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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26. 15:39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91 HOW TO READ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니콜러스 로일 지음 | 이다희 옮김

2007, 웅진지식하우스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31812


082

하66ㅇ v. 2


400년이 지나도록 지칠 줄 모르고 언어유희를 일삼으며 독자들에게, 관객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작가, 셰익스피어! 벤 존슨은 셰익스피어를 일컬어 "한 시대가 아닌 만세를 위한" 작가라고 했다. 뛰어난 시적 상상력, 인간성의 안팎을 넓고 깊게 꿰뚫어보는 통찰력, 놀랄만큼 풍부한 언어구사력, 다양한 무대 형상화 솜씨 등에서 그를 따라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셰익스피어의 언어유희 속으로 들어가보자.


●   ●   ●


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도발적인 작가와 사상,

그들의 글을 원전으로 직접 만난다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불멸의 작가,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의 언어는 언제나,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전제하에, 즉 움직임, 몸짓, 만들기, 행위하기의 전제하에 해석되어야 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이고 강렬한 느낌은 그가 언어를 사랑한다는 느낌이다. 말을 가지고, 그리고 말이 초래할 수 있는 놀랍고도 무시무시한 결과를 가지고 논다는 느낌이다. 셰익스피어의 말은 제 생명이 따로 잇거나 기계적인 힘이 있는 듯하다. 하나하나가 작은 검색 엔진이며, 참견쟁이 꼬마 도깨비이며,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기이한 생물 같다.


HOW TO READ 시리즈

위대한 사상, 세기의 저작을 원전으로 직접 만나는 특별한 기회, HOW TO READ 시리즈, 이 시리즈는 세계적 석학들의 안내를 받으며 사상가들의 저작 중 핵심적인 부분을 직접 읽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읽는 척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제대로 읽을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우리시대 교양인을 위한 고품격 마스터클래스가 될 것이다.


니콜러스 로일 Nicholas Royle

영국 서식스대학교 영문학 교수이며, <옥스퍼드 문학 비평>의 공동 편집장이다. 주요 저서로 《텔레파시와 문학》《E.M. 포스터》《자크 데리다》《언캐니》 그리고 앤드루 베넷과 공동 집필한 《문학과 비평, 이론 입문》이 있다.


이다희

1999년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고, 200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2006년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고전학 협동 과정에 재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한여름밤의 꿈》, 와리스 디리의 《사막의 꽃》, 카렌 암스트롱의 《신화의 역사》 등이 있다.


차례


■ HOW TO READ 시리즈를 열며

■ 저자 서문 : "그러니까 자꾸, 자꾸 읽으시기를"


1 톡톡 튀는 재치꾼

: 《베니스의 상인》


2 환영

: 《율리우스 카이사르》


3 사랑에 뒤흔들리는

: 《좋으실대로》


4 벙어리들

: 《햄릿》


5 눈을 멀게 하다

: 《오셀로》


6 안전한

: 《맥베스》


7 끄덕임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 자료출처

■ 주

■ 셰익스피어의 생애

■ 함께 보면 좋은 자료

■ 역자 후기 : 원전을 옆에 두고 읽으시기를


1

톡톡 튀는 재치꾼

《베니스의 상인》


'톡톡 튀는 재치꾼'은 아름답고 이상한 말이다.

셰익스피어 작품 다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고 실제로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따르면 셰익스피어가 쓰기 이전에는 그 어느 영어 문장에서도 이 말이 쓰였다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톡톡 튀는 재치꾼'이라는 말은 사실상 셰익스피어가 꾸며낸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에서 톡톡 튀는 재치는 빠르기와 관련이 있다.


2

환영

《율리우스 카이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우리에게 거의 불면의 수준에 가까운 깨어 있음에 대해 특별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불면의 상태는 브루투스에게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며 무자비할뿐만 아니라 죄의식과 연관이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악몽 같은 세상을 품고 있으며 여기에 스스로 환각적이고 섬뜩한 꿈의 시간을 부여하고 있는 듯하다.


3

사랑에 뒤흔들리는

《좋으실대로》


실로 우리가 '사랑'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 희곡에 비추어 생각해볼 때 다양한 방식으로 뒤흔들린다.

특히 우리는 사랑이, 연출되는 것이라는 의미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가정해보게 된다.

사랑은 모방의 논리와도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며 동시에 '순전히 광기'다.

결국 언제 혹은 어디서, 희곡이 혹은 놀이가 끝나는 것일까?


4

벙어리들

《햄릿》


대사가 없는 배우들을 벙어리라고 한다. 그런데 햄릿이 감히 "벙어리"라고 말하는 순간 마치 어떤 숨죽임의 필요성, '혹은(or)'을 넣어야 할 필요성이 생긴 듯하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엇바꿈과 물 타기가 유독성을 높인다. 여기서 '혹은(or)'은 '그리고(and)'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햄릿의 말을 표면상 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여기며 극을 관람하거나 희곡을 읽기는 불가능하다.

이 말은 무대 너머에 잇는 우리를, 즉 독자나 관객들을 향하고 있다.


5

눈을 멀게 하다

: 《오셀로》


'눈을 멀게 하다(seel)'는 이아고 혼자만의 말이 아니다. 오셀로가 1막의 마지막에 언급하는 것에 대한 아이러니한 메아리이며 기이한 전위다.

1막의 끝에서 오셀로는 "깃털 달린 큐피드의 재빠른 노리개가 음탕한 나른함으로 나의 명석하고 충성스러운 도구를 멀게 했을 때", 즉 사랑의 신의 어르고 달래는 손길이 사랑의 잠으로써, 그로부터 자신의 임무를 명확히 볼 수 있는 능력을 앗아 가버렸을 때를 회상하며 웃는다.

마치 오셀로가 이 말로써 자신의 운명을 꿰매어 닫아버리는 듯하다.


6

안전한

: 《맥베스》


종교적 '구원'의 거의 완전한 생략은 안전의 개념, 지금, 여기, 안전하게 잇음을 강조한다.

'안전한' 그리고 '더 안전한' '안전하게' 그리고 '안전'과 같은 관련 단어들은 모두 지금 이 생애, 눈앞에 있는 물리적인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잇다.

이 짧은 책을 통해 나는 어떻게 셰익스피어의 일개 단어가 희곡 전체의 해석으로 우리를 안내할 수 잇는지 탐구해왔다. 《맥베스》의 경우 '안전'은 여기서 몹시 매력적인 단어로 다가온다. 이 단어는 희곡 전체를 특징짓는 말장난에 부합한다.


7

끄덕임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끄덕임'은 오만하거나 혹은 정중할 수도 있고, 무관심하거나 혹은 친밀할 수도 있고, 솔직하거나 혹은 비밀스러울 수도 있고, 위협적이거나 혹은 매력적일 수도 잇으며, 주의 깊은 모습이거나 혹은 졸음이 오는 모습일 수도 있다.

놀랍게도 셰익스피어는 이런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말장난을 하고 있다.

실로, 놀랄 만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그의 언어에 부합해서 '끄덕임'은 중요한 맺힘점으로서 이 단어가 나타나는 작품의 전체적인 텍스트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길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셰익스피어의 생애


여기에 있는 셰익스피어 작품들의 제작 연도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대체로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가 다르기는 해도, 모든 연대는 기본적으로 추측에 의거한 것임을 밝힌다.


1564년 4월 26일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Stratford-upon-Avon)에서 세례를 받다.

1582년 11월 28일 윌리엄 셰익스피어(18세)와 앤 해서웨이(26세) 혼인 증명서 발급.

1583년 5월 26일 딸 수재나의 세례.

1585년 2월 2일 이란성 쌍둥이 주디스와 햄넷의 세례.

1590~1591년 《베로나의 두 신사 The Two Gentlemen of Verona》《말괄량이 길들이기 The Taming of the Shrew

1591년 《헨리 6세 Henry Ⅵ》 2권과 3권.

1592년 로버트 그린이 셰익스피어를 "물 흐리는 까마귀(upstart crow)" "우리나라에서 무대를 뒤흔드는 유일한 사람(the onely Shake-scene in a countrie)"이라고 칭함. 《헨리 6세 Henry Ⅵ》 1권,  《티투스 안드로니쿠스 Titus Andronicus

1592~1593년 《리처드 3세 Richard Ⅲ》 《비너스와 아도니스 Venus and Adonis

1593~1594년 《루크리스의 겁탈 The Rape of Lucrece

1594년 셰익스피어는 이때 이미 챔벌린 경 극단의 중요한 일워이었음. 《실수 연발 The Comedy of Errors

1594~1595년 《사랑의 헛수고 Love's Labour's Lost

1595년 《리처드 2세 Richard Ⅱ》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 《한여름 밤의 꿈 A Midsummer Night's Dream

1596년 8월 11일 스트랫퍼드에서 햄닛 셰익스피어(11세)의 장례식. 《존 왕 King John

1596~1597년 《베니스의 상인 The Merchant of Venice》 《헨리 4세 Henry Ⅳ》 1권.

1597년 5월 4일 스트랫퍼드의 뉴플레이스 저택 구입.

1597~1598년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The Merry Wives of Windsor》 《헨리 4세 Henry Ⅳ》 2권.

1598년 《헛소동 Much Ado About Nothing

1598~1599년 《헨리 5세 Henry Ⅴ

1599년 글로브 극장 완공. 《율리우스 카이사르 Julius Caesar

1599~1600년  《좋으실대로 As You Like It

1600~1601년 《햄릿 Hamlet》 《십이야 Twelfth Night

1601년 9월 8일 스트랫퍼드에서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의 장례식.

1602년 5월 1일 올드 스트랫퍼드에 320파운드를 주고 토지 구입. 《트로일루스와 크레시다 Troilus and Cressida

1593~1603년 소네트 제작.

1603년 5월 다른 배우들과 함께 국왕 극단(King's Men)의 일원이 됨. 《말은 말로 되는 되로 Measure for Measure

1603~1604년 《연인의 불만 Lover's Complaint》 《토머스 무어 경 Sir Thomas More》 《오셀로 Othello》

1604~1605년 《끝이 좋으면 만사형통 All's Well that ebds Well

1605년 《아테네의 티몬 Timon of Athens

1605~1606년 《리어왕 King Lear

1606년 《맥베스 Macbeth》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Antony and cleopatra

1607년 6월 5일 딸 수재나와 존 홀의 결혼. 《페리클래스 Pericles

1608년 9월 9일 스트랫퍼트에서 어머니 매리의 장례식. 《코리올라누스 Coriolanus

1609년 《겨울 이야기 The Winter's Tale》, 《소네트 The Sonnets》 출판.

1610년 《심벨린 Cymbeline

1611년 《폭풍 The Tempest

1613년 3월 10일 런던의 블랙프라이어스 게이트하우스 저택 구입. 《헨리 8세 Henry Ⅷ》, 글로브 극장 화재로 소진.

1613~1614년 존 플레처와 《두 귀족 형제 The Two Noble Kinsmen》 공동 집필.

1616년 2월 10일 딸 주디스와 토머스 퀴니의 결혼.

            3월 25일 스트랫퍼드에서 유언 작성.

            4월 25일 스트랫퍼드에서 셰익스피어의 장례식.

1623년 8월 8일 스트랫퍼드에서 앤 셰익스피어의 장례식. 제1판본(First Folio) 출판.





posted by 황영찬
2014. 9. 23. 14:01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90 아스텍 제국 - 그 영광과 몰락


세르주 그뤼진스키 지음, 윤학로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1


082

시156ㅅ 16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016



인간 신이 지배했던 아스텍 제국.

그들은 강력하고 찬란하고 잔인한 문명을 일구어냈다.

중앙 아메리카에 첫발을 내디딘 스페인

병사들은 그들의 문명을 보고 놀라 겁을 집어

먹을 정도였다. 검과 신화로 상징될 수 있는 두 문화의

충돌에서 승리는 유럽인들의 몫이었다. 왕궁을 차지한

정복자들은 닥치는 대로 아스텍 문명을 파괴했고 유럽 문명을

이식했으나, 아스텍 문명의 빛줄기는 여전히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다.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

(Hernan Cortes)에 의한 멕시코 정복은 역사와

전설의 가장 독특한 만남이었다.

1519년 2월 10일, 코르테스는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먼저 쿠바를 침공했다.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상륙한

1519년은, 아스테카의 역(曆)이 정한 52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케트살코아틀(Quetzalcoatl)의

귀환 날짜와 일치했다.

아스텍인들은 케트살코아틀, 즉 깃털 달린 뱀이

다른 신들과 돌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먼 옛날 깃털 달린 뱀이 떠났던 동쪽으로부터 온,

철옷을 입고, 턱수염을 기르고, 피부가 하얀

이상한 사람들, 멕시코에서는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말(馬)을 소유한 사람들,

혹시 그들은 신이 아닐까?


아스텍의 황제 목테수마는 그렇게 믿었다.

스 비극적인 오인 때문에 역사의

한 장이 뒤바뀌게 되었다.

코르테스의 충실한 동료이자 역사가였던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Bernal Diaz del

Castillo)가 그 중요한 에피소드를 기록으로 남겼다.

"1519년 3월 12일, 우리는 함선을 이끌고 인디오들이 타바스코강이라 부르는 그리할바강에 도착했다……. 1만 2,000명이 넘는 전사들이 결집해 있었다……. 그들은 용감하게 돌진해 와서 카누로 우리를 포위하고 화살을 퍼부었다. 그것은 소나기 같았다. ……"

"코르테스가 치안책임자 후안 데 에스칼란테를…… 지체하지 않고 비야리카로 파견했다. 에스칼란테의 임무는 닻과 밧줄, 돛 따위 쓸 만한 물건을 거둬들이고 보트를 제외한 모든 군함을 침몰시키는 일이었다."

"위대하고 막강한 멕시코의 황제 목테수마는 우리가 그의 도시로 쳐들어올까 두려워한 나머지, 틀락스칼라의 아군 진지로 고위관리 다섯 명을 보내 환영의 뜻을 표했다. …… 그들은 금화 1,000피아스트르에 상당하는 …… 값진 선물을 가져왔다."

"추리가 틀락스칼라에 입성했을 때, 거리는 물론이려니와 지붕 위까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인디오들이 우리를 구경하려고 몰려나왔다. 그들은 우리를 보며 즐거워했다……. 우리가 그 도시에 입성한 날은 1519년 9월 23일이었다."

"코르테스가 목테수마에게 다가갔고 둘은 서로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 코르테스는 마르가리타스(margaritas)라는 정교하게 가공된 채색 유리구슬로 만든 목걸이를 선물로 가지고 왔다. …… 그는 목테수마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막 식사를 끝냈을 때, 목테수마가…… 호사스럽게 차려 입고서 여러 왕자를 대동한 채 우리를 방문했다. 왕자들은 모두 황제의 친척들이다……. 회의가 끝나자 목테수마는 코르테스에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세공한 금붙이를 선사했다."

"용맹하고 성미가 불 같은 후안 데 에스칼란테가 그의 병사들 가운데에서 가장 민첩하고 강건한 병사들을 차출했다……. 에스칼란테는 멕시코인의 요새로 떠났다. 에스칼란테군과 멕시코 전사는 새벽녘에 서로 맞닥뜨렸다."

"목테수마의 궁전으로 들어선 코르테스는 여느 때처럼 황제엑 인사를 올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고함을 치거나 소동을 일으킨다면, 우리 병사들에게 처형될 것이오. 그들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차례


제1장 툴라, 문명의 신기루

제2장 제국의 건축가

제3장 세계를 정복한 아스텍인

제4장 두 세계의 충돌

제5장 투쟁에서 협력으로

제6장 정복 이후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찾아보기


세르주 그뤼진스키 Serge Gruzinski

세르주 그뤼진스키는 1949년 11월 5일 투르코앵에서 태어났다. 문학박사이자 고문서학자이며, 카사 데 벨라스케스의 회원이기도 하다. 국립 역사 연구소의 외무부 파견 연구원(1978~1982)이기도 했던 그는 현재 국립 과학 연구소에서 연구 책임자로 재직하고 있으며, 멕시코, 중앙 아메리카, 안데스 연구 센터의 부소장직을 맡고 있다. 그뤼진스키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미국, 그리고 7년 간 거주했던 멕시코 등지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수많은 논문을 발표한 그는 아르쉬브 콩탕포렌 출판사에서 <멕시코의 인간신 : 16-17세기 인디오의 권력과 식민 사회>(1985)를 출간했고,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상상적인 것의 식민지화>를 출간했다.


옮긴이 : 윤학로

1959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강원대학교 불어불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잇다. 번역서로는 <연극이란 무엇인가><철학의 역사><레비 스트로스의 미학 에세이> 등이 있다.


제1장

툴라, 문명의 신기루


스페인 정복 이후의 역사를 기술하려는 초기 멕시코 역사가들에게 하나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떠오른다. 다름 아닌 '대도시 툴라'의 이미지이다. 그들이 멕시코 역사를 기술할 때 툴라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왕국의 수도였던 툴라는 고대 멕시코 역사 전반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16세기에 디에고 두란이 그린 그림. 이주가 시작될 무렵, 멕시카족의 초기 역사를 표현했다. 당시 멕시카족은 동굴에 거주하며 수렵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수천 년 전 중앙 멕시코에서는 옥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아메리카 최초의 농경문화가 탄생햇다.

<아스카티틀란 사본(寫本)>의 한 부분으로 멕시카족이 맨 처음 이주하던 때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멕시카족은 산악지대를 통과했는데, 그곳에는 선인장과 용설란, 등심초와 전나무, 종려나무가 자랐고, 야생동물이 우글거렸다.

사냥과 전쟁을 관장하는 북쪽의 신, 카막스틀리. 믹스코아틀이라 부르며 추앙했다.

꽃과 사랑, 춤과 시의 신. 소치필리의 상(像).

