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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 12. 15:29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09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상>

 

 

홍순민

2017, 눌와

 

대야도서관

sb121405

 

911.6

홍56ㄱ

 

왕조국가의 중심,

임금이 사는 곳

 

궁궐은 왕조국가 조선의 정점이자 핵심이었다

 

궁궐은 '임금이 사는 곳'이다. 임금은 왕조국가의 주권자이자 통치자이다. 그런 임금이 '산다'는 것은 일상생활을 넘어, 국정을 운영하고 통치행위를 하는 공적인 활동을 가리킨다. 임금은 궁궐을 벗어나는 일이 드물었다. 임금의 활동은 대부분 궁궐에서 이루어졌다. 궁궐은 임금의 존엄을 과시하고 정치적, 행정적 명령을 내는 곳이었다. 궁궐은 왕조국가의 중심이요, 최고의 관청이었다.

 

홍순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조선 후기 정치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조선 후기 국가경영의 실상을 밝혀보려 공부하고 있다. 정치의 배경이 되는 공간에 대한 관심에서 공간에서 살던 사람들과 그들의 삶의 꼴, 곧 문화로 탐구의 대상을 넓혀가고 있다. 도성과 궁궐에 대한 책을 쓴 데 이어 종묘, 그리고 조선시대 서울을 쓸 궁리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홍순민의 한양읽기: 도성》, 《한양도성, 서울 육백년을 담다》, 《조선시대사 1》(공저), 《서울 풍광》, 《우리 궁궐 이야기》등이 있다. 현재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에서 문화자원을 가르치고 있다.

 

차례

 

머리말

 

 

 

제1장

우리 땅 우리 서울


1 백두산 뻗어나려
   반도 삼천리

   산분수합, 산자분수령
   반도 삼천리의 배꼽, 서울


2 왕도 서울

   서울을 왕도로 만든 세 가지
   왕도의 예복, 도성
   서울 바닥
   묘사궁궐


제2장

임금이 사는 곳, 궁궐


1 궁궐이란 무엇인가

   궁궐, 그 낱말의 뜻
   궁궐은 아닌, '궁'들


2 궁궐의 짜임새

   오문삼조?
   궁궐의 여섯 공간


3 건물 읽기

   전통건축의 구조
   건물의 신분


제3장

궁궐의 역사


1 첫 번째 양궐체제

   궁궐 이해의 열쇠, 양궐체제
   영원한 법궁, 경복궁
   창덕궁과 창경궁의 탄생
   임진왜란, 궁궐을 삼키다
   정릉동행궁


2 두 번째 양궐체제

   광해군의 무리수
   동궐과 서궐
   궁궐 임어, 왕권의 발현


3 세 번째 양궐체제

   법궁 경복궁 중건
   고종의 이어, 이어, 이어


4 경운궁 단궐체제

   경운궁 시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궁궐의 끝, 국망


부록

궁궐을 보는 눈

궁궐의 주제, 궁중문화
사람들의 삶의 꼴, 문화
공간, 시간, 인간 속으로
문화유산 만나기
전통문화의 기본 관념


참고 문헌 / 주석
도판 출처 / 고서화, 고지도

 

《여지도》 중 <조선일본유구국도>의 한반도 부분 |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거기서 갈라져나온 한북정맥의 끝에 매달린 붉고 탐스런 열매 서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기전도>, 《동국여도》| 서울은 바로 북쪽의 북한산성, 서북쪽 개성의 대흥산성, 서쪽 강화의 읍성 및 돈대와 문수산성, 남쪽 광주의 남한산성, 더 멀리 수원의 화성을 거느리고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한성전도>, 《고지도첩 | 도성은 내사산 등성이를 따라 한 바퀴 돈다. 내사산 바깥으로는 산줄기들이 겹겹이 감싸준다. 도성 안에서 모여든 물은 동으로 나가 중량천으로 합류하고, 중량천은 남으로 흘러 한강으로 합치고, 한강은 서쪽으로 가면서 성저십리 전체를 안아준다. (영남대학교박물관 소장)

서울의 내사산 | 북한산의 가장 남쪽 봉우리 보현봉에서 산줄기가 내려가면서 형제봉, 구준봉을 거쳐 백악으로 솟았다. 백악에서 동남쪽으로 흐른 줄기가 나지막하게 타락산을 이루었다. 백악에서 서남쪽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인왕산으로 이어지고,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목멱산으로 마무리되었다.

