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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25. 11:14 산행/이어도산악회

[광명 도덕산, 구름산, 가학산]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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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5. 2. 25. 11:08 산행/이어도산악회

[광명 도덕산, 구름산, 가학산]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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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5. 2. 25. 11:05 산행/이어도산악회

[광명 도덕산, 구름산, 가학산] 01

1. 산행일시 : 2015년 2월 22일(일)

2. 집결장소 및 시각 : 지하철 7호선 철산역 2번 출입구, 10:00

3. 코스 : 철산역 - 도덕산 송신탑 - 도덕산 정상 - 밤일고개 생태육교 - 한치고개 육교 - 구름산 정상 - 가학산 - 오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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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5. 2. 24. 16:20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21 만인보 


高銀

1996,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799


811.6

고67만  11


창비전작시----------------------------------------------------------------------


큰 명제에 대한 시대적 일탈이 여기저기서 눈여겨지는 때에 시와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이 있어야겠다. 그것은 근원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뜨겁게 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접어두고 나서 나는 그 이념의 혐의와 상관없이 먼저 인간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이나 사회 · 역사 · 문명 전반에 대한 통합적 인식이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는 사실에 새삼 눈떠야 했다. 인간의 실존적 정화 내지 승화만이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고비들을 넘기는 일의 시작이라는 것도 거기에 포함된다.

세상에 어디 '시적 인간'의 가능성이 그 싹수마저 보이고 있느냐라고 고개를 젓지 말기 바란다. 바로 이런 판에서 시인보다 먼저 시적 인간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므로.

다만 그런 인간에게서 메시아적이기보다 연인적이기까지 한 친화를 경험하는 것이 창조의 축복과도 닿아 있을 터이다.

「머리말」에서


고은(高銀)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눈길」「천은사운」 등을 추천받아 등단.

1960년 첫시집 『피안감성』 간행. 이후 시 · 소설 · 수필 · 평론 등에 걸쳐 100여 권의 저서 간행.

1984년 『고은시선집』 간행.

1986년 『만인보』 간행 시작

1987 ~ 94년 서사시 『백두산』 간행.

제3회 만해문학상, 제1회 대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등 수상.


차례


박정희 / 오  윤 / 오  준 / 문익환 / 조지송 / 이창복 / 무교동 목포집 / 캠프 레이건 입구 / 김관석 / 성내운 / 사  슴 / 전우(田愚) / 강만길 / 장만철 / 김영초 / 이철구 / 장홍주 / 김천수 / 이범렬 / 시노트 신부 / 서해의 썰물 밀물 / 김부자 / 김부자 영감 / 김재준 / 안재웅 / 최민화 / 오태순 / JP / 나병식 / 유인태 / 김성재 / 정  붕 / 이선영 / 구창완 / 청계천 뚝방 홍씨 마누라 / 박도연 / 엉터리 사주쟁이 / 장영달 / 민주화운동의 어떤 영감 / 한명회 / 이  철 / 서경보 / 부광석 / 임재경 / 이현배 / 법  정 / 김형욱 / 셋째딸 성숙이 / 신나무 / 정문화 / 신승원 / 이건영 / 송건호 / 강구철 / 정명기 / 강신옥 / 홍성엽 / 이  강 / 중앙시장 과부 / 유달영 / 이름 숨기기 / 공주 느림보 / 부완혁 / 이효재 / 이남덕 / 백두진 / 강수(强首) / 탑골공원 그 사람 / 이철승 / 아버지와 아들 / 요정 종업원 임도빈 / 서광선 / 정화암 / 정일형 / 이태영 / 양일동 / 똥  가 / 박석무 / 달  밤 / 정석해 / 다동 다복여관 장기투숙객 / 조재천 / 장용학 / 오풍류 교수 / 이헌구 / 한산 주창길 / 썩은 새끼 서 발 / 신정식 / 무교동의 밤 / 남재희 / 신라 진흥왕 / 조향록 / 어린 장선광 / 오줌 싸는 시간 / 이동화 / 정회성 / 최원식 / 윤형중 / 관철동 밤 피리소리 / 신경림 / 그 노파 / 늙은 교도관 / 조요한 / 김용구 / 김성식 / 정수동(鄭壽銅) / 이  인 / 백낙준 / 서대문경찰서 유치장 담당 / 조용철 / 윤제술 / 심우성 · 전성우 / 송시열의 종 / 김성우


박정희


그가 태어난 고장

선산 도리사 밑 밭두렁에는

캐내지 못한 바위가 박혀

혼자 거무튀튀하다

그 바위를 닮아야 했던가

여름 햇볕이 쨍 !

그는 그렇게 고독했다


일본 육군의 모범장교였다가

육군 소장이었다가

쿠데타 이래


녹슨 쇳소리

그의 목소리의 파쇼는 바윗덩어리였다

탄압과 건설이

행여 뒤질세라


모든 곡선들은

거듭된 5개년계획과 함께

새마을 슬레이트지붕

고속도로의 직선으로 교체되었다


남부동해안 울산공업단지

포항제철

그가 태어난 고장도 공장의 도시로 교체되었다


1970년 초 서울에는

쉬쉬쉬 소문이 떠돌았다

박정희 육영수는

총 맞아 죽을 운명이라는 것


어느덧 춘궁기 보릿고개가 사라졌고

전란 이후

휴전선 이남의 산야는

개발의 나라

성장의 나라였다

그런 어느 날

쉬쉬쉬 소문이 떠돌았다

감옥 지붕의 비둘기들이 우르르 날아오르며


나병식


전봇대 키

도수 높은 안경이면 되었다

거기다가

숨차며 말 이어가면 되었다


서울대 사학과 학생이었다가

민청학련 사건 사형짜리


몇차례나 감옥에서 나오면

마늘장수도 하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도 속인다는

꿀장사도 하고

그러다가

양복점 풀빛도 차려보았다


그러다가

출판사 풀빛 차려

이 책

저 책을 내어

그 책더미 속에서

숨차며 말 이어가면 되었다


나병식

그는 광주가 고향이기 전에 조국이었다

황사바람 펄럭이는데


이  철


민청학련 사건 주동자인

그 대학생은

차라리 고교생처럼 풋풋하였다

사직동 거리에서

현상수배자로 잡혀보니

키도 낮았다


진주 남강가에서 자라나

울림 없는 토막진 말 몇마디

서울로 온 이래

아버지는 박정희의 아들 지만을 가르치는 교사였고

아들은 박정희 독재에 맞선 대학생이었다


이미 다 검거되었는데

나중에야

고교생으로 변장한 채 잡혔다


그는 유인태 나병식 김병곤 들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 사형선고도 엄포였을 뿐

몇개월 뒤에 내보냈다


그 뒤 일체 재야에서 떠났다

시대를 오래오래 씹어야 했던가

쓴 것이 단 것으로 되는 것이 씹는 일이므로


신승원


민청학련 사건 169명 가운데는

아서라 고교생 둘이 들어 있다


4월혁명 치닫을 때였던가

전국의 고교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온 이래


부산고등학교 소년이

여드름 하나를 달고

부산대 언니들 따라

유신체제 반대를 위하여 나섰으니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으로

1심에서 풀려나왔으나


오륙도 바다 위

일찍 뜬 별 왠지 안쓰러워


저문 바다 위 바람 불었다


정명기


민청학련 사건 뒤로도

다시 감옥에 갔다

다시 감옥에 갔다

그런 뒤에야

감옥 대신

도시빈민에 다가가


이른바 달동네에 판잣집 교회를 개척했다

젊은 목사가 되어

함께 싸웠던 여학생이

어느덧 목사 부인이 되어

초라한 십자가를 달았다


서울의 밤

한국 각처의 밤

시뻘건 십자가가 난립하는 것이 아닌

초라한 십자가를 달았다


언젠가는 그런 십자가조차도 달지 말아야 할 때가 오리라


강신옥


1974년 7월 4일

용산 보통군법회의

민청학련 사건 담당 변호인 강신옥

긴급조치 4호 위반

피고인 169명 중 9명 재판이 시작되었다


강신옥

피고인을 변론하다가


이 애국학생들에게 중형을 구형하는 것은

사법살인이다

직업상 이 자리에서 변호하고 있으나

차라리 피고인들과 함께

피고인석에 앉고 싶다고 외쳤다


바로 이 변론요지로

긴급조치 4호 위반 피고인이 되었다

그의 말대로

변호인이 아니라 피고인이 되었다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


군 법무관 시절

그의 후배들 홍성우 황인철 들과 함께

이미 뜻을 맞췄던 일이

70년대 내내

그 뒤로도 내내 이어지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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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5. 2. 23. 13:15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20 습관의 재발견

 

스티븐 기즈 지음 | 구세희 옮김

2014, 비즈니스북스

 

 

대야도서관

SB102051

 

181.845

기77ㅅ

 

기적 같은 변화를 불러오는 작은 습관의 힘

 

작게, 사소하게, 가볍게 시작하라!

지킬 수 없는 '위대한 목표'보다 지킬 수 있는 '서소한 행동'이

당신의 인생을 극적으로 바꾼다!

 

사소한 행동으로 큰 결과를 만드는 '작은 습관'의 힘!

지키지도 못할 거창한 계획 세우기에만 집착하지 말고

'작은 시작'으로 기적 같은 변화를 경험하라!

 

올해 세웠던 계획,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는가? 굳은 결심으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유야무야된 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내고 있지는 않은가? 하지만 당신의 나약한 의지력을 탓하며 좌절하지 마라. 문제는 당신이 선택한 변화 전략에 있을 뿐이다. 결심하고 포기하고, 또 결심하고 또 포기하는 무한반복의 굴레에서 당신을 구해 줄 단 하나의 전략은 바로 '작게 시작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원대한 목표와 완벽한 계획 따위는 필요 없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무조건 실천 가능한' 작은 행동뿐이다!

 

지은이 스티븐 기즈 Stephen Guise

블로그 '딥 이그지스턴스'(Deep Existence)를 운영하는 미국의 파워블로거이자 자기계발 전문가이다. 2004년에 문을 연 '딥 이그지스턴스'는 지난 10년간 많은 사람들에게 개인의 성장과 자기관리에 관한 다양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며 지난 2012년 미국 네티즌들이 뽑은 '가장 영향력 있는 자기계발 블로그' 1위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블로그는 미국의 인기 정보 웹사이트 '라이프해커'(Lifehacker)와 더불어 가장 많은 방문자 수를 자랑하기도 한다.

현재까지도 가장 많은 조회 수를 기록하는 포스트는 '팔굽혀펴기 1회의 도전'(The One Push-up Challenge)으로, 이 책의 시초가 된 글이다. 스티븐 기즈는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열정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거나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라' 같은 널리 알려져 있는 자기계발 및 습관 만들기에 관한 통념을 거부하며 정신없이 바쁘고 피곤에 찌든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알맞고 '실천 가능한' 습관 전략으로 '작은 습관'을 제시한다. 작은 행동에 담긴 인지심리학 및 뇌과학적 원리는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고 사용하는 대부분의 자기계발 전략이 왜 그토록 실천하기 버거운지 그 이유를 밝혀 준다. 또한 작은 습관이 어떻게 일정하고 지속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도 보여 준다. 이 책은 당신의 삶을 좌절과 패배의 기억이 아닌 지속적인 성공과 자기존중감으로 가득 채우는 위대한 변화를 향한 첫걸음이 되어 줄 것이다.

www.deepexistence.com

@deepexistence

 

옮긴이_ 구세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와 호주의 호텔경영대학교(ICHM)를 졸업하고 국내외 호텔과 외국계 기업에서 근무하며 운영 관리 및 인사 업무를 담당했다. 번역에 매력을 느껴 과감히 하던 일을 그만둔 후 현재는 번역 전문 그룹인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여러 가지 분야의 글을 공부하며 영어를 훌륭한 우리글로 옮기는 데 매진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아이만 낳으면 엄마가 되는 줄 알았다》, 《원씽》, 《위대함의 법칙》, 《시빌라이제이션》 등이 있다.

 

M I N I  H A B I T S

 

차례

 

프롤로그_ 작은 습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최고의 전략
이 책의 구성



제1장 작은 행동, 큰 결과

모든 변화는 ‘팔굽혀펴기 한 번’에서 시작되었다

나쁜 습관을 끊는 것보다 좋은 습관을 기르는 게 더 쉽다

작은 습관이 만들어 내는 변화 : 사소한 행동, 위대한 결과

당신의 삶을 바꾸는 습관의 과학

당신도 모르는 습관의 세 가지 비밀



제2장 습관은 어떻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가

우리의 뇌는 느리고 게으르도록 진화했다

힘세고 멍청한 로봇과 영리하지만 피곤한 관리자

생각하는 사람: 행동을 결정하는 머릿속 감독관

프로그래밍된 뇌 : 좋은 습관을 ‘자동화’하는 방법


제3장 의지력, 습관을 완성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동기 만능주의 신화’의 수많은 문제들

의지력이 동기를 능가할 수 있는 이유

의지력에도 관리가 필요하다



제4장 당신의 한계를 넓혀 주는 작은 습관의 힘

작은 습관을 위협하는 다섯 가지 요인

작은 습관은 당신의 ‘컴포트 존’을 넓힌다

거부감의 장벽에 부딪히는 두 번의 순간들

거부감의 장벽을 넘어서는 작은 도약



제5장 작은 습관만의 작지만 위대한 차이

당신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스스로를 믿게 된다

자율성을 부여한다

추상적이든, 구체적이든 반드시 목표를 이루게 된다

두려움과 회의, 망설임을 없앤다

목적의식을 갖고 살게 한다



제6장 큰 변화로 가는 여덟 단계


제1단계 : 작은 습관과 작은 계획을 선택하라

제2단계 : ‘왜?’라고 물어 핵심을 파고들어라

제3단계 : 습관 신호를 정하라

제4단계 : 보상 계획을 세워라

제5단계 : 모든 걸 적어 놓아라

제6단계 : 작게 생각하라

제7단계 : 높은 기대를 버려라

제8단계 : 징후를 찾아라. 단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제7장 작은 습관을 위한 체크리스트


체크리스트 1 : 부정행위는 금물이다

체크리스트 2 : 어떤 진척이든 만족하라

체크리스트 3 : 자주 보상을 내려라

체크리스트 4 : 분별력을 유지하라

체크리스트 5 : 강한 거부감이 들면 한 발 후퇴하라

체크리스트 6 : 얼마나 쉬운 일인지 스스로에게 상기시켜라

체크리스트 7 : 너무 작아 효과가 없는 목표는 없다

체크리스트 8 : 큰 목표가 아닌 초과 달성에 에너지를 쏟아라



에필로그_ 당신의 인생을 ‘작은 습관’으로 채워라!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 노자

 

"왓슨, 나는 뇌일세. 나머지는 그저 쓸모없는 살덩이에 불과하지."

- 아서 코난 도일. 《마자린의 보석》중에서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단 한가지는 승자는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 앤서니 라빈스

 

"우리가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이 바로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 준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습관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승리할 기반을 갖춰 놓은 뒤 전쟁을 벌인다. 패하는 군대는 일단 전쟁을 일으키고 이길 방도를 찾는다."

- 《손자병법》 중에서

 

"아이디어는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그대로 죽어 버린다."

- 로저 본 외흐

 

"규칙을 잘 알아 두어라. 효과적으로 어길 수 있게."

- 14대 달라이 라마

 

 

posted by 황영찬
2015. 2. 13. 17:26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19 마티스 - 원색의 마술사


그자비에 지라르 지음, 이희재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31


082

시156ㅅ  26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6


순수한 색채, 단순한 선만으로도 이전의

대화가들보다 더 눈부신 빛을 창조한 화가 마티스.

대담한 원색의 구사로 인해 자칫 혼란스럽기

쉬운 화풍에 냉철하고 풍부한 지성으로 적절한 질서를

부여할 줄 알았던 마티스는, 인상파와는 또 다른

시각에서 빛과 색을 찾아내 사람들에게 원색의

마법을 선보인 가장 혁신적인 화가이다

 

Matisse, "Une splendeur inouie"

 

"마티스 이전에는

모든 그림이 빛을 발하지 않았다고

어떤 이는 말한다.

이것은 오류이며 불공평한 견해이다.

그러나 마티스의 그림 옆에서는 반 고흐,

르누아르, 모네, 터너의 그림마저 빛을 잃고 만다.

세계사의 어느 시점에서 한 화가를

그러한 존재로 인정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최소한 반세기 동안 이러한 영광을

부여받은 화가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림에서 빛을 볼 뿐이다.

그들은 인간성의 밤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창문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젊은 세대는 비로소 그들에게서

태양의 모습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루이 아라공,

1948년 필라델피아 예술박물관에서 열린

마티스 회고전 카탈로그 서문에서




 

차례

 

제1장 그림에서 맛본 희열

제2장 이국의 매력

제3장 색, 무용, 음악

제4장 거대한 아틀리에

제5장 "내 몽상의 대상"

제6장 완전한 통일

기록과 증언

참고문헌

그림목록

찾아보기

 

그자비에 지라르 Xavier Girard

마티스 미술관의 관장으로 있는 그자비에 지라르는 니스 대학교에서 예술사를 가르치고 있다. <아트 프레스> <아트 포럼> <갤러리 매거진>과 같은 미술 전문잡지에 비평을 기고하고 있으며, 프랑스 국내외 여러 박물관의 전시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유럽 회화와 조각에 관련된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고,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일본 등지에서 여러 차례의 마티스전을 시획했다.

 

옮긴이 : 이희재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서로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30번 <고갱.과 <말하기의 다른 방법>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 <꿈과 상상의 여행> <추적> 등이 있다.

 

제1장

그림에서 맛본 희열

 

"내 삶의 줄거리에는 이렇다 할 사건들이 없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나는 1869년 12월 마지막 날 북부 프랑스의 르카토캉브레지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상인이었던 나의 선친은 아들이 법관이 되기를 원했으므로 나는 열여덟 살에서 스물두 살까지 생캉탱의 한 법률사무소 서기로 충실하게 일하려고 노력했다."

대대로 장갑을 만들고 가죽을 다듬어 온 집안에서 자란 마티스의 어머니(1887년 아들과 찍은 사진)는 가족상회에서 도료 파는 일을 맡았다. 마티스가 모자, 꽃(그녀는 도자기에 꽃을 그렸다). 장식미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티스가 '나의 처녀작'이라고 말한 이 작품(1890) 안의 법률책은 그림 때문에 방향전환을 해야 햇던 그의 인생을 상징한다.

