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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5. 20:15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16  만인보

 

高銀

2007,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789

 

811.6

고67만  1

 

창비전작시---------------------------------------------------------------------

 

"우선 내 어린시절의 기초환경으로부터 나아간다"고 한 작자의 말대로, 이번 세 권은 주로 어릴 때 알던 고향사람들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들을 제대로 논하려면 마땅히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로서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당장의 뿌듯한 감회는, 어떠한 가난이나 고난 속에서도 끊길 줄 모르고  이어져온 이땅 위 삶의 기쁨과 보람이다. 또한 이 기쁨과 보람을 담은 시인의 말, 겨레의 말에 대한 자랑스러움이며, 작자 자신도 이야기한 바 그 말 앞에서 삼가는 마음이다.

『만인보』의 서사적 풍요는 차라리 소설문학의 성취를 떠올린다. 그리고 고은 자신의 『전원시편』에 비해서도 "첫가을에 백리가 트인다"는 그의 시구대로 무언가 툭 트였다. 더러 장황하던 대목이 크게 가셨고 농사꾼의 일하는 기쁨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어떤 착심 같은 것도 자취를 감추었다.

- 백낙청(발문 중에서)

 

고은(高銀)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눈길」「천은사운」 등을 추천받아 등단.

1960년 첫시집 『피안감성』 간행. 이후 시 · 소설 · 수필 · 평론 등에 걸쳐 100여 권의 저서 간행.

1984년 『고은시선집』 간행.

1986년 『만인보』 간행 시작

1987 ~ 94년 서사시 『백두산』 간행.

제3회 만해문학상, 제1회 대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등 수상.

 

차 례


작자의 말

서시 / 할아버지 / 머슴 대길이 / 애꾸 양반 / 내시 처선 / 동고티 무덤 / 삼만이 할머니 / 대바구니 장수 / 나그네 / 신라 사복 / 당숙모 바그메댁 / 사행이 아저씨 / 어머니 / 또섭섭이 / 고모부 / 장복이 / 곽낙원 / 대기 왕고모 / 삼거리 주막 / 아버지 / 정태란 놈 / 혈의 루 / 귀섬 여편네 / 관묵이 아저씨 / 고모 / 땅꾼 도선이 / 떠나간 작은어머니 / 진달래 / 고주몽 / 싸움꾼 기백이 / 외할머니 / 엿장수 / 큰집 고모 / 이동휘의 꾀 / 난산마을 아저씨 / 옥정골 철곤이 / 죽은 소금례 / 대보름날 / 아리랑 영감 / 당숙모 / 외삼촌 / 코피 / 의병 정용기 / 기생들 / 강도들 / 작은고모 / 사정리 할아버지 / 수레기댁 / 용녀 / 보리밭 문둥이 / 백제 혜현 / 수양 영감 / 일만이 아버지 / 사정리 할머니 / 김성숙 / 딸 / 개사리댁 / 초례청 / 절름발이 떠돌이 / 기창이 고모 / 할머니의 울음소리 / 재학이 아저씨 손가락 / 필례 / 지관 오창봉 / 학배 / 정안수 / 맹식이 삼촌 / 쌍놈 기철이 / 효조지 영감 / 고대 혜공 / 방앗간집 며느리들 / 복만이 아저씨 / 두 가마니 반 / 큰외숙모 / 딸그마니네 / 태욱이 아저씨 / 정여립 / 봉태 누나 / 도요하라 / 개똥벌레 / 감꽃 / 영규스님 / 금자 / 지랄병 / 애꾸 아주머니 / 진평구 이야기 / 홍식이 작은아버지 / 새벽닭 / 기호 / 임제 / 염훈장 / 호열자 / 소도둑 / 장타령 / 백두개 도깨비 / 선제리 아낙네들 / 한식날 밤 / 을밀대 / 연 / 개살구꽃 / 외톨박이 권오종

서시

 

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

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

부여땅 몇천 리

마한 쉰네 나라 마을마다

만남이여

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

이 오랜 땅에서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

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

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할아버지

 

아무리 인사불성으로 취해서도

입 안의 혓바닥하고

베둥거리 등때기에 꽂은 곰방대는

용케 떨어뜨리지 않는 사람

어쩌다가 막걸리 한 말이면 큰 권세이므로

논두렁에 뻗어 곯아떨어지거든

아들 셋이 쪼르르 효자로 달려가

영차 영차 떠메어 와야 하는 사람

집에 와 또 마셔야지 삭은 울바자 쓰러뜨리며

동네방네 대고 헛군데 대고

엊그제 벼락 떨어진 건넛마을

시뻘건 황토밭에 대고

이년아 이년아 이년아 외치다 잠드는 사람

그러나 술 깨이면 숫제 맹물하고 형제 아닌 적 없이

처마 끝 썩은 낙수물 떨어지는데

오래 야단받이로 팔짱끼고 서 있는 사람 고한길

 

그러다가도 크게 깨달았는지

악아 일본은 우리나라가 아니란다

옛날 충무공이 일본놈들 혼내줬단다 기 죽지 말어라

 

집안 식구 서너 끼니 어질어질 굶주리면

부엌짝 군뷸 때어 굴뚝에 연기 낸다

남이 보기에 죽사발이라도 끓여먹는구나 속여야 하므로

맹물 끓이자면 솔가지 때니 연기 한번 죽어라고 자욱하다

 

삼 년 원수도 술 주면 좋고 그런 술로 하늘과 논 삼아

8월 땡볕에 기운찬 들 바라본다

거기에는 남의 논으로 가득하다 작년 도깨비불도 떠오른다

 

이 세상 와서 생긴 이름 있으나마나

죽어서도 이름 석 자 새길 돌 하나 없이

오로지 제사 때 지방에는 학생부군이면 된다

실컷 배웠으므로

실컷 배웠으므로

 

어머니

 

하루내내 뼈도 없고 뉘도 없는 만경강 갯벌에 가서

그 아득한 따라지 갯벌 나문재 찾아 발목 빠지다가 오니

북두칠성 푹 가라앉은 신새벽이구나 단내 나는구나

곤한 몸 누일 데 없이 보리쌀 아시 방아 찧어야지

도굿대 솟아 캄캄한 허공 치고 내려 찧어 땅 뚫는구나

비오는 땀방울 보리쌀에 뚝뚝 떨어져 간 맞추니

에라 만수 그 밥맛에 어린것 쑥 자라나겠구나

여기말고 어디메 복받치는 목숨 따로 부지하겠는가

아 땅의 한 아낙의 목숨이 어찌 만 목숨 살리지 않겠는가

충청도 장항에서 흐린 물 느린 물 건너

삐그덕 가마 타고 시집 온 이래 그 고생길 이래

된장 간장 한 단지 갖추지 못한 시집살이에 몸 담아

첫 아들 낳은 뒤 이틀 만에 그놈의 보리방아 찧어

두벌 김매는 논에 광주리 밥 해서 이고 나가니

산후 피 펑펑 쏟아 말 못할 속곳 다섯 벌 빨아야 했다

그러나 바지랑대 걸음걸이 한번 씨원씨원해서

보라 동부새바람 따위 일으켜 벌써 저만큼 가고 있구나

갖가지 일에 노래 하나 부르지 못하고 보리고개 봄 다 가고

여름 밭 그대로 두면 범의 새끼 열 마리 기르는 폭 아닌가

우거진 풀 가운데서 가난 가운데서 그놈의 일 가운데서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찌 나의 어머니인가

 

고모부

 

고모부 강일순은 하필 강증산하고 한 이름이라

괜히 그놈의 무극대도 믿어

이따금 눈 감고 빈 입으로 중얼댔지요

그러다가 정작 병들어 누우니

이 노릇도 작파해버리고

서래 선창 갈대밭 사이 나가는 배 뱃노래 듣다가

어린아이 다 되어 눈물바람 적시더니

부엌데기 고모 불러서

이 사람아

나 죽으면 심심할 테니

이것이나 배워보소

피우던 담배 여차여차 건네니

고모는 억지로 담배 빨고 기침했지요

그 뒤 고모부 세상 떠난 뒤

홀어미 된 늙은 고모 담배 연기 길게 길게 내뿜었지요

그게 어디 담배 연기뿐이리요 죽은 영감 담배 연기 아니리요

 

아버지

 

강 건너 내포 일대

대천장 예산장 서산장

아무리 고달픈 길 걸어도

아버지는 사뭇 꿈꾸는 사람이었읍니다

비 오면 두 손으로 비 받으며

아이고 아이고 반가와하는 사람이었읍니다

 

고모

 

서래 나루 시집간 고모

예복이 고모

그 웃음

찬 콩나물국 같은 웃음

예복이 고모

실컷 울고 나 추운 고모

 

외할머니

 

소 눈

멀뚱멀뚱한 눈

외할머니 눈

 

나에게 가장 거룩한 사람은 외할머니외다

 

햇풀 뜯다가 말고

서 있는 소

 

아 그 사람은 끝끝내 나의 외할머니가 아니외다

이 세상 평화외다

 

죽어서 무덤도 없는

 

 

당숙모

 

큰집 아주머니는

내 육촌누이 덕순이 하나 낳고는

덕순이 영 터를 안 팔아

큰당숙한테 자식 못 낳는다 구박깨나 받더니

기어이 일 났구나

바로 문 하나 달린 윗방으로 밀려나고

아랫방 아랫목에다 시앗 보아야 했다

밤마다 아랫방에서

새로 온 각시하고 영감하고

미주알고주알 알랑방구 뀌는 것 다 들어야 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아들은커녕 딸내미 하나 못 두고

그만 그 각시 떠나버리더니

큰당숙도 세상 떠나고

딸 하나 있는 것 덕순이도 시집가고

혼자된 큰집 아주머니

대밭에 눈더미 툭툭 떨어지는 소리 나도 그만

개 매달아 불태워 잡을 때

그 개 울부짓는 소리도 그만

담 끼고 가노라면

담 넘어 본 일 없는 난장이 키에다가

밭에 있으면

밭두렁하고 딱 맞는 큰집 아주머니

10년이나 안 먹고 둔 곶감 같은 큰집 아주머니

 

외삼촌

 

외삼촌은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갔다

어이할 수 없어라

나의 절반은 이미 외삼촌이었다

가다가

내 발이 바큇살에 걸려서 다쳤다

신풍리 주재소 앞에서 옥도정기 얻어 발랐다

외삼촌은 달리며 말했다

머슴애가 멀리 갈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상해에 갔다가

북경에 갔다가

만주 지지하루로 갈 것이다

그 다음은

남으로 남으로 바다 건너

야자수 우거진 자바에 갈 것이다

이런 답답한 데서

어떻게 한평생 산단 말이냐

갈 것이다

갈 것이다

나중에는 너도 데려다 함께 살 것이다

외삼촌은 자전거를 더 빨리 내몰았다

나는 쌩쌩 바람에 막혀 숨이 막혔다

나의 절반은 외삼촌이었다

스치는 십리길 전봇대여 산의 무덤들이여

그 뒤 세세년년 북국 5천 킬로 무소식의 외삼촌이여

 

작은고모

 

큰고모 등짝에서

나문재 뜯으러 간 어머니 기다리는 등짝에서

배고파 울다가 말다가 하는 등짝에서

나는 별을 처음 보았다

별이 아니라 밥이었다

별 따먹으면 배부르겠다고

별 따줘 별 따줘 새로 울었다

작은고모 야문이는

나 한번 업지도 못하고

뽕나무 선 오디 찾아다녔다

그러더니 이질에 걸리자마자 세상 떠났다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렸다

네년이 야문이를 안 먹여 죽었다고

약 한 첩 못 써 죽었다고 때렸다

어머니는 키로 막다가 실컷 맞고 굴뚝에 가 울었다

 

 

산토끼몰이 잘하던 남수영감 죽은 이튿날

시집간 딸 옥순이가

마을 밖 오릿길에 접어들면서

머리 풀고 세상 떠나가게 곡성 내니

눈물이 앞을 가려

앞 못 볼 지경으로 곡성을 내니

마을에 들어서자

이 집 저 집 아낙네들 다 나와

 

쯔쯔쯔 혀 차다가

그네들까지 함께 곡성을 내어주니

온 마을에 슬픔 한번 커다랗구나

이만하면 죽은 영감 두 다리도 다시 한번 쭉 뻗겠구나

그렇지

슬픔이라도 풍년 들어야지

 

큰외숙모

 

어쩌자고 외할아버지께서는

큰아들 상룡이는 날 보듯 해서

집 내어 보낸 뒤로

그 집 가려고 두루마기 떨쳐입은 적 없다

군산 명산동 벼랑 말랭이 다락집에는

밤새도록 콜록댄 큰외삼촌 상룡이 누렇게 썩어가고

눈썹 검고 눈동자 검은 큰외숙모가

생것 광주리장수로

이 집 저 집 박대 팔아 죽이라도 대는데

아들 하나 있는 것

명산동 벼랑에서 삘기 뽑다 헛디디어

스무 길 밑으로 떨어져 피죽사발 되어버렸다

뒤이어 큰외삼촌도 죽어버렸다

식은 방바닥 치며

울음 막혀 울지도 못하는 큰외숙모 혼자 남아

생것 광주리 두어 번 이고 다녀보다가

그도 또한 양잿물 먹고 죽어버렸다

스무 길 벼랑 찬바람에 산 사람들이야 고뿔 들어

입마개하고 종종걸음으로 지나간다

 

 

 

posted by 황영찬
2014. 12. 11. 19:45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15 갑사와 동학사

 

글 / 박남수, 심대섭, 최응천●사진 / 박보하

1999, 대원사

 

 

시흥시립도서관

SA002639

 

082

빛12ㄷ  230

 

빛깔있는 책들 230

 

연혁 - 박남수------------------------------------------------------------------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동국대 · 경기대 강사를 역임하고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로 있다. 저서로는 『일본6국사 한국관계기사』(공역)가 있고, 연구논문으로 「신라 화백회의의 기능과 성격」, 「신라 상대 수공업과 장인」, 「신라 승관제에 관한 재검토」 등 10여 편이 있다.

 

건축 - 심대섭------------------------------------------------------------------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고건축설계사무소와 시공회사를 거쳐 현재 대원고건축연구소 대표로 있으며 연세대학교와 건국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한식목조건축의 공포에 대한 논문과 경기도 지정문화재 등의 실측조사 및 중수공사보고서를 다수 집필하였다.

 

유물 - 최응천------------------------------------------------------------------

동국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전남대, 건국대, 숙명여대, 성신여대 강사를 역임했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 조계종 성보문화재 전문위원을 겸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불교미술대전』(공저)과 『박물관 밖의 문화유산 산책』이 있으며 「고려시대청동금고의 연구」, 「조선시대 운판에 대한 고찰」, 「일본에 있는 한국 범종」 및 「한국 범종의 특성과 변천」 등 논문이 다수 있다.

 

사진 - 박보하------------------------------------------------------------------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으며 네 번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을 가졌다. 1993년 월간 『사진예술』에서 주최하는 올해의 사진가상을 수상하였고 1994년에는 『Korean Culture』로 한국일보 출판문화상 사진예술상을 수상하였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사진들을 주로 촬영하고 있다.

 

|차례|

 

1 갑사

 

갑사의 연혁

갑사의 건축

갑사의 유물

갑사 대웅전 전경

천진보탑  보탑은 거북 형상을 이룬 자연석으로 머리 부분은 수정봉을 바라보고 있다. 이것에 얽힌 전설은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초기 불교가 전통적인 자연물 숭배사상과 관련이 잇음을 준다.

대적전 요사  갑사의 대적전 건물 앞쪽과 좌우에는 통일신라기로 여겨지는 건물의 초석이 널려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 어느 때인가 현재의 대적전 자리 주변에 당우가 자리잡고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계룡산과 갑사  갑사는 나말려초에 화엄사찰로서 명성을 떨쳤는데 이는 일찍부터 우리나라에서 계룡산이 중요하게 여겨졌던 사실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표충원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킨 휴정과 유정, 영규의 뜻을 기려 표충원에 그들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표충원 내부  갑사의 거듭된 중창에는 무염, 도선, 해명 등 여러 고승들이 관련되어 있다.

갑사 입구

갑사 대웅전  작은 석재로 낮은 하부 기단을 만든 다음 뒤로 약간 물려 상부 기단을 구성하였다. 상부 기단은 장대석들 사이사이에 작은 자연석들을 끼워 넣어 대웅전의 위엄을 한층 드높이고 있다.

대웅전 내부  1고주5량가를 기본으로 하여 출목도리를 보강한 형태이다. 내부에 세워진 고주는 구조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후불벽과 불단을 설치하고 불상을 안치하여 불전을 위엄있게 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하다.

강당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앙칸에는 가운데에 고주가 1개씩 세워져 있어 2칸으로 되어 있다. 측면에는 공포가 설치되어 있지 않으며 풍판이 없어 가구의 구성 모습을 확연히 파악할 수 있다.

강당의 공포  살미의 쇠서는 초제공과 이제공은 앙서로 되어 있고 삼제공은 연꽃을 조각하여 최상단의 쇠서가 수서 형태로 되어 있는 통상적인 형태와는 다르다.

삼성각  대웅전 남쪽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세워져 있다.

삼성각 내부  배면 벽에 붙여 불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불단에는 중앙에 칠성탱화, 좌우로 산신탱화와 독성탱화를 봉안해 놓았다.

대적전  현재의 갑사 경내에서 계곡 건너편 금당터로 추정되는 곳에 요사체 1동과 일곽을 이루면서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불단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로 봉안해 놓아 건물 명칭과는 맞지 않는다.

팔상전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을 서향하여 세웠다.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정면 3칸에는 삼분합띠살문을 칸마다 설치하였다. 내부에는 석가모니 불상만이 봉안되었고 북쪽 벽에 쌍림열반상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표충원  영각에는 서산 · 사명 · 영규대사 등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이들이 임진왜란 당시 국란 극복에 미친 영향을 기리는 뜻에서 표충원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대웅전 불상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여 오른쪽에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의 삼존을 봉안하고 있으며 이 삼불을 중심으로 대세지보살과 문수 · 관음 ·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대웅전 석가모니불  대웅전의 삼존불은 수인을 제외하고 거의 동일한 모습이며 모두 소조로 만들어져 있다.

대적전 석가모니불 좌상  팔각 목조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짧은 목과 좁은 어깨, 신체에 비해 비대해진 얼굴 등 조선 후기 조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대적전 문수 · 보현보살상  거의 동일한 형태의 좌상으로 손에는 연꽃을 잡고 있다. 높은 형태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양 어깨에는 통견의 천의 위에 보발이 길게 흘러내렸다.

석조 보살입상  유일한 삼국시대의 작품이다. 화강석재로 만들어졌으며 목 이하가 절단된 것을 붙여 놓았는데 머리 뒤에 표현된 보주형 두광은 얼굴과 한 돌로 조각된 것이다.

석조 약사불입상  둥그스름한 얼굴의 이마 중앙에는 깊게 파인 백호가 표현되었고 반쯤 뜬 눈과 작게 오므린 입술엔 미소가 느껴지지만 코 부분은 일부 마멸되어 있다.

삼신불 괘불탱  삼신불의 표현과 더불어 육방불보살 11구와 십대제자, 사천왕, 사금강 등 모두 36위의 존상이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밝고 화려한 채색에 섬세한 필법을 갖추었다.

대웅전 영산회상도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화면 중앙에는 키형의 거신광 안으로 두광과 신광을 지닌 석가모니불이 화려한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대웅전 삼장보살도  평행으로 배열된 구도에 많은 권속들이 빽빽하게 둘러싼 전형적인 군도 형식으로 오른쪽에는 이중의 원형 두광과 신광을 두른 지장보살이 앉아 있다.

대적전 석가삼존불화 중앙 탱화  삼세불이 그려진 중앙 탱화는 위아래 2단으로 구분하여 윗단에는 삼세불을 비롯하여 십대제자, 천녀, 동자, 판관을 배치하고 아랫단에는 삼세불의 협시와 여러 보살들을 배치한 평행 배열 구도이다.

대적전 석가삼존불화의 사천왕상  위의 위로부터 보탑을 든 다문천왕과 용과 여의주를 잡은 광목천왕을, 그리고 아래에는 비파를 든 지국천왕과 보검을 잡은 증장천왕을 위아래로 2구씩을 배치하여 앞 시기의 불화들과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팔상전 팔상도  팔상도는 석가모니의 탄생부터 입멸에 이르기까지 일생의 중요 장면을 8폭으로 나누어 그린 것이다. 색체와 필선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지만 팔상도의 기본 형식을 충실히 따른 20세기 초기의 좋은 자료이다.

갑사 금고가  용가 형식을 취한 국내 유일의 작품이다.

만력명 범종  종신의 외형은 위가 좁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넓게 퍼진 원추형을 이루었다. 정상부에는 하나의 몸체로 이어진 두 마리의 쌍룡으로 구성된 용뉴가 배치되었는데, 갈기와 비늘까지 생동감 있게 조각되었다.

