쵸커 스타일의 목걸이, 라피스 라줄리와 금으로 구슬을 만들어 꿴 목걸이와 라피스 라줄리를 둥글게 깎아 붙인 은으로 된 옷핀은 모두 한껏 멋을 낸 수메르 여인들의 미적 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수메르 아트(Art) 기원전 약 2500년경의 작품으로 염소 형상을 한 높이 50cm의 조각상이다. 수메르(Sumer)인들의 대표적인 금세공 작품 가운데 하나로 이 시대 금세공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얼굴에 입 부분과 발 부분은 얇은 금박으로, 뿔과 어깨, 털, 눈은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와 조개로, 배는 왕호박으로 만들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수메르 인의 머리장식 수메르 우르 시대에 남자 무덤에서 발견된 머리장식으로, 시대는 기원전 2500년경으로 보인다. 중앙의 원은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와 코닐리언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원의 가장자리에 연결된 네 줄은 금, 라피스 라줄리, 그리고 코닐리언이 번갈아가며 꿰어져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부적으로 쓰이던 금속 펜던트 기원전 약 1950 ~ 1800년경 이집트 제12왕조에서 사용하던 이집트 굴(Oyster) 껍질 모양의 금 펜던트로, Senusert(Sesostris)라는 이름이 Cartouch(이집트 시대에 왕의 이름을 새기던 원형의 장식 테두리)에 새겨져 있다. 이러한 굴 껍질 모양의 금속 팬던트는 이집트 왕조 중반에 부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Wedjat Eye'의 부적들 기원전 약 1068 ~ 661년의 것으로서 재생을 목적으로 사용한 부적들이다. 'Wedjat Eye'는 우리에게 알려진 이집트 부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으로 Wedjat의 뜻은 'the sound one'(하나의 소리)로 경쟁자 Seth과의 제권 싸움에서 잃은 Horus의 왼쪽 눈과 연관이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맨 처음 발견된 이집트 주얼리 이집트 제2왕조 때의 귀걸이로 남성과 여성 모두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귀걸이는 투탕카멘 왕이 살아 있던 당시에 쓰였으며 당시 남성들은 일반적으로 사춘기 이후에는 귀걸이를 착용하지 않았다(Cairo Museum 소장).

투탕카멘 왕의 묘에서 발견된 독수리 형상 주얼리 투탕카멘 왕의 묘에서는 독수리 형상이 담긴 가슴장식과 목걸이가 많은 양 발견되었다.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상징으로 영원(shen)과 삶(ankh)은 매의 모습을 가진 태양신(falcon horus)의 발톱에 매달려 있었다(Cairo Museum 소장).

한 쌍의 이집트 금팔찌 기원전 약 940년경의 것으로 이집트 제22왕조를 건국한 Sheshongq 1세의 아들인 Nemareth 왕자의 소유물이었다. Harpocrates의 형상은 부조로 표현되어 적색 상감된 연꽃 위에 앉아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팔찌의 나머지 부분은 땋은 형태로 금과 라피스 라줄리, 그리고 푸른색 유리가 번갈아 장식되어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이집트 왕조 중반의 금팔찌 기원전 약 2000 ~ 1750년경의 것으로 금으로 만들어진 팔찌 중앙에는 은으로 만든 여러 가지의 상징적인 형상들이 다양한 Wedjat eye(Horus의 눈)와 djed(4대의 주부가 얹어진 기둥), 그리고 앵크(ankh, 위쪽에 고리가 달린 T자 형의 십자)가 서로 번갈아가며 장식되어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에게 해 연안에서 발견된 금반지들 기원전 약 1850 ~ 1550년경 에게 해 아이지나(Aegina)섬에서 출토된 지름 2.1cm, 무게 152g의 반지들. 아이지나에서 발견된 5개의 반지 가운데 라피스 라줄리가 들어간 4개는 아이지나 보물 가운데서도 기술적으로 가장 숙련된 것이다. 라피스 라줄리는 매우 귀하고 값비싼 것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수입하여 사용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양머리 모양의 팔찌 세트 그리스 사이프러스(Cyprus)의 Kourion 무덤 73에서 출토되었지만 페르시안 스타일이 엿보인다. 지름 8.4cm, 무게 1669g, 기원전 약 450 ~ 400년경의 작품으로 양의 머리 부분은 반쪽씩 따로 만들어져 접합되었고 눈은 에나멜 착색으로 만든 듯 하다. 머리는 팔찌 링에 테두리로 연결되어 구리 알로이 못으로 고정되어 있으며 팔찌의 링은 구리에 금박을 입힌 것이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사이프러스의 특산품 나산형의 귀걸이 그리스 사이프러스(Cyprus)의 무덤 256의 석관에서 발견된 지름 약 2.9cm, 무게 245g의 귀걸이로 기원전 약 425 ~ 400년경의 작품이다. 동에 금박을 입힌 나선형 끝에 그리폰의 머리가 부착되어 있다. 그리폰의 머리는 금판을 두드려 만들었고 이마는 금으로 만든 장미 모양으로 장식했고 목은 푸른색과 녹색의 에나멜로 착색되어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날개 달린 키메라(CHIMERA) 모양의 금 브로치 기원전 525 ~ 500년의 것으로 길이 6.8cm, 무게 117g, 이탈리아에서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금 브로치의 좋은 예로 에트루스칸(Etruscan) 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던 주얼리이다. 이 주얼리는 얇은 금박을 두드려 만든 것으로 키메라 부분은 두 개로 나누어 만든 다음 서로 맞붙여 땜질해 붙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OXus의 부적 팔찌 기원전 4 ~ 5세기의 것으로 뒤에서 보면 꽉 찬 것 같지만 사실 팔찌의 밑부분은 그리핀의 날개가 있는 앞 끝으로 오면서 관 형태를 이룬다. 괴물의 뿔 안쪽 부분과 얼굴, 몸통의 홈은 상감을 이용한 것으로 나중에 날개의 윗부분에 부착되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귀걸이 금으로 만든 기원전 3세기의 귀걸이. 윗부분은 원형 디스크로 과립화(Granulation)된 작은 금 알갱이들을 붙여 장식 효과를 냇으며 가장자리에는 천사 모양의 메달이 두 개 달려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초상 카메오 로마 시대 세 층의 샤도닉스 돌을 깎아 만든 높이 12.8cm, 넓이 9.3cm의 카메오. 이 카메오는 로마제국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기원전 27년 ~ 기원후 14년) 황제의 큰 초상화 가운데 한 조각이다.

이집트 여인의 미이라 초상 약 100 ~ 120년 정도의 주얼리로 높이는 38.2cm 정도이다. 이 여인의 초상은 이집트 스타일의 미이라에서 나온 것으로 주제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 초상에서 보이는 여인의 모습은 그리스-로마 시대 여성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영국 로만 시대의 금반지 2 ~ 3세기 무렵의 것으로 지름 2.2cm의 반지. 또같은 문자가 들어간 이러한 형태의 다각형 반지는 이미 2세기 영국 로만 시대의 왕가에 널리 퍼진 것이었다. 들어간 문자는 대부분 그리스어로 이 반지에는 'Polemios(사랑의 증거)'라고 써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금과 유리로 제작된 메달 로마 카타콤바에서 발견된 지름 60.4mm의 4세기 작품. 그리스도 안에서 결혼한 부부를 주제로 메달 속 남녀의 상반신은 얇은 금박 테두리와 글씨에 둘러싸여 있다. 양 옆으로는 'DULCIS ANIMA VIVAS'("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은 (오래)살 것입니다")라는 글귀가 써 있다. 이 메달은 결혼 선물로 만들어졌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용(龍) 형태의 브로치 한 쌍 기원후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의 것으로 보이는 길이 4.5cm의 보석으로, 푸른색과 적색의 에나멜로 착색된 이 한 쌍의 브로치는 뒤쪽에 상당히 심하게 구부러진 핀으로 보아 두꺼운 옷을 고정하는 데에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비잔틴과 중세 주얼리가 지닌 화려함의 기본이 되는 장식기술로서, 여러 가지 종류의

에나멜 기법을 빼놓을 수 없다. 오리지널 에나멜 기법인 클로아저네(Cloisonne)에서 반투명 기법인

샴플레브(Champleve), 그리고 금 위에 흰색이나 다른 색이 있는 유리가루 반죽을 굳혀 붙이는

론드 보스(en Ronde Bosse) 기법 등이 이 시대 주얼리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프랑크 족 귀부인의 주얼리 북부 프랑스 Artres의 무덤에서 발견된 것으로 1855년 프랑스 Artres의 한 농부가 작은 고분 밑에서 발견하였다. 중앙에 있는 커다란 두 개의 은으로 된 브로치는 망토를 고정하거나 치마를 고정하는 데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금과 가넷(Garnet)으로 만든, 작은 두 개의 브로치는 각각 겉옷이나 일반 옷을 고정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랫쪽의 구슬이 꿰어진 금귀걸이 세트는 6세기 특유의 귀걸이 형태이며 위의 은팔찌는 사회적 신분을 나타낸다. 또 금에 부착된 크리스털 펜던트는 그 시대의 부적으로 사용된 듯 하다(런던 The British Museum 고장).

금과 에나멜로 만든 귀걸이 세트 비잔틴 시대(약 10세기)의 것으로 길이 47mm, 높이 38.8mm의 이 귀걸이는 반달형 호에는 에나멜 판넬과 작은 새들이 부리에 작은 가지를 물고 있는 디자인으로 장식되어 있다. 에나멜 판넬의 바탕 부분은 반투명의 녹색이고 새는 머리와 목 부분이 불투명의 흰색 에나멜로, 몸통 부분은 반투명 푸른색, 날개는 불투명한 푸른색의 에나멜로 착색되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Londesborough' 브로치 8세기 무렵의 것으로 길이 24.2cm, 은에 금도금을 해서 만들었다. 원의 윗부분은 호박과 푸른색 유리, 그리고 조각으로 장식되어 잇으며 원의 뒷부분 역시 유리장식과 함께 곡선 모티브를 사용해 상감으로 되어 있다. 동물 형상 모티브의 사용은 앵글로색슨족의 세공사들이 주로 사용하던 것으로 아일랜드 금 세공사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제품을 만들 수 있었는지를 증명한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Robert Fitzwalter의 봉인 약 1213 ~ 1219년경 제작된 영국 남작의 문장이다. 봉인은 일반적으로 집안의 문장이나 디자인이 들어간 것으로 중요한 서류를 봉할 때 초 위에 찍던 도장이다. 이 봉인 위에 들어간 갑옷과 투구의 자세한 디데일과 스타일은 1213 ~ 1219년의 정치상황을 그대로 설명해 주고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노아의 방주 카메오('Noah' Cameo) 무거운 금메달에 부착한 길이 5.3cm의 오닉스 카메오. 아르크(Ark)를 떠나는 노아와 그 가족, 그리고 동물들을 묘사하고 있다. 아르크의 문 위에는 메디치 가의 Lorenzo de' Medici의 이니셜인 'LAUR MED'가 새겨져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보쥬(Beaujeu) 지방 Ann의 초상 유명한 그림 <Maitre de Moulins>의 일부분으로 1498년 무렵의 작품이다. 에나멜 착색이 된 당시의 아름다운 머리장식이 돋보인다. 작품의 원작은 Moulins 성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

Dunstable 백조 금으로 만든 다음 그 위에 흰색 에나멜로 착색했다. 물갈퀴 부분에는 검은색의 에나멜로 착색한 흔적이 보인다.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브로치의 연결 고리는 뒤쪽 표면에 부착되어 있으며 불투명 에나멜 기법인 론드 보스가 금에 사용된 가장 좋은 본보기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15세기 초 큰 성골상자를 장식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에나멜 기법으로 영국에서도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성침(Holy Thorn)이 보호되어져 있는 비잔틴 시대의 메달 약 14세기경 프랑스 제품으로 하나의 '금박'과 두 개의 크리스털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잔틴 황제 Bladwin의 성스러운 왕관의 한 부분이었던 이 성골 상자 뚜껑의 안쪽 면과 중앙의 한쪽 면에는 반투명의 에나멜을 사용하여 제작한 예수의 일생에 대한 여섯 장면의 그림이 있다. 성침은 크리스털과 'DE SPINA SANCTE CORONE'(성스러운 왕관의 성침)이라는 문구와 함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비잔틴 시대의 작은 성골상자 메달 클로이져네 기법으로 에나멜 착색을 했으며 내부에는 성 십자가의 작은 파편이 보호되어 있다. 표면에는 동정녀 마리아의 기도하는 모습이, 양 옆으로는 성 바실리오와 성 조르지오의 상반신이 그려져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형상 예술의 수준으로 주얼리를 끌어올린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 17세기의 주얼리는 이전까지

집착하고 있던 형상 예술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 주얼리는 그 자체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더 이상 사회적인 지위나 종교, 정치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게 된다.

프랑스 파리는 패션과 유행을 선도하는

핵심 도시로 자리 잡게 되고 베르사이유 궁전의 화려함으로 파리의 절대성은 정점에 이른다.

 

 

바로크 진주가 사용된 르네상스 시대의 주얼리 인어의 상반신에 여러  형태의 바로크 진주를 사용해서 제작. 카닝 자작(Canning Viscount) 2세가 구입했다고 해서 카닝 주얼리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주얼리는 16세기 르네상스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현재는 19세기 르네상스 부활 시기의 디자인으로 보는 견해가 더 많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파닉스 주얼리(Phoenix' Jewel) 약 1570 ~ 1580년경 제작된 이 금메달의 중앙에는 엘리자베스 여왕 1세의 상반신 실루엣이 들어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녹색과 적색의 에나멜로 착색된 튜터(Tudor) 왕조의 장미가 둘려져 있다. 메달 뒷면에는 문장과 왕관, 그리고 광선이 릴리프로 표현되어져 잇으며 아랫 부분에는 불사조가 날개를 편 형태가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성스러운 모노그램 IHS가 쓰인 펜던트 중앙 위쪽에 십자가가 장식되어 있고 체인에 연결된 3개의 못은 Crucjfixion(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내는 십자가)의 못을 나타낸다. 다이아몬드와 금을 사용해 만들었으며, 16세기 말에 북유럽에서 제작되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Lyte' 주얼리 1610년 29개의 다이아몬드가 조각된 금 펜던트로 겉에는 모노그램 IR이 새겨져 있다. R의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꽃잎 모양의 난집 위에 있는 4개의 다이아몬드는 15세기의 것으로 Burgundy 왕조의 다이아몬드 연마사들이 최초로 면을 낸 것이다. 열린 펜던트 안쪽에는 1610년에 Nicholas Hilliard가 그린 영국 왕 James 1세의 초상이 들어 있는데 Hillard는 영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영국 황실 아티스트로 여왕 Elizabeth 1세와 그 후세들을 위해 일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보디스(Bodice) 장식 17세기 말 제작된 작품으로 당시에 여성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주얼리였다. 길이 10.5cm, 네덜란드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보디스는 금에 토파즈를, 은에 로즈 커트 다이아몬드를 조각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머리장식이 돋보이는 여인의 초상 Elenora de'Medici의 딸 Margherita gonzaga(1591 ~ 1632)의 초상으로 17세기 초반 이탈리아 작품이다. 이 여인은 진주로 꾸며진 화려한 머리장식과 가슴장식을 하고 있는데 장식에 쓰인 다이아몬드는 테이블 커트와 하트 커트 등으로 연마된 것인데 당시에는 아직 브릴리언트 커트 연마방식이 발견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에나멜 착색이 된 모자 주얼리(Hat-Jewel) 지름 4.8cm, 뒷면을 쳐서 무늬가 겉으로 도드라지게 하는 Repousse 기법을 사용해 만든 모자장식 주얼리. St. Paul의 개종을 설명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모자 주얼리의 기원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으로 이 주얼리는 16세기 중반에 사용된 것으로 뒷면에 이탈리아어로 해군 장교인 Marchese Camillo Capizucchi의 모자 장식 세트라고 기록되어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찰스 1세(Charles Ⅰ)를 기리는 기념반지 약 1650년경 영국에서 제작된 이 금반지는 두 개의 오벌 형태의 납작한 틀로 이루어져 있고 안쪽 면에는 에나멜로 그린 찰스 1세(1625 ~ 1649)의 초상화가 들어 있다. 경첩 부분은 에나멜과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져 있다. 반지의 어깨부분은 검은색 에나멜로 착색되어 있고 다이아몬드는 검은 에나멜과 함께 가장자리에 테를 두르고 있으며 뚜껑의 가장자리 역시 흰색과 검은색의 에나멜로 장식되어 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여러 가지 색의 귀보석 반지 세트

1열 에메랄드(Emerald), 루비(Ruby), 사파이어(Sapphire), 사파이어(Sapphire), 사파이어(Sapphire), 사파이어(Sapphire)

2열 스피넬(Spinel), 시트린(Citrine), 아메시스트(Amethyst, 자수정), 아쿠아마린(Aquamarine), 페리도트(Peridot), 크리소베릴(Chrysoberyl)

3열 투어멀린(Tourmaline), 투어멀린(Tourmaline), 지르콘(Zircon), 지르콘(Zircon), 토파즈(Topaz), 토파즈(Topaz)

4열 가넷(Garnet), 데만토이드(Demantoid), 가넷(Garnet),  헤소나이트 가넷(Hessonite Garnet),  오팔(Opal), 블랙 오팔(Black Opal), 파이어 오팔(Fire Opal)

5열 크리소베릴Chrysoberyl),  캣츠 아이(Cat's Eye),  스타 사파이어(Star Sapphire), 스타 루비(Star Ruby), 문스톤(Moonstone), 래보라도라이트(Labradorite)

6열 크리소프레이스(Chrysoprase), 터키석(Turquoise), 말라카이트(Malachite),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  칼세도니(Chalcedony), 어벤츄린 쿼츠(Aventurine Quartz)

7열 오닉스Onyx), 모스 아게이트(Moss Agate), 코닐리언(Cornelian), 아게이트(Agate), 재스퍼(Jasper)

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펠리컨 모양의 펜던트 1550 ~ 1575년경에 스페인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8.8cm의 펠리컨 모양을 본딴 펜던트. 이 성스러운 느낌의 펜던트는 금에 에나멜 착색을 하고 뒷면에 넓게 적색 포일 백(Foil Back)을 해서 붙인 다음 진주를 매달아 만들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독일의 결혼반지 1575년경 제작된 것으로 디자인은 아탈리아의 '믿음의 손'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거나 또는 그 당시 유행했던 사랑과 믿음의 상징에서 비롯된 듯하다. 두 사람이 하트 형태를 맞잡고 있는 이 반지는 결혼반지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잘 살려낸 작품이다.

The Tor Abbey 주얼리 영국에서 약 1540 ~ 1550년경 금에 에나멜을 착색해 제작했다. 죽음을 상징하는 관 형태의 드라마틱한 유물로 뚜껑을 열면 안에는 에나멜로 착색한 해골이 누워 있다. 뚜껑의 무어(Moorish)식의 장식은 당시 유럽에서 흔히 사용되던 것이었는데 가장자리에 써 있는 글귀 'THRONGH, THE, RESVERRECTION, OF, CHRISTE, WE, BE, ALL, SANCTIFIED'는 이것이 영국 주얼리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해골을 사용해 제작된 죽음과 관련된 반지들 죽음의 상징인 해골을 기본 모티브로 해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잘 형상화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18세기 초의 주얼리는 일상생활에서 쓰는 주얼리와 중요한 공식 행사 때에 착용하는 화려한 주얼리,

또는 저녁 파티를 위해 여러 가지 보석으로 만든 세트 주얼리 등으로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주얼리는 상류사회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파티의 촛불 아래 최대한

반짝거려 돋보일 수 있도록 특별히 디자인되곤 했다.

 

에나멜과 금, 은, 다이아몬드로 조각한 부케 길이 22cm의 17세기 말 스페인 작품으로 Dona Juana Rabasa(당시 스페인 재무부 장관이었던 Charles 4세의 부인)의 소유품이었으나 훗날 Saragossa의 Virgin of the Pillar에 기부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눈 그림이 들어 있는 애도 반지 약 1794년경 영국에서 만들어진, 지름 2cm, 무게 58g의 작품이다. '눈 그림 반지'는 죽은 사람이 항상 자기를 지켜본다는 생각을 표현한 작품으로 이 눈은 일반적으로 초상화에서 잘라 내어 삽입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Flora of Pistrucci' 카메오 금반지 크기 2.3cm의 이 반지는 코닐리언 보석에 장미꽃과 양귀비, 마가레트로 머리를 장식한 Flora의 형상이 릴리프로 카메오 조각되어 금반지에 물려 있다. 이탈리아 조각가 Benedetto Pistrucci(1784 ~ 1855)의 명작 가운데 하나이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보디스(Bodice) 로즈 커트로 절단되어 뒷면을 댄(Foil Back) 은에 다이아몬드를 붙여 만든 이 주얼리는 스토마커(stomacher, 화려하게 꾸민 삼각형의 가슴장식)로도 사용되었다. 1720년 영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밑에 보이는 몇 개의 보석들은 뒷부분의 색이 벗겨져 갈색의 색조를 띄고 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18세기 특유의 우아함을 살린 목걸이 1660년경 프랑스에서 제작된 높이 17cm의 목걸이. 이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작품은 금을 기본으로 그 위에 에나멜을 착색하여 여러 가지 색을 냈으며 다이아몬드를 조각해 화려함을 더했다. 중앙 부분은 진주와 사파이어로 장식, 18세기 특유의 우아함과 화려함의 조화를 엿볼 수 있는 목걸이이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나비 모티브를 잘 살린 목걸이 1805년 프랑스에서 제작된 목걸이로 총 길이는 40cm이다. 불투명 보석을 각각의 나비 디자인에 맞게 절단하여 꽃 줄에 끼워 맞춘 모자이크로 장식해 만들었다. 이러한 모자이크 방식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독특한 스타일이지만 이 주얼리의 조립 및 완성은 프랑스에서 이루어졌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Cut Steel의 Chatelaine 19세기 초 프랑스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길이는 52.7cm이다. 맨 위쪽의 고리(Hook)부분은 왕관의 모노그램으로 장식되어져 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로 만든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 1806년 작품으로 나폴레옹과 그의 아내 조세핀이 양녀 스테파니의 결혼식 때 선물한 주얼리 세트. 목걸이 뒷부분의 두 물방울형 에메랄드는 뒤에 조립된 것이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베를린의 아이언 워크 고딕 스타일의 트레이서리(Tracery) 무늬와 잎사귀 무늬 장식의 목걸이로 1820 ~ 183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큰 장식 부분의 중앙은 빛을 반사하기 위해 광을 낸 원형의 납작한 철을 붙여 만들었다. 당시에 유행한 독특한 소재로 만든 주얼리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19세기에는 로맨틱한 감성과 애국심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는 시기로서 새로운 대중

예술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련된 도시의 주얼리와 대중적인 서민 주얼리 사이에 스타일의 교환이 이루어지곤 했다.

특히 서민적인 스타일의 의복과 장식품에 대한 관심은

훗날 윌리엄 모리스의 아트 앤 크래프트 운동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금과 은에 다이아몬드가 가득 박힌 왕관 약 1855년경 영국 런던에서 제작된 지름 16.3cm의 왕관으로서 사실적으로 묘사된 세 개의 떡갈나무 가지와 열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 개의 장식은 각기 떨어져 브로치로도 사용될 수 있게 만들어진 다기능 주얼리로, 브로치와 왕관의 테는 금과 거북이 등껍질로 만들어졌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포도 넝쿨 목걸이 1840 ~ 1850년경 제작된 목걸이로 포도 알갱이는 자수정으로, 잎은 금에 녹색 에나멜을 착색해서 만들었다. 이런 형태의 섬세한 디자인을 가진 주얼리는 후에 작은 진주 등으로도 제작되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메꽃 브로치 1845 ~ 185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금에 터키석과 진주로 장식했고 가장 긴 부분의 길이는 12.5cm 정도이다. 메꽃의 꽃말은 '연분, 결속', 또는 '절망'을 뜻한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움직이는 나비가 매달린 머리장식 브로치 높이 9.4cm의 이 장신구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세 가지 색깔의 금으로 만들어졌다. 장미 가지 형태로 만든 것으로서, 이러한 꽃 모티브는 19세기 초 꽃말 등을 통해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꽃다발에는 나비를 용수철을 이용해 떨리도록 만들어 끝부분에 매달아 진짜로 나비가 움직이는 것 같은 효과를 주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그리스 스타일을 재현한 금목걸이 1870년경 제작된 총 길이 35cm의 목걸이. 금선으로 그물을 엮듯이 짠 줄에는 속이 빈 펜던트와 장미 모양의 장식이 촘촘히 달려 있는, 이탈리아 세공 대가 Castellani의 작품이다. 오리지널 주얼리는 1864년 Kul Oba에서 발굴된 기원전 360년의 그리스 주얼리이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전기 주얼리의 하나인 해골 핀 1867년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재미있는 전기 주얼리. 화이트 에나멜과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금핀으로 뒤쪽 목 부분에 달린 뼈는 전기 단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배터리에 연결되면 다이아몬드가 박힌 눈은 빙글 빙긍 돌고 턱은 딸깍거린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사용되었던 딱딱한 스타일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선의 유동적인 자유로움과 자연에 집중한 주제의 사용,

또 새롭고 강렬하며 다양한 색채의 선택 등이 아르누보 시대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또 이 시대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 예술과의 접목을 들어도 과언이 아니다.

 

 

르네 라릭(Rene Larique)의 작품 금, 에나멜 착색, 크리소프레이스(Crysoprase)로 만든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주얼리가 보관되어 있는 리스본의 Gulbenkian Foundation은 1898년 Calouste Gulbenkian이 세운 박물관으로 아르누보 시대를 대표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얼리들을 갖고 있다(리스본 The Calouste Gulbenkian Museum 소장).

플리끄 앙 주르 에나멜 기법을 사용한 머리장식 1900년 작품으로 길이는 7.6cm, 루비와 다이아몬드를 사용했다. 위쪽의 꽃잎을 통해 쏟아져 내려오는 빛은 에나멜의 투명함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아르누보 스타일의 목걸이 약 1902년경 금과 Blister pearl(납작한 거품 진주), 오팔로 제작된 길이 24cm의 목걸이로 디자이너 Archibald Knox가 런던의 주얼리 가게 Liberty를 위해 디자인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클로아저네 방식으로 착색한 일본 스타일 메달 1868년에서 1870년 사이에 프랑스 세공사 Alexis Falize가 제작, 일본식 주얼리 스타일과 에나멜 기술은 별다른 무리없이 자유롭게 유럽 주얼리에 적용되었다(런던 The British Museum 소장).

르네 라릭의 코사지 프랑스에서 1898 ~ 1899년에 금과 에나멜로 제작된, 라릭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이다. 아홉 마리의 뱀이 서로 얽혀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리스본 The Calouste Gulbenkian Museum 소장).

조지 포끄의 코사지(Corsage) 1902년 작품. 날개 달린 바다 괴물의 형태로 몸통은 클로이저네 에나멜 기법으로, 지느러미와 꼬리는 플리크 앙 주르 에나멜 기법으로 착색되었다. 뱀 머리 윗부분에는 에메랄드가 부착되어 있고 금과 분홍색 바로크 진주, 다이아몬드를 사용해 해초를 표현하였다.

날개 달린 뱀 모양의 드라마틱한 손 장신구 아르누보 시대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 가운데 한 명인 알퐁소 무챠(Alphonse Mucha)의 디자인으로 조지 포끄(George Fouquet)가 제작한 팔찌와 반지. 1899년 파리에서 금과 에나멜, 오팔과 다이아몬드를 사용해 만든 이 환상적인 팔찌는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의 <클레오파트라> 공연을 위해 제작되었다(개인 소장).

공작 펜던트 약 1900년경 제작된 펜던트로 날개는 플리크 앙 주르 에나멜 기법을 사용하였고 날개 사이의 하트 모양 깃털은 오팔로 장식하였다. 아래 물방울 형태로 매달린 것 역시 오팔이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아르데코 시대의 주얼리 제작자들은 그 이전까지는 단 한번도 제작된 적이 없는

불후의 명작들을 많이 남겼다.

이때는 대담하면서도 정성을 가득 담아 만든 환상적인 대작에서 신선하고 때로는

장난스럽기까지 한 독창적인 작품들이 공존했다. 이 시기를 결정짓는

주얼리 디자이너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신 보석을 판매하는 보석상의 브랜드 네임이 힘을 얻던 것도

이 시대의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자동차 기념 브로치 오벌 형태의 브로치로 자동차 'Thunderbolt'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1937년 Land Speed 세계 기록을 깬 캡틴 조지 이스턴(George Eyston)의 부인에게 선물된 브로치로 이처럼 이 당시에는 모티브나 디자인에 한계가 없었다.

풍뎅이(scarab)과 꽃 상징 모티브 이탈리아 주얼리 제작에 중심이 되는 모티브는 풍뎅이와 꽃 상징 모티브였다. 위쪽의 둥근 모양은 해와 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달의 신 Thoth와 해의 신 Ra-Horakhty를 함유하고 있다(Cairo Museum 소장).

실편백 나무 모양을 본딴 브로치 Lacloche Freres사의 작품으로 1927년 작품이다. 화이트 골드에 원형의 브릴리언트 커트와 직사각형의 바게트 커트로 커팅된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 블랙 오닉스로 만들어졌다. 이 브로치는 거꾸로 뒤집으면 펜던트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카르띠에(Cartier) 백금 팔찌 1929년 파리에서 만들어진 이 팔찌는 두 마리의 키메라(chimera) 머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상이다. 백금(platinum)에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 그리고 사파이어로 장식했다.

카르티에(Cartier) 브로치 1940년 런던에서 제작된 아르데코 스타일의 브로치. 1847년 창립한 카르티에는 19세기 그 어떤 회사의 주얼리보다 많은 사랑을 받으며 주얼리 계의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전형적인 아르데코 스타일의 팔찌 넓은 밴드 스타일의 팔찌로 1925년 Oscar Heyman & Brothers사가 제작했다. 화려한 색상의 남부 열대지방의 꽃과 새 모양으로 장식했으며 이러한 디자인에 맞게 연마된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오닉스가 멜레 다이아몬드와 함께 백금(Platinum)에 물려져 만들어졌다.

Quivering Camellia Set 1938년 작품으로 CORO(Cohn & Rosenberger.Inc)제작. Gene Verrecchio가 디자인했으며 디자인 특허를 낸 제품이다. 브로치, 팔찌, 목걸이, 귀걸이 세트로 금, 은도금, 크리스털과 큐빅, 에나멜로 작업했으며 금색 도금된 동백꽃에 푸른색 바게트 커팅된 크리스털과 라운드 커팅된 큐빅, 잎사귀는 검은색의 에나멜로 장식했다.

