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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20. 11:00 내가 읽은 책들/2012년도

2012-159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역사서

2001, 김영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6521

 

911.056

이241송

 

한 인간을 둘러싼 300년 신화의 가면 벗기기

 

송시열은 조선 전체와 한국사의 비극이었다!

시대를 역행한 한 정치가에 대한 공허한 찬사의 진실!

한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논란의 대상.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 이상 언급된 조선 최대 당쟁가, 송시열. 그는 조선과 한국사에 비극을 잉태했다. 300년이 넘게 유지되어 온 송시열 신화의 비밀. 성인과 악마라는 극단적 찬사와 저주 사이에 놓인 그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가. 서인들의 쿠데타, 인조반정은 그 비극의 뿌리였다. 소현세자의 좌절과 북벌왕 효종의 급서. 이를 둘러싼 예송논쟁. 그리고 현종의 의문의 죽음. 그가 살았던 시대는 가장 치열한 당쟁의 와중이었으며, 조선이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 받던 때였다. 그러나 그 변화를 거부하고 사대부와 당의 이익을 대변한 송시열과 이에 맞선 정적(政敵) 윤휴, 허목, 윤선도, 이경석, 김육. 이들의 주장은 또한 무엇이며, 당시 조선의 역사는 어떤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는가? 당쟁으로 점철된 숙종 시대. 예송논쟁의 여진 속에서 문을 연 숙종과 송시열, 그 닮은꼴의 충돌. 83세의 그는 14세에 왕에 오른 숙종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정반대의 엇갈리는 기록. 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도 송시열의 노론은 멸망하지 않고 세력을 유지해 왔다. 그러는 동안 송시열은 하나의 신화가 되어 왔다.

 

송시열과 그들이 만들어낸 조선사와 이로부터 이어지는 한국사의 그늘.

그 숨겨진 비극적 역사의 실체와 진실의 추적기!

 

"완전하지 못한 사람을 완전한 존재로 만들려는 인위적 조작이 신화이고, 그 신화에 도전하는 것을 거부하는 물리적 힘이 금기이다.

송시열에 대해 기술하겠다는 나의 진심이 송시열이란 신화가 만든 금기에 도전하는 것임을 이미 알고 지인들은 우려했다. 그리고 그 우려는 지금까지 나왔던 송시열에 대한 글들처럼 그를 성인으로 만드는, 그럼으로써 서로가 좋고 좋은 그런 류의 글들이 아니라 그를 인간의 자리,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파탄에 대해 부채를 지녀야 하는 한 정치가의 자리로 그를 끌어내려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것임을 알고 하는 우려이기도 했다."

- 이덕일, <책머리에>에서

 

 

이덕일

숭실대학교 사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동북항일군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연구실과 강단이라는 공간적 한계와 전문연구서라는 매체적 제약에서 벗어나 열린 가슴으로 역사 연구의 성과를 대중과 함께 나누는 작업을 시도하여, 한국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그가 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 2》는 우리 사회가 어떤 역사서를 원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 책으로 독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으며, 수많은 논쟁과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거칠 것이 없어라 : 김종서 평전》,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사도세자의 고백》, 《누가 왕을 죽였는가》, 《유물로 보는 한국역사》 등의 저서는 많은 독자들과 한국사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역사와 대중의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역작들이다. 은폐된 조선조 최대 사진을 철저한 고증으로 재현한 《운부 1, 2, 3》에서는 역사가가 완성한 역사소설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며, 학문적 깊이와 지적 흥미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인간 중심의 역사서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책머리에 · 신화와 금기

 

들어가는 글

논쟁 속으로 들어가다

극단적 찬사와 극단적 저주 사이

 

1부

흔들리는 주자학의 나라에서

어찌 감히 농민들이 사대부를 넘보랴

조선 심리학이 예학으로 간 까닭을 찾아서

 

2부

인조반정, 그 비극의 뿌리

 

서인들의 쿠데타, 인조반정이 낳은 비극들

병자호란, 역사적 반동이 가는 길

 

소현세자, 그 진보성과 개방성의 좌절

한 선각자에 대한 부왕의 저주

 

3부

북벌의 시대, 대동법의 시대

 

북벌, 말인가 실천인가?

송시열 북벌의 300년 신화 벗기기

 

농민을 잃을지언정 사대부를 잃을 수는 없다

송시열의 정적들 - 대동법의 경세가 김육

 

승무주의자 효종과 승문주의자 송시열

북벌대의의 겉꽃과 속뜻

 

스러진 북벌의 꿈

기해독대 뒤에 생긴 일들

 

4부

왕위에 올랐다고 가통까지 이은 것은 아니다 - 예송논쟁

 

임금이라도 차자가 아닌가?

