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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한국전쟁과 민간인 집단 학살 편

 

서중석 답하다 김덕련 묻고 정리하다

2015, 오월의 봄

 

대야도서관

SB0486693

 

911.07

서766ㅅ  2

 

"전쟁이 터지자, 대통령은 국민을 버리고 도망갔다!"

이승만 대통령, 전선에선 피 흘리는데 영구 집권 꾀해

태워 죽이고, 굶겨 죽이고 … 학살로 세운 극우 반공 체제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교수의 역사 왜곡 바로잡기!

우리에게는 '역사의 죄인'이 있다. 우선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이승만을 존경하는 사람들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거기 포함된다. 이들은 이승만을 살리고 나아가 그를 '건국의 아버지' '국부'로 만들어놓을 수만 있으면 '역사의 죄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나아가 이승만이 국부가 되면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 기득권을 계속 움켜쥘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

우리에게는 '역사의 힘'이 있다. 항일 독립 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줄기차게 계속된 것도, 우리 제헌 헌법에 자유 · 평등의 독립 운동 정신이 담겨 있는 것도 역사의 힘이다. 우리 국민이 친일파, 분단, 독재를 있어선 안 되는 잘못된 것으로 보는 것도 역사의 힘이다. 막강한 힘의 지원을 받은 역사 교과서가 참패한 것도 그렇다.

- '책머리에' 중에서

 

서중석

1948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했으며, 6월항쟁 당시 《신동아》 취재기자로 역사적 현장에서 그날의 사건들을 생생히 목격하고 기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이며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 연대 상임 공동대표, 제주 4 · 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80년대 민중의 삶과 투쟁》 《한국 근현대 민족문제 연구》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1 · 2》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남북협상 : 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 《조봉암과 1950년대》(상 · 하) 《비극의 현대 지도자》 《배반당한 한국 민족주의》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한국 현대사 60년》 《이승만과 제1공화국》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6월항쟁》 등이 있다.


김덕련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를 거쳐 프레시안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신문사 일을 하면서 틈틈이 역사 관련 책 작업을 함께해왔다. 《세계를 바꾸는 파업》, 《근현대사 신문》(2권),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5권)를 함께 쓰고 만들었다

 

|차례|

 

책머리에

연표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                          한국전쟁,

                                             어디부터 잘못 꿰어졌나

 

두 번째 마당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대통령

                                             "잘한 게 없다"

 

세 번째 마당                         원자탄을 사용하겠다고?

                                            요동치는 전선, 평화는 멀고도 멀었다

 

네 번째 마당                         "북한, 전면전은 못할 것…

                                             한국전쟁 공포 때문"

 

다섯 번째 마당                     전쟁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민간인 집단 학살                                   

 

첫 번째 마당                       "수십만 죽이고 30년 넘게 침묵…

                                          참 무서운 한국"

 

두 번째 마당                       쏘아 죽이고, 태워 죽이고,

                                          굶겨 죽이고…

 

세 번째 마당                       고마운 미국?

                                          "한국인들 죽이거나 학살 방조"

 

네 번째 마당                       추종자 아니면 모두 적

                                          무서운 '빨갱이 만들기'

 

다섯 번째 마당                   국민 목 친 학살자들이

                                          오히려 출세하는 세상

 

여섯 번째 마당                  민간인 학살 위에 세워진

                                         공포의 극우 반공 체제

 

일곱 번째 마당                 박정희 쿠데타 세력은 왜

                                        합동 묘지를 파헤쳐야 했나

 

나가는 말

한국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군인. 한국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세계 전쟁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예컨대 한국에 전투 지원을 한 나라만 16개국(미국, 영국, 터키, 캐나다, 호주,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남아공, 콜롬비아, 그리스, 태국, 에티오피아, 필리핀, 벨기에, 룩셈부르크)에 이르렀다.

한국 현대사 연구의 개척자 브루스 커밍스가 펴낸 한국전쟁 관련 서적들. 커밍스는 1950년 6월 25일 이전 38선 부근에서 내전 상태라고 할 만한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 있었고 한국전쟁은 그것이 확대된 것으로 보았다.

