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2 셰익스피어 - 비극의 연금술사
프랑수아 라로크 지음 | 이종인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8
082
시156ㅅ 23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3
Shakespeare, Comme il vous plaira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의 영국은 여왕을
정점으로 하여 궁신, 군인, 탐험가, 시인, 학자들이
모두 제몫을 해준 한 판의 멋진 가장행렬이었다.
이 융성한 시대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한 극작가의 손끝에 의해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이 극작가는 런던으로 진출하여 당시 흥성하던
연극계에서 출세를 했고 영문학사상 불멸의
금자탑이 된 걸작들을 남겼다.
"대사는 나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말해야 돼.
여느 배우들처럼 큰 소리로 그저 대사만
주워섬기는 거라면 거리의 방물장사를 불러다가
시키는 게 낫지. ……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은
연극의 본질을 벗어나는 일이니까.
연극의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뭐라고 할까.
자연에다 거울을 비추는 거야.
선은 선, 악은 악, 있는 그대로를 비춰 내며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지."
차례
제1장 스트래트퍼드 어펀 에이븐
제2장 런던
제3장 연극의 세계
제4장 엘리자베스 1세, 신화와 과대선전
제5장 새로운 세계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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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라로크 Francois Laroque
현재 파리 소르본 대학 영문학 교수인 프랑수아 라로크는 셰익스피어가 전공이다. 그는 프랑스 몽펠리에에 위치한 폴 발레리 대학 부설 '엘리자베스 시대 연구소'의 정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풍습 및 민속에 대하여 여러 편의 무게 있는 논문을 발표했다. 저서로는 <셰익스피어의 축제의 세계 : 엘리자베스 시대의 계절적 오락행사와 연극무대>가 있고, <영문학선집>을 공동으로 편찬했다.
옮긴이 : 이종인
1954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한국 브리태니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번역서로는 <절망이 아닌 선택> <증발> <때로는 낯선 타인처럼> <문자의 역사> 등이 있다.
제1장
스트래트퍼드 어펀 에이븐
셰익스피어는 전세계적으로 천재라고 인정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어디서나 읽히고 공연된다. 그러나 장갑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남들보다 많은 교육을 받은 편이 아니엇다. 주변 세계에 강렬한 호기심을 갖고 있던 셰익스피어는 나중에 희곡을 쓸 때 어릴 적부터 기억하고 있던 장면을 많이 이용했다. 어린 시절 기억에는 시골의 풍습과 미신, 시장, 대중적 오락행사 등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는데, 이것들은 왕과 귀족들의 이야기만큼 드라마의 소중한 재료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화가 데이비드 빙크분스가 그린 <마을 장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연극은 16세기의 대중오락이었다.
셰익스피어가 세례받은 사실을 기록한 날짜와 몇 마디의 말. 그가 실존인물이라는 기본적인 증거이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희극에서 학교선생을 웃기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휴 에번스라는 선생이 윌리엄 페이지라는 소년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는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다음 대화를 한번 보라.
"에번스 : 라틴어 라피스는 무슨 뜻이지, 윌리엄?
윌리엄 : 둘이라는 뜻입니다.
에번스 : 그럼 둘은 뭐지, 윌리엄?
윌리엄 : 자갈입니다.
에번스 : 아니, 라피스지. 그걸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두란 말이야."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 4막 1장)
엘리자베스 시대의 학교를 그린 이 그림에서, 선생은 지나치게 크게 그려져 있고, 반면 학생은 작게 스려져 있어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것은 당시의 선생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는가를 반증한다.
1607년에 발간된 라틴어 입문서 속표지에 나온 일곱 사람은 일곱 개 문과과목을 상징한다.
"갈라진 혓바닥에 점이 박인 배암들아, 가시 돋친 고슴도치, 도룡뇽이나 도마뱀도 물러가거라. 요정여왕 주무신자."
《한여름밤의 꿈》, 2막 2장
뱅코의 망령이 나타날까 두려워하는 맥베스는 그 망령에게 나올테면 나오라고 도전한다. 바로 그 대사에 당시의 그림에 나와 있는 뿔 달린 물소도 거명된다. "험악한 러시아 곰이건, 뿔 달린 물소건, 허케이니어의 호랑이건, 무엇이든지 나오너라."
(《맥베스》, 3막 5장)
셰익스피어의 극 중에는 180가지의 서로 다른 동물들 - 실존하는 혹은 상상 속의 - 이 3,000번 정도 언급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가 등장시킨 전설적인 동물들은 동물우화집이나 전설에서 직접 나온 것이다. 여기에 나온 동물들은 에드워드 톱셀의 논문 <뱀의 역사>(1608)와 <네발 달린 동물의 역사>(1607)에서 나온 것이다. 바다뱀(가운데)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항해자들에게는 아주 무서운 존재였다. 히드라(아래)는 《코리올레이너스》에서 다양성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가이 마천트의 그림은 《목자의 달력과 퇴비》라는 책자에서 나왔는데, 행성이 인체 각 부위에 미치는 영향을 그리고 있다. 해골의 다리 사이에 그려져 있는 바보는 15세기 도덕극을 지칭한다.
리치먼드 근처의 템스 강변에 모여 선 모리스 춤꾼들.
