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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26. 09:26 내가 읽은 책들/2011년도
2011-019 제주 성읍 마을

글/김영돈●사진/현을생

1997, 대원사

시흥시종합복지회관
EM013051

082
빛12ㄷ 9

빛깔있는 책들 9


김영돈

제주대 교육대학원장이며 문화재전문위원이다. 제주민요, 해녀 등을 연구 하였으며 「제주도민요연구」「한국구비문학대계」「제주설화집성」을 펴냈다.

현을생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현재 한국 사진작가협회 회원이다. 제9회, 11회 제주도 미술대전 사진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제2회 전국 제물포 사진대전, 부산 사진 공모전에서 입선했다. 87년 개인전 '제주 여인 시리즈 Ⅰ'을 가졌으며, 제주도 작가 작품전에 출품했다.


|차례|

성읍 마을의 역사와 환경
성읍 마을의 사회적 배경
   성읍 마을의 사회와 생업
   성읍 1리
   성읍 2리
성읍 마을의 문화재
   문화재 개관
   초가집
   느티나무와 팽나무
   정의향교와 일관헌
   돌하르방
성읍 마을의 전승 문화
   민요
   걸궁
   연자매
성읍 마을 사람들의 신앙 생활
   민간 신앙
   공인 종교
성읍 마을의 세시 풍습

성읍민속마을의 역사

성읍민속마을은 1423년 이래 약 5세기간 정의현(旌義縣)의 현청(縣廳) 소재지로서의 맥을 이어온 유서깊은 마을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정의현청은 태종(太宗) 16년(1416) 안무사(安撫使) 오식(吳湜)의 건의에 따라 성산면(城山面) 고성리(古城里)에 정의성(旌義城)을 축성하였었으나, 현청이 동쪽에 너무 치우쳐 행정상 불편할 뿐아니라 태풍의 피해가 잦고 또한 우도(牛島)가 가까이 있어 왜적(倭賊)으로 부터의 침입이 빈번하였으므로 안무사 정간(鄭幹)이 건의하여 세종(世宗) 5년(1423), 당시 진사리(晋舍里, 현 표선면 성읍리)로 현청을 옮기게 되었다 합니다.

따라서 일명 진사성(晋舍城)이라고도 불리었던 정의성(旌義城)은 축석을 시작한지 불과 5일만에 세종(世宗) 5년 정월(正月)13일에 총 둘레 2,986尺, 높이 13尺의 규모로 완공되었는데, 성에는 동서남으로 세 개의 문을 두었고 성안에는 두 곳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읍치(邑治)로서의 정의성은 축성 초기에는 어느 정도의 가호(家戶)를 포괄하였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숙종(肅宗) 28년(1702) 이형상(李衡祥) 목사(牧使)의 탐라순역도(耽羅巡曆圖)에 의하면 당시 민가(民家) 호수(戶數)가 1,436호, 전답(田畓)이 140결(結), 성수비군(城守備軍)이 664명(名), 말 1,178필(匹), 흑우(黑牛) 228수(首)를 보유할 정도의 상당히 번성하였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순조(純祖)26년(1826)에는 성안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민가 80여동이 소실되는 재난을 겪은 적도 있었으나, 군(郡)으로 승격되어 군수(郡守)를 두게 되면서 성읍은 제주목(濟州牧)의 관할에서 벗어나 직접 전라도 관찰사의 관할아래 소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주의 지정학적(地政學的) 특성상 불편이 많자 고종(高宗)32년(1895)에는 지방제도 개편과 더불어 제주를 부(付)로 고쳤으며 따라서 목사를 관찰사로 바꾸었고, 판관제도(判官制度)를 참사관제도로 개편하여 군수를 겸하게 하였습니다.

광무(光武) 10년(1906)에는 고종 33년(1896)에 부활됐던 목사제도(牧使制度)가 다시 폐지되어 군수를 두게되었고, 급기야 1914년에 정의군은 대정군(大靜郡)과 함께 제주군에 합병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1423년 이후부터 약 5세기 동안 정의현의 도읍지로 번성하였던 성읍은 평범한 농촌마을로 차츰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1915년 5월 1일부로 제주군제도 마저 폐지되고 도제(道制)가 실시되면서 정의고을이었던 성읍은 한갓 표선면 면소재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지금의 표선면은 1935년 동중면이 개칭된 이름입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성읍민속마을은 그 역사적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하여 문화재적 차원에서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주도 지정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고, 이어 1984년 6월에는 총 1,425필지 3,191.711㎡의 면적이 중요민속자료 188호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었으며, 1978년 9월에는 보호구역이 935필지(790.747㎡)로 약간 축소 조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올라니못


건립연도 : 미 상
소재지 :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3292

 시거니못에서 약 100m 정도 하류로 천미천의 일부입니다. 이곳은 좌우에 아열대수림이 우거져 있고 청둥오리, 원앙새 등 겨울 철새들의 보금자리로 보입니다. 

성읍리는 물론 인근 가시리나 신풍리의 주민들이 음료수, 세탁, 여름에는 목욕 등으로 이용되던 못입니다. 
‘올라니’란 청둥오리가 이 연못에 겨울이면 많이 날아와서 붙은 이름입니다.

시거니못


건립연도 : 미 상
소재지 :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3292

표선리 방향의 길가에 있습니다. 
천미천의 일부로 성읍-표선간 동부산업도로를 만들 때 시거니못 좌우에 시멘트 옹벽을 치면서 못의 원형이 파손되고 말았습니다. 
주민들이 위쪽에 있는 물은 식수로 사용하였습니다. 

아래쪽 물에서는 채소를 씻고 솥을 걸어놓고 빨래를 삶아 인근의 너럭바위에 널어 말리기도 하던 곳이었습니다. 
밤에는 주로 여성들이 목욕을 하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웃마을인 가시리에서도 이용할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고 큰 못이었습니다.

참봉이기선휼궁비



규격 : 높이 62㎝, 너비 32㎝, 두께 10㎝

흉년이 들어 성읍리 백성들이 굶주리자 쌀을 마련하여 온 마을 사람들의 기근을 모면케 하는 등 백성들의 구휼에 힘쓴 이기선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입니다.

비의 전면에는 
‘참봉이기선휼궁비(參奉李寄善恤窮碑)’라 써 있습니다. 
비 앞면의 우면에는 ‘계속 드는 흉년 여름에 굶주린 자를 모두 배부르게 하다(年凶夏交 飢者咸飽)’, 
비의 앞면의 좌면에는 ‘쌀은 정해짐에 따라 한 말[斗]씩 나누니 한 고을이 은혜를 입었다. 1908년 정월 일(米石斗分 一鄕蒙恩, 隆熙二年 正月 日)’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성읍 조일훈 가옥(중요민속자료 제68호) 울타리 돌담에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 성읍리사무소의 비석군이 있는 곳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김씨효부정려비

규격 : 높이 60㎝, 너비36㎝, 두께 12㎝

추증 호조참판 조명윤(趙命允)의 아내입니다. 천성이 부드럽고 온화하며 행실이 고결하였습니다. 시부모 모시기를 효도로써 하고, 남편 섬기기를 공경으로 하였습니다.  일찍이 남편이 죽자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그 시아버지가 연로하여 봉양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시아버지 병이 위독하게 되자 대변을 맛보며 치료하고 병이 낫기를 빌었으므로 온 마을 사람들이 감탄하였습니다. 

이에 고종 28년(1891)에 효부 김씨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정문(旌門)과 함께 효부비(孝婦碑)를 세웠습니다. 비의 전면에는 ‘贈嘉善大夫戶曹參判趙命允妻孝婦貞夫人金氏之旌閭’, 전면 좌측에는 ‘光緖十七年辛卯八月十二日 判下’라 새겨져 있습니다. 비는 정의현성 동문 밖에 세워져 있습니다.

접(接)

성읍1리의 예전에 있었던 접은 다음과 같습니다.

접명

내 용

특 징

고레접

연자매 하나를 공동으로 설립, 운영한다.

