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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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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16. 14:47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53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  강 시집

2016, 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전철 4호선,
선바위역과 남태령역 사이에
전력 공급이 끊어지는 구간이 있다.
숫자를 세어 시간을 재보았다.
십이 초나 십삼 초.
그사이 객실 천장의 조명은 꺼지고
낮은 조도의 등들이 드문드문
비상전력으로 밝혀진다.
책을 계속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워
나는 고개를 든다.
맞은편에 웅크려 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파리해 보인다.
기대지 말라는 표지가 붙은 문에 기대선 청년은 위태로워 보인다.
어둡다.
우리가 이렇게 어두웠었나.
덜컹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맹렬하던 전철의 속력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가속도만으로 레일 위를 미끄러지고 있다.
확연히 느려졌다고 느낀 순간,
일제히 조명이 들어온다, 다시 맹렬하게 덜컹거린다. 갑자기 누구도
파리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나는 건너온 것일까?

 

시인 한  은 1970년에 태어나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네 편이 실리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과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등을 출간했다.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는 침묵의 그림에 육박하기 위해 피 흘리는 언어들이 있다. 그리고 피 흘리는 언어의 심장을 뜨겁게 응시하며 영혼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확인하려는 시인이 있다. 그는 침묵과 암흑의 세계로부터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렸던 최초의 언어에 가닿고자 한다. 뜨겁고도 차가운 한강의 첫 시집은 오로지 인간만이 지닌 ‘언어-영혼’의 소생 가능성을 점검해보는 고통의 시금석인 셈이다.

 

시인의 말

 

어떤 저녁은 투명했다.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불꽃 속에

둥근 적막이 있었다.

 

2013년 11월

한  강

 

차례

 

시인의 말

 

1부 새벽에 들은 노래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새벽에 들은 노래

심장이라는 사물

마크 로스코와 나

마크 로스코와 나 2

휠체어 댄스

새벽에 들은 노래 2

새벽에 들은 노래 3

저녁의 대화

서커스의 여자

파란 돌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이천오년 오월 삼십일, 제주의 봄바다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

 

2부 해부극장

조용한 날들

어두워지기 전에

해부극장

해부극장 2

피 흐르는 눈

피 흐르는 눈 2

피 흐르는 눈 3

피 흐르는 눈 4

저녁의 소묘

조용한 날들 2

저녁의 소묘 2

저녁의 소묘 3

 

3부 저녁 잎사귀

여름날은 간다

저녁 잎사귀

효에게. 2002. 겨울

괜찮아

자화상. 2000. 겨울

회복기의 노래

그때

다시, 회복기의 노래. 2008

심장이라는 사물 2

저녁의 소묘 4

몇 개의 이야기 6

몇 개의 이야기 12

날개

 

4부 거울 저편의 거울

거울 저편의 겨울

거울 저편의 겨울 2

거울 저편의 겨울 3

거울 저편의 겨울 4

거울 저편의 겨울 5

거울 저편의 겨울 6

거울 저편의 겨울 7

거울 저편의 겨울 8

거울 저편의 겨울 9

거울 저편의 겨울 10

거울 저편의 겨울 11

거울 저편의 겨울 12

 

5부 캄캄한 불빛의 집

캄캄한 불빛의 집

첫새벽

회상

무제

어느 날, 나의 살은

오이도

서시

유월

서울의 겨울 12

저녁의 소묘 5

 

해설 | 개기일식이 끝나갈 때 · 조연정

 

피 흐르는 눈 3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초여름 천변

흔들리는 커다란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면서

그 영혼의 주파수에 맞출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앗던 순간에 대해서

 

(정말) 허락된다면 묻고 싶어

 

그렇게 부서지고도

나는 살아 있고

 

살갗이 부드럽고

이가 희고

아직 머리털이 검고

 

차가운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믿지 않는 신을 생각할 때

살려줘, 란 말이 어슴푸레 빛난 이유

 

눈에서 흐른 끈끈한 건

어떻게 피가 아니라 물이었는지

 

부서진 입술

 

어둠 속의 혀

 

(아직) 캄캄하게 부푼 허파로

 

더 묻고 싶어

 

허락된다면,

(정말)

허락되지 않는다면,

아니,

 

회복기의 노래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회상

 

아무것도 남지 않은 천지에도

남은 것들은 많았다 그해 늦봄

널브러진 지친 시간들을 밟아 으깨며

어김없이 창은 밝아왔고

흉몽은 습관처럼 생시를 드나들었다

이를 악물어도 등이 시려워

외마디소리처럼 담 결려올 때

분말 같은 햇살 앞에 그저

눈 감으면 끝인 것을

텃새들은 겨울부터 아니 그전 겨울부터 아니아니 그 전 겨울부터

목 아프게 지저귀고 있었다

때론 비가 오고 때론 개었다 세 끼 식사는 한결같았다 아아

사는 일이 거대한 장례식일 뿐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어린 동생의 브라운관은 언제나처럼 총탄과 수류탄으로

울부짖고 있었고 그 틈에 우뚝

살아남은 영웅들의 미소가 의연했다

그 해 늦봄 나무들마다 날리는 것은 꽃가루가 아니었다

부서져 꽂히는 희망의 파편들

오그린 발바닥이 이따금 베어 피 흘러도

봉쇄된 거리 벗겨진 신 한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천지에서 떠밀려온 원치 않은 꿈들이 멍든 등을 질벅거렸고

그 하늘

그 나무

그 햇살들 사이

내 안에 말라붙은 강 바닥은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모든 것이 남은 천지에

남은 것은 없었던 그해 늦봄

 

그때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비였다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에, 뱃가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그러나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바스러졌다

 

저녁의 소묘 4

 

잊지 않았다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건

부스러질 것들

 

부스러질 혀와 입술,

따뜻한 두 주먹

 

부스러질 맑은 두 눈으로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

검은 웅덩이의 살얼음에 내려앉는 걸 지켜본다

 

                                    무엇인가

                                   반짝인다

 

반짝일 때까지

 

파란 돌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을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러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이 아직 따뜻했네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캄캄한 불빛의 집

 

그날 우이동에는

진눈깨비가 내렸고

영혼의 동지(同志)인 나의 육체는

눈물 내릴 때마다 오한을 했다

 

가거라

 

망설이느냐

무엇을 꿈꾸며 서성이느냐

 

꽃처럼 불 밝힌 이층집들,

그 아래서 나는 고통을 배웠고

아직 닿아보지 못한 기쁨의 나라로

어리석게 손 내밀었다

 

가거라

 

무엇을 꿈꾸느냐 계속 걸어가거라

가등에 맺히는 기억을 향해 나는 걸어갔다

걸어가서 올려다보면 가등갓 안쪽은

캄캄한 집이었다 캄캄한

불빛의 집

 

하늘은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텃새들은

제 몸무게를 떨치며 날아올랐다

저렇게 날기 위해 나는 몇번을 죽어야 할까

누구도 손잡아줄 수는 없었다

 

무슨 꿈이 곱더냐

무슨 기억이

그리 찬란하더냐

 

어머니 손끝 같은 진눈깨비여

내 헝클어진 눈썹을 갈퀴질하며

언 뺨 후려치며 그 자리

도로 어루만지며

 

어서 가거라

 

저녁의 소묘

 

어떤 저녁은 피투성이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

 

흑과 백

그 사이 수없는 음영을 따라

 

어둠이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

 

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의

평화도,

오랜 지옥도

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일히도록

 

외등은 희고

 

외등 갓의 바깥은 침묵하며 잿빛이도록

 

그의 눈을 적신 것은

조용히, 검게 흘러내리도록

 

새벽의 들은 노래

 

봄빛과

 

번지는 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얼비쳐

 

나는 입술을 다문다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나는 입술을 다문다

 

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

 

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

 

기다려봐야지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

 

다시는

 

이제 다시는

 

해부극장*

 

한 해골이

비스듬히 비석에 기대어 서서

비석 위에 놓인 다른 해골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

 

섬세한

잔뼈들로 이루어진 손

그토록 조심스럽게

가지런히 펼쳐진 손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이

안구가 뚫린 텅 빈 두 눈을 들여다본다

 

                (우린 마주 볼 눈이 없는걸.)

                (괜찮아, 이렇게 좀더 있자.)

 

* 17세기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안드레아 베살리우스의 책. 수년간의 급진적 해부 연구 끝에 인간의 뼈와 장기, 근육 등 정교한 세부를 목판에 새겨 제작했다. 독특한 구도의 해골 그림들이 실려 있다.