1591년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을 위해 수상 스포츠를 개최한 허트퍼트 백작을 방문했다. 백작은 엘리자베스 1세에 즐겨 비견되던 달의 여신 다이애나를 상징하는 초생달 모양으로 연못을 특별히 축조하여 거기서 수상 스포츠를 열었다. 그림은 여왕이 신하들에 둘러싸여 수상 스포츠를 구경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스트래트퍼드의 길드 제품 교회에 있는 최후의 심판 그림에는 악마가 타락한 자들을 지옥에 처넣는 장면이 등장한다. 종교개혁시대에는 이 그림이 독실한 신자에게는 오히려 해롭다고 판단해 하얗게 지웠다 한다.(이 수채화는 1807년 당시에 남아 있던 그림을 보고 다시 그린 것이다.)
겨울은 향연과 실내오락의 계절이었다. 이 17세기 수채화는 식사(위)와 카드놀이(가운데)를 보여 주고 있다. 크리스마스 때에는 배우나 바보들이 귀족의 저택에서 즉흥공연을 해 보였다. 주로 간단한 즉흥극이나 아침연주 같은 것이었다. 가면을 쓴 배우(아래)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시작 부분, 즉 로미오와 머쿠쇼,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변장을 하고 캐풀릿의 무도회에 가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오늘 밤 우리 집에서는, 전부터 노상해오던 연회를 열기때문에 친한 손님을 많이 청해 놓았소. 집은 누추하지만, 어둔 밤을 빛내는, 기라성 같은 여인들을 많이 볼 거요. (로미오, 머쿠쇼, 벤볼리오와 또 다른 대여섯 명의 가면 무도자 등장.)"(《로미오와 줄리엣》, 1막 2~4장)
시가행렬
중세 런던 거리에서 즐겨 벌어진 화려한 민간행렬은 며칠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행사는 종교개혁 이전에 종교적 목적을 위해 자주 벌어진 '화려한 행렬'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시가행렬은 4월 23일 성 조지의 축일, 6월 24일 성 요한의 축일, 그리고 10월 29일 시장의 날 등에 실시되었다. 기괴한 모습을 한 행렬이 시가를 걸어 내려가면 단봉낙타, 일각수, 용 따위 전설적인 동물들이 수레를 끌고, 배우나 천사로 분장한 아이들은 수레 위에서 연극을 했다. 행렬을 이끌고 가는 인솔자는 전통적으로 야만인으로 분장하여 횃불이나 화인(火印)을 들고 있었다. 그것은 군중들 사이로 길을 내기 위한 소도구였다. 이런 시가행렬은 처음으로 조직한 것은 길드였는데, 그들은 이 기회를 통해 자신들의 부와 권세를 자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극작가가 이 행사를 주관했다. 1615년에 제작된 이 그림은 데니스 반 아스루트의 작품인데 이사벨라 여왕(1566~1633)의 브뤼셀 입성을 축하하는 내용이다. (이사벨라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인 앨버트와 결혼했다.)
헨리 언턴 경의 화려한 기억
1596년에 무명씨가 그린 이 그림은 외교관이었던 헨리 언턴 경의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 그림은 언턴의 집에서 벌어진 가면극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그림 속에서 행렬은 나선형으로 진행되고 있다. 세 그룹으로 나뉜 여자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그들은 손에 사냥꾼의 활과 꽃을 쥐고 있다. 가운데에는 서너 명으로 구성된 악단이 있다. 그들 위에는 날개 달린 머큐리가 다이애나 옆에 서 있다. 여신은 달 모양의 머리 장식을 하고 손에는 활과 화살을 들고 있다. 열 명의 큐피드 - 다섯 명은 까만데 이것은 낮과 밤의 풍유이다 - 는 횃불을 들고 신비한 빛을 던져 주고 있다. 나머지 그림들은 언턴의 출생과 활동, 장례식과 무덤을 그리고 있다.
16세기 플랑드르의 화가 요리스 후프나헬의 작품은 결혼이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야 할 인생의 가장 중요한 행사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 1639년 그림에서 보이는 요정은 퍽으로도 알려져 있는 로빈 굿펠로를 그리고 있다. 요정은 친구들이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가운데 춤을 춘다. 그는 양성(兩性)의 모습과 악마적 성격을 가진 목신으로 묘사되어 있다. 청교도들은 켈트의 전설에 나오는 이런 존재들을 악마의 화신이라고 보았다.
모리스 춤꾼을 그린 이 그림은 18세기에 출간된 셰익스피어 전집 속표지에 수록되었다.
유랑극단이 마련한 무대를 그린 그림. 몇몇 특권층 사람들만이 가까운 술집 창문에서 연극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것은 16세기에 피터 브뢰겔이 성 조지 축일의 축제를 그린 것이다. 조잡하게 가설된 무대는 셰익스피어의 어린 시절 스트래트퍼드에 설치된 무대와 유사하다.
토머스 키드의 희곡 《스페인의 비극》(그림은 그 표지이다)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늙은 히에로니모가 자신의 아들이 정원으로 나 있는 창문에 목을 매달고 죽은 것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그리하여 철저한 복수극이 시작된다. 히에로니모는 범인을 죽이기 위해 연극 중에서 연극을 한다. 미친척하는 것이다. 이 연극은 인기를 끌었고 셰익스피어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타이터스 안드로니쿠스》와 《햄릿》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엘리자베스 풍의 보닛과 목도리를 한 여자를 그린 것인데 앤 해서웨이(셰익스피어의 아내)일 것으로 추측된다.