Camellia Set 1939년 작품으로 CORO(Cohn & Rosenberger.Inc)제작. Adolph Katz가 디자인했으며 역시 디자인 특허 제품이다. 동백꽃 모티브를 이용한 팔찌와 브로치 세트. 팔찌는 1965년 플라스틱으로 다시 만들어져 오리지널 작품의 바리에이션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1950년대 많은 조각가와 화가들은 주얼리에 관심을 보이고 직접 주얼리를 제작했다.

처음으로 주얼리를 제작하기 시작한 조각가는 스위스의 자코메티와 미국의 칼더이고,

그 뒤를 이어 에른스트, 탕가이 등의 조각가들이 주얼리를 제작했다.

이들의 주얼리는 그들의 작품과 동일시되는 독특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작품들과는 구분이 되었다.

 

 

불가리(BULGARI)의 화려한 목걸이와 귀걸이 아기들의 턱받이 모양으로 디자인된 목걸이와 길고 큼직하게 내려오는 귀걸이로 이루어진 주얼리 세트로 1965년 작품이다. 18K 옐로 골드를 기본으로 물방울 모양으로 다듬은 터키석과 에메랄드, 캐보션으로 커트된 자수정, 그리고 다이아몬드가 사용된 이 세트는 불가리의 VINTAGE collection 가운데 하나이다.

뱀 모양의 체인 런던에서 1947년 수출을 목적으로 제작된 길이 39.5cm의 목걸이로, 화이트와 옐로우 골드로 만든 뱀 효과가 나는 줄(Snake chain)에 다이아몬드와 루비, 사파이어가 조각된 장식으로 중앙을 고정했다(런던 Victoria & Albert Museum 소장).

'Tree' 1942년 제작된 작품으로 디자인 특허를 낸 나무 형태의 브로치이다. 메탈 은도금과 하늘색 보석, 큐빅, 검은색 에나멜을 사용해 만들었다,

'Rock Fish' 1945년 만들어진 독특한 작품이지만 디자인 특허는 하지 않았다. 디자인의 독창성으로 디자이너 Adolph Katz가 잡지 《American Magazine》의 '모든 여성은 여왕' 란에 특별 인터뷰한 작품으로 하늘색과 적색 보석의 두 가지 바리에이션이 있다.

'Griphon' 1941년 작품으로 디자인 특허 제품이다. 금도금 메탈과 적색, 청록색 에나멜을 착색, 큐빅깃털이 풍성한, 꼬리가 긴 까치 형태의 브로치로 머리, 몸통과 다리는 큐빅 조각을 했다.

'Medusa Set' 1946년 작품으로 브로치와 귀걸이 세트. 금도금 메탈과 큐빅을 사용했다. 1946년 6월 잡지 《Women's Wear Daily》가 '상상을 초월하는 비범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린 주얼리로 얼굴 부분이 검은 색 에나멜로 착색된 변형본도 있다.

'Pom Pom and Tom Tom' 1949년 작품으로 디자인 특허된 어린아이들 모양의 브로치 한 쌍. 메탈 은도금과 유리, 큐빅을 사용한 작품이다. 잡지 《Harper's Bazaar》와 《Jewelers Circular-Keystone》에 광고된 것으로, 발랄한 어린이들의 형상이 푸른색과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Cat Fishing in a Bowl' 1948년 제작된 작품으로 어항에서 헤엄치는 금붕어를 잡는 재치 있는 디자인의 브로치. 스터어링 실버(Sterling Silver, 92.5퍼센트는 실버, 나머지는 동)에 도금, 적색의 사각 보석과 큐빅, 에나멜을 사용했고 어항은 루사이트(Lucite, 투명합성수지)로 표현했다.

'Ballet of Jewels' 가운데 'Prima Ballerina' 디자인 특허된 1950년 작품. 금도금 메탈과 큐빅으로 춤추는 발레리나 형태를 만들었다. 1949년 7월 잡지 《Women's Wear Daily》에 소개된 작품이다.

'Bowknot' 1940년 작품으로 디자인 특허된 리본 형태의 브로치이다. 은도금과 적색 에나멜을 사용하고 큐빅을 조각해 제작했다.

카르티에(Cartier) 타이거 클립 1957년 파리에서 만들어진 옐로 골드와 옐로 다이아몬드, 오닉스, 에메랄드로 제작된 호랑이 펜던트. 1961년 카르티에는 이 브로치와 함께 할 수 있는 귀걸이도 제작하였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디자인의 브로치 옐로 골드와 4 ~ 6mm 크기의 진주, 루비로, 치아는 진주로 표현한, 혁신적이고도 독창적인 디자인의 이 제품은 현재도 그 참신함과 신선함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Good Fairy' 1946년 작품. 은도금, 큐빅이 가득 박힌 요정 형태의 브로치로 투각된 날개 가장자리는 검은색 에나멜로 착색했다. 이름부터 독창적인 주얼리로서 프랑스 주얼리 회사 Van Cleef & Arpels의 컬렉션인 'Wings of Victory'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다.

 

미래에는 어떤 주얼리가 유행할지 지금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새로운 기술과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그 디자인과 유행이 달라지기 때문인데

확실한 것은 주얼리에 사용되는 금과 백금, 다이아몬드와 그 밖의 유색 보석이 가진

화려함이 주는 마술 같은 매력은 언제까지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중앙 부분이 움직이는 반지 깔끔하고 절제된 이미지로 전 세계 주얼리 마니아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니싱(NIESSING)의 독특한 반지. 중앙 부분의 장식이 회전하여 한 개의 반지로 두 개의 반지를 소유한 느낌을 갖게 하는, '니싱다운'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Gold Virtuosi 2002

INTERNATIONAL JEWELRY DESIGN AWARDS

Gold Virtuosi 2002 당선 작품 레이저를 이용해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정교하고 세밀하게 새겨서 만든 목걸이와 반지로 공모전에서 기술상을 수상했다(디자인 Ranjith Gamage).

 

Diamonds International Awards

1998년 당선작 작품명 '사하라' 이탈리아 Damiani 제품으로 사하라 사막의 모래언덕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했다. 다이아몬드를 사용해 섬세한 선을 표현해 낸 이 독특한 주얼리는 디자이너 Giam Paola De Marchi의 작품이다.

 

CHIMENTO

 

'삶은 꿈이다'라는 의미의 'La Vita e Sogno'를 회사의 기본 경영철학으로

삼고 있는 이탈리아 브랜드

치멘토(CHIMENTO)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주얼리 가운데 하나이다.

 

NIESSING

너무나 독일적인 브랜드 니싱(NIESSING)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주얼리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다.

인간 내면의 목소리를 주얼리라는 매개로 표현하고자 하는 니싱은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받아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참신한

아이디어와 인간과의 교감이 빛나는 각각의 작품에는 이러한

니싱의 마인드가 그대로 담겨 있다. 심플하고 멋스러우며

지적인 느낌이 잘 살아 있는 니싱은 현재 우리나라에도 런칭되어 있다.

 

 

 

 

 

 

posted by 황영찬

2017-001 박태상의 동유럽문화예술산책

 

박태상

2002, 생각의 나무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8830

 

982.02

박883동

 

탐사와 산책 12

 

누가 도나우강에서 뱃놀이를 했는가

 

박태상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MSU)에서 객원교수를 지냈고, 한국방송대학교 울산지역대 학장을 거쳐 현재 인문학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동시에 사단법인 [서울평양학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두 권의 문학평론집 '전통부재시대의 한국문학'과 '엽기 패러디 시대의 한국문학' 및 한 권의 영화평론집 '영화, 어떤 문화코드로 읽을 것인가'를 출간했고, 대통령자문기구인 민주평통자문위원(상임위원)과 옥천 지용제 운영위원 겸 홍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KBS 라디오 한민족

 

 

목차

 

책머리에 | 동유럽, 그 치열한 지성과 냉혹한 역사적 현실의 세계

 

쇼팽이 사랑한 여인, 쇼팽이 사랑한 음악 | 바르샤바의 쇼팽박물관

크라쿠프에서 괴테를 만나다 | 폴란드 왕립 소금광산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 다뉴브 강과 부다페스트의 슬픔

여인천하 | 루카치 박물관과 쉔브룬 궁전

모차르트, 베토벤과 동거하다 |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음악가 무덤

프라하의 봄 | <2000어 선언>과 밀란 쿤데라

비세흐라트의 향기 | 체코의 자랑 프라하 성

카프카의 연인들 | 프라하의 명소 카프카 박물관

신세계를 펼쳐라 | 드보르자크의 예술세계

어떻게 살아남아야만 하는가 | 브레히트 박물관의 신비로움

베를린판 분서갱유 | 독일의 명문 흄볼트 대학

한국을 독립시켜라 | 세칠리엔호프 궁전과 포츠담 선언

헤겔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가 | 헤겔 철학의 세계정신

도브리 젠 | 레닌 묘와 고리키 박물관

단테스, 콘체로바를 포기하라 |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 푸슈킨

에르미타쥬 미술관과 '황금의 방' |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자존심

캔버스를 허리춤에 차고 예술을 창조한 화가 | 사실주의 화가의 대명사 일리야 레핀

아르바트 거리와 젊은 예술인들 | 러시아 전통의 이콘 페인팅

민족이 우선인가, 세계화가 먼저인가 |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표트르 차이코프스키

 

쇼팽 박물관 내부 폴란드 젤라조바 볼라에 있는 쇼팽 박물관의 내부이다.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별명답게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소품들의 조화가 인상적이다.

쇼팽 초상 감상적이면서도 다소 신경질적인 쇼팽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는 쇼팽의 초상이다. 상드의 회고에 의하면 쇼팽이 가장 사랑한 여인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고 한다.

밖에서 본 쇼팽 박물관 쇼팽 박물관은 고즈넉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풍긴다. 바르샤바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쇼팽을 사랑하는 외국의 관광객들로 늘 붐비고 있다.

쇼팽의 가족사진 박물관 벽에 붙어 있는 쇼팽의 가족들 사진이다. 프랑스인이었던 쇼팽의 아버지 니콜라스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사회적인 불안을 피해 폴란드로 이주했는데, 연초공장에서 회계 일을 하던 중 백작의 집에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됐다. 그곳에서 옛 귀족 출신 가정부 유스티나와 결혼, 1남 3녀를 얻었다. 그 가운데 둘째가 쇼팽이다.

조르주 상드의 초상화 쇼팽의 연인 조르주 상드의 초상화. 당대의 화가 들라크르와의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격정적이면서도 섬세한 조르주 상드의 내면이 잘 드러나 있는 그림이다.

쇼팽의 초상 쇼팽의 깔끔하면서도 창백한 인상은 뭇 여성들로부터 모성 본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실생활에서도 쇼팽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고독을 무척 즐겼다고 하는데 이런 성격은 그의 음악세계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쇼팽의 정원에 있는 음악비 조르주 상드, 보진스카 등의 연인들과 뜨겁게 사랑했지만 끝내 평안을 얻지 못했던 쇼팽. 그래서 그런지 그의 음악비는 어딘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하게 보인다. 그의 장례식장에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흘렀다.

쇼팽의 초상화 평소에 바흐를 존경했던 쇼팽. 그의 표정에서는 바흐 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단아한 귀족미와 고전적인 절제, 그리고 세련된 자족감이 느껴진다.

왕립 소금광산 박물관 폴란드 크라쿠프에 있는 소금광산 박물관의 전경이다. 소금광산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명소로 광산 안에는 광부들이 새긴 조각물들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다.

소금광산 내 연못 폴란드 크라쿠프에 있는 왕립 소금광산 내의 연못. 둘레에 관광객들을 위한 다리가 놓여져 있다.

이집트로의 피난 왕립 소금광산 내에 있는 성 킹가 성당 벽에 조각된 작품으로 당시의 광부들의 손에 의해 제작되었다.

최후의 만찬 성 킹가 성당 벽에 조각된 작품으로 조각가이며 광부인 안토니오 비로덱에 의해 제작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을 모사한 작품이다.

괴테의 초상 근엄하면서도 낭만적인 멋을 갖춘 귀족이며 신사였던 괴테의 위엄과 매력이 잘 드러나 있는 초상화이다.

울리케 폰 레베초 괴테는 74세 때 19세의 울리케 폰 레베초에게 청혼하였다. 괴테는 1823년 뵈멘으로 마지막 온천여행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그가 묵었던 집 주인의 손녀인 우아한 그녀에게서 열정적 사랑을 느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 헝가리 민주의회정치의 현장인 동시에 198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1956년의 5 . 6혁명 당시 부다페스트 공과대학 학생들은 이곳에서 소련군의 철수와 헝가리의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이 사건은 헝가리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헝가리 국립미술관 부다페스트 부다 왕궁에 있는 국립미술관. 현재 여러 부속 박물관과 국립 세치니도서관을 수용하는 문화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다눕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쏘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순간,

바숴진 네 두부는 소스라쳐 삼십 보 상공으로 튀었다.

두부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디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의 일만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눕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눕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 스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 사장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 쥐고

왜 열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을까,

죽어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열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잡히는 것 아무 것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 김춘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중 일부

 

가브리엘 천사상 영웅의 광장에 조각되어 있는 조각으로 헝가리 국민들의 선민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헝가리 국민들은 가브리엘 천사가 신에 의탁해 헝가리를 보호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마차시 성당 부다페스트의 명소 중 하나인 마차시 성당의 모습. 18세기 초에 세운 삼위일체상이 유명하며 신고딕 양식의 뾰족탑이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성당의 채색 모자이크 기와 지붕이 무척 화려하고 아름답다.

글로리에터 전경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별궁이었던 쉔부룬 궁전의 뒤편 언덕에 만들어진 글로리에터(글로리아 게이트)

오스트리아 쉔부룬 궁전의 전경 40년 간의 통치로 여인천하 시대를 열었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야심이 그대로 표현된 대궁전. 궁전의 방이 무려 1,441개나 된다.

글로리에터 측면 쉔부룬 궁전의 뒤편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글로리에터의 모습도 가까이에서 보면 매우 웅장하고 아름답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스케일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무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중심가에 위치한 비엔나 중앙 묘지 안의 '음악가 무덤'에 있는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의 무덤과 그 조형물.

모차르트의 초상 천재성과 장난기, 그리고 광기가 느껴지는 모차르트의 초상. 그는 감정의 기복이 심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재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비엔나 현지에 가면 모차르트에 대한 비엔나 시민들의 사랑을 어디에서든지 쉽게 느낄 수 있다.

구스타프 말러 표식 비엔나의 오페라하우스 가는 길에 위치한 '보행자의 거리'에 새겨진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별 모양의 표식

모차르트의 초상 그의 음악은 고귀한 기품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심에 찬 느낌을 잘 표현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의 음악'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또한 그는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전개되는 음악을 만드는 타고난 리듬감을 가지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가족 일찍부터 천재적 재능을 나타냈던 모차르트는 14세가 되기 전에 피아노, 바이올린, 관현악을 위한 많은 곡을 작곡했다. 그의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인식하고 그를 데리고 유럽 전역에 연주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두 아들 모차르트는 결혼을 해서 세 아들을 두었지만 첫아들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잃고 만다. 그림은 둘째아들과 셋째아들이다.

 

죽음이란 우리가 그걸 아주 가깝게 생각한다면, 우리 존재의 참다운 목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최근 몇 해 동안에 인류의 가장 좋은, 가장 진실한 친구인 이 죽음과 대단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죽음의 영상은 제겐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퍽이나 부드럽고 진정으로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죽음이 참다운 행복으로 통하는 문의 열쇠라는 것을 터득할 기회를 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도 젊은 나이에 저는 밤마다 언젠가는 제가 살아 잇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자리에 드는 때가 한 번도 없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줄곧 내가 얼마나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당신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요. 나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을 나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오. 무지무지하게 날 괴롭히는 일종의 공허감 - 일종의 그리움 - 그것은 결코 충족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 것이오. 끈질기게 내게 달라붙어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해질 뿐이라오.

- 병상에 누워있던 부친(1787)과 바덴에서 요양중이던 병약한 아내 콘스탄츠(1791)에게 보낸 편지

 

한 어버이가 자식들을 넓은 세상에 내보낼 때, 가장 훌륭하고 고명한 벗에게 맡겨 보호와 지도를 부탁하는 것은 곧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경애하는 고명한 벗이여! 여기 6명의 자식(하이든 4중주곡의 6편)을 그대에게 보냅니다. 부디 그들의 다정한 친권자가 되어 주시기를…… 이후로 나는 그들에 대한 모든 권리를 당신께 양도합니다.

 

베토벤 초상 섬약한 듯하면서도 강직하고 신경질적이면서도 초인적인 예술혼을 가지고 있던 베토벤의 내성이 잘 드러나 있는 초상화이다.

베토벤 임종시의 초상 베토벤은 1819년 완전한 귀머거리가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작곡하는 일을 멈추지 않던 그는 계속되는 병마와 싸우다가 1827년 세상을 떠난다. 그의 죽음에 대해 온 유럽의 지식인들은 깊은 애도를 표했다. 20,000명의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그의 운구 행렬을 따르던 젊은이 가운데는 슈베르트도 있었다.

 

나의 천사, 나의 전부, 나의 분신이여!

 

오늘은 몇 마디만, 그것도 (그대의) 연필로……

겨우 내일쯤에는 거처가 정해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건 정말 공연한 시간의 낭비입니다……!

숙명적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깊은 고뇌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우리들의 사랑은 희생과 단념 이외에는 아무런 방법도 없을 것인지……. 그대가 나만의 존재가 아니고 내가 그대만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영영 변치 않을 것인지…….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당면한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며, 나는 그대를, 그대는 나를 위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한 마음 한 뜻으로 될 수만 있었던들 나도 그리고 그대도 이렇게 괴로워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여행은 지긋지긋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저께 아침 4시에야 겨우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중략)…….

조만간 만나겠지만 오늘도 이 며칠 동안의 내 생활에 관한 나의 생각을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이 서로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따금 나는 말이란 전혀 쓸모 없는 것이라고 느끼기도 합니다. 명랑한 마음으로…….

내가 그대에게 있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항상 나의 진실하고 유일한 보물, 나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십시오. 그 이외의 것은 무엇이나 신에게 맡길 수밖에 없겠지요.

그대의 성실한 루드비히

베토벤 무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중심가에 위치한 비엔나 중앙 묘지 안의 '음악가 무덤'에 있는 베토벤의 무덤과 그 조형물.

스트라호프 수도원 1126년 세워진 유서 깊은 스트라호프 수도원의 언덕에서 바라본 체코의 수도 프라하 시의 전경.

스테판 성당 체코의 명물 스테판 성당. 체코 가톨릭을 대표하는 성당으로 체코 국민들에게 정신적인 위안을 주는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밀란 쿤데라 체코 사회의 정치적 알레고리를 함의적으로 깔고 있는 작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세계 문단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

체코 대통령 궁 체코의 하벨 대통령이 집무하고 있는 대통령 궁의 정문과 그 조각물.

 

역사의 경우도 개체의 삶에 있어서와 상황이 비슷하다. 단 하나의 체코인들의 역사가 있을 뿐이다. 어느날엔가 그것은 토마스의 삶과 마찬가지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을 것이다. ……보헤미아의 역사와 유럽의 역사는 불행하게도 인류의 무경험에 의해 그려진 두 개의 스케치다. 역사란 개별적인 인간의 삶과 똑같이 가벼운 존재다. 그것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휘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밀란 쿤데라 체코를 대표하는 작가인 밀란 쿤데라는 음대 교수의 아들로 출생했다. 1975년 체코에서 프랑스로 망명, 주로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에도 활발히 번역 출간되고 있다.

영화 <프라하의 봄> 포스터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프라하의 봄> 포스터. 줄리엣 비노쉬, 레나 올린이 상반된 캐릭터인 테레사와 사비나의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틴 성당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틴 성당. 벽공을 향해 솟아 있는 첨탑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코흘 분수 프라하의 대통령 궁 안의 정원에 있는 코흘 분수. 초기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어졌으며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태양을 상징하는 사자가 받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 비투스 성당의 내부 체코 프라하에 있는 성 비투스 성당의 내부 모습이다. 고딕 양식을 적용한, 끝이 맞물리는 아치형의 첨탑(98미터)을 가지고 있는 것이 퍽 인상적인데, 3세기 영국 성인 비투스를 추앙하여 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성 비투스 성당의 외부 프라하 성의 언덕에 우뚝 솟아 있는 프라하 최대의 고딕 양식 건물로 10세기부터 점차적으로 건축이 진행되었다. 우측 중앙의 성 바츨라프(체코의 고대 왕으로 체코의 수호성인 중의 한 사람) 예배당과 좌측 바로 앞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유명하다. 지하에는 찰스 4세를 비롯한 체코 역대 왕들의 무덤이 있다.

하벨 대통령 시인이자 희곡작가로 활동했던 하벨은 첨예한 정치적 상황에서도 소신 있는 입장을 밝혀 체코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다.

카프카 초상 체코 프라하를 세계적인 문학적 수도로 만들어버린 프란츠 카프카. 그의 문학의 본딜은 '결여성'에서 발견된다.

황금골목의 상점 카프카의 막내동생 오트라의 집이 있었던 황금골목에 위치한 상점으로 현재 카프카와 관련된 기념품 등을 관광객들에게 팔고 있다. 역시 프라하의 명소이다.

청년 시절의 카프카 비범했지만 소심해서 평생을 프라하에서 살았던 카프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에 골몰한 채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그는 이 시절 보험회사에 취직하였으나 창작시간이 전혀 나지 않자 그만두기도 한다.

카프카와 그의 누이들 카프카에게는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유독 막내동생 오트라와는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드보르자크 동상 체코 프라하 시내에 있는 드보르자크 음악박물관 정원에 있는 드보르자크의 동상. 조각가 데젠호프의 작품이다.

 

친애하는 친구 S에게

 

내가 편지를 먼저 써야 할 정도로 그대가 오랜 기간 동안 왜 편지를 쓰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먼저 밝힐 것은 최근에 비엔나에 와서 나는 매우 경쾌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비에스바덴 출신인 브람스 박사와 함께 보낸다는 사실 때문이지요. 나는 그동안 그가 그렇게 즐거운 표정을 짓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었어요. 우리는 매일 낮에 만나서 밤늦게까지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보냈지요. 나와 담소를 나누는 것은 브람스 자신을 흡족하게 하는 일인 것처럼 보였소. 그래서 나는 그의 예술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그의 매력을 칭송하게 되었소. 그리고 브람스의 내면에 감추어진 마음과 영혼에 대해 흠뻑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오.

- 드보르자크가 브람스와의 친교에대해 친구 심록(Simrock)에게 보낸 편지

 

드보르자크 음악박물관의 외관 프라하 시내인 카를로뷰 20번지에 위치한 드보르자크 음악박물관의 우아한 모습. 그의 음악세계의 정교함과 섬세함을 그대로 반영한듯한 건축적 조형이다.

드보르자크의 초상 제자들을 가르칠 때 무척 엄격했다고 전해지는 드보르자크는 스메타나와 더불어 체코 음악을 세계에 알린 대음악가이다. 그는 <슬라브 무곡> 등으로 민족 정서를 반영하는 곡을 쓰기도 했고 <신세계 교향곡> 같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찬탄을 표현하는 곡을 남기기도 했다.

브레히트 박물관 표현주의 예술의 거장이며 20세기 연극이론의 기초를 마련했던 브레히트와 그의 아내 헬레나가 함께 살았던, 베를린의 카우세 스트라세 125번지에 위치한 브레히트 박물관.

브레히트와 그의 아들 브레히트와 그의 아들 프랑크의 단란했던 모습. 브레히트는 평생 애용했던 담배를, 아들 프랑크는 과일을 손에 들고 있다.

브레히트와 헬레나 브레히트는 마리아네 초프와 29세 때 이혼하고 만났던 연극배우 출신의 열정적인 여인 헬레나에게 사랑을 느낀다. 브레히트와 헬레나의 다정한 한때.

브레히트의 가족사진 왼쪽이 브레히트이고 가운데가 그의 동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제지공장을 운영하는 중산층이었고 브레히트는 부모의 바람대로 처음에 의대에 진학하지만 곧 문학의 세계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담배를 문 브레히트 평소에 담배를 무척이나 즐겼던 브레히트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사진을 많이 남겼다. 브레히트 박물관에는 그가 애용했던 수많은 재떨이들이 전시되어 있다.

베를린의 국회의사당 가운데 상단부의 투명한 유리 돔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돔을 투명한 유리로 만든 것은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투명한 정치를 펼치자는 독일 정치인들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마르크스 엥겔스 동상 베를린의 국립미술관과 베를리너 돔 근처에 있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 이들이 전개한 '토대와 상부구조', '리얼리즘 소설이론'은 이후 많은 경제학자, 문예비평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베를린 장벽 원래는 동독과 서독 양쪽에서 만든 장벽이 있었으나, 현재는 한쪽 벽만 슈프레 강 주변에 남아 있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벽 위에 그려진 전위예술가들의 그림이 분단의 상흔을 회상케 하고 있다.

베를린판 분서갱유의 역사유 흄볼트 대학 법과대학 앞 광장에 놓여 있는 역사적인 유물이다. 히틀러가 자신의 체제에 동조하지 않은 지성인들의 책을 끌어내어서 불태워버린 것을 고발하고 있다. 투명한 유리창 밑에 빈 서가가 보인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세계 최고의 관현악단으로 키워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푸르트벵글러, 토스카니니 등과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지휘자로 꼽힌다.

포츠담에 모인 세 정상 1945년 6월에 열린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미국 영국 소련의 세 지도자. 왼쪽부터 처칠, 투루먼, 스탈린이다. 처음에는 미국 대표로 루스벨트, 영국 대표로 처칠이 참석했으나 뒤에 투루먼과 애틀리로 바뀌었다.

세칠리엔호프 궁전 역사적인 포츠담 회담이 열렸던 장소로 이곳에서 한국의 독립이 재확인되었다.

쉬로스 세칠리엔호프 호엔촐레른가의 마지막 왕인 빌헬름 1세의 아들 빌헬름 2세의 부인으로 세칠리엔호프 궁전은 그녀의 이름으로부터 나왔다.

포츠담 회담이 열렸던 회담장 독일 베를린의 부란덴부르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1945년 6월 역사적인 포츠담 회담이 시작되었다.

헤겔의 무덤 독일 베를린 공동묘지에 있는 헤겔의 무덤. 헤겔은 평소에 존경했던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의 옆에 묻히기를 원했고, 그의 희망대로 사후에 피히테 곁에 묻혔다.

헤겔의 초상 과묵하지만 사려 깊고 논리적이었던 헤겔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초상이다. 헤겔은 무척 성실한 철학자였으며 그의 생애 동안 점진적으로 자신의 논리를 보완 완성해 나갔다.

횔더린(위)와 피히테(아래)의 초상 헤겔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두 사람. 튀빙겐 대학의 동창이었던 횔더린과 철학자로서의 전범을 보여주었던 피히테.

청년 헤겔의 초상 비록 보잘것 없는 보수를 받으며 예나 대학의 강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청년 헤겔은 이 시절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정립할 기회를 갖는다. 그의 철학은 후일 마르크스 철학의 기본 동력으로 작용해 세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나는 정찰을 위해서 말을 타고 거리를 지나가는 황제-이 세계정신-를 보았습니다. 그러한 개인을 본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기분이며, 그 개인은 한 점에 집중되어 잇고, 마상에 앉아서 세계를 쥐고 그것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목요일부터 월요일까지의 그러한 사태전개는 놀라지 않고는 불가능한, 이 예외적인 개인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 나폴레옹을 접하게 된 것에 감격하여 남긴 글

 

당신이 만약 허락한다면, 나는 당신이 현재의 처지에서보다 대학교육을 위해서 더욱더 활동적인 공헌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사태가 아직 불확실하기 때문에 이 나의 편지가 터무니없고 쓸데없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쓰는 데는 그만한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사랑스럽고 마음씨 고운 처녀와의 관계가 그것이다. 내 행운은 부분적으로 내가 대학에서 한 자리를 얻는다는 조건과 결부된 것이다.

그저께부터 나는 이 사랑의 마음이 나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운을 빌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그녀에게 우선 당신과 당신의 부인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을 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 폰 툭허라고 부른다.

- 1811년 4월 18일 친구 니히트함머에게 보낸 편지

 

너는 나의 것 ! 나는 그녀를 내 것이라 부를 수 있네.

너의 눈짓에서

사랑의 눈짓을 되돌려주는 것을 알겠네.

오 이 기쁨, 오 최고의 행복 !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너는 지금 말할 수 있네.

괴로운 가슴 속에

너무나 오랫동안 몰래 간직했던 것

그것이 이제 내게 큰 기쁨이 되네 !

 

사랑의 황홀은 말이 모자라.

얼마나 그것이 안에서 끓고 넘치는지

표현하기에는 가슴이 벅차

너의 힘이 모자라지.

 

밤에 우는 새야, 나는 네가 부러워

너의 목의 힘으로,

자연도 말하기 어려워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

 

그녀가 입으로 말을 할 때에도

사랑은 축복

결혼의 약속은 없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주고

 

그녀가 그에게 준 깊은 표시,

입맞춤의 깊은 말은

영혼이 닻을 내리는 곳

내 마음 너의 마음 속에 넘쳐 흐르네.

- 헤겔

 

브레히트의 무덤 베를린 공동묘지에 있는 브레히트의 무덤. 브레히트는 사후에 헤겔의 무덤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

고리키 박물관 고리키는 『어머니』 등의 뛰어난 민중소설을 남긴 러시아의 대표적인 민족작가이다. 그는 정치적인 탄압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소신을 지켜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고리키 박물관에 방문객들이 몰려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로마소노프 동상 러시아 최고의 대학인 모스크바 대학을 설립한 로마소노프의 동상.

레닌의 시신 레닌이 죽은 후 후계자 스탈린은 레닌의 우상화 작업에 착수, 권력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다. 레닌의 시신을 방부처리한 후 공개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이다.

담배를 피우는 고리키 고리키는 톨스토이와는 달리 출신성분이 서민계층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생계에 뛰어들어 많은 작업을 전전하였고 이 경험들은 나중에 그의 작품세계에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어린 푸슈킨 초상 푸슈킨은 어린시절부터 감수성이 예민했고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사랑, 우정, 기쁨, 슬픔 등을 언어로 표현해 내는 데 있어 천부적인 시인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푸슈킨 초상 열정적이며 다정다감하고 순수했던 푸슈킨의 초상. 그는 결국 콘체로바라는 여인을 사이에 두고 단테스라는 연적과 결투를 벌이다 목숨을 잃는다.

