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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3 한 손엔 차표를, 한 손엔 시집을 시가 있는 여행

 

윤용인 지음

2012, 에르디아

 

 

대야도서관

SB079845

 

981.102

윤65ㅅ

 

희망, 사랑, 치유

    이야기가 담긴 감성 여행

 

감상은 때때로 무의식적으로 찾아오지만, 여행자는 가끔 그 감상을 인위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것이 여행을 잘하는 방법 중 하나다. 시집을 들고 떠나는

여행은 그래서 좋다. 여행지에서 시집을 들었을 때 여행자는 시인이 된다.

 

만남은 길보다 먼저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까지 다가와

어느새 철길을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 자국이 된다.

- <철길> 김정환 -

 

지은이 윤용인

딴지일보 기자를 거쳐 2000년 7월 여행 전문 웹진 '딴지관광청'을 창간해 많은 여행 독자와 소통하고 소비자 중심의 여행문화 바로 세우기에 주력했다.

2003년 11월 '노매드 Media & Travel'이라는 여행 컴퍼니를 설립, 본업인 여행은 필수로 하면서 각종 방송과 매체 등을 통해 여성과 결혼, 육아와 심리 등 폭넓은 글을 썼다. 저자 특유의 솔직담백한 글들이 '유쾌한 감성체'로 세상에 소개되었고, 주요 일간지에 칼럼을 연재하며 수많은 남녀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쓴 책으로 <사장의 본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어른의 발견> <딴지, 여행에 똥침을 쏘다> <발리> 등이 있다.

 

"당신의 여행이 시(詩) 안에서 더 풍성해지기를"

                                                                              2012년 1월 윤용인

 

차 례

 

1장 당신이 내리실 역은 희망 정거장

당신이 내리실 역은 희망 정거장 항동 기차여행

생명의 소음이 있는 곳 광장시장

자연과 하나 되어 걷는 길 제주 올레

하늘에서 가까운 예술 마을 낙산

 

2장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할 것이다

나를 버리고 떠난다 보길도

소중한 사소함을 찾아서 약수동

시인과 동백과 상사화가 있는 곳 선운사

맑고 향기로운 삶 길상사

사람에 대한 간절함을 안고 떠나는 여행 지심도

섬에서 게으르게 무위도식하기 선유도

 

3장 가족, 함께하는 여행

핑크빛 분위기로 떠난다 춘천

아이에게 추억 만들어 주기 태안해수욕장 호핑투어

볼 것 많고 먹을 것 많은 여행지 담양

할머니 품처럼 아득하고 아련한 도시 강경

교과서 밖에서 만나는 통일과 평화 고성

 

4장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은 사슴들이 사는 아름다운 섬 소록도

출구 없는 시간 속으로 떠난 여행 군산

오래된 것을 찾아 떠난 여행 홍제동 개미마을

천 년의 역사가 숨 쉬고 있는 도시 경주

 

5장 치유의 시, 치유의 여행

상처 난 가슴이 닿는 곳 해남 땅끝마을

절망의 끝에서 봄 맞으러 가기 원당종마목장

자연으로 떠나는 치유여행 통도사와 영축산

슬픔의 코드에 잘 닿아 있는 곳 영월 청령포

그리움을 가득 안고 떠난 여행 목포

어느 날 엄마가 그리울 때 운주사

문학의 땅에서 마주하는 고해성사 장흥

 

6장 주름을 사랑하리라

나 자신을 위해 하루를 쓰고 싶을 때 수종사와 다산 유적지

갈대밭에서 순응하는 삶을 배우다 순천

곡선의 여행 부석사

맛 따라 길 따라 강원도 여행

세월을 따라 느릿느릿 우이령 길

 

철길

| 김정환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덩어리가 이만큼 견뎌 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이 내려

철길의 들끓어 오름을 적셔주었다.

무너져 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 온 것은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건너면서

인천방면으로, 그리고 수원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폼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길이 이토록 머나먼 것은

그 이전의, 떠남이

그토록 절실했다는 뜻이다.

만남은 길보다 먼저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에까지 다가와

어느새 철길은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 자국이 된다.