일요일이면 대중은 성 바오로 대성당에 모여 설교를 들었다. 무명씨의 1616년 그림(아래)은 성당에 모인 대중을 묘사했다. 1572년에 나온 런던 시가도(위)를 확대한 이 지도는 주요 도로들이 가로지르는 건물 밀집 지대와 도시 외곽의 공한지와 정원을 보여 주고 있다.
템스강의 남쪽 둑은 1588년에는 대부분 공한지였다. 그 무렵 그려진 이 수채화는 뱅크사이드의 우범지대와 동물격투장을 보여 준다. 로즈 극장과 글로브 극장은 이 격투장 옆에 세워졌다. 북쪽 둑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벽으로 둘러싸인 런던탑, 런던 브리지, 성 바오로 대성당의 옆모습이 보인다. 서쪽으로 더 가면 귀족들의 저택이 나오고 이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등장한다. 맨 왼쪽에 첨탑이 보이는 곳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1620년에 제작된 플랑드르파의 그림. 그리니치에서 런던 쪽을 바라본 것이기 때문에 런던은 '개들의 섬' 너머로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런던시 성문을 나서면 바로 전원지대가 이어졌고 시내에도 곳곳에 공원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흑사병의 창궐을 막을 수는 없었다. 피를 빼는 것이 유일한 방책이었고 로즈마리 꽃을 귀와 코에다 꽂았을 정도였다. 흑사병에 걸린 사람이 있는 집은 판자로 둘러막고 붉은 십자가 표시를 했다. 그리고 그 집의 다른 가족들 또한 감염되지 않아도 외부세계와 격리되어야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존 신부는 줄리엣이 죽은 척하는 사연을 알리는 편지를 로미오에게 전하려 하나 실패한다. 만추아의 검역관이 흑사병에 걸렸는지 의심했기 때문이다. "검역관이, 우리 두 사람이 그 전염병 환자 집에 같이 있었다고 의심을 해서, 문을 봉하고 우릴 밖에 내놓지 않아서, 그만 급한 만추어 행도 못하고 거기 머물렀어요." (5막 2장)
대역죄인들은 런던탑에 투옥되었다. 암울한 역사를 지닌 이 거대한 성채 그림은 웬세슬라우스 홀라의 17세기 작품이다. 《리처드 3세》에서 형인 에드워드 4세는 클라렌스 공작을 런던탑으로 보낸다. 여기서 에드워드 4세의 또 다른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후의 리처드 3세)은 사람을 시켜 클라렌스를 죽인다. 글로스터 공은 왕권을 장악하기 위해 에드워드 4세의 아들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글로스터 공은 황태자에게 "왕이 되실 몸이니 2~3일 런던탑에 쉬셨다가 가시지요."라고 말하는데, 황태자는 "하필이면 런던탑, 거기는 싫소. 그 성은 줄이어스 시저가 지었다면서요?"라고 대꾸한다.(3막 1장). 르네상스 시대의 런던탑에는 왕실동물원이 있었다.
런던 브리지(이 그림은 1615년경 제작)는 한때 템스강을 건너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며, 다리 양쪽에 주택과 가계가 죽 늘어서 있었다. 대역죄인의 머리를 잘라 꼬챙이에 꽂아서는 다리 입구 위에 걸어 놓곤 했는데, 이것은 왕권의 엄중함을 시민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그림은 1616년에 제작된 것이다. 1599년 스위스의 여행가 토머스 플라터는 친구들과 함께 런던 브리지로 강을 건넜고 이엉을 엮은 지붕이 있는 건물(글로브 극장)에서 《줄리어스 시저》를 보았다고 여행기에서 썼다.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신문이 없었다. 그래서 작가라는 직업은 별로 돈을 벌지 못했다. 궁정에서 지원을 받는 것 이외에, 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많은 관객을 끌어 들일 수 있는 연극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관객 동원에 성공한 작품 중의 하나로는 박식한 파우스투스 박사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파우스투스 박사는 학문이 지겨워지고 우주의 신비를 알아내고 싶어서 세속적인 권력과 쾌락을 얻는 조건으로 악마에게 자기 영혼을 팔았다.
크리스토퍼 말로의 초상화(위)는 1585년에 제작되었다. 셰익스피어가 런던에 왔을 때 말로의 강력한 대사가 로즈 극장을 뒤흔들고 있었다. 캔터베리 구두수선공의 아들인 말로는 조숙한 천재였는데 스물일곱 살 때 자신의 대표작을 썼다. 국왕이 그를 스파이로 이용했기 때문에 그의 피살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말로의 뒤를 잇는 극작가가 되었다. 《헨리 6세》 3부작은 셰익스피어가 말로의 웅변술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아래는 셰익스피어의 찬도스 초상화이다.
레이플 홀린셰드의 《연대기》 초판(1577)에 들어 있는 그림에서처럼 죄수의 처형은 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죄수는 죽기 전에 대중 앞에서 마지막 유언을 할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헨리 6세》와 《리처드 3세》에서 이 유혈낭자한 장면을 등장시켰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대한 흥미는 《루크리스의 능욕》이라는 설화시(1594)의 어두운 주제에서 잘 드러난다.
《타이터스 안드로니쿠스》(1594)의 속표지.
이 그림(1595년)은 셰익스피어 생존 당시에 상연된 연극의 한 장면을 그린 그 시절의 그림 중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타이터스 안드로니쿠스》 중 약 40줄이 담겨 있는 페이지에 나온다. 중앙에 있는 여자는 고트족의 여왕인 타모라인데 타이터스에게 두 아들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고 있다. 오른쪽에는 무어인 아론이 왼손에 칼을 들고 서 있다. 타이터스와 타모라가 입고 있는 옷은 고증이 제대로 안 된 것 같고 위병들의 복장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것이다.
