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7 나 대신 꽃잎이 쓴 이 편지를
한국우정 115주년 기념시집
1999, 정보통신부
시흥시대야도서관
EM021720
811.6
나23정
서정시인들이 보내는 사랑의 편지
LETTER POEM
가을 편지
고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기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영혼에 전해지는 사랑의 메시지를 모으며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편지가 우리의 마음을 소중한 사람에게 전해주는 가장 친근한 벗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편지란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적어 내려간 한 편의 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시인들이 편지와 관련된 아름다운 시들을 끊임없이 발표했으며, 시와 편지의 멋진 만남의 장면을 연출하였다.
이 시집에 수록된 115편의 시들 중에는 시인들의 주옥 같은 작품들과 함께 우체국 직원들의 땀내가 물씬 풍기는 작품도 함께 담았다. 특히 시집을 준비하는 동안 이미 고인이 되신 이육사, 유치환, 윤동주 님을 비롯한 유명한 시인들의 명시들을 감상하면서 우편과 관련된 시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소중히 간직하고픈 잔잔한 기쁨이었다.
이제 21세기 지식 정보화 사회를 맞아 우체국도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우체국은 단순히 편지만 전해주는 곳이 아니라 지역 정보문화의 거점으로서, 전자상거래의 인프라로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새롭고 편리한 정보통신 수단이 개발됨과 동시에 우체국의 역할도 더욱 커질 것이다.
아무쪼록 이 시를 읽는 순간만이라도 우편과 우체국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조그만 바램을 가져 본다.
--- 「편집후기」 중에서
행복
유치환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그녀의 우편번호
--- 한국우정 115주년을 기념하며
김종해
오늘 아침 내가 띄운 봉합엽서에는
손으로 박아쓴 당신의 주소
당신의 하늘 끝자락에 우편번호가 적혀 있다
길 없어도 그리움 찾아가는
내 사랑의 우편번호
소인이 마르지 않는 하늘 끝자락을 물고
새가 날고 있다
새야, 지워진 길 위에
길을 내며 가는 새야
간밤에 혀끝에 굴리던 간절한 말
그립다 보고 싶다
뒤척이던 한 마디 말
오늘 아침 내가 띄운 겉봉의 주소
바람 불고 눈 날리는 그 하늘가에
당신의 우편번호가 적혀 있다
*
나는 오늘도 편지를 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
수신인의 이름을 또렷이 쓴다
어 · 머 · 니
*
새야,
하늘의 이편과 저편을 잇는 새야
사람과 사람 사이
그 막힌 하늘길 위에
오작교를 놓는 새야
오늘밤 나는 그녀의 답신을 받았다
흰 치마 흰 고무신을 신으시고
보름달로 찾아오신
그녀의 달빛 편지
나는 그녀의 우편번호를
잊은 적이 없다
차례
1. 바닷가 우체국
편지 / 강은교, 가을 편지 / 고은, 가거도 편지 / 곽재구, 편지 / 김남조, 사랑 / 김용택, 마지막 편지 / 김초혜, 어떤 편지 / 도종환, 봄 / 박 엽, 정희에게 / 박용철,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 박원형, 가을 / 백대붕, 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서리꽃 / 유안진, 행복 / 유치환, 편지 / 윤동주, 연못에서 / 이건창, 길 연작 · 3 / 이문재, 感興 / 이성윤, 들꽃 / 이승훈, 路程記 / 이육사, 강 위에서 쓴 편지 / 이희지, 선유동에서 / 정 박, 또 기다리는 편지 / 정호승, 편지 / 천상병, 편지 / 최승자, 白鳥 / 한하운, 편지 / 홍우원, 조그만 사랑노래 / 황동규
