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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27. 15:18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93 오래된 서울

 

최종현, 김창희 지음

2013, 동하

 

 

대야도서관

SB089459

 

911

최75ㅇ

 

'서울학' 창설의 주역과 그 전파자가 눈이 무르도록 자료를 뒤지고

발이 부르트도록 골목을 누빈 끝에 빚어낸 『오래된 서울

 

모처럼 묵직한 읽을거리가 탄생했다. 서울에 대한 책이지만 대하드라마처럼 장대하고 탐정소설처럼 흥미진진하다. 그러면서도 학술논문보다 더 학술적이고 문화비평보다 더 비판적이다. 풍부한 이미지에 민정기 화백의 '삽화'들까지 곁들여져 보는 맛 또한 특별하다. 저자들은 '최근의 기억까지 사정없이 지워진' 서울에서 고려 남경의 옛 흔적을 찾아내고 인왕산 아래 서촌에서 선대들의 못 다한 꿈을 되살린다. 경화사족에서 중인, 친일파, '모던 보이'를 거쳐 현대사의 격랑에 '미아'가 된 사회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꿈의 주제들과 엇갈린 입장은 그대로 아픈 우리 역사의 축도다. 저자들은 힘주어 말한다. 전통과 역사는 먼 데 있지 않고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에 새겨져 있다고, 그리고 그 땅에 새겨진 기억을 반추하지 않은 채 만드는 현실은 비루할 뿐이라고, 이 책은 오랜 내공의 소산이다. '서울학' 창설의 주역과 그 전파자가 눈이 무르도록 자료를 뒤지고 발이 부르트게 골목을 누빈 끝에 빚어냈다. 박물관이 했어야 할 일을 대신, 그리고 더 잘해낸 저자들에게 감사와 찬사를 보낸다. ___ 강홍빈(서울역사박물관 관장)

 

화가들의 몇 가지 앵글을 찾아낸 것은 꽤나 지난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안평대군, 정선, 이인문과 김홍도, 다들 한 시대를 풍미한 대가들이고, 그들의 작품 역시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 작품들의 현장을 일일이 찾아 그런 앵글들을 확인하는 것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언덕 저 언덕을 몇 차례씩 오르내리고, 손에 도판을 든 채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며 ' 저 앞의 건물이 없다면 어떻게 보일까?' 일일이 맞춰보는 것은 보통의 인내심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저자들은 그런 유명한 작품들이 어떤 지점에서 어떤 시각으로 무엇을 본 것이라는 식으로 사실 확인만을 하는 데에 그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넘어서서 그런 앵글이 갖는 의미를 천착하고 싶었다. 왜 굳이 그런 앵글을 잡았는지, 그런 앵글로는 무엇이 보이는지를 찾아보려 했다. 왜냐하면 그런 앵글들은 당대인들이 땅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 나아가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관점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가지 앵글들 가운데 이인문과 안평대군의 그것이 바로 그 예다.

(…) 저자들의 당초 의도는 답사안내서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서울의 어디에 가면 무엇이 있으며, 그것의 역사적 맥락은 어떤 것이라는 설명을 제공하는 책은 무수히 많다. 그 책들의 대개의 공통점은 이야기가 분절적이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들의 맥락을 가능한 수준에서 한 줄에 꿰어 보여주는 책을 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저자들은 외람되게도 장소와 사람의 관계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종합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그것은 도시학 또는 도시사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기도 했다. ___ 「에필로그」 중에서

 

최종현 崔宗鉉

1945년 중국 심양 출생.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우리나라의 도시 및 취락 역사를 필생의 연구분야로 설정하고 전국을 발로 뛰며 눈에 담고 기록으로 남겼다. 자연히 땅 - 도시 - 건축 - 인간의 유기적 관계가 시야에 들어오면서 지금껏 이를 정식화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2011년 한양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직에서 정년퇴직한 뒤 오히려 연구가 탄력을 받고 있다면서 자신이 설립한 사단법인 통의도시연구소에서 샘솟는 의욕으로 '한국 전통건축에서의 정면성', '한국 도시의 입지와 구조', '옛길에서 만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등의 연구주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궁극적인 관심사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과 도시를 건강하게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소박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김창희 金昶熙

