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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22. 09:26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90 네 속의 나 같은 칼날

 

강유정 시집

1995, 문학과지성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03861

 

811.6

강66ㄴ

 

문학과 지성 시인선 154

 

"감동은 백포교가 칼을 수평에서 정면으로 거두자마자 앞으로 다가선 군사들의 가운데로 파고들었다. 그는 칼을 아래에서 사선을 그으며 위로 치켜올려 몸을 반쯤 돌리는 은망을 취하였으니, 칼날이 둥글게 틀어 공격하는 구렁이의 이빨과 같았다. 이는 적의 공격을 이용하여 적을 막는 법이었다. 감동을 급습하였던 백포교는 제 편인 왼쪽의 군사 측면에 서게 되고, 수룡은 깊숙이 들어와 백포교의 뒤에 있었고 감동은 오히려 세 군사들 가운데 박혀버렸던 것이다. 가운데 섰던 군사가 허리에서 가슴 위에까지 비스듬하게 칼을 맞고 뒤로 넘어졌다. 감동은 그 동작에 연이어 좌익이 되어 오른편 끝에 있던 군사의 좌측을 빠져서 다시 집 쪽으로 들어가며, 그의 어깨를 재빨리 찔러 빼고는 툇마루 앞으로 돌아 섰다.

셋에 군사 하나를 베었고 다른 하나를 찔렀으며 여섯에 돌아섰으니, 유수룡과 백포교와 나머지 군사는 솔가지 더미와 툇마루 사이에 일직선으로 몰려 있었다."

그래 적을 베기는 은망(銀蟒)도, 비연착충(飛燕捉蟲)도 좋다. 그러나 내 속의 기격(奇擊)의 칼날은 어쩐단 말인가.

시인 강유정씨는 195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1976년 『현대문학』에 「이 강물 마시고」「늦은 편지」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푸른 삼각형』(1983)이 있다.

시집 『네 속의 나 같은 칼날』은 언어로 된 은장도 같은 것이다. 시인은 강철을 담금질하고 벼려서 날선 칼을 만들 듯이 언어를 벼려서 시를 만든다. 그래서 그의 시는 짧고 날카롭다. 대부분의 짧은 시가 운율에 기대어 시적 힘을 발산하는 데 비해 그의 시는 묘사와 회화적 힘에 기댄다. 그의 시는 뾰족한 끝을 보고 난 뒤에 남는 잔상처럼 우리들의 맨살을 뚫고 들어온다.

 

自序

 

무엇을 쓰고 있는 것일까. 이 삶의 짧은 순간에 내가 쓰고 있는 것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내가 만나는 것들 속에서 나는 무엇일까. 존엄한 있음 속에다 내 칼날을 들이대는 짓은 아닌가. 하찮은 의미 몇을 도려내기 위해 그 속으로 집어넣는 무모한 칼질은 아닌가. 이 무모한 칼질의 두려움은 또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가뭄의 끝이었다. 몇십 년 전 만든 못이 처음으로 바닥을 드러냈다. 예전에 마을이던 자리였다. 마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햇빛 가득한 양지 쪽에서 슬근슬근 일어서는 마을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여뀌풀 사이로 면도날처럼 반짝이는 말들의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그 풍경은 또 얼마나 잠시였는가.

1995년 봄

강 유 정

 

차례

 

