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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23. 08:43 내가 읽은 책들/2016년도

2016-013 재미있는 반야심경

 

대안스님 지음

2004, 혜성출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41900

 

223.53

대6219반

 

반야심경·심경이라고도 하는 반야심경은 당나라 현장이 번역했다. 관자재보살이 반야행을 통해 나타나는 법의 모습을 단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불교의 기초적인 법문인 오온·12처·18계가 모두 공하여, 12연기 또는 공하며, 4가지 진리 또한 공하다고 하여 모든 법의 공한 이치를 나타내었다.

 

대안

1985년 통도사에서 성파 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통도사 승가대학을 졸업했다.

통도사 서운암에서 쪽빛 염색과 도자기 작업을 시작해

2000년 동의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학세계에 시가, 현대시조에 시조가 당선되어 문학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부산 금화사 주지며 선원에서 정진중이다.

주요 저서로 『알기 쉬운 불교강좌』, 『전통 복식에 나타난 청색에 관한 연구』, 『전통염색의 이해』(공저) 등이 있다.

 

차례

 

제1장 반야심경에 대하여

제1절 반야심경의 의의

제2절 반야심경의 성립과 구조

제3절 반야심경의 사상

제4절 반야부의 경전들

 

제2장 반야심경 해석과 강의

제1절 원문과 해석

제2절 반야심경 강의

_ 1. 제목

_ 2. 번역자

_ 3. 부처님을 찬탄하다

_ 4. 색은 곧 공이다

_ 5. 마음은 불생불멸이다

_ 6. 십이처, 십팔계가 본래 없다

_ 7. 십이인연이 본래 없다

_ 8. 사성제, 팔정도도 본래없다

_ 9. 보살들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셨다

_ 10. 꿈을 깨고 열반에 들자

_ 11.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해서 깨달았다

_ 12. 반야바라밀다는 최상의 주문이다

_ 13. 다함께 성불합시다

 

찾아보기

참고문헌

 

반야심경 자전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
 
 
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
 
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
 
 
波羅蜜多故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
 
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
 
 
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知
 
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
 
 
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3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해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큰 지혜로써 부처님 세계에 이르게 하는 핵심되는 진리의 말씀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관자재보살님께서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훤히 비추어 보시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으로부터 건너게 하시옵니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사리자야,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니,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
 
 
受想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도 이와 같느니라.
 
 
舍利子 是諸法空相
 
사리자야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습은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이런 연고로 공 가운데에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안이비설신의도 없으며, 색성향미촉법도 없으며,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안계 내지 의식계도 없으며,
 
 
無無明 亦無無明盡
 
무명이 없고 또한 무명이 다람도 없으며,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내지 노사가 없고 또한 노사가 다함도 없으며,
 
 
無苦集滅道 無智無得
 
고집멸도가 없고 지혜라 할 것도 없고 또한 지혜 얻음도 없느니라.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얻은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들은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罫碍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셨느니라 그런 연고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無罫碍故 無有恐怖
 
걸림이 없는 연고로 두려움도 없느니라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전도몽상을 멀리 여의고 구경에는 열반에 들어가야 하느니라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셨기 때문에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위없이 큰 깨달음을 이루셨느니라
 
 
故知 般若波羅蜜多
 
그러므로 알라. 반야바라밀다는
 
 
是大神呪 是大明呪
 
크게 신비한 주문이며 크게 밝은 주문이며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위없는 주문이며 비교할 수 없는 등급의 주문이며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능히 일체 고통을 없애주시고 진실하여 헛됨이 없느니라.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해 가로대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
 
가자가자, 저 언덕에 가자, 저 언덕에 다함께 가자,
 
 
揭諦 菩提 娑婆訶
 
깨달음을 구경에는 원만히 성취하자
 
 
 
 
이야기 산책 ① 반야는 무엇으로 바탕을 삼습니까?
 
 
조주스님께서 행각하실 때 대자환중(大慈寰中, 780~862) 스님에게 물었다.
 
"반야는 무엇으로 바탕(體)을 삼습니까?"
 
대자스님이 말하였다.
 
"반야는 무엇으로 바탕을 삼습니까?"
 
스님께서는 하하! 하고 크게 웃으며 나왔다. 다음날 스님께서 마당을 쓰는데 대자스님이 보고는 물었다.
 
"반야는 무엇으로 바탕을 삼습니까?"
 
스님께서 빗자루를 놓고 하하! 하고 크게 웃으며 가버리자, 대자스님은 방장실로 돌아갔다.
 
                                              『조주록(趙州錄)
 
 
 
 
이야기 산책 ② 인도 23조 전등
 
 
가섭과 아난이 장경을 결집하여 세상에 유통시키고 열반에 드시자, 상나화수 등 스물 한 분의 성인이 서로 이어 불법을 널리 펴서 중생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였다. 뭇 성인들의 사적은 글이 번거로우니 기록하지 않고 다만 그 이름과 법의 등불이 전한 햇수만 간략히 적어 보도록 한다.
첫째 가섭이 법의 등불 전하심은 45년이고, 둘째 아난이 법의 등불 전하심은 37년이며, 셋째 상나화수가 법의 등불 전하심은 62년이고, 넷째 우바국다가 법의 등불 전하심은 65년이며, 다섯째 제다가가 법의 등불 전하심은 49년이고, 여섯째 미차가가 법의 등불 전하심은 55년이고, 일곱째 불타난제가 법의 등불 전하심은 55년이고, 여덟째 불타밀다가 법의 등불 전하심은 48년이며, 아홉째 협존자는 법의 등불 전하기를 45년 하였는데, 『대비바사론』을 지어 삿된 견해를 꺾어 부수어 바른 종지를 붙들어 세우고 현풍(玄風)을 다시 떨쳤으며, 열번째 부나야사가 법의 등불 전하심은 60년이고, 열한번째 마명보살은 법의 등불 전하기를 56년 하였는데 『기신론』을 지어 바른 법을 다시 일으켰다. 열두번째 가비마라가 법의 등불 전하심은 58년이고, 열세번째 용수보살은 법의 등불 전하기를 57년 동안 하였다. 그는 처음엔 바라문이었다가 뒤에 불교를 믿었다. 코가 청정해짐을 얻어 큰 바다에 들어가 『화엄경』을 냄새로 맡아 가지고 나와 세상에 퍼뜨렸으며, 『대지도론』을 설하여 『반야경』을 풀이하였다.
열네번째 가나제바가 법의 등불 전하심은 51년이고, 열다섯번째 라후라다가 법의 등불 전하심은 48년이며, 열여섯번째 승가난제가 법의 등불 전하심은 39년이고, 열일곱번째 승가야사가 법의 등불 전하심은 61년이며, 열여덟번째 구마라타가 법의 등불 전하심은 34년이고, 열아홉번째 사야다가 법의 등불 전하심은 43년이고, 스물한번째 학륵나가 법의 등불 전하심은 44년이고, 스물세번째 사자(師子)존자가 법의 등불 전하기를 50년 동안 하였다.
 