<텔레리아노 레멘시스 사본>에, 역사의 각 단계는 날짜 밑에 달력에 쓰이는 상형문자로 표시되어 잇다. 이주하는 멕시카 부족은 다양한 자치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쟁과 태양의 신 우이트실로포츠틀리는 멕시카족의 수호자이며(위, 왼쪽), '남쪽의 벌새'라는 뜻이다. '연기 거울'이라는 의미의 보이지 않는 신 테스카틀리포카는 밤, 북쪽과 관련이 있다(위, 오른쪽). '싹을 틔우는 자'라는 틀락록은 비의 신으로 농부들의 추앙을 받았다(아래, 오른쪽). '부관' 파이날(아래, 왼쪽)은 급류를 의미한다.

구전설화에 따르면, 멕시코 중부 고원지대에 살았던 일곱 부족은 민족적으로 동일한 기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대지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 저편에 위치한 마을이나 '일곱 개의 동굴'인 치코모스톡에서 이주해 왔다. 일곱 개의 동굴에서 왔다는 일곱 부족은 아콜우아(Acolhua), 찰카(Chalca), 치남파네카(Chinampaneca), 콜우아(Colhua), 테파넥(Tepanecs), 틀라우이카(Tlahuica), 틀라테포트스카(Tlatepotzca)이다.

이주(移住)를 기록한 한 자료에 따르면, 멕시카족은 '물고기'를 소유한 사람들의 땅' 미초아칸을 횡단하여 테노치티틀란에 정착했다고 한다. 미초아칸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들은 우이트실로포츠틀리신을 알현하고는 비록 그곳이 그들에게 약속된 땅은 아니더라도 그 지역에 거주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멕시카족이 테노치티틀란 건국의 상징으로 생각했던 선인장에 앉아 뱀을 먹고 있는 독수리는 그들 건국신화의 원형(原型)이 아니다. 16세기 자료에는 뱀이 아니라 선인장 열매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제물로 바쳐진 희생물의 심장을 상징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 신화가 제시하는 은유를 놓치지 않고, 심장을 독수리에 먹히는 뱀(뱀은 악이라는 관념과 밀접한 연상작용을 일으킨다)으로 대체시켰다. 그뒤 이 장면은 스페인 왕조인 합스부르크가(家)의 문장(紋章)에 등장한다.

여러 가지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멕시카족은 거대한 돌덩이를 잘라 내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잘라 낸 덩어리를 연마용구로 윤을 낸 뒤, 피라미드 신전과 왕궁을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

부유채원(浮遊菜園)이라 할, 말뚝으로 고정된 갈대 뗏목 치남파스는 호수 밑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허리에 두르는 막스틀라틀(maxtlatl)과 면 망토 틸마틀리(tilmatli)를 걸치고 있는 원주민 국왕.

'아스텍 제국'은 전쟁과 외교를 병행하여 1세기도 지나지 않아 지배권을 장악했다. 이 당시에 멕시코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처럼, 하나나 그 이상 되는 자문단의 지원을 받고, 고관(高官)들이 군사와 행정을 담당하는 절대군주제의 통치구조를 가지고 있던 수많은 작은 독립국가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아스텍 제국은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번영을 이루었다. 삼각동맹의 지배권을 받쳐주던 원동력은 종속 도시국가들이 바치는 공물이었다. 공물목록에는 공물의 종류와 수량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공물목록을 보면 살아있는 새, 보석, 옥수수, 금, 피망, 옷, 면제품, 담요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금은세공은 밀랍세공술을 이용했다. 우선 세공술사가 나타내려는 형상을 석탄에 조각해 넣는다. 이것이 주형이 되는데, 여기에 밀랍을 녹여 붓는다. 밀랍이 식은 뒤 이를 떼어 내고는 그 위에 금이나 은을 녹인 액체를 바르면 원하는 제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몬테 알반 무덤에서 발굴된 보물. 시페토텍신의 마스크(위)와 갑옷의 가슴받이(아래)와 같은 보물은 스페인 사람들의 탐욕에 희생되지 않고 보존된 몇 안 되는 금속 유품들이다. 아스텍인은 검소한 옷을 즐겨 입었으나, 보석장신구나 머리모양은 호사스럽게 갖추었다. 이것은 지위와 부귀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제2장

제국의 건축가


1440년 목테수마 1세는 이트스코아틀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했다. 일반적으로 위대한 아스텍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일컬어지는 매력적인 인물, 목테수마는 마흔이라는 이른 나이에 전설에 싸인 제국의 정권을 잡았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스텍 제국의 시조로 각인되어 있는 목테수마의 통치는 끔찍한 재앙의 연속으로 시작되었다.

비의 신인 틀랄록.


고대 멕시코인의 역법(曆法)은 태양력의 365일과 점력(占曆, divinatory calendar)의 260일(그들의 1년 365일은 20일로 이루어지는 18개월에 5일이 더해진 그들은 달도 날도 수로 부르지 않고 각각 이름을 붙였는데, 1~13까지의 수를 週와 같이 연속시켜 각 날의 이름을 배열하여 썼으므로, 260일 주기로 같은 이름의 날이 같은 번호를 취했다)이 혼합된 형태이다. 태양력의 하루하루는 그에 상응하는 제식일의 이름으로 불렸다. 1년은 변함없이 네 개의 기호, 즉 갈대, 희생제식에 쓰이는 칼, 집, 토끼 중의 하나로 시작되었다. 두 역법을 상응시키기 위해, 네 개의 기호는 주기번호 13개와 조합되고 52년이라는 순환주기가 생겼다(날의 이름은 20개뿐이므로, 매년 5일째 이름이 밀려나 결국 52년 주기로 같은 달 같은 날의 이름에 같은 주기번호가 오게 되어 있었다).

52년 한 주기에서 다른  주기로 넘어갈 때에는 중요한 제식이 베풀어졌다. 태양이 질 때 사제들은 세로 데 라에스트렐라 언덕(별의 언덕) 꼭대기에 세운 사원으로 올라가서 묘성(昴星)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희생제물의 가슴을 가르고 거기에 불을 새로 피우면 파발꾼이 횃불에 불을 붙여 제단을 밝힌다.

고대 멕시코인의 생활에서 해마다 200일에서 300일에 달하는 축제일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개개인을 사회에 통합시키려 했으며, 제식의 반복을 통해 시간을 계산하고 측정하는 다양한 방식을 표현하여 했다. 소코틀(xocotl, 위)이라는 의식은 한 해의 열번째 달에 거행되었다. 허리에 두르는 옷과 종이 망토를 걸치고 손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포로이다. 그들은 밤새도록 춤을 춰야 했는데 아침이 되면 파이날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막대기에 꽂힌 채 화형을 당했다. 틀라츠틀리(tlachtli)라는 공놀이(아래)는 T자 두 개를 합쳐 놓은 모양을 한 경기장에서 벌어졌다. 경기는 두 진영으로 나뉜 선수들이 무릎과 엉덩이로 공을 상대편 진영으로 넘겨 보내는 방식이었다. 이때 공은 양쪽 벽에 걸어 놓은 두 개의 석조 링을 통과해야 했다. 아스텍의 다른 놀이와 마찬가지로 이 놀이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경기장은 세계를 가리키고 공은 태양이나 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스텍족의 수명이라 할 수 있고 그들이 가장 선망하는 운명은 전투에서 죽거나 희생제식의 제단 위에서 죽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힘찬 행진 속에서 태양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젊은 전사들은 '독수리기사(eagle-knights)'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은 한 세기 동안 벌어진 대규모 전쟁 즉 '꽃의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전쟁을 할 때 아스텍인은 특별한 전투복을 갖추어 입었다. '표범기사(jaguar-knights)'의 복장은 몸에 꼭 끼는 것이었다. 이츠카우이피이(ichcahuipilli)라는 갑옷과 투구는 화살을 막기 위해 속을 채워 넣어 보강했다.

왕족과 고관은 화려하기 그지없는 케트살(quetzal, 남아메리카에 서식하는 꼬리가 긴 새의 일종)의 초록 깃털이나 앵무새의 붉고 노란 깃털을 널리 애용했다.

깃털세공인의 직업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갈대로 짠 골격에 아주 흔한 깃털을 그물 모양으로 덧대어 단단한 틀을 만든다. 깃털을 고정시키는 방식은 항상 같다. 우선 깃털의 줄기에 가느다란 대나무관을 단단하게 덧댄다. 그러고 나서 용설란 실로 깃털을 한 묶음씩 시친다. 다음에는 좀더 질긴 실로 깃털묶음을 틀에 부착시킨다. 이렇게 틀이 민들어지고 나면, 진귀한 새(케트살, 마코앵무새 등)의 깃털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한다. 다시 말하면 줄기에 대나무관을 덧대고, 깃털을 시침질한 다음, 골격에 붙들어매는 것이다. 케트살의 푸른빛 도는 황금색 깃털의 흰 솜털은 장밋빛 깃털의 가장자리로 보이지 않게 한 다음 이것을 맨 위에 덧댄다. 완성품을 보석으로 장식하는 경우도 있었다.

제물로 바치는 포로는 더 이상 적이 아니라 신에게 보내는 사자였다. 그래서 제물의 복장은 마치 신의 복장처럼 화려했다. 병사가 포로를 생포할 때면 이렇게 말했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그러면 포로는 "존경하는 아버지!"라고 응답했다.

황제는 틀라카테쿠틀리(Tlacatecuhtli), 즉 '병사들의 주인'이라는 칭호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테노치티틀란의 군대뿐만 아니라, 동맹을 맺은 도시국가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군사통수권은 황제의 중요 권리였다. 황제 주변의 고관대작 중에서 가장 비중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 초기에는, 군사적 책무를 맡았다.

테노치티틀란의 남성은 곧 전사를 의미했다. 그들은 많은 포로를 잡아야 승진할 수 있었고, 깃털모자를 쓰고 가죽팔찌를 차고 다닐 수 있었다. 그뒤 그들은 콰칙틀리(quachictli)나 콰우치치메카틀(quauchichimecatl)이 될 수 있었다.

전사가 승진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는 표범기사와 독수리기사가 있었다. 표범기사는 표범가죽으로 만든 전투복을 입었고, 독수리기사는 독수리 머리 모양의 투구를 썼다.

텍스코코의 왕 네사우알코요틀은 시인이요 철학자이자 재능이 뛰어난 건축가이며, 고대 멕시코 문화를 대표하는 가장 전형적이고 세련된 대변자이다.

공물 목록. 오른쪽 아래에 말린 피멘토(멕시코 고추) 400개가 들어 있는 자루 두 개와 케트살 깃털 모자가 보인다.


제3장

세계를 정복한 아스텍인


목테수마가 세상을 떠난 3년 뒤인 1472년에는 텍스코코의 위대한 동맹자 네사우알코요틀이 죽었다. 이로써 삼각동맹은 위대한 창건자와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고리를 잃었다. 그후 삼각동맹은 보잘것없는 후계자들의 손에 넘어갔고 테노치티틀란은 위기와 역경을 겪게 되었다.

테노치티틀란 대신전의 한 제단. 테오칼리(teocalli, 나우아틀어로 '신의 집'이라는 의미)의 114층 계단이 제물로 바쳐진 사람의 피로 물들고 있다(위). 멕시코에 갓 당도한 스페인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래는 17세기 화폭에 담긴 멕시코의 어느 도시.

고대 멕시코에서 행해진 인간 희생제식(위)은 인간에게 소중한 소유물인 피를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었다. 스페인인이 가장 놀랐던 식인제식(食人祭式, 아래)은 사실 영적인 것에 접근하는 방식이었으며, 또 하나의 성찬식이었다.

"족장을 살해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 …… 가늘고 긴 줄로 발목이 묶인 '고귀한 포로'가 그 위에 올라갔다. 이윽고 그에게 검과 방패가 주어졌고, 그를 포로로 잡은 병사가 올라와 그와 싸움을 벌였다"

익명의 스페인 정복자

《신(新) 스페인에서 겪은 몇 가지 사건에 관한 견문담》

"포로는 잘게 저며졌다. 넓적다리는 목테수마의 식탁으로 보내졌고, 나머지는 귀족이나 그들의 친척 몫이었다. 고기는 일반적으로 죽은 자를 생포했던 사람의 집으로 보내졌다. 그들은 옥수수를 넣어 살을 익힌 다음, 작은 대접에 고깃덩어리를 나누었고, 국물과 옥수수도 함께 먹었다. 그 요리의 이름은 틀라카틀롤리(tlacatlolli)였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신스페인 풍물의 일반사》

사제들은 제단 위에 희생자를 쓰러뜨렸다. 그런 뒤 사제 하나가 흑요석 칼로 희생자의 가슴을 절개하고 심장을 꺼내 그것을 돌항아리에 넣고 삶았다. 신의 옷을 입고 신의 장신구로 치장한 희생자는 익시프틀라(ixiptla), 다시 말해 '신의 이미지(the gods image)'라 불렸다. 위의 그림은 <아스텍 사본>의 일부이고, 아래는 19세기의 복제화이다.

"도시의 형태는 정방형이었는데, 사통팔달 곧게 뚫려 있는 포장이 잘된 넓은 도로 때문에 장기판을 연상케 해준다. 그래서 중앙에서 볼 때와 마찬가지로 도시 어느 곳에서건 도시의 전체상을 조감할 수 있다."

지오바니 프란세스코 게메이 카레리

《세계여행》

아우이트소틀의 재위기간(1486~1502)을 보여 주는 달력.

스페인 정복시대의 멕시코 도시는 테노치티틀란과 틀라텔롤코를 포함한다. 정복 얼마 전에 탄생한 이 '위대한 멕시코'는 북쪽으로는 틀라텔롤코, 남쪽으로는 늪지대가 호수와 혼재해 있는 지점에 위치한 테페약에 걸쳐 번성하고 있었다. 남쪽 변경지대에는 톨탱코(등심초의 가장자리), 아카틀란(갈대의 장소), 시우이통코(목장), 아티사판(흰 물), 테페티틀란(언덕 기슭), 아마날코(물의 조각) 같은 장소가 있었고, 서쪽 영역은 아틀람파(물가)와 치치메카판(치치멕족의 강)에 위치한 부카렐리 거리까지 이르렀다. 동쪽 영역은 텍스코코 호수가 시작되는 아틀릭스코(물의 표면)에 이르렀다. 도시는 한 변이 3km인 정방형으로 총 면적은 1,000헥타르였다.

"우리는 앞서 여러 번 텍스코코의 왕 네사우알피이가 마술사나 마법사의 명성을 누렸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인디오들에게서 들은 가장 설득력 있는 의견은 그가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디에고 두란

《신스페인 인디오의 역사》

점력(占曆)의 날들은 20개의 기호로 표시되었다. 수생동물, 바람, 집, 도마뱀, 뱀, 죽음, 노루, 토끼, 물, 개, 원숭이, 풀, 갈대, 표범, 독수리, 콘도르, 지진, 규석, 비, 꽃이 그것이다. 기호들은 언제나 동일한 순서로 이어졌고, 하나하나의 기호에는 1에서 13까지 주기번호가 매겨졌다.

소코요트신(Xocoyotzin, 젊은이)이라고 알려진 목테수마 2세는 1502년 재위에 오르자마자 치난틀라와 믹스텍 지역에서 전투를 벌여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려 했다.

1945년에 제작된 디에고 리베라의 프레스코화. <위대한 테노치티틀란, 옥수수 장수>

흰 옥수수와 검은 콩

"시장에는 인디오들의 일용할 양식이 모두 나와 있었다. 상인들은 흰색, 짙은 하늘색, 검은색, 붉은색, 노란색 등을 띠고 있는 말린 옥수수 낟알, 얼룩덜룩한 강남콩, 큰 콩, 갈색, 회색, 붉은색, 노란색을 띠는 명아주 씨, 흰색이나 검은색, 또는 주름진 치아(chia, 샐비어)와 소금, 칠면조, 조개, 집토끼, 산토끼, 사슴, 오리, 물새, 갈매기, 야생거위 등을 팔고 있었다. 용설란 시럽과 벌꿀을 파는 상인도 있었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신스페인 풍물의 일반사》


1942년에 제작된 디에고 리베라의 프레스코화. <테노치티틀란의 시장, 깃털 모자이크 제조와 금 세공>.

금, 은, 그리고 깃털

"군주는 시장과 시장에서 판매되는 모든 상품을 감독했다. 그의 관리이전 도시 거주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불행한 자이건 다시 말해 그의 모든 백성이 속거나 경멸당하거나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온갖 상품들을 일정한 장소를 지정해 주고 그곳에서만 사고 팔게 한 것도 시장을 감독하는 한 방법이었다. 상품들은 이곳저곳 함부로 뒤섞여 있으면 안 되었다. 군주는 또한 시장감독관을 임명하기도 했다. 시장감독관은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에 일일이 관여하며 그곳에 널려 있는 모든 상품을 관리했다. 결국 시장감독관은 부당행위가 이루어지지는 않는가, 상품가격은 적절한가 하는 점까지 신경을 썼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신스페인 풍물의 일반사》

1950년에 제작된 디에고 리베라의 프레스코화. <황제에게 과일, 담배, 카카오, 바닐라를 바치다>.

토토낙족이 벌이는 행사

"토토낙족은 북쪽 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자신들은 우악스텍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길쭉한 얼굴과 납작한 두상을 지녔다. 매우 무더운 그들의 거주지에는 온갖 먹을 것과 과일이 풍성했으나 카카오는 없었다. 호박(琥珀)이나 그들이 소치오코트소틀(Xochiocotzotl)이라고 하는 향기로운 나무의 진은 풍부했다. 형형색색으로 칠한 야자잎 깔개와 방석을 만들기도 했다. 그 지역에는 면화도 자랐으며 어떤 사람은 나무에서 자라는 면화를 발견했다. 그들은 보석 장신구나 목걸이를 즐겨 했으며, 깃털이나 다른 귀금속으로 장식한 옷을 잘 입었으며, 여자들은 우아하게 채색한 치마를 입었다. 그들이 면도하는 방식은 참으로 기이했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신스페인 풍물의 일반사》

"그 도시는 너무나 웅장하고 아름다워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도시는 그라나다보다 웅장했고, 그라나다보다 강건한 방어시설을 갖추었으며, 건물과 주민의 수도 그라나다보다 많았다.