 

들리는 소리

| 원재길

 

1

바로 아래층에서

전기 재봉틀 건물 들어 올리며

옷 짓는 소리

목공소 전기톱

통나무 써는 소리

카센터 자동으로

볼트 박는 소리

 

굉음에 하늘 돌아보니

불빛 번득이며

먹구름 밑 낮게 나는 헬리콥터

어서 지나가면 좋겠는데

아까부터 시동 걸려

골목에 버티고 선 트럭

 

2

너는 모든 침묵을

소음의 자식으로 여겨라

모든 소음은

침묵의 아비로다

사람의 모든 色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려 애써라

 

도보순례

| 이문재

 

나 돌아갈 것이다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질 것이다

 

나에게로 혹은 나로부터

발사되던 직선들을

짐짓 무시할 것이다

 

나 돌아갈 것이다

무심했던 몸의 외곽으로 가

두 손 두 발에게

머리 조아릴 것이다

한없이 작아질 것이다

 

어둠을 어둡게 할 것이다

소리에 민감하고

냄새에 즉각 반응할 것이다

하나하나 맛을 구별하고

피부를 활짝 열어놓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눈을 쉬게 할 것이다

 

이제 일하기 위해 살지 않고

살기 위해 일할 것이다

생활하기 위해 생존할 것이다

어두워지면 어두워질 것이다

 

파안

| 고재종

 

마을 주막에 나가서

단돈 오천 원 내놓으니

소주 세 병에

두부찌개 한 냄비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

그것 나눠 자시고

모두들 볼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

허허허

큰 대접 받았네 그려!

 

건강한 소통이란 그와 나 사이에 서로의 섬이 있음을 담백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고도 그 섬에 가겠다는 의지보다는 가고 싶다고 염원만 했던 시인의 마음을 닮는 것이다.

사랑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즐거운 편지

|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

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 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

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천창호에서

| 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송창식 - 선운사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에요

Repeat counter 0

 

선운사 동구洞口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 서정주

 

아직 한 번도

당신을

직접 뵙진 못했군요

기다림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기다려보지 못한 이들은

잘 모릅니다.

- 이해인 <상사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벽이 허물어지는 아름다운 어울림을 보네.

저마다 가는 길이 다른

맨머리 스님과

십자성호를 긋는 신부님,

나란히 나란히 앉아 진리의 법을 나누는

아름다운 어울림을 보네.

늦은 깨달음이라도 깨달음은 아름답네.

자기보다 크고 둥근 원에

눈동자를 밀어 넣고 보면

연꽃은 눈흘김을 모른다는 것,

십자가는 헐뜯음을 모른다는 것,

연꽃보다 십자가보다 크신 분 앞에서는

연꽃과 십자가는 둘이 아니라는 것,

하나도 아니지만 둘도 아니라는 것,

늦은 깨달음이라도 깨달음은 귀하다네.

늦은 어울림이라도 어울림은 향기롭네.

이쪽에서 '야호!' 소리치면

저쪽에서 '여호!' 화답하는 산울림처럼

이 산 저 산에 두루 메아리쳐 나아가면 좋겠네.

- 고진하 <연꽃과 십자가>

 

당신에게 중독되어버린 내 사랑

| 황봉학

 

눈감으면 떠오릅니다

온몸이 전율해 옵니다

당신이 주신 사랑에 중독되어

당신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고

눈물이 쏟아지고

죽을 것만 같습니다

 

당신 손끝으로 파르르 파문을 일으키며

떨던 몸은

당신의 미소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지러지곤 합니다

어느 세월에 가서야 당신을 잊을 수 있을까요

어느 세월에 가서야 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죽어서도 내 영혼은 당신에게 중독되어

당신의 입술을 기다리고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당신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당신에게 중독된 내 육신과 영혼을 살리는 길은

내가 나로서 온전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나를 아득하도록 황홀케 하는

오직 당신의 사랑 하나뿐입니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드러져 개개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곱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 년 놓아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처럼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누구에게나 추억의 도시가 있다. 가슴 시린 첫사랑의 추억이 깃든 곳일 수도 있고,

두 사람이 처음 연애를 시작했던 곳일 수도 있고,

혹은 이별의 아픈 기억이 있는 도시일 수도 있다.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조흔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율포의 기억

| 문정희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 이름 생각만 해도 눈물겨운

| 권강업

 

부딪치면 쉽게 부서지던 삶, 까짓 온 몸

불 위에 던졌기에, 그래도

헐거운 문설주에 찬바람 징징대는 겨울밤을

등 따습게 보내었다

 

미어터지던 가난이 골목길 돌아

눈물처럼 비틀거리며 얼어붙은 산동네

허기지던 노동의 새벽길에

유언도 없이 하얗게 뿌려지던

중증의 골다공증을 앓던 뼛가루

그래 묻지 않았다. 고향

싸릿재 너머 사북 고한

막막하던 막장의 그 어둠 속 어디쯤이냐고

 

초라해도 당당하던 한 삶을

뿌듯한 자부심으로, 교훈처럼 전설처럼

어린 아들에게 구전으로 전해보지만

우리는 그저 노란 배관을 타고 와서, 딸깍

손쉽게 불붙는 도시가스일 뿐

예전 당신들의 처절하던 모습으로는 비춰지지 않는다

 