1958년 경남 통영 출생.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동아일보와 프레시안에서 20여 년 언론인 생활을 했다. '표현의 자유'와 '역사기록으로서의 언론'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지만 포기할 수 없는 엄중한 과제라는 점을 그때 배웠다. '서울 정도 600년'과 관련된 일련의 기사를 준비하던 1992년 최종현 교수와 처음 만나 도움을 받은 이후 공동작업을 구두선처럼 얘기하다가 드디어 첫 결실을 만들어냈다. 앞으로도 이 행복한 동행아 이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땅이나 공간과 같이 궁극적으로는 말로 번역이 불가능한 것을 말로 옮기는, 역시 쉽지 않은 일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한양도성도」 채색필사본, 129.5×103.5cm, 18세기 중엽,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차례

 

오래된 서울

들어가는 글 ● '오래된 서울',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제1부 서울의 탄생

 

서울의 원점을 찾아서

· 서울의 나이는 600년인가 2,000년인가

· '서울의 원점 = 사대문 안'은 600년전 갑자기 생겨났을까

· 남경의 흔적을 찾아서

· 서울의 원점에 서다

 

삼산양수를 찾아서

· 의미심장한 고려 말 100년

· 삼산양수는 어디인가

· '사냥터'와 '이상향' 사이

· 유교와 불교의 합의 과정

· 다시 생각해보는 '삼산양수'

 

고려시대의 길을 찾아서 1

· 서울로 가는 길

· 한양에 들기 전 의관 정제하던 남경역

· 워터레벨을 따라 형성된 서울의 프로토타입

· '아름다운 청년'과 '향기로운 산' 마주보다

 

고려시대의 길을 찾아서 2

· '향교동'에서 길을 묻다

· 홍어집, 점집, 요정, 한복집… 푸근한 길

· 고려에서 조선으로 건너뛰는 길

 

제2부 꿈꾸는 인왕산

 

꿈꾸는 인왕산 1 : 왕실의 터전

· '땅' '물길' '하늘'을 읽으면 도시가 달라 보인다

· 태종과 세종이 '왕의 꿈'을 익힌 동네

· '왕의 꿈'과 '왕이 될 수 없었던 왕자의 꿈'

· 안평의 앵글

 

꿈꾸는 인왕산 2 : 모진 인연의 고리 속에서

· 경덕궁 또는 경희궁, '왕기설'의 실체

· 인경군, 내쫓긴 자리로 다시 돌아온 백성들

· 자수궁, 옛 여인들의 자취

· 기억정치, 과거를 상기하되 미래를 겨냥하는

· 육상궁에서

· 같고 또 다른 왕실의 꿈

 

질곡 속의 희망 찾기 1 : 서촌, 선비의 동네로 거듭나다

· 목소리는 없었으되 큰 울림으로 남은 사람

· 아직도 숨어 있는 대은암, 지척이지만 갈 수 없는 곳

· '경치'에는 두 가지가 있다

· 스님에게서 비롯된 장의동과 청풍계

· 옛길을 찾으면 도시가 보인다

 

질곡 속의 희망 찾기 2 : 선비들의 자신감, 정점에 서다

· '백세청풍'의 계곡에 충절과 의리를 심고

· '맑고 시원한 동네'에서 최고조에 이른 시대정신

· 옥류동, '맑음' 혹은 '흐림'

· 옥류동과 청휘각은 어디에

· 이항복과 후손 이희영이 공존하는 서촌

· 「인왕제색」에 담긴 희망의 빛

 

옥계에서 꾸는 꿈 1 : 중인들, 시대를 타고 넘다

· 옥계, 사대부와 중인이 공존하던 지역

· 최고의 화원을 통해 그림을 남긴 뜻

· '송석원', 삼중의 의미를 갖다

 

옥계에서 꾸는 꿈 2 : 중인들, 승리하다

· 다시 '송석원'으로… 그 각자는 어디로 갔을까?

