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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17. 09:11 내가 읽은 책들/2015년도

2015-085 Andy Warhol 앤디워홀

 

지은이 | 이자벨 쿨, 옮긴이 | 정연진

2008, 예경

 

 

시흥시대야도서관

SB0401661

 

650.8

아887ㅇ  7

 

ART SPECIAL 7

 

Andy Warhol | 앤디 워홀

 

"앤디 워홀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나의 표면을 관찰하면 된다.

그 표면 밑으로 숨겨진 건 아무것도 없다."

- 앤디 워홀

 

앤디 워홀은 살아 있는 동안에 '살아 있는' 신화였고, 세상을 떠난 지금 역시 '살아 있는 신화'이다. 워홀에 의해 수프 캔, 세탁 세제 박스 같은 일상용품은 처음으로 예술의 주제가 되었으며, '공장(팩토리)'이라고 불리는 그의 작업실은 뉴욕 보헤미안의 집결지가 되었다. 이 책은 워홀이 활동한 1960년대 자본주의의 수도 뉴욕으로부터 팩토리와 그의 사랑을 비롯한 삶과 예술, 오늘날 앤디 워홀의 위상 등을 한꺼번에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지은이 | 이자벨 쿨 Isabel Kuhl은 미술사가이며 편집자이자 작가로 활동 중이다. 현재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다.

 

옮긴이 | 정연진은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슈투트가르트 예술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국제회의통역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대학원에서 통번역학 박사과정 재학 중에 있고, 동대학원 및 서강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앤디 워홀 | Andy Warhol(1928-87)

 

가난한 이민가정에서 태어난 앤디 워홀은 카네기 공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단돈 200달러를 들고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에서 워홀은 잡지나 신문 삽화, 광고 그림을 그려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흔히 먹던 캠벨 수프, 코카콜라병을 작품소재로 삼아 뉴욕 미술계에 파장을 일으킨다. 이후 공장에서 찍어내듯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미술품을 대량생산해내면서 비난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앤디 워홀은 자신의 작업실인 팩토리에서 조각품, 실크스크린뿐만 아니라 실험영화까지 제작했다. 그는 영화에 그치지 않고 유명인과의 인터뷰를 실은 잡지를 창간하고, TV 쇼를 진행하고, 광고에 출연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워홀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비판이 커질수록 더욱 높은 유명세를 탔다.

 

1928-44

 

세계사

 

>> 1929년 토마스 만, 《부덴부르크 일가》로 노벨문학상 수상. 10월 24일, 뉴욕 증시 급락으로 '검은 금요일' 이후로 세계경제에 위기가 도래.

>> 1933년 아돌프 히틀러, 독일 제 3제국 총리로 취임.

>>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

>>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 1941년 콘라드 추제가 최초의 컴퓨터 발명.

 

앤디 워홀의 예술세계

 

>> 1928년 8월 6일 피츠버그에서 워홀 출생함. 당시 이름은 '앤드류 워홀라'

>> 1934-36년까지 초등학교, 그 후에는 중고등학교에 진학함.

>> 1942년 아버지 온드레이 워홀라 사망.

 

1945-49

 

>> 19455년 제2차 세계대전 종결.

>> 1946년 첫 UN 총회가 열림.

>> 1947년 인도 독립.

>> 1949년 나토 설립.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선포. 윌렘 드쿠닝, 잭슨 폴락 같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뉴욕에서 예술가 동맹인 '성마른자들(The Irascibles)' 결성.

 

>> 1945년 피츠버그 카네기 공대에서 산업디자인 전공으로 학업을 시작함.

>> 1949년 졸업과 동시에 뉴욕으로 이사 · 광고 디자이너로 취업함.

 

1950-55

 

>> 1953년엘비스 프레슬리의 첫 앨범 발매.

>> 1954년 제1차 베트남 전 종결. 미국 상원의원 매카시의 시대가 막을 내림.

>> 1955년 독일 카셀에서 제1회 도쿠멘타 전시회 열림. 제임스 딘이 차 사고로 사망. 바르샤바 조약 체결.

 

>> 1950년 어머니 줄리아, 뉴욕 워홀의 집으로 이사 옴.

>> 1952년 뉴욕 휴고 화랑에서 드로잉 작품으로 첫 개인전이 열림.

>> 1954년 '미국 그래픽 아트 협회'가 수여하는 상업디자인 분야 최우수상 수상.

>> 1955년 처음으로 조수를 기용함.

 

1956-62

 

>> 1957년 영화배우 험프리 보거트 사망. 구소련,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지구궤도에 쏘아 올림.

>> 1958년, 미국 첫 인공위성 발사.

>> 1959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개관. 피델 카스트로가 정권 장악함.

>> 1952년 배우 마릴린 먼로 사망.

 

>> 1956년 '아트 디렉터스 클럽 어워드'에서 '디스팅티브 메리트' 메달 수상.

>> 1957년 앤디 워홀 엔터프라이즈 사(社) 설립.

>> 1960년 만화를 모티브로 한 첫 작품을 선보임.

