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6 萬人譜 21
高銀
2006, 창비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809
811.6
고667만 21
창비전작시
스웨덴 Svenska Dagbladet가 뽑은 '2005 올해의 책'
옛일은 참혹했던 일까지도 향수를 느끼게 한다. 이번 고은 선생의 『만인보』에 그려진 4 · 19도 그러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것은 지금의 눈에 비치는 당시의 일들이 어떤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신문팔이 소년의 용기가 계엄군을 돌아서게 하는 이야기는 그러한 순진성 또는 순수성을 드러내준다. 이것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 시인의 시심이 그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인보』는 민족 또는 민중의 서사시이다. 서사시에는 영웅이 있게 마련이고, 이 시의 영웅은 민중이지만, 모든 것이 민중이데올로기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만인보』는 정치와 관련 없는 민중의 삶, 더 나아가 혁명의 적에게도 열려 있다. 여기에 실린 「어느 임종」은 죽음에 임하여, 독수리에게 자신의 주검을 내맡기며, 내생을 사절하는, 도인의 초탈을 읊고 있다. 『만인보』의 시심은 정치를 넘어, 이러한 초연함과 일치하고, 다시 한 없는 자비심과 일치한다. ● 김우창 문학평론가, 고려대 명예교수
『만인보』는 이번 세기 세계문학에서 가장 탁월한 기획 가운데 하나다. 그 시들은 더할나위 없이 감칠맛 나고, 사람들 삶의 세목으로 충만하다. ● 로버트 하스(Robert Hass)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서평
그는 무엇보다 시적 영감을 얻은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적, 정신사적 영향력을 지닌 백과사전이다. 통찰력과 풍자와 온정을 갖고 이 차가운 불빛 속에서 인간적 자연의 하약함과 유혹을 드러내 보여준다. ● 얀 칼손(Jan Karlsson) Kristianstadsbladet 서평
윤회하는 세속의 그의 인물들은 무아의 경지에서 가장 강하다. 시들 속의 이야기는 마술퍼럼 마을과 밭과 개들, 그리고 새들과 인간들과 시간의 흐름을 내포한다. ● 스웨덴 국영라디오 'P1' 서평
고 은 高 銀
1958년 처녀시를 발표한 이래 시 · 소설 · 평론 등에 걸쳐 14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다. 서사시 『백두산』『만인보』와 『고은시선집』 1 · 2 『고은전집』(전38권) 등을 출간했고, 전세계 10여개 언어로 50여권의 시집 · 시선집이 간행되어 큰 반향을 얻고 있다. 현재 세계 시아카데미 회원(한국대표)로 세계시단이 주목하는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방의 태양을 쏘라
조명암(趙鳴岩)
동방이 얼어붙었다
태양의 붉은 피가 얼어붙었다
젊은이여 이 고장 백성의 아들이여
손에 든 화살을 힘주어 쏘아보아라
태양의 가슴의 붉은 피를 쏘아 흘려라
백성이 광명에 굶주리고
강산의 줄기줄기 숨죽여 누웠으니
허물어진 옛터
님의 꽃잎 하나 둘
……
화살을 쏘라
동방의 태양을 뽑아내라
피 끓는 심장에 불을 붙여
님은 봉화 재 우에 높이 들고 서서
산과 들 곳곳에 이날의 레포를 아뢰어라
차례
시인의 말