 

해부극장 2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견딜 수 없다, 내가

 

안녕,

이라고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고 말하고

정말이에요,

라고 대답할 때

 

구불구불 휘어진 혀가

내 입천장에

매끄러운 이의 뒷면에

닿을 때

닿았다 떨어질 때

 

*

 

그러니까 내 말은,

 

안녕.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심이야.

 

          후회하고 있어.

 

          이제는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아.

 

*

 

나에게

심장이 있다.

통증을 모르는

차가운 머리카락과 손톱들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나에게 붉은 것이 있다, 라고

견디며 말한다

일 초마다 오므렸다 활짝 펼쳐지는 것,

일 초마다 한 주먹씩 더운 피를 뿜어내는 것이 있다

 

*

 

수년 전 접질렸던 발목에

새로 염증이 생겨

걸음마다 조용히 불탈 때가 잇다

 

그보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다친 무릎이

마룻장처럼 삐걱일 때가 있다

 

그보다 더 오래전 으스러졌던 손목이

손가락 관절들이

다정하게

고통에 찬 말을 걸어온다

 

*

 

그러나 늦은 봄 어느 오후

검푸른 뢴트겐 사진에 담긴 나는

그리 키가 크지 않은 해골

 

살갗이 없으니

물론 여위었고

역삼각형의 골반 안쪽은 텅 비어 있다

엉치뼈 위의 디스크 하나가

초승달처럼 곱게, 조금 닳아 있다

 

썩지 않을,

영원히 멈춰 있는

섬세한 잔뼈들

 

뻥 뚫린 비강과 동공이

곰곰이 내 얼굴을 마주 본다

혀도 입술도 없이

어떤 붉은 것, 더운 것도 없이

 

*

 

몸속에 맑게 고였던 것들이

뙤약볕에 마르는 날이 간다

끈적끈적한 것

비통한 것까지

함께 바싹 말라 가벼워지는 날

 

겨우 따뜻한 내 육체를

메스로 가른다 해도

꿈틀거리는 무엇도 들여다볼 수 없을

 

다만 해가 있는 쪽을 향해 눈을 잠그고

주황색 허공에

생명, 생명이라고 써야 하는 날

 

혀가 없는 말이어서

지워지지도 않을 그 말을

 

거울 저편의 겨울

 

1

 

불꽃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파르스름한

심장

모양의 눈

 

가장 뜨겁고 밝은 건

그걸 둘러싼

주황색 속불꽃

 

가장 흔들리는 건

다시 그걸 둘러싼

반투명한 겉불꽃

 

내일 아침은 내가

가장 먼 도시로 가는 아침

오늘 아침은

불꽃의 파르스름한 눈이

내 눈 저편을 들여다본다

 

2

 

  지금 나의 도시는 봄의 아침인데요 지구의 핵을 통과하면,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꿰뚫으면 그 도시가 나오는데요 그곳의 시차는꼭 열두 시간 뒤, 계절은 꼭 반년 뒤 그러니까 그 도시는 지금 가을의 저녁 누군가가 가만히 뒤따라오듯 그 도시가 나의 도시를 뒤따라오는데요 밤을 건너려고 겨울을 건너려고 가만히 기다리는데요 누군가가 가만히 앞질러 가듯 나의 도시가 그 도시를 앞질러 가는 동안

 

3

 

거울 속에서 겨울이 기다리고 있었어

 

추운 곳

 

몹시 추운 곳

 

너무 추워

사물들은 떨지 못해

(얼어 있던) 네 얼굴은

부서지지도 못해

 

나는 손을 내밀지 않아

너도

손을 내미는 걸 싫어하지

 

추운 곳

오래 추운 곳

 

너무 추워

눈동자들은 흔들리지 못해

눈꺼풀들은

(함께) 감기는 법을 모르고

 

거울 속에서

겨울이 기다리고

 

거울 속에서

네 눈을 나는 피하지 못하고

 

너는 손을 내미는 걸 싫어하지

 

4

 

만 하루 동안 비행할 거라고 했다

 

스물네 시간을 꼭꼭 접어서 입속에 털어넣고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그 도시의 숙소에 짐을 풀면

오래 세수를 해야지

 

이 도시의 고통이 가만히 앞질러 가면

나는 가만히 뒤처져 가고

 

네가 잠시 안 들여다보는

거울의 찬 뒷면에 등을 기대고

아무렇게나 흥얼거려야지

 

스물네 시간을 꼭꼭 접어서

따가운 혀로 밀어 뱉어낸 네가

돌아가 나를 들여다볼 때까지

 

5

 

  내 눈은 두 개의 몽당양초 뚜욱뚝 촛농을 흘리며 심지를 태우는데요 그게 뜨겁지도 아프지도 않은데요 파르스름한 불꽃심이 흔들리는 건 혼들이 오는 거라는데요 혼들이 내 눈에 앉아 흔들리는데요 흥얼거리는데요 멀리 너울거리는 겉불꽃은 더 멀어지려고 너울거리는데요 내일 당신은 가장 먼 도시로 가는데요 내가 여기서 타오르는데요 당신은 이제 허공의 무덤속에 손을 넣고 기다리는데요 기억이 뱀처럼 당신의 손가락을 무는데요 당신은 뜨겁지도 아프지도 않은데요 꼼짝하지 않는 당신의 얼굴은 불타지도 부서지지도 않는데요,

 

거울 저편의 겨울 7

- 오후의 미소

 

거울 뒤편의

백화점 푸드코트

 

초로의 지친 여자가

선명한 파랑색 블라우스를 입고

두 병째 맥주를 마시고 있다

 

스티로폼 접시에

감자튀김이 쌓여 있다

 

일회용 소스 봉지는 뜯겨 있다

 

너덜너덜 뜯긴 경계에

달고 끈끈한 소스가 묻어 있다

 

텅 빈 눈 한 쌍이 나를 응시한다

 

너를 공격할 생각은 없어

라는 암호가

끌어올린 입꼬리에 새겨진다

 

수십 개의 더러운 테이블들이

수십 명의 지친 쇼핑객들이

수백 조각의 뜨거운 감자튀김들이

 

나를 공격할 생각은 마

 

너덜너덜 뜯긴

식욕을 기다리며,

 

거울 저편의 겨울 8

 

흰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눈먼 남자 둘이서

앞뒤로 나란히

구두와 지팡이의 리듬을 맞춰 걷고 있었다

 

앞의 남자가

더듬더듬 상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뒤의 남자는 앞의 남자의 등을

보호하듯 팔로 감싸며 따라 들어갔다

 

미소 띤 얼굴로

유리문을 닫았다

 

거울 저편의 겨울 4

- 개기일식

 

생각하고 싶었다

(아직 피투성이로)

 

태양보다 400배 작은 달이

태양보다 400배 지구에 가깝기 때문에

달의 원이

태양의 원과 정확하게 겹쳐지는 기적에 대하여

 

검은 코트 소매에 떨어진 눈송이의 정육각형,

1초

또는 더 짧게

그 결정의 형상을 지켜보는 시간에 대하여

 

나의 도시가

거울 저편의 도시에 겹쳐지는 시간

타오르는

붉은 테두리만 남기는 시간

 

거울 저편의 도시가

잠시 나의 도시를 관통하는

(뜨거운) 그림자

 

마주 보는 두 개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서로를 가리는 순간

완전하게 응시를 지우는 순간

 

얼음의 고요한 모서리

 

(아직 피투성이로)

짧게 응시하는 겨울

의 겉불꽃

 

거울 저편의 겨울 9

- 탱고 극장의 플라멩코

 

정면을 보며 발을 구를 것

 

발목이 흔들리거나, 부러지거나

리듬이 흩어지거나, 부스러지거나

 

얼굴은 정면을 향할 것

두 눈은 이글거릴 것

 

마주 볼 수 없는 걸 똑바로 쏘아볼 것

그러니까 태양 또는 죽음,

공포 또는 슬픔

 

그것들을 이길 수만 있다면

심장에 바람을 넣고

미끄러질 것, 비스듬히

 

(흐느끼는 빵처럼

악기들이 부풀고)

그것들을 이길 수만 있다면

당신을 가질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중력을 타고 비스듬히,

더 팽팽한 사선으로 미끄러질 것

 

피 흐르는 눈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그밖에 뭘 가져보았는지는

이제 잊었어.

 

달콤한 것은 없어.

씁쓸한 것도 없어.

부드러운 것,

맥박 치는 것,

가만히 심장을 문지르는 것

 

무심코 잊었어, 어쩌다

더 갈 길이 없어.

 

모든 것이 붉게 보이진 않아, 다만

모든 잠잠한 것을 믿지 않아, 신음은

생략하기로 해

난막(卵膜)처럼 얇은 눈꺼풀로

눈을 덮고 쉴 때

 

그때 내 뺨을 사랑하지 않아.