                                              『석가여래행적송』
 
 
 
이야기 산책 ③ 무엇하시려고 기왓장을 갑니까?
 
어느날 남악선사(南嶽禪師)가 전법원(傳法院)에 갔다. 그곳에는 온종일 좌선하는 마조도일(馬祖道一)스님이 있었다. 남악스님은 마조스님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물었다.
"뭣 땜에 참선하는가?"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남악스님은 그 말을 듣고 기왓장을 하나 주워와서 마조스님 옆에 가서 돌 위에 기왓장을 갈기 시작했다. 마조스님이 그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돌에 기왓장을 갈고 있는 남악스님에게 물었다.
"무엇하시려고 기왓장을 갑니까?"
"음, 거울 만들려고"
그 말에 마조스님은 웃었다.
"기왓장으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이때 남악스님의 눈이 번쩍했다.
"그래,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좌선을 해서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마조스님은 한 방망이 맞고는 가슴이 덜컹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소 수레와 같다. 수레가 가지 않으면 소를 때려야 엃은가,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이 말을 들은 마조스님은 아무말도 못하고 서있었는데 남악스님이 최후의 일침을 가했다.
"그대가 좌선을 하여 부처가 되고자 하니 내가 충고하건데, 선(禪)은 이 좌(坐, 앉아 있는 것)가 아니요, 부처는 이 말뚝처럼 그저 가만히 꽂혀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가지고 저것은 버리는 선택의 마음이 있다면 부처는 커녕 부처 그림자도 못 찾는다. 이 도리는 오직 스스로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물을 먹어 봐야 맛을 아는 것이니 말해 주긴 어렵도다"
이 말에 마조스님의 긴 여행은 끝났다.
 
                                              『마조록(馬祖錄)』
 
 
 
이야기 산책 ④ 여기까지 이렇게 왔습니다.
 
효봉선사가 젊었을적에 금강산의 석두스님을 찾아가 절을 하고 말했다.
"석두 큰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어디서 왔는가?"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몇걸음에 왔는가?"
이에 효봉선사는 벌떡 일어나 큰방을 한바퀴 잽싸게 돌고는 말했다.
"이렇게 왔습니다"
 
                                                   『선의 세계
 
 
 
 
이야기 산책 ⑤ 불생불멸의 도리
 
조주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법이란 본래 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말을 꺼냈다하면 나는 것이요, 말을 하지 않으면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할 것도 없으니, 여러분은 무엇을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도리라고 하겠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벌써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음이 아닙니까?"
"이 놈이 그저 죽은 말만 알아듣는구나"
 
                                                     『조주록(趙州錄)
 
 
육근(육내처)               육경(육외처)
 
① 안처(眼處) ------------ ⑦ 색처(色處)
② 이처(耳處) ------------ ⑧ 성처(聲處)
③ 비처(鼻處) ------------ ⑨ 향처(香處)
④ 설처(舌處) ------------ ⑩ 미처(味處)
⑤ 신처(身處) ------------ ⑪ 촉처(觸處)
⑥ 의처(意處) ------------ ⑫ 법처(法處)
 
 
육근(육내처)    육경(육외처)       육식
 
① 안근(眼根) - ⑦ 색경(色境) = ⑬ 안식(眼識)
② 이근(耳根) - ⑧ 성경(聲境) = ⑭ 이식(耳識)
③ 비근(鼻根) - ⑨ 향경(香境) = ⑮ 비식(鼻識)
④ 설근(舌根) - ⑩ 미경(味境) = 16 설식(舌識)
⑤ 신근(身根) - ⑪ 촉경(觸境) = 17 신식(身識)
⑥ 의근(意根) - ⑫ 법경(法境) = 18 의식(意識)
 
 
이야기 산책 ⑥ 저에게는 눈 · 귀 · 코 · 혀 등이 있는데
 
동산스님의 휘(諱)는 양개(良价)이며, 회계(會稽) 유씨(兪氏) 자손이다. 어린 나이에 스승을 따라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우다가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라는 대목에서 홀연히 얼굴을 만지며 스승에게 물었다.
"저에게는 눈 · 귀 · 코 · 혀 등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반야심경』에선 없다고 하였습니까?"
그 스승은 깜짝 놀라 기이하게 여기며, "나는 그대의 스승이 아니다" 라고 하더니 즉시 오설산(五洩山)으로 가서 영묵선사에게 머리를 깎으라고 가르쳐주었다.
 
