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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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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07 톈산 산맥 아래에서

 

 

 

최석

2016, 천년의 시작

 

대야도서관

SB110702

 

811.7

시72ㅊ 198

 

시작시인선 0198

 

한때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 속하였던 러시아와 시베리아, 중앙아시아는 스탈린에 의해 1937년 10월부터 1938년 4월 사이에 연해주 일대에서 강제 이주당한 20여만 명의 고려인(까레이스끼)과 그 후예들의 발자취가 짙게 배인 광활한 땅으로 이른바 CIS(독립 국가 연합) 지역이다. 이들 나라에는 고려인 후예들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날아 들어간 '한인韓人'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영주권을 취득하거나 장기간의 체류를 하면서 한인 동포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제2의 도시 알마티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 최석 시인의 새 시집 『톈산 산맥 아래에서』는 디아스포라(추방된 자들)의 후예인 고려인과 1990년대 후반 국교 수립 이후 새로운 형태의 노마드(유목민)로 들어간 한인들의 애환과 삶의 치열함 혹은 '척박한 광야에서의 삶'을 담아낸 중앙아시아 코리안 문학의 탄력과 에너지로 작동하여 울림이 크다. 「부룬다이 가는 길」「부음」「그라프가 늙는다」 등의 시편은 우리 시대 노마드 문학Normad Literature의 드넓고 독창적인 지평선을 보여준다.

- 김준태(시인 · 조선대 교수)

 

최석

논산 출생으로 1987년 무크지 『현실시각』과 1989년 계간 『현대시세계』를 통해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97년에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살고 있다. 2,000년대 초 정상진, 양원식, 이정희 등의 고려인 문인들과 한국에서 이주한 작가들을 모아 중앙아시아문인협회를 결성하였고 2006년 고려인문예지 『고려문화』를 창간하여 편집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1년 해외 문인들에게 주는 이병주국제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집으로는 『작업일지』(청하, 1989년)가 있다.

 

시인의 말

 

톈산의 발치에 앉아

고추 잎을 딴다

아무것도 맺지 못한 흰 꽃들

여린 간니들이 갈볕 아래 환하다

오랜 밤을 견딘 기억들이 펼쳐놓으니

허술하기만 하다

조바심을 내던 빈 자루에

칠성무당벌레 한 마리 기어오른다

존재한다는 것은 만만하지 않다

광야가 비어가니

곧 겨울이 올 것이다

 

2015년 가을 알마티

최  석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서시
부룬다이 가는 길
개양귀비꽃의 소묘
천 년의 풍경
봉분의 역사
더께에 대하여
귀뚜라미 보일러
그리운 최영 장군
산해진미론
알마굴에 대한 비망록
그라프가 늙는다
매명의 시
털 이야기
부음
저 푸른 초원 위에
차를 마시며
김 가이의 봄
해방 60주년의 점심 식사
고려인을 위하여
마경준 동무를 곡함
하여가
홍범도를 그리며
한 여인의 짧은 기록
모정의 세월
뚜르겐스키 적포도주
개떡
아버지
고슴도치의 시
꽃이 피다
이사 가던 날
여름날
자작나무의 시

제2부
실크로드는 없다
맛있는 피클
예르쟌
낙하의 비밀
톈산에서 만나는 동해 바다
새참
독서
톈산 산맥
떠도는 냄새
희망에 대하여
고수를 찾아서
또 고수를 찾아서
냄비에 대한 편견
폼생폼사
밭고랑 한 줄을 일궜을 뿐인데……
첫 눈

비극적 상상력
KBS World
소원의 나무
또 다른 외전
기억의 고집
위그르의 수박가게
배설론
호두나무 연대기
영웅시대
소나무
선악과에 대하여
배달되는 봄
우화의 세계
하렘을 찾아서
사막의 꿈

해설
홍용희 톈산에서의 실존을 위하여

 

톈산 산맥

 