에르난 코르테스

<멕시코에서 보낸 편지>


제4장

두 세계의 충돌


16세기 초엽에 목테수마 2세는 자신이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절대적인 지위는 오래가지 못했고, 황제는 운명의 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운명은 턱수염이 텁수룩한 하얀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거의 무표정하고 납빛에 가까운 코르테스의 얼굴은 좀더 길었더라면 더욱 기품이 있어 보였을 것이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우면서도 근엄했다. 얼굴에는 짙은 색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었고, 수염과 같은 색깔을 띤 머리 모양은 유행을 따르고 있었다. 그는 넓은 가슴과 떡 벌어진 어깨, 배가 나오지 않아 늘씬한 몸매, 미끈한 다리를 지닌 멋쟁이였다."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

《신스페인 정복사》

"스페인 병사들이 들이닥치기 10년 전 불행의 첫 전조가 하늘에 나타났다. 그것은 혀를 날름대는 불꽃이나 불길, 아니면 먼동이 트는 것과 비슷했다. 그것은 하늘을 뚫고 내려오는 빗방울 같았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신스페인 풍물의 일반사》

시팍토날신(왼쪽)과 시팍토날의 부인 옥소모코가 동굴 안에서 점력, '토날라마틀(tonalamatl)'을 작성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림은 아스텍에서 발굴된 사본 가운데 내용에서나 그림과 그 보존상태에서 가장 완벽한 것인 <보르보니쿠스 사본>에서 발췌했다.

네사우알피이는 꿈속에서 목테수마를 불러 미래의 전조를 보여 주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 재위기간에 닥쳐올 기이하고 경이로운 사건을 알려 주겠소."

디에고 두란

《신스페인 원주민의 역사》

점력에 사용되는 기호들. 토날포우케(tonalpouhque)라고 불렸던 전문직 사제는 탄생, 결혼, 상인이 먼 나라로 떠나는 일, 족장의 선출 따위 특수한 상황에서 기호와 숫자의 의미를 해독해 주곤 했다.

스페인인과 아스텍인의 전투(위). 아래에 보이는 초록색 깃털모자는 코르테스가 목테수마에게 받은 기나긴 보물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코르테스는 1519년 7월에 이것을 카를로스 5세에게 보냈고, 그뒤 카를로스 5세는 조카에게 선물했다.

"도냐 마리나는 뛰어난 여인이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도시의 추장이었고, 봉신(封臣)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파이날라라는 도시의 영주였는데 파이날라는 여러 도시의 맹주였다."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

《신스페인 정복사》

위 그림에서 선물을 받는 코르테스 옆에 마리나가 서 있다.

"논의가 계속되었다. 우리는 친구로서 그에게 충고했다. 말썽이 일어날 수 있는 소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항구에 정박한 선박을 몽땅 파괴해 버리자고 말이다. 내륙으로 진군해 들어가는 동안 반란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

《신스페인 정복사》

에르난 코르테스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함대의 선박을 남김없이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목테수마 궁전의 코르테스. 1689년 작.

"목테수마 황제는 200명의 영주들을 거느리고 나를 마중하러 나왔다. 그들은 모두 맨발이었고 특이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평인에 비해 아주 호사스러워 보였다."

에르난 코르테스

《멕시코 정복》

"옷을 들어올리고, 그는 내게 자신의 몸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손으로 팔과 몸통을 만지면서 '보시다시피 나도 당신과 똑같이 살과 뼈를 가진 인간이오.' 하고 말했다. 그는 작별을 고했고, 잠시 후 닭과 빵, 과일, 숙소에 필요한 용품들을 보내 왔다. 나는 후한 대접을 받으며 6일을 지냈다."

에르난 코르테스

《멕시코 정복》

스페인 군대의 포로가 된 목테수마가 죽은 후, 동생 쿠이틀라우악과 조카 쿠아우테목이 아스텍의 지도자가 되었다. 아스텍군에게 포위당한 코르테스는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슬픈 밤(noche triste)'이라고 부르는 비오는 야밤을 틈타, 스페인 군대는 테노치티틀란을 강둑과 연결하는 도로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아스텍 병사들은 그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스페인 병사들의 반 이상과 그들을 돕던 원주민 거의 전부가 학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코르테스는 '슬픈 밤'의 패배를 앙갚음할 작전을 준비했다. 포병과 기병의 진용을 새롭게 정비하고, 특히 스페인군의 군사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돛단배 13척을 건조했다. 스페인군은 그동안 수상작전에서 열세를 보였던 것이다.

1520년 7월 '슬픈 밤' 이후 코르테스의 병사들은 테노치티틀란에서 정신없이 도주했다. 그때 아스텍군은 오툼바에서 코르테스와 스페인 병사의 퇴각을 봉쇄하려 했다. 치열한 접전에서 심각한 전력 손실을 맛보았지만, 스페인 병사들은 결국 승ㄹ리자가 되었고, 틀락스칼라를 재탈환하여 그곳에서 군사력을 보강할 수 있었다. 그들은 부상병을 치료하면서 테노치티틀란을 총공격할 준비를 했다.


제5장

투쟁에서 협력으로


'어제의 군주들'이 모두 패배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멕시카와 텍스코코 귀족 중 일부는 침략자들은 언젠가 떠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반(反)스페인당'이라 할 이들은 구(舊)체제의 복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르테스는 그들의 마지막 환상을 산산이 부수고 말았다.

16세기에 제작된 아스텍의 도시, 테노치티틀란의 도시계획도(위). 난폭한 개를 동원한 고문(아래).

산 후안 데 울우아의 추장이 자신의 신앙을 포기할 수 없다고 고집하자, 코르테스는 추장을 체포하고 신전으로 난입해 이교도 사제들과 원주민들이 아연실색해 있는 가운데 우상을 파괴해 버렸다. 다음날 바르톨로메오 데 올메도 신부는 성체배례를 집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일용하는 곡식과 채소를 반죽해 우상을 만들었다. 곡식과 채소를 가루로 빻아 섞은 다음, 사제가 사람의 가슴속에서 꺼낸 아직도 뛰고 있는 심장의 피를 넣고 함께 빚는다. 이렇게 우상을 만들고 나면 그들은 더 많은 심장을 우상에게 봉헌한다."

에르난 코르테스

《멕시코 정복》

아스텍인의 전통 종교의식(위). 멕시코 대주교, 돈 페드로 모야 데 콘트레라스(아래)는 신스페인의 첫번째 종교재판관이었다.

원주민의 기독교 개종사업은 극도로 잔인한 능률성을 갖추고 있었다. 스페인 병사들이 아스텍의 우상을 파괴하는 장면(위). 틀락스칼라 영주들의 세례식(아래).

1539년 종교재판소는 텍스코코의 추장 돈 카를로스 오메토츠트신을 화형에 처한다고 선고해 충격을 몰고 왔다. 후일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다.

코르테스는 바르톨레메 데 올메도 신부에게 인디오에게 세례를 주는 책임을 맡겼다. 탁월한 신학자이자 지식인인 그는 인디오의 기질을 이해했고, 종종 스페인 정복자들의 넘치는 혈기와 난폭성을 조절하는 역할을 했다.

스페인인은 원주민들이 선물로 바친 여인 20명을 데리고 타바스코를 떠났다(위). 그들 중 한 여인은 마리나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코르테스의 통역자이자 정부(情婦)가 되었다(아래).


"틀락스칼라의 늙은 추장 시코텡가가 코르테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당신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사실, 당신에게 기쁨을 주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기 위해 당신에게 우리의 딸을 주어 당신의 아내로 삼고 후손을 보도록 하고 싶습니다."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

《신스페인 정복사》

펠리페 2세 치하(1556~1598)의 스페인 군대 문장.

후안 게르손이라는 원주민 화가는 <테카마찰코의 묵시록>이라는 프레스코화를 제작했다. 그는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토착적인 요소와 유럽적인 요소를 혼합해 그림을 구성했다. 원주민 화가들은 스페인인의 요구에 부합함으로써 식민지의 실상을 표현할 수 있었고, 그들의 예술세계에 충실할 수 있었다. 물론 토착적인 요소가 서구의 도상학적(圖像學的) 도구에 체계적으로 순응되면서 토착적인 요소의 본래 의미와 기법이 변형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두 요소의 대결구도에서 진정한 예술적 표현기법이 탄생했던 것이다.

1554년 한 스페인 선교사의 지휘 아래 상형문자와 스페인어를 함께 사용한 사본이 만들어졌다. 선교사들은, 특히 초창기에, 그림을 원주민과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편리한 도구로 보았다.

1550년과 1564년 사이에 돈 루이스 데 벨라스코 총독의 요구에 따라 2.5m×7m짜리 <리엔소 데 틀락스칼라 사본>이 제작되었다. 사본에는 틀락스칼라인의 눈에 비친 정복과정이 87장의 그림들로 복원되어 있다. 카를로스 5세의 문장 아래로 틀락스칼라의 통치자들, 총독, 행정관들이 보인다.

당시 아스텍의 의사. 티시틀(ticitl)이 알고 있던 의학적 지식으로는 스페인인이 옮겨 온 전염병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질병은 신들의 의지나 마술사의 마법 따위 초자연적인 원인 탓으로 돌렸고, 티시틀은 점괘나 마법을 푸는 마법, 또는 일종의 안수(按手) 의식에 의존했다. 그러나 그는 골절치료, 고약 처방, 지혈, 약용식물에서 약제를 추출하는 일 따위에는 능했다.


제6장

정복 이후


17세기부터 식민지 멕시코를 뒤흔든 혼란 속에 토착 원주민 사회가 분열되고 파괴되었다. 소수 귀족들이 스페인 정복 이전으로 소급되는 자신들의 전통성을 자랑스레 고집했지만, 그것은 스페인적 생활방식에 충성스런 복제물에 지나지 않았다.

16세기 말 멕시코에는 백인과 유색인종의 혼혈인이 이미 2만 5,000명 선을 넘었다. 반세기 후 그 수는 40만 명으로 증가했다. 혼혈인은 스페인의 이주민이 대부분 남자였던 만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8세기 말에는 혼혈인이 150만 명에 육박했다. 인디오 아내와 함께 일하고 있는 로보(lobo, 뮬라토와 인디오의 혼혈).

정복 초기, 스페인 국왕은 정복자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내버려두고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정복자들이 주도권을 가지는 것을 경계했던 국왕은 그들이 오랫동안 요구하던 권한을 허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529년 11월부터 국왕은 신하들 중에서 매사 신중하고 근면한 대영주를 선택하여 왕을 대신하여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멕시코를 통치하게 했다. 약 3세기 동안 62명의 총독들이 멕시코를 통치하게 되는데, 첫번째로 안토니오 데 멘도사가 1535년에 멕시코에 부임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이로써 정복자의 시대가 끝나고 행정가의 시대가 시작된 셈이었다. 안토니오 데 멘도사(1535~1549), 루이스 데 벨라스코(1550~1564), 마르틴 엔리케스(1568~1580) 등 뛰어난 세 총독이 통치했던 16세기는 멕시코가 평화를 구가한 시기였다. 그동안 정복이 계속되었고, 멕시코의 경제상황은 정복자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총독의 관저(아래)는 위용을 뽐냈고, 토착 영주(위)들은 관저의 웅장함에 매료되곤 했다.

신스페인의 수도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13만 7,00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신스페인의 수도 멕시코 시티는 신대륙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였다. 신수도에는 성당, 카사 데 로스 아술레호스(Casa de los Azulejos)와 같은 저택, 담배제조업 따위 새로운 산업이 열기를 내뿜을 공장건물, 광산 학교나 산 카를로스 순수예술 아카데미(아카데미는 마드리드 정부에서 보낸 주형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었다) 등 새로운 제도를 시행할 공공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도시화는 안토니오 마리아 데 부카렐리 이 우르수아 총독의 지시에 따라 시작되었고, 그의 후계자들은 도시를 더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데 주력했다. 총독들은 도로를 포장하고, 보도를 정비하고, 쓰레기와 오수를 처리하도록 조처했으며, 목테수마가 통치하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관청에서 거리에 조명을 밝히는 일을 담당했다. 이제 멕시코 시티는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안전하고 화려한 도시가 되었다.

피라미드에서 대성당까지

멕시코 시티의 소칼로(옛 마요르 광장)에는 멕시코에서 가장 웅장한 대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회색 석재로 쌓아올린 바로크 양식의 대성당 정면 양쪽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두 개의 첨탑을 세웠다. 카빌도(cabildo, 시위원회)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신대륙의 풍성함을 대변해 줄 새 성당을 건축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한 이후로, 1573년에 공사에 착스하여 1813년에야 완성되었다. 대성당은 정복 이튿날에 우이트실로포츠틀리신의 피라미드 신전에서 채취한 석재를 사용하여, 현재 성당 북서쪽의 좁은 장소에 지었던 아주 보잘것없던 성당을 대체한 것이다. 바로크풍의 정면에는 현관이 세 개 있는데, 현관 측면에는 원주가 세워져 있고, 상부에는 벽감(壁龕)을 만들고 조각품으로 장식해 놓았다. 이렇듯 대성당에서 다양한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것은 대성당 건축이 여러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인디오들은 변함없이 늘 먹던 전통음식을 먹으며 전통가옥에서 살았다. 그러나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벽에 성모 마리아의 초상이 걸려 있고 열린 문 밖으로 성당이 보인다.

스페인 정복자의 눈에 인디오는 무엇보다도 노동력의 제공자였다. 사실 그들은 멍에에 매인 짐승과 같았다. 16세기 말 멕시코의 경제와 사회가 서서히 발전하자, 스페인은 원주민의 노동력 착취제도를 재정비했다. 그리하여 스페인인은 거대한 영지 아시엔다스(haciendas)를 계속 세웠다. 아시엔다스의 소유주는 인디오 가족들을 끌어모아 임금을 선불해 주거나 국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선납해 주곤 했다. 인디오들은 이제 평생 빚에 시달리게 되었다.

수십 또는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먼 곳에 사는 인디오들이 걷거나 당나귀를 타고 쿠아우티틀란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소원을 빌고, 기도를 올리며, 예물을 바치고 헌화하면서 도움을 청했다. 과달루페의 성모는 멕시코 전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상이었다. 바로크풍으로 제작된 조상(彫像)을 앞세우고 마을을 행진하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조상은 나무로 조각하고 그 위에 채색을 하여 완성하였는데, 피투성이 상처를 그대로 표현하는 등 대단히 사실적으로 제작되었다.

17세기, 더욱이 18세기 초에도, 용설란주의 준비에는 여전히 종교의식과 공양물을 불사르는 불의 봉헌이 수반되었다. 그리고 신심회(信心會)의 축제, 장례식, 천주교 의식을 마감하는 흥겨운 주연(酒宴)은 정복 이전의 집단적인 축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 말과 19세기로 접어들면서 풀케리아에도 정복자의 영향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태양력의 1년은 18개월, 1개월은 20일, 거기다 덧붙이 5일을 더해서 365일이다.

<보르보니쿠스 사본>에 등장하는 시페토텍신과 아스텍인의 어느 한 달.

테노치티틀란에 정착하기까지 고대 멕시카인이 수행했던 대장정.

어린아이들과 성인의 교육과정. <멘도사 사본>.

우이트실로포츠틀리의 메신저, 틀락록.

케트살코아틀에게 바치는 봉헌물을 그린 환상적인 판화. 동물의 피(새끼돼지와 새끼새)와 인간의 피(귀와 혀의 봉헌).

비취로 모자이크 세공한 머리가 둘 달린 뱀.

공물목록, 표범가죽.

<사아군 사본>에 실린 나비.

도시로 등짐을 지고 가는 아스텍 상인(위)과 틀라텔롤코 시장에 좌판을 벌여 놓은 상인(아래).

스페인 정복 이전 시대의 틀라텔롤코 시장 풍경.

타라스카족이 사용하던 식기.


인간 희생제식, 디에고 두란.

정상에 제식을 위한 돌(위)이 있던 태양신전(아래).

텍스코코의 왕인 네사우알피이가 목테수마에게 스페인인이 도착할 것이라고 알려 주고 있다.

천개(天蓋)가 쳐진 가마에 걸터앉은 목테수마가 코르테스와 병사들을 환영하고 있다.

타바스코에 입성한 승리자, 코르테스(1519년 3월 18일).

용설란주 축제. 멕시코인은 용설란주를 마시고 항상 취해 있었다.

스페인 정복 이후에 시례식, 장례식, 종교의식 등 수많은 카톨릭 의식들이 인디오의 전통적인 종교의식을 흡수했다.

의사와 환자(위). 과달루페 성모상(아래).









posted by 황영찬
2014. 9. 22. 15:29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89 좋은 사진을 만드는 장세현, 전국희의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DSLR 촬영 테크닉


장세현, 전국희 지음

2014, 한빛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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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사진 놀이부터 상업적 활용까지 51가지 DSLR 촬영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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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고수들도 궁금해하는 라이트 페인팅 기법까지

DSLR 카메라로 할 수 있는 모든 촬영 기법을 쉽고 자세히 설명한다


writer

장세현

여행사진 작가로 국내와 해외를 여행하며 다양한 세상의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현재 사진 전문지에 사진촬영 기술에 관한 글을 연재하고 있으며, 다수의 잡지에 사진 여행기를 기고하였다. 아프리카 예술박물관 초청으로 '사진으로 보는 아프리카 이야기'라는 사진전을 열었으며,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40여 차례 이상의 사진 공모전 수상 이력이 있다. 사진 블로그 www.UltraOrange.co.kr을 운영하고 있으며, 네이버 사진부문의 파워블로거다.