>> 1962년 할리우드 스타와 캠벨 수프 깡통 모티브의 실크스크린 작품을 선보임.

 

1963-64

 

>> 1963년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됨.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 상영.

>> 1964년 초반 베트남 전 발발. 제3회 카셀 도쿠멘타 열림. 장폴 사르트르가 노벨문학상 거부함.

 

>> 1963년 작업실을 '팩토리'로 명명함. 첫 영화 <슬리프>를 제작함.

>> 1964년 파리 일리아나 소나벤드 화랑에서 유럽 첫 전시회 열림.

 

1965-68

 

>> 1965년, 말콤 X 피살됨. 밥 딜런, 노래 <라이크 어 롤링 스톤> 발표.

>> 1966년 중국 문화혁명이 일어남.

>> 1967년 체 게바라의 사형이 집행됨. <섬머 오브 러브> 행사로 히피문화가 절정에 다다름. 뮤지컬 <헤어> 초연됨. 르네 마그리트 사망.

>> 1968년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됨. 파리에서는 대학생들이 소르본 대학을 점거하고, 무력진압이 벌어짐.

 

 

 

>> 1966년 해프닝 예술인 <익스플로딩 플레스틱 인에비터블>을 연출함.

>> 1967년 록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앨범커버를 디자인함.

>> 1968년 제2 팩토리로 이사. 7월 3일 여성권리주의자 발레리 솔라나스의 총격에 의해 중상을 입음.

 

1969-72

 

>> 1969년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

>> 1970년 점보제트 여객기 첫 출항.

>> 1971년 이집트에서 아스완 댐 준공. 가수 루이 암스트롱 사망. 빌리 브란트, 노벨평화상 수상.

>> 1972년 로마 클럽에서 《성장의 한계》 보고서 발표.

 

 

>> 1969년 《인터뷰》지 창간.

>> 1971년 뉴욕의 라마마 실험극장과 런던의 라운드하우스 극장에서 <포크>를 상연. 워홀의 슈퍼스타 중 한 명인 에디 세즈웍 사망.

>> 1972년 피츠버그에서 어머니 줄리아 사망.

 

1973-75

 

>> 1973년 베트남전 휴전. 1차 오일파동이 일어남. 파블로 피카소 사망.

>> 1974년 미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파문으로 하야함. 요셉 보이스가 뉴욕에서 <나는 미국을 좋아하며, 미국은 나를 좋아한다>라는 제목 하에 행위예술을 펼침.

>> 1975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사(社) 설립.

 

 

>> 1974년 제3 팩토리로 이사함.

>> 1975년 저서 《앤디 워홀의 철학》 출간으로 큰 성공을 거둠.

 

1976-80

 

>> 1976년 마오쩌둥 사망.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애플 사를 공동설립함. 화가 만 레이 사망.

>> 1977년 한스마틴 슐라이어 독일경영자연맹 회장이 테러단체 '적군파(RAF)'에 의해 납치되어 살해됨. '독일의 가을'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독일 테러리즘이 최고조에 달함.

>> 1978년 첫 시험관아기 탄생. 요한 바오로 2세 즉위.

 

 

>> 1978년 <산화> 연작을 선보임.

>> 1980년 《파피즘》 출간, 요셉 보이스의 초상화를 작업함.

 

1981-85

 

>> 1981년 로널드 레이건이 제40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 IBM 사가 첫 개인컴퓨터(PC)를 시장에 선보임.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스펜서의 결혼식이 열림.

>>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에 포크랜드 전쟁 발발. 배우 로미 슈나이더 사망.

>>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됨.

 

>> 1981년 제4 팩토리로 이사함.

>> 1982년 뉴욕 지역방송사에서 <앤디 워홀 TV>가 방영됨.

>> 1984년 장 미셸 바스키아, 프란체스코 클레멘테와 공동작업을 시작함.

 

1986-87

 

>>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참사가 일어남. 요셉 보이스 사망.

>>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가 세스나기(機)로 모스크바 붉은광장에 착륙함.

 

>> 1986년 MTV에서 <앤디 워홀의 15분>이 방영됨.

>> 1987년 2월 22일 수술 합병증으로 워홀 사망함.

 

차례

 

그때 그 시절

모든 길은 빅애플로……

 

최고가 되기까지

높이, 더 높이

 

예술

일상을 그리는 화가

 

파티도 좋지만 일 먼저

 

사랑

슈퍼스타의 조용한 사랑

 

지금도 우리 곁에

뒤늦은 명성

 

그때 그 시절

 

"뉴욕은 어떤 도시와도 다르다.

뉴욕은 추하고, 지저분하다.

탁한 공기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뉴욕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것이다.

다른 어떤 도시도 뉴욕만큼

좋을 수는 없다는 것을……."

헨리 제임스

 

거대한 사과!

 

빅애플은 20세기가 흐르는 동안 국제적인 예술, 미디어, 금융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잠들지 않는 도시'인 뉴욕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었다. 앤디 워홀도 그 수혜자 중 한 사람이었다.

클래스 올덴버그는 생활소품들을 커다랗게 확대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미술품에 현실성을 부여하려면 그것을 현실 세계의 일부분으로 만들어야 한다."