▨ 自 序

나 같은 칼날 / 비 / 누드 / 낡은 오후 / 피에로 / 바다의 새는 흰빛일까 / 어젯밤 바다에서 바이올렛 / 막차를 기다리며 / 몽골리언 / 불면 / 수몰 지구 / 친구 / 색감 / 여우비 / 화투판 / 서상환의 刻 / 신문지로 바른 벽 / 석가에게 / 소묘집 / 赤土의 잠 / 가죽나무 그늘 / 실밥을 뜯다 / 여울에서 / 밥물 / 붉은 머리 / 풀잎 사이 / 금사매 / 연습 / 급매도 / 세상 이야기 / 가뭄 더위 / 篆刻 몇 방 / 홍매 / 폐차장 / 차꽃 / 낡은 그림 / 우수 경칩 / 별이 와 닿는 / 춘란 / 도시의 칸나 / 채송화 / 草木染 / 물끝을 쪼는 / 바라보는 저쪽 / 낮 고양이 / 나루 / 대숲 사이로 / 늙은 아버지의 전생 / 다시 지나는 길 / 밥상을 차리다 / 개울가의 풀 / 버린 집 / 그녀의 엽서 / 풀의 뼈 / 눈썹 위로 겨울 / 유년의 강물 / 輓章 / 어둠 속에서 노래 / 청춘 / 붉은 비 1 / 붉은 비 2 / 붉은 비 3 / 붉은 비 4 / 붉은 비 5 / 붉은 비 6 / 붉은 비 7 / 붉은 비 8 / 붉은 비 9 / 붉은 비 10 / 붉은 비 11 / 붉은 비 12 / 붉은 비 13 / 붉은 비 14 / 붉은 비 15

▨ 해설 · 덧없는 존재의 일순, 그리고 유미적 허무주의 · 송희복

 

청춘

 

비 내리는 단풍 끝 무슨 그리움이 남았는가

환하게 낡은 골목길 위로

우리는 젖어서 접었다 펴는 우산 사이

잠시 붉었다 지는 꽃이었다

 

 

조금 열려진 창 사이로 떨어지는 비

손끝에 묻어두고 사는 은빛 거미줄처럼

섬세하고 무서운 여자

창을 열면 온 세상 다 받아내는

 

여우비

 

낮잠의 밖으로

여우비는 얼마나 올까

이 세상 구겨놓은 이력서 몇 장

하루이틀 등짐 진 블록담 아래

마지막 붉은 귀의 채송화 몇 송이

"속임수의 술잠에서 깨어나서"

지워졌다 새겨졌다 비 오는 거기까지

 

밥물

 

늑었다 가을 저녁 샛강을 건너는

굽 낮은 구두를 적시는 여우비

낡은 버스에 기대 잠든 물별이 두 개 나머지 잠은 소리없이

잠긴 비를 받아내는 샛강 한쪽 개참꽃이 무성했다

옷을 벗으면 저문 쪽으로 사람이 태어나서 끓이는 밥물

 

여울에서

손마디를 꺾는 소리에도 다시 여울이 번지고

하늘 전체가 강물처럼 흔들거렸다

담홍의 얇은 강은 붉고 가벼운 유난히 시린 허리께를 내놓고

그렇게 젖어서 걷는 저쪽, 노 젓는 배가

기웃

 

금사매

 

손뼉 한 번에

꽃 하나 피우려 했는데

물 뿌려

비 내릴 뿐 금사매 핀 양지 쪽 강물

 

赤土의 잠

 

땅이 붉어서 적토라 부르는 그 땅의 새는 어디로 갔을까 돌이 아름다워 풀이 날카로운 그 새는 어디로 갔을까 이 세상 쪼아가는 매서운 길 한뎃잠을 자다 깨어나니 콧물 눈물 범벅의 얼굴 아아 나도 모르는 눈물이 깜깜한 잠속에 있었던가

 

輓章

 

얕은 내 깊게 건너는

바위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받아내는

이마와 꽁지가 빨간

만장 사이로 몇 줄기 비를 헤아리는

 

누드

봄에 시드는 꽃

몇 장

엽서 같은 꽃

잘못 발송된 그대나 나나

우리에게 언제나

약간의 비애를

주는 귓바퀴를 붉히며

잘못 찍힌 쉼표

 

색감

허리가 외로운 날은

풀잎으로 쓰러지는 가슴은 없을까

그녀와 술을 섞어 먹으면서

수채화처럼 눈이 잠기는 오후

색은 얼마나 낡을 수 있을까

 

홍매

 

탱자나무 그늘 잊었다

그늘 속에 홍매 몇 송이

가지처럼 빨간 라디오 안테나

조금 열려진 창 너머

잘 말라붙은 안개꽃

머리를 말리던 여자의 하얀 팔목

 

우수 경칩

 

어디쯤은 건너뛰어도 그냥인 세상

그런 물빛이람 초록 따위도 모자라는

귀밑머리

우수 경칩의 서릿발 여자

슬픈 일이면 다 주어버릴

단조 몇 소절의 바람기

 

물끝을 쪼는

 

물끝을 쪼는 비애

잦은 비에 쓰러져 흙을 묻히는 풀잎

잘못 밟은 보도 블록 사이로 파랗게 돋아나는

불륜의 유혹

 

붉은 비 12

 

물파스 냄새가 난다.