입술을, 얼룩진 인중을 사랑하지 않아.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마크 로스코와 나 2

 

한 사람의 영혼을 갈라서

안을 보여준다면 이런 것이겠지

그래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이다

붓 대신 스펀지로 발라

영원히 번져가는 물감 속에서

고요히 붉은

영혼의 피 냄새

 

이렇게 멎는다

기억이

예감이

나침반이

내가

나라는 것도

 

스며오는 것

번져오는 것

만져지는 물결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의 피

 

어둠과 빛

사이

 

어떤 소리도

광선도 닿지 않는

심해의 밤

천년 전에 폭발한

성운 곁의

오랜 저녁

 

스며오르는 것

번져오르는 것

피투성이 밤을

머금고도 떠오르는 것

 

방금

벼락 치는 구름을

통과한 새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 영혼의 피

 

마크 로스코와 나

- 2월의 죽음

 

미리 밝혀둘 것도 없이

마크 로스코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는 1903년 9월 25일에 태어나

1970년 2월 25일에 죽었고

나는 1970년 11월 27일에 태어나

아직 살아 있다

그의 죽음과 내 출생 사이에 그어진

9개월여의 시간을

다만

가끔 생각한다

 

작업실에 딸린 부엌에서

그가 양쪽 손목을 칼로 긋던 새벽

며칠 안팎에

내 부모는 몸을 섞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점 생명이

따뜻한 자궁에 맺혔을 것이다

늦겨울 뉴욕의 묘지에서

그의 몸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신기한 일이 아니라

쓸쓸한 일

 

나는 아직 심장도 뛰지 않는

점 하나로

언어를 모르고

빛도 모르고

눈물도 모르며

연붉은 자궁 속에

맺혀 있었을 것이다

 

죽음과 생명 사이,

벌어진 틈 같은 2월이

버티고

버텨 마침내 아물어갈 무렵

 

반 녹아 더 차가운 흙 속

그의 손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심장이라는 사물

 

지워진 단어를 들여다본다

 

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

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

지워지기 전에 이미

비어 있던 사이들

 

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

어깨를 안으로 말고

허리를 접고

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희미해지려는 마음은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덜 지워진 칼은

길게 내 입술을 가르고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

 

저녁의 소묘 5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저녁 잎사귀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년쯤

별 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posted by 황영찬
2018. 10. 12. 08:50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52 유네스코 선정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1

 

 

 

이종호 글 · 사진

2015, 북 카라반

 

대야도서관

SB108008

 

911

이75ㅎ  1

 

불국사와 석굴암부터 백제역사유적지구까지

 

UNESCO World Heritage of KOREA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종묘, 남한산성, 백제역사유적지구, 하회마을과 양동마을,

해인사 장경판전, 수원 화성, 강화 · 고창 · 화순 고인돌 유적, 조선 왕릉,

불국사와 석굴암, 경주역사유적지구,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한국의 건축물을 대변하는 궁궐은 많지만, 창덕궁이 유일하게 세계문화유산에 지명되었을 정도로 남다른 특이성을 갖고 있다. 세계에서 단일 목조 건물로 가장 규모가 큰 종묘와 남한산성도 한국의 자랑스런 세계문화유산이다.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백제역사유적지구와 하회마을과 양동마을, 해인사 장경판전, 수원 화성도 세계문화유산에 속한다. 한국은 '고인돌의 나라'로 불러도 좋을 만큼 많은 고인돌이 전국에 산재해 있는데, 특히 강화도와 전남 화순, 전북 고창 지역의 고인돌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조선시대의 왕릉은 거의 전부 한양을 중심으로 100리 안에 잇다. 경주 지역은 1995년 한국의 간판스타라 볼 수 있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최초로 지정되었고, 2000년 경주역사유적지구라는 명칭으로 경주시 전부를 포괄해 지정되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인 한라산천연보호구역, 성산일출봉, 거문오름 용암동굴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종호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페르피냥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와 과학국가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문부성이 주최하는 우수 논문상을 수상했으며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에서 연구했다. 과학기술처장관상, 태양에너지학회상,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했으며, 기초 없이 빌딩을 50층 이상 올릴 수 있는 ‘역피라미드 공법’을 비롯해 특허 10여 개를 20여 개국에 출원하는 등 이론과 실제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그동안 『유적으로 보는 우리 역사』(전2권), 『과학문화유산답사기』(전3권), 『미스터리와 진실』(전3권), 『황금보검의 비밀』, 『과학 삼국유사』, 『과학 삼국사기』, 『고대 신전 오디세이』,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파라오의 저주』, 『천재를 이긴 천재들』(전2권), 『세계 불가사의 여행』, 『세계사를 뒤흔든 발굴』, 『노벨상이 만든 세상』,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한국의 유산 21가지』 등 100여 권을 집필했다.

 

차례

 

머리말

 

제1장 창덕궁

한국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궁궐

공간 구성과 배치
돈화문 | 금천교 | 진선문 | 인정문 | 인정전 | 상의원 | 내병조 | 선원전 | 선정전 | 희정당 | 대조전 | 경훈각 | 함원전 | 성정각 | 승화루 | 낙선재 | 궐내각사

한국 조원의 대명사, 후원
부용지 지역 | 연경당 지역 | 존덕정 일원 | 옥류천 일원

 

제2장 종묘

선왕에 대한 제사의 장소

종묘 제도

격식과 장엄함의 대명사, 종묘
신도와 어도 | 망묘루 | 향대청 | 공민왕 신당 | 재궁 | 정전 | 공신당과 칠사당 | 영녕전 | 악공청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

 

제3장 남한산성

역사의 현장, 남한산성

남한산성 돌아보기
남문 | 암문 | 수어장대 | 서문 | 군포와 매탄지 | 옹성과 치 | 북문 | 벌봉 | 여장과 포루 | 장경사 | 성벽 | 동문 | 동암문

남한산성 행궁

 

제4장 백제역사유적지구

공주

공주 공산성 | 공주 송산리 고분군 | 무령왕릉 | 무령왕릉의 출토 유물

부여

부여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 부여 능산리 고분군 | 부여 나성 | 부여 정림사지

익산

익산 왕궁리 유적 | 익산 미륵사지

 

제5장 하회마을과 양동마을

하회마을

한국의 4대 길지

3년을 적선하라

전통적인 유교마을

마을 전체가 역사 유물
양진당 | 충효당 | 화경당 | 염행당 | 주일재 | 하동고택 | 원지정사 | 작천고택 | 옥연정사 | 겸암정사 | 삼신당 | 병산서원 | 화천서당

양동마을

양동마을의 건축
관가정 | 무첨당 | 향단 | 서백당 | 상춘헌 | 근암고택 | 두곡고택 | 이향정 | 심수정 | 안락정과 강학당 | 동강서원 | 옥산서원 | 독락당

 

제6장 해인사 장경판전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불력으로 외적을 격퇴하다

대장경을 만들다

고려 최대의 국책 프로젝트

장경판전

 

제7장 수원 화성

정조, 조선 제2의 도시를 짓다

신도시 건설이 최선이다

다목적 기능의 신도시

철저한 설계도면에 의한 다양한 건축

정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정약용의 설계안

첨단 과학 기자재를 사용하다

수원 화성 돌아보기
장안문 | 북서적대와 북동적대 | 서북공심돈 | 화서문 | 서장대와 노대 | 서암문 | 서포루 | 서남각루 | 팔달문 | 남수문 | 봉돈(봉화대) | 창룡문 | 동북공심돈 | 연무대 | 화홍문 | 방화수류정 | 창성사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

 

참고자료

 

■ 창덕궁은 지형지세를 활용한 자유로운 공간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주변 경관과 조화를 중시해 한국적인 궁궐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 돈화문에서 돈화는 『중용』의 '대덕돈화大德敦化'에서 취한 것으로 '교화를 도탑게 한다'는 뜻이다.

■ 금천교 네 모서리에 있는 산예라는 상상의 동물은 그 표정은 무섭지 않고 오히려 귀엽고 친근감을 준다.

■ 인정전 좌우로 회랑이 감싸고 회랑 안에는 네모난 널찍한 마당이 있는데, 이 마당이 만조백관이라고 할 때의 '조朝', 백관들이 모여서 왕에게 조회를 하던 뜰 곧 조정이다.

■ 선정전은 '정치를 널리 펼친다'는 뜻을 갖고 있는 편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 선정전이 공식적인 업무 공간이라면 희정당은 다소 사적인 업무 공간이다. 다시 말해 '여러 신하들을 한가로이 접견하는 곳'이다.