2. 친절이란 사랑으로
열애의 書 / 김경미, 재의 사랑 / 김명리, 이별 / 김민숙, 친절이란 사랑으로 / 김인숙, 진달래 / 김승희, 편지를 쓰면서 / 김태인, 밤에 쓰는 엽서 / 김하민, 엽서 / 민경수, 마지막 편지 / 박상순, 봄밤의 편지 / 박용재, 친구의 편지 / 박주택, 편지 / 박 찬, 기도의 편지 / 서정윤, 나는 알 수가 없었다 / 성대현, 편지 / 송시현, 戀書/ 신효삼, 우표 가게 / 윤수천, 부치지 목할 편지 / 이정하, 어머니 전상서 / 이진우, 燈에 부침 / 정석주, 아버님 전상서 / 전윤호, 나침반 / 조난영, 배 / 조도현, 사랑을 담는 그릇 / 조성호, 가을편지 / 최은아, 그리움 / 최정환, 우표 / 함민복, 편지 / 허 연, 나 대신 꽃잎이 쓴 이 편지를 / 홍우계
3. 그리운 편지
사랑이란 / 김경태, 별 / 김낙중, 우정 / 김수미, 흐르는 강물 / 김영미, 어둠을 밝히는 등불 / 김영진, 기도 / 김용희, 안개 / 김창동, 소중한 사람에게 / 라준식,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 류시현, 편지를 보내면서 / 박승기, 이슬 / 박정순, 가을 / 박진강, 꽃잎 / 백현선, 뜯지 않은 편지 / 오도환, 사랑의 기준 / 이승희, 즐거운 답장 / 이은주, 국화 / 이희숙, 이슬비 / 임종익, 달빛 속에서 / 임지연, 들국화 / 장선우, 새벽 / 전성근, 친구에게 / 전혜령, 사랑의 풍경 / 정승현, 고백 / 정용수, 물과 구름 / 조재우, 우체국에서 / 조준범, 그리운 편지 / 한신희, 달빛 / 홍영태
4. 집배원의 여름 일기
편지 장수 / 강성혜, 낙화 / 고광만, 우체국에서 / 권영숙, 노송 / 권중재, 우체통 손님 / 김찬회, 다리 / 나길옥, 집배원 / 문병우, 눈 오는 지도 / 박영식, 우편 배달 / 박용선, 어느 날의 우체국 / 서향순, 엽서 / 설상귀, 이동 우체국 / 성낙곤, 가을 편지 / 양동욱, 흔적 / 양유상, 창구에서 / 오점록, 집배원 / 오한성, 어느 집배원의 일기 / 윤긍환, 우체통 / 윤태종, 집배원 / 이근창, 외면당한 배달부 / 이석오, 山寺에서 / 이세훈, 그리움 / 이영순, 포스트 맨의 노래 · 10 / 장동윤, 戀歌 / 장은섭, 집배원 / 전광진, 집배원의 노래 / 조광수, 집배원의 여름 일기 / 최장식, 편지 / 한맹숙, 雲霧 / 한병윤
나 대신 꽃잎이 쓴 이 편지를
홍우계
부칠데는 없지만 써야겠다고
오늘도 꽃그늘에 나왔습니다마는
한낮이 기울도록 한자도 못쓰는데
심술처럼
얼굴가린 바람이 와 꽃가지를 흔들자
내 볼을 간질이며 간간이 진 꽃잎이
내 말 대신 편지지에 자리를 잡을 때
내 옷에 촉촉히 스민 목련향.
내가 쓸 말 대신 향내만 촉촉한
이대로 접고 봉한 이 편지를 받으실
어디먼데 누구라도 계시면 좋겠습니다.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 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친절이란 사랑으로
김인숙
아이야!
친절이란 사랑이란다
비 개인 오후처럼
몸에 배인 소박함 그대로
첫 만남의 반가움 그대로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어야 되잖니?
낙엽이 곱게 물들며 지는 것은
이듬해 새 잎을 피우기 위함이듯
네가 서 있는 그 자리
다소곳이 미소를 머금고
친절이란 사랑을 보이렴
네가 너를 아끼듯
친절이란 이름으로
다정한 사랑을 담으렴
그리운 편지
한신희
그대는
가슴 가득 흘러넘치는
애타는 연정이다
따사로운 봄
갈대밭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부드럽게 말하는 속삭임이다
열매를 맺기 위해
스스로 땅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참다운 희생이다
고통이 깊을수록 상처가 클수록
남몰래 간직한
그리움 하나 적어 보낸다
어느 집배원의 일기
--- 우체통 속의 잠자리 주검을 보며
윤긍환
제 날개로는 다 못닿을
저 영원의 하늘과
푸른 바다와 수평선 너머 아득한
그립던 고운 님의 목소리여!
