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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5 라디오 데이즈

 

하재연 시집

2007, 문학과지성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0034

 

811.6

하73라

 

문학과지성 시인선 327

 

먼 나라를 찾아가다 귀찮아진 계절드리 거기 머물렀다. 지구 어느 편에 있는지 잘 모르는 나라들의 길고 뜨거운 이름들이 좋았다. 뾰족하고 높은 성을 탈출하던 소녀의 파란 머리카락이 떠오른다. 창밖으로 치렁하게 늘어뜨려진 머리카락, 그건 소녀나 마귀할멈과는 상관없이 살아 움직이며 빛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난 정말로 그 그림을 보았던 걸까. 두고 온 눈동자를 찾으러 돌아가면 먼지를 묻히고 굴러다니던 속눈썹이 반짝, 눈을 떴다가는 책꽂이 사이로 숨어버렸다. 눈 속에 무릎까지 소복소복 파묻히며 책장이 넘어갔다. 창틀이 정말로 여러 개였다. 한 개의 창문으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쬘 때 다른 세 개의 창문에서는 별이 떴다. 그곳을 눈 내리는 만화가게라고 부른다.

주석 달지 못한 여러 개의 이름들, 내 시에 섞여 들어와 찰흙처럼 몸을 만들어주었다. 이름 따위는 상관없이 내 살이 그 살들과 섞여 기분 좋게 물렁물렁해지기를 바란다. 처음과 끝이 어디부터 어디쯤인지, 새로 시작된 건 언제인지 기억한다면 많은 것들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여권과 비자 없이 국경을 넘어 불법 체류자가 되지 않는 나라, 도시, 마을에 대한 글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상상이 현실에서는 시적이고 정치적인 메타포가 된다. 이 상상과 정치 사이, 또는 그걸 넘어 내가 가고 싶은 나라의 이름을 언제쯤인가는 써볼 수 있을까.

 

시인 하재연은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같은 과 대학원 박사과정 중에 있다.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 문학상을 수상하며 시단에 나왔다.

 

시집 『라디오 데이즈』는 향기처럼 휘발하는 감각들에 대한 재빠른 스케치다. 시인과 부닥치고 스쳐지나는, 또는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느낌들이 탄생한다. 색깔과 감촉, 냄새 등 대상과 접촉하는 시인의 감각에 의해 생겨나는 이 즉흥적인 느낌은 미처 그 정체를 알아채기도 전에 공중으로 휘발하고 만다. 그러나 그러한 느낌을 시인은 언어와 언어의 부딪힘, 문장과 문장의 얽힘, 행과 행의 연속과 단절을 통해 재탄생시킨다. 이렇게 시 안에 들어 있어서 우리가 읽을 때마다 돋아나는 그 감각과 느낌은 오로지 감각의 세계 그 자신의 것이다. 이 시집은 향기를 가둔 향수병처럼 우리에게로 온다.

 

시인의 말

 

너는 안녕이라고 말하고,

나는 안녕하냐고 말하지.

비틀스의 노래가 생각났다.

언제부터 알고 있던 음악일까?

 

2006년 초겨울

하재연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우리들은 물고기처럼

휘파람 / 천국의 계단 / 동시에 / 나비 효과 / 팔월의 일요일들 / 일요일에 골동품 가게 / 거품 / 장미 덩굴처럼 / 사계절의 상인 / 향수 / 오 분간 / 네 얼굴은 불빛 아래 / 오래된 침대 / 한여름의 스노볼 / 아마도 내일은

 

제2부 이상하고 환한 요일

아이들은 자란다 / 구름의 식탁 / 복도의 아이 / 할머니의 침대 / 라디오 데이즈 / Snow White / 내 꿈은 학교 / 나는 얼굴이 검은 아이 / 내 사랑 변전소 / 스텔라 미장원 / 이동 / 봄의 교향악 / 공생기

 

제3부 안녕, 안녕

나만의 인생 / 서커스 / 스파이더맨 / 우리는 만난다 / 눈뜨는 영혼 / 피의 책 / 그대는 마네 / 여름의 달력 / 의자 / 토요일은 밤이 좋아 / 간선 도로 / 우리들의 일요일 / 문들 / 봄날의 인사

 

제4부 여기는 나일, 여기는 고베, 여기는 이름 모를

지상의 저녁식사 / 머나먼 북쪽 / 드림 캐처 / 아름다운 날들 / 음악들 / 에코 / 빵의 황제 / 열한 개의 창문 /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 흑백 영화 / 고속도로 위에서 / 미드나잇 트레인 / 흐르는 강물처럼 / 나는 자전거를 타고

 

해설 | 초연성(超然性)의 시 쓰기 · 이광호

 

라디오 데이즈

 