■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침실이자 왕자와 공주의 탄생지였고, 어린 왕자와 공주를 교육하던 곳이었다.

■ 경훈각은 대조전 서북쪽에 있는 단층 건물로 초익공계의 무익공 양식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 성정각의 정문으로 들어서면 건물의 오른쪽에 정면 6칸 측면 2칸의 누마루가 있는데 남쪽에는 보춘정, 동쪽으로는 희우루가 있다.

■ 낙선재는 헌종이 후궁을 위해 마련한 사적인 공간이다. 낙선재에는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처소인 석복헌과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처소인 수강재가 있다.

■ 정조는 즉위하자 역대 왕과 자신의 시문과 글씨 등 왕과 직접 관련되는 자료들을 보관할 집을 후원에 짓게 하니 이것이 규장각과 주합루다.

■ 옥당은 '옥같이 귀한 집'이란 의미로 국가의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는 곳 혹은 출세가 보장되는 인재들이 모인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 부용정은 후원의 꽃이라고도 불리는데 연꽃 모양을 형상화했다. 부용정 내부에 설치한 창은 팔각형으로, 인간을 의미한다.

■ 영화당에서 나와 왼편 담장으로 두 개의 문이 보이는데, 금마문과 불로문이다. 불로문(아래)은 창덕궁 안에서 돌로 된 유일한 문으로 늙지 않는 문이라는 뜻이다.

■ 궁궐 안의 다른 건물들이 단청과 장식을 화려하게 한 것에 비해 연경당은 단청을 하지 않았다.

■ 취규정(위)의 취규는 "별들이 문장을 주관하는 별자리로 모여든다"라는 뜻이며, 취한정의 '취한'은 "푸른 소나무들이 추위를 업신여긴다"라는 뜻이다.

■ 역대 왕들을 모신 종묘는 최고의 사당 건축이자 가장 숭고한 신전이다.

■ 조선의 종묘는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독특한 형식의 건물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 유형이다. 종묘의 신위 배치도.

■ 신도는 혼령만이 드나드는 길이고 어도는 제사 담당자인 왕과 세자가 이동하는 의례의 길이다.

■ 망묘루는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 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 공민왕의 초상을 모신 사당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과 공민왕이 직접 그렸다고 전해지는 <준마도>가 봉안되어 있다.

■ 정전은 신위를 모신 신실인 감실 19칸, 그 좌우의 협실 2칸의 박공지붕 건물로 왕의 신위가 늘어나면서 계속 증축되었다.

■ 칠사당은 왕실 제례 과정에 관여하는 7명의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 영녕전은 제2대 정종이 사망하자 그의 신위를 봉안하기 위해 정전의 서쪽에 세운 별묘다.

■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조선시대의 모든 제례 중에서도 가장 격식이 높은 왕실 의례다.

■ 종묘대제는 2012년부터는 1년에 2차례씩 열리는데 '어가 행렬', '영녕전 제향', '정전 제향'으로 나뉘어져 더 품격을 높였다.

■ 남한산성의 남문은 성곽의 서남쪽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유일하게 문루에 현판이 걸려 있다.

■ 남한산성에 현재 남아 있는 암문은 모두 16개인데, 제6암문은 1637년 한밤중에 습격해온 청군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고 부른다.

■ 장대는 전쟁 때나 군사훈련을 위해 마련한 장수의 지휘소여서 성내의 지형 중 높은 곳, 즉 지휘나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한다.

■ 장경사는 1894년 갑오경장으로 승군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전국에서 뽑힌 270여 명의 승려가 교대로 산성을 보수하거나 경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 성벽을 보면 남한산성이 천혜의 요새라는 사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죽 했으면 '천작지성'이라고 했을까?

■ 동문은 일반적인 성문 구조로 되어 있으며, 거칠게 다듬어진 자연석을 막돌쌓기로 하고 면만 바르게 쌓았다.

■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우국충절을 기리는 사당이다.

■ 행궁은 정궁에 대비되는 용어로 왕이 궁궐을 벗어나 거둥할 때 머무는 별궁 또는 이궁, 임시궁궐을 말한다. 남한산성 행궁 배치도.

■ 좌승은 '앉아서 이긴다'라는 뜻으로 반드시 이길 만한 계책을 써서 적을 물리친다는 의미다. 남한산성 행궁 내의 좌승당.

■ 금서루는 공산성 답사의 시작이다. 원래 그 터만 남아 있었는데 성내로 진입하는 차도로 이용되다가 1993년에 복원되었다.

■ 공북루는 공산성의 북문이다. 옛 망북루의 터에 신축한 것으로 강 사이를 왕래하는 남북 통로의 관문이다.

■ 송산리 고분군은 나지막한 구릉에 있는데, 이곳은 예부터 '송산소'라고 불리던 곳이다.

■ 무령왕릉의 구조는 단순한데, 자연 암반을 파내어 공간을 만든 뒤에 벽돌을 쌓은 것이다. 무령왕릉 내부 모습.

■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에 이르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유물만도 12점에 달한다. 위에서부터 관모, 금제 뒤꽂이, 왕비 귀걸이, 왕비 금동 신발.

■ 부소산은 해발 100미터 정도의 나지막한 구릉으로 이곳에 고구려 군사를 방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왕궁과 시가를 방비하는 최후의 보루였던 부소산성을 건설했다. 부소산성 입구.

■ 능산리 고분군은 그 많은 고분 가운데 부여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봉분이 비교적 잘 남아 있고, 규모면에서도 큰 축에 드는 무덤들이 모여 있다.

■ 정림사지에서는 여러 시대에 걸친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그중에서 정림사지 탑은 백제 시대의 부여를 대표한다.

■ 왕궁리 오층석탑은 익산의 미륵사탑을 본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으로 높이 9미터, 기단 면석에 두 탱주를 갖추었다.

■ 동서로 172미터, 남북으로 148미터에 이르는 미륵사터에는 서석탑(위), 1993년에 복원된 동석탑, 당간지주 2기 등이 남아 있다.

■ 서석탑 해체 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어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해체 보수 중인 서석탑.

■ 하회마을의 물길이 S자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학자들은 S자보다는 태극 모양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하회마을 전경.

■ 양진당은 풍산 류씨의 대종가로 문중의 대소사가 이곳에서 논의되었다. '입암고택' 현판은 입암 류중영을 지칭한다.

■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의 종택으로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가옥이다. '서애종택'이라고 부르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엄밀한 의미에서 서애 사후에 지은 집이다.

■ 화경당은 원래 만수당으로 불렸는데, 영남의 전형적인 사대부 집의 면모를 보여준다.

■ 염행당은 양진당, 충효당, 화경당과 더불어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4대 건축물이다.

■ 작천고택은 양진당, 충효당 사이의 길을 따라 서쪽으로 낙동강을 향한 우측에 있다. 1934년 대홍수로 유실되어 현재는 안채만 남았다.

■ 병산서원은 한국 최고의 서원 건축으로 꼽힌다. 경내에는 복례문, 만대루, 입교당, 동재, 서재, 고직사, 장판각, 내삼문, 존덕사, 전사청 등이 있다.

■ 관가정은 풍수적으로 지맥이 흘러드는 위치에 있는데, 관가정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을 담고 있다.

■ 향단은 검박함과는 거리가 멀다.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과시적 입지, 정면에서 보나 측면에서 보나 3개의 박공면이 강하게 드러나는 등 특이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 서백당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전통 건축의 대표라 할 수 있으며 양동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 심수정은 형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노모 봉양에 정성을 다한 이언적의 동생 이언괄을 추모해 지어진 정자다.

■ 안락정은 양동마을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앞쪽에 툇마루를 둔 '일一' 자형의 평면집이다.

■ 옥산서원은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이언적을 배향한 서원이고, 무변루는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의미로 원래는 납청루였다.

■ 독락당은 정면 칸살이 4칸으로 일반적인 양식을 벗어나 있다. 이언적이 낙향한 이듬해 지어진 건물로 말년을 보냈는데, 옥산정사라고도 불린다.

■ 계정은 정자로 사용되었으며, 계곡의 반석 위에 가느다란 기둥을 세워 쪽마루를 덧댄 특이한 구조다. 편액은 한석봉의 글씨다.

■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은 불교 경전 일체를 한자로 새긴 현존 세계 유일이자 가장 완벽한 불교 문헌 목판 인쇄물이다. 가야산 해인사 입구와 팔만대장경 입구.

■ 목판의 양쪽에 새겨졌던 불전들은 원래 강화도의 선원사에 보관되었으나 1398년에 한양의 지천사를 거쳐 현재의 해인사로 이관되었다. 강화도 선원사터.