『조동록(曹洞錄)』
 
 
이야기 산책 ⑦ 바보 지팡이
 
옛날 어떤 사람이 자식 하나를 두었는데 어떻게나 미련하던지 일을 시킬 수 없을 정도로 바보짓만 연속해 하였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오늘은 아침 먹고나서 장에 좀 갔다 와야겠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밥을 먹고나서 바로 없어졌다. 정오가 훨씬 넘어서 비실비실 걸어와서 아버지께 인사햇다.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어디를 다녀왔느냐?"
"장에를 다녀왔습니다"
아버지는 너무나도 기가 막혀 우두커니 섰다가 옆에 있던 지팡이를 집어주며,
"얘야, 이 세상에서 너보다 더 못난 사람을 만나거든 이것을 주어라"
바보는 매일 그것을 짊어지고 와서 자기 집에다가 세워 놓고 나무를 하러 다녔다. 하루는 나무를 해 가지고 오니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왜 우십니까?"
"아버지가 다 죽게 되었다"
아들이 숨을 헐떡거리는 아버지를 보고 물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이제 저 세상으로 가려고 그런다"
"저 세상이 어딘데요?"
"모르겠다 가보아야지"
"며칠이나 걸리며, 노자는 몇 푼이나 듭니까?"
"모르겠다"
"지금 가시면 언제쯤 돌아오십니까?"
"그것도 모르겠다"
아무리 물어도 모두 다 모르겠다고만 한다. 바보는 곧 방으로 가서 세워 놓았던 지팡이를 가지고 와서 말했다.
"아버지 이것 받으세요"
"뭐냐?"
"바보 지팡이요. 이 세상에서 아버지보다 더 바보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고는 지팡이를 아버지의 손아귀에 꼭 쥐어드렸다.
 
                                                             『비유경
 
 
이야기 산책 ⑧ 오동잎 떨어지니 온 천하가 가을이로세
 
동산(東山, 1890~1965) 선사는 충청북도 단양군 사람으로 속성은 하(河)씨이다. 29세때 범어사 용성(龍城)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1965년 4월 범어사에서 세수 76세, 법랍 53세로 입적하였다.
태국의 승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동산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번 제가 당신 나라에 갔을 때 멋진 선물과 후대를 해주셨소. 오늘은 제가 선물을 드리겠소"
그리고 동산 선사는 돌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자가 보입니까?"
"예"
"그럼 사자의 울음소리가 들립니까?"
태국에서 온 승려는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때 동산 선사가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선물할 것은 그것뿐입니다"
 
                                                 『선문선답(禪問禪答)』
 
 
 
이야기 산책 ⑨ 불씨를 구하는 여인
 
부처님께서 한 마을을 가고 있을 때 멀리 한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여인은 머리칼이 구겨지고, 눈에는 슬픔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여인은 부처님에게 다가와 품에 쓰러져 울었다.
"부처님이시여, 저의 아들이 오늘 아침에 죽었습니다. 저에게는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식입니다. 저는 이제 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어떻게 자식을 다시 살아오게 할 수는 없을까요?"
여인의 흐느낌이 부처님의 가슴을 흔들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지나간 숱한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 여인을 생각하며 이 여인의 마음속에 박혀 있는 아들을 생각햇다.
"그대 아들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사람이 죽은 일 없는 집을 찾아 그 집의 불씨를 구해오십시오"
여인은 희망을 안고 부처님을 떠나 불씨를 구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찾아다녔다.
"지금껏 한번도 사람이 죽지 않은 집, 어느 집입니까?"
그러나 찾아간 집마다 문들이 쓸쓸히 닫혔다. 여인은 네거리로 달려가서 지나는 사람마다 옷깃을 잡았다.
"당신 집에 사람이 죽지 않은 일 있습니까?
사람들은 여인에게 실망을 안겨 주고 떠나갔다. 여인은 기진하여 부처님에게 와서 말을 했다.
"그런 집은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부처님은 여인의 머리칼을 만져주면서 말하셨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어둠만이 그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석가여래행적송』
 
 
 
이야기 산책 ⑩ 불이야, 불이야
 
 
경허(鏡虛)스님의 긴 옷자락이 밤바람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갈지(之)자 걸음은 고요로 덮여 가는 마을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웬 녀석이 이 밤중에 소란을 피우는 거야"
마을의 젊은이들은 화가 나서 팔을 걷어붙이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스님이 술에 고래가 되어 비틀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경허스님은 우악스러운 젊은이들에게 붙들려 몰매를 맞고 골방 깊숙이 갇혀 버렸다. 경허스님을 가둔 젊은이들은 인간내부에 묻혀 있던 잔인성의 표출로 하여 뜨겁게 달아오르는 마음을 짓누르며 돌아갔다. 얼마후 경허스님을 덮고 잇던 취기는 말끔히 가셔 버리고 경허스님의 마음에는 초롱초롱한 반짝이뿐이었다. 그 반짝임이 어둠을 영롱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불이야, 불이야"
잠으로 깊어 가는 마을을 두드려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저마다 손에 갈쿠리 혹은 곡괭이를 들고 불이 난 곳을 향하여 달려갔다. 헐떡이며 달려온 그들의 앞에는 아까 술이 곤드레 만드레 되어 몰매를 맞던 경허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서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불이 난 거요?"
늙은이 하나가 성급하게 뛰어나왔다. 경허스님은 떡 벌어진 자기 가슴을 치며 껄껄 웃었다.
"요 속에서 불이 났소. 몹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소"
 
                                                     『경허짐(鏡虛集)』
 
 
 
이야기 산책 ⑪ 아프냐 안아프냐?
 
