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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 20. 08:56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23 바다로 가득 찬 책

 

강기원 시집

2006, 민음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54594

 

811.6

강18바

 

강기원의 작품은 여성성이라는 것이 음식을 끓이는 불처럼 작용하여 언어에서 강렬함과 맛있는 냄새가 피어오르게 하는 그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리하여 시에 대한 독자의 미각을 살아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밤의 적막이 깃털이던/ 검은방울새"요, "구름의 날개 가진 슴새"인 시인을 갖게 되었고 "한때 그녀는 명소였다"라는 구절에 나오는 낱말을 빌려 시의 명소(名所)를 하나 더 갖게 되었다.

- 정현종(시인) / 심사평 중에서

 

강기원의 시는 평범, 당연, 상식, 고정관념을 거부한다. 그의 시는 새로운 표현에 대한 열정, 역동적인 사유, 엉뚱한 발상과 대담한 진술들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영육을 통째로 흐린 늪 바닥에 밀어 넣어 절이는 듯한 그의 의식은 그로테스크하면서 종교적이고 도발적이다. 제도 속의 가축 떼를 놀라게 하는 맹수처럼, 지루하고 고루한 것들을 물어뜯으려는 힘이 그의 시 도처에서 느껴진다. 강한 시인을 예감케 하는 한 신인의 등장을 보는 듯하다.

- 최승호(시인) / 심사평 중에서

 

『바다로 가득 찬 책』은 "야수인 예수"와 렉터 박사라는, 식인 풍습에 기원을 두는 두 인물을 큰 축으로 삼아 설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이 두 인물은 잡아먹기와 먹이기라는 서로 상반된 방향의 운동을 하는데, 고기를 잡아먹는다는 매혹적인 행위 안에서 '먹이기'를 발견하는 것은 시적 화자의 정신세계에서 큰 전희에 해당한다.

유한성 속에서 홀로 죽는 대신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을 먹이는 사건', 이것은 내가 나의 유한성을 넘어서, 타인이 누리고 살아갈 시간 한 조각을 쪽배처럼 얻어 타고 계속 살아 나가는 방식이다. 결국 '먹이기'라는 행위의 본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구원의 사건'이며, 이렇게 타인을 먹임으로써 그를 구원하고 동시에 내가 구원받는 것, 그것이 바로 '어머니 대지'가, 곧 우주가 살아 나가는 방식인 셈이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한 개체로서의 여자라기보다는, 코라(Khora), 바로 생명들의 요람인 어머니 대지이며 "만물을 삼키고 뱉어내는 소용돌이", 만물을 '먹이고 먹는 일'을 돌보는 질서, 더 나아가 우주의 바퀴를 회전하게 하는 "위대한 암컷"이다.

- 서동욱(시인 · 문학평론가) / 작품 해설 중에서

강기원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97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요셉 보이스의 모자」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시집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가 있다. 2006년 제25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차례

 

시인의 말

 

전지가위 / 위대한 암컷 / 마근(馬根) / 복숭아 / 봄날의 도서관 / 언어로 가득한 주방 / 차디찬 고깃덩어리 / 만두 / 베이글 만들기 / 곰국 / 절여진 슬픔 / 그린티 아이스크림 / 칵테일 / 껍질 / 치한이 되고 싶은 봄밤 / 가을날의 피에로 / 쇠 침대 / 비눗방울 / 당 르 누아르 / 기린 / 바다로 가득 찬 책 / 그린다는 것 / 마젠타 / 화이트 / 블랙 / 회색이란 / 너의 이름 / 야생 보호 구역 / 하짓날 하오 세시 / 피어싱 / 달거리가 끝난 봄에는 / 연애에 대한 기억 / 미약 제조법 / 연애 / 고무장갑 / 벨트 / 고리 / 저녁 어스름처럼 스며든 / 마네킹 / 고슴도치 / 열두 개의 회색 벨벳 양복으로 남은 사내 / 에스컬레이터 / 미아 / 다몽증(多夢症) --- 몸 / 난지도 / 데자뷔 / 염(殮) / 씻김굿 / 울음 / 빅 브라더 / 얼굴 작동 부호화 시스템 / 방 한 칸 / 어떤 하루 / 덩굴손 / 선물 / 다몽증(多夢症) --- 집 / 비 / 붉으락푸르락 / 이별 / 검은방울새 / 너무나 조용한 소풍 / 잠꼬대 / 돌계집 / 뭉게구름 / 나의, 나의 것도 아닌 / 보름달