■ 일본은 1502년 오키나와 슈리성 밖의 원감지라는 연못에 건물을 짓고 고려대장경을 보관하기도 했다.

■ 유능한 각자공 1명이 경판 2장을 만들기도 어려웠을 텐데, 팔만대장경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연인원은 무려 100만 명이 넘는다.

■ 「팔만대장경」은 몽골군의 공포에서 고려인이 살아남아 싸워야 한다는 신념을 심어주었다. 해인총림海印叢林 입구.

■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들은 그 이름과는 달리 무슨 창고나 헛간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 외관을 보고 실망하기도 한다.

■ 법보전은 앞의 건물과 같은 규격으로 나란히 놓여 있는데, 중앙 칸은 안쪽 높은 기둥열이 있는 곳까지 벽으로 되어 비로자나불상과 양측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봉안했다.

■ 「팔만대장경」은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목각판에 옻칠을 했다. 따라서 내구성이 강해 75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부패하거나 쥐와 좀벌레가 갉아먹는 일이 거의 없다.

■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만들기로 했는데, 수원은 한양과 남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상업활동을 위한 도시였다.

■ 정조는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으로 고치고 어머니의 존호를 혜빈에서 혜경궁으로 높였다. 수원 <화성능행도> 일부.

■ 수원 화성이 다른 성곽과 차별되는 것은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평산성 형태로 설계되었다.

■ 정조는 젊은 실학자 정약용에게 '삼남의 요충이요, 한양의 보장지지로 만세에 길이 의지할 만한 터'인 수원 화성을 건설토록 했다. 한강의 배다리 재현 모습.

■ 거중기는 적은 힘으로 큰 물건을 들어올림으로써 인력을 절약할 수 있고 무거운 물건이 떨어지는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 수원 화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는데 북문인 장안문과 남문인 팔달문이 가장 크다. 장안문은 건물 높이만 해도 32척9치로 반원형의 둥근 벽체로 벽돌로 축조되었다.

■ 수원 화성에는 적의 집중적인 공격이 예상되는 화서문과 팔달문 근처에 서북공심돈과 남공심돈을 두었고, 동북공심돈은 구릉지에 있기 때문에 치성 위에 구축할 필요가 없어 성벽 안쪽에 독립적으로 원형으로 축조했다. 동북공심돈(위)과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 서장대는 수원 화성에서 가장 높은 팔달산 정상에 있는데, 돌로 쌓은 대 위에 있는 2층 누각이다. 서장대(위)와 서노대.

■ 서포루는 수원 화성 서장대 북쪽으로 약 200미터 거리에 잇는 성곽 시설물이다. 성 몸에 '철(凸)' 모양을 붙여 치성을 만들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 팔달문은 한양의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은데 문루의 네 귀에 높은 기둥이 없는 것이 다르다.

■ 봉화대는 변방에서 발생하는 군사적인 긴급 사태를 중앙에 급히 알리기 위해 설치된 것이다.

■ 연무대는 전쟁 지휘소로 장수가 장병들을 모아 놓고 훈련을 하거나 지휘하는 곳이다. 그 주변에는 탁 트인 넓은 공터인 활터가 있다.

■ 방화수류정은 전시에 적군 감시와 지휘소 기능을 하면서도 평시에 휴식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posted by 황영찬
2018. 9. 14. 13:58 내가 읽은 책들/2018년도

2018-050 임금의 도시

 

 

 

이기봉 지음

2017, 사회평론

 

대야도서관

SB128708

 

911.0028

이18ㅇ

 

서울의 풍경과 권위의 연출

 

너무나 익숙해서 보이지 않았던

우리 풍경의 재발견!

 

문명은 어떻게 권위를 시각화했는가?

서울의 3단계 풍경은 어떻게 권위를 연출해내는가?

풍경의 아름다움 너머 우리 풍경의 원리를 밝힌다!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우리 풍경을 보고도 그 보편성과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아름답다고만 했지 그 아름다움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인식되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했다."

 

이기봉

 

1967년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서 태어나 수원 수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 ·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 2월부터 2009년 3월까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책임연구원으로 일했으며, 그 후 현재까지 국립중앙도서관 학예연구사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 『지리학교실』, 『조선의 도시, 권위와 상징의 공간』, 『평민 김정호의 꿈』, 『조선의 지도 천재들』, 『근대를 들어올린 거인 김정호』, 『땅과 사람을 담은 우리 옛 지도』, 『슬픈 우리 땅이름』, 『천년의 길』 등이 있다.

 

차례

 

프롤로그 - 우리 풍경의 뿌리를 찾아서

 

1 임금의 도시, 서울의 탄생

    성씨가 다른 새로운 왕이 즉위하다 / 고려의 흔적을 지워라
    최후의 수단, 천도 / 천도를 둘러싼 임금과 신하의 줄다리기
    사는 곳이 곧 권력이다 / 명분을 가진 자가 모든 걸 가진다
    태조의 승리 / 마침내 태어난  '임금의 도시'

 

2 보이지 않는 서울의 풍경

    신도시 한양의 청사진 / 궁궐 앞에 주작대로 대신 시장이 있다?
    계승과 단절, 두 마리 토끼를 잡다 / 조선시대에 태평로는 왜 없었을까?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경복궁 / 과거 보러 가는 선비의 한양 구경
    시야를 통제하며 3단계 풍경을 만들다 / 나라의 근본, 종묘와 사직
    골육상쟁의 기억을 품은 창덕궁 / 세종의 효심, 창경궁
    왕기가 서린 경희궁 / 임금의 풍경을 연출하라

 

3 우리 전통건축물은 왜 작을까?

    위치가 바뀌면 풍경이 바뀐다 / 외국의 건축물은 왜 이리 거대한 걸까?
    하늘을 찌를 듯한 삼국시대의 탑들 / 권위를 시각화하는 또 다른 방법

 

4 한국 풍경의 기원을 찾아서

    서울 풍경은 유교 때문에 생긴 것일까? / 법흥왕, 죽음까지 혁신하다
    가장 오래된 3단계 풍경 / 풍수는 지배자를 위한 사상이었다
    명당은 살기 좋은 땅일까? / 지배와 피지배의 살풍경이 남아 있는 풍수
    땅의 논리인가, 하늘의 논리인가? / 하늘, 배경으로 밀려나다
    이데올로기의 풍경

 

5 장소가 만든 역사의 풍경

    거대도시 경주의 풍경 / 그 많던 높은 목탑들은 어디로 갔을까?
    낮은 석탑이 만든 감은사의 3단계 풍경 / 목탑에서 석탑으로
    궁예, 견훤, 왕건, 그리고 도시 삼국지 / 개성은 최초의 풍수 도시였다

 

6 임금과 공간의 정치학

    고려는 풍수 때문에 망한 걸까? / 위태로운 왕권과 훈요십조
    천도가 아니면 새 나라를?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고려 최후의 시도
    풍수는 어떻게 한반도의 문화유전자가 되었나

 

7 방어력 없는 성곽의 비밀

    선조, 도성을 버리고 피난 가다 / 한양은 왜 무방비로 함락되었을까?
    명당은 방어에 유리할까? / 서울 성벽은 왜 해자가 없고, 낮을까?
    왜 높은 성벽을 만들지 않았을까?
    산이 드문 곳에는 높은 건물을 짓고, 산이 많은 곳에는 낮은 것을 만든다
    소 잃고 산성 고치기 / 산성의 나라가 된 조선

 

8 감시와 통제의 밤 풍경

    보신각의 종소리는 아름다웠을까? / 음모의 밤 / 야경꾼과 딱다기
    물시계는 누구를 위해 흘렀을까?

 

9 사라진 정원의 풍경

    우리나라에는 왜 정원이 별로 없을까? / 임금의 정원
    높고 웅장하게 솟은 경회루 / 조선의 미니멀리즘, 향원정
    골짜기에 숨겨진 절경, 창덕궁 후원 / 손가락이 아닌 달을 봐야 정원이 보인다
    외부로 펼쳐진 정원 / 가공하지 않은 자연 속 정원

 

에필로그 - 보이지 않는 우리 풍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태조 이성계의 어진

고려시대 홍건적과 왜적을 물리치며 불패의 무장으로서 명성을 쌓아가던 이성계는 자신을 따르는 강력한 사병세력을 기반으로 신진사대부의 지원을 받아 마침내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왕위에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왕조를 지키는 것이다. 새로 왕위에 오른 이성계에게는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었다.

