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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 12. 13:08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08 툭, 건드려주었다

 

 

 

이상인 시집

2016, 천년의 시작

 

대야도서관

SB110703

 

811.7

시72ㅊ  203

 

시작시인선 0203

 

지그시 거침없음, 이게 이상인 시의 묘한 매력이다. 각별하거나 사람을 놀리게 할 만큼 이마에 탁 부딪히는 선뜻함은 아닐지라도 넉넉하게 잡아끄는 힘을 지니고 있는 시들이다. "세월을 견디며 삭아가는" 이야기들은 은근한 듯하면서 더러는 "폐허처럼 깊은" 추억의 각인이 되기도 한다. "내면에 파동치는" 울림이 깨끗하고 말간 섬진강 은어처럼 튀어 오를 때 맛보게 되는 시인의 언어가 실은 담백하다. 이 시집에서 "밥물처럼 자갈자갈 끓어넘치는" 사랑스러운 참새 소리를 발견함이라거나 낚싯대로 "힘차게 파닥이며 따라 올라오는 냇물"을 낚아채는 뚝심의 시법이 미더운 한편으로 시인에게 "밑받침으로 얹어주"는 작은 생명들의 깨우침이 노을빛으로 어지간히 아름답다.

- 강인한(시인)

 

질주하는 승용차며 트럭들의 굉음으로 전쟁터 같은 고속도로지만 바로 옆의 야산 하나만 훌쩍 넘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울울한 숲과 숲의 고요가 있는데 이상인이 그렇다. 그 숲의 끝자락에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저수지가 하나 있고 저수지엔 커다란 달이 가득 차 있는데 이상인의 시가 그렇다. 그 저수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적절한 절제의 기예로 균형 잡힌 시를 건져 올리는 시인이 이상인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늘 달빛이 묻어 있고 바닥에는 익숙한 일상의 고요가 있다. 어두운 밤이지만 어둡지 않고 환한 대낮이지만 눈부시지 않다.

- 박두규(시인)

 

이상인

 

전남 담양 출생.

1992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시집 『UFO 소나무』『연둣빛 치어들』『해변주점』이 잇음.

 

시인의 말

 

아무 생각 없이 꽃이 핀다.

이내 꽃이 진다.

 

생의 행간에서

보너스처럼 새가 울어준다.

 

이런저런 날은

마음대로 구부러진 문장 길

시 한 편으로

마냥 서성거리다가

시외버스처럼 점점 멀어져가고 싶다.

 

2016년 봄 풍진이와 발미에서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소 울음소리
현미밥을 지으며
문장리
이륜耳輪
선암매
순천역이 가슴속에서 떠나갔다
둥근 하늘
쥐눈이콩
툭, 건드려주었다
물방울
반짝이는 어둠
뻐꾸기 둥지
황태찜
민들레 우주선
풍진이의 봄날
경經, 중얼거리다


제2부
애기사과
하늘로 밀려가는 파도들
풍진이의 겨울
여명
오리들의 묵념
폐자전거
세 명의 내가 쓴 시
휘리릭 휘리릭
매미
어머니의 눈
난꽃
빨간 신호등 건너기

번데기
황금 붕어
붉은 주머니


제3부
목이전木耳傳
시래기
소쩍새 울음
한 무리의 은어
수숫대
천둥
보리밭
12월
이상인 씨의 농사法
마루
낚시하는 잠자리
빨래방을 나오며
겹겹의 배춧잎
들깻잎
제비꽃 무덤
애장 터에서


제4부
섬진강 노을
식구
콩꽃
고구마
태풍
백설白雪
백일홍
황사
대추나무
꽃무릇 사랑
망가진 소리판 한 장
벚꽃
수평선
대나무처럼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월산 이현도 씨네 매화나무


해설
염창권 겹으로 짠 우주그물에서 날아온 나비

 

둥근 하늘

 

나비 한 마리가 무밭을 뒤집다.