우체통 속 두 날개 접은
침묵하는 잠자리의 굳은 절규
풍장風葬에 묻혀버린 서러운 세월과
그리움에 사무친 첫키스의 소인消印을 간직한 채
오늘도 빠알간 세륜世輪은
닿을 수 없는 번지番地로 흐르는데…….
백치白痴의 날개 끝에서 퍼득이는
밤마다 꿈마다 서서 우는 그리움이여!
저녁놀 붉은 서산 너머
영원으로 날아가 버린 님이여!
편지
윤동주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엽서
민경수
사랑이 어디쯤
오고 있는가?
사랑이 어디에서
머무르고 있는가?
지금 사랑은
그대와 나를 이어주고 있는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표 가게
윤수천
바다가 보이는 곳에
우표를 파는 가게가 있다
목발의 소녀는 오늘도
우표 한 장을 팔고 나면
먼 바다를 바라본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 하나 있어
그리움으로 사는 소녀는
오늘도 우표를 팔며
그를 기다린다
우표
함민복
판셈하고 고향 떠나던 날
마음 무거워 버스는 빨리 오지 않고
집으로 향하는 길만 자꾸 눈에서 흘러내려
두부처럼 마음 눌리고 있을 때
다가온 우편배달부 아저씨
또 무슨 빚 때문일까 턱, 숨막힌 날
다방으로 데려가 차 한 잔 시켜주고
우리가 하는 일에도 기쁘고 슬픈 일이 있다며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또박또박
붙여오던 전신환 자네 부모만큼 고마웠다고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열심히 살라고
손목 잡아주던
자전거처럼 깡마른 우편배달부 아저씨
낮달이 되어 쓸쓸하게 고향 떠나던 마음에
따뜻한 우표 한장 붙여주던
이동 우체국
성낙곤
바람이 분다, 겨울 바람 분다
침산동 공단로에
빠알간 지붕채 차대 하나
내 이동 우체국
종일은 내 그 안에 있으면
도란도란 누구가 온다
공녀들 소포 안고 와서
그것들 한 무리 스무살이
내 비망 몇 줄에 덧붙이면
나는 또 어디로 가야 한다
사자 어디메 정점에
우리가 가득한 이력 같은 사랑을
만나러 가자
오전과 오후의
밑 없는 사유들이 뒹굴어도
오늘은 바람이 들지 않아 따뜻한
저 열의 온실로 가자
집배원
오한성
덩컹거릴 틈바귀도 없이 빽빽이
휩싸인 도심
빌딩 아파트 빌라 주택……
우리에겐 희비가 엇갈리는
하나의 쌍곡선.
쉬임없이 뿜어내는 깊은 힘겨움의
입맞춤이 언뜻언뜻
누구네의 초인종에 음을 맞추고.
그래도 천직인 양
"안녕하세요. 편지 왔습니다." 한 마디에
화색이 짙어가는 그네들.
무언의 대지도 가만 속삭여주고
석양 노을도 향내를 토하며
우리네의 뒷모습을 채색해주네
땀으로 얼룩진 빛바랜 근무복을
진실로 채워진 퇴색된 이륜차를
사랑으로 꿈꾸어진 집배원의 마음을.
우체통
윤태종
주시면
순종밖에 모르는 몸종이었습니다.
순박한 키는
앞에 선 소녀의 가슴만 보여도
붉게 물드는 행복이었답니다.
언제였습니까?
모든 밀어는
수없이 많은 비밀의
시작과 종말
기나긴 밤새움의 이름까지 기억하여
붉은 수의에 텅빈 공허를 간직한
갈 곳 없는 나그네의 가슴으로 서 있어야 합니까?
채워도 채워도
한 번은 영원히 비어 버린다고
귀뜀하기에는
그는
기다림밖에 알지 못했습니다.
순결한 순종에
첫 순결을 주고픈, 그래
버림받아 돌이킬 수 없는 여인 같았습니다.
쓰고 싶습니다.
보고 싶어
듣고 싶어
이 밤
주소도, 이름도 적지 않은 긴
사모의 편지
한 통.
짐작할 수 없는 순결한 가슴
깊은 곳에 안기는
사그락
첫 만남의 여운처럼 가슴 여미는 소리를
고개 속여도 피는 수줍음에
붉게 붉게
얼굴 붉히는 순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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