태조 왕건상

개성 현릉(왕건릉)에서 발견된 태조 왕건상. 머리에는 황제가 쓰는 통천관을 쓰고 있다. 불상 형식으로 제작된 왕건상은 불교의 나라였던 고려의 운명과 궤를 같이 했다. 원래 이 상은 개성 종묘에 봉안되어 제례에 쓰였는데, 이성계의 명에 의해 종묘와 함께 마전군으로 옮겨졌다가 유교예법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건릉에 매장되었다. 1992년 능 공사 중에 발견되어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고려의 중심 개성

① 1720년쯤의 개성 모습(「광여도」). ② 공민왕릉. ③ 선죽교. 송악산을 등지고 세워진 개성은 제1의 명당이라고 불렸으며, 몽고의 침입 때문에 강화도로 옮긴 기간을 제외하고 왕건이 도읍한 이래 400여 년간 고려의 수도였다. 이성계가 모셨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묘 등 도시 곳곳이 왕씨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또 이성계의 즉위를 반대하다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한 정몽주처럼 왕위를 찬탈한 이성계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다. 이와 같이 개성은 여전히 고려의 도시여서 이성계에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성계는 이를 극복하고 성공적인 왕조를 열기 위해 천도를 추진했다.

개성 첨성대와 서운관

고려시대 하늘을 관측했던 첨성대는 서운관에서 관리했다. 서운관은 하늘을 관측하고 절기를 측정하는 업무를 봤다. 서운관은 천문과 지리 현상을 모두 관장하고 그에 따른 길흉까지 점치는 기관이었다.고려가 쇠약해지면서 천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때 큰 역할을 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도 존속하다가 세종 때에 관상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1392

○ 1392.7.17 이성계 왕위 등극

 

    태조 : 왕조의 정당성과 왕권 강화를 위해서 천도가 필요하다. 한양으로 천도 시도.

    배극렴 · 조준 : 반대. 궁궐과 성곽을 짓지 않고 수도부터 옮기면 백성들이 곤란해질 것입니다.

 

● 1393

○ 1393.1.2

    태실중고사 권중화

    계룡산으로 천도 건의

 

    정요 : 왕비가 편치 못하고, 초적이 나타났으니

              (계룡산 행차를 중단해야 합니다).

    태조 : 내가 하지 못하면 후손들은 더욱 할 수 없을 것이다.

○ 1393.2.10

    계룡산 수도 건설 공사 시작

○ 1393.12.11

    하륜의 반대 상소로 계룡산 수도 이전 백지화

 

    하륜 : 계룡산은 국토에서 남쪽에 치우쳐 있고, 풍수상 '반드시 망할 땅'입니다.

              대신 무악을 천거합니다.

 

● 1394

○ 1394.8.11

    태조 무악 시찰. 서운관 관원과의 논쟁

 

    서운광 관원 : 무악은 좋지 못합니다. 개성에서 궁궐을 다시 짓는 게 좋습니다.

    태조 : 개성이 지기가 쇠했다고 상소를 올린 곳이 서운관이다. 다른 곳은 어디가 좋은가?

    서운관 관원 : 가장 좋은 명당은 개성이고, 그다음이 한양입니다.

○ 1394.8.12

    태조, 한양으로 행차

 

    태조 : 형세를 보니 도읍으로 삼을 만하다. 조운이 잘 통하고, 사방으로 거리가 균등해 나라 ㅇㄴ영에 편리할 것이다.

    무학대사 : 사면이 높고 수려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도읍이 될 만합니다.

    신하들 :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 한다면 한양이 좋습니다.

 

    정도전 : 국가의 흥망은 인간 세계에 있는 것이지 지기의 성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석린 : 무악은 수도로 삼기에 너무 좁습니다.

    이직 : 수도 이전은 하늘과 백성들을 설득시킨 후에 가능합니다.

○ 1394.8.24

    한양으로 천도 확정

○ 1394.10.25

    태조 한양으로 천도 선언

○ 1394.10.28

    한양에 도착하여 집무 시작

개성 성균관

공민왕 때 유학을 전담하게 된 성균관은 조선 건국의 핵심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을 대거 양성한다. 나라의 흥망이 풍수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정도전은 강경한 유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도전을 제외한 다른 개국공신들은 오랫동안 이어온 풍수를 판단 근거로 인정함으로써 신진사대부 역시 풍수의 영향력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한양도성도」

18세기 후반 편찬된 『여지도』에 수록된 지도로 시각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궁궐과 종묘사직, 산세, 간선도로 등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지도를 보면 한양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를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

종묘

사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남대문(숭례문)

동대문(흥인지문)

북대문(숙정문)

수선전도로 본 한양의 도시 설계

한양은 북쪽으로는 북악산, 남쪽으로는 남산, 서쪽으로는 인왕산, 동쪽으로는 낙산에 둘러싸여 있고, 청계천이 한가운데로 지나가는 지형이다. 조선 건국 때 정궁으로 지어진 경복궁이 왼쪽에 자리잡고 있고, 종묘는 궁궐 왼쪽에 사직은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동서대로는 직선으로 곧게 나 있는 반면, 남대문에서 시전으로 이어지는 남대문로는 활처럼 휘어져 있다. 서대문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육조거리 : 정무를 담당한 여섯 부서,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와 한성부 관청이 있었다.

 

운종가 :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이는 거리라는 의미로 국가에 물자를 보급하는 시전이 설치되어 중심 상업 지역 기능을 했다.

한양과 북경의 도시 구조 비교

두 도시 모두 『주례』「고공기」를 바탕으로 건설되었지만, 구조에서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다. 북경의 경우, 한눈에 보기에도 직사각형과 좌우대칭의 형태로 엄격하게 '좌묘우사', '전조후시'의 원리가 적용되어 있다. 자금성에서 천안문을 거쳐 외성 정문인 영정문까지 마차 아홉대가 나란히 지날 수 있는 대로가 직선으로 놓여 있다. 반면 한양의 경우 경복궁이 중앙에 위치해 있지 않고, 시장이 경복궁 앞에 위치해 '전조후시'의 원리가 지켜지지 않았다. 또한 경복궁과 남대문까지 직선대로를 만들지도 않았다.

숭례문(남대문)에서 광화문 가는 길

숭례문에서 경복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직선도로 대신 두 번에 걸쳐 꺾어지는 복잡한 길로 돌아가야 했다. 숭례문에서 출발해서 지금의 종로인 운종가에서 한번 꺽고, 육조거리 앞에서 다시 한 번 꺽어야 경복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1900년대 남대문로

1900년대 구한말 당시 남대문로의 모습. 임금이 사는 궁과 정문인 남대문까지의 길이 휘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건물들 너머로 북악산이 보인다. 낮은 초가집과 기와집으로 이뤄진 풍경에서 북악산은 지금보다 훨씬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광화문광장(육조거리)에서 본 경복궁

어느 대문에서 어느 길로 와도 보이지 않던 경복궁이 육조거리로 들어서는 순간 북악산과 함께 시야에 펼쳐진다.

육조 거리에서 바라본 광화문 옛 풍경

고층건물이 즐비한 오늘날 과거의 광화문 풍경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현대의 흔적을 지우고 조상들이 보았을 권위의 풍경을 그려보아야만 우리 풍경을 이해할 수 있다.

종묘의 3단계 풍경

하늘에서 종묘를 내려보면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과 정전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고 틀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진입로에서부터 외대문과 보현봉을 일치시키기 위해 진입로가 정북이 아니라 서북북 방향을 향해 있다.

「동궐도」로 본 창덕궁 구조

정문과 정전이 일직선상에 위치한 일반적인 궁궐들과 달리 창덕궁은 특이하게 돈화문에서 인정전까지 진입로가 어긋나 있다. 돈화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금천교를 건너 왼쪽으로 꺽어야만 정전인 인정전이 나온다. 이렇게 조성한 이유는 창덕궁 앞에 종묘가 있어서 3단계 풍경을 위한 진입로 조성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창덕궁의 독특한 궂는 3단계 풍경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다.

 

돈화문 안의 보현봉

돈화문 앞에서 바라보면 문 틀 안에 보현봉이 한 폭의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다. 서울이 산에 둘러싸인 지형이라 해도 이런 멋진 광경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돈화문을 보현봉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세웠으며 이 문이 엄밀한 구도 하에 건축되었음을 보여준다.

함춘원 방향에서 본 창경궁의 3단계 풍경

창경궁은 이미 지어진 종묘와 창덕궁 때문에 3단계 풍경을 연출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종묘와 창덕궁처럼 하늘산을 보현봉이 아닌 인왕산 왼편의 안산으로 잡아 창덕궁과 전혀 다른 새로운 풍경을 구현했다.