· 그림을 읽으니 도시가 보인다

· 중인문화의 절정, 송석원시사

· 꿈꾸는 옥계

 

제3부 서촌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

 

꿈을 잃은 서촌 1 : 친일파들의 폭력이 휩쓸다

· 정체성 변화로 몸살 앓는 서촌… 친일파들이 몰려들다

· '한양 아방궁'… 큰 것은 좋다

· 세도정치의 현장으로 전락한 송석원

· 한 시대의 폭력적 청산

· 벽수산장과 윤덕영

 

꿈을 잃은 서촌 2 : 조상의 터전에서 제 정신 갖고 살기

· 동농 김가진은 누구인가

· "깊은 밤 잠들어 꿈속이라 몇이나 깨었을꼬"

· 상하이에서… 계속되는 생각의 진화

· 남는 문제들

 

다시 꿈꾸는 서초 1 : 함께 걷는 길

· '천재'를 '박제'로 만들어버린 곳

· 아름다운 동행

· 그의 괴로움에는 정말 이유가 없었을까

· 말을 하면 바로 시가 되던 시절

 

다시 꿈꾸는 서촌 2 :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길

· 사회운동과 미술, 포기할 수 없는 두 축

· 서촌에서 다시 만난 형제, '민족'을 발견하다

· 해방정국… 설 자리를 잃다

· 암흑을 이기고 세상으로 나온 빛

 

서촌에서 역사의 파도에 실종된 여인들

· 종달새, 노래를 잃다

· 시인, 길을 잃고 서촌에 유폐되다

· 앨리스 현, 남에서도 북에서도 설 땅을 못 찾다

· '옥인동 사람' 현순 - 앨리스 현 부녀의 동행

· '특이한 존재'의 가는 길

 

오늘의 서촌 : 결코 끝나지 않은 꿈

· '정직한 화공'의 마지막 불꽃

· 결코 끝나지 않은 꿈

 

에필로그 ● 서울의 내일을 향한 꿈

참고문헌

도판출처

찾아보기

「서울지도(Map of Seoul)」(동판본, 45.6×45.2cm, 1902년) 일부

서울시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 경계에 위치한 아차산 제5보루에서는 한강 유역과 그 남쪽 지역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이 보루는 5~6세기 무렵 이 지역을 차지했던 고구려가 백제의 동태를 살피고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것이었다.

서울시 북한산 비봉의 정상에 서 있는 진흥왕 순수비. 사진의 비석은 모형이며, 원본은 국보 제3호로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아차산 보루와 함께 이 순수비도 서울 지역이 삼국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이었음을 증명한다.

「경복궁전도」를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경복궁 터전의 지형과 물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자연 하천의 물길을 살려 향원정과 경회루 연못, 금천교 등을 경유하게 유도한 점이 눈길을 끈다.

정도전. 조선 건국기에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흥 사대부 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방원과의 갈등으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죽는 바람에 조선시대 내내 그늘에 가려 있었으나 그가 새 왕조의 설계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무학. 그 역시 조선 건국기에 이성계의 측근으로서 큰 역할을 했고 특히 서울로의 천도에는 불교계를 대표해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조선시대의 역사는 전혀 온당한 대접을 하지 않았다.

세검정 쪽에서 자하문 고개로 막 올라서면 나타나던 창의문 모습. 조선시대 말기인 1890년대에 외국인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도 이곳에 이르면 비로소 남경에 도착한 셈이었다. 어느 시대이건 이 고개길은 서울의 관문 역할을 했다.

19세기 『대동여지도』 중의 「경조오부도」.

18세기에 제작된 「한양도성도」(삼성미술관 LEEUM 소장, 위)와 1927년도에 제작된 「경성시가도」(아래)에서 종로와 청계천 사이의 골목길을 비교해보자. 동서로 길게 이어지는 몇 개의 비슷한 루트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영조의 청계천 준천 직후인 1765년 제작된 「사산금표도」(목판본, 93×60cm, 1765년). 청계천이 오간수문으로 나가기 직전 양쪽에 '가산(假山)'이 표기돼 있다. 흥인지문 밖 안암천 물길이 한번 휘어 도는 위치의 구릉지 바로 아래에 고려시대 남경역의 후신인 '보제원'이 적시된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

「수선전도」 중 창의문 넘는 길이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게 표기된 부분.