성읍에는 16개의 ‘고래접’이 있었다.

장막접

장막을 공동으로 사들이고 계원들이 함께 쓴다.

계원 이외의 사람이 이용할 땐 사용료를 받는다. 하골장막계, 상골장막계가 있다.

화단접

‘상여계’로 초상을 같이 도와 치른다.

각 마을마다 화단접은 있다.

산담접

장사치르는 날 봉분과 산담을 같이 하기 어렵기 때문에 산담은 ‘산담계’에 의뢰한다.

산담쌓는 일을 해주고 그 수입은 계원 수입으로 처리한다.

쌀접

경조사나 가옥신축, 수리 때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모임.

쌀이나 현금을 모아두었다 필요할 때 쌀로 지원받는다.

쒜접

괭이, 삽, 지레 등의 구입을 할 때 비용부담을 같이 해서 구입하고 공동소유로 한다.

 

구술자

이영옥,여(75). 김채란,여(83).송심자,여(55)

자료 : 남제주의 문화유산 p.1002~1012

성읍 느티나무 및 팽나무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161호
소재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881-2 외 3필지
지정일: 1961. 1. 31
수량: 4그루

 조선시대 500여년간 정의현의 읍치였던 표선면 성읍리 일관헌(日觀軒)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느티나무(Zelkova serrata Makino) 한 그루와 팽나무(Celtis wildenowiana Romer et Schultes) 세 그루입니다.

 고려 충렬왕 때 이 마을에 매우 울창한 숲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불과 몇 그루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현재 느티나무는 키가 30m, 가슴높이의 둘레가 5m에 이르러 나무의 나이를 약 1,000년 정도로 봄.  팽나무는 키가 24∼32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 2.4∼4.5m이르며, 나무의 나이는 약 600년입니다.

성읍 조일훈 가옥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68호
건립연도 : 1901년
소재지 :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872
지정일 : 1979. 1. 22 
수량 : 1곽

부엌의 찬장에는 현대의 그릇들(유리그릇, 알미늄 주전자, 스텐레스 사발, 플라스틱 국자 등이 어수선하게 진열되어 있습니다. 
큰구들에는 궤, 서안, TV, 술병 등이 부조화를 이루며 놓여 있습니다.
마당 한가운데에 항아리, 화분이 있고 소나무와 양란이 심어져 있습니다. 
모커리 축사에서는 관람객에게 <제주꽝>엑기스와 <오미자차>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밖거리는 아예 모든 문이 닫아걸어져 있습니다. 
통시에는 흑돼지를 한 마리 기르고 있습니다(관람객 설명용). 
이 가옥이 목축을 많이 하던 집이라는 특징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1) 배치
정의현성의 객사터 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거릿길에 면한 대지는 정형에 가까운 네모꼴이고, 마당을 중심으로 안거리, 밖거리, 목거리가 ㅁ자로 배치된 이문간이 갖추어진 집입니다.

거릿길이 만나는 모서리를 이용하여 이문간으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북향하여 밖거리가 있으며, 밖거리 맞은편에 남향하여 안거리가 있고 마당 좌우측 안거리와 밖거리 사이에 목거리가 두 채 배치되어 있습니다.

마당은 폭 9.5m 길이 16m정도이며 안거리와 밖거리는 위계성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폭 6m의 안뒤는 큰 동백나무 등이 울담에 의지하여 공간을 구성하고 있으나 장항굽이 있었던 곳은 소멸되었으며 안뒤공간을 구성하는 담 또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안거리 동쪽에는 통시가 원형 그대로 보존이 잘 되어 있으나 목거리 동쪽에 있었던 우영공간은 남아 있지 않고 단지 근래 들어 심은 삼나무들만이 빽빽합니다.

(2) 안거리
평면구성은 가운데 상방을 두고 왼쪽으로 앞뒤에 정지와 작은구들, 오른쪽으로 앞뒤에 큰 구들과 고팡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큰구들과 상방 앞에는 난간이 있으며 큰 구들과 작은 구들 옆에 각각 굴묵이 위치합니다.

큰 구들에는 상방과 연결되는 샛벽에 쌍여닫이 세살문과 앞벽에 가로 78cm, 세로 145cm, 턱높이 12cm의 쌍여닫이 용자창이 설치되어 있는데, 창은 다시 안쪽에 쌍미닫이창이 덧달려 있습니다. 측벽에 붙여 위에는 구들 쪽으로 개방하여 벽장이 설치되었으며 아래에는 굴묵을 두었습니다. 고팡은 우물마루이고 상방 쪽으로 출입이 가능하도록 쌍여닫이 판문이 있습니다. 또한 뒷벽 쪽으로 판문으로 된 환기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상방에는 우물마루가 깔려 있고 앞벽에는 쌍여닫이 판문으로 하여 큰 구들쪽 가까이에 가로 78cm, 세로 145cm, 턱높이 28cm의 호령창과 그 옆에 가로 93cm, 세로 145cm, 턱높이 24cm의 대문이 있습니다. 뒷벽에는 뒷문 옆에 고팡쪽에 붙여 장방이 있고 반대쪽은 뭍등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정지는 흙바닥이며 앞벽과 측벽에 쌍여닫이 판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상방쪽 샛벽 또한 쌍여닫이 판문입니다. 측벽 가까이에 있는 화덕에는 4개의 솥이 배열되어 있습니다. 작은 구들은 정지의 일부에 포함되며 상방쪽으로 출입문과 뒷벽으로 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모두 쌍여닫이입니다. 작은구들의 난방은 외벽에서 출입하지 않고 정지 내부에서 이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붕은 초가이며 우진각 모양입니다. 지붕틀은 중도리가 곱은도리인 산방낭이 쓰여진 2고주 7량집입니다. 기둥과 보와 도리는 고사리맞춤으로 정교하게 짜 맞추었으며 도리의 아래에는 장혀를 보강하지 않았습니다. 기둥은 네모기둥을 사용하였으며 도리는 기둥과 비슷한 정도의 굵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초석은 모두 자연석을 이용한 현무암의 원통형 초석이고 잇돌은 전면에만 한단 놓여 있습니다. 처마내밀기는 64cm입니다. 마루는 바닥에서 37cm의 높이에 설치되어 있으며, 구들은 바닥높이가 마루바닥과 같다. 구들에서 천정높이는 210cm입니다.

(3) 밖거리
평면구성은 4간집으로 왼쪽으로부터 앞뒤로 마루방과 구들, 구들, 헛간, 그리고 연자방앗간 순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왼쪽 구들은 측벽쪽에 벽장을 두어 굴묵을 설치하였으며 앞에는 과거에 곡물을 보관하던 마루방이 있는데 내부에서 출입하지 않고 마당에서만 출입하도록 한 드문 예입니다. 두번째 구들은 앞뒤로 퇴공간을 둔 것과 외부로 출입하는 문과 구들로 출입하는 문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상방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오른쪽 두 간의 공간은 과거 말방애로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식당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지붕은 초가이며 우진각 모양입니다. 지붕틀은 중도리가 곱은도리인 산방낭이 쓰여진 2고주 7량집입니다. 기둥과 보와 도리는 고사리맞춤이며 도리의 아래에는 장혀를 보강하지 않았습니다. 기둥은 네모기둥을 사용하였으며 도리는 기둥과 비슷한 정도의 굵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초석은 자연석을 이용한 현무암의 방형초석이고 잇돌은 입구에만 한 단 놓여 있습니다. 처마내밀기는 59cm입니다. 구들은 바닥에서 19cm의 높이에 있으며 구들에서 천정높이는 216cm입니다.

(4) 목거리, 이문간
목거리는 3간집으로 지붕은 초가이며 7량집의 우진각 모양입니다. 과거에는 쇠막으로 쓰였으며 마당을 거치지 않고 소들이 측벽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계획되어 있습니다.

이문간은 3량의 3간집으로 우진간 지붕의 초가이며 가운데 문간을 설치하고 양 옆에는 헛간이 있습니다.