 

작품 해설 / 서동욱

렉터 박사, 외과 수술, 아니 식사

 

바다로 가득 찬 책*

 

네가 한 권의 책이라면 이러할 것이네

첫 장을 넘기자마자 출렁, 범람하는 물

너를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자꾸 깎이네

점점 넓어지는 틈 속으로

무심히 드나드는 너의 체온에

나는 녹았다 얼기를 되풀이하네

모래펄에 멈춰 서서 해연을 향해 보내는 나의 음파는

대륙붕을 벗어나지 못하고

수취인 불명의 편지처럼 매번 되돌아올 뿐이네

네가 베푸는 부력은 뜨는 것이 아니라

물밑을 향해 가는 힘

자주 피워 올리는 몽롱함 앞에서 나는 늘 눈이 머네

붉은 산호(珊瑚)들의 심장 곁을 지나

물풀의 부드러운 융털 돌기 만나면

나비고기인 듯 잠시 잠에도 취해 보고

구름의 날개 가진 슴새처럼

너의 진동에 나를 맡겨도 보네

운이 좋은 날,

네 가장 깊고 부드러운 저장고, 청니(靑泥)에 닿으면

해골들의 헤벌어진 입이 나를 맞기도 하네만

썩을수록 빛나는 유골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너의 너울거림

그 멀미의 진앙지를 찾아 그리하여

페이지를 펼치고 펼치는 것이네, 그러나

너라는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

나는 보네, 보지 못하네

네, 혹은 내 혼돈의 해저 언덕을 방황하는

홑겹의 환어(幻魚) 지느러미

 

* 라니 마에스트로(Lani Maestro)의 사진집 제목.

 

다몽증(多夢症)

--- 몸

 

빨래들 수북하다

수돗물 나오지 않다

녹슨 물 변기에 가득하다

내려가지 않다

마른 옷들에 비누칠하다

몸 뜨거워지다

문지른 건 빨래 아닌 살덩이

집을 나서다

원색의 옷 입은 사람들

서로 바라보지 않다

햇살 환하다

살 껍질 꾸덕꾸덕 말라 가다

광장 한가운데 서다

누군가 어깨를 툭 치고 가다

한순간에

퍼즐의 몸 흩어지다

조각난 머리, 젖가슴, 허벅지, 무릎뼈가

밟히다, 짓밟히다

 

피어싱

 

아홉 개의 구멍이 모자랐어요

부패한 내장의 밍크 고래가 폭발하듯

나를 폭파시킬 수 있었다면 그리했을 거예요

 

콧방울, 혓바닥, 유두, 배꼽, 은밀한 그곳까지

바벨의 뇌관을 박는 거지요

하늘에, 땅에, 당신의 심장에 총구를 겨누는 대신

 

거추장스러운 몸뚱이에 거추장스러움을 더하는 일

(부정의 부정을 하면 긍정이라 당신이 말했지요, 이상한 문법)

 

무엇이든 뚫고 싶었어요

답답한 도시, 답답한 공기, 답답한 사랑, 답답한 당신들……

 

갈라진 혀로 조금씩 피 흘리며

껌 씹기, 침 뱉기, 사탕 빨기, 키스하기……

짜릿한 아픔이 퍼질 때마다 살아 있는 나를 느끼는 거죠

 

반짝이며, 잘랑이며, 아슬아슬하게 팽팽해져

이 거리를 활보할 거예요

부딪히는 것마다 터뜨릴 거예요

 

지루한건정말참을수없거든요

 

뚫어 보실래요, 당신?

 

덩굴손

 

머리도 없다

가슴도 없다

발도 없다

물론 오장 육부도

영혼도 없다

 

오직 하나뿐

 

손!

 

벽을 넘어뜨리며 죽으리라

 

마젠타

 

내 몸의 피를 조금씩 뽑아, 알뜰히 모아

당신을 칠해 드릴게요

 

흰 자위가 푸른 당신의 눈동자와 눈동자 속의 나

완고한 이마와 굳게 다문 입술

검은 옷자락 뒤 성실한 심장과

그 안의 헤아릴 수 없는 웅덩이까지

 

속속들이 당신이 붉어지는 동안

나는 점점 바래 가겠지요

 

진흙 속살의 얼굴이 되어

당신은 웃는군요, 우는군요 눈썹 가득 핏방울을 달고

 