"너무나 복잡하다네." 마티스는 자신이 베껴 그린 안 데 헴의 정물화 <식기대>(위)의 모사화(아래)를 피에르 쿠르티옹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마치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며 그린 듯해, 원작 안의 어떤 사물들을 귿도로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지. 그래서 나는 이젤을 방 맞은편에 놓고 마치 실물을 옮기듯 작업했다네." 이 모사화는 1955년 마티스가 '현대적 구성기법에 따라' 그린 대작 <데 헴의 정물 변주>의 바탕이 되었다.

1895년 마티스가 처음 브르타뉴를 방문했을 때 뵈제크카프시쥔에서 그린 <브르타뉴의 마을>은 카미유 피사로나 장 프랑수아 밀레에 여과되기는 했지만 마티스가 코로에 진 빚을 여실히 보여 준다. 풍경과 화가 사이에는 장매물이 놓여 있다. 마티스는 먼저 문제를 명확히 분석하면서 실마리를 풀어 나갔다. 역광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늘은 어떻게 철리할 것인가? 브르타뉴 아낙네를 집과 지붕과 첨탑으로 둘러싸는 것이 그 해결책이었다.

'등을 보이는' 초상화 중 첫번째로 그려진 <책 읽는 여자>는 코로의 화실과 흡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모델 카롤린 조블로가 마티스와 함께 살고 있던 살림방 겸 작업실에서 생활용품에 둘러싸여 있다.

1896년 벨일에서 찍은 마티스의 사진.

훗날 마티스는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레몽 에스쿨리에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모네가 작업했던 (탁 트인 <굴파르의 바다 경치>(1896)에 보이는 벨일의 거친 해변에서 일했습니다. 당시 내 팔레트는 진한 갈색과 황토색이 고작이었던 반면 베리는 인상파다운 팔레트를 갖고 있었어요.…… 나는 순수색의 광채가 지닌 마력에 눈을 떴습니다.


제2장

이국의 매력


"나는 어디서나 스스로를 탐구했다." 마티스는 나중에 자신의 형성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같은 인상파 화가를 조심스럽게 흉내내려는 시도에서부터 빈센트 반 고흐와 오딜롱 르동에게 영감을 받아 자극적인 색을 쓰느 데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적 가능성을 탐구했다. 폴 세잔식의 공간구성을 모방했고 신인상파 화가 폴 시냐크의 충고에 따라 색을 실험하기도 했으며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의 평온한 세계를 따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길을 열어 준 것은 마티스 자신의 직관이었다.

그림의 제목인 <호사, 평온, 관능>(1904~1905, 부분화, 위)--샤를 보들레르의 시구에서 따왔다--은 풍경과 여인들의 나체가 빚어내는 자연스러운 조화에서 샘솟는 열락의 상태를 나타낸다. 마티스가 처음으로 그린 자화상(1900~1903, 아래)은 램브란트에게 영감을 받았다.

"귀스타브 모로의 화실에 있는 동안은 결코 인물화를 그리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라고 마티스는 루이 아라공에게 말했다. "그래서 정물화에다 인물을 집어 넣았지요." 피사로에게서 영감을 얻은 <저녁 식탁>(첫번째, 1896~1897)의 인상주의 기법은 그 자체로도 마티스가 따로따로 탐구해 온 그림의 두 유형을 결합했다는 데서 참된 의미를 갖는다. 두번째는 <벨일의 르팔레 항구>(1896)이고, 세번째와 내번째는 1896년의 앙리 마티스아멜리 파레르이다.

브르타뉴 여행을 통해 마티스는 외광 풍경화(plein-air landscape)에, '자연에 깃들인 빛의 계시'에 처음으로 눈떴다. 색채로 들끓는 코르시카의 전원에서 그는 빛의 구체성을 복원할 필요성을 느꼈다. 충만하면서도 집중된 <아작시오의 방앗간 마당>(1898)은 '무지개 빛깔'로 가득 찬 마당에 쏟아지는 빛의 효과를 나타내려는 시도였다.

마티스의 친구들은 대부분 화가였다. 샤를 카무앵과 알베르 마르케(위), 앙리 망갱(아래).

<첫 오렌지 정물>(1899)에서는 반 고흐, 고갱, 시냐크의 영향이 드러나고 있다. 인상파의 '미묘한 색채점이(漸移)'가 여기서는 오렌지라는 지배색에 압도되어 잇다. 기욤 아폴리네르는 이 오렌지를 '빛으로 터질 듯한 과일'이라고 묘사했다. 대상들은 오렌지의 공격에 저항하려는 듯이 중앙에 모여 있다.

마티스가 창가에서 내려다보곤 하던 다리는 도시풍경 연작(1900~1905)에 나타난다. 마르케가 비슷한 도시풍경화에서 선호했던 뿌연 유백광은 사라지고 군데군데 그대로 노출된 캔버스의 환한 역광 위에 색을 빠르게 흩뿌리는 기법이 나타난다. 이 그림은 1900년경에 그려진 <생미셸 다리>이다.

세잔의 <목욕하는 세 여인>(1879~1882경)처럼 마티스의 뇌리에 오래 남아 있던 작품도 드물 것이다. 마티스는 1899년 이 작품을 사들인 뒤 프티팔레 미술관에 기증할 때까지 37년 동안이나 소장했다. 인물과 풍경이 군더더기 없이 융합된 세잔의 그림에서 구현된 엄격한 예술적 총체성은 시각적 실재성을 압도하고 있다.

펠릭스 페네옹이 예고한 '태양의 광포한 승리'에 마티스는 도취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마티스는 빛을 다스리는 쪽을 택했다. 마르케와 상징주의 화가들이 준 교훈에 따라 마티스는 깊이감을 상쇄시키기 위해 <역광이 있는 정물>(1899)에서 역광을 이용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온몸이 울퉁불퉁한 <농노>(위는 팔이 제거되기 전의 모습, 아래는 제거된 후의 모습. 1900~1904)는 색을 통해 공간이 평면화되고 균일화되었던 캔버스화와 대조를 이룬다.

앙브루아즈 몰라르는 1904년 6월 처음으로 마티스 개인전을 대규모로 열었다. 그는 마티스가 화랑과 계약을 맺지 못하고 있을 때 그의 초기작 가운데 다수를 구입했다.

마티스의 작품은 무엇보다도 작업이 발전하는 공간이다. <풍금이 있는 실내>(1900)처럼 거듭 손질된 작품은 계속되는 재구성의 과정을 생생히 보여 준다. 처음 그림에서 풍금의 왼쪽 하단은 앞으로 쏠려 있었고 바깥쪽으로 벌어져 있었으며 뚜껑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뚜껑의 가장자리는 아래로 향하는 화살과 같았다. 방의 안쪽을 향해 밀고 들어가는 꽃다발이 균형을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전경의 책은 더욱 바닥으로 하강하는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폴 시냐크(1907년경).

<생트로페의 테라스>(위, 1904)를 둘러싼 폴 시냐크와의 갈등은 마티스로 하여금 같은 해에 <생트로페만>(아래)을 그리게 만들었다. 두 그림의 차이점에서 우리는 마티스가 의도적으로 후퇴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러나 신인상주의로의 복귀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생트로페만>은 생트로페에서 처음 그려진 지중해 풍경화들에서는 무시되었던 그 '황홀한 해안'으로 마티스가 다시 관심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호사, 평온, 관능>(1904~1905)은 마티스의 작품을 지탱하는 세 가지 근본적인 주제-고대, 가족, 풍경-를 느린 이동 촬영 장면처럼 펼쳐지는 구성 안에서 결합하고 있다. "이것은 순수한 무지개 빛깔로 그려진 그림"이라고 마티스는 나중에 썼다. "그 유파(신인상파)의 모든 그림은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 약간의 분홍, 약간의 파랑, 약간의 녹색으로 이루어진 너무도 제한된 그들의 팔레토가 내 마음을 썩 편하게 하지는 않았다."

"콜리우르? 거기에는 여자, 배, 바다, 산이 있다."고 드랭은 1905년에 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빛이 있다. 그늘을 드리우는 황금빛 햇살." <콜리우르의 실내(시에스타)>(1905)에서 마티스는 바다가 굽어보이는 방에서 바닷가 마을의 빛을 담았다. 그의 의도는 한낮의 대상이 띠는 색채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꿈결이나 채색파 화가의 실험에서 볼 수 있는 가벼운 회오리운동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 운동은 벽과 마루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그림자와 반사광을 흐트러뜨리며 색채의 원 안으로 실내와 실외를 감싸안는다. 풍경은 방 안으로 살그머니 들어와서 잠자는 여인의 꿈속으로 녹아들었다.

 

 

"(이것이) 외부세계와 바다와 내부세계를 결합할 수 있었다면." 마티스는 <콜리우르의 열린 창>(1905)을 이렇게 평했다. "그것은 풍경의 분위기와 내 방의 분위기가 바로 하나였기 때문이다."

마티스는 1905년 여름에 <콜리우르의 풍경>을 그렸다. "잠시 야수파에 젖어 있을 동안 우리는 모든 색채를 빠짐없이 강렬하게 처리하고 그중 아무것도 희생시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닮은꼴로 그린 <마티스 부인의 초상/녹색 줄무늬>(아래, 1905)에서도 그랬지만 마티스는 <모자를 쓴 여인>(위, 1905)에서 모자, 얼굴, 일본 부채를 병치하여 위대한 초상화가인 마네, 르누아르와 자웅을 겨루려 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뚜렷하고 특징적이며 강렬하지만 서로 삐걱거리는 야성적인 색의 배합으로 나타내려고 했다.

그림 안에 그림들이 담겨 있는 듯한 복잡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선사시대 동굴벽화와 그리스 신화에서 스테판 말라르메와 파리의 카바레에 이르는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주제와 이미지를 차용한 <삶의 기쁨>은 <호사, 평온, 관능> 이후 그림으로 표명한 마티스의 가장 중요한 발언이다. 다섯 달 동안 작업해 완성한 이 작품은 원래 독립적으로 구상되었다가 나중에 식물의 모티프로 설정된 무대 안에서 시각적 연상효과를 낳을 수 있게 배열된 이미지들로 구성되었다. 마티스는 콜리우르의 약동하는 풍경을 장식적인 분위기에 담아, 화가 에두아르 뷔야르가 만들었던 상징주의적 무대를 연상시키는 평면적이고 선적인 에덴 동산을 연출했다. 섬세한 운율과 연상으로 가득 찬 이 그림의 구성은 마치 말라르메의 시구처럼 펼쳐진다. 흩어지는 파편들을 하나로 모으는 효과를 낳는 무희들의 군무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의 모호성과 궁극적인 불확정성, 그리고 이것과 결부된 상징주의적 뉘앙스는 이 시기의 마티스가 아직은 과도기에 머물렀던, 잠재력으로 충만한 화가였음을 암시한다.

 

제3장

색, 무용, 음악

 

1906년 5월, 콜리우르로 돌아간 마티스는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 그릴 생각"이라고 밝혔다. 사람들이 그를 야수파로 이해하던 바로 그 무렵에 마티스는 조각과 도자기에 손을 댔고 그 작업을 캔버스에다 옮겼다. 마티스의 그림은 이내 순수하게 장식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생각이었다."고 그는 몇 년 뒤에 말했다.

<붉은 조화 / 식탁>(1908, 일부)에서 마티스는 현실에서 관찰한 대상들의 일관성을 장식적 추상성과 조화시켰으며, 육체성이 결여된 선을 무게 및 양감과 조화시키기 위해 조심스럽게 색을 사용했다.

<비스듬히 누운 나부 Ⅰ>(1906~1907)은 우여곡절 끝에 <푸른 나부 : 비스크라의 추억>으로 발전했다.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

야수파 아리아드네. 아프리카의 거대한 오달리스크. 요정 님프가 하나로 결합된 <푸른 나부 : 비스크라의 추억>은 모순된 요소들을 병렬한 다음, 이 인물의 형태적, 상징적 효과를 크게 강조하는 방식으로 그 요소들을 짜 넣고 있다. 이 인물이 피카소, 드랭, 조르주 브라크의 그림에서 거듭 나타난다는 사실은 이 그림이 초기 입체파의 이미지에서 차지하는 막중한 비중을 웅변적으로 드러낸다.

포도덩굴과 포도송이로 둘러싸인 님프(1907)는 오스트하우스 저택의 장식용으로 제작된 3면 도예화의 왼족 부분이다. 이것은 <푸른 나부 : 비스크라의 추억>을 장식화로 옮긴 셈이다.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채색 광택 타일로 된 벽화는 조그만 방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되었지만 마티스의 후기 작품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친다.

마티스, 아내, 딸 마르그리트가 1907년 여름 콜리우르의 작업실에서 여러 점의 미완성 작품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위) 1908년 오톤 살롱 전시회에 출품된 마티스의 조각 <두 여인>(아래, 1907)은 아프리카 조각이나 고전 조각이 두 인물을 다루는 방식을 결합하고 있다.

<호사 Ⅰ을 위한 습작>(위, 1907)과 <호사 Ⅱ>(아래, 1907~1908).

 

<삶의 기쁨>를 좀더 장대한 규모로 재현한 두 개의 <호사>는 세잔의 <사랑에 빠진 양치기>를 고갱과 퓌비 드 샤반의 시각을 통해 장식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생트로페만과 비슷한 이 한적한 해안에 비너스를 닮은 자연미에 충실한 인물, 쪼그려 앉은 숭배자, 화환을 든 제3의 여인이 있다. 성적인 수수께끼는 이 목가적인 분위기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마티스가 이 낙원의 정경을 위해 창조한 장식적인 여인들은 우아하고 담백한 미적 이상을 발산한다.

<나무공 놀이>(위, 1908)와 <거북이와 목욕하는 세 여인>(아래, 1908)에 나오는 장대한 장식적 인물들은 세잔의 <세 명의 해수욕객>과 일맥상통한다. 마티스는 세잔에게서 영감을 받은 피카소의 큐비즘에 맞서 조화롭고 표현적인 신체의 움직임을 강조하는 이 기념비적인 구성을 내놓았다.

파리의 스타인 부부 아파트에 모인 미카엘 스타인과 사라 스타인, 마티스, 알랑 스타인, 한스 푸어만(위, 1907경). 마티스(중앙)와 학생들(아래, 1909~1910). <붉은 조화 / 식탁>(가운데, 1908)에서 빨강은 색채가 갖는 무한한 잠재력을 탐구하고 있다.

"나는 (그림을) 보완하려는 시도로 조각을 했다."고 마티스는 술회했다. 그는 <춤 Ⅰ>에 나오는 인물들의 약동하는 활기찬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의 발을 조각으로 탐구했다(1909).

"아뇨, (춤의) 주제는 벽에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1951년의 인터뷰에서 마티스는 말햇다. "나는 남달리 춤을 좋아하고 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본답니다. 표현력이 풍부한 움직임, 율동감 있는 움직임, 내가 좋아하는 음악 따위를요, 춤은 내 안에 있었습니다." 마티스는 1909년 3월 유채 스케치, <춤 Ⅰ>를 그린 데 이어 이듬해 봄에는 같은 주제를 좀더 강렬하게 그렸다. <음악>(아래, 1909~1910).

 

제4장

거대한 아틀리에

 

마티스가 <대화>에 착수한 1908년 가을부터 이 작품을 완성한 1912년까지 그의 그림으로 파란색이 쇄도해 들어온다. 또 하나의 장식적 문턱을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마티스의 작업실은 우리가 예술이라고 일컫는 초월적인 대화가 이루어지는 단순한 배경이나 무대의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그곳은 고독, 행동, 명상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으며, 독보적인 색의 공간이었다.

<제라늄이 있는 정물>.

잔 바드랭을 모델로 한 <처녀와 튤립>(1910)에서 마티스는 회복기에 들어선 환자의 모습과 만개하기 직전의 튤립을 짝지우고 있다. <자네트> 연작 조각들처럼 이 작품은 식물의 자연스러운 생명력과 신체에 내재된 유기적인 치유력을 상징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튤립은 생명선의 구실을 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모델에 불어넣고 있다.

<춤이 있는 정물>을 그리는 마티스(1909년).

1910~1911년, 마티스가 <세비야 정물>(위)과 <스페인 정물>(아래)을 세비야의 임대 작업실에서 그리고 있었을 때, 그의 기억 속을 또렷이 맴돌던 것은 뮌헨의 이슬람 미술전에서 보았던 양탄자와 벽걸이 장식의 풍요로운 색채였다. 그림에서 현실의 꽃송이는 인공의 세계 속에 파묻혀 버리다시피 했다. 직물 위에서 물결치는 꽃무늬에 압도당한 그림 안의 꽃병은 활기찬 장식미와 정감 어린 메시지를 상징하고 잇다. 벽 전체는 꽃의 붉은 빛깔로 처리되어 있다.

<마닐라 숄>(1911)은 마티스의 관심이 '현실의 제라늄'을 묘사하는 데에서 꽃무늬의 인상적인 반복으로, 꽃잎의 붉은색에서 타오르는 정염을 간직한 붉은색으로 바뀌었음을 보여 준다.

마티스 미학의 훌륭한 전범이 되는 <대화>(1908~1912)는 많은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피에르 슈네데는, 이 그림이 일상생활의 한 장면(마티스 부부의 말다툼)을 창문의 '중심적인 순수성(central purity)'이 지배하는 비잔틴 시대의 성화(聖畵)로 승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슈나이더에 따르면 이 작품은 "그림이라는 종교가 주는 일종의 계시이다." 예술사가 잭 플램은, 이 그림의 구성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고대 함무라비의 석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만, 주제는 현대 화가의 독백"이라고 주장한다. 발코니 격자는 'NON(부정어)'으로 읽히는데, 이것은 그림에 나오는 부부뿐 아니라, 순전히 시각적인 그림의 한계로 말미암아 장면으로부터 단절된 감상자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두 해석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점은 <대화>가 마티스의 작품세계 전반을 대변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작품과 짝을 이루는 <붉은 조화>가 파란색으로 출발했으며 <대화>의 관능적인 붉은색이 추상적인 파란색으로 덮여 있음을 알고 있다. 색은 화가의 내밀한 감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힘을 잃지 않고 있다.

"식구들 생각만 하면 골치가 지끈거린다." 마티스는 1911년 5월 26일 <화가의 가족>(1911)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썼다. 갈등이 빚어지고 있었지만 그림 속에서는 그런 갈등의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피에르와 장은 체스를 두고 있고 마티스 부인은 뜨게질을 하고 있으며 마르그리트는 한손에 책을 들고 있다.

1911년에 마티스가 보낸 엽서로 <화가의 가족>의 스케치가 보인다.

세르게이 슈추킨.