어느날 신회(神會)라는 한 동자(童子)가 혜능대사가 머물고 있는 옥천사(玉泉寺)에 찾아왔다. 혜능대사가 물었다.
"네가 먼 곳에서 고생하며 왔으니 근본은 가지고 왔느냐? 만약 근본이 있다면 곧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 것이다. 말해 봐라"
"머무름 없는 것으ㅡ로 근본을 삼으니 보는 것이 바로 주인입니다"
"이놈, 왜 이런 경솔한 말을 하는가?"
혜능대사가 눈을 부릅뜨고 주장자(拄杖子)로 세 번 때리며 말하니 신회가 되물었다.
"스님께서는 좌선하실 때 보는 것이 있습니까?"
"내가 너를 때렸으니 아프냐, 안 아프냐?"
"아프긷 하고 안 아프기도 합니다"
"낟 보기도 하고 안 보기도 하느니라"
"어떤 것을 보기도 하고 안 보기도 하는 것입니까?"
"내가 보는 것은 내 마음의 허물이요, 보지 않는 것은 타인의 시비나 좋고 나쁜 것이다. 이 때문에 보기도 하고 안 보기도 하는 것이다. 너는 아프기도 하고 안 아프기도 하다고 했는데, 네가 아프지 않다면 목석이요, 아프다면 범부(凡夫)의 생각이니 화가 치밀 것이다. 너는 아직 마음을 보지 못하고도 그런 희롱을 하느냐"
 
                                             『돈황본단경(敦煌本壇經)』
 
 
이야기 산책 ⑫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도둑놈
 
김씨의 사랑채는 잔칫날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 같았다. 마침 이곳을 지나던 만공(滿空)스님은 김씨댁을 두드렸다. 이 집 주인은 평소 만공스님을 찾아와 법문을 듣던 일이 있는 불자였다.
"만공스님 오셨다!"
사랑채에서 우글거리던 선비들은 도인(道人)이 오셨다는 말에 바둑판과 골패짝을 집어던지고 너도 나도 만공스님을 한 가운데로 하고 빙 둘러앉았다.
사랑채는 잠시 긴장이 감돌았다. 만공스님을 둘러싼 유생(儒生)들의 눈은 저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득했다. 이윽고 만공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다. 만공스님의 음성은 쩌렁쩌렁 대들보를 흔들며 그들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이 세상에는 제일 큰 도둑놈이 있소. 어떤 자가 제일 큰 도둑놈이냐 하면, 담을 넘어서 남의 집 물건 훔쳐 가는 놈은 좀도둑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밤낮으로 골패나 치며 놀고 먹는 놈들이야 말로 제일 큰 도둑놈이오. 보시오. 농부들은 일년내내 전가족이 피땀을 흘려가며 농사를 지어도 이듬해 봄이 되면 양식이 없어 나무뿌리를 캐먹는데, 하물며 아무 것도 않고 게다가 놀고 먹는 이 양반부스러기야 말로 도둑 중에서도 제일 큰 도둑이오"
좌중은 물 끼얹은 것 같았다. 이 말에 누구 하나 감히 입 벌리는 자가 없었다.
 
                                                     『선의로 가는 길』
 
 
이야기 산책 ⑬ 오직 부처되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
 
홍인화상께서 혜능에게 묻기를
"너는 어느 곳 사람인데 이 산에까지 와서 나를 예배하며, 이제 나에게서 새삼스레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셨다.
혜능이 대답하기를
"제자는 영남사람으로 신주의 백성입니다. 지금 짐짓 멀리서 와서 큰스님을 예배하는 것은 다른 것을 구함이 아니옵고 오직 부처되는 법을 구할 뿐입니다." 하였다.
오조대사께서 혜능을 꾸짖으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영남사람이요 또한 오랑캐거니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혜능이 대답하기를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지 않사오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오조스님은 함께 더 이야기하고 싶었으니, 좌우에 사람들이 둘러서 있는 것을 보시고 다시 더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혜능을 내보내어 대중을 따라 일하게 하시니, 그때 혜능은 한 행자가 이끄는 대로 방앗간으로 가서 여덟달 남짓 방아를 찧었다.
 
 
                                             『돈황본단경(敦煌本壇經)』
 

 

 

 

 

 

 

 

 

 

 

 

 

 

 

 

 

posted by 황영찬
2016. 8. 16. 08:24 내가 읽은 책들/2016년도

2016-012 롬멜 MYTHOS ROMMEL

 

마우리체 필립 레미 지음 | 박원영 옮김

2003, 생각의 나무

 

총통의 공격 명령을 어기고 수십만 부하의 목숨을 구한, '위대한 퇴각'을 감행한 총사령관 롬멜

그는 증오해야 마땅한 확실한 나치였나, 아니면 히틀러에 저항한 영웅이었나?

인간에 내재된 모순과 악, 그에 맞서 변화하는 내면을 보여주는 심리 드라마

 

마우리체 필립 레미Maurice Philip Remy


독일 뮌헨 출생. 가장 성공적인 유럽 다큐멘터리필름 제작자로 손꼽히는 그의 작품들은 그 강렬함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는 <베른슈타인 침머Bernsteinzimmer에 관한 기록>, <망명보트 빌펠름 구스틀로프Wilhelm Gustloff>', <러시아 황녀 아나스타샤>, <바티칸 시리즈 - 교황의 권력> 등이 있으며, 1995년에서 1998년까지 작가 겸 감독으로 <히틀러 - 그 결과와 조력자들>이라는 시리즈물을 기획, 제작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최근 작품인 ‘홀로코스트’에 관한 6부작은 36개국에서 방영되었다. 독일 ARD 방송국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필름 <롬멜 신화>의 감독이었던 그는 이 책에서 충분한 자료조사와 분석을 통해 인간 롬멜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그는 육군원수인 롬멜이 단지 히틀러의 단호한 명령에 복종하는 삶을 택한 것이 아니라. 그 독재자에 대항해 저항세력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옮긴이 박원영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및 동대학원 독문학 석사를 졸업했으며 독일 예나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독문학을 수학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옮긴 책으로는 여러 권의 아동책을 포함해 『행복을 주는 지혜』, 『남녀관계에 유익한 108가지 이야기』, 『아름다운 이웃, 동식물의 신비』, 『나무의 힘』 등이 있다.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영예로운 일이 아닐 때, 그는 신임을 잃는 길을 택했다."

- 프리드리히 아돌프 폰 데어 마르비츠의 기념관에서

 

"권력은 파괴한다. 즉 모든 권력은 모두 파괴한다."