효종의 국상에는 3년복을 입을 수 없다

 

적자라는 호칭은 임금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송시열의 정적들 - 예론의 대가 허목

 

종통과 적통이 어찌 다르랴

송시열의 정적들 - 시인 정객 윤선도

 

어찌 감히 주자와 달리 해석하랴

송시열의 정적들 - 반주자학자 윤휴

 

온양 행궁에서 벌어진 싸움

송시열의 정적들 - 한때 의 주인이었던 이경석

 

왜 15년 전과 다르단 말인가

고례(古禮)와 국제(國制) 사이의 줄타기

 

5부

국익(國益)보다는 당익(黨益)이 앞선다

 

스승만 알고 임금은 알지 못하는구나

예송 끝의 낙마

 

아버지가 중한가 스승이 중한가

송시열의 정적들 - 은자 윤증

 

정권을 놓치면 모든 것을 잃는다

허적과 윤휴, 죽임을 당하다

 

남인들의 원한을 어찌 풀겠는가?

소론, 서인에서 갈라지다

 

남인 소생 왕자가 어찌 임금이

타당 소생의 임금 탄생은 목숨 걸고 막아야

 

숙종의 분노

마침내 몰락의 때가 오다

 

나가는글

그리고, 그들의 나라

편벽한 소인에게 주어진 공허한 찬사

 

이 책을 쓰는 데 직접 도움을 받은 자료와 책

 

▲ 대전시 동구 가양동에 있는 남간정사. 최근 그 주변을 막대한 예산을 들여 우암공원으로 조성해 사당 등을 새롭게 단장했다.

▲ 송시열의 초상화

▲ 남한산성 남문인 첨화루,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이 문으로 나와 삼전도로 가서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책에 나온 내용)

▲ 이상하네... 왜 책에는 남한산성 남문인 첨화루로 나가서 항복했다 하지? 첨화루는 강화산성의 서문인데... 그리고 남한산성의 서문은 우익문인데...

▲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송자대전』목판. 대전시 동구 가양동 우암사적공원 내의 장판각에 있다.

▲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계곡의 금사담가 바위에 새긴 글씨. 우측의 '忠孝節義(충효절의)'는 명나라 태조의 친필이다.

▲ 화양계곡 바위에 새겨져 있는 송시열의 친필. '창오산의 구름이 끊어지고 무이산이 비어 있다'는 시구는 명이 망하고 청이 중원을 정복한 상황을 한탄한 것이다.

▲ 잠곡 김육 초상. 대동법 시행을 둘러싸고 이를 반대하는 우암 송시열과 치열한 논쟁을 전개했다.

▲ 충남 아산시 영인면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신도비. 김육이 저술했다.

▲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는 삼전도비. 이경석이 이 비문을 썼다고 해서 훗날 송시열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 화양동계곡의 옛 화양서원 터에 있는 만동묘 묘정비. 임진왜란때 구원군을 파견한 명나라 신종 황제를 기리는 비이다.

▲ 강원도 삼척시 정과동에 있는 척주동해비. 허목이 삼척부사로 있을 때 세웠다.

▲ 척주동해비. 허목이 삼척부사로 있을 때 바닷물이 고을까지 들어와 난리가 나자 이 비를 세웠더니 잠잠해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전남 해남읍 연동리에 있는 고산 윤선도의 녹우당. 윤선도는 예송논쟁 때 송시열을 거세게 몰아부쳐 큰 파문을 일으켰다.

▲ 전남 완도군 노화면 보길도의 세연정.  윤선도는 이곳에 부용동 정원을 만들어 놓고 중앙정계에서 소외된 시름을 달랬다.

▲ 퇴계 이황 초상. 당시 훈구파에 밀린 재야 사림파의 영수였던 이황은 사림파가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는 이기이원론을 주장했다.

▲ 충남 강경의 황산서원(현 죽림서원).  이곳에서 윤휴 처리 문제를 두고 송시열과 윤선거가 논쟁을 벌였다. 조광조와 퇴계 이황, 그리고 송시열의 위패를 보관하고 있다.

▲ 죽림서원 정문.  서원에 오르면 파란 금강 지류가 아름답게 흐른다.

▲ 보길도 중통리 산 1-1번지에 있는 바위에 새긴 글씨.  송시열이 제주도로 귀양갈 때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대전시 동구의 우암공원 내의 이의당.

▲ 경남 거제시 동산리 동뫼의 반곡서원.  우암은 장기에서 이곳으로 유배해 반곡서당을 세워 후학을 가르쳤는데 아직도 서당유허가 남아 있다.

▲ 윤증 초상.  윤증은 임금의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정일품 우의정을 제수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 화양동 계곡의 화양서원 터.  화양묵패를 발행하는 등 온갖 행패를 부리다 대원군 때 철폐되었다.

▲ 서울시 석관동에 있는 경종의 의릉.  장희빈의 아들인 그는 재위 4년 만에 급서하는데 소론과 남인들은 노론에서 독살했다고 믿었다.

▲ 대전시 우암공원 내 남간정사 오른쪽에 있는 기국정.

 

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지만 소인은 편벽되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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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