<붉은 조화>가 그랬듯이 <붉은 화실>(1911)도 원래는 황토색이 악센트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실내는 전체적으로 파르스름한 빛깔이었다.

탕헤르만을 살피는 마티스(1912).

마티스는 <탕헤르의 정원>(1912)을 그린 별장의 정원을 이렇게 묘사했다. "드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우뚝우뚝 솟은 우람한 나무들을 보고 할 말을 잊었다. 키 작은 아칸서스는 또 얼마나 우거져 있던지, 그 화려한 자태란 마치 내 관심을 끌려고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탕헤르의 정원>은 모로코의 정원을 그린 석 점 가운데 하나이다.

<성문><창에서 바라본 풍경>(1912~1913)은 이반 모로소프의 요청에 따라 제작되었다. 이 창을 통해 바라본 모습은 '파란 풍경'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두번째로 탕헤르를 찾았을 때 마티스는 원래 연한 녹색과 분홍색을 띠고 있던 그림의 색조를 시원한 청색으로 바꾸었다.

그는 대형 유화인 <테라스에서>(1912~1913)를 위의 두 그림과 함께 이른바 모로코 3부작으로 구성하려고 처음부터 생각한 것일까? 어쩌면 조라의 오빠들이 누이의 모델 노릇을 방해할까 봐 미리미리 그려 두었는지도 모른다. '끊기지 않는 몽상'의 상태에 놓인 모델을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파악하는 시간이 지난 뒤 마티스는 처녀를 러시아 성화에 등장하는 성모의 이미지로 변형시켰다.

전쟁이 고조되었을 무렵, <금붕어와 팔레트>(1914)는 화가의 작업이 능동적이며 건설적인 내용임을 만천하에 알렸다.

1913년 5월, 사진가 알뱅 랑동 코뷔른이 이시레물리노 화실에서 대작 <강가의 물놀이>(맨 아래)를 그리고 있는 마티스의 모습을 잡았다. 마티스가 1909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이 그림은 1916년에 가서야 완성되었다. 그림의 건축적 형태는 입체파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에 화답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강조점은 분명히 장식적 원시주의에 놓여 있다. 슬그머니 들어오는 뱀을 보고도 꿈쩍하지 않는 이 세잔풍의 인물들에서는 퓌비 드 샤반과 로댕의 영향력도 감지된다.

1914년 마티스는 피카소를 더욱 자주 만났고 후안 그리스와 가깝게 지냈다. 아내 조제트와 함께한 후안 그리스.

1914년 초에 비평가 모리스 레날의 아내 제르맨이 <높은 걸상 위의 여인>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알베르 랑스베르는 뒤에 <이본 랑스베르 양의 초상>(1914)-처음에는 동판화로 제작되었다(아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누이가 모델이 되었던 첫날에는 그림 속의 인물과 모델이 아주 비슷했지만, 점점 그림이 추상적으로 바뀌었다. …… 작업이 계속 진행될수록 그림 속의 인물은 육체적으로는 누이와 점점 다른 모습을 띠어 갔지만, 나는 거기서 누이의 영혼을 읽을 수 있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처음부터 색채는 탁월했다. 표면을 가로지르는 신비로운 하얀 선들의 바탕을 이루는 강청색(鋼靑色), 철회색(鐵灰色), 검은색, 주황색, 흰색이 인상적이었다." 마티스는 나중에 이 선들은 "공간에서 차지하는 폭을 넓히기 위해 내가 인물 주위에 마련한 구조적인 장치였다."고 말했다.

미술평론가 펠릭스 페네옹(스위스 화가 펠릭스 발로통이 그린 모습)은 마티스의 오랜 후원자였다. 마티스가 1909년 9월 베르냉 화랑과 계약을 맺은 것도 페네옹의 소개 덕분이었다.

"우리는 리얼리즘 운동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마티스는 1909년에 말했다. "리얼리즘 운동은 약간의 원자료를 확보했다. 자료는 준비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그것을 조직하는 대대적인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마티스의 눈에 들어온 입체파의 중요성은 <얀 다비드스츠데 햄의 '식탁'을 닮은 정물>(1915)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브라크와 드랭이 전선으로 떠난 뒤 착잡한 심정에 빠졌던 피카소는 전통에서 위안을 찾앗다. <작업실의 화가>(1916)에서 마티스는 자신이 2년 전부터 탐구하기 시작한 형태적 단순성을 더욱 밀어붙였다. 전쟁중에도 화가와 모델 사이에 오가는 정감 어린 대화는 계속되었다. 분명히 각도는 예각으로 변했으며, 전망이 단절되어 있고 천장이 낮은 비좁은 방은 대조적인 부분들로 분할되었다. 그러나 비록 몸은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화가가 전하려는 중심 메시지는 여전히 살아 있다.

<피아노 교습>(1916)에서 마티스는 젊은 초심자이건(피아노 앞에 앉은 그의 아들 피에르처럼) 원숙한 경지에 올라 있건 모든 화가가 당면해 있는 가장 큰 과제는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다.'라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제5장

"내 몽상의 대상"

 

"모든 게 거짓말 같고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고 매혹적이다." 마티스는 1917년 말 니스에서 묵었던 호텔방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호텔 방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던 장식성은 그가 남태평양으로 떠날 때까지 마티스의 작품세계를 지배한다.

 

앙리에트 다리카레르는 <장식적 배경 위의 장식적 인물>(위, 1925~1926)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림이라는 공간 안에 대상으로 묘사된 익명의 모델로만 머물지는 않았다. 그 자신이 화가이며 음악가였던 다리카레르는 그림이라는 극장에서 마티스와 협연했으며(아래, 1921년 작업실에 함께 있는 두 사람), 그의 모델 중에서도 남다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고 거리를 둠으로써 마티스는 고독과 함께 찾아오는 내밀함을 다시 포착할 수 있었다. <자화상>(1918)에서 화가의 과장된 엄지와 삐죽 솟은 붓은 그의 잠재된 창조력을 상징한다.

마티스는 한때 <바이올린이 있는 실내>(1917~1918)를 '가장 아끼는 그림'이라고 했다.

마티스는 1918년 <창가의 바이올린 주자>를 그렸다.

마티스는 카뉴쉬르메르 부근에 있던 노화가 르누아르의 레콜레트 별장을 방문했다. 사진 윗줄 가운데에 마티스가 있고, 그의 왼편으로 마티스의 아들 피에르와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보인다.

"모자에 타조 깃털을 단 젊은 여인의 초상화를 보라." 마티스는 <깃털 모자>(1919)를 가리키면서 말햇다. "깃털은 하나의 장식이며 장식적 요소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깃털은 연장(延長)을 만지면 느껴질 듯한 가벼움을 지니고 있다. 훅 불면 날아갈 듯한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느낌……. 나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한꺼번에 전달하고 싶었다. 내가 하나의 주제 앞에서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집약해서 보여 주고 싶었다."

앙리에트 다리카레르와 마르그리트 마티스는 <무어 병풍>(위, 1921)의 모델이었다. <정원 다과회>(아래, 1919).

세르게이 디아길레프(1916).

미켈란젤로의 <밤>(위)은 마티스의 <대형 나부 좌상>(아래)에 영감을 주었다.

수많은 오달리스크를 그렸던 작은 무대에서 앙리에트 다리카레르를 그리고 있는 마티스. 그는 알록달록하고 울긋불긋한 커튼을 잘 활용했다.

세 점의 '머리 표현' 연작 중 가장 뛰어난 두번째 작품 <앙리에트 Ⅱ>(1925~1926).

<터키 의자에 기댄 오달리스크>(1927~1928). "이 오달리스크들을 자세히 보라."고 마티스는 썼다. "현란한 햇살이 밀려 들어오고 있다. …… 이제 실내의 동양적 장식, 커튼과 양탄자의 배열, 화려한 의상은 …… 우리를 속일 수 없다. …… 커다란 긴장이 끓어오르고 있다. 그것은 다양한 요소들의 상호작용에서 야기된 특스한 그림의 질서가 낳는 긴장이다."

마티스는 남태평양으로 떠날 때 미처 끝내지 못한 <노란 드레스>(1929~1931)를 니스로 돌아온 다음 마무리했다. 여행은 새로운 요소를 이 그림에 덧붙여 주었다.

 

제6장

완전한 통일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창작자가 자기의 삶을 작품에 불어넣는다는 점에서는 말이다. 그때 예술품은 마치 자연물처럼 풍요하고 보는 이를 전율로 몰아넣는 힘 - 그 눈부신 아름다움 - 을 가진 것으로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마티스는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954년에 가진 한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위대한 사랑이 필요하다. 진리를 향한 그 끈질긴 탐구, 그 타오르는 열기, 모든 작품의 탄생에 필수적인 그 분석의 깊이를 고취시키고 유지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그런 사랑이.

니스 레지나 호텔의 화실에서 작업에 몰두해 있는 마티스(위, 1952). 1948년에 그린 어느 책의 삽화. 담배항아리 속의 꽃(아래).

니스의 빈 차고에서 <춤>의 초기 미완성작을 스케치하고 있는 마티스(위, 1931). 마티스는 최초의 완성작(아래)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그가 완성한 벽화는 1933년 반스 재단 중앙 홀에 설치되었다. 이 홀에는 이미 세잔의 <카드 놀이 하는 사람들>, 르누아르의 <화가의 가족>, 쇠라의 <모델들> 등 주옥 같은 걸작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빛이 잘 드는 곳에 설치된 마티스의 벽화는 홀 맞은편에 있는 두 개의 발코니와 회랑 바닥에서 볼 수 있었다-마티스에 따르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마티스는 "벽화가 홀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홀에 전시된 그림들에게 숨쉴 수 있는 공간의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세심한 신경을 썼다.

<춤 벽화를 위한 습작>(1930~1931). 초기의 작은 유화 습작으로 미완성상태에서 둘둘 말려 한곳에 치워져 있다가 1992년에야 재발견되었다.

1935년 5월에서 10월까지 마티스는 오려 낸 종이들로 공간과 색채의 '양적'조화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누워 있는 대형 나부 / 분홍색 나부>를 제작했다. 여러 달 동안 작업이 계속되면서 애초에 실제 모델에 바탕을 두었던 자연주의적 중간그림들은 장식성이 돋보이는 기념비적 작품인 최종작(아래)으로 발전했다. 화가는 이 작품의 발전과정을 사진에 담아 두었는데, 완성까지 모두 20여 단계를 거쳐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위 사진은 마티스의 비서 리디아 델렉트로스카야가 1935년 10월 15일이라고 적혀 있는 중간그림을 지우고 있다. 미완성작 <타히티의 창가 Ⅰ>이 그녀 뒷벽에 걸려 있고 <동 Ⅳ> 석고상이 배경에 놓여 있다.

"<숲 속의 님프>는 원래 태피스트리를 위한 디자인으로 구상되었다. 애초에 그림의 주제는 말라르메의 시집을 위해 1931년에 제작된 동판화였는데, 그때는 구도가 거꾸로였고 인물도 등장하지 않았다." 리디아 델렉트로스카야는 이렇게 증언했다.

<음악>(1939)에서 마티스는 1930년대에 즐겨 쓰던 방법을 다시 도입하면서 기존의 주제를 확장하고 있다. 전에는 엘렌 갈리친 혼자서 기타를 치고 있었지만 여기에는 두번째 인물이 추가되었던 것이다.

마티스가 걸상에 올라가 <숲 속의 님프>를 그리고 있다(1941). 그림 속의 나무줄기가 방공 탐조등이 내쏘는 빛줄기와 비슷하다. 세계는 온통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피리를 든 님프와 파우니>(1940~1943).

1939년 8월 파리에서 완성된 <검은 배경의 책 읽는 여인>.

<파란 여인>(1937)에서 리디아 델렉트로스카야는 러플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다. 그해에 마티스는 러플이 달린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자주 화폭에 담았다.

마티스는 친구에게 <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나는 어여쁜 루마니아 블라우스를 발견했지. 공주나 입었을 법한 빛바랜 붉은 장식이 달린 블라우스 말이야. 그런 블라우스를 더 구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가 아끼는 그림과 바꾸었을 거야. 이 그림을 완성하는 데 1년이 걸렸다네.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대충대충 그린 것으로 착각할지 모르지만 말이야."

1939년 파리의 작업실에서 모델 빌마 자보르를 스케치하고 있는 마티스. <검은 배경의 책 읽는 여인>에도 그녀가 등장한다. 마티스 뒤편으로 그가 눈을 감고 그린 자화상이 보인다.

1938년 11월. 마티스는 레지나 호텔로 작업실을 옮겼다.

"요즘 들어 내가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그림이다." 1941년에 마티스는 <목련이 있는 정물>을 이렇게 평했다. 부분에 따라 색채에 따라 이러저러하게 인쇄효과가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꼼꼼하게 손수 써서 《베르브》지 제판공에게 보낸 작업지시서는 이 작품을 그가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를 알려 준다. "(중앙의 화병) 왼쪽 손잡이는 베네치안 레드에 검정 윤곽선, 오른쪽 손잡이도 베네치안에 검정 윤곽, 바닥은 황토색과 흰색, 주전자 바닥은 진홍색으로 그러데이션을 주고 부드러운 선황색을 한 겹만 입힐 것."

1942년 9월 26일부터 마티스의 간호사로 일하기 시작한 모니크 부르주아는 곧 마티스의 수많은 그림에 등장한다. <우상>은 1942년 12월에 그려졌다. 마티스는 그녀가 자크 마리라는 이름을 받고 수녀가 된 다음에도 "장난기 섞인 연애"를 즐겼다. "마치 둘이서 꽃송이를 던지고 받으며 노는 것 같았다."고 마티스는 술회했다. 두 사람의 다정한 관계는 방스 성당을 지을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방스 성당의 <십자가의 길>(위)을 위한 밐그림은 "샘솟는 영감의 도움을 받아" 불과 두 시간 만에 그려졌다. 아래 사진은 아직 완공되지 않은 예배당에 앉아 있는 마티스.

얼굴없는 성자의 모습으로 정신적 고행을 상징하는 <성 도미니코> 벽화의 착수에 앞서 수많은 습작들이 그려졌다. 어떤 것은 작업실 벽에 실물과 똑같은 크기로 그려지기도 했다. 마티스는 도미니코 수도회의 전통에 어울리는 성자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다양한 시도 끝에 도미니코 수도회의 이상이 가장 잘 반영된 형상을 창조할 수 있었다.

만년의 마티스는 커다란 채색지에다 가면처럼 생긴 얼굴을 수없이 많이 그렸다(<가면>, 1950). 그는 이 그림들을 화실 벽에 오려 붙인 종이들 사이에 걸어 유기적 모티프를 구성했다.

<푸른 나부 Ⅳ>(1952)에 보이는 목탄 선은 1951년 9월에서 1952년 6월 사이에 그린 일련의 종이 누드에도 등장한다. 이것은 이 작품이 많은 준비단계를 거쳐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끝없는 성장과 발전의 과정이 생명을 더 높은 단계로 고양한다고 말했다. 베르그송이 말한 엘랑 비탈(elan vital), 곧 생명력을 표현한 <다발>(1953)은 분명 활력으로 용솟음치고 있다.

<재즈>에 나오는 <광대>(1947).

발로리의 라갈루아즈 집에서 포즈를 취한 피카소와 프랑수와즈 질로(1951).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마티스의 사진(1944).

니스 레지나 호텔에서 마티스가 키우던 새. 평론가이자 시인인 앙드레 베르데가 레지나 호텔을 방문한 뒤 이렇게 썼다. "그 커다란 방에는 모두 300마리가 넘는 새가 있었다. 잉꼬, 개똥지빠귀, 비둘기, 그리고 흔히 볼 수 없는 희귀조들이 살고 있었다."


 




posted by 황영찬
2015. 2. 13. 14:47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18 만인보 


高銀

1996,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798


811.6

고67만  10


창비전작시----------------------------------------------------------------------


큰 명제에 대한 시대적 일탈이 여기저기서 눈여겨지는 때에 시와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이 있어야겠다. 그것은 근원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뜨겁게 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접어두고 나서 나는 그 이념의 혐의와 상관없이 먼저 인간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이나 사회 · 역사 · 문명 전반에 대한 통합적 인식이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는 사실에 새삼 눈떠야 했다. 인간의 실존적 정화 내지 승화만이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고비들을 넘기는 일의 시작이라는 것도 거기에 포함된다.

세상에 어디 '시적 인간'의 가능성이 그 싹수마저 보이고 있느냐라고 고개를 젓지 말기 바란다. 바로 이런 판에서 시인보다 먼저 시적 인간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므로.

다만 그런 인간에게서 메시아적이기보다 연인적이기까지 한 친화를 경험하는 것이 창조의 축복과도 닿아 있을 터이다.

「머리말」에서


고은(高銀)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눈길」「천은사운」 등을 추천받아 등단.

1960년 첫시집 『피안감성』 간행. 이후 시 · 소설 · 수필 · 평론 등에 걸쳐 100여 권의 저서 간행.

1984년 『고은시선집』 간행.

1986년 『만인보』 간행 시작

1987 ~ 94년 서사시 『백두산』 간행.

제3회 만해문학상, 제1회 대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등 수상.