어떤 임종 / 지족 / 춤 몇대 / 사색풍경(四色風景) / 어머니의 정수리 / 장충동 판잣집 대장 / 할머니의 젖 / 김주열 / 유대평 씨 / 고교생들 / 신나명 / 김정렬 / 김효덕의 아버지 / 김위술 / 고(故) 김상웅의 넋두리 / 구두닦이 / 사라호 해골 / 그 형제 / 꿈 / 이대우 / 용실이가 죽어서 왔어 / 의규군의 아버지 / 백암의 꿈 /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 / 손진흥 / 신호덕이 / 여순경 김숙자의 웅변 / 유정천리 / 이장 고재순 / 마산공고 2학년 이종모 / 그의 일생 / 노원자 / 옥봉이 / 임옥남 / 박정덕이 마누라 / 그들 9형제 / 닭 두 마리의 마당 / 청주여고 2학년 신순옥 / 대전고 / 유해성 / 김효성 / 춘천고교 설정일 / 교장 김석원 / 이 충혜왕 / 동래고 유수남 / 이의남 / 박우영 / 절도 8범 / 정추봉 / 거지 / 이상은 / 이영민 / 이정길 / 채섭 채철 형제 / 평생 침대 / 생선가게 오영감 / 최기태 / 발산리 새댁 / 김선인 / 허정 / 이문길 / 어느 어머니 / 진영숙 / 진영숙의 아버지 진명옥 / 이상은 / 강명희 / 임화수 / 임화수들 / 김순자 / 이옥비 / 4월 266일 / 김경진 / 김재우 / 야산 이달 / 박우택 / 박수만 / 국민대 김수현의 결혼 / 앉은뱅이 종석이 / 박종구 / 윤석길 / 태관동 / 씻김굿 가족 / 백원배 / 장충식 / 김치호 / 정대근 / 김효덕의 어머니 / 김영호 / 오성원 / 그 어머니 주경옥 여사 / 두 혼백 / 아버지의 염불 / 어머니 이계단 / 아우 이중하 / 4월계 / 김분임 / 김정돈 옹 / 김광렬 / 어머니 이춘란 / 옛 꽃다발 / 신형사 / 이종양 / 전성천 / 화물차 감옥 / 그녀의 밤 / 김두철 / 가루 / 김기선 / 김유만 / 이강욱 / 이강석 / 그 할아범 / 프란체스카 도너 / 박마리아 / 승마 출근 / 어떤 낚시질 / 한상철 / 윤광현 / 김준호 / 이성남 / 안국동 덕성여중 3학년짜리 / 김창호의 관 / 박점도 / 이채섭 / 심정구의 어머니 / 명남이 / 어떤 쌀도둑 / 남기춘 고모의 넋 / 김왈녕 / 심은준 / 박철수 / 김창필 / 최현철
어떤 임종
바람이 온다 나는 간다
몽골독수리 둘이
나를 본다
이내 내려앉으리라
내생 필요없다
사색풍경(四色風景)
차츰 근세 조선정치는 제 본색에 접어들어
동인
서인이라
그 지긋지긋한 임진 정유 전란중에도
동인
서인이라
그러다가 동인이 갈라져
남인
북인이라
서인이 갈라져
노론이라
소론이라
심지어 옷맵시도 갈라져
노론의 저고리 옷섶은
둥글둥글 접혔고
소론의 저고리는
모가 났더니라
어디 바깥뿐인가
노론의 집안 아녀자 치마는
굵은 주름
소론의 치마는
여러 주름이더니라
아니 노론 풍류는
천하절경을 바라볼 때도
으음
소론 풍류는
허허
이것이 근대 독립운동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썩은 동앗줄로 이어지는
기나긴 당질(党疾) 아니던가
오늘밤 나 또한 나의 노론이고 나의 소론 아닌가
유대평 씨
밥 한 숟갈에 쌀알 3백개
밥 열 숟갈에 쌀알 3천개라
한끼 스무 숟갈이면
밥알 천개라
그러니 하루 세 끼면 밥알 1만 8천개 아닌가
내 입이 너무 크다
내 밥통이 너무 크다
긴 장마철
문 처닫고 70일 금식으로 숨진 도사 유대평 씨
비 그쳤다
구두닦이
열다섯살에 세상에 나갔다
아니
처음부터 그에게는
세상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홀어머니 어디로 시집갔다
삼촌집에 있다가 나왔다
차라리 세상의 찬 바람이 좋았다
빈 몸 하나
처음 1년은
구두닦이 아저씨 밑에서
단골손님 구두를 벗겨왔다
그 다음
구두닦이 견습
구두닦이 4년째
이제 시장 입구 곰살궂게 자리잡았다
190년 3월 15일 시위대열에 끼여들었다
함께 달려가다
가슴팍이 뜨끔 그리고 쓰러졌다 숨졌다
신마산 구두닦이 23명이 돈을 내어
죽은 동료를 장사지냈다
오성원 여기 잠들다
백암의 꿈
상하이 임정 대통령
백암 박은식 각하께서는
어느날 밤
빗소리 들으시다 잠든 밤
금나라 태조를 꿈속에서 뵙고
큰절을 올리셨다우
이런 순 오랑캐 짓거리라니
그러나 금나라는 여진
여진은 발해
발해족은 마한족 이주자
엄연함이여
두루 드넓은 만주 연해주 일대가
서로 어우러진
내 더운 핏줄 갈래갈래들이라우
꿈 깨어나서
큰절 올려도 무방하다우
