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2 열하일기 1
박지원 지음 | 김형조 옮김
2014, 돌베개
대야도서관
SB102080
816.5
박78ㅇ 1 c. 2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사람들은 단지 인간의 칠정七情 중에서 오로지 슬픔만이 울음을 유발한다고 알고 있지, 칠정이 모두 울음을 자아내는 줄은 모르고 있네. 기쁨이 극에 달하면 울음이 날 만하고, 분노가 극에 치밀면 울음이 날 만하며, 즐거움이 극에 이르면 울음이 날 만하고, 사랑이 극에 달하면 울음이 날 만하며, 미움이 극에 달하면 울음이 날 만하고, 욕심이 극에 달해도 울음이 날 만한 걸세. 막히고 억눌린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버리는 데에는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은 없네, 통곡 소리는 천지간에 우레와 같아 지극한 감정에서 터져 나오고, 터져 나온 소리는 사리에 절실할 것이니 웃음소리와 뭐가 다르겠는가?
생김새가 사뭇 다르고 옷차림이 다른 사방의 외국인들, 칼과 불을 입으로 삼키는 요술쟁이들, 라마불교와 그 승려 반선班禪, 난장이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비록 괴상망측하게 생긴 사람들이지만, 『장자』에서 말하는 도깨비나 물귀신과 같은 그런 부류는 아니다. 『열하일기』 안에는 진기한 새나 짐승, 아름답고 특이한 나무에 대해서도 그 생긴 모습과 특징을 완벽하게 묘사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등 길이가 천 리가 되는 새, 8천 년 묵은 신령한 참죽나무 등과 같은 『장자』의 황당한 과장이나 거짓말을 어찌 이야기했으랴!
이제야 알겠다! 장자가 지은 외전外傳에는 실제도 있고 거짓도 있지만, 연암씨가 지은 외전에는 실제만 있고 거짓이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언을 겸하면서도 끝내 이치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귀결시킨 방법은 서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
중국의 노래나 가요에 관한 것, 풍습에 관한 기록도 사실은 나라의 치란에 관련된 것들이고, 성곽과 궁실에 대한 묘사라든지, 농사짓고 목축하며 도자기 굽고 쇠를 다루는 것들에 대한 내용은, 그 일체가 기구를 과학적으로 편리하게 사용하여 민생을 두텁게 하자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길이 되는 내용으로서, 모두 『열하일기』 안에 들어 있다. 그리하여 『열하일기』라는 책은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취지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
- 유득공의 '머리말' 중에서
지은이 박지원朴趾源(1737~1805)
조선 후기의 저명한 문학가이고 실학파 학자로,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이다. 명문 양반가 출신으로 약관의 나이에 문명을 떨침으로서 장래 나라의 문운文運을 잡을 인물로 촉망을 받았다. 그러나 타락한 정치 현실과 속물적 사회 풍기를 혐오하여 과거 시험을 통한 출세를 진작 포기하고, 창조적 글쓰기와 학문에 몰두하였다. 재야의 양심적 지식인으로서 당파와 신분을 초월하여 인간관계를 형성하였으며, 특히 선비 곧 지식인의 자세와 역할에 대해 일생 동안 깊이 고민하고 성찰하였다. 그의 산문은 중세적 사유의식을 떨쳐버리는 참신한 작품이 대부분으로, 그를 민족문학사의 최고의 경지에 끌어올렸다. 특히 44세에(1780년) 중국을 여행하고 지은 『열하일기』는 당시 문단에 큰 영향력을 끼쳤을 뿐 아니라, 민족과 세계의 고전에 값하는 기념비적 저술이 되었다. 50세에 음직으로 벼슬에 나아가 이후 안의현감, 면천군수, 양양부사 등을 역임하며, 주체적 벼슬아치 혹은 부모 같은 목민관으로서의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문집 『연암집』을 남겼는바, 주옥과 같은 시와 산문, 『열하일기』, 『과농소초』 등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옮긴이 김혈조金血祚
1954년 경북 선산에서 출생하였다. 성균관대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한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이래 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며 공부하고 있다. 한국한문학의 산문 문학에 주로 관심을 두고 있으며, 특히 연암 박지원의 산문 문학을 집중적으로 탐구하였다. 연암의 산문 작품을 연구한 『박지원의 산문문학』이라는 저서와, 산문을 가려 뽑아 번역한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라는 역서가 있다. 「연암체의 성립과 정조의 문체반정」이라는 논문 이외에 연암의 문학과 관련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차례
역자 서문 왜 다시 『열하일기』인가?