차례


머리말

함석헌 / 전태일 / 육영수 / 늙은 절름발이 / 우의정 한효순 / 이소선 / 김대중 / 차인출 / 윤반웅 / 증  살 / 계훈제 / 이상훈 / 이돈명 / 문재린 / 설  총 / 김수환 / 천관우 / 안국동 / 서대문 현저동 노인 / 허병섭 / 장준하 / 이인영 / 선우휘 / 관철동 삼일여관 / 박고석 / 서울역 지게꾼 / 원각사 행자 / 정연주 / 이우성 / 이문영 / 유일한 / 공중변소 낙서꾼 / 마니산 참성단 / 이응로 / 정경화 / 윤이상 / 지명관 / 김이옥 / 강원룡 / 두 의사 / 강운구 / 오종우 / 산중 혁명 / 황인철 / 문국주 / 대원암 탄허 / 막걸리반공법 / 서경덕 / 이해학 / 장기표 / 김  윤 / 연산군 / 함세웅 / 남정현 / 안병무 / 박난주(朴蘭州) / 길진섭 / 대전발 0시 50분 / 봉천동 이씨 / 노동자 김진수 / 청진동 옥자 / 안수길 / 지석영 / 정구영 / 칠보 들노래 / 홍성우 / 대법정 정리(廷吏) 김두식 / 고영근 / 곽태영 / 김홍도 / 권호경 / 김승훈 / 최일남 / 홍남순 / 강세황 / 가짜 문둥이 / 화곡동 수리공 / 이종찬 장군 / 유진오 / 신상초 / 최정호 / 신선시 / 이규태 / 오충일 / 정경모 / 김정한 / 김숭경 / 유원식 / 문익점 / 박명호 / 박철웅 / 박철웅 / 목요상 / 만일제 / 박목월 / 고상돈 / 정태기 / 이희승 / 고선지 / 김종철 / 낭만 아가씨들 / 광주 조아라 / 차순이 / 대왕암 / 김윤수 / 김병곤 / 청계천 뚝방 홍씨 / 김지하 / 성삼문 / 소년수


함석헌


하얀 머리칼 나부낀다

찬바람 분다

하얀 수염 나부낀다

찬바람 분다


오로지 섭리의 역사

하얀 두루마기

하얀 고무신

성큼 한걸음 나서노라면


거기가

이 나라의 갈숲

하얀 갈꽃이 소리쳐 피어오른다


집안에는 깨어진 꽹과리 따위

대야에 담긴 얼음 따위지만

세상에 성큼 나서노라면


그에게는 끝내 글이 없다

있는 것은

어제도 오늘도허위허위 쉬지 않는 말


이 나라의 수고 많은 하늘 아래

그의 뒷모습까지도 말이었다

하얀 머리칼 나부낀다

찬바람 분다


전태일


그의 죽음은

너의 시작이었다

나의 시작이었다

하나 둘 모여들어

희뿌옇게

아침바다의 시작이었다


그는 한밤중에도 우리들의 시작이었다


육영수


1974년 8월 15일

그녀는 국립극장 단상에서 쓰러졌다

한 송이 백목련이라고

한 마리 날개 접은 백학이라고

그녀의 죽음은 고개 숙여 받들어졌다


그 정치적 산화(散華) 이후

남편은 황량한 때를 말갈기로 달렸고

딸들과

아들은 하나하나 고아가 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성난 성장에 바쳐진 슬픈 가족이었다


그녀는 드물게 영롱한 새소리로

하얀 이빨 시려

불행을 돕는 마음을 일으켜 행복했으나

그 새소리는 더이상 들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꽃도 새도 아닌 백자 항아리로 말이 없다

그해 8월 15일 이후


김대중


고난이 필요한 시대 그는 고난의 화신이었다


일본 수도의 한 호텔 안에서

토막져 죽어야 했다가 살아났다

현해탄 복판에 던져져

물귀신이 되어야 했다가 살아났다


71년 대통령선거에서

아슬아슬하게 졌다

그의 파도치는 웅변이

1백만 인파를 지진처럼 흔들어댔다

그는 혼자서도

1백만 인파였다


그로부터 박정희는 이를 갈았다


70년대 전 기간 그는

그 극한의 고난 가운데서도

밤새워 책 읽고 영어 개인교사를 드나들게 했다


모든 준비를 다 마쳤다

친지와 의논할 때도

라디오 FM 틀어놓고

도청을 막아가면서

모든 준비를 다 마쳤다

하지만 오직 하나

그가 바라는 것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아직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뒤의 어떤 고비에도

그는 삶을 겨자씨만치도 허비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녕 70년대 한국 국민은

한국에서 가장 정밀한 그를 모르고 살 수 없었다


김수환


1969년 한국 천주교의 첫 추기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쓴 빨강 스컬캡은 신앙에 앞서 명예였다

그러나 가장 겸허한 사람이었다

70년대 이래

그는 한번도 분노를 터뜨리지 않아도

항상 강했다


그는 행동이기보다 행동의 요소였다


하늘에 별이 있음을

땅에 꽃이 있음을

아들을 잉태하기 전의

젊은 마리아처럼 노래했다


그에게는 잔잔한 밤바다가 있다

함께 앉아 있는 동안

어느새 훤히 먼동 튼다


그러다가 진실로 흙으로 빚어낸 사람

독이나

옹기거나


장준하


경기도 포천군 이동 약사봉 아래

장준하가 추락한 곳은 으슥하다

그의 죽음보다

그의 의문 없는 삶이 먼저 떠오른다

난초잎새 같은

머리칼 쳐올려 깎은 흰 얼굴

그 어디에

큰 간담 있음을 내색이나 하겠는가


임시수도 부산에서

미국의 후원으로 월간지를 창간했다

하기야

광복군 시절의 OSS 인연에 이어

USIS 인연도 있을 법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야릇하다

한국 지식인들의 역사의식 저항의식까지

파고들었다

북한에서 태어나

남한에 사는 계몽지식인들이 뭉치는 쎈터를 후원했다


발행인 장준하는 아내와 함께

잡지를 찍어

리어카에 싣고

서점마다 돌리기도 했다


김준엽 노능걸 들과

중국 서주에서

멀고먼 사천 중경까지 갔던 사람

가서 김구 주석의 가난한 환영을 받았던 사람


박정희더러

밀수왕초라고 마구 공격하던 사람


박정희 3선개헌 반대의 싸움을

앞장서서 이끌다가

그의 죽음으로도

싸움을 이끌었다


선우휘


선우휘 신상초 고정훈

이 서북의 사나이들

서북지방 기독교와는 동떨어져

술 한번 마셨다 하면

바지 저고리

다 벗어던지고 마셨다


우리에게는 남은 사진 한 장이 있다

한국전쟁의 1 · 4 후퇴 당시

평양 대동강 철교 가득히

남으로 남으로 피란민 건너는 광경이다

온통 흰옷뿐

흰옷밖에 입을 줄 모르는 사람뿐


바로 그들의 피란을 이끌었던 사람

1950년대 휴머니즘은

거기서부터였다

1950년대 전후 휴머니즘 문학은

거기서부터였다


육군 대령 선우휘

그는 군복 입은 전후의 작가였다

후방의 음울한 작가 손창섭

짚차 달려 자갈 튕기며

전방의 작가 선우휘


훨씬 뒤 마당에는 명아주 따위 잡초 우거지도록 방치했다

그 잡초야말로 그에게는 꽃이었던가


유일한


1970년에 20프로의 한국인 한 사람이 죽었다

9세에 미국으로 떠났다가

그곳에서 고학생이었다

어느 만큼 애국자였다가

돌아와 유한양행을 차렸다


20프로의 한국인으로

80프로 이상의 한국을 꿈꾸었다

모든 것을 돌려주었다

그의 딸에게도 주지 않고

세상에 돌려주었다

단 한푼도


물질이 소유의 것이 아니라

공공의 것이었던 바가

태초이거늘


이응로


동백림사건으로

고국에 왔다

고국의 중앙정보부에 왔다

고국의 대전교도소에 왔다


웬일인지

감방에서 붓과 페인트를 구할 수 있었다

4 · 6배판 정도의 책만한

베니어판이면 되었다


거기에 뚝 멈춰선 황소를 그렸다

정지된 분노와도

발기된 성기의 화석과도 같았다

한 송이 꽃도 그렸다


대전교도소 사상범 사방

겨울의 철창을

비닐로 막았다 하나

방안은 영하의 냉방

손 곱아

붓이 잡히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여

붓을 잡았다


가까스로 봄이 와 꽃이 피었다

베니어판 위

그리하여 빠리로 돌아간 뒤

그의 한지 묵화

그의 상형문자 묵화

그의 민중무한 묵화

그것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졌다


그 육중한 대머리에

모락모락 김이 났다

으스스한 빠리 교외의 겨울에도

보리밭처럼

보리밭 위 종달새처럼

조국이 녹아들어

질척거렸다


정경화


전란이 지나간 뒤

엄마는 어린 딸을

사랑하는 딸을

바이올린으로 만들었다


만들어지는 단련과

이미 만들어진 천재가

길고 긴 미로를 통과했다


한국이 인권 없는 나라 서열 8위일 때

코리아게이트의 추악으로 들끓을 때

그런 나라에서 피어난

화려한 꽃이었다


기립박수 속에서

그의 바이올린 연주는

한국의 성층권에서

세계의 대기권으로 내려갔다


윤이상


가서 동양을 펼쳐라

바다 밑 용왕으로부터 명을 받았다

한 마리 다친 용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렇게 떠났다


그 용이 광복절 초청의 이름 아래

잡혀왔다

그 용이 감방 벽에 쇠붙이에 머리를 치받았다

타살을 거부할 마지막 자결의 힘으로

쏟아지는 피로 유서를 썼다

아들아 나는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러움 없다 간첩 사건은 조작이다……

그는 죽어가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무기수의 겨울이었다

떠다 둔 식수가 얼어버리는 감방에서

용은 웅숭그린 채

담요 둘러쓰고

엎드린 채


양자강 언저리 장주(莊周)의 나비를 꿈꾸었다

그의 5선지는 살아났다

천둥 치고

무너지고

그리고 적요했다


세계는 그의 음악을

정장(正裝)의 경건성으로 받들었다

말러 이후인가


장기표


그의 순정은 사명이었다

무엇인가를 말해야 했다

혼자일 때도

그는 마음속에서

말해야 했다

말하는 동안

그에게는 기쁨조차도 슬픔이었다


1977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서울구치소

3사 상 감방에서

나는 그대를 만났지

그대는 항소심이고

나는 1심이었지


추운 날 손가락 펴가며

묵사지에

골필 항소장을 쓰고 있었지


어머니는 항상 전태일의 어머니였지

그의 몸 90퍼센트는 꿈

나머지 10퍼센트에

아내와

어린 두 딸이 있다


고등학생 때는 산사에 들어갔고

대학생 때는

시대의 최전선에 섰다

하얀 낮

머루 눈

나막신 소리 같은 목소리

정치와

인간을 혼동하는 정신

그대는 그렇게

시집가는 신부의 다홍치마였지


함세웅


한국의 천주께서는

참 깨끗한 아들 하나를

거룩한 볼모로 삼으셨나이다

너희들

너희들

이 사람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거든

나를 함부로 망각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하얀 칼라 제복의 여고생들이

저쪽으로 가고 있다

저쪽에서 천주의 아들이 혼자 오고 있다

가고 오고

그 아들은 파란 하늘에 물들어 있다


맑은 얼굴

맑은 눈

비온 뒤라면 무지개 걸려


그러나 독재나 어떤 잔재 따위에는

진흙탕 싸움을 사양할 수 없다

그 아들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지(知)와 신앙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도시의 신부다 두메로 가면 안 된다


지석영


사람들은 그의 종두법에 의하여

팔뚝에

우두를 맞기 시작하였다

사내든

계집이든

팔뚝 윗부분에

우두자국 흉터가 달빛에 드러나며 번쩍거렸다


켈로이드 체질의 우두자국은

바야흐로 꿈틀대다 멈춘 버러지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이 또 하나 있다

어려운 한문 버리고

쉬운 한글을 쓰자 하였다

쉬운 한글 가로쓰기로 쓰자 하였다


이것은 그 무렵 일본의 영어교도 모리가

한자는 물론이거니와

아예 일본어를 버리고

영어로 말하고

영어로 쓰자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최일남


술 취하면 노래 열 개 스무 개가

줄 서서 흘러나오지만

하늘의 별들이

땅 위의 노래를 위하여 깜박인다

별이기보다

먼 등불인 양


지극히 정다우나 지극히 어꾸수하나

지극히 공적인 사람

한번도 찬란한 적 없으나

어느 곳도

헛디딘 곳이어서는 안되었다


그는 그의 과녘 적중을 자랑하지 않는다

세월이 갈수록

그는 무서운 사람이어서

날 저물어

추운 개울물 건너

타락을 모르는 무서운 사람이어서


우리나라가 아주 망해버리지는 않을 터


홍남순


광주에 가면 홍남순 옹이 있다

무등산이 있고

무등산이 내려보는 곳에

홍남순 옹이 있다


그런디 그것이……

송충이 같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반대라기보다

그저 언짢은 듯이


그 눈썹 그 머리가

몇년 뒤

하루아침 하얗게 셀 줄이야

어디에도 판사인지

변호사인지

그런 자취 도무지 없이

그저 마을 좌장으로

조끼 입고

조끼 단추 다 끼고

팔짱 끼고 앉아


그런디 그것이……

광주시 북판 궁동

그의 집 겸

그의 사무실 사랑방이야

하루 내내

이 사람 저 사람

드나들어

발 고린내도 남아 있다


그런디 그것이……


유진오


일본제국 헌법과 독일 바이마르 헌법을 본떠

법률유보 아래 자유권을 두어

양원제

의원내각제로 원안을 만들었다

이른바 유진오안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

국회 단원제로 뜯어고쳐

사실상 제헌헌법은 누더기 개헌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초안을 고친 것이기보다

헌법 전문위원 유진오나 권승렬을 뛰어넘어

이승만의 전횡이었다

그 전횡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 대한민국 헌법만큼

남루한 세월을 살아온 것도 없으렷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헌법에는

본래의 알속 빠진 이로니

으레 유진오의 이름이 따라다닌다

소설가

대학 총장

야당 총재

그리고 대통령후보가 되기도 한다

한동안 프랑스 요리도 즐기면서

막걸리를 통 몰랐다


곱게

곱게 마고자 입고

등줄기 서늘히 등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한 사람의 귀족이 된 이래

중년 이래 저 건너 가난을 몰랐다


이규태


1930년대의 아이

1940년대의 어린이 그대로 촌사람이다

진안 장수

산골 촌사람이다

그런데 지구의를 돌려보아라


지구의 어느 구석

거기에는

반드시 그의 발자취가 있다

심지어 네팔 카트만두의 초밥집에도

그 초밥집 주인 성씨 김(金)이

한국 김씨의 한 자손임을 밝혀내는

그의 발자취가 있다


그래서 한반도 천년의 삶

켜켜이 쌓인

그 먼지투성이 가운데서

이윽고 한 마리의 새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투박하기는 막걸리 뒤의 모주인가

대학도 제대로가 아니었다

전후 클래식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그 뒤로는 언론인으로

사실과 상상을 묶어버려

어느 것이 상상인가


어디까지가 이규태인가


목요상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의 시대

흑암의 시대

그 흑암에 맞서

사법부의 기상을 떨친

한 판사가 있었다

끝내 법복을 벗었다


어느 시대란 어느 인간을

서론에서

각론으로 옮겨놓는다

젊은 판사는

사법부에서

입법부로 옮겼다


그러는 동안 이 나라의 사법부는 없어졌다

대법원장실에는

역대 대법원장의 사진 대신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목요상

그는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더 이상

지난날의 기상은 떨치지 않았다


인간은

한번만의 절정에서 내려가는 것인가


박목월


청록파 3인이라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이라


타고난 서정파라

인생파라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일제시대는

형산장 기슭에서

금융조합 다니느라

긴 포플러 길을

자전거 타고 다녔다


발은 유난히 크고 미욱했지만

손은 두꺼웠다

눈은 늘 서늘했다

시는 연필로 썼다


그러다가 대통령 부인이게

한동안

매주 한번씩

시 이야기를 들려준 일로


시인들

시집 낼 돈을 얻어

여러 시인들 시집 냈다


시집 뒤에는

어느 고마우신 분의 도움으로

이 시집을 냅니다라는

팻말이 박혀 있었다


그 뒤 그녀가 죽은 뒤

그 전기 써서

동작동 무덤에 가서 봉정했다

딸 근혜와 함께


아마 그 전기 밑글은

싼 원고료 받고

박재삼이 썼다던가


미리 묻힐 데

부인과 함께 정한 뒤

먼저 묻혔다

묻혀

달에 구름 가는가


고상돈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정상에 태극기가 꽂혔다

스물아홉살의 사나이가

그 태극기와 함께

그곳에 서 있었다


힘만이겠는가

뜻만이겠는가

운명만이겠는가


그 정상은 지상이 아니었다

몇만년 이래

모든 사람에게

그 정상은 천상이었다

지상에서는

먼 옛날 12세 소년 주몽이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쳐

해씨에서

고씨로 성을 바꿔

풀지붕 띳집궁궐로 나라를 세웠다

고구려 동명왕이었다

그런 뒤 오늘에 이르러

고상돈이

에베레스트에 오른 것

이제 그는

더이상의 일이 없어야 한다

동북아시아 한반도의 태극기들이

에베레스트 정상의 태극기와

함께 휘날리는 동안


이희승


키가 작아

서울의 북악

남산 낙산

아니 인왕마저

함께 키를 낮춘다


곱게

가을 햇빛에 물들어

곱게 곱게

쪼글쪼글한 대춧빛

그 대추 속

단단한 씨들이

그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다


평생 욕도 못한 입

화내거나

떠벌리거나 해보지 못한 입에

밥 한 숟갈 넣어

50번은 씹어 넘긴다

딸깍발이 선비라 하지

모두들

딸깍발이 선비의 나막신이라 하지

모두들


그는 모국의 말과 글에 파묻혔으나

무슨 큰 학문이나

큰 사업도 없이

더러 시조도 썼고

벙어리 냉가슴

수필도 썼다


어김없이 반독재 반열에 은근히 이름을 올렸다

세상 떠날 때도

요란한 기적소리 없었다

보리밭 노고지리도 울지 않도록


김지하


70년대 김지하

한국의 도처에 그가 있었지

세계의 도처에 그가 있었지

드디어 감옥 7년

그 7년은 70년이었지

그의 감방 앞에는

볼품없는 화분 하나 놓여 있었지


그 무상대도 젊음 다 바쳐





posted by 황영찬
2015. 2. 11. 11:44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17 명화의 거짓말 - 명화로 읽는 매혹의 그리스 신화

 

나카노 교코 지음 | 이연식 옮김

2011, 북폴리오

 

 

시흥시대야도서관

SB066606

 

654.2

나872ㅁ

 

명화가

건네는 말을

모두 믿지 마라!

 

"현대인은 흔히들 유명한 회화는 진지한 예술가가 진지한 예술적 태도로 완성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땅히 옷깃을 여미고 감상해야 하고, 발표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모두가 옷깃을 여미고 보았을 것이라고……."

 

루벤스, 클림트, 틴토레토, 보티첼리 등 최고의 화가들은 그리스 신화를 어떻게 읽어 냈을까? 그들이 그려 낸 신들의 드라마는 모두 진실일까?

교양과 문화 전반의 해박한 지식과 블랙 유머가 담긴 독특한 시각으로 유명한 『무서운 그림』의 나카노 교코가 이번에는 모든 드라마의 원형인 '그리스 신화'를 이야기한다.

곤두박질치는 이카루스를 주변 인물들이 외면하는 이유, 아르테미스의 얼굴이 그 당시 아이들의 모습이었던 까닭, 무시무시한 추녀의 얼굴을 한 운명의 세 여신을 통해 고야가 하려던 말,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이 팜므 파탈로 보이는 이유와 함께, TV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는 그리스 신화를 만난다.