- 로버트 라우센버그

 

"예술은 박물관에 쳐박혀 있는 것 그 이상의 것을 행해야 한다."

- 클래스 올덴버그

워싱턴 스퀘어 광장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비트족 시인 앨런 긴즈버그, 그레고리 코르소, 언론인 바니 로셋, 1957년.

맨해튼에 있는 낡은 모자공장을 개조해 만든 앤디 워홀의 첫 '팩토리'.

안무가 머스 커닝엄이 공연한 발레극 <레인 포레스트>, 1968년.

팝 예술가인 톰 웨슬만은 일상생활의 소품을 나체 여성과 함께 구성했다.

액션 페인팅 | 잭슨 폴록은 자신만의 예술세계와 더불어 새로운 회화기법도 함께 발견했다. '드리핑' 기법이 그것으로, 거대한 캔버스에 물감을 떨어뜨리거나 뿌려대는 방식이다. 캔버스가 큰 경우에는 캔버스를 눕혀 놓고 그 위를 돌아다니며 작업했다고 하니, '액션 페인팅'이라는 며ㅛㅇ칭이 어색하지 않다.

표현주의 | 잭슨 폴록이 사망한 뒤 웰렘 드 쿠닝이 추상표현주의 예술의 선두주자로 나선다. 드 쿠닝이 살던 곳의 지명을 딴 1957년 작품 <팰리세이드>는 제목만 보고는 감상자가 모티브의 지형을 가늠하기 어렵다. 푸른색으로 가득 찬 캔버스를 휘저은 넓은 붓터치가 인상적이다.

발견자 | 앤디 워홀의 초상화에 나타난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스트인 그는 1960년대 뉴욕을 휘저었던 최고의 예술 기획자였다. 재스퍼 존스,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등 팝 예술가들의 전시회를 기획하고, 이들에게 엄청난 성공을 안겨준 인물이다.

젊은 야성 | 앤디 워홀과 키스 해링을 알기 전, 장 미셸 바스키아는 맨해튼의 벽이란 벽은 모두 그래피티 낙서로 채우고 다녔다. 그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최고의 예술가로 급부상한다. 바스키아는 27세로 요절했지만 100점이 넘는 유화 및 오브제 그리고 2천 점이 넘는 습작을 남겼다.

 

최고가 되기까지

 

"물론 앤디 워홀이 재능이

없다은 아니오.

…… 다만 천재적인

자기홍보 능력외에

그가 가진 재능이 무엇인지

모르겠단 말이오."

트루먼 카포티

 

"사업을 잘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다."

 

이는 워홀이 뉴욕 광고계에 몸담았던 초기에 터득한 신조이다. 예술계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워홀에 대한 관심은 불꽃처럼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1980년 독일 뮌헨에서 함께한 앤디 워홀과 요셉 보이스.

 

극장에 이름을 걸다

 

1968년 여름, 앤디 워홀은 여성운동가 발레리 솔라나스의 총격으로 큰 부상을 입는다. 그가 입원한 병원에 문안편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중에서 예전에 워홀의 영화를 상영했던 그리니치 빌리지 개릭 극장에서 보내온 편지는 특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워홀을 기리는 뜻에서 1968년 7월 15일, 극장 이름을 '더 앤디 워홀 개릭 극장'으로 개명한다는 내용이었다.

 

"앤디 워홀에 대한 심리분석이라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낫네. 그를 너무 사랑하니까."

- 요셉 보이스

워홀의 끊임없는 노력과 야망이 결실을 맺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워홀은 생전에 여러 유명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여는 명예를 누렸을 뿐 아니라 국제전시회를 통해 엄청난 부도 거머쥐었다.

1949년, 사회 초년생인 워홀이 맡은 일은 여성지 《글래머》에 실린 '뉴욕 직장에서 성공하기'라는 기사에 삽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다 아름답다."

- 앤디 워홀

1961년, 워홀은 자신의 작품을 쇼윈도 장식에 활용한다.

1964년 레오 커스텔리 화랑에 전시되었던 <브릴로 박스>.

1964년 동료 화가들과 함께한 워홀. 왼쪽부터 톰 웨슬만, 로이 리히텐슈타인, 제임스 로젠퀴스트, 앤디 워홀, 클래스 올덴버그.

위조지폐 혹은 예술지폐 | "난 돈이 벽에 걸려 있는 게 좋다. 어차피 20만 달러를 주고 그림을 살 거라면, 그냥 돈을 벽에 거는 게 더 낫다." 워홀은 자신의 저서 《앤디 워홀의 철학》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가 그린 위조지폐들은 진짜 지폐의 가치를 훌쩍 넘어서버렸다.

돈의 예술 | <달러 사인>은 평단과 관람객 모두에게 외면당했다. 갤러리스트 레오 카스텔리가 1982년에 기획한 대규모 전시회는 실패로 끝나버린다.