손바닥 푸른 손금 안에, 생각을 낳는지

소리도 없이 몇 초씩 머물러서

내 등허리 간지럽다.

 

문득 어깨를 들썩여보니

노란 알에서 깨어난 추억들이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

 

얼마를 아슬아슬 디디며 견디어야

둥근 하늘에 구멍이 뚫리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나

 

나부끼는 생, 몇 장 독파하고 나니

펼치는 힘찬 나비의 날갯짓

허공에 물결무늬 투명하게 새겨진다.

 

콩꽃

 

광주 망월 무덤가에

혼자 피어 있는 노란 콩꽃을

두 손 모아 감싸고 오다가

옛 전남도청 앞에서 살며시 펼치자

 

노오란 나비 한 마리

멈칫하더니

팔랑팔랑 아픈 기억을 폈다, 접었다

훨훨 날아간다.

 

어둡고 찬 세월 속에 오래 갇혀 있던

그 맑디맑은 이름 하나

이제 막 푸른 하늘 속으로

손뼉 치듯 날아갔다.

 

백설白雪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것일까

흰나비들이

하늘을 가득 채우더니

메마른 마음을 깊이깊이 뒤덮는다.

 

이런 날은

뼈마디 부서지도록 열심히 살아온 시간을

한 장 한 장 되넘겨가며

꼼꼼하게 읽어보고 싶어진다.

 

아직 그려지지 않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여백을

아득한 그리움으로 스케치하고 싶어진다.

 

지금까지

나는 따뜻한 사랑으로 그대를 건너왔다.

여기서 만난

흔적 없이 저편으로 건너간 모든 인연이

 

은은하게 빛나는 추억 위로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흰나비 떼처럼

온 세상을 가득 메웠다.

 

여명

 

저물녘 대숲에 슬그머니 숨어드는

비둘기 한 마리

대나무가 푸른 깃을 펼쳐 안아 들인다.

 

그때부터였다.

파도처럼 물결치는 대숲을 따라

비둘기는 흔들리고 흔들리며 잠을 청한다.

허리 휘는 대나무들과 하나가 되어

꿈속에서도 흔들린다.

함께 흔들리지 않으면

푸드덕 땅에 떨어지거나

여지없이 달려드는 날카로운 발톱

 

쏴쏴 밤새 가슴 쓸어대는 소리

긴 장대 하나에 의지한 어두운 밤은

눈썹 반짝이는 별들을 유난히 끄먹거리게 하듯

날마다 세상은,

흔들흔들 삶을 이리저리 마구 흔들어대는데

 

터벅터벅 걸어서 불쑥 당도한 새벽에

동네 개들이 깜짝 놀라

컹컹 어둠을 하얗게 짖을 때까지

자꾸 휘어지는 댓가지 하나 꼭 붙들고 흔들리고

흔들리다.

마침내 숨 트는 갓밝이 속으로

 

툭, 건드려주었다

 

벼랑 돌 하나를 굴려주었다.

일억 이천만 년 동안 나를 기다려

비탈길 하나를 굴러 내린다.

 

한 번의 구름을 위해

수만 번의 심호흡과 몸을 둥글게 말아가며

자세를 가다듬었을 것이다.

 

그 오랜 침묵의 무게를 벗고

파닥 날개를 펴는 새처럼

땅을 박차고 힘껏 뛰어 내려갔을 것이다.

 

단 한 번의 밀어줌으로

간단없이 급한 비탈의 경계를 넘어

다음 생에 당도한 바위 조각,

거기서 또다시

누군가 툭, 건드려주는 일이 또 생길 듯이

깊은 꿈을 꾸듯 기다려야 한다.

 

애기 사과

 

   밑줄 그으며 몇 번씩 침 묻혀 넘겨본 생을 뒤적여보면 한 길 건너 모퉁이에 얼른 어른이 되고 싶은 내가 서성거리고 있었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대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다 자라지 못한 생각들을 이듬해 봄 탐스러운 꽃으로 만들어 매달아보곤 하였네.

