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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2. 15:05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120-1 한국사傳

6

슈퍼맨

아버지의 눈물

- 영조

 

1762년 윤5월 13일.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둔다.

울부짖는 아들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뒤주에 못질을 한 아버지.

영조는 왜 아들을 죽여야 했을까?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 봄을 맞아 안부를 물으면서자신은 "한 가지 병이 깊어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흉중을 털어놓고 있다.

오른쪽에 사도세자의 수결이 들어가 있는 사도세자의 친필 편지. 중간에 비밀로 해달라는 뜻에서 잠(潛)이란 글자를 덧붙인 게 보인다.

사도세자 8세때 글씨.

정조 때 편찬된 종합 무예교본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桶志》. 사도세자가 지은 《무기신식武藝新譜》이란 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조 영정.

1742년 당시 여덟 살이었던 사도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해 세운 탕평비.

탕평책을 논하는 자리에 처음 등장했다는 데서 유래한 탕평채.

《승정원일기》 가운데 영조의 명에 의해 지워진 사도세자에 관한 부분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창경궁의 휘녕전.

 

7

조선의 여성 CEO

- 김만덕

 

조선의 명재상 채제공의 책 《번암집》에는

자신의 삶을 개척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정조 20년(1796) 가을, 제주 출신의 한 여인이 궁에 들어섰다.

평민 신분의 여성이 임금을 알현한 것은 조선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김만덕.

그녀는 열녀도 효부도 아니었다.

빈 손으로 시작해 일약 제주 최고 부자에 오른 상인이었다.

최악의 흉년에 시달리던 200년 전 제주, 만덕은 자신의 재산을 풀어 수천 명의

제주도민을 살려냈다. 상업용 천하게 여기던 조선 사회,

그녀는 시대보다 앞서 돈의 가치에 주목했다.

출선기. 제주에서 뭍으로 나가는 배들은 모두 출륙허가서인 출선기를 발급받아야 했다.

김만덕 영정.

김만덕 묘비.

<탐라순력도>(일부). 귤 밭에서 제주 목사가 기녀들과 풍악을 즐기고 있다.

옛 제주항의 모습.

김만덕의 객주 집터.

객주매매문서.

태양열에 바닷물이 증발하면서 배추 절이기에 적당한 염도의 물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짐치통'이라는 이름이 붙은 바위 웅덩이.

제주시 애월읍의 염전바위. 갯벌이 없는 제주는 너른 바위 위에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하기도 했다.

객주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 객주는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상품을 위탁 판매하는 일종의 중개상인이었다.

제주의 특산물이었던 말총. 갓에 필요한 재료 중 하나.

양태장인 양순자 씨가 양태를 짜는 모습.

제주와의 교역이 가장 활발했던 강진 마량항. 지명에 마(馬)라는 글자가 남아 있을 정도로 제주와 인연이 깊은 교통의 요충지이자 상업의 거점이었다.

충남 논산시 강경포구의 옛 모습. 제주 특산품은 뱃길이 험했던 칠산 바다를 건너 당시 전국 3대 시장 중 하나인 충청도 강경까지 진출했다.

금강산 유람지도.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은 풍류객들에게 대단한 명예로 여겨졌다.

채제공의 영정. 당시 정승이던 채제공은 그녀의 일대기를 글로 써서 선물할 만큼 그녀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8

비운의

라스트 프린세스

- 덕혜옹주

 

1962년 군사정권이 들어서던 해,

한 여인을 태운 비행기가 김포의 활주로에 내려섰다.

비행기가 도착하는 순간, 고운 한복을 입은 노인들이 큰 절을 올렸다.

"아기씨"

아기씨라고 불린 그 여인은 38년 만에 다시 보는 고국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기씨는 일본으로 끌려가야 했던 고종의 외동딸,

잊혀진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여 덕혜옹주다.

영친왕 이은(오른쪽). 열한 살이 되던 해에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의해 일본으로 보내졌다.

고종의 시종이었던 김황진. 덕혜의 부마로 자신의 조카 김장한을 천거했던 사실이 들통 나 궁에서 쫓겨났다.

의친왕 이강. 고종이 독살되었음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19년 11월 9일 신의주로 탈출을 강행했지만, 국경에서 일본경찰의 감시망에 걸리고 말았다.

고종은 원래 9남 4녀를 두었지만, 순종황제 척(拓), 의친왕 강(堈), 영친왕 은(垠), 그리고 덕혜(德惠) 옹주.(위에서부터) 이렇게 3남 1녀만 생존했다.

덕혜가 일본식 교육을 받았던 일출초등학교 교적지.

동창생이 증언한 덕혜의 학창시절을 기록한 문서.