화제 바꾸기 | 작품 <꽃>은 워홀이 <전기의자>의 예처럼 죽음과 연관지어 기획한 시리즈 이후에 탄생한 작품이다. 워홀이 이처럼 친근한 모티브를 선택하게된 데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현대미술 담당인 헨리 겔트잘러의 역할이 컸다.

자연으로 돌아가자 | 워홀의 <꽃> 시리즈는 1964년 카스텔리 화랑 전시회에서 전 작품 매진이라는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꽃> 시리즈는 워홀이 처음으로 자연에서 모티브를 구한 작품으로, 위에서 내려다본 꽃밭을 사진에 담아 작업에 활용했다.

친구, 그리고 적 | 워홀은 독일 출신 예술가인 요셉 보이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친구만 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사진작가인 프레데릭 에버슈타트는 1960년대 워홀에 대해 "은색 가발을 뒤집어 쓴 역겨운 말라깽이"라는 서슴지 않았다.

동료 예술가 | 워홀은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유명인사라면 누구든 초상화의 모티브로 삼았는데, 동료 예술가였던 요셉 보이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워홀은 초상화 모델의 사진을 찍을 때, 그림같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얼굴을 하얗게 화장시키곤 했다고 한다.

 

예술

 

"착한 워홀은 워홀이 아니지.

사람이 이보다 짖궂을 수 있을까?

워홀은 예술사학자들에게

아주 골칫거리다.

워홀이 일부러 예술사를 무시하는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는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그가 폭발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거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달러 지폐, 자동차 사고,

연쇄살인범, 수프 깡통……

 

워홀의 작품에 등장한 모티브들을 열거하려면 끝이 없다. 그가 찾는 대상은 일상적이고, 진부한 것들이었다. 미술계가 이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린다. 아직은 추상표현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팝 예술가인 재스퍼 존스 또한 제품 포장 디자인에 매혹을 느꼈다. 다만 그가 고른 소재는 수프가 아닌 맥주 깡통이었을 뿐.

 

 

"팝아트란 사물을 좋아하는 것을 의미한다."

- 앤디 워홀

 

 

 

워홀은 20년간 캠벨 수프가 자신의 점심 메뉴에서 빠진 적이 없다고 했다. 이렇게 가까운 대상이었으니 작품의 모티브로 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1980년대에는 거꾸로 캠벨 회사에서 워홀에게 광고 포스터 제작을 의뢰했다.

 

"말이 없는 작품일수록 완벽한 작품이기 마련이다."

- 앤디 워홀

아크릴과 파스텔로 캔버스에 그린 <슈퍼맨>. 1960년 작품.

깡통의 활약은 계속된다. 캠벨 수프 깡통은 워홀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모티브가 된다.

1966년, 워홀은 카스텔리의 화랑에서 벽지와 방석 디자인을 선보인다.

슈퍼스타 제인 홀저와 함께 한 앤디 워홀. 1966년.

번진 선 | 워홀의 드로잉 기법은 '블로티드 라인' 즉 '선 번짐'이라고 불린다. 번진 점이 이어져 선 모양이 되는데, 잉크로 그림을 그린 후 종이를 덮어 찍어내면, 거울 반대방향으로 드문드문 끊어진 선이 생겨난다. 이러한 인쇄기법은 워홀의 오프셋 인쇄 작품들을 한층 다양하게 해주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신발 | 워홀은 구두라면 가리지 않고 그렸다. 1956년 작품인 금장식 구두 그림은 조금 특별하다. 제목이 가수이자 배우인 <주디 갈런드>였기 때문이다. 워홀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꼬불꼬불한 글씨는 워홀의 어머니인 줄리아의 필적이다.

스텝을 따라서 | 워홀은 스텝 순서를 그림으로 옮기면서 깨끗한 흑백으로 처리했다. 이 1962년 작품은 2분의 2박자 또는 4분의 4박자의 경쾌한 리듬에 맞추어 추는 폭스트롯 스텝을 보여준다. 이 연작의 다른 그림을 감상하면 또 다른 춤들을 배울 수 있다.

30명의 모나리자 |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르네상스 시대의 미녀 모나리자에 워홀은 홀딱 반했다. 워홀은 결국 이 신비한 미소를 복제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림의 제목은 <서른 개가 한 개보다 낫다>이다.

실험정신 | 워홀의 영화 <이트>에서 주인공 로버트 인디애나가 버섯을 맛있게 먹는 장면이다. 조급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45분. 뻔한 장면이 계속되는 것을 감안하면 꽤 긴 작품이다. 1960년대 워홀 영화의 키워드는 '디테일'이었다.

인내심 | 1964년 영화 <앰파이어>에서 워홀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져준다. 이 영화를 감상하려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주변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7시간 동안 한 각도만을 응시해야 한다.

산화작용 | 이 작품의 기법에 대한 점잖은 표현은 '금속성 킬러에 혼합재료' 정도가 되겠다. 워홀의 팩토리에선 금속 함유 물감을 칠하고 오줌으로 산화처리한 이 기법을 '오줌 페인팅"이라고 불렀다.