일러두기
머리말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
압록강을 건너며 도강록渡江錄
머리말 「도강록서」 ⊙ 6월 24일 신미일 ⊙ 6월 25일 임신일 ⊙ 6월 26일 계유일 ⊙ 6월 27일 갑술일 ⊙ 6월 28일 을해일 ⊙ 6월 29일 병자일 ⊙ 7월 1일 정축일 ⊙ 7월 2일 무인일 ⊙ 7월 초3일 기묘일 ⊙ 7월 초4일 경진일 ⊙ 7월 초5일 신사일 ⊙ 7월 초6일 임오일 ⊙ 7월 초7일 계미일 ⊙ 7월 초8일 갑신일 ⊙ 7월 초9일 을유일 ⊙ 옛 요동 이야기 「구요동기」⊙ 요동 백탑에 대한 기록 「요동백탑기」 ⊙ 관운장 사당 구경 「관제묘기」 ⊙ 광우사 구경 「광우사기」
심양의 이모저모 성경잡지盛京雜識
7월 초10일 병술일 ⊙ 7월 11일 정해일 ⊙ 예속재에서 나눈 이야기 「속재필담」 ⊙ 가상루에서 주고받은 이야기 「상루필담」 ⊙ 7월 12일 무자일 ⊙ 골동품 목록 「고동록」 ⊙ 7월 13일 기축일 ⊙ 7월 14일 경인일 ⊙ 심양의 사찰 「성경가람기」 ⊙ 산과 강에 대해 요약함 「산천기략」
말을 타고 가듯 빠르게 쓴 수필 일신수필馹迅隨筆
머리말 「일신수필서」 ⊙ 7월 15일 신묘일 ⊙ 북진묘 관람기 「북진묘기」 ⊙ 수레 제도 ⊙ 연희 무대 ⊙ 시장 점포 ⊙ 객점 ⊙ 다리 ⊙ 7월 16일 임진일 ⊙ 7월 17일 계사일 ⊙ 7월 18일 갑오일 ⊙ 7월 19일 을미일 ⊙ 7월 20일 병신일 ⊙ 7월 21일 정유일 ⊙ 7월 22일 무술일 ⊙ 7월 23일 기해일 ⊙ 강녀묘 관람기 「강녀묘기」 ⊙ 장대 관람기 「장대기」 ⊙ 산해관 관람기 「산해관기」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이야기 관내정사關內程史
7월 24일 경자일 ⊙ 7월 25일 신축일 ⊙ 조선 그림의 목록 「열상화보」 ⊙ 7월 26일 임인일 ⊙ 백이 · 숙제 사당 관람기 「이제묘기」 ⊙ 난하에 배를 띄우고 「난하범주기」 ⊙ 사호석 이야기 「사호석기」 ⊙ 7월 27일 계묘일 ⊙ 7월 28일 갑진일 ⊙ 범의 호통 「호질」 ⊙ 7월 29일 을사일 ⊙ 7월 30일 병오일 ⊙ 8월 초1일 정미일 ⊙ 8월 초2일 무신일 ⊙ 8월 초3일 기유일 ⊙ 8월 초4일 경술일 ⊙ 동악묘 관람기 「동악묘기」
북경에서 북으로 열하를 향해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머리말 「막북행정록서」 ⊙ 8월 초5일 신해일 ⊙ 8월 초6일 임자일 ⊙ 8월 초7일 계축일 ⊙ 8월 초8일 갑인일 ⊙ 8월 초9일 을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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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ion Credits
『열하일기』
◎ --- 도강록
도강록은 1780년 6월 24일(음력)부터 7월 9일까지의 일기이다. 연암이 사신 일행을 따라 중국에 들어가 겪은 첫 번째 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의주를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의 요양까지 이르는 도중에서 일어난 일과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중심으로 일기체로 서술하였다.
도강록이란 말은 압록강을 건너며 기록한 글이라는 의미이긴 하지만, 그 말 자체에 이미 강을 건너서 남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이 담겨 있다. 길에서 마주치는 이역의 풍경과 중국의 앞선 문화 문물 등을 범상히 넘기지 않고 붓끝으로 담아냈다. 중국의 선진 문화를 예리하게 관찰 분석 비판한 대목에서 붓끝은 자못 진지하게 돌아가다가도, 연도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견문과 체험의 대목에서는 붓끝이 경쾌하게 돌아간다. 옛날 분들이 이 도강록의 문체를 두고 이른바 소설식의 패사체稗史體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도道가 강물과 언덕 중간에 있다고 설파한 대목, 조선의 강토에 대한 관심과 그 논변, 넓디넓은 요동 벌판을 마주하며 한 바탕 통곡하기 좋겠다는 이른바 호곡장好哭場 대목 등은 깊이 음미할 부분이다.