이메일 lightsout@naver.com


writer

전국희

Sony World Photography National Award 1st Place 등을 포함하여 여러 공모전에서 입상하였고, 내셔널지오그래픽 코리아 인물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또한 사진동호회 Timecapture의 운영진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세상을 움직이는 한 장의 사진'이라는 개인 블로그 www.cookee.co.kr과 페이스북 www.facebook.com/cookee92를 통해 사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이메일 dev_cookee@naver.com


목차 CONTENTS


머리말

알아두면 촬영 재미가 두 배 되는 카메라 기본 상식


PART 01

시간! 색다른 사진의 비밀


고속촬영, 찰나의 미학

PLAY 01 / 수조 속의 주사위 · 두 대의 스트로보

PLAY 02 / 풍선 터뜨리기 · 암실 장노출

PLAY 03 / 워터 스플래시 · 순간 촬영

PLAY 04 / 물방울 아트 · 물방울 접사


장노출, 시간이 만들어내는 특별함

PLAY 05 / 퇴근길 · 패닝 촬영

PLAY 06 / 몽환의 숲 · 틸팅

PLAY 07 / 꽃이 피다 · 주밍 기법

PLAY 08 / 보케 주밍 · 보케 장노출

PLAY 09 / 도시 속으로 · 야경 주밍

PLAY 10 / 꽃향기 흩날리며 · 카메라 회전

PLAY 11 / 나뭇잎 뿔뿔이 · 수면 장노출

PLAY 12 / 시간 속에 나홀로 · 도심 장노출

PLAY 13 / 운명의 주사위 · 소도구를 이용한 장노출

PLAY 14 / 나이스 샷 · 궤적 촬영


다중노출, 찰나의 조합

PLAY 15 / 가을 소경 · 이미지 합성 촬영

PLAY 16 / 궤적 모으기 · 다중노출

PLAY 17 / 미술관 나들이 · 다중노출 연사


PART 02

빛으로 만드는 특별한 사진


라이트 드로잉, 빛으로 그리는 그림

PLAY 18 / 볼 오브 라이트 · 발광체의 활용

PLAY 19 / 라이트 스프링 · 불빛의 회전

PLAY 20 / 또 다른 행성 · 철솜 궤적 촬영

PLAY 21 / 불꽃비를 맞으며 · 불꽃놀이 사진

PLAY 22 / 불의 자전거 · 스파클러 불꽃 촬영

PLAY 23 / 불의 마왕 · EL Wire 불꽃 촬영

PLAY 24 / 놀이터 이야기 · LED 드로잉

PLAY 25 / 사랑을 그리다 · 불빛 글씨

PLAY 26 / 보케 향기 · 보케 촬영

PLAY 27 / 하트시티 · 보케 필터 촬영

PLAY 28 / 빛 그리고 반영 · 손전등으로 그리는 불빛


라이트 페인팅,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사진

PLAY 29 / 마천루 위의 질주 · 라이트 페인팅 촬영

PLAY 30 / 플라워 · 사물에 빛 칠하기

PLAY 31 / 한밤의 바다 풍경 · 손전등으로 빛 칠하기

PLAY 32 / 어둠 속의 소녀 · 인물에 빛 칠하기


빛의 궤적, 아름다운 빛의 흐름

PLAY 33 / 역사 속으로 · 빛의 궤적 촬영

PLAY 34 / 빛의 터널 속으로 · 움직이는 빛의 궤적 촬영


스트로보의 특별한 활용

PLAY 35 / 위드 스타 · 새어나오는 불빛 촬영

PLAY 36 / 고스트 · 다중복재 사진

PLAY 37 / 스윙 · 스트로보의 멀티 기능

PLAY 38 / 빛과 그림자 · 사방 발광


PART 03

재미있고 신기한 포토샵의 세계


플래닛 파노라마, 둥글게 표현되는 세상

PLAY 39 / 보홀섬 플래닛 파노라마 · 포토샵 왜곡 필터 기능


다중복제, 또 다른 나 만들기

PLAY 40 / 혼자 놀기 · 포토샵 레이어 마스크


레이어 마스크 기법을 이용한 신기한 사진

PLAY 41 / 만남 · 포토샵 레이어 마스크와 투명도 조절

PLAY 42 / 호러쇼 · 포토샵 레이어 마스크

PLAY 43 / 네이키드 카 · 포토샵 레이어 마스크

PLAY 44 / 공중 부양 · 포토샵 스팟 힐링 브러시


틸트 - 시프트, 미니어처 효과내기

PLAY 45 / 런던의 밤 · 포토샵 필터 가능


드로스테, 달팽이 사진 만들기

PLAY 46 / 달팽이 꽃잎 · 포토샵 플러그인 드로스테


PART 04

알아두면 유용한 촬영 기법들


KILL TIP 01 / 별 사진과 궤적 · 점상 사진, 궤적 사진

KILL TIP 02 / 불꽃놀이 · 밤하늘 불꽃 사진

KILL TIP 03 / HDR · 브라케팅 촬영

KILL TIP 04 / 수정구슬 속 세상 · 수정구 사진

KILL TIP 05 / 호수에 담긴 가을 · 반영 사진


부록 / 사진에 도움되는 추천 사이트





posted by 황영찬
2014. 9. 19. 09:32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88 한국의 암각화


글, 사진 / 임세권

1999,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2914


082

빛12ㄷ  225


빛깔있는 책들 225


임세권-------------------------------------------------------------------------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으며 박물관장을 지냈다. 저서로 『중국 변방을 가다』『안동문화의 재인식』(공저)『한국의 암각화(공저)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 「우리나라 선사암각화의 연대에 대하여」「한국과 중국의 암각화 비교 연구」「안동 수곡리 바위그림 유적」「한국 선사시대 암각화의 성격」「북한의 청동기시대 연구」 등이 있다.


|차례|


책 머리에

한국 암각화의 발견

암각화의 이해

한국의 암각화 유적

한국 암각화가 갖는 의미

참고 문헌

울주 반구대 암각화 탁본

한국 암각화 분포도

선명한 학 그림과 명문  반구대 마을 강가 절벽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시회(詩會)를 하면서 새긴 많은 한시들과 사람 이름들, 학과 같은 그림들이 남아 있다.

반구대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  절벽이 연이어진 오른쪽으로 마치 대패로 깎은 듯이 반반한 바위면에 갖가지 형상의 동물과 인물 그림들이 펼쳐져 있다.


암각화의 기법

쪼아낸 그림  바위를 단단한 돌이나 다른 도구를 이용하여 두드려 쪼아서 형상을 묘사하였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

갈아낸 그림  쪼아낸 뒤에 그 부분을 갈아서 더 깊고 매끈하게 만들었다. 남원 대곡리 암각화.

그어 새긴 그림  날카로운 금속 도구로 바위면을 그어서 가는 선으로 묘사하였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

경주 석장동 유적의 환경  암각화들은 대체로 강가 절벽 중에서 사람의 팔이 닿을 정도로 그리 높지 않은 수직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안동 수곡리의 평면 암각화  산 능선 끝부분의 편평한 바위면에 암각화가 새겨져 있는데 하늘을 마주보고 있는 특이한 경우이다.

동물상  주로 사슴이나 고래, 호랑이 등이 그려져 있으며 배를 불룩하게 묘사한 그림이 많다. 이는 새끼를 밴 모습으로 생산의 풍요를 기원한 것이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

그물에 갇힌 동물과 창을 맞은 고래  동물과 사람을 새긴 대표 유적인 반구대 암각화에는 수렵의 모습을 보여 주는 그림들이 있다.

반구대 암각화의 인물상  제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나 샤먼의 모습이다. 다리를 구부리고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거나 허리에 손을 대는 등 춤추는 형상이며 긴 나팔을 부는 사람도 있다.

천전리 암각화의 마름모꼴 도형  원이나 동심원, 삼각형이나 물결무늬처럼 추상적인 특징을 갖는 도형들은 상징성이 강하며 특정한 집단만이 알아볼 수 있는 부호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검의 그림  주로 고인돌에 새겨져 있는 그림으로 영일 인비리(위)와 여수 오림동(아래)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쭈어강의 암채화  중국 광시좡족 자치구의 쭈어강에 있는 약 200미터 높이의 절벽에는 40미터 높이까지 수많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안동 수곡리의 저수 시설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면 한쪽에는 의식을 거행할 때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깊이 팬 물 저장 시설이 있어 당시 종교 의식의 일면을 보여 준다.

추상 선각과 동물 면각  얕게 쪼아진 사슴 그림을 파괴하면서 굵은 선각의 추상 도형들을 새겼기 때문에 추상적인 도형들이 동물 암각화보다 후대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


고령 양전리 암각화의 태양신 얼굴  이마에 새겨진 U자형과 얼굴 양쪽의 오목하게 깎아낸 뺨, 굵은 점으로 묘사된 눈 · 코 · 잎, 턱밑을 제외한 얼굴 주위 3면에 마치 태양광선처럼 짧은 직선을 돌려놓은 점이 시베리아나 몽골, 중국 북부 암각화의 태양신과 비슷하다.

시베리아 암각화의 태양신 얼굴  시베리아나 몽골, 중국 등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이 얼굴 모습은 태양신을 상징한다. 우리나라의 신상이 사각형에 가까운 데 비해 시베리아 등지의 신상은 타원형이나 원형으로 되어 있다.

반구대의 경관  태화강 지류인 대곡천을 따라 약 1킬로미터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수십 미터에 이르는 높은 절벽이 병풍처럼 강물 한쪽을 막아 선다. 그 중에서도 대패질한 듯 반반한 수직 암벽 부분에 한국 암각화를 대표하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가 그려져 있다.

반구대 암각화 상세도(붉은색은 면각 그림, 파란색은 선각 그림)

바위면 왼쪽의 고래 떼  바위면 왼쪽에는 스무 마리 이상의 고래들이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떼지어 있어 대규모의 고래 떼가 한꺼번에 승천하는 듯 보인다.

반구대 암각화의 인물상  바위면 제일 위쪽에는 두 팔을 들어올리고 다리를 굽혀 춤추는 듯한 인물상이 있고(위), 왼쪽 맨 아래에는 팔과 다리를 수평으로 벌리고 손과 발에는 다섯 개씩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과장하여 표현한 인물상이 있다(아래).

신격화된 고래  왼쪽 암각화군 위에 있는 새끼 밴 고래(위)와 중앙 암각화군의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몸집의 고래(아래)는 위치와 크기, 형태에서 신격으로서의 신성성이 엿보인다.

가는 선으로 연결된 고래와 배  바위면 왼쪽으로 20명 가량의 사람이 타고 있는 가늘고 긴 몸체의 배와 작은 선각 고래가 연결되어 있으나 의도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중심부의 육지 동물들  오른쪽 암각화군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암사슴이나 맷돼지 등으로 보이는 육지 동물들이 많은데 대부분 아랫배가 불룩하다.

투시법으로 그린 멧돼지  중앙부 위쪽의 멧돼지는 몸체에 가로세로 연결된 선들이 복잡하게 새겨져 있다. 이들은 모두 입에서 몸체 내부로 들어가는 선이 묘사되어 있어 투시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선각 몸체에 면각 꼬리를 가진 고래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있으며 오른쪽 꼬리를 훨씬 크게 묘사하여 크게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몸체를 선각으로 표현한 것은 고래의 배 부분에 있는 주름을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힘차게 움직이는 듯한 호랑이와 고래 그림  면각의 동물들이 대부분 정적인 데 비해 선각으로 묘사한 동물들은 동감의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생산의 풍요를 상징하는 선각 동물들  바위면 왼쪽 위에는 그물 속에 갇힌 동물이 있고 왼쪽과 중앙의 경계 부분에는 호랑이처럼 맹수류로 보이는 동물들이 잇다. 이 맹수류의 몸체에는 세로줄무늬나 점이 찍혀 있으며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여 걸어간다.

선각의 가면  얼굴 윤곽선이 거의 역이등변 삼각형이며 눈이나 코, 입 등도 거의 직선으로 표현되어 경직된 모습을 보여 준다. 특히 이마 윗부분이 직선으로 잘려 있어 가면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천전리 암각화 전경  물이 흐르는 곳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는 앞으로 기울어진 장방형 암벽에 암각화가 그려져 있다. 너비 9.5미터, 높이 2.7미터 크기의 벽면은 비교적 매끈하다.

천전리 암각화 상세도  (붉은색은 면각 동물, 파란색은 선각의 추상 동형, 녹색은 가는 선 그림, 검은색은 신라시대의 선각 글씨)

큰 뿔을 가진 사슴 머리  뿔이 아름답게 강조된 사슴의 머리가 비교적 뚜렷이 보여 몸체를 새기지 않았거나 아니면 아주 얕게 형식적으로 쪼아냈을 가능성이 있다. 사슴의 큰 뿔이 숭배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추상화된 인물상  천전리 암각화에는 반구대의 가면과 비슷한 형태의 사람 얼굴과 거칠게 쪼아낸 미완성의 얼굴 그리고 얼굴을 크게 과장시킨 인물상 등이 있다.



양전리 암각화  사람 얼굴을 추상화시킨 듯한 도형과 동심원, 원 안에 네 개의 홈을 새긴 것 등 모두 29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양전리 암각화의 동심원  고령과 천전리 암각화에는 공통으로 동심원이 나타나는데 주로 태양의 상징으로 본다.

안화리 암각화  바위면 아래쪽에 모두 네 개의 신상이 가로로 한 줄 새겨져 있다. 이마가 U자형으로 패어 있고 주변에 머리카락 모양이 없으나 단지 중앙 도형의 위쪽 한 변에만 머리카락이 있다.

칠포리 계곡 동쪽의 암각화  길이 3미터, 높이 2미터 크기의 암벽에 깊이 새겨진 대형 암각화로 모두 신상을 표현한 것이다. 머리카락이 없으며 도형 내부에 U자형 이마가 크게 새겨져 있다.

칠포리 계곡 서쪽의 암각화  바위의 대부분은 땅 속에 묻혀 있고 일부만 땅 위에 드러난 셈인데 하늘을 향하고 있는 수평면에는 신상 암각화가 남북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고 비스듬히 흘러내린 동쪽 측면에는 길이 15, 6센티미터, 너비 10센티미터 내외의 작은 도형들이 20여 개 새겨져 있다.

여성 성기형 그림  측면에 새겨진 그림들 가운데에는 윗부분을 둥글게 처리한 역삼각형에 하단을 짧은 세로줄로 양분하거나 타원형의 내부를 세로로 양분한 여성 성기형 그림이 있다.

고인돌의 암각화  바닷가 가까운 곳에 있는 고인돌 측면이나 냇가의 바위 측면 등에 신상 암각화와 화살촉이나 마제 석검으로 보이는 암각화가 있다.

석장동 유적의 전경  경북 석장동의 서천에 인접한 수직 암벽에는 다양한 모양의 신상, 사람과 동물의 발자국, 태양으로 보이는 작은 도형들, 인물과 동물상 등이 새겨져 있다.

남향 바위면 왼쪽의 동물과 인물상  두 팔을 수평으로 벌리고 두 다리를 벌려 서 있는 사람이 굵은 선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동물은 머리가 분명치 않으나 앞뒤 한 쌍씩의 다리를 묘사하였다. 그 아래로 동물 발자국 모양의 도형이 있다.

상신리 암각화 유적  경주시 내남면 상신리 광석마을 남쪽 들판 한가운데 떨어져 있는 바위에서 여러 개의 변이형 신상 암각화와 동심원이 확인되었다.

봉황대 유적의 전경  봉황대 정상부에 하나의 큰 바위가 있고 그보다 약간 아래쪽에 또 하나의 바위가 있는데 암각화는 이 두 바위에 각각 3점씩 새겨져 있다.

위쪽 바위면의 암각화  왼쪽 한 점은 아래위로 긴 장방형이지만 마멸되어 내부의 자세한 모습을 거의 알아볼 수 없고 중간 도형과 오른쪽 도형은 그 형태가 분명하다.

아래쪽 바위면의 암각화  밑이 좁고 위로 가면서 넓게 벌어지는 형태이며 윗부분이 V자형으로 안쪽으로 꺾어진 것이 특이하다.

보성리 암각화 유적  산기슭 땅속에 묻혀 있던 바위는 경지 작업중 발견되었다. 바윗덩어리의 밑면은 편평하게 손질되었고 둘레도 약간씩 다듬어 긴 타원형으로 만들었다.

보성리 암각화의 부분  위아래로 긴 장방형으로 양 옆이 안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활 모양이며 중간 허리에 가로줄을 그어 아래위로 양분하고 각각의 칸에 두 개씩의 점을 찍었다.

가흥동 암각화 전경  표면이 거친 화강암의 절벽이 아래위 두 층으로 이루어졌다. 그림의 형태는 세로로 긴 장방형이고 네 윤곽선을 모두 안으로 휜 반원으로 처리하였다.

인비리 암각화가 새겨진 고인돌 전경  높이 140센티미터, 너미 135센티미터 고인돌의 뚜껑들 남쪽 측면에 마제 석검 두 자루와 삼각형 마제 석촉으로 보이는 그림이 있다.

인비리 고인돌 측면에 새겨진 마제 석검과 석촉

오림동 고인돌 전경  여수시 오림동의 구릉지에 있는 고인돌 가운데 길이 268센티미터, 높이 172센티미터 크기의 고인돌(오른쪽에서 두 번째) 남쪽 면에 석검과 인물상이 새겨져 있다. 현재 체육공원 안에 옮겨져 있다.

마제 석검과 인물상  마제 석검은 손잡이가 통으로 되어 있으며 칼 끝을 아래로 하여 비스듬히 서 있다. 칼 왼쪽에는 가는 선으로 두 사람을 묘사하였는데 한 명은 다리를 벌리고 서 있으며 또 다른 한 명은 두 팔을 앞으로 내밀고 다리를 굽혀 앉은 것처럼 보인다.