사우샘턴 백작인 헨리 로트슬리(위)는 흑사병이 창궐해 연극 공연이 중단되었던 시기에 쓴 두 편의 장시를 헌정한 인물이다. 셰익스피어에게 하사된 문장에 관련된 글(아래). 1598년에 작성된 이 글의 뜻은 이렇다. "검은 바탕에 황금의 밭이 있고 멋진 창이 대각선을 그리며 위쪽으로 날아가 은을향한다. 그 위에는 날개를 활짝 편 매가 문장을 지그시 누르며 앉아 있다. 문장 속에 새겨질 글씨는 "Non sanz droict(자격 없이 얻어지지 않는다)."이다.
연극의 세계
젠틀맨, 극작가, 배우, 챔벌린 극단의 주주, 셰익스피어는 당시 연극계가 가지고 있던 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줄 알았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작품은 다양한 무대, 다양한 등장인물, 각양각색의 관중들이 모두 함께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글로브 극장을 그린 이 수채화(위)는 1616년에 제작되었다. 극장 정면에는 '온 세상이 무대'라는 라틴어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1659~1665년에 제작된 톰 스켈톤의 초상화(아래)는 알록달록한 색깔이 특징인 바보의 복장을 보여 준다.
동시대의 그림을 보면 셰익스피어 시대의 런던 극장들에 대한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위 그림은 커튼 극장을 그린 것인데 극장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어 연극이 공연중임을 알 수 있다. 시가도는 당시의 여러 극장의 위치를 보여 준다.
조지 셰퍼드가 글로브 극장을 그린 수채화.
당시 인기 있던 오락 '황소 괴롭히기'를 그린 그림.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5막 7장)에서 터사이테스가 패리스와 메넬라우스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외친다. "자, 황소! 자, 개! 패리스. 저런, 아, 두 마리 암탉에 맞서는 참새! 앗, 패리스가! 황소가 이길 것 같은데, 뿔을 조심해!"
곰 괴롭히기(아래)는 셰익스피어가 즐겨 쓰는 이미비 중의 하나이다. 이 놀이에서는 링 가운데 설치한 막대에 곰을 묶어 놓고 개에게 공갹하게 한다. 곰은 개를 여러 마리 죽이지만 결국은 개에게 씹혀 죽고 만다. 이 16세기 그림(위)은 곰 괴롭히기 스포츠가 벌어지던 두 운동장을 그리고 있다. 《줄리어스 시저》에서 옥타비우스는 외친다. "우리는 막대에 묶여 있고 수많은 적들이 공격해 오고 있다."(4막 2장) 《맥베스》에서 맥베스가 맬컴의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 같은 이미지가 사용된다. "그들은 나를 막대에 묶어 놓았다. 나는 달아날 수가 없고 곰처럼 끝까지 싸워야만 한다."(5막 7장)
스완 극장을 그린 이 그림은 네덜란드 사람 아렌드 반 부셸의 작품이다. 그의 친구인 요하네스 드 위트가 1596년에 스케치한 것을 보고 그린 것이라고 한다. 반 부셸은 이렇게 말했다. "런던의 극장 중에서 가장 크고 멋있는 것은 스완 극장인데 3,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
글로브 극장은 훨씬 정교하게 지어진 로즈 극장(그림)보다 더 비좁았다. 이것은 《헨리 5세》의 프롤로그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아쟁쿠르의 하늘을 뒤흔든 투구의 용사들을 이 목조의 원형 속에 어떻게 몰아넣으리요?"
영국인 의사 로버트 플라드는 기이하고 상상력 넘치는 무대그림을 남겼다. 이 그림은 글로브 극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미지에는 기억을 돕는 무엇이 있다. 무대 쪽으로 열린 다섯 개의 문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싶은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의미(작품에 대한)를 나타내는 것 같다. 바닥에 그려진 다섯 개의 원형과 마름모꼴은 더욱 신비롭다.
"태어날 때 우리는 도착했음을 운다. 아 얼마나 바보스러운가."
《리어왕》, 4막 3장
1632년에 발간된 윌리엄 엘러베스터의 희곡 《록사나》의 표지에 그려진 무대.
"요컨대 동작을 대사에, 대사를 동작에 맞추라는 것인데, 다만 명심할 것은 자연의 절도를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거야.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은 연극의 본질을 벗어나는 일이니까. 연극의 목적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과거나 현재나 뭐라고 할까, 자연에다 거울을 비추는 거야."
《햄릿》, 3막 2장
이 그림은 프랜시스 커크맨이 인기 있는 연극의 희극적인 장면만을 모아 놓은 책인 《기지 모음집》(1673)의 속표지에 수록된 것이다.
《한여름밤의 꿈》에 나오는 희극적인 장면(1막 2장)에서, 아테네의 장인들은 '피라무스와 티스베'의 이야기를 궁중에서 공연하고 싶어 안달이지만 서로 여자 역은 안맡겠다고 주장한다.
"퀸스 : 플루트, 티스베 역을 자네가 맡지?"
플루트 : 티스베는 어떤 역이지? 유랑하는 기사인가?
퀸스 : 피라무스가 사랑한 여자라네.
플루트 : 아니, 여자 역이라고? 난 시키지말게. 난 수염이 나오려고 하니까 말이야."