철릭 조선 시대 무관 복장의 하나로, 당상관의 철릭은 남색이고 당하관은 분홍색이다.
축 현악기로 가야금과 비슷하게 생겼고, 줄이 13개이다. 연주할 때는 왼손으로 현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판을 잡아서 현을 퉁긴다.
역주易州에 있는 형가의 기념탑과 비석
구련성의 옛 터 현재 성은 없고, 그곳에 옛 성터임을 알리는 작은 표지석만 있다.
봉황산 산성의 표석
변문진 표석
봉황성의 옛 거리
벽돌 가마 『천공개물』 초간본 삽도.
부필의 글씨
관제묘
가의
요동 벌판
누르하치
청나라 군사 조직 팔기병의 군복
『전운시』
원숭환의 석상
화표주
요동의 백탑
근년에 새로 복원한 광우사 패루와 광우사 패루 뒤에 있는 것이 광우사인데, 그 규모가 대단히 크다.
◎ --- 성경잡지
성경盛京은 심양瀋陽의 옛 이름이다. '심양의 이모저모'라고 번역한 성경잡지는 7월 10일에서 7월 14일까지의 여행 기록과 심양에서 체류하며 겪은 내용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도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이 모두 새롭고 흥미로운 것이어서 점입가경의 느낌을 가지게 한다.
심양에 도착한 연암은 바로 이튿날부터 한밤중에 숙소를 빠져나와 중국의 젊은이들과 밤을 새워가며 필담 토론을 벌인다. 예속재와 가상루에서 그곳의 주인들과 갖가지 화제를 끄집어내어 문답하고 토론을 하는데, 이역의 풍물과 인사들에 대해서 연암이 얼마나 많은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읽을 수 있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연암을 자신의 상점에 초빙하여 밤을 새워가며 필담하는 장면에서 연암의 박식한 학문과 예술 취향 그리고 소탈한 면모가 여실하게 드러난다.
또한 중국인들에게 연암이 자기의 필력을 뽐내려고 점방의 간판 글씨를 써 주는 대목인 '기상새설'欺霜賽雪은 마치 소설에 복선을 깔아놓은 듯 흥미를 주며, 중국의 초상 제도를 관찰하려고 상가에 들어갔다가 얼떨결에 문상까지 하고 나오는 대목은 연암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폭소를 유발하는 흥미로운 장면이다.
백탑 심양시의 동릉구東陵區 20km 밖 백탑보에 있다.
향장 심양성 안의 향장으로, 일종의 가리개 구실을 하여 앞뒤를 차단한다.
숭정전
숭정전의 편액
정대광명 편액
봉황루
잔도
양자강과 백제성 양자강 가운데 섬같이 보이는 곳에 백제성이 있다.
천산의 입구
연암이 그린 <국죽도>菊竹圖
낙타 청나라 화암華嵒, <천산적설도>天山積雪圖
청동으로 만든 골동품. 고(觚)(위), 이(彛)(가운데), 준(尊)(아래)
채경의 글씨
가산 괴석을 쌓아서 인조의 산을 만들어 연못 주변을 장식했다.
동기창의 필적
「경직도」
연암이 쓴 편액 글씨 저실기측咀實其測
각 민족의 문자 오른쪽에서부터 만주(滿), 서번(藏), 중국(漢), 위구르(維), 몽고(蒙)의 글자이다.
청 태조 누르하치의 무덤인 복릉(위)과 청 태종의 무덤인 소릉(아래).
◎ --- 일신수필
일신수필은 7월 15일 신광녕에서 출발하여 7월 23일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연도에서 본 이국의 풍물과 체험을 쓴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일신수필이란 말은 빠르게 달리는 역말 위에서 구경을 하고 지나가듯 보고 느낀 것을 생각나는대로 썼다는 뜻이다.
서문과 수레 제도를 논한 별도의 글에서 참다운 학문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제시함으로써 선비에게 참다운 학문을 추구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7월 15일의 일기에는 저 유명한 '중국의 장관론'을 도도하게 펼쳤다. 연암은 중국의 장관이 깨진 기와 조각과 냄새나는 똥거름에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조선의 지배 이념을 주도하며 민족의 생활 경제를 낙후하게 만들고 있는 고루한 선비들에 대한 통렬한 반어적 비판이다.