《숙빈최씨소령원도》 중 <묘소도형여산론>의 산도(山圖) 부분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무덤인 소령원(昭寧園)의 산도다. 산줄기는 가운데 무덤을 겹겹이 감싸고, 그 갈피갈피에서 물줄기가 모여들어 서북쪽으로 흘러 나간다. 이른바 명당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손들이 잘 되었나?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도성도>, 《조선강역총도》 | 도성의 문루가 숭례문과 흥인문, 돈의문, 광화문에만 있는 것으로 보아 도성 정비가 끝나기 전인 18세기 초의 것으로 보인다. 경희궁은 경덕궁으로 쓰여 있으며, 숮정문은 터만 있고, 광희문은 수구문으로, 남소문은 광희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도성 | 백악곡성에서 서편으로 도성이 구불구불 백악 정상을 휘감아 돈다. 저 멀리 인왕산 암봉을 돌아 목멱 정상을 넘고 넘어 사진에 보이지 않더라도 타락산을 더듬어 훑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인왕산 밑자락의 도성 옛 모습 | 도성 아래 순라길에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몇몇은 성 밑 마을에서 이제 막 올라오고 있다. 저 뒤편으로 인왕산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도성의 서쪽 소의문과 돈의문 사이 어디쯤일 것이다. (퍼시벌 로웰 사진, 1884년)

혜화문 옛 모습 | 도성의 동북쪽 문인 혜화문. 속칭 동소문이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네 정문(正門)의 하나가 되었다. 좌우에 성벽을 거느리고 고갯마루에 올라앉은 모습이 장하다. 강원도 함경도 방면에서 몇 날 며칠을 걸려 한양에 온 시골 사람들, 저 성문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 (《조선고적도보》)

불타기 전 숭례문 | 화재 바로 전날인 2008년 2월 9일에 찍은 숭례문 모습. 저때까지 유지되어오던 옛 모습이 하룻밤 새에 잿더미가 되었다. 보존은 어려운데 파손은 예측할 수 없는 위기 속에 들이닥친다.

창의문 | 도성문들 가운데 유일하게 제자리, 제 모습을 지키고 있는 창의문.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12월 2일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었다.

운종가 옛 모습 | 오늘날의 종로2가 YMCA 자리에 있었던 한성전기회사 옥상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광경. 널찍한 운종가 한가운데로 전차 선로가 가고 있다. 사진 왼편의 다른 건물들보다 조금 큰 건물이 보신각이다. 피마골 안에도 사람들이 다니고 있다. (《버튼 홈즈의 여행 강의》)

<수선총도>의 운종가 부분 | 운종가 가운데서도 중심부인 종루 근처와 그 아래 남대문로에는 주요 생필품을 파는 시전 점포들이 모여 잇었다. 사진의 아래에 가로로 그어진 선이 운종가이다. 그 주변에 시전의 이름들이 기재되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1903년 서울 | 사진 왼쪽에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굽은 선이 도성이다. 도성 밖으로도 시가가 이어져 있다. 중단에 숭례문이 우뚝하고, 그 안에 선혜청이 넓게 자리 잡았다. 도성 안이 도성 밖보다 지형이 높고, 도성 안에는 크고 중요한 건물들이 많은 데 비해서 도성 밖은 상대적으로 작은 집들로 채워져 있다. (일본 학습원대학 동양문화연구소 소장)

마포 옛 모습(위) | 한강변에 큰 마을이 형성되어 초가집과 함께 기와집들도 빽빽하게 들어찼다. 강안에 닿아 있는 배들의 돛대도 촘촘하게 줄을 지었다. 선착장으로 오가는 사람들, 골목골목에서 무언가 하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숭례문 바깥 옛 모습(아래) | 소로 밭을 가는 뒤로 초가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저 멀리 도성이 높다랗게 좌우로 지나가는데 숭례문이 우뚝 솟아 있다. 장한 모습이다. 사진의 왼쪽 아래로 만초천이 흘러간다. (《꼬레아 에 꼬레아니》)

남대문로 옛 모습 | 숭례문 문루 2층쯤에서 성 안을 바라보았다. 남대문로가 오른쪽으로 굽어 이어진다. 길 가장자리에 길게 이어지는 초가집은 도로를 침범하여 지은 가가(假家)다. 아직 종현성당이나 상동교회는 들어서지 않은 것으로 보아 1898년 이전 사진이다. (《토미 톰킨스와 더불어 한국에서》)

1915년 이전 보신각 | 단층으로 된 종각 건물에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보신각 편액이 걸려 있다. 위치는 운종가와 남대문로가 만나는 삼거리 동남쪽 모퉁이이고, 정북을 바라보고 있다. 1915년에 옮기기 전임을 알 수 있다.

1915년에 옮긴 이후의 보신각 | 북에서 남으로 바라본 남대문로의 동쪽가에는 서양식 2층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사진의 왼편에 보신각이 서북쪽을 바라보면서 앉아 있다. 한복 입은 사람들 사이에 간간이 일본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섞여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 종루 주춧돌 | 원래 자리에서 발굴되어 서울역사박물관 앞마당으로 옮겨져 전시되어 있는 종루 주춧돌. 주춧돌 전부가 아니지만 이렇게 남아 있는 주춧돌만 보아도 종루가 얼마나 장대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현재 보신각 | 위치는 뒤로 물러났고, 좌향은 엉뚱하게 서북쪽을 바라보며, 철근콘크리트 2층 건물이다. 세부 모양과 장식도 근거를 찾기 어렵다. 게다가 달려 있는 종도 제 것이 아니다. 보신각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한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현재 기념비전(위) |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를 품고 있는 기념비전. 자리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주위 건물이 사라지고, 높은 빌딩이 들어서고, 도로도 몇 차례 넓어지는 등 주변 환경이 변함에 따라 매우 옹색한 처지가 되었다.