미스터리 | <그림자> 시리즈는 크기가 매우 큰 추상화이다. 이 비밀스러운 작품을 보면 도무지 이전 작품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워홀은 이 그림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에게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이건 살 수 있는 그림이 아니오"라고.

그림자 극장 | 팩토리에 들어찬 물건들이 만들어내는 이런저런 모양의 그림자는 워홀의 그림자 시리즈 제작에 많은 영감을 주었으리라,  <산화>와 마찬가지로 워홀은 이 작품에서도 구매자들에게 속 시원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앤디는 다른 인간들과는

완전히 달라요. 냐고요?

세계 최초로 제작된 플라스틱

인간이니까요."

울트라 바이올렛(본명 이자벨 뒤프렌)

 

"수줍고, 말이 없고

때론 배타적인 사람."

 

워홀 작품의 모델이 되었던 지인들의 평가다. 수많은 사진 속의 웃는 모습이 많지 않다. 워홀은 하루의 대부분을 창작에 매달렸고 시간이 생기면 파티 장소를 돌아다니는 데 썼다. 어김없이 카메라, 녹음기 그리고 그를 따르는 '슈퍼스타'들을 대동하고 말이다.

스튜디오 54에서 파티를 즐기는 앤디 워홀과 모델 제리 홀.

 

"내가 결혼한 건 1964년. 내 생애 첫 녹음기를 손에 넣었을 때다. 그 녹음기가 내 아내가 되었지. 내가 보통 '우리'라는 인칭을 쓰면, 그건 '나와 내 녹음기'를 지칭한 거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여기에선 어딘가 항상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지하실 아니면 지붕 위에서, 지하철 아니면 버스에서, 배 위에서 아니면 자유의 여신상에서."

- 앤디 워홀

워홀라 형제들. 왼쪽으로부터 폴, 앤드류, 존. 1942년 피츠버그 추정.

어머니 줄리아, 형 존과 함께한 앤디 워홀. 1931년 추정.

말끔하게 양복을 입은 앤디 워홀. 17세 추정.

인테리어 디자이너 수지 프랭크퍼트와 공동으로 펴낸 코믹 요리책 《와일드 라즈베리》 중 가장 많이 추천받은 래시피.

거울 속의 나 | 앤디 워홀은 앤드류 워홀라로 불리던 고등학생 시절에 이미 자화상 그리기를 좋아했다. 실크스크린 기법을 알게 된 1942년까지는 연필을 주로 사용했다.

클로즈업 | "앤디 워홀은 예술가와 사회 사이, 그리고 문명, 예술, 소비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소외감을 지워버리고 싶어했다. 그는 갈등 없는, 그리고 의미 없이도 아름다운,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예술적 삶을 꿈꾸어왔다. 그는 쓸데없는 공산주의 따위가 아니라 이러한 삶이 인간을 평등하게 만들고, 또 '행복한 소비기계'로 만든다고 했다." 1982년, 에두아르 보캉의 말.

캔버스에 만화 | 앤디 워홀은 어린 시절 만화를 무척 좋아했는데, 커서도 그 취향이 크게 바뀌지 않았던 모양이다. 워홀은 1961년, 시금치를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 '뽀빠이'를 캔버스로 불러냈다.

컬트 캐릭터 | 만화 캐릭터가 무조건 어린이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재치 있는 소녀 낸시의 일상과 모험을 그린 만화 <낸시>는 각종 신문에 연재되었고, 20세기에 가장 오래 연재된 만화 중 하나다.

색채의 향연 | 워홀은 1974년에 그린 영국 화가 데이비스 호크니 초상화에서 배경을 푸른 물빛으로 가득 채웠는데, 그냥 사용한 것은 아닌 듯하다. 호크니는 로스앤젤레스의 수영장들을 그린 유화로 유명해진 화가이기 때문이다.

동질감 | 1961년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카스텔리 화랑에서 선보인 거대한 만화 컷들은 워홀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1976년, 워홀은 존경하는 리히텐슈타인의 모습을 초상화에 담는다.

영화산업의 여신 | 노란 배경에 보라색, 검은 배경에 연두색……, 워홀이 만들어낸 수십 개의 틀 속에서 마릴린 먼로가 미소 짓고 있다. 워홀은 영화 <나이애가라>(1953)에 나온 먼로의 모습을 작품 소재로 택했다.

여신의 신화 | 먼로가 196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했을 때의 나이는 36세였다. 먼로의 죽음에 관한 억측이 쏟아져나오면서 그녀는 점차 신화로 자리매김해갔다. 끊임없이 먼로에 대해 '찍어내고' 싶어하는 마음은 언론이나 워홀이나 매한가지였다.

1975년에 출간된 《앤디 워홀의 철학》 표지.

워홀 사망 후 출판된 《앤디 워홀의 일기》.

1968년 6월 4일자 《뉴욕 포스트》지에 앤디 워홀과 저격범인 발레리 솔라니스(오른쪽)의 사진이 나란히 실렸다.

뉴욕에서 워홀과 촬영작업 중인 프레드 휴즈, 테일러 미드, 패트릭 틸든클로즈, 1967년 12월.

조 달레산드로가 출연한 1968년 워홀 영화 <플레시>의 포스터.