수레 제도와 시장 및 다리 등에 대한 소상한 기술은 바로 북학北學의 구체적 내용의 하나이며, 아울러 중국 역사의 현장, 특히 명 · 청 교체기에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 현장과 장수들에 대한 회고와 서술은 연암의 역사의식의 일단이다.
태산의 정상
노구교
변발을 한 공친왕恭親王(1871년경)
이성량 패루
광녕성의 쌍탑
북진묘
북진묘 앞의 돌사자
북진묘 마당의 비석들
사천 지방 검각의 관문
관운장의 소상
계문연수비 계문의 연수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으로, 북경 해정구海淀區에 있다.
금주 고탑
청 태종 홍타이지
이자성의 동상
영원성 누각
원숭환
김홍도, <총석정>(《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
태호석
맹강의 소상
진의정
망해정 정자의 편액에는 징해루澄海樓라고 적혀 있다.
천하제일관이라는 현판이 걸린 산해관 제3문
명나라 소현蘇顯이 썼다는 천하제일관 현판
산해관 노룡두 만리장성이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
◎ --- 관내정사
관내란 산해관 안쪽을 가리키는 말이다. 곧 본편은 산해관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견문을 기록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도에서 마주치고 경험한 내용은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로운데, 특히 본편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사상사적 주제와 관련된 일련의 글들이다. 고사리 사건과 「호질」이 그것이다.
백이 · 숙제 사당을 지나며 음식으로 제공된 고사리와 그로 인해 벌어진 사단은 왜곡된 춘추대의를 비판한 글이다. 백이 · 숙제 및 고사리로 표상되는 춘추대의는 기실 명나라와 청나라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사상적 문제이다. 명나라를 높이고 오랑캐 청나라를 물리치자는 북벌론은 춘추대의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 고사리 파동은 바로 북벌론의 허구성을 통렬히 지적한 것이다.
「호질」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알려진 작품인데. 보다 근본적 시각에서 작품을 읽을 필요가 있다. 인간 중심의 문맹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그중의 하나이다.
과친왕 윤례
서위
창려현 갈석산
한유 소상
영평부의 고성
이광
변발
독락사(위)와 독락사 대불(아래)
관음지각 왼편 아래 태백太白이란 글자가 보인다.
동악묘
근대 초기의 조양문
서안에 복원한 아방궁
자금성 전경
정양문(왼쪽)과 적루敵樓
동악묘 패루
동악묘 별음
동악묘 비석
◎ --- 막북행정록
막북이란 사막 북쪽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대체로 만리장성 북쪽 변방을 의미하는 말로 쓴다. 막북행정록은 북경에서 열하까지 가는 동안의 체험, 특히 고생하면서 가는 길의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압록강을 건너 40여 일 만에 도착한 북경이었으나, 황제는 북경에 있지 않고 열하에 있었다. 황제는 만수절 행사 전에 조선 사신을 열하에 도착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는바, 조선 사행으로서는 처음으로 열하를 가게 된 것이다. 일정이 촉박한 관계로 사행단은 그 숫자를 절반으로 줄이고, 밤낮을 달려서 갈 수 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갖가지 체험과 고생을 했다. 그 눈물 나는 고생과 그런 총중에도 장성을 빠져나가는 당시의 감회를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특히 북경에 체류하는 사람과 열하로 가는 사람의 이별 장면을 보고서 쓴 '이별론'은 탁월한 서정 산문이다. 인간에게 가장 큰 괴로움이 무엇일까? 이 문제를 도도하게 풀어낸 글이 바로 '이별론'이다.
<새연사사도>塞宴四事圖 만 · 몽이 연맹을 맺은 뒤 몽고는 청 왕조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매년 가을 사냥이 끝난 뒤 청 황제는 몽고인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면서 씨름 · 연주 · 말 길들이기 · 경마 등과 같은 활동을 벌였다.
피서산장 정문(위)과 열하 비석(아래)
첨운패루
지안문
고루(앞 건물)와 종루
자금성의 담벽
소현세자릉(소경원昭慶圓) 경기도 고양시 소재
밀운현 무령산霧靈山
불수감
고북구 관문 1910년대의 모습
쌍탑산
경추산 우측 하단의 사람을 통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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