기념비전 옛 모습(아래) |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던 기념비전. 하지만 이것도 원래 모습은 아니다. 원래는 기로소 행각 안에 있었다. (《꼬레아 에 꼬레아니》)

현재 광화문앞길 | 도로 안에 광장이 갇혀 있는 형국이다. 세종대왕 동상을 넘어 광화문으로 가까이 가기 전에는 광화문과 그 뒤 풍경을 보기 어렵다. 가까이 간들 곧바로 걸어가서 광화문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광화문앞길 옛 모습 | 길 동편과 서편에는 국가의 중추 관서들의 행각과 정문이 담처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정면에 광화문이 남면하며 주인으로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더 멀리는 백악 산줄기가 감싸주는데, 북한산 보현봉이 슬쩍 넘겨다보고 있다.

광화문앞길에 모인 사람들 | 사진 맨 왼쪽에 광화문의 반이 보이고, 그 앞으로 관아들의 행각과 문이 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광화문앞길을 흰 옷에 흰 갓 또는 삿갓 아니면 희고 검은 장옷을 입은 사람들과 아이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전신주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1899년 이전이다. 그렇다면 1897년 명성왕후의 빈소를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옮긴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장이 된 경복궁 | 공진회장 광고탑에서 동남쪽을 찍었다. 중앙 약간 왼쪽에 근정문이 있다. 그 오른편에 크게 'ㅁ'자로 보이는 가건물이 공진회 제1호관이다. 오른쪽에 오벨리스크를 얹고 있는 것은 철도국 특설관이다. 그 오른편에 광화문이 있고, 광화문 앞으로 광화문통으로 이름이 바뀐 광화문앞길이 나 있다. (《조선물산공진회보고서》)

종묘 들어가는 길 | 운종가에서 북으로 방향을 틀면 운종가의 북쪽에서 운종가를 따라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제생동천을 건너게 된다. 그곳에는 당연히 돌다리가 걸쳐 있었다. 임금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이 다리를 건너기 전에 탈것에서 내려야 했다.

<도성도>(부분)에 나타난 종묘, 사직과 궁궐 | 종묘가 서울의 중앙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을 기준으로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단을 지었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종묘 자리부터 정하였고 그다음에 경복궁 자리를 잡았다고 《태조실록》은 말한다. 중국의 종묘와 조선의 종묘는 성격과 위상이 상당히 다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창덕궁 | 돈화문의 남서쪽에 있는 빌딩에 올라가 동북쪽으로 바라본 창덕궁 전경. 응봉에서 길게 흘러내리는 산자락의 서쪽 기슭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창경궁 | 서울대학교병원 의생명연구원에서 서남쪽으로 바라본 창경궁 전경. 응봉에서 흘러내리는 산자락의 동쪽 기슭에 동향으로 자리 잡았다. 창경궁 너머로 서울 도심이 빌딩 숲을 이루었다.

경희궁 | 멀리 떨어진 빌딩에서 서북쪽으로 바라본 경희궁의 외전 영역. 새로 지은 건물들이지만 숲과 어울려 궁궐 분위기를 제법 낸다.

경운궁 | 서울시의회 별관에서 정북 방향으로 바라본 경운궁 전경. 야경인 덕분에 경운궁의 부자연스럽고 초라한 부분들이 가려져서 그런대로 궁궐다운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중국 베이징 자금성의 북문 | "고궁박물원"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자금성은 그 많은 왕조가 생겼다가 없어진 중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궁궐이다. 물론 현재 살아 있는 궁궐은 아니다. 고궁으로서, 박물관을 겸하고 있다.

창덕궁 인정전 일대 | 창덕궁 서쪽 건물 높은 곳에서 본 전경이다. 오래된 건물도 있고, 새로 지은 건물도 있지만 어쨌거나 모두 죽은 건물들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이요, 본연의 제 기능을 발휘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영조 어진> | 우리는 조선의 임금을 아주 먼 옛날 사람으로 생각한다. 반면에 조선의 임금을 우리의 임금으로 여기는 생각도 저변에 깔려 있다. 서로 어긋나는 이러한 생각을 정리하여 옛 사람들에 대하여 객관적이면서 정확한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경복궁 동십자각 옛 모습 | 높은 대 위에 잘 생긴 누가 있고, 그 안에 작은 방이 있다. 성상소다. 동십자각 바로 옆으로 삼청동천이 흘러내려 개천으로 들어간다. 그 삼청동천에 난간도 없는 돌다리가 걸려 있다.