보급소 소장이 욕을 했다. 병신 새끼, 미칠 듯이 더운 여름 옆집 난쟁이 아저씨가 나의 개를 잡아먹었고 나는 그 집 딸의 주근깨를 증오했다 계절마다 배불러 웃고 다니는 국화 엄마의 부풀어오른 배를 나무 꼬챙이로 찔러보고 싶었다

 

푸른 면도날과 붉은 꽃을 상상하다가 잠이 들고 매일 아침 엄마는 울면서 깨어났다 밤마다 이불이 축축하지? 옆집 주근깨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비죽 웃었다 일요일 저녁에는 은빛 자전거를 닦고 연탄재 옆에 쭈그리고 오줌을 눴다 몹시 땀이 났다

 

우리는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니나가 잡혀 있는 사차원 세계는 언제나 방과 후였다 방과 이전과 방과 후 세계는 나에게 두 가지뿐이었다 영어 선생은 추한 여자였다 긴 화상 자국이 블라우스 아래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

 

붉은 꽃을 보여준 건 주근깨였다 엄마는 어느 날 아침인가부터 울면서 깨어나지 않았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따위 노래는 이제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 은빛 바퀴는 어디론가 굴러갔다 나는 초록색 철대문집 아이였다

 

천국의 계단

 

당신은 발자국 소리가 없어요

고양이의 영혼

아이들은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지요

당신에게는 시간이 오래 머물러 있습니다

나에게서 아주 조금만 가져가준다면

나는 당신과 영원히 함께 있을 텐데

나는 당신의 주름을 가만히 움켜잡고 싶습니다

내 몸의 빨간 피를 하나하나 응고시키면

이파리의 물관들처럼 싱싱한 지도가 생기겠지요

당신은 그냥 나를 지켜봐도 좋습니다

하나, 둘, 셋 하다가 나는 잠이 들 것입니다

당신은 마치 거기서 달리려는 것처럼

 

네 얼굴은 불빛 아래

 

불빛이 타는 거리를 지나 세 사람의 광장을 지나 벌과 꿀의 언덕을 넘으면 푸른 잿빛 거리 지나 초록 기찻길을 지나 붉은 강물의 길로 들어서면 여름 봄 겨울이 가고 깨어진 노란 머리 여자애들이 유리병을 창문 밖으로 던지며 깔깔거리고 나는 온통 젖어 불빛에 타고 가을이 지나가고 내가 가진 모든 동전들이 없어지고 회전목마의 말들이 뚜벅뚜벅 꿈속으로 들어서듯이 네 얼굴은 불빛 아래 돌고

 

가로등 아래 트럼펫을 부는 사내 까만 점을 빛내며 웃고 가끔 너는 행복하다 말하고 가끔 너는 슬프다 말하고 네 얼굴은 불빛 아래 아무도 몰라보게 허옇게 분칠을 하고 혁명의 거리를 지나 하나뿐인 길을 건너 삐걱거리는 침대의 보도를 밟으면 내 발자국은 반복되는 마지막 소절 주제를 잊고 느리게 흘러가는 기이한 간주

 

네 손가락에 차갑게 얼어 있는 네 손마디에 기록되지 않는 귀청을 뚫고 지나가는 나는 싸구려 선술집의 주크박스에서 삼만 년째 돌고 있는  차가운 맥주 거품처럼 꺼져가는 너의 목소리는 네 머릿속에서만 흘러나오고 너의 목소리는 지상의 만 분의 일 초도 흉내 내지 못하고 북극에서 차를 몰고 달려온 사내의 병 속에서 투명하고 아름다운 알약들이 꽃처럼 피어나고 흩어지고 죽음 같은 음도 고요한 칼날도 지각하지 못하는 네 손가락이 만지는 허공에

 

동시에

 

그녀는 책장을 넘기고 있었고

남자가 문 열린 차를 타고 벼랑으로 내달았고

고양이가 식탁 위의 커피잔을 건드렸고

양탄자가 약간 들썩거렸고

고장난 시계 초침이 열두 번을 돌았고

소년은 마라톤 결승 테이프를 끊었고

그녀는 행운을 빌었으나

양손이 쪼글쪼글해지고

머리칼이 가늘어지고

커피는 쏟아졌고 양탄자는 젖지 않았고

남자는 녹색 지붕 아래 비행하는 순간

 

휘파람

 

그림자들이 여러 개의 색깔로 물든다

자전거의 은빛 바퀴들이 어둠 속으로 굴러간다

 

엄마가 아이의 이름을 길게 부른다

누가 벤치 옆에

작은 인형을 두고 갔다

 

시계탑 위로 후드득 날아오르는 비둘기,

공기가

짧게 흔들린다

 

벤치, 공원, 저녁과는 상관없이

 

나비 효과

 

지붕 위에 올라간 돼지들을 보고 있던 어젯밤

당신은 술 취해 택시 기사와 멱살잡이를 한다

화면의 폭우는 미칠 듯이 계속되고

 