경계가 뭉개지는 이, 목, 구, 비

빨라지는 박동 수 따라

등신불인 양 끓어오르는 몸뚱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마그마처럼 흘러내리는 숨결……

 

한 방울의 피도 남아 있지 않은 나는

타오르는 당신 곁에서 이제야 편안한 재입니다

미안……합니다

 

당 르 누아르*

 

어둠 속에선 누구나 알몸이 되나 보다

구석구석 붙어 있던 주머니들 사라지나 보다

눈과 함께 코도, 입도, 귀도 떼어져

새로운 더듬이가 자라나 보다

원시의 시력 되찾은 시선의 줄기들 벋어나고

소리 뒤의 소리 모이는 귓바퀴 넓어지고

구순기의 혀로 무엇이든 말랑하게 핥아 대고

동굴 속의 흰 지네만큼 수많아진 손, 발이

숨어 있는 것들과 섬세히 만나

두근거리는 하나가 되나 보다

아니, 온몸으로 최초의 긴 탯줄이 되어

조용하고 맛있게

만물을 삼키나 보다, 숨 쉬나 보다, 뿜어내나 보다

 

* 캥캥푸아 거리에는 한 점의 불빛도 허용되지 않는 '암흑 식당'이 있다. 이곳에선 시각 장애인 웨이터들의 안내를 받아 비장애인들이 장애자가 되어 식사를 즐긴다. 열흘 전에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성업 중이란다.

 

껍질

 

양들의 침묵, 그 미치광이

렉터 박사가 아니어도

피부는 모으고 싶지

퀼트처럼 조각조각 잇대어 보고 싶지

맘에 안 드는 얼굴은

깔아뭉갤 엉덩이로

분주했던 팔다리는

의연한 척하는 두피는

뜨거운 가슴으로

아니, 아예 여자를 남자로

천사를 악마로 바꾸어 보고 싶지

스무 살의 피부

마흔 살의 피부

오르가슴에 젖은 피부

고독의 소름 박힌 피부

때에 따라 적절히

갈아 붙이고도 싶지

늙은 피부는 얼마나 많은 사연을

능청스레 감췄는지

늘이고 늘여도 끝없이 늘어날걸

수줍은 창조주는 아니지만

이건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거룩한 제사

태우는 대신 벗겨 내어

한 땀 한 땀 다시 새기는

피의 박음질

껍질만으로 잘도 속는

시력 나쁜 세상에게

멋지게 복수하는 일

아니, 아니

그냥 농담 거는 일

 

만두

 

중국의 용문(龍門)에선

인간으로 만두를 빚었지

그곳의 만두 맛은 정말 특별해

한 번 맛보면 잊을 수 없지

 

인육을 구하는 건 쉽지 않지만

맛만 있다면 사람들은

먼 거리도 마다 않지

바람을 뚫고

모래를 뚫고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제 발로 찾아오거든

 

그날은 별미의 만두가 나오는 날

자모검을 쓰는 주방장은 보이지 않고

새벽녘 나오는 푸짐한 만두 속엔

알 수 없는 재료가

찰지게 반죽돼 있다네

 

나는 만두를 좋아해

만두를 맛있게 먹는 모습

바라보는 걸 더 좋아해

 

사랑하는, 망설이는 널 끌고

용문으로 가야지

허기진 네게

인상 깊은 만두를 먹여야지

만두소처럼 나로 너를

온전히, 맛있게. 그득하게 채워야지

 

복숭아

 

   사랑은…… 그러니까 과일 같은 것 사과 멜론 수박 배 감…… 다 아니고 예민한 복숭아 손을 잡고 있으면 손목이, 가슴을 대고 있으면 달아오른 심장이, 하나가 되었을 땐 뇌수마저 송두리째 서서히 물크러지며 상해 가는 것 사랑한다 속삭이며 서로의 살점 뭉텅뭉텅 베어 먹는 것 골즙까지 남김없이 빨아 먹는 것 앙상한 늑골만 남을 때까지…… 그래, 마지막까지 함께 썩어 가는 것…… 썩어갈수록 향기가 진해지는 것…… 그러나 복숭아를 먹을 때 사랑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베이글 만들기

 

나의 얼굴, 팔, 다리, 심장을 대접하겠습니다

 

           늑골의 강력분

           땀과 눈물의 소금기

           숨결 효모

          수줍은 미소의 당분 약간

          칠 할인 체액을

 