 

나카노 교코 中野京子

와세다 대학에서 독일 문학과 서양 문화사를 강의하고 있으며 다양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오페라로 즐기는 명작 문학』『멘델스존과 안데르센』『나는 꽃과 나비를 그린다 - 바로크 시대의 곤충화가 메리안의 일생(사이언스 북스, 2003년)』『사랑에 죽다』『오페라 갤러리 50』(공저) 등을 썼으며,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국내에는 『무서운 그림(세미콜론, 2008년)』시리즈로 인지도를 높였으며 역사와 문화 전반을 종횡무진하는 독특한 시각의 미술 읽기로 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다.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웹사이트에서 역사 에세이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개인 블로그는 http://blog.goo.ne.jp/hanatumi2006이다.

 

옮긴이 이연식

미술사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과정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일본의 우기요에浮世繪와 양풍화洋風畵에 대한 논문을 썼다. 학부에서는 그림을 그렸고, 현재 미술책 저술과 번역을 병행하며 미술사를 다각도에서 조명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미술 글쓰기를 주제로 강의도 하고 있다.

『미술영화 거들떠 보고서』『위작과 도난의 미술사』『유혹하는 그림, 우키요에』『눈속임 그림』『아트 파탈』을 썼다. 옮긴 책으로는 『무서운 그림』(1권, 3권), 『맛있는 그림』 등이 있다.

 

진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름답다. 하지만, 거짓 역시 그렇다.

- 랄프 왈도 에머슨

 

|목차|

 

서문

신들의 계보

 

                                                                          01 제우스 ZEUS

관능적인 다나에

영웅 탄생

알에서 태어난 쌍둥이

모두가 여자 탓?

 

                                                            02 아프로디테 APHRODITE

천연덕스러운 아프로디테

피그말리온 판타지

합체욕구

여성 육상선수

여자의 육감

봄이 한가득

 

                                                                    03 아폴론 APOLLON

연인을 죽게 하고는

크로노스의 반주

아비의 마음을 자식은 몰라

저승에서의 귀환

 

                                                  04 그 외 신화 THE GREEK MYTHS

어머니의 집념

승산 없는 싸움

처녀의 분노

스스로에게 빠져 꽃이 되다

짜고, 재고, 자른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역자 후기

 

제우스

Z  E  U  S

 

                                                            관능적인 다나에

 

렘브란트 판 레인 『다나에』

1636년, 유화, 185×203cm, 예르미타시 미술관 소장(러시아).

 

- 열쇠를 든 늙은 하녀가 커튼을 열어 황금의 비를 불러들인다.

- 일순, 빛을 거부하는 것처럼 들어 올린 팔, 그 그림자가 복부에 떨어져 다나에의 육체를 더욱 에로틱하게 보이도록 한다.

- 호화로운 실내장식과 가구들

- 캔버스가 손상되어, 빛의 입자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약해지고 말았다.

- 고귀한 용모, 진지한 눈길

- 양손이 묶여 몸부림치며 우는 큐피드는 억압된 사랑을 상징한다.

티치아노 베첼리오 『다나에』

1553년경, 유화, 130×181cm, 프라도 미술관 소장(스페인)

구스타프 클림트 『다나에』

1907년경, 유화, 77×83cm, 뷜토르 화랑 소장(오스트리아)

 

 

- 세기말 팜므 파탈의 상징과도 같은 붉은 머리칼

- 경직된 손가락이 절덩의 느낌을 묘사한다.

- 자궁을 향해 흘러들어가는 황금의 물줄기.

-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검은 네모꼴.

- 클림트의 사인도 금박이다.

 

◐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년)은 신화화, 역사화, 초상화 등 많은 양의 작품을 남겼다. 운명의 장난으로 인생의 전반은 빛, 후반은 어둠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인생의 양극단을 맛봤지만 세속적인 성공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작품은 깊고 탁월해져서 '영혼의 화가'라는 별명이 붙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년)는 장식예술에서 출발하여, 회화에서도 아르누보 양식을 받아들여 장식성이 강한 작풍으로 알려졌다. 빈 분리파의 지도자였다.

 

                                                                     영웅 탄생

 

야코포 틴토레토 『은하수의 기원』

1575년경, 유화, 149×168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영국)

 

- 헤라의 젖이 하늘을 향해 용솟음쳐 반짝이는 별들이 되었다.

- 애인이 낳은 아이가 굶어죽지 않도록, 정실부인의 침실로 날아든 제우스의 필사적인 모습.

- 제우스를 나타내는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발톱으로 전갈 모양의 벼락을 쥐고 있다.

- 공작을 보면 이 여성이 헤라임을 알 수 있다.

- 이곳이 하늘의 궁전임을 나타내는 운해(雲海).

- 그물과 활과 화살, 붉은 허리띠를 지닌 큐피드들.

주세페 아르침볼도 『베르툼누스 - 루돌프 2세』

1591년경, 유화, 70.5×57.5cm, 스코클로스터 성 소장(스웨덴)

 

야코포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 1518~1594년)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의 의뢰를 받아 이 그림을 그렸다. 아르침볼도에게 과일과 야채로 된 자신의 공식 초상화를 그리게 한 것으로 유명한 괴짜 황제인 까닭에 더욱 공을 들였다고 한다.

유쾌한 화가 틴토레토의 본명은 야코포 로부스티. 가업이 염색 가게여서 '틴토레토(염색집 아들)'라고 불리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의 이름에는 이런 식의 이름이 많았다. 프라 안젤리코는 「천사 같은 수도승」, 보티첼리는 「작은 술통」, 마사초는 「뚱보」, 엘 그레코는 「그리스 사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빈치 마을의 레오나르도」 등등. 그 당시 현실에서 화가는 예술가라기 보다 직공 취급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알에서 태어난 쌍둥이

 

페테르 파울 루벤스 『파리스의 심판』

1632-35년경, 유화, 145×194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영국)

체사레 다 세스토 『레다와 백조』(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작)

1515-20년, 유화, 97×74cm, 윌튼 하우스 소장(영국)

 

- 두 개의 알에서 태어난 두 쌍의 쌍둥이들. 앞쪽이 여자아이들이고 뒤쪽이 남자아이들이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풍의 미소와 배경 묘사. 하지만 인체를 스푸마토로 처리한 솜씨는 불완전하다.

- 머리칼이 흐트러진 모습은 장식적이고, 허리를 비튼 모습은 고혹적이다.

- 묘하게도 음험한 눈빛을 띤 이 백조는 한쪽 날개를 레다의 허리에 두르고 있다.

- 배후에는 '재생'을 상징하는 부들이 무성하다.

 

체사레 다 세스토(Cesare da Sesto, 1477~1523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년)의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의 화가다.

 

                                                             모두가 여자 탓?

 

장 쿠쟁 『에바 프리마 판도라』

1550년경, 유화, 97×150cm, 루브르 미술관 소장(프랑스)

 

- 「일찍이 판도라였던 이브」라고 쓰인 명판.

 

- 그리스 형 콧날에 험상궂은 눈길. 오른손은 사과 가지를 든 채 해골에 기대어 있다.

- 왼팔에 감은 뱀. 손으로 덮어 누르고 있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라 '판도라의 단지'다.

- 발가락이 둘로 갈라진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의도적인 걸까?(예로부터 악마의 발은 말의 발처럼 굽이 있다고 여겨졌다)

 

장 쿠쟁(Jean Cousin, 1490~1560년)은 퐁텐블로 파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에바 프리마 판도라」는 그의 대표작인 동시에 프랑스 회화 초기의 완전한 나체화다.

 

아프로디테

 

A P H R O D I T E

 

                                                               천연덕스러운 아프로디테

 

야코포 틴토레토 『불카누스에게 발각된 비너스와 마르스』

1555년경, 유화, 135×198cm, 아르테 피나코텍 소장(독일)

 

- 여성의 알몸이 화면을 대담하게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구도는 「은하수의 기원」과 닮았다.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것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 헤라가 내던져 버렸기 때문이다.

- 창가의 요람에서 자고 있는 큐피드.

- 아내의 바람을 의심하여 얇은 천을 들춰보는 헤파이스토스.

- 헤파이스토스의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것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 헤라가 내던져 버렸기 때문이다.

- 침입자를 향해 짖는 개. 침대 밑에 숨은 아레스는 곤혹스럽기 그지 없다.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3년경, 템페라, 172.5×278.5cm, 우피치 미술관 소장(이탈리아)

 

                                             피그말리온 판타지


장 레옹 제롬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

1890년, 유화, 88.9×68.6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미국)


- 무덤의 부장품이었던 타나그라 인형이 벽 가장자리에 죽 늘어 놓여 있다.

- 갈라테아의 하반신은 아직 희고 단단한 석고이다.

- 벽에 걸려 있는 그림에, 이 장면의 앞 이야기가 담겨 있다(피그말리온이 비너스 신전에서 소원을 빌고 있다).

- 활을 당기는 큐피드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 남자의 굵고 다부진 팔과 여체의 나긋나긋한 허리가 대비된다.

- 피그말리온이 공방으로 뛰어 들어왔음을 옷소매의 움직임으로 알 수 있다.

- 그리스 연극에 사용되는 가면이, 마치 이 사건을 보고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다.


장 레옹 제롬(Jean-Leon Gerome, 1824~1904년)은 들라로슈의 제자다. 일찍이 프랑스 예술 아카데미의 중진이었지만 지금은 그리 높이 평가받지 못한다. 중동과 고대를 무대로 한 역사화를 여럿 그렸는데,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의 알몸은 에로틱한 것으로 유명하다. 틀림없이 그는 살아 있는 여성을 좋아했으리라.


                                                      합체욕구


바르톨로메우스 슈프랑거 『헤르마프로디토스와 살마키스』

1582년경, 유화, 110×81cm,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오스트리아)


- 살마키스의 얼굴과 표정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관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 나무 뒤에 숨어 옷을 벗는 살마키스. 한껏 비비꼰 몸이 에로틱한 분위기를 북돋는다.

- 살마키스가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샘에 발을 담근 채 쉬는 소년 헤르마프로디토스.

- 어두운 나무 그늘을 배경으로 벗어 던진 붉은색 옷이 두드러진다.

- 원근감은 뚜렷하지 않다.


바르톨로메우스 슈프랑거(Bartholomeus Spranger, 1546~1611년)는 네덜란드 출신이지만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공부한 뒤 빈의 합스부르크 가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이윽고 괴짜 황제 루돌프 2세는 궁정을 프라하로 옮기고 슈프랑게르를 초빙하여 수석궁정화가로 임명했다. 프라하는 황제의 취미인 연금술사 · 마술사 · 점성술사가 집결한 '악마의 도시'가 되었고, 성에는 온 세상의 진귀한 물건이 모였다. 슈프랑거는 작위를 받고 황제가 좋아하는 관능적인 신화화를 여럿 그렸다.


                                                 여성 육상선수


귀도 레니 『아탈란타와 히포메네스』

1618-19년, 유화, 206×297cm, 프라도 미술관 소장(스페인)


- 히포메네스의 탄탄한 육체와 달리 아탈란타의 복부는 너무 불룩해서, 빨리 달릴 것 같지 않다.

- 두 사람의 경주를 보는 구경꾼들의 모습이 멀리 흐릿하게 그려져 있다.

- 작은 야생 사과를 두 개째 줍는 참이다. 하나는 왼손에 들고 있다.

- 교차하는 다리. 단순하고 힘찬, 대담한 구도.

- 조각 같은 인체. 하지만 몸에 감긴 천이 휘날리면서 움직임을 나타낸다.


귀도 레니(Guido Reni, 1575~1642년)는 살아 있을 때부터 '돌아온 라파엘로'라고 불리며 17세기 최고의 화가로 칭송될 정도였지만 20세기 들어서 인기가 떨어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재평가되고 있는 분위기다.


                                                                  여자의 육감

 

페테르 파울 루벤스 『비너스와 아도니스』

1638년경, 유화, 197.5×243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미국)

 

- 상반신을 아프로디테라는 '애욕'에, 하반신을 큐피드라는 '사랑'에 붙들린 채, 아도니스는 주저하는 마음을 떨치지 못한다.

- 인물들이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다.

- 활과 화살통은 큐피드의 것.

- 필사적으로 아도니스를 붙잡는 큐피드. 양팔로도 부족하여 자그마한 다리로도 붙들고 있다.

- 보기 드문 무지외반증의 예.

티치아노 베첼리오 『비너스와 아도니스』

1554년경, 유화, 186×207cm, 프라도 미술관 소장(스페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년)는 플랑드르 회화의 황금기를 구축한 천재화가다. 하늘이 그에게 내린 축복을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정도다. 외모, 건강, 장수(長壽), 훌륭한 반려자(게다가 두 사람), 고전에 대한 교양, 여러 나라 말을 구사하는 언어적 소양, 커다란 공방을 운영하는 역량, 외교관으로서의 수완, 그리고 물론 비범한 재능, 이런 데 인격이 원만하지 않으면 이상할 터, 물론 모두에게 존경받고 부와 명예가 빗발처럼 쏟아졌다. 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나 명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인생을 보낸, 화가로서는 매우 드문 예다.

 

                                                                  봄이 한가득

 

산드로 보티첼리 『봄(프리마 베라)』

1482년경, 템페라, 203×314cm, 우피치 미술관 소장(이탈리아)

 

- 낙원 위에 떠 있는 구름을 지팡이로 쫓는 헤르메스.

- 영화의 정지 화면 같은 그림. 여기저기서 갖가지 드라마가 펼쳐진다.

- 삼미신이 걸친 얇은 베일의 묘사는 섬세하기 이를 데 없다.

- 화면에 그려진 풀과 꽃은 190종이라고 한다.

- 성모 마리아와 헷갈리는 아프로디테. 머리 위에는 통통한 큐피드가 눈을 가린 채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 꽃을 흩뿌리는 여성은 변신한 플로라일까?

- 서풍 제피로스의 날카로운 청록색 날개는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4~1510년)는 인생 후반부터 신비적 경향의 종교 세계에 빠져들어 작품의 질이 명백히 떨어졌다. 만년의 10년 정도는 작품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세상에서 잊힌 이유는 이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폴론

 

A P O L L O N

 

                                                         연인을 주게 하고는

 

장 브로크 『히아킨토스의 죽음』

1801년, 유화, 175×120cm, 생트 크루아 미술관(프랑스)

 

 

- 등에 진 화살은 태양 광선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폴론의 지물.

- 저물녘 들판의 아름다운 모습.

- 인적 없는, 이 세상에는 그저 둘뿐.

- 히아신스 꽃은 히아킨토스의 발치에서는 붉다(피를 암시한다).

- 죽음을 가져온 황금의 원반.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히아킨토스의 죽음』

1753년경, 유화, 287×232cm,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소장(스페인)

 

- 이국적인 건물. 그리고 이국의 새인 앵무새, 왼편에 이국풍 의상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도 보인다.

- 패닉을 나타내는 판의 조각상.

- 월계관을 쓴 아폴론. 연인의 죽음으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 둘 사이의 사랑을 나타내는 큐피드.

- 시합하는 동안 복부를 보호하기 위해 두터운 벨트를 매고 있다.

- 창을 든 남자의 양 다리 사이로, 테니스 네트가 보인다.

- 히아신스 꽃에 놓인 테니스 라켓과 공

 

장 브로크(Jean Broc, 1771~1850년)는 신고전주의의 거장 다비드의 공방에 있었다. 이 그림만으로 이름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1696~1770년)는 이탈리아 로코코 최고의 화가다. 왕후 귀족을 위해 신화를 제재로 장대한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 시대 특유의 경쾌함과 우아함, 세련된 색채감각을 보여주었다.

 

                                                            크로노스의 반주

 

니콜라 푸생 『인생의 춤』

1634-36년경, 유화, 82.5×104cm, 월레스 콜렉션 소장(영국)

 

- 네 남녀는 누구일까?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아직 진실은 풀리지 않았다.

-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모래시계를 든 큐피드. 맞은편에는 「인생무상」을 상징하는 비눗방울을 부는 큐피드.

- 태양신 아폴론이 시간의 정령들을 이끌고, 천마가 끄는 황금 마차를 타고 하늘을 내달린다.

- 천상에서도 윤무, 지상에서도 윤무. 시간은 돌고 돈다.

- 커다란 날개를 지닌 알몸의 노인은 시간을 집어삼키는 크로노스.

 

                                               아비의 마음을 자식은 몰라

 

페테르 파울 루벤스 『파에톤의 추락』

1605년경, 유화, 98×131cm,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미국)

 

- 제우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화면 위쪽에서 비스듬히 내려오는 강렬한 광선이, 분노한 신이 내린 번개를 나타낸다.

- 태양의 운행을 수행하는 정령 호라이가 번개에 놀라 벌벌 떤다.

- 28세라는 젊은 나이의 루벤스가 여러 인물이 뒤엉킨 화면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보여준다.

- 갖가지 각도에서 그려진, 날뛰는 일들의 생동감.

-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된 전투용 이륜마차.

피터르 브뤼헐 『이카로스가 추락하는 풍경』

1567년경, 유화, 73.5×112cm, 벨기에 왕립미술관 소장(벨기에)

 

- 이 그림이 브뤼헐의 진작(眞作)이 아니라는 근거 중의 하나는 농민의 발이다. 이대로 걷는다면 말이 나아가는 방향과 직각으로 어긋나게 된다.

- 어부가 낚싯대를 바다로 막 던진 참이다.

- 웅대한 파노라마.

- 양치기도 이카로스에게서 등을 돌리고 엉뚱한 곳을 올려다보고 있다.

-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않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지만, 추락한 이카로스의 양 다리가 수면 위로 나와 있다. 주변에는 새의 깃털이 흩어져 있다.

 

                                                            저승에서의 귀환

 

카미유 코로 『저승에서 에우리디케를 데려오는 오르페우스』

1861년, 유화, 112×137cm, 휴스턴 미술관 소장(미국)

 

- '안개의 화가'로 불렸던 코로다운 서정적인 묘사.

- 나무들 사이로 망자들의 모습이 여럿, 흐릿하게 떠오른다.

- 살아있는 존재가 사라진 것 같은 으스스한 습지의 모습.

- 남편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잠자코 따라가는 에우리디케.

- 월계관을 쓰고 리라를 치켜든 오르페우스는 아내의 손을 끌고 의기양양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귀스타브 모로 『오르페우스』

1865년, 유화, 155×100cm, 오르세 미술관 소장(프랑스)

 

- 바위산에서 목동들이 피리를 분다. 이는 죽어서도 여전히 노래했다는, 오르페우스의 목소리와 리라 소리를 암시하는 것이다.