수곡리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면  옛날부터 신선바위로 알려져 있던 바위 위에는 말굽 모양이나 윷판 모양의 그림 그리고크고 작은 구멍들이 많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운데 가장 확실한 우리나라 제천 의식의 거행 장소이다.

장대를 꽂았던 자리로 보이는 바위 구멍  삼면의 낭떠러지에는 길다란 장대를 꽂았던 자리로 보이는 긴 홈이 패어 있는데 바위 윗면에도 여러 개 보인다.

여성 성기형 암각화  바위면 남쪽에 비교적 고루 분포되어 있는데 타원의 한쪽이 트여 있고 원호는 대부분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반타원형의 중심에 직선을 그어 내부 공간을 둘로 나눈 것도 있다.

새 모양의 암각화  활처럼 구부러진 선의 양쪽으로 작은 꼭지가 붙어 있고 뒤쪽으로 뻗친 직선의 끝은 둘로 갈라져 있는데 이는 새의 머리와 다리 부분처럼 보인다. 전체 모습이 양 날개를 활짝 편 큰 새를 묘사한 듯하다.

윷판형 암각화  작은 원형 홈들을 배열한 윷판형 도형이다. 원형 내부를 십자형으로 분할하고 네 개의 내부 공간에 작은 원형 홈을 다시 하나씩 배치하였다. 원형 홈의 배치 상태가 윷놀이에 사용하는 말판과 완전히 일치한다.

사람 발자국 형태의 암각화  바위면 남쪽 끝부분에 길이 15센티미터, 너비 4~6센티미터, 깊이 2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발자국이 찍혀 있다. 발바닥과 발가락이 완전한 형태인 왼발의 모습이며 남쪽을 향하고 있다.. 

도항리 암각화가 새겨진 고인돌  길이 230센티미터, 너비 120센티미터의 긴 타원형의 고인돌 윗면에 7개의 동심원과 260여 개의 크고 작은 원형 홈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도항리 암각화의 동심원과 원형 홈들  동심원과 원형 홈들이 서로 겹쳐지지 않게 새겨져 있는데 밤 하늘에 뜬 별을 묘사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양아리의 추상 선각 암각화  남쪽을 향해 길게 누워 있는 펑퍼짐한 바위에 조선시대부터 금석문으로 알려진 문자가 있었으나 최근에 선사 암각화로 밝혀졌다.

경주 석장동 암각화  암각화가 집중적으로 새겨져 있는 남향 바위면의 중심부로 서쪽으로 가면서 약간씩 직각에 가깝게 꺾인 부분이 있다. 바위면 가장 윗부분에는 20~28센티미터 길이의 신상들 네 개가 30센티미터 내외의 간격으로 가로로 배치되어 있다.






posted by 황영찬
2014. 9. 12. 10:52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87 아프리카 탐험 -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


안 위공 지음, 한양환 옮김

1996, 시공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2120


082

시156ㅅ  15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5


탐험가들을 매료시킨 검은 대륙 아프리카.

원시 자연 상태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프리카 내륙 지방은 탐험가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생명을 걸고 아프리카 오지를 답사하여

신비에 싸인 미지의 세계를 세상 사람들에게 소개했던

위대한 탐험가들, 그러나 이들의 업적은

유럽 열강을 부추겨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다음 날 나는 그 유명한

모시와투냐(Mosi-oa-Tounya) 폭포를 찾아나섰다.

칼라이(Calai)를 출발해서 얼마간의 항해 끝에 물보라에

싸여 있는 거대한 물기둥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폭포

가까이에 위치한 섬에 내린 순간 너무도 놀라운 장관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폭이 1,000미터나 되는 강이 겨우

20미터 반경에 불과한 웅덩이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내가 본 적이 없는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나는 이를 빅토리아 폭포라고

명명하고 그 근처에 백여 개의 복숭아와 살구씨,

그리고 상당한 양의 커피 씨앗을 뿌렸다.

한 원주민으로 하여금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돌보도록

한 후 나는 바로 옆에 서 있는 나무 등걸에 내 이름의 약자를

새기고 그 밑에 1885년이라고 새겨 놓았다."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차례


제1장 검은 대륙의 발견

제2장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

제3장 리빙스턴의 남아프리카 탐험

제4장 밀림 속으로

제5장 탐험가의 세계

기록과 증언

그림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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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위공 Anne Hugon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젊은 여성학자이다. 수년 전부터 아프리카 대륙 탐험사에 관한 연구를 해왔으며, 메리 킹슬리(Mary Kingsley)의 탐험기를 번역하기도 했다. 리용 제2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그녀는, 현재 아프리카 대륙 내에서의 선교 활동사에 관한 글을 집필하고 있다.


옮긴이 : 한양환

1958년 공주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파리 제1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남대학교와 교원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문제 연구소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다수의 아프리카 관련 논문을 썼으며, 번역서로는 <프랑스의 고용보험> <중국> 등이 있다.






제1장

검은 대륙의 발견


19세기 초엽까지도 아프리카 내륙지역은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terra incognita)'이었다. 그후 탐험가들은 각 지역을 답사하여 하천과 산세를 확인했고 다양한 동식물군(群)에 대한 연구목록을 작성했으며 아프리카인과도 유대를 다져 왔다. 그러나 불과 1세기 후에 이 땅은 유럽 열간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탐험가들은 새로운 바람을 일으킴으로써 유럽 제국주의가 아프리카 대륙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다.

1300년대에 아프리카를 여행한 이븐 바투타도 낙타를 이용하여 아프리카 지리에 관해 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15세기에 제작된 세계지도는 당시 지리적으로 혼동되던 나일강과 니제르강이 텐트로 표시된 아프리카 왕국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보여 준다.

박물학자인 조지프 뱅크스경은 1768년 쿡 선장이 지휘한 태평양 탐험에 동참했고 2년 뒤에는 아프리카협회를 창설했다. 대무역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여러 명의 과학자와 영국 황태자가 포함되어 있는 실질적인 후원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노예폐지론자가 탄원서를 제출하는 이 그림은 1826년 발간된 아멜리아 오피의 《흑인의 비애》에 등장한다. 노예폐지론자들은 노예무역을 금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탄원서를 제출하거나 인쇄물을 배포하여 여론에 호소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투쟁을 전개했다.(위) 19세기 노예폐지론자의 판화(아래)에서 쇠사슬에 묶인 흑인을 볼 수 있다. 노예폐지론자들은 흑인도 한 형제자매라는 형제애를 강조했는데, 이는 선의에서 우러나온 것이지만 그들의 태도는 스스로 큰형임을 자처하며 동정적인 인종차별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1840년 런던에서 개최된 노예해방협회의 총회장면. 1830년부터 노예제도는 영국령 식민지역 내네서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노예폐지론을 찬성하는 계층은 주로 상류층 인사와 산업자본가였다. 특히 이들 산업자본가는 경제적 이해관계와 연관해서 노예폐지론을 지지했다.

선교사들이 저술한 기행문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를 포함해 학교와 진료소는 선교사업의 주요거점이었고 이들 부속기관에서는 다양한 자선사업을 벌였다. 리빙스턴은 개종(改宗)에 따르는 필요충분조건을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누구든 문자를 해독하고 기독교의 근본을 이해하지 않고는 세례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주장했던 것처럼 기독교의 개종이 순수한 영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복음전도를 위해 선교사들은 개종한 자에게 그 대가로 연장이나 의복 따위 산업제품을 제공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물질적 대가를 바라고 거짓 개종한 사람들이 속출했다. 리빙스턴이 남아프리카인에게 설교하는 그림.

18세기 런던은 세계 상업의 중심지였고 아프리카와 연관된 모든 지적, 상업적 활동의 메카였다. 토머스 알롬의 그림은 19세기 런던항의 모습을 보여 준다. 영국 제2의 항구도시 리버풀은 검은 대륙과 노예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척할 수 있었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노예무역 열기가 수그러들자 경기가 다소 침체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수많은 탐험가들이 증기화물선을 타고 아프리카로 향했다.

장 밥티스트 마르샹

탐험가 새뮤얼 베이커가 그린 수채화는 라투카(Latooka), 장례식 춤을 묘사한 것이다. 종종 유럽인은 매혹적이긴 하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의식을 통해 원주민들로부터 성대하게 환대받았다.

리처드 버턴 경은 동양적인 품성과 이미지를 지니려고 했다. 그는 아편을 복용하고 방탕한 친구들과 어울렸으며 동성연애자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에 대한 이 같은 나쁜 평판은 그의 군경력을 손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총을 들고 열대림에 도전할 모든 준비를 갖춘 헨리 모턴 스탠리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탐험가의 전형을 보여 준다.

리빙스턴이 제작한 빅토리아 폭포 지도.

셔와호를 표시한 지도. 리빙스턴. 왕립지리학회, 런던

지질학자로서 1843년부터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종신 회장을 역임한 로드릭 머치슨경은 논리정연하면서도 권위적이었으며 든든한 재력을 바탕으로 많은 추종자들과 더불어 과학발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나일강 수원을 찾으려는 탐험대를 적극 후원해 주었다. 이에 감사하는 뜻에서 베이커는 앨버트호에서 내려오는 폭포에 머치슨이라 이름붙였다.

아홉 자녀들 중 일곱 명과 자리를 같이한 빅토리아 여왕. 스펙과 그랜트 등은 아프리카의 왕을 제압하기 위해 아무런 주저 없이 영국 여왕의 아들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제2장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서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기록했다.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인 나일강은 신성한 대상이었으며 오랫동안 지리학적 신비로 남아 있었다. 나일강은 과연 어디에서 흘러오는 것일까? 사람들은 나일강이 세상의 끝 또는 그 너머에서 발원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탐험가들은 나일강의 신비를 벗길 수 었었다.

탐험가 존 해닝 스펙의 초상. 스펙은 나일강의 수원을 알아냈으나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위대한 탐험가 스펙은 세속적인 명성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70만 권의 장서를 소장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 프톨레마이오스. 중세 말까지 사람들은 그의 저서를 많이 읽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유명한 저서 《지리학》이 15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이 책을 참고해서 고대 아프리카 지도가 제작되었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아프리카 남부지방은 실체가 명확하지 않으며 서부 해안선 윤곽 역시 확실치 못하다. 그러나 나일강의 묘사는 어느 정도 정확성을 띠었다. 당시 사람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보다 헤로도토스의 견해를 더욱 일반적으로 받아들였다.

제임스 브루스는 많은 지식인들과 교류를 가졌으며 때때로 그들에게서 큰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한번은 항해 도중에 탐험기재를 분실하여 탐험을 중도에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때 뷔퐁이 루이 15세를 설득하여 그에게 필요한 자재를 급송해 준 적이 있었다. 브루스가 스린 에티오피아의 동식물.

고고학자이며 지질학자였던 카이요는 기린, 타조, 나일강 지역 주민들(그림은 전통복 차림을 한 나일강 연안 주민들이다), 메로웨 문명의 사라진 영광, 아비시리 폭포 등 아프리카의 여러 풍물에 매료되었다. 그는 한때 이집트인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맹수 사냥꾼으로 유명한 존 스펙은 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였다. 히말라야와 티베트 여행을 통해 스펙은 모험심을 길렀고, 훌륭한 탐험가로서의 자질을 갖출 수 있었다.

리처드 버턴은 동양의 풍물과 미지의 땅을 향한 모험에 매료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순례자로 변장하여 메카에 잠입한 것이 그의 최초 기행(奇行)이었다(위). 그는 아프리카 동부에 위치한 이교도 금단지역인 하라르(아래)에 은거하기도 했다. 뛰어난 언어학자인 버턴은 아랍어와 힌두어를 포함해 30개가 넘는 언어를 구사했으며, 《아라비안 나이트》와 인도의 외설스런 문학작품을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끝없는 야망을 지닌 버턴은 까다로운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권위주의자로, 몹시 자만심이 강했으며 성마른데다가 전통적인 가치를 경시하기도 했다. 그는 하위직 외교관으로서 일생을 마쳤는데, 아래 사진은 트리에스테에 살고 있을 무렵인 그의 말년에 찍은 사진이다.


버턴은 탐험가들이 타고 다닌 당나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고집 세고 버릇도 나쁜 당나귀는 말과에 속하는 동물이 지닌 못된 버릇 네 가지를 가지고 있다. 뒷걸음질 치고 비틀거리고 뒷발로 차는가 하면 도망치기 일쑤이다."

스펙의 수채화.

스펙은 무테사왕을 비난했으나 스탠리는 그를 흠모했다.

"드디어 탐험의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고대 나일강이 빅토리아 냔자호에서 발원한다고 생각했다. 일찍이 예언했던 것처럼 냔자호는 우리 종교의 창시자(모세)가 바구니에 실려 떠내려온 성스러운 강의 근원임을 확신했다"라고 리폰 폭포에 도착하던 날 스펙은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어 두었다.

1880년에 제작된 이 판화는 콘도코로에서 이루어진 스펙과 그랜트와 베이커의 만남을 묘사하고 있다. "여러 척의 선박들이 정박해 있는 강가에서 우리는 멀리서 급히 뛰어오는 사람을 발견하고 우리가 찾고 있던 사람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곧 오랜 친구인 베이커의 뜨거운 악수가 나를 착각에서 깨어나게 했다. 이 뜻밖의 해후는 무척 큰 감동을 주었다."

곤도코로에서

스펙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한 스펙과 그랜트를 위해 왕립지리학회에서 주최한 환영회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열광하는 지지자들 앞에서 학회장은 이들에게 메달을 수여했다. 이 같은 모임은 유명한 탐험가가 참석할 경우 더욱 성황을 이루었다.

새뮤얼 베이커는 1821년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에 나가는 대신 집에서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은 탓으로, 그는 보수주의적 기질과 강한 개인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여러 차례 경험한 여행을 통해서도 이러한 편협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전투, 스포츠, 사냥에 참가하기 위해 스리랑카와 발칸 지역을 두루 여행한 적이 있다. 영국이 많은 식민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종적 우월을 자부하던 베이커는 19세기 인종차별주의적 이론이 대두되기 이전에 이미 앵글로 색슨족이 인간세계의 우등민족임을 확신하고 있었으며, 외국인 혐오감을 바탕으로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기 위해 글을 쓰곤 했다. 그러나 그는 회화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주었다. 수채화(위)에서 베이커는 쇼아에 있는 자신과 아내를 그렸으며, 아래 그림에서는 시르강 지역의 무인(武人)을 표현했다.

캄라시왕이 파견한 사절이 왕이 베이커를 스펙의 '형제'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탐험가 새뮤얼 베이커가 그린 <앨버트 냔자호 항해>이다.


제3장

리빙스턴의 남아프리카 탐험


"나는 방대하고 비옥한 아프리카 대륙이 그 신비의 베일을 벗고 유럽인의 경제생활에 유용한 상업시장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 마지막으로 나의 기록이 이 미지의 대륙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촉진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데이비드 리빙스턴

《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에서의 연구》

리빙스턴은 선교사, 탐험가, 문명의 사절로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을 위해 봉사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나는 열 살 때 방적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다."라고 리빙스턴은 탐험기에 적고 있다. 리빙스턴이 다닌 공장은 블랜타이어에 있었다. 그는 아침 6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했다. 또한 야간학교에서 10시까지 수업을 받은 후 자정까지 공부에 전념했다.

"1840년, 3개월의 항해 끝에 나는 케이프타운에 도착했다. 소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 내륙으로 들어가기 위해 알고아만으로 향했다. …… 그곳에서 16년 간 의료봉사와 선교사업에 헌신했다."

리빙스턴

탐험기(期)기에서 식민지 경영기로의 과도기라 할 수 있는 1879년에서 1890년 사이에 조지프 톰슨 또한 잠베지강에서 대호수 지역까지 탐사를 벌였다. 지질학자인 톰슨은 5,000km를 탐험하여 이룬 지리학적 발견 성과보다 그 탐험방법을 통해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가였으나, 언제나 대원들을 사려 깊게 대했고, 분쟁 없이 평화로운 가운데 탐험을 수행해 나가려 노력했다.

리빙스턴은 그의 가족을 동반해 응가미호에 이르렀다.

"수레들을 포기한 지 열이틀째 되는 날. 1849년 8월 1일, 우리는 응가미호의 북동쪽 끝 호수의 만곡부에 도착했다. 우리는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 아름다운 호수를 음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호수의 수심이 얕아 상업용 선박통로로 사용할 수 없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리빙스턴

리빙스턴이 잠베지강에서 수집한 노 젓는 흑인들의 뱃노래 중에, "아무도 모른다네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네 그가 어디로 가는지."라는 구절이 있다. 리빙스턴은 "현지주민은 잠베지강을 영물(靈物)로 여겼다."라고 적고 있다. 앙골라에서 인도양까지 2,700km를 흐르는 잠베지강에는 계곡과 폭포가 많아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 어려움이 따랐다. 위의 수채화는 리빙스턴의 소형증기선 마 로버트호이다.

리빙스턴이 일기를 적어 놓은 종이쪽지(위). 그는 가능한 한 장비를 줄이고자 했는데, 이 때문에 물자부족을 감수해야 했다. 풍경을 묘사하고 탐험행로를 설명하고 육분의(아래)를 이용해 지형지물을 측정하여 그 결과를 기록할 때 쓰는 종이는 무엇보다 귀한 물품이었다. 여행중에 쌓인 피로 때문에 탐험에 관련된 여러 사항을 모두 머릿속에 담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그때마다 기록해 두어야 했다. 또한 그는 탐험 도중 불운을 당했을 때 문서를 그들이 만나는 첫번째 백인에게 넘겨주라고 대원들에게 지시해 두었다.