 

   하르르 그 꽃잎들 지고, 그대도 없이 주렁주렁 품에 안아 키운 다 자란 작은 애인들이 너도나도 얼굴을 붉히는 동안 벌써 시린 발목을 동여매고 가는 야금야금 벌레 먹은 백년 세월의 그림자.

 

   자꾸만 어른이 되지 못한 푸른 비애와 당신을 만나지 못한 노란 그리움들이 군데군데 차돌 박힌 땅바닥을 치며 뚝뚝 떨어져 나뒹굴고

 

   그렇게 흔들리는 세연世緣의 가지를 붙잡고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쭈글쭈글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죽어라 손을 놓지 못하던 하, 수상한 세월이 있었네.

 

난꽃

 

어디선가 줄지어 힘차게 날아온

다섯 마리 기러기 가족,

제일 뒤쳐져 따라온 막내가 좀 비실거린다.

 

비실거려 내가 가끔 물 뿌려주고

맑게 닦아놓은 하늘길을 일렬로 통과 중이다.

 

반갑게 손 흔들며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주어 참 고맙다는 말 건네려는데

기럭기럭,

소리 없는 그 향기 허공에 그득하다.

 

선암매

 

비사표 당성냥 한 줌씩 들고 위태로이 서서

화악, 불 싸질러버릴 태세다

 

난 그 성냥개비 하나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오래 만지작거린다

 

일어나지 않은,

말없이

말할 줄 아는 충동마저 깡그리 태워버릴

얼음덩이 같은 화염을 생각하며

 

민들레 우주선

 

항암에 좋다는 흰민들레

우물가에서 깨끗이 씻어 마루에

가지런히 뉘어놓았다.

잎과 뿌리가 시들시들해질수록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꼭 다물었던 꽃망울을 터뜨리며

다급하게 둥근 우주 하나씩

세상에 피워놓는다.

 

사지가 깡마르고 심하게 뒤틀리는

생의 마지막 찰나까지

온힘을 다해 토해놓은

아름다운 우주선들

한순간 바람에 힘껏 솟구쳐

민들레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는

새로운 세계로 환하게 날아간다.

 

붉은 주머니

 

꺾어온 감 한 가지 벽에 걸렸다.

빵빵하게 속살 차오른 가슴들

떫은 젊음을 뽐내며

세상 이곳저곳을 손전등처럼 환히 비추더니

농익어 군침 돌게 했다.

 

이제 그 퉁퉁 불어터질 것 같던 것들이

잔주름이 잡히고 자신도 버겁다는 듯이

아래로 고갤 수그렸다.

선홍색으로 물들었던 볼에도

어느덧 내려앉은 검은 반점들

몸이 졸아들어 삶도 가벼워졌다.

 

먹지도 못하니 버리기로 하고

먼지 앉은 그것들을 만지작거리는데

작고 딱딱한 게 부딪히는 느낌

둥근 자궁 속에서 새근새근 잠들었다가

화들짝 놀라 깨어나는 소리

 

늙어서도 몇 개의 씨를 소중하게 품고

끈질기게 버티어낸

붉은 주머니

 

식구

 

동박새가 매화 가지 사이에서 날아오더니

쮸 쮸, 찌이, 찌이, 쮸 쮸

빠른 장단으로 옹알이하며

스스럼없이 동백나무 품으로 파고든다.

기다렸다는 듯이

푸른 옷섶을 여미며 받아 안는다.

눈썹 닮은 또 한 놈이

쮸 쮸, 찌이, 찌이 부리나케 날아와

함께 꿀을 빤다.

어리광부리듯이 이 꼭지 저 꼭지

돌아가며 꿀을 먹고는

만개한 벚꽃 속으로 장난처럼 사라진다.

그 뒷모습을 쫓는 동백나무의 무수한 눈동자가

스물네 시간, 사방팔방으로 열려 있다.

 

순천역이 가슴속에서 떠나갔다

 

순천만 비상하는 흑두루미를 배경으로

흐릿하게 찍힌 사진 속에서

불현듯 되살아 나온다.