범종 세부  이중의 테두리로 둘러진 원형의 당좌는 내구에 작은 자방으로 구성된 연판을 배치한 뒤 그 바깥을 파도무늬와 같은 엽문으로 장식하였다. 그리고 연곽과 연곽 사이에는 몸을 옆으로 돌린 채 소발을 한 승려형의 입상이 1구씩 모두 네 곳에 부조되었다.

건륭 39년명 요사 동종  불룩하게 솟아오른 천판 위로 하나의 몸체로 이어진 쌍룡의 용뉴를 갖추고 있다. 연곽 사이마다 부조된 보살입상은 원형 두광을 지녔으며 유려하게 흘러내린 천의가 돋보인다.

선조 2년간 월인석보 판목  총 24권 가운데 권 21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래 57매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46매만이 전한다. 보물 제582호.

계룡갑사 현액  강당에 걸려 있는 현액으로, 단아하면서도 웅건한 맛을 준다.

중사자암터 3층석탑  대웅전의 북쪽 응향각 옆에 세워져 있는데, 기단은 일부가 결실되어 하층만 남아 있고 위에는 탑신과 옥개를 하나의 돌로 결구한 3층의 탑신부로 구성되어 있다.

공우탑  대웅전에서 대적전으로 가는 길 계곡 옆에 위치하고 있다. 방형의 기단과 탑신, 옥계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석탑의 형식을 갖춘 이형의 부도이다.

철당간과 석조 지주  여러 마디로 된 지름 50센티미터의 철통을 두 개의 석조 지주 사이에 세운 것으로 다섯 번째 마디 부분을 3줄의 철심으로 묶어 지주에 고정시켰다.

사적비  자연의 암반 위에 정방형의 비좌를 마련하고 그 앞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비신의 4면에는 갑사의 창건과 연혁 등에 관한 내력을 기록하였다.

대적전 앞 팔각 부도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고려시대 부도로 지대석과 탑신, 옥개 등이 팔각을 이룬 팔각원당형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팔각 부도 세부  몇 개의 돌로 구성된 팔각의 높은 지대석 위에 올려진 3층의 기단부 가운데 하대는 아래로부터 크기를 줄여가며 연잎, 사자와 동자상, 구름무늬를 입체적인 부조로 조각하여 매우 화려하게 꾸몄다.

갑사 부도군  입구에서 본전 쪽으로 500미터 거리에 있는 부도골이라는 계곡에는 16기의 부도가 세워져 잇다. 이들 부도는 조선 후기 승탑 형태인 석종형 부도 양식을 따르고 있다.

 

2 동학사

 

동학사의 연혁

동학사의 건축

동학사의 유물

 

 

숙모전의 단종 위패  동학사는 고려 역대 왕과 조선 단종 및 심온, 사육신 등 역대 충혼들을 제향하는 곳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아 왔다.

동학사 전경

동학사 대웅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배면 벽쪽에 붙여 불단을 설치하고, 불단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여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모셔 삼세불을 봉안하였으며 후불탱을 목각으로 제작하였다.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이다.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들이고 불단을  설치한 뒤 칠설, 산신, 독성을 봉안하였다.

숙모전  단종을 비롯해 단종 복위를 꾀하다 참형을 당한 충신 200여 위의 혼백을 위로하기 위한 제단이 잇던 곳으로 초혼각이 세워져 있었다. 현재의 숙모전은 고종 때(광무 8년)에 재건된 것으로 예전의 초혼각을 고쳐 숙모전이라 사액하였다.

대웅전 삼존불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오른쪽에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의 삼세불을 봉안하고 있다. 19세기 불상에 새로운 근대 조각 양식이 가미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약사탱화  결가부좌하고 양손에 약호를 든 약사불상을 중앙에 크게 배치하였다. 본존 주위에는 육보살과 십대제자가 배치되었는데, 그 전체가 하나의 둥근 테두리 속에 수용되었다.

대웅전 앞 3층석탑  현재의 탑은 계룡산 전각골의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라 전한다. 탑신에 보이는 문의 장식이나 4단의 옥개석 층급받침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동화사 부도군  대웅전 서쪽 뒤편에 있는 6기의 부도로 모두 조선시대 후기 작품이다. 이 가운데 세 번째 작품(아래)은 동학사 부도 가운데 가장 완벽한 형태를 갖추면서도 세부 조각이 뛰어난 수작이다.

남매탑  백제국이 멸망한 뒤 어느 남매가 와서 수도하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2기의 석탑은 각각 5층과 7층으로 쌍탑의 배치를 보이지만 양식면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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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0. 12:37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14 아마존 - 상처받은 여전사의 땅

 

알랭 게르브랑 지음, 이무열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7

 

082

시156ㅅ  22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2

 

발 디딜 틈이 없는 빽빽한 숲,

바다만큼이나 깊고 넓은 어마어마한 강,

악몽 속에서나 나타날 법한 징그럽고 괴상한 동물들.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태초의 땅 아마존을 얘기할 때면

사람들은 그곳을 녹색의 지옥처럼 공포스러워했다.

그러나 이제 여전사 아마조네스들의 후손들과,

아마존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식한 나라들은

개발과 환경 보존이란 두 마리 토끼를 좇으며

새로운 아마존을 창조하고 있다.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해군 군의관 쥘 크레보는

아마존강과 오리노코강 유역으로 탐사를 떠났다.

그의 모험담은 석판화로 기록되어

프랑스의 <세계 여행>지에 1880~1881년 동안

소개되었다. 크레보는 1882년 4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마존 행을 시도하다가

토바족 인디오에게 살해당했다.

 

"여행을 서두르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그래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나는 지금 신의 은총으로 여기에 와 있다.

이 기회를 잘 활용해서 주의 깊게 자연을 조사해야 한다.

다시는 이 물을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작은 벤치에 앉아 있다.

내 앞에는 배의 나침반이 있고 무릎에는 노트가 있다.

나는 우리가 나아가는 길을 기록하는 중이다."

본능은 어서 빨리 급류를 타고 떠나라고 하는데,

이성이 나를 제지한다. 탐험가가 미지의 땅을 급히 지나가는 것은

적에게 등을 돌리고 달아나는 것과 같다."

 

"처녀림 -- 기아나에서는 '거대한 숲'이라고

부른다 --의 표정이 차갑고 무시무시하다.

30~40m는 됨직한 열주(列柱)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다. 그 속에서 비할 데 없이

화려한 것을 가진 새들의 노래가 흘러 나온다."


 

"우아나카가 옆에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는 가늘고 긴 막대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막대 끝에는

밧줄로 만든 올가미가 매여 있었다.

그는 동물의 목에 올가미를 척 걸고는

홱 잡아당겼다."

 

"움직이는 숲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법한 인디오 한 무리가

태평스레 우리 옆을 계속

따라왔다."

 

L'Amazone, un geant blesse

 

차례

 

제1장 천지에 널린 계피

제2장 살아 있는 전설

제3장 이성의 시대가 열대우림 속을 파고들다

제4장 거대한 고무산업

제5장 인디오와 열대우림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찾아보기

 

알랭 게르브랑 Alain Gheerbrant

1920년 파리 태생인 알랭 게르브랑은 시인이자 영화제작자이고 탐험가이기도 한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그는 한때 아방가르드 출판인으로 일하다가 보고타로 떠나 거기서 오리노코-아마존 탐사대를 조직하여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아마존 탐사에 나섰다. 그는 시에라파리마 산맥을 넘어 야누마미족(당시에는 과하리보족으로 알려짐)과 최초로 평화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후 세계를 두루 여행하며 연구와 집필을 거듭하여 이를 토대로 수많은 책과 영화를 만들었다.

 

옮긴이 : 이무열

1958년 전북 익산 출생.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북스 한국어판 편집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번역 및 저술에 종사하고 있다. 저서로는 <러시아사 100장면>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정보 고속도로 길라잡이> <1980년대 러시아> <인공지능> <프로그래밍 언어> 외 다수가 있다.

 

제1장

천지에 널린 계피

 

"인디오들은 왜 이런 식으로 방어를 할까? 그것은 그들이 아마존의 신민(臣民)이라는 것말고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우리가 왔다는 게 알려지자 인디오들은 그들에게 가서 도움을 구했고, 곧 열 명 남짓한 아마존이 왔다. 아마존들은 여자 대장으로 인디오 남자들 앞에 서서 정말 용감하게 싸웠다. 인디오들은 감히 등을 돌릴 생각을 못 했는데, 그런 경우에는 아마존들이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들을 쳐죽였다."

가스파르 데 카르바할

"정복자들은 눈을 크게 뜬 채 끝없이 이어지는 하얀 섬망 상태 속에서 살았다."

장 데스콜라

잉카 제국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

키토 고원 지대 한쪽에는 안데스 산맥의 화산 봉우리 중 53개가 우뚝 솟아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산기슭이 낮은 경사를 이루며 아마존 지역으로 뻗어 내려간다.

페루는 20년도 채 못 돼서 온 유럽을 휩쓸고 그 지정학적 균형까지도 깨뜨려 버린 황금강의 발원지였다. 강의 시원은 안데스 산맥이었는데, 잉카 신전에서 약탈한 보석과 신성한 그릇과 조각품들이 스페인인이 만든 용광로 속에서 주괴로 변했다. 야마들을 징발해 보물로 탈바꿈한 상품들을 해안으로 실어 나르면, 거기서 황금막대들을 캘리언선에 실었다.

안데스 산맥을 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페인인의 말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된 인디오들도 특수 훈련을 받은 개한테는 완전히 혼비백산했다. 피사로는 탐험에 사나운 인디오 공격용 개 2,000마리를 대동했다.

배를 만드는 스페인인.

오레야나가 돌아온 지 45년 뒤인 1587년, 지도 제작자 호안 마르티네스는 라플라티강 근처에다 파타고니아를 그려 넣고, 기아나 고지가 안데스 산맥에 이어진 것처럼 그렸으며, 오리노코강과 아마존강을 하나의 거대한 히드라처럼 만들어 바다로 빠져 출구가 적어도 둘인 것처럼 묘사했다. 오리노코강 하류가 분명한 위쪽 가지는 오레야나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마라뇬강에서 뻗어나온 아래쪽 가지에는 이름이 붙어 있지 않다. 두 강 사이에 아마존의 땅이 거대한 섬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가스파르 데 카르바할은 여자 전사들이 분명히 북쪽에서 공격해 왔다고 기술했다. 이 지도를 보고 있노라면 잉카 제국 시인의 지혜가 떠오른다. 시인은 제국의 주변 숲을 휘감으며 미끄러져 내리는 이 물길을 아마루-마유, 즉 '거대한 뱀-인간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들이 바삐 활을 다루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내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벌거벗은 몸에 팔장식도 두르지 않은 모습으로 어찌나 빨리 화살을 뽑아 쏘아대는지, 솜씨가 영국인 명궁에 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의 야만인들은 활을 쥔 손으로 화살통을 잡은 채, 시위를 여섯 번 당겼다 놓았다 싶은 동안에 12개의 화살을 날려보냈다."

장 드 래리


"황금 투구를 쓰고 번쩍이는 무기를 찬 전사들을 바라보는 데서 얻은 어떤 만족감도 그 야만인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는 기쁨에 비길 수는 없었다.

가스파르 데 카르바할


1602년 동판화에 묘사된 브라질 해안.

카를로스 5세는 브라질이 발견된 바로 그해에 태어났으나, 선제인 페르디난드나 이사벨 여왕만큼 아메리카 인디오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당시 신세계로부터 금이 대거 유입되는 데에 맞추어 자신의 새로운 본토 전략을 시행하는 데만도 너무 바빴던 것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인디오의 노예화를 금지하고 그 신분을 인간으로 인정하는 신법의 반포(1548년)는 그의 통치와 신세계의 역사에 지속적인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명령이 법적 구속력을 얻기까지는 몇 세기가 걸렸다.

곤살로 피사로의 처형을 그린 이 동판화는 운명의 장난에 대한 부정적인 교훈을 담고 있겠지만, 작가의 무대 연출 기교는 연극보다도 뛰어나다.


제2장

살아 있는 전설


나뭇잎이 나비로 변하고 열대 덩굴이 뱀으로 변하며 뱀이 덩굴로 변하는 등, 동물과 식물과 광물, 공기와 물, 빛과 그림자의 구별이 모호한 데서 야릇한 즐거움을 맛보는 세계에서, 어디서 현실이 떠나고 어디서 상상이 시작되는가를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16세기와 17세기에 아마존 일대를 덮고 있는 우림은 숨을 죽인 채 환상을 추구하는 인간들이 빚어 내는 모험 가득한 대서사시를 지켜보았다.

엘도라도는 마누아에 사는 것으로 전해졌는데, 그 규모가 전설의 도시에 어울렸다. 월터 롤리 경에 따르면, 후안 마르티네스는 하루 종일 걷고도 더 걸어서야 황궁에 도착했다고 한다.

아무도 본 적이 없다 보니 점점 신비에 싸여, 파리마호수(그림은 1630년에 네덜란드인이 그린 지도)는 지도제작자들이 저지른 속임수 중에서도 가장 오래도록 사실로 믿어졌다. 지도에서 호수가 사라지기까지는 2세기가 걸렸다.

런던탑에서 13년 동안 고생을 한 뒤에, 월터 롤리는 가장 커다란 모험을 찾아서 신비의 땅, 엘도라도로 2차 항해를 떠낫다. 그는 후에 영국으로 돌아와 단두대에 세워졌다.

16세기의 판화에서처럼 환영하는 인디오들을 만나고 혼 후, 롤리는 런던탑에서 자신의 기념비적인(그러나 불행하게도 끝맺지 못한) 《세계사》를 쓰기 시작했다.

에와이파노마족(아세팔리, 즉 '머리없는 인간'으로도 불렸다)은 지금의 북베네수엘라에 사는 카리브 부족의 하나인 에콰나족이었는지도 모른다.

16세기에 아마조니아의 '야만인'들을 찾아 나선 광신적인 선교사들은 인디오들이 대거 내륙으로 도피해 들어간 데에 큰 책임이 있다. 자신들의 관습과 믿음을 악마 숭배라 하여 추방시키려는 조직적인 공격에 맞서 자신들을 힘으로 지키기 위해서, 인디오들은 마지못해 적합한 시기를 택하여 지나치게 열심인 침입자들을 참살했다. 선교사들은 반대로 이것을 순교자의 왕관을 쓸 기회로 받아들이고 더 한층 고무되어 오히려 노력을 배가했다(그림은 1611년의 스페인인 선교사 페레르). 어처구니없는 이 싸움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가 모든 사람의 서로 다른 권리를 인정하고 나서부터였다.

아르마딜로에 관한 월터 롤리 경의 기록이다. "스페인인이 아르마디야라고 부르는 짐승은 레노세로 비슷하게 생긴 작은 접시 위에 줄무늬를 넣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꽁무니에 거대한 사냥용 나팔만큼이나 큰 하얀 뿔이 자라나 있다. 그 뿔은 휘감는 데 쓰였는데, 외과의사인 모나르두스는 그 뿔에서 나온 가루가 귀에 조금만 묻어도 귀머거리가 된다고 쓰고 있다."

결국에는 도시의 건설자로 변신하지 않은 정복자가 어디 있던가? 스페인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피사로는 잉카제국을 장악하자마자 곧 그 성형 수술을 꾀하기 시작했다. 아타왈파는 1533년에 죽었고, 그와 더불어 그의 왕조는 사라졌다. 1534년, 피사로의 부관인 세바스티안 데 베날카사르는 수도를 파괴하고 스페인식 격자 모양의 거리를 가진 새로운 키토를 설계했다. 예수회 교단의 건축가가 해발 2,000m에다 세운, 마치 산꼭대기에 박힌 보석과도 같은 이 귀중한 유적은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고전풍의 괴기스런 이 그림은 신세계 탐험가의 스케치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켈란젤로의 그림에 가까운 분위기를 풍긴다. 장 드 래리의 브라질 항해(1555~1558년)기록 속에 들어 있는 이 삽화는 이름난 식인종 투피남바의 생활을 묘사한 장면이다.


"커다랗게 외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마치 개나 늑대의 울부짖음처럼 들리는 것이 매우 신기했다. '그가 죽었어요!' 몇몇이 구슬픈 목소리로 말한다. '그는 매우 용감해서 우리들에게 많은 포로들을 먹을 수 있게 해주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응답한다. '그는 정말 훌륭한 사냥꾼이고 뛰어난 낚시꾼이었는데!' 다시 한 명이 외친다. '오, 우리의 원수를 갚아 주던 사람이여, 우리의 용감한 포르투갈인 살육자여!'"

장 드 래리

우아하기 그지없는 고전풍의 이 그림은 '고상한 야인'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본 장 자크 루소와 동시대인이 그렸다. 인디오들을 미화시켜 그린 것으로 이보다 더한 것은 찾아볼 필요도 없을 정도이다. 역설적이게도, 신대륙에 관한 객관적인 기록이 부쩍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을 묘사하는 방식은 여전히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1616년 1월 20일의 벨렘 요새 축성은 포르투갈의 아마조니아 병합의 신호탄이었다. 다른 유럽인들이 철수하고 테이셰이라 선장이 키토 왕복 여행을 완수한 후, 포르투갈인들은 다음 단계의 침투에 착수하여 바라(현재의 마나우스) 요새를 쌓았다(1669년).

 

제3장

이성의 시대가 열대우림 속을 파고들다

 

"어떤 장벽이라도 넘겠다는 열정으로 그들은 안데스를 넘고, 컴컴한 신비의 강을 기어내려가고, 짐수레를 끌고서 사막을 가로지르고, 반딧불 반짝이는 뱀처럼 얽힌 정글을 헤치며 나아갔다 ……. 그들이 그런 식으로 조사하고 정리하고 문자화한 결과, 아메리카는 300년 동안 무성하던 환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빅토르 볼프강 폰 하겐

《남아메리카가 그들을 불렀다》

쿠라레 독액에 관한 샤를 마리 드 라콩다민의 기록. "자기네들의 복수심이나 질투심, 증오감을 만족시키는, 그렇게도 확실하고 효과 빠른 도구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그것이 원숭이나 새들에 한해서만 치명적인 수단으로 쓰인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자신의 새로운 신도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종종 증오의 대상이 되는 선교사가 …… 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나 불신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더더욱 결단을 자아낸다."

 

1745년의 판화에 나타난 아마존강의 협곡.

"오늘 아침 몇 시간 동안 훔볼트와 함께 있었다. 그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를 안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에게 늘 새로운 놀라움을 느낀다. 그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다재다능한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 그 어떤 주제가 화제에 오르더라도 그는 지극히 편안한 자세로 자신의 지식 창고에서 숱한 보물을 꺼내 우리 위에 쏟아붓는다. 그는 엄청난 물줄기를 쏟아 내는 분수와도 같다. 우리는 마를 줄 모르는 값진 물줄기를 받아 담을 그릇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안데스 산맥을 넘는 훔볼트. 19세기의 동판화.

19세기 중엽 영국에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새로운 종류의 과학연구자들이 등장했다. 바로 이권에 좌우되지 않는 과학자들이다. 자연과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여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헨리 월터 베이츠와 앨프레드 러셀 월리스를 생각해 보라. 그들이 처음 만나 서로가 모험의 꿈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하나는 측량기사의 조수였고 하나는 속옷가게의 점원이었다. 대영박물관은 그들에게 곤충과 식물 표본의 채집을 의뢰했다. '팔 수 있는 상태로' 가져온 종 하나마다 3펜스를 준다는 조건이었다. 1848년, 그들은 열정 외에는 이렇다 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벨렘에 상륙했다.

동물지리학회의 아버지. 앨프레드 러셀 월리스는 네그루강에서 4년을 보냈다. 진화론의 선구자였던 그는 다윈에게 자연선택에 관한 자신의 논문을 보냈고, 그 논문은 동시에 런던 린네 협회에 보고, 낭독되었다. 그 유명한 《종의 기원》의 첫번째 초안이었다.

아마조니아의 물에서 가장 장관인 두 괴물 중 하나인 악어를 잡는 헨리 월터 베이츠. 검은 카이만악어는 몸길이가 5~6m에 이른다. 카리브 해안에 사는 그 사촌, 크로코딜루스 인테르메디우스는 8m가 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아나콘다 중에는 몸길이 약 12m, 몸무게 150kg 이상까지 자라는 것도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리오브랑코 인디오

쿠니부시 인디오

마유루나시 인디오

마쿠시 인디오

철학여행

1783년에서 1792년 사이에 일군의 포르투갈인 탐험자-학자들은 아마조니아 인디오들과 동물상을 그린 당세기의 가장 귀중한 그림첩을 만들어서 명성을 얻었다. 알렉산드레 로드리게스 페레이라는 코임브라대학의 '자연철학' 박사였고, 그의 여행 동반자 주아킴 주세코디나와 주세 주아킴 프레이레는 리스본 왕립 자연사 수집소 소속의 화가였다. 그들은 9년동안 네그루강, 브랑코강, 마데이라강, 과포레강, 마모레강을 따라 4만km(지구의 둘레에 해당하는 거리이다)를 돌아다니며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가는 곳마다 놀라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인디오를 처음 본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사진처럼 정확하게 인디오에 관한 기록을 처음으로 남겼다. 그러한 발견 가운데에는 화살이나 창을 쏘는 데 쓴 장치가 있는데, 그것은 활보다도 앞서는 인류의 가장 오랜 무기 가운데 하나였다.