덕혜의 생모인 양귀인.

천담복을 입은 덕혜의 모습이 실린 기사.

덕혜의 남편인 소 다케유키 백작.

덕혜의 결혼식 기사에서 남편 얼굴을 지워버린 <조선일보>.

덕혜의 딸 마사에.

덕혜와 남편 소 다케유키. 1931년 11월 쓰시마섬 방문 당시 촬영.

김을한. 덕혜의 남편이 될 뻔한 감장한의 친형이자, 조국에서 잊혀진 덕혜를 맨 처음 찾아 나선 인물이다.

유모 변복동 씨와 덕혜옹주. 변씨는 1972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옹주 곁을 지켰다.

말년의 소 다케유키의 모습과 그가 잠들어 있는 쓰시마섬 만송원.

정신이 맑은 날 썼다는 덕혜옹주의 메모.

 

사진으로 보는 덕혜옹주 일대기

1913년. 덕혜옹주 돌사진.

덕수궁 즉조당의 유치원 시절.

당의를 입은 덕혜.

덕혜 나이 열 네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당시 기모노를 입은 모습. 1925년 3월 28일 경성역에서 촬영.

일본여자학습원 재학 시절. 하카마를 입은 덕혜.

1931년 5월 8일. 스무 살의 나이에 소 다케유키 백작과 결혼식을 올리는 덕혜.

1931년 11월. 결혼식 후 처음으로 쓰시마 시댁을 방문했을 때.

1962년 1월 26일. 3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리는 덕혜.

1972년 덕혜옹주 회갑.

1983년 KBS 취재진의 카메라에 잡힌 생전 마지막 모습.

덕혜옹주 영정.

 

9

김옥균을 쏜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 홍종우

 

"김옥균 씨가 상해의 호텔에서 함께 동행한 조선인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했음."

- 일본 <유빈호치신문郵便報知新聞> 1894년 3월

 

1894년 3월. 상하이에서 김옥균이 암살당했다.

범인은 그와 함께 호텔에 투숙했던 홍종우.

지금까지 홍종우는 의문의 암살자로 남아 있다.

오구니 마사시가 그린 <김옥균 씨 조난 사건>. 도쿄경제대학 도서관 소장.

<최신역사>에 등장하는 김옥균(아래)과 홍종우의 그림.

홍종우가 파리 방문을 기념해 찍은 사진. 기메 박물관 소장.

1894년에 새긴 홍종우의 명함. 기메 박물관 소장.

레가미가 그린 홍종우의 초상.

<춘향전>을 번역한 책 <향기로운 봄> 홍종우 · J.H. 로니 번역.

《심청전》을 번역한 책 《마른나무에 꽃이 피다》.

홍종우가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한 《직성행년편람》.

홍종우의 자필 결근계.

기메박물관 지출내역서. 홍종우가 월급으로 100프랑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홍종우가 근무했던 기메 박물관 한국관.

홍종우가 파리의 명사들 앞에서 연설했던 카페 되 마고 외경.

북촌 일대를 중심으로 신문물을 논했던 개화파들.

김옥균이 그린 갑신정변 작전도.

홍종우가 김옥균을 암살한 상하이 뚱허양행(동화여관)의 모습. 이곳 2층에서 김옥균이 암살당햇다. 1894년 3월 27일 당시 사진.

일본 신문에 실렸던 김옥균 추모금 모집광고.

홍종우의 1차 상소문 초본. 

도쿄 아오야마 공원에 있는 김옥균의 묘.

제주 목사 시절 홍종우.

 

10

조선 장수의

흑룡강 승전보

- 신유

 

조선의 국경에서 2000여 리 떨어진 흑룡강.

1658년 음력 6월 10일, 이곳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과 청나라 연합군과 러시아군이 격돌한 것이다.

이는 당시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을 결정 짓는 국제전이었다.

바로 이 전쟁에 조선의 조총병 200명이 참전했다.

이들은 조선 청나라 연합군의 결정적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조선의 러시아 정벌, 그 현장에 조선의 명장 신유가 있었다.

신유의 《북정록》. 인쇄본이 아닌 신유의 친필 그대로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해 있는 회령시.

청나라가 주둔했던 옛 성터에 남아 있는 비석. 청나라 정부는 영고탑을 기지로 흑룡강과 송화강 일대에서 침략을 일삼던 러시아 토비들을 물리치기 위해 여러 번 파병했다.

러시아를 상징하는 성 바실리 사원. 16세기 말 본격적인 시베리아 진출에 나서면서 건립되었다.

아무르지역박물관.

전립.

퉁장시의 탑.

흑룡강.

훈련도감터.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