역전 콩나물국밥 집 해월식당에 남은

이빨 자국 하나 꽉 문 깍두기

 

그저 이렇게 저렇게 왔다가 가면서

폐허처럼 깊은 그리움을 남긴다.

무수한 발자국 위에 또 하나

지워지지 않는 인연의 흔적을 찍듯이

 

마음만큼 뜨겁던 세월의 뚝배기도

어느덧 바람처럼 뚝딱 비워지고

더러 보내고 남는다는 것이

몸 깊숙이 박힌 이빨 자국 하나 품고

오래 견디는 일이거니

 

무리 지어 날아와 혼자이듯 앉았다가

대오를 이루어 날아가는 철새처럼

우리는 늘

깊은 상처를 서로 어루만지며

서둘러 떠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장리

 

사람들은 짧은 문장 안에서 산다.

 

잠시도 문장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명사들이

서툴게 쓴 문장 길을 어슬렁거리고

문장의 크기만큼 열리는 오일장에는

싸고 풋풋한 언어들이 넉넉하게 팔린다.

몇 대째 한 문장에서 함께 사는 이들

고치고 고쳐도 허술한 생을 베개 삼아

저녁이면 30촉짜리

밝은 주제 하나 켜놓고 잠든다.

 

개구리 떼도 긴 문장 속에서 운다.

 

어쩌다 문장을 펄쩍 뛰쳐나간 놈들은

소문처럼 아침 안개로 떠돈다.

별들마저 새까만 밤하늘의 첫 페이지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전설을 수놓는

이 문장 안에서, 문장 사람들은

서로 뜻이 잘 통하는 한 구절 문장일 뿐.

부대끼며 힘들게 살다 보면

눈인사만 나누어도 금방 친숙해지듯이

짧고 간결한 내용의 문장들이

다시 태어나고 새롭게 고쳐 쓰이다가

결국은 삶의 비틀린 얼룩 자국처럼

세월의 비누로 깨끗이 지워져가는 것이다.

 

짧고 긴 문장 안에 사는 것들이 많다.

 

경經, 중얼거리다

 

시시로 변해가는 저문 풍경을

귀에 담아두려고

뜰에 흔들의자를 내놓고 있는데

나무들이 꽃들이 나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대추나무 사이로 내려앉는 새도

저희끼리 무어라 속삭이며 중얼거린다.

강조할 점이 있다는 듯이

내 이마에 한참을 머물다 방점을 찍는

흰나비 한 마리

일어났다 흩어지는 구름이나 무심히 바라보다가

대숲을 뒤적이는 바람 소리

조금 엿듣고 있을 뿐인데

도대체 무슨 내용이 쓰여 있기에

나를 읽고 또 읽으려 애쓰는 것인지.

 

만 권의 책을 공부해도 몸에 넣지 못하고

천 번의 이별과 사랑을 기약해도

그 뜻을 듣지 못하는 내 귀 근처를

볼멘소리로 다가온 모기 한 마리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물방울

 

목욕탕 한쪽에 누워 있는데

누군가 내 이마를 툭 친다.

내가 누울 때부터 점점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

아마도 내가 천장에 매달려 있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또 생겨난 물방울 하나가

이번엔 내 오른쪽 귀를 때리고 잘게 부서진다.

저 헛생각처럼 자꾸 생겨나고 있는

크고 작은 물방물들은 나를 바닥으로 여기겠지만

나는 천장이 바닥으로 보인다.

내가 물방울들 사이로 떨어질 것 같아

잠시 몸을 움츠리는 찰나에도

이 세상 여기저기에서는

물방울들이 끊임없이 태어나서 자라고

잠시 매달려 살다가

순식간에 떨어져 흔적도 없이 부서져갈 것이다.

 

내 살아온 만큼의 무게로 떨어져

가닿아야 할 지 천장 너머 무궁한 바닥,

아득하게 깊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