존 스코토가 1588년경에 그림 그림. 여왕이 좋아했던 광대인 리처드 탈턴이 농부복장을 하고 피리와 드럼을 연주하고 있다.
광대 윌리엄 캠프는 런던에서 노리치까지 오는 동안 계속 춤추었다(위). 이 그림은 그의 책 《9일 동안의 경이》(1600년)에 나온다. 드루리 부인이 17세기 초에 그린 광대 그림(아래)은 풀무를 가지고 노는 전형적인 광대를 다룬다. 풀무는 라틴어로 follis라고 하는데 시사풍자극 'follies'라는 단어와도 시각적으로 어울린다.
인기 있는 우화(寓畵)
드루리 부인은 서퍽의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 근처에 있는 자신의 집 호스테드에서 여러 그림을 그렸는데 그것들은 제프리 휘트니(1586)와 클로드 파라딘(1591)의 우화집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우화는 모두 똑같은 패턴을 따르고 있다. 한 페이지에 그림이 하나 들어 있고 맨 위에는 라틴어 격언이 적혀 있으며, 가운데에는 도덕, 풍자, 수수께끼 등이 담긴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림 밑에는 간단한 논평이 적혀 있다. 드루리 부인의 그림에는 간단한 라틴어가 쓰여 있다. 위의 그림 속에 있는 잠자는 인물은 게으름을 나타내고 있다. 또 《한여름밤의 꿈》에서 당나귀로 바뀐 직조공 보텀을 그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래의 그림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24의 중심 은유를 상기시킨다. "내 눈은 화가가 되어 그대의 미모를, 내 가슴의 화판에 옮겨 놓았네. 내 몸은 그 그림의 틀, 최상의 화가의 기술인 원근법을 썼노라."
광기 속의 지혜
휘트니의 우화 중에 <에티오피아인 씻기기>가 있다. 이 우화의 주제는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자연이 내려준 피부색을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주제가 위의 드루리 부인의 우화가 드러내려는 것이다. 《타이터스 안드로니쿠스》(4막 2장)에서 사악한 무어인 아론은 자기의 피부색을 변호하고 나섰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가 고트족의 여왕인 타모라에게서 낳은 사생아의 피부색을 옹호한다. "석탄과 같은 검은빛이 다른 빛보다도 더 낫다. 검은빛은 다른 빛에 물들지 않는다. 백조의 검은 발은, 대양의 물을 다 퍼부어도 하얘지지 않는다. 비록 끊임없이 발을 씻는다고 해도 그렇다."
고래 때문에 뒤집어지려는 배 그림(가운데)에는 "약속이란 믿을 수 없다."라는 라틴어 격언이 쓰여 있는데 《템페스트》의 첫 머리를 연상시킨다. 이 작품에서 안토니오와 밀라노의 궁중신하들은 놀랍게도 거친 파도가 왕의 위엄을 조롱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노인(아래) 옆에는 "내 지혜로 인하여 나는 어리석어졌노라."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다. 노인은 불모의 황야에 서 있는 리어왕을 연상시킨다.
재능 있는 예술가 리처드 버비지의 자화상. 시어터 극장을 건립한 제임스 버비지의 아들인 그는 챔벌린 극단의 스타급 배우가 되었다. 리처드는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을 도맡아서 공연했다. 존 매닝햄은 1602년에 이런 일화를 남겨 놓고 있다. 버비지가 《리처드 3세》를 공연하고 있을 때 연극을 관람한 한 귀부인이 버비지를 자기 집에 초대했다. 이것을 엿들은 셰익스피어는 리처드보다 먼저 그 귀부인의 집에 갔다. 마침내 그 부인의 집에 나타난 버비지는 정복왕 윌리엄이 리처드 3세보다 먼저 도착했다는 말을 셰익스피어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는 동시대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고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육필 원고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프랜시스 미어스의 《팔라디스 타미아》에서 발췌한 문장.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희곡이 읽혀지기보다는 무대 위에서 상연되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소네트》(1609년 판의 속표지)는 별도의 문제였다. 소네트에 대해서 시인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어쩌면 내가 그대의 묘비를 쓰게끔 오래 살지도 모르고, 어쩌면 내가 흙 속에서 썩고 있을 때 그대 살아 있을 것이라. 어쨌든 그대의 기억은 죽음도 빼앗아 가지 못하리라. 내게 속하는 모든 것이 다 잊혀진다 해도, 그대의 이름은 이 시로 영생하리니, 나는 한번 죽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나지마는……. 그대는 언제나 살리라. 내 붓은 그런 힘이 있나니, 숨결이 약동하는 곳, 사람의 입 속에서."
(《소네트》, 81)
셰익스피어가 출판을 승인한 권위 있는 텍스트인 '굿 쿼르토' 중 한 권의 속표지.
수수께끼 인물 셰익스피어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누구였을까? 많은 비평가들은, 1623년 퍼스트 폴리오 판에 수집된 뛰어난 작품들을 쓴 사람과 배우 셰익스피어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했다. 어떻게 장갑제작자의 아들이 작품 속에 보이는 뛰어난 고전, 법률, 기술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궁정신하들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얻었을까? 철학자, 저자, 정치가인 프랜시스 베이컨과 더비 백작, 옥스퍼드 백작, 에섹스 백작 등이 실제의 셰익스피어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추측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추측이 통하지 않는다. 여기에 모아 놓은 초상화는 모두 셰익스피어를 그린 것이다. 첫번째 것이 '플라워' 초상화이고 두번째가 '엘리 팰리스' 초상화, 네번째는 워싱턴 D.C.의 폴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초상화이고, 세번째는 제라드 소스트가 그린 초상화이다.