"20분 간 항해한 끝에 우리는 '포효하는 연기'라고 불리는 물안개기둥을 발견했다. 거대한 기둥은 구름과 닿아 있는 듯했다. 밑동이 흰 물안개기둥은 위로 올라갈수록 색깔이 차츰 짙어졌기 때문에 땅에서 솟아오르는 연기기둥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주변의 큰 나무들이 함께 어우러진 풍경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강기슭과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들에는 환상적인 나무들이 무성해 있었다."

리빙스턴

《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에서의 연구》

토머스 베인스가 그린 테테 지방을 흐르는 잠베지강 지도(위). 리빙스턴(가운데)과 치세라를 통과하는 리빙스턴 탐험대(아래)

리빙스턴은 노예무역에 대한 식민관청의 묵인을 신랄히 비판했다. "다음날 50명이 넘는 노예가 석방되었다. ……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노예대상의 우두머리는 테테 지역에서 노예무역을 수행할 수 있는 권리를 관할 총독에게 허가받았음을 강조했다."

메어리 리빙스턴(위)은 잠베지강 유역에 머물고 있던 남편을 만나기 위해 영국을 출발했다. 강인한 체력과 아프리카에 대한 충분한 사전지식을 숙지했던 메어리였지만, 병에 걸려 동료 의사의 정성스런 치료에도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1862년 4월 사망했다. 그녀는 바오밥나무 아래에 안장되었다.(아래)

리빙스턴의 소형증기선 마 로버트. 정원 36명. 12톤 급 소형증기선은 1858년 탐험을 위해 특별히 제작되었다. 연료소비량이 많고 부식에도 약했던 마 로버트는 속력도 많이 낼 수가 없어 '천식환자(Ashmatic)'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베인스 그림.

스탠리와 리빙스턴의 역사적 만남을 스탠리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양측으로 늘어선 호기심이 가득한 원주민 사이를 지나 아랍인들이 서 있는 곳까지 갔다.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을 발견한 나는 당장에 그에게 달려가 포옹하고 싶었지만 모여든 군중에 위축되었고 또 그가 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몰랐기 때문에 그저 형식적인 예절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중히 그에게 다가간 나는 헬멧을 벗어 들고…….

"잔잔한 호수는 하늘의 푸르름을 반사하며 에머랄드빛을 쏘아댔다."

탕가니카호에서 스탠리

범람하는 강과 싸우고 있는 리빙스턴과 그의 짐끈들.

리빙스턴은 작은 마을에서 그의 일생을 마감했다. 마지막까지 리빙스턴을 간호하던 흑인들은 기도하는 자세로 죽음을 맞이한 그의 최후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

리빙스턴의 유해가 잔지바르에 도착한 것은 1874년 2월이었다. 그의 시신은 각종 서류를 비롯한 그의 유품과 함께 아서 랭에게 전달되었고, 아덴에서 말와호에 옮겨져 4월 16일에야 영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리빙스턴의 시신은 사우샘프턴에서 런던으로 이송되었다. 친구들과 윌리엄 퍼거슨 경이 왼쪽 어깨에 남아 있는 상처자국으로 본인임을 확인했다. 이 상처는 1843년 사자에게 물려 골절상을 입었을 때 남은 것이다.

리빙스턴의 충실한 하인 제이콥 웨인라잇이 잔지바르항에서 고인의 유물을 지키고 있다.


제4장

밀림 속으로


"리빙스턴은 루알라바강을 항해해 내려간다는 것이 어리석은 모험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렇다. 내가 다시 모험을 한다면 최소한 200명의 소총수를 동반할 것이다. 사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백인이 읽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전지전능한 신의 섭리에 맡긴 채 나는 모험을 계속할 것이며 이 글을 계속 써 나갈 것이다."

스탠리

《탐험일기》

캐머런(위)은 1875년에 포르투갈 노예무역상의 활동지역을 횡단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최초로 인류학적이고 식물학적인 탐사활동을 벌였고 지형을 자세히 관찰해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우기중에 행한 탐험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지만 31개월 간의 여정을 통틀어 사망자는 두 명에 불과했다. 로보이강을 건너는 캐머런 탐험대(아래).

티푸 티브는 중부 아프리카의 가장 유력한 대상으로, 잔지바르 왕의 통제에서 벗어나 낭궤지방에 군림했다. 그는 부하들을 파견해 노예와 상아를 약탈했다.

스탠리의 젊었을 때 모습. 존 롤랜즈는 1841년 영국의 웨일스 지방에서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14세 되던 해에 미국행 선박에 소년선원으로 고용되어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어떤 상인의 양자로 입양되어 헨리 모턴 스탠리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1865년에 기자생활에 입문한 스탠리는 《뉴욕 헤럴드》에 아비시니아에 관한 기사를 기재했으며 리빙스턴을 구출하여 전설적인 명성을 얻었다.

스탠리는 탐험을 함께한 세 명의 유럽인이 살아 대서양에 다다르지 못했음을 비탄했다. 열대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개의 죽음도 슬픈 일이었다. 그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프랭크 포콕, 프레데릭 바커, 잔지바르의 소년, 에드워드 포콕, 칼루루.

애초에는 통째로 운반할 계획이었던 레이디 앨리스호의 분해품. 앨리스호를 여러 조각으로 분해한 사람은 잔지바르의 목수였다. 스탠리는 약혼녀 이름을 배에 붙였던 것인데, 그가 탐험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앨리스는 이미 결혼한 후였다.

아서 젭슨은 1887년 스탠리의 마지막 탐험에 참여했다.

1900년대에 등장하는 광고,

브라자가 프랑스의 이름으로 추진했던  야심적인 식민사업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비록 스탠리의 대규모 탐험에 비길 바는 아니었지만, 제1차 오고웨강 탐사에 1만 7,500프랑을 지원받은 그는 이후 무려 4만 프랑을 지출했다. 브라자의 초상.

사람들은 인간과 유사한 고릴라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폴 뒤 샤이는 그의 저서 《적도 아프리카 모험과 그 탐사》에서 고릴라의 으르렁거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밀림 속에서 들리는 소리 중에 고릴라의 포효만큼 괴이하고 무시무시한 것은 없다. 성난 개처럼 시작된 울부짖음은 깊은 저음으로 변하는데, 그것은 멀리서 들려 오는 천둥소리와 같다.

메어리 킹슬리의 인생행로는 매우 독특했다. 1862년에 의사와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30세 되던 해 한 달 간격으로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집을 떠났다. 독학으로 라틴어, 물리, 화학과 독일어를 습득했던 킹슬리는 열정적인 여행가였던 부친에게서 탐험가 자질을 물려받았다. 여행기와 과학서적이 가득한 부친의 서재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킹슬리는 대영박물관에 새로운 어류의 표본을 기증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 신종 어류는 지금도 그녀의 이름을 따라 킹슬리아에(kingsleyae)로 불리고 있다.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알코올이 담긴 어항을 항상 들고 다니면서 그 속에 직접 잡거나 혹은 현지 어부에게서 구입한 물고기를 보관했다.


제5장

탐험가의 세계


얼떨결에 아프리카 탐험에 도전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아프리카가 아마추어 탐험가에게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탐험의 성공 여부는 선두에 서는 탐험가의 노련함에도 달려 있지만, 무엇보다도 짐꾼과 안내인의 능력에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출발 전의 세밀한 준비작업은 출발 후의 지구력만큼이나 중요하다.

"탐험을 준비하는 사람은 잔지바르에 체류하는 동안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 시간은 쏜살같이 빠르고, 한 순간도 낭비하는 일없이 탐험하고자 하는 지역에서 필요한 피륙, 유리제품, 철사 등을 사들여야 한다."라고 스탠리는 그의 탐험일기에 적고 있다.

콩고를 탐험중인 프랑스 탐험가, 루이 미종 대위.

탐험가는 상류 계층 출신은 아니었지만, 다독(多讀)과 자연과학에 대한 열정으로 지식인 계층에 편입될 수 있었다.

인부들이 장 밥티스트 마르샹의 보트를 분해해 운반하고 있다.

19세기 초 상아 수출량이 증가한 것은 유럽 상류층에서 수요량 증가에 따른 결과였다. 피아노 건반, 당구공, 거실의 장식용품으로 사용되던 상아의 교역은 앙골라의 쵸크웨족이나 남웨지족의 생활에 사회적, 경제적인 대변혁을 초래했다. 현지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한 상아가 결국 이들 원주민을 세계경제에 편입시킨 셈이었다. 그리고 현실적인 면에서는 상아를 넘겨준 대가로 소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프랑스의 마르샹 대위는 150명의 세네갈인 소총수를 거느렸다. 다재다능한 흑인 병사들은 짐꾼 역할은 물론 장교의 시중을 드는 하인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프랑스 우편엽서는 당시 식민정책의 홍보를 위해 자국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사진을 담곤 했다.

스탠리와 그의 일꾼을 묘사한 19세기 목판화에는 1871년부터 그의 시중을 들었던 칼룰루가 보인다. "나는 그가 일을 배우는 데 남다른 자질이 있음을 발견하고 하인으로 고용했다. 더 이상 일을 잘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였다. 셀림도 식탁에서 그만큼 내가 필요한 것을 빨리 알아채지 못했다. 칼루루의 생동감과 민첩성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그의 작고 검은 두 눈은 끊임없이 사물을 관찰하고 관찰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점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곧 필요하게 될 일까지도 생각해 냈다." 칼룰루는 1877년 스탠리가 그의 이름을 붙인 콩고강의 폭포에 휘말려 사망했다.

파쇼다 사건의 영웅, 장 밥티스트 마르샹 대위의 활약을 소재로 한 선전물. 마르샹은 19세기 말 프랑스의 국민적인 영웅으로 부상했다. 그는 다카르와 지부티에 이르는 대서양-홍해의 연결축을 확보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콩고강에서 나일강에 이르는 지역을 탐사했다. 1896년, 마르샹 대위는 대규모 탐험대를 인솔하여 나일강 상류로 진격하던 중 프랑스에 대항하는 세력을 평정이라는 명분으로 무차별하게 진압하기도 했다. 1898년 7월, 마르샹 탐험대가 수단의 파쇼다(오늘날 코독)에 도착해 프랑스 국기를 게양하려고 할 때, 호레이쇼 키치너가 지휘하는 2만에 달하는 영국과 이집트 연합군이 그곳에 도착했다. 영국과 프랑스 간에 외교적 위기상황이 야기되었다. 결국 프랑스가 11월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파쇼다 사건으로 프랑스는 외교적 굴욕을 당했는데, 국내 민족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애국주의를 고취하는 선전물로 삼았다.

스펙과 그랜트의 충성스런 수행원들. 리빙스턴은 현지인에게 아프리카 횡단을 도와 준 데 대해 감사를 표했다. "세켈레투가 황소 12마리와 괭이, 유리구슬 등을 제공했고 나는 그것으로 작은 배를 하나 살 수 있었다. 그의 관대함이 없었다면 탐험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동부 해안까지 갈 수 있도록 지원해 준 것은 콜롤로족과 몇몇 아프리카 부족들인 셈이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리빙스턴의 '발견여행'을 수행한 추마와 수시. 여기서 발견여행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개념이다. 오래 전부터 아프리카인은 유럽인이 발견한 지역을 지배하는 왕자였다.

사실상 아프리카 흑인과 몇몇 아랍인이 대육 내부 지리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공표하지 않은 것은 외부인이 그곳에 눈독들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무바릭 봄베이는 스펙과 버턴 탐험대에 참여했다.

체체파리는 인간과 동물에게 잠자는 병을 불러일으킨다. 체체파리의 분포는 지역에 따라 달랐는데, 리빙스턴은 체체파리가 극성을 부리는 지방을 통과할 때는 밤을 이용해 이동했다.

인부를 권총으로 겨누고 있는 스탠리는 인부를 함부로 다룬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행군 도중 공개재판을 열어 처벌을 결정하기도 했다. 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은 다섯 명 중 두 명의 살인자와 한 명의 탈주자에 대한 집행은 실행되지 않았다.

콩고 원주민의 지도자. 마코코의 초상.



1739년에 제작된 이 프랑스 지도는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나타내고 있다.


무테사왕이 베푼 성대한 환영식에 입장하는 스탠리.

망설임 끝에 몇몇 탐험가는 아프리카 축제에 동참했다. 우쿨리마와 어울려 춤추고 있는 그랜트.

탕가니카호 주변의 한 원주민 부락에서 환영의 뜻을 담은 상아를 증정받는 리빙스턴.


베이커는 언제나 차분함을 보여 주었다. 소 등에 올라타 흑인 전사들의 전투력을 평가하는 모습.

노예무역을 반대하면서도 탐험가들은 종종 그들의 안전을 위해 노예상들과 행로를 같이해야 했다.

Esquisse des découvertes de R. F. Burton et de J.-H Speke dans l'Afrique orientale... / par V. A. Malte Brun - 1



아프리카의 강들에 산재하는 폭포와 급류는 증기선을 이용한 편안한 원정을 기대했던 탐험가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윌리엄 해리슨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월산>의 두 주인공.

아프리카 탐험가로 영원히 기억될 스펙과 그랜트.

《뉴욕 헤럴드》지의 사장. 제임스 고든 베넷.






posted by 황영찬
2014. 9. 12. 10:33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86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레이 몽크 지음 | 김병화 옮김

2007, 웅진지식하우스



시흥시립대야도서관

SB031811


082

하66ㅇ v. 1


우리가 철학자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는 대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철학자의 사상이 흥미를 끄는 경우와,

한 인간으로서 그 철학자가 흥미를 끄는 경우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두 가지 모두에서 흥미를 끄는 인물이다.

그의 철학은 현대 철학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의 생애는 그의 철학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도

충분히 흥미를 가질 만큼 독특했다.


●  ●  ●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도발적인 작가와 사상,

그들의 글을 원전으로 직접 만난다


현대 철학사의 획기적 전환을 이끌어낸

괴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평생 동안 오직 단행본 한 권, 논문 한 편, 서평 한 편만을 발표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하는 새로운 방식, 철학이라는 주제의 역사에서 전례 없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언어가 철학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비트겐슈타인은 특이한 시적 글쓰기 방식 때문에 동료들과 현격하게 구분된다. 저자 레이 몽크는 비트겐슈타인의 사고 바탕에 우리 시대의 과학주의적 성격에 저항하고 비과학적 형태의 이해에 자율성과 고결성이 있음을 주장하려는 단호함이 있다고 말한다.

그가 철학에 접근하는 방법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제시되었던 견해, 즉 철학이 과학, 혹은 과학 비슷한 어떤 것일 수도 없다고 하는 입장을 충실하게 견지하려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원리들로 구축된 하나의 전체가 아니라 언어가 던지는 마술에 의해 빚어진 혼란을 청소하는 활동이다.


HOW TO READ 시리즈

위대한 사상, 세기의 저작을 원전으로 직접 만나는 특별한 기회, HOW TO READ 시리즈, 이 시리즈는 세계적 석학들의 안내를 받으며 사상가들의 저작 중 핵심적인 부분을 직접 읽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읽는 척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제대로 읽을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우리시대 교양인을 위한 고품격 마스터클래스가 될 것이다.


레이 몽크 Ray Monk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수리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를 움직인 100대 인물에 철학자로는 유일하게 꼽힌 우리시대의 대표적 철학자다. 현재 영국의 사우샘프턴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국내에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작가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김병화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석 ·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번역 · 기획 네트워크 '사이에'의 위원으로 활동하고 잇다. 옮긴 책으로 《쇼스타코비치의 증언》《나의 기쁨과 슬픔 : 첼리스트 카잘스》《이 고기는 먹지 마라?》《공화국의 몰락》 등이 있다.


차례


■ HOW TO READ 시리즈를 열며

■ 저자 서문 | 철학을 하는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다


1 케임브리지의 루트비히 | <케임브리지 리뷰>

2 세 단어로 철학을 청소하다 | 《논리-철학 논고》, 서문

3 세계를 그려보다 | 《논리-철학 논고》

4 명제란 무엇인가 | 《논리-철학 논고》

5 철학은 학설이 아니라 활동이다 | 《논리-철학 논고》

6 1929년, 케임브리지의 루트비히 | 《논리적 형식에 관한 몇 가지 언급들》

7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 | 《철학적 탐구》

8 합리주의를 뒤흔드는 언어 게임 | 《청색 책

9 상자 속의 딱정벌레, 사적 언어 | 《철학적 탐구

10 비트겐슈타인과의 대화 | 《철학적 언급들》, 서문 초고

11 과학과 예술의 결정적 차이 | 《철학적 탐구》, 제2부


■ 주

■ 비트겐슈타인의 생애

■ 함께 보면 좋은 자료

■ 역자 후기 |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하는 결정적 힌트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에 대해 가진 태도는 학술 기관에 몸담고 있는 전문적 철학자들이 보이는 지배적인 태도와는 아주 달랐다.

그는 철학을 일차적으로 직업으로서는 물론 학술적 주제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볼 때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활동이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사업가였던 것처럼 자신은 철학에 대해 사업적인 태도를 가졌다고 말하곤 했다.

마치 사업가가 책상 위에 쌓인 문제를 처리하는 것처럼 철학적 문제를 처리하고자 한 것이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애쓰지 않아야만 아무것도 상실되지 않는다.

하지만 말해질 수 없는 것은 말해진 것 속에-말로 할 수 없이-담겨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분명히 비트겐슈타인의 이념이 되었다.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고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소통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세계'에 대한 논쟁은 다른 모든 철학적 문제처럼 우리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며, 그렇기 때문에 명제의 정확한 분석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비트겐슈타인은 믿었다.


의미 있는 명제는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상태를 그리는 것에 한정되는 데 비해, 윤리적이거나 미학적이거나 종교적인 가치는 세계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윤리적 사실이란 것은 없다.

윤리적 명제가 있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철학의 과제는 우리 언어의 논리가 갖는 진정한 본성을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그 논리가 오해되었을 때 발생하는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이다.