<보인소의궤> 중 조선국왕지인 | 조선 임금의 존재와 권력을 알리는 대표적인 인장, 대보다. 전서체 한자와 청나라 글자로 새겼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함흥본궁 | 이성계가 임금이 되고 나서 함흥이 있는 자신의 잠저에 지은 건물이다. 이성계가 죽은 뒤에는 왕실의 사당으로 쓰였다. 늙고 굽은 소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른편에는 노둣돌이 보인다. 이 노둣돌을 밟고 내리는 이는 누구일까? (《조선고적도보》)

건구고궁 현판 | 주역 건괘(乾卦)는 여섯 효(爻) 모두 양효(陽爻, -)로 되어 있다. 구(九)는 양효를 가리킨다. 그 가운데 첫째, 곧 맨 아래 양효인 초구(初九)는 잠룡을 가리킨다. 아직 용이 되기 전 물에 잠겨 있는 상태다. 이러한 뜻을 담아 영조는 자신의 잠저였던 창의궁 정당에 이 "건구고궁"이라는 현판을 써서 걸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운현궁 노락당 |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고 있던 때는 그 위세에 걸맞은 규모를 갖추었지만, 이후 영역도 축소되고 건물들도 바뀐 것이 많다. 그 후손들이 지키지 못하고 지금은 서울특별시 소유로 관리되고 있다.

<인평대군방전도> | 타락산 기슭에 있던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집(위)을 그린 그림이다. 인평대군의 형으로서 나중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집(아래)을 함께 포함하였다. 봉림대군의 집에는 조양루(朝陽樓), 인평대군방에는 석양루(夕陽樓)가 있어 서로 마주보며 형제 우애를 다졌다 한다. 정조 대에 집을 고쳐 짓고, 1792년(정조 16) 이 도면을 그렸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육상묘와 연호궁 편액 | 뒤편의 육상묘는 육상궁으로 승격되기 전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 이름이다. 연호궁은 숙빈 최씨의 며느리이자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사당 이름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신주가 한 건물에 동거하고 있는 셈이다.

<화성행행도병> 중 서장대야조도 | 1795년(정조 19)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갔다 오는 장면을 그린 여덟 폭 병풍 중 서장대에서의 야간 군사 훈련 장면이다. 가운데 화성행궁이 보이는데, 행궁으로서는 규모가 크고 짜임새가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화성행궁 | 2003년에 복원을 마친 화성행궁을 팔달산 쪽에서 내려다본 모습이다. 이 행궁은 정확한 위치에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는가? 그래서 과연 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나는 아무리 보아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남한산성행궁 | 인조가 유사시를 대비해서 지은 시설인데, 실제로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활용하였다. 사라졌던 것을 복원하긴 하였으나 의문이 남는다.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랜 시간의 층위가 쌓여 있는데…. 그것을 살리는 방법은 정녕 없었을까? 아쉽고 안타깝다.

<오문삼조>, 《삼재도회》 | 고문(皐門)에서 노문(路門)까지 다섯 문이 구역을 나누고 있다. 외조, 치조, 연조는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지 않다. 두 번째 고문(庫門) 안에 가석(嘉石) 등이 있고, 그 좌우에 종묘와 사직이 표기되어 있다. 종묘와 사직의 위치와 위상이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있다.

조선 후기에 조선 전기 경복궁의 구조를 추정해 그린 지도인 <경복궁도>(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궁궐의 여섯 공간을 각각 다른 색으로 표시하였다.

경복궁 외전 구역 | 광화문 안에 홍례문, 홍례문 안에 영제교, 영제교 건너 근정문, 근정문 안에 근정전, 광화문 밖에서 근정전에 이르기까지 문을 셋, 다리를 하나, 총 네 개의 경계를 지나야 한다. 어느 문이 고문(皐門)이고 또 고문(庫門)이며, 치문이며 응문인가? 어느 공간이 외조이고 치조인지 연결시키기가 어렵다.

근정전 | 근정문 안이자 근정전 앞에는 회랑으로 둘러싸인 넓은 마당이 열린다. 이를 조정이라고 한다. 저 조정에 가득 차게 들어선 많은 관원들, 곧 만조백관을 그려본다.

창덕궁 인정전 | 정면 5간 측면 4간에 중층 지붕의 다포식 건물이다. 2층 기단 위에 좌우 대칭을 하고 있어 매우 엄격한 느낌을 준다.

<정아조회지도> | 정아란 궁궐을 가리킬 수도 있고 여기서처럼 조정을 가리킬 수도 있다. 조정에서 조회할 때 각 참여자들이 자리 잡을 위치를 밝힌 도면이다. 조회에 참여하는 인원수가 대단히 많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경복궁 강녕전 내부 | 강녕전은 경복궁의 내전이다. 그에 걸맞게 그 내부도 널찍하다. 가운데 대청마루의 양쪽으로 온돌방이 있고, 마루와 대청마루 사이는 들어 올릴 수 있는 분합문으로 나뉘어 있다.