서적 판매업은 런던의 성 바오로 대성당 주변 지역에서 번성했다. 셰익스피어는 이 지역에서 잠깐 살았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도 살앗다. 책의 초판은 보통 몇백부에 불과했고 《성서》나 종교서적 같은 경우에는 몇천 부까지 찍기도 했다. 서점을 그린 이 그림은 1689년 작품이다.
제4장
엘리자베스 1세, 신화와 과대선전
신민(臣民)이 자신을 처녀 여왕(Virgin Queen)으로 알아 주기를 바란 엘리자베스 1세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이미지를 이용했다. 여왕은 로마 시대의 달의 여신이며 순결한 사냥꾼인 다이애나에, 정의와 순결의 여신인 아스트라이아에 비유되는 것을 좋아했다. 당대의 모든 작가들이 그랬듯이 셰익스피어도 여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를 총동원했다.
1588년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2세의 명령을 받고 영국 침공을 감행한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이 역사적 사건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구교 세력을 무찔렀다는 상징으로 작용한다. 위의 그림은 개선군을 격려하기 위해 템스강 하구의 틸버리를 방문하는 여왕을 그리고 있다. 그림 배경에서 불타고 있는 것은 적함들이다. 전사 여왕의 이미지와 대조적으로 작은 초상화(아래)는 우아미를 간직하고 있다.
니콜라스 힐리어드가 제작한 보석의 앞면(위)에는 순결의 상징인 튜더가의 장미가, 뒷면(아래)에는 성스러운 대피소를 뜻하는 노아의 방주가 그려져 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하고 난 뒤 반(反)구교 선전행위가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여왕은 이때 전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여제로 칭송되었다. 무명씨가 그린 이 '아마다' 초상화(1588년경 제작)에서 여왕은 지구의에 오른손을 얹고 있다. 악마의 세력을 물리친 여왕은 모든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여왕의 초상화
위의 엘리자베스 여왕의 초상화는 치세시에 여왕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무척 화려한 여왕의 옷과 장식품들은 여왕의 미덕과 권세를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여왕이 손에 쥐고 있는 체와 깃털(첫번째, 두번째)과 옷에 장식된 하얀꽃(다섯번째)은 순결의 상징이다. 가슴에 놓인 손과 손에 쥔 무지개(세번째, 네번째)는 여왕의 광휘를 한층 더 빛내 주고 있다. 마커스 기어라어트 2세가 그린 초상화(다섯번째)는 여왕이 헨리 리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여왕은 이 초상화에서 지구를 밟고 서 있고 여왕의 발은 리의 저택이 위치한 옥스퍼드셔를 가리키고 있다. 여왕은 치세 초기에 고대신화 속의 여러 인물들과 비견되었다. 무명씨가 그린 다섯번째 그림은 비할 데 없는 권세와 지혜와 아름다움을 지닌 세 여신 엘리자베스가 등장하자 주노, 아테나, 비너스가 무색해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잔치와 무용을 좋아하는 활기찬 여왕이었다. 그래서 잔치와 무용은 궁중생활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었다. 잔치 장면을 다룬 다룬 이 그림에서 여왕이 가보트(gavotte) 춤을 추고 있다. 《헨리 5세》(3막 5장)에서 영국군의 맹추격을 받아 퇴각하는 프랑스 병사들이 나누는 아니러니컬한 대사를 보면 이 춤이 얼마나 인기 있었는지를 살필 수 있다.
"도핀 : 사실이오. 귀부인들이 우리를 비웃겠는걸…….
부르봉 : 우리에게 영국 무용학교에 가서 높이 뛰는 라볼타 춤이니. 속도가 빠른 코란토 춤을 가르치라고 할 겁니다. 우리는 발꿈치에 유일한 특기를 지닌 날쌘 도망꾼이라고 하면서."
갑옷을 입은 서섹스 백작의 초상화는 1593년에 제작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기거하던 궁전 중 이름이 높았던 서리의 논서치궁(요리스 후프나헬 그림)이다. 논서치궁은 1680년에 철거되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정원
엘리자베스 시대의 정원은 엄격한 원칙에 따라 조성되었다. 화단은 네모꼴 혹은 매듭꼴로 만들어졌다. 그 같은 장식적 효과는 17세기 초의 정원 디자인(아래)에 잘 드러나 있다.위의 정원도는 조스 드 몸퍼가 1633년에 그렸다. 화단의 꽃과 야채는 색깔, 꽃피는 시기, 열매 맺는 시기 등을 감안하여 선택되었다. 생울타리는 기하학적 문양이나 동물의 모습을 모형으로 조성되었다. 그리고 귀족의 저택 정원에는 미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극 중에는 '닫힌 정원'의 이미지를 즐겨 쓰고 있는데, 특히 《리처드 2세》(3막 4장)에서는 이 정원이 난맥을 이룬 그의 왕국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쓰였다. "이렇게 울타리에 둘러싸인 마당 안에서, 뭣 때문에 법이다 형식이다 균형이다 하고 까다로운 걸 지키고, 설계도처럼 우리들의 조건을 구태여 내보일 필요가 뭐 있습니까? 바다에 둘러싸인 정원인 이 나라 전체가, 잡초투성이이고, 제일 고운 꽃들은 숨이 막히고, 과일나무는 손질도 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고, 생나무 울타리는 다 못 쓰게 되고, 잘 꾸민 화단은 다 볼품도 없이 되고, 좋은 초목이 다 벌레투성이가 된 이때에, 이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로버트 플라드는 대우주(우주)와 소우주(인체)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심오한 논문을 썼다.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1막 3장)에 나오는 율리시스는 그런 우주관을 갖고 있다. "유성과 지구, 아니 천체 그 자체도, 계급, 선후관계, 위치, 방침, 방향, 사철, 형태, 직권, 습성을 질서 있게 준수하는 법입니다. 오, 모든 고상한 계획으로 이끄는 사다리와도 같은 이 질서가 흔들리면, 일은 글러 버립니다.