「동궐도」속 창덕궁과 전경

창덕궁과 창경궁은 쌍둥이처럼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창덕궁은 정전, 정문, 진입로가 남향이지만 창경궁은 동향이다. 홍화문 앞부터 함춘원의 언덕이 시작되기 때문에 나중에 지어진 창경궁은 지형의 제약을 받았고, 그 결과 3단계 풍경의 하늘산도 바뀌었다.

경희궁의 3단계 풍경

경희궁 역시 창덕궁과 마찬가지로 숭정문 방향과 진입로를 조정해서 인왕산을 배경으로 하는 3단계 풍경을 구현하고 있다.

거리에 따른 북악산과 광화문 비율 변화

조선시대에 없었던 태평로에서 광화문을 바라보면 북악산에 비해 경복궁은 매우 작게 보인다. 궁궐이 초라하게 보인다는 것은 임금의 권위가 약화되는 일이다. 이 때문에 한양의 도시계획자들은 하늘 - 산 - 궁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적절한 비율을 유지하기 위해 숭례문에서 경복궁까지 직선도로를 만들지 않았다.

근정전의 앞뜰

근정전의 아름다운 자태도 유심히 살펴봐야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앞뜰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앞뜰의 규모에 따라 근정전의 크기와 느낌이 달라지기 때문에 너무 넓어서도 좁아서도 안 된다. 근정전의 크기에 비례해서 앞뜰도 조성되었다. 거대한 북악산이 근정전과 일치되어 근정전 뒤로 숨어들어 간 것처럼 보이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5층 목조건물인 법주사의 팔상전은 상륜부의 높이까지 22.7m로 조선시대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① 자금성 태화전과 ② 오사카성 천수각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은 3단 월대 때문에 시각적으로 경복궁 근정전보다 훨씬 거대하게 다가온다. 오사카성의 천수각 역시 높은 축대 위에 지어져 우뚝 솟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축대나 언덕 위를 이용해 건축물을 더욱 높게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세계의 거대건축물

① 태국의 왓아룬 사원. ② 티베트의 포탈라궁. ③ 이탈리아의 밀라노 대성당. ④ 인도의 타지마할. ⑤ 이집트의 피라미드. 아름다운 세계의 거대건축물의 감상은 잠시 뒤로 하고 그 너머를 살펴보자. 공통적으로 주변에 다른 높은 자연물 혹은 인공물이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건물 너머 우뚝 솟은 산이 있는 풍경은 세계적으로 보면 결코 보편적인 풍경이 아니다.

황룡사 복원도

황룡사 9층 목탑은 낮게 잡은 추정치조차 80m에 가까워서 23m를 넘지 못했던 조선시대 어떤 건축물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높이를 자랑한다. 하지만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어서 실제 모습이 어땠는지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남아 있지 않지만 삼국시대에는 높은 목탑들이 많이 건축되었다.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는 목탑을 중앙에 두고 두 개의 석탑이 양옆에 세워졌다. 복원된 석탑의 높이는 27.7m이다. 중앙에 있었던 목탑은 50m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사는 황룡사와 같은 시기 세워졌는데 미륵사 목탑을 세웠던 백제의 기술자가 황룡사9층목탑에도 참여하였을 것이다.

인왕산에서 본 경복궁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배화여자대학교에서 내려다본 서울 시내 전경이다. 지금은 고층건물에 가려져 잇어 상단부만 보이지만 과거에는 경복궁 전체와 내부까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경복궁처럼 다른 곳에서 궁궐 안을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은 보편적인 모습이 아니다. 임금의 권위를 손상시킬 뿐 아니라 경비 등 안전상 문제까지 있다. 이처럼 궁궐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가 궁궐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일반적인 경우라고 할 수 없다.

종묘 정전

종묘는 유교사회였던 조선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유교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만큼 중요한 의식은 없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가장 먼저한 일 역시 종묘를 짓는 일이었다. 그래서 역대 왕과 왕비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는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다. 신주가 늘어남에 따라 계속 증축하였고, 그 결과 지금처럼 옆으로 길다란 모습이 되었다.

경주 대릉원의 황남대총

고대로 갈수록 고분의 크기는 곧 지배자의 권력과 비례했다. 대릉원에는 왕과 왕비,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형고분이 총 23기가 모여 있다. 이 고분들은 신라가 지방 지배를 강화하여 고대국가체제로 넘어가면서 지배층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알려준다. 이 중 황남대총은 대릉원의 고분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누구의 무덤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두 개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잇으며 남분은 남자, 북분은 여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네페리티티 흉상

아크나톤이 주도한 개혁의 영향을 받은 아마르나 예술의 대표작이다. 측면얼굴을 보여주는 기존 이집트 예술의 정통을 깨고 사실주의 묘사가 두드러진다. 아크나톤의 개혁이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 문화 · 사회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관습법에서 율령의 통치체제로 발돋움하는 법흥왕 시기에도 사회 전 분야에서 변혁의 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감은사지 전경

감은사는 문무왕 수중릉으로 알려진 대왕바위 근처에 있다. 과거 감은사지의 진입로는 현재 논밭과 도로로 변해서 정면 방향을 제대로 감상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진입로를 지나쳐서 감은사지 오른쪽에 만들어진 주차장을 통해 절터로 올라가 탑을 감상하고 돌아간다. 감은사지뿐만 아니라 많은 유적지가 이렇게 주차장에서부터 관람을 시작하게끔 동선이 짜여 있다. 문화유산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문화재 자체도 중요하지만 문화재가 만들어내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의 건축자가 의도했던 대로 원해 정문 진입로에서부터 문화재를 감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탑평리 7층 석탑(위)과 신세동 7층 전탑(아래)

탑평리 7층 석탑은 남아 있는 신라 석탑 중 가장 높은 탑으로 높이가 14.5m이다. 신세동 7층탑은 벽돌로 쌓아올린 높이 17m의 전탑으로 현존하는  신라 탑 중 가장 높다. 거대목탑들이 많았던 삼국시대와 달리 통일신라 이후에는 10m 안팎의 3층 석탑이 주류가 되었다.

감은사지 3층 석탑

신라 최초의 3층 석탑인 감은사지 3층 석탑은 당시 경주시내에 세워졌던 높은 탑들에 비해 작은 규모이다. 경주를 벗어나 산이 배경에 놓이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석가탑

감은사지 3층 석탑과 석가탑은 같은 3층 석탑이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초기 3층 석탑인 감은사지 3층 석탑은 화강암을 사용한 목탑 양식으로 육중함과 웅장함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8세기 중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불국사의 석가탑은 아름다운 비례와 날렵함을 구현했다.

① 철원 도성 복원도

궁예는 중국 도성을 본따 평야지대인 철원에 도성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웅대한 이상을 담아냈다. 사각형의 도성과 직선으로 뻗은 도로망에서 알 수 있듯이 한양보다 중국의 도성과 훨씬 닮아 있다.

② 후백제의 견훤이 수도로 삼았던 동고산성

견훤의 궁궐이 있었던 동고산성은 평야지대인 철원과 달리 낮은 산정상에 자리를 잡고 있다.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의 많은 도시들이 동고산성처럼 방어에 유리한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③ 위에서 내려다 본 경주 시가지 원경

천년고도 경주는 풍수적으로 명당과 거리가 멀다. 경주는 산과 멀리 떨어져서 하천을 낀 평야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평야지대에 입지한 도시가 세계적으로 꽤 있는 편이지만 방어에 좋은 구릉에 만들어진 도시가 더 많았다.

송악산을 등지고 있는 만월대터

왕건이 도읍한 개성은 여러모로 한양과 많이 닮아있다. 고려 제일의 명당으로 꼽힌 개성은 사실 궁궐이 들어서기에 지형이 고르지 못했는 데 높은 축대를 사용해 이를 해결하였다. 만월대 너머로 송악산이 보이면서 서울에서 볼 수 있는 3단계 풍경과 같은 구도임을 알 수 있다.

개성의 외성과 황성, 궁성의 구조

개성은 지형에 맞게 동서대로와 남북대로를 만들었다. 외성의 남대문인 희빈문에서 출발해서 남북대로를 따라 황성의 동문인 광화문을 서쪽으로 들어가 북쪽으로 꺾기까지 만월대의 정궁을 볼 수 없다. 지형부터 성과 도로망까지 한양과 유사한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일월오봉도

용상 뒤에 놓는 병풍으로 해와 달은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임금이 용상에 앉았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그림이다. 다양한 자연물을 이용해 임금의 권위를 표현했으며, 권위를 시각화하려는 싣의 일환이다.