오직 그것뿐 오직 영세일계(永世一系)의 왕검 자손 어디 계시나
신호덕이
이른 봄 배고픈데 똥거름 냄새 푸짐하구나
보리밭머리
뚝새 냉이 벌금자리 캐는 호덕이
하늘 속 종달새가 도리어 귀기울여 내려다보는지 몰라
호덕이 저 혼자 노래하고
노래 듣누나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사랑도 하나……
유정천리
1960년 2월 15일
야당 대통령후보가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죽었다
야당 후보의 죽음 두번째였다
대폿집이 만원이었다
고교생의 빵집도 만원이었다
대구 경북사대부고 2학년 학생
오석수
이영길
유효길
그 세 녀석이 유행가 「유정천리(有情千里)」 곡에
조사(弔辭)를 지어 붙여
개사곡을 불렀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박사도 떠나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길은 몇 구비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온다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춘삼월 15일 조기선거 웬말이냐
천리만리 타국땅 박사 죽음 웬말이냐
설움 어린 신문 들고 백성들이 울고 있다
교내에 퍼져갔다
시내에 퍼져갔다
전국으로 퍼져갔다
세 녀석 무기정학
내무부장관 최인규
책상바닥 내려치며 가로되
천인공노할 놈들 왜 그놈들 정학처분으로 끝내는가 당장 퇴학시켜라
그의 일생
나의 아버지가 빨갱이였다 합니다
나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나의 삼촌이 빨갱이였다 합니다
나는 아닙니다
나의 매형이 빨갱이였다 합니다
나는 아닙니다
나는 아닙니다
세월이 가혹했습니다 까마귀떼가 활발했습니다
나는 억지춘향 빨갱이가 되었습니다 맞아죽었습니다
망우리 공동묘지 동쪽 비탈 덤불
그가 고요히 묻혀 있다
영영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 없다
이 충혜왕
허허 이 왕 좀 보소
고려 제28대 충혜왕
정작 왕권은
원나라 천자께서 가져갔으니
황음(荒淫) 삼매에 드셨던가
왕에게는
거기에 안성맞춤인
어의(御醫) 유광렬이 대령하였것다
마마께서
동녀(童女) 100명에게 은총을 베푸시오면
마마께서 100년을 계시옵니다
이 말 뒤
여진 산삼
향산 녹용
사산(四山) 흰 뱀을 강정보약을 대령하였것다
마마께서 밤마다 전국 동녀 100명을 불러들여
성은망극의 은총을 베푸셨것다
그 100명 뒤 코피 두 사발 쏟으셨것다
허허 아예 서기를 작파하시고
앉기를 작파하시고
누워버리셨것다
며칠 누워 계시다가 그만 승하하셨것다
왕이라 함이
나라는 지키는 것
나라를 키우는 것
나라 안의 굶주림을 줄이는 것
나라 안팎의 문물을 떨치는 것
이런 왕업 저쪽에서
나라의 청색 짓밟고 쭉 뻗어버리는 것인고
평생 침대
이유순
4월혁명 한 가녘에 나섰던 처녀 예쁘고 곧은 처녀
서울 을지로2가에서
경찰 곤봉 맞고
경찰 총탄 맞았다
그녀의 허리
그녀의 좌측 좌골이 거덜났다
일어날 수 없다
일어설 수 없다
누워서
밥 먹고
누워서 오줌 눈다 똥 싼다
그 침묵의 얼굴이
이따금 웃음을 보였다
평생 누워 있다
나무들은 평생 서 있고
나는 평생 누워 있다고
찾아온 친구에게
그녀가 말한 적이 있다
그뒤로
그런 말도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수천개의 하루가 오고 또 왔다
혁명도 곧 거덜나 검은 안경 육군소장 쿠데타의 시대가 왔다
누워서
바람에 휘날린 적 없는 머리칼 오똑한 코 말없는 입술 감은 눈 빈 이마
빈 가슴
고요하고 고요하다
임화수들
4월 18일 저녁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까지 나아갔다 자랑스럽다
고대생들이
대학으로 돌아가는 길 자랑스럽다
다음날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혁명의 전야를 장식했다