- 유교 명언

【"롬멜은 그저 우리들과 함께 하는 게 아니었다. 그 역시 국가사회주의자였던 것이다"

롬멜에 대한 히틀러의 한마디, 1941년, 베를린

 

차례

 

MYTHOS ROMMEL 롬멜

 

서문 다시 쓰는 롬멜 신화

1장 신화의 시작 - 전진 또 전진

2장 '사막의 여우', 롬멜 - 반전에 반전

3장 나치의 장군으로 - 총통과의 악수

4장 명령에 복종할 것인가 - 위대한 퇴각

5장 여우 사냥 - 현실주의자의 패배

6장 작전명 '알라리히' - 이탈리아에서의 막간극

7장 헛된 믿음 - 롬멜의 회의

8장 추악한 진실이 드러나다 - 비밀작전의 시작

9장 히틀러를 포기할 수 없다 - 최후 통첩

10장 또 다른 진실 - 거짓 의식

후기 진정한 영웅 롬멜

 

원주

참고 자료

 

"롬멜은 우리가 증오해야 마땅한 나치였나, 아니면 히틀러에 저항한 영웅이었나?"하는 문제도 역사를 잘 들여다보면 둘 중 어느 것이 정답인지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롬멜은 분명한 나치이자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도자적인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부대원들을 자신에게로 끌어 들이는 능력이 있는데, 이것은 이성적으로는 설명하기 곤란한 힘입니다."

【청교도적인 집안 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평범한 사관후보생 시절  형제 자매들과 함께, 1910

【도둑맞은 푸어 르 메리테 훈장을 되찾다 1917

【집에서는 자상한 남편】 루시에 롬멜과 함께, 1916, 단치히

【결혼 12년 만에 얻은 아들】 아들 만프레트, 1931, 드레스덴

【충실한 아내, 좋은 아빠】 1932, 드레스덴

【고슬라를 방문해 군대를 사열하는 히틀러】 히틀러의 왼쪽에 있는 사람이 롬멜이다. 1934. 9. 30

 【전술교사가 되다】군사 학교의 사령관과 함께(오른쪽이 롬멜), 1938, 포츠담

【"롬멜은 절대 나치가 아니야"】 1938, 포츠담

【'총통'의 특별 열차를 타고】 1939. 9. 폴란드

【무한한 자긍심에 차서】 승리의 퍼레이드, 1940. 6. 20, 파리

 

히틀러는 이제 롬멜이라는 패를 들 수 있었다. 그는 울리는 목소리로 계속했다. "우리는 행복하다. 이제 우리의 롬멜 대장이…… 그의 용맹스런 이탈리아-독일 전차 부대와 기계화 사단을 이끌고 적군이 그를 무찔렀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에 재빨리 선회해서 적군을 다시 밀어냈다."

【선전을 위해 차량을 밀다】 1941, 연출사진

【명령을 어기고 단독으로 감행한 공격】 1941.4, 키레나이카

【격렬한 전투를 지켜보며】 1941. 4, 토브룩

【의기양양한 분위기 속에서】 독일과 이탈리아 장교들과 함께(가운데 앉은 이가 롬멜), 1941. 11

【'희망의 빛' 롬멜과 히틀러】 1942. 3. 18

【사막의 롬멜】 1942. 6, 비르 하차임

【"그래도 전쟁은 계속된다"】 차에 서 있는 사람 중 왼쪽이 롬멜, 1942. 6. 21, 로브룩

【육군 원수로 영전될 무렵의 롬멜】 1942. 6. 22, 토브룩

 

"롬멜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확고한 세계관을 가진 그는 우리 국가사회주의자들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도 국가사회주의자이다. 그는 임기응변에 능한 군 지휘자이며 용감하고 매우 창의적인 인물이다. 그런 군인이 필요하다. 롬멜은 군 총사령관이 될 것이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1942.6. 마르사 마트루

【"나는 롬멜을 무찔렀다"】 몽고메리(중간)와 처칠(왼쪽), 사막에서, 1942. 8

【"확고한 세계관으로" 제국 의회에서 원수 계급장을 받는 롬멜, 1942. 10. 1. 베를린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경험 중에서 단 한 가지 실수를 고백하자면 그것은 바로 내가 '승리가 아니면 죽음'이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24시간 동안 거역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딸 게르트루트의 방문 1942. 10, 비너 노이슈타트

【"전쟁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 퇴각하면서, 1942. 11

【해결책은…… 후퇴뿐】 1942. 11. 리비아

 

"그는 독일 시민 전쟁의 승리라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그는 히틀러에게서 등을 돌렸어요. 그리고는 이 가망 없는 전쟁을 하루 빨리 끝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지요……"

 

【케셸링의 모략 케셸링(오른쪽)은 롬멜에게 솔직하지 않았다. 1942. 11

【마차 기병대의 늙은 말차럼……】 카셰리네 도로로 가는 길에서, 1942. 2.  튀니지

 

"원수님, 이제 어느 쪽을 끝내야 할지 생각해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동쪽? 아니면 서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롬멜은 "글쎄, 동쪽은 절대 아니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때 롬멜이 독일의 이런 희망 없는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으로 연합국과의 단독 강화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암시되었다.

【깊은 우울증에 빠져】 히틀러의 사진사인 발터 프렌츠(Walter Frentz)가 찍은 초상, 1943

【히틀러가 정상이 아니야】 총통 지휘 본부에서, 1942. 여름

【그리스이 롬멜】 1943. 7. 25. 살로니키

【이탈리아에서의 막간극】 무솔리니와 함께, 1943. 10. 살로

 

그러나 그 당시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도 롬멜을 더 괴롭혔던 것은 독일이 처한 상황이었다. 그는 현실ㅈ의자로서 다른 대부분의 독일 장교들보다도 먼저 곧 닥쳐올 패배를 예감하고 있었다.