 

제4장

거대한 고무산업

 

"'에베'라고 불리는 나무는 에스메랄다스 지방에서 자란다. 단 한 번만 쭉 그어도 나무는 우유 같은 환액을 분비하는데, 공기와 접촉하면서 이 액은 차츰 굳어지고 색깔이 짙어진다. …… 마야족은 거기서 얻는 수지를 '카우추'라고 부르는데, '눈물을 흘리는 나무'라는 뜻이다."

샤를 마리 드 라콩다민

아마조니아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야생 고무를 능숙하게 사용했다. 19세기에 오마과 인디오는 포르투갈인들에게 고무 시린지의 사용법을 시험해 보였다.

 

악순환

우기가 닥쳐 고무액 채취를 할 수 없게 되면 세링게이루는 자신의 수확물을 강 위에 띄우고아비아도르(중개인)가 기다리고 있는 마나우스로 내려간다(위). 펠레를 쪼개어 등급을 매기고(가운데) 무게를 단 후에(아래) 중개인은 자신의 고객과 새로운 계약에 서명한다. 물론 거래 실적표에서 그의 수입을 산출해 낸 뒤의 일이다. 아비아도르의 창고에는 통조림, 음료, 옷가지, 그리고 불쌍한 채취꾼들이 우기의 괴로운 몇 달 동안을 보내는 데 있으면 좋겠다 싶은 갖가지 물건들이 그득하다. 그러니 세링게이루가 올 때마다 늘상 아비아도르에게 더 많은 빚을 지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해를 거듭하면서 채취꾼은 '자유'를 꿈꾸지만, 결과는 그와 무자비한 주인 사이에 채무 관계의 사슬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뿐이다.


제5장

인디오와 열대우림


"내 뒤를 이을 국왕, 내 딸인 공주, 내 아들인 왕자가 하는 모든 일, 하도록 허락되는 모든 일이 섬이나 육지, 어느 곳에 사는 인디오들, 그 생명과 재산 어느 것에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공평하고 친절한 대접을 받는 것을 그들이 눈으로 확인하기를 바라노라."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마지막 유언




걷는 법 배우기

보토쿠도족 인디오들은 인종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레가 자신이 머물던 땅의 주인인 아셰족에게 숲으로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했을 때 배운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아셰족들은 멈칫했다. "그들의 가장 큰 염려는 나 때문에 일행의 속도가 늦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내가 동행하는 데 동의했고, 나는 곧 그들의 염려가 근거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 때문에 '길을 우회하거나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은 날랜 동작으로 걸었고, 나는 자꾸만 뒤로 처졌다.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나무덩굴이 비록 꼼짝 못하게는 아닐지라도 계속해서 길을 막았고, 때로는 덩굴이 갑자기 나를 휘감아 나무줄기에 내동댕이치곤 했다. 옷이 가시에 걸리면 가시를 떼어 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나는 뒤로 처지는 데 그치지 않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아셰족은 말이 없고 날렵하고 능숙했다. 오래지 않아 나를 뒤처지게 만드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옷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나뭇가지와 덤불은 벌거벗은 인디오의 피부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도 그들처럼 하기로 작정하고 옷을 벗어 던졌다."

세균전

아마존강의 양대 지류인 주루아강과 푸루스강은 페루, 볼리비아와 경계를 이루는 브라질의 아크레주를 관통하여 흐른다. 두 강은 전장에 걸쳐 항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강의 원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의 역사가 19세기 초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이 지역에 살았던 인디오들은 탐험가들을 평화로이 맞았다. 그런데 고무 붐이 일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이 지역에 야생 고무나무가 풍부하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인디오들에게는 불행하게도, 수아레스가 자신의 제국 건설에 착수했다. 인디오들을 되도록 신속하게 없애 버리기 위해 세랑게이루(투기꾼)들은 18세기에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이 북아메리카 인디오들에게 시도하여 성공한 방법을 원용했다. 심지어는 병균에 감염된 옷을 건네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오늘날 이 사람들은 실제로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 

전세계의 다른 사람들처럼 인디오들(위는 카마칸족 인디오)도 춤을 언어와 축제, 둘 다로 생각했다. 신성과 세속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없는 시대로의 일종의 회귀인 셈이다. 언어보다도 오래된(새들의 짝짓기 군무를 보라) 춤은 언어를 초월한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광란하며, 시간을 뛰어넘는 몰입으로 이중성 - 육체와 영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을 쓸어 없애고 존재를 다시 하나로 묶어 내면서, 춤은 생명 본능을 표현한다. 흔히 축제로, 이따금씩은 내키는 대로, 셀 수 없이 벌어지는 인디오들의 춤판은 출생, 사춘기, 죽음, 전쟁, 결혼, 집짓기, 새로운 땅의 개척 등등, 기념할 만한 일에서부터 일상적인 일까지, 인생 행로의 마디마디에 구두점을 찍는다.

인디오 공동체가 바깥 세계에 포위되어 공동체의 존속 자체를 위협받게 되었을 때, 샤먼의 지속적인 존재는 집단의 결집력과 나아가 존재 자체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증이었다 - 인종학자와 선교사들이 모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이다. 예언자와 사제와 치료자가 하나로 뭉쳐진 샤먼은 부족원 개개인의 건강을 지키고 부족의 안녕과 행복에 관계된 모든 일에 자문을 한다.


"주민들의 발가벗은 몸은 풀로 이어짠 푹신한 바람벽과 야자나무의 술로 보호받는 것 같았다. 원주민들이 오두막에서 미끄러져 나올 때면, 마치 거대한 타조 깃으로 만든 덮개를 벗어 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몸과 보드라운 상자에 담긴 장신구들은 정교한 본을 따르고 있었고, 몸의 화장과 칠이 화려하다 보니 오히려 살색이 돋보였으며, 몸의 요란한 칠은 또한 깃털과 꽃 사이에서 밝고 오묘한 섬광을 발하는 야생동물의 이빨 등, 그보다 더 휘황찬란한 장식물들이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배경 효과를 노린 것 같기도 했다. 그 광경은 마치 문명 전체가 삶의 형태와 내용과 색깔에 대한 단 하나의 뜨거운 애정에 전폭적인 협력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18세기 포르투갈인의 그림에 묘사된 쿠루추족 인디오의 공동의 집.

브라질과 콜롬비아, 페루의 교차로에 사는 제법 큰 규모의 인디오 부족인 술리몽스 강변의 투쿠나족(위)은 지난 2세기 동안, 용케도 자기네 사회문화적 통합력을 잃어버리지 않고 이웃 백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그러나 국제 언론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그들마저도 브라질 쪽에서의 잔인한 습격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한다.

브라질령 아마존 지역의 인디오들이 사는 다양한 형식의 움막들.

 

"오셀롯 귀신아, 나한테로 내려오너라! 헤쿠라여, 당신은 나를 돕지 않았나이다. 나는 며칠 밤을 지새며 복수할 방법을 궁리했노라. 나는 수리 귀신과 딜 귀신을 보았노라. 달 귀신이 인간의 육체를 탐하여 움막 속에 들어왔다가 수이리나의 화살에 맞았구나. 그 상처와 흘린 피에서 살을 뜯어먹는 무수한 귀신들이 태어났도다. 달 귀신아, 수리 귀신아, 너희들은 식인종이다. 수리야, 네 머리는 피로 물들었고, 네 콧구멍에는 벌레들이 들끓는도다. 하늘에 잠자리들이 모여드는구나. 오마웨가 화살로 땅을 뚫었구나. 구멍 속에서 솟아나온 물줄기가 하늘에 닿아 하늘 뚜껑을 이루었도다. 그 위에서 잠자리들이 번식하는구나. 그 위에 목마른 자들이 산다! 그들을 나한테 내려오게 하라! 오마웨가 나의 혀에 불을 붙였도다! 그들로 하여금 내 혀를 적셔 새롭게 만들게 하라! 악마에게 우리 아이들을 잡아가도록 명령한 자들은 내 복수를 받으리라. 그들이 어디 있다하더라도."

한 아이의 죽음에 부친 야누마미족 샤먼의 주문

자크 리조 기록

만일 브라질인 투기꾼들이 우연히 시에라파리마 산맥의 아마존 쪽 사면에서 다량의 금과 다이아몬드 퇴적물을 발견하지만 않았더라면, 야누마미족은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우리와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에서 살아갔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유명한 모험가이자 런던탑에 갇힌 죄수였던 월터 롤리 경이 400년 전에 찾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엘도라도가 다시 태어났다. 1987년에 시작된 이 골드 러시는 4만 명의 사람들 - 그리고 그 문화와 질병 -을 야누마미 땅으로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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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4. 12. 5. 22:02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13 우리 옛 질그릇

 

글, 사진 / 윤용이

1999, 대원사


 

시흥시립도서관

SA002624

 

082

빛12ㄷ  229

 

빛깔있는 책들 229

 

윤용이-------------------------------------------------------------------------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사 및 학예관을 거쳐 문화재위원을 역임하였고 현재 원광대학교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한국도자사연구』『아름다운 우리 도자기』『한국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공저) 『우리 옛 도자기』 등이 있다.

 

|차례|

 

머리말

선사시대 질그릇

   신석기시대 질그릇

   청동기시대 질그릇

   초기철기시대 질그릇

역사시대 질그릇

   원삼국시대 질그릇

   삼국시대 질그릇

   통일신라시대 질그릇

   고려시대 질그릇

   조선시대 질그릇

맺음말

참고 문헌

우리나라 질그릇 역사 연표

덧무늬 질그릇발  양양 오산리 출토, 높이 16.5센티미터, 입지름 23.6센티미터,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손톱무늬 질그릇발  양양 오산리 출토, 높이 27.7센티미터, 입지름 37.5센티미터,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주구달린 덧무늬 질그릇발  부산 소선동 패총 출토, 높이 12센티미터,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덧무늬 질그릇발  김해 수가리패총 출토, 높이 20.6센티미터, 부산대학교박물관 소장.

빗살무늬 질그릇발  서울 암사동 출토, 높이 40.5센티미터, 경희대학교박물관 소장.

빗살무늬 질그릇발  서울 암사동 출토, 중 · 소 · 대, 높이(대) 47.5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빗살무늬 질그릇의 분포도

북방식 고인돌  강화도 부근리 소재

청동기 유물  화순 대곡리 출토, 지름(큰 거울) 18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민무늬 질그릇발  광주 미사리 출토, 높이 44.6센티미터, 경희대학교박물관 소장.

민무늬 질그릇발  서울 가락동 주거지 출토, 높이 35센티미터,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각종 철기  초기철기시대, 위원 용연동 출토, 길이(창) 32.6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흑도 장경호  대전 괴정동 출토, 높이 22.5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점토대 질그릇발  대전 괴정동 출토, 높이(왼쪽) 17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점토대 질그릇발  출토지 미상, 높이(왼쪽) 15.1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손잡이달린 흑도 장경호  원삼국시대, 경주 조양동 출토, 높이 32.6센티미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돌무지무덤  고구려시대, 중국 퉁구 장군총 전경.

손잡이달린 질그릇호  고구려 6~7세기, 대동 송신리 출토, 높이 17.1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질그릇 단지  고구려 6~7세기, 높이 35.7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몽촌토성 전경  서울 방이동(현 올림픽공원), 전체 길이 2,285미터.

삼족도기 백제 5세기, 서울 몽촌토성 출토, 입지름 24.9센티미터,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원통형 질그릇  백제 5세기, 서울 몽촌토성 출토, 높이 54센티미터,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백제 기와 가마터 전경  백제 6~7세기, 부여 정암리 소재.

백제 도용  백제 6~7세기, 부여 정림사터 출토,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도제 불상대좌  청양 본의리 가마터 출토, 높이 100센티미터,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가야 금관  가야 5~6세기, 전 고령 출토, 높이 11.5센티미터, 호암미술관 소장.

기마인물형 질그릇  가야 5세기, 전 김해 출토, 높이 23.2센티미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집 모양 질그릇  가야 5~6세기, 높이 35센티미터, 호암미술관 소장.

오리형 질그릇  가야 5~6세기, 전 경상남도 출토, 높이 15.7센티미터(왼쪽), 16.5센티미터(오른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령 지산동고분 발굴 모습

금제 태환식 귀고리  경주 보문동 부부총 출토, 신라 5~6세기, 길이 8.7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남자인물상 도우  신라 5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질그릇 장경호  신라 5세기, 경주 황남동고분출토, 높이 34센티미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배 모양 질그릇  신라 5~6세기, 경주 금령총 출토, 높이(왼쪽) 12.6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마인물형 질그릇  신라 5~6세기, 경주 금령총 출토, 높이 23.5센티미터(주인), 21.2센티미터(시종),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석굴암과 본본불상  통일신라 8세기, 경주 토함산.

얼굴 모양 수막새  통일신라 7세기, 경주 사정동 영묘사터 출토, 높이 14센티미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여인상 도용(세부)  통일신라 7세기, 경주 황성동고분 출토, 높이 16.5센티미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문관상 도용  통일신라 8세기, 경주 용강동고분 출토, 높이 17센티미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녹유 도기 인화문합  통일신라 8세기, 경주시 출토, 총높이 16.5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주 안압지 전경

질그릇 묵화문합  통일신라시대, 경주 안압지 출토, 입지름 11.3센티미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각종 질그릇  고려시대, 연세대학교박물관 소장.

장독대(버선본 붙인 독)

소래기  높이 31.5센티미터

전라도 지방의 독  높이 100센티미터

경기도 지방의 독  높이 97센티미터

경기도 지방의 독  높이 94센티미터

 

 

posted by 황영찬
2014. 12. 5. 10:02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12 뭐냐

 

고은 선禪시집

2013, 문학동네

 

대야도서관

SB079219

 

811.6

고67ㅁ

 

너 뭐냐 뭐냐 뭐냐 뭐냐 뭐냐……

이 작은 시편들,

사물들 위로 내리꽂히는 번개들의 찰나를 품는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우뚝 멈춰섰다. 사고를 정지시키는 공안(公案)과도 같은 정신의 폭죽들! 나는 이 시들을 설명할 수 없으며 다만 그 함의를 절반쯤만 이해하고 이 시들이 드러내는 작은 알곡에 매혹될 뿐이다. 깨뜨리기에는 단단한 견과, 하지만 많은 시들이 견과이면서도 동시에 비어 있는 듯하다. _알렌 긴즈버그

 

고은은 노선사들이나 젊은 시인들보다 한 수 위이다. _게리 스나이더

 

무례하고 동정적이며 종종 유머가 넘치는 이 작은 시편들은 이해의 광대한 들판 쪽으로 문을 열어놓고 있다. 고은의 시들은 만물의 민주주의 가운데서 살며 바로 이 순간, 빛나며 도약하는 본질을 똑바로 그리고 커다란 기쁨을 가지고 바라본다. _제인 허시필드

 

선시들은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말로 하며 본질로 직격하는데, 직격하며 대상을 깬다. 삼라망상에 들이대는 "너는 뭐냐"라는 물음이 그것을 깨는 망치다. 선시들은 대상들을 여지없이 께트린다. 그 파쇄를 본질로 향유하는 것, 이게 바로 고은 선시의 본래면목이다. _장석주, '해설' 중에서

 

고은

1958년 처녀시 「폐결핵」 발표 이래 시 · 소설 · 평론 · 에세이 등 15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그중 시집은 서사시 『백두산』 7권, 전작시 『만인보』 30권을 비롯해 모두 70권이며, 『고은 시전집』『고은 전집』을 출간했다. 세계 25개 국어로 시와 소설이 번역 출판되었고, 이 가운데 『만인보』는 스웨덴에서 '현대의 고전'으로 선정되어 중고교 외국문학 교재로 채택되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한국민예총 초대회장 등을 지내고, 미국 하버드 대학 옌칭연구소 초빙교수, 버클리대 동양학부 초빙교수(시론 강의), 서울대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단국대 석좌교수, 유네스코 세계 시 아카데미 명예위원회 위원, 한겨레사전 남북한 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며 국내외 시단에서 창작활동중이다. 국내외 문학상과 훈장을 다수 수상했다.

 

차례

 

서문

이실직고 / 일기 / 얼씨구 / 달밤 / 화두 두 개 / 임종 / 선방 / 권고 / 메아리 / 올빼미 / 작별 / 아기 / 산을 내려오며 / 쇠고기 / 부시먼 / 이름 세 개 / 감회 / 거량(擧揚) / 난주경허(蘭州鏡虛) / 낮 / 웃음 / 저 건너 / 옷 / 주정뱅이 / 법화경 / 좌선(坐禪) / 골목 / 벽암록 / 낮달 / 무지개 / 남과 북 / 선방(禪房) / 허튼소리 / 친구 / 삼거리 주막 / 대웅전 / 늦여름 / 소나기 / 하루살이 / 허깨비 / 백팔염주 / 이삭줍기 / 달 / 문둥이 / 청개구리 / 한마디 / 품 안 / 고려 보조 / 뻐꾸기 / 미소 / 수평선 / 사자 / 산은 산 / 산꼭대기 / 먼 불빛 / 물결 / 까치 새끼 / 길을 물어 / 한 평 반 감방 / 길 / 파경조 / 빨래 / 팔공산 / 바람 / 쇠고기 등심 / 낮 / 종로 / 괜히 / 어느 날 / 옛 부처 / 밭두렁 돌덩이 / 제주 새밭 / 달 / 오대산-五臺拍手峨媚笑 / 봄꿈 / 청개구리 / 폭우 / 졸장부 / 잔물결 / 바람 / 출가 / 한산 습득이 / 어떤 거사(居士) / 내가 좋아하는 말 / 마정리 아낙네 / 새로운 길 / 모기 / 집 / 말 한마디 / 여름 / 별똥 / 가을밤 / 오늘 / 푸른 하늘 / 어린아이 / 친구 / 문 닫으며 / 마가목차 한 잔 / 고향 / 왜 죽여 / 소경 아나욜타 / 운봉 임종게 / 전등록 / 달밤 / 그믐밤 / 아궁이 / 낮잠 / 용맹정진(勇猛精進) / 지렁이 / 파리 한 마리 / 편지 / 야보 / 멧돼지 / 한밤중 / 북극성 / 팔만대장경 / 돼지 / 싱거운 놈 / 낮잠 뒤 / 아난 / 경책 / 대좌 / 지나가며 / 귀 / 이슬 / 밤 / 그리움 / 웃음 / 세 식구 / 상류(Upper Stream) / 열 / 태평로 / 몇천 년 / 파주 낙조 / 안개 / 달밤 1 / 그리움이거든 / 1992년 4월 15일 / 1992년 4월 16일 / 1992년 4월 17일 / 1992년 4월 18일 / 저녁 / 보리밭 / 자정 / 봄바람 / 먼 데 / 파도 / 임 / 섬 / 돌맹이 / 아침이슬 / 냇가 / 기흥 지나면서 / 죽음 / 보이저 2호 / 이름 없는 노래 1 / 이름 없는 노래 2 / 이름 없는 노래 3 / 어느 날 / 화엄 / 기념 / 상원사 / 미풍 / 대화 / 향기 / 호수 / 달밤 / 태풍 / 감사 / 이웃 / 그리움 / 모국어 / 술 / 마을 하나 / 서운산 / 낭떠러지 / 몸의 노래 / 친구 / 예로부터 / 직립

해설 | 고은 선시에 관하여 장석주(시인, 문학평론가)

 

지렁이

 

지렁이 기어간다 기어가다가 쉰다

이 하늘의 벗이여

 

팔만대장경

 

횡설수설로 길 막혀

돌아서니

거기

뱀 한 마리

 

뱀이 뱀의 길 잘도 안다

 

어린아이

 

나는 불 법 승 3보에 귀의하지 않노라

길 가다가

어린아이 하나 만나

그 천진난만에 빠져버려

촛불 따위 향 따위 군더더기

아이고 놓쳤다 잠자리!

 

푸른 하늘

 

이 사람아 실컷 울어아

 

그믐밤

 

달 뜨지 않아도

7백 리 밖

그대와 나 사이

밤새도록 휘영청

내일 죽을 개 죽을 줄 모른다

힘차게 짖는다

 

메아리

 

저문 산더러

너는 뭐냐

 

너 뭐냐 뭐냐 뭐냐 뭐냐 뭐냐……

 

골목

 

막다른 골목 돌아선다

좋아라

여기저기

환한 불꽃

 

정릉 어느 골목

 

냇가

 

가을 저녁

추운 물 바쁘게시리 흘러간다

그 물소리 유난 떨어

저만큼까지 이 아리며 들리는지

저문 들마저 귀 가다듬는다

 

세 식구

 

천둥번개 치는데

깜깜한데

어린놈 있다

에미 애비 있다

시퍼런 번개불빛에 드러난 이 실재!