1949년 3월 김일성, 박헌영, 홍명희 등 북한 대표단이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크렘린궁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때 김일성은 무력에 의한 조선 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물었다.

1948년 북한을 떠나기 전에 평양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행진하고 있는 소련군의 모습. 소련군은 그해 12월에 북한에서 철수했다. 이로 인해 더 이상 남한에 머물기가 어렵게 된 미군이 약 500명의 군사 고문단만 남기고 1949년 6월에 철수했다.

1949년 박헌영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는 김일성. 왼쪽 두 번째에 앉아 있는 이가 소련 대사 테렌티 쉬티코프.

1949년 10월 1일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있는 마오쩌둥.

1950년 6월 26일에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회의 모습.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행위를 침략으로 규정하고 38선 이북으로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이날 소련은 불참했다.

1949년 12월 스탈린의 70세 생일 축하연. 마오쩌둥의 모습도 보인다. 스탈린은 미국이 한국전쟁에 어떠한 방식으로, 얼마만한 규모로 관여할지를 주목하면서 한반도를 시험장으로 생각했다.

1951년 대구 순시를 위해 공항에 나온 이승만 대통령 내외. 이승만 정권이나 미국이 제대로 대응했다면 초기에 전쟁이 중부 전선에 머물 수도 있었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전쟁 초기 북한군의 행진 모습. 북한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아서 초기에 이기지 못하면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돼 있었다.

국군이 행군하고 있는 모습. 전쟁 직전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은 북한이 곧 쳐들어올 거란 얘기까지 했으면서도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1951년 6월 이승만 대통령(오른쪽)이 신성모 신임 주일 대표(공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국방부 장관 시절 신성모는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고 말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경향신문, 동아일보 1950년 6월 27일 자 신문. "찬(燦)! 아군 용전(勇戰)에 괴뢰군 전선서 패주 중"(위), "국군 정예 북상 총반격전 전개"(아래)란 제목이 크게 적혀 있다. 나중에 크게 논란이 일게 되는 "해주시를 완전 점령"(아래 오른쪽) "일부는 해주시에 돌입"(위 오른쪽)이란 제목도 눈에 띈다. 국방부 발표문을 토대로 보도한 이 기사들은 사실상 거짓이었다. 이 내용을 보고 피란을 가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새벽 이미 국민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고 없었다.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의 모습.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들보다 먼저 서울을 떠났다. 자신은 도망을 가면서도 우리가 이기고 있으니 안심하고 있으라는 거짓말 방송을 몇 차례나 내보냈다.

1950년 9월 서울 수복 직후, 미군과 한국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주민이 인민군 부역자를 폭행하고 있다. 피란을 가지 못한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부역자가 되기도 했다.

경남 거제도에서 피란지를 살피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중에 국민을 돌보지 않은 무책임한 정치인이었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 개회된 국회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 사회를 보는 이는 신익희 2대 국회의장. 이승만 정권은 땃벌떼, 백골단, 민중자결단 등을 동원해 국회를 협박하고 공갈을 일삼았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52년 6월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지방의회 의원들이 철야 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 의원들은 1952년 대한민국 최초로 실시한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사람들로 대부분 자유당 쪽 사람들이었다. 이승만 정부 편에 서서 국회를 압박한ㄴ 역할을 했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50년 9월 인천에서 한 여자 어린이가 울고 있다. 한국전쟁은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을까. 한국전쟁은 시작부터 국제전이 되었고, 애꿎은 사람들만 큰 피해를 봤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끊임없이 폭격을 퍼부었다. 그래서 북한의 군대는 주로 밤에 이동했다. 사진은 미국 공군의 폭격을 받고 있는 원산 지역의 모습.

1950년 9월 미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다. 북한은 이 작전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비할 군대가 별로 없었다.

1950년 10월 27일 국군의 평양 입성을 축하하는 퍼레이드가 서울에서 열렸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 당시의 맥아더. 맥아더는 전쟁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과 전면전을 벌이고 소련을 상대로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흥남에서 배를 타고 피란길에 오른 사람들. 1950년 12월의 모습.