워홀이 발간한 잡지 《인터뷰》의 창간호 표지. 1969년.

1987년 2월 23일 《데일리 뉴스》에 실린 워홀의 사망 소식.

황제 | 워홀의 스타 시리즈에 '로큰롤의 황제'가 빠질 리가 없다. 워홀은 가수로, 또 배우로 성공을 거듭하는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열광했다. 1963년 작품 <더블 엘비스>에서 워홀은 은빛 배경에 자동차 도장용 래커 한 통을 모두 사용했다.

재키 | 1963년 11월 케네디 암살 당시 재클린 케네디는 옆에서 남편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 역사적 사건은 수 주가 흐른 뒤에도 미디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언론매체에 실린 재키의 다양한 모습은 워홀에게 영감을 주었다. <열여섯 명의 재키>에서 워홀은 패션 아이콘 재키와 미망인 재키의 모습을 상반되게 보여준다.

초고속 작품 | 팩토리에서 만들어지는 작품에는 '초고속'이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릴 듯하다. 당시에 제작된 연작 중 하나도 이러한 특성에 걸맞게 교통사고를 모티브로 했다. 하지만 미술시장은 아직 도발적인 예술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재난 | 워홀은 비극적 문구의 헤드라인이 지니는 흡인력에 대해 일찌감치 간파하고 이를 자신의 작품에 반영했다. 전기의자, 연쇄살인범, 해골, 재난사고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그것이다. 위의 작품은 <열 번의 초록빛 재난>.

진부함의 아름다움 | "모든 것이 다 아름답다……. 워홀은 이러한 신조를 내걸고 진부한 대상까지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독일의 저명 출판업자인 지크프리트 운젤트가 앤디 워홀에 대해 평가한 1991년의 편지 내용이다. 달걀 그림이 더욱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다.

형태의 최소화 | 때론 흑백으로, 때론 요란한 색깔로 캔버스를 가득 메운 달걀 그림은 간략한 모티브와는 달리 규모가 어머어마하다. 캔버스 길이가 자그마치 180cm, 작품 수는 230점이나 되었다. 1982년 워홀이 부활절 기념으로 제작한 이 연작에서 추상화풍이 살짝 엿보인다.

워홀의 안목 | 워홀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워홀이 이 작품을 어떤 시선으로 봤는지가 중요하다. 1987년 워홀 사망 후 그의 <최후의 만찬> 연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은 경매에서 17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빈정거림의 진실 | 화가 자니스 쿠넬리스는 1985년 요셉 보이스와 나눈 대화에서 워홀의 무지함에 대해 성토한다. "5년 전, 앤디 워홀이라는 작자가 이탈리아에 왔어요. 사람들이 이 멍청이를 우리 테이블에 앉혔죠. 테이블에는 모라비아를 비롯한 여러 명의 작가가 있었는데, 이탈리아 예술가 중 아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워홀이 글쎄 '이탈리아에 관해선 스파게티밖에 아는 게 없다'고 하지 않겠어요." "빈정거린 것이었겠지." "빈정거린 게 아니었어요! 워홀은 앉아서 줄곧 모욕적인 말만 늘어놓았다구요. 그는 재능도 없고, 예술가는 더더욱 아니에요!"

 

사랑

 

 

"세상본인

직접 참여해야 되는

두 가지가 있다.

섹스와 파티."

 

앤디 워홀

 

변화의 물결 속에서

 

미국 산업화시대의 수시민적 삶에서 시작하여 폭풍우 같던 1968년 히피시대를 거쳐 1980년대 피트니스 열풍과 첫 에이즈 공포를 겪기까지 워홀이 살아온 시대는 빠른 변화를 겪었고, 워홀은 그 물결을 따라 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코르키(랄프 T. 워드)와 앤디 워홀이 1953년 함께 펴낸 시집 《사랑은 핑크 케이크 같은 것》의 표지.

 

"가십과 스타들을 그토록 좋아하는 앤디가 자신의 개인사에 대해선 공개적으로 내보이기 싫어했다는 건 매우 모순된 일이다."

- 헨리 겔트잘러

워홀은 그림, 영화, 사진을 통해 보여주었던 자유분방함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애정사에 관해서는 매우 폐쇄적인 태도를 보였다.

워홀이 1955년에 《내 정원의 바닥에서의 책 표지에 그린 연인의 형상.

 

"앤디 워홀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내 그림, 내 영화, 내 모습에서 보이는 표면을 관찰하면 된다. 그 표면이 바로 나다. 그 밑으로 숨겨진 건 아무것도 없다."

- 앤디 워홀

워홀은 오랜 세월 어머니와 한집에서 살았다. 1974년 작 <줄리아 워홀라>.

앤디 워홀과 그림자. 1981년에 그려진 자화상 연작 중 하나이다.

골드북 | 《골드북》에서 보이는 인체 드로잉 및 초상화에서도 워홀은 특유의 부드럽고 드문드문 이어지는 곡선을 사용했다. 사진을 근거로 드로잉을 그렸는데, 후기 초상화에는 상상력이 많이 추가되었다. 18점의 그림이 담긴 《골드북》은 하드커버로 100권이 제작되었다.