그렇다 삶이 아닌 이 부재!

 

지나가며

 

절하고 싶다 저녁연기 자욱한 먼 마을

 

빨래

 

빨래 펄럭이누나 보살이 보살인 줄 모르며

 

일기

 

편할수록

불편하다

더 불편하다

 

왜 올가을이 내년 가을인가

 

 

달 보면 된다고?

달 가리키던 손가락 잊어버리라고?

이런 벽창호!

 

달과 손가락 다 잊든지 말든지

 

대웅전

 

크게 그르쳤다

 

차라리

일주문에서 돌아갈 일

 

 

마른 똥덩어리

파리도 날아오지 않는다

 

여기 극락세계? 아냐

 

 

비 온 뒤 물 불었다

제비 열두어서너대여섯 마리 높디높다

 

어느 날

 

앞산에 번개

뒷산 우레

이 가운데

돌멩이 벙어리

 

모기

 

모기한테 물렸다

고맙구나

내가 살아 있구나

긁적긁적

 

뻐꾸기

 

이른 아침 뻐꾸기 세 마리 나란히 앉아

이 세상 좋을시고

저 세상 좋을 시고 말없다

어제 울던 뻐꾹뻐꾹 다 잊어버리고

오늘 울 뻐꾹뻐꾹 아직 일러라

이때가 제일 좋은 때!

 

거량(擧揚)

 

이리 오너라

 

발이 없다

 

개 한 마리 보내니

네 발을 물을 것이다

 

새 같은 놈!

 

내일 오너라

 

내일? 내일이 뭐냐?

 

개 같은 놈!

 

선방(禪房)

 

네가 1겁은 고사하고

10겁을 앉아보아라

정법(正法)이 나타나지 않으리라

 

그냥 번뇌 망상하고 놀다 일어나거라

 

 

posted by 황영찬
2014. 12. 2. 13:01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11 HOW TO READ 라캉 Jacques Lacan


슬라보예 지젝 지음 | 박정수 옮김

2007, 웅진지식하우스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31818


082

하66ㅇ v. 8

 

라캉의 관점에서, 신경증, 정신병, 도착증 같은 병리적 형식들은

근본적으로 현실에 대한 철학적 태도들을 지니고 있다.

만약 내가 신경증을 앓고 있다면, 이 '질병'은 현상에 대한 내 모든 관계를

물들이고, 내 인격의 전체 구조를 결정한다.

라캉이 다른 정신분석학과를 비판하는 초점은 그들의

임상적 편향에 맞춰 있다. 라캉에게 정신분석 치료의 목적은

환자의 복리나 성공적인 사회생활 내지 개인적인 자기성취가 아니라,

환자로 하여금 욕망의 기본 좌표와 곤경을 대면하도록 하는 것이다.

 

HOW TO READ

●  ●  ●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도발적인 작가와 사상,

그들의 글을 원전으로 직접 만난다


탐욕스러운 독자이자 해석자, 라캉

 

라캉에게 정신분석학은 근본적으로 심리적 장애를 다루는 이론이나 기법이 아니라, 개인들을 인간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영역과 대면시키는 이론이자 실천이었다. 저자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은 읽는 좋은 방법은 그의 독법을 실천하여 라캉으로 다른 텍스트를 읽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지젝은 라캉으로부터 CIA 일화,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 <에일리언> <카사블랑카>, 도스토예프스키의 단편소설 <보보크>, 테러리스트 부예리의 편지 등 다른 분야의 텍스트로 이행하면서 일어난 일들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지젝은 이 책에서 특유의 논리로 라캉의 '어려운' 개념들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HOW TO READ 시리즈

위대한 사상, 세기의 저작을 원전으로 직접 만나는 특별한 기회, HOW TO READ 시리즈, 이 시리즈는 세계적 석학들의 안내를 받으며 사상가들의 저작 중 핵심적인 부분을 직접 읽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읽는 척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제대로 읽을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우리시대 교양인을 위한 고품격 마스터클래스가 될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독보적인 철학으로 '동유럽의 기적' 혹은 라캉 정신분석학의 전도사로 일컬어지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현재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선임 연구원, 슬로베니아의 주간지 <믈라디나>의 정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삐딱하게 보기 : 대중 문화를 통한 라캉의 이해》《부정태와 함께 체재하기 : 칸트, 헤겔,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 등이 있다.

 

박정수

서강대학교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국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생활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현대 소설과 환상》이 있고, 옮긴 책으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민족주의와 섹슈얼리티》(공저)가 있다.

 

차례

 

■ HOW TO READ 시리즈를 열며

■ 저자 서문 : 우리 뇌를 씻어내자

 

1. 알맹이가 없는 텅 빈 제스처

    : 라캉, CIA 음모와 대결하다

2. 진짜와 가짜

    : 라캉, 마니차를 돌리다

3.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

    : <아이즈 와이드 셧>과 함께 라캉을

4. 실재의 수수께끼

    : <에일리언> 관객으로서의 라캉

5. 초자아적 명령 "즐겨라!"

    : <카사블랑카> 관객으로서의 라캉

6. 신은 죽었다. 하지만 신은 그걸 모른다

    : 라캉, <보보크>와 놀다

7. 진실에 대한 무조건적 집착

    : 라캉, 테러리스트의 편지를 읽다

 

■ 주

■ 라캉의 생애

■ 함께 보면 좋은 자료

■ 역자 후기 : 이데올로기의 전쟁터에서 정신분석학은 어느 편인가?

 

1

알맹이가 없는

텅 빈 제스처

: 라캉, CIA 음모와 대결하다

 

"왠 호들갑인가? 우리는 단지 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항상 해왔던 일을 공개적으로 승인하자는 것뿐이다.

그들에 비하면 오히려 우리는 훨씬 덜 위선적이지 않은가?"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다.

"미국 고위 관료들이 의도한 게 단지 그것이라면 왜 그걸 말하는 거지?

왜 그들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은밀하게 그 짓을 하지 않는 거지?"

제기되어야 할 물음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 진술을 하게 만든 진술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2

진짜와 가짜

: 라캉, 마니차를 돌리다

 

티베트의 마니차는 기도문이 쓰인 종이를 원통 속에 넣고는 기계적으로 돌리는 것인데

그럼으로써 바퀴가 대신 기도를 해준다.

비록 내가 음탕한 성적 환상에 빠져 있을지라도,

나는 스탈린주의자들의 말처럼 "객관적으로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3

환상의 주문에서 깨어나기

: <아이즈 와이드 셧>과 함께 라캉을

 

니콜 키드먼의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범람하는 환상들을 틀어막기 위해,

또다시 환상들이 우리를 압도하기 전에 빨리 섹스를 하자.

꿈속에서 대면한 실재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현실로 깨어난다는 라캉의 생각은

성행위에 관련된 곳이라면 어디든 적용된다.

섹스를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섹스에 관한 꿈을 꾸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를 덮칠지도 모를 꿈의 과잉성을 억누르기 위해, 그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섹스를 하는 것이다.

 

4

실재의 수수께끼

: <에일리언> 관객으로서의 라캉

 

영화광이라면 이 모든 것을 언젠가 한번 본 듯한 느낌을 피할 수 없다.

라캉의 묘사는 단지 공포 영화의 끔찍한 창조물을 상기시키는 것만은 아니다.

특히 라캉의 묘사는 10여 년 후에 나온 영화,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의 장면들을

조목조목 기술하는 것처럼 읽힌다. 이 영화의 기괴한 외계 생명체는 라캉의 라멜라와 닮았는데,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라캉이 이 영화를 본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5

초자아적 명령

"즐겨라!"

: <카사블랑카> 관객으로서의 라캉

 

자아 이상(여기서는 공중의 상징적 법, 공적 발화 속에서 우리가 따르고 있다고 가정되는 규칙의 집합)의

차원에서는 문제 될 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텍스트는 깨끗하다.

이에 반해 또 다른 차원에서 텍스트는 관객에게 "즐겨라!"라는 초자아적 명령을 퍼붓는다.

즉 우리의 더러운 상상의 길을 터준다.

 

6

신은 죽었다. 하지만

신은 그걸 모른다

: 라캉, <보보크>와 놀다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린 장면이 신 없는 세계의 장면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말하는 시체들은 (생물학적으로) 죽고 난 이후 그들의 삶을 경험하는데,

그 자체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신은 여기 있다.

죽고 난 이후에도 우리를 살아 있게 함으로써 그것이 그들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이유다.

 

7

진실에 대한

무조건적 집착

: 라캉, 테러리스트의 편지를 읽다

 

테러리스트 부예리가 단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로 죽음을 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도착증자는 "만약 당신이 진실하다면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로부터

"만약 죽음을 원한다면 당신은 진실되다"로 이행한다.

이 단락은 타인의 소망을 대신 떠맡는 놀라운 수사로 끝난다.

"나는 당신을 대신해서 이 소망을 소망할 것이오."

 

라캉의 생애

 

1901년 4월 13일 라캉(Jacques-Marie-Emile Lacan)은 파리의 엄격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

            다. 예수회 학교 콜레주 스타니슬라스(College Stanislas)에서 교육받았고 바칼로레아를

            치른 후 처음에는 의학, 나중에는 정신의학을 공부했다.

1927년 생트 안느(Sainte-Anne) 병원에서 근무, 임상 훈련을 시작했다. 1년 후 클레랑보

             (Clerambault)가 연 특별 진료 서비스(Special Infirmary Service)에서 근무했다.

1932년 <인성과의 관계에서 본 편집증적 정신병 De la psychose paranoiaque dans ses

             rapports avec la personalite>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3년 그 이론적 풍부함으로, 특히 에메(Aimee) 사례에 대한 분석으로 초자연주의자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1933년과 1939년 사이에 고등 연구원에서 열린 코제브(Alexandre Kojeve)의

             '헤겔 독해를 위한 입문' 강연을 들었다.

1934년 카롤린, 티보, 시빌르를 낳게 될 블롱댕(Marie-Louise Blondin)과 결혼했다. 뢰벤슈타인

             (Rudolph Loewenstein)과의 분석 작업 동안 파리정신분석협회(S. P. P.)의 멤버가 되었

             다.

1940년 파리의 군 병원 발 드 그라스(Val-de-Grace)에서 근무. 독일 점령기 동안 어떤 공식 활동

             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1946년 S. P. P.가 활동을 재개하고 라캉은 나흐트(Nacht), 라가슈(Lagache)와 함께 훈련 분석과

             지도 감독의 책임을 맡았으며 중요한 이론적, 제도적 역할을 맡았다.

1951년 S. P. P.가 라캉의 '짧은 시간 면담'이 표준적인 분석 시간에 위배된다며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1953년 1월에 라캉은 S. P. P. 대표로 선출되었다. 6개월 후 S. P. P. 대표직을 사임하고 라가슈,

             돌토(F. Dolto), 부토니에(J. Favez-Boutonier)와 함께 프랑스정신분석협회(S. F. P.)에 가

             입했다. 라캉은 국제정신분석협회(I. P. A.)로부터 프랑스의 공식 기관인 S. P. P.를 사임하

             고 다른 단체에 가입한 것은 위법이라는 통지를 받는다. 바꾸어 말하면 라캉이 더 이상 I.

             P. A.의 회원이 아니라는 뜻이다. 로마에서 <말과 언어의 장과 기능 Fonction et champ

             de la parole et du langage>을 발표했다. 7월 17일 주디스(Judith)를 낳게 될 마클레스

             (Sylvia Makls)와 결혼했다. 그해 가을 라캉은 생트 안느 병원에서 세미나를 하기 시작했

              다.

1954년 처음 열 번의 세미나는 정신분석 기법과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 그리고 정신분석의 윤리

             에 대한 생각을 다듬었다. 이 시기 라캉은 자신의 세미나, 회의, 구두 강연에 기반을 두고

             1966년 《에크리》에 실린 중요 텍스트들을 집필했다.

1956년 저명한 지식인들이 세미나에 참여했다(첫 번째 세미나 동안 프로이트의 '부정

             Denegation'에 관한 논문을 장 이폴리트가 분석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플라톤에 대해 코

            이레(Alexandre Koyre)가 강연을 했고, 레비스트로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

            Ponty), 그리올(Marcel Griaule), 민족학자 방브니스트(Emile Benveniste) 등이 라캉의 강

            의에 참석했다.

1962년 S. F. P. 회원들이 I. P. A.의 승인을 원했다. I. P. A.는 라캉의 이름이 훈련 교사 목록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허락했다.

1963년 I. P. A.가 정해놓은 최종 기한(8월 31일) 2주 전 S. F. P.의 훈련 교사 위원회는 1962년의

            용감한 입장을 포기하고, 금지령을 받아들이는 입장을 취했다. 라캉은 더 이상 훈련 교사의

            일원이 아니게 되었다. I. P. A.로부터 제명된 것이다.

1964년 공식적으로 프랑스 정신분석 학교를 창립하기 전까지 클라브뢸(Jean Clavreul)을 비롯한

            라캉 추종자들이 정신분석에 대한 스터디 그룹을 조작했다. 프랑스 정신분석 학교는 곧바로

            라캉이 세운 파리 프로이트 학교(E. F. P.)로 재편되었다. 레비스트로스와 알튀세의 지지 속

            에서 그는 고등연구원(Ecole Pratique des Hautes Etudes) 강사로 임명되었다.

1965년 1월 라캉은 고등사범학교(Ecole Normale Superieure)에서 '무의식의 내 가지 기본 개념

            들'에 대한 새로운 세미나를 시작한다. 이 세미나의 청중은 분석가들뿐 아니라 고등사범학

            교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젊은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밀레(Jacques-Alain

             Miller)가 있었다.

1966년 《에크리》(Paris, Seuil, 1966) 출간. 이 책은 지식인 계층을 넘어 폭넓은 학생 대중의 관

            심을 끌었다.

1967년 라캉은 E. F. P.의 정초 행위(Acte de Fondation)를 제시했다. 이것의 새로움은 통과

            (passe) 절차에 있다. '통과'는 두 명의 안내자(passeur) 앞에서 하는 테스트로 구성되는

            데, 자신의 피분석자로서의 경험과 특히 피분석자의 위치에서 분석가의 위치로 이행하는 중

            요한 순간을 설명하는 것이 주된 과제다. 안내인들은 통과자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이번에는

            교장, 라캉 그리고 몇몇 지도교사로 구성된 승인 위원회 앞에서 그들이 들은 내용을 증명한

            다. 이 승인 위원회의 기능은 학교의 분석가를 선발하는 것뿐 아니라 선발 절차 이후 '학설

            의 작업'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다.

1969년 통과에 관한 문제가 E. F. P.의 운명을 위협하게 되었다. 라캉의 분석가 훈련 방법과 승인

            과정에 반대하면서 E. F. P.에서 사임한 사람들 주위에 '제4의 그룹'이 형성된 것이다. 라캉

            은 1968년 5월로 이어지는 대학의 붕괴 속에 놓여 있었다. "만약 정신분석이 지식으로 개진

            되고 그 자체로 가르쳐질 수 없다면 그것은 대학에서 아무런 위상도 갖지 않습니다. 대학은

            오직 지식의 문제만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고등사범학교의 교장 플라셀리에르(Flaceliere)

            는 학기가 시작될 무렵 라캉에게 고등사범학교는 더 이상 그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핑계를 찾은 것이다. 게다가 《분석 노트 Cahiers pour l'Analyse》 역시 출판을 멈춰야 했

           다. 하지만 뱅센(Vincennes) 대학(파리 8대학)은 달라 보였다. 푸코는 라캉에게 뱅센 대학

           에 정신분석학과를 만들고 지도해달라고 요청했다. 라캉은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감사의 표

           시로 팡테옹(Pantheon)의 법률 학교로 세미나 장소를 옮겼다.

1974년 뱅센 대학의 정신분석학과가 '프로이트파의 장(Le Champ freudien)'이라고 이름을 바꿨

           다. 라캉이 학과장으로, 밀레가 학장으로 취임했다.

1980년 1월 9일 라캉은 E. F. P.의 폐교를 선언하면서 그와 함께 작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를 글로 진술하라고 요청했다. 일주일 만에 1000통의 편지가 그에게 배달됐다. 2월 21

           일 라캉은 '프로이트적 대의(La Cause freudienne)'를 창설했다. 이 학교는 나중에 '프로이

           트 대의 학교(L'ecole de la Cause freudienne)'로 이름을 바꿨다.

1981년 9월 9일 파리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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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4. 11. 28. 11:00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10 사탄과 약혼한 마녀

 

장-미셸 살망 지음, 은위영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6

 

082

시158ㅅ  21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1

 

Les sorcieres, fiancees de Satan

 

15세기 말부터 서구에는 마녀 사냥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닥쳤다. 행실이 나쁘다거나

무언가 의심쩍은 구석이 있는 사람은, 특히나

여자일 경우 어김없이 화형장의

불길 속으로 던져졌다. 이처럼 유럽을

광기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마녀 사냥의 배후에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종교적 갈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인쇄술의 발달도 여기에 한몫을 했다.

악마론의 연구서들이 전 유럽으로 급속히

전파되었던 것이다.

 

"태생을 보면,

마녀에게는 배우자도 가족도 없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운석(隕石)같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괴물. 누가 감히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으리.

마녀는 어디 있는가. 접근이 불가능한 지 어느 곳,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얽히고 설킨 광야의 한끝이 아닐까.

혹은 한밤중 선사의 어느 고인돌 아래쯤,

그녀가 거기 있다 한들, 그녀는 여전히 혼자,

그러니 두렵지 않을 자가 누가 있나.

사나운 불길이 그녀를 에워싸고 있다고는 하지만

누가 이를 믿으랴. 그녀는 그저 한 여인일 뿐인데,

거칠고 무서운 삶이라 한들 그녀가 여자임을

잊게 할까, 여인의 본성을…….

 

모든 것은 사탄에서 비롯하나니, 살아 숨쉬며

저주하는 마녀들이란 사탄의 보금자리.

사람들은 마녀가 두렵다 말들 하지만, 마녀가 없다면,

그들은 권태로움에 죽을 것임을 고백해야 하리."

 

쥘 미셀레(Jules Michelet), <La Sorciere>

 


|차례|

 

제1장 마녀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제2장 마녀사냥

제3장 무자비한 사법장치

제4장 마법인가, 마술인가?

제5장 마법의 몰락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찾아보기

 

장 - 미셸 살망 Jean-Michel Sallmann

1950년 1월에 태어난 장-미셸 살망은 파리 제10대학에서 근대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근대 이탈리아의 종교 · 문화사를 연구하고 있다. 이단 재판을 통해 16세기의 주술을 연구하며, <보물 탐색자와 운명의 장난꾼 : 16세기 나폴리의 초자연 현상에 대한 연구>(1988)를 출간한 바 있으며, 현재는 카톨릭교회 개혁기에 있어서 나폴리 왕국에 나타난 성인(聖人)과 성녀(聖女)에 관한 저서를 준비하고 잇다.

 

옮긴이 : 은위영

1964년 전주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파리 제10대학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번역서로는 <지식과 권력> 등이 있다.

 

제1장

마녀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마법은 암흑의 시대에만 존재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마법은 세계와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표상하는 인식양식이다. 마녀들의 집회, 마법의 의식, 이단재판 그리고 화형은 시작과 끝을 가진 하나의 역사이며 아직도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화가이며 조각가인 한스 발퉁 그린은 중세 말엽, 최초로 마녀사냥에 참여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악마에 대한 신화가 남부 독일에서도 비롯되었음을 보여 준다.

종교재판의 희생자들은 산베니토(sanbenito, 지옥의 옷)를 걸치고 화형대에 올랐으며 사람들은 처형 직전 산베니토를 벗겨 냈다. 또한 자손만대에 이르기까지 그 죄과를 미치게 한다는 의미에서 교회 입구에 그들의 이름과 함께 그들이 입었던 속옷을 내걸었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자행된 스페인 종교재판은 그 잔인함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렇지만 이 탄압의 주요한 희생자들은 개종한 유대인과 무어인 그리고 이교도 들이었다.

베로나 공회(公會)의 발표에 따르면, 보두교는 1184년 이래 프랑스, 이탈리아, 현재의 스위스 영내,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계속해서 전파되었다고 한다. 보두교인은 1555년부터 보두아 지역 골짜기에 교회를 세웠으며 예배를 통해 개혁사상의 부흥을 꾀했다.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말까지 있었던 여러 차례의 탄압으로 푸예, 칼라브르, 피에몽 등지에서 많은 보두교인이 처형당했다.

《구약성서》의 초기 판본에는 '야훼가 천지만물의 창조주의자 선과 악의 주관자'라고 이른다. 그러던 중 사탄 -- 히브리어로는 적(敵)을 의미한다 --의 형상이 신의 형상에서 분리되어 원죄의 근원으로 그려진 것은 B.C. 6세기부터이다.