<무신진찬도병> 중 통명전진찬도 | 통명전은 창경궁 중궁전의 정전이다. 외부의 남성들은 원칙적으로 들어올 수 없다. 통명전에서의 진찬은 그러므로 여성들의 진찬, 내진찬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복궁 사정전 일원 | 사정전은 경복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임금과 관원들이 만나서 국정을 논의하는 회의공간이다. 가운데 편전의 정전인 사정전은 하나의 마룻방으로 되어 있는 데 비해 그 동편에 만춘전, 서편에 천추전은 가운데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갖추고 있다.

<호조>, 《숙천제아도》 | 19세기의 문관인 한필교가 자신이 근무하였던 관서들을 그림으로 그려 모은 화첩인 《숙천제아도》 가운데 호조의 그림이다. 호조는 광화문앞길에 있었다. (하버드대학교 엔칭도서관 소장)

경복궁 함화당 | 경복궁의 중궁전인 교태전의 북쪽, 생활기거공간으로 분류할 수 있는 영역에 있다. 동쪽으로는 집경당이 연결되어 있으며, 주변의 행각은 일제강점기 때 사라졌다가 근년에 복원되었다.

창덕궁 소요정 | 동궐의 후원 옥류천 영역의 한가운데에 있는 정자다. 소요정의 이름 중 '소요'는 《장자》에 나오는 표현으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후원은 이렇게 자연에 안기고자 하는 공간이었다.

경복궁 강녕전 월대 | 건물에 월대가 있다는 것은 그 건물이 그럴 만한 격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였다. 경복궁에서 임금이 머무는 대전 강녕전 역시 그러하였다.

창경궁 경춘전 | "경춘전은 정면 (     )간, 측면 (     )간 해서 전체 (     )간 건물입니다" 건물을 보면 먼저 바닥의 규모부터 보는 것이 좋습니다. (    ) 속에 알맞은 숫자를 써 넣으세요.

종묘 정전의 기둥들 | 종묘 정전은 벽과 문을 맨 바깥 기둥에 내지 않고 한 간 뒤로 물러서 냈다. 그 결과 전면 한 간은 회랑이 되었고, 맨 바깥 기둥은 노출되었다. 배흘림기둥이 길게 늘어서서 빚어낸 모습이 매우 깊고 긴 울림을 준다. 그런데 가까이 보이는 왼편 기둥은 원이 아니라 네모다. 정전의 기둥이 아니라 익랑 기둥이기에 격을 낮추었나 보다.

지붕의 다양한 형태들

전당합각재헌루정 | 건물 이름의 끝 글자들을 보면 건물의 격과 모양, 기능까지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편액 자체도 대체로 크고 화려한 데서 작고 간결한 데로 바뀌어간다. 건물 이름을 들으면 어렴풋이나마 건물이 보인다. 위로부터 근정전, 양화당, 곤녕합, 경훈각, 낙선재, 영춘헌, 주합루, 함인정.

창경궁 명정전 | 외전의 정전으로서는 그리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으나 광해군 대에 다시 지은 이래 큰 화재를 입지 않아 그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외부 내부 여러 곳에 변형된 부분이 다수 잇음에도 국보로 지정된 근거다.

창경궁 양화당 | 창경궁 중궁전의 정전인 통명전 동편에 있다. 정면 6간 측면 4간 단층 이익공 팔작지붕이다. 건물 크기에 비해 높이가 다소 낮아 보이기는 하지만 당당한 기품을 갖고 있다.

창덕궁 낙선재 | 헌종 대에 후궁으로 맞이한 경빈 김씨의 거처로 지은 건물이다. 그 뒤로도 주로 후궁과 같은 왕실 여성들이 쓰던 건물이다. 높지 않은 기단에 계단이 셋 놓여 있다. 그 앞에는 노둣돌도 있다. 왼편에 앞으로 누마루가 돌출되어 전체적으로 'ㄱ'자 모양을 하고 있다. 웅장하고 화려하지는 않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부분이 많다.

창덕궁 태극정 | 동궐 후원 가운데 가장 북쪽에 흐르는 옥류천변에 있는 다섯 정자들 가운데 가장 상류에 있는 정자다. 장대석으로 네모반듯하게 쌓은 기단 위에 네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둘렀다. 지붕은 사모지붕인데 모임 부분에 절병통을 얹었다. 아주 엄격한 분위기를 풍긴다.

<무신진찬도병> 중 인정전진하도 | 1848년(헌종 14) 3월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육순(六旬)과 왕대비 신정왕후의 망오(望五), 곧 41세가 됨을 기념하는 진찬 행사를 열었다. 이를 그린 병풍 가운데 헌종이 인정전에서 신하들에게 진하를 받는 부분이다. 구름에 잠긴 소나무가 뒤에서 받쳐주고 잇어 이곳이 인정전임을 알려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왕조 '법궁-이궁 양궐체제'의 변천

만월대 | 고려의 수도 개성에는 궁궐이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크고 대표적인 궁궐이 만월대에 있었다. 뒤편의 임신한 여인이 누워 있는 형상의 산이 바로 송악산이다.