초기 작품 | 1957년 출판된 《골드북》의 드로잉은 워홀이 서른 살 때 선보인 작품이다. 당시 워홀은 상업디자이너로 성공을 거둔 지 십 년이 흘렀지만 그의 금빛 드로잉들이 순수미술로 인정받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Do It Yourself!" | "직접 꾸며보세요!" 워홀이 작품에 곁들인 친절한 설명이다. <두 잇 유어셀프> 연작에서 워홀은 일부만 색칠하고, 나머지 작업은 구매자들의 몫으로 남겨놓는다. 이러한 '색칠공부'식 콘셉트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색칠공부 | 워홀의 <두 잇 유너셀프> 연작에서는 숫자 칸이 모두 비거나, 모두 채워지는 등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거대한 캔버스에 펼쳐진 바닷가 풍경 속에 색을 지시하는 번호들이 흩어져 있다.

권태 | 워홀은 1976년 동료인 글렌 오브라이언이 "요즘은 왜 자주 그림을 그리지 않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이디어가 떨어졌어.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도 않고, 난 오래 전부터 그리기를 포기하려고 했어. 매일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건 정말 지루한 일이야……."

토르소 | <토르소> 연작은 워홀이 회화를 포기하고 영화제작에 전념하겠노라고 선언한 후에 탄생했다. 팩토리에 넘쳐나는 모티브들이 그를 새로운 영감으로 이끌었나 보다.

카무플라주 | 워홀은 카무플라주 무늬에 애착심을 보이면서, 자화상에까지 이 무늬를 사용했다. 위의 작품은 세로 3m, 가로 10m가 넘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1986년에 제작된 <카무플라주> 연작은 여러 가지 색으로 제작되었다.

칭찬 혹은 견제 | 워홀은 자신의 추상작품 개인전의 개막식에 온 관람객에게 다른 예술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제 전시회 길 건너에 더 뛰어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면 그건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로르샤흐 검사법 | 환자가 잉크얼룩을 보고 연상되는 것을 근거로 심리분석을 하는 검사법이다. 이것을 고안한 스위스 심리학자 헤르만 로르샤흐는 화가가 꿈이었지만 의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미궁 속의 내면 | 워홀이 1984년에 완성한 <로르샤흐> 연작은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린 작품으로, 400×280cm의 어마어마한 크기다. 워홀이 이 그림을 연상시키려 했던 내면의 비밀은 무엇일까?

 

지금도 우리 곁에

 

앤디 워홀과 장 미셸 바스키아.

"워홀의 예술세계에서

보이는 반복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예술에는

어떠한 반복없다는 것이다"

 

존 케이지, 워홀에 대해 말하며

 

끝없는 유산

 

워홀이 남긴 자료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규모가 완전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워홀은 작품 수량뿐 아니라, 수집품도 엄청난 양을 자랑했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싶다면, 워홀의 고향 피츠버그행 비행기를 타라.

 

"앤디 워홀은 당대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거울이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예술가였다."

- 칼 앙드레

이제 워홀의 명성은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시대가 왔다. 2004년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앤디 워홀의 후기 작품'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대규모 전시회에는 7만 5천 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찾아와 워홀의 예술인생 후반에 만들어진 비디오, 영화, 유화 들을 감상했다. 위는 마오쩌둥의 초상화.

1982년, 갤러리스트 레오 카스텔리는 워홀의 <달러 사인>을 자신의 화랑에 전시하기로 마음 먹는다.

 

"나는 죽으면 어떤 잔재도 남기고 싶지 않고, 스스로도 어떤 잔재가 되고 싶지 않다. …… 나라는 기계가 완전히 사라졌으면 좋겠다."

- 앤디 워홀

뉴욕 소더비 사에서 제작한 앤디 워홀 경매 카탈로그. 방대한 수집품 때문에 6권이나 되었다.

소더비 사 직원들이 워홀의 소장품을 분류하는 데만 수개월이 걸렸다. 사진은 워홀의 부엌.

팀워크 | 바스키아가 20세기를 대표하는 미술가로 꼽히면서 그의 작품들이 경매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그래피티, 만화, 아프리카 가면, 토템상, 동물, 문자 등……. 모티브의 다양함에 있어서도 워홀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두 화가가 공동작업한 작품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토끼 | 마이클 잭슨과 애완원숭이 버블스의 모습을 도자기로 굽고, 금속 재질로 싸구려 슈퍼마켓 토끼 풍선을 흉내 낸 제프 쿤스의 작품들은 항상 논란을 몰고다녔다. 쿤스 역시 워홀과 마찬가지로 소비문화와 대중문화 속에서 작품 모티브를 찾았다.

도자기 마을 | 워홀은 1980년 독일 방문 중에 유명 도자기회사인 로젠탈 사를 방문햇다. 워홀은 공장 방문을 기념하여 사장인 필립 로젠탈의 초상화를 그려준다. 이런 인연으로 로젠탈 사는 워홀 시리즈 제품을 기획, 판매하게 되었다. 위의 사진은 캠벨 수프 깡통 모양의 머그잔이다.