성읍 고평오 가옥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69호
건립연도: 19세기초
소재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859
지정일: 1979. 1. 22 
수량: 1곽

안거리는 마루와 부엌만 문이 열려 있고 나머지 문은 닫혀 있습니다.
큰구들에는 판매용 갈옷이 옷걸이에 걸려있고 이불이 개켜지지 않은채 어지럽게 있습니다. 
족은구들에는 판매용 기념품을 담은 검은 비닐봉지들이 쌓여 있습니다. 
안뒤의 장항굽을 비롯한 많은 공간들이 텅 비어 있습니다.
통시에는 흑돼지를 두 마리 기르고 있습니다(관람객에게 설명용).
밖거리는 항상 모든 문이 닫혀 있습니다. 
집에 사람이 산다는 기척과 온기를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1) 배치
정의현성의 남문에서 객사터로 가는 거릿길(폭 3.4m, 담높이 1.4m) 입구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대지는 거릿길에 비해 낮으며 네모난 모양입니다. 마당을 중심으로 남향하여 안거리가 자리하고 안거리 맞은편에는 밖거리가 북향하여 있습니다. 마당 동쪽에는 쇠막이 서향하여 배치되어 있으며 이문간이 갖추어진 집입니다. 과거에는 쇠막 반대쪽에 동향하여 막이 있었으나 70년대 중반에 헐렸습니다.

이문간 앞 올래의 어귀에는 지름 60cm정도 크기의 어귓돌이 양쪽에 놓여 입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문간을 지나면 마당으로 유도하는 목거리가 틀어져 배치되어 안거리의 기밀성 뿐만 아니라 안거리로의 자연스런 동선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밖거리로 유도하기 위한 잇돌이 놓여 있으며, 밖거리 측벽에는 마당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덧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덧벽의 굽돌은 지름 38cm, 높이 110cm 정도의 원통형 석재로 가공이 정교한 것으로 보아 성문의 주춧돌을 옮겨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당은 올래쪽으로 폭 11.9m, 반대쪽으로 폭 8.8m이며 길이는 16m정도입니다. 안거리와 밖거리는 일반 초가보다 큰 거리를 유지할 뿐 아니라 안․밖거리의 위계성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당 서쪽으로는 서북풍을 막고 시선을 차단하기 위하여 대나무들이 밀집되어 있습니다.

안거리 뒤에는 폭 4.5m의 사다리꼴 안뒤를 이루며, 한 그루의 큰 동백나무와 대나무들이 심어져 있습니다. 안뒤에는 다시 정지 뒷부분에서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담장을 따로 둘러 장독대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목거리 북쪽 측벽에 붙어있던 통시는 북쪽 담에 붙여 개량변소를 만들면서 헐어버렸습니다. 밖거리 뒤쪽은 우영공간이며 그 동쪽은 최근에 남방아를 설치하여 과거의 “접(계)”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2) 안거리
평면구성은 가운데에 상방을 두고 왼쪽으로 앞뒤에 큰구들과 고팡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정지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큰구들과 상방 앞에는 난간이 있으며 큰구들 옆에 굴묵이 위치합니다.

큰구들에는 앞벽에 가로 101cm, 세로 152cm, 턱높이 59cm의 쌍여닫이 판창과 다시 안으로 쌍미닫이 용자창이 있으며, 상방과 연결되는 샛문에 쌍여닫이 세살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구들 뒤에는 구들쪽을 향하여 단을 높여 문이 없는 벽장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고팡은 상방과 쌍여닫이 판문으로 연결되며 바닥은 우물마루입니다. 고팡문은 안미닫이였으나 후에 밖여닫이로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상방에는 우물마루가 깔려 있으며 상방뒷문 옆에 장방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앞벽 구들쪽 가까이에 가로 66cm, 세로 123cm, 턱높이 6.5cm의 호령창과 그 옆에 가로 112cm, 세로 167cm, 턱높이 6.8cm의 대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호령창 턱높이 또한 개조하면서 원형을 잃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뒷벽에는 대문과 일직선이 되지 않게 하여 안거리 뒤로 통하는 가로 88cm, 세로 132cm, 턱높이 6.5cm의 뒷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호령창, 대문, 뒷문은 모두 쌍여닫이 판문입니다.

정지는 앞벽에 문을 전면으로 향하지 않고 사선방향으로 빗겨 설치된 가로 82cm, 세로 174cm, 턱높이 42cm의 출입문과 뒷벽에 장항굽으로 통하는 가로 88cm, 세로 132cm, 턱높이 40cm의 뒷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모두 쌍여닫이 판문입니다. 정지의 측벽 쪽에 붙여 화덕이 설치되어 있는데 최근에 양회로 마감하여 본래의 맛을 찾아 볼 수 없다. 굴묵은 난간 쪽으로 트여 있었으나 개축하면서 폐쇄되어 마당에서 직접 출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큰구들과 상방 앞의 난간에는 마루가 설치되었으나 그 아래는 양회로 막아 잇돌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붕은 초가이며 우진각 모양입니다. 지붕틀은 곱은도리를 하지 않은 내민보이며 산방낭이 쓰여진 2고주 7량집입니다. 기둥과 보와 도리는 고사리맞춤으로 정교하게 짜 맞추었으며 도리의 아래에는 장혀를 보강하지 않았습니다. 기둥은 네모기둥을 사용하였으며 도리는 기둥과 비슷한 정도의 굵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초석은 모두 자연석을 이용한 현무암의 사다리꼴 초석이고 잇돌은 양회로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처마내밀기는 90cm정도로 일반적인 제주도 초가보다 긴 편입니다. 마루는 바닥에서 58cm의 높이에 높게 설치되어 있으며, 구들은 바닥높이가 마루 바닥과 같다. 구들에서 천정높이는 229cm입니다.

(3) 밖거리
평면구성은 가운데 두 실의 연속된 구들을 중심으로 뒤에 굴묵이 있으며, 구들 왼쪽으로 앞뒤에 장방을 둔 마루방, 오른쪽에 정지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구들을 중심으로 마루방을 배치한 수법은 육지의 상류주택의 실배치와 유사합니다.

정지쪽 구들은 뒤에 반침을 두어 문을 설치하였고 마루방쪽 구들은 문을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정지쪽 구들은 난간쪽으로만 문이 설치되어 있고 문 크기가 가로 114cm × 세로 157cm로 마루방쪽 구들문(가로 65cm x 세로 132cm)보다 큰 것으로 보아 과거에는 구들이 아닌 상방으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문이 세살문이 아닌 쌍여닫이 판문인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마루방쪽의 구들은 난간과 마루방으로 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난간쪽이 작고 마루방쪽이 큰 것(가로 91cm x 세로 154cm)으로 보아 난간쪽 문은 창의 역할을 하였으며 마루방과 연결된 문은 출입구로 이용되었다고 보아진다.

마루방은 앞뒤로 문이 설치되었지만 마당을 거쳐서 출입하지 않고 측벽으로 바로 출입이 가능하도록 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안거리를 안(여자)공간, 밖거리는 바깥(남자)공간으로 영역을 분리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보입니다. 밖거리 측벽에 덧벽을 설치하여 안거리와의 시선을 차단한 것 또한 그렇습니다.

정지에는 앞뒤로 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측벽쪽으로 솔받침대인 화덕만이 놓여 있습니다. 난간에는 마루가 깔려 있고 정지로 바로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있으며 난간 끝에 다용도로 쓰이는 장방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붕은 초가이며 우진각 모양입니다. 지붕틀은 정지쪽은 곱은도리를 하지 않고 산방낭이 쓰여 졌으며 마루방쪽은 곱은도리로 된 곱은도리와 산방낭이 혼합된 2고주 7량집입니다. 기둥과 보와 도리는 고사리맞춤으로 정교하게 짜 맞추었으며 도리의 아래에는 장혀를 보강하지 않았습니다. 기둥은 네모기둥을 사용했으며 도리는 기둥과 비슷한 굵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초석은 모두 자연석을 이용한 현무암의 방형초석이고 잇돌은 전면에만 한 단이 놓여 있습니다. 처마내밀기는 63cm정도입니다. 긴 편입니다. 마루는 바닥에서 8.5cm의 높이에 매우 낮게 설치되어 있으며 구들은 바닥높이가 마루바닥과 같습니다. 구들에서 천정 높이는 232cm로 매우 높습니다.