<조선태조어진> |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은 조선 말기의 모사본이다. 얼마나 태조 이성계의 본성과 인상을 드러냈는지 알 수 없으나, 이 그림이 주는 인상은 후덕한 군주보다는 단단한 무장의 그것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전주 경기전 소장)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 | 북한산에거 서쪽으로 뻗어나간 등성이 가운데 비봉 꼭대기에 있었다. 추사 김정희가 이것이 진흥왕순수비임을 밝혔다. 당연히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라고 여섯 자가 새겨져 잇지는 않다. 지금 비석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경조오부>, 《동여도》 | 경조란 서울이란 뜻이다. 행정적 공식 도시 이름은 한성부. 한성부의 행정 구역은 다섯 부로 구성되었다. 5부는 처음에는 도성 안만을 포함하였지만, 점차 도성 밖에도 사람들이 많이 살게되면서 부 아래의 행정 구역인 방(坊)이 설치되었다. 행정 구역을 넘어 넓은 범위의 서울은 이 지도에 포함된 지역, 곧 북으로 북한산 기슭, 남서로 한강을 경계로 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경복궁 근정전 | 사방을 행각으로 둘러싼 안 넓은 마당을 박석으로 덮었다. 2층 기단에 돌난간을 두르고 정면 5간 측면 5간에 겹지붕을 한 건물이 위엄 있게 자리 잡았다. 임금이 정사를 돌보는 곳이 아니라, 신하들이 임금에게 충성의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다.

<경복궁전도> | 임진왜란 이전의 경복궁의 모습을 당대에 그린 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기억에 의존해 그린 개념도들이다. 그 가운데 이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은 마치 산도처럼 주위 산줄기의 흐름을 공들여 그렸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도성 말바위에서 바라본 경복궁 전경 | 교태전으로부터 강녕전, 사정전, 근정전, 광화문이 일직선으로 축을 맞추고 있다. 광화문 앞으로는 광화문앞길이 열린다.

창덕궁 금천교 |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임금 태종 대에 건설된 다리이다. 하지만 저기 조각되어 있는 석수들의 표정은 살벌함과는 거리가 멀다. 부드럽고 재미있어 친근감을 준다.

변박, <부산진순절도> | 부산진을 공격하는 왜군이 타고 온 배가 바다를 덮었다. 이미 상륙하여 성 밑에까지 다가와 아우성치는 왜군이 새까맣다. 성 위에서 이를 바라보며 싸우는 조선 사람들의 수효는 많지 않다. 목숨을 바쳐 싸우다 간 이들의 심정…. 그것을 잊지 말라고 이 그림은 말한다. (육군박물관 소장)

정선, <경복궁도> | 무너지다 만 궁성 안에 경회루 돌기둥과 근정전 기단의 흔적만 있는데, 빈터를 지키는 군사들의 건물이 덩그렇다. 뒤편은 빽빽한 숲을 이루었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영묘조구궐진작도> | 1767년(영조 43) 12월 16일 영조는 태종이 태조에게 오래 사시라는 뜻으로 술 잔을 올렸던 옛일을 본받아서 경복궁 근정전 터에서 관원들로부터 술 잔을 받는 의식인 진작례를 베풀었다. 2층 월대와 중앙의 계간, 모서리의 동물상 등이 근정전 터임을 알려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선조실록》(왼쪽)과 《선조수정실록》(오른쪽) | 실록은 오랜 기간 여러 사람이 사초를 작성하고, 임금 사후에 사초와 함께 여러 자료들을 편집하여 작성하였다. 그런만큼 엄정하였다. 하지만 기록자와 편집자의 주관을 모두 배제할 수는 없었다. 권력을 잡은 집단이 급격하게 바뀌면 실록을 없애지는 못하고 수정본을 작성하였다. 그 수정한 실록이라고 해서 객관적이고 엄정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입장과 관점을 강하게 반영하였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일본 규슈 구마모토성 |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뒤인 1601년부터 7년간 쌓은 성이다. 규모가 크고, 자연 지형을 이용한 축성 기술이 잘 살아 있다. 가토가 임진왜란에서 얻은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고 한다.

월산대군 사당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다. 사당 남쪽 큰길 건너에는 월산대군의 묘가 있다. 임금의 형. 어찌 보면 동생 성종보다 더 임금이 될 자격을 갖추었으나 임금이 되지 못한 사람. 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떠돌며 전해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경운궁 즉조당 | 인조반정 후 인조가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서궁, 곧 경운궁에 와서 즉위하였다는 건물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함인지 조선 후기 내내 보존되었다. 1904년 화재에 불타서 바로 다시 지었다.

광해군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있다. 쫓겨난 임금은 임금이 아니다. 종묘에 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그 무덤도 능이나 원이 아닌 묘이고, 외지고 좌향도 좋지 않는 곳에 그 규모나 치장도 웬만한 양반만도 못한 묘로 남았다.