바스키아 | 워홀은 영화 속에서도 살아 있었다. 줄리앙 슈나벨 감독은 1996년 그래피티 예술가인 장 미셸 바스키아를 기리는 영화를 제작한다. 바스키아에 제프리 라이트, 워홀 역은 데이비드 보위가 맡았다. 그리고 개리 올드먼, 데니스 호퍼 같은 스타들이 대거 조연으로 출연했다.

영화 주인공 | <오스틴 파워-제로>(1997)는 스윙 문화가 극에 달한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 영화. 1960년대라면 워홀이 빠질 수 없다. 마크 브링글슨이 은빛 가발을 쓰고 분한 워홀은 생전의 모습 그대로 파티장에서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앤디 워홀의 친구들

 

앤디 워홀은 생전에 어딜 가나 혼자 다니는 법이 없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워홀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던 이들 그룹은 낮에는 그의 조수, 모델, 배우이었고, 밤에는 그의 파티 친구들이었다. 팩토리를 드나드는 이들은 누구나 이 그룹에 속하길 열망했으며, 그만큼 그의 측근 자리를 꿰차기 위한 경쟁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워홀은 지인들에 대한 호감을 순식간에 비호감으로 바꾸어버리기로 유명했다. 이들 중 몇몇은 워홀과의 관계를 발판 삼아 경력을 쌓는 데 성공했지만, 대부분은 팩토리 시절의 영광을 뛰어넘는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대로 시들어버린다.

 

네이션 글럭

1955년부터 워홀의 조수로 일했다. 그의 인맥관리 능력과 창의력은 50년대 워홀이 성공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베이비 제인 홀저

본명은 제인 홀저. 뉴욕 상류사회를 주름잡던 여성으로, 《뉴욕 매거진》이 선정한 '1964년을 빛낸 여성'에 뽑힌 바 있다. 워홀의 첫 영화인 <키스>(1963) 출연으로 워홀의 슈퍼스타 계보의 초시가 되었다.

 

프레데릭 휴즈

텍사스 휴스턴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휴즈는 1964년에 워홀을 알게 되었다. 휴즈는 미국 최대 규모의 미술품 소장으로 유명한 메닐가(家) 사람을 자신의 후견인으로 두었기 때문에, 워홀을 위해 자신의 인맥을 적극 활용한다. 휴즈는 후에 앤디 워홀 엔터프라이즈 사(社)의 자회사인 앤디 워홀 영화사의 회장직을 맡는 동시에 워홀의 유산관리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제드 존슨

제드 존슨은 1968년 팩토리 직원으로 고용된 이래로 80년대까지 애인으로서 워홀의 옆자리를 지켰다. 존슨은 워홀의 마지막 영화인 <앤디 워홀의 배드>(1976)에서 연출을 담당하기도 했다. 워홀 사망 후에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했다.

 

제라드 말랑가

말랑가는 1963년 20세에 워홀의 조수로 기용된 이후로 그의 곁을 가장 오래 지킨 동료이다. 말랑가는 워홀의 영화에 몇 번 출연했고, 《인터뷰》지 창간 당시 공동출판인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폴 모리세이

본래 직업은 사회복지사였다가 1965년에 워홀의 팩토리 팀에 합류햇다. 그는 주로 워홀의 영화제작에 참여했는데, 워홀의 말기 영화에서는 연출을 맡기도 했다.

 

빌리 네임

본명은 빌리 리니치. 전에는 미용사이자 조명기사로 일하다가, 1960년 워홀과 알게 되고 나서 첫 팩토리의 공식 사진기사로 탈바꿈했다. 그는 1970년 어느 날 갑자기 "난 간다. 내 걱정은 마."라는 짧은 메모를 남긴 채 작업 도중에 잠적해버린다.

 

온딘

본명은 빌리 올리비오. 마약에 찌든 이성복장착용자로, 1963년부터 팩토리를 드나들었다. 워홀의 영화 <첼시 걸스>에서는 '그리니치빌리지의 교황' 역을 맡았다.

 

브리짓 포크

본명은 브리짓 벌린.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반항심과 자유분방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워홀의 영화에도 다수 출연했던 포크는 1963년 처음 워홀을 알게 된 후로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그의 최측근 자리를 지켰다.

 

에디 세즈윅

본명은 에디스 민턴 세즈윅. 워홀과는 1965년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고, 워홀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익스플로딩 플래스틱 인에비터블>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에도 출연했다. 세즈윅은 1960년대 뉴욕의 패션 아이콘이었다. 세즈윅 사망 1년 후인 1971년에는 그녀를 기리는 전기영화 <차오, 맨해튼>이 나오기도 했다.

 

비바!

본명은 재닛 수잔 메리 호프먼. 1960년대 워홀의 슈퍼스타가 되면서 '비바'라는 예명을 얻었다. 비바는 <첼시 걸스>, <론섬 카우보이>, <블루 무비> 등의 워홀 영화에 출연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