 (4) 목거리, 이문간
목거리는 1고주 6량의 4간집으로 우진각 지붕의 초가입니다. 왼쪽으로부터 수레간, 방아간, 그리고 쇠막 순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방아간의 출입도 마당에서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소의 출입은 마당을 거치지 않고 측벽 출입구로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문간도 3량의 3간집으로 우진각 지붕의 초가입니다. 가운데에 문간을 설치하고 양옆에는 헛간이 있습니다.

성읍 이영숙 가옥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70호
건립연도: 19세기초
소재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799
지정일: 1979. 1. 22 
수량: 1곽

구들, 마루에는 한 개의 민속품도 없이 텅 비어 있습니다.
정지에는 뚜껑없는 알미늄 솥 하나가 있습니다. 
마당 구석에 비석이 하나 엎어져 있습니다. 
헛간은 텅비어 있습니다. 
완전히 빈집과 같은 휑한 분위기입니다.

(1) 배치
정의향교의 북쪽에 이웃하여 위치하고 있습니다. 활꼴 거릿길을 따라 들면, 부정형한 대지에 이문간 없이 마당을 앞에 두고 동향하여 안거리가 자리하고 맞은편에 헛간이 안거리와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습니다. 입구 옆 우영공간의 눌이 있던 곳에는 신축한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으며 안거리 북쪽 측벽 앞에는 통시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안거리 뒤쪽에는 상방에서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담으로 구획되어 안뒤공간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 뒤에는 제주도 가옥배치에서는 보기 드물게 넓은 우영이 일구어져 있습니다.

(2) 안거리 
평면구성은 가운데에 상방을 두고 왼쪽으로 앞뒤에 정지와 작은구들이 있으며, 오른쪽에 큰구들과 고팡이 앞뒤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큰구들과 상방 앞에는 난간이 있습니다. 상방에는 우물마루가 깔려 있으며, 상방뒷문 옆 고팡 사이에 장방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앞벽 구둘쪽 가까이에 가로 68㎝, 세로130㎝, 턱높이 33㎝의 호령창과 그 옆에 가로 94㎝, 세로 156㎝, 턱높이18㎝의 대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문은 모두 쌍여닫이 판문입니다. 

큰구들은 측벽쪽에 굴묵공간을 둔 벽장이 있었으나 기름 보일러로 난방방식을 바꾸면서 구들공간을 확장하였습니다. 앞벽에 가로 77㎝, 세로 139㎝, 턱높이 31㎝의 쌍여닫이 세살창과 안쪽에 다시 쌍미닫이 용자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고팡에는 우물마루가 깔려있으며 상방쪽으로 쌍여닫이 판문의 출입문과 뒷벽에 쌍여닫이 판문의 환기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작은구들에는 상방쪽에 쌍여닫이 용자문과 뒷벽에 외여닫이 세살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정지는 흙바닥이며, 앞벽에 가로 94㎝, 세로 131㎝, 턱높이 32㎝의 출입문과 측벽에 가로 59㎝, 세로 119㎝, 턱높이 33㎝의 뒷문이 있습니다. 모두 쌍여닫이 판문입니다. 솥덕 뒤의 불치공간은 찾아볼 수 없으며 솥덕이 놓였던 자리에는 양회로 마감한 솥덕이 있습니다.

지붕은 초가이며 우진각모양입니다. 지붕틀은 곱은도리를 하지 않은 내민보이며 산방낭이 쓰여진 2고주 7량집입니다. 기둥과 보와 도리는 고사리맞춤으로 정교하게 짜 맞추었으며 도리의 아래에는 장혀를 보강하지 않았습니다. 기둥은 네모기둥을 사용하였으며, 도리는 기둥과 비슷한 정도의 굵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초석은 모두 자연석을 이용한 현무암의 사다리꼴 초석이고 잇돌이 한 단 놓여 있습니다. 처마내밀기는 75㎝입니다. 마루는 바닥에서 31㎝의 높이에 설치되어 있으며, 구들은 바닥높이가 마루바닥과 같다. 구들에서 천정높이는 223㎝입니다.

(3) 헛간
헛간은 5량의 2간집으로 우진각 지붕의 초가입니다. 앞벽 가운데 쌍여닫이 판문의 출입구를 두고 있으며, 지금은 관광객들이 차를 마시는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성읍 한봉일 가옥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71호
건립연도: 19세기 중반
소재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928
지정일: 1979. 1. 22 
수량: 1곽 

대문입구의 팽나무 밑둥과 우영팟에 양식전복 껍질, 구젱기 껍질을 마구 가져다 놓았습니다. 
안내자는 상군 해녀의 집이라고 관람객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문거리 양 옆 곳간에는 스티로폼으로 제작한 남방아가 놓여 있습니다.
통시에는 흑돼지 두 마리를 기르고 있습니다(관람객에게 설명용).
상인이 이 집의 방 2개를 상품창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나무와 우영팟이 아름다운 집이 점점 품격을 훼손당해가고 있습니다.

(1) 배치
정의현성의 동문지 옆에 위치합니다. 부정형한 대지에 마당을 중심으로 동향하여 안거리, 맞은편에 서향하여 밖거리, 남향하여 이문간을 두고 마당공간을 남쪽으로 트이게 한 전형적인 제주도 초가의 ㄷ자형 배치형식입니다.

동문지 앞 거릿길에서 짧은 올래를 두어 이문간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거릿길과 대지와는 고저차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옆으로 우영이 있어서 올래의 맛을 한층 더 높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입구를 나타내기 위하여 올래의 입구에는 동백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마당은 폭 9.1m, 길이 14m 정도로, 안거리와 밖거리는 일반 초가와 비슷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안뒤는 상방 또는 정지로만 출입할 수 있도록 담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동백나무 등이 울타리를 따라 안뒤공간을 감싸주어 전형적인 안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안뒤공간에 놓여있던 장독대는 소멸되어 아쉬움을 남깁니다.

마당 남쪽에는 눌이 두 곳에 놓여 있었으나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통시가 있었던 곳에는 개량변소가 들어서 있습니다.

(2) 안거리
평면구성은 가운데 상방을 두고 왼쪽으로 앞뒤에 정지와 작은구들이 있으며, 오른쪽에 큰구들과 고팡이 각기 앞뒤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큰구들과 상방 앞에는 난간이 있으며 큰구들 옆에 굴묵이 위치합니다.

상방의 문은 쌍여닫이 판문으로 앞벽에 대문과 뒷벽에 뒷문이 설치되어 있고 호령창은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바닥에는 우물마루가 깔려 있으며 뒷문 옆 고팡쪽에 장방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큰구들에는 앞벽에 가로 82cm, 세로 148cm, 턱높이 13cm의 쌍여닫이 세살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측벽에 붙여 뒤에는 구들쪽으로 개방하여 벽장이 있으며 아래에는 굴묵을 두었습니다. 큰구들 뒤쪽의 고팡도 지금은 바닥을 온돌로 바꿔 방으로 개조하였습니다.

정지는 흙바닥이며 측벽 가까이에 솥들이 나란히 놓였던 솥덕만이 남아 있습니다. 앞벽과 측벽에 쌍여닫이 판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앞벽의 출입문은 동선이 원활하도록 빗겨져 있습니다. 정지 앞 출입문 옆에는 물구덕을 얹어 두는 물팡이 있습니다. 작은구들에는 상방으로 출입하기 위한 외여닫이 세살문과 뒷벽에 외여닫이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지붕은 초가이며 우진각 모양입니다. 지붕틀은 중도리가 내민보인 산방낭이 쓰여진 2고주 7량집입니다. 기둥과 보와 도리는 고사리맞춤으로 정교하게 짜 맞추었으며 도리의 아래에는 장혀를 보강하지 않았습니다. 기둥은 아래보다 위가 넓은 14.5cm × 14cm의 네모기둥을 사용하였으며 도리는 기둥과 비슷한 굵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초석은 마루보다 높은 현무암의 방형초석이고 처마내밀기는 68cm입니다. 마루는 바닥에서 22cm의 높이에 설치되어 있으며, 구들은 바닥높이가 마루바닥과 같다. 구들에서 천장 높이는 220cm입니다.