<원종어진> | 인조의 생부 정원군의 초상화이다. 백택 흉배를 한 것으로 보아 임금이 아닌 종친 신분을 표현하였다. 추존되어 '원종어진'이란 이름으로 불리긴 하나, 임금이 아닌 임금의, 어진이라고 불리나 어진이 아닌 초상화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남한산성 우익문 | 남한산성의 서문으로, 서울과 가장 가까운 거리로 통하는 문이다. 위의를 차리기에는 바깥 지형의 경사가 너무 급하다. 긴급하게 드나드는 문,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이 문을 나서서 삼전도로 갔다.

<동궐도> | 동궐, 곧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그 후원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그린 기록화. 새가 내려다보는 관점의 부감법을 써서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건물들을 사선으로 배치하였다. 동궐을 이해하는 데 더 없이 도움을 주는 자료이나, 또 한편으론 그림은 그림일 뿐, 사진이나 실측 도면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한양도>, 《천하도》 | 위백규(魏伯珪)가 1770년에 그린 지도를 1822년에 그의 후손인 위영복(魏榮馥)이 목판으로 제작, 간행하였다. 당시 도성 내부에 묘사가 매우 소박하고 부정확한데, 유독 경희궁이 강조되어 잇는 것이 눈에 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경희궁 | 네모반듯한 회랑 안에 숭정전이 자리 잡고 잇고, 그 뒤로 자정전, 그 서편에 태녕전이 잇다. 바로 뒤편에서 인왕산이 이 모두를 받쳐주고 있다.

<연잉군초상> | 후일 영조가 된 연잉군이 사모를 쓰고, 백택 흉배를 단 녹색의 단령을 입고 있어 종친 신분을 드러내고 있다. 갸름한 얼굴에 째진 눈꼬리가 <영조어진>의 인상과 통한다. 그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문제는 신임옥사의 원인이 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사도세자의 영지(令旨) | 1761년(영조 37) 4월 3일 사도세자가 평양에 갔을 때 내린 명령서. 평양부에 사는 통덕랑 서필영이라는 사람의 자손에게 부과하는 잡역을 면제해주라는 내용이다. 마지막에 사도세자가 수결(手決)을 하였다. 이듬해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는 죽음을 맞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경희궁 금천교 | 적지만 옛 부재가 남아 있어 이를 근거로 옛 모양을 추정하여 다시 지었다. 정문 흥화문 자리는 구세군회관이 차지하였고, 외전 내전으로 들어가는 길은 서울역사박물관이 가로막았다. 지금은 물길도, 궁궐도 사라졌지만, 본래는 이 다리를 건너면 궁궐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무진진찬도병> | 1868년(고종 5) 익종비 신정왕후의 회갑을 기념하는 진찬 장면을 8폭 병풍으로 꾸몄다. 경복궁을 중건하고 열린 첫 큰 행사였다. 오른쪽부터 1폭과 2폭은 근정전진하도, 3폭과 4폭은 강녕전진찬도, 5폭에서 7폭은 강녕전익일회작연도이고, 8폭은 좌목이다.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소장)

경희궁 후원에서 바라본 경복궁 전경 | 저 멀리 겹지붕이 불쑥 솟은 근정전, 그 뒤에 사정전, 그보다 조금 가까이에 경회루가 보인다. 1876년의 화재로 내전이 불탄 후 복구하기 전에 찍은 사진이다. 반면 가까이 경희궁에는 별다른 건물은 보이지 않고 나무만 무성하다. 궁성도 무너진 부분이 군데군데 눈에 뜨인다. 사진 상태가 좋진 않지만 19세기 말 경복궁과 경희궁의 상황을 동시에 보여준다.

당백전 | 엽전 100개의 명목가치를 갖는 돈이다. 앞면에는 상평통보, 뒷면에는 호대당백이라고 새겨져 잇다. 실질가치가 명목가치를 따라가지 못하면 그 돈은 경제 질서, 나아가서는 사회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흥선대원군초상> | 흥선대원군 자신이 제발을 직접 써 넣었다. "내가 61주갑 되던 해의 초상이다." 경진년, 그러니까 1880년(고종 17) 여름에 그렸다. 이미 실권을 잃은 후의 일이다. 검은 건을 쓰고 푸른 포를 입었는데 인상이 강하다. 흥선대원군은 끝내 권력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못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창덕궁 농수정의 고종 | 미국인 퍼시벌 로웰은 1883년 조선의 미국 수호통상사절단을 안내한 인연으로 1883년 12월부터 3개월간 조선을 방문하였다. 그때 고종의 사진을 찍었다. 고종이 1876년의 화재로 창덕궁에 이어해 있을 때의 일이다. (퍼시벌 로웰 사진, 1884년)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과 순종이 머물렀던 방 | 서양식 침대와 실내 장식이 화려하다. 하지만 한 나라의 임금이 외국 공관에서 1년이나 머물렀다는 사실은 그 공간이 아무리 화려하다 한들 씁쓸한 뒷맛을 지우기 어렵다. (《이왕궁비사》)

옛 러시아공사관 탑 | 러시아공사관은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본채는 다 없어지고 동북 모서리에 있던 탑 부분만 무슨 지표인양 남아 있다.

