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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23. 22:05 내가 읽은 책들/2011년도
2011-089 옛절터

글, 사진●윤덕향
1995,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3084

082
빛12ㄷ 44


빛깔있는 책들 44

윤덕향------------------------------------------------------------------------

서울대학교 고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화재연구소에서 근무하였다. 지금은 전북대학교 고고인류학과 교수로 있다.

|차례|

시작하는 글
중요한 절터
   황룡사지
   미륵사지
   정림사지
   감은사지
   만복사지
   미륵리 사지
우리나라 가람 배치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와 조선시대
절터 조사의 보람
절터 일람


황룡사지

▲ 황룡사 금당지 「삼국유사」에 기록된 장육존상이 모셔졌을 것으로 보이는 금당지에 대한 조사에서는 기단의 형식이 2중기단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 서금당지 황룡사의 서쪽 금당은 가운데의 금당에 비하여 규모가 작고 파괴가 심하였다. 기단의 형식은 중앙 금당과 동일한 2중기단이었다.

▲ 기단 내부 대좌 중앙에 있는 큰 대좌 옆쪽으로 작은 대좌가 자리하고 있어서 주존불 옆에 작은 불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좌석 윗면의 홈에 불상의 촉을 끼움으로써 불상을 안정되게 모시는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 강당지 강당은 일반적으로 사원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다. 황룡사지의 경우 강단의 기단 규모는 52.64X21.1미터 길이인 300여 평의 건물로 강당에 모였던 사람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다.

▲ 목탑지 백제 사람인 아비지가 세웠다는 목탑은 높이 225자에 이르는 것이다. 이같은 높은 건물을 지탱하기 위하여 목탑지의 하부에는 4미터에 가까운 깊이에서부터 주춧돌을 놓고 있다.

▲ 목탑지 심초석 심초석은 길이 4.35미터, 폭 3미터의 장타원형을 이루는 화강암으로 30여 톤의 무게를 가진 것이었다. 안에는 사리를 모시기 위한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사진에 보이는 것은 이 심초석 위에 놓여 있는 돌이다.

▲ 종루지 황룡사에는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보다 더 큰 종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종루지에 걸어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경루지 종루와 함께 3차 가람에서부터 가람의 중심곽에 들어서게 된 건물로 황룡사에 큰 종이 만들어진 854년을 전후한 시기에 건축된 건물로 보인다.

▲ 중문지 절의 중심곽인 탑과 금당이 있는 구역에 들어오기 위해서 지나는 문은 중문이 된다. 황룡사의 중문은 창건된 이래 3차에 걸쳐 고쳐 지은 것이다.

▲ 발굴조사 광경 황룡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1976년부터 실시되고 있다. 이 조사를 통하여 가람의 배치와 변화 과정 등이 밝혀지고 규모가 확인됨으로써 동양 최대의 가람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 곡옥 심초석 하부와 주변에서 출토된 2,890여 점의 유리 구술중 수정, 유리, 마노의 곡옥도 있었다.


미륵사지

▲ 미륵사지 서탑 미륵사에는 중앙에 목탑이 자리하고 그 동서에 각각 1기씩의 석탑이 있었다. 현재는 서쪽의 석탑만이 남아 있는데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한 가장 초기의 것으로 보인다.

▲ 동금당지 전경 미륵사지의 지하 유구를 보여주는 동금당지의 바닥은 불로 구워져 있엇고 높은 초석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금당지의 앞쪽에는 면석이 보이며 앞에 있는 사각의 동른 석등대석이다.

▲ 동금당지 기단 내부 금당지에는 높은 초석이 자리하고 있으며 건물의 네 모서리 부분에는 기단과의 사이에 일종의 환기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이 환기시설은 지하 공간을 유지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 서금당지 지하 유구를 만들기 위하여 높은 초석의 윗면에 홈을 파서 옆으로 이어지는 긴 하방석을 놓고 그 위에 마루청을 깔았을 것으로 보이며 초석과 기단 사이는 마루청의 밑까지 흙으로 채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 중금당지 석등 목탑의 북변 계단지에서 석등 쪽으로 장대석을 깔았으며 탑과 금당 사이에 있는 석등의 하대석에는 백제 말기 양식의 연화문이 있다. 이 하대석의 북쪽에는 상대석이 엎어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 승방지 동원과 서원의 북회랑에는 북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건물지가 있다. 건물지 내부는 크게 4개처로 구획하였는데 각 구획마다 2개씩의 방이 있다. 

▲ 강당지 미륵사의 강당지와 승방지의 북면 기단이 있는 쪽에는 동서로 긴 석축이 자리하고 있다.

▲ 녹유 서까래 기와 일곱 개의 연꽃마다 인동자엽이 표현되었고, 기와의 중심에는 네모진 구멍이 있어서 서까래에 못으로 고정할 수 있도록 되었다.

정림사지

▲ 정림사지 전경 전형적인 1탑식 가람 배치 형태의 절터로 알려진 정림사지의 전경. 좌측에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있고, 그것들을 둘러싸는 회랑이 정비되어 있다.

▲ 발굴조사 광경 1980년에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유적의 보존 상태가 극히 불량하여 조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신중하고 정밀한 조사를 통하여 절터의 성격과 규모에 대한 많은 것을 밝혀낼 수가 있었다.