여왕의 상징적 영토를 그린 1588년의 그림.
아이작 올리버가 1590년 무렵에 그린 젊은 젠틀맨의 그림은 셰익스피어 극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의 지치고 우울한 모습을 잘 보여 준다. 특히, 《좋으실대로》(4막 1장)에서 제익스가 대표적이다. "내 우울증은 경쟁심에서 오는 학자의 우울증도 아니요. 음악가의 변덕스러운 우울증도 아니며, 벼슬아치의 거만한 우울증, 야심에서 오는 군인의 우울증, 법률가의 교활한 우울증, 아낙네의 까다로운 우울증, 또는 이것들을 다 합친 연인의 우울증도 아니거든, 그것은 여러 가지 물체에서 뽑아 낸 많은 성분이 합성된 특유한 거야. 나는 늘 여행에서 보고 들은 일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데, 그때마다 야릇하게 울적해진단 말이야."
셰익스피어 시대의 의술은 고문이나 별다를 바가 없었다. 배냇점은 악마의 소행이라고 인식되었고, 존 디 같은 학식 높은 점성술가도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혼란스러워할 정도였다.
제5장
새로운 세계
엘리자베스 1세가 죽고 제임스 1세가 뒤를 이었다. 마키아벨리즘이 승리를 거두었고 반대의견은 설땅을 잃고 말았다. 이제 셰익스피어는 더 이상 낙관주의자일 수 없었다. 불안, 불확실성, 환멸이 연극계를 지배했다. 인생은 한낱 가면극에 지나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은 셰익스피어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여왕의 치세 말기에 이미 명성이 확립되어 있던 셰익스피어는 재코비언 시대에도 계속 극을 써 나갔다. 이 그림은 1623년에 발간된 퍼스트 폴리오의 속표지이다.
1567년부터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 1세는 어머니 메리 스튜어트가 타의에 밀려 양위하자 1603년에 영국의 왕이 되었다. 이 초상화는 1610년에 존 드 크리츠 1세가 그렸다.
장엄한 행렬이 따르는 가운데 1603년 4월 28일에 여왕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위, 가운데) 군중이 말의 뒤를 좇았고 만장이 하늘 높이 날렸으며 미늘창은 땅을 향했다. 장례식 직후 흑사병이 또다시 런던 지역을 덮쳤다. 제임스 1세(아래)는 1604년이 되어서야 런던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헨리 6세》 제1부 서두에서 베드퍼드 공이 이렇게 외친다. "하늘에 검은 휘장을 쳐서 낮을 밤으로 하여 주시옵소서. 시국의 변을 알리는 혜성이여! 너의 수정 같은 머리털을 공중에 휘둘러 헨리왕의 죽음을 꾀하도록 한 반역의 나쁜 별들을 채찍질해 다오. 성덕이 지극하여 단명하신 헨리 5세 왕이여!" 그의 대사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장례식에서 그대로 읊조린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제임스 1세 치세 초기에 쓴 극들은 회의, 환멸, 심지어 비관주의까지 드러내고 있다. '문제극' 중 하나인 《법에는 법으로》에는 부패한 빈 사회가 생생하게 묘사되는데 이사벨라의 냉정한 미덕은 안젤로의 위선적인 악덕만큼이나 혐오스럽다. 새로운 군주 제임스 1세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 공작은 비록 막후에서 전체적인 선(善)을 위해 노력하지만 베일에 가려 남아 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퇴락의 과정 속에서도 매혹과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런 느낌이 결국에는 승리하여 두 주인공을 파괴시킨다.
가이 포크스와 그 일당(1625년 그림)
벤 존슨은 자신의 첫 희곡을 셰익스피어 극단에게 주어 상연했는데 그의 명성은 제임스 1세 시대에 들어와 더욱 높아졌다. 왕은 벤 존슨에게 겨울동안 궁중을 즐겁게 하기 위한 가면극의 극본을 의뢰했다. 박식한 고전지식, 시인으로서의 명성, 그리고 경쟁의식이 없었던 셰익스피어와의 친교 등이 원인이 되어 벤 존슨은 저명인사가 되었다. 이 초상화는 에이브러햄 밴 블라이엔바치의 그림을 모방할 것이다.
후에 영국의 국왕 제임스 1세가 되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쓴 《악마학》 논문의 속표지.