 

나는 그 경이의 순간을 기억한다.

내가 내 앞에 나타난 그때를

스쳐가는 환영처럼

순수한 아름다움의 정령처럼

 

희망 없는 비애의 그리움 속에서

소란한 조급함의 흥분 속에서

내게 오랫동안 그 부드러운 소리 울렸고

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꿈꾸었다.

- 안나 페트로브나 케른에게 바친 연애시

 

네가 주인이다. 홀로 살아가라.

걸어가라 자유로운 길을,

자유로운 정신이 너를 이끄는 곳으로

좋아하는 생각의 열매를 완성하면서

고귀한 행위에 대한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며,

그것은 너 자신의 내부에 있다.

너 자신이 최고의 심판관이다.

너는 누구보다도 더 엄격하게 자신의 작품을 평가할 수 있다.

- 푸슈킨 「시인에게」

겨울궁전 예카테리나 2세 여왕이 기거하던 겨울궁전은 현재 에르미타쥬 국립 미술관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다. 에르미타쥬 미술관은 세계 3대 미술관의 하나로 230만 점의 소장품을 자랑하고 있다.

황금의 응접실 에르미타쥬 미술관 내부의 황금으로 꾸며진 응접실. 호화롭고 사치스러웠던 왕조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에르미타쥬 미술관 내의 응접실 아치 모양의 장식이 다채롭고 화려한 에르미타쥬 미술관 내의 응접실. 당시 황족이나 귀족들의 미의식과 유행하던 건축 양식 등을 알 수 있다.

압생트를 좋아하는 여인 피카소의 그림으로 에르미타쥬 미술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이 그림은 피카소가 파리에 옮겨온 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이른바 청색시대의 작품에 해당하는데, 푸른색에 대한 그의 독특한 애호는 그의 그림에 고독과, 슬픔, 연민 등의 감정을 불어넣는다.

열매를 들고 있는 여인 폴 고갱의 그림으로 역시 에르미타쥬 미술관의 소장품 중 하나이다. 원초적인 순수의 세계를 찾아 타히티에 정착한 고갱이 그곳의 원주민 소녀를 그린 그림으로 인공의 미가 거세된 순수한 생명의 매력이 잘 드러나 있다.

일리야 레핀이 그린 푸슈킨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러시아 리얼리즘 미술의 대가인 일리야 레핀이 그린 천재 소년 시인 푸슈킨의 초상.

푸슈킨의 신혼집 푸슈킨이 갓 결혼해서 살았던 집. 아르바트 거리에 있다.

 

내가 운명에 대해 경멸을 간직해야 하는가?

내가 운명에 대해서는 고집을

그리고 내 자랑스런 젊음에 대해서는

인내를 지녀야 하는가?

- 푸슈킨

 

푸슈킨과 콘체로바의 동상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푸슈킨과 콘체로바의 동상. 정장 차림인 푸슈킨과 웨딩드레스 차림인 콘체로바의 모습이 이채롭다.

림스키 코르사코프 동상 오페라 <사드코>로 유명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동상. 차이코프스키의 세계화 전략에 맞선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의 상징적인 작곡가이다.

림스키 코르사코프 초상 강직하면서도 위엄을 갖췄던 러시아 민족주의 작곡가 코르사코프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초상화이다. 그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배제했던 차이코프스키보다 러시아 국민에게 더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무소르그스키(위)와 보로딘(아래)의 초상 림스키 코르사코프, 발라키레프, 쿠이와 함께 러시아5인조로 활동, 민족주의 정신을 고취했던 위대한 민족주의 작곡가 무소르그스키와 보로딘의 초상이다.

림스키 코르사코프 부인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부인은 아름다운 것으로도 유명했지만 남편의 음악적 활동을 이해했고 무엇보다 민족음악을 정립하고자 하는 코르사코프의 노력에 동조 적극적으로 권장을 하였다.

작곡을 하는 림스키 코르사코프 말년에 작업실에서 작곡을 하고 있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모습. 그는 말년에 러시아 설화에서 채집한 소재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작곡에 전념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초상 차이코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한 코르사코프와는 달리 주로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외국으로도 활발한 연주여행을 떠났다. 그는 러시아 국내보다는 국외에서 더 많이 알려졌으며 러시아 음악의 세계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차이코프스키의 초상 3개월 간의 짧은 결혼 생활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차이코프스키는 열렬한 팬이었던 나데주다 부인의 금전적 지원을 바탕으로 왕성한 작곡, 연주 활동을 펼치면서 점차 러시아 음악계의 거두로 자리 잡는다.

차이코프스키와 그의 부인 차이코프스키는 밀류브코바라는 여인과 단 한 번 결혼하지만 3개월 만에 헤어지고 만다. 이후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는데 그 때문인지 그에게는 동성애자였다는 의혹이 따라붙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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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6. 12. 9. 15:16 내가 읽은 책들/2016년도

2016-026 신정일의 낙동강역사문화탐사

신정일

2003, 생각의 나무

 

시흥시대야도서관

EM032377

 

981.102

신746낙

 

탐사와 산책 19

 

사라진 강 길을 따라 홀로 떠난 낙동강 천 삼백 리 역사찾기의 도정

 

물의 가르침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물을 마셔라.

선종

 

강대국이 강의 하류와 같다면, 모든 것이 그에게 흘러 갈 것이다. 그에게서 세상의 여성적인 것이 구현될 것이며, 여성적인 것은 잔잔함을 통하여 영원히 남성적인 것을 이길 것이다.

- 노자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 괴테 『파우스트』에서

 

차례

 

추천의 글 임재해

길머리에

 

제1구간 낯선 곳에선 길을 물을 사람도 없다 _너덜샘에서 단천리까지

 

1일 강물이 흐르듯 내 마음도 따라 흐르고

      흔들리며 홀로 떠난다 | 너덜샘에 비가 내리고 | 황부자의 전설이 서린 황지

      낙동강 천삼백 리 예서부터 시작되다 | 구무소를 지난 강물 | 여울져 흐르는 강물이 석포에 접어들고

      전화는 불통이고 빈집들만 남아 있다 | 죽느냐 사느냐 그게 문제로다 | 정향사에는 스님의 그림자도 없다

 

2일 길을 물을 사람도 없는데

      풍애터널을 통과하다 | 모든 나무의 으뜸인 춘양목 | 걸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을 | 삶도 죽음도 도처에 있다

      삶도 죽음도 도처에 있다 | 낯선 곳에선 길을 물을 사람도 없다 | 혼자서 가라, 그 길을 | 합강 나루엔 빈 배만 매어 있고

 

3일 청량산 자락을 흘러가는 낙동강

      청량산에서 바람이 소리를 만나다 | 바위 봉우리가 연꽃잎처럼 벌어져 있고 | 욕심 많은 자도 청렴해지는 산

      선비의 고장 안동에 접어들다 | 길이란 무엇인가 | 넓고도 넓은 낙동강을 건너다

 

제2구간 흐르는 저 강물 천리를 흐르는데 _단천리에서 삼강 나루까지

 

4일 안동댐을 지나 병산서원으로 가는 물길

      낙동강에서 물수제비를 뜨다 | 도산서원 앞으로 낙동강은 흐르고

 

5일 작살로 찔렀다 하면 은어가 올라오고

      작살로 찔렀다 하면 은어가 올라왔다 | 배나들에는 주진교가 떠 있고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임청각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다

      왕건과 견훤의 싸움터였던 안동 | 하늘로 흐르는 강 | 고구려식이라는 봉정사 극락전

     요사채로 남은 고금당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낙동강 변에는 메밀꽃들이 피어 있고 | 병산서원에서의 하룻밤

 

6일 하회 앞에서 물은 휘돌아간다

      만대루에 올라서서 낙동강을 굽어보다 | 그토록 맑은 물에 우뚝 솟은 절벽 | 연화부수형 하회 마을

      가버린 옛시절이 떠오르는 낙동강 | 한사코 길이 없다고?

 

제3구간 시간이 있거든 강물을 보고 배우시게 _삼강 나루에서 고령교까지

 

7일 한 배 타고 세 강을 건너던 삼강 나루

      내성천과 금천이 합쳐지는 곳 |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 | 비경 중의 비경 | 의성포 물도리동 | 꽃게 나루엔 배가 없다

      낙동강의 제일 절경 경천대 | 길만 나 있어도 행복하다 | 문득 바람이 세차게 일어나고 | 내가 오늘 갈 것이다

      나각산에 설치된 뱀 그물 | 낙동강에서 제일 큰 낙동 나루 | 신라 최초의 절 도리사 | 바람 부는 강변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8일 두 갈래 길에서 흔들리는 내 마음

      낙동강이 안개 속에 숨어 있고 | 인재의 고장 선산 | 신검이 진을 쳤던 송림 | 두 갈래 길에서 내 마음은 흔들리고

     페놀사태와 낙동강 | 길은 포기하는 순간 없어지고 | 워커라인으로 불렸던 낙동강 방어선 | 왜물고

      퍼내도 펴내도 생기는 모래

 

9일 비를 맞으며 걷는 강길

      젊은 사람이 오토바이도 못 타 | 낙동강의 오염벨트 대구 일대 | 어느 날 문득 강이 내게로 왔다

 

제4구간 한가함보다 즐거운 것은 없다 _고령교에서 삼랑진 나루까지

 

10일 내가 가는 길은 순탄치 않다

      지도 위에도 길은 없다 | 현풍에서 비슬산을 바라보다

      낙동강은 푸른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하고 | 홍의 장군 곽재우가 잠든 곳

      참을 수 없는 집의 가벼움 | 최치원이 즐겨 놀았던 청량사

      해인삼매에서 유래된 해인사 | 오광대놀이가 시작된 율지 나루 | 우포늪이 멀지 않다

 

11일 정암 사공아, 뱃머리 돌려라

      박진나루엔 빈 배만 매어 있고 | 낙동강으로 남강이 접어들다 | 고려 말의 혁명가 신돈이 태어난 곳

      세상을 내려다보는 용선대의 부처님 | 본포 나루에서 해가 저물다

 

12일 길은 없다, 그러나 길은 있다

      아침 강에 피어오르는 물안개 | 철새들의 낙원 주남 저수지 | 밀양강이 낙동강에 몸을 풀고

      강낭콩보다 푸른 절개

 

제5구간 낙동강은 그래도 낙동강이다 _삼랑진에서 을숙도까지

 

13일 뒷기미 나리는 눈물의 나리

      까마귀 두 마리를 잡은 사내 | 물금 나루에서 강은 바다와 같다 | 불보사찰 통도사

      금관가야의 중심지, 김해 | 눈에서 멀면 마음에서도 멀다 | 구포 나루는 흔적도 없고 | 낙동강에 그래도 희망은 있다

 

참고문헌

 

나는 걸르면서 나의 가장 풍요로운 생각들을 얻게 되었다.

걸으면서 쫓아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이란 하나도 없다.

- 키에르케고르

 

훌쩍 떠나온 것이 나는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네!

친구여! 인간의 마음이란 대체 어떠한 것일까?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헤어지길 섭섭해 했던

자네 곁을 이렇게 떠나와서는 기쁨을 느끼고 있다니!

-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의 첫 구절

 

발원지 태백시 화전동에서 정선군 고한읍으로 넘어가는 싸리재를 사이에 두고 금대봉과 함백산 사이 천의봉 너덜샘에서 낙동강이 발원한다.

한국에서 제일 높은 역 추전역에는 일반 객차가 쉬지 않는다. 다만 대처로 실려 가기 위한 석탄만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며 그 때문인지 온 천지가 시커멓다.

 

경상도의 낙동강은 태백산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서 한 도[一道]의 중간을 그었으며, 또 동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태백산 동쪽 줄기는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흐르고 서쪽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으로 꺾어지며, 남쪽은 지리산에 이르고 다시 동쪽으로 가서 김해에 이른다. 경상도의 한 도는 모두 한 수구水口를 이루니, 낙동강은 상주 동쪽을 말함이다. 낙동강의 상류와 하류는 비록 지역에 따라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통틀어 낙동강이라 부르며, 이 강은 '가야진伽倻津'이라고도 한다. 강 동쪽은 좌도左道가 되고, 강 서쪽은 우도右道가 된다. 고려 때에는 이 강과 호남의 섬진강과 영산강을 배류背流한 삼대강三大江이라고 하였다.

- 이긍익 『연려실기술』 「지리전고」 낙동강에 대해

 

황수黃水는 태백산 황지에서 시작한다. 서남으로 흘러 3백 리 함창에 닿고 동으로 굽이쳐 남으로 또 3백 리 함안에 이른다. 북향으로 꺾어 동류東流 1백 리 김해의 동북 황산포구에 이른다. 여기서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낙동이라 함은 가락의 동쪽이라는 말이다.

- 다산 정약용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 낙동강에 대해

 

태백산의 황지는 산을 뚫고 남쪽으로 나와서 봉화奉化에 이르러 매토천買吐川이 되며, 예안禮安에 이르러 나화석천羅火石川이 되고 손량천損良川이 된다. 또 남쪽으로 흘러 부진浮津이 되며, 안동安東 동쪽에 이르러 요촌탄寥村灘이 되며, 물야탄勿也灘이 되고 대항진大項津이 된다. 영양英陽 · 진보眞寶 · 청송靑松의 여러 냇물이 모두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 용궁龍宮의 비룡산秘龍山 밑에 이르러 하풍진河豊津이 된다. 풍기豊基 · 순흥順興 · 봉화奉和 · 영천英川의 물은 합하여 예천禮泉의 사천沙川이 되고, 문경聞慶 · 용연龍淵 · 견탄犬灘의 물은 남쪽의 함창咸昌에 와서 합쳐 곶천串川이 된다.

상주 북쪽에 이르러 송라탄松蘿灘이 되며, 상주 북쪽 동북 35리에 이르러 낙동강이 되며, 의성義城 · 의흥義興 여러 냇물은 군위軍威 · 비안比安을 거쳐 와서 합쳐진다. 선산善山 북쪽에 이르러 견탄이 되며, 선산부善山府 동쪽에서는 이매연이 되고 여차니진餘次尼津이 되며, 선산부 동남쪽으로 보천탄寶泉灘이 되었다. 속리俗籬 · 황악黃岳 동쪽 물은 지례知禮의 감천甘川이 되어 금산金山 · 개령開寧을 거쳐 합친다.

인동仁同 서쪽에 이르러 칠진漆津이 되며, 성주星州 동쪽에 이르러 소야강所耶江이 되고 동안진東安津이 되니, 곧 대구 서쪽 경계이다. 영천永川 · 신령新寧 · 하양河陽 · 자인慈仁 · 경산慶山과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다시 합친다.

초계草례溪 동쪽 창녕昌寧 서쪽에 이르러 감물창진甘勿倉津이 되며, 거창居昌 덕유산德裕山 동남쪽 여러 냇물은 합하여 합천陜川의 남강南江이 되고, 또 초계의 황둔진黃芚津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가서 합한다.

영산靈山 서쪽에 이르러 기음강岐音江이 되어 촉석강矗石江과 합하여진다. 영산의ㅣ 기음강에 이르러 낙동강과 합하고, 칠원漆原 북쪽에 이르러 모질포毛叱浦가 된다. 이 물은 다시 흘러서 매포買浦가 되는 것이니, 이것을 무포라고도 한다. 창원昌原 북쪽에 이르러 주물연진主勿淵津이 되며, 밀양 남쪽 30리, 김해 북쪽 50리 경계에 이르러서 뇌진磊津이 되는데, 이속은 해양강海陽江이라고도 한다. 청도淸道와 밀양의 물은 응천凝川이 되어서 영남루嶺南樓를 남쪽으로 돌아서 합쳐진다.

또 동쪽으로는 삼랑창三浪倉이 있고 남쪽으로 흘러 왕지연王池淵 황산강黃山江이 된다. 또 남쪽으로 양산梁山의 동원진東院津이 되며, 또 남쪽으로는 세갈래 물이 되어서 김해부金海府 남쪽 취량鷲梁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 이긍익 『연려실기술』 지리전고에 낙동강에 대해

 

이정표 누구도 흐르는 물과 내 발걸음을 중단시키지 못할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낙동강의 하구인 을숙도에 도착할 것이다.

 

때로는 산봉우리에 내리는 눈이 되어 때로는 서리나 이슬이 되어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 물의 성질이라 아무도 그 뜻을 막을 수 없다.

- 게오르그

 

강물

 

오세영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의 격류도

소에선 쉴 줄을 안다.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이른다.

텅 빈 마음이 충만에 이른다.

 

푸르고 푸른데 어찌 태백이라 하였던가. 그 위에 당집을 짓고 천왕이라 이름하였네. 신라 고려 때부터 숭상하여 믿었고, 모두 무당과 박수의 도회로세. 저 동쪽을 바라보니 팽나무도 많고 저 남쪽을 돌아보니 크고 높은 언덕도 많네.

- 『삼척진주지』 「척주부」에서 태백산에 대해

 

천하의 명산이 삼한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쪽이 가장 뛰어나며, 동남쪽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태백

- 최선(고려 때)의 예안 『용수사기』에서 태백산에 대해

 

멀고 아득한 태백산을 서쪽에서 바라보니, 기암괴석이 구름 사이에 솟아있네. 사람들은 신령님의 영험이라 말하는데 분명코 천지의 조화로세

- 매월당 김시습 「망태백산望太白山」

 

구무소 메밀뜰 마을을 지나 혈내촌에 다다르면 그곳에 구무소가 있다. 강이 산을 뚫고 지나가는 도강산맥이라는 세계적으로 진귀한 지형인 구무소는 '구멍' '굴'의 고어인 '구무'와 늪을 뜻하는 '소'가 어우러져 지어진 이름이다.

구무소 위의 정자 나는 구무소를 바라보며 "천하에 물보다 더 유약한 것은 없지만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는 이보다 앞설 것이 없다. 천하의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가장  딱딱한 것을 부린다"는 노자의 『도덕경』을 떠올린다.

 

그칠 줄 모르는 시냇물 같이

시간은 그 시간의 아들들을 싣고

떠나가 버린다

시간의 아들인 만물은 동트면 사라지는 꿈과 같이

망각의 피안으로 옮겨간다

- 『시간의 정복』을 지은 웰즈

 

누구 한 사람 알아주는 이 없는 인파 속을 헤집고 다닐 때만큼 고독을 느끼는 경우도 없다고

- 괴테 『이탈리아 기행』에서

 

천천히 삶을 즐겨라, 너무 빨리 달리면 경치만 놓치는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도 놓치게 된다

- 에디캔터

 

걱정의 40퍼센트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의 30퍼센트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22퍼센트는 사소한 고민이다. 걱정의 4퍼센트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4퍼센트는 우리가 바꿔놓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거이다

- 어니 젤린스키 『모르고 사는 즐거움』에서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잇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죽음이란 저기 또는 여기에 있지 않고 모든 길 위에 있다. 너의 그리고 나의 내면에 깃들어 있다.

- 헤르만 헤세

 

삶이 때때로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지만 삶의 시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그 삶은 언제나 매일 매일 다시 시작된다.

- 장 그르니에 『지중해의 영감』 중에서

 

근심할 것과 근심하지 말 것을 분별케 하소서, 조용히 앉아 있기를 가르쳐 주소서.

- T. S. 엘리엇

 

찬란한 노을이 아름다워도 잠깐 사이에 스러지고 만다. 흐르는 물 소리가 듣기 좋지만 들을 때 뿐 듣고 나면 그뿐이다. 사람이 찬란한 노을을 통해 여생을 헤아린다면 허물이 가벼워지리라. 사람이 흐르는 물에서 거문고 소리를 들을 수 잇다면 정신에 유익함이 있게 되리라

- 도륭(명나라 때 문인) 『파라관청언』

 

나는 걸으면서 나의 가장 풍요로운 생각들을 얻게 되었다. 걸으면서 쫓아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이란 하나도 없다.

- 키에르케고르가 1847년 제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든 여행은 그 속도가 정확하게 결정되는 것에 따라 지루해진다.

- 러스킨(영국의 예술비평가)

 

책을 불살라 버려라. 강변의 모래들이 아름답다고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원컨대 그것을 맨발로 느끼고 싶은 것이다. 어떠한 지식도 감각을 통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면 아무런 값어치가 없다.

- 앙드레지드

 

분천역

갓바위 갓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갓바위라고 부르는 낙동강 가에는 깊디 깊은 갓바우 소가 있고 갓바위 다리를 지나자 음내마을에 이른다.

 

강물이 될 때까지

 

신대철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흐린 강물이 흐른다면

흐린 강물이 되어 건너야 하리

 

디딤돌을 놓고 건너가려거든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디딤돌은 온데 간데 없고

바라볼수록 강폭은 넓어진다

우리가 우리의 땅을 벗어날 수 없고

흐린 강물이 될 수 없다면

우리가 만난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디딤돌이다

 

그리고 강물 소리는 불타는 듯한 그리움과 탄식과, 아무리 해도 멈출 줄 모르는 욕구로 가득 차서 울려왔다. 강물은 목표를 향해 애쓰며 나아가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 강물이 바삐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자신과 그의 육친과 그가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 강물은 황급히 흘러갔다. 모든 물결은 고뇌하며 목표를 향해 빠르게 흘러갔다. 그것들은 수많은 목표를 향해, 폭포를 향해, 호수를 향해, 여울을 향해, 그리고 대해를 향해 흘러갔다. 그리하여 모두가 목표에 도달하지만 거기에서 다시 새로운 목표를 향해 흘러가는 것이다. 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오르고, 비가 되어 다시 떨어져 샘물이 되고, 시냇물이 되고, 다시 강물이 되어 거듭거듭 새로운 목표를 향해서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움에 찬 소리는 변했다. 그 소리는 여전히 고뇌하고 그리워하는 음색이었지만, 거기에는 다른 소리들이 섞여 잇었다. 기쁨과 슬픔의 소리, 선한 소리와 악한 소리, 웃음소리와 탄식의 소리,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소리들이 뒤섞여 있었다.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도보로 산책하는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혼자여야 한다. 단체로, 심지어 둘이서 하는 산책은 이름뿐인 산책이 되고 만다. 그것은 산책이 아니라 오히려 피크닉에 속하는 것이다. 도보로 하는 산책은 반드시 혼자 해야한다. 왜냐하면 자유가 그 내재적 속성이기 때문이고 마음 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멈추거나 계속하여 가거나 이쪽으로 가거나 저쪽으로 가거나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걷기 챔피언 옆에서 뛰다시피 따라 걷거나 데이트하는 처녀와 함께 느릿느릿 걷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보조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 스티븐슨

 

확신하거니와, 내가 만약 산책의 동반자를 찾는다면 나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교감하는 어떤 내밀함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나의 산책은 분명 더 진부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취미는 자연을 멀리함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산책에서 얻게 되는 저 심오하고 신비한 그 무엇과도 작별인 것이다.

-소로

 

발걸음의 문화는 덧없음의 고뇌를 진정시켜 준다. 걸어서 하루에 30킬로미터를 갈 때 나는 내 시간을 일 년 단위로 계산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3천 킬로미터를 날아갈 때 나는 내 인생을 시간 단위로 계산한다.

- 레지스 드브레

 

해동 여러 산중에 웅장하기는 두류산(지금의 지리산0이고 청결하기는 금강산이며 기이한 명승지는 박연폭포와 가야산 골짜기다. 그러나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밝으면서도 깨끗하며 비록 작기는 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청량산이다.

- 주세붕(조선조) 「청량산록」에서 청량산에 대한 예찬

 

청량산 옥류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헌사하랴 못 믿을 손 도화로다. 도화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 알까 하노라.

- 퇴계 이황

 

이 산은 둘레가 1백 리에 불과하지만 산봉우리가 첩첩이 쌓였고 절벽이 층을 이루고 있어 수목과 안개가 서로 어울려 마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또 산봉우리들을 보고 있으면 나약한 자가 힘이 생기고, 폭포수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욕심 많은 자도 청렴해질 것 같다. 총명수를 마시고 만월암에 누워 있으면 비록 하찮은 선비라도 신선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 주세붕 「청량산 예찬」

 

길가의 무덤

 

길가에 외로운 무덤이 하나

자손들 지금은 어디에 있나.

- 김상헌 「노방총路倣塚」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물을 안다는 것은 우주와 대자연, 생명의 모든 것을 아는 것과 같다.

- 에오토 마사루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쾌락은 우리를 스스로에게서 멀리 떼어놓는다.

그런데 여행은 우리를 제자리로 데리고 가는 하나의 고행이다.

- 카뮈

 

청포도

 

이육사

 

내고장 칠원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흠뻑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전교당 도산서원 앞에 있는 전교당은 보물 제210호로 지정되었다.

도산서원 도산서원이 세워진 것은 선조 7년이었다. 서원을 창건하여 퇴계 이황을 배향하고, 그 다음 해에 사액을 받았다.

시사단 서원을 나와 낙동강을 보면 강 한 가운데에 작은 집 한 채가 서 있다. 시사단이라 부르는 이곳은 1792년 3월에 정조영남사림을 위해 도산서원 앞에서 과대인 별시를 베풀었던 것을 기념하여 단을 쌓고 정자를 세운 곳이다.

 

흐르는 저 강물 삼천 리나 되는데 집에서 온 편지는 겨우 열 다섯 줄

줄마다 줄마다 별다른 말 없고 고향으로 어서 돌아오란 말뿐.

- 원개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내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성경

 

안동댐 내리는 비를 맞으며 안동댐을 바라본다. 안동댐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 중가구리의 낙동강 본류를 가로막은 다목적댐이다.

안동기념탑 1971년에 착공된 안동댐은 우리나라 최초의 양수 겸용 발전소이다.

신세동 7층전탑 법흥동 중앙선 열차가 지나는 곳에 나라 안에서 제일 큰 신세동 7층전탑이 있다.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이 탑은 통일신라 전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뜻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임청각 보물 제182호로 지정된 임청각에 올라서 바라보면 멀리 낙동강이 보이고 동쪽의 작은 연못에는 수련이 피어 있다. 김수근은 이 집을 가리켜 '인간적인 치수를 반영하여 지은 집'이라고 극찬했다.

의성 김씨 종가 보물 제450호로 지정된 의성 김씨종가는 일반 형식에 궁전 형식을 덧보탠 것으로 고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비원 석불 신라 때 도선국사가 새겼다고 전해지는 이 석불은 11미터 높이의 화강암 암벽을 이용하여 몸통을 만들고 2미터 높이의 바위로 부처의 머리를 만들었다.

 

매년 음력 정월보름 열엿새에 부 내에 사는 사람들이 부의 중앙에 있는 내를 경계선으로 하여 좌우편으로 패를 나누어 돌을 던져서 서로 싸워 승부를 결정한다. 정오년 왜적을 토벌할 때 석전을 잘하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선봉으로 삼았더니 적이 감히 전진해 오지 못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석전에 대해

 

영호루 언제 지어졌는지 알 길이 없는 영호루에서 공민왕은 뱃놀이를 즐겼다.

봉정사 극락전 천등산 기슭에 있는 이 절에는 빼어난 문화재들이 보석처럼 숨어 있다.

 

어녀윤에 청계상에 놋다리야 놋다리야. 이 터이는 누터이로 나라님의 옥터일세

- 놋다리 노래

 

개목사 영산암에서 등산로를 따라 고개를 넘어가면 개목사에 닿는다. 인삼밭 너머로 살며시 몸을 드러낸 개목사는 신라시대 의상이 창건한 절이다.

 

안동부 서쪽 30리쯤 천등산 기슭에 절이 있어 봉정사라 일걸으니 절이 앉은 자세가 마치 봉황이 머물고 있는 듯하여 이와 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됐다. 이 절은 옛날 능인대덕이 신라 때 창건하고 이후 원감, 안충 등 여러 스님들에 의해 여섯 차례나 중수되었으나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1363년(공민왕 12년)에 용수사의 대선사 축담이 와서 중수했는데 다시 지붕이 허술해져서 수리하였다.

- 봉정사 극락전 상량문

 

마애동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바위에 새긴 부처가 있으므로 마애 또는 마라라고 부르는 마애리의 소나무 숲에는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17호인 마애동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고 마애불 앞에는 진성 이씨가 그 조상 이돈과 이희보 부자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산수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낙동강

 

안도현

 

저물녘 나는 낙동강에 나가

보았다, 흰 옷자락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오래 정든 하늘과 물소리도 따라가고 있었다

그때 강은

눈 앞에만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 이마 위로도 소리 없이 흐르는 것을 알았다

 

어릴 적의 신열처럼 뜨겁게,

어둠이 강의 끝부분을 지우면서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낡은 목선을 손질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그물 한 장을 주셨다

 

그러나 그물을 빠져 달아난 한뼘 미끄러운 힘으로

지느러미 흔들며 헤엄치는 은어떼들

나는 놓치고, 내 살아온 만큼 저물어가는

외로운 세상 강변에서

문득 피가 따뜻해지는 손을 펼치면

 

빈 손바닥에 살아 출렁이는 강물

아아 나는 아버지가 모랫벌에 찍어 놓은

발자국이었다. 홀로 서서 생각했을 때

내 눈물 웅얼웅얼 모여 흐르는 낙동강

그 맑은 마지막 물빛으로 남아 타오르고 싶었다

 

 

먼 훗날 다시 낙동강에 나갈 때 아우야 강물이 스스로 깊어진 만큼

우리도 내아가 부끄럽지 않고 서글프지 안은 물줄기 이루었을까.

- 안도현 「다시 낙동강」에서

 

병산서원  서원은 본래 선현을 제사하고 지방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거나 후진들을 가르치던 곳이었으나 갈수록 향촌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사림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제 병산서원은 우리 나라내로라 하는 다른 서원과 비교해 보면,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은 그 구조가 복잡하여 명쾌하지 못하며 회재 이언적李彦迪의 안강 옥산서원은 계류에 앉은 자리는 빼어나나 서원의 터가 좁아 공간 운영에 활기가 없고, 남명 조식의 덕천서원은 지리산 덕천강의 깊고 호쾌한 기상이 서렸지만 건물 배치 간격이 넓어 허전한 데가 있으며, 환훤당 김굉필의 현풍 도동서원은 공간 배치와 스케일은 탁월하나 누마루의 건축적 운용이 병산서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흠이 있다. 이에 비하여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혼연히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것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유홍준

 

유성룡 씨 고택 유성룡은 총명했지만 정여립 같은 과격한 성품은 아니었고, 동인과 서인이 첨예하게 맞서 있을 때에도 동인에 속해 있었지만 서인에게도 항상 온건한 태도를 취했다.