"14세기 후반의 불행 -- 기근, 페스트, 백년전쟁 거듭되는 내란과 반란, 교회의 대분열(교황의 아비뇽 유폐에 따라 1378년에서 1417년까지 지속된 카톨릭 교회의 분열을 말한다 : 역주), 오스만투르크의 군사적 위협 --에 처한 중세인은 무한한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불행의 원인을 인간성의 과도한 발현과 교회의 타락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은 뒤범벅된 것처럼 보였으며 결말은 최후의 심판일 것이 분명했다."

J. 들뤼모

《원죄와 공포》

부르고뉴, 프랑슈콩테, 플랑드르, 아르투아의 군주 필리프 르 봉.

중세 말, 기독교는 신과 악마라는 모순된 관념 속에 부유(浮游)하면서 이원론적 특성을 드러냈다. 실제로 악마가 인간의 몸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마법사는 주문을 외워 바람을 일으키고 우박을 내리게 하고 미래를 예언하며, 어떤 사람으로부터 과실과 젖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이보다 놀라운 일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전한다. 그러므로 남자든 여자든 죄인으로 판명될 경우에는 지체 없이 계율 속에 묶어 넣어야 하며, 군주는 반드시 그들을 처벌해야 한다."

《게르만 고적사》

제사에서 어린아이를 희생양으로 삼는 전형적인 제의적(祭儀的) 살인행위는 로마 군대가 기독교인과 충돌할 때 이미 저질러졌다. 기독교인은 곧 이어 유대인으로 대치되엇으며 나중에는 이교도와 마법사가 그 표적이 되었다. 13세기부터 프랑스 국왕은 여러 가지 조직적인 수법을 동원해 영토 내에 거주하는 유대인 추방을 번번히 자행했다. 이것은 종교적 열정에 따른 행위이기도 했지만, 그 배경에는 재정상의 필요성이 깔려 있었다.

근대에 주술이란 농촌사회의 특이한 현상이며 농민세계의 취약성을 표현해 준 것이었다. 흉작, 자연재해, 전염병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재물은 바로 마녀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 가운데 플랑드르 지방의 농촌에 닥친 변화와, 농촌경제에서 목축이 갖는 중요성을 브뢰겔만큼 잘 보여 주는 화가는 없다.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플랑드르에서도 가축은 마법의 주요한 표적이 되곤 했다.

"악마의 환상과 헛것에 홀려 늘 사탄을 찾아다니는 악녀들이 확신에 차서 숨김없이 고백한다. 한밤중에 말을 타듯 동물들을 타고 이교도의 여신 다이에나, 그리고 숱하게 많은 다른 여자들과 함께 한밤의 죽음 같은 정적을 뚫고 수많은 제국들을 가로질러 간다고, 다이애나가 그들의 주인이기라도 하듯이 그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그녀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특별한 날 밤에 모인다고 한다."

《카농 에피스코피》

마법의 집회를 그린 상상화들은 마녀들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중세에는 이처럼 마법사들이 반종교(反宗敎), 곧 악마의 대리자이며 광신자로 비쳤다. 악마가 변신하는 형태 또한 다양하여 그리핀(Griffin, 독수리의 머리, 날개, 발톱에 사자의 몸을 지닌 괴수 : 역주), 인간의 머리를 가진 용, 염소, 두꺼비 또는 온갖 추악한 괴물로 표현되고 있다. 악마의 목적은 오직 카톨릭의 열성적인 신자들을 배교(背敎)토록 하는 데 있었으므로, 이 집회의 의식이 커톨릭 의식과 비슷하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새로운 신자들은 악마에게서 다시 세례를 받았으며, 악마와 사랑을 나누어 태어난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의식을 지낸 다음 식탁에 올렸다.


제2장

마녀사냥


15세기 말부터 서구는 마녀사냥의 물결에 휩싸여 1580년에서 1670년 사이에 그 절정에 다다른다. 이 물결은 때로 극한을 달려 사회적 재앙을 부르게 된다.

"그리고 바라건대 마법사들의 원수는 바로 나임을 알라. 그들의 증오가 극에 달하면 달할수록 그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 또한 증오가 커져 그들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을 것이다."

앙리 보귀에

《마법사를 저주함에 부쳐》

아바돈, 아스타로트, 마몬은 사탄의 무리를 형성하는 수많은 일당들 가운데 하나이다. 마술사들은 미래를 예측할 때 그들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마법 탄압에 개입한 세력은 카톨릭 교회만이 아니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까지 영국의 성공회도 마녀사냥에 나섰다. 그러나 앵글로 색슨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악마에 대한 신화를 갖고 있지 않았다. 마녀들은 화형이 아니라 교수형에 처해졌을 뿐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시민법을 위반했을 뿐 종교적 죄악을 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1529년 앙제에서 태어나 1596년에 사망한 장 보댕은 툴루즈에서 12년 동안 로마법을 강의했으며 그 자신 마법사로 의심받기도 했다.

바오로 3세의 재위기간(1534~1549)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1542년에 창설된 종교재판 성소(聖所)와 1545년에 소집된 트리엔트 공의회가 그것이다.

사법관들이 쓴 마녀사냥에 관한 논설들은 16세기 말, 사법관들이 악마신화에 대한 믿음에 집착했음을 드러낸다.

마법의 집회가 없이는 악마의 마법도 없다. 심문을 시작한 판사의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관심은 마법사나 마녀에게서 마법의 집회에 참석했다는 자백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자백은 곧 사형선고로 이어졌으며, 자백을 얻기 위해서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집회준비

 

한스 발퉁의 판화(1514년)들은 대단히 시사적이다. 무엇보다도 오디새와 박쥐의 피, 종(鍾) 부스러기와 검정가루가 들어가는 고약 또는 마법의 기름을 보자, 마녀들 가운데 하나는 마편초 불 위에 얹은 작은 솥에 약물을 끓이고 있고 다른 마녀들은 마법의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쇠스랑이나 양을 타고 구름 속으로 사라질 채비를 하고 있다. 준비가 다 된 기름을 쇠스랑에 바르며 무시무시한 봉헌 주문을 외운다. 한 마녀는 해골로 채워진 쟁반을 하늘로 들어올리고 있고 다른 마녀는 흡사 곡식이나 방울이라도 된다는 듯이 태아의 작은 두개골로 폭주로 만들어 늘어뜨리고 있다. 이어서 그들은 마법의 집회에 참석해 마법사들과 함께 짝을 짓는데, 보귀에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에서 제일 사악한 결합이다. "아들이 어머니를 가리지 않고, 오빠가 여동생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가 딸을 가리지 않는 ……. 그들이 거기에서 어떤 음란한 짓을 저지르는가 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고적한 여기 한밤중을 떠도는 은밀한 공포가 내 오감을 사로잡네. 기기묘묘한  천 가지 형상을 나는 보네. 또는 본다고 믿네. 어둠 속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에 기대어, 저기 마법의 집회가 열리네."

무명씨가 남긴 17세기 글

저주의 죄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희생양이 되었던 여자들은 마을공동체에서 아주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약초의 비밀을 알고 있는 여인네가 종종 있었다. 긴장이 고조되고 마법에 대한 풍문이 떠돌기 시작할 때, 여인들이 지닌 특별한 능력을 두려워했던 대중들은 제일 먼저 그들을 의심했다.

마법의 집회에 참석한 세속의 두 여인(귀부인과 그 하녀)이 나타나는 이미지는 흔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갖는 특정한 의미는 둘째치고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는 악마숭배 의식은 더욱 자세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전문가들은 두 가지 가정을 설정했다. 첫번째 가정에 따르면, 그림의 악마숭배에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Janus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두 얼굴을 가진 신. 특히 로마 신화에서는 가장 중요한 神性으로 추앙되어 그와 어원을 공유하고 있는 주피터보다도 더 귀한 경배대상이 되기도 했다 : 역자)에 대한 로마적 의식이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드 랑크르는 이러한 가정과 무관하게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자네트가 이야기하길…… 그(악마)는 야누스의 그림에서 본 것처럼 겉얼굴과 속얼굴 두 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두번째 가정에 따르면, 이는 일반 평민들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역전시킨 축제의 한 종류라는 것이다. 이 경우 위와 아래의 의미가 바뀌어 위(지배자)에 있는 것이 아래(피지배자)로 환치되고 또한 아래에 있는 것이 위로 환치되어 묘사된다.

16세기의 유럽에서는 출판물의 제작과 유통은 행정관청과 교회의 철저한 통제 아래 있었다. 1559년 바오로 4세는 최초의 금서목록을 배포했다. 후임자들 또한 선임자의 정책을 이어받아 금서의 기준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했다. 1571년, 파이 5세는 금서를 선정하고 관리할 목적으로 아예 추기경 특별 성성(聖省)을 제도화했다. 금서는 특히 이단서적들을 뜻했다. 마법이나 마술에 관련된 내용은 어차피 인쇄물의 형태로 세상에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탄압조치와 관계가 없었다.


제3장

무자비한 사법장치


16세기, 마법은 이단과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불경죄로 여겼으므로 세속법정은 기꺼이 종교재판을 수행했다. 그 같은 선택이 의미하는 바를 추론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시골의 한 농부가 올가미에 걸려들었을 때, 몸을 다치지 않고 올가미에서 빠져 나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마법사냥은 잔인한 이미지와 극적인 측면을 넘어서서 형사재판의 합목적성까지 의심하게 만들었으며, 중세 말에서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는 동안 소송절차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 영향은 프랑스 대혁명 전야에 이르도록 계속되었다.

마녀의 부름에 화답하여 나타난 악마의 형상.

마법은 당시까지 유럽인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세계에 대하여 그들이 투사한 온갖 유형의 환상을 배출하는 통로였다. 16세기의 독자들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장 드 망드빌의 《여행》을 읽으며 아직 공상에 잠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 수평선이 확장되면서 유럽인의 이국취미는 그 내용을 달리하게 되었다. 마법은 객관적인 지식이 오랫동안 억압했던 이러한 환상의 한 부분을 내재화시킨 것이다.

신명심판 또는 '신의 심판'은 그 기원이 게르만의 침입과 유럽의 기독교화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엄연한 사법현실이다. 그것은 무고한 사람이 신에게 버림받을 리 없다는 원칙에서 출발한다. 마녀들을 물에 던져 시험하는 선악(善惡)판별법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서구 역사에 음울한 기억을 남겼던 종교재판은 사실 대규모 마녀사냥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종교재판의 경험이 없는 영국에서 더욱 혹독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종교재판 기구

기원을 따져 볼 때 종교재판은 중의적(重義的)인 성격을 갖는다. 의식(意識)을 심판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로마 법령에 기초를 두면서 또한 동시에 스페인 법령체계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그 관할권의 상층부에는 최고평의회가 자리잡고 있다. 의장에 해당하는 최고재판관과 평의원들은 세속의 군주가 임명했으며, 약 15개의 지방재판소를 통해 그 권능을 행사했다. 각 재판소는 반(反)기독교적 범죄를 단죄하는 데 신학적 논거를 제공할 것을 임무로 하는 여러 판사들과 소추를 담당하는 검사들로 구성되었다. 그 밖에도 종교재판소는 여러 '우인(友人)'의 협력을 받곤 했는데, 이들은 종교재판소에서 무보수로 일하는 일종의 경찰관 구실을 했으며, 지역 유지들은 우인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신앙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은 중세 말엽부터 점차 형사심판 체계로 변해 갔다. 콜베르의 형사대심령(刑事大審令)은 이러한 변화를 프랑스 법령체계 내에 정식으로 수용하는 계ㅏㄴ에서 기가 되었다(1670년). 이 절차는 피고소인에게 가히 '악마적인' 것이어서 그는 자신의 죄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세상과 격리되어 고문과 싸우면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만 했다. 다만 마법의 혐의에 연루되어 있는 한, 구체적인 물적 증거를 확보할 것을 의무화한 콜베르의 법령은 사실상 증거 수집이 무척 힘든 이 부분의 재판에서 미미하나마 하나의 발전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판사와 검사의 역할이 거의 구분되어 있지 않은 것과 재판이 비밀리에 진행되며 변호사가 없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고문이 자행되는 것은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재판절차가 프랑스에서 공식적으로 폐기된 것은 1780년에 이르러서였다. 그런데 당시는 이미 유럽 전역에서 고문이 자취를 감추고 있을 때였다.

"사람을 죽이는 대가로 악마는 마법사들에게 어떤 보상을 하는가……?" 자백에 따르자면 …… "그가 세상의 모든 재물을 약속했나니."

1679년 5월 29일에 부비니에서 화형당한 고귀용의 재판기록

개종하지 않는 이교도를 기다리고 있는 형벌은 태형과 징역, 팔다리를 꺾어서 바퀴에 매달아 죽이는 차형(車刑), 그리고 화형 따위였다. 마녀들의 경우에는 이런 방법말고도 훨씬 간단한 대안이 있었다. 그들이 고문을 이기고 마법의 집회에 참여했음을 부인하는 데 성공했다 할지라도 모든 의심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향에서 추방당하거나 마을공동체에서 퇴거당했으며, 이것은 마녀라는 손가락질이 따라다니는 한 또 다른 형태의 사형이었던 것이다.

"(마녀들은) 저주의 불길 위에 솥을 얹어, 사람의 몸이나 동물에서 채집한 여러 성분과 독초들을 끓인다."

툴루즈 종교재판소에서 심판받았던 안 마리의 증언

마법의 주술을 걸기 위해서는 교수형에 처해진 사람의 이빨을 사용하는 것이 즉효라는, 세간의 믿음을 풍자한 고야의 그림.

1560년에서 1670년 사이에 남서부 독일은 가혹한 마녀사냥의 한 시기를 보냈는데, 이때 최소한 3,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비젠타이크 마을에서는 1562년 한 해 동안에 63명의 여자가 마녀로 몰려 화형대 위에 올랐으며, 오베르마르히탈에서는 1586년과 1588년 사이의 3년 동안, 43명의 여자와 11명의 남자가, 곧 전체 인구의 약 7%가 마법과 관련되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1560년에서 1670년 사이에 남서부 독일은 가혹한 마녀사냥의 한 시기를 보냈는데, 이때 최소한 3,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비젠타이크 마을에서는 1562년 한 해 동안에 63명의 여자가 마녀로 몰려 화형대 위에 올랐으며, 오베르마르히탈에서는 1586년과 1588년 사이의 3년 동안, 43명의 여자와 11명의 남자가, 곧 전체 인구의 약 7%가 마법과 관련되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제4장

마법인가, 마술인가?

 

북유럽, 특히 종교개혁으로 신교를 수용한 국가에 인접해 있는 카톨릭교 신봉 지역에서는 불에 의지하여 마귀를 쫓는 의식이 성행했다. 악마적 마법론은 이단론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반면,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와 같이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비교적 적게 노출되었던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서는 '운명의 장난꾼들', 다시 말해 마법사나 마술사가 악마와 계약을 맺은 자들로 의심받지 않았다.

제의적(祭儀的) 마술은 마법과 별도로 발달되었다. 16세기에 절덩에 달한 마술은 오직 비기(秘記)의 전수자들만이 알고 있는 방법을 이용해 신의 비밀을 캐려 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그노시스(gnosis, 신학에서 말하는 영적, 신비적 인식 : 역주)였다.

연금술은 2세기와 3세기에, 헬레니즘 풍의 신비주의 인식론이 유행하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 모습을 나타냈다. 아랍 세계가 서구에 연금술을 전해 준 때는 12세기이다. 연금술사들은 만병통치약이며 금속을 금으로 변하게 하는 화금석(火金石)을 발견하기 위해 애썼다.

1583년, 전유럽에는 화금석의 비밀을 알아냈다는 소문이 퍼져 큰 소란이 일어났다. 3년이 지난 1586년에는 급기야 교황 시스티나 5세가 모든 형태의 예언을 금하는 특별 칙서, <하늘과 땅의 창조주>를 내리기까지 했다.

냄새와 맛이 고약했던 만드라고라(mandragora, 위)는 마취기능과 하제기능을 함께 각춘 약용식물이었으며, 사람들은 사형대 밑에서 자라는 만드라고라가 신비한 치유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마녀들의 상징이었던 뱀, 바실리스크. 그리스-로마 전설에 나오는 괴물로 사람들은 그것이 쳐다보기만 해도 당장에 죽는다고 믿었다.

몽환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몽유병자의 눈-쿠르베가 그린 이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이-은 투시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졌으며 낭만주의자들이 특히 환영하는 소재였다.

집시 여인들은 이미 16세기부터 마술의 세계를 넘나드는 무시무시한 점쟁이들로 여겨졌다. 위 그림은 집시 여인들이 자기들의 경험담을 늘어놓고 있는 장면으로 카라바조가 이를 유행시킨 이래 바로크 미술에서 흔히 다루는 주제가 되었다.

중세 말에 성행했던 강신술은 죽은 자들의 혼령을 불러내거나 매장된 시체를 찾아내 신묘한 처치를 하는 무술(巫術)이었다.


제5장

마법의 몰락


마녀사냥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종교재판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언제나 같은 결론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마법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성직자들 사이에서, 특히 의사들 사이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법의 문제를 통해 제기되는 것은 결국 기독교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문제이다.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이란 원죄로 각인되어 있는 존재이다. 여성은 악마의 심부름꾼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육체 자체가 두려움을 자아낸다. 여성의 생리에 대한 몰이해가 인간의 모든 상상력을 극단으로 질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보슈와 브뢰겔이 그린 악마들은 축제와 카니발에 나타나는 귀신들이나 다른 특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데 비해, 리하카르트가 그린 악마들은 '현실주의적'이다. 격렬한 율동과 대비되는 썩어 들어가는 살은 그야말로 경이적이다.

장 비에는 16세기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고립되어 있었다. 의사들이 마법에 관하여 의학적 견해를 용기 있게 개진하기까지는 1세기를 더 기다려야 한다.

17세기는 카톨릭 교회의 개혁기였다. 수도원의 급격한 증가와 엄격한 계율의 적용은 많은 갈등을 유발했다. 폐쇄된 공간에서 이루어진 신앙지도 사제들과 가족들의 간섭으로 여자들만 있는 수녀원에는 많은 문제가 일어났다. 마귀들린 사건들이 되풀이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17세기에는 새로운 지적 움직임이 일어난 때이다. 이른바 계몽주의 시대인 것이다. 1653년에 사망한 가브리엘 노데는 마지랭과 크리스틴 드 쉬에드의 사서였다. 그는 마자랭을 도와 당대에 수많은 도서와 수고(手稿)들을 수집했다. 그는 마자랭의 보호와 면책특권을 누림으로써 자유주의 운동의 표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노력도 프롱드의 난으로 말미암아 무로 돌아가고 말았다. 훗날 마자랭이 자신의 도서관을 재건할 수 있게 도와 준 이는 권좌에 복귀한 콜베르였다.

수녀원들은 교구청의 엄한 감독하에 운영되었다. 그들은 폐쇄생활의 규율이 훼손되거나 특정한 신비주의에 오염되는 것을 경계했으며 악마의 표정이 나타나는 일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상부에 자주 보고되었던 신비적 견신(見神)도 17세기 수도생활의 중요한 특징을 이루었다. 이는 많은 경우 종교생활의 자율성을 요구하는 한 방편으로 수녀들 사이에서 자리잡았다.

17세기의 마법논쟁은 절대왕권의 강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리슬리외 추기경은 절대왕정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였다.

"프란체스코회 락탕스 신부의 말에 따르자면 …… 그랑디에는 화형대의 형틀에 묶인 채로 자신을 불태울 나무들에 마법을 걸었는데 이는 악마가 불길을 억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구마서(驅魔書) 위에 떨어졌을 호두알만큼 큰 흑점을 보고 이내 단념했던 게 아닌가 추정된다."

앙주의 공증인의 증언

한 증언은 잔 데장주 수녀를 '유혹의 가시덩굴에 얽히고 찢긴, 그러나 가장 혹독한 폭풍에도 맞서 싸운 한 떨기 아름다운 흰 백합'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마귀쫓기 시험은 그녀의 성녀로서의 평판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1663년에서 1683년까지 루이 14세의 재상을 지냈던 장 밥티스트 콜베르는 형사법규를 개정하지 않았다. 그의 주도로 1667년과 1670년에 공포된 두 법령은 개혁에 앞서 기존의 형사법규를 정리하고 확정하는 것이었다.

 

한 신념의 종언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귀신들린 자도, 마술사도, 점성술사도, 정령도 존재하지 않는다. 100년 전에는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 모든 신비들이 가능했을까. 귀족들은 모두 성채에 갇혀 지냈고 겨울밤은 길었다. 이 귀중한 놀잇감이 없었더라면 모두 권태로 죽었으리라. 모든 성에는 뤼지낭성에 사는 멜뤼진(Melusine, 토요일이면 다리가 뱀으로 변하는 요정) 요정처럼 때가 되면 돌아오는 요정들이 살았거늘 …… 마을마다 마법사나 마녀가 살았고 군주들은 자기들을 위한 점성술사를 거느렸다. 여인들이 제각기 자기들의 경험담을 털어놓을 때, 귀신들린 자들은 들판을 질주했다. 악마가 넘보았던 것은 바로 이들, 혹은 이들이 넘보았던 것은 바로 악마였다."