벤 존슨은 소도구와 무대장치를 담당한 이니고 존스와 협력하여 약 30편의 가면극을 썼다. 이 화려한 극은 대부분 단발 공연으로 그쳤다. 이니고 존스가 그린 이 두 점의 수채화에서 보이는 화려한 의상은 귀족들, 왕 또는 왕비가 그 비용을 지원했다. 왕과 왕비는 연극에 직접 참가한 적도 있었다. 우아한 의상, 세련된 부대장치, 기발한 기계장치, 그리고 아라베스크(arabesque, 한쪽 발을 뒤로 곧게 뻗고, 한쪽 팔을 앞으로, 다른 팔은 뒤로 뻗치는 자세) 동작과 어우러지는 화려한 빛깔의 전개마저 곁들여져 벤 존슨은 그 가면극을 '궁중의 상형문자'라고 불렀다.
엘리자베스 시대는 위대한 여행가의 시대였다. 월터 롤리 경(위, 1585년경에 니콜라스 힐리어드가 그린 초상화)은 1595년에 버지니아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기대하던 황금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미지의 식물이던 담배를 발견했다. 담배는 새로운 악이 되었고 청교도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1608년에는 존 스미스 선장이 체사피크만을 탐험했는데, 그는 인디언 공주 포카혼타스를 데리고 귀국했다. 아래 그림은 버지니아를 그린 17세기 지도.
블랙프라이어즈 극장은 런던의 다른 건축물, 즉 미들 템플(위)과 차터하우스(아래)를 닮았다.
그가 속해 있던 극장이 불타 버릴 즈음 셰익스피어는 런던을 떠나 뉴 플레이스로 은퇴했다. 이곳은 그에게 많은 은전을 베풀었던 스트래트퍼드의 휴 클롭턴 경이 전에 살던 집이었다. 이 17세기 그림은 뉴 플레이스 저택이 박공이 다섯 개나 되는 거대한 3층 건물이었음을 증언해 준다.
극적인 장관
19세기 역사화의 전통을 충실하게 지켰던 화가 대니얼 매클리스는 햄릿이 네덜란드 궁정에서 '곤자고의 살해'를 실연하는 그 유명한 장면을 화폭에 옮겼다. 햄릿은 그 연극의 진행과정에서 아버지의 망령이 가르쳐 준 대로 왕을 죽인 범인이 숙부 클로디어스라는 사실이 폭로되기를 바란다. "죄지은 놈이 연극을 보다가, 하도 근사하게 꾸며졌기 때문에 그만 감동되어 제 죄상을 다 털어놓은 일이 있다지, 흔히 있는 이야기, 살인죄는 입이 없어도 스스로 실토하게 마련이거든, 신기한 노릇, 아까 그 배우들을 시켜, 숙부 앞에서 아버님 살해 장면을 연기하게 해야겠다. 그때 눈치를 살펴 급소를 찔러 보는 거야. 그래서 움찔이라도 한다면 더 이상 주저할 것 없지."(《햄릿》, 2막 2장)
셰익스피어는 워윅 변호사 프랜시스 콜린스가 작성한 석 장에 달하는 유언장에 모두 서명했다. 이것이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친필이다.
스트래트퍼드에 있는 셰익스피어 기념비.
"태양의 열도 겨울의 혹독한 추위도 겁낼 것 없네. 이 세상에서 그대의 시련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갔네.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먼지 쓸 듯 다 지나가는 길."
《심벨린》, 4막 2장
1623년에 출간된 《퍼스트 폴리오》의 페이지들.
셰익스피어 유언장의 맨 마지막 페이지. 맨 밑에 입회인들의 이름이 보인다. 유언장은 변호사가 작성했고, '본인 윌리엄 셰익스피어'만이 그의 친필이다.
1988년 발굴 당시의 로즈 극장 기초 부분(사진 위쪽에 있는 두 개의 커다란 콘크리트 슬래브와 기둥은 현대식 사무실 건물에 속하는 것이므로 무시할 것). 주요 흔적으로는 외벽, 복도의 내벽, 관객들이 서 있던 공간, 원래 무대 자리, 극장이 북쪽으로 확장되면서 무대가 늘어난 자리 등을 들 수 있다.
1609년 발간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집》에 부친 신비한 헌정문.
1594년에 발간된 《루크리스의 능욕》의 헌정사 페이지.
앤더슨이 분장한 맥베스.
《코델리아의 시체를 붙들고 통곡하는 리어왕》, 제임스 배리의 그림을 모사한 18세기 판화.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포샤의 정원. 윌리엄 호지스의 그림을 모사한 1795년 판화. 이 그림의 고전적인 구도는 니콜라 푸생에게 영감을 받은 것이다.
리처드 3세로 분한 데이비드 개릭. 윌리엄 호가스의 원작을 모사한 판화(1745년). 전투 전에 잠이 들었다가 악몽을 꾸고 깨어나는 리처드 3세를 보여 주고 있다.
낭만적 화풍으로 그린 햄릿과 그의 아버지의 망령. 헨리 푸셀리의 그림을 흉내내어 그린 18세기 후반의 그림.
조슈아 레이놀즈 경이 1773년경에 그린 리어왕.
오펠리아의 죽음을 사실적으로 그린 존 에버렛 밀레이스의 유명한 그림(1851~1852). 《햄릿》에서 여왕이 오펠리아의 죽음을 묘사한 말을 그림으로 재현한 것.
햄릿으로 분장한 존 필립 켐블(1783).
햄릿으로 분장한 존스턴 포브스 로버트슨.
햄릿으로 분장한 존 길거드(1934).
헨리 5세로 분장한 로렌스 올리비에(1944).
피터 그리너웨이가 연출한 《프로스페로의 책》(1991)에 출연한 존 길거드.
그대로 보존된 셰익스피어 생가. 1769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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