- 아름다운 얼굴은 리라와 거의 한몸처럼 되었다.

- 헤베로스 강. 이 강을 따라 오르페우스의 목과 리라가 떠내려왔다.

- 트라키아의 처녀가 오르페우스의 목을 거두어 장사지내려 한다.

- 레몬 나무는 비탄을 상징한다.

- 두 마리의 거북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 1796~1875년)는 19세기 최대의 풍경화가 중 한 사람이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림을 팔아 생활하느라 고생하지도 않았고 좋아하는 것만 그렸다. 세 번이나 이탈리아로 공부하러 가는 등 혜택 받은 인생을 보냈다.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년)도 지적인 부르주아 가정 출신으로 코로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유학에서 많은 것을 공부했다. 바깥 세계를 보이는 대로 재현하려 했던 동시대의 인상주의 화가들과 선을 긋고 신화와 성서를 주제로 환상적인 세계를 만들어냈다. "보이지 않는 것, 느끼는 것만을 믿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외 신화

 

T H E  G R E E K  M Y T H S

 

                                                               어머니의 집념

 

프레데릭 레이턴 『페르세포네의 귀환』

1891년, 유화, 203×152cm, 리즈 미술관 소장(영국)

 

- 흰 구름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산뜻한 오렌지색 의상을 걸친 데메테르가 양팔을 벌리고 있다. 풍성한 색채가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를 부각시킨다.

- 날개 달린 둥근 모자를 쓰고 뱀이 휘감긴 지팡이를 든 신은 헤르메스.

- 마치 씨앗에서 나온 새싹처럼 생명을 갈구하며, 동굴(땅 밑)에서 나오려고 필사적으로 뻗은 페르세포네의 창백한 양팔.

- 저승에서 피는, 색이 없는 죽음의 꽃은 바깥 세상에 핀 아름다운 분홍색 꽃과 대비된다.

- 그야말로 땅에 발이 닿지 않은 상태. 아직 반은 죽어 있는 것이다.

 

프레데릭 레이턴(Frederic Leighton, 1830~1896년)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오늘날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25세 때 로열 아카데미에 처음 출품한 「치마부에의 성모의 행렬」을 빅토리아 여왕이 매입한 이래 레이턴은 영광의 길을 내달렸다. 영국 로열 아카데미의 회장 자리에 20년 가까이 있었고 프랑스 학사원 회원이 되어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고 남작의 작위까지 받았다. 그랬던 그가 죽은 뒤 눈 깜짝할 사이에 잊힐 거라고는 본인도 주위 사람들도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잊힌 것은 그림에 파격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것도 저것도 아름답게 그려내기만 해서는 오히려 아름다움은 살아나지 않는다는 비평가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승산 없는 싸움

 

디에고 벨라스케스 『직녀들』

1657년경, 유화, 220×289cm, 프라도 미술관 소장(스페인)

 

- 흡사 인상주의 미술을 예견한 것처럼, 물레가 움직이는 모습을 절묘하게 그려냈다.

- 굴러다니는 실뭉치와 실부스러기, 앉아 있는 고양이, 가난한 맨발의 여성들, 얼핏 보면 그저 직물 공장을 그린 그림처럼 보인다.

- 후경은 마치 무대에서 공연되는 연극 같다. 오른편 끝의 여성은 고개를 돌려 관객들을 쳐다본다.

- 벽에 걸린 커다란 태피스트리에 그려진 것은 유명한 「에우로파의 약탈」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 의자, 첼로, 투구를 쓴 여성……. 작업장에 어울리지 않는 소품과 인물.

티치아노 베첼리오 『에우로파의 약탈』

1560-62년, 유화, 178×205cm, 이자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 소장(미국)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de Silva y Velazquez, 1599~1660년)는 생애의 대부분을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의 펠리페 4세를 섬기며 살았다. 무능한 왕이라고 불렸던 펠리페 4세의 궁정생활이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전해진 것은 오로지 이 천재 화가 덕분이다.

 

                                                                  처녀의 분노

 

프랑수아 부셰 『목욕하는 디아나』

1742년, 유화, 57×73cm, 루브르 미술관 소장(프랑스)

 

- 깊은 숲 속, 인간은 결코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여신의 목욕장.

- 초승달의 머리장식을 단 아르테미스는 그리스 형의 옆얼굴에 프랑스 로코코 문화에서 좋아했던 통통하고 자그마한 알몸이다.

-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지물인 화살통과 사냥개. 화면 오른편 끝에는 사냥한 토끼와 새가 활에 매여 있다.

- 발을 담근 샘물이 투명하다.

- 산뜻한 로코코 블루의 시트 위에 흰 알몸이 앉아 있다.

 

프랑수아 부셰(Francois Boucher, 1703~1770년)는 루이 15세의 공식 총회 퐁파두르 부인이라는 엄청난 후원자를 얻어 수석궁정화가가 되었고, 우아하고 세련된 실내장식가로서도 인기가 높았다.

 

                                               스스로에게 빠져 꽃이 되다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 『나르시스』

1597-99년경, 유화, 116×98cm, 벨리니 궁전 국립고전회화관 소장(이탈리아)


- 거울 같은 수면에 비친 것은 거울상 같이 보이긴 하지만 실은 거울상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허상과 실상의 완전한 대칭.

- 수면에 비친 얼굴을 일부러 모호하게 그렸다.

- 좁은 화면에 나르시스만 달랑 그렸다. 나르시스의 이야기에 필수적인 수선화도 없고 에코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 윗옷의 무늬와 슬릿이 들어간 푸른 바지가 소년이 멋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 젊디젊은 소년의 매끈매끈한 무릎이 아름답다.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1~1610년)는 17세기에 한 시대를 풍미한 바로크 양식의 선구자로 평가 받는다. 강렬한 빛과 어둠의 대비, 이상화를 거부한 생생한 묘사, 그건 마치 카라바조의 인생 그 자체 같았다.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으면서도 행실이 불량하여 마지막에는 살인죄까지 범하고 도망친 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짜고, 재고, 자른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운명의 세 여신』

1821-23년, 유화, 123×266cm, 프라도 미술관 소장(스페인)


- 어딘지 언제인지도 알 수 없는 이 세상 같지 않는 풍경. 흰 줄기는 강일까 호수일까, 아니면 운해(雲海)일까, 알 수가 없다.

- 인간의 목숨을 실로 잣는 클로토. 점토인형 같은 것에 실을 감고 있다.

- 실의 길이를 재는 라케시스. 돋보기를 들고 있다.

- 세 여신에 의해 운명이 결정지어진 인간. 완전히 체념한 걸까, 무표정하고 무감동한 모습으로 떠 있다.

- 맨 마지막에 그 실을 끊는 아트로포스.

- 군중에 떠 있는 모습을 그리는 고야의 솜씨는 발군이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년)가 모이라이에게서 받은 몫은 엄청난 에너지와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5백 점의 유화, 3백 점의 판화라는 방대한 작품은 벨라스케스 풍으로 출발하여 발랄한 로코코 풍을 거쳐 음침한 리얼리즘으로 나아가, 프로이트를 연상시키는 인간 표현에 이른다. 이것이 전통의 완성자이자 파괴자, 스페인 근대 회화의 최고봉이라고 찬사 받는 이유다.

본인도 모순투성이였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관청에서 주최하는 미술 콩쿠르에 두 차례나 낙선한 후, 출세를 노리고 결혼하여 능란한 처세술로 지위와 재산을 얻었다. 사교계의 총아가 되어 마침내 수석 궁정화가의 자리에 오른다. 아내에게 스무 명이나 아이를 낳게 하는 한편 신분이 다른 사랑에 울며 애인을 여럿 사귀었다.

이 불쾌한 사내에게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40대 중반, 큰 병을 앓고 나서 청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온몸의 신경이 눈으로 모여 보고 또 보며 중심 주제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배경은 어두운 작품을 거듭 그렸다. 흡사 이를 위해 스스로 귀를 닫아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귀머거리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린 자화상이 스케치로 남아 있는데, 흐트러진 머리칼과 정면을 응시하는 얼굴은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베토벤의 이미지와 놀랄 만큼 닮았다. 이 두 천재는 거의 같은 시대에 살았고, 둘 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장년기에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모이라이의 장난일까?

때마침 스페인은 격동기를 맞았다. 나폴레옹 군과의 처참한 싸움을 겪은 뒤 겨우 스페인 왕이 복위했나 싶었는데 새로운 왕은 나폴레옹 뺨치게 냉혹했고 게다가 우둔해서 이단 심문을 재개한다. 개인적인 복수를 한다며 가는 곳마다 무고한 사람들을 참살하였다. 그리하여 붉은 땅은 피를 머금어 더욱 붉어질 뿐이었다.

고야는 듣지 못한 체 지옥을 순례했다. 우아한 궁정생활에서 발을 빼어 민중의 고통, 인간 존재에 대한 절망과 분노를 향해 몸을 던졌다. 잔혹하고 기묘한 「전쟁의 참화」「카프리초스」 같은 판화집은 고야 말고 누가 만들 수 있었을까?

하지만 아마도 너무 많이 보았던 것이리라. 인간이 인간의 심신에 저지른 엄청나게 잔혹한 행위를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그린 끝에 마침내 스스로가 감당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듯하다. 73세의 노화가는 별장 '귀머거리의 집'에 틀어박혔다.

5년 뒤, 고야는 가족과 보르도로 망명했는데, 이 때 그 2층 집의 회벽에는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비롯한 14점의 귀기(鬼氣) 넘치는 그림이 남아 있었다. 뒤에 검은 그림이라고 불리게 될 걸작인, 「운명의 세 여신」도 그 중 하나다.

공포와 잔학, 비정한 운명에서 도망쳐 틀어박혔던 그 집에서 왜 다시 그것들을 테마로 삼아 그림을 그렸던 걸까? 그건 아무래도 자기치유에 필요했기 때문이리라. 슬플 때 즐거운 음악을 들으면 오히려 더 큰 슬픔에 빠져든다. 슬플 때는 우선 슬픈 음악에 몸을 맡기고 슬픔을 거듭 체험한 뒤에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고야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지옥에서 빠져나온 그는 지옥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서는 거기서 해방될 수 없었던 것이다.

모이라이와 함께 부유하는 인간이 어쩐지 고야 자신처럼 보인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티치아노 바첼리오 『바커스와 아리아드네』

1520년경, 유화, 175×190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영국)


- 첫눈에 반해서 시작된 이 사랑이 마지막에는 별자리의 이야기가 되었음을 관(冠) 모양의 별들이 알려준다.

- 오른편 구석에 포도주 통을 나르는 알몸의 사내가 보인다.

- 아리아드네에게 첫눈에 반하여 수레에서 뛰어내리는 주신(酒神) 디오니소스.

- 멀어지는 배가 수평선 저쪽으로 자그맣게 보인다.

- 디오니소스의 기세에 엉겁결에 달아나려는 아리아드네.

- 이들이 아시아에서 돌아오는 길이라는 것을 두 마리의 표범으로 알 수 있다.

- 항아리에 티치아노의 서명이 들어 있다.

- 어리고 귀여운 사티로스가 송아지의 머리를 끌고 있다. 개가 짓는다.

- 심벌즈를 울리는 신녀(信女). 뱀에게 몸이 휘감긴 라오콘의 모습과 닮은 사티로스.

- 당나귀에 올라탄 뚱뚱하고 키 작은 사내는 디오니소스의 친척 살레노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7~1576년)는 베네치아 파 최고의 화가다.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하기 시작한 최초의 화가이기도 하다. 이 그림에는 왼쪽 아래편에 굴러다니는 다리 달린 단지에 라틴어로 서명(TICIANUS)이 새겨져 있다. 당시는 아직 화가가 직공으로 간주되었지만 티치아노는 각별했다. 인기도 지위와 명예도 재산도 압도적으로 최고였고 그의 작품 또한 밝고 화려하여 줄곧 '행복한 화가'로 불렸다. 카를 5세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의 비호 아래 합스부르크 가의 궁정화가로서 훈장과 연금을 받기도 했고, 베네치아 공화국 공인화가로 만토바 궁정과 로마 교황 등도 후원자였다.

그런데 인색한 왕후 귀족이 계약한 돈을 지불하지 않았는지 펠리페 2세에게 보내는 꽤 웃기는 편지가 남아 있다.

"지불이 늦어져서 생활이 빈궁합니다."(이 시절에 이미 큰 부자였다), "줄곧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건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제 나이가 90이 되었으니, 연금은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습니다."(실제로는 70대였다), "주문하신 그림을 지금 열심히 제작 중입니다."(실은 착수도 하지 않았다) 등등. 이런 노련함이 작품에도 훌륭하게 반영되어서인지 그의 그림은 대부분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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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5. 2. 10. 08:07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16 만인보 


高銀

1997,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797


811.6

고67만  9


창비전작시----------------------------------------------------------------------


나는 고은의 『만인보』를 읽으면서 인간에 대한 종교적 연민을 배운다. 나는 사람의 삶의 형태에 따라서 어느 쪽인가 하면 사람과 미움의 마음이 분명한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찌들어진 운명의 땅에 태어나 온갖 삶의 형태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사라져간 인간들에 대해서 사랑이나 미움보다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다만 『만인보』를 읽음으로 말미암아서 나 자신이 인간과 삶에 대해서 더욱 경건해지는 것만으로도 『만인보』와 그 작가 고은에 대해서 감사한다.

- 한양대 교수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이영희

 

일찍이 발자끄는 빠리의 호적부와 경쟁하겠다고 호언히였다. 뛰어난 소설가라면 모름지기 이만해야 한다. 그런데 한 시인이 있어 우리 민족의 호적부와 겨루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웠다. 고난으로 축복받은 이땅에서 살아갔던 평균적 인물들의 눈부신 삶과 탁월한 역사적 개인들의 평균적 삶의 자태를 교직한 『만인보』에서 시인은 문득 일천 강물 위에 은빛 도장을 찍는 달빛이 되어 독자들을 저 망망한 민중사의 바다로 인도한다. 소도둑과 혁명가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을 백과사전적 전개 속에서 추구하는 『만인보』는 진실로 민족서사시적 위엄을 스스로 갖추고 있다.

- 문학평론가 최원식


고은(高銀)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눈길」「천은사운」 등을 추천받아 등단.

1960년 첫시집 『피안감성』 간행. 이후 시 · 소설 · 수필 · 평론 등에 걸쳐 100여 권의 저서 간행.

1984년 『고은시선집』 간행.

1986년 『만인보』 간행 시작

1987 ~ 94년 서사시 『백두산』 간행.

제3회 만해문학상, 제1회 대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등 수상.


차례


이용문 / 방앗간집 딸 / 오복이 아버지 / 오복이 할머니 / 말감고 / 이현상 / 질경이 / 득순이 / 득순 어미 / 무녀리 / 문매기 / 김정호 / 남순이 / 유병렬씨 전실 딸년 / 남춘이 / 칠  수 / 최만식이 / 재룡이 / 정읍 여인 / 쌍  례 / 쌍례네 / 노래할지어다 / 생불이 할머니 / 생불이 할아버지 / 노래를 폐할지어다 / 옥순이 어머니 / 옥순이 아버지 / 옥순이 / 옥  상 / 이  녕 / 정분이 / 미자 어머니 / 미  자 / 박  연 / 사팔뜨기 노인둥이 / 정생 홍도 / 순임이 작은어머니 / 마서 심서방 / 김목공이 일대기 / 유  유 / 선  자 / 대장간 부자 / 한만걸이 마누라 / 박지원 / 단속곳 도둑놈 / 김용국 / 요까티 순자 / 의주 홍부자 / 넓적이 / 넓적이 어미 / 상이군인 / 그 처녀 / 채영묵 / 채영묵이 어머니 / 채병묵이 / 송시열 / 부  용 / 장터 영자 / 방의원 마누라 / 방의원 / 김개똥 / 순  자 / 생  피 / 마서 정연덕이 / 정연덕이 막내누이 / 공짜술꾼 / 오성륜 / 거짓말쟁이 / 이희광 / 추석 뒤 / 뻔뻔이 / 뻔뻔이 마누라 / 석금이 / 원오 화상 / 며느리고금 / 대복이 어머니 / 영실이 / 여서방 / 김호익 / 일본도 / 김서장 / 배불뚝이 / 임종면 / 임종면 재취 / 박봉양 / 재  례 / 장독대 / 검정몸뻬 / 검정몸뻬 아비 / 남의 옷 백 벌 / 팔마비 / 이  름 / 달치 포구 / 달치 포구 다정옥 / 이씨 종가 시엄씨 / 이득구 / 요까티 봉모 / 박진홍 / 최만석 주임 / 달 / 밤나무 주인 / 윤달이 / 응달 나무 / 소서방 / 융 / 쌍둥이 자매 / 이칠구 / 용이 할아범 / 도식이 마누라 / 낙서쟁이 / 장치기 김옥섭이 / 유장사 / 도두머리 우래옥 / 비인 과부 / 정씨 몸종 / 비인 장사와 판교 장사 / 풍 / 말  례 / 임두빈 / 임두빈 마누라 / 거지 계집애 / 우병덕이 / 조남술이 / 옥봉이 / 삽시도 이장 / 반공포로 / 한정기 / 운천석물 고석관 / 고석관이 아들 / 고석관이 딸 / 체장수 / 충승 충지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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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이 아버지