초로의 야윈 내 가슴에

아직 고스란히 온기로 돌고 있는

그 이름 생각만 해도 눈물겨운

어머니라 부를 연탄

 

늙은 거미

| 박재영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거문개똥거미가 마른 항문으로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암컷 거문개똥거미가 제 마지막 거미줄 위에 맺힌 이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죽은 할머니가 그러셨지 아가, 거미는 제 뱃속의 내장을 뽑아서 거미줄을 만드는 거란다 그렇게 새끼들 다 키우면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나가고 거죽만 남는 것이지 새끼들 다 떠나보낸 늙은 거미가 마지막 남은 한 올 내장을 꺼내 거미줄을 치고 있다면 아가,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수의를 짓고 있는 거란다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자신을 위해 만드는 처음이자 마지막 거미줄이란다 거미는 그렇게 살다 가는 거야 할머니가 검은 똥을 쌌던 그해 여름, 할머니는 늙은 거미처럼 제 거미줄을 치고 있었지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 신경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한때 나는 한 봉지 솜과자였다가

한때 나는 한 봉지 붕어빵였다가

한때 나는 좌판에 던져진 햇살였다가

중국집 처마밑 조롱 속의 새였다가

먼 먼 윤회 끝

이제 돌아와

오류동의 동전

- 박용래 <오류동의 동전>

 

아이를 키우며

| 렴형미

 

처녀시절 나 홀로 공상에 잠길 때며는

무지개 웃는 저 하늘가에서

날개 돋쳐 훨훨 나에게 날아오던 아이

그애는 얼마나 곱고 튼튼한 사내였겠습니까

 

그러나 정작 나에게 생긴 아이는

눈이 크고 가날픈 총각에

총 센 머리칼 탓인 듯 머리는 무거워 보여도

물푸레아지인 양 매출한 두 다리는

어방없이 날쌘 장난꾸러기입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고삐 없는 새끼염소마냥

산으로 강으로 내닫는 그애를 두고

시어머니도 남편도 나를 탓합니다

다른 집 애들처럼 붙들어놓고

무슨 재간이든 배워줘야 하지 않는가고

 

그런 때면 나는 그저 못 들은 척

까맣게 탄 그애 몸에 비누거품 일구어댑니다

뭐랍니까 그애 하는 대로 내버려두는데

정다운 이 땅에 축구공마냥 그애 맘껏 뒹구는데

 

눈 올 때면 눈사람도 되어보고

비 올 때면 꽃잎마냥 비도 흠뻑 맞거라

고추잠자리 메뚜기도 따라잡고

따끔따끔 쏠쐐기에 질려도 보려무나

 

푸르른 이 땅 아름다운 모든 것을

백지같이 깨끗한 내 마음속에

또렷이 소중히 새겨넣어라

이 엄마 너의 심장은 낳아주었지만

그 속에서 한생 뜨거이 뛰어야 할 피는

다름 아닌 너 자신이 만들어야 한단다

 

네가 바라보는 하늘

네가 마음껏 뒹구는 땅이

네가 한생토록 안고 살 사랑이기에

아들아, 엄마는 그 어떤 재간보다도

사랑하는 법부터 너에게 배워주련다

그런 심장이 가진 재능은

지구 우에 조국을 들어올리기에……

 

보리피리

| 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뉠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뉠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뉠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뉠리리.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뜨거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 이동李東 <단종대>

 

문고리

| 조은

 

삼 년을 살아온 집의

문고리가 떨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고 닫았던 집의 문이

벽이 꽉 다물렸다

문을 벽으로 바꿔버린 작은 존재

벽 너머의 세상을 일깨우는 존재

문고리를 고정시켰던 못을 빼내고

삭은 쇠붙이를 들여다보니

구멍이 뻥 뚫린 해골처럼 처연하다

언젠가 나도 명이 다한 문고리처럼

이 세상으로부터 떨어져나갈 것이다

나라는 문고리를 잡고 열린 세상이

얼마쯤은 된다고 믿을 수만 있다면!