볼테르《철학사전》

《이광치미 씨('이광치미' 씨는 '미치광이' 씨의 글자 수수께끼이다. 'Oufle'은 'le fou'의 역순)》는 마술서들에 대한 풍자이다. 이 책은 평생 마술과 마법에 관한 책만 읽고 현실을 허구로 사는 한 가난뱅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몽테스팡 후작 부인은 1667년에서 1677년까지 태양왕 루이 14세의 정부였다. 콜베르의 보고서가 그녀의 결백함을 증명하고 있지만 1676년에 처형된 브랭빌리에 후작 부인 사건과 20여 명을 처형함으로써 마무리된 '독살사건(1677~1681)' 때문에 후작 부인은 큰 곤욕을 치렀다.

"새로운 정신은 완전한 승리자였기에 그동안의 모든 싸움을 잊게 하다가 겨우 오늘날에야 그 승리들을 기억하게 해준다. 첫 시작의 고통과 비천하고 조아하며, 야만적이면서 잔인하게도 희극적인 그 시작의 형태들을 상기시키는 것도 쓸모없지만은 않았다. 박해 속에서 여인들이, 불운한 마녀들이 대중들에게 풀어 놓은 그 새로운 정신이란! …… 그녀들은 죽었고, 죽어야 했다. 어떻게? 무엇보다도 자기들이 발전시킨 과학의 진보로 인하여, 의학으로 인하여, 자연주의자들에 의하여, 바로 자기들이 힘써 지키려 한 이 모든 것들로 인하여, 마녀들은 언제나 죽었다. 그러나 요정은 죽지 않는다. 마녀들은 죽지 않는 요정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남자들의 일을 기꺼이 떠맡았던 지난 세기의 여인들은 그 대신 자신들의 고유한 역할을 잃어버렸다. 치료와 간병, 병을 낫게 하는 요정의 역할을 …… 반(反)자연은 빛을 잃었으니 반자연이 기울어 세계에 여명이 깃들일 그날은 멀지 않았다."

쥘 미슐레

《마녀》

마녀의 체포 장면에는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세속재판관들과 마을주민인 고소인들, 그리고 등장하지 않는 때도 있지만 마녀로 지목된 희생자. 그림은 17세기에 영국에서 제작된 삽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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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25. 17:07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09 서예 감상법

 

글, 사진 / 이완우

2009, 대원사


 

시흥시매화도서관

SH013807

 

082

빛12ㄷ  228

 

빛깔있는 책들 228

 

이완우-------------------------------------------------------------------------

대전에서 출생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 터어키어과를 졸업하였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 ·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한국서예사를 전공하였다. 현재 대전대학교 서예과 전임강사로 재직중이다. 논문으로는 「이광사 서예 연구」, 「석봉 한호 서예 연구」 등이 있다.

 

|차례|

 

서예를 감상하기 전에

서예에는 어떤 특성이 있는가

서예를 즐겁게 감상하려면

어떻게 감상할 것인가

형식에 맞게 감상하려면

서체에 맞게 감상하려면

서예 감상을 마치면서

찾아 보기

참고 문헌

 

서간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 종이 바탕, 31.5×39센티미터, 서울대박물관 소장.

평안첩(平安帖) · 하여첩(何如帖)  동진 왕희지, 당나라 모본(摹本), 왕희지의 필적은 대부분 서간이라는 실용적 기능을 지녔으면서도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몽전첩(夢奠帖)  당 구양순, 종이 바탕, 25.5×16.5센티미터, 옛 서예가들은 점획을 신체에 비유하여 골, 근, 육, 혈이 고루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구양순은 골을 강조한 뼈대가 강한 글씨를 썼다. 중국 랴오닝성박물관 소장.

시첩 부분  북송 휘종, 종이 바탕, 27.2×265.9센티미터(전체), 대상물의 형태를 뼈대 있는 필선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골법용필'을 극대화한 경우로 뼈대만 남은 글씨이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백씨초당기(白氏草堂記)  청 등석여, 종이 바탕, 점획의 이상적인 형태와 선질을 구사하기 위해 서예가글은 끊임없는 연구를 해왔다. 「백씨초당기」에서는 점획이 강한 글씨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일본 개인 소장.

「최자옥좌우명(崔子玉座右銘)  청 오희재(吳熙載), 종이 바탕, 획이 가는 글씨로 여백의 효과를 한층 높여 준다. 일본 개인 소장.

장계명첩(張季明帖)  북송 미불, 종이 바탕, 세로 25.8센티미터, 글씨는 한 번 쓰면 돌이킬 수 없다는 일회성을 가진다. 그리고 쓴 사람의 심리 상태까지 자연스럽고 뚜렷하게 표출된 글씨라야만 가치 있게 평가된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예기비(禮器碑)」의 앞부분  동한 156년, 내용이 긴 비문을 쓸 경우 제작자는 전체의 필치를 고르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 비는 일정한 필치로 일관되어 있는 예이다.

백원첩(伯遠帖)  진(晉) 왕순(王珣), 종이 바탕, 25.1×17.3센티미터, 글씨는 글자를 읽지 않고 그 동세, 선질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조형미를 느낄 수 잇다. 중국 베이징고궁박물원 소장.

단조로운 장법  균일하고 안정적이어서 통일미가 있다. 「장미화시(薔薇花詩)」, 청 이병수(伊秉綬), 종이 바탕, 110×50센티미터, 중국 랴오닝성박물관 소장.

변화로운 장법  변화와 율동감을 주어 전체적인 조화미를 느끼게 한다. 「논화어(論畵語)」, 청 하소기(何紹基), 종이 바탕, 94×57센티미터, 중국 개인 소장.

자간에 비해 행간이 넓은 장법  「태산각석(泰山刻石) 진, 기원전 209년, 탁본.

자간에 비해 행간이 좁은 장법  「장경잔비(張景殘碑)」, 동한, 159년, 탁본.

자간과 행간이 비슷한 장법  「석고문(石鼓文)」, 전국시대, 탁본, 28×18.2센티미터.

자간과 행간을 무시한 장법  「적벽부(赤壁賦)」, 明 축윤명, 종이 바탕, 31.3×1001.7센티미터, 중국 상하이박물관 소장.

여러 짜임의 '之'자들  한 작품에서 같은 글자의 짜임을 다르게 하는 것도 반복적인 표현을 피하는 좋은 방법이다. 곳곳에 보이는 '之'자가 각기 다른 점획과 짜임을 취하고 있어 왕희지의 뛰어난 조형 감각을 여실히 보여 준다. 「난정서」, 동진 왕희지, 당나라 모본(摹本), 중국 베이징고궁박물원 소장.

방필의 글씨  붓을 댄 곳과 뗀 고 그리고 꺾는 부분이 모난 글씨는 강렬하고 각박한 느낌을 준다. 「시평공조상기」 부분, 북위, 5세기 말, 탁본.

원필의 글씨  붓을 댄 곳과 뗀 곳 그리고 돌린 부분이 둥근 글씨는 부드러우면서도 원만한 느낌을 준다. 「정희하비」, 북위, 511년, 탁본(위), 「현묘관중수삼문기(玄妙觀重修三門紀)」부분, 원 조맹부, 종이 바탕,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아래)

「후신첩(風信帖)」 부분  헤이안시대 쿠카이, 812년경, 종이 바탕, 28.8×157.9센티미터, 쿠카이는 왕희지와 안진경의 서풍이 결합된 중국적 취향이 강한 글씨를 썼다. 일본 교토 교오고고쿠사(敎王護國寺) 소장.

「교쿠센첩(玉泉帖)」 부분  헤이안시대 오노노미치카제, 종이 바탕, 27.4×188센티미터, 오노노미치카제는 왕희지 서풍의 골격에 가나 글씨의 운치를 융합하여 일본 특유의 서풍인 '와요'를 완성시켰다. 일본 궁내청 소장.

화기(畵記)  조선 이광사, 1746년, 종이 바탕, 33×177센티미터, 고전적인 두루마리 글씨는 대개 세로 40센티미터를 넘지 않는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행수가 홀수인 축과 짝수인 축  행수가 홀수면 전체의 장법이 안정적이나, 짝수면 자칫 무게나 필세가 한쪽으로 치우쳐 전체 균형이 깨지기 쉽다. 오언율시, 조선 이지정(李志定), 17세기, 종이 바탕, 96.3×54.3센티미터,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위), 칠언절구, 조선 이광사, 18세기, 비단 바탕, 105.4×56.3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아래)

서몽시첩(書夢詩帖)  조선 신위,  18세기, 비단 바탕, 38×23센티미터, 원래 대폭이던 것을 서첩으로 개장한 경우이다. 개인 소장.

매오영(梅五詠)  조선 신위, 19세기, 종이 바탕, 17.5×50센티미터, 글자를 줄여 쓰지 않고 아래로 갈수록 행간을 줄이는 방식을 사용하여, 위로 갈수록 펼쳐지고 아래는 차분히 모아지는 느낌을 준다. 개인 소장.

서간  조선 이이(李珥), 1559년, 종이 바탕, 25×28.8센티미터, 개인 사이의 의사를 전달하는 편지는 보통 인사말, 전하는 말, 마침말, 기일 및 서명 그리고 추신으로 구성된다. 개인 소장.

오언율시  조선 이황, 종이 바탕, 57×34센티미터, 보물 548호, 『퇴도선생필법(退陶先生筆法)』에 실려 있는 것으로, 흘림의 정도에 따라 운필의 속도는 조금씩 빨라졌지만 근엄한 획법과 단정한 짜임의 방식은 지속되어 있다. 개인 소장.

편액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편액(위)은 김생이 썼다고 전하며,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편액(아래)은 공민왕이 썼다고 전하나 그들의 필적인 지 신빙하기 어렵다.

돈의문 편액  전(傳) 조윤덕(曺潤德),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유행한 설암풍으로 쓴 편액이다. 문화재관리국 소장.

지리산 천은사 편액  조선 이광사, 18세기 후반, 천은사의 화기를 막기 위해 물 흐르듯이 썼다고 한다.

춘종첩  원 설암, 1296년 씀, 조선시대 목판본, 설암체는 점획의 굵기가 굵고 획 사이의 여백이 매우 좁으며 점획의 시작, 끝, 전절 부분이 강조되는 특징이 있다. 개인 소장.

김약로묘표(金若魯墓表)  조선 한호, 1755년 건립, 한호의 『대자천자문』은 18세기 이후 비석 앞면의 제서로 집자되면서 널리 유행하였다.

호고연경(好古硏經)  조선 김정희, 19세기, 종이 바탕, 각 124.7×28.5센티미터, 예서 대련으로 의외의 짜임과 거침없는 필획을 구사하여 졸박하고 변화로운 특유의 품격을 보여 준다. 호암미술관 소장.

경남 양산 통도사 일주문의 주련  주련은 비바람에 노출된 곳에 걸리므로 종이에 쓴 것을 걸지 않고 이를 나무판에 새기고 건물의 분위기에 어울리게 색칠하여 건다.

서울 흥천사 만세루의 주련  사찰의 주련판 위아래에는 연화문 등의 문양이 새겨지고 이를 단청하여 불전을 장엄하기도 한다.

전남 영광 불갑사 대웅보전의 주련  사찰의 주련은 불경이나 논장에 있는 글을 쓰기도 하며 고승들이 지은 게송을 쓰기도 한다.

산씨반(散氏盤)  서주시대, 탁본, 고대 문자에 대한 금석학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옛 서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산씨반은 고졸한 서풍을 지닌 대표적인 금문으로 여겨진다. 원물은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역산각석  진, 기원전 209년, 송나라 모각본, 8세기 이전에 이미 원석이 부서져 당나라 탁본에 의해 10세기 때 다시 새겨졌다. 모각되면서 균제적 자형과 균일한 획으로 변질되엇다.

낭야대각석  진(秦), 기원전 209년, 탁본, 소전의 창시자인 이사의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원각일 뿐만 아니라 글자 수도 많이 남아 있다.

이씨삼분기  당 이양빙, 767년, 탁본, 이양빙의 전서는 획이 곡선적이고 형태가 부드러워 긴장감이나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현묘관중수삼문기(玄妙觀重修三門記) 전액(篆額)  원 조맹부, 종이 바탕, 조맹부는 주요 서체를 터득하여 옛 서법을 재현하였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예서비  2세기 중 · 후반에는 수많은 예서비들이 세워져 한예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을영비(乙瑛碑)」, 동한 153년, 탁본(위), 「사신비(史晨碑)」, 동한 169년, 탁본(아래).

예서비  동한시대의 예서비들은 후대 비평가들로부터 다양한 품평을 이끌어내어 중국 서예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조전비(曺全碑)」, 동한 185년, 탁본(위), 「장천비(張遷碑)」, 동한 186년, 탁본(아래).

임장천비(臨張遷碑)  청 하소기, 종이 바탕, 청대에는 금석학의 발전에 따라 그동안 위축되었던 전서와 예서가 신선한 생명력을 얻게 되엇다. 일본 개인 소장.

호주안씨묘지(湖州顔氏墓誌) 부분  청 등석여, 종이 바탕, 청나라 중반 이후의 서예가들은 이전과는 다른 신선한 서풍을 창출하여 학구적 성과와 예술적 성취를 함께 거두었다. 일본 개인 소장.

승선태자비(昇仙太子碑) 제액(題額)  당 측천무후(則天武后), 699년, 탁본, 비백은 궁궐 건물의 편액 글씨로 사용되는 등 주로 장식 서체로 쓰였다.

정희하비  북위 정도소, 511년, 원각(原刻), 중봉세의 부드러운 운필과 고풍스런 짜임으로 넉넉한 정취를 풍긴다.

장맹룡비  북위, 522년, 탁본, 방필의 방정한 골격이 잘 드러나며 호방하고 웅건한 풍격이 있다.

「황정경」 부분  동진 왕희지, 동진시대의 대표적인 해 필적으로 내용은 도교 경전이다.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  당 우세남, 628년, 탁본, 우세남은 남조에 기반한 온화한 획법으로 근골을 함축한 듯한 점이 돋보인다.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  당 저수량, 653년, 탁본, 저수량은 붓끝의 정취를 살린 가는 획법과 부드럽고 경쾌한 운필로 유명하다.

천복사다보탑감응비(千福寺多寶塔感應碑)  당 안진경, 752년, 탁본, 안진경은 중년에 명확한 획법과 정밀한 짜임의 깔끔한 서풍을 구사하였다.

현비탑비(玄秘塔碑)  당 유공권, 841년, 탁본, 유공권은 이전 명서가들의 장점을 선별적으로 계승하여 이를 자신의 서풍으로 발전시켰다.

만안교비(萬安橋碑)  북송 채양, 1059년 이후, 탁본, 송해의 대표적인 명서가 채양은 안진경의 서풍을 바탕으로 정형적인 해서를 구사하였다.

금강반야바라밀경  남송 장즉지, 종이 바탕, 세로 32.1센티미터, 장즉지는 필획 사이를 유연하게 연결시키는 등 송나라 해서의 특성을 잘 정리해낸 서예가이다. 일본 교토 지적원(智積院) 소장.

이사훈비(李思訓碑)  당 이옹, 739년 이후, 탁본, 사선 방향으로 삐침을 길게 빼는 것과 같은 이옹의 서풍은 조맹부의 해서에 영향을 끼쳤다.

「출사표(出師表)」  명 축윤명, 1514년, 종이 바탕, 축윤명은 종요의 필적과 왕희지의 소해 법첩을 적극 수용하여 예스러운 풍격을 이루어냈다. 일본 개인 소장.

「낙화시권(落花詩卷)」  명 문징명, 1504년, 종이 바탕, 문징명은 왕희지의 소해 필적을 보다 경쾌하고 산뜻한 필치로 되살려내었다. 일본 개인 소장.

「하첩표」  위 종요, 219년, 각첩, 세로 24.6센티미터, 종요가 국가의 전승을 축하하고자 임금에게 올린 글로 행서의 초기 발전 단계에 해당되는 필적이다. 일본 서도박물관 소장.

난정서  동진 왕희지, 당 풍승소(馮承素) 모본, 신룡반인본(神龍半印本), 종이 바탕, 24.5×69.9센티미터, 이미 진적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이나 여러 임모본이 전하므로 왕희지 행서의 장법이나 운필의 특징을 살피는 데에는 충분하다. 중국 베이징고궁박물원 소장.

집자성교서  동진 왕희지, 672년 집자, 탁첩, 26×13센티미터, 당나라 궁중에 소장된 왕희지의 행서와 초서 필적을 모아 집자한 것으로 다양한 자형과 짜임을 학습하는 데 효과적이다. 개인 소장.

온천명  당 태종, 648년 탁본, 변화로운 짜임, 자신에 찬 운필, 유연한 붓끝의 움직임이 물씬 풍긴다. 프랑스 국립파리도서관 소장.

진사명  당 태종, 646년 탁본, 담담한 짜임, 침착한 운필, 장봉세의 간명한 획법이 눈에 뛴다. 중국 베이징도서관 소장.

「제질문고」  당 안진경, 758년, 종이 바탕, 28.8×77센티미터, 안징경이 안사의 난으로 살해된 조카의 영령을 추모한 제문으로 당나라 명서가의 진적으로는 매우 드문 예이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쟁좌위고」  당 안진경, 764년 탁본, 외형적 꾸밈이나 필획의 교묘함에 개의치 않고 솔직한 태도로 붓이 가는 대로 졸박한 필법을 이룬 안진경의 서풍은 솔직한 심회를 표현한 글씨로 높이 평가되면서 송대의 행서풍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베이징고궁박물원 소장.

서간  송 소식, 종이 바탕, 소식은 송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그의 글씨는 황정견 등에게 영향을 미쳤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의고  송 미불, 1088년, 비단 바탕, 미불은 이왕(二王) 행서의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여 후대의 서예사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예학명  남조 작자 미상, 514년경 탁본, 남조의 대표적인 마애각석으로 짜임이나 획법 등에서 황정견의 행서에 영향을 끼쳤다.

「송풍각시권(松風閣詩卷)」부분  송 황정견, 1102년, 종이 바탕, 34.2×554센티미터, 황정견은 풍부한 개성을 표현하여 왕희지의 전통에서 벗어나 행서의 표현 범위를 넓히는 선례가 되었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적벽부」 부분  원 조맹부, 1301년, 종이 바탕, 27.2×11.1센티미터, 조맹부의 행서는 왕희지 등의 고법을 바탕으로 가늘고 굵은 필선의 변화, 리듬감 있는 균형, 미묘한 붓끝의 연계성, 용필에서의 완벽성 등이 총체적으로 융화되어 있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문무첩(文武帖)  위 황상(皇象), 각본(刻本), 『순화각첩』 권3에 실려 있다.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장초 필적으로 당시 정비되어가던 금초 또는 해서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평복첩」  서진 육기, 종이 바탕, 23.8×20.5센티미터, 자연스러운 붓질의 편지 글씨이다. 겸손하고 꾸밈 없는 필치로 당시 초서가 장초로부터 금초로 변화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중국 베이징고궁박물관 소장.

십칠첩  동진 왕희지, 각첩, 행서와 초서의 집대성자로 불리는 왕희지는 장초나 금초를 모두 썼으며 이를 혼합한 초서도 썼다. 이 필적은 한 글자씩 떨어지는 독초(獨草)의 전형적인 예이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행양첩  동진 왕희지, 당대 모본, 24.4×8.9센티미터, 종이에 밀랍을 입힌 누런색의 경황이라는 종이에 구륵곽전의 방법으로 베꼈다. 미국 프린스턴대학교미술관 소장.

진초천자문  수 지영, 『진초천자문』은 현재 목적과 각본으로 전하는데,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원형에 가까운지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후대에 지속적 영향을 준 것은 아마 각본이었을 것이다. 당나라 임본, 종이 바탕, 서첩 높이 24.5센티미터, 일본 개인 소장(위), 각본, 1109년 간행, 중국 베이징고궁박물원 소장(아래).

『서보』 부분  당 손과정, 687년, 종이 바탕, 27.2×898.24센티미터, 장지 · 종요 · 왕희지 · 왕헌지 등 고대 명서가들의 우열을 비교하는 등 이왕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서예관을 보여 주는 유명한 서론이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중추첩  동진 왕헌지, 각본, 중추첩에 보이는 일필의 필세는 광초의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 송 미불이 임서하였던 것을 뒤에 새긴 것으로 『여청재첩(餘淸齋帖)』에 실렸다. 일본 개인 소장.

압두환첩  동진 왕헌지, 비단 바탕, 세로 26.1센티미터, 시원한 일필세를 보기는 어렵지만 운필이 교묘하고 유려한 아름다움이 있어 왕희지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중국 상하이박물관 소장.