1930년대에 촬영된 서촌 지역의 항공사진. 경복궁과 조선총독부의 서쪽에 가득 들어찬 집들과 그 사이를 누비는 물길, 골목길의 위치가 선명하다. 사진 왼쪽 가장자리 중간에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 '사직단'이며, 거기서 남동쪽으로 뻗은 길을 따라 내려오다 만나는 대형건물군이 인경궁 터전에 그때까지 남아 있던 '청평위궁'이다. 그러나 이 무렵이면 이미 일제 식민당국의 대토지 점유가 많이 진행돼 사진 왼쪽 하단의 주택단지는 경희궁을 잠식하고 들어선 '전매국 관사'이며, 경복궁 담장 서쪽의 단지는 창의궁 자리에 들어선 '동양척식주식회사 관사'다. 사진 왼쪽 위의 인왕산 기슭에 홀로 뚝 떨어져 있는 서양식 건물은 윤덕영의 '벽수산장'이다.

1902년 동판으로 제작된 「서울지도」 중 서촌 부분. 준수방도 보인다.

인왕산 아래 자하문로변에 위치한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바로 그 자리가 위의 지도에 '준수방(俊秀坊)'이라고 표기된 지역이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간송미술관 소장) 중의 「수성동」. 이 그림의 기린교 건너 왼쪽 바위 뒤쪽에 안평대군의 비해당이 있었다.

김영상이 1950년대 말에 촬영한 기린교.

인왕산 수성동 계곡의 최근 모습. 화면 왼쪽 중간의 바위 계곡에 걸쳐진 돌다리가 기린교다. 1751년 겸재 정선의 그림과 그로부터 200년 후의 사진에 나타났던 소박한 돌다리가 21세기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몽유도원도.

최근 장서각에서 발굴된 청평위궁의 도면이다.

유일하게 한 장 남은 자수궁교의 사진. 이 다리는 1927년 자하문로가 복개되고 확장되면서 지하에 파묻히고 말았다. 오른쪽 뒤의 산이 북악산인 점으로 미루어 남쪽에서 북쪽을 보고 찍은 사진이다. 따라서 자수궁은 오른쪽의 건물들이 아니고 이 사진에 나타나지 않은 왼쪽 나무가 우거진 안쪽에 있었던 것 같다.

창의궁에서 창의문까지 서촌의 영역 전체를 보여주는 「한양도성도」의 일부. 청계천 상류에 해당하는 물길 본류에 3개의 다리가 표시돼 있다. 남쪽에서부터 '금청교'는 지금의 경복궁역 2번 출구 앞의 적선시장 입구에, '수궁교(자수궁교)'는 신한은행 효자동지점이 있는 효자동사무소 앞 사거리에, '신교'는 푸르메자활센터가 위치한 청운동사무소 앞 사거리에 각각 있었다.

「한양도성도」 중의 창의궁 주변. 동쪽으로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북쪽으로는 경복궁의 서쪽 문인 연추문(영추문), 서쪽으로는 '금청교' 너머로 체부동과 인경궁 등이 각각 자리 잡았고, 남쪽으로는 대단히 복잡한 도시 구성을 보이고 있다. 서십자각과 월성위궁, 내자시, 장흥교 등이 있었으며, 송담교는 종침교의 다른 이름이다.

현재 청와대와 담장을 끼고 있는 칠궁은 조선시대 왕의 생모로서 죽은 뒤 종묘에 합사되지 못한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당초 이 자리에는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 씨의 육상궁만 있었으나 나중에 후궁 6명의 사당이 더 옮겨와 칠궁이 되었다.

겸재 정선의 『 장동팔경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755년) 중의 「 청송당 」.  화면 중앙의 큰 건물이 청송당이고 그 아래 작은 건물 앞의 바위에 후대 사람들이 '청송당 유지'라는 바위 각자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지금 경기상고 뒤뜰에 있는 '청송당 유지' 바위 각자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의 「대은암」.  건물 뒤쪽으로 시커멓게 표시된 큰 바위 두 개가 보이지만 어느 것이 대은암인지는 분명치 않다. 청와대 뒤뜰과 북악산 자락이 개방되어야 확인할 수 있겠다.

사진으로만 전하는 북악산 자락의 여러 바위 각자들. 위는 김영상이 촬영한 '도화동천', 아래는 청와대 경호실에서 촬영해 공개한 '쌍계동', '악록' 등이다.