1951년 1월 8일 강릉 부근에서 피란을 떠나는 사람들.

한국전쟁에 참전해 포로로 잡힌 중국군의 모습.

미군에게 생포된 중국군의 모습.

1951년 4월 부산에 있던 전쟁 포로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지만, 정전협정을 맺기까지는 무려 2년 넘게 걸렸다.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가 전쟁 포로 문제였다.

위쪽부터 미국의 마크 클라크, 북한의 김일성, 중국의 팽덕회가 정전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과 공산군 수석대표 남일이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모든 관계자의 서명이 완료된 정전협정문. 이로써 3년 만에 포화는 멎었다.

1950년 11월 서울의 모습. 폐허 더미에서 사람들이 뭔가를 찾고 있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한반도 전체는 이미 큰 피해를 본 상태였다. 한국의 전 역사를 돌아봐도 한국전쟁만큼 대규모의 학살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1 삐라 1040 소련과 중공을 위해서 죽음을 택할 필요가 있는가?

2 삐라 1242 지주와 그 하인과 소

3 삐라 1276

중공군은 좋은 무기는 자기네가 차지하고 못쓸 무기는 북한군에게 넘겨주고 있다.

왜? 북한이 약해져야 집어먹기 쉬우니까…… 북한 주민들이여! 이젠 여러분이 왜 중공군이 북한군에게 쏘지 못할 무기만 넘겨주는지를 알았을 것이다! 중공군은 여러분의 적이다!

4 삐라 1282 북한 인민은 이렇게 뜯기만 한다!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의 3선 출마를 촉구하는 우익 단체의 시위 행렬. 부정부패하고 친일파도 많았던 이승만 정부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나쁜 정부로 보이는 면이 분명히 있었지만, 전쟁 후 이승만 정부는 굉장히 힘이 셌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56년 서울 세종로. 제3대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전쟁을 거치면서 극우 반공 체제가 한국 사회에서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51년 1월 북한 지역을 폭격하고 있는 미국 공군. 북한은 미군의 폭격으로 철저하게 파기되었다.

1955년 1월 고아원의 아이들이 고무신을 받아들고 즐거워하고 있다. 1950년대엔 고아원이 많았다. 이산가족이 많이 수용됐고, 북한에서 내려온 어린애들이 수용된 경우도 많았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영화 <자유부인> 포스터와 스틸컷. 이 영화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10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영화를 봤다. 감독 한형모, 주연 박암, 김정림, 1956년 개봉.

박인수 사건을 보도한 당시 신문 기사. 1심 판결에서 판사는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54년 북진 통일 궐기대회에서 한 학생이 지붕 위에 올라가 '북진 통일'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 학생은 교복, 교모에 혁대를 차고 목청껏 부르짖고 다른 학생은 호루라기를 불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1950년대 극우 반공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50년 38선의 모습.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을 극도로 단순화된 사회로 만들었다. 남북 모두 군인이 지배하는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남한의 경우, 30년간 군대의 획일화된 사고와 문화가 사회를 지배했다. 그런 단순화가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를 괴롭히고 있다.

1950년 7월 대전형무소 재소자가 학살되는 장면. 이때 무려 1,800여 명의 정치범 및 보도연맹 관련 민간인이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되었다.

1951년 4월 대구 인근에서 군인이 정치범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다. 학살 당시 어린이도, 여자도, 노인도 많이 죽었는데 그때 죽이면서 '빨갱이 새끼는 죽여도 좋다. 빨갱이 여편네는 죽여도 좋다. 빨갱이 애비는 죽여도 좋다', 이런 식의 주장을 폈다.

1950년 4월 서울 부근에서 처형장으로 끌려나온 좌익들. 미국 측은 이들이 공산주의자이며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처형에는 6명의 미국 군무관 및 장교가 참관했다. 처형을 준비하고, 사격을 가한 뒤, 시체를 확인하는 장면이다.

1950년 9월 서울을 수복한 후 한 미군이 미국영사관에 성조기를 내걸고 있다. 서울 수복을 전후해 우익 청년 단체들이 각지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미군도 학살에 가담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노근리 학살이다.

