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6 만인보 ①
高銀
2007, 창작과비평사
시흥시대야도서관
SB001789
811.6
고67만 1
창비전작시---------------------------------------------------------------------
"우선 내 어린시절의 기초환경으로부터 나아간다"고 한 작자의 말대로, 이번 세 권은 주로 어릴 때 알던 고향사람들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들을 제대로 논하려면 마땅히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로서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당장의 뿌듯한 감회는, 어떠한 가난이나 고난 속에서도 끊길 줄 모르고 이어져온 이땅 위 삶의 기쁨과 보람이다. 또한 이 기쁨과 보람을 담은 시인의 말, 겨레의 말에 대한 자랑스러움이며, 작자 자신도 이야기한 바 그 말 앞에서 삼가는 마음이다.
『만인보』의 서사적 풍요는 차라리 소설문학의 성취를 떠올린다. 그리고 고은 자신의 『전원시편』에 비해서도 "첫가을에 백리가 트인다"는 그의 시구대로 무언가 툭 트였다. 더러 장황하던 대목이 크게 가셨고 농사꾼의 일하는 기쁨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어떤 착심 같은 것도 자취를 감추었다.
- 백낙청(발문 중에서)
고은(高銀)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눈길」「천은사운」 등을 추천받아 등단.
1960년 첫시집 『피안감성』 간행. 이후 시 · 소설 · 수필 · 평론 등에 걸쳐 100여 권의 저서 간행.
1984년 『고은시선집』 간행.
1986년 『만인보』 간행 시작
1987 ~ 94년 서사시 『백두산』 간행.
제3회 만해문학상, 제1회 대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등 수상.
차 례
작자의 말
서시 / 할아버지 / 머슴 대길이 / 애꾸 양반 / 내시 처선 / 동고티 무덤 / 삼만이 할머니 / 대바구니 장수 / 나그네 / 신라 사복 / 당숙모 바그메댁 / 사행이 아저씨 / 어머니 / 또섭섭이 / 고모부 / 장복이 / 곽낙원 / 대기 왕고모 / 삼거리 주막 / 아버지 / 정태란 놈 / 혈의 루 / 귀섬 여편네 / 관묵이 아저씨 / 고모 / 땅꾼 도선이 / 떠나간 작은어머니 / 진달래 / 고주몽 / 싸움꾼 기백이 / 외할머니 / 엿장수 / 큰집 고모 / 이동휘의 꾀 / 난산마을 아저씨 / 옥정골 철곤이 / 죽은 소금례 / 대보름날 / 아리랑 영감 / 당숙모 / 외삼촌 / 코피 / 의병 정용기 / 기생들 / 강도들 / 작은고모 / 사정리 할아버지 / 수레기댁 / 용녀 / 보리밭 문둥이 / 백제 혜현 / 수양 영감 / 일만이 아버지 / 사정리 할머니 / 김성숙 / 딸 / 개사리댁 / 초례청 / 절름발이 떠돌이 / 기창이 고모 / 할머니의 울음소리 / 재학이 아저씨 손가락 / 필례 / 지관 오창봉 / 학배 / 정안수 / 맹식이 삼촌 / 쌍놈 기철이 / 효조지 영감 / 고대 혜공 / 방앗간집 며느리들 / 복만이 아저씨 / 두 가마니 반 / 큰외숙모 / 딸그마니네 / 태욱이 아저씨 / 정여립 / 봉태 누나 / 도요하라 / 개똥벌레 / 감꽃 / 영규스님 / 금자 / 지랄병 / 애꾸 아주머니 / 진평구 이야기 / 홍식이 작은아버지 / 새벽닭 / 기호 / 임제 / 염훈장 / 호열자 / 소도둑 / 장타령 / 백두개 도깨비 / 선제리 아낙네들 / 한식날 밤 / 을밀대 / 연 / 개살구꽃 / 외톨박이 권오종
서시
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
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
부여땅 몇천 리