(3) 밖거리
평면구성은 왼쪽으로부터 마굿간, 상방과 뒤에 마루방, 앞뒤로 구들과 구들이 배치되고 그 옆에 반침을 사이에 두고 정지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제주도 초가와는 달리 상방을 앞뒤가 긴 한 간으로 꾸미지 않고 상방의 뒤쪽에 작은구들을 둔 점이 특이합니다.

지붕은 초가이며 우진각 모양입니다. 지붕틀은 중도리가 곱은도리이며 내도리 또한 곱은도리로 된 2고주 7량집입니다. 기둥과 보와 도리는 고사리맞춤이며 도리의 아래에는 장혀를 보강하지 않았습니다. 기둥은 네모기둥을 사용하였으며 도리는 기둥과 비슷한 정도의 굵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초석은 자연석을 이용한 현무암의 방형초석입니다. 마루는 바닥에서 33cm의 높이에 있으며 구들은 바닥높이가 마루바닥과 같다. 구들에서 천정높이는 189cm입니다.

(4) 이문간
2고주 5량의 3간집으로 우진각 지붕의 초가입니다. 가운데 문간을 설치하고 양 옆에는 헛간과 쇠막이 있습니다.

성읍 고상은 가옥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72호
건립연도: 19세기 말
소재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862
지정일: 1979. 1. 22
수량: 1곽

문은 모두 알미늄 샛시로 바꾸어져 있습니다.
마당에 천막창고를 지어서 경운기, 오토바이, 농기구 등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마당은 완전히 시멘트 하였습니다.
입구 쪽에 가건물을 지어 안내인들에게 임대하여 주고 있습니다.  
주민들이 저렇게 원형이 훼손된 집을 국가가 지정을 해지 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당국의 처사를 의아해합니다.

(1) 배치
고평오 초가의 맞은편 길건너 현감만이 이용하였다는 ‘남문물통’이란 우물이 있었던 바로 길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안거리는 마당을 앞에 두고 남향하였으며 목거리는 안거리와 ㄱ자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거릿길이 만나는 두 모서리를 이용하여 올래 없이 바로 마당으로 출입구를 두었습니다. 제주초가의 외부공간 요소인 안뒤는 안거리가 뒷울담과 붙어 배치되어 찾아 볼 수 없으며 안거리 측벽쪽으로 담을 구획한 장항굽 공간이 있었으나 최근에 안거리 공간을 확장하면서 헐렸습니다. 안거리와 목거리 사이에 있던 통시는 개량식 화장실로 개조되었습니다.

(2) 안거리
평면구성은 가운데 상방이 있고, 왼쪽에 큰구들, 오른쪽에 구들이 앞뒤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다시 그 오른쪽에 앞뒤로 정지와 구들이 있습니다. 평면의 간살이가 모두 개조된 것으로 보입니다. 상방에는 우물마루가 깔려 있으며, 상방뒷문 양옆에 제기를 보관하는 장방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앞벽은 난간쪽으로 공간을 확장하여 벽과 문을 허물어 트여 있습니다. 뒷벽의 뒷문을 제외하고 구들로 연결되는 통로의 문은 쌍미서기창으로 개조되어 있습니다. 상방과 큰구들 앞의 난간에는 네짝 또는 두짝 미닫이 현대식 문을 설치하였습니다.

큰구들은 뒤에 고팡과 굴묵공간까지 확장하여 가로 350㎝, 세로 480㎝ 크기의 하나의 방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큰구들 맞은편 정지와 작은구들로 되어 있던 공간 또한 정지를 구들로 개조하였으며, 다시 오른쪽으로 정지공간과 세면장을 확장하였습니다.

지붕은 초가이며 우진각 모양입니다. 지붕틀은 곱은도리를 하지 않는 내민보이며 산방낭이 쓰여진 2고주 7량집입니다. 기둥과 보와 도리는 고사리맞춤으로 정교하게 짜 맞추었으며 도리의 아래에는 장혀를 보강하지 않았습니다. 기둥은 네모기둥을 사용하였으며 도리는 기둥과 비슷한 굵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초석은 모두 자연석을 이용한 현무암의 방형초석이고 잇돌은 양회로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처마내밀기는 69㎝입니다. 마루는 바닥에서 33㎝의 높이에 설치되어 있으며, 구들은 바닥높이가 마루바닥과 같습니다. 구들에서 천정높이는 240㎝로 매우 높습니다.

(3) 헛간
헛간은 5량의 2간집으로 우진각 초가입니다.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토산품집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제주민요


소재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지정일: 1989. 12. 4
종목: 오돌또기, 맷돌노래, 산천초목, 봉지가 등 4수
예능보유자: 조을선(사망)

정의현청이 있는 성읍에서는 제주도 민요의 대종을 이루는 노동요와는 그 성격이 확연히 다른 창민요가 일찍부터 불려졌습니다. 

창민요 중에서도 특히「오돌또기」ㆍ「관덕정앞」ㆍ「용천검」ㆍ「계화타령」ㆍ「사랑가」ㆍ「봉지가」ㆍ「산천초목」등이 유명합니다. 
이중에서 「오돌또기」ㆍ「맷돌노래」ㆍ「봉지가」ㆍ「산천초목」등 4개의 민요를 1989년 12월 4일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제주민요」라는 명칭으로 지정하였는데 예능보유자는 조을선(趙乙선)이었습니다. 

2000년 조을선이 작고한 이후 아직까지 보유자는 정하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보유자 후보는 이곳에 살고 있는 이선옥입니다. 
조교인 강문희는 조을선의 외손녀(孫女)로 성읍에 살면서 그 맥을 잇고 있습니다.

정의향교(旌義鄕校)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5호
건립연도 : 1423년(세종 5)
소재지 :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820-1
지정일 : 1971. 8. 26 
수량 : 3동
보호범위 : 경내 1필지 3,316㎡

1423년(세종 5) 정의현의 읍치(邑治)를 성산읍 고성리에서 진사리(晉舍里․현 성읍리)로 이설할 때 향교를 서성(西城) 안에 건립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관아가 가깝고 여염집이 떠들썩하여 문묘의 자리로서는 적합지 않다고 여겨져 매번 옮겨 세우자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1809년(순조 9) 여철영(呂喆永) 현감이 부임하여 이같은 의견을 모아 북성(北城) 쪽인 화원동(化源洞)에 옮기기 위하여 1810년 10월 24일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객사의 화재로 여철영 현감이 체임되었고, 그의 후임 노상희(盧尙熙) 현감에 의해 다음해 3월 9일 완공되었습니다.

그 후 1849년(헌종 15) 장인식(張寅植) 제주목사가 조정에 소청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고, 1967년 보수하였습니다.
현재 복원된 건물은 대성전ㆍ명륜당ㆍ수선당ㆍ수호사ㆍ내삼문ㆍ협문(2동)ㆍ동재ㆍ서재 등이 있습니다.
수호사는 원래 수복고(守僕庫)로 정의서당 터입니다.

정의읍성의 서문 옆 약간 높은 언덕에 동향으로 위치해 있습니다. 
좁은 골목이 대성문까지 이어 있고 들어서서 정면이 내삼문과 담장을 두른 대성전 일곽이고 남측 옆으로 명륜당, 수선당과 수호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대성전은 전면 5칸, 측면 2칸에 전후에 퇴가 있습니다. 앞퇴는 틔여 있고, 바닥에 박석을 깔았다. 기단은 낮고 원뿔대형의 장주초 위에 민흘림 두리기둥을 굵게 썼습니다.