겸재 정선의 「삼승조망」(개인 소장, 위) 「장안연우」(간송미술관 소장, 가운데) 「동대상춘」(개인소장, 아래)

서촌 지역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낸 정선은 서촌의 풍경을 많이 남겼는데 각각 다른 시기에 그려진 이 석 점의 그림은 서촌의 전경을 파노라마식으로 매우 아름답게 담았다. 이는 틀림없이 그의 서촌을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였을 것이다. 세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남산의 위치가 화폭에서 조금씩 이동하고 있는 것을 눈여겨 보면 정선의 앵글을 추정할 수 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 「창의문」. 이 그림에 나타난 촘촘한 계단이 지금 창의문로 위와 아래로 난 바로 그 계단으로 계승되었다. 창의문에서 내려오던 계단이 한번 꺾이는 위치에 지금 최규식 경무관 동상이 서 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 「백운동」.  창의문에서 내려오는 계단의 서쪽 지역이다. 이 지역은 나중에 김가진의 백운동천과 백운장 영역으로 계승된다.

1927년에 발간된 「경성시가도」 중의 서촌 물길 부분. 파란 색 물길로부터 그 동쪽의 골목길까지의 영역이 합쳐지고 직선화돼 지금의 자하문로가 되었다. 지도 상단의 물길 바로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 경복고등학교(당시 제2고등보통학교)이고, 그 동남쪽의 건물군은 지금의 '칠궁'인데 덕안궁이 합사(1929년)되기 전이어서 '육궁'이라고 표기돼 있다.

겸재 정선의 「청풍계」(간송미술관 소장, 1739년, 58.8×133cm).  상당히 큰 그림이지만 화면 가득 청풍계의 짙은 녹음과 바위 절벽, 그리고 그 사이 사이에 보이는 듯 숨은듯 자리 잡은 건물들이 인상 깊게 표현됐다.

겸재 정선의 또 다른 「청풍계」(고려대 박물관 소장, 1730년, 36×96.2cm).  간송본에 버금가게 큰 그림으로 넓은 범위의 청풍계 전경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청풍계 안팎의 음영이 확연하게 구별된다.

'백세청풍' 각자의 요즘 모습이다. 개인주택의 축대에 파묻힌 것은 재산권 행사이니 할 말이 없다 쳐도, 그 내력을 뻔히 알 텐데 이렇게 시야를 방해하는 철책을 두른 것은 무슨 심사일까?

 

천민리 떨어진 곳 모래바람 날로 불어

천지 온통 흐려지고 어두움에 잠겨버렸네

멀리 우리 집 맑고 시원한 그곳

붉은 먼지 한 뼘도 없구나

- 김상헌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 「독락정」.  '맑고 찬 시냇물'이 사시사철 흐르던 계곡에 작은 정자 하나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이 정자가 바로 김상헌의 손자 김수홍이 지은 것이다.

「한양도성도」에서 장동 지역 부분도. 창의문과 신무문(경복궁 북문) 사이에 도화동, 유란동, 백운동, 청풍계 등의 지명과 육상궁, 청송당, 독락정 등의 건물이 표시되어 있다. 육상궁의 바로 동쪽에 무속헌이 있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 「청휘각」.  그림의 화제에 '청휘각(晴暉閣)'이라는 표현이 분명하다. 그러나 후대에 대부분 '청휘각(淸暉閣)'이라고 표현하게 된 것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다.

「한양도성도」에서 옥류동 부분.  청풍계에서 세심대(동대)를 넘어 남쪽 지역이며, 기린교가 있는 인왕산 물길의 북쪽이다. 이 큰 물길에 합류하는 작은 물길을 끼고 양쪽 야트막한 경사지에 옥류동이 자리 잡았다.

1950년대의 가재우물 사진(위).  지금의 동네 주민들은 '가재'라는 말의 출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이 청휘각 지역의 두 번째 주인 김창업의 호 '노가재(老稼齋)'에서 온 것이었다. 이 우물은 1960년대 이후 사실상 식수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가운데와 아래 사진은 최근 가재우물 위의 바위를 타고 주택 건물이 들어앉은 모습(가운데)과 그 건물의 아래에 가재우물 자리가 쇠창살에 가로막힌 채 처참하게 방치된 모습(아래).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간송미술관 소장) 중 「필운대」.  지금은 그림과 같은 청정한 기운을 전혀 느낄 수 없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삼성미술관 LEEUM 소장). 국보 제216호.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그림이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