뽑아 반죽한 뒤 바닥에 세게 내리쳐 주십시오

오장 육부 속에 자욱이 들어찬

업의 가스, 한 번으로 빠질 리 없으니

이차 발효 공정이 필요합니다

미농지처럼 얇고 투명해질 때까지

고작 반죽 덩어리인 나를

당신 마음에 들도록 성형하십시오

(이때도 끊임없이 내 몸을 때려 여분의 잡념을 몰아내야 합니다)

 

환골탈태의 과정이 끝났다고 해서

그대에게 갈 수는 없습니다

예열된 오븐의 열기가 내 혼 깊은 곳까지 고루 스며야 하니까요

 

노릇하고 바삭하게 구워진 나

 

그래도 아직은 아닙니다

이때쯤 적당히 식혀 주십시오

너무 뜨거우면 피의 시럽 뿌릴 수 없으니

당신의 목이 멜 터이니

 

무뚝뚝한 껍질 뒤에 숨긴

무향(無香)의 다감한 속살

이제 그대만을 위해 내어 드립니다 기꺼이

 

치한이 되고 싶은 봄밤

 

너의 이미지는

늘 봄밤이었어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었지

불 질러 버리고 싶었어

네 화사함 뒤의 불순함

네 향기 뒤의 악취를

그건 쉬운 일이었지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했어

정공법으로는 어림없는 일

너의 아킬레스건을

순식간에 도려내리라

뜻밖에도 급소는

곳곳에 있더군

그렇게 보였어

비수를 들이댈 때마다

스---윽 너는

그러나 너는

온몸이 수렁인 양

칼을 삼켰지

그래도 나는 다시

칼을 찔러 댔어

그러면 너는 다시

칼을 삼켜 버리는 거야

봄밤이었으니까

 

가을날의 피에로

 

   살을 다 발라낸 물고기 한 마리

   수조 속에 던져진다

   주방장의 노련한 칼질에

   뇌가 아직 살아 있는 그것이

   푸른 쓸개도, 부레도 없는 그것이

   분장이 얼룩진 피에로처럼

   물속을 벌겋게 물들이며

   헤엄치기 시작한다

   탄성을 내뱉는 이들에게

   싱싱한 회 한 접시 내어 드리고

   대가리와 꼬리만 남은,

   피 흘리는 화석 같은,

   다 해진 물고기

 

   코와 목에 연결된 여러 가닥의 줄, 한 끼분의 식사가 튜브 속으로 흘러가는 동안 틀니 뺀 노모의 입은 느리게 허공을 씹는다 말을 할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입 눅눅하고 두꺼운 공기 속을 빈틈없이 채운 묵은내, 해마처럼 오그라든 몸 위 우멍한 두 눈, 부유물처럼 천정과 벽 사이를 더듬다 진종일 켜 놓은 화면 위에 잠시 머문다 클로즈업된 물고기의 헤엄이 서서히 찾아든다 늦가을 햇살의 꼬리가 창턱에 아직 남아 있다.

 

차디찬 고깃덩어리

 

양수리에 가다 보면

'두 근 반 세 근 반' 고깃집이 있어

두근거리며 당신을 기다리는

살덩이들이 있어

당신의 호명대로

허파며 간, 쓸개, 혓바닥, 뇌수에 핏물까지

아낌 없이 내어 줄 토막 난 몸뚱이

당신이 막힌 길을 뚫고

국도와 고속도로

번갈아 타며 달려오는 동안

감실 같은 진열대 안에서

혼마저 얼어붙을 냉동 창고 안에서

몇 날 며칠 숨죽인 채 기다려 온

날것의 시간들

드디어 당도한 당신이

식육의 허기를 애써 감추며

무언가 가리킬 때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도

전신을 내어 드리는

크고 맑고 슬픈 눈동자가 있어

순하게 꿈벅이는

보이지 않는 눈동자가 있어

 

곰국

 

그대 향해

굽은 등뼈

기고 기어 온 무릎

감추어 둔 꼬리까지

이제 그만 내어 주기로 한다

시원히 토막 내기로 한다

비린 핏물은 빼야지

부글거리던 속내도 거둬 내야지

징그러운 그리움일랑

아예 뭉그러질 때까지

더 이상 우려낼 무엇도 없어질 때까지

푹푹 고아

진하게

한 그릇 드려야지

엄살 없이

슬픔 한 점 없이

설마

나인 줄은 모르게

감쪽같이 뽀얘져서

고추 후추 듬뿍 뿌려

나인 듯 아닌 듯

자 드세요

곰처럼 미련했던 나의 평생으로 끓인

곰국입니다

 