「고시사첩(古詩四帖)」 부분  전(傳) 장욱, 종이 바탕, 29.5×195.2센티미터, 장욱의 광초는 필획의 연명성이 강하고 짜임의 변화가 풍부하며, 획을 아래로 길게 빼거나 춤을 추는 듯한 쾌속함을 이루었다고 평가된다. 중국 랴오닝성박물관 소장.

「자서첩(自敍帖)」 부분  당 회소, 777년, 종이 바탕, 28.3×755센티미터, 회소가 어린 시절 불문에 들어가 틈틈이 글씨를 익혀 초서의 묘를 터득했다는 자전적 이야기를 쓴 것으로, 운필의 흥취가 매우 천연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자서첩」 말미의 낙관 부분

 「이백시권」 부분  송 황정견, 종이 바탕, 37×392.5센티미터, 회소의 서풍을 바탕으로 특유의 짜임새와 운필의 완급을 가미하였다. 일본 교토 후지이유린관(藤井有隣館) 소장.

초서시축  명 부산, 종이 바탕, 명나라의 광초는 파격적인 장법과 점획의 태세와 윤갈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서풍으로 대중화되어 갔다. 일본 개인 소장.

 

 

 

posted by 황영찬
2014. 11. 14. 16:51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08 알렉산더 대왕


피에르 브리앙 지음, 홍혜리나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5


082

시156ㅅ  20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020


기원 전 334년 봄, 마케도니아의 왕인

알렉산더 3세는 스물두 살의 나이로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소상시아의 연안을 향해 출항했다.

이로써 그리스인들은 '왕 중의 왕'인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의 제국을 정복하러 아프가니스탄과

인도까지 이르는 대(大)원정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 웅장한 서사시는 알렉산더가 제국의

아름다운 수도 바빌로니아에서 죽는 날까지,

약 십여 년 간에 걸쳐 펼쳐진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Philippos)의 아들로 태어났다.

펠리에 있는 궁전에서 가장 명성있는 스승들의

정성어린 가르침을 받은 그는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검술은 물론 운동과 사냥,

그리고 머리를 끄는 데까지 탁월함을 보였다.


스승들은 알렉산더에게 판단력과

도덕심을 심어 주는 것 못지않게

자신의 신체를 맹수처럼 강인하게 단련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알렉산더는 총명했을

뿐만 아니라 외모도 남달리 출중했다.

스승들은 알렉산더의 뛰어난 면모를 보면서

그의 찬란한 업적을 예견할 수 있었다.


필리포스가 죽자 알렉산더는 왕위를 계승햇다.

그 당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맹주가 되었고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은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5만의 군사를 이끌고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건넜다.

페르시아왕 다리우스 3세는

우월감에 빠져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리우스 3세 휘하의 장군들은 이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그라니쿠스강 우안에 이오니아와 리디아의 지사

스피트리다테스가 페르시아 기병대를 소집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알렉산더는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다. 그렇지만 저녁 무렵

그는 승기를 잡아 페르시아인을

발아래 굴복시켰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차례로 해방했다.

에페수스, 프리에나, 밀레투스, 마그네시아에서

민주정이 회복되었다.

겁을 먹은 다리우스 3세는

직접 나서서 알렉산더에 대항했지만

결국 이수스 전투에서 패해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가족과 보물들은 정복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시돈과 티루스가 함락되면서 이집트로 가는 길이 열렸다.

이집트 나일강 유역의 삼각지에 새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되었다. 알렉산더가 '아몬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후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메소포타미아의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는

또다시 도망쳤다. 페르시아인은 저항을 포기했다.

그들은 정복자에게 바빌론의 문을 열어 주었다.


여러 해가 흘렀다.

알렉산더는 그동안 페르시아, 파르티아, 마르기아나,

아라코시아, 박트리아, 소그디아나를 굴복시켰다.

이윽고 그는 인도의 문턱에 다다랐다.

모두들 그에게 무릎을 꿇고 공물을 바치며 지지를 표했다.

오직 인도왕 포로스만이 항복을 거부한 채

대규모 군대와 코끼리 200마리,

전차 300대를 동원해 대항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알렉산더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패자에게 물었다. "어떤 대우를 바라는가?"

"왕이오." 포로스가 대답햇다.

그리하여 그는 왕좌를 지킬 수 있었다.

이 새 동맹자와 더불어 알렉산더는

동쪽으로 더 진군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랜 원정으로

지친 병사들은 더 이상의 원정을 거부했다.

알렉산더의 정복이 한계에 이른 것이다.


차례


제1장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제2장 정복전쟁의 시작

제3장 주요 도시들의 병합

제4장 페르시아의 새로운 대왕

제5장 인더스강에서 페르시아만까지

제6장 마지막 나날, 그리고 마지막 계획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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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브리앙 Pierre Briant

피에르 브리앙은 툴루즈(Toulouse) 제2대학의 고대사 교수로서, '중세사 : 페르시아 지배기와 알렉산더 정복기, 그리고 후계자들의 시대'를 전공하고 있다. 역사학 교수이면서 문학박사인 그는 안티고네(알렉산더의 후계자 중 하나)에 관한 논문을 썼다. 주요 저서로 <알렉산더 대왕>, <고대 중동에서의 국가와 국가 원수들> 등이 있다.


옮긴이 : 홍혜리나

1965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불어불문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및 박사 과정을 이수 했다. 현재는 독일 유학 중이다. 번역서로는 <소설 카프카> <인간과 문화> 등이 있다.


제1장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B. C. 4세기, 그리스 전체가 복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모두들 철천지원수 페르시아에게 '복수전'을 펼쳐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살라미스 해전과 마라톤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둔 뒤로 2세기 이상 대치상태가 이어지다가 암울한 굴욕의 순간이 다가왔다.

리스 도시글은 나름대로 힘을 지녔지만 페르시아에 전혀 대항하지 못했다. 그리스군은 페르시아왕의 장군들이 내리는 명령에 번번이 따라야 했다. 필리포스는 처음으로 페르시아 원정 계획을 세웠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이를 추진해 나갔다.

B. C. 359년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 수도 펠라 주변의 여러 소공국(小公國)들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마케도니아가 강국으로 부상한 것은 다음 몇 가지 사항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의 정치, 문화적 중심지로 떠오른 펠라의 시가지를 재정비했고, 트라키아의 새 광산을 손에 넣어 왕의 초상이 찍힌 금화와 은화를 대량 보급했고, 보병으로는 농부들을, 기마병으로는 귀족들을 징집하여 강력한 군대를 구성했으며, 여기에 금을 받고 지원한 용병들이 가세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베르기나의 왕묘

베르기나의 유적지 부근, 마케도니아 영토에 속하는 피에리 산맥 기슭에서 고고학자들은 헬레니즘 시대의 왕궁터 부근에 자리잡은 무덤을 여러 기 발굴했다. 거대한 봉분(지름 110m, 평균높이 12m)의 아래에서 호화롭게 장식된 거대한 돔형 무덤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갖가지 유물들이 도굴꾼의 손이 닿지 않은 채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특히 석관 속의 시신은 자줏빛과 금빛이 영롱한 눈부신 옷을 입고 있었다. 그곳에서 발견된 도자기 양식으로 추정해 보건대 이 돔형 무덤은 B.C. 4세기 무렵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필리포스 2세와 그의 부인들 가운데 한 명(클레오파트라가 가장 유력하다)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베르기나는 여러 왕들이 매장된 마케도니아의 옛 수도 아이가이 지역이다. 상아로 만든 여러 작은 조상(彫像)들은 왕가(王家)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맨 위 왼쪽은 올림피아스, 맨 위 오른쪽은 알렉산더, 두번째는 필리포스이다.

왕의 무기들

왕의 시신과 함께 행사 때 입던 갑옷, 무기들이 부장(副葬)되었다. 가는 철판에 가죽과 피륙을 덮어 만든 갑옷은 수평, 수직으로 금조각들을 배열하여 장식했다. 앞부분은 여섯 개의 사자머리를 달아 치장했다. 갑옷은 전체적으로 전사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정면에 아테네 여신의 얼굴을 장식한 높은 산 모양을 한 왕의 투구는 최초로 발굴된 마케도니아의 투구이다.

금으로 만든 고리토스(gorytos, 활과 화살을 넣는 케이스)에는 도시를 점령하는 전사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에페이로스에 사는 물로스족의 왕녀였다. 지나치게 권력 지향적이던 올림피아스는 필리포스 옆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추방될 지경에 이르렀으나, 아들 알렉산더의 중재로 간신히 펠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나중에 아들은 아무리 먼곳으로 원정을 떠나도 어머니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어느 날 테살리아인 필로니코스가 필리포스에게 13탈란트에 팔겠다고 부세팔로스란 말을 가져왔다. 사람들이 들판으로 나가 그 말을 타려고 했지만 말이 어찌나 고집이 센지 도저히 다룰 수가 없었다. …… 성미가 급한 필리포스가 그 말을 도로 데려가라고 지시하자 …… 알렉산더가 이렇게 탄식했다. "저렇게 훌륭한 말을 놓치다니, 수완과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라 감히 올라타지도 못하는구나!" 그 말을 들은 필리포스가 아들에게 말했다. "너보다 연륜이 높은 사람들을 그처럼 무시하다니, 그렇다면 네가 그들보다 이 말을 더 잘 다룰 수 있다는 거냐?" "물론입니다." 알렉산더가 대답했다. …… "만일 네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경거망동한 대가를 어떻게 치르겠느냐?" "제우스신의 이름을 걸고 이 말값을 치르겠나이다."

플루타르크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상비군이나 특별부대를 편성해서 주둔시켜야 했다. 대왕은 우선 창과 방패로 무장한 왕궁수비대를 활용할 수 있었고 긴급한 상황에서는 제국의 전민족들에게서 병사를 징집할 수 있었다. 위 그림은 왕궁수비대의 모습이 담긴 페르세폴리스 유적의 벽면 부조이다.

다리우스 대왕 때 이집트에서 제작되어 수사의 왕궁 입구에 세워진 이 기념상은 다민족에 대한 대왕의 지배를 상징하고 있다. 각 민족은 옷과 머리 모양으로 알아볼 수 있으며 상형문자로 표기되어 있다. 위에서부터 페르시아족, 메디아족, 엘람족, 박트리아족, 소그디아나족, 스키타이족, 리디아족, 아랍족, 이집트족, 인도족, 누비아족이다.

"테베시는 많은 수모를 겪었다. 그러던 중 품행이 단정한 유명한 귀부인 티모클레이아의 집이 트라키아 병사들에게 약탈당한 일이 있었다. 병사들이 부인의 재산을 터는 동안 그들의 우두머리가 부인에게 다가와 강제로 욕을 보였다. 그리고 나서 혹시 어딘가에 금은 보화를 숨겨 놓은 게 없는지 물어 보았다. 부인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그 우두머리만 정원으로 데려가 가장 값비싼 보화를 숨겨 놓았다며 한 우물을 보여 주었다. 트라키아인이 우물 속을 들여다보려고 몸을 숙이는 순간 부인은 그를 우물 안으로 밀어 넣고 돌을 가득 집어 던져 죽여 버렸다. 병사들이 부인을 포박해 알렉산더 앞에 데려갔을 때 알렉산더는 부인의 태도와 몸짓을 보고 한눈에 그녀가 용감하고 뛰어난 여자임을 알아보았다. 부인은 자기를 끌고 가는 사람들 뒤에서 겁먹은 표정도 짓지 않고 한치도 근심스러워하는 구석이 없이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신분을 묻자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그리스를 해방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필리포스에 맞서 싸우다가 케로네아에서 전사한 테아게네스의 누이입니다.' 알렉산더는 부인의 분명한 대답과 당당한 태도에 탄복하여 자녀들과 함께 자유롭게 떠나도록 놓아주라고 명했다."

플루타르크

자신의 영지에서 대왕의 대리인이던 지사는 왕궁의 의례를 본떠 격식을 차려 가며 권한을 과시했다. 부조에 보이는 왕관과 파라솔도 그 예이다.

알렉산더가 정복하려고 한 페르시아 제국은 동서로는 이집트에서 인더스강 유역까지 4,000km, 남북으로는 시르다리야강(오늘날의 러시아)에서 페르시아만에 있는 호르무즈 해협까지 약 1,800km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제국은 다양한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란 고원과 이집트와 발루치스탄(게드로시아)의 사막지대, 나일강 유역과 바빌로니아, 박트리아의 평야지대, 힌두쿠시와 카프카스 산맥의 험준한 산악지대, 수평선이 끝없이 펼쳐지는 소아시아 연안의 지중해,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삼각지대 등등 이렇게 다양한 지역들을 알렉산더는 차례차례 정복해 나갔다. 페르시아는 전국 구석구석까지 도로망(왕도)을 정비하여 제국의 중심지와 지방을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었다.

페르시아 귀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페르시아 왕은 속국들을 장악하고 있던 관리들과 장군들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페르시아인은 관모양의 독특한 머리쓰개로 알아볼 수 있다.

키루스 대왕이 정복활동을 펼친 지 30년이 흐른 뒤, B.C. 522년에서 B.C. 521년 사이에 제국 내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지만, 다리우스 대왕은 이를 진압했다. 대왕은 자신의 공적을 바빌로니아에서 엑바타나로 가는 길에 있는 베히스툰 바위 위에 새겨 넣었다. 여기서 대왕은 반란을 주도한 적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고 반란에 가담한 왕들은 목에 밧줄이 매여 있다. 대왕 뒤에는 그가 권력을 장악할 때 공을 세운 여섯 명의 귀족 가운데 두 명이 서 있는데, 그중 한 명은 창꽂이를, 다른 한 명은 화살통을 들고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위대한 신 아후라마즈다가 위에서 굽어보고 있다.


제2장

정복전쟁의 시작


B.C. 334년 봄, 마케도니아군은 아비도스 부근의 소아시아 연안에 상륙했다. 육지에 발을 디딘 알렉산더는 땅에다 창을 꽂아 페르시아를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이어 그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에게 자신을 수호해 달라고 제식을 올렸다.

마케도니아의 군사적 우위를 확신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원정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에게 자신의 원정을 비호해 달라고 빌었다. 아래 그림은 알렉산더가 아킬레스의 무덤을 찾아가 경의를 표하는 장면이다.

미케도니아의 귀족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더도 훌륭한 기마병이 되기 위하여 강훈련을 받았다. 스승들은 그를 건장한 전사이자 왕국을 강력하게 통치할 수 있는 군주로 교육시켰다.

자기 또래의 '동료들'과 함께 성장한 알렉산더는 자연스럽게 그들 가운데서 조언자와 장군을 뽑았다. 펠라의 모자이크 위에 사자사냥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크라테레스도 이렇게 해서 선발된 인물이다.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 사이의 첫번째 전투는 그라니쿠스강에서 벌어졌다. 양편 모두 소수의 기마대만이 전투에 참가했다.


"'왕의 혈족들'이 힘을 모아 알렉산더에게 투창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들은 알렉산더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육탄전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갑옷에 두 번, 투구에 한 번, 트로이의 아테네 여신 신전에서 가져온 방패에 세 번 창을 맞았지만 그는 주춤거리기는커녕 오히려 불굴의 용기를 발휘하여 갖은 위험에 맞서 당당히 싸웠다. 그 결과 땅바닥에 쓰러진 것은 그가 아니라 페르시아의 수많은 명장들이었다."

디오도로스

"당시 아르테미스 여신은 알렉산더의 출산에 참견하느라 신전이불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에페수스에 머물고 있던 점성가들은 한결같이 신전이 파괴된 걸 보고 불행이 닥칠 것이라고 예견했으며, 그날이 아시아에 큰 재앙과 참화를 가져온 날이라고 주장했다."

마그네시아의 헤게시아스 플루타르크의 책에 인용됨

고르디온의 신전에 있는 매듭에 관한 일화를 묘사한 르네상스 시대의 벽화.


"매듭은 산수유나무 껍질로 만들어졌는데 아무도 그 매듭의 시작과 끝을 알지 못했다. 이 매듭을 풀 방법을 찾지 못하자 알렉산더는 그것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안 되자 단칼에 두 동강냈다고 한다. 하지만 아리스토불로스는 알렉산더가 수레에서 쐐기를 뽑는 동시에 매듭을 잡고 수레의 채에 연결된 멍에를 당겨 매듭을 풀었다고 전한다."

아리아누스

왕실수비대의 사수들은 불사조란 칭호를 갖고 있었다.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이유는 한 사람이 싸우다가 쓰러지면 체격이 비슷한 다른 사람이 곧바로 그 대신 싸우기 때문이라고 한다. 긴 창으로 무장한 이들은 등에 화살통을 지고 있었다.


"페르시아인이 불사조라 부른 1만 명 가량의 군인들이 곧장 진군하기 시작했다. 야만인의 호사스런 장신구로 치장한 그들의 모습은 더욱더 위풍당당했다. 그들은 금목걸이와 금실로 수를 놓은 옷가지들, 보석이 박힌 소매 달린 긴 옷을 입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전쟁터에서 처음으로 알렉산더와 맞붙은 다리우스 3세는 전차 위에서 투창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싸웠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를 찾아내기 위해 곳곳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 눈에 띄자 알렉산더는 그를 지나쳐 기마병들과 함께 전투가 벌어지는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그는 페르시아인에게 이기기보다는 더 큰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디오도로스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3세가 참전한 모습을 묘사한 그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 유명한 이수스 전투장면을 그린 모자이크 벽화이다. 이것은 폼페이에 있는 목신 파우누스의 사당에서 발견한 것으로, 알렉산더가 죽은 뒤 에레트리아의 필로크세노스가 그린 것을 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왕은 친구 헤페스티온을 데리고 여자들을 찾아갔다. 두 사람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헤페스티온이 용모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더 뛰어났기 때문에 시시감비스는 그를 왕으로 여기고 그 앞에 넙죽 엎드렸다. ……"

"…… 반응이 없자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알렉산더 앞에 재차 엎드렸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입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역시 알렉산더다운 말이었다. 늙은 여인을 어머니라 부름으로써 여인네들을 따뜻한 인간애로 대할 것임을 암시했던 것이다."

디오도로스

동전을 통해 왕의 영웅적인 이미지가 널리 유포되었다. 정복자는 이집트의 아몬신처럼 숫양뿔을 달고 있다. 아몬신이 시와의 오아시스에서 알렉산더에게 세계지배를 약속했는지도 모른다.

이집트에 입성하자 알렉산더는 지방귀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또한 파라오의 비호를 받은 사제들과 화합했고 룩소르에서는 신전에 예배소를 꾸몄다. 이 예배소의 벽 부조에서 알렉산더(부조의 오른쪽)는 파라오의 모습으로 자신이 숭배하는 미노스신 앞에 서 있다.


제3장

주요 도시들의 병합

 

3년 간 알렉산더는 정복에 정복을 거듭했다. 자신의 군대와 함께 수천 킬로미터를 달렸고 수많은 도시와 나라를 굴복시켰다. 하지만 다리우스 3세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 주지는 못했다. 한편, 다리우스 3세는 이수스에서 패한 이후로 바빌론에서 군대를 새롭게 편성했다. …… B.C. 331년 봄, 마케도니아인은 메소포타미아로 또다시 길을 떠난다.


B.C. 331년 가을부터 B.C. 330년 봄 사이의 몇 달 동안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왕이 머무르던 왕궁들(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파사르가다이)을 차지했다. 그는 도시마다 승전자로서 당당하게 입성했다.

 

"마케도니아인은 의기양양하게 전차들을 에워싸고 무장을 해제시켰다. 마부와 말에게 엄청난 재앙이 덮친 셈이었다. 마부는 미친 듯이 날뛰는 말을 더이상 통제할 수 없었다. 말은 머리를 마구 흔들어댓고 그 바람에 멍에가 떨어져 나갔다. 자기 진영으로 돌진하는 전차도 생겼다. 상처 입은 말은 죽은 병사들을 끌고 다녔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말은 제자리에 멈출 수도, 앞으로 나아갈 기력도 없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규모 그룹을 이룬 사두이륜전차들이 닥치는 대로 적군을 죽이면서 마지막 대열까지 이르렀다. 땅에는 몸통에서 잘려 나온 사지들이 나뒹굴었다. 병사들은 부상당한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치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무기를 놓지 않고 용감히 싸웠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브뢰겔이 놀라운 상상력으로 표현한 혼란스런 교전장면(아래)과 B.C. 4세기 그리스 화병 위에 그려진 세련된 그림(위) 모두 다리우스 3세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 화병은 말을 탄 알렉산더와 비무장한 채 전차에 올라탄 다리우스 3세의 모습을 통해 전투의 결과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패색이 짙어지자 다리우스 3세는 이수스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싸움터에서 달아나고 말았던 것이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채찍소리를 들었다. 채찍을 든 마부가 왕의 말들을 쉬지 않고 후려쳤다. 이것이 다리우스 3세가 달아나면서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한 뒤 알렉산더는 바빌론에 당당히 입성했다. 그림은 샤를 르브룅이 루이 14세를 위해 베르사유궁에 그린 그림을 모방한 태피스트리이다.