딱 한번 추석때 와서

한 댓새 집에 머물다가

홀연히 또 떠나간다

꼬장꼬장한 오복이 아버지

옥생각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내일 모레 눈감을 어머니 있건만

염소똥 같은 외동아들 있건만

물에 물 탄 듯한 마누라

그러나 속 깊은 마누라 있건만

집에 붙어 있으면 숨차는지

벌떡 일어나

하늘 본다

하늘가 구름 본다

그러다가 아버지 무덤 벌초나 하고 나서

또 떠나가버린다


행색이야

늘 그 행색이매

여기저기 별 수 없는 떠도는 막일꾼으로

강원도 땅도

충주 제천도

안 다니는 데 없이

떠나가버린다


술에 약하여

술 두어 잔에 잠들어버린다

작년에 없던 흉터

새 흉터

팔에 그어져 번쩍거리건만

도시 이런 오복이 아버지 입 열어본 적 없이

또 떠나가버린다


이마적 고로롱고로롱 누워 있는 늙은 어머니

갈자리 갈대 도막 분질러대며

저런 인간을

내 뱃속에 두었으니

내 탓인지

영감 탓인지

하늘 탓인지


오복이 할머니


시름시름 누워 있다가도 조금만 빤하면 일어난다

이른 아침 이슬 차고

산 넘어 사래밭에 간다

누구 따라올까보아 달아나듯이 간다

그 비알진 밭에 가

한번 쭈욱 살펴보고

일면 자갈 주워내고

일면 풀 맨다

종일 사람 구경이라고는 씨도 없다

싸가지고 간

주먹덩어리 깡보리밥 삼키고

쉴 참도 없다

밥 먹고 바로 매던 풀 맨다

매어놓은 풀 벌써 시들어

그 풀냄새가 동무이런가

그런 하루 팍 저물어서야

물것 덤벼들고

잔솔 밑 물병 보이지 않게 어두워서야

허리 쳐 일어난다

가져갈 것 없으니

모깃불 덮을 풀이라도 한 다발

혼자 산 넘어 돌아오는데

밤새 솟적다 솟적다 벌써 청승떤다

돌아오는 마을이래야

어디 변변한 불빛 하나 있는가

그저 입에 넣을 것 넣고

어둠에는

고된 몸도 가려지매

바로 구들장 지는 마을이다

어머님 이제 오세유

하는 기어들어가는 며느리 말소리

귀하디귀한 손자놈이야

벌써 자빠져 잔다

마당 구석 나팔꽃 오른 데로

반딧불 두어개 난다


득순이


괜스러이 마른번개 친다 아침부터

쇠미 길갓집

외주물집

거기에 무슨 화초담쟁이겠는가

무슨 흙담이겠는가

무슨 놈의 싸리울 짚울타리이겠는가

거적때기 걸친 일도 없이

그냥 초가삼간 덜렁

길에 나붙어

문 열면

방안의 빈댓자국 붉은 댓잎사귀 다 나오고

득순네 머리 매고

누워 있는 것

다 보인다


그 길갓집 딸 득순이

누가 데려가야지

나이 스물아홉이면

두메 마을에서야

재취자리 아니면 갈 데 없는데

두 모녀 싸움 나면

득순네 청승떠는데

아이고 저년은 첩복도 없어 시앗복도 없어

첩살이도 못 가는 년이여

아이고 내 원수여

홀어미 욕이나 배불리 얻어먹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어느 날

득순이 떠나버렸다

누가

대천정거장에서 막차 타는 것 보았다 한다

장항 가는 버스 타는 것 보았다 한다

댕기 딴 머리

미장원에 가 다 잘라버리고

지지고 볶고 떠나는 것 보았다 한다


득순 어미


딸 도망간 뒤

다리병신으로

혼자 밥 끓여먹고

거미줄에 걸리고

혼자 나무해 끌고 오고

절뚝절뚝

혼자 군소리

끊이지 않고

오사할 년

오사할 년

어찌 이게 딸 욕인가

세상 욕이지

나무비녀 꽂으나마나

머리 숱 성겨

낭자라고 탱자만한데

남의 밭 고구마 캔 밭 더트며

잔 고구마 주워 담으며

혼자 군소리

참 내

참 내

그러나 단 한번도 슬퍼보지 않았다

어디에 슬플 만한 하늘 있는가


슬픔도 혹이로다

사람 이하에는

슬픔도 괜히 풍류로다


쌍례


대천 아랫갈머리 건너 쇠미에 가면

낯선 사람 가면

제일 먼저 쫓아나오는 계집아이

쌍례

하루내내 무슨 일이 있겠는가

낯선 사람 가면

지키고 있다가 반색하며

쫓아나오는 계집아이

쌍례

각시풀 뜯어다가

각시 만들어

너 가져라

너 가져라

나누어주는 계집아이

쌍례

그 사팔뜨기 눈으로

낯선 사람 가면

제일 먼저 쫓아나와 헤실헤실 웃는 계집아이

헌 광목치마 기워 입었을 뿐

단속곳도 안 입고

아무것도 안 입고

맨바람 숭숭 드나드는 계집아이

쌍례


딸만 아홉인데

그 가운데 딸 쌍둥이 한배 있어

쌍례하고

뒷례하고 자라나다가

뒷례는 묻혀버렸다

둘이 클 것을 혼자 커서 그런가

말만한 쌍례

그만 일찌감치 눈맞아

염소 풀 매러 나온

아랫갈머리 지동춘 영감한테

참빗도 받고

동전도 받고

눈깔사탕도 받더니

나이 열여섯 다 못되어

지영감 소실로 가버렸다


낮의 지영감

누가 오면 집안 계집아이라 하고

밤의 지영감

어서 어서 들어와

기명을랑 내일 식전에 치고

하며 안달하는데

어서 들어와 허리 주물러주어

안달하는데


어린 시절

그렇게도 사람께나 바치더니

사내라고

피 식은 영감땡감 몸이나 뎁혀주고

콧김이나 쐬어주는 등글개첩

쌍례


그러나저러나

밥이야 굶지 않으니

서방복 그만두고

식복으로 살어리랏다

쌍례


쌍례네


딸만 아홉에다가

슬슬 계명워리짓도 해

어느 놈은

딴 서방 소생이기도 하지만

다 본서방 성 받아

어엿이 임금 왕자 왕씨 딸들이라

그러나 딸부자가

어디 부자인가

태어난 코맹맹이 소리로

멸치젓 사아

갈치젓 사아

자하젓 사아


환갑 회갑 넘어서도

멸치젓 사아

새우젓 사아

갈치속젓 사아


이 세상 사는 일이

젓 이고 다니며 파는 일이요

젊어서는 사잇서방질도 더러 하는 일이요

가을 하늘 푸르건만

그 푸른 것이 무슨 까닭이겠는가

쌍례네야

하늘 모른다

구름 모른다


젓냄새밖에 낼 줄 모르는 쌍례네

달 밝은 밤에도

한숨 모른다

노여워 욕사발 퍼부으면 퍼부었지

한숨 따위 모른다

그것 하나 기막힌 힘이라

밤새 달빛 저 혼자 부서진다

딸년들 제 힘으로 시집갈 년은 가고

못 가는 년은 못 가

집이나 보거라

집 보다가 나가고 싶거든 나가거라


생불이 할머니


대천읍 관촌 앞

생불이네 집 송방집

옛날 보부상이나 개성 상인들 연락하던 송방집

이제는 그냥 성냥 엿 과자 등잔기름 따위

참숯 소주 사이다 따위

묵은 명태 따위 파는 잡화상이라

부엌 겸 술청 겸 막걸리도 팔았다

이러니 술장사라 하여

마을에서 상것으로 치부했다

딸 하나 달랑 있다가

시집가서

외손자 생불이가 태어나

생불이 외할머니가

생불이 할머니로 불리운들 어떠랴

안방에는 괜히 이대통령의 커다란 사진 걸려 있다

동네 어른들한테

상것 대접받는 값인가

동네 아이들한테는

욕 퍼부어대기 아니면

돌팔매 던지기 버릇 들었다

그러니 자식 없고 손자 없고

아무 짝에도

쓸 모서리 없는 외손자밖에 없지

아나 생불이 할머니

라고 한내장 말썽꾼 관모가 윽박질렀다

그러면 유리창 드르륵 닫아버린다

차 지나가며

흙탕물 튀어 붙은 유리창이었다


그 안에서 원통하고 절통한지

생불이 할머니 우는 소리 나다 말았다


생불이 할아버지


늘 신작로에 나가 어정거린다

길손이 길 묻거나

뉘 집 묻거나 하면

그것 자세자세 가르쳐주고

장날 촌에서 나오는 장꾼들하고

허드레 인사나 하고

아 하늘이 보아주어서

이번 장은 궂은 장 안되겠그만그려

어쩌고저쩌고

이런 인사가 소임이다


공연스러이 뒷짐깨나 지거나

팔짱 끼거나

너무 많이 나와 있었다 생각되면

송방 가서

덧문 세워둔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거나


가을바람 한 자락 기다렸다가

용케 그것 알아맞히고

물에 가

밀물새우나 징게미

체로 뜨거나

모기장 체로 둠벙에 가 훑어오거나 해서

오갈뚝배기에

손수 정성껏 쓿여

혼자 한잔 들어 흐뭇한가


어느새 여름 가네그려

낮달이 차츰

빛나기 시작하는 애저녁

60년 인생 깨쳐

부처나

지랄이나 될 만도 한가

어느새 여름 가네그려


옥순이 어머니


옥순이 생모

그러니까 옥순이 배다른오빠 김무공의 계모

갯것장수 소금장수 나물장수 채소장수

어느 장수 안해본 것 없다

워낙 밖으로 나다니는지라

거기에 무슨 알뜰살뜰한 것이 붙어 있겠는가

그저 정정한 몸 서서

무거운 것 이고 나다니는지라

한가위 송편 솜씨 없다

송편이라고 빚으면

넓적한 것이

꼭 제 귀만했다

큰 귀 두 개 가진 옥순이 어머니

나이 여든까지도

수수모가지 광주리 이고

저문 수수밭 휘영청 일어섰다

그 걸음밭에서 부싯돌불 빛났다

길하고 하나인 아낙

흙하고 둘이 아닌 아낙

고려 대지의 아낙

하늘이 무너져내려도 끄떡없는 아낙

옥순이 어머니

웬만한 사내 두엇인 듯

온 마을 든든했다


옥순이 아버지


옥순이 아버지

그러니까 정분이 아버지

그러니까 정분이 오빠

김목공이 아버지

평생 조끼 하나 입지 못하고

늘 동저고리 바람으로 살아온 가난이나 판 무식이나

세상 이치야 먼동 터 훤했다

술보다 담배가 좋다

금방 피우고 나

다시 담배 꾹꾹 눌러 불 붙인다

식구들이 채독 걸려도

겉으로는 놀라는 기색 내색지 않았다

한산 이씨 문구네 형

갈말 여릿재 골창에서

총 맞아 죽은 것을 달려가 묻어주었다

세월 흘러

그 무덤 면례도

정분이 아버지가 나서서 해주었다


모진 세월일수록

거기 반드시 인정 깊으나 깊은 사람 있다

변하는 세월일수록

세월 뒤켠에 변할 줄 모르는 사람 있다

간장은 짜고

물은 달다

이 세상 아무리 망해버려도

다시 세상 일으키는 사람 있다

그런 사람 가까이

멀뚱멀뚱 옛 마음씨 그대로인 사람 있다


옥순이


김목공이 여동생

찔레순 꺾어 먹고

장다리

공다리 꺾어 먹고

그렇게 커서

두근두근 시집가 어찌 사는지

친정 올 때 되었는데도


그렇게도 달음박질 잘 치던 처녀

장다리꽃 꺾어 들면

장다리밭 나비 따라와

나비하고 달음박질치던 처녀

시집간 지 3년 세월 어찌 사는지

아이 배어

아이 지워버렸다는 소식 있고

그 뒤로 어찌 사는지

목덜미 점 하나 어찌 사는지


미자 어머니


고향 한산에서

일찌감치 부모 저 세상 보내고

어찌 어찌 한내까지 흘러와

남의집살이하다가

김목공이와 눈맞았다


김목공이 거름으로 쓰느라

역전 이 집 저 집 뒷간 치워

그 거름 져나르는데

그때 눈맞고 배맞췄다

인연은 똥지게에도 있어

똥 구린내도

어엿이 사랑이었다


훗날 어디가 좋아 눈맞았느냐고 하면

그냥 다 좋았다고 했다


미자 낳아 길러

어느덧 미자하고 걸어가면

미자 어머니가 더 작은 키였다

그러나 쟁기질 빼놓고는

무슨 일이나 억척이었다

시부모 섬기는 것도 몸에 불났다


그런 미자 어머니 하는 말 있다

부자는 곡간에서 인심 나고

가난뱅이야 아침 이슬에서 복 나온다

부지런해야 한다

부지런해야 한다

부지런하면

하늘이 우박이라도 내려주신다


미자


김목공이 딸

난리통에 어떻게 크는 줄도 모르게 컸다

먹은 것도 없이

복학으로 빈 배가 올챙이배였다

네 팔다리 무우말랭이로 말라비틀어져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개구리 고아 먹이는 것이 약이었다

회초리로

콩밭 뒤져 개구리 후려쳐 잡아다가

그것 고아 먹여서 키웠다

그 미자 커서

대천역전 나서면

사방의 눈길 쪼르르 모여든다

눈부셨다

다가가고 싶었다

수밀도 같았다

단 하나 아버지 김목공이 눈 닮아

먼데 바라보면 까닭없이

아버지처럼 세상이 싫어졌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라디오 가게 노래 쟁쟁하건만