마한 쉰네 나라 마을마다
만남이여
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
이 오랜 땅에서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
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
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할아버지
아무리 인사불성으로 취해서도
입 안의 혓바닥하고
베둥거리 등때기에 꽂은 곰방대는
용케 떨어뜨리지 않는 사람
어쩌다가 막걸리 한 말이면 큰 권세이므로
논두렁에 뻗어 곯아떨어지거든
아들 셋이 쪼르르 효자로 달려가
영차 영차 떠메어 와야 하는 사람
집에 와 또 마셔야지 삭은 울바자 쓰러뜨리며
동네방네 대고 헛군데 대고
엊그제 벼락 떨어진 건넛마을
시뻘건 황토밭에 대고
이년아 이년아 이년아 외치다 잠드는 사람
그러나 술 깨이면 숫제 맹물하고 형제 아닌 적 없이
처마 끝 썩은 낙수물 떨어지는데
오래 야단받이로 팔짱끼고 서 있는 사람 고한길
그러다가도 크게 깨달았는지
악아 일본은 우리나라가 아니란다
옛날 충무공이 일본놈들 혼내줬단다 기 죽지 말어라
집안 식구 서너 끼니 어질어질 굶주리면
부엌짝 군뷸 때어 굴뚝에 연기 낸다
남이 보기에 죽사발이라도 끓여먹는구나 속여야 하므로
맹물 끓이자면 솔가지 때니 연기 한번 죽어라고 자욱하다
삼 년 원수도 술 주면 좋고 그런 술로 하늘과 논 삼아
8월 땡볕에 기운찬 들 바라본다
거기에는 남의 논으로 가득하다 작년 도깨비불도 떠오른다
이 세상 와서 생긴 이름 있으나마나
죽어서도 이름 석 자 새길 돌 하나 없이
오로지 제사 때 지방에는 학생부군이면 된다
실컷 배웠으므로
실컷 배웠으므로
어머니
하루내내 뼈도 없고 뉘도 없는 만경강 갯벌에 가서
그 아득한 따라지 갯벌 나문재 찾아 발목 빠지다가 오니
북두칠성 푹 가라앉은 신새벽이구나 단내 나는구나
곤한 몸 누일 데 없이 보리쌀 아시 방아 찧어야지
도굿대 솟아 캄캄한 허공 치고 내려 찧어 땅 뚫는구나
비오는 땀방울 보리쌀에 뚝뚝 떨어져 간 맞추니
에라 만수 그 밥맛에 어린것 쑥 자라나겠구나
여기말고 어디메 복받치는 목숨 따로 부지하겠는가
아 땅의 한 아낙의 목숨이 어찌 만 목숨 살리지 않겠는가
충청도 장항에서 흐린 물 느린 물 건너
삐그덕 가마 타고 시집 온 이래 그 고생길 이래
된장 간장 한 단지 갖추지 못한 시집살이에 몸 담아
첫 아들 낳은 뒤 이틀 만에 그놈의 보리방아 찧어
두벌 김매는 논에 광주리 밥 해서 이고 나가니
산후 피 펑펑 쏟아 말 못할 속곳 다섯 벌 빨아야 했다
그러나 바지랑대 걸음걸이 한번 씨원씨원해서
보라 동부새바람 따위 일으켜 벌써 저만큼 가고 있구나
갖가지 일에 노래 하나 부르지 못하고 보리고개 봄 다 가고
여름 밭 그대로 두면 범의 새끼 열 마리 기르는 폭 아닌가
우거진 풀 가운데서 가난 가운데서 그놈의 일 가운데서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어찌 나의 어머니인가
고모부
고모부 강일순은 하필 강증산하고 한 이름이라
괜히 그놈의 무극대도 믿어
이따금 눈 감고 빈 입으로 중얼댔지요
그러다가 정작 병들어 누우니
이 노릇도 작파해버리고
서래 선창 갈대밭 사이 나가는 배 뱃노래 듣다가
어린아이 다 되어 눈물바람 적시더니
부엌데기 고모 불러서
이 사람아
나 죽으면 심심할 테니
이것이나 배워보소
피우던 담배 여차여차 건네니
고모는 억지로 담배 빨고 기침했지요
그 뒤 고모부 세상 떠난 뒤
홀어미 된 늙은 고모 담배 연기 길게 길게 내뿜었지요
그게 어디 담배 연기뿐이리요 죽은 영감 담배 연기 아니리요
아버지
강 건너 내포 일대
대천장 예산장 서산장
아무리 고달픈 길 걸어도
아버지는 사뭇 꿈꾸는 사람이었읍니다
비 오면 두 손으로 비 받으며
아이고 아이고 반가와하는 사람이었읍니다
고모
서래 나루 시집간 고모
예복이 고모
그 웃음
찬 콩나물국 같은 웃음
예복이 고모
실컷 울고 나 추운 고모
