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9 탈춤
글 / 채희완●사진 / 김문호
1997,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7979
082
빛12ㄷ 120
빛깔있는 책들 120
채희완-------------------------------------------------------------------------
서울대학교 문리대 미학과, 같은 학교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였다. 청주사범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무용학과 교수로 있다. 「탈춤의 사상」(엮음),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국의 민중극」(공동 엮음) 등 여러 책과 논문이 있다.
김문호-------------------------------------------------------------------------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하였다. 주요 활동으로 '89년에 개인 사진전, '90년에 리얼 포토스전(공동 사진전)을 가졌으며 ,89년에 대만의 사진저널 「인간」에 10여 점의 사진 작품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현재 자유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사진집 「달라진 저승」(열화당) 등이 있다.
|차례|
탈춤이라는 이름
탈
탈의 뜻
탈의 주술성
탈의 연행성
탈의 조형성
탈춤 전승의 사회 문화사적 배경
두레패 연희로서 전승
도시 성향의 탈춤 대두
개방적 민중성
공동체 의식의 분화
전승 탈춤의 민중 의식과 세계상
마당굿으로서 집단적 신명
유랑성과 민중적 전형과 예인 정신
'이름없음'과 여성적인 것의 권리 회복
탈춤 양식의 접근
탈춤의 극구조와 '통일의 다양'
노장춤
탈춤의 현재적 의미
세시 풍속적 의미 지평
봉건 사회 해체기의 민중 연희
역사맞이굿의 가능성
참고문헌
▲ 봉산탈춤의 목중춤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
▲ 하회별신굿 탈놀이의 할미탈 광대뼈가 불거지고 움푹 파인 눈에 눈알은 튀어나와 있다. 양볼, 눈언저리, 입가에 주름살이 패여 있고 뾰족한 턱에 입은 크게 벌어져 있다. 지지리 궁상스런 표정이 문득 살아 강렬한 호소력으로 다가온다.
▲ 하회별신굿 탈놀이의 소 백정의 도끼에 죽어 넘어진 소. 얼굴만이 아니라 가장의 필요에 따라 온몸을 가린 것도 탈이라 한다.
▲ 「악학궤범」'시용향악정재(時用鄕樂呈才)'에 실려 있는 처용탈
▲ 수영들놀음의 담보
▲ 통영오광대의 사자탈
▲ 봉산탈춤의 사자탈
▲ 북청사자놀음 사자놀이는 함경남도 북청군 전지역에서 계를 모아 정월 대보름에 놀았다. 그 가운데 구 청해면 토성리 사자놀음은 관원놀음과 합쳐져 더욱 이름이 높았다. 북청사자놀음은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 고성오광대의 문둥탈
▲ 하회별신굿 탈놀이의 양반탈 하회탈은 오리나무에 종이를 입히고 옻과 안료를 두세겹 칠한다. 양반, 선비탈 둘 다 매부리코인 점이 특이하다. 후대의 양반탈을 보면 하회탈에서 보이던 위엄, 권위, 덕성 등이 사라지고 허세와 비리와 거드름을 날카롭게 풍자하여 왜곡, 폄출, 찬탈시킨 공격성을 보인다. 그러나 형상의 완성도에서 보면 하회탈에 비할 바가 못 된다.
▲ 하회별신굿 탈놀이의 무동선 각시 각시를 무동세우고 판에 나온다. 하회별신굿 탈놀이는 풍산 유씨의 동족 마을인 경북 안동군 풍천면 하회마을에서 행해지던 서낭굿형의 탈놀이이다. 하회탈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 양주별산대놀이의 애사당 법고놀이 애사당 법고놀이가 끝나고 완보와 목중이 법고를 사이에 두고 입씨름을 벌인다. 완보는 목중의 우두머리로서 관쓴 중으로 일컫기도 한다. 완보라는 이름은 양주사직당 당직이의 실제 이름이었는데 그가 완보역을 잘하였기에 그 이름이 역의 이름으로 되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몽고인 광대의 명칭인 완보가 전래된 것이라고도 한다. 양주별산대놀이는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 강령탈춤의 미얄춤 "난간이마에 주게턱, 웅캐눈에 개발코, 쌍퉁은 다 깨진 바가지 같고 머리칼은 다 모즈러진 빗자루 같고…" 이러한 재담이 미얄탈의 형상을 만들어 내고 탈의 형체가 없더라도 탈의 형상을 전승시키는 기능을 지닌다.
▲ 수영들놀음의 수양반탈(위)과 말뚝이탈(아래) 바가지에 한지를 바르고 그 위에 색칠을 하고 나서 먹으로 형상을 다듬었다. 눈썹이나 수염은 말총, 토끼털을 쓴다. 귀를 만들어 붙인 것이 통영오광대의 것말고는 딴 데서 보기 어려운 한 특징인데 통영에 비해 귀가 열려 있다. 수양반탈은 아래턱이 움직이도록 분리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수영들놀음은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다.