 

천자가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했다. 학문을 열심히 익혀 종일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몸을 비틀거나 기댄 적이 없으며, 남들을 대할 적에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고 말수가 적었다.

- 실록의 사관의 유성룡에 대한 평가

 

하회 마을 안동 하회 마을은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민속마을로 중요 민속자료 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회 장승 하회 마을은 조선 전기 이후 전통적 가옥군의 존재와 영남의 명기라는 풍수적 경관과 아울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유은룡 고택 하회 마을에서 유서 깊고 규모가 갖추어져 보물 또는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된 가옥들은 모두 풍산 유씨의 소유이다. 그중에서도 유운룡과 유성룡의 유적이 중추를 이루고 잇어 유씨 동족마을의 형성시기와 역사적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부용대 부용대는 저우리 동쪽 낙동강 가에 있는 대로서, 60미터가 넘는 기이한 바위가 깎아지른 듯 병풍같이 서 있다.

 

다시 낙동강

 

안도현

 

아우야

우리가 흰 모래밭 사금파리 반짝이는 소년이었을 때

앞서거니 뒤서거니 땅으로만 기어 흐르던 낙동강이

오늘은 저무는 경상도하늘 한 끝을 적시며 흐르는구나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말로

강물이 하나의 회초리라는 것을

우리 어린 종아리에 감기던 아버지 싸리나무 푸른 매

강물도 하회 부근에서 들판의 종아리를 때리며 가는구나

아우야

아버지 수십 년 삽질로도 퍼내지 못한 낙동강이

아직 철들지 않은 물고기들 하류로 풀어 보내며

조심하여라 조심하여라 웅얼대는 소리 듣느냐

아버지 등줄기에 흐르던 강물 보았느냐

그 곳을 거슬러 올라 헤엄치던 어린 날 우리는

그렇지 한 마리씩 빛나는 은어였을 것이다

 

먼 훗날

다시 낙동강에 나갈 때 아우야

강물이 스스로 깊어진 만큼 우리도

나이가 부끄럽지 않고 서글프지 않은 물줄기 이루었을까

저무는 강가에 아버지가 되어

푸른 매가 되어 돌아와 설 수 있을까

아우야

 

 

삶은 대단한 모험이다. 그런 삶이 아니라면 시간의 헛된 흐름일 따름이다.

- 헬렌 켈러

 

……중얼거린다. 무엇이 그를 이곳까지 질질 끌고 왔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도 못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 기형도 「여행자」

 

길은 또 없다! 주위는 심연! 그리고 죽음의 정적! 너는 그것을 바랐고 너 자신의 의지에 따라 길을 버렸다. 이제야말로 방랑자여, 냉정하고 명쾌하게 보아야 한다! 너에게는 파멸이 있을 뿐-만일 네가 위험의 존재를 믿는다면.

- 니체 『즐거운 지식』에서 토로한 방랑자

 

무엇을 찾아 노력하는 사람은 방황하게 되고,

방황하는 사람은 결국 잘못을 저질러도 구원받는다.

- 괴테

 

고향을 알기 위해서는 타향으로 가야한다.

- 프란츠 카프카

 

서산에 해지기를 기다리느냐

인생이 꿈 같은 걸 알고 있느냐

- 영화 <꿈>

 

부석사 내성천의 지류 중 하나인 낙화암천 끄트머리에 부석사가 있다. 부석사는 어느 때 어느 계절에 가든 항상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절 중의 절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하룻밤을 지내며 겨우 몇 시간 머무른 내가 부석사의 무엇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선묘 낭자의 의상을 향한 사랑도 무량수전 뒤편의 뜬 돌이나 무량수전 앞의 석등에서 바라보는 안량루도 그리움으로만 남겨 두어야지.

금성단 부석사 부근 소수서원 근처에 있는 금성단은 세종대왕의 여섯 째 아들이고 세조의 동생이었던 금성대군을 제사지내는 곳이다.

의성포가는 철다리 철다리를 건너면 천하 비경 물도리동에 닿는다. 아직까지 강물은 유유히 흐른다.

내성천의 회룡포 물도리동 내성천은 봉화군 물야면 북쪽 선달산과 옥석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봉화면 포저리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여 흐른다.

장안사 내성천을 건너면 비룡산이 한 눈에 들어오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1킬로미터쯤 올라가면 이곳 사람들이 남산절이라 부르는 장안사가 있다.

공갈못 노래비 고령 가야국 시대에 축조된 공갈못에는 '상주함창 공갈못 노래'가 전해온다.

 

상주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줄게

이 내 품에 잠자주소

잠자기는 어렵잖소

연밥 따기 늦어가오

상주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큰아가

연밥 줄밥 내 따줌세

백년 언약 맺어다오

백년 언약 어렵잖소

연밥 따기 늦어진다

- '상주함창 공갈못 노래'

 

경천대 크지 않은 소나무 숲이 우거진 경천대 국민 관광지

 

감나무는 한국 · 중국 · 일본 밖에서는 아무리 옮겨 심어도 살지 않는, 고집 있고 주체성이 대단한 동양의 나무다. 그래서인지 감나무를 칭송하는 예찬도 많다. 이를테면 감나무에는 사람이 따를 수 없는 오절 · 오상이 있다 했다. ① 수 - 몇백 년을 사니 목숨이 길고 ② 무조소無鳥巢 - 새가 깃을 들이지 않으며 ③ 무충 - 벌레가 꾀질 않고 ④ 가실嘉實 - 열매가 달길 그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⑤ 목견木堅 - 나무가 단단하길 역시 비길 나무가 없다는 것이 감나무의 오절이다. 또 단풍 든 감나무 잎을 시엽지枾葉紙 또는 자연전自然箋이라 하여 글쓰는 종이가 되므로 '문'이 있고, 또 나무가 단단하여 화살촉으로 쓰였다 하여 '무'가 있으며, 만천하의 과실 가운데 속과 겉이 다르지 않고 똑같이 붉은 것은 감밖에 없다 하여 표리부동의 '충'이 있고, 이빠진 노인도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과실이라 하여 '효'가 있으며, 또 서리를 이기고 만추까지 유일하게 버티니 '절'이 있다 했다. 문 · 무 · 충 · 효 · 절. 이것이 감나무의 오상五常이다. 또한 나무가 검고(흑) 잎이 푸르며(청) 꽃이 노랗고(황) 열매가 붉으며(적) 말린 곶감에서 흰가루(백)가 난다 하여 오색 · 오행 · 오덕 · 오방을 두루 갖춘 유일한 나무라 하여 우러러보기도 했다.

- 이규태, 감나무에 대하여

정기룡 경천대 남쪽 2백 미터 지점에는 바위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정기룡 장군이 이곳에서 용마를 타고 훈련하겠다고 전해진다.

화달리 삼층석탑 조촐하지만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사벌국 왕릉 옆에 신라 탑의 모습을 지닌 화달리 삼층석탑이 있다.

사벌국 왕릉 사벌면 화달리에 있는 사벌국의 왕릉은 정사에서는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고 야사에만 등장한다.

 

가장 뚜렷한 침묵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을 열고 얘기를 하는 것이다.

- 알베르 카뮈

 

인각사 선덕여왕 11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인각사에서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봄날의 구름은 산이라야 걸맞고, 여름 구름은 나무라야 어울린다. 가을 구름은 흐르는 물 위에, 겨울 구름은 드넓은 들판이라야 제격이다.

- 오종선 「소창지기」의 한 구절

 

낙동나루의 관수루 옛 시절의 낙동나루는 영남 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용무를 보러 가거나 과거를 보러 갈 때 꼭 거쳐야 하는 중요한 길목 중 하나였다.

 

백만 번이나 굽어진 푸른 산 속에

한가하게 행하여 낙동을 지난다

풀이 깊으니 아직도 이슬이 있고

솔이 고요하니 스스로 바람없는 것이다

가을 물은 오리 머리같이 푸르고

새벽놀은 성성의 피같이 붉도다

게을리 노는 손이 사해로 떠도는 한 시옹詩翁인 것을 누가 알리!

- 이규보

 

황지의 근원 물은 겨우 잔에 넘치는 데

냅다 흘러 예 와서는 넓기도 한지고

한 줄기에 예순 고을이 갈리고

나루 곳곳엔 돛대가 너울 너울

바다까지 곧바로 내려가길 사백 리

관풍에 왕래하는 장사꾼 배들

아침에 월파정을 떠나

저녁에 관수루에 묵네

누각 아래 배에서는 천만량을 실었으니

남민들이 혹독한 조세를 어찌 견디리

쌀독은 비고 도토리 밥도 없는데

강가에선 노래와 풍류 살찐 소를 잡는구나

나라의 사신들은 유성과 같건마는

강가의 해골들은 누가 허물이나 묻겠는가

- 김종직 '낙동요'

 

삶이 반복이며 삶의 아름다움이 반복에 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살하며 (그에게 갑자기 닥쳐왔듯이) 파멸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희망은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과일처럼 손짓하며 기억은 충분하지 않은, 쪼들리는 여비이지만 반복은 축복으로 만족시켜주는 매일매일의 빵이기 때문이다. 생을 마감하게 될 때면 그 사람이 삶은 반복이며 반복을 기다리는 기쁨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가 드러난다.

- 키에르케고르 반복의 개념에서

 

갈꽃이 피면

 

송기원

 

갈꽃이 피면 어이하리

함성도 없이 갈채도 없이, 산등성이에

너희들만 눈부시면 어이하리

눈멀고 귀 멀어 하얗게 표백되어

너희들만 나부끼면 어이하리

아랫녘 강어귀에는 기다리는 처녀

아직껏 붉은 입술로 기다리는 처녀

 

도리사 어느 날 신라의 스님 아도가 경주에 갔다가 돌아와 냉산 밑에 이르니 눈 덮인 겨울이었는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해 있었다. 아도 스님은 그곳에 절을 짓고 그곳을 '도리사'라 불렀다.

도리사 석탑(위)과 도리사 사리탑(아래) 1977년, 도리사에서 세모 사리탑이 발견되면서 도리사는 전국 불교 신자들의 명소가 되었다.

 

도리사 앞에는 도리꽃 피었더니

묵호자 가버린 뒤 아도가 왔네

뉘 알리요, 빛나던 신라 때 모습

모례의 움집 속엔 재뿐인 것을

- 김종직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노신

 

낙산동 고분 이곳에는 2~6세기에 만들어진 가야 · 신라시대의 고분인 2백5기의 무덤이 있다.

죽장동 5층석탑 선산읍 법륜사에 있는 죽장동 5층석탑은 우리나라에 있는 5층석탑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커서 우러러 보아야 한다.

낙산동 3층석탑 보물 제469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탑은 바로 뒤편에 자리 잡은 병산과 어우러져 잔잔한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야은 길재

 

팔공산 오동나무 숲에서 견훤에게 크게 졌던 왕건은 그로부터 8년 뒤인 935년에 지금의 선산 땅인 일선군의 숭신산성에 병력 10만 명을 모아 지금의 일선교 둘레인 태조 방천으로 불리는 낙동강 연안에서 견훤과 후삼국 통일을 위한 싸움을 벌여 크게 이겼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곳의 나루를 지나며 전승을 기려 '나의 나루'라는 뜻으로 '여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이듬해인 936년에는 견훤의 아들 신검이 고아면 관심리 앞들에서 왕건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는데 왕건이 이곳에서 신검을 막기 위해 병력을 주둔 시킨 곳이 '어검 평야', 곧 지금의 '어갱이'이고 그가 진을 쳤던 곳은 '장대'라고 불린다. 신검은 송심리 앞들에 진을 치고 잇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군사를 거두어 괴평리로 옮겨 배수진을 쳤다. 송림리의 앞들은 지금도 이곳 사람들이 '발갱이', 곧 신검의 기세를 뿌리뽑았다고 하는 발검 평야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그들이 옛 역사를 알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또 왕건이 매봉산 서쪽 낮은 구릉으로 기습하여 신검을 사로잡은 곳은 점검 평야로서 지금의 '점갱이'가 되었다.

- 향토 사학자 김수기

 

걸어보지 못한 길

 

프로스트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간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었습니다

아, 먼저 길은 다른 날 걸어 보리라! 생각했지요

인생 길이 한번 가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그래서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고,

그것으로 내 운명이 달라졌노라고

 

 

큰 고통이야 말로 정신의 마지막 해방지다. 이 고통만이 우리를 최후의 깊이에 이르게 해준다.

- 니체 『즐거운 지식』에서

 

고통과 고뇌는 위대한 자각과 깊은 마음을 가지고 잇는 사람에겐 늘 필연적인 것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에서

 

우리들의 후방에는 더 이상 물러설 방어선이 없다. 우리 부대들은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그 균형을 깨뜨리기 위하여 끊임없이 역습을 감행해야 한다. …… 부산으로 철수한다는 것은 사상 최대의 살육을 의미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 우리들은……차라리 같이 싸우다가 죽을 것이다.

- 워커 중장

 

왜관 기념비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통일의 그날은 아직도 요원하고 전쟁 기념물로 보존되고 잇는 왜관 인도교 밑을 낙동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다.

 

영령들이여!

우리는 보았노라, 들었노라, 기억하노라. 이곳 유학산 봉우리에

그리고 낙동강 기슭에 남긴 그때 그날, 그들의 희생을

고귀한 피의 발자욱을 우리 겨레는 영원히 소중하게 간직하리라

- 왜관 전적기념관 비문

 

한 줄기 낙동강 물에 조국의 운명을 걸어놓고 자유와 정의를 수호하느냐 노예와 사막의 구렁에 빠지느냐? 피가 끓고 살이 튀는 화랑 정신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 지역의 전투에서 생생하게 아로새겼다

-다부동 승전비

 

다부원에서

 

조지훈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彼我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大邱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 해 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軍馬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리군 전사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을 받아

움직이던 생령生靈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마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으랴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하엽정 고개를 넘어 하빈면 묘리에는 박팽년의 11대 손인 박성수가 1747년에 세운 삼가헌이 잇고, 연꽃이 만발한 곳에 자리잡은 하엽정이 있다.

물과 같은 선을 실천하는 사람은 처신은 겸손하게 하고, 마음가짐은 고요하게 하며, 널리 베풀되 보답은 바라지 않고, 말은 진실되어 망녕되지 않게 하며, 정치에서는 좋은 성과를 얻고, 일에서는 좋은 효과를 거둔다. 또한 행동은 좋은 시기를 선택해서 한다. 그는 남과 다투지 않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잘못이 없다.

- 노자

 

자연에 대해 말하면서 자기에 대해서는 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자연이라는 사실을-따라서 자연은 우리가 그것의 이름을 부를 때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 니체 『망각된 자연』(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에서

 

걷는다-멈춘다-걷는다. 이것이 이상적인 존재 방식이다.

- 한트케 『연필의 역사』에서

태고정 묫골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3대 정문인 삼충각三忠閣이 있고 묫골 북쪽에는 태고정太古亭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사느니라.

- 『논어』

 

금호琴湖는 영천시 서쪽 6킬로미터 지점에 있는데 금호읍 남쪽과 북쪽이 구릉지로 호수와 같아 갈대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 비파 소리와 같은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하여 금호라고 불렀다고 한다.

-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1984, 경북 교위)

 

낙동강 오염의 핵심 지역은 대구를 중심으로 한 김천, 구미, 달성과 구지쪽 중류권이다. 이곳엔 김천공단, 구미 국가 1~4공단, 왜관공단, 대구3공단, 다산주물공단, 서대구공단 등 지방공단급 이상의 중 · 대규모 공단이 밀집해 있다. 여기에다 대구 2백48만 5천, 김천 15만, 구미 29만, 달성 12만 5천 명 등 3백만 명 이상의 밀집 인구가 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일 1백만 톤의 생활 하수가 나온다. 1991년 페놀이 유출된 것을 비롯해 낙동강으로 흐르는 중금속 대부분이 이 지역에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을 '낙동강 오염 벨트'라고 부르고 있다. 낙동강 오염 벨트 지역은 대구 · 경북의 산업개발과 이에 따른 부산 · 경남의 수질 피해가 맞부닥치는 '딜레마' 지역이 된 셈이다.

- 《한겨레》 2001년 8월 8일자

 

사람들은 흐린 물에서 고기를 낚는 사람과 깊은 물에서 고기를 낚는 사람을 혼동하곤 한다

- 니체

 

가야산의 노을 붉게 물들고

금호강의 달밤 어부들의 피리 속에 깊어간다

늙고 늙은 강에 계수나무 솟은 듯

낙동강 물 헤치며 돛단배 하나 포구를 찾는다

- 작자 미상 「배성십경

 

어느 날 문득 강이 내게로 왔다.

- 『논어』「옹야」편

높은 곳에 오르는 뜻은 마음 넓히기를 힘씀이지 안계를 넓히기 위함이 아니다.

- 정구, 『가야산 기행』

 

현풍을 지나며

 

김지하

 

산 아래

구름 있어

 

현풍이다

 

바람도 바람

검은 바람

 

내 배 아래 바람

누이 바람

 

산 위에

물 있고

 

물 아래 산 있어

 

기이하다

 

오늘

여기 지나는

인연이 기이하다

 

훗날

다시 오는 날

 

흰 구름이

발끝을 적시리

 

산 위에

내 넋

높이 떠나리

 

박소선 할머니 전국적으로 알려진 현풍할매곰탕의 역사는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소선 할머니가 달성군 유가면에서 '일성식당'이라는 이름으로 가마솥에 끓여 뚝배기에 담아 팔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절 하나 연기와 안개 아무 일도 없는 속에 서 있으니, 어지러운 산 푸른 물방울 가을빛이 짙었네. 구름 사이 끊어진 돌층계 6, 7리요, 하늘 끝 먼 멧부리 천만경일세. 차 마시고 나니 솔처마에는 달 걸려 있고, 경 읽는 것 한참인데 바람부는 탑에 쇠잔한 종소리 들리네. 흐르는 시냇물 응당 옥띠玉帶 띤 손을 웃으리. 씻으려도 씻을 수 없는 이 티끌 속 발자취로다

- 김지대金之代 유가사에 대해

 

도동서원 선조 38년에 창건한 도동서원에는 한훤당 김굉필을 봉안하였다.

 

사람이 한가함보다 즐거움이 없다는 말은 아예 할 일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가하면 책을 읽을 수가 있고, 명승을 찾아노닐 수도 잇으며, 유익한 벗과 사귀기도 하고, 술을 마실 수도 있고, 책을 저술할 수도 있다. 천하의 즐거움 가운데 이보다 큰 것이 잇으랴.

- 유몽영

 

그들은 신의 창窓들을 과조하고 있다.

- 체코의 격언(고요한 한가로움에 대해)

 

에드거 포우의 '행복의 네 가지 조건'

첫 번째 '야외 생활'

두 번째 '어떤 존재에 대한 사랑'

세 번째 '모든 야심으로부터의 초월'

마지막 '창조 행위'

 

곽재우 장군의 묘 곽재우의 묘를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시 전란이 소용돌이 치고 간 뒤 어느 누가 곽재우 장군의 무덤을 기억이나 했을까.

진흥왕 척경비 우리나라에서 세운 최초의 비인 평남 용강군 점제현의 신사비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이 비는 화앙산 기슭에 묻혀 있다가 1914년에 발견되었다.

 

가야의 산들

 

김지하

 

가야의 산들

심상치 않다

 

겨울 흰 햇살

너른 들에 우뚝 선

검은 봉우리

 

신내려

떨림

 

아아

가야여 가야여

 

망한 옛

동이의 아득아득한

솟대여

 

봉화군 명호면의 청량사 유리보전

해인사 대적광전 해인사의 이름은 '세계 일체가 바다에 찍히는 삼매'를 말한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하였다.

 

중첩한 산을 호령하며 미친 듯이 쏟아지는 물소리에

사람의 소리는 지척사이에도 분간하기 어렵고

시비의 소리 귀에 들릴까 언제나 두려움에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모두 귀먹게 했구나.

- 최치원

 

그림 같은 무지개다리 급한 물결에 비치는데

다리위 지나는 사람 발길을 조심한다

나의 옷 걷고 물 건너려는 것

그대는 웃지마소

고운이 어찌 위태로운 길 밟았던가

- 김종직

 

조사祖師인 순응대덕은 신림대사에게서 공부하였고 대력(大曆, 766~779) 초년에 중국에 건너갔다. 마른나무 족에 의지하여 몸을 잊고 고승이 거처하는 산을 찾아가서 도를 얻었으며, 교학을 탐구하고 선禪의 세계에 깊이 들어갔다. 본국으로 돌아오자 영광스럽게도 나라에서 선발함을 받았다. …… 정원貞元 18년(802년) 10월 16일에 동지들을 데리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 …… 이때 성목왕태후聖穆王太后께서 천하의 국모國母로 계시면서 불교도들을 아들처럼 양육하시다가 이 소문을 듣고 공경하며 기뻐하시어 날짜를 정하여 귀의하시고 좋은 음식과 재물을 내리셨다. 이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지만 사실은 땅에 의하여 인연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안개처럼 모여들 때 스님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하여 이정선백利貞禪伯이 뒤를 이어 공적을 세웠다. 중용의 도리를 행하여 절을 잘 다스렸고, 주역 대장大壯의 방침을 취하여 건축을 새롭게 하니 구름이 솟아오르듯, 노을이 퍼지듯 날마다 새롭고 달마다 좋아졌다. 이에 가야산의 빼어난 경치는 도를 성취하는 터전에 알맞게 되었으며 해인사의 귀환 보배는 더욱 큰 값어치를 지니게 되었다.

- 최치원 「신라가야산해인사 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 善安住院壁記」

 

팔만대장경 국보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장경판고는 8만1천2백58매의 고려대장경판(국보 제32호)을 간직하고 있는 조선 초기의 건물로서, 여러 차례의 화재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소실됨 없이 보존되고 있다.

 

가능한 한 앉아 있지 마라. 야외에서나 자유로운 움직임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면 믿지 마라. 모든 선입견은 내부에서 나온다. 오래 앉아 있는 것은-다시 한 번 강조한다-성령을 거스르는 죄이다. 단지 행동으로 옮긴 생각만이 가치를 갖는다.

- 니체

 

우포늪 우포늪은 우리나라 유일의 배후습지다. 이 늪은 1983년 식물학자인 정영호 박사에 의해서 자연늪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에서 태어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사라져 가는 우리

그 사이의 빛나는 시간이 우리의 일생이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만년교 영산에는 그냥 지나치면 서운할 아름다운 돌다리가 남아 있다. 물 속에 드리운 보름달 같은 돌다리의 아름다움을 어디에 비유할 수 있을까.

연지못

 

낙동강

 

양우정

 

낙동강은 700리

몇 굽이더냐

눈물이라네

태백산太白山, 산골짜기

어린 초부樵夫의

구슬픈 노래 싣고

고이 흐르지

에-헤루 흘러서

어데를 가나

원정願情 말할 동무 찾아

흘러가지요

 

700리 강두던에

가을이 오면

낙엽이 주루루

강에 떨어져

다시 못을 고향길

뒤돌아보며

머나먼 700리를

길 떠나지요

에-헤루 흘러서

어데를 가나

구포 나루 님을 찾아

흘러간다내

 

낙동강은 700리

몇 나루더냐

나루마다 서러운

눈물이라네

 

덕천서원 덕천서원은 민족의 성산 지리산 자락에 있다. 그 아래로 진주 남강이 도도하게 흐른다.

정암나루 "정암 사공아 뱃머리 돌려라. 우리님 오시는데 마중갈까나. 아이고데고 성화가 났네."

 

나는 손만 가지고 쓰는 것이 아니다. 내 발도 항상 한몫을 하고 싶어한다. 때로는 들판을 가로질러서 때로는 종이 위에서 발은 자유롭고 견실하게 제몫을 담당해내고 있다.

- 니체

 

화왕산 남쪽에 있다. 고려 신돈의 어머니는 바로 이 절의 종이었다. 신돈이 죽음을 당하자 절도 폐사되었으니 고쳐 지으려다가 완성되기도 전에 돈의 일로 해서 다시 반대가 생겼기 때문에 헐어버렸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27권 「창녕현」편 불우조 옥천사

 

관룡사 용선대 관룡사가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은 용선대의 석가여래좌상에서 받은 강한 인상 때문일 것이다. 요사채의 담길을 따라 한적한 산길을 20여 분쯤 오르면 커다란 암벽 위에 부처님 한 분이 날렵하게 앉아 있다.

관룡사 돌장승 관룡사로 가는 좁은 산길을 오르다 보면 돌장승 한 쌍이 길손을 맞는다. 커다란 왕방울눈에 주먹코가 인상적이다.

곽재우 비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을 인정받아 경상좌방어사로 재직하던 곽재우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왜군과 맞섰고 그 싸움에서 왜군 수천 명을 무찔렀다.

 

방랑과 변화를 사랑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다.

- 바그너(독일의 작곡가), 여행에 대해

 

내게 여행은 정신의 젊음을 되돌려주는 샘물이다.

- 안데르센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책을 한 페이지밖에 읽지 않은 것이 된다.

- 아우구스티누스(로마)

 

햇빛 속에 이따금 머물 줄 아는 것만이라도 사람의 흐르는 세월은 다 흐린 것이리라, 다 흐린 것 아니다.

- 박재삼, 「남강 가에서」

 

주남 저수지에 와서

 

정일근

 

죽어 썩어가는 철새들의 주검과

등이 휘어진 기형 물고기들을 본다

우리나라 애국가 속으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속으로

무리지어 힘차게 날아가던 저 새들이

딸아이의 동화 속에서

함께 춤추고 노래하던 어린 물고기들이

여기저기 죽어 떠다닌다

보아라 어느 시인이

물의 안식과 사랑을 노래할 것인가

기쁨과 평등과 희망이 출렁이던 물에는

수은, 납, 구리, 카드뮴, 아연이 녹아 출렁이고

마산 앞바다에서 온산에서 금호강에서

아프다 아프다 하며 죽어가는 물과 강과 바다

이제 새와 물고기들은 우리 곁을 떠나리라

시인은 더 이상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못하리라

물과 산이 마르고

나무들 또한 꽃 피고 열매 맺지 못하리라

병이여 깊은 이 강산의 병이여

날개 꺾인 새들의 울음소리

등뼈가 휘어지는 고통의 소리

내 몸 속에서 내 몸이 썩어 들끓어 오르는

저주와 회한의 소리 듣는다

주남 저수지에 와서

 

문창축제 굿이요 동네 사람 다 모이소

지신 봅자 지신아 어연아 지진아

천년이나 울리고 만년이나 울리소이

…… 금일 명장 시헌공 극락 세계로 가옵시고

금년 농사짓거든 대풍년이 되시옵소서

아들딸을 잘 길러 효자 충신 점지하소서

우리 동네 농부들 동서남북 다 뎅기로

관제 구설 다 막아서 하늘같이 넘기소이

조푸굿에 집 나간다 어서 치고 술 묵자

- 문창제놀이 중 '성신신고'

 

영남루 수많은 사연을 지닌 채 흘러온 밀양강을 아름다운 절집 청도 운문사와 제약산 자락의 표충사 그리고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한 곳이며 영남 제일루인 영남루(보물 제174호)가 하직인사를 보냈으리라.

 

논개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이 흘러라

아리답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맞추었네

아! 강낭콩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 길이 푸르르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아니 흐르랴아!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남강 가에서

 

박재삼

 

강 바닥 모래알 스스로 도는

진주 남강 물 맑은 물같이는,

새로 생긴 흔이랴 반짝어리는

진주 남강 물빛 밝은 물같이는,

사람은 애초부터 다 그렇게 흐를 수 없다

 

강물에 마음 흘린 사람 두엇

햇빛 속에 이따금 머물 줄 아는 것만이라도

 

사람의 흐르는 세월은

다 흐린 것 아니다, 다 흐린 것 아니다.

 

그런 것을 재미 삼아 횟거리나 장만해 놓고

강물 보는 사람이나 맞이하는 심사로

막판에 강가에 술집 차릴 만한 세상이긴 한 것을

가을날 진주 남강 가에서 한정없이 한정없이 느껴워한다.

 

 

대지는 아직도 위대한 영혼들에게 열려 있다. 거기에는 의로운 사람들을 위한 장소, 하나 혹은 두 사람을 위한 자리, 침묵의 바다 냄새가 풍겨오는 그러한 장소들이 남아 있다.

- 니체

 

 

낙동강역 낙동강역은 작지만 아름다운 역이다. 일제 때인 1906년에 지어졌다.

 

 

뒷기미 나리는 눈물의 나리

임을랑 보내고 나 어찌 살라고

아이고데고…… 성화가 났네

- 뒷기미 뱃노래

 

 

부의 동쪽 41리에 있다. 원으로부터 남으로 5~6리 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진도가 있어 매우 위험한데 그 한 구비는 돌을 깨고 길을 만들었으므로 내려다보면 천길의 연못인데 물빛이 짙은 푸른빛이고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조리고 두려운 걸음으로 지나간다. 예전에 한 수령이 떨어져서 물에 빠진 까닭에 지금까지 원추암이라고 부른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역원」조 작원酌院에 대해

 

물소리에 귀를 모을 일이다. 그것은 우주의 맥박이고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이고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갈 곳이 어디인가를 소리 없는 소리로 깨우쳐줄 것이다."

- 법정 스님 『말없는 관찰』

 

가야진사伽倻津祠

 

물금역

 

낙동강의 바람

 

강은교

 

그대 있는 곳을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정신없이

몸 흔드는 게 아닌가.

 

그대 잠들지 않는 이유를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한많은 소리로

뼈 부서지는 게 아닌가.

 

살이 살을 뜯는 거리에서

울음떼 무성한 언덕쯤에서

출렁임이 또 한 출렁임 낳아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이여.

 

오늘은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끼리

저무는 해를 만지고 있는데

그대 가는 곳을

나는 아네.

얼었다 녹으며

녹았다 얼며

 

이 구름 밑

살지 못해 죽는 그대

오, 죽지 못해 사는 그대.

 

김수로왕릉 지금의 김해시가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듯이 김수로왕과 그의 아내였던 허씨의 무덤이 김해시에 남아 있다.

 

통도사 통도사의 대웅전은 금강계단을 등지고 서 있다. 부처의 형상이 놓이지 않았더라도 대웅전의 불단 자리를 보고 예배를 하면 석가여래 사리탑에 예배를 하는 형식이 되도록 되어 있다.

 

닮은 것과 닮은 것 사이에 마음이 흐른다.