철학적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가장 잘 해결하려면 사례 연구 차원으로 내려가야 한다.

따라서 철학은 학설이 아니라 활동이다.


이러한 외관상 사소하고 기술적인 것 같은 양보를 하고 나면 전체 이론이 해체되어버리며,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논리-철학 논고》의 이론에 난 구멍을 수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논리학과 언어에 대한 자신의 접근법 전체를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1929년에 케임브리지에 돌아온 다음 해부터 그가 한 일이 이것이었다.


우리의 고찰에는 어떤 가설적인 것도 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모든 설명(explanation)을 배제해야 하며, 기술(description)만 남겨두어야 한다.

이 기술은 철학적 문제들에서 그 빛, 즉 목적을 얻는다.

물론 이것들은 경험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 언어의 작동 과정 및 설령 그에 대해 오해하게 만드는 충동이 있을지라도 그 과정을 우리가 깨닫게 만들어주는 방식을 조사함으로써 해결된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종류의 문장이 있는가?

단언문, 의문문, 명령문이 있다고?

문장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고, 우리가 '상징', '단어', '문장'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용도도 수없이 다양하다.

이런 다수성은 뭔가 단번에 영원히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종류의 언어, 새로운 언어 게임이 존재하게 되며, 다른 것들은 구식이 되고 잊혀진다.


한 사람이 그 자신의 내면적 경험, 즉 감정, 기분 등등을 자기 혼자만 사용하기 위해 음성적으로 표현하거나 글로 적을 수 있는 언어도 상상할 수 있을까?

-글쎄, 우리도 일상 언어에서 그렇게 하지 않던가?-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언어의 각 단어들은 말하는 인물에게만 알려질 수 있는 것, 즉 그의 아주 일차적이고 사적인 감각 지각을 지칭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인물은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내게는 그의 반대로 명료성, 명석성이 그 자체로서 귀중하다.

나는 건물을 쌓는 데는 관심이 없고, 지을 수 있는 건물의 기초를 명료하게 보는 관심이 있다.

그러니 내가 겨누는 과녁은 과학자들의 것과 같지 않으며, 나의 사고방식은 그들의 것과 다르다.


어떤 사람이 어떠어떠한 심리 상태에 있다는 것, 예를 들면 시늉만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증거에 의거해 확신하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증거'에는 '계량 불가능한' 증거가 포함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생애


1889년 4월 26일 빈에서 카를과 레오폴디네의 여덟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남.

1903~1906년 린츠의 실업학교에 다님.

1906~1908년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에 있는 기술고등학교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함.

1908~1911년 맨체스터에서 항공공학을 공부함.

1911년 버트런드 러셀에게서 배우기 위해 케임브리지에 감.

1913년 코피의 《논리의 과학》 서평을 <케임브리지 리뷰>에 발표함.

1913~1914년 노르웨이에서 혼자 살면서 논리학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연구함.

1914년 6월 빈에 도착했으나, 여름을 보낸 뒤 다시 노르웨이로 돌아가려고 생각함.

1914~1918년 오스트리아 군대에 입대해 처음에는 러시아 전선에서, 다음에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함.

1918~1919년 이탈리아 포로 수용소에서 1년을 보냄. 《논리-철학 논고》를 완성함.

1919~1920년 빈에서 교사 수련을 받음.

1920~1922년 저지 오스트리아의 트라텐바흐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침. 《논리-철학 논고》가 출판됨.

1922~1924년 푸흐베르크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침. 프랭크 램지가 방문함.

1924~1926년 오테르탈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침.

1926~1928년 빈에서 건축가로 일함.

1929년 프랭크 램지와 함께 연구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돌아감.

1930년 램지의 죽음.

1931년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에서 강의하기 시작.

1933년~1934년 강의하는 대신 학생들에게 《청색 책》을 구술함.

1934~1935년 소수의 학생들에게 《갈색 책》을 구술함.

1935년 소련을 방문.

1936~1937년 노르웨이에서 살면서 현재 《철학적 탐구》의 1부가 되어 있는 내용을 대부분 집필.

1938년 3월 12일 오스트리아와 나치 독일이 병합됨. 비트겐슈타인은 독일 시민이 됨.

1938년 4월 영국 시민이 됨.

1939년 2월 11일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선출됨.

1941~1942년 런던의 가이 병원에서 짐꾼으로 일함.

1942~1944년 뉴캐슬에서 의학 연구 프로젝트의 실험실 조수로 일함.

1944~1947년 케임브리지에서 강의.

1947년 케임브리지 교수직을 사임.

1947~1949년 아일랜드에서 살면서 현재 《철학적 탐구》의 2부가 되어 있는 부분을 집필.

1950년 마지막으로 오스트리아를 방문.

1951년 4월 28일 케임브리지에서 사망.


posted by 황영찬
2014. 9. 12. 08:54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85 사진, 새로운 눈


최건수 엮음

2014, BMK



대야도서관

SB100330


668

최14ㅅ


사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간단히 말하면 그냥 좋아서, 어떤 대가도 없이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누군가 알아보기도 하고

한 수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기도 한다.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성공의 노하우다.


2013년 3월 개강과 함께 9명의 사진 벗들과 책을 한 권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나랑 일 년 동안 일 주일에 한 번씩 사진을 핑계 삼아 놀던 분들이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일 주일에 한 번 만나서(때때로 배우고 익히면서) 재미나게 놀았다(기쁘지 아니한가?) 남들보다 특별히 열심히 한 것도 없다.

때때로 만나 공부(?)하고 떠들고 놀다 보면 뭐 좀 남는 것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믿음으로 세월을 보냈다. 콩나물 시루에 부은 물이 다 빠져나갔다고 콩나물이 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뭔가 계속 붓다 보면 사진도 조금씩 커갈 것이다.

이 여유로움으로 사는 인생이 즐겁다. 더 무엇을 욕심 낼 것인가?


차례


엮은이의 글

강혜숙 | 쓸쓸함을 위하여

김종성 | 겨울 오디세이

류태숙 | 사소한 신화

서병용 | 물의 뿌리

오은주 | 점 · 선 · 면

이동숙 | 봄부터 여름까지

이윤자 | 빛의 노래

이중찬 | 산의 명상

전효기 | 흰구름의 산책

후기


최건수

1953년에 태어났다. 1980년 이후 사진평론가, 사진가, 전시 기획자, 사진교육자로 살아오고 있다. 1989년 《동아미술제》에서 미술상을 수상했다. 1991년 제1회 개인전 《Reconstruction》을 시작으로 2009년 제9회《한국현대미술제》에서 <Soulwave>를 발표했고, 제1회《ABSGRAPHY》, 《2009 SIPA》 등을 통해 새로운 작업을 선보였다. 2013년에는 회갑 기념전 《TEXT》를 개최했다. 기획한 전시로 《우리 시대의 사진가》(1994), 《5028, 사람 그리고 景》(2007), 《한국사진의 프런티어》(2008), 자연과 사물》(2009), 《사진의 터》(2013)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1995), 『사진 그리고 삶』(1999), 『사진 속으로의 여행』(2004), 『한국사진의 프런티어』(2008), 『사진 읽는 CEO』(2009), 『제주 올레, 행복한 비움 여행』(2010), 『사진을 바꾼 사진들』(2011), 『TEXT』(2013), 『사진 직설』(2014) 등이 있다.

작은 세계에서 보는 큰 세계

세계가 걸어 들어온다

석산에서 만나는

억만 겁의 삶의 흔적


삶이 힘들 때

그 산에 오른다

말 없는 산이 나를 위무한다.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이리라

마음을 밟고 지나가는 초침 소리.

왜일까?

심장이 말랑말랑해진다.

어둠은 밝음을 다독이고…

생각은 늘 제멋대로

잠시 세월을 묶어두기

위해서는

생각을 멈출 필요가 있다.

알 수 없는 길을 걸었다.

이제는 가물가물한 무수한 소망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뒹군다.

이를 어쩌나!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다고

세상을 쓸쓸하다고 말하지 말자.




posted by 황영찬

2014-084 한국의 나비


글 / 남상호●사진 / 남상호, 이수영

1999,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3146


082

빛12ㄷ  224


빛깔있는 책들 224


남상호-------------------------------------------------------------------------

1949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생물학과 및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고려대학교 한국곤충연구소 연구원 및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대전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있다. 곤충 관련 논문 50여 편을 발표하였으며, 저서로는 『한국동식물도감 곤충편 · 』『유아용 그림책』『한국의 곤충』『원색도감 한국의 곤충』『한국곤충생태도감』 등 18권이 있으며, 『과학 앨범』 등 63권의 곤충 분야 책을 감수하였다.


이수영-------------------------------------------------------------------------

1953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으며, 10여 년 동안 국내외를 다니며 곤충의 세계를 촬영하여 왔다. 1996년 3월부터 1997년 1월까지 용인 에버랜드에서 곤충사진전을 개최한 바 있다. 저서로는 '한국의 자연탐험' 시리즈 가운데 『야생벌』『사슴벌레』『메뚜기』『개구리』『장수풍뎅이』『반딧불이』 등 생태서적 6권과 『한국곤충생태도감』(5권) 『곤충을 찾아서』 등이 있다. 현재 출판, 신문, 잡지 분야에서 곤충사진가로 활동중이며, 한국 생태사진가협회 홍보이사로 있다.


|차례|


우리나라의 나비 실태

나비와 나방

나비의 한살이

계절에 따른 나비의 출현

나비들이 즐겨 사는 곳

우리나라의 주요 나비

보호가 필요한 나비

한국산 나비 목록 일람표

찾아 보기

참고 문헌

산네발나비

흰무늬왕불나방


호랑나비의 한살이




배추흰나비

조흰뱀눈나비

네발나비

번데기

모시나비

애호랑나비(이른봄애호랑나비)

Luehdorfia puziloi(Erschoff)

모시나비

Parnassius stubbendorfii Menetries

꼬리명주나비

Sericinus montela Gray

사향제비나비

Atrophaneura alcinous (Klug)

호랑나비

Papilio xuthus (Linnaeus)

산제비나비

Papilio maackii Menetries

제비나비

Papilio bianor (Cramer)

기생나비

Leptidea amurensis (Menetries)

북방기생나비

Leptidea morsei (Fenton)

남방노랑나비

Eurema hecabe (Linnaeus)

극남노랑나비

Eurema laeta (Boisduval)

각시멧노랑나비

Gonepteryx aspasia (Menetries)

멧노랑나비

Gonepteryx rhamni (Linnaeus)

노랑나비

Colias erate (Esper)

갈구리나비

Anthocharis scolymus (Butler)

대만흰나비

Pieris canidia (Sparrman)

배추흰나비

Pieris rapae (Linnaeus)

큰줄흰나비

Pieris melete (Menetries)

줄흰나비

Pieris napi (Linnaeus)

풀흰나비

Pontia daplidice (Linnaeus)

참까마귀부전나비

Fixsenia eximia (Fixsen)

큰주홍부전나비

Lycaena dispar (Haworth)

작은주홍부전나비

Lycaena phlaeas (Linnaeus)

남방부전나비

Pseudozizeeria maha (Kollar)

암먹부전나비

Everes argiades (Pallas)

푸른부전나비

Celastrina argiolus (Linnaeus)

산꼬마부전나비

Plebejus argus (Linnaeus)

부전나비

Lycaeides argyrognomon (Bergtraisser)

작은홍띠점박이푸른부전나비

Scolitantides orion (Pallas)

뿔나비

Libythea celtis (Laicharting)

왕나비

Parantica sita (Kollar)

봄어리표범나비

Mellicta britomartis (Assmann)

여름어리표범나비

Mellicta ambigua (Menetries)

작은은점선표범나비

Clossiana perryi (Butler)

큰표범나비

Brenthis daphne (Denis et Schiffermuller)

흰줄표범나비

Argyronome laodice (Pallas)

큰흰줄표범나비

Argyronome ruslana (Motschulsky)

암끝검은표범나비

Argyreus hyperbius (Linnaeus)

은줄표범나비

Argynnis paphia (Linnaeus)

은점표범나비

Fabriciana adippe (Linnaeus)

제이줄나비

Limenitis doerriesi Staudinger

제일줄나비

Limenitis helmanni Lederer

별박이세줄나비

Neptis pryeri Butler

황세줄나비

Neptis thisbe Menetries

중국황세줄나비

Neptis tshetverikovi Kurentzov

두줄나비

Neptis rivulatis (Scopoli)

북방거꾸로여덟팔나비

Araschnia levana (Linnaeus)

거꾸로여덟팔나비

Araschnia burejana Bremer

네발나비(남방씨-알붕나비)

Polygonia c-aureum (Linnaeus)

산네발나비(씨-알붐나비)

Polygonia c-album (Linnaeus)

청띠신선나비

Kaniska canace (Linnaeus)

큰멋쟁이나비

Vanessa indica (Herbst)

작은멋쟁이나비

Cynthia cardui (Linnaeus)

먹그림나비

Dichorragia nesimachus (Doyere)

황오색나비

Apatura metis Freyer

번개오색나비

Apatura iris (Linnaeus)

은판나비

Mimathyma schenckii (Menetries)

밤오색나비

Mimathyma nycteis (Menetries)

유리창나비

Dilipa fenestra (Leech)

대왕나비

Sephisa princeps (Fixsen)

물결나비

Ypthima motschulskyi (Bremer et Grey)

애물결나비

Ypthima argus Butler

산지옥나비

Erebia neriene (Bober)

도시처녀나비

Coenonympha hero (Linnaeus)

굴뚝나비

Minois dryas (Scopoli)

조흰뱀눈나비

Melanargia epimede (Staudinger)

부처나비

Mycalesis gotama Moore

부처사촌나비

Mycalesis francisca (Cramer)

왕팔랑나비

Lobocla bifasciata (Bremer et Grey)

왕자팔랑나비

Daimio tethys (Menetries)

멧팔랑나비

Erynnis montanus (Bremer)

수풀알락팔랑나비

Carterocephalus silvicola (Meigen)

참알락팔랑나비

Caterocephalus diekmanni (Graeser)

돈무늬팔랑나비

Heteropterus morpheus (Pallas)

지리산팔랑나비

Isoteinon lamprospilus C. et R. Felder

유리창떠들썩팔랑나비

Ochlodes subhyalina (Bremer et Grey)

수풀떠들썩팔랑나비

Ochlodes venatus (Bremer et Grey)

황알락팔랑나비

Potanthus flavus (Murray)

줄점팔랑나비

Parnara guttata (Bremer et Grey)




posted by 황영찬

2014-083 대한민국 기차여행의 모든 것


병국 · 박준규 · 정진성 지음

2014, 지식너머



대야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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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44ㄷ


NEW 내일로티켓 | 자유여행패스 완벽가이드


친구 / 연인 / 가족들을 위한 진짜 괜찮은 기차여행지 총정리


주말, 방학, 휴가철에도

매일 "방콕" 중인 당신을 위한

대한민국 최고의

기차여행 가이드북!


PART· 기차표 구입부터 알면 돈 버는 유용한 정보까지!

PART· 당일 · 무박2일 · 2박3일 · 자유여행패스를 이용한 3일 · 내일로여행자를 위한 전국일주 등 무한감동 추천 코스!

PART 3 · 다채로운 이벤트로 절대 지루할 틈이 없는 대한민국 관광열차 올 가이드!

PART· 명승고적, 맛집, 박물관, 간이역, 럭셔리 기차여행, 사계절 축제 등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는 테마여행!

PART 5 · 알아보기 쉽고 찾아가기가 쉬운 지역별 기차역 주변 여행지 소개, 추천 일정, 꼭 가볼 곳, 꼭 먹어봐야 할 것 등 알짜배기 여행정보로 가득!


여행 코스 짜는 게 귀찮고, 반복되는 교통체증에 장시간 운전이 두렵다면?


기차역에서 여행지까지 헤매지 않고 논스톱으로 갈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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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살아있는 지식을 안겨주는 체험여행!


3인 3색

대한민국

기차여행의

모든 것!


내가 원하던 진짜 괜찮은 여행을 떠나자!

정말 괜찮은 여행을 즐기려면 자신의 여행에 대한 취향부터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박2일을 즐길 만한 체력을 갖췄는지?"와 같은 기초적인 질문에서부터 "내가 좋아하는 여행의 모습은 자연 관광인지, 도시 구경인지, 쇼핑몰만 크면 되는지, 그저 풍경 좋은 곳으로 기차만 타고 다녀도 즐거운지"에 대한 질문에 어느 정도 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또 하나 준비해야 할 것은 '기차 탄다는 것'의 즐거움을 이해하는 것이다. 먼 곳은 왕복 10시간 이상 기치만 타고 가야 하는데, 내려서 잠깐 구경하고 집에 오는 것만 생각한다면 절대 행복한 여행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기차여행은 목적지만큼이나 차창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여행 코스가 무척 중요하다.


임병국 | badajr@naver.com

한국의 기차역을 모두 답사하고 등록문화재 지정(16개)에도 참여했다. 점점 사라져가는 간이역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간이역 여행》을 출간한 바 있으며, 코레일 사보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가 지키고 가꿔야 할 한국의 개념 여행지 발굴과 우리만의 독특한 철도문화를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박준규 | pcfixman@hanmail.net

                   http://facebook.com/pcfixman

코레일 명예기자, 사보 취재기자, 고객대표, KTX 탑승 1호 승객, 망상역 명예역장, 청량리-정동진을 기차로만 300회 이상 완주하는 등 자타공인 대한민국 기차여행 전문가다. 오늘도 기차여행의 활성화를 위해 열심히 여행 중인 그는, 블로그와 페이스북 그리고 카페에 최신 여행정보를 실시간으로 포스팅하는 부지런한 여행작가다. 기차여행 떠날 때 그의 컨설팅은 필수!