▲ 통영오광대의 말뚝이탈 대바구니에 밧줄을 꼬아 눈과 입, 양볼에 혹을 만들고 그 위에 종이를 붙인 뒤 검붉은 채색을 한다. 귀는 대부분 통영오광대의 탈이 그렇듯이 눕혀 붙인다. 말뚝이탈은 높이가 40센티미터, 너비가 37센티미터 가량으로 크기가 큰데, 패랭이를 얹어 탈을 쓰고 나오면 어깨를 덮을 정도여서 탈쓴 몸이 왜소해 보인다. 통영오광대는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 동래들놀음의 말뚝이탈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말뚝이탈이다. 동래들놀음은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
▲ 양주소놀이굿 소의 생산력을 통해 풍요 다산을 비는 경사굿의 하나이다. 고무래, 짚, 멍석 등으로 소의 형상을 만들어 마부와 무당이 타령과 덕담을 주고받으며 소를 놀린다. 이러한 농경 의례의 탈놀이는 후대 탈놀이의 원천적인 토대를 이루었다. 이 밖에도 무당이 주재하는 굿 가운데 탈춤과 깊이 연관된 것으로서는 제주도의 영감놀이, 세경놀이, 영등굿놀이, 입춘굿놀이, 동해안 별신굿의 거리굿, 범탈굿 등을 들 수 있다.
▲ 하회별신굿 탈놀이의 살림살이 마당 부네나 각시와 대조를 이루는 할미는 찌든 삶을 베틀에 올려 놓고 신세 타령을 한다. 할미의 지나온 인생 역정을 잘 반영하고 있는 이 대목은 한국 여인상의 한 전형을 보여 준다. 하회별신굿처럼 농촌 공동체나 향촌의 마을굿으로 탈춤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는 강릉단오굿, 여양의 주실탈놀이, 봉화의 황목탈놀이 그리고 여러 지역 풍물대의 지신밟기나 잡색놀이를 들 수 있고, 전라도의 안놀음, 비비새놀음, 경상도의 원놀음, 무안용호싸움, 자인 8광대, 함경도의 사자놀음 등도 이와 관련이 깊다.
▲ 하회별신굿 탈놀이의 강신 마당 탈춤의 형성 분파는 크게 세 줄기로 잡을 수 있다. 첫째는 궁중 연회나 상층 문화를 토대로 한 산대도감극 계통의 것, 둘째는 농어촌을 기반으로 한 향토형 탈놀음, 셋째는 유랑 연희 집단의 탈춤이 그것이다. 이들 세 줄기는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으나 현재 전해 오는 대부분의 탈춤은 지역 토착적인 선행 예능을 기초로 하여 문화 전파상 전문 예인의 것이 혼용, 적층된 것으로 보인다.
▲ 북청사자놀이의 악사 '애원성'이라는 독특한 선율과 음색의 퉁소 가락을 단순, 간결한 북장단에 맞춘다. 퉁소는 굵은 대나무로 만드는데 길이가 66센티미터쯤 된다.
▲ 남사당 꼭두각시놀음의 박첨지와 평양 감사 상여 남색 집단이었던 남사당은 오늘날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유랑 예인 집단이다. 이들의 주요 공연 종목은 풍물, 버나(접시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춤) 그리고 덜미(꼭두각시놀음) 등이 있다. 직업적인 전문 연희패로는 이들말고도 사당패, 대광대패, 중매구패, 초란이패, 솟대장이패, 굿중패 등이 있어 각 지역 탈춤을 비롯한 민중 연희의 전파, 교류에 큰 몫을 하였다.
▲ 고성오광대의 제밀주 마당 본처인 할미가 영감의 첩인 제밀주가 낳은 아이를 두고 다투면 영감이 제밀주 편을 들면서 뜯어 말린다. 고성오광대는 고성 전래의 지신밟기와 용왕제를 바탕으로 해서 초계 밤마리 장터의 대광대패 탈놀이를 수용하였다. 향토적인 세시 풍속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탈춤이 전승 발전된 점은 다른 지역의 들놀음이나 오광대도 다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통영 매구굿, 지신밟기와 통영오광대, 가산천룡제(天龍祭)와 가산오광대, 동래나 수영의 지신밟기와 동래들놀음, 수영들놀음이 그러하다.
▲ 동래지신밟기 동래들놀음의 앞놀이 격인 동래지신밟기는 정초에 마을 가가호호를 돌면서 축원과 걸립을 목적으로 놀았던 마을굿이다. 이러한 지신밟기는 풍물대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놀았지만 동래의 것은 배역도 다양하고 화려한 규모이다.
▲ 은율탈춤의 사자춤 마당 마당판씻이로 등장하는 사자춤은 벽사 진경의 뜻을 담아 판열음을 한다. 은율탈춤의 사자는 장정 세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크다. 은율은 구월산 아래 있는 소읍으로서 농산물 집산지이며 비교적 물산이 풍부하여 예부터 '놀탈'이 센 곳이라 하였다. 이속이 주도한 다른 탈춤과는 달리 놀이꾼은 주로 토박이로서 생업은 농업이었고 읍내 한량인 반농반예인이 주축을 이루었다. 은율탈춤은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