산맥이 튀어 오른다

하늘을 탐하는

이교의 창검처럼 불안하다

차안에서 피안까지

가야 할 길은 먼데

산맥은 자꾸만 경계를 만든다

원래 저 산은

흉노와 짱깨들이 만든 소도가 아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는

파미르의 속살이 아니다

지구라트를 세우던 습성과

말을 버리고 주먹을 사용하던 관성 때문에

생겨난 저주이다

그런 추가 조항 때문에

간혹 산이 운다

 

서시

 

톈산은 늘 거기 있었지만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일 년 내내 한텡그리 봉은 흰 눈을 건처럼

두르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사는 것이 뭔지

고개를 숙인 채 인상만 찡그린다

검색어만으로 접선이 완료되는 인터넷의 대낮에

두고 온 한국의 친인척과 연고가

끊어지고 있는 사이

끊고 있는 사이

딸과 아들은 유창한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국적 없는 세계화의 꿈나무로 자라고

노린내 나는 양고기를 주식처럼 좋아한다

불확실한 미래

아이들에겐 조국이 없다

국적조차 모호하다

비닐봉지에 담긴 김치 한 보시기에

쉬어 꼬부라진 향수병이나 도지는

알마티의 저녁

석양은 지평선 끝에 닿지도 않고

장엄하게 벌개지는데

눈만 들면 보이는 톈산의 뭇 봉들이

오늘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보이지 않는다

 

더께에 대하여

 

알마티 가가리나 115번지

여기가 우리 집

아들 현상이가 착상이 되었을 때 이사와

이제 일곱 살이 되었으니 우리는

이곳에서 8년째 살고 있는 셈이다

아이들에게는 고향과 진배없지만

나는 언제나 낯설다

오래 살아도 삶에 더께가 끼지 않는다

인간들이 낯설고 땅이 낯설다

냄새가 낯설고 맛이 낯설다

체위가 낯설고 오르가슴이 낯설다

낯설음은 불안함이고

낯설음은 극단적 선택을 강요한다

끝내 아내가 낯설고

내가 낯설다

낯설음에 대한 익숙함

그것은 삶의 더께가 아니고 관성일 뿐이다

물이 끓고 있다

주전자 속에서 달아나려 하는

수많은 세월의 미립자들, 하모니카

소리를 내며 몰려나오는 수증기처럼

간혹 깨끗이 증발해버렸으면 싶다

허옇게 둘러붙은 석회 앙금

박박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데

그것이 내 삶의 더께일까?

 

여름날

 

노을진 들판을 바라보고 있으면

배가 고프다

논에 피사리 간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태 돌아오지 않고

시렁에 놓인 보리밥 소쿠리는 비어 있다

텃밭에 늙은 가지를 따

먹다 집어던지고

아릿한 입맛만 다신다

잠자리를 쫓는 것도

흙장난도 시들해지는 저물녘

뒷집에선 저녁연기 잦아들고

나직한 토장국 냄새

담을 넘어오는데

싸하니 횟배가 아프다

어머니는 언제나 돌아올까?

자꾸만 까치발로 내다보는 들길

저녁해는 먹다 버린

가지 꽁다리만큼도 안 남았다

땅거미에 젖어드는 빈집

기다림에 지쳐 설핏 잠이 든다

어머니 밥 짓는 소리

초저녁 별이 뜨고 있다

 

개떡

 

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그것도 쌓인 눈을 비껴가며 돋아나는 초봄이

좋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좌

문득 개떡이 먹고 싶다

거무튀튀하고 못생긴 쑥개떡

어머니의 뭉그러진 지문이 남아 있는 쑥개떡

무슨 새참한 맛이 있겠냐마는 지금

먹고 싶은 것은 어릴 적의 그리움 아니냐

다북쑥 소담한 논두렁을 타고

뭉기적뭉기적 넘어오던 봄바람

까르르르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대던 예닐곱 살

마른버짐 번성한 까까머리 동무들 아니냐

논산시 채운면 새터마을

나싱개 자운영 벌금자리

무성하던 어린 날 들녘으로 돌아가고 싶다

고향을 잊어버린 두 아이들에게

내 어린 날의 봄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고 싶다

"옛날에 저 둠벙 속에는 이무기가 한 마리 살았었는데……"