절여진 슬픔

 

곤이젓, 창난젓, 아가미젓

저게 창자와 벌름거리던 숨구멍과

대구의 생식기였단 말이지

내 끊어진 애와

벙어리 가슴과

텅 빈 아기집도 들어내

한 말 굵은 소금에 절여 볼까

컴컴한 광 속에서

한 오백 년 푹 삭아 볼까

마늘, 생강, 고춧가루

듬뿍 뿌려 맛깔스레 무쳐 볼까

그대 혀끝에

올려진다면

그게 나인 줄도 모르고

삼켜진다면

그리운 그대 속내

알아보는 거야

원 없이 들여다보는 거야

 

언어로 가득한 주방

 

불과 칼을 함께 씁니다

절제의 저울과 계량 컵은 필수이지요

오늘의 요리는 '말라르메'입니다

 

재료 : 이슬 한 스푼, 검은 공포 두 뿌리

         구름 한 덩이, 고름 두 덩이

         안개 한 장, 지루함 약간

        빗방울 흠뻑, 쾌감 충분히

        지저귐 큰 스푼 둘, 불안 넉넉히

이외에 말없음표, 감탄 부호의 향신료들

 

마음 그릇에 재료를 고루 섞어 곱게 갈아 주십시오

오랜 시간 뭉근한 불에서 익힙니다 표면 장력이 최대치에 이르러

비등점이 되었을 때 불을 줄여 마디게 졸여 주십시오

재료가 눌어붙지 않도록 무심의 무쇠 솥을 써 주시고

극단의 방향으로 간간이 저어 주셔야 합니다

진한 '인생의 색'이 배어 나오기 시작하면

그대의 깊은 속에서 끄집어낸 혈흔과 깊은 한숨을 섞어 간을 맞추십시오

「목신의 오후」가 완성되었습니다

잘 씹어 드시기 바랍니다 비밀의 글자들은 갈리지 않은 채

여전히 남아 있을지 모르니까요

 

야생 보호 구역

 

나마스테,

내 안의 황야에게

황야의 굶주린 맹수에게

맹수의 발톱에게

피 흘리는 옆구리에게

옆구리에서 자라나는 가시에게

가시뿐인 덤불에게

덤불을 키우는 바람에게

 

침묵의 동굴에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어떤 사육사로도 길들여지지 않는

태양을 삼켜 버린 달처럼 빛나는

홀로인 야수

야수인 예수에게

합장.

 

마근(馬根)

 

말의 남근?

법명의 내력이야 알 수 없어도

스님의 민머리를 뵐 때마다

참으로 불경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

부도를 바라보며

남근을 떠올렸던

천진한 노(老)시인의 푸른 눈빛이 생각나네

 

장엄하나 벙어리인 책들이

성처럼 쌓여 있는

오후의 도서관

 

용마(龍馬)도 천마(天馬)도 있다지만

그들의 높은 날개보다

오늘은

본 적 없는

말의 뿌리를 잡아 보고 싶은 거네

그 거대한 근

온몸으로 받아들여

반쪽 아닌 온통으로

개안(開眼)하고 싶은 거네

하나 되고 싶은 거네

 

보름달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이제 낡은 몸을

바꿔야겠다

그동안 나는

죽은 나를

끌고 다녔다

하느님을 낙태시키고

천사의 무리들을

제거했다

여름 초저녁이다

보름달이 떴다

황홀한 울렁증을 겪으며

다시 수태를 꿈꿔야겠다

신비로운 밤의 분만실로 가

만삭의 몸을 뉘어야겠다

늙지 않을 나를

아무도 모르게

낳아야겠다

어미도 아비도

나인 나를,

 

위대한 암컷

 

한때 그녀는 명소였다

 

살아 있는 침묵

하늘을 낳고 별을 낳고 금을 낳는

신화였으므로

범람하는 강이며 넘치지 않는 바다

빛 없이도 당당한 다산성이었으므로

바람의 발원지

바람을 재우는 골짜기

제왕도 들어오면 죽어야 나가는

무자비한 아름다움이었으므로

요람이며 무덤

영혼의 불구를 치유하는 성소

꺼지지 않는 지옥 불이었으므로

만물을 삼키고 뱉어 내는 소용돌이의 블랙홀

곡신(谷神), 위대한 암컷이여

 

여전히 그녀는 명소다

수많은 자들의 탐험이 있었으나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은밀한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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