7량집으로 기둥머리에 창방을 얹고 주두를 놓아 화반으로 장혀와 도리를 받고 있습니다. 당초문이 선각되어 있고 보아지와 화반, 대공은 모두 와선무늬로 되어 있습니다. 천정은 연등천장이며 완만한 물매의 겹처마 합각지붕으로 여느 건물과 비슷합니다. 명륜당 역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전후좌우 퇴집입니다. 전퇴는 토방이고 중앙 3칸은 판청이고 좌우익은 온돌과 고방으로 고전적인 간잡이를 하고 있습니다.

전퇴는 박석을 완자형으로 깔고 기단은 낮고 원뿔대형 장주초에 민흘림 두리기둥을 쓴 것은 대성전과 비슷합니다.

지붕은 합각지붕이나 홑처마로 여러 모로 민가방식과 같이 처리했습니다. 즉 기둥머리에 퇴보를 맞추고 창방을 직교시켜 사괘 맞춤으로 올리고 창방 위에 도리를 놓은 것을 위시하여 보아지와 대공의 모양가지 매우 간결하고 실용적인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일관헌(日觀軒)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7호
건립연도 : 1443년(세종 25)
소재지 :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809-1
지정일 : 1975. 3. 12
수량 : 1동
보호범위 : 건물 추녀 끝에서 사방 30m

조선시대 정의현감이 정사를 보던 동헌입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합각지붕이다. 전면 16.5m 측면 7.3m의 규모입니다.
1443년(세종 25) 현감 송섬(宋暹)이 창건했습니다. 여러 차례 중수되었습니다. 1898년(광무 2) 강인호(康仁鎬) 군수와 1903년(광무 7) 홍종우(洪鍾宇)목사가 편액을 지었습니다. 일제시대에는 면사무소로 사용되었고 그 후에는 리사무소로 이용되었습니다. 현재 건물은 1975년 옛 건물을 헐어서 새로 지은 것입니다.

성읍 정의현청의 동헌건물로 마을 중심의 도로변에 위치해 있습니다. 건물 앞에 넓은 마당을 두고 돌담이 둘러 있고 일각대문으로 출입합니다. 현 건물은 1975년에 개축한 것인데, 기둥을 콘크리트를 사용한 유사한 전통건물로 간잡이도 동헌의 일반형인 5칸이 아닌 4칸이고 측면이 2칸인 19세기 이후 민가의 간잡이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두벌대 현무암 기단 위에 합각지붕으로 외형적인 권위를 갖추고 있을 따름입니다. 전면퇴는 우물마루로 트여 있고 좌측퇴는 수납과 「굴묵」으로 사용합니다. 간살이는 가운데 2칸이 판청이며 양측간은 방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동문 돌하르방(북우)


동문 돌하르방(북좌)


동문 돌하르방(남우)


동문 돌하르방(남좌)


소재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일대
지정일: 1971. 8.26

장방형의 구역을 만들어 정주석과 정낭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보호하고 있습니다.
스텐레스로 만든 안내판이 서있습니다. 
성읍의 돌하르방 중에서 중간 크기의 형태입니다.

서문 돌하르방(북우)


서문 돌하르방(북좌)


서문 돌하르방(남우)


서문 돌하르방(남좌)


소재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일대
지정일: 1971. 8.26

돌담에 기대듯이 서있어 자연스럽기고 원형의 모습에 충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보호울타리도 없어 자동차에 받혀 훼손을 입을까 하는 우려를 자아냅니다.

남문 돌하르방(동우)


남문 돌하르방(동좌)


남문 돌하르방(서우)


남문 돌하르방(서좌)


소재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일대
지정일: 1971. 8.26

남문 입구에 따로 장방형의 구역을 만들어 정주석과 정낭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보호하고 있습니다. 
성읍의 돌하르방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몸피도 큰 형태입니다. 
스텐레스로 만든 안내판이 서 있습니다.

통시


<사진 출처> NAVER

제주도의 뒷간은 '통시'라고 부르며 돼지우리와 함께 있다. 사람의 똥은 돼지 먹이의 일부가 되는데 통시를 돝통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허벅과 물구덕

<사진 출처> NAVER

구덕은 물건을 담아 등에 맬 수도 있는 바구니와 같은 것이고, 물허벅은 물을 담는 용기(容器)이다.

정낭


집 밖으로 통하는 대문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담과 담 사이에 가로로 나무를 꽂아 동물의 출입을 막는 구실도 한다.

정지


장독



정소암 화전놀이

조선시대에는 봄이 되면 정소암으로 현감은 들놀이를 갔다. 정소암이란 영주산 기슭을 휘돌아나가는 천미천의 계곡을 말합니다.

하얀 너럭바위들이 펼쳐진 곳에 가마솥과 같은 푸른못이 있고 계곡 양옆에는 아열대성 수림이 우거진 명승지입니다.

현감의 이 봄놀이 행사에는 여인들을 동원하여 진달래꽃으로 화전 등 운치 있는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기생들의 소리와 춤과 풍악이 어우러졌으며 초대받은 선비들은 시를 읊었습니다.

이 정소암 화전놀이에는 제주목사도 초대받아 갈 정도로 정의 기생의 교태와 함께 이름 있는 놀이였습니다.
이 전통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소규모의 봄맞이 들놀이 정도로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으며 지금은 친목계원들 끼리 모여서 가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성읍민속마을에서는 아직도 초가지붕을 새[띠]로 이는 광경을 겨울이면 볼 수 있습니다.
민속가옥으로 지정된 5개의 민가를 비롯해서 지정구역 내에는 아직도 초가지붕을 가진 집들이 더러 있습니다.
지붕일기는 가을농사를 완전히 끝내고 음력으로 섣달에 접어들면 줄을 꼬는 등 입춘 전에 지붕을 새로 일기 위해 하나씩 일을 진행해 나갑니다.
전에는 지붕일기를 하려면 동네사람들이 모아들어서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일당을 받는 인부들이 하기 때문에 주인이 없어도 별 지장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초가지붕을 일 때에 태풍에 불렸던 부분이나 걸어 다녀 봐서 푹 꺼지는 곳은 더욱 보강하였으나 지금은 주인이 없으니 건성으로 대충하는 정도라 지붕의 선이 튼실하지도 않고 곱지도 않습니다.

걸궁


연자마


연자마는 농사를 짓는 규모가 큰 농기구의 하나입니다.
제주도의 재래적인 주곡은 조와 보리 및 잡곡이었고, 이를 장만하는 데는 연자마의 이용도가 높았습니다. 제주도의 연자마는 구조가 탄탄하고, 조밀하게 분포되었다는 점이 다른 지방과는 다른 점입니다. 제주도에는 1974년 표본조사를 해 본 결과 평균 29가구당 연자마가 하나씩 설치되었을 만큼 연자마가 흔했었습니다.

포제(祭)

포제는 리민이 총동원된 남성 위주의 유교식 제례입니다. 매년 음력 정월 初丁日에 지내며 제단은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포제동산에 있습니다.  

祭官은 음력 12월 25일에 열리는 리민대회에서 선정되며 가급적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잇으며 명문출신이라야 합니다.

祭官들은 執祭 24시간 전에 이미 정해진 祭廳에 모여서 준비하게 된다. 즉 初丁日 오전 1시쯤 거행되는 제사를 앞두고 祭廳에서 祭服차림으로 예행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祭需로는 돼지 1마리(15관 이상, 예전에는 소1마리), 소고기, 생선, 祭米, 祭酒, 香獨, 幣帛紙 등입니다. 祭享費는 全里民이 공동으로 부담합니다.

이곳의 포제에 특이한 것이 있다면 祭享對象神입니다. 祭享對象神은 <諸首任神之位> <梁疾神之位> 외에 <牧童神之位>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 마을의 축산업이 주요생업으로서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正月에 지내는 酺祭는 마을 사람들이 한마음을 이루는 출발이 됩니다.>

<포제동산>

자료 : [ 성읍민속마을 보존 및 육성기본계획 1980 제주도 ]

마을의 민간신앙 - 당

당이름

당신(堂神)

제일(祭日)

제 물

당의 특징

문호당

허물할망

생기맞는날에 가나 주로 3,7일에 간다.