내가 살기 전에도

누군가가 수십 년을 살았고

문을 새로 바꾸고도 수십 년을

누군가가 살았을 이 집에서

삭아버린 문고리

삭고 있는 내 몸

 

인연

| 김해자

 

너덜너덜한 걸레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또 망설인다

이번에 버려야지, 이번엔 버려야지, 하다

삶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또 한 살을 먹은 이 물건은 1980년 생

연한 황금색과 주황빛이 만나 줄을 이루고

무늬 새기어 제법 그럴싸한 타월로 팔려온 이놈은

의정부에서 조카 둘 안아주고 닦아주며 잘 살다

인천 셋방으로 이사 온 이래

목욕한 딸아이 알몸을 뽀송뽀송 감싸주며

수천 번 젖고 다시 마르면서

서울까지 따라와 두 토막 걸레가 되었던

20년의 생애,

더렵혀진 채로는 버릴 수 없어

거덜 난 생 위에 비누칠을 하고 또 삶는다

화염 속에서 어느덧 화엄에 든 물건

쓰다 쓰다 놓아버릴 이 몸뚱이

 

성장

| 이시영

 

바다가 가까워지자 어린 강물은 엄마 손을 더욱 꼭 그러쥔 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거대한 파도의 뱃속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다 엄마 손을 아득히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 잘 가거라 내 아들아, 이제부터는 크고 다른 삶을 살아야 된단다. 엄마 강물은 새벽 강에 시린 몸을 한번 뒤채고는 오리처럼 곧 순한 머리를 돌려 반짝이는 은어들의 길을 따라 산골로 조용히 돌아왔습니다.

 

솟구쳐 오르기 2

| 김승희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 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잠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 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뺄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소나무에 대한 예배

| 황지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 있

建木 :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 친다.

 

물방울, 송곳

| 정병근

 

이 기억을

모두 잊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시간이

어찌 지금만일 수 있으리

 

물방울이 맺힌다

한 방향으로만 걸어온 기억이

마지막 시간을 쥐어짜고 있다

올 데까지 온 기억의 장렬한 최후

 

결심을 끝낸 물방울이 떨어진다

뒷물방울이 앞 물방울의 목을 친다

바닥에 부딪쳐 산산조각 나는 머리통

 

똑, 똑……

맨몸을 던져 바위를 뚫는

저 집요한 기억의 송곳

 

선술집

| 고은

 

기원전 이천년쯤의 수메르 서사시 '길가메시'에는

주인공께서

불사의 비결을 찾아나서서

사자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하늘에서 내려온

터무니없는 황소도 때려잡고

땅끝까지 가고 갔는데

 

그 땅끝에

하필이며 선술집 하나 있다니!

 

그 선술집 주모 싸두리 가라사대

 

손님 술이나 한잔 드셔라오

비결은 무슨 비결

술이나 한잔 더 드시굴랑은 돌아가셔라오

 

정작 그 땅끝에서

바다는 아령칙하게 시작하고 있었다

 

어쩌냐

 

엄마

| 정채봉

 

꽃은 피었다

말없이 지는데

솔바람은 붙었다가

간간이 끊어지는데

 

맨발로 살며시

운주사 산등성이에 누워 계시는

와불님의 팔을 베고

겨드랑이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엄마

 

눈길

| 이청준

 

오랜만에 고향집에 내려와 내일 아침에 바로 떠날 생각을 하는 나를 지배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부채의식이다. 나는 스스로 어머니에게 진 빚도 없고, 그러기에 갚을 빚도 없다고 생각한다. 마을 개간 사업으로 마을에서 몇 채 남지 않은 어머니의 집 지붕을 개간하고자 하는 어머니의 소망을 애써 무시하는 매몰참도 바로 자신이 단정한 부채 없음에 대한 실천이다. 그러나 눈길에 대한 아내와 어머니의 대화를 엿듣게 되면서, 나는 자기 안에 숨기려 그렇게 노력했던 원죄와 만나게 된다.

먹고살기 위해 원래 살던 큰 집을 팔아 버리고, 행여라도 타지에서 공부하는 아들놈이 그 사실에 실망할까 봐 어머니가 보인 모성. 자식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는 이미 팔린 집에서 나를 기다리시고, 자식이 어색해 할까 봐 옷장만은 방에 그대로 둔 채 언제나처럼 나를 맞아 주시고 하룻밤을 따뜻하게 재워 주신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흰 눈으로 덮인 길을 어머니는 아들을 바래다 주기 위해 큰길까지 동행하신다. 버스에 태워 주고 돌아오는 길, 그 허한 길을 어머니는 아들이 남긴 눈 발자국에 자신의 발자국을 채움으로써 달래신다.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라고 눈물로 읊조리시며.

 

| 김광규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고

나의 선생의 제자이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적이고

나의 나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고

나의 단골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이다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그 굽은 곡선

| 정현종

 

내 그지없이 사랑하느니

풀 뜯고 있는 소들

풀 뜯고 있는 말들의

그 굽은 곡선!

 

생명의 모습

그 곡선

평화의 노다지

그 곡선

 

왜 그렇게 못 견디게

좋을까

그 굽은 곡선!

 

태백산행

| 정희성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 살이야 열아홉 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성에꽃

| 최두석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각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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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