경복궁 곤녕합 | 곤녕합 일대는 건청궁 안 왕비의 거처이다. 그중에서도 사진에 찍힌 누 부분의 이름이 옥호루인데, 이곳이 바로 1895년 을미사변의 현장이다. 뒤의 서양식 건물은 외국인들의 숙소로 쓰였던 관문각이다.

미국공사관 옛 모습 | 1905년 9월 방한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앨리스와 총영사 고든 패덕 등 미국인들. 그리고 대한제국 군인 몇이 미국공사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미국공사관 건물은 한옥 골격을 유지하면서 전면에 현관을 추가 설치하였다.

원구단 | 대한제국에서 외국 귀빈을 머물게 하기 위해 지은 대관정에서 본 모습이다. 왼편에 있는 건물이 원구단 정문, 중앙부에 보이는 3층 지붕 건물이 황궁우, 중단 오른편에 흰 기단에 흰 지붕이 보이는 부분이 원구단이다. (《버튼 홈즈의 여행 강의》)

경운궁 함녕전 | 고종의 거처였을 뿐만 아니라, 1904년 화재를 입어 다시 짓기는 하였으나, 처음부터 오늘까지 경운궁을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경운궁의 중심 건물이다.

1902년 경운궁 전경 | 모습을 갖춰가는 경운궁 서측 부분 전경. 아직 궁성은 완성되지 않았고, 내부 건물들도 온전히 다 갖추어지지 않았으나 2층 건물 중화전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1904년 경운궁 화재 | 1904년 4월 14일 화재로 불타버린 경운궁 중심 구역. 아직도 연기가 나고 있다. 보는 우리 가슴도 타들어간다.

1904년 일본군의 전첩축하회 | 러일전쟁의 첫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창덕궁 후원에서 축하회를 열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기단과 아래층 규장각은 물론 2층 주합루까지 일본인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대안문 편액 | 대안문 편액. 주변의 테두리가 떨어져 나가고 퇴색되었지만 단정한 글쎄에는 기품이 배어 있다. 글씨 부분에 검은색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현재의 중화전 | 기단에 견주어도 건물의 높이가 낮다. 1904년 화재 뒤 다시 지으면서 겹지붕을 홑지붕으로 만든 결과다.

을사늑약 기념사진 | 조약을 체결한 것을 기념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일제의 고위 관원들이 대관정에서 기념사진을 박았다. 그러나 비준 절차를 마치지 않았으므로 조약은 법적으로 체결되지 않았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 |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렸으나, 만국이란 말에는 세계 모든 나라가 아니라 힘 있는 나라들만 포함되었다. 고종이 파견한 특사들은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다.

헤이그 특사 위임장(영인본) | 고종이 특사들에게 준 위임장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위임된 권한은 발휘되지 못하고 말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창덕궁 인정전 | 인정문에 외벽이 생기고 거기 판문이 아닌 작은 문이 달렸다. 회랑에도 문이 생겼다. 회랑이 아닌 접견실 등 건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인정전 용마루 전면에 다섯, 인정문 용마루 전면에 셋, 오얏꽃 문양이 박혔다.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인정전 앞의 순종 |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순종에게 현재 서울역인 당시의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평양, 신의주 등 서북 지역을 순행하게 하였다. 순종이 돌아온 뒤 인정전 앞에서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순종의 왼쪽에 이토 히로부미가 있다.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창덕궁 인정전 내부 | 인정전 용상의 단이 없어지고 맨 마룻바닥에 서양식 의자가 놓여 있다. 임금의 자리가 아니라 파티의 주인이 되는 총독이나 정무총감의 자리다. 그 뒤에는 일본식 가리개 위에 공작인지 뭔지 모를 일본풍의 새 그림이 걸렸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닫집이 도리어 어색하다. (《인정전 사진첩》)

순종 경술국치 위임장 | 1910년 8월 29일 순종이 병합조약을 체결하러 가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준 위임장. '척(坧)'이라는 순종의 본명을 쓴 수결(手決)이 못났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데라우치 마사타케 | 뜻밖에 합병 문제를 용이하게 해결하고 그는 이렇게 썼다. "가가(呵呵)." 사진에서도 속으로는 가가대소(呵呵大笑)하고 있을 것이다.

통감 관저 | 대한제국을 일본이 집어삼키는 형식상의 절차인 조약안에 도장을 누른 장소인 통감 관저. 목멱산 북쪽 기슭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흔적만이 남아 있다.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 | 1910년 8월 22일 이완용이 순종으로부터 전권위임장을 받은 곳. 그날 경술국치의 출발점이다. 다만 1917년 창덕궁 화재 때 불타 새로 지었기 때문에 그때의 그 건물은 아니다.

하도(위)와 이를 아라비아 숫자로 다시 정리한 도표(아래)

낙서(위)와 이를 아라비아 숫자로 다시 정리한 도표(아래)

복희팔괘차서

복희팔괘방위(위)와 문왕팔괘방위(아래)

오행사상의 오행과 상생상극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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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