- 인도의 잠언시

 

사람을 대하는 곳에 세상을 기화할 수 있고, 물건을 접하는 곳에 천지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나니라. 만일 이 두 가지 길을 버리고 도를 구한다면, 이는 허무에 가깝고 실지를 떠난 것이니 천만 번 법경을 외운들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 최시형(동학의 2대 교주) 강원도 영월군 직곡리 박용걸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대인접물'에 대해

 

1875년의 부산의 모습은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대창동, 남포동 일대는 그 뒤에 매축한 곳으로 그때는 모두 바다였다. 번화가로 알려진 광복동 같은 곳도 그때는 한복판에 도랑이 있고 풀만 무성하여 여우라도 나올 듯했다.

- 오이케가다스케 『부산 개항 50주년 회고록』(1926년 11월)

 내가 첫발을 들여놓은 부산항은 흰 모래와 푸른 솔의 해안에 종일 파도가 밀려 왔다갔다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작은 어촌이었다. 육지에는 한국인들이 소뼈와 소가죽을 햇빛에 말리고 있었을 뿐이다. 배를 매어둘 만한 부두조차 없었다.

- 오쿠라 가하치로

 

나가사키항에서 한국의 부산항까지는 증기선으로 열다섯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부산에서 1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입구가 있는 낙동강은, 수심 1.5미터의 물을 거슬러 밀양에서 80틸로미터를 증기선으로 항해할 수 있고, 수심 1.2미터의 물을 거슬러 정크선으로 사문까지 1백60킬로미터를 더 갈 수 잇으며, 거기서는 짐을 가벼운 견인 포트에 옮겨 싣고 연안으로부터 2백74킬로미터 떨어진 상진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이 이용 가능한 수로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서울-부산간 철도가 곧 이루어지리라는 어렴풋한 전망과 더불어부산은 상업의 중요한 중심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부산을 포함하고 있는 경상도 지방은 여덟 개의 지방(현재는 행정적인 목적으로 13개임)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다. 또 경상도 지방은 전라도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현재 한국에서 가장 번창하고 있는, 비옥한 지방임이 확실하다…… 나는 증기선 갑판의 먼 거리에서 한국인들을 처음 보았다…… 한국인들은 참신한 인상을 주었다. 그들은 중국인과도 일본인과도 닮지 않은 반면, 그 두 민족보다 훨씬 잘생겼다. 한국인의 체격은 일본인보다 훨씬 좋다. 평균 신장은 1백63.4센티미터이지만, 부피가 큰 흰옷 때문에 키가 더욱 커 보인다. 또 벗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없는 높다란 관 모양과 모자 때문에도 키는 더 커 보인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 부산과 낙동강에 대해

 

을숙도

 

박라연

 

몇몇은 공중에 둥지를 틀었다

가난은 깃털 같은 죄라며

아직도 물이 두려운 사람들

대낮에도 발이 빠진다

오랜 설움 안으로 안으로만 삭여온 녹슨 종처럼

눈물꽃 송이송이 목마른 갈대숲 적시고

삐삐꽃 쑥부쟁이 떠난 자리에

죽어도 죽지 않는 풀뿌리들 돋아나

동행을 재촉한다 모두가

잊혀진 어제는 눈발에 젖어

상처만큼 깊어지는 강물이 되어

한 세상 눈시린 풍경으로 떤다

뼈아픈 그림자 허옇게 드리운 채

속죄하며 흔들리는 늪

어둡고 쓸쓸한 지상의 한 끝에서

우리를 잠시 취하게 하는 가을산의 어스름

하염없이 울고 가는 두루미떼 따라가면

밀물과 썰물이 무작정 섞여지듯

우리들 인심도 그렇게 섞일 수 있을까

그대 묻힐 땅 한 뼘 없어도

을숙도의 뿌리 끝에

해마다 새끼를 치는 희망을 치는

강줄기 따라 만나고 헤어진 이웃들

한 해의 철새가 되어 그 저녁 하늘로 날아들면

우리도 등뼈에 묻어둔 비밀 몇 포기씩 안고

높이 더 높이 날아올라

만삭의 죄를 풀고 가벼이 아침을 따라 내려오리라

외로운 직립의 투박한 을숙도 뿌리 곁으로

 

낙동강

 

이동순

 

…… 잠시도 쉬지 않고 퍼부어대는 저 독하디 독한

강가의 쓰레기 매립

가축 분뇨 댐 공사에 광산 폐수

농약 생활 하수 가두리 양식 찌꺼기…… 탁한 강물을 마셔서

마음조차 흐려진 이곳 강 유역의 주민들은…… 밤마다 그들의 목을 휘감아오는

저 차고 무거운 쇠사슬이

사실은 죽은 강줄기의 망령임을

소스라쳐 깨어서도 눈치채지 못한다

 

낙동강

 

이기철

 

마흔몇 해를 낙동강 가에 살면서 나는 낙동강을 한 번도 노래하지 못했다

아카시아 그루터기같이 가시만 성성한

내 여름 몸살 같은 낙동강

내 송곳니 빼어서 던지며 예쁜 새 이 나 달라고 물살 세던 낙동강

댕기머리 내 누미 삼베옷 빨아 말려 입던 낙동강

지금은, 뒤웅박이 쌀 팔아 내 중학등록금, 검정운동화 사주시던

어머니 무덤만 황혼 속에 잠들어 있는 낙동강

 

낙동강이여, 부르면 몇 년 추억인 낙동강

거기서 스탠더드 영어책 배우고 페니실린 주사 맞아 말라리아 쫓아내고

거기서 쇠똥종이 공책 찢어 싸리꽃 같은 순이한테 편지 쓰던 낙동강

 

노을이여, 아무리 아름답게 걸려도, 그 드리운 치마폭엔 절로 한숨이 배어 있는 낙동강 노을이여

왜 피 같은 거, 죽음 같은 거, 왜 못견디게 그리운 것들만 네 곁에 서면 도라지꽃으로 피어오는지

서른아홉 해 전의 소련제 장총과 함경도 방언이 우리에게 무엇인지를

왜 너는 말하지 않느냐

아직도 탄피 묻힌 골짜기엔 원추리꽃 피고

네 곁에 공장 짓고 학교를 세우던 사람들도,

너의 맨살 배고 잠들었던 너를 가로질러 한 달에 한 번 월급 받는 나도

장롱 속에 담요를 내 아이 덮어주듯 네 추운 강자락 덮어주지 못했다

부디 너는 손톱 밑에 흙 넣지 말고 살거래이, 제발 너는 애비처럼

손등이 누릉지기 되지는 말거래이, 어머니 소원이던 나는 지금 흙 대신 분필을 만지는 선생이 되어 끝없는 회의의 교실을 오고 가지만

복도를 오가면서 저 스무살들의 남방과 블라우스 속에 감춰진 분노가 무엇인지를

그들 분노의 심연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면서도 그들의 연못 속에 발을 꽂진 못했다

강원도의 물줄기 불러모아, 봉화 청송을 마음 급해 쫓아오다가 돌밭에 가슴 찢긴 낙동강

 

금호강 남강 그 옷고름 같은 지류들도 다독거리며

물으면 터질까봐 입 다물고 흘러가는 낙동강

남원 거창 합천을 쓸어모아 남해로 달려갈 때

네 물결에 발을 씻고 잠드는 농부 있거든

낙동강이여, 보습날에 다친 그들의 발목 아물게 하라

네 흐르는 물소리 속에 첫밤을 맞는 신부 있거든 그녀에게 해 같은 첫 아일 갖게 하라

 

내 낙동강이라 부르지 않을 때 이 땅의 것 아닌 낙동강이여

내 낙동강이라 부르면 어느새 달려와 소나무 껍질 같은 내 삼촌의 목소리 되는 낙동강이여

 

마흔이 되어서도 겁 많은 사내 하나를 질타하라

닦아도 닦아도 닦이지 않는 사내 하나의 녹슨 심장을 난타하라

욕망에 눈먼 사람들이 네 위에 열 번 나라를 허물고 세워도

천년을 길 바꾸지 않는, 천년을 낙동강일 뿐인

댕기풀과 다람쥐와 내 맨발의 무덤일 낙동강.

     

 

 

posted by 황영찬
2016. 11. 18. 17:07 내가 읽은 책들/2016년도

2016-025 신정일의 한강역사문화탐사

 

신정일 지음

2002, 생각의 나무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8567

 

981.1

신73한

 

탐사와산책 14

 

역사와 삶의 궤적을 쫓아, 천삼백 리 한강의 물길을 따라 걷다

 

강을 보라.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그 근원인 바다로 들어가지 않는가.___니체

 

신정일

1954년생. 문화사학자로 역사 관련 저술활동을 전개해 가고 있는 작가이자 도보여행가이다. 그는 1980년대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발족하여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들을 펼쳤고,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으며,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회에 참가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였던 김개남, 손화중 장군 추모사업회를 조직하여 덕진공원에 추모비를 세우는 데 노력하기

 

차례

 

발문 | 길을 떠나면서

 

제1구간 잠시 맡겼다가 돌아갈 뿐이다___검용소에서 아우라지까지

 

1일 봄물 드는 버들강아지를 바라보며 33km

      태백으로 가는 길 | 내린 눈 다 녹지 않고 | 보통 물보다 무거운 우통수 물 | 한강의 발원지 아래 첫 마을 안창죽 | 흔들흔들 구름다리를 지나 | 나는 신랑 얼굴도 몰라 | 그렇게 좋으면 와서 살아봐 | 석유를 배 아플 때 먹는 약이라고 여기던 시절

 

2일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서 있는 것도 위험하고 36km

      골지리가 아니고 고기리이다 | 흰구름 뜬 고개 위에 | 그림 같은 구미정 아래 강물은 흐르고 | 받아들인다는 것, 더불어 산다는 것

 

3일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아리랑 아라리요 13.5km

      사라진 물줄기 | 아우라지에 접어들다

 

제2구간 일백번 굽이친 강물은 멀리 바다로 흐르고___아우라지에서 문산나루까지

 

4일 얕은 내도 깊게 건넌다 38km

      아우라지에서 배를 타다 | 강가에는 수진달래가 피어 있고 | 시냇물에는 멈춰선 물길이 없다 | 낯선 곳에서 만난 남난희 씨| 꿩꼬치산적은 사라지고

 

5일 기억의 강, 망각의 강 35km

      잊어버릴 줄 모르는 이 마음이 슬픔 | 하늘이 낮아 재 위는 겨우 석 자 높이 | 일천 산엔 겹겹 푸르름이 가로놓였고 | 지루하고 가파른 산길만이 이어지다 | 떼돈을 벌었던 떼꾼들은 사라지고

 

6일 동강의 섬 절매마을에 갇혀서 12km

      백룡동굴은 강 건너에 | 황새여울에는 강물만 흘러가다 | 돌아가자 돌아가자 산을 휘돌아 돌아가자

 

제3구간 얕은 물은 요란스럽게 흐른다___어라연에서 충주나루까지

 

7일 동강의 절경 어라연 43km

      강가의 뽕나무엔 오디가 주렁주렁 | 떼꾼들의 무덤 된꼬까리여울 |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 | 꽃밭여울에 강물은 흘러가고 | 정조의 태실이 있는 계족산 | 상리나루에서 온달의 장사를 지내고 | 남한강변에 어둠이 내려앉다

 

8일 오른 만큼 내려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 28km

      온달산성에는 안개가 지욱하고 | 물맛이 단 단물내기 | 곳곳에 온달의 전설이 남아 | 올 때도 문득 오고, 갈 때도 문득 간다 | 도전리에서 태어난 삼봉 정도전

 

9일 나그네 꿈이 땅울림에 놀라 깨니 12km+배타고 40km

      수몰지에 얽힌 사연 | 꽃거리에 꽃은 없다 | 하늘로 통하던 다리 우화교 | 열 걸음을 걷는 동안에 아홉 번을 뒤돌아본다 | 물은 갈수록 겹겹이요, 또 산은 거듭거듭

 

제4구간 강산은 만고의 주인 사람은 백년의 손님___충주나루에서 이포나루까지

 

10일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32km

        어디로 날아가는 새들이여! | 탐금대에는 신립의 자취가 남아 | 충주 달천의 물이 천하에 으뜸가는 물맛 | 나라의 중앙에는 중앙탑이 남아 | 목계나루에는 나룻배가 없다 | 강산은 만고의 주인 사람은 백년의 손님

 

11일 진리가 샘물처럼 솟아나다 30km

강여울에 떠가던 떼배는 사라지고 | 남한강으로 섬강이 접어들다 | 도는 어디로 뻗어 있는가 | 전국의 3대 선원 고달선원 | 고달사지에는 석물만 남아 있고 | 이색의 마지막을 지켜본 남한강 | 강물은 유유히 흘러서 가고

 

12일 그 아름다운 물집에 관한 보고서 20km

       열일곱 개의 물집 | 아파트 쇠창살 안에 갇힌 청심나루터 | 여주에서 북간도마을을 만나다 | 이포나루에서 여정을 풀다

 

제5구간 남한강과 북한강이 몸을 합하고___이포나루에서 뚝섬까지

 

13일 혼자 감당해 낸 그 세월의 그림자들 33km

파사산성에 피어난 달맞이꽃 | 진달래꽃이 많이 피는 꽃봉 | 양근포구에는 물결만 일렁이고 | 상심이나루와 한여울나루 | 드디어 두물머리를 만나다 | 서거정이 극찬한 수종사

 

14일 드디어 한강으로 거듭나다 32km

        다산의 탯자리 능내리 | 천주교의 은인 정약용 | 다시 꽃밭을 지나며 | 더 멀리 뛰기 위해 몇 걸음 뒤로 물러선다 | 길가에 열려 있는 천도복숭아 | 배암드리성이 바람드리성이 되다

 

제6구간 어머니의 젖줄 같은 달디단 강물___압구정동에서 보구곶리까지

 

15일 나루터마다 놓인 저 다리들 35km

       압구정에는 무지개 개울이 있다 | 뽕나무가 많았던 잠실 | 노량진에는 배다리가 설치되었다 | 마포 새우젓 장수 왕십리 미나리 장수 | 고려시대 귀양지 여의도 | 안양천에서 유전油田을 보다 | 방화대교 아래에서 고기를 낚다

 

16일 휴전선은 강물 위에도 있다 28km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보이다 | 적은 이곳을 보고 있다 | 애기봉을 목전에 두고 | 한강의 하구 보구곶리

 

참고문헌

 

쾌락은 우리를 스스로에게서 멀리 떼어놓는다.

그런데 여행은 우리를 제자리로 데리고 가는 하나의 고행이다. --- 카뮈

 

강을 보라.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그 근원인 바다로 들어가지 않는가 --- 니체

 

한강漢江은 도성 남쪽 10리 지점 곧 목멱산木覓山(남산) 남쪽(한남동)으로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 하였다. 신라 때에 북독北瀆, 고려조에서는 사평도沙平渡라고 하였는데 민간에서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근원이 강릉부의 오대산 우통于筒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충주 서북쪽에 이르러 안창수安倉水(섬강)와 합하고 양근군楊根郡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과 합하며 광주 지경에 이르러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광진廣津(광나루)이 되고 삼전도三田渡가 되며 두모포豆毛浦(두뭇개)가 되며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漢江渡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흘러서는 노량이 되고 용산강이 되며 또 서쪽으로 가서 서강西江이 되고 시흥현 북쪽에 이르러서 양화도楊花渡가 되며 양천현 북쪽에서 공암진孔巖津이 되며 교하군 서쪽에 이르러 임진강과 합하고 통진부 북쪽에서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 한강 『동국여지승람』

 

오대산 서대西臺 장령長嶺 밑에 샘물이 솟아나는데 그 빛깔이나 맛이 특이하였다. 무게도 보통 물보다 무거웠고 사람들은 그 샘물을 우통수于筒水라고 불렀다. 우통수는 바로 한강의 수원이다. 사람들은 우통수의 빛과 맛이 변하지 않음이 마치 중국 양자강의 경우와 마찬가지라는뜻에서 중령中泠이라고도 불렀다. 중령이란 중국의 고사에 나오는 물 이름인데 여러 줄기의 냇물이 모여서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지만 중령의 물만은 다른 물과 어울리지 않고 그 찬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고사를 말하는 것이다.

- 우통수 권근, 기문記文

 

걷는 것과 사고하는 것은 두 가지 형태의 동일한 개념이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얘기할 수 있다. 걷기를 선호하는 사람은 생각하기를 선호한다고. --- 토마스 베른하르트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맑으면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 공자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육지에서는 기마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모든 처형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던 그날

빨갱이 마을이라 하여 남녀 중학생들을 금악 벌판으로 몰고가 집단 몰살하고 수장한데 이어

정방폭포에서는 발가벗긴 빨치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 나무기둥에 묶어두고 표창연습으로 삼다가……

- <한라산> 시인 이산하

 

 

풀리는 한강가에서

 

서정주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은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러기같이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장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 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민들레나 쑥니풀 같은 것들

또 한 번 고개 숙여보라 함인가

황토언덕

꽃상여

과부의 무리들

여기 서서 또 한 번 더 바라보라 함인가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걸쳐놓은 하나의 밧줄이다.

하나의 심연을 건너가는 밧줄인 것이다.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그 위에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를 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다. --- 니체

 

봉산리 강가의 구이정(구미정?)에서 목을 축이고

조선 숙종 때 이조참의를 지냈던 이치가 기사사화를 피하기 위해 이곳 봉산리에 은거하면서 세웠다고 한다. 기암절벽 위에 세워진 그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귀거래사

 

도연명

 

그만 두어라

이 우주간에 몸 맡길 날이 얼마나 남았는가

어찌 마음대로 머물고 나아가지 못하는가

무엇을 위하여 허겁지겁 어디로 가려는가

안타깝기 이를 데 없는

……

기분이 좋을 때는 홀로 나다니고

대대로 지팡이 꽂아놓고 김을 매노라

……

잠시 자연에 맡겼다가 돌아갈 뿐이다

 

침묵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인간과 함께 사는 것은 어렵다. --- 니체

사막에서 혼자 사는 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사는 것보다 어렵지 않다. --- 루소

 

봄 강에 홀로 낚싯대 드리우다

 

대숙륜

 

홀로 봄 강에 낚싯대 드리우니

봄 강의 흥취가 마냥 길구나

풀밭에 서린 안개 파랗고

꽃잎 떠가는 강물 향기롭다

마음은 백사장과 갈매기와 같아

뜬구름 같은 인생을 쪽배에 실었노라

연잎 옷은 애당초 먼지에 물들지 않았으니

무삼 창량수에 빨래를 하랴?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상철 임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 정선아리랑

 

아우라지나루의 처녀상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옛날 여량리에 사는 처녀와 아우라지 건너편 유천리에 사는 총각이 연애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유천리에 있는 싸리골에서 서로 만나곤 하였다. 그러나 어느 가을에 큰 홍수가 나서 아우라지에 나룻배가 다닐 수 없게 되자 그 처녀는 총각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정선아리랑 가락에 실어 부르게 된 것이란다.

 

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억수 장마 지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명사십리가 아니라면서 해당화는 왜 피나

모춘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우나

 

정선읍내 일백오십 호 몽땅 잠들여놓고서

이호장네 맏며느리 데리고 성마령을 넘자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잠시 잠깐 님 그리워서 나는 못 살겠네

 

저 건너 묵밭은 작년에도 묵더니

올해도 날과 같이 또 한 해 묵네

 

당신은 나를 흙싸리 껍질로 알아도

나는야 당신을 알기를 공산명월로 알아요

- 정선아리랑

 

세상에서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어떠한 굳세고 강한 것도 물을 이기지는 못한다.

- 노자

 

모래내

 

김지하

 

목숨

이리 긴 것을

가도 가도 끝없는 것을 내 몰라

흘러 흘러서

예까지 왔나 에헤라

철길에 누워

철길에 누워

 

한없이 머릿속으로 얼굴들이 흐르네

막막한 귓속으로 애 울음소리 가득 차 흘러 내 애기

핏속으로 넋 속으로 눈물 속으로 퍼지다가

문득 가위소리에 놀라

몸을 떠는 모래내

철길에 누워

 

한 번은 끊어버리랴

이리 긴 목숨 끊어 에헤라 기어이 끊어

어허 내 못한다 모래내

차디찬 하늘

 

흘러와 다시는 내 못 가누나 어허

내 못 돌아가 에헤라

별빛 시린 교외선

철길에 누워

철길에 누워

 

세상에서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어떠한 굳세고 강한 것도 물을 이기지는 못한다. 그것은 물보다 더욱 약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는 것을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단지 실천하지 않을 뿐이다.

- 노자

 

숲에는 움직이지 않는 나무가 없고 시냇물에는 멈춰선 물길이 없다.

- 곽백

 

청학동에 사는 남난희

- 내가 걷는 백두대간 28

 

이성부

 

세석에서 내려오니 남난희가 있더라

키를 넘는 산죽발 헤쳐서 몇 십 리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골짜기

물어물어 찾아드니 그녀는 찻집 주인

다섯 살짜리 아들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내 마음 어디로 가는 길을 잃었구나

사람이 바라보는 것이 반드시

예전 그 자리 그대로는 아닌 것처럼

보여지는 것 또한

반드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음을

산에 와서 내가 배운다

녹차 한 잔 마시고 책 한 권 빼어들고

뒤돌아보며 손짓하며 내려간다

내 슬픔도 포개어 배낭에 넣어두고

천천히 청학동을 내려간다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산 너머 고개 너머 행복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나는 남따라 따라 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되돌아왔네.

산 너머 고개 너머 행복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 칼 부세

 

봄밤에 내리는 반가운 비

 

두보

 

좋은 비 시절을 알아

봄이 되니 곧 내리기 시작한다

바람 따라 밤에 몰래 스며들어

소리 없이 촉촉히 만물을 적신다

들판 길 구름 낮게 깔려 어둡고

강 위에 뜬 배의 불만이 밝다

새벽녘 분홍빛 비에 젖은 곳 보니

금관성錦官城에 꽃들 활짝 피었네

 

동강 12경

 

1경 - 가수리 느티나무와 마을 풍경

2경 - 운치리의 수동(정선군 신동읍) 섭다리

3경 - 나리소와 바리소(신동읍 고성리~운치리)

4경 - 백운산(고성리~운치리, 해발 882.5m)과 칠족령(덕천리 소골~제장마을)

5경 - 고성리 산성(고성리 고방마을)과 주변 조망

6경 - 바새마을 앞 뼝대

7경 - 연포마을과 홍토 담배 건조막

8경 - 백룡동굴(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9경 - 황새여울과 바위들

10경 - 두꺼비바위와 어우러진 자갈, 모래톱과 뼝대(영월읍 문산리 그무마을)

11경 - 어라연(거운리)

12경 - 된꼬까리와 만지(거운리)

 

가수리마을의 700년 된 느티나무 700여 년 전 강릉 유씨가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평화로운 정경을 자아낸다.

 

꽃은 누구를 위하여 피고 지는가

 

엄운

 

봄볕 아장아장 어디로 돌아가는가

새삼 꽃 앞에서 술잔 잡아들었네

종일토록 꽃에게 물어도 꽃은 말이 없는데

누굴 위하여 시들고 누굴 위하여 지는가

 

가자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 김수영

 

숲에서 혼자 그렇게 걸었다

아무것도 찾지 않으면서

그것이 내 의도였다

- 괴테

 

일천 산엔 겹겹 푸르름이 가로놓였으니 한 가닥 길은 푸른 공중으로 들어간다

- 이색

 

벼랑을 따라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길이 있구나.

옛 읍이 산을 의지하였는데 산은 성을 이루었네

- 한철중

 

하늘 모양은 작기가 우물 속에 비쳐서 보이는 것 같고 산의 푸르름은 멀리 구름 위에 가로놓였다.

- 정추

 

산마을에 돼지 배부름은 반드시 새벽에 물 먹인 것이 아니요 이웃집 닭이 살쪄도 날마다 훔쳐가는 자 없다

- 안축

 

피곤한 말이 실 같은 가는 길을 뚫고 가기를 근심하니 어지러운 산봉우리들이 높고 깎아지른 듯하여 겹으로 된 성과 같구나. 바람이 바위틈에서 나오니 대포의 수레가 구르는 것 같고, 물이 마을을 안고 흘러 한 필 흰 비단 가로놓은 것 같다. 몸은 이 세상 백 년에 두 귀밑이 희어졌고, 물과 산 처리 길에는 벼슬살이하러 다니는 심정이 서럽구나. 난간에 의지해 앉아 동산의 달을 기다리노니, 밤이 고요하여 시 생각이 오랠수록 더욱 맑아진다.

- 성현

 

물에는 원래 동쪽으로 흐르는 물, 서쪽으로 흐르는 물이라는 구분이 없다. 그러나 위로 흐르는 것, 아래로 흐르는 것이라는 구분도 없는가?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 사람은 선량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물은 아래로 흘러가지 않는 물이 없다. 지금 만일 물을 손바닥으로 쳐서 튀어오르게 한다면 사람의 이마 위로 넘어가게도 할 수 있고 또 물길을 막아서 역류시킨다면 산 위로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 그것은 단지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일 뿐이다. 사람도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 악한 짓을 할 수 있지만, 그 본성은 역시 물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 맹자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 「나룻배와 행인」

 

 

우리집의 서방님은 떼를 타고 가셨는데

황새여울 된꼬까리 무사히 지나셨나

 

 

강물은 돌고 돌아 바다로 나가지요.

이내 몸은 돌고 돌아 어디로 가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 정선아리랑

 

한가한 사람이 아니면 한가함을 얻지 못하니

한가한 사람이 바로 등한한 사람은 아니라네.

- 『문가유림』

 

 

눈물로 사귄 정은 오래가지만

돈으로 사귄 정은 잠깐이라네

돈 쓰던 사람 돈 떨어지니

구시월 막바지에 서리 맞은 국화라

놀다 가세요 쉬다 가세요

그믐 초승달이 뜨도록 놀다 가세요

황새여울 된꼬까리에 떼 띄워놓았네

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 차려놓게나

 

 

나는 누구냐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다

미친 듯이 소리쳐 옛 사람에 물어보자

옛사람도 이랬더냐 이게 아니더냐

산아 네 말 물어보자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이냐

그림자는 돌아다봤자 외로울 따름이고

갈림길에서 눈물 흘렸던 것은 길이 막혔던 탓

삶이란 그날 그날 주어지는 것이었으며

살아생전의 희비애락은 물 위의 물줄 같은 것

그리하여 말하지 않았던가

이룩한 미완성 하나가 여기 잇노라고

혼이여 돌아가자 어디인들 있을 데 없으랴

- 매월당 김시습

 

원통한 새가 되어서 제궁을 나오니

외로운 그림자 산중에 홀로 섰네

밤마다 잠들려 해도 잠 못 이루어

어느 때 되어야 이 한이 다 할꼬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피눈물 흘러서 봄꽃은 붉다

하늘도 애끓는 소리 듣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시름에 찬 내 귀에는 잘도 들리는고

- 단종 <자규시>

 

남한강에서

 

김지하

 

덧없는

이 한때

남김없는 짤막한 시간

머언 산과 산

아득한 곳 불빛 켜질 때

 

둘러봐도 가까운 곳 어디에도

인기척 없고 어스름만 짙어갈 때

오느냐

이 시간에 애린아

 

내 흐르는 눈물

그 눈물 속으로

내 내쉬는 탄식

그 탄식 속으로

네 넋이 오느냐 저녁놀 타고

 

어둑한 하늘에 가득한 네 얼굴

이 시간에만 오느냐

남김없는 시간

머지않아 외투깃을 여미고

나는 추위에 떨며 낯선 여인숙을

찾아나설 게다

 

먼 곳에 불빛 켜져 주위는

더욱 캄캄해지는 시간

이 시간에만 오느냐

짤막한 덧없는 남김없는

이 한때를

애린

 

노을진 겨울강 얼음판 위를

천천히 한 소년이

이리로 오고 있다

 

 

이렇게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어느 날 문득

삶의 길에서 죽음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태어남, 만남,

그리고 죽음들이 길 위에서 비롯되고 길 위에서 끝맺음을 하니.

 

온달산성에 올라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의 사람이다. 얼굴 모습은 우스꽝스러웠으나 속마음은 아주 맑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구걸한 음식으로 어머니를 봉양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 공주가 장성하자 왕은 상부의 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다. 공주는 "대왕께서는 항상 '너는 필시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더니 지금은 어찌 예전의 말씀을 고치십니까? 지금 대왕의 명령이 전과 틀리시니 저는 감히 따르지 못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온달전에서

향산사의 삼층석탑 향산사는 신라 눌지왕 때 묵호자가 이곳에 절을 지으라는 꿈을 꾼 후 세워졌는데, 그가 입적한 후 그의 제자들이 부도를 세워 사리를 모셨다는 말이 전해진다.

가곡면의 홍수 흔적 기념비 1990년 9월 9일에 일어난 홍수 때 이 도로까지 물이 가득 찼다고 한다. 그 홍수 때 이 지역의 집 89채가 잠겼고 소, 돼지가 이 강물에 숱하게 떠내려갔다고 한다. 대단한 일이다. 이 길목까지 물이 찼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이 조마조마했을까?

단양팔경의 시작 도담삼봉 도담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에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지난 뒤 을사년 장마 때 이곳까지 흘러흘러 왔는데 정선 땅의 관리들이 삼봉을 찾아 이곳으로 와서는 자기들의 것이라며 산세로 해마다 쌀 여섯 섬을 세금으로 걷어갔다. 그러던 어느 해 정선에서 관리들이 세금을 거두러 오자 정선의 한 아이가 나서서 "저 삼봉은 우리가 불러서 온 것이 아니고 제멋대로 온 것이요. 그렇게 중요하다면 도로 가져가시오"라고 말했다는 전설이 있다.

 

 

산은 붉은 단풍잎 물은 옥같이 맑은데

석양의 삼봉엔 저녁노을 드리웠네

신선의 뗏목을 취벽에 기대 잘 적에

달과 별빛 아래 금빛 파도 너울진다

- 퇴계 이황

 

 

떠나고 돌아오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세상이리라.