새로운 봄 이야기를 만들어주고 싶다

아마도 내가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고려인을 위하여

 

중앙아시아에서는 스스로 고려인이라 부른다

그들에게는 조국이 없다

없어져버렸다

원동遠東에서 기차에 실려

화물칸에 실려

뾰족한 송곳처럼 서서

분노를 세우고

공포를 세우고

도착지도 모른 채 뿌려진 곳

중앙아시아 눈이 부신 햇살 아래 펼쳐진

소금꽃 핀 광야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곳

아직도 그들이 산다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살던 그들이

이제는 번듯한 집에서 산다

땅굴 속에서도 죽지 않은 사람들은

장군도 되고 영웅도 되고

가수도 되고 첩이 되기도 했다

그때 핏덩이였던 사람들조차

이제 다 죽었다

원동을 그리며 죽었다

그들의 자식 자식의 자식들이 살아간다

동해물과 백두산을 모르고도 살아간다

그들의 조국은 카자흐스탄이고 우즈베키스탄이다

어쩌면 원동일지도 모른다

원동에 가면 조선이 보이고 한국이 보인다

제발 신파조로 그들을 대하지 마라

고려인은 눈물을 싫어한다

 

새참

 

"어이 오게나"

허리 굽은 강태수가

찬물에 밥을 말아 먹고 있다

 

몽롱한 나르꼬지 몇 포기

돌각밭에 기대어 흔들거린다

모다 힘이 든 게지

 

눈물 콧물 닦고

일찍 뜬 쪽달만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

 

마경준 동무를 곡함

 

고려인 인명 자료를 뒤적이다 만난 사람

강제 이주의 열차를 타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36일을 달려와

흰 눈밭에 빨간 피를 한 움큼 뱉어낸 사람

추웠다던 그 겨울

잘 먹어야 낫는 구멍 난 폐 덩어리를 품으며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 그러하거늘

크즐오르다 부르노예 정거장 부근에서

불행히 세상을 떠난 사람

질긴 한 목숨이었거늘

인명록에 기록할 만한 사유가 없어

잊혀져야 하는

1938년 6월 10일 레닌기치의 역사歷史

빠알간 개양귀비꽃 벌판에서

돌림병처럼 꽃대를 올리는

마경준

동무

 

김 가이의 봄

 

우슈토베의 농법은 진보하지 않는다

한때는 레닌의 이름을 붙였던 꼴호즈 언저리에

김해나 경주쯤이 본관이었을 김 가이가

씨를 덮는다 고집도 없이

밋밋한 사람처럼

땅을 헤집고 씨앗을 덮는다

동쪽의 끝에서 기차를 타고 왔을 흑역사를

덮고 또 덮어서 싹을 틔운다

갈무리된 순한 눈빛은 씨감자마냔 둥그랗다

남도 어디선가 마났을 법한 동무

김 가이의 덩이줄기가 궁금했지만

캐낼 것이 없는 마른 기침뿐

그는 우스토벤스키

진보하지 않는 저 땅으로 들어갈 것이다

쏟아져 있는 씨감자들이

촉수를 틔우고 있는

김 가이의

텃밭

 

해방 60주년의 점심 식사

 