▲ 5층석탑. 한때 평제탑이라고도 불렸던 백제의 석탑으로 낮은 기단과, 얇으면서 추녀 끝이 위로 올라가고 있는 지붕돌 등 백제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림사의 창건과 더불어 만들어진 것으로 실제 연대에 있어서 미륵사지 석탑보다도 일찍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 금당지 정림사는 백제가 멸망할 당시에 상당한 파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유구의 잔존 상태가 극히 불량하였는데 금당지에서는 2중기단이었음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도용 흙으로 빚어 만든 인형과 같은 것으로 불상의 일종이라 생각된다. 이 도용의 표면에 각종의 색을 칠하여 장식하였는데, 온화한 백제의 미소가 남아 있다.

감은사지

▲ 감은사지 전경 절터에 대한 것으로는 1959년에 처음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 금당지 지하 유구 감은사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의지가 담겨 잇는 곳이다. 용으로 변한 문무왕이 쉴 수 있도록, 홈이 있는 주춧돌에 긴 돌을 끼우고 다시 돌을 가로질러 덮어 완성한 지하 유구를 설비하였다.

▲ 석축 감은사지 남쪽에 있는 이 석축은 부두의 배를 대는 시설과 비슷하게 보인다. 따라서 동해로부터 배를 타고 이 절에 드나들 수 있게 마련한 것으로 생각된다.

▲ 용혈(龍穴) 금당 밑의 지하 유구에 용이 드나드는 통로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 통로를 용혈이라고 한다. 사진은 용혈로 추정하는 것으로 미륵사의 금당에서와 같이 지하 유구를 지탱하는 환기시설의 기능을 하면서 동시에 용의 통로를 상징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 주종유구(鑄鐘遺構) 감은사지의 서편 건물지에서 노출된 유구로, 종을 만들던 곳으로 추정된다. 땅을 파고 그 중심에 둥글게 얇은 와전을 쌓고 흙을 발랐으며 매우 높은 온도로 구워진 흔적이 있다.

▲ 강당지 기단 외부 와편 노출 상태 강당지 기단 외부에 기와편이 노출되어 있는 상태로 지붕에 놓였던 기와가 그대로 떨어져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유구를 통하여 당시 기와를 놓는 방법과 주춧돌에서 처마가 얼마나 앞으로 나왔는가 등을 알 수 있다.

▲ 석재 절터를 발굴하다보면 용도를 알 수 없는 유물이 출토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길이가 긴 이 석재는 톱날무늬가 있는 중앙 부분에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어 흥미롭다.

만복사지

▲ 만복사지 전경 남원시에 자리한 만복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1979년부터 1985년까지 실시되었다.

▲ 북금당지와 목탑지

▲ 만복사지 5층 석탑 전라도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백제계 석탑의 양식이다. 단층의 기단이며 초층 탑신에 비해 2층에서는 탑신의 높이가 갑자기 감소되어 옥개석과의 조화를 잃고 있다.

미륵리 사지

▲ 미륵리 절터 전경 암굴사원 형태의 미륵리 절터는 기본적으로 탑과 금당을 일직선상에 배치하는 구도를 따르고 있다. 북쪽에서부터 탑, 석등, 석불이 자리하고 있다.

▲ 석불 둥근 테의 모자를 쓰고 있는 모양의 석불 주변에는 석축을 쌓은 형태의 구조물이 3면을 두르고 있다. 이것은 인공적인 석굴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이 안에 불상이 모셔졌다.

▲ 석등 석탑과 석불의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진 전형적인 석등이다.

▲ 석탑 일반적으로 탑이 금당의 남쪽에 자리하는 것과는 달리 불상의 위치와 함께 북쪽에 자리한 점이 미륵리 절터에서 특이한 점이다. 탑의 상륜부 일부가 결실되었다.

▲ 예산 사면석불 충남 예산의 사면석불은 백제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불의 주위에 건물을 짓고 예배를 드렸을 것이며 탑이나 석등 등이 없는 간단한 형태의 절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 굴불사지 사면석불 이차돈이 순교했을 때 목이 날아가 떨어졌다고 전해지는 곳에 백률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 산인 금강산의 기슭에 땅에서 부처가 나왔다는 굴불사의 사면석불이 자리하고 있다.

▲ 굴불사 건물지 석불의 주위에는 건물지가 있었는데 금당의 기능을 지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굴불사지 조사에서는 금당지만이 확인되었는데 석불을 예배하는 장소였던 것 같다.

▲ 굴불사지 출토 종 이 종 안에 작은 종이 들어 있었다. 정상부에 우리나라 종의 특징을 갖춘 용통이 있으며 몸체에는 주악 천인상과 당좌가 교대로 배치되고 있다.

▲ 반자 대정(大正) 23년이라는 명문이 있어 고려 명종 13년(1183)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 죽죽리 절터 기단 전을 이용하여 기단을 쌓은 예는 극히 드문 일인데 여기서는 크고 넓적한 전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기단을 형성하였다.

▲ 미륵사지 당간지주 통일신라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지주 사이에는 깃대를 받치는 돌이 있으며, 두 지주의 안쪽에는 깃대를 지탱하기 위하여 버팀대를 끼우는 간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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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