 

야이차의 공을 표창하다, 단양적성비 적성산성을 조사하던 중 비 하나를 발견했다. 비문은 모두 440자 가량으로 추정되지만 288자가 남아 있었다. 그 내용은 진흥왕이 이사부, 이간, 내예부, 대야간, 무력 등 10여 명의 고관에게 일러 야이차의 공을 표창하여 앞으로도 야이차와 같이 신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포상을 내리도록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장회원에 이르러 다시 말을 타고 길을 나서면 더욱 가경으로 접어들게 된다. 여기서 가득 버섯처럼 자라는 돌무더기를 발견했다. 산봉우리에서 봉우리를 연결한 푸른 아지랑이는 좌우와 동서를 분간하지 못하리란 말에 현혹하여 어떤 마술사의 기교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가은암 앞에 말을 세웟다. 아까보다 더 찬란한 연하는 더욱 길을 흐리게 하여 남가산의 꿈 같은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절경에 명칭이 없는 것이 매우 어색하여 대뜸 단구협丹丘峽이라 명명했다.

- 김일손

 

거북을 닮은, 구담봉 남한강 줄기를 따라 깍아지른 듯한 장엄한 기암괴석으로 그 형상이 거북과 같다고 하여 구담봉이라 부른다. 구담의 뱃놀이는 천하제일의 흥취로 꼽혔다.

비온 뒤의 죽순처럼, 옥순봉 봉우리들이 마치 비온 뒤의 죽순처럼 솟아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소금강이라고도 불리운다. 옥순봉 아래에는 물살이 급하여 벽력 같은 소리가 닜다고 하는 돌내기여울이 있었다고 하나 이미 지나간 옛일일 뿐이다.

 

나그네 꿈이 땅 울림에 놀라 깨니

가랑잎만 어지러이 창문을 두드리네

모를레라 이 밤에 강물로 흐른 비

구봉을 얼마나 깍아내는지

- 이인상

 

겨드랑이 밑에 절벽을 끼고

강물 위를 미끄러져 간다

누구나 나를 보면 하늘에서 온 줄 알리

구담에 비친 그림자

들여다보다 나도 속았네

구담봉 옛 주인은

어디 가 계시는고

나무학 타고 올라

바람 몰고 다니더니

그날에 학채 구름채

구름 속으로 갔나 보다

-율곡 이이

 

제 몫으로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겁다고 느껴질 때 생각하라.

얼마나 무거워야 가벼워지는지를.

내가 아직 자유로운 영혼,

들새처럼 영혼의 힘으로 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 짐이 아직 충분히 무겁지 못하기 때문이다.

- 정현종

 

충주댐, 「홍수와 가뭄 다목적댐이 막아줍니다」 충주댐의 건설은 서울과 인천을 포함한 한강 유역권에 사는 사람들의 물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써 그 혜택은 외지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탄금대비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장병 8,000명과 함께 배수진을 치고 왜군을 맞아 싸운 전적지인 탄금대 내에는 충주문화원, 야외음악당, 충혼탑, 탄금대비, 우륵추모비, 궁도장, 신립 장군 순절비, 탄금정 등이 있다.

중앙탑 신라 문성왕 때에 나라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다. 신라 땅의 남쪽과 북쪽 끝에서 각각 출발한 두 사람이 이 탑에서 만났다고 한다. 이 중앙탑은 이 고장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는 곳이 우리나라의 중심지라는 의삭을 심어주었다.

중원 고구려비 장수왕의 아들 문자왕 때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석은 고구려와 신라가 충돌하였으며 또 신라와 백제가 모의하여 고구려와 싸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충주를 포함한 이 고장은 고구려가 남쪽으로 뻗어내려 오면서 '나라의 들'이라는 국원성으로 불렸을 만큼 중요하게 여겼던 곳이었다.

 

 

자연을 따르고 자연의 이치에 맞게 행동하라.

 

 

인간은 자연에 복종할 때에만 자연에 명령할 수 있다.

- 프랜시스 베이컨

 

목계장터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다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 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있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목계장터 시비

 

길이라는 것은 그렇다. 길이 없을 듯싶은데

어느 순간 문득 길이 환하게 열린다.

 

 

눈 덮인 산길을 어지러히 걷지 말라

뒤따라오는 사람들의 표적이 되리니

- 서산대사 휴정

 

석불대좌(보물 8호) 고달사지에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석조유물이 석불대좌이다. 불상 없이 대좌만 있는데 보물 제8호로 지정된 것으로 보아 그 수법이 뛰어남을 짐작할 수 있다.

원종대사 부도비의 귀부와 이수(보물 6호) 975년에 세워진 혜목산 고달선원 국사 원종대사비를 받쳤던 귀부와 비신 위에 얹혔던 이수. 거북을 비의 받침으로 삼으니 귀부, 이무기를 지붕으로 삼으니 이수라 한다.

고달사지 부도탑(국보 4호) 혜목산문의 개산조였던 원감국사의 사리탑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팔각원당형 부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면서도 안정감이 잇는 빼어난 작품이다.

원종대사 부도탑(보물 7호) 하늘에서 춤을 추며 날아가는 듯한 비천상들과 금방이라도 살아움직일 것 같은 다섯 마리의 용의 모습에서 옛날 장인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진다. 원종대사가 입적한 지 19년이 되던 고려 경종 2년(977년)에 만들어졌다.

신륵사 대웅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 기슭에 위치한 이 절은 신라 진평왕 때 원화스님이 창건했다고 하지만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절 신륵사가 유명해진 것은 고려 말의 고승 나옹선사가 이 절에서 열반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신륵사 대장각기비 고려 말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선사의 문도와 함께 대장경을 인출印出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225호) 흰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신라나 고려의 석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룡문과 연화문, 그리고 물결 무늬와 구름무늬의 조각들이 빼어난 솜씨를 자랑하며 새겨져 있다.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226호) 아래로 남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 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른다.

신륵사 조사당 조선 초기 예종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고려 말 기울어가는 불교계에 한 가닥 빛이 되었던 소위 '3화상和尙'이라 불리는 지공 · 나옹 · 무학의 덕을 기리고, 또 그들의 법력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중앙에 나옹, 그리고 좌우에 지공과 무학 선사의 영정을 봉안해 두고 있다.

나옹선사 석종부도 신륵사 조사당을 지나, 양지바른 구릉을 오르면 보제존자 나옹선사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가 있다. 부도는 종 모양을 닮았다 하여 석종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강물

 

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석등(보물 231호) 석종부도 앞에 있다. 부도의 주인에게 등불 공양을 올리는 공양구로 부도를 장엄하게 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규모는 자그마하지만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고려 말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인생이 무어 별건가. 오지 않는 내일 오지 그 무엇을

기다리다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도보 여행자에게는 신발이 전부다. 모자니 셔츠니 명예니 덕목이니 하는 것은 모두 그 다음의 문제다.

- 퇴퍼 『지그재그 여행』의 저자

 

방법은 간단하다. 그저 잠자리에 들 때 촛불의 그을음을 알코올에 타서 그걸로 발을 문지르면 된다. 그러면 다음날 물집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차츰차츰 구두가 발에 익숙해지거나 발이 구두에 익숙해진다. 처음에는 많이 쩔뚝거렸지만 굳은살이 단단해져서 이제는 오랫동안 걸어도 아프지 않다.

- 카크란

 

영월루 18세기 말의 건물로 추정된다. 원래 군청의 정문이었는데 1925년경 군청 이전 때 군수가 현 위치에 누각을 다시 세웠다. 마암 언덕에 서 있다.

 

여주 팔경 - 『동국여지승람

 

반도낙안 - 여강 언저리에 내려앉은 기러기

동대만월 - 동대인 청심루에서 바라본 달

연탄귀범 -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

학동모연 - 학동의 저녁 연기

신륵종성 - 신륵사의 종소리

마암어화 - 마암 아래에 떠 있는 고깃배의 등불

어릉춘수 - 두 영릉의 신록

자수장림 - 팔대수의 우거진 숲

 

세종대왕 영릉 세종대왕과 왕비 소헌왕후를 합장한 영릉英陵.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능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합장릉이므로 2개의 상석이 있다. 주위는 12개의 돌기둥을 세워 12간지를 표시했고 돌난간으로 연결시켜 놓았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일을 행하고 가더라도 살아생전 젊은 여자가 잠자리를 같이 하고자 간청했을 때 거절한 남자는 절대로 천국에 가지 못할 것입니다.

- 『희랍인 조르바』 조르바 이야기

 

이상하다. 안개 속을 걸으면 나무도 숲도 외롭다.

- 헤르만 헤세

 

삼국시대 때 축성된 파사산성 천서리 파사산의 능선을 따라 산성이 축성되어 있다. 파사산이라는 이름의 연유는 옛날 파사국이 있었던 자리라서 그렇다는 설과 신라의 왕이었던 파사왕이 이곳에 성을 쌓아서라는 설이 있다. 산정에 오르면 여주, 이천, 양평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십 리 밖, 혹은 날 때마다 그곳에 가서 시름을 풀고, 혹은 유숙한 다음 돌아올 수 있는 곳을 장만해 둔다면 이것은 자손대대로 이어나갈 만한 방법이다. 옛날에 주부자朱夫子가 무이산武夷山의 산수를 좋아하여 냇물 굽이와 봉우리 꼭대기마다에 글을 지어서 빛나게 꾸미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다 살 집은 두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봄 동안에 저곳에 가면 붉은 꽃과 푸른 잎이 서로 비치어서, 또한 제대로 나쁘지 않다' 하였다. 후세 사람으로서 산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것을 본으로 삼을 일이다.

- 이중환 『택리지』 생리편

 

군읍의 15리 서쪽, 즉 파내탄波乃灘 하류에 대탄이 있다. 돌이 강 중간에 가로누워 있어 물이 넘치면 바위가 보이지 않고 물이 얕아지면 파도가 인다. 강물이 사납게 흘러내려 하도下道(영남지방을 의미함)의 조운선槽運船들이 자주 파선된다.

고려 때 왕강王康이 건의하여 암초를 조금 파냇으나 공사가 어려워 중단했는데 그 뒤로 물살이 더 심해졌다. 세조 때 구달충具達忠을 시켜 다시 파게 하였다. 물 가운데에 있는 그 돌의 둘레를 나무로 막고 물을 퍼내면서 팠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염여퇴艶澦堆와 비교한다.

- 대탄에 대해

 

양수리에 가면

 

김승희

 

가을이면

양수리에 닿고 싶어라

가을보다 늦게 도착했을지라도

양수리에 가면

가을보다 먼저

물과 물이 만나는 것을

볼 수 잇으니

 

가장 차갑고

가장 순결한

물과 물이 만나

그저 뼈끝까지 가난하기만한

물과 물이 만나

외로운 이불 서로 덮어주며

서러운 따스함 하나를 이루어

다둑다둑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으니

 

가난한 것을

왜 그저 외롭다고만 하랴

외로운 것을

왜 그저 서럽다고만 하랴

 

양수리에 가면

가을보다 늦게 도착했을지라도

가을보다 먼저

물과 물이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헐벗은 가을나무

제 유언을 풀 듯

조용히 물그림자 비추어

스스로 깊어지는 혼자 외로움

겨울같이 전신으로 대면하고 있으니

 

가을이면

양수리에 가고 싶어라

어디선가 나뉘었던

물과 물이 합하여

물빛 가을이불 더욱 풍성해지고

가을나무 물그림자

마침내 이불 덮어 추위롭지 않으리니

 

홀로 서 있다 하여

어찌 외롭다 하랴

하늘 아래 헐벗었다 하여

 

어찌 가난하다고만 하랴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아담하면서도 화려한 탑신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기품이 있어 보이는 석탑이다. 62년도에 탑을 이전할 때 18점의 보물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양수리 수종사

 

서거정

 

가을이 오매 경치가 구슬퍼지기 쉬운데

묵은 밤비가 아침까지 계속하니 물이 언덕을 치네

하계下界에서는 연기와 티끌을 피할 곳이 없건만

상방上方(절) 누각은 하늘과 가지런하네

흰구름은 자욱한데 뉘게 줄거나

누런 잎이 휘날리니 길이 아득하네

내 동원東院에 가서 참선 이야기 하려 하니

밝은 달밤에 괴이한 새 울게 하지 말아라

 

동방 사찰 중 제일의 전망, 수종사 수종사는 운길산에서도 가장 전망이 좋은 곳으로 절에서 보면 양수대교를 비롯한 양수리와 북한강 일대가 확연히 한눈에 들여다보인다.

 

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

도우려 들지 말아라

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당신의 도움은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

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제 자리를 떠난 별을 보게 되거든

별에게 충고하고 싶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 장 루슬로

 

1925년 홍수 때 떠내려 갔던 것을 1975년 새로 복원한 다산의 생가

다산과 그의 아내 숙부인 풍산 홍씨를 합장한 묘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 정양용은 학문을 실생활과 연관시키는 한편, 실학의 학문적 입장을 정리하는 데 힘썼다. 그는 서학과 청대의 고증학까지 수영하여 학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기존의 유학에서 독립하는 기반을 만들었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바다나루에서 팔당댐 호수 둘레에 당집이 여덟 군데가 있었다고 해서 팔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고, 또 한편에선 한강가에 넓은 나루가 있었으므로 바다나루, 바대이, 바당이 하다 팔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팔당대교 팔당대교를 벗어난 물은 한강으로 흐를 것이다. 예로부터 한강을 낀 중부지방은 이 나라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한강을 얻으면 흥하고 빼앗기면 망한다"라는 말이 있었다.

삼국시대의 전략 요충지 아차산성 이 성은 삼국시대의 전략 요충지로 삼국의 쟁탈대상이었다. 백제가 초기 광주에 도읍을 두었을 때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여 쌓았다고 한다.

삼전도비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 김상헌

 

경복궁의 역사役事가 언제나 끝나 그리던 가속을 만나볼까

에에헤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도편수의 거동을 봐라 박통을 들고서 갈팡질팡한다

- <경복궁타령>

 

왕십리 처녀는 풋나물 장수로 나간다지 고비 고사리 두릎나물 용문산채를 사시래요

건드렁 건드렁 건드렁거리고 놀아보자…… 애오개 처녀는 망건 장수로 나간다지

인모망건 경조망건 곱쌀망건을 사시래요

- <건드렁타령>

 

한강수라 맑고 깊은 물에

풍덩실 빠져 애고 나는 못 죽어

- <한강수타령>

 

한강수 푸른 물아

너는 어찌 늙지 않어

만고불변 한결같이 흐르는데

…… 에헤야 무정할 손

사람만이 늙는구나

- <한강수타령> 평택지방

 

다리는 권력의 영역이 공간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모습이다.

- 헤겔

 

한강의 다리 노량나루에는 제1한강교가 놓여졌고, 양화나루에는 제2한강교가, 한강나루에는 제3한강교가, 송파나루와 광나루 부근에는 잠실대교와 천호대교가 놓여지며, 한강의 나루는 점차 없어져 간다.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산모롱이 사이로는 낚싯배가 아련하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 이병연

 

이태원이 목멱산 남쪽에 잇다. 입으로 전하는 말로는 임진왜란 후에 항복하고 귀순한 왜인들을 숭례문 밖 남산 아래에 살게 함에 스스로 한 마을을 이루고, 그 마을 이름을 이타방異他邦이라고 하던 것이 후에 이태원으로 바뀌었다.

- 『동국여지비고』 역원조

 

동東잠실이 성동 아차산 아래에 있다. 내시가 맡아본다. 지금 새로 새잠실을 한강 아래 원단동에 설치하고 역시 내시로 하여금 맡아보게 하고 있다.

서西잠실은 도성에서 서쪽으로 10여 리쯤에 있다. 곧 옛날의 연희궁이다.

이들 잠실마다 별좌別坐 2인으로 전담하게 하다가 별좌를 상의원尙衣院에 예속시키고 여름철에 현지로 가서 누에를 치고 그 일을 마치면 상의원으로 돌아와서 근무하게 하였다. 동서 잠실로 하여금 제각기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승정원에 납품하게 하고 이것을 검사하여 잘 되고 못 된 정도에 따라 상도 주고 벌하기도 한다.

남강에 있는 밤섬에서도 여러 가지 종류의 뽕나무를 심고 해마다 뽕잎을 따서 누에를 친다. 지난날에는 도성 안 지체 높은 집이라도 겨우 서너 집 정도가 누에를 치더니, 이제는 지체 높은 집뿐만 아니라 가난한 집 부녀자까지도 누에를 치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므로 자연히 뽕잎 값이 폭등하여 요즈음에 와서는 많은 사람들이 뽕나무를 심어 이득을 챙긴다.

- 『용재총화』, 10권

 

강원도 뗏목장수 뗏목 빼앗긴 채 울고 가고 전라도 알곡장수 통배 빼앗기고 울고 가면 삼개(마포) 객주 발 뻗고 울고 노들나루 색주가 머리 잘라 판다.

- <한강원가>

 

성삼문 등 여섯 충신이 사형을 당할 당시 서울은 형용할 수 없을 지경으로 혼란에 빠졌던 까닭에 그들의 시체를 묻을 겨를조차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밤중에 남몰래 이곳에 시체를 모시었으니 창망중에 그 시체들이 제대로 챙겨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사육신 신도비

 

노량진의 사육신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육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묘.

 

마포 8경

 

용호제월 - 용산강 물 위로 뜨는 달

마포귀범 - 마포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

방학어화 - 강 건너 방학 언덕의 밤낚시

율도명사 - 밤섬의 깨끗한 모랫벌

농암모연 - 동바위마을의 저녁 연기

우산방축 - 와우산의 소 말 방축

양진낙조 - 양화나루의 석양 무렵의 낙조

관악청람 - 관악산의 맑은 날의 아지랑이

 

조선시대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로 목덜미가 까맣게 탄 사람은 왕십리 미나리장수, 얼굴이 까맣게 탄 사람은 마포 새우젓장수라 하였다. 그 이유는 왕십리에서 아침에 도성 안으로 미나리를 팔러 오려면 아침 햇빛을 등뒤에 지고 와 목덜미가 햇빛에 탔기 때문이고, 마포에서는 아침에 도성 안으로 새우젓을 팔러 오려면 아침 햇빛을 앞으로 안고 와 얼굴이 햇빛에 새까맣게 탔기 때문이다.

- 『동명연혁고』 마포구편

 

한강 개발과 여의도 건설의 일환으로 하구를 넓혀 한강 물이 잘 흐르도록 총 17,393평의 밤섬을 폭파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부군당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어 17대를 살아온 62가구 443명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 어업과 도서업에 종사하고 있다. 밤섬은 주로 돌산으로 되어 있는데 서울특별시는 이 섬을 폭파하고 여의도 축석에 필요한 잡석 114,000㎥를 캐낼 방침이다. 서울특별시는 거주민에게 토지와 건물 보상비를 지급,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청평 대지에 연립식 주택을 건설하여 5가구씩 살게 할 방침이다.

- 동아일보 사회면 1968년 2월 10일자

 

밤섬에서는 친척끼리도 당사자들이 마음만 맞으면 시집도 가고 장가도 든다. 비록 4촌 5촌간의 근친이라 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홀아비나 과부가 생기면 따로 혼처를 구하지 않고 동거하는 것을 조금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사방이 강물로 둘러서 이웃한 마을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행하는 일이 남의 이목에 띄지 않는 것을 기화로, 깊고 얕은 강물을 건너 섬을 드나들 때면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는 등 음란하기 이를 데 없다.

- 《명종실록》 11년(1556년) 4월 초 당시 밤섬 풍습

 

찾으니 장강長江인데 강 건너 은모래벌

벌 지나 뫼이온데 뫼 넘어 구름일세

천지의 봄바람이 불어 왕래하더라

- 노상 이은상

 

천하엔 본시 일이 없건만

속인이 제 스스로 소란스럽네

 

이 시구는 정말 빼어나다. 그러나 속인이 소란스러운 것이야 그렇다 해도 지혜 있다는 자가 소란스럽게 되면 그 재앙이 크고 작음에서 반드시 구별이 있는 법이다.

- 주국정朱國禎 『자술』중에서

 

양화진의 절두산 마치 누에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어서 잠두봉이라 하였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정경은 그림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경치는 대원군에 의해 천주교인의 대량 처형장소가 되면서 지금은 절두산 천주교 성지가 되었다.

 

한강의 옛 나루터 양화라고 하는데

좋은 경치 골라 지으니 물가 가까우네

문득 들으니 우는 기러기 모래판에서 일어나네

- 예겸

 

경기지방의 경치로는 한강이 으뜸이다. 누대가 높이 구름을 막고 물이 푸르러 거울이 떴다. 나루로는 양화도가 있는데 물살이 번성하여 팔도의 물산을 모으고 나라의 빼어난 경치와 그 중요한 구실을 밝혀주고 잇고 옷깃과 같이 중요한 부분이 된다.

- 『동국여지승람』

 

양화도 어귀에서 뱃놀이 하니

별천지가 바로 예로구나

어찌 신선과 학을 타고 놀아야만 하는가

해가 서산마루에 지면서

황금의 물결 이루노니

흥이 절로 인다

- 서거정

 

한강변 최대의 명소 망원정 합정동에 위치하고 있는 옛 모습의 정자로서 1925년 큰 홍수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1989년에 복원되었다. 세종의 형이었던 효령대군이 별장을 지어 강상의 풍경을 즐기던 곳이었다.

 

한강

 

박노해

 

한강의 가슴을 연다

여윈 여미의 가슴처럼

주름진 강심江心이 소리 없이 열려 흐른다

 

얼어붙은 겨울 속으로

숨죽이며 흐느낌으로 흐르던

눈물 강물

 

봄은 멀은데

병든 가슴, 지친 노동에

탄식하며 탄식하며 쓰러져

몰아치는 찬바람에

다시 아귀찬 이를 물며 일어서 흐르는

사랑이여 모진 생명이여

 

강물은 흐르고

더러움과 오욕에 뒤섞여

 

거칠게 한강은 흐르고

살얼음을 뒤척이며

어두운 겨울 속으로

봄을 부르며

봄을 부르며

 

소리 없이 열려 흐르는

눈물이여 강물이여

 

고려 공민왕 때에 평민 형제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 두 덩이를 주워서 형에게 하나 주었다. 나루터에 와서 형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을 물 속에 던지므로 형이 괴이하게 여겨서 물으니, 대답하기를 "제가 평소에 형님을 독실하게 우애하였는데, 금을 나누어 가진 다음에는 형님을 꺼리는 마음이 갑자기 생깁니다.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니, 강에 던져서 잊어버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였다. 형이 말하기를 "네 말이 참으로 옳다" 하고, 형도 또한 금을 물에 던졌다. 그때 같은 배를 탔던 자는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던 까닭에, 그 형제의 성씨와 거주하는 마을을 묻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 『동국여지승람』 투금탄(안양천 앞 한강여울)에 대해

 

방화대교 인천 영종도 국제공항과 육지를 연결한다. 한강 다리 중 가장 길며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행주대첩비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의 하나로, 행주치마의 전설을 안고 있는 행주대첩을 기념하는 비.

 

강 1

 

이성복

 

남들은 저를 보고 쓸쓸하다 합니다

해거름이 깔리는 저녁

미루나무숲을 따라갔기 때문이지요

 

남들은 저를 보고 병들었다 합니다

매연에 찌들려 저의 얼굴이

검게 탔기 때문이지요

저는 쓸쓸한 적도 병든 적도 없습니다

서둘러 그들의 도시를 지나왔을 뿐입니다

 

제게로 오는 것들을 막지 않으며

제게서 가는 것들을 막지 않으며

그들의 눈 속에 흐르는 눈물입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흙탕물에 젖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숫타니 파타

 

 

황지우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 보면

조선팔도,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내행선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 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닻이었구나

 

휴전선의 남쪽 끝, 애기봉 쑥갓머리산에는 평안감사와 사랑을 나누었던 애기의 슬픈 사연이 서려 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애기봉에 비를 세웠다.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 맹자

 

한강

 

이근배

 

내일로 흐르는 강

호랑이처럼 내닫고

용이 되어 오르는 강

꺼지지 않는 불꽃의 강

우리들의 비원인

통일을 실어오는 강

 

오오 일어서라

 

천둥처럼 지축을 흔들고

가슴에 담은 산 같은 기쁨 터뜨려

이 땅에 가득하리라

종소리가 되리라

목숨이 되리라

 

 

 

posted by 황영찬
2016. 11. 8. 17:27 내가 읽은 책들/2016년도

2016-023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2

 

금난새 지음

2007, 생각의나무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07096

 

670.15

금19219클 2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012

 

클래식 음악 입문자들을 위한 가장 재미있고 훌륭한 안내서

금난새

 

행복을 선사하는 무대 위의 나는 새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베를린 음대에서 라벤슈타인에게 사사했다. 1977년 최고 명성의 카라얀 콩쿠르에 입상한 후 KBS교향악단과 수원시향의 지휘봉을 잡았으며, 1998년 '벤처 오케스트라' 유라시안 필하모닉을 창단했다.

연주회마다 선보인 '파격'과 '독특한 시도'는 클래식 음악회는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청중과 함께 호흡하는 무대를 만들어냈다. 특히 '해설이 있는 청소년 음악회'는 지휘자 금난새를 스타덤에 올린 간판 프로그램으로 6년간 전회 전석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클래식 음악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도서관 음악회', '해설이 있는 오페라', '포스코 로비 콘서트', '캠퍼스 심포니 페스티벌', '뮤직 인 잉글리쉬' 등 철저한 고객지향의 프로젝트로 큰 호응을 얻었으며, 메세나협의회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사업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고 있다. 기업과 예술의 호혜적 파트너십을 이루어낸 공적으로 2006 한국 CEO 그랑프리 문화예술부붐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2006년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하였으며, 경희대 음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신선한 발상으로 늘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지휘자 금난새는 클래식 음악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정다운 메신저로서 무대와 청중을 찾아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 펼쳐 가고 있다.

 

1970년    서울대 음대 작곡과 졸업

1974년    카라얀 국제 지휘콩쿠르 입상

1980년    KBS교향악단 전임 지휘자

1989년    KBS교향악단과 국내 최초 오케스트라 녹음 출반.

             (생상 '동물의 사육제', 프로코피에프 '피터와 늑대')

1992년    수원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1994년    '해설이 있는 청소년음악회' 기획 · 진행

1998년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창단

2002년    CJ그룹과 오케스트라 후원 계약 체결,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 홍보대사

2005년    유라시안 필하모닉 충무아트홀 상주(~2006. 12. 31)

2006년    베르사유 특별연주, 류블리아나 뮤직페스티벌 총청연주

             경기필하모닉 예술감독 취임

 

현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경희대 교수

 

차례

 

머리말

 

1 체코 민족의 자긍심을 음악으로 드높인

    드보르작 vs 스메타나

보헤미아의 브람스, 드보르작 |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 스메타나 | 정육점집 아들에서 국민 작곡가로 | 스메타나의 지극한 나라 사랑 | 신세계에서 고향을 그리다 | 불행으로 점철된 비운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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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스트리아 최후의 낭만적 심포니스트

    말러 vs 부루크너

20세기에 불어온 말러 열풍 | 네번째 위대한 B, 브루크너 | 작곡가이자 지휘자로서의 '이중생활' | 초등학교 선생님에서 늦깎이 작곡가로 | 영원한 주제, 삶과 죽음 | 성스럽게 쌓아올린 9개의 교향곡 | 교향곡 9번의 징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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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맑고 투명한 북구의 서정 시인

   시벨리우스 vs 그리그

핀란드의 음악 영웅, 시벨리우스 | 북구의 쇼팽, 그리그 | 법학도에서 작곡가로 | 친구를 만나다, 민족음악에 눈뜨다 | 러시아가 두려워한 금지곡 <핀란디아> | 별장 '아이놀라', 그리고 30년의 침묵 | 솔베이그의 노래, 그 지고지순한 사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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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탈린 시대를 견뎌낸 러시아 현대음악가

    쇼스타코비치 vs 프로코피에프

스탈린 체제하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운동 | 조국 러시아를 지키다 | 망명의 길을 떠나다 | 스탈린의 탄압을 극복하고 | 돌아온 탕아, 걸작을 쏟아내다 | 영화 음악과 재즈에도 관심 |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쓴 음악동화

|금난새의 추천음악|

 

5 프랑스 음악계의 아름다운 아웃사이더

    비제 vs 생상

로마 대상을 거머쥔 비운의 작곡가 | 로마 대상에서 낙방한 '프랑스의 모차르트' | 근대 프랑스 음악의 아버지 | 니체도 탄복한 오페라 <카르멘> | 오페라 속의 팜파탈, 카르멘과 델릴라

|금난새의 추천음악|

 

6 현대음악의 두 거목

    스트라빈스키 vs 바르토크

파리 음악계를 발칵 뒤집어놓다 | 민요 채집에 정열 쏟은 현대음악가 | 흥행 천재 디아길레프와의 운명적 만남 | 알아주는 이 없는 외로운 창작의 길 | 평생 떠돌이 이방인으로 살다 | 천재, 백혈병에 걸리다

|금난새의 추천음악|

 

7 한 폭의 그림처럼 한 편의 영화처럼

   무소르그스키 vs 라흐마니노프

러시아 5인조의 백미 | 최후의 낭만주의자, 라흐마니노프 | 죽은 친구의 그림을 음악으로 | 신경쇠약의 슬럼프를 극복하고 | 알코올 중독과 처절한 만년 | 돌아오지 못할 망명의 길

|금난새의 추천음악|

 

서양사와 음악사 연대표

CD 수록곡 해설

 

1882년의 안톤 드보르작. 그는 브람스의 은혜를 입어 작곡가로서 성공가도에 발을 들여놓았다.

짐로크 사의 상업적 기획으로 큰 성공을 거둔 <슬라브 무곡집>의 타이틀 페이지(위)와 드보르작의 자필이 담긴 악보 첫 페이지(아래). 이 작품집으로 드보르작은 국제적인 스타가 되었다.

스메타나의 <체코 무곡집> 타이틀 페이지. 그는 오페라에 민족적 요소들을 도입했는데 특히나 폴카, 프리안트 등의 민속무용 리듬을 즐겨 차용했다.

1866년 5월 30일 체코 프라하 가설 국민극장에서 초연된 <팔려간 신부>의 상연 프로그램.

1909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된 <팔려간 신부>에서 신부 역을 맡았던 소프라노 에이미 데스틴. 이 공연에서는 말러가 지휘를 맡아 <팔려간 신부>를 미국 청중에게 처음으로 소개했다.

말년의 드보르작. 귀국 후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 상원의원을 지냈고, 프라하 음악원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간장병으로 1904년 5월 1일에 숨을 거두었다.

프라하 거리를 지나 위대한 체코인들의 안식처인 비세라드 성의 묘지로 향하는 드보르작의 장례 행렬.

1860년에 결혼한 스메타나와 그의 두번째 아내 베티나 페르디난도바. 그러나 그들의 결혼생활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고, 스메타나는 말년 내내 전처와 두 딸을 그리워하는 나날을 보냈다.