돌아가는 길
동대문 부근
종로5가
천일백화점 앞
쇠갈고리
곡괭이
쇠사슬 들을 휘둘렀다
때려눕혔다
자랑스럽던 고대생들 하나둘 널브러졌다
피가 튀었다
임화수는 임화수들
그 깡패들의 학살이 시작됐다
이 학살에 격분
다음날
모든 대학생과
고교생
중학생 들이 뛰쳐나왔다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야 했다 혁명이 왔다
4월 18일의 학살로 4월 19일의 환희가 왔다
야산 이달
『주역』 통달
야산 이달 선생
괘 뽑아
대구 미두장에서
소 한 마릿값 10원일 때
허어 3천만원을 대번에 벌었다
1924년 봄
다음날
열두살 장남 건화가
용돈 좀 달라 했다
따귀를 쳤다
이놈아
이 돈이 내 돈인 줄 아느냐
이 돈은 조선 백성의 돈이다
차남도
삼남도 어림없었다
그 거액을 만주로 보냈다
자금책 임주동
연락책 이상춘 들이
잘도 전달
임주동은 대종교 나철의 의발(衣鉢)을 받은 사람이었다
1929년애도 이달 선생
만주로 독립운동자금 보냈다
광산 개발
광산 15개 지구
그리고 철원에 70가구 공동촌을 만들었다
『주역』 철리에도 으뜸
명리에도 으뜸
그러나 어느 곳에도 그의 정처 없다
늘 바람 속이었다
늘 구름 속이었다
조선의 밤하늘 총총한 별빛 속이었다
1889년 태어나
198년 죽었다
그녀의 밤
남편은 혁명진압의 경찰기동대장
벌써 엿새째 집에 오지 않았다
장바구니 들고
동대문 신설동 카바레에 갔다
실내
어둠이 좋았다
어둠 속에서 블루스가 좋았다
제비사내 따라나섰다
바깥세상
어둠이 좋았다 사내 뒤가 좋았다
동일여관 구석방
한 여자의 육체가 살아난다
죽어도 좋다고
넋 놓으며
1960년 4월 어느 봄밤
한 여자가 뜨겁게 살아난다
한 여자의 음란한 혁명이었다
그 할아범
이승만의 독재가
혁명에 졌다
그의 쓰디쓴 입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85세였다
그 이승만과 동갑인 할아범
전남 장흥군
남녘 유채꽃 눈부신 득량만 개펄마을
옛날 농민혁명군 남은 병력
마지막
마지막 진지였던 울지리
그곳에서
굶주린 농민혁명군에게
밥을 해준 어머니의
살아남은 막내아들
관군에게
부모와 형들 다 도륙당하고
어찌어찌
살아남은 막내아들 오달복
그 할아범이 동갑내기 대통령의 신세를 한탄했다
곰방대 꺼진 담뱃불 다시 붙여 빨았다
가슴속 울적
허어
하야가 아니라 주어야 허는디
팍 죽어번져야 진짜배기 하야가 되는디
나도 그만 살고
어서 죽어버려야 쓰겄는디
끝을 왜 이리 질질 끌어
박마리아
부족을 못 견딘 여인
민족을 못 견딘 여인
이승만의 마누라 프란체스카가 그녀에게 너무 가까이 있었다
아 모든 근원은 무능하구나
승마 출근
1949년 대한민국 정부 기틀이 제법 잡혀갔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그대로 대한민국 중앙청
농림부는 서울역 부근
내무부는 명동 입구
체신부는 정동 입구
차도 제자리 포도 제자리
각각 기틀이 잡혀갔다
국무총리는 중앙청
전국 공무원 집무시간 금주령을 내렸다
그럭저럭
정부 기틀이 잡혀갔다
베니어판 책상도 의자도 새로 맞췄다
국장 과장 명패도 맞춰다놓았다
공무원증도 발부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총독부 때 쓰던 것을
그대로 썼다
전국 공무원 집무시간 금주령을 내렸다
그러나 오정남도 오정군 오정면사무소 호적계
만년 서기 한판남은
호적등본 한자 한자 써서 발부해주고 한잔
호적초본 한자 한자 써서 발부해주고 한잔
낮 2시면
벌써 막걸리 곤드레로
천하태평 코를 골았다
그러나 중앙청은 쉬쉬쉬 금주령이 두려웠다
아침 8시 국무총리 이범석은
그가 만주벌판 독립군 그대로
자동차를 타지 않고
군마를 타고
독립군 영의정이라고
허리 꼿꼿 뽐내며 출근했다
그의 비서관 이개동도
어디서 구한
노새 한 마리 타고 충직하게 뒤따랐다
그런데 그 이개동이
남로당 지하당 첩자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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