【"한 명의 사단장만도 못해"】 롬멜에 대한 룬트슈테트의 평가(왼쪽), 1944. 파리

【"모든 것을 집결시켜 전투에 투입하라"】 대서양 방벽에서, 1944. 1

【롬멜의 과도한 욕심】 1944. 4

【마지막 기대감】 콘크리트 장애물을 점검하는 롬멜, 1944. 3

【전쟁에 패하다】 최후의 승리를 의심하다

【헛된 믿음】 마이젤(Meisel) 장군과 함께, 1944. 4. 노르망디 해안

【매우 심각한 상황】 시찰 여행에서 랑, 루게, 슈파이델과 함께(왼쪽부터, 오른쪽 끝이 롬멜), 1944. 5

 

슈파이델은 나중에 "롬멜이 괴르델러의 생각에 반박하였고, 자신은 히틀러를 순교자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그 계획, 즉 국가의 원수이자 국방군의 최고 사령관을 살해하는 일은 그 시점의 롬멜에게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그너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으며 이를 절대 누설하지 않았다. 비밀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국가의 기본 토대는 정의여야 한다"】 루시에와 함께, 1944. 2, 헤어링엔

【"나의 정치적 입장은 롬멜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한스 슈타이델과 함께, 1944. 5.

【연합군 상륙 전날의 휴가】 아내의 생일을 맞아 가족과 함께, 1944. 6. 5

 

"독일은 전쟁에 패했다. 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을 총통이 깨달아야 한다. ……이제 총통이 물러나야 할 시간이 왔다. 그는 무질서한 정치와 독단적인 군사 개입으로 독일 국민을 나락으로 빠지게 했다. 우리는 이제 평화 조약을 맺어야 한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목슴을 잃고 모든 것이 파괴되어 폐허로 변한다. 이것은 바로 범죄이다."

 

【"확실한 상황을 밝혀라"】 노르망디의 영국군, 1944. 6. 6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1944. 6. 7. 오마하 해변

【라 로셰-기용 성】 롬멜이 산책하던 성 뒷편 숲길

【전쟁을 끝마쳐야 해】 블루멘트리트, 슈파이델, 롬멜, 룬트슈테트(왼쪽에서 오른쪽으로), 1944. 6. 26, 라 로셰-기용

【영국군과 싸워 본 경험이 없는 장군】 한스 귄터 폰 클루게 원수

【"나는 롬멜에게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케사르 폰 호프아커

【"긴급 시에는 디트리히를 믿어도 되겠어"】 제프 디트리히(중간), 1944. 7. 17

【적 전투기의 공격을 받다】 저공 공격을 받은 롬멜의 군용차, 1944. 7. 17

 

확실히 롬멜의 "마음은 총통을 향해 있었다."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양심에 위반되는 히틀러의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힘가 용기를 모아 계속 그에 반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이 더더욱 중요하며 그것이야말로 에르빈 롬멜의 또 다른 진실이다.

 

【왼쪽 눈꺼풀이 마비 된 채로……】 르 베시네 군 병원에 있을 당시의 롬멜, 1944. 7

【임종 후의 모습】 마지막까지 히틀러의 명을 따르다

【"그의 마음은 총통을 향해 있었다"】 추도사를 읽는 룬트슈테트, 1944. 10. 18. 울룸

 

 

 

 

posted by 황영찬
2016. 8. 10. 09:33 내가 읽은 책들/2016년도

2016-011 한나 아렌트의 말 -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한나 아렌트 | 윤철희 옮김

2016, 마음산책

 

마침내 숨결을 허락한 긴장감 어린 텍스트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생생한 목소리

 

상당히 오랫동안 아렌트의 저술들을 손에서 놓지 않고 지냈지만 그녀의 책은 항상 긴장감을 갖고 읽어야 하는 난해한 텍스트였다. 내로라하는 영어 실력자들도 종종 오역을 만들어내는 그녀의 길고 정교한 문장들은 그녀의 숨결을 느끼도록 결코 허락하진 않았다. 이렇게 묶여 출판되는 네 편의 인터뷰는 비록 글로 이루어진 것이긴 해도 마치 아렌트와 직접 대화를 나누듯 그녀의 사상 속에 담긴 숨결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 무척 반갑다. 아렌트 생각의 중요한 문제들을 해명하고 또 새로운 면을 드러내고 있어서, 아렌트를 보다 생생하게 그리고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해준다.

 

김선욱 숭실대 철학과 교수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독일 태생의 유대계 미국 정치이론가. 1906년 독일 하노버(당시 독일제국 린덴)에서 태어났다. 철학이 단독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통찰에서 시작한다는 점 때문에 철학자로 불리길 거부하고 세계 안에서 관계 맺고 살아가는 인류를 주목해 정치이론가를 자처했다.
칸트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은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와 베를린에서 유대인보다는 독일인에 가까운 정서를 지니고 자랐지만 성인이 되어 반유대주의를 접하고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자각했다. 청소년기 선생님에게 반항하여 퇴학을 당했지만 1924년 마르부르크대학에 들어가 철학과 신학, 그리스어를 공부했고, 이 시기 스승이던 마르틴 하이데거와 깊이 교류하다 얼마간 연인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하이데거의 나치 동조 전력 때문에 훗날 고초를 겪기도 했다. 뒤에는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실존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를 사사했다.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만난 귄터 슈테른과 1929년 결혼해 베를린에서 신문기자로 일하지만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 게슈타포에 체포돼 일주일간 감금당했고 유대인 박해 속에서 파리로 망명, 그곳에서 반나치 운동과 유대인 피난을 도왔다. 1937년에는 첫 남편과 이혼을 했으며 같은 해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1940년 독일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시인 하인리히 블뤼허와 재혼했는데 그즈음 독일의 프랑스 점령과 비시정부의 유대인 탄압으로 위기가 고조되자 1941년 미국 뉴욕으로 다시 한 번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학계와 언론에 공헌하며 더는 적籍이 바뀌는 일 없이 미국 시민으로 살았다.
지은 책으로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8) 『과거와 미래 사이』(1961) 『혁명론』(1963)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1968) 『공화국의 위기』(1972) 등이 있다.
1975년 12월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마지막까지 해로했던 하인리히 블뤼허 곁에 묻혔다.