스메타나의 후기 작품들인 <비밀>과 <악마의 벽>을 초연한 체코 국민극장 내부.

말년의 스메타나. 그는 정신착란 증세에 시달리다가 60세의 나이에 프라하 정신병원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 사진은 마지막 정신착란이 엄습하기 직전의 모습을 담았다.

빈 국립가극장 복도에 세워진 말러의 흉상. 이 흉상은 1909년 말러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오귀스트 로댕이 빚은 것이다. 말년의 말러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는데, 그는 2년 뒤인 1911년에 숨을 거두었다.

6세 때의 말러. 그는 1860년 보헤미아 칼리슈트(현 체코령)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독일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모라비아로 이주한 그는 유년시절부터 음악에 눈떴고, 열다섯 살부터 빈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페리 베라턴이 그린 안톤 브루크너의 초상화. 그의 나이 64세였던 1888년에 그려졌다. 그는 베토벤과 말러 시대 사이의 가장 중요한 교향곡 작곡가로 꼽힌다.

1892년 런던 코벤트가든에서 함부르크 가극단과 함께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전곡 연주 지휘했던 시절의 말러.

말러를 만나기 전부터 전도유망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친 말러의 부인 알마. 그러나 말러는 아내의 활동을 지지하지 않았고, 알마는 남편이 자신의 재능을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결혼 후부터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성 플로리아누스 수도원의 파이프 오르간. 브루크너는 이곳에서 음악교육을 받은 뒤 오르간 주자로 일했다. 이곳에서 작곡을 시작한 브루크너는 수도원에 큰 애정을 품고 있었고, 10년간 이곳의 오르간을 쳤다. 현재 이 오르간은 '브루크너의 오르간'으로 불린다.

오르간 앞에 앉은 만년의 브루크너를 묘사한 오토 벨러의 실루엣화. 브루크너는 작곡가 이전에 오르가니스트로 명성이 높아 런던과 파리에서 연주를 했는데, 그중에서 런던의 크리스털 팰리스(수정궁)에서의 콘서트가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1907년 빈 가극단의 음악감독 자리를 사임하기 직전의 말러. 그는 그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객원지휘자로 일했고, 나중에는 뉴욕 필하모닉 협회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는 타협을 모르는 투사였고, 다혈질이었으며 완벽주의자였다.

1863년 39세 때의 브루크너. 이 해에 바그너의 <탄호이저>가 린츠에서 공연되었고, 브루크너는 이에 깊은 감명을 받아 바그너를 찾아가 자신의 악보를 보여주기도 했으나 사실 그와 바그너는 음악적으로 거의 대척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브루크너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에게 큰 감명을 준 작곡가 바그너. 그는 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오페라와 달리 연극적 요소를 더 강하게 부각시킨 악극(Musikdrama)의 창시자로, 독일 민족주의를 고취시켜 당대 지식인 사회와 지배층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1년 말러의 장례식을 그린 쇤베르크의 그림.

핀란드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악세리 갈렌 칼레라가 1894년에 그린 시벨리우스의 초상화.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국보급 음악가다.

'북구의 쇼팽'이라 불리는 노르웨이 작곡가 에드바르드 그리그. 그는 노르웨이 음악을 세계에 널리 알렸을 뿐 아니라 프랑스 인상파 음악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그에 대한 노르웨이 국민들의 애정은 각별하고 극진하다. 오늘날 세계 주요 음악제 중 하나인 베르겐 음악제가 노르웨이에서 최초로 열렸을 때 60세를 맞은 그리그는 축제의 주인공이었다.

헬싱키 음악원 바이올린 반의 시벨리우스(뒷줄 왼쪽). 이곳에서 시벨리우스는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마르틴 베겔리우스로부터 작곡을 배웠는데, 바이올리니스트를 지망했던 시벨리우스는 그 영향으로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문호 헨릭 입센. 입센과 그리그는 그리그의 청년 시절, 로마에서 만났고, 이 만남에서 <페르 귄트>라는 걸작이 탄생한다.

그리그의 고향 베르겐에 위치한 그리그 자택의 작업실.

화가 악세리 갈렌 칼레라가 그린 시벨리우스(맨 오른쪽)와 핀란드 작곡가 로베르트 카야누스, 그리고 화가 자신.

1907년 아이놀라 별장의 시벨리우스. 그는 1904년 헬싱키 근교에 이 별장을 짓고 아내의 이름을 딴 애칭을 붙였다.

아이놀라 별장에서 시벨리우스와 지휘자 유진 오먼디. 오먼디는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미국에 처음 소개하여 격찬을 받았다.

1898년 경의 그리그와 그의 부인 니나를 그린 그림. 성악가였던 니나 하구르프는 남편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스탈린의 전체주의에 의한 '즈다노프 비판'의 첫번째 희생양이었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천명될 즈음 그가 무대에 올렸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금지곡이 되어 29년 동안이나 암흑 속에 묻혀 있어야 했다.

교향곡 제7번을 작곡중인 쇼스타코비치. 그는 서방으로 망명한 많은 작곡가들과는 달리 끝까지 고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결국 스탈린이 죽은 후 다시 복권되었다.

<빈대>의 상연을 준비하기 위해 모인 쇼스타코비치, 시인 마야코프스키, 연출가 메이어홀드 등 당대 러시아 최고의 예술가들.

소련 작곡계의 총아로 떠올랐던 젊은 시절의 쇼스타코비치. 브루노 발터,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은 그의 교향곡을 앞 다투어 소개했다.

1934년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유년시절의 프로코피에프.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운 그는 다섯 살에 즉흥연주를 했으며 아홉 살에 오페라를 작곡하는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다.

러시아를 떠나기 직전의 프로코피에프. 짧은 일정을 예정하고 고국을 떠났던 그는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18년 동안이나 외국을 떠돌게 된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의 공연 DVD. 스탈린은 이 작품을 관람하던 도중 작품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리하여 작품은 러시아 제일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연출했던 1934년의 초연 이후 내내 금지 되었다가 흐루시초프가 집권한 이후에야 다시 무대에 올려질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를 전체주의와 싸우는 투사로 묘사한 미국 《타임》지. 냉전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서방 작곡가들은 너도나도 그의 작품을 연주하려 했다.

영화, 연극, 발레에 두루 관심을 가졌던 프로코피에프의 또다른 작품,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장면.

러시아 영화사에 길이남을 에이젠슈타인과 프로코피에프의 협력작들. 영화 <이반대제>(위)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아래).

'형식주의자'로 매도당했던 러시아의 위대한 세 음악 거장. 왼쪽부터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

19세에 로마 대상을 수상하며 프랑스 음악계의 천재로 떠올랐던 작곡가 조르주 비제. 그러나 야심작 <카르멘>의 실패를 견디지 못하고 36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했다.

로마 대상을 수상할 당시 열아홉 살의 야심만만한 비제. 그는 열여덟 살에 <다윗>이라는 칸타타로 로마 대상에 도전했으나 2위 입상에 그쳤고, 다음해에 칸타타 <클로비스와 클로틸드>로 재도전, 마침내 로마 대상을 거머쥐고야 만다.

프랑스 및 전 세계의 유명 인사들이 잠들어 있는 파리 페르 라 셰즈 묘지에 있는 비제의 무덤.

비제와 동시대를 살았던 또 한 사람의 음악 천재 생상. 그의 재능은 비단 음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어서 그림과 시, 철학, 천문학 등 다방면에 대단한 식견을 보였다.

10세 무렵의 생상. 그는 1846년 5월 파리의 살 프레이엘에서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협주곡을 연주하여 '신동'으로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23세 때의 생상. 당시 그는 파리 음악원의 일등상을 수상한 뒤, 파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들렌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자리에 오름으로써 프랑스에서 가장 인정받은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또한 그해에 파리 박람회에서 주최한 작곡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가 그린 사라사테의 초상 <흑의 습작>. 생상이 최초로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은 이 스페인의 연주자 겸 작곡가에게 바친 것이었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공연 포스터. 초연 때 파리 시민들로부터 차갑게 외면당한 이 작품은 현재 세계 3대 오페라 중 하나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이 되었다.

후대의 디아길레프가 무대에 올린 <카르멘>의 무대 의상 스케치.

스페인 감독 카를로스 사우라가 현대판으로 각색하여 만든 영화 <카르멘>. <카르멘>을 무대에 올리려는 배우와 연출가가 극의 내용과 똑같은 감정에 휘말리게 된다는 '극중극' 형식을 차용해 국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카르멘 역을 맡았던 19세기 미국 메조소프라노 미니 호크. 그녀는 1877년 브뤼셀 무대에서 이 역할을 처음으로 맡아 이후 500회가 넘도록 프랑스, 이탈리아, 영어 버전으로 공연하였다. 그녀는 미성(美聲)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나 팜 파탈인 카르멘 역할에 요구되는 강렬함과 관능적 표현의 대가였다고 전해진다.

생상의 이국취향과 신화에 대한 관심은 <삼손과 델릴라> <나일 강가에서> 등의 대표작에 반영되었다. 그림은 귀스타브 모로가 그린 <오르페우스의 목을 쥔 파코스의 무녀>(1865).

<삼손과 델릴라>의 클라이맥스 장면. 이 작품은 1877년 바이마르에서 먼저 초연되었고, 1892년이 되어서야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상연할 수 있었다.

큐비즘 화가 알베르 그레즈가 그린 스트라빈스키의 초상. 스트라빈스키는 <봄의 제전>에서 혁신적인 퀴비즘 예술 강령을 따랐으며 또한 퀴비즘을 선포한 여러 예술가들과 친분을 나누었다.

에른스트 폰 도흐나니, 졸탄 코다이와 함께 서영음악계의 변방이었던 헝가리의 음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작곡가 벨라 바르토크.

니콜라스 레리히가 그린 발레 <봄의 제전>의 의상 스케치. 1913년 파리 상젤리제에서 초연된 이 작품의 의상은 러시아 민속의상에서 모티프를 차용했다.

레온 박스트가 디자인한 <불새>의 의상. <불새>는 스트라빈스키와 디아길레프의 첫 협력작으로, 이후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전 유럽에 러시아 발레와 음악 붐을 일으킬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부다페스트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의 젊은 벨라 바르토크.

스트라빈스키(왼쪽)와 최근 작고한 첼리스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영국 BBC교향악단을 지휘하는 말년의 스트라빈스키. 그는 작곡가로 서뿐만 아니라 리듬을 자유자재로 살리는 리드미컬한 지휘자로서도 유명했다.

유년기와 청년기의 바르토크.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처음으로 음악에 눈뜬 그는 오스트리아의 명문 빈 음악원의 입학 허가를 받았으나 결국 유럽 음악의 중심지인 빈으로 가지 않고 자국의 부다페스트 음악원을 선택한다.

베니 굿맨, 요제프 시게티와 함께 <컨트라스트>를 녹음하는 벨라 바르토크. 1943년 백혈병 진단을 받은 그를 위해 세르게이 쿠세비츠키. 예후디 메뉴인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새로운 작품들을 의뢰했다. 그는 병마와 싸우면서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과 <피아노 협주곡 제3번> 등 걸작을 쏟아냈다.

러시아 음악비평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의 초상화(일리야 레핀 그림). 스타소프는 러시아 5인조 음악가들을 '막강한 소수'라 불렀으며 그들을 이론적으로 대변했다.

'최후의 낭만주의자' 라흐마니노프(보리스 샬리아핀이 그린 초상화). 190센티미터의 거구에 걸맞게 연주 스케일이 유달리 컸던 그는 모든 피아노 기법을 구사하는 천재였으며, 작곡한 피아노곡 역시 스케일이 크고 음역이 넓은 고도의 기교가 필요한 곡들이었다.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이 그린 <춤추는 남녀>. 이들은 우크라이나 민속무용인 고파크를 추고 있는데, 러시아 문호 고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 <소로친스카야 시장> 등도 이 고파크 무용곡의 특색을 살린 것이 특징이다.

러시아가 낳은 불세출의 명가수 표도르 샬리아핀. 그는 라흐마니노프의 친구였으며,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러시아 음악의 매력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러시아 음악의 전도사였다.

글라주노프의 성의 없는 지휘로 첫 공연이 실패로 돌아가 의기소침해 하던 시절의 라흐마니노프. 그는 이 시절 작곡을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했으나 최면요법으로 이를 극복하고 4년 뒤 재기하여 격찬을 받았다.

세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집필할 당시의 라흐마니노프.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던 만년의 무소르그스키 초상. 그는 과음한 끝에 42세 생일 직후 숨을 거두었다.

근위대의 사관학교에 입학한 13세의 무소르그스키. 귀족 자제가 군대에 복무하는 것은 당시 러시아에서는 당연한 코스였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근위대에 입대한 17세의 무소르그스키는 이곳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보로딘과 발라키레프를 만나 그들과 자연스럽게 러시아 5인조를 형성하게 된다.

아들 라흐마니노프에게 일찍부터 피아노와 음악을 가르친 어머니 류보피 부타코바(위)와 가산을 탕진하고 파산한 부친 바실리 라흐마니노프(아래).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유년기의 라흐마니노프. 그는 엄격한 레슨으로 유명한 피아노 교수 니콜라이 즈베레프에게 피아노를 사사했는데, 즈베레프와 그의 문하생들은 안톤 루빈슈타인이나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거장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특권을 누렸다.

 

 

posted by 황영찬
2016. 10. 31. 14:56 내가 읽은 책들/2016년도

2016-022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여행

 

금난새 지음

2003, 생각의 나무

 

시흥시대야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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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15

금19219클

 

"클래식음악이 대체 뭐길래 공부까지 해야 한다는 거야? 귀찮게시리."

지오디(god) 노래는 아무 준비 없이도 신나게 들으며 즐길 수 있는데 말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바꾸어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클래식은 룰을 알고 즐기는 야구 게임과 같다"라고.

룰을 모르고 보면 아무 흥미도 가질 수 없는 게임에 불과하지만 몇 가지 룰을 익히면

너무나 흥미진진하게 즐길 수 있는 야구게임 말입니다.

클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준비 없이 들으면 어렵고 막막한 것에 불과하지만

조금만 공부를 하고 들으면 음악이 주는 환희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답니다.

지오디(god)의 노래가 특별한 룰을 알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공놀이라면,

클래식은 룰을 알아야 즐길 수 있는 야구경기인 셈입니다.

 

금난새

 

현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경희대 교수

행복을 선사하는 무대 위의 나는 새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베를린 음대에서 리벤슈타인에게 사사하였다. 1977년 최고 명성의 카라얀 콩쿠르에 입상하였고, KBS 교향악단과 수원시향의 지휘를 맡아 활약했다.

연주회 때마다 선보인 '파격'과 '독특한 시도'는 클래식 음악회는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청중과 함께 호흡하는 무대를 만들어냈다. '해설이 있는 청소년 음악회'는 지휘자 금난새를 스타덤에 올린 대표적인 간판 프로그램으로 6년간 전회 전석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클래식 음악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지휘자 겸 음악감독이자 '기업형 오케스트라'의 CEO로 각종 기업체 공연과 '도서관 음악회', '베토벤 페스티발', '포스코 로비 콘서트' 등 탁월한 기획력과 철저한 고객지향 서비스로 민간 오케스트라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새로움에 대한 부담보다 '도전' 그 자체를 즐기는 지휘자 금난새는 클래식 음악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정다운 메신저로서 새로운 무대 창출로 클래식 대중화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1947년   부산 출생

1970년   서울대 음대 작곡과 졸업

1974년   베를린 음대 유학

1977년   카라얀 국제 지휘 콩쿠르 입상

1980년   KBS교향악단 전임 지휘자

1989년   KBS교향악단과 국내 최초 오케스트라 녹음 출반

             (생상 '동물의 사육제', 프로코피에프 '피터와 늑대')

1992년   수원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1994년   '해설이 있는 청소년음악회' 기획 · 진행

1998년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창단

2002년   CJ그룹과 오케스트라 후원 계약 체결,

             한국기업메세나 협의회 홍보대사

 

차례

 

머리말

 

1  클래식 음악에 관한

       몇 가지 질문

 

클래식 음악이란? | 클래식 음악은 서양음악을 뜻한가? | 클래식은 어렵다? | 클래식만이 고급음악이다? | 클래식을 권하는 이유

 

2 음악의 아버지와 어머니,

      바흐헨델

 

요한 제바스티한 바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 음악명문 출신 바흐, 의사의 아들 헨델 | 교회음악가 바흐 | 사업가 헨델 | 코스모폴리탄 헨델 | 진지한 바흐, 대중적인 헨델 | 스무 명의 자녀를 둔 바흐, 평생 독신으로 지낸 헨델 | 닮은꼴 죽음 | 고전음악의 모태, 바로크 | 탐험시대가 낳은 아이, 바로크 | 바로크 음악의 특징

| 쉽게 풀어쓴 음악상식 |   | 금난새의 추천음악 |

 

3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 | 대장간 집 아들 하이든 | 아이 같은 모차르트, 아버지 같은 하이든 | 마지막 궁정 음악가 | 교향곡의 아버지 | 자유를 갈망한 모차르트 | 모차르트의 오페라 | 너무 일찍 떠난 천재 | 하이든의 나라사랑 | 고전주의 음악을 완성하다

| 쉽게 풀어쓴 음악상식 |   | 금난새의 추천음악 |

 

4 고뇌하는 예술가 베토벤

      음악의 미식가 로시니

 

루트비히 판 베토벤, 조아키노 로시니 | 가혹한 어린시절 | 짧은 학력, 넘치는 학구열 | 계몽사상 | 프랑스 대혁명 | 빈으로 간 베토벤 | 당당한 음악가 베토벤 | 시련에 맞선 투쟁 | 마음의 세계를 표현한 말년 | 이탈리아 천재소년 로시니 | 청중의 인기를 한 몸에 | 작품과 작곡가 그리고 사회

| 쉽게 풀어쓴 음악상식 |   | 금난새의 추천음악 |

 

5 가난한 가곡의 왕 슈베르트

      귀공자 멘델스존

 

프란츠 페테르 슈베르트,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 뛰어난 재능을 보인 소년 슈베르트 | 축복 받은 탄생, 멘델스존 | 가난한 방랑자의 길을 택하다 |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잇는 다리 | 천진난만한 예술가 | 바흐를 부활시키다 | 가곡의 왕 슈베르트 | 지휘자 멘델스존 | 생의 끄트머리에서 남긴 걸작, <겨울 나그네> | 낭만파 음악

| 쉽게 풀어쓴 음악상식 |   | 금난새의 추천음악 |

 

6 피아노의 시인 쇼팽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닌 인기스타 리스트

 

피아노를 사랑한 쇼팽과 리스트 | 수줍은 음악 천재 | 영원한 조국사랑 | 파리를 떠들썩하게 한 천재음악가 | 피아노의 시인 | 조르주 상드와의 사랑 | 헝가리의 천재소년 | 오빠부대를 이끈 인기 스타 | 교향시와 피아노곡 | 성직자 리스트

| 쉽게 풀어쓴 음악상식 |   | 금난새의 추천음악 |

 

7 고전적 낭만주의자 브람스

      종합예술가 바그너

 

브람스파 vs 바그너파 | 가난한 천재, 브람스 | 일생을 바꾼 두 번의 기회 | 스승의 아내를 향한 일편단심 | 고전적 낭만주의 | 바그너와의 대립 - 표제음악과 절대음악 | 클라라를 뒤따른 죽음 | 바그너, 불우한 어린시절 | 오페라 카펠마이스터 | 혁명 그리고 도피 생활 | 종합예술론 | 바그너의 여인들 | 편안한 말년

| 쉽게 풀어쓴 음악상식 |   | 금난새의 추천음악 |

 

8 러시아 음악의 선구자

      차이코프스키림스키-코르사코프

 

러시아 음악의 발전 |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감추고 |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음악가의 길로 | 내성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차이코프스키의 사랑 | 후원자 메크 부인 | 러시아 음악을 세계로 |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교향곡 <비창> | 음악을 사랑한 해군장교 | 전문적인 음악가로 | 그림 같은 음악, 토속적인 음악 | 국민주의 음악과 5인조 | 황제에게 맞서다!

| 쉽게 풀어쓴 음악상식 |   | 금난새의 추천음악 |

 

9 프랑스의 자존심을 되살린

      드뷔시라벨

 

프랑스 음악의 자존심을 회복하다 | 형식을 거부한 반항아, 드뷔시 | 프랑스를 대표하는 음악가 | 인상주의와의 만남 | 다양한 음악에 대한 관심 | 전통을 계승하여 현대를 이끌어낸 라벨 | 신고전주의 | 관현악의 마술사 | 다양성과 조화의 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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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와 음악사 연대표

CD 수록곡 해설

바이올린과 기타, 곤잘레스, 1913

음악은 미술뿐 아니라 다른 예술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가 어렵게 생각하는 클래식 음악도 음악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 속한 하나의 분야이지, 별개의 것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성녀 세실리아

음악의 수호성인인 세실리아에 관한 그림은 많이 그려졌다. 왼쪽은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미힐 반 코크셰의 작품이며, 오른쪽은 20세기 화가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이다. 시대에 따라 그녀를 표현하는 방식이나 연주하는 악기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클래식 음악이 어렵다는 편견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일지 모른다.

음악 파티, 필림 메르시

대개 클래식을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클래식도 당대에는 그 시대를 풍미했던 하나의 문화였다. 우리도 약간의 준비만 갖춘다면 누구라도 클래식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캐나다 전자음악 앙상블

기계적 장치에 의한 음악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클래식은 어렵고 낯설 수도 있다. 하지만, 클래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만들어진 음악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취향과 다른 것이지 음악 그 자체가 고급스럽다거나 어려운 것은 아니다.

악기 모양 과자들

18세기 후반 이후 사용된 과자 제조용 틀이다. 여러 가지 악기모양을 볼 수 잇다. 이런 틀을 보면 당시 클래식이 일상생활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 무덤에 그려진 벽화, 기원전 1400년경

활 모양의 큰 하프를 연주하는 음악가와 목이 긴 류트를 부는 동료가 그려져 잇다. 이처럼 오래된 음악의 역사 속에는 우리가 흔히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17세기에서 19세기 정도까지의 음악도 들어 있다. 클래식 음악도 피라미드, 스핑크스와 같이 오래도록 아끼고 소중히 해야 할 무형(無形)의 문화유산이다.

중국 당나라 때의 피리 부는 부인들

서양의 것이라고 클래식 음악을 폄하하거나 편견을 갖고 대하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이다. 서양 고전인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우리의 국악이나 다른 여러 나라의 고전 음악은 지금의 음악이 있게 한 근원이며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멜포메네와 에라토, 풀림니아, 르 쉬외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홉 명의 뮤즈 중 멜포메네, 에라토, 풀림니아를 그린 그림. 멜포메네는 비극을 주관하며 에라토는 서정시 또는 노래를 주관한다. 풀림니아는 찬가와 무악을 담당한다.

바흐의 초상화, E. G. 하우스만, 1746년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이 <3성의 카논> 악보이다.

오르간용 코랄 <샛별은 아름답게 빛나고> BWV 739

바흐의 자필 악보 중 현존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가 아른슈타트의 오르간 주자로 있던 1705년경에 씌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중년의 헨델, 필립 메르시에, 1720

헨델은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를 배워 오페라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 작품으로는 <수상음악>, <왕궁의 불꽃놀이>, <메시아> 등이 있다.

<수상음악>의 초판 표지

<수상음악>은 20개의 관현악곡으로 이루어진 모음곡이다. 전체적으로 명랑하며 화려한 느낌을 준다.

바흐의 초상화, 1715년

바이마르에서 궁정악단의 악사장으로 승진한 바흐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드레스덴 풍경, 베르나르도 벨롯토, 1748년

독일의 남동부 작센주에 위치한 드레스덴은 바흐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바흐는 드레스덴의 카톨릭 교회를 위해 <마태 수난곡>을 작곡하였고, 칸타타를 다수 작곡하였다. 1736년에는 드레스덴에서 궁정 작곡가의 칭호를 받기도 했다.

바흐의 막내 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바흐의 아들들 대부분이 음악가가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막내 아들은 '런던의 바흐'라고 불릴 만큼 이름을 떨쳤다.

템즈강의 불꽃놀이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1749년 5월 15일에 화이트홀 부근 템즈 강 위에서 행해진 불꽃놀이를 그린 그림. 이를 위해 헨델은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을 작곡했다. 이 곡은 <수상음악>과 함께 헨델의 곡중 가장 유명한 관현악 작품으로 손꼽힌다.

17세기 악기를 그린 정물화

종교 음악 중심이었던 음악이 1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변화되기 시작했다. 오페라의 등장으로 세속 음악이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이러한 음악들이 바로크 시대를 이끌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악기도 다양해졌는데 첼로, 바이올린, 만돌린 등이 그림에 보인다.

모차르트의 미완성 초상화, 요제프 랑게, 1782년경

모차르트와 의형제를 맺은 요제프 랑게가 그리다 만 미완성 초상화로 1782년부터 1783년 사이의 겨울에 그려졌다. 모차르트는 뛰어난 재능으로 인류 음악사에 영원히 남을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하이든의 초상, 루트비히 구텐브룬, 1770년경

같은 시대 활동했던 모차르트와 달리 하이든은 '파파 하이든'이라고 불릴만큼 점잖고 모범적인 성품으로 존경을 받았다.

1766년 여름 파리의 콩티 공(公) 살롱에서

모차르트가 반주를 하기 전 조율을 하고 있다(화면 왼쪽).

모차르트 일가, J. N. 델라 크로체, 1780년경

벽에 걸린 초상화는 1778년 7월 3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의 모친이다.

모차르트의 두 아들 칼과 볼프강

모차르트 사후 각각 13세, 6세 때의 모습.

콘스탄체 모차르트, 요셉 랑게, 1782

모차르트의 아내인 콘스탄체를 그린 초상화. 그녀의 형부인 요제프 랑게가 그렸다.

궁정 의상을 입고 있는 모차르트(위)와 난넬

이 의상은 1762년 가을에 여제가 하사한 옷이다. 난넬은 모차르트의 누이이다. 그녀 역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다.

하이든 초상화, 크리스찬 루트비히 제하스, 1785년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릴만큼 많은 교향곡을 작곡한 하이든. 그는 고전주의의 이상인 '균형과 조화'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음악 형식이 교향곡이었기 때문에 그토록 교향곡을 좋아했다.

작은 새를 쥐고 있는 소년 모차르트, 조포니, 1764년

음악적으로 재능이 뛰어난 모차르트였지만 철없는 어린애 같은 행동과 천재적인 재능에 대한 시기로 유달리 적이 많았다고 한다.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Paul Anton Esterhazy, 1711~62)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형으로 하이든을 부악장으로 고용하는 계약을 맺고 궁정의 음악적인 기초를 닦는 데 상당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하이든의 하프시코드

하이든이 런던에 머물 당시 사용하던 것이다. 이무렵 하이든은 때때로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면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천지창조>의 2개국 공용 악보

1800년 하이든 자신이 출판한 것이다. 헨델의 <메시아>와 함께 최고의 오라토리오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는데 헨델의 <메시아>를 듣고 감동 받아 작곡하게 되었다. 전체 31부 32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친숙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는 그의 종교적 믿음과 낙천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아우구스트 폰 클뢰버가 1817년 메들링에서 그린 초상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베토벤 석판화

처음으로 빈을 찾은 베토벤은 먼저 피아노의 거장으로 이름을 떨치고자 결심했다. 그 노력은 열매를 맺어 베토벤은 전통 깊은 빈 음악계에서 피아노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13세의 베토벤

어린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을 이용해 돈을 벌고자 한 아버지 때문에 베토벤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베토벤을 그린 세밀화, 크리스티안 호르네만, 1803

빈의 귀족 살롱에서 세련되고 우아한 연주가로 명성을 떨치던 시절의 베토벤의 모습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들라크루아, 1830년경

18세기 말, 귀족 계급의 황포로 평민들은 기아에 허덕였고 귀족들도 세금을 내야한다는 평민들의 주장에 군대는 총칼을 들이댔다. 평민들의 분노는 폭발하였고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혁명 정신은 개인의 권리와 감성을 존중하고 평등에 입각한 사상으로 많은 예술에 영향을 미쳤으며 음악에서는 낭만주의가 도래하게 되었다.

<열정 소나타> 자필 악보 첫 장

1805년경 베토벤은 리히노프스키 후작을 위해 이 작품을 썼다. 그러나 후작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뛰쳐나와 이 악보를 들고 비오는 밤길을 걸어 트로파우로 갔다. 악보 위의 얼룩은 그때의 빗방울 자국이다. <열정>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운명>이 초연된 빈의 케른트너토르 극장

<운명>은 엄격하고 절제된 짜임새로 고전파의 맥을 잇는 동시에 작곡가의 내면 감정을 잘 표현하여 낭만파 음악의 문을 연 작품으로 평가된다.

베토벤의 장례행렬, 1827

장례식에는 2만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체르니, 슈베르트 등은 관 뒤에서 횃불을 들고 뒤따랐다.

젊었을 때의 로시니, 빈첸조 카무치니, 1816년경

로시니는 18세 때부터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오페라는 듣기 좋고 아름다워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젊은 날의 슈베르트, 작자 미상

서른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슈베르트. 그가 남긴 아름다운 음악들은 우리 곁에 남아서 오랫동안 그를 기억하게 한다.

멘델스존의 초상화, 제임스 워튼 차일드, 1829년

멘델스존이 처음으로 런던을 방문했을 때 그려진 그림. 멘델스존은 유복한 집안에 교양 있고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상류 사교계에서 인정을 받아, 곧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12세 때의 멘델스존, 칼 베가스, 1821

멘델스존은 슈베르트와 달리 경제적으로 부유한 아버지와 음악적 재능이 풍부한 어머니를 둔 행운아였다. 그는 괴테와 절친한 음악가였던 첼티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

그린 더럼 대성당, 멘델스존, 1829년

멘델스존은 평생동안 조그만 화첩을 가지고 다녔는데 거기에는 그가 보고 들은 풍경을 그린 여러 가지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마왕>, 모리츠 폰 슈빈트, 1828년

괴테의 시 「마왕」은 여러 예술가들에게 작품의 소재로 널리 이용되었다. 슈베르트 역시 1시간만에 신들린듯이 <마왕>을 작곡했다고 한다.

멘델스존의 초상화, 작가 미상, 1835년

이 해에 그는 당시 독일의 가장 중요한 음악 중심이었던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에 취임했다.