대천역 모랫바람 부는 날

미자에게는 사랑도 싫다

그저 대천에서 홍성 갔다 오고

예산 갔다 오고

수덕사 일엽 스님 찾아갔다 오고

어느 때는 천안까지 갔다 온다

이런 미자의 뜻 알아주는 사람 하나

오직 미자 어머니

영감 잃은 미자 어머니

딸이 무슨 큰 일로 다녀온다고

올 시간 되면

대천역까지 마중 나가

조각달 뜬 밤

함께 돌아오기도 한다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고 따지는 일 없이

오로지 딸의 말 몇 마디에

암만

암만

암 그렇지

암 그렇고말고


넓적이


잘난 놈은 잘났으나

못난 놈은 못난 놈끼리

무던히도 넓은 세상이구나


북선에서

북선 청천강 어디에서 피난 온

아이 윤정길이

엿목판 가슴 앞에 걸고

거기 미제 꿀 눈깔사탕 요깡 건빵 나부랭이

오징어 나부랭이 담겨

드문드문 팔렸다


앞뒤로 눌렀는지

얼굴 납짝하여

이름은 모르나

장터 술도가 옆 넓적이라면 다 안다

뒤통수에 돈짝만한 흉터 있어

넓적이라면

그 흉터에 햇빛 비쳐 번쩍번쩍 다 안다

끔 장사하다가

학교 편입해 학교 다녔으나

본바닥 아이들이 깔보아

친구 하나 없었다

그러더니 국민학교 졸업하고 어디로 갔다

어디 가 무얼 먹고 사는지

어디에 가

사람이 짝 있는 법이라

되게 얽은 여자라도 만나

서로 지고 들어가

아들딸 낳고 사는지


하늘이 너무 크니

하늘보고 짐작할 일 하나도 없다


그런데 누가 장항에서 넓적이 보았다 하고

장항 천안 사이

느려터진 완행열차 안에서

틀림없는 넓적이 보았다 한다

아니야

가면 멀리 갈 사람이여

전라도나

경상도 어디나

서울 하왕십리나


넓적이 어미


넓적이가 끔 판 돈

건빵 판 돈 다 모아

막걸리 사먹었다

막걸리 졸업하고

소주하고 배갈 사먹었다


들은 말인즉 피난길에서

미군 두 놈한테 강간당하고

그 길로 실성하여

그때부터 술꾼 되었다 한다


술 취하면

사내더러는 좆이라 하고

여자더러는 씹이라 했다


야 이 좆대가리 간나새끼 인사하고 가라우야

야 이 씹구멍에

꿩대가리 박은 에미나이야

나한테 인사하고 지나가라우


제 아들 넓적이 있거나 말거나

덜렁 덥지도 않은 날 저고리 벗어

젖통 다 드러내놓고


야 이 씹구멍에

날감자 박은 년아 인사하고 지나가라우야


채영묵


대천 떠난 30년 뒤

채영묵이 중동으로 돈 벌러 간 기술자 마누라 꼬여

수천만 원 갈취하고

더 가져오라고 때리고 패다가

고발당해 쇠고랑 찼다

부전자전이 아니라 모전자전쯤 된다

제 어머니 빼다 박아

늘 생글거리며

여자가 좋아하게 이쁘장한 영묵이

교도소 나와

사촌이 살고 있는 대천에 왔다 갔다

대천 사람들이 알아보고

술자리 만들어주었더니

술 먹고 엉엉 울었다

술집 색시가 손수건 꺼내

눈물 닦아주었다

아버지 맹꽁이차 운전수는 진작 죽었다 한다


채영묵이 어머니


채영묵이 아버지가 맹꽁이차 운전수였다

트럭 본네트가 짧아 맹꽁이차였다

거기에 짐도 가득 싣고

사람도 빼곡하게 실었다

그런 때

그 맹꽁이차에 탄 사람들

영락없이 콩나물같이 순했다

정기버스가 없던 시절이라

장날에는 장짐 실은 장돌뱅이가 독차지했다

좀처럼 크락숀소리 울리지 않았다

아무리 소가 길 막아도

아이들이 길 비키지 않아도


이렇게 채영묵이 아버지가 집 비우는 날 많자

채영묵이 어머니 방 하나 남아돌아

하숙 쳐 가양에 보태어 썼다

워낙 물색 좋은 여자라

국민학교 5학년 아이 어머니가 아니라

생처녀같이 싱그러웠다

검정 사지바지에

걸을 때마다 엉덩이가 보기 좋았다

진분홍 털스웨터 차림이었다

달밤의 박꽃처럼 어여뻤다

거기다가 생글생글했다

누구에게나 먼저 웃는 얼굴이엇다


그러더니 그만 나이 아래 하숙생하고

고등학생 하숙생하고 통정하고 말았다

대천농고 2학년 아이

그 아이도 학교 작파해버렸다

끝내 둘이 도망쳐버렸다

그렇게 되자 채영묵이 아버지도

남우세스러워 맹꽁이차에 제 짐 싣고

운전수 옆자리에 우는 영묵이 앉혀

대천바닥 썰렁하게 떠나버렸다

괜찮다 괜찮다 사람은 어디 가나 살 데 있다


방의원 마누라


본래 술집 돌던 여자인데

방준식이 만나

아이 배자 달라붙어 살기 시작했다

턱이 겹치고

귀가 길쭉하게 처져서

복덩어리라 했다

턱 뾰쪽 빤 준식이가

돈 벌고 출세한 것도

제 덕이 아니라

마누라 덕이라 했다

남편 면의원 된 뒤

그 마누라 한내 나들이갈 때

저만치 딸 순자 앞세우고

몸통 흔들며

두 팔 흔들어대며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가는 걸음걸이었다

그 전에는 먼저 인사하더니

이제는 누가 인사해야 아는 체한다

물론 금비녀 끼고

낭자도 사발만하게 커졌다

저런 ! 고개 돌려

땅보다 하늘하고 더 친하며


방의원


한내에서 술장사로 돈 벌었다

그러나 술장사라 해서 사람 대접 못 받는지라

그만 술장사 그만두고

논 7천 평 사고

밭 2천 평 사서

관촌으로 이사 왔다

그러나 술장사 내력 아는지라

누구하나 대접해주지 않았다

여기에 포한이 져서

면의원에 출마 당선되니

하루아침에 방준식이가

방의원이 되었다

방의원 마누라가 나서서

우리 방의원 방의원 하고

말머리에 달고 다녔다

어느덧 관촌 양반부스럭지들도

방준식이가 집 나서면

방의원 하고 대접했다


마서 정연덕이


마서 서룡리 웃말

서당에서 제일 공부 잘하던 연덕이

그런데 스물아홉에도 장가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고자라 했다


인물 한번 잘났는데

부리부리한 눈에

떡 벌어진 가슴팍

철이 바뀌어도 감기 못 들어온다


누이가 생피 붙은 이후

대천으로 이사 가 건어물전 벌였으나 맡겨두고

대천 앞바다에만 나갔다

하루내내 해수욕장 수박 먹고 나

그 수박씨 애잔한 잎새 틔워

파르라니 나 있는 것도 보며

느린 파도소리 들으며

바다 바라보며


드디어 바다 위 뱃놈 될 생각했다

다음날 대천ㅇ업조합 직원한테 줄 넣어

보령 제1호 갈치배 타기도 했다


그렇다 바다 위에서는

과거도 없고 내일도 없다

그날과

그날의 파도 끝없을 따름이다


정연덕이 막내누이


언니 연옥이가 생피 붙어버렸으니

누이 연복이야 시집갈 길 막혔다

언니 일로 운 것은

정작 연복이뿐이었다

늘 다정한 계집애


대천으로 이사 온 지 한 달 못되어

그 연복이 집 나갔다

계룡산 신중이 되어 흰고무신 신었는지

아니면 온양 온천에 가

늘어지게 잠자는 갈보가 되었는지


집안에 일 하나 생겨

이렇게 집안 식구 흩어져

흩어져

이 세상 넓은 것인가


집안 식구 빨래 다 하고도

손끝 놀리지 않던 계집애

누가 데려가면

그 집 복 찰 계집애

연복이


그러나 어디 가서 무슨 몸인지


뻔뻔이


요까티 강순달이

이발값 아껴

댂칼 갈아 거출거출 면도 시늉하고

면도 시늉하면

보는 사람이야 어쨌거나

면도하고 나서

얼굴에 물 바르고 나서면

그 기분 괜찮은지라


떡 본 김에 제사인지라

잔칫집이나

초상집 가서

하루 삼시 세때 잘 먹고

국수 두 그릇 먹어도

눈치 받지 않고

그것으로 부족하여라

반드시 남은 음식 걷어가지고 일어선다

돼지고기 비계에다

점잖은 윗손님 술상 홍어 찐 것도 걷어가지고

허리 아프지도 않으며

끙 ! 하고 일어선다


초상집 일가붙이 어른이 나와

자네는 문상 왔나

음식 챙기러 왔나

하는 점잖은 핀잔 따위야 코방귀이다

아니 자네 순달이 여전히 뻔뻔하네그려 하면

그래서 나를 뻔뻔이라 부르지 않소

강순달이라면 모르지만

뻔뻔이라면 오소산 이짝 저짝에서

나 모르고 어쩌겠소

하고 너스레 떨며 일어선다


먹던 묵

먹고 남은 고사리나물 숙주나물

흰 소금 따위

음식뿐 아니라

쓰고 남은 백지 조각 따위도 가지고 일어선다

찬바람 불면 누가 막아주겠나

문구멍 막아주는 것은 이것이여

문풍지 우는 밤

문바람 막아주는 것은 이것이여

하고


한번은 떨어진 옷고름 주워 담다가

옷고름 주인 순자 어머니한테 걸려

아니 한다 한다 하자니까

이제는 남의 옷고름까지 떼어가?

하자

떼어가다니요

줏어가는 것하고 떼어가는 것하고는

구별할 줄 알아야

이 세상에 하늘 있고 땅 있어요

참 내


순자네 개가 뻔뻔이 알아보고

꼬리깨나 흔들어 배웅한다

옷고름 빼앗기고 서운한 뻔뻔이 강순달이 뒤에서


뻔뻔이 마누라


낭자에 젓가락 비녀 꽂은 강순달이 마누라

눈은 뜨는지 감았는지

늘 째져 있을 뿐

그런 눈으로 용케 앞을 본다

앞뿐 아니라 뒤도 빤히 짐작한다


강순달이에

강순달이 마누라라고

어찌 서방과 딴판이겠는가

남의 집 부엌이나 뒤란에

그놈의 마당발 들여놓기 망정이지

그런 곳에 들어갔다 하면

누더기 앞치마에 감춰가지고 나오는 것

반드시 있다


친정에 가서는

단속곳 안에

친정조카 돌 선물 은수저 훔쳐 꽂은 것 떨어져

친정 올케와 대판 싸우고

발 끊겨버렸다


밤중에 잠 안 와 팔베개 고쳐 베고 나서

아니 요새 당신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하니

하다못해 과부네 굳은 된장이라도

한 사발 가져오지 못하니

하자

서방 순달이도 한 마디

그러는 임자는 무엇이여

그 좋은 솜씨 어디다 처박아두고

손목 잘러버려

손목 잘러버려


밤중 귀뚜라니 소리 점점 줄어든다


임종면


장항부두 통통배 두 척

15마력짜리

10마력짜리

거기에다 중선 세 척의 선주 임종면이

그 임종면이 자전거 타고

허리 꼿꼿이 세우고 지나가면

서천군수도 서장도

읍장도

물 건너 군산항만청장도

저 앞에서부터 알아보고 굽신거린다

아직 수염 기를 나이 아닌데

여덟팔자 수염까지 단청했으니

절 받을 만한 임종면이

늘 양복 조끼에 시계금줄 걸려 있고

칠피구두는 자전거 페달과 함께 돌며 번쩍거린다

칠산바다 조기는 다 임종면이네 조기라 하고

마까오 물건은 다 임종면이네 물건이라 한다

돈으로 요 깔고 자고

돈으로 이불 해 덮고 잔다 한다

그런데 그 임종면이네 집

불행 있다

딱 하나

외아들이 간질병 나면

방바닥 나뒹굴며

비싸디비싼 옛날 백자 항아리 부수어버린다

흰 거품 물고

눈 흰자위 뒤집혀져

나자빠져

꼭 무당벌레 뒤집혀진 듯이 지랄한다

아버지 임종면이 들어와

그런 병신자식 지랄에

찬물 한 양철동이 퍼부어버린다

이 원수야


임종면 재취


임선주 임부자 본마누라 고생만 실컷 하고

배 한 척 두 척 사들이자

그만 병 들어

그 길로 칠성판 지고 갔다

지랄병 아들 달랑 남겨놓고 갔다

거기에 천안 처녀 하나

논 사주고 밭 사주고 가마 태워 왔는데

장항에 오니

당장 제1미인이라

눈 같은 살결에

눈동자는 흑진주 저리 가거라

앵두입술에

어느 때는 생대구 이리 같은 입술에

검은 머리 가리마 쪽 곧아 푸르러라


한 마디 더 보태자면

둥근 얼굴 영락없는 보름달이라

한번 나들이 나서면

그 누구 감히

그 자태 바라볼쏘냐

그저 쉬쉬쉬 꿀꺽

흘끔 바라보고 목젓 막혀버린다

그런 미인인지라

임종면이 재산 다

그 재취 베갯속에 간다 한다

아이고 어디 저게 사람이여

신선 아니면

백년 묵은 여우 둔갑한 것이여

저 치맛자락 땅에 닿은 것 좀 보아

그 밑에 고무신 버선발 좀 보아


그런데 그 임종면이 재취가

전실 자식 지랄병 아이 살인죄 쓰고 잡혀갔다

간질병으로 나뒹구는 아이를

수쳇구멍에 처박아 죽였다 한다

그러나 임종면이 배 한 척 팔아

그 재취부인 풀려나왔다

그리하여 그 재취 수덕사로 마곡사로

부여 고란사로

아들 하나 점지해 달라고

칠성불공 앉히러 연락부절로 다녔다


3년 뒤 아들 하나 낳았다

기쁨 찼다

그러나 백일 넘기고 죽었다

장항거리 어디에도

그 재취부인 보이지 않았다

임종면이 통통배 다 넘어가고

중선 하나는 덕적도 앞바다에 가라앉았다


아름다움이여 파괴와 멸망이여


껌정몸뻬


1 · 4후퇴 피난민 행렬이

아랫녘으로 아랫녘으로 내려가다가

전선이 38선 언저리서 맞대어 완충 이루자

죽어도 서울 가서 죽어야 한다고

다시 올라갔다

큰 길로만 올라가다가

마을에 들러

보리 한 자쯤 자라난 이른봄

나물 캐어

화덕에 걸고 나물국 끓여먹었다

거기에 구호양곡으로 밥이라고 해먹었다


그 북행 피난민 행렬에서

동네 간장 얻으러 오는 처녀

껌몸뻬

흰 무명실로 더덕더덕 기워 입은

껌정몸뻬

검은 눈썹 두 마리 볼 만하다

그 처녀 들창코 내밀고

간장 달라고

한 집에 들어가

한 시간도 앉아 졸라댔다

아무리 인심 좋은 마을이나

간장 된장 다 떨어진 난리인지라

없다 해도

곧이 듣지 않고 졸라댔다


그러다가 숨겨둔 것 한 갱끼

기어이 얻어가고 마는 껌정몸뻬 아가씨

그게 어디 아가씨인가

그냥 돌멩이거나

황소 뿔이거나


흠 북선년 독한 년이여

어디 가서도 살기는 살어

어느 바위 너설에도

올라앉은 엉겅퀴꽃이여


껌정몸뻬 아비


제 딸 사는 힘 질기다고

제 딸 앞세워

먹을 것 얻어가는

껌정몸뻬 아비

황해도 사리원 영감

일제 때 수리조합장 했다 하나

그런 것 같지도 않은 영감

피난민 머무는 미창 창고에서

다른 사람들 다 부지런히

먹을 것

땔 것

입을 것

쓸 것 찾아다니는데

손 놓고

그냥 낯선 타관 한눈팔고 있는 영감

딸 없으면

어쩔 뻔했나

그냥 내려오다가

개성 토성 언저리서 죽었을 영감

아무나 보고 빙그레 웃으니

혹시 이쪽에서 긴가민가 계면쩍어

어이할 수 없이 빙그레 답례하는데

썩 근사한 한 마디

우리 좋은 세상 오우다 꼭 오우다

제 이마빡 먹사마귀 믿듯이


임두빈


무창포에서 멀리 대천 선창이 보인다

대천 바다에서 태어나

무창포로 와 흘러와 사는 암두빈

날마다 선창에서

갯바람에 절어 사는데

이따금 저 건너 대천 쪽 바라보지만

거기 가본 적 없다

가볼 생각 없다

잠깐 말미 내면

버스 타고 가면 금세 대천인데

아버지 보아도 그렇고

형을 보아도 그렇고

그냥 내리닫이 10년 20년을

무창포 선창 떠난 적 없다

 

충청도 사람 조상 유난히 섬기지만

임두빈이야

그런 조상 거들떠본 적 없다

그저 맞아들이는 것은

날마다 홍합배 갈치배라

만선 들어오면

그것 퍼내느라 숨쉴 겨를도 모자라

이렇게 선창 막일로 살아가며

계집 생기고

자식 생겨

밤 늦게 막걸리 먹고 집에 가면

그때에야

아이고 우리 상식이 잘 놀았느냐

하고 희끗희끗 수염발 문지른다

암 조상은 없어도 자식은 있다

 

임두빈 마누라

 

무창포로 흘러와

선창 구석 상밥집 식모살이하다가

임두빈 타진 옷 꿰메주고 나서

그 길로

임두빈 마누라 되어

참기름집 옆에다

방 얻어 살림났다

얼굴에 촘촘이 주근깨 덮여 있어

말할 때마다

웃을 때마다

그 주근깨 쏟아질 듯하지만

아기 낳아

그 아기 얼러대는데

얼씨구 얼씨구 하고 기뻐 어쩔 줄 모르는데

그렇게 얼러대는데

기쁜 주근깨도 함께

얼러대는데

밭에 밭이랑나비

바다에 물결이랑나비 큼직하기도 하여라

 

웅천석물 고석관

 

군산 밖 옥산에서 농사짓다가

투전 끝발에 논밭 날리고

군산 수산시장에서 생선 좀 만지다가

그 노릇도 작파하고

강 건너

웅천에 마음 붙여

검은 돌 만지기 시작했다

난리 지난 뒤라

한동안은

어디 비석 세울 자손 있던가

여기저기

집 들어서고

새 거리 트이면서

차츰 산에 언덕에 밭두렁에

그냥 맨무덤 두었다가

하나둘 비석 섰다

그때 날랜 고석관이 석물공장 차렸다

밤중까지 돌 쪼는 소리

돌 가는 소리

그러자니 먼 돈 가까이 왔다

그토록 달아나기만 하던 돈

이제 얼쑤얼쑤 어깻짓하며 왔다

고석관이 고부자 되었다

 

대천 미군부대 지프 한 대 사들여 타고 다녔다

그 차 지나가면

자갈길 먼지 자욱히 피어올랐다

땅딸보 고석관이

위가 아래인지

아래가 위인지 모르게 땅달보라

아무리 돈 많아도

술집 색시들 넌즈시 에누리했다

 

그래서 고석관이 술 취하면 틀림없다

술상 차고 일어난다

일어나 돈 뿌리고

문 밀치고 나와버린다

청천하늘에 별도 많아

뭇별들 넌지시 에누리한다

너도 사람이라고 술 취했구나 하고

 

별 뜬 하늘에 늦은 달 떠올라와

저 아래 조용한 술집 마당 내려비치며

허허 저기 저 술집에는

그 고석관이 안 왔구나

 

고석관이 아들

 

어머니 타겨

인삼 다려먹어도 파리파리하다

고석관이 아들 영수

나이 열일곱인데

고등학교 다니다가 그만두고

집안에서 논다

겨우 마당 맨드라미하고 논다

몸이 허약하매

눈뜨기보다

눈감고 있을 때가 좋았다

그러다가 눈이 좋아져

책을 읽었다

밤새도록 읽었다

진주탑 마도의 향불

어디 그뿐인가

수호지

어디 그뿐인가

토정비결까지

 

동네 사람들

공장 사람들 모르는 것 있으면

거기 가 묻는다

콧잔등에 푸른 심줄 돋아난 영수

그 영수 모르는 것 없다

 

끝내 계룡산 신도안 드나들다가

신도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훔치훔치 그 산중 굴속으로

 

고석관이 딸

 

어디서 날아 온 딸 정순이

영수하고

배다른 동생 정순이

이 계집애 돈에 밝아

어릴 때부터 돼지저금통 채워쌓더니

커서

아버지한테 타는 용돈 안 쓰고 모아

어느새 밭 하나 샀다

밭 2백 평짜리

 

아버지한테 밭 샀다고 말하자

술 취한 아버지 기뻐할 줄 알았으나

아니다

뭣이 ! 네가 밭을 사 저금통으로 밭을 사

네 에미하고 다른 데 하나도 없구나

네 에미도 돈이라면

죽고 못 살더니

 

그러나 오빠 집 나간 뒤

열네살 정순이 그 계집애

댕기머리 잘라

단발머리로

일꾼 꼼짝달싹 못하게 다스린다

아저씨 방아달 밭에 재 내가야지

왜 안 내가고 있어요?

집 안의 잿간에 재 차면

그 집이 어디 사람 사는 집이유?

 

한쪽 볼에 얕은 볼우물

그것이 덩달아

화난 얼굴 더하여준다




posted by 황영찬

2015-015 대나무

 

글 / 김준호●사진 / 박보하

2004, 대원사

 

 

시흥시매화도서관

SH013811

 

082

빛12ㄷ  234

 

빛깔있는 책들 234

 

김준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식물생태학으로 석사 · 박사 과정을 이수하여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주사범대학과 서울대 자연대 교수를 역임하고, 한국식물학회 · 한국생태학회 · 한국생물과학협회 회장을 지냈고,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와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환경운동연합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보하-------------------------------------------------------------------------

경남 거창에서 태어낫으며 네 번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을 가졌다. 1993년 월간 『사진예술』에서 주최하는 올해의 사진가상을 수상하였고 1994년에는 『korean culture』로 한국일보 출판문화상 사진예술상을 수상하였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사진들을 주로 촬영하고 있다.

 

|차례|

 

대숲 예찬

대숲의 사계

대나무의 생태와 환경

대나무의 일생

대숲의 자연 질서

2000년을 이어온 대문화

새로운 대문화를 위한 움직임

참고 문헌

오죽헌  율곡의 생가인 오죽헌에는 검정색 줄기의 대숲이 무성하다.

오죽헌의 오죽(검정색 줄기의 대나무)

 

이 원(園)이 좋아서 사랑하노니

시원하여 더위를 피할 만하다.

소나무 바람은 으슬으슬 불어 대고

연잎에 가랑비는 가늘게 내리네.

산이 가까워 그늘이 난간을 덮고

시냇물 드리워서 찬 기운 발에 든다.

저녁 볕이 여기에 어찌 이르랴.

다시금 대숲이 어우러져 있는데.

爲愛玆園好(위애자원호)    淸凉可避炎(청량가피염)
松風吹浙瀝(송풍취절력)    荷雨灑廉纖(하우쇄렴섬)
山近陰籠檻(산근음농함)    溪懸爽琇廉(계현상수렴)
斜陽那到此(사양나도차)    更有竹林兼(경유죽림겸)

오세신(吳世臣, 생몰년 미상)

 

산림이 구름 속에 숨어 있으니

도덕군자 마음은 생생하구나.

바람 속의 소나무는 신통한 피리 소리 보내오고

달 아래 대나무는 맑은 그늘 띄우네.

여기에서 알맞게 익은 술을 마시며

길고 짧은 소리로 글을 읊조려.

산에 사는 사람이라 어찌 벗이 없으리오.

때로는 두어 마리 새들도 있네. 

林壑隱雲表    生君道者心
風松送靈籟    月竹散淸陰
爰以淺深酒     遂成長短吟
山人豈無友     時下兩三禽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년)


능소화 덩굴 대나무를 휘어 감아도 곧은 마음 지키려고 애를 쓴다네.

태고의 고운 소리 돌에 부딛는 건 물줄기 소리.

凌霄竹抱若貞心   激石波含太古音

윤인서(尹仁恕)

경복궁 자경전의 대나무 무늬판  자경전의 서쪽 담 외벽에는 매화, 난초, 대나무 등의 무늬판이 치장되어 있다.

방갓  방갓은 가늘고 얇게 쪼갠 대오리를 삿갓 모양으로 결어 거죽으로 하고 왕골 속을 엮어서 안을 받치며, 가장자리를 사화판형으로 만들어 완성한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