여순 사건 당시 반군 협력자 색출을 위해 진압군이 주민들을 학교에 집결시키고 있는 모습.

국민보도연맹증. 국민보도연맹은 좌익 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1949년에 결성되었다. 1949년 말에는 가입자 수가 30만 명에 달했고, 주로 사상적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지역별 할당제가 있어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등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여순 사건 당시 진압군이 반란군과 협력자를 색출해 연행하고 있다. 학살에 관련된 군 지휘관들은 과거에 일본군에 있었던 경우가 많다. 해방 후 친일 청산을 제대로 못한 것이 학살을 키운 셈이다.

노근리 사건이 벌어졌던 다리 밑 사진. 19660년 자료다. 미군 제25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은 명령서를 통해 '전투 지역에서 움직이는 모든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라'고 지시했다.

1948년 5월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 수뇌부. 제주 4 · 3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작전권이 미군한테 있었다. 미군은 직접 민간인 학살에 가담하기도 했고, 한국군의 학살을 방조하기도 했다.

미군이 찍은 1950년 대전형무소 재소자 학살 사건 당시 사진. 여러 자료를 볼 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도 주한 미군이 져야 할 책임이 크다.

재판을 받고 있는 조봉암(앞줄 왼쪽). 이승만 대통령은 정적에게 대단히 가혹했다. 그의 정적이었던 조봉암은 간첩 협의로 처형됐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 포스터. 이 선거는 부정과 폭력으로 얼룩졌다.

1950년 10월 24일 국제연합의 날(유엔데이) 기념 행사장에 나란히 자리한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이시영 부통령(왼쪽에서 두 번째).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 중에 결정한 비상 조치령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중형에 처해졌다.

1951년 2월 11일 방위사관학교 졸업식 모습. 방위사관학교는 국민방위군을 이끄는 장교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운 곳이다.

1950년 7월 대전형무소 정치범들을 처형하기 위해서 트럭에서 끌어내리고 있다. 인민군이 쳐들어오자 서울을 버리고 떠난 이승만 대통령은 7월 1일까지 대전에 머무르고 있었다.

군경에 의해 학살된 대전형무소 재소자들. '총살 명령은 의심할 바 없이 최고위층에서 내렸다'고 돼 있는 걸로 봐서 이 학살은 정부 고위층에서 내린 것으로 보인다.

1956년 8월 지방 자치 선거에서 군인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이 선거에서도 엄청난 부정이 일어났다. 일부 지방에서는 다수의 민주당원들이 후보 등록조차 하지 못했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56년 5월 정부통령 선거 당시 자유당 대통령 후보 이승만과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선거 홍보물이 내걸려 있다. 이 선거가 끝난 후 이승만은 친일파, 학살을 자행한 인사 등을 요직에 등용한다.

4 · 3사건 당시 중산간 지대로 피신한 제주 사람들. 당시 2만 5,000명에서 3만 명이 희생된 걸로 추정된다. 제주도 전 주민의 10퍼센트다.

1954년 4월 중앙청(현 경복궁) 광장에서 열린 북진 통일 궐기대회에 참가한 청년이 태극기에 혈서를 쓰고 있다. 민간인 대량 학살을 일으킨 극우 반공 독재 세력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반공주의가 내면화돼서 공포에 질식된 사회를 만들었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1980년 5월 21일 12시경 공수부대와 시민이 전남도청 앞에서 대치하고 있다. 한 시간 후 집단 발포가 이뤄졌다. 한국전쟁 전후에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 조사와 책임 추궁이 철저히 이뤄졌다면, 광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 출처 : 전남대 5 · 18연구소

1961년 5월 22일 대한상이용사회가 5 · 16 지지 차량 행진을 하고 있다. 5 · 16쿠데타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다시 한 번 극단적인 반공주의가 득세하게 된다.

1952년 전쟁 중 부산에 세워진 대한민국 정부 청사 건물. 한국전쟁 이후 다른 지역에 비해 경상도에서 진보적인 흐름이 더 선명하게 나타났다. 사진 출처 : e영상역사관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