집의 주인들은 없다 지붕은 회색이거나 파란색이지만

돼지들은 어떤 지붕이건 가리지 않고

흙물은 붉다

 

한 호랑나비 웃는 얼굴로 날갯짓한다

그 무늬로 적을 겁주거나

그 미소로 핀에 꽂히거나

 

보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의 등을 잘 보아야 한다

다가서는 순간

등의 표정은 무너지고 만다

 

거리에서 나는 늘 추월당한다

지나쳐온 것들은 언제나 뒤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돼지의 여름과 무관하게

호랑나비의 여름과 무관하게

 

새가 아파트 103동과 105동 사이로

조용히 날아간다

하늘에는 새의 곡선이 남아 있지 않다

 

오 분간

 

어려운 건 결심의 문제다 저 구름은 오 분간 한자리에 머물러 있기로 한 모양이다 오 분 후 구름은 쉬지 않고 내내 자세를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보고 잇는 오 분간이다 바람이 구름을 지나치는 순간, 구름의 모양은 흐트러진다 그것이 바람의 힘이었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 역도 마찬가지다 구름의 힘이 바람을 불러들인 것은 아니다 저기 있는 구름을 결정한 것은 구름의 형태가 아니고, 내가 보는 구름은 오 분간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구름이다 우리는 오 분간, 아주 약간, 옮겨진 건지도 모르지만

 

오래된 침대

 

내 옆구리에는 몇백만 년 전 누군가 뱉어놓은 무화과 씨앗이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올이 고운 먼지들이 손으로 짠 담요처럼 나를 덮는다 언제부턴가 나를 지나간 지상의 숨결들 내리쬐던 환한 빛을 기억하려 할 때마다 옆구리가 아파왔다

 

고요한 한낮을 기억할 수 없이 오랜 동안 건너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틈새에 몸을 열어두는 일 그리고 낮과 밤의 기나긴 운행 뚫린 하늘로부터 내려앉는 살비듬들, 천장이 아득해진다

 

푸른 먼지 결 고운 곰팡이는 내 좋은 토양 몸 안의 무화과 이파리 줄기들 한없이 전화선 속으로 들어가 우주 건너편의 어떤 한낮, 누워 있는 여자의 눈까풀을 가만히 쓰다듬을 것이다 그 화사한 손길을 꿈꾸는 동안, 그리고 누구도 나를 방문하지 않는 동안

 

이동

 

당신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는가? 떨림이나 울음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여자의 보이지 않는 둘레 안에 누군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을 둥그런 무늬가 일그러지거나 또 다른 고리를 만드는 것을

만약 당신이 선택하는 자라면 옆에 있거나 떠나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는가?

그 여자는 울거나 웃었거나가 아니라 다른 쪽을 향해 조금씩 움직였다는 것을

 

나만의 인생

 

내 눈동자는 나의 것

눈썹을 깜박이는 것도 나의 의지입니다

고개를 돌려 당신을 바라보는 것도 나의 의지

내 손은 나의 것

담배를 피우거나

비벼 끄는 것은 나의 의지입니다

연기가 피어올라 공중으로 사라져가듯,

나의 말은 나에게서 나와

당신에게로 흘러들어갑니다

당신이 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내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어느 날 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거리에 불이 켜지면

나는 거리로 나갑니다

어느 날 가로등들이 꺼졌다 켜졌다 하듯이

당신은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나는 쏟아지는 불빛을 거리에서 맞습니다

나의 의지는 나만의 것이지만,

 

피의 책

 

너는 피의 책이다

네 눈의 뜨거운 신경다발은 목구멍까지 이어져 있다.

얇은 낱장들이 내게서 펄럭였다.

한 권의 책에는 어떤 사건도 담기는 법.

너는 육신으로 기록한다.

내 몸의 모래 알갱이들,

발바닥을 찌르는 빛나던 유리잔,

토마토의 차가운 속살,

네 피는 붉고, 너를 서서히 채우고,

그리고 식는다.

바람은 어디에서든 잠깐, 불어왔을 뿐.

네게는 너의 현재가 읽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무 일도 도모하지 않기 위해

다른 나라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언젠가 피로써 번역되기를 바라면서.

 

아마도 내일은

 

아마도 내일은

오래된 눈

 

누군가 장례식장으로 가는 자를 몰고

그대는 죽지 않고 나는 살아 있네

 

눈은 날리고 날리는 눈은

유리창에 부딪혀 녹아 없어지네

 

그대의 검은 머리에 내려앉고

내 검은 눈동자를 비껴 나가던

 

오래된 눈 창에 얼룩을 남기고

나는 얼룩을 지우네

 

누군가 흰 꽃을 던지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네

 

노래는 끝을 알 수 없이 희미해져

그대는 죽지 않고 나는 살아 있네

 

아마도 내일은

그대와 나와 오래된 눈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