흘레브

고려인들은 떡이라고 부르는 빵

옛날 봉놋방에 굴러다니던

목침 같다 해방 직후

소련군이 그랬다는 것처럼 사실

그것을 베고 잠을 자본 적도 있었다

깨어나서 뜯어먹어 본 적도 있었다

오늘 점심으로

고려인 통역 아줌마와 함께

흘레브를 먹는다

한민족의 근현대사를 먹는다

그녀는 떡을 먹는 것이고

나는 빵을 먹는다

그녀는 고기에 곁들여 먹고

나는 김치를 얹어서 먹고

그녀는 일용할 양식을 먹고

나는 대용식을 먹는다

바라보며 멋쩍게 웃는다

같은 피를 가졌어도

서로 신토불이다

 

톈산에서 만나는 동해 바다

 

요거는 동태국

요거는 네덜란드에서 온 수꿈부리야

배소배소의 땅에서는 나름 귀한 것들

먹어봐요

안 먹으면 죽어요

눈이 십 리는 들어간 내게

쥐어주는 숟가락

간간한 갯내가 슬그머니

빈속에 들어앉는다 혹여

캡슐 하나로 한 끼를 때울 수 있다면

우리들의 저녁은

얼마나 서러운 바리때였을까

관음보살의 아우라로 빛나는

그대 뒤로

등 푸른 바다가 걸려 있고

짤랑짤랑 반짝이는

저 금초롱

물고기들

 

하여가

 

카자흐 사람들은 우리 보고

마늘 냄새가 난다 하고

우리는 도리어 노린내가 난다 하고

양파 냄새가 난다 하고

식재료가 다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살다 보면 무뎌지는 법

이젠 양고기도 제법 먹는다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별게 아니다

벌써 카자흐인과 한국인의 교배종이

땅 위에 등장한 지 오래

애비의 성을 따르든

에미의 성을 따르든

결국 카자흐인이 된다

된장국을 끓인다

알마티의 애호박과 타쉬겐트에서 실어온 감자

남해 바다 멸치에 고려인 된장을 넣어 끓인

애매모호한 국물 끓일수록

진해지는 한민족의 눈물처럼

몸속 깊숙이 된장의 냄새가 든다

 

차를 마시며

 

톈산의 눈 속 낡은 집이

차를 마신다 보성에서 채집한

곡우의 봄소식은 아직 쌀쌀하고 춥다

창밖에는 카자흐의 초원에서

몰려오는 눈발이 조용히 나리고

나리다가 지겨우면

창문에 이마를 대고 들여다본다

 

차를 마시며

간혹 순천만을 적시고

지리산 자락으로 올라가는 찬바람 소리와

불순한 운주사

천불천탑의 꿈을 덮던

속 너른 눈발이 보일 듯도 하지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로 인해 세상의 모든 것은 쌓인다

슬픔이 쌓이고

얼굴이 쌓인다

 

보성차가 끓는다

구증구포의 숨결이 부대끼며 끓는다

톈산 북로의 말 울음소리와

결기 푸른 대숲의 바람 소리를

교접하려는 단꿈이

혼자서

끓는다

 

고슴도치의 시

 

  현상이는 내가 늦게 얻은 자식 만으로 일곱 살이다 말도 징그럽게도 안 들을 나이 그래도 하루가 다르게 크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놈도 여느 아이와 다를 바 없는 로봇 마니아다 로봇들을 가지고 진종일을 논다 한국 로봇을 가지고 러시아 말로 논다 혼자서 묻고 혼자서 대답하고 레이저 포를 쏘고 적의 부메랑에 맞아 쓰러진다 신기하여라 별난 효과음을 다 낸다 가끔은 저놈이 한국인인지 러시아 사람인지 분간이 안 간다 부끄럽지만 나도 이제 고슴도치 조건 없이 예쁘다 바라느니

  틀을 만들지 말 것

 

꽃이 피다

 

아버지가 녹슨 라이터를 닦고 있다

몰골이 많이 상한 라이터

Zippo도 아니고

Zippon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논에서 김을 매다가 잃어버린 라이터

나락을 베다가 찾아낸 라이터

한때 반짝이던 광택의 시간도 지워지고

녹물이 번성한 Zippon의 깊은 수심

불이 붙지 않는 아버지를 아버지가 닦고 있다

 