메 1기

피부병 치료와 육아에 효험

안할망당

안할망

(관청할망)

생기맞는날에 가나 주로 정월에 간다.

메 4기, 제숙, 과일, 계란, 명실, 지전, 물색, 소주 등(육류는 금한다)

송사, 시험, 승진 등을 기원

자이루일뤠당

일뤠한집 (토산할망)

6/7, 9/17, 11/27

메, 돌래떡, 술, 과일, 계란, 생선


- 문호당
성읍민속마을 표석에서 제주시 가는 방향으로 조금 가다 보면 길 건너편으로 과수원이 있는데 당은 그 안에 나무가 우거진 곳이 있습다. 당은 돌담으로 둘러져 있고 면적은 약 4평 정도입니다. 주위에 나무가 많이 있으며 그 중심에 가느다란 나무가 있어 거기에 물색을 걸어놓았습니다.

- 안할망당
명칭 : 안할망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락민은 ‘당’이라 부르지 않고 ‘안할망’, ‘안할마님’, ‘관청할마님’ 등 친근감 있게 부르고 있습니다.

위치 : 마을 중심부 현청(일관헌)옆에 있습니다.

구조 : 과거에는 늙은 팽나무 신목 앞에 돌을 모아 제단을 꾸미었고 주위는 돌로 울타리를 둘렀으나 1971년 이사무소를 신축하게 됨에 따라 그 부지에 접하게 되어 팽나무 밑둥에 있었던 당을 그 바로 서쪽 돌담 너머에 2평 가량의 슬레이트집을 짓고 이설(移設)하였습니다.

유래 : 본향당이지만 본풀이를 해낼 수 있는 심방은 없습니다. ‘안할망’이란 원래 ‘안칠성’이라 하는 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안칠성’이란 집안의 고방(庫房)에 모시면 부를 갖다 주는 사신(蛇神)으로 일반적으로는 가내신(家內神)으로 모셔지고 있는데, 이 마을에선 마을의 부를 갖다 주는 당신으로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매인심방 : 원래 성읍리는 매인심방이 없습니다. 60여 년 전에 정의지방에서 가장 큰 심방이던 ‘고평이’가 살았을 때 이 당을 맡고 있었으나 후손이 없어 계승을 못하고 그 후 이 사람 저 사람이 안할망을 모셔 1~2년 살면 전부 나가버리다가 20여 년 전에는 한원평씨가 큰심방으로 당을 맡고 있었으나 역시 후손이 없어 본풀이를 완전히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어졌으며 큰굿도 안하게 됐습니다.

- 상궁알당(자니루일뤠당)
상궁알당 또는 토산할망당, 일렛당이라고도 합니다. 마을 서쪽 끝에서 약 300m 거리에 있습니다. 백지와 광목 등 물색이 걸린 늙은 팽나무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길게 자연석 제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당은 약간 둥글게 돌담으로 둘러처져 있고 면적은 약 5평 가량 된다. 남동향으로 제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제일은 유월 초이레, 초여드레 및 동짓달 초이레, 초여드레, 열이레, 열여드레이며 원래 심방들 자신을 위한 당이어서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굿은 친숙한 민간신앙이었습니다.

자료 : 남제주의 문화유산 p.1002~1012

안할망당


일관헌과 바로 담 하나를 두고 있는 신당으로 벽돌 기와집입니다. 원래 신앙처는 일관헌 옆의 팽나무 밑에 돌담으로 둘러막아 있었습니다. 
신체(神體)는 기왓장 두개를 마주붙인 모습으로 그 속에 여인의 노리개나 구슬, 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에는 일관헌 서쪽의 광주부인당과 함께 모셨다가 광복 이후 현재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남제주군(현재:서귀포시)이 1990년대에 그 자리에 기와집을 짓고 신체인 기왓장을 나무로 만든 감실 속으로 옮겼습니다. 
신앙인들이 아직도 새벽에 찾아와 기원하고 있습니다. 건물의 왼쪽에는 인물형태의 괴석(怪石)이 놓여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스텐레스 안내판이 있습니다.

문호당

건립연도 : 미 상
소재지 :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1525

 제주시 쪽에서 성읍마을로 들어서기 위해 가파른 언덕을 내려와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이 당이 뚜렷이 보입니다. 주변은 감자밭인데 청자, 분청사기, 백자, 토기 등의 파편이 발견되었습니다. 원형의 돌담으로 에워싸여 있고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습니다. 어린이의 종기 등 피부병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진 당입니다. 지전물색은 보이지 않으나 주민에게 물어보니 아직도 신앙인이 있다고 합니다.

포제단(酺祭壇)

건립연도 : 미 상
소재지 :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1534

 마을에서 일년에 한번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유교식 마을제인 포제를 지내는 곳입니다. 상단과 하단이 있는데 상단은 돌담을 네모지게 둘렀으며 위쪽의 제단은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단은 상단의 오른쪽 돌담 옆에 자그마하게 돌담을 둘러 곁방처럼 만들었습니다. 

역시 제단이 있습니다. 상단에서는 포신(酺神)에게, 하단은 제수임신(諸首任神) 염질신(染疾神) 목동신(牧童神)에게 일년에 한번 제를 지냅니다. 
상단의 제를 먼저 지낸 후에 하단의 제를 진행합니다. 

제일은 해마다 첫 정일(丁日) 또는 해일(亥日)이며 희생은 검은 수퇘지 한 마리입니다. 제청은 조립식 건물로 지어져 있으며 여기서 제관들이 3일 동안 머물며 정성합니다. 

이때 포제청의 출입을 삼가야할 사람은 탈상을 하지 않은 상주, 몸이 부정한 사람(여자와 관계한 사람, 몸에 상처가 나서 피를 흘린 사람, 환자를 위문한 사람 등)입니다. 2007년도 포제는 입제 2월 20일(음력 1월3일), 파제 2월22일(음력 1월5일) 일정으로 치러졌으며 제관은 다음과 같습니다. 

초헌관 최기종, 아헌관 강창석, 종헌관 강기숙, 전사관 김규영, 집례 이영진, 대축 고광석, 알자 송충훈, 찬인 정영규, 찬자 강철, 봉로 홍두표, 봉향 강계언.

성읍교회

건립연도 : 1908년
소재지 : 표선면 성읍리  901

1908년 도내 첫 교회인 제주시 성내교회가 세워진 다음 해(1909년) 창설되었습니다. 
현 450평 규모의 교회시설은 1970년에 개축된 것입니다.

법성사

건립연도 : 1964년
소재지 : 표선면 성읍리 1386-9

대한불교 일붕선교종 법성사터이다. 전신은 대한불교 법화종 영불사입니다.
1964년 창설, 1987년 규모를 갖춘 가람을 마련했으나 2002년 10월 법당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습니다.