 

옮긴이 윤철희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영화 전문지에 기사 번역과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캐스린 비글로』 『스탠리 큐브릭』 『알코올의 역사』 『런던의 역사』 『위대한 영화1, 2』 『히치콕』 『지식인의 두 얼굴』 『제임스 딘』 『클린트 이스트우드』 『로저 에버트』 『에퀴아노의 흥미로운 이야기』 등이 있다.

 

차례

 

해제 | 아렌트 숨결이 깃든 대화록

 

무엇이 남아 있느냐고요? 언어가 남아 있어요

아이히만은 터무니없이 멍청했어요

정치와 혁명에 관한 사유 - 하나의 견해

마지막 인터뷰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혁명가는 길거리에

권력이 떨어져 있는 것이 언제인지를 알고,

그걸 집어 들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사람이에요.

 

미국에서, 1944

<추어 페르손>에 출연한 한나 아렌트의 모습(1964)

파리 망명 후 2년 뒤의 모습(1935)

미국에서, 1944

아이히만 재판 중 대중의 주목을 촉구하는 이스라엘 측 검사 기드온 하우스너(1961)

파리로 망명하던 해의 한나 아렌트, 1933

젊은 시절의 한나 아렌트, 연도 미상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이 열린 예루살렘 법정의 모습(1961)

재판을 받는 아돌프 아이히만(1961)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처음 연재된 〈뉴요커〉 표지와 연재면(1963)

미국으로 망명하던 해의 한나 아렌트. 1941

베를린공과대학에서 학생들이 독일의 긴급조치법 채택에 반대하던 모습(1968)

남편 하인리히 블뤼허와 함께. 1961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하면서 새로 설정된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선 오데르-나이세 라인. 동독과 달리 서독은 1970년까지 이 선을 인정하지 않아 소련 등 동구권과 마찰을 빚었다.

말년의 한나 아렌트. 1975

웨슬리언대학교 재직 시절. 1960년대 초

『전체주의의 기원』(1951)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한나 아렌트 사후 독일에서 발행된 우표(1968)

 

 

 

 

posted by 황영찬

2016-010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1916-1956

 

이중섭 지음 | 박재삼 옮김

2013, 다빈치

 

이중섭의 삶과 사랑 그리고 예술

일제 강점기 암흑 시대를 거쳐 전쟁으로 이어진 끊임없는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화가 이중섭.

그는 한 시대에 못 박힌 순교자였다.

그가 세상을 등진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를 등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진정 세상을 떠나간 것이 아니라 오고 있는 것이다.

이 서간집을 통해 우리는 더 이상은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닌 정직한 화공 이중섭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편지들은 가장 어려웠던 시절, 이중섭이 아내 남덕과 교환한 삶의 편린들이다.

퍼즐처럼 두 사람의 진솔한 삶의 궤적을 맞추어보면 그 모습은 다름 아닌 그 시대 우리들의 자화상임을 엿보게 될 것이다.

 

정직한 화공 이중섭李仲燮 1916-56

암흑의 시대에 불꽃처럼 치열한 삶을 살다간 화가 이중섭.

그는 한 아내의 남편이었으며 두 아이의 아버지였고 무엇보다도 정직한 화공이었다.

그에게도 모든 것이 어린잎의 새순처럼 뻗어나가던 순수의 시절이 있었다. 아름다운 그 시절, 그는 숙명처럼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폭풍우 같은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그의 영혼은 소를 통해 민족적인 것에 바쳐졌다. 그는 이미 한국인의 정서 깊숙이 자리 잡아, 그를 일컬어 어떤 이는 민족 화가 또 어떤 이는 국민 화가라고도 하기도 한다.

소를 그린 화가로 알려진 그는 분노한 소를 통해 압박받는 우리 민족의 자화상을 그렸으며 그 모습은 또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기도 했다.

 

옮긴이 박재삼朴在森 1933-97

193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경남 삼천포에서 성장하였으며, 고려대학교 국문과를 중퇴했다.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정적靜寂" 시조 "섭리攝理"가 추천되어 등단했고, 시집으로 『춘향이 마음』(1962), 『천년의 바람』(1975), 『허무에 갇혀』(1993) 등이 있다. 1997년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김소월로부터 발원돼 미당 서정주로 승계된 한국 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이어나간 노래꾼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의 말

 

이중섭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 이 시는 1951년 봄 피난지이던 제주도 서귀포 이중섭의 방에 붙어 있던 것을 조카 이영진 씨가 암송하여 전 한 것입니다.

돌아오지 않는 강 1956년 종이에 연필과 유채 20.2×16.4cm

 

내가 만난 李仲燮

 

金春洙

 

光復洞에서 만난 李仲燮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南浦洞 어느 찻집에서

李仲燮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東京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은종이 그림

 

李仲燮

 

金春洙

 

西歸浦의 남쪽,

바람은 가고 오지 않는다.

구름도 그렇다.

낮에 본

네 가지 빛깔을 다 죽이고

바다는 밤에 혼자서 운다.

게 한 마리 눈이 멀어

달은 늦게 늦게 뜬다.

아내는 毛髮을 바다에 담그고,

눈물은 아내의 가장 더운 곳을 적신다.

 

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차례:

 

1_ 나의 소중한 특등으로 귀여운 남닥

 

연인 - 사랑의 그림엽서들

 

2_ 나의 사랑하는 소중한 아고리

 

3_ 나의 영리하고 착한 아들 태현, 태성

 

이중섭의 삶과 사랑 그리고 예술

 

연보

서귀포의 환상 1951년 나무판에 유채 56×92cm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 1951년 나무판에 유채 41×71cm