외할머니
소 눈
멀뚱멀뚱한 눈
외할머니 눈
나에게 가장 거룩한 사람은 외할머니외다
햇풀 뜯다가 말고
서 있는 소
아 그 사람은 끝끝내 나의 외할머니가 아니외다
이 세상 평화외다
죽어서 무덤도 없는
당숙모
큰집 아주머니는
내 육촌누이 덕순이 하나 낳고는
덕순이 영 터를 안 팔아
큰당숙한테 자식 못 낳는다 구박깨나 받더니
기어이 일 났구나
바로 문 하나 달린 윗방으로 밀려나고
아랫방 아랫목에다 시앗 보아야 했다
밤마다 아랫방에서
새로 온 각시하고 영감하고
미주알고주알 알랑방구 뀌는 것 다 들어야 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아들은커녕 딸내미 하나 못 두고
그만 그 각시 떠나버리더니
큰당숙도 세상 떠나고
딸 하나 있는 것 덕순이도 시집가고
혼자된 큰집 아주머니
대밭에 눈더미 툭툭 떨어지는 소리 나도 그만
개 매달아 불태워 잡을 때
그 개 울부짓는 소리도 그만
담 끼고 가노라면
담 넘어 본 일 없는 난장이 키에다가
밭에 있으면
밭두렁하고 딱 맞는 큰집 아주머니
10년이나 안 먹고 둔 곶감 같은 큰집 아주머니
외삼촌
외삼촌은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갔다
어이할 수 없어라
나의 절반은 이미 외삼촌이었다
가다가
내 발이 바큇살에 걸려서 다쳤다
신풍리 주재소 앞에서 옥도정기 얻어 발랐다
외삼촌은 달리며 말했다
머슴애가 멀리 갈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상해에 갔다가
북경에 갔다가
만주 지지하루로 갈 것이다
그 다음은
남으로 남으로 바다 건너
야자수 우거진 자바에 갈 것이다
이런 답답한 데서
어떻게 한평생 산단 말이냐
갈 것이다
갈 것이다
나중에는 너도 데려다 함께 살 것이다
외삼촌은 자전거를 더 빨리 내몰았다
나는 쌩쌩 바람에 막혀 숨이 막혔다
나의 절반은 외삼촌이었다
스치는 십리길 전봇대여 산의 무덤들이여
그 뒤 세세년년 북국 5천 킬로 무소식의 외삼촌이여
작은고모
큰고모 등짝에서
나문재 뜯으러 간 어머니 기다리는 등짝에서
배고파 울다가 말다가 하는 등짝에서
나는 별을 처음 보았다
별이 아니라 밥이었다
별 따먹으면 배부르겠다고
별 따줘 별 따줘 새로 울었다
작은고모 야문이는
나 한번 업지도 못하고
뽕나무 선 오디 찾아다녔다
그러더니 이질에 걸리자마자 세상 떠났다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렸다
네년이 야문이를 안 먹여 죽었다고
약 한 첩 못 써 죽었다고 때렸다
어머니는 키로 막다가 실컷 맞고 굴뚝에 가 울었다
딸
산토끼몰이 잘하던 남수영감 죽은 이튿날
시집간 딸 옥순이가
마을 밖 오릿길에 접어들면서
머리 풀고 세상 떠나가게 곡성 내니
눈물이 앞을 가려
앞 못 볼 지경으로 곡성을 내니
마을에 들어서자
이 집 저 집 아낙네들 다 나와
쯔쯔쯔 혀 차다가
그네들까지 함께 곡성을 내어주니
온 마을에 슬픔 한번 커다랗구나
이만하면 죽은 영감 두 다리도 다시 한번 쭉 뻗겠구나
그렇지
슬픔이라도 풍년 들어야지
큰외숙모
어쩌자고 외할아버지께서는
큰아들 상룡이는 날 보듯 해서
집 내어 보낸 뒤로
그 집 가려고 두루마기 떨쳐입은 적 없다
군산 명산동 벼랑 말랭이 다락집에는
밤새도록 콜록댄 큰외삼촌 상룡이 누렇게 썩어가고
눈썹 검고 눈동자 검은 큰외숙모가
생것 광주리장수로
이 집 저 집 박대 팔아 죽이라도 대는데
아들 하나 있는 것
명산동 벼랑에서 삘기 뽑다 헛디디어
스무 길 밑으로 떨어져 피죽사발 되어버렸다
뒤이어 큰외삼촌도 죽어버렸다
식은 방바닥 치며
울음 막혀 울지도 못하는 큰외숙모 혼자 남아
생것 광주리 두어 번 이고 다녀보다가
그도 또한 양잿물 먹고 죽어버렸다
스무 길 벼랑 찬바람에 산 사람들이야 고뿔 들어
입마개하고 종종걸음으로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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