피아노 치는 슈베르트, 그 뒤에서 노래하는 미하엘 포글, F. G. 발트 뮐러, 1827년

슈베르트의 많은 가곡들이 이런 형식으로 발표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슈베르트의 초상화, W. A. 리더, 1825년

슈베르트는 명예나 돈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생전에는 그 예술성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실을 잣는 그레트헨>의 자필 악보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했다. 1816년 이 작품의 사본을 만들어 괴테에게 보냈으나 괴테로부터 답은 없었다. 슈베르트는 괴테의 수 많은 시에 곡을 붙였으나 생전에 괴테와 만나지는 못했다.

슈베르트의 초상화, 요제프 밀러

슈베르트는 가곡의 왕이라고 불릴정도로 많은 가곡을 남겼고 그가 만든 가곡의 가사와 곡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침대 위의 영면한 멘델스존, 에두아르트 벤데만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누이 파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멘델스존은 누이가 죽은 후 약 6개월 뒤에 별세했다.

쇼팽 초상화, 아리 셰퍼, 1847년

쇼팽은 마치 시인이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시를 쓰듯 피아노로 표현할 수 있는

온갖 섬세한 방법을 이용하여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고자 애썼다.

리스트의 초상화, 빌헬름 폰 카울바하

리스트는 거의 19세기 전체에 걸쳐서 살았고, 베토벤과 살리에리, 체르니, 그리고 바그너에 이르기까지 많은 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파리 몽소 공원에 있는 쇼팽과 상드의 상, 자크 프로망 무리스 제작

쇼팽에 피아노를 연주하고 상드가 그 음색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쇼팽은 낭만파에 속했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음악 자체로의 아름다움을 중요시 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매우 서정적이다.

임종의 자리에 누운 쇼팽, 크비아트코프스키

상등의 죽음 이후 건강이 나빠진 쇼팽은 1849년 10월 17일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프란츠 리스트, 1824년의 석판화

빈을 찾아간 신동 리스트는 베토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여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남긴 피아노 음악의 유산을 이어받아 그 시대를 이끌며 낭만파로 넘어가는 다리 구실을 했으며, 피아노 음악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1836년의 리스트

20대 중반의 리스트이다. 리스트는 잘생긴 외모에 신들린 듯한 피아노 연주 솜씨로 많은 여성팬들의 인기를 얻었다.

헝가리 민족의상을 입은 리스트, 1839

이탈리아 출생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였던 파가니니는 리스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기교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리스트는 스스로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리스트의 모습을 그린 수많은 스케치와 만화 가운데 하나

리스트는 바흐의 음악이나 오페라, 교향곡 등 모든 장르의 음악을 피아노 한 대로 표현해 보였고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부르크 극장의 객석 풍경, 구스타프 클림트, 1888년

부르크 극장이 폐쇄되기 직전에 그린 구(舊) 브루크 극장의 내부 전경이다. 부르크 극장은 1741년 궁정 무대로 설계된 것으로 부르크 왕궁 옆에 위치하고 있어 부르크 극장이라고 불린다. 표준 독일어 발음 공연으로 유명하며 독일어권 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극장으로 유명하다.

20세의 브람스

슈만의 부탁으로 프랑스의 음악가이자 화가인 J. J. B. 로렌스에 의해 그려진 연필화. 1853년 뒤셀도르프에서 슈만과 브람스는 처음 만난다. 이후 슈만은 브람스의 음악적 선배이자 재정지원가가 되어 브람스를 후원한다.

58세의 요하네스 브람스, 루트비히 미할레크

브람스는 낭만주의의 파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전주의의 맥을 이은 고독한 음악가였다.

바그너 초상, 렌 바하, 1873

바그너는 대담한 화성과 강렬한 감정 표현, 그림을 보는 듯한 회화적인 묘사를 중시하는 표제음악을 추구하면서 급진적 낭만주의 음악을 이끌었다.

반프리트에서 공상에 젖어 있는 바그너, 렌바하

바그너는 <지그프리트>, <라인의 황금>, <로엔그린>, <탄호이저> 등 여러 곡의 오페라를 남겼으며 이런 오페라들은 중세 전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바그너와 코지마, 1872

바그너와 코지마가 빈에 머물 당시 그려진 그림이다. 코지마는 아버지 리스트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그너와 결혼했다.

바이로트축제극장

1875년 독일 바이로트시에 독일 오페라 작품 상연을 위해 건립되었다. 바그너가 구상하고 루트비히 2세의 후원을 받아 건립되었으며 완공된 이듬해에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가 초연되었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사망한 해에 니콜라이 쿠즈네초프가 그린 작품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때로 서유럽 중심의 고전 음악 창작을 뛰어넘어 러시아 특유의 정서와 감성을 담고 있다.

차이코프스키 가족, 1848

차이코프스키가 여덟 살 때 찍은 사진으로 왼쪽 끝의 아이가 차이코프스키이다.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 음악원과 차이코프스키 동상

깊은 애수와 어두운 분위기가 풍기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예민하고 심리적 · 내적 갈등이 많은 그의 성격과 연관이 있다.

메크 부인

메크 부인은 평생 차이코프스키의 후원자로 그가 생계 걱정 없이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차이코프스키 최후의 사진 중 하나

차이코프스키는 발레음악을 작곡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백조의 호수>는 장대한 짜임새와 아름다운 선율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초상화, 발렌틴 세로프

그의 작품은 "색채적이고 명쾌하여 이해하기 쉽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것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관현악기의 특징을 잘 살렸기 때문이다.

1885년의 림스키-코르사코프

이 해 그는 해군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이후 모든 시간을 음악에 바쳤다.

림스키-코르사코프 부인의 초상, 프란츠자베르 빈터할터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전문적인 음악 애호가였던 그녀에게서 많은 음악적 지원을 받았다.

수중왕국의 사드코, 일리야 레핀, 1876

<사드코>는 11세기 노브고로트의 전설을 바탕으로 주인공 사드코가 원양항해에서 겪게되는 여러가지 모험담을 그린 것이다. <금계와>와 함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금계>의 의상 디자인, 빌리빈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마지막 오페라인 <금계>의 의상으로 위는 세마한의 여왕의 의상이고, 아래는 도도왕의 의상 디자인이다. <금계>이야기는 푸시킨의 환상적인 이야기에 바탕을 두었다. 내용이 당시 제정 러시아를 비판한 것이라 하여 상연이 금지되었다.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 5인조 중의 보르딘과 무소르그스키

국민주의 음악은 자기 민족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는 데 역점을 두었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 오는 민요나 춤곡, 옛 이야기를 주제로 음악을 만들었다.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 5인조는 러시아의 음악적 특징을 유럽에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야만의 음악, 폴 고갱, 1892

19세기 말은 민족 음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아울러 일부 작가들에 의해 이국적 음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었다. 특히 드뷔시, 라벨 등은 자바 음악, 그중에서도 특히 가믈란의 이국적 음향이나 동인도의 '관현악' 합주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드뷔시의 초상화, 마르셀 바셰, 1884

프랑스가 낳은 20세기의 세계적인 음악가인 그는 인상파 음악의 창시자이다. 그는 형식적인 화상법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음악 세계를 개척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펠리아드와 멜리장드> 등이 있다.

보디첼리의 <봄>

드뷔시는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봄>이라는 곡을 만들었다. 인간과 자연이 서서히 피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개화하는 폭발적인 기쁨을 묘사한 이 작품은 당시의 다른 음악들에 비해 새롭고 독특하였다.

눈덮인 루앙 성당, 클로드 모네, 1894

틀에 박힌 음악보다는 자유롭고 참신한 것을 좋아했던 드뷔시는 미술계에 새 바람을 일으킨 인상주의와 문학의 새로운 사조인 상징주의에 빠져들었고 그 자신이 최초의 인상주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세상에 내놓았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공연을 위한 박스트의 무대 디자인

드뷔시가 작곡한 이 작품은 최초의 인상주의 음악이라고 불린다. 시인 말라르메의 시에 드뷔시가 곡을 붙인 것이다. 이 곡은 기존의 낭만주의 음악과 전혀 다른 독창적인 음악이었다. 내용면에서는 줄거리 전달이 아니라 느낌이나 분위기 전달을 위주로 하였으며 형식에 있어서도 선율, 화성, 음색, 리듬 등 형식상의 원칙을 과감히 탈피하였다.

드뷔시의 초상화, 자크 에밀 블랑슈, 1902년경

드뷔시는 색다른 음악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동양 음악에 매료되었으며 이국적인 음악을 많이 작곡하였다.

파자마를 입은 라벨의 초상, 이실 우브레, 1909년

드뷔시보다 13세 연하인 라벨은 스페인 바스크 출신인 어머니로부터 정서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런 이유로 스페인의 춤곡인 볼레로에 영감을 얻어 나중에 발레음악 <볼레로>를 작곡하게 된다. 그 역시 드뷔시와 같이 인상주의 음악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1941년 12월 초연된 <볼레로>의 의상 디자인

<볼레로>는 당시 최고의 발레리나였던 이다 루빈스타인 부인의 의뢰로 1928년에 작곡되었다. 스페인의 춤곡 '볼레로'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는데 15분에 걸쳐 같은 멜로디가 무려 169회나 반복되는 음악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곡이다.

라벨과 스트라빈스키

라벨의 음악은 유희적인 놀이와 고풍스러운 멋, 감각적인 것가 기계적인 것이 잘 조화된 작품으로 평가된다.

라벨의 임종

1937년 12월 28일 알베르 모로가 그린 것. 라벨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수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사망하였다.

라벨의 오페라 <아이와 마법>의 초판본을 위한 앙드레 엘레의 표지 디자인.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작곡되었다. 상당한 규모의 관현악을 수반하고 있지만 필수적이지 않은 선율이나 음색을 제거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이 있다.

 

 

 

 

posted by 황영찬
2016. 10. 31. 14:42 내가 읽은 책들/2016년도

2016-021 그림에 차려진 식탁들

 

이여신 지음

2016, 예문당

 

대야도서관

SB108232

 

650.4

이64ㄱ

 

역사 속의 명화에 담겨진 톡톡 튀는 음식 문화 이야기

 

브레첼에서 숯불고기까지

화려한 음식들의 향연

 

사람마다 생각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선생님은 사람에게 필요한 의, 식, 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우리는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지.

"맞아요. 저희도 그렇게 생각해요. 사람은 먹지 않으면 죽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음식을 그저 단순한 '먹을거리'로만 생각하기는 어려워.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결국 인류는 배불리 먹기 위해 행동을 한 경우가 많이 있거든. 음식은 인류가 탄생한 순간부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단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살던 원시 인류는 먹을 것을 찾아 다른 대륙으로 이동했고, 그러면서 세계 곳곳에 문명을 탄생시켰지. 그뿐이 아니야. 음식은 정치, 경제, 사회의 많은 분야에도 영향을 끼쳤어.

"우와! 음식이 역사에 미친 영향력이 엄청나네요."

그래, 그래서 선생님은 너희들에게 음식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단다.

- 본문 중에서 -

 

지은이 이여신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졸업. 역사콘텐츠연구회 '어제그리고오늘'을 통해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교육을 할 수 있도록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저서로 『그림으로 들어간 사람들』, 『미래를 열어주는 세계 역사박물관』, 『특목고 엄마들』, 『어린이를 위한 고대문명사』, 『위인들의 재능이야기』 시리즈, 『천하무적 속담왕』 등이 있고, EBS 초등영어교재 『요요플레이타임』, 『똑똑 영어놀이터』를 기획한 바 있다.

 

차례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1ST DAY 식사준비를 해볼까?

 

빵 굽는 사람들  갓 구운 빵이 나왔습니다!

빵 굽는 사람(욥 베르크헤이데), 빵장수 부부(얀 스테인)

 

폴렌타  옥수수를 주식으로 먹는 나라

폴렌타(피에트로 롱기)

 

쌀밥  한국인의 영원한 밥

벼타작(김홍도)

 

파스타  누가 이탈리아에 파스타를 전했을까?

국수 만들기(중세의 건강서적 Tacuinum Sanitatis)

 

시장 구경  왁자지껄한 중세 유럽의 시장

시장풍경(피테르 아르트센), 시장 물건을 파는 농부들(피테르 아르트센)

 

저잣거리  조선 시대 저잣거리의 풍경

저잣길(신윤복)

 

봄나물 캐는 여인  오늘은 무슨 나물을 캘꼬

나물캐기(윤두서)

 

분주한 부엌  다듬고, 만들고, 차리고

부엌의 모습(빈센초 캄피), 밥상 준비(김준근)

 

수수께끼 레시피  전문 요리사와 요리책의 등장

기적의 양념(제안 조르주 비베르)

 

푸줏간 풍경  아무나 먹을 수 없었던 귀한 고기

푸줏간(안니발레 카라치), 푸줏간의 진열대(피테르 아르트센)

 

인스턴트  현대인의 식탁을 점령한 즉석요리

캠벨수프(앤디 워홀)

 

2ND DAY 차려진 식탁 엿보기

 

고구려의 밥상  고구려 사람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무용총 접객도, 안악 3호분-부엌

 

그리스와 로마의 만찬  향락과 식사 사이

파에스툼 유적의 프레스코화

 

영주의 식사  중세 귀족의 식단

베리 공작의 화려한 기도서(랭부르 형제)

 

무도회의 만찬  바이킹의 식사법, 뷔페

무도회의 만찬(아돌프 폰 멘첼)

 

소박한 식탁  감자와 콩을 먹는 사람들

감자를 먹는 사람들(빈센트 반 고흐), 콩 먹는 사람(안니발레 카라치)

 

추수감사절  아메리카 인디언과 '터키 데이'

첫 번째 추수감사절(장 레온 제롬 페리스)

 

농가의 결혼식  중세 시골 마을의 흥겨운 결혼식

농가의 결혼식(피테르 브뢰겔)

 

성 니콜라스 축제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사람들

성 니콜라스 축제(얀 스테인)

 

새색시의 큰상  '큰상'을 받은 새색시의 마음가짐

신부연석(김준근)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회갑연을 차린 정조의 효성

봉수당진찬도(김득신 외)

 

개화기의 만찬  식탁 위에 올라온 낯선 서양음식

조일통상장정기념 연회도(안중식)

 

돌잔치  돌 맞은 아이는 무엇을 쥐었을까?

돌잔치(김홍도)

 

3RD DAY 디저트를 먹어볼까?

 

디저트  '식탁을 치우다'는 뜻에서 비롯된 말

빵과 과자가 있는 정물(게오르크 플레겔)

 

  우리 조상들이 먹었던 최초의 과자

씨름(김홍도), 엿 만들기(김준근)

 

치즈의 유혹  하늘이 내린 맛

리코타 치즈를 먹는 사람들(빈센초 캄피)

 

청어와 맥주  기름진 청어와 시원한 맥주 한 잔

청어와 맥주가 있는 정물(피테르 클레즈)

 

커피 한 잔  '이슬람의 와인', 커피

커피를 즐기는 투르크 여인, 커피 한 잔(빅토르 가브리엘 질베르)

 

초콜릿 소녀  올멕 문명에서 밀크 초콜릿까지

초콜릿 소녀(장 에티엔 리오타르), 초콜릿을 마시는 여인(장 에티엔 리오타르)

 

우유  태어나서 처음 먹는 음식

우유를 따르는 여인(요하네스 베르메르), 채유(조영석)

 

4TH DAY 밖에서 즐기는 식사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화려한 파리의 술집에 가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에두아르 마네)

 

파리의 레스토랑  '그 레스토랑'에 가고 싶다

파리 레스토랑의 실내(빈센트 반 고흐)

 

카페의 화가들  커피, 문학과 예술, 만남이 있는 곳

그레코 카페의 화가들(루트비히 요한 파시니)

 

풀밭 위의 휴식  야외에서 즐기는 티타임

휴일(제임스 티소)

 

새참 먹는 사람들  잠깐 일손을 멈추고 새참을 먹자

새참(조영석), 들밥(김홍도)

 

주막집  주막에서 술잔을 들고

주막(김홍도), 주사거배(신윤복)

 

어부들의 식사  생선찜과 한 잔 술에 피로를 풀다

강변회음(김득신)

 

난로회  야외에서 먹는 숯불고기의 맛이란!

야연(성협)

 

참고문헌

 

<빵 굽는 사람> 욥 베르크헤이데, 1681년, 메사추세츠 우스터 미술관 소장

 

<빵장수 부부> 얀 스테인, 1658년

 

브레첼은 빵을 만들고 남은 반죽을 얇고 길게 밀어서

꼬불꼬불한 하트 모양으로 만든 뒤 굵은 소금을 살짝 뿌려서 구워낸단다.

바삭바삭하면서도 짭짤하며, 씹을 때 쫄깃쫄깃한 맛이 나서

세계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지.

 

<폴렌타> 피에트로 롱기, 1740년경, 카 레초나코 미술관 소장

 

폴렌타는 끓는 물에 옥수수가루 등의 곡물가루를 넣고 끓인 '죽' 형태의 이탈리아 요리란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많이 즐겨 먹는 대표적인 서민음식이지.

 

<벼타작> 김홍도, 무기년(1775~1780년)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농사가 '천하지대본(모든 일의 근본)'이었던 우리나라에서는

쌀이 재산의 가치로 매겨질 만큼 소중한 존재였단다.

오늘날처럼 쌀이 외면당해 남아도는 현실을 옛 사람들이 보면 어떤 심정일까 궁금해져.

 

<국수 만들기> 작자 미상, 연대 미상, 중세의 건강서적 『Tacuinum Sanitatis』 수록

 

스파케티는 이탈리아 국수인 파스타의 한 종류야.

파스타는 라자니아, 라비올리 같은 밀가루로 만든 이탈리아 국수를 아우르는 명칭이지.

마카로니 같이 길이가 짧고 안에 구멍이 뚫린 면도 파스타의 일종이란다.

 

<시장풍경> 피테르 아르트센, 1550년,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 소장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도시의 중심부에 있었던 광장인 아고라나 포룸이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했지. 당시 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경제적인 기능만 했던 곳이 아니야. 항시 많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정치적인 역할도 했지.

 

<시장 물건을 파는 농부들> 피테르 아르트센, 빌라프 리하르츠 미술관 소장

 

<저잣길> 신윤복, 18세기 말 추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생선이 담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채소가 들어 있는 망태기를 옆구리에 낀 채

이야기하는 젊은 여성과 그여성을 마주보며 대화하는 나이 든 여인이 등장하고 있어.

젊은 여성이 생선과 채소를 사왔는지 팔러 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제목이 <저잣길>인 걸로 봐선 팔러 가는 확률이 높아 보이는구나.

 

<나물캐기> 윤두서, 18세기 초 추정, 개인 소장

 

조선 시대에 나물을 캔다는 것은 반찬을 만든다는 의미도 있지만, 집에 곡식이

바닥나서 굶주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해. 백성의 대부분은 농민이었지만

그들은 양반이나 큰 지주들의 땅을 빌려 경작했던 소작농이었거든.

 

<부엌의 모습> 빈센초 캄피, 1585년경,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소장

 

[백은영]기산07-밥

<밥상 준비> 김준근, 19세기 무렵, 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소장

 

사경(새벽 1시부터 3시 사이)에 일어나 머리 빗고,

오경(오전 3시부터 5시 사이)에 시어른께 문안드리네.

이담에 신랑하고 친정에 가면,

밥도 굶고 한낮까지 실컷 자리라.

- 이 옥(조선 후기)

 

<기적의 양념> 제안 조르주 비베르, 1890년경, 올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소장

 

르네상스 이전 중세 유럽에서 양념은 신분의 상징이었지.

동양이 원산지인 후추, 육두구, 생강, 샤프란, 계피, 백리향, 바닐라 등의 향신료는

매우 비싸고 귀했기 때문에 특권계층에서만 구할 수 있었거든.

 

<푸줏간> 안니발레 카라치, 1580년경, 크라이스트처치 미술관 소장

 

<푸줏간의 진열대> 피테르 아르트센, 1551년, 웁살라대학 미술관 소장

 

소시지는 다진 고기에 소금과 허브, 돼지기름을

첨가하고 동물의 찬자(주로 돼지 창자)에 싸서

하루 동안 쟁여두었다가 끓는 물에 삶아 먹는 음식이야.

우리나라의 순대는 돼지기름 대신 피를 넣는 게 다르지.

 

<캠벨수프> 앤디 워홀, 1962년,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그는 대중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미술뿐만 아니라

영화, 광고, 디자인 등 시각예술 전반에 혁명을 일으켰어.

살아있는 동안 이미 전설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현대미술의 아이콘'으로 통하지.

 

<무용총 접객도> 작자 미상, 5세기 경 고구려, 고분벽화

 

<안악 3호분-부엌> 작자 미상, 357년 추정, 고분벽화

 

오늘날 우리가 즐겨 먹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한국의 대표음식인 불고기, 너비아니, 김치, 된장 등이

바로 고구려 음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야.

 

<파에스툼 유적의 프레스코화> 작자 미상, 기원전 475년경, 이탈리아 파에스툼 박물관 소장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했던 아테네의 귀족들은 갈수록 특이한 음식을 찾았어.

과식으로 죽은 돼지를 진미로 간주했고 젖은 곡식을 먹여서 살찌운 거위고기 따위를 즐겼지.

 

<베리 공작의 화려한 기도서> 랭부르 형제, 1414년경, 샹티이 콩데 미술관 소장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서양 요리는 대부분이 코스 요리지.

하지만 수프에서 시작해 샐러드, 생선, 육류, 디저트, 과일과 치즈, 커피 등으로 이어지는

요즘의 코스 요리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단다.

 

<무도회의 만찬> 아돌프 폰 멘첼, 1878년, 베를린 내셔널 갤러리 소장

 

이 바이킹식 뷔페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18세기 프랑스 황실에서부터야.

연회를 자주 베풀었던 프랑스 궁정에서 뷔페식 상차림은 아주 적합했지.

 

<감자를 먹는 사람들> 빈센트 반 고흐, 1885년, 반 고흐 미술관 소장

 

<콩 먹는 사람> 안니발레 카라치, 1580년경, 코로냐 갤러리아 소장

 

<첫 번째 추수감사절> 장 레온 제롬 페리스, 1912~1915년, 미국 의회 도서관 소장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함께 인디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시작되었어.

그 후 추수감사절 행사는 미국의 중요한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단다.

<농가의 결혼식> 피테르 브뢰겔, 1568년,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

 

뒤쪽으로 녹색 휘장이 드리워져 있는 여인이 바로 신부야.

마주잡은 손이 긴장하고 있음을 보여주지. 당시의 풍습에는 저녁까지

신랑이 신부 앞에 나타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성 니콜라스 축제> 얀 스테인, 1660~1665년경, 암스테르담 라익스 미술관 소장

 

<신부연석> 김준근, 19세기 말경, 『기산풍속화첩』 수록, 개인 소장

 

큰상은 먹지 않는 게 관례였어. 그래서 큰상을 '눈요기상'이라고 했지.

눈요기로 보기만 하는 상이라는 뜻이야. 큰상은 물리고 나면 신부를 따라온 하인들이 먹었어.

큰상 외에도 '입매상'이라 하여 작은 상에 국수장국, 떡 등과 함께 술을 내어놓았지.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 신 사임당

 

<봉수당진찬도> 김득신 외, 19세기경,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한국요리는 조선 시대에 와서 가장 발전을 이루었는데

특히 궁중 음식은 한국요리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어.

전국에서 올라오는 진귀한 재료와 고도의 조리기술을 가진

주방 상궁과 숙수들에 의해서 다양한 종류의 맛깔 나는 음식이 만들어졌지.

 

<조일통상장정기념 연회도> 안중식, 1883년,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재미있는 것은 서양식 상차림에 우리 전통의 음식이 보인다는 거야.

높다랗게 쌓아올린 고임음식은 우리나라의 잔치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식이지.

연회 역시 잔치라고 생각해 고임음식으로 격식을 차린 것이 재치 있지?

 

<돌잔치> 김홍도, 1781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리나라에서는 아이가 태어나 만 1년이 되면 이를 기념하여 돌잔치를 치렀어.

요즘에야 태어나 맞는 첫 생일을 축하해주는 의미로 돌잔치를 치르지만, 옛날에는 좀 다른 이유로

잔치를 열었단다. 옛날에는 아기들이 질병에 걸려 죽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태어나서 1년이 되는 시기가 아이의 생존에 아주 중요했어.

 

<빵과 과자가 있는 정물> 게오르크 플레겔, 1610년경, 프랑크푸르트 시립미술관 소장

 

아랍사람들은 설탕으로 만든 과자도 즐겨 먹었어.

오늘날의 캐러멀도 만들었는데, 캐러멀은 아랍어로 '달콤한 소금으로 만든 공'이라는 뜻의

'쿠라트 알 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

 

<씨름> 김홍도, 18세기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의 왕들도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이부자리 안에서 조청 두 숟가락을 먹고 난 뒤 일과를 시작했다고 해.

이는 엿의 당분으로 잠든 뇌를 활성화시키는 과학적인 방법이란다.

 

<엿 만들기> 김준근, 19세기 말경, 국립기메박물관 소장

 

우리 조상들은 엿을 단순히 '과자'로만 여기지 않았어.

엿이 몸에 활력을 주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고 믿었지.

 

<리코타 치즈를 먹는 사람들> 빈센초 캄피, 1580년경, 리옹 미술관 소장

 

치즈는 모두 알다시피 소, 염소, 물소, 양 등의 동물의 젖에 들어있는 단백질을 뽑아

응고, 발효시킨 식품이야. 치즈의 맛은 원료, 숙성 방법, 발효균의 종류 등에 따라

다양한 모양과 맛을 내지. 현재 약 1천여 종의 치즈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람들이 즐겨 먹는 치즈는 그중 20여 종에 불과해.

 

<청어와 맥주가 있는 정물> 피테르 클레즈, 1636년,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관 소장

 

맥주는 인류가 마신 가장 오래된 술이야.

인류가 정착해 농경생활을 하면서부터 맥주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탄생시킨 수메르 사람들이나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즐겨 마셨다는 것으로 봐선 문명의 탄생과 같다고 보여.

 

<커피를 즐기는 투르크 여인> 작자 미상, 연대 미상

 

서양 사람들은 자신들의 와인에 빗대 커피를 '이슬람의 와인'이라고 부른단다.

이처럼 커피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이슬람의 음료였어.

'지옥처럼 검고, 죽음처럼 강하며, 사랑처럼 달콤하다.' 이는 커피에 관한 터키의 유명한 속담이지.

 

고급스런 카페는 아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은

그녀에게 천금 같은 시간일 거야.

그녀가 마시는 커피에서 짙은 향이 날 것 같아.

 

<커피 한 잔> 빅토르 가브리엘 질베르, 1877년, 개인 소장

 

<초콜릿 소녀> 장 에티엔 리오타르, 1744~1745년, 드레스텐 미술관 소장

 

카카오에는 커피와 마찬가지로 정신을 맑게 해주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효능이 있기 때문에 신성한 음료로 여겨졌지.

훗날 아스텍 문명 사람들도 카카오를 신의 열매라 부르며 귀중하게 여겼단다.

 

<초콜릿을 마시는 여인> 장 에티엔 리오타르, 1744년, 영국 국립미술관 소장

 

<우유를 따르는 여인> 요하네스 베르메르, 1658~1660년, 암스테르담 레익스 박물관 소장

 

인류는 오래 전부터 우유를 마셔왔어.

우유의 풍부한 영양소는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들어주었고,

사람들도 그런 우유를 신의 축복이라고 여겼어.

 

그림 속에서 도포에 갓을 쓴 양반 여럿이 모여 소젖을 짜고 있어.

풍성한 도포자락이 젖을 짜기에 무척 불편해보이지?

이들은 아직 젖도 떼지 않은 어린 송아지를 한쪽에 떼어놓은 뒤

어미 소의 코뚜레를 움켜잡고 뒷다리까지 줄로 옭아매 꼼짝하지 못하도록 한 다음

그릇을 받쳐 들고 쪼그려 앉아 젖을 짜고 있어.

 

<채유> 조영석, 17세기경, 개인 소장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에두아르 마네, 1881~1882년, 코톨드 미술관 소장

 

인류의 역사에서 술집은 언제부터 있어왔을까?

아마도 인류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닐까 싶어.

기원전 3900년 경 바빌로니아에 선술집이 존재했다는 증거도 있지.

 

<파리 레스토랑의 실내> 빈센트 반 고흐, 1887년, 크뢸러 뮐러 미술관 소장

 

특권 계층만 맛볼 수 있는 요리를 이제 누구나 돈만 내면 사먹을 수 있게 되었지.

이로써 레스토랑이라는 형태의 '음식점'이 생겨나게 된 거야.

 

<그레코 카페의 화가들> 루트비히 요한 파시니, 1852년, 함부르크 미술관 소장

 

그레코 카페는 1750년 무렵 문을 연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 세 곳 가운데 하나야.

오늘날에는 유럽 카페 문화의 상징이 되어서 커피 애호가들은 성지 순례하듯 이곳을 찾는다고 해.

 

<휴일> 제임스 티소, 1876년경, 테이트 모던 갤러리 소장

 

당시 유럽에서는 커피, 초콜릿, 차 등이 전해지면서

티타임을 갖는 것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어.

특히 여성들은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담소를 나누며 차를 즐겼지.

 

<새참> 조영석, 18세기 초경, 개인 소장

 

<들밥> 김홍도, 연도 미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주막> 김홍도, 18세기 말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주사거배> 신윤복, 18세기 말경, 간송미술관 소장

 

주막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진풍경이 종종 벌어졌어.

손님이 많이 붐빌 때는 마치 잔칫집처럼 흥청거리기도 했고,

서울에서 과거라도 있을라치면 지방에서 과거 보러 온 손님들로 만원을 이루었어.

 

<강변회음> 김득신, 18세기경, 간송미술관 소장

 

어부들의 여유로운 식사 장면이 담긴 이 그림은 김홍도, 신윤복과 함께

조선의 3대 풍속화가로 꼽히는 김득신의 <강변회음>이야.

강변회음은 '강가에 모여앉아 술을 마시다'는 뜻이지.

 

<야연> 성협, 조선 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 양반들 사이에선 화로에 숯불을 피워놓고 소고기를 구워먹는

이른바 '난로회'가 유행이었어. 음력 10월 초하룻날,

한양의 사대부들은 들판으로 나가 화로 안에 숯을 피워서 소고기를 구워먹었지.

 

술잔, 젓가락 늘어놓고 이웃 모두 모인 자리.

버섯이며 고기며 정말 맛이 있네 그려.

늙마에 이런 음식 좋아한들 어찌 식욕을 풀어보리.

고깃간 지나며 입맛 다시는 사람일랑 본받지 말아야지.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