도선국사

신라 말에 할동했던 도선은 풍수지리의 대가였다. 훈요십조에서 볼 수 잇듯이 왕건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고려시대 활발했던 임금풍수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 왕건(942년)

서경에서 3년마다 백일 이상 머무를 것(훈요십조)

호족 사이의 위태로운 왕권

 

● 숙종(1099년)

김위제의 주장에 따라 남경 재창설

여진의 성장

 

● 인종(1135년)

묘청의 난(서경 천도 운동)

이자겸의 난과 금나라의 성장

 

● 공민왕(1360년)

한양과 백악으로 시도

원나라의 쇠퇴와 외적 침입

 

부산진순절도

임진왜란의 시작을 알리는 왜군의 부산진 침략을 그린 기록화. 영조 때 화가 변박이 그렸다.

한양 도성 성곽

18km에 이르는 한양 성곽은 언뜻 보기에는 단단한 방어 준비로 보인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 큰 전쟁에서 서울의 성곽은 전투 한번 제대로 치루지 않고 함락됐다.

콘스탄티노플 성벽과 단면도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명성이 높았다. 방어를 위해 해자와 삼중의 성벽을 갖추고 있었으며 성벽 높이는 10미터가 넘었다. 성벽을 넘기 위해 다양한 공성도구가 사용되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나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20톤 무게의 초대형 우르반 대포를 동원하고 방어군보다 열 배가 넘는 군사를 동원한 오스만 제국에 50일 넘는 공방전 끝에 마침내 함락된다.

옹성이 축조된 흥인지문 성벽

동대문(흥인지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옹성이 축조되어 있지만 실제 방어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다. 풍수에서 볼 때 서울은 동쪽이 약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름에 之를 넣어서 4자로 짓고, 옹성을 쌓았다.

중국의 산해관 성벽

만리장성 동쪽 끝에 위치한 산해관은 천하제일관이라는 현판대로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던 청나라조차 넘지 못한 요새였다. 높이 14m에 달하는 성벽을 자랑하는 산해관을 청나라는 무력으로는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의 협력으로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다.

오사카성의 해자

넓은 해자는 성벽과 함께 평지에 위치한 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해자는 성벽으로의 접근성과 기동성을 떨어뜨리는데,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너비와 깊이를 갖추어야 한다.

풍납토성

풍남토성은 발굴 초기에는 도성을 방어하는 작은 토성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추가 발굴조사를 통해 많은 유물과 함께 10m가 넘는 토성과 해자가 발견되면서 거대한 규모가 드러났다. 현재는 백제의 수도 위례성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가 쌓았던 백암산성

중국과 잦은 전투를 벌여야 했던 고구려성은 높은 성벽과 치 같은 방어력을 높이는 구조로 축조되었고, 중국 요령성의 백암산성처럼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지어졌다.

경천사지 10층 석탑

충목왕 때 세워진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화려하고 장식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던 고려는 사회 전반에서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이런 상항에서도 풍수의 전통은 뿌리 깊게 자리 잡아 풍수에서 파생된 건축원리가 조선까지 이어진다.

한양도성과 동일한 도시 원리의 낙안읍성

낙안읍성의 구조는 한양과 동일한 도시원리로 그대로 옮겨놓았다. 남문 밖 진입로에서부터 걸어오면 금전산이 남문 위로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읍성 안으로 들어서면 읍성에서 궁의 역할을 하는 동헌이 보이지 않는다. T자로 난 대로의 왼쪽으로 꺽어 가다가 동헌 앞에서 비로소 오른쪽을 돌아보면 동헌과 금전산이 하나처럼 펼쳐진 풍경을 볼 수 있다.

남한산성의 성벽

남한산성의 성벽 높이는 평지성에 비해 높지 않지만 산비탈 자체가 성벽 역할을 하면서 높은 방어력을 가지게 해준다.

남한산성 행궁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조선은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산성 내부에 행궁을 지으면서 장기항전을 준비했다.

제야의 종 행사

오늘날 제야의 종 행사는 지나간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축하하는 송구영신의 상징적인 행사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조선시대 백성들에게 보신각종은 지금보다 훨씬 권위적인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보신각종은 통금 사이렌처럼 출입을 제한하고 시간을 통제하기 위한 기준이었다.

보신각

보신각은 종로 통운교에 설치되어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렸다. 매일 오전 4시에 33번을 타종하고 오후 10시에 28번 타종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복구했으며, 현재의 보신각종은 세조 때 주조한 원각사종을 사용하고 있다.

자격루 모형

현재 덕수궁에 있는 자격루는 물받이통과 항아리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장영실이 만들었던 자격루는 일정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종이 치게 설계된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계장치였다.

세종 때 만들어진 다양한 발명품

위에서부터 앙부일구, 측우기, 혼천의이다. 조선시대에는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측정하기 위한 다양한 도구가 발명되었다. 발명품들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왜 이러한 발명품들이 만들어졌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발명품들은 예측할 수 없던 날씨와 시간과 같은 자연현상을 통제의 영역으로 편입시키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다.

웅장한 경회루 전경

경회루는 여러모로 독특한 정원이다. 규모에서 경회루는 중국과 일본의 일반적인 누각보다 훨씬 더 큰 규모를 자랑한다. 또 연못과 연못 안의 섬 모두 사각형의 단순한 구조를 띠고 있는 점 역시 특이하다. 정원을 만들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담을 두르고 나무를 심어 시야를 막고 분리된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경회루 왼쪽으로 보이는 인왕산에서 알 수 있듯이 경회루는 탁 트인 시야를 보여준다.

동양의 대표적 정원들의 사계절

① 졸정원, ② 퇴사원, ③ 고락쿠엔, ④ 금각사. 이 정원들은 연못과 누각을 만들고, 수석 등을 배치해서 장소마다 , 또 같은 장소에서도 시선에 따라, 그리고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다른 풍광을 보여준다. 동양의 이상적인 정원은 분리된 공간에 무릉도원의 이상적 모습을 담고자 했다.

성락원

성락원은 철종 때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장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정원과 마찬가지로 공간을 세분화해서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을 구현하고 물줄기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주었다.

경회루 전경

자연경관에 대한 시각적 경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회루의 크기는 커졌고, 대신 자연과 대비되는 인공연못을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었다.

경회루 누각에서 본 풍경

경회루에서는 멀리 인왕산과 경복궁의 여러 전각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기둥이 액자틀 역할을 하는 동시에 인왕산이 한 폭의 그림에 담긴 것처럼 펼쳐진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내부의 인공경관을 감상하는 중국과 일본의 누각과 달리 경회루는 탁 트인 외부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 만들었다.

조선 3대 누각이었던 촉석루

밀양읍성의 영남루와 평양성의 부벽루와 함께 3대 누각으로 불렸던 촉석루는 남강 옆에 세워졌다. 경회루와 마찬가지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풍경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연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게 큰 누각을 지었다. 도시입지에 풍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한국은 중국 · 일본과 달리 도시 가까이에 큰 산이 들어서 있었다. 그 결과 공간을 분리해서 인공적으로 꾸미기보다 이미 도시 안에 들어와 있는 자연공간을 이용하는 경관 감상이 더 유행하였다.

향원정

지금의 향원정은 고종 때 지어진 것으로 경회루와 동일한 조성원리가 적용되었다. 높게 솟은 북악산과 인왕산을 가리지 않고 연못과 인공섬을 단순하게 원형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자연과 조화를 추구했다.

비원의 여러 모습

위에서부터 차례로 ① 부용정. ② 청의정. ③ 애련정이다. 창덕궁은 평지에 자리 잡은 경복궁과 달리 산줄기 허리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를 이용하여 골짜기 자체를 밖과 단절된 공간으로 사용했다. 비원을 둘러싼 산과 능선이 담장 역할을 하면서 골짜기 안의 화려한 자연 자체가 정원의 풍경이 된 것이다.

세검정도

조선시대 정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자 자체보다 정자가 위치한 공간과 풍경을 살펴봐야 한다. 그래서 밖에서 정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정자 안에서 펼쳐지는 풍경이 중요하다. 한국 정원이 중국, 일본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이유는 도시 가까이에 산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별다른 인공적인 요소 없이도 뛰어난 풍광이 있는 곳에 정자를 세움으로써 풍류를 즐길 수 있었다.

인공정원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안압지

문무왕 때 조성된 안압지는 신라가 망하면서 폐허가 되었다가 1975년 발굴되면서 복원되었다. 굽이치듯이 설계된 연못의 외양은 동양의 인공정원 방식을 잘 보여준다. 굽이치듯이 설계된 연못의 외양은 동양의 인공정원 방식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현재 복원된 안압지는 인공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외부와의 차단이 안 되어 있어서 과거의 정취를 온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