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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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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7-3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돌하르방 어디 감수광

 

|명월성|  명월포(지금 한림항)와 비양도에 왜구가 나타나는 것을 대비해 쌓은 진지이다. 조선 중종 때 목성으로 축조되고 선조 때 석성으로 개축되었는데 이후에도 제주 서쪽을 방어하는 군사시설 기능을 해왔다.

|명월성 팽나무 군락|  수령 400년까지 되는 노거수 팽나무 65그루가 명월천변을 따라 줄지어 있다. 이리 굽고 저리 굽으면서 자란 굴곡진 팽나무 줄기에는 모진 바람을 이긴 강한 생명력이 서려 있다.

|명월대|  명월천 한쪽에는 풍류를 즐기던 사람들이 야외무대로 삼았던 명월대가 남아 있다.

|백난아 기념비|  폐교된 명월국민학교는 제주 갈옷 몽생이 작업장이 되었고 교문 옆에는 명월리가 고향인 「찔레꽃」의 가수 백난아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산방산|  오름의 섬에 이처럼 불쑥 솟은 바위산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장대한 기상의 산방산이 있음으로 해서 제주의 서남쪽은 동쪽의 성산일출봉과 달리 색다른 풍광을 선사해준다.

|산방굴에서 내다본 풍경|  산방굴사는 산방굴이라는 자연 석굴 안에 불상을 모신 절로 굴 앞에서 내다보이는 바다는 선적인 고요함이 있다.

|하멜상선전시관|  하멜이 표착할 때 타고 온 스페르베르호를 복원하여 전시관으로 삼은 것이다. 멀리서 보아도 그럴 듯하고 의도도 좋았다. 다만 예산이 부족해서 실물 크기가 아니라 80퍼센트 축소했다.

|『하멜보고서』|  서양에 코리아를 알린 최초의 기행문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사실은 하멜이 보상금을 받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이다.

|서물과차 각석| 서불이 새겼다고 전하는 이 글씨는 '서불과차(徐市過此)'로 판독되기도 한다. 서귀포, 남해, 거제도에 똑같은 형상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무태장어|  보통 장어보다 몇배나 더 큰 무태장어는 그 서식지가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는데 천지연과 천제연 폭포 아래에서 서식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천지연폭포|  너무도 유명한 천지연폭포는 언제나 관광객으로 만원인데, 명불허전이라고 그 장쾌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는 제주의 자랑으로 삼을 만하다. 폭포 위쪽으로 자생하고 있는 담팔수 여섯 그루는 천연기념물이다.

|용머리해안|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용머리처럼 보였지만 막상 해안가로 내려가면 거대한 절벽들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일으킨다.

|송악산과 진지동굴|  절울이오름이라고도 불리는 송악산은 제주 서남쪽의 마침표 같은 오름으로 바다를 내려다볼며 걷는 산길이 사뭇 행복하다. 절벽 아래로는 일제가 파놓은 진지동굴이 줄지어 있다.

|해안 절벽의 진지동굴|  송악산 아래 절벽엔 일제가 태평양전쟁 때 파놓은 진지동굴이 줄지어 있다. 이 군사시설을 위해 제주인들은 혹독한 사역에 동원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어떤 동굴은 디귿자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진지동굴|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제는 알뜨르 비행장에 20개의 비행기 격납고를 만들었다. 견고한 콘크리트 돔으로 축조하고 그 위를 흙과 풀로 덮어 위장한 이 격남고들은 일제가 마지막 옥쇄작전지의 하나로 제주도를 생각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알뜨르 비행장 훈련기 모형|  알뜨르 비행장에서는 카미까제 특공대 조종사들의 훈련장이기도 했다. 그들의 훈련기는 잠자리 모양의 빨간색이어서 '아까똠보'라고 불렀다.

|백조일손지묘|  '백 할아버지 한 무덤'이라는 이 무덤은 4 · 3사건의 후유증이 얼마나 슬프고 비참했는지를 말해주는 유적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예비검속으로 학살당한 132명의 시신을 7년 만에 수습하면서 뼈만 추려 봉분을 만든 공동묘지이다.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저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저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 김지하,  「빈 산」(『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추사 김정희 초상|  추사의 제자인 소치 허련이 그린 추사의 초상이다. 갖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학예를 높은 차원에서 완성한 인품이 잘 나타나 있다.

|납읍 산신당|  천연기념물 제375호인 제주 납읍리의 난대림은 후박나무, 생달나무, 종가시나무 등이 제주 천연의 모습을 전해준다. 숲속 깊은 곳에는 해묵은 곰솔을 앞에 둔 번듯한 산신당이 있어 신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추사 유배지|  추사는 대정에 유배되어 8년 3개월간 귀양살이를 했다. 전후 세 차례 집을 옮겼는데 여기는 강도순의 집터에 그가 처음 살던 송계순의 집 모양을 편지에서 말한 대로 복원한 것이다.

|「세한도」|  추사가 남긴 불후의 명작인 「세한도」는 제작 과정, 여기에 첨가된 시문들, 그리고 그 이후의 전래 과정이 모두 하나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로 엮어진다.

|추사 유배지 안채|  추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집을 '귤중옥'이라 이름지었다. 매화나 연꽃은 육지에서도 볼 수 있으나 귤만은 제주가 아니면 볼 수 없다며 허허로운 마음으로 귀양살이를 받아들였다. 담장 너머로는 하귤 한 그루가 있다.

|추사 유배지의 수선화|  추사는 일찍부터 수선화를 좋아했다. 육지에서는 귀한 이 수선화가 제주에 지천으로 널려 있어 농부들이 웬수 보듯 하는 것을 보면서 사물이 장소를 잘못 만나면 당하는 것이 이러하다고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 말하곤 했다.

|추사의 「수선화부」 탁본|  추사의 그림과 글씨는 후대에 사모하는 이가 많아 여러 가지 탁본으로 간행되었다. 그 중 수선화를 노래한 「수선화부」 마지막에는 몽당붓으로 아무렇게나 그렸다는 수선화 두 송이 그림이 실려 있다.

|추사의 '무량수각' 현판|  추사는 귀양살이 내려오면서 해남 대흥사에 '무량수각'(위)이라는 현판을 써주었고, 또 그후 고향 예산의 회암사를 중수하자 '무량수각'(아래)을 써주게 되었다. 이 두 글씨에서 보이는 차이는 곧 추사가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면서 추사체를 형성하게 되는 과정을 잘 말해준다. 앞의 글씨는 살이 찌고 윤기가 나는데 뒤의 글씨는 군더더기 없이 필획의 골기만 남기고 있다.

|「완당선생해천일립상」|  소치 허련이 그린 추사 선생 귀양살이 모습이다. 이 그림은 소동파가 하이난에 유배되었을 때 나막신 신고 도롱이 입은 모습을 그린 「동파입극도」를 번안하여 그린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추사의 삶과 학예가 소동파와 비슷했다고 말하곤 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