비가 조금씩 뿌려지기 시작한다. 어깨가 조금씩 흔들거리더니 장면은 보리밭이다.

작은 개울이 흐르고 그녀의 어깨선도 개울처럼 조금씩 흐르고 있다.

내 어깨 가까이 그녀 어깨가 개울의 물소리처럼 귀를 세운다. 개울을 건너 아무도 없는 창밖의 하늘. 부옇게 비안개로 흐려져 있는 풍경.

그녀를 만난 곳은 책방이다. 파르르프르르 책장을 넘기는 그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훔친다.

그녀의 몸에서 바람개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창밖은 여전히 흐르고 풍경은 바람에 조금씩 지워져 보이곤 한다.

그녀는 붉은 샌들을 딸딸 끌고 간다. 흰 양산을 쓰고 아무도 타지 않는 한낮의 전철을 기다린다. 풍경은 무겁게 젖어 있고 바람개비 도는 소리를 내며 그녀가 내 앞을 지난다. 그녀의 다리를 걸었다. 그녀는 넘어진다. 붉은 샌들이 벗겨지고 언뜻 그녀의 가슴이 출렁, 출렁이는 치마 밑으로 희고 곧은 다리를 본다. 그녀는 바람개비를 돌리며 달아난다. 개울 위로 새까만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간다. 파르르프르르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자막은 이제 나오지 않는다. 창밖에는 아무도 없고 젖어 있다. 바람개비 돌아가는 어깨가 내 어깨 가까이 기우뚱한다.

 

나 같은 칼날

 

감동 없이 무너지는 날들

견딜 수 없는 잦은 비 끝으로

종이꽃을 접었다 편다

너무 얇아 그늘이 투명한 빛 같은

네 속에 든 나 같은 칼날

감동 없는 날은 그렇게 베이고 싶다

 

붉은 비 4

 

지하철을 내렸을 때 선로를 받치고 섰는 거대한 지주들 사이로 자갈을 보이며 물이 흘렀다. 바닥을 보이는 강을 꺾어 돌아섰을 때 우리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어떤 마을에 와 있었다. 우리는 그때야 지하철을 내렸을 때 검표원이 없었던 것을 기억했고 그곳이 정류소가 아니었던 사실도 기억해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그외의 것은 어떤 것도 기억에 없었다. 마을의 표지판은 없었다. 우리가 그의 초대를 받고 마을에 가야겠다고 마음으로 응낙했을 때부터 사단은 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텅 빈 마을에 빈터만 덩그렇게 남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을을 이루었던 초석만이 몇 이끼가 마른 채로 남아 우리의 마중을 끝마쳤을 때 참으로 막막하였다. 여뀌풀이 무성하게 자라서 마을 터를 덮고 있는 것은 더욱 우리를 낯설게 하였다. 그리고 눈부시게 밝은 빛이 중천에 떠 있었는데 눈이 부시지 않는 그런 빛의 덩어리였다. 수몰되었다 다시 육지로 드러난 마을. 도대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이 우리가 이곳에 도착해서 정신차려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의 전부였다. 그리고 우리들 신체의 많은 부분이 지워지고 없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다. 마을은 빛 속에 잠겨 있어도 물 속에 잠겨 있는 듯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이야길 나누고 있었는데 자문자답이었을 뿐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인골 몇 조각을 주웠다. 그 인골들은 상아로 깎은 듯 깨끗하고 단아했다. 우리는 그 인물이 누구의 것인지를 금방 식별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들 몸에서 사라져간 부분들이었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