세시풍속(歲時風俗)

正月 (설빔, 세배, 상보기, 걸궁, 토정비결, 콩 윷놀이, 투전놀이, 할망당 가기, 酺祭, 장담그기, 연날리기, 春榜, 符籍붙이기, 除厄)

二月 (한식일-先墓 손질)
三月 (時祭, 미역캐기)
四月(첫돌애 머리깎기)
五月 (단오-그네뛰기)
六月 (닭 補身, 갈옷 짓기)
七月 (七夕비, 물 맞기, 마풀림, 牛馬祭, 호박 · 박줄치기)
八月 (掃賁, 동백기름 짜기)
九月 (심방굿)
十月 (牛馬 烙印)
十日月 (지붕이기, 祭酒빚기)
十二月 (꿩사냥, 雪寒占, 新旧間, 儠平엿, 접쇠<契牛>잡기, 鄉會, 묵은세배, 칼국)

자료 : [ 성읍민속마을 보존 및 육성기본계획 1980 제주도 ]

- 세시풍속 : 양력으로 정리 -

정월과 2월
양력으로 정월멩질을 하는 사람들은 1월에 합니다. 공식적으로 1월 2일까지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정을 인정하게 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음력설로 돌아섰으나 오랜 공무원 생활을 한 집안에서는 양력으로 명절을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민은 ‘구정’으로 하고 있습니다. 타향에 가서 생활하던 사람들도 이때는 고향에 돌아와 세배를 하고 친척들을 돌아봅니다. 일가친척에 대한 세배는 차례를 지낼 때 만나게 되면 자연스레 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네 어르신에 대한 세배는 노인당에서 합동으로 하고 있으며 이때 성의껏 성금을 내놓고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노인당 벽에는 성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이 걸려 있습니다.
구정이 닥쳐와 가면 미리 조를 짜서 돼지를 추렴하여 제수용으로 사용하고 평소에 신세를 졌던 분에게 선물하기도 합니다. 여성들은 집에 스님을 청하여 한해의 평안을 비는 안택제(安宅祭)를 지내기도 하는데 모든 세대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 

3월과 4월
한식에 무덤의 산담 무너진 것을 보수하거나 잔디가 벗어진 것을 보충합니다. 3월의 시제가 문중 차원에서 하는 산소 돌보기라면 2월에는 개인별로 자기가 제사를 모시는 산소를 돌보는 일입니다.  
시제[時祭]에는 문중차원에서 비석을 세우거나 이장, 산담 등 많은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는 산역(山役)을 ‘모다들어서’ 합니다. 이에 대한 준비는 정시[풍수지리사]의 자문에 따라 준비기간이 약 1년 정도 걸리며 하나하나 순서에 따라 진행해온 일입니다.  
여성들은 일년 동안 제사와 명절에 사용할 고사리를 꺾으러 부지런히 들로 나갑니다. 고사리는 햇살이 좋은 낮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흐리거나 안개비가 내리는 날에도 새벽부터 나갑니다. 고사리는 조상의 제사와 명절에 반드시 올려야할 채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사리는 싹이 아홉이라 꺾어도꺾어도 다시 돋아나므로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손이 번성하는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5월
4월초파일 석가탄신일(부처님 오신 날)에는 여인들은 한복을 입고 절에 갑니다. 가정의 평안과 가족의 건강 및 행복을 빌기 위해서입니다. 성읍민속마을 안에는 절이 없어서 표선이나 서귀포시에 있는 절에 다니고 있습니다.   
5월 5일은 어린이날이어서 손자가 찾아오면 용돈은 손에 쥐어주며 “착한아이가 돼라”, “공부 잘해라” 하는 덕담을 합니다. 아들과 며느리, 손자들과 식사를 하거나, 관광지에 놀러가서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5월 8일은 어버이날입니다. 멀리 육지에 가서 살고 있는 자식에게서 전화가 오고 용돈도 보내옵니다. 제주시나 서귀포시에 나가 살고 있는 자식들도 찾아온다. 선물로 가져오는 것은 건강식품이나 옷, 용돈 등입니다. 같이 식사를 하러 나갈 때도 있습니다. 부녀회와 청년회에서 합동으로 어버이날 행사를 해줍니다. 마을회관에서 공동으로 식사를 하고 선물을 나누어 받기도 합니다. 버스를 타고 관광지로 관광을 나가기도 합니다. 이때 몸이 아파서 거동을 하지 못하는 어르신에게도 선물이 똑같이 배달됩니다. 
 
6월
보리와 유채를 거두어들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이 두 작물은 힘이 좋아서 비만 맞으면 싹이 나기 때문에  장마가 들어오기 전에 부지런히 거두어서 말려두어야 안심할 수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은 햇보리로 개역[보리미수가루]을 만들어서 이웃에도 돌리고 사돈집에도 보내고 자식들에게도 보낸다. 여름 밑반찬 마농지시[마늘장아찌]를 담그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7월
음력 유월 스무날은 전통적으로 닭을 잡아먹는 날입니다. 봄에 알을 깬 병아리가 알맞게 자랐고, 몸이 약한 사람은 닭을 한 마리쯤 잡아먹어야 여름 무더위를 무사히 넘길 수 있다고 전해 내려오는 말입니다. 그래서 친척 어르신에게 닭을 한 마리 선물로 가져가기도 합니다. 여자는 장닭, 남자는 암탉이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8월
갈중이를 만드는 계절입니다. 음력 7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는 직사광선이 ‘중대가리 깨지게 쏟아지는’ 날들이 이어진다. 확실하게 하루 종일 날씨가 좋을 날을 골라서 풋감을 새벽에 따내려 도구리에 빻고 감물을 들입니다. 만들어놓은 광목 중이 적삼을 깨끗이 빨아서 말려 두었다가 감물을 들인 후 햇볕에 널어서 오전오후 앞뒤를 돌려가며 말리면 발갛게 색이 돋아납니다.
음력 7월 15일은 백중입니다. 이때 신경통이 있는 여자들은 물 맞으러 산속으로 갑니다. 검은 모래가 있는 남원의 공천포 바닷가로 모래뜸을 뜨러 가기도 합니다. 
목축을 하는 사람들은 백중에 들에 나가 쉐코사[牛告祀]를 지냅니다. 소나 말의 진드기 구제를 하면서 마소의 피부와 건강을 점검합니다. 예전에는 귀에 표시를 하거나 낙인을 찍었는데 지금은 낙인은 찍지 않는다. 

9월
조상의 묘에 벌초(伐草)를 합니다. 집안의 벌초는 자식들이 알아서 적당한 날을 잡아 하지만 음력 8월 초하루는 문중 벌초날로 정해져 있습니다. 이때 서울이나 육지부에 사는 자손일지라도 참석하지 못하면 경비라도 보내야 합니다. 요즘은 묘 한 자리 벌초 값이 3만원에서 5만원 정도입니다.
동백나무 열매인 돔박이 익어서 벌어지기 시작하면 따 모아서 기름을 짭니다다. 머릿기름은 물론 기관지천식에 약으로 복용하며 가구의 곰팡이 제거에도 좋습니다다.

10월
추석명절에는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난 후 무덤에 다시 차례를 지내러 가기도 합니다. 일가친척과 방상들이 모여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집안에 조카 결혼 같은 경사가 있으면 이에 대한 의논도 하고 역할 분담에 대한 토론도 합니다. 전에는 떡을 집에서 만들었으나 이제는 떡집에 맞추고 집에서 만드는 음식은 적(炙)과 삼색나물 정도입니다. 추석에 먹는 나물로 양엣간[양하꽃]이 있습니다. 방향이 독특하며 데쳐서 마늘을 빚어넣고 깨소금에 양념하여 먹으며 양에지[장아찌]를 만들기도 합니다.  마소의 먹이인 촐[꼴]을 베어서 말려 저장하며 산에 방목했던 소나 말을 찾아서 집으로 데려옵니다.

11월
사냥을 좋아하는 사람은 꿩코를 여기저기 놓아두곤 꿩이 걸려들었는지를 날마다 확인하러 다닌다. 남자들은 저녁이면 모여앉아 잡담을 하며 놀다가 밤이 깊어지면 이 계절의 별미로 꿩고기에 메밀국수를 만들어 먹습니다. 명절에 제주로 쓸 오메기술을 담급니다.

12월
초가지붕을 갈이 할 준비를 합니다. 품질이 좋은 새[띠, 茅]를 사들이고 줄을 꼬아줄 사람을 미리 맞추어 약속을 하고 날을 잡아 합니다. 돼지를 추렴하여 나누어다가 부모님께도 드리고 가족의 영양보충도 합니다. 신구간에 이사할 사람들은 미리미리 이사 갈 집이나 방을 수소문하여 알아둡니다. 연말이 되면 친목을 하는 사람들은 모여서 한 해가 무사히 지난 것을 축하하고 새해의 우의를 다지는 망년회를 합니다. 대개는 저녁을 먹고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십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