 정진성| serm001@naver.com

네이버 철도동호회 '엔레일'의 운영자이자 국내 유일의 철도잡지 <레일러> 기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휴일만 되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변신하여 행방이 묘연해지기 일쑤이다. 혼자 알기 아까운 아름다운 기차여행지를 소개하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


철도동호회 엔레일

http://nrail.net

망상역 명예역장 블로그

http://traintrip.kr

기차여행기를 적는 사람들

http://cafe.daum.net/traintripwrite

철도 전문 매거진 레일러

http://cafe.naver.com/railers


CONTENTS


INTRO  내가 원하던 진짜 괜찮은 기차여행

           기차여행 갈 때 꼭 챙기자


PART 1

기차 여행자들을 위한 특별한 팁


01 기차표, 이렇게 구입하자

02 할인! 할인! 알면 돈 번다

03 기차, 알차게 이용하자

04 기차여행 고수들만 아는 팁

05 기차여행 업그레이드 노하우 Best 10

06 기차여행에 도움이 되는 사이트 Best 7

07 코레일 여행상담센터

08 기차여행 전문 여행사 총정리

09 열차 소개


PART 2

기차여행의 고수 3인이 추천하는 Best 코스


01 당일 코스

    박준규 추천 | 부산역

    임병국 추천 | 광천~청소 둘레길

    정진성 추천 | 경주역

02 무박2일 코스

    박준규 추천 | 정동진역, 강릉역

    임병국 추천 | 목포역

    정진성 추천 | 원주역, 해운대역

03 1박2일 코스

    박준규 추천 | 순천역, 곡성역

    임병국 추천 | 예천~안동 문화여행

    정진성 추천 | 영동지방 정복 프로젝트

04 2박3일 코스

    박준규 추천 | 울릉도, 독도여행

    임병국 추천 | 남남여행

    정진성 추천 | 사랑해! 충청

05 자유여행패스를 이용한 3일 코스

    박준규 추천 | 강원도 완전정복

    실전! 자유여행패스를 이용한 3일 코스 짜기

06 내일로여행자를 위한 전국일주 코스(4일 이상)

    박준규 추천 | 강원도, 경상북도, 부산

    임병국 추천 | 반시계 방향 남부지방 일주

    정진성 추천 | 내일로와 함께하는 전국일주

    유서 깊은 도시로 떠나는 내일로여행 일정표


PART 3

한국의 특별한 관광열차 & 여행 Best 13


01 교육전용관광열차(E트레인)

02 와인시네마트레인

03 레일크루즈 해랑

04 바다열차

05 중부내륙순환열차(O트레인)

06 협곡열차(V트레인)

07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

08 에코레일자전거열차

09 남도해양관광열차(S트레인)

10 꼬마열차

11 팔도장터관광열차

12 부울경관광테마열차(BUGs-Train, 침대열차)

13 평화생명벨트열차(DMZ트레인)


PART 4

테마가 있는 기차여행


01 명승고적을 찾아 떠나는 기차여행 | 백양사역, 기장역

02 맛집 여행 | 안동역, 전주역, 춘천역

03 전망이 있는 숙박여행 | 목포역, 정동진역

04 산으로 계곡으로 | 소백산역, 동해역

05 박물관 기행 | 청주역

06 도시 습격 프로젝트 | 대전역, 대구역, 부산역, 광주역

07 바다가 보이는 기차여행 | 강릉역, 정동진역

08 느림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기차여행 | 영동선, 경전선, 경북선

09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찻길을 찾아서 | 동해남부선, 경전선, 장항선, 중앙선

10 오지 간이역을 찾아 떠나는 소박한 여행 | 양원역, 승부역, 화본역, 각계역, 신림역

11 철길 풍경이 있는 기차여행 | 아우라지역

12 기차만 타고 다니는 'only 기차여행' | 추전역, 승부역

13 기차와 버스를 함께 타고 떠나는 복합여행 | 정바레

14 영화 촬영지를 찾아 떠나는 기차여행 | 옛 구둔역, 옛 곡성역, 공전역

15 스탬프 습격 프로젝트 | 전국

16 프로스포츠와 함께하는 기차여행 | 부산역, 전주역, 태백역

17 폐선 따라 걷는 여행 | 레일길

18 역사를 찾아 떠나는 가족여행 | 온양온천역, 창원역, 함백역

19 대한민국 럭셔리 기차여행 | 레일크루즈 해랑

20 四계절 축제 기차여행 | 진해, 보령, 정읍, 화천


PART 5

지역별 대한민국 기차여행의 모든 것


강원도

01 강릉역 / 정동진역

02 태백역 / 추암역

03 동해역 / 추암역

04 망상역

05 정선역 / 아우라지역

06 영월역

07 춘천역 / 강촌역


전라도

01 보성역

02 여수엑스포역 / 순천역

03 남원역 / 곡성역

04 목포역

05 군산역

06 전주역

07 정읍역 / 백양사역

08 광주역 / 광주송정역


충청도

01 대천역

02 제천역 / 단양역

03 홍성역

04 충주역 / 삼탄역

05 천안역 / 온양온천역

06 대전역 / 옥천역

07 논산역 / 연산역

08 영동역


경상도

01 경주역 / 포항역

02 진주역

03 영주역 / 풍기역

04 김천역 / 구미역

05 부산역 / 해운대역

06 동대구역

07 안동역 / 예천역

08 밀양역 / 청도역

09 창원역 / 진해역

10 봉화역 / 승부역

11 점촌역


수도권

01서울역

02 수원역

03 임진강역 / 도라산역

04 연천역 / 신탄리역

05 가평역 / 청평역

06 인천역 / 인천국제공항역

07 백마고지역


부록 기차여행자들을 위한 추천 숙소


특별부록

전국 기차역 연계 시티투어 코스 BEST 29 핸디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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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4. 8. 27. 16:35 내가 읽은 책들/2014년도

2014-082 서양 고전음악 감상법


글, 사진 / 조성진

1999,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3145


082

빛12ㄷ 223


빛깔있는 책들 223


조성진-------------------------------------------------------------------------

1947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빈대학과 빈국립음대, 독일 함부르크대학과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극학, 음악학, 오페라 연출을 전공하였다. 1980년부터 「아이다」를 시작으로 「꿈」, 「코지 판 투테」, 「피가로의 결혼」, 「앨버트 헤링」 등 많은 오페라를 연출하였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예술의전당 초대 예술 감독으로 재직하였다. 저서에는 『오페라 감상법』이 있다.


|차례|


머리말

고전이란 무엇인가

감상의 시작

고전음악의 장르

음악사의 큰 산맥들

올바른 감상을 위하여

연주회장에서의 매너

감상과 병행할 일들

음악 발전을 위하여

부록 - 1600년 이후의 주요 작곡가

마르타 아르헤리치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1960년대 중반에 뛰어난 젊은 피아니스트로서 세계에 소개된 이후 오늘날까지 그명성을 잃지 않고 있다.

18세기의 오페라 공연  하이든이 오래 재직했던 에스터하지 궁에서 자신의 오페라를 공영하는 광경. 이처럼 귀족이 존재했던 시기의 작곡가들은 대개 귀족이 소유한 개인 오케스트라의 악장이었다.

1780년경의 모차르트 가족  볼프강 아마데우스와 손위 누이 마리아 안나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고 그 앞에 자녀를 위해 헌신적이었던 부친 레오폴트가 바이올린을 들고 있다. 벽에 걸린 초상화는 작고한 모친 안나 마리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독일을 대표할 뿐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권위있는 오케스트라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주무대인 베를린 필하모닉 홀은 전통에서 벗어난 현대적 스타일의 콘서트 홀을 대변한다.

멜로스 현악 4중주단  19세기 독일 작곡가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폭넓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는 현재 독일을 대표하는 중견 현악 4중주단이다. 왼쪽부터 빌헬름 멜허, 게르하르트 포스, 헤르만 포스, 페터 부크.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20세기 러시아의 작곡가로 리스트처럼 피아노의 대가였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이 무지치

리카르도 무티

레너드 번스타인

모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볼프강 자발리쉬

주빈 메타

구스타프 말러의 지휘 모습  1899년 빈의 신문에 나온 말러의 모습이다. 말러는 빈의 왕립 오페라 하우스를 이끌면서 타협을 모르는 지휘로 뛰어난 작품 해석을 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유럽에서 가장 전통적이자 가장 보수적인 성향의 오케스트라이기도 하다. 그들만의 독특한 사운드를 지킨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의 연주를 뒷받침해 주는 데 주연주장인 빈의 무직페라인 홀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무직페라인 홀은 유럽에서 가장 음향이 좋은 몇 안 되는 전통적인 연주장 중의 하나이다.

칼 뵘  모차르트와 슈트라우스를 중심으로 독일계 음악을 주된 레퍼토리로 하는 오스트리아 지휘자이다. 거의 전적으로 음악적인 바탕 위에서 출발하는 오스트리아풍의 꼼꼼한 지휘를 대표한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기돈 크레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1850년의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 부부  클라라는 뛰어난 현역 피아니스트였고 두 사람은 부부애로도 유명했다. 슈만의 피아노곡들은 거의 모두 표제음악들이다.

현악 4중주  20세기가 끝나가는 이 시점에서도 현악 4중주는 전통적인 실내악의 중심을 이룬다. 세계적 현악 4중주단인 독일의 멜로스 현악 4중주단.

후고 볼프  오스트리아 작곡가 로거의 가곡에만 전념했고 독일어의 언어 멜로디를 파고들어 독특한 경지를 이룩했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18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독일 출신이지만 주로 영국에서 활약했다. 18세기 오페라의 거장이었다가 말년에는 「메시아」를 비롯한 걸작 오라토리오들을 썼다.

17세기의 오페라 하우스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1637년 상업적인 오페라 하우스를 만들어 귀족과 평민을 한꺼번에 관객으로 받아들였다. 헨델이 오페라 작곡가로 활약할 당시의 런던 코벤트 가든 오페라 하우스.

헨리 퍼셀  음악사에서 영국은 대륙에 견줄 만한 작곡가들을 많이 배출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헨리 퍼셀은 근대 음악 초창기에 이미 우뚝 선 대가이다.

안토니오 비발디  비발디의 화려하고 부담없는 곡들은 1960년대 초부터 일반에게 인기를 끌게 되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세 명의 아들들  바로크 음악의 마지막 대가 바흐(왼쪽)와 아들 세 명의 1730년경 모습이다. 바흐의 아들들은 바로크 음악이 고전주의로 넘어가던 시기에 변화를 잘 이끌어 나간 작곡가들이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작품 세계는 인류 문화사상 드물게 균형미를 보이고 있다. 모차르트의 처남이었던 요셉 랑게가 1789년에 그린 미완성 유화.

18세기의 오스트리아 빈  라틴 문화와 게르만 문화가 만나는 시점에 음악의 중심지가 된 이곳은 과거에는 동양 문화를 만나는 통로였고 19세기에는 동유럽 문화가 접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18세기 말에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을 중심으로 이른바 '빈 고전주의'가 형성되었다.

요제프 하이든  18세기 말의 대가로 특히 1780년 이후 교향곡과 현악 4중주의 걸작들을 내놓으면서 프랑스 혁명 전야의 세대로부터 추앙받았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귀족 사회가 존재하던 시절에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지만 그의 대작들은 귀족의 몰락 이후에 나왔다. 자신의 개성적인 예술 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던 19세기 최초의 거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19세기 작곡가들의 우상이 되었다.

프레데리크 쇼팽  섬세한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거의 모두 주옥 같은 피아노곡들을 남겼다. 슈만의 피아노곡과 달리 쇼팽의 곡들은 표제음악이 없다.

로베르트 슈만  낭만주의적 상상력과 확고한 음악적 기반의 조화를 적절하게 이루어 피아노곡뿐 아니라 모든 장르에 깊이 있고 섬세한 명곡을 남겼다.

프란츠 리스트  화려한 기법의 피아노 연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그는 오늘날 피아노 연주의 뿌리이다.

슈베르트와 그의 연주를 들으러 온 친구들  슈베르트는 세속적인 야심없이 친구 집을 전전하며 살았고 그런 슈베르트를 중심으로 많은 친구들이 모였다.

엑토르 베를리오즈  프랑스 낭만주의를 가장 극명하게 대표하는 작곡가로 작품수는 많지 않으나 거의 모두 이전의 전통적인 기법을 탈피해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려 했다. 1846년 빈의 신문에 난 이 캐리커처는 베를리오즈가 전통 음악에 익숙했던 청중에게 충격을 주는 장면을 풍자하고 있다.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  '러시아 5인조' 중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곡을 발표하면서 미완성으로 남긴 동료의 곡들을 틈틈이 마무리해 발표하는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러시아 민족 음악을 대변했던 '5인조' 중의 한 사람이다. 음악적 기법의 기초가 약했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 러시아의 원초적인 정서를 담은 독특한 곡들을 남겼다.

얀 시벨리우스  전세계에서 애호를 받는 거의 유일한 핀란드 작곡가이다. 그의 음악은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면서도 핀란드의 분위기를 빼놓지 않는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안토닌 드보르자크  체코 출신의 작곡가로 19세기 후반 이전까지 주변에 머물러 있던 동유럽 음악들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몫을 했다. 그의 음악은 확고한 음악적 기반 위에 대중적인 친화력을 가지고 있어 아직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베드르지히 스메타나  드보르자크와 더불어 동유럽의 정서를 정감있게 보여 준 체코 작곡가이다. 드보르자크가 기악곡을 위주로 한 데 반해 스메타나는 오페라를 여러 편 남겼다.

빈에 있던 브람스의 작업실  북독일 함부르크 출신인 브람스는 1872년부터 죽던 해인 1897년까지 오랜 세월을 빈에서 살았다.

요하네스 브람스  19세기 후반 독일 음악의 보수적 맥을 이은 대표자이다. 음악의 모든 장르에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단 한 편의 오페라도 쓰지 않은 것은 과연 바그너 반대 진영의 우두머리다운 인상을 준다.

구스타프 말러  독일 현대 음악의 문을 연 작곡가이자 20세기 지휘의 기초를 닦은 연주가로 1차 대전 전야의 불안한 정서를 대변하는 대규모의 교향곡들을 남겼다.

안톤 브루크너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로 종교적 성찰을 담은 깊이 있고 규모가 큰 교향곡들을 남겼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20세기의 작곡가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고 일찍 작품 활동을 시작해 많은 곡들을 남겼다.

클로드 드뷔시  프랑스 작곡가로 전통적인 화성을 벗어나 독특하고 새로운 경지를 보여 줌으로써 20세기 음악의 문을 열었다.

프란츠 슈베르트  정장을 한 그림의 인상과는 달리 실제의 슈베르트는 세속에 초연한 자세로 살았던 사람이다. 빌헬름 리더가 1825년에 그린 그림이다.

드보르자크의 슬라브 무곡 악보 표지

바이올리니스트 안네소피 무터와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무터는 13세 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데뷔하여 세계적 재능으로 소개된 이후 성장 시기를 잘 극복했고 개인적인 고뇌도 겪으면서 현재 세계를 대표하는 여성 연주가의 하나가 되었다.

게오르크 솔티

니콜라 랑크레의 음악 레슨  18세기 전반 프랑스 귀족의 음악 생활을 보여준다. 이런 사실적인 그림들은 당시의 풍속뿐 아니라 악기의 모양과 연주법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니콜로 파가니니  생전의 파가니니는 피아노의 리스트처럼 눈부신 기법의 화려한 연주로 유명했다. 그림은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의 현이 끊어지도록 열정적인 연주를 하는 모습이다.

오토 클렘페러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1914년 초창기 음반 녹음  녹음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오케스트라의 규모를 줄여야 했고 곡의 길이도 짧게 했다. 사진의 지휘자는 영국의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

피아노 4중주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와 아마데우스 현악 4중주단의 멤버들이 브람스의 피아노 4중주를 연주하고 있다. 피아노 4중주는 특히 피아노와 현악기들의 사운드 균형이 중요하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리스트  1840년 빈의 화가 요셉 단하우저가 그린 그림으로 예술인들이 자주 모이던 전형적인 파리의 살롱이다. 왼쪽부터 문학가 알렉상드르 뒤마, 빅토르 위고, 조르지 상드, 뒤쪽에 파가니니와 로시니, 등을 돌리고 앉은 여인은 리스트의 애인이었던 마리 다구이다.

영국 버밍햄에 있는 인터내셔널 컨벤션센터 심포니 홀  연주회에 가는 이유는 단순히 음악적 지식을 얻거나 선율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상과는 다른 고양된 체험을 하기 위해서이다.

밤베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  전통있고 수준 높은 독일의 지방 오케스트라인 밤베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1993년에 개관된 콘서트 홀에서 연주하고 있다.

오브 에이틴스 센튜리 오케스트라  바로크 음악뿐 아니라 19세기 초까지의 음악도 과거 악기로 연주하는 단체가 많아졌다. 지휘자는 프란스 브뤼헨.

영국왕 조지 1세와 헨델  헨델의 「물 위의 음악」은 왕의 노여움을 풀어 주기 위해 헨델이 템즈 강에서 왕의 배를 따라가면서 연주하도록 한 곡이라는 일화가 있다.


고전음악 감상의 10계명


1. 음악을 듣는 계층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2. 지식에 의존하지 말고 자유로운 느낌을 가지라.

3. 그러나 지식을 섭취하면서 감상하라.

4. 시간이 있을 때 듣지 말고 시간을 만들어서 들으라.

5. 흥미가 연결되도록 하고 중간에 포기하지 말라.

6. 인격이 높은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듯한 자세로 들으라. 결코 수동적이지 말고 질문하라.

7. 취한 상태, 몸이 피곤한 상태에서 듣지 말라.

8. 음반을 들을 때는 연구하는 자세로 들으라.

9. 음반을 들으면서 반드시 실제 연주를 들으라.

10. 연주가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라.



posted by 황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