어느

봄날

일리 강을 따라가는 묵은 길가에서 만나다

붉은 꽃 푸른 꽃

노랗고도 하얀 꽃

Zippon 꽃들

지천이다

 

맛있는 피클

 

피자집에서 피자를 먹다

물컹한 피클을 먹다 생각을 하다

투명하게 빛났을 스무 살

치렁한 갈색 머리

깊고도 푸른 눈빛을 빛내며

또박또박 깜사몰스카야거리를 활보했을

러시아의 여인

꼬뮤니스트 갈리나 니꼴라이나

뚱뚱해진 정년을 넘긴 후에야

우리 세탁소의 바지 프레스를 눌렀던 여인

무릎의 지친 흔적을 곱게 펴던

갈리나 니꼴라이나

내 딸애의 입속에 피클을 넣어주던

오 갈리나 니꼴라이나

그녀가 빚은 상큼한 향기

아삭한 피클을 먹을 수 없음에

다시 먹을 수 없음에

눈시울이 시큰하다

 

부룬다이 가는 길

 

알마티 시가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다

기차를 타고 며칠을 달려도 지평선이 보인다

누군들 주눅이 들지 않겠는가

쥐코밥상만 한 한국의 땅덩이에 한숨이 나고

아등바등거리는 오늘의 삶에 눈물이 난다

죽어서도 묻힐 땅조차 없는 우리들

이승에 움집 하나도 내 것이 아닌 바에

죽어 한 줌 재로 날린들 무에 대수겠는가

친했던 고려인의 하관을 마치고 온 후로

부룬다이 모래 한 점 섞이지 않은

대지의 속살을 만지고 난 후로

문득 이곳에 뼈를 묻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업보이거늘

살고 죽는 일이 어디 내 소관일까 마는

 

그라프가 늙는다

 

그라프

몸도 크지만 대가리가 기형적으로 큰 개

처음 저놈을 만났을 때 눈빛이 형형했었다

그때가 벌써 다섯 살

털은 반지르르하고 골격은 단단하게 바라졌었다

뼈다귀를 삶아주면 밤새

우둑우둑 씹어 삼키는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깊은 잠에 들었다

저놈은 우리 집의 수난사를 잘 알고 있다

첫 번째 강도가 들던 날

나를 먼저 물어뜯었고

두 번째 강도가 들던 날은 달아났다

달아났다 아침에 들어왔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개답지 못한 개

그래도 저놈을 버리지 못했다

첫정이었다

우리의 식구였다 간혹

줄을 끊고 담을 넘어

발정이 난 암캐를 찾아갔고

다음 날이면 상처를 입고 들어와 며칠을 앓았다

그렇게 십수 년을 혼자서 살고 있다

개에게도 슬픔이 있다

언제부턴가 조금씩 미쳐가고 있는 그라프

비 오는 날은 눈에 광기가 돋고

폐부에서 끌어올리는 소리로

밤새워 운다 깊은 상처가 있었으리라

노쇠한 구도자처럼 구부러진 그라프

그라프가 늙는다

내가 늙는다

 

부음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텃밭에 나간다

하는 일이라는 게

단순히 잡초를 뽑는다든지

고추 대에 북을 돋우는 것이 고작이지만

땡볕이라도 그 일이 즐겁다

식구들마저 촌놈의 근성으로 치부하는 눈치지만

옛말 그른 것이 어디 있는가

땅이 아니 흙은 거짓말을 않는다

뿌린 대로 나온다

정성대로 큰다

거기서 배우는 때늦은 사랑법

새로운 씨앗이라면 뭐든 뿌려보고 싶다

새로운 기쁨이 싹을 틔울 것 같다 오늘

그대의 소식을 듣는다

땅에 묻는다

꽃으로 피지 못한

그대는 어떤 꽃이었을까?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