"알렉산더의 모습은 리시포스가 제작한 조상들에서 가장 잘 표현되었다. 알렉산더도 리시포스가 자신의 조상을 제작해 주기를 원했다."

플루타르크

엘람의 옛 수도인 수사는 B.C. 520년 무렵부터 다리우스 1세가 단장하기 시작했다. 바빌론의 예술가들은 아시리아의 조상을 본떠 거대한 왕궁을 디자인했다. 외벽에 자리한 이 날개 달린 스핑크스들은 수호신의 일종이었다.

바빌론의 성도(聖道)는 푸른색 유약을 칠한 벽돌로 장식한 이시타르의 문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이 벽돌 위에는 신화 속의 동물들과 실재하는 동물들(용과 황소 575마리, 사자 120마리)이 새겨져 있다.

키루스 대왕은 페르세폴리스 근처에 위치한 돌무덤 속에 묻힌 자신의 후계자들과 달리 수도인 파사르가다이에 자신의 능을 만들게 했다.

"이 방에 키루스 대왕의 유해가 들어 있는 금으로 된 관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금으로 세공된 다리가 달린 침대가 있었다. 침대에는 바빌론산 이불과 자줏빛 망토가 깔려 있었다. 무엇보다도 바빌론에서 만든 페르시아식 의복과 소매 달린 옷들이 눈에 띄었다."

아리아누스

드넓은 평야를 굽어보는 높은 언덕 위에 건설된 페르세폴리스는 다리우스 1세가 건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들이 재임하는 기간까지 공사가 계속되었다. 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거나 기존의 건물이 개축되곤 했다.

궁의 전면은, 여기에 재현해 놓은 다리우스 1세의 왕궁처럼 권력의 심장부다운 호사스러움을 과시하는 색벽돌로 장식되어 있었다. 원주의 소벽 위, 측면의 원반 속에는 인간의 형상을 한 위대한 신 이후라마즈다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왕궁은 페르시아의 파라다이스라고 소문난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 정원은 주변 풍경에 사치스러움을 더해 주었다.


제4장

페르시아의 새로운 대왕


다리우스 3세는 기우가멜라 전투에서 패배한 뒤 페르시아 제국의 여름 궁전이 있는 엑바타나로 피신했다. 그는 그곳에서 금은으로 뒤덮인 휘황찬란한 왕궁과 신전 속에 파묻혀 복수를 계획했다. 그는 전열을 정비하여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알렉산더와 정정당당하게 싸워 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행운의 여신이 자기 편이기를 기대하면서…….

19세기 말 옥수스 강 기슭에서 금은으로 만든 세공품들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정착민들이 살던 지역과 스키타이족이 거주한 스텝 지역 간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 주는 증거이다. 의자가 설치된 이 황금 4두 마차상도 그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스텝 유목민들이 쓰던 전차를 축소한 것으로 보인다. 헤로도토스는 유럽의 스키타이족(우크라이나)은 '이동가옥'인 수레에서 사는 것이 특징이라고 기록했다.

스키타이의 기사들은 페르시아군의 정예부대를 구성했으며, 페르시아 전쟁중 그리스에서 벌어진 초기 전투에서부터 참가했다. 스키타이 전사들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를 도와 싸움을 치렀고, 베소스, 스피타메네스와 합류했다가 알렉산더에게 분쇄되었다.

약사르테강 건너에 사는 일부 스키타이족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B.C. 516~515년 다리우스 1세는 스키타이의 슌 카왕과 싸워 이겼다. 그의 모습은 반란을 일으킨 다른 왕들과 함께 베히스툰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는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는데, 이 모자를 보고 페르시아인은 이 종족을 '화살처럼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쓴 스키타이족'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란의 귀족들과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 알렉산더는 B.C. 327년 박트리아의 아름다운 로크사네 공주와 정략결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의 측근들도 박트리아 공주들과 결혼하도록 권유했다. 성대하게 치러진 결혼식은 마케도니아의 전통을 따랐는데, 이것은 결혼으로 패배자들과 완전히 동화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밝혀지는 의도였다. 게다가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유대를 맺은 귀족들에게는 신의의 표시로 볼모를 보내게 했다. 이렇게 해서 로크사네의 아버지인 옥시아르테스는 두 아들을 정복자에게 딸려 인도로 보내야 했다.

"욕정에 사로잡힌 알렉산더는 자기 나라의 풍속대로 빵을 가져오게 했다. 마케도니아에서 빵은 육체적 결합을 의미하는 신성한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는 칼로 그 빵을 잘라 신부와 나눠 먹었다. …… 그리하여 아시아와 유럽을 지배하는 왕이 포로와 결혼으로 맺어지게 되었고 이 포로는 피정복민들을 다스릴 아이를 낳게 되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알렉산더는 공식적인 알현의식을 강요하는 등 페르시아 궁정예법에 따랐다. 왕좌에 위엄 있게 앉은 대왕이 방문객을 맞고 있는데 이 방문객은 상체를 완전히 숙이고 왕의 오른손에 입을 맞춰야 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를 왕이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는 증거로 오인하고 '프로스키네즈(Proskynese)'라 불렀다.

 

제5장

인더스강에서 페르시아만까지

 

B.C. 516~515년, 다리우스 1세가 간다라와 신드를 정복했다. 그러나 2세기 후부터 아케메네스 왕조의 권위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B.C. 326년 인도의 여러 왕국들은 인더스강 유역과 그 지류의 영토를 되차지했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페르시아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는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이에는 카이바르 고개가 버티고 있다. 해발 1,100m, 길이 50km인 이 협곡은 중간 지점에서 폭이 좁아진다.

"포로스는 주위에 코끼리 40마리를 거느리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여 치명적인 손실을 입혔다. 그는 다른 기사들보다 덩치가 크고 힘도 셌으며 2.2m가 넘는 장신이었다. …… 또한 그는 쇠뇌 같은 힘으로 창을 던졌다."

디오도로스


"인도 보병대의 사상자는 족히 2만 명은 되었다. 기마병은 약 3,000명이 죽었고 전차들은 모두 파괴되었다. 포로스의 두 아들도 유명을 달리했다. 코끼리와 전차를 지휘하던 사령관들과 기마부대의 사령관, 그리고 포로스 군대의 장군들 모두가 같은 운명이었다."

아리아누스

"몇몇 기사를 거느린 알렉산더는 앞장서서 말을 타고 포로스를 만나러 갔다. 그는 말을 멈추고서 포로스의 체격과 잘생긴 얼굴, 굽힐 줄 모르는 투지에 감탄을 표했다. 한 용감한 인간이 또 다른 용감한 인간을 만난 셈이었다. 그러고 나서 알렉산더는 포로스에게 어떻게 대우받기를 원하는지 물어 보았다. 포로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왕으로 대해 주시오.'"

아리아누스

탁실라왕이 알렉산더에게 항복하자 포로스는 독립을 유지하고 인도 북부에서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서 알렉산더에게 대항하기로 했다. 이 10드라크마짜리 은화에는 전쟁이 두 왕 - 한 사람은 말을 타고 또 한 사람은 코끼리를 타고 있다 - 사이의 싸움으로 표현되어 있다.

알렉산더가 인도에서 거둔 승리를 찬양하기 위해서 그의 후계자들은 코끼리 가죽을 머리에 쓴 왕의 모습을 조각했다.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후방에 파다하게 퍼진 시기에 포로스를 이긴 것은 아시아 원정 가운데 가장 값진 승리였다. 따라서 알렉산더가 거둔 이 승리를 소재로 한 그림들이 수없이 그려졌다. 귀스타브 모로의 그림도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젊은 정복자는 그의 발치에 엎드린 모든 피정복 민족들을 다스렸다. 막강하고 찬란한 왕권이 수립된 인도의 작은 계곡에는 환상적인 신전들, 성스러운 호수들, 신비와 공포로 가득 찬 지하세계 등 인도의 모든 모습이 담겨 있다. …… 그리고 그리스, 찬란하고 아름다운 그리스의 영혼이 꿈과 신비로 가득 찬 이 먼 미개척지에서 찬란한 빛을 발했다."

귀스타브 모로


"사냥꾼들은 '사로잡은 코끼리들'을 마을로 데려와서 우선 식용 갈대와 풀을 주었다. 하지만 코끼리들은 드러누운 채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자 인도인의 코끼리들을 둘러싸고 북과 심벌즈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 주었고 그제서야 코끼리들은 먹기 시작했다. 사실 코끼리는 영리한 동물이다. …… 전쟁터에서 죽은 주인의 시신을 수습하여 운반해서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게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올 정도이다. 어떤 코끼리들은 주인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을 때 방패구실을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코끼리들은 주인이 쓰러졌을 때 그를 보호하려고 직접 싸우기도 했다. 성이나서 주인을 죽인 코끼리가 절망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리아누스

 

제6장

마지막 나날, 그리고 마지막 계획

 

정복전쟁에 나서 자리를 비운 지 6년, 알렉산더는 제국이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음을 알게 도었다. 그가 임명한 지사들과 관료들 중 대다수가 직무태만에 빠져 있거나 직위를 ㄴㅁ용하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탓이었다. 이제 알렉산더의 최우선 목표는 정복한 나라들과 도시들을 다시 장악하는 것이었다.

B.C. 325년, 알렉산더의 여생은 2년 남짓 남아 있었다. 그는 이제는 자기 차지가 된 옛 페르시아 제국의 주요 도시들을 왕래하면서 마지막 2년을 보냈다. 그렇지만 마지막 긴 여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빌론에서 출발하여 오늘날 고고학계의 가장 큰 불가사의로 남아 있는 그의 무덤이 있는 알렉산드리아까지 상여를 타고 가는 여행이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그곳에 가서 묵념을 올렸을까? 17세기의 이 그림은 그런 상상을 가능하게 해준다.

알렉산더는 일부 지사들에게서 보이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확산될 것을 우려하여 반란이 일어날 때마다 강경한 조처를 취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는 왕이 지나치게 가혹하게 진압했다고 누누이 강조햇다. 로마 시대의 역사책을 복제한 중세의 한 필사본에 들어 있는 이 채식삽화들은 그 사실을 입증해 준다.

 

"(메디아의 장군들이 일으킨) 사태에 관한 소식을 들은 왕은 그들을 즉각 체포할 것이며 구제의 여지가 없음을 통보했다. 사실 그들은 알렉산더가 인도에서 무사히 귀환하기를 바랐거나 믿었더라면 감히 그 같은 범죄를 저지를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왕은 이들을 투옥시켰고 그들의 배신행위에 동조한 병사 600명을 처형시켰다. 같은 날, 페르시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5년 전에 일어난 화재로 도시가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왕 중 왕(王中王), 즉 대왕이 되고자 하는 알렉산더는 페르세폴리스를 매우 중요한 도시로 여겼다. 페르세폴리스는 새 제국의 수도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후로도 페르시아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는 전에 자신이 불을 지른 적이 있는 -- 나는 이 행위에 찬동하지 않았다 -- 페르시아의 왕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현자에 와본 알렉산더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떳떳하지 못했음을 까달았다."

아리아누스

"알렉산더는 (파사르가다이에서) 석관과 침상을 빼고는 텅비어 버린 키루스 대왕의 무덤을 발견했다. 불경한 자들은 석관 뚜껑을 열고 키루스 대왕의 시신을 밖으로 내던져 버렸고, 들고 가기 쉽도록 석관의 일부를 떼어 내고 일부는 아예 없애 버렸다. 하지만 일이 여의치 않자 그들은 석관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동댕이친 채 도망가 버렸다."

아리아누스

"'내가 앉아서 명령만 내리면서 이 모든 것을 얻었단 말이오? 그대들 중에서 내가 그것을 얻으려고 애쓴 것 이상으로 나를 위해 애쓴 자가 있소? 자, 그러니 갑시다! 부상당한 사람이 상처를 내보인다면 나도 내 상처를 보여 주겠소! 나는 그대들의 부와 영광을 위해 싸우다가 부상당했소! …… 사실 요즘 나는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이제 군복무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되돌려보낼 생각이었소. 하지만 그대들 모두 가겠다면 그렇게 하시오!' 이렇게 말하고서 그는 자신의 거처로 되돌아갔고 측근들 앞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흘 뒤 그는 왕궁으로 페르시아의 간부들을 불러모았고 그들에게 부대별로 지시를 내렸다. …… (마케도니아인에게) 페르시아인과 왕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일이 전해지자 …… 그들은 모두 왕궁으로 달려가 알렉산더가 자신들을 통촉해 주지 않는 한 문에서 한 발짝도 물러날 수 없다며 울부짖었다. (이를 보고) 알렉산더가 밖으로 나왔고 …… 그 역시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아리아누스

 "알렉산더는 바빌론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동료들로부터 왕국을 누구에게 넘겨주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최선책은 동료들이 나의 죽음을 기리는 장렬한 싸움을 치르는 것일게요.' 결국 그의 말대로 되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동료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동료들이 최고봉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고 수많은 전투를 치렀기 때문이다."

디오도로스

시돈에서 발굴된 석관

19세기에 시돈에서 왕실묘지가 발굴되면서 지방군주의 무덤 몇 기가 빛을 보았다. 그중 하나는 대대로 알렉산더의 석관으로 여겨져 왔다. 거기에는 전투장면과 사냥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그것들은 당시 막 개발된 다색배합(多色配合)으로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다. 그 시대의 조각판 중 하나에는 사자가죽을 머리에 쓴 마케도니아 기마병이 묘사되어 있다. 쓰러지는 말 위에 탄 한 페르시아인 앞에서 앞발을 든 말에 타고 있는 이가 바로 알렉산더이다. 이 장면은 전쟁터에서 보여 준 왕의 용맹스런 행위를 다소 과장되게 재구성한 것 같다. 이수스 전투가 끝나자 시돈은 알렉산더에게 아무런 저항없이 항복했고 알렉산더는 아브달로님에게 왕권을 넘겼다. 아마도 아브달로님이 그리스의 예술가에게 이 석관을 주문해서 정복자의 공적을 칭송하는 장면들을 그리도록 분부했을 것이다.

전쟁과 사냥

예술가는 전투장면 옆에다가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 양국 모두에서 왕권의 상징으로 통하는 사냥장면들을 석관의 여러 판에 새겨 놓았다. 그에게는 이것이 왕의 눈에 들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사냥은 사자, 표범, 사슴 등 온갖 종류의 짐승들을 보호하는 구역에서 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가 전하는 바로는 사냥은 대규모로 이루어져서 박트리아에 있는 한 야생동물의 서식지에서 단체사냥이 끝날 무렵이면 4,000마리 이상의 짐승들이 알렉산더와 그 일행의 손에 죽었다고 한다. 석관의 부조는 시돈에 있는 페르시아 동물천국에서 왕이 참가한 단체 사냥장면을 묘사한 듯하다. 이날 사냥에서 왕의 친구인 리시마크가 사자에게 물려 중상을 입었다. 여기서 두드러진 점은 전투장면과 반대로 페르시아인과 마케도니아인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야수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는 알렉산더가 의도한 마케도니아와 이란 간의 협력정책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려 한 것이다.

알렉산더가 죽은 뒤 오리엔트는 두 개의 큰 왕조 -- 하나는 프톨레마이오스(위)가 이집트에 세운 것이고 또 하나는 소아시아의 셀레우코스(아래)가 인더스강 유역에 세운 왕조이다 -- 의 지배하에 놓였다. 새로운 왕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새긴 주화를 발행했다.

알렉산더는 《일리아드》를항상 머리맡에 놓아 두고 보았으며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을 모델로 삼았다. 그리고 출항할 때마다 아킬레스에게 경배를 올렸다. 허버트 로버트의 이 그림은 알렉산더가 가상의 트로이의 신전과 묘지들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플루타르크는 알렉산더와 카이사르를 같은 수준에 올려놓았다.

 



posted by 황영찬
2014. 11. 13. 16:25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107 늦게 온 소포


고두현 시집

2002, 민음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28139


811.6

고26늦


고두현

1963년 경남 남해 출생

경남대 국문과 졸업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등단


차례


1 땅 이야기


빗살무늬 추억 / 달과 아이들 / 횡단보도 / 손바닥에 빗물 고이네 / 늦게 온 소포 / 연밥을 따며 / 해금(海琴)에 기대어 / 땅 이야기 / 상생(相生) / 발왕산에 가보셨나요 / 상원사 / 남으로 띄우는 편지 / 4월 장자(莊子) / 장수잠자리 / 외포리에서 / 칡꽃 / 봄 꽃 편지 / 인동당초 벽화 / 불목하니 / 직녀


2 밥에 관한 생각


보고 싶은 마음 / 오목 / 산할미꽃 / 참회 / 먼 그대 / 묵언 / 산에 가야 맛을 알지 / 남해 금산 큰 새 / 말씀 / 사람들 산에 오르다 / 산감나무 / 허암사 빈 절에 얽힌 / 겨울 두타산 / 밥에 관한 생각 / 풋고추 / 헌 집에 들며


3 유배시첩(流配詩帖)


남해 가는 길 / 울타리 밖에 채마밭을 짓고 / 안부 / 적소에 내리는 눈 / 꿈에 본 어머님 / 구운몽 / 잎 속의 바다 / 세 발 까마귀 / 월광(月光) 소섬 / 희방사 길 / 꿈꾸는 돌기둥 / 그리운 굴뚝 / 사랑니 / 집 짓기 / 마음의 등짐 / 참 예쁜 발 / 끈


4 참나무와 함께 자다


책성의 목책 울타리 / 자작나무 숲 / 발해 금(琴) / 발해 자기 / 푸른 기와로 지붕 얹고 / 발해 맷돌 / 그리운 그대 느릅나무 강 / 노성의 벼 / 수이푼강 / 도읍 / 참나무와 함께 자다 / 줄 없는 현금(玄琴) / 신라 가는 길 / 길이 끝나는 곳에 / 옥주에서 들은 얘기 / 콩밭 / 그 우물 아직 / 쑥무덤


늦게 온 소포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땅 이야기


내게도 땅이 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상주중학교 뒷산

철 따라 고운 꽃 피지도 않고

돈 주고 사자는 사람도 없는

남해 상주 바닷가 언덕

한 평 못 차는 잔디 풀밭 거기

평생 남긴 것 없는 아버지의 유산이

헌 옷으로 남아 있다.


저 눕고 싶은 곳 찾아

아무데나 자리잡으면 그 땅이 제 땅 되는

우리들 아버지의 아버지대로부터

사람들은 기억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고

더욱 잊지 않기 위해 비를 세웠다지만

중학에 들어가자마자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나는 학교 옥상에서 그 언덕빼기

공동묘지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세우질 못했다.


철 들고 부끄럼 알 때 즈음

흙이 모여 돈이 되고 묘 자리도 잘라서 팔면

재산이 된다는 나라

시내버스로 휴일 한나절

쉽게 벌초도 하고 오는 근교 공원묘지

아파트처럼 분양을 받고

중도금 잔금 치러가며 화사하게 다듬은

비명들 볼 때마다 죄가 되어

나도 햇살 좋은 곳 어디

한 열두 평쯤 계약을 할까.


그런 날은 더 자주 꿈을 꾸고

잠 속에서 좁은 자리 돌아누우며

손 부비는 아버지

고향길 멀다는 것만 핑계가 되는 밤이

깊어갈수록 풀벌레 소리 적막하고

간간이 등 다독이는 손길 놀라

잠 깨보면 쓸쓸한 봉분 하나

저녁마다 내 곁에 와 말없이 누웠다가

새벽이면 또다시 천리 남쪽 길 떠나는

아픈 내 땅 한 평.


밥에 관한 생각


냉장고 문에

에티오피아 아이들

굶는 사진 붙여놓고 석 달에 한 번

용돈으로 성금 채우는 건이 녀석,

장난치다가 짐짓

눈길 굵어지는 표정


아내가 달덩이 같은

밥상을 들고 들어올 때

누군가 수저를 놓고 쨍, 지구의

반대편으로 돌아가는 소리

들린다.


먹는 일의 성스러움이란

때로 기품 있게 굶는 일.

식구들 모여

오래오래 냉장고 문을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다.


남해 가는 길

- 유배시첩 · 1


물살 센 노량 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

선천(宣川)서 돌아온 지 오늘도 몇 날인가.

윤삼월 젖은 흙길을

수레로 천 리 뱃길 시오 리

나루는 아직 닿지 않고

석양에 비친 일몰이 눈부신데

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

내 이제 바다 건너 한 잎

꽃 같은 저 섬으로 가고 나면

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

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들 모아

화전(花田)을 만들고 밤에는

어머님을 위해 구운몽(九雲夢)을 여끙며

꿈결에 듣던 남해 바다

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앵강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만년에 유배 살던 남해 노도(櫓島) 앞바다 이름이다.


참나무와 함께 자다


산이 짙어 작잠누에를 쳤더니

산은 간데없고 명주폭 흰 치마에

깁옷 입은 발해 며느리

갓 시집 온 고치 속에서 달빛만 뽑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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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