종이에 유채 28×40cm

물고기와 아이들 종이에 유채 22.5×17cm

가족과 어머니 1953-54년으로 추정 종이에 유채 26.5×36.5cm

사나이와 아이들 종이에 연필과 유채 39.5×48cm

닭과 가족 종이에 유채 36.5×26.5cm

도원 1954년 종이에 유채 65×76cm

가족과 비둘기 1956년 무렵 종이에 유채 29×40.3cm

춤추는 가족 종이에 유채 22.7×30.4cm

세 사람 종이에 연필 18.2×28cm

봄의 어린이 종이에 유채 32.6×49cm

호박 종이에 유채 40×26.5cm

호박꽃 종이에 유채 61×97cm

황소 1953년 무렵 종이에 유채 32.3×49.5cm

싸우는 소 종이에 유채 17×39cm

흰 소 종이에 유채 30.5×41.3cm

사계 종이에 연필과 유채 19.8×20.3cm

1954년 종이에 유채 18.4×32.5cm

사계 종이에 유채 26.5×36.5cm

달과 까마귀 1954년 종이에 유채 29.4×41.5cm

종이에 유채 27.5×41.5cm

부부 종이에 수채오ㅘ 크레파스 19.3×26.5cm

부인에게 보낸 편지 종이에 잉크와 색연필

투계 1954년 무렵으로 추정 종이에 유채 29×42cm

부부 1953년 무렵 종이에 유채 51.5×35.5cm

환희 1955년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29.5×41cm

흰 소 1954년 무렵 나무판에 유채 30×41.7cm

충렬사 풍경 1954년 종이에 유채 41×29cm

초가가 있는 풍경 종이에 유채 41.5×29.5cm

나무와 달과 하얀 새 1956년 종이에 크레파스와 유채 14.7×20.4cm

해변의 가족 종이에 유채 28.5×41.2cm

나무 위의 노란 새 1956년 종이에 유채와 크레파스 14.7×15.5cm

성당 부근 1955년 종이에 유채 34×46.5cm

판잣집 화실 종이에 수채와 잉크 26.8×20cm

물고기와 노는 두 어린이 종이에 유채 41.8×30.5cm

물고기, 게와 노는 네 어린이 1951년 무렵 종이에 유채 36×27cm

파란 게와 어린이 종이에 유채 30.2×23.6cm

길 떠나는 가족 1954년 종이에 유채 29.5×64.5cm

가족에 둘러싸여 그림을 그리는 화가 은종이에 유채 10×15cm

그리운 제주도 풍경 1954년 전후로 추정 종이에 잉크 35×24.5cm

구상네 가족 1955년 종이에 연필과 유채 32×49.5cm

동촌 유원지 종이에 유채 19.2×26.5cm

돌아오지 않는 강 1956년 종이에 연필과 유채 20.2×16.4cm

연인 1940-1943년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그려 보낸 사랑의 그림엽서들

반우반어 1940년 말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9×14cm

말과 소를 부리는 사람들 1941년 3월 30일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9×14cm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 1941년 4월 2일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9×14cm

두 마리 사슴 1941년 4월 24일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9×14cm

두 마리 동물 1941년 5월 20일 종이에 과슈와 잉크 9×14cm

나뭇잎을 따려는 여자 1941년 5월 15일 종이에 수채와 잉크 9×14cm

나뭇잎을 따주는 남자 1941년 5월 16일 종이에 수채와 잉크 9×14cm

소와 여인 1941년 5월 29일자 소인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9×14cm

야수를 탄 여자 1941년 6월 2일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9×14cm

누워 있는 여자 1941년 6월 3일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9×14cm

바닷가 1941년 6월 12일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9×14cm

바닷가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9×14cm

말 탄 남자를 뿔로 쳐내는 소 1941년 6월 13일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9×14cm

날아오르는 여자 1941년 6월로 추정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9×14cm

토끼풀 1941년 6월 19일 종이에 수채와 잉크 9×14cm

토끼풀 1941년 6월로 추정 종이에 수채와 잉크 9×14cm

서커스 1941년 7월 4일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9×14cm

저울질하는 사람 1941년 7월 7일 종이에 수채와 잉크 9×14cm

물놀이하는 아이들 1941년 9월 9일 종이에 수채와 잉크 9×14cm

해를 불평하는 사람 1941년 9월 22일 종이에 크레용과 잉크 9×14cm

연꽃밭의 새와 소년 1941년 9월 28일 종이에 크레용과 잉크 9×14cm

바닷가에서 물새와 노는 소년들 1941년 10월 21일 종이에 잉크 9×14cm

새해 인사 1942년 1월로 추정 종이에 수채와 잉크 9×14cm

사람을 치는 소 1942년 8월 8일 종이에 잉크 9×14cm

사랑 1955년 은종이에 유채 15×10cm

1952년 무렵 추정 은종이에 유채 8.5×15cm

게와 물고기가 있는 가족 은종이에 유채 8.5×15cm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 종이에 수채 23×20cm

다섯 어린이 종이에 수채 23.5×17.5cm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한 그림 종이에 잉크와 색연필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종이에 먹과 수채 53.5×26.5cm

해와 아이들 종이에 연필과 유채 32.5×49cm

두 어린이와 사슴 종이에 수채 17×24cm

해초와 아이들 종이에 수채 17×24cm

닭과 게 종이와 연필과 구아슈 29×41cm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1953년 종이에 연필과 유채 25×37cm

물고기와 게와 두 어린이 종이에 크레파스와 수채 19.3×26.4cm

길 떠나는 가족이 그려진 편지 1954년 종이에 연필과 유채 10.5×25.7cm

자화상 1955년 종이에 연필 48.5×31cm

두 어린이와 복숭아 종이에 유채 9.5×12cm

종로공립보통학교 졸업사진

1938년 무렵의 이중섭. 분카가쿠잉 재학 시절의 사진

아내 이남덕. 일본에서 보낸 사진

1941년 제5회 지유텐(자유미술가협회) 출품작

이남덕 여사와 두 아들

꽃 피는 산 1941년 9월 17일 종이에 크레용과 잉크 14×9cm

파도타기 1941년 9월 중순으로 추정 종이에 크레용과 잉크 14×9cm

두 사람 1943년 종이에 수채와 잉크 14×9cm

1955년의 이중섭과 전시회 카탈로그

신문 보는 사람들 은종이